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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정치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좌담] 우리미래 이성윤, 비례민주주의연대 김푸른, 청년참여연대 김현우
전혁수 기자 | 승인 2017.10.06 12:57[미디어스=전혁수 기자]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424개 시민·노동단체가 함께하는 정치개혁 공동행동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선거연령 18세 인하 등의 개혁안을 제안하고 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출범했으며 지난 27일 국민의당 정동영 의원의 주도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간담회에서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함께하는 선거제도 개혁 '민정연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청년이 만드는 젊은 국회라는 목소리도 선거제도 개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미디어스는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힘쓰고 있는 청년정당 우리미래 이성윤 대표와 비례민주주의연대 김푸른 청년위원장, 청년참여연대 김현우 정치분과장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정치개혁 청년행동 출범 기자회견 모습. 김현우 청년참여연대 정치분과장(왼쪽 세 번째), 김푸른 비례민주주의연대 청년위원장(왼쪽 네 번째), 이성윤 우리미래 대표(오른쪽 네 번째). ⓒ미디어스

청년정당 우리미래 이성윤(이하 성윤) : 정치개혁 공동행동이 추구하는 선거제도 개혁 안에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함께 청년들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주제들도 있다. 지난해 촛불집회에서 나왔던 만 18세 피선거권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연동형 비례대표제도 청년들과 관계가 많다.

선거제도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서 청년 정치인이 많이 탄생할 수도 있다. 청년 유권자는 전체 유권자의 34%인데, 지금은 국회의원 중에 2030세대는 1%도 안된다. 청년문제는 계속 화두가 되는데 청년 의원은 없다. 평균 55.5세의 남성 중심의 국회가 돌아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선거제도를 바꿔 더 많은 청년들이 국회에 진입하게 해야겠다는 문제의식으로 정치개혁 청년행동이 시작됐다.

청년참여연대 김현우 정치분과장(이하 김현우) :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의회 내 독과점을 타파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제도다. 나는 청년 참여연대에서 활동을 하던 중에 청년세대가 직면한 사회문제를 개선하려면 청년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실감했다. 기성세대는 청년이 가진 의제를 우선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방향성 속에서 청년 시민단체들이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만들고 의제를 알리는 등의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래서 정치개혁 청년행동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18세 선거권, 바쁘니까 나중에?  

비례민주주의연대 김푸른 청년위원장(이하 김푸른) : 정치개혁 청년행동이 만들어진 맥락도 정치개혁 공동행동이 만들어진 맥락과 비슷하다. 각자 자리에서 다양한 의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모인 거다. 그러나 사실 청년에 대한 정책이나 여러 의제들이 어떻게 실현될지는 요원하지 않나. 촛불광장에서 '성평등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구호를 들고 나가고 페미니즘 이슈나 일자리 이슈 등 여러 의제가 있었는데, 실제로 실현된 건 거의 없다. 그래서 이런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의식이 생겼고, 청년 의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물론 언론이 청년에 주목한다는 측면을 고려한 것도 있다.

김현우 : 사실 겉으로 청년정치를 장려한다면서도 실질적으로 정치권 내에서 '과연 청년에 대한 생각을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여러 상황을 비춰봤을 때 정치개혁 청년행동 활동을 하면서 청년들만의 조직을 정치권에 보여줘야겠다는 생각도 있다.

이성윤 : 작년 촛불정국에서 우선 순위는 탄핵이었지만, 뒤에서는 청년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돼야 한다는 촛불시민들의 목소리도 있었다. 당시 정치권에서 만 18세 선거권을 해줄 것처럼 하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조기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바쁘니까 나중에 목소리를 듣겠다"는 식으로 흐지부지됐다. 이런 과정들이 청년의 입장에서 아쉬움이 컸다.

또한 현행 선거제도는 양당제를 조장하고 있다. 겉으로는 5당체제가 만들어져 있지만 나는 지금도 양당제 체제라고 생각한다. 바른정당이 언제 자유한국당으로 들어갈지 모르는 것이고, 국민의당이 그나마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다면 3당이 유지는 되겠지만, 그래도 결국 몇 차례 현행 선거제도로 선거를 치르면 결국 양당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결국 5000만 국민 목소리를 2개의 정당으로는 모두 담을 수 없다. 누군가는 청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여성, 누군가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당제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의 선거제도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청년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 청년행동이다. 전국 청년네트워크, 민달팽이유니온, 제가 속해 있는 우리미래 등 청년 관련 단체들이 다수 들어와 있는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청년 정치인이 정치권에 들어가야 청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현우 : 그런데 현재 거대양당에는 청년이 들어갈 틈이 없다. 공천 과정을 생각해보면 현재의 지역구 위주의 정치에서는 자본이 부족한 청년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비례대표 확대로 청년이 정치권에 들어가고, 청년의 감수성으로 청년의 의제를 풀어줘야 청년들이 바라는 정치가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청년뿐 아니라 젠더 문제나, 장애인 문제, 중소상공인 등 다양성을 인정받는데 선거제도 개혁이 필수적이다.

정의당 추혜선 의원과 정치개혁청년행동 회원들이 19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피선거권 연령하향 및 청년할당제 입법청원 제출 관련 기자회견을 있다(연합뉴스)

20대, 의회 진출 더 어려워져   

김푸른 : 한국 기득권 정당들의 폐해 중 하나가 정당 민주화가 돼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청년들이 기득권 정당에 들어가면 지역기반이 없이 때문에 공천을 받아 당선될 가능성이 적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다. 가끔 거대정당에서 등장하는 청년 의원들이 과연 그 정당에서 큰 청년이냐는 거다. 우리나라는 선거철만 되면 외부에서 인재를 영입한다. 그 정당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스웨덴의 경우 32살에 교육부 장관이 된 사례가 있는데, 그 인물의 경우 11살에 입당을 해서 그 정당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리고 19살에 국회의원이 됐고, 32살에 장관이 됐다. 무조건 나이로만 청년인 것이 아니라, 어떤 청년이 어떤 삶의 비전을 가지고 어떤 정치를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천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사실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정당 내에서 제도화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쉽게 바뀔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김현우 : 청년 정치 교육 등도 함께 이뤄야할 과제다. 정치, 인권, 노동 등에 대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 요즘 청년들은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게는 대체로 개인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나의 경우에도 책을 읽는 등의 개인 시간을 꿈꾸지만 정말로 시간이 없다. 그리고 청년들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선거법 개혁을 통해 당사자인 청년이 의회에 들어가고, 청년 정치가 청년의 삶을 바꿔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성윤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직업 선택의 자유'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헌법 15조에는 국민은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돼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 권리가 없다. 국회의원, 시의원, 구의원에 입후보 했다가 떨어질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삼성에 이력서를 넣어도 그 기업이 나를 원하지 않으면 그 기업은 나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국민들에게 심판을 받고 싶다. 국민에게 정치인이라는 직업을 해보고 싶다는 이력서라도 내보고 싶은 것인데, 만 25세 이하의 청년들에게는 이러한 선택의 자유가 없다. 결국 성인 남성만 민주주의를 누렸던 고대 아테네의 제한적 민주주의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지난 2014년 OECD국가들의 만 40세 미만 의원 비율은 평균 19%였다. 그런데 지난 19대 국회에도 우리나라는 민주당 김광진, 장하나 의원 정도 있었을 뿐이다. 19대에 2030은 9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대는 김영삼 전 대통령 이후 1명 있었다. 과거에도 가능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20대가 의회에 진출하는 게 더 어려워진 느낌이다.

김현우 : 청년들이 기득권 정당에 들어가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의식들이 약해지는 경향도 있다. 거대정당과 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만의 색깔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선거제도 하에서는 더 심화될 수밖에 없고, 결국 이게 악순환이 돼 돌아올 것이다.

김푸른 : 나는 청년문제 해결을 복지국가로의 이행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청년 정치인의 세력화는 기득권의 해체라고 본다. 그러니 당연히 기득권 정당에서 청년의 자리가 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현재의 기득권 정당을 보면 아직까지도 1980년대 문제의식에서 멈춰있는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세력이 청년으로 해석이 된다면, 이들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청년할당제와 새누리당의 비례 7번  

이성윤 : 솔직히 말하면 기득권 정당에게 청년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을 때 가장 기대되는 효과가 '인기투표'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당의 정책을 보고 투표하는 정책 선거가 된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는 유명한 사람을 데리고 와야 당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막 사회에 진출한 청년들은 장년층에 비하면 언론 노출도 적고, 가진 경험도 적고, 정당에서 후보로 내놨을 때 당선이 될 수 있느냐는 측면에서 보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청년할당제를 법제화하자는 얘기를 한다. 지난 입법 청원서에도 청년 할당제 권고를 넣었다. 청년들을 3의 배수로 명부에 포함시키는 권고안을 넣으면 여성할당제와 조화될 수 있다. 그런 것이 하나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푸른 :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여성할당제와 청년할당제를 같은 불평등 해소의 장치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 유보적인 입장이다. 여성과 청년을 동등한 약자로서 놓고 보느냐는 것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정당 내부의 민주화가 이뤄지고, 청년이 정치권에 많아질 때 어떤 변화가 생길지 아직 그려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과거 새누리당에서 비례 7번에 청년을 넣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청년이라는 세대를 단일하게 기성세대와 대치되는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청년이 청년을 대변했나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따른다. 그런 식이라면 청년 담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부분이 생긴다.

이성윤 : 청년들이 그냥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이를 이유로 정치권에 나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장기간 정당에서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정치권에 몸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미래 안에서도 급하게 하지 말고 커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를 한다.

그래도 청년들이 정치권에 진출하면 많은 것이 변할 것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030 유권자가 국민의 30% 이상인데 국회의원 300명 중에 100명만 청년이었다면 대학 등록금 문제가 해결이 안 됐을까. 기숙사 문제가 해결 안 됐을까란 질문을 던져본다. 최근 부산에서 청년 조례를 만든다고 하는데, 그 자리에 청년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하더라. 이러한 세세한 것들이 청년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내에서 제대로 철학과 비전을 교육 받은 청년들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김푸른 : 물론 청년들이 기회를 갖는 것은 필요하다. 청년이 100명이면 달라질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다만 기성세대가 바라보는 나이로서의 틀을 넘어선 청년이어야 한다고 본다. 정말 기성세대의 정치인들과 동등하게 정치인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는 게 중요하다.

2030 세대가 겪는 문제를 청년 문제로 정의하지만, 이것은 청년세대를 넘어서도 이어질 것이라고 본다. 그런 문제이기 때문에 빈곤감과 좌절감, 불확실성을 느끼고, 이런 것들이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기저로서 작용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청년 정치인이 정치권에 들어가도 그 사람이 청년들을 대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 대선에서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여성 대통령 후보라고 나갔는데, 심 의원의 정체성은 노동전문가다. 그런 것처럼 꼭 청년들이 청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를 져야 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유한국당을 뺀 여야 4당 의원들과 시민사회 연대체인 '정치개혁 공동행동'은 지난달 27일 선거제도 개편 추진을 위한 공동 기구 구성 방안 등을 논의했다.(연합뉴스)

지금은 선거법 개혁 불 붙일 때 

이성윤 : 나는 그래서 당사자 정치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꼭 청년들이 다 해결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탈리아를 보면 차기 총리 물망에 오른 사람은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변변한 직업도 가져보지 못한 인물이다. 그런 당사자 정치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지금의 한국 정치는 당사자가 아닌 엘리트 중심의 정치가 되고 있지 않은가. 결국 더 많은 다양한 세력이 국회에 들어가고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정치권에 들어가야 한다.

김현우 : 지금까지의 그런 과거 정치사를 돌아보면 결국 양당제를 깨내야 한다. 의회의 다양성을 재고할 시기라고 본다. 우리는 청년이란 담론을 내세우지만 청년뿐만 아니라 모두의 문제다. 청년정치도 일반적이 되려면 다양한 사람이 의회에 진입해야 한다.

김푸른 : 국회의 기득권들이 1980년대 문제의식에 머물러 있어서 한국 사회의 기본방향을 청년 중심으로 가져오는 게 결국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그러기 위해서 선거법 개정안이 필요하고,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 필요하다. 그리고 법안 하나 통과시키면 될 일이라고들 하지만 결국 정치권에서만 하는 일이 아니다. 뉴질랜드가 시민사회운동을 통해 선거법 개정에 성공한 사례처럼 우리도 이걸 촛불정국에서의 '박근혜 탄핵'처럼 구호로 요구할 수 있을 만큼 공론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성윤 : 이런 부분이 지금까지 이슈화가 되지 못한 부분은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누누히 얘기하는 거지만 유럽 선진국의 민주주의는 역사가 길다. 이 싸움은 길게 가져가고, 그래서 당장 되지 않더라도 속상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은 선거법 개혁에 불을 붙일 시기인 것 같다.

김현우 : 실제로 선거제도를 바꾼 나라들을 보면 10년 이상 관련된 운동들이 벌어졌다. 이 활동이 당장 실패하더라도 개헌안에 '비례성 보장' 정도의 문구만 들어가도 작은 변화가 생길 것이란 희망을 걸고 있다.

전혁수 기자  wjsgurt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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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대가 허용되는 나라, 미국... 이대로라면 참사 재발을 막기 힘들 것

미국이 연이은 총기참사에도 총기규제에 실패하는 이유

민병대가 허용되는 나라, 미국... 이대로라면 참사 재발을 막기 힘들 것

17.10.06 20:56l최종 업데이트 17.10.06 20:56l

 

 미국 서부 네바다 주(州)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진 미 역대 최악의 총기난사 참사로 59명이 사망하고 515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사진은 총격범 스티븐 패덕이 자동화기를 쏜 32층 객실의 깨진 창문
▲  미국 서부 네바다 주(州)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진 미 역대 최악의 총기난사 참사로 59명이 사망하고 515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사진은 총격범 스티븐 패덕이 자동화기를 쏜 32층 객실의 깨진 창문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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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저녁, 미국 라스베이거스 중심가인 스트립 지역에서는 컨트리 가수들의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다. 10시 8분 경 제이슨 알딘(Jason Aldean)이 공연을 펼치던 중 폭죽소리와 같은 연속된 폭발음이 울렸다. 하지만 폭죽소리가 아닌 총성이었다. 수많은 관중들의 머리 위에 총알이 빗발쳤다. 범인은 콘서트장 바로 옆에 위치한 만달레이 베이 호텔 32층 객실에서 창문을 깨고 총격을 가했다. 한순간에 콘서트 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관중들은 총격을 피해 바닥에 엎드렸지만 오히려 공중에서 날아드는 총알에 더 넓게 노출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59명이 숨지고 527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사상자가 600명에 달할 정도로 피해규모가 컸던 것은 범인이 32층 호텔에서 다수의 인파를 향해 총격을 가했기 때문이지만 범행에 사용된 총기의 특성에서도 크게 기인한 바도 크다. 범인이 머물렀던 호텔 객실에서는 20여정이 넘는 총기가 발견되었다. 스나이퍼들이 사용하는 스코프(조준경)도 발견되었다. 특히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1발씩 발사되는 반자동 방식의 총기를 분 당 400~800발의 완전자동 사격이 가능하도록 개조할 수 있는 범프 스탁(bump-stock)'도 발견되었는데, 피해가 컸던 결정적 이유였다.

최악의 총기참사를 겪은 미국은 슬픔에 잠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총기참사 현장을 방문해 "나라 전체가 애도한다"며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각국 지도자들의 애도도 이어졌다. 

이번 기회에 총기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의 총기난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거의 매년 크고 작은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그때마다 슬픔과 애도 그리고 총기규제 주장이 이어진다. 그러나 미국은 반복적으로 총기난사 사건으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겪으면서도 총기규제에는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총기규제의 실패의 원인을 미국총기협회에서 찾고는 한다. 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로는 미국의 헌법과 건국과정에까지 이어진다.

미국 최대의 로비단체, 미국총기협회
 

 영화 <미스 슬로운> 스틸컷
▲  영화 <미스 슬로운> 스틸컷
ⓒ (주)메인타이틀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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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비스트들의 활약을 그린 2016년 작 영화 <미스 슬로운(Miss Sloane)>은 총기규제 법안을 둘러싼 미국 정계의 암투를 그리고 있다. 영화에는 총기규제 법안 도입을 무산시키기 위해 불법까지 서슴지 않는 미국총기협회(The National Rifle Association of America, NRA)와 거대 로비그룹, 거물급 정치인들이 등장한다. 

 

총기규제를 둘러싼 알력다툼은 영화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대형 총기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총기규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지만 로비가 합법화된 미국에서 막대한 자금을 보유한 NRA의 로비에 번번이 실패하고는 했다. NRA는 실제로 정치권에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총기규제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엘 고어 후보의 반대활동을 하여 결국 엘 고어의 낙선에 결정적 여향을 미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개인의 총기소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반면 미국에서 총기규제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총기규제법안 역시 총기소유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총기구입 시 신원확인 절차 등을 강화하는 내용일 뿐이다. 하지만 이 정도 규제도 미국사회에서는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총기소유의 자유가 미국의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국 수정헌법 제2조는 "규율 있는 민병은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국민의 무장할 권리를 넘어 민병대의 존재까지 규정하고 있다.

헌법에 의해 보장된 무장할 권리

미국의 헌법이 무기를 소유할 권리를 국민의 권리로 규정한 것에는 미국의 독특한 역사적 맥락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미국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약 8년에 걸친 싸움 끝인 1783년 독립에 성공했다. 그리고 1787년 연방헌법을 완성한다. 그런데 헌법이 제정 된지 2년 만인 1789년에 미국의 제4대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은 헌법의 수정을 주장한다. 연방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견제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할 헌법조항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권리장전이라 불리는 10개조로 이루어진 수정헌법이다.

미국은 영국과 독립전쟁 당시 정규군대가 없었다. 대신 지역별로 산재해 있던 민병대(militia)들로부터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민병대는 후에 대륙군(Continental Army)으로 합쳐져 독립을 이끌었다. 대륙군은 독립 이후 다시 민병대로 해체되었다. 

그런데 민병대는 정규 군대와는 성격이 달랐다. 민병대는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사냥 등을 하던 사람들이 필요시 군대를 형성하여 전투 활동에 참여 하는 형태다. 때문에 민병대는 민간인들의 평시 무장을 전제로 한다. 평시 무장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전시에 이들을 모아 민병대를 조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수정헌법이 민병대와 국민의 무장을 보장하게 된 계기다.

미국의 민병대는 오늘날까지도 존재하고 이는 불법이 아니다. 현재도 미국 곳곳에서는 수백여 개의 민병대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다만 민병대의 존재는 수정헌법 제2조에 따라 보장되지만 군사적 행동이나 인명피해의 발생 등 불법행위는 금지된다. 그러나 몇몇 민병대가 주정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가 실행 전 적발된 사건도 있었고, 멕시코 접경지대에서는 민병대가 자체적으로 밀입국자들을 단속하며 불법행위를 일삼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은 시민들이 각자 저마다의 총을 들고 군대를 만들어 독립을 일구어냈다. 독립 후엔 연방정부의 권력독점을 방지하고자 계속하여 민병대가 허용되었다. 자신의 총기로 무장한 개개인으로 구성된 민병대는 건국 초기 미국의 상징이었다. 그렇기에 헌법까지 무장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병대에서 시작된 미국의 역사는 오늘 날 부메랑이 되어 미국을 세계 최대의 총기사고 국가로 만들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총기는 거대산업으로 성장했고 미국 정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로비단체로까지 이어졌다.

이번 총기참사로 목숨을 잃은 많은 이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면, 600명에 가까운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또다시 총기규제에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일 내에서 또다시 총기참사가 발생할 것이다. 
 

 미국 서부 네바다 주(州)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진 미 역대 최악의 총기난사 참사로 59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3일(현지시간) 미국 네바다 주 클라크 카운티 검시소 측이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에 설치한 총격 피해자 가족지원센터 앞에서 노란 근무복을 입은 경찰관이 출입자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  미국 서부 네바다 주(州)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진 미 역대 최악의 총기난사 참사로 59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3일(현지시간) 미국 네바다 주 클라크 카운티 검시소 측이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에 설치한 총격 피해자 가족지원센터 앞에서 노란 근무복을 입은 경찰관이 출입자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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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퇴출·합성사진·댓글달기…국정원의 연예인 활용법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입력 : 2017.10.06 07:32:00

 

MB 정부 블랙리스트에 ‘좌파 성향’ 연예인으로 분류됐던 코미디언 김미화씨.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MB 정부 블랙리스트에 ‘좌파 성향’ 연예인으로 분류됐던 코미디언 김미화씨.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2013년 세상을 뜬 배우 박용식씨는 10년간 생계를 위해 방앗간을 운영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과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을 금지당했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에나 나올 법한 독재 정권 시절의 황당한 인권 탄압 같지만, 최근 그 실상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이명박(MB) 정부 국정원의 문화예술인 탄압 행태도 그 못지 않다. MB 정부 국정원은 분야별 문화예술인 82명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분류했고, 방송사에 압박을 가해 입맛에 맞지 않는 연예인들의 출연을 막았다. 너절한 합성사진과 댓글공작으로 이미지도 훼손했다.
 

■ 성향 분류·퇴출 압박·합성사진…국정원의 연예인 활용법 

코미디언 김미화씨는 2010년 7월6일 SNS에 “김미화는 KBS 내부에 출연금지 문건이 존재하고 돌고 있기 때문에 출연이 안된답니다”며 “KBS에 근무하시는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블랙리스트’ 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지 밝혀주십시오” 라는 글을 올렸다. 같은해 4월 김씨가 KBS <다큐멘터리 3일> 내래이션을 맡자 KBS 김인규 사장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내래이터가 잇따라 출연해 게이트키핑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문제를 삼은 지 석 달 만에 올린 글이었다. KBS는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김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김씨는 이듬해 4월 10년간 진행하던 MBC 라디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도 급작스럽게 하차했다.

7년이 지난 지금 김씨가 올린 SNS 글은 하나 둘씩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로부터 보고받은 ‘MB정부 시기의 문화·연예계 정부 비판세력 퇴출 건’ 과 MB 정부 청와대의‘좌파 연예인 비판활동 견제 방안(2010년 4월)’ 문건 등에 따르면 국정원은 분야별로 좌파 문화예술인 82명의 명단을 만들고 관리했다. 문화계는 이외수·조정래·진중권씨 등 6명, 배우 겸 방송인 문성근·명계남· 김민선·김미화·김구라·김제동씨 등 16명, 영화감독 이창동·박찬욱·봉준호씨 등 52명 등 총 82명이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국정원은 아예 정부 비판 연예인들의 프로그램 배제, 퇴출 등 압박을 위해 2009년 7월 김주성 당시 국정원 기조실장 주도로 문화·연예계 대응을 위해 ‘좌파 연예인 대응 TF’를 구성했다. 국정원이 2009년 12월24일 작성한 ‘라디오 시사프로 편파방송 실태 및 고려사항’에는 김미화씨에 관해 “퇴출, (경영진에) 교체권고, 프로그램은 개편으로 폐지”라는 ‘지시사항’이 담겼다. 국정원은 해당 문건에서 “(2010년 6월) 지방선거 앞두고 정부 비판 급증 예상”이라며 “방송사 행정 제재, 경영진 주의 환기”라는 ‘지침’을 내렸다. 

방송인 김제동씨가 지난달 서울 상암 MBC 사옥에서 파업 집회를 열고 있는 조합원들과 만나 이명박 정권 때 당한 방송출연 제약 등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방송인 김제동씨가 지난달 서울 상암 MBC 사옥에서 파업 집회를 열고 있는 조합원들과 만나 이명박 정권 때 당한 방송출연 제약 등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방송인 김제동씨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사전 행사를 진행하고, 이듬해 1주기 추도식 때 사회를 보면서 MB 정부의 눈 밖에 났다. 김씨는 2009년 10월 진행 중이던 KBS <스타 골든벨>에서 하차 통보를 받았고, KBS <해피투데더>출연도 촬영 전날 취소됐다. 2010년 4월 MBC 에서 진행 중이던 <환상의 짝꿍>도 폐지됐다. 2010년 1월19일 국정원에서 작성된 ‘문화예술체육인 건전화 사업 계획’에는 김미화씨, 김제동씨 등을 ‘퇴출 대상’으로 삼고 “방송사 간부, 광고주 등에게 주지시켜 (이들을) 배제하도록 하고 그들의 비리를 적출하여 사회적 공분을 유도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이것이 일부 현실화된 셈이다. 퇴출TF와 별도로 국정원 심리전단은 온라인상에서 특정 연예인을 ‘종북 성향’이라고 낙인찍어 공격하기도 했다. 

배우 김규리씨는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때 “광우병이 득실거리는 소를 뼈채로 수입하다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입안에 털어 넣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라는 글을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렸다가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김씨는 최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해 “(내가 쓴 글에) 청산가리 하나만 남게 해서 글 전체를 왜곡했던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며 “그 누군가가 10년 동안 가만히 있지 않고 내 삶, 내가 열심히 살고 있는 틈 사이사이에서 (나를) 왜곡했다”고 말했다. 

배우 문성근씨가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피해자로 조사를 받기 위해 1지난달 1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배우 문성근씨가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피해자로 조사를 받기 위해 1지난달 1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국정원 심리전단은 배우 문성근씨와 김여진씨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기 위해 둘의 나체 합성사진도 직접 제작해 인터넷에 유포했다. 해당 합성사진을 만들어 유포한 국정원 직원은 최근 구속됐다.
 

■ 왜 연예인일까 

MB 정부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명단은 연예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연예인들에게 특히 조직적으로,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하려 한 정황이 눈에 띈다. 대중적 영향력이 크고 여론과 이미지에 민감한 연예인들의 직업적 특성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이다.

국정원은 퇴출 대상인 블랙리스트 뿐만 아니라 ‘지원 대상’인 우파 연예인 리스트까지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이 2010년 작성한 ‘연예계 좌파실태 및 순화방안’ 문건에는 친정부 성향의 연기자, 개그맨들을 ‘좌파 연예인들의 대항마’로 거론하며 이들을 정부 주관 행사나 공익광고에 우선 섭외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 교수는 “일반 대중과 접촉면이 넓고, 영향력도 있는 연예인들을 압박하는게 파급력이 있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화씨 등 국정원 블랙리스트 관련 피해자들을 소환 조사한 검찰은 추석 연휴가 끝난 뒤 국정원 개혁발전위에서 넘겨받은 자료 등과 함께 수사에 더욱 속도를 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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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0060732001&code=910100#csidx949139f5bbd60dabde06137228620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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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개성공단 공장 더욱 힘차게 돌아갈 것

북, 개성공단 공장 더욱 힘차게 돌아갈 것
 
 
 
박한균 기자 
기사입력: 2017/10/06 [10:4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지난 개성공단이 가동될 당시 의류제조공장 모습. <사진-인터넷>     

 

북은 6일 ‘여론을 오도하기 위한 흉칙한 수작질’이라는 개인 논평 글에서 “최근 괴뢰들이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을 비롯한 언론 매체를 동원하여 우리가 개성공업지구에서 의류제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을 은밀하게 가동하고 있다고 떠들어 대고 있다”며 북의 주권 행사에 관여할 바가 아니라며 “공업지구공장들은 더욱 힘차게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인터넷 소식에 따르면 북 대외선전용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공업지구공장들을 저들의 ‘승인’없이 돌리면서 주로 외국에서 주문한 임가공제품을 생산하고 있다느니, 공장운영이 드러날가봐 두려워 공장창문들에 불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가림막까지 치고 보안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느니, 공장들이 가동을 시작한지 6개월이 넘었는데 이것은 불법무법이라느니 하는 온갖 낭설을 퍼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매체는 “그야말로 우리 공화국의 힘찬 전진에 배 아파난 자들의 부질없는 앙탈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우리는 이미 박근혜 역도가 미국과 작당하여 개성공업지구를 깨버렸을 때 공업지구에 있는 남측기업과 관계기관의 설비, 물자, 제품을 비롯한 모든 자산들을 전면 동결한다는 것과 함께 그것을 우리가 관리운영하게 된다는데 대해 세상에 선포하였다”고 역설했다.

 

이어 매체는 “따라서 우리 공화국의 주권이 행사되는 공업지구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에 대하여 그 누구도 상관할 바가 없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뢰들이 우리의 공업지구운영을 두고 허튼 나발을 불어대는 것은 마치도 우리가 못할 일을 하는 것처럼 여론을 오도하기 위한 흉칙한 수작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매체는 “우리 근로자들이 지금 어떻게 당당하게 일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눈이 뜸자리가 아니라면 똑똑히 보일 것”이라며 “다시 한 번 명백히 하건대 미국과 그 졸개들이 제아무리 짖어대며 제재압살의 도수를 높이려고 악을 써대도 우리의 힘찬 전진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며 공업지구공장들은 더욱 힘차게 돌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자유아시아(RFA) 방송은 지난 2일(현지시간) 북 내에서 임가공 사업을 하고 있는 중국의 한 대북 소식통이 “조선당국이 개성공단 내 19개의 의류공장을 남한당국에 통보하지 않고 은밀하게 가동시키고 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한편 개성공단은 지난 2000년 8월 22일 현대아산과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사이에 개발합의서가 체결된 후 2004년 12월 15일 개성공단의 공장에서 첫 제품 생산되면서 공장 가동이 본격화됐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지난 2015년 2월10일 북의 4차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 등을 이유로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했다. 개성공단의 북 노동자 임금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사용되고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홍용표 전 통일부 장관은 국회에서 북 노동자 임금이 군사용으로 전용됐다는 확증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개성공단기업협회가 올해 2월 개성공단 폐쇄 1년에 맞춰 집계한 입주기업 피해액은 토지ㆍ건물ㆍ기계설비 등 고정자산 5936억원, 원ㆍ부자재 등 유동자산 2452억원, 가동 중단에 따른 미납품 위약금 1484억원, 개성 현지 미수금 375억원, 가동 중단에 따른 영업손실(1년) 3147억원, 거래처 단절 등 영업권 상실에 따른 피해 2010억원 등, 총1조 5404억원 규모로 나타났다. 하지만 정부가 지금까지 지원한 금액은 4838억원에 불과하다. 온전한 피해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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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고리 공론화, 한수원과 정부출연 연구소의 역할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10/06 10:56
  • 수정일
    2017/10/06 10:5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발행 2017-10-05 14:54:37
수정 2017-10-05 14:5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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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세상을 위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시민행동이 15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현 상황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공론화위원회 회신공문은 신고리 시민행동의 주요 요구에 모호하게 답변하고 있다며 공정성, 중립성을 지키고 설명자료 내용의 자율성 보장과 한수원과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건설 재개측 활동 중단 등을 요구했다.
안전한 세상을 위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시민행동이 15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현 상황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공론화위원회 회신공문은 신고리 시민행동의 주요 요구에 모호하게 답변하고 있다며 공정성, 중립성을 지키고 설명자료 내용의 자율성 보장과 한수원과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건설 재개측 활동 중단 등을 요구했다.ⓒ뉴시스
 

“그럼 산업부 장관도 재생에너지 전문가인데, 산업부 장관이 전문가 자격으로 ‘건설중단 측’ 발표를 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지난 21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사무실에선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에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정부출연연구소 관계자의 ‘건설재개측’ 활동에 대한 논쟁이 오고갔다. 건설 중단측은 원자력연구원 산하 원자력정책센터장이 계속 ‘건설재개측’ 패널로 토론회에 참여하는 문제를 제기했고, 건설재개측은 ‘개인적인 입장을 발표하는 건데 그게 뭐가 문제냐’며 논쟁은 평행선을 달렸다.

그러던 중 산업부 장관 이야기가 나왔다. 공직을 맡고 있는 이에게 ‘개인적인 입장’이란 언제나 애매하다. 그동안 건설 재개측은 정부가 신고리 5,6호기 백자화를 기정사실로 하고 ‘짜고치는 고스톱’을 치고 있다며, 정부의 중립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질문에 대한 건설 재개 측의 답변은 ‘그렇게 하세요.’라는 것이었다. 정부가 중립을 선언한 상태에서 산업부 장관이 나올 리도 없고, 설사 나오더라도 모양새가 안 좋을 것은 누가 봐도 명확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의 ‘중립요구’, 그런데 공기업과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선거 공약은 ‘신고리 5,6호기 백지화’였다. 따라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출범 이전부터 탈핵단체들은 문재인 정부의 공론화 결정에 대해 ‘공약 후퇴’라며 비판했다. 또한 신고리 5,6호기 건설 공사를 중단시킨 것도 정부였다. 이미 문재인 정부는 노후핵발전소 수명연장 금지, 신규 핵발전소 건설 중단을 선언했기 때문에 이런 정책을 널리 알리고 집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보수언론과 보수 야당의 탈핵정책 비판이 이어지자, 정부와 여당은 ‘중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명목상 국민들에게 판단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지만, 더 현실적인 이유는 보수 진영의 반발을 염두해 둔 변화였다. 특히 형식상 중립을 지켜야 할 정부와 달리 여당의 경우 대선 공약을 지키고 폭넓은 국민 여론을 수렴할 의무가 있지만,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반면 보수 야당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 입장을 홍보하고 있다.

정부의 공약은 ‘신고리 5,6호기 백지화’이지만, 이미 공론화가 시작된 상황에서 십분 양보해서 정부가 중립을 표명할 수 있다. 그간 국민의 의사결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럼 정부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가?

신고리 5,6호기를 건설하고 있는 한수원은 공기업 한전의 자회사로 주식의 100%를 한전이 소유하고 있다. 한수원을 통하지 않고 신고리 5,6호기에 대한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다. 안전성, 경제성 등 공론화의 주요 토론주제는 물론이고, 건설 기간과 투입금액 등 모든 정보는 한수원이 독점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의 담당 부서인 산업부 조차 한수원이 정확한 내용을 보고해주지 않으면 내용을 알수 없다. 이런 가운데 한수원이 공론화 과정에서 한쪽 편 ‘선수’로 뛰는 것은 이미 공정치 못한 게임이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수원은 그동안 ‘건설 재개 측’ 토론자로 참여하기도 했고, 각종 회의에 참석했다. 오히려 자신들이 주요한 이해당사자라며 공론화 자체를 주도하는 모습까지 보여왔다. 더구나 한수원의 홍보 물품인 부채와 핸드폰 케이블 등이 길거리에서 ‘신고리 5,6호기 건설재개’ 유인물과 함께 배포되는 현실은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물량 공세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이 심각함을 보여준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위 ‘국책연구소’라고 불리는 이들 기관은 우리나라 정책을 그동안 좌지우지해온 곳들이다. 이들의 영향력은 일반 대학 교수나 전문가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 원자력연구원, 에너지경제연구원 등 이번에 쟁점이 되었던 연구소들은 그간 우리나라 핵발전 정책과 에너지정책을 총괄해 온 곳이고 현안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의 연구자들이 정부에게 중립을 요구하는 ‘건설재개 측’ 패널로 참석해서 시민들을 설득하겠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정부 출연연구기관 구성원이 외부 발제를 위해서는 기관장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사실상 연구소의 암묵적 지원에 의한 ‘건설재개 측’ 활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환경운동연합회원들 경주 지진을 기억하라며 신고리 원전 공사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환경운동연합회원들 경주 지진을 기억하라며 신고리 원전 공사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한 차례 해프닝이 아니라, 이후 제대로 된 기준이 있어야

혹자들은 정부 출연연구소 소속 연구자들의 ‘다른 목소리’를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이명박 정부 당시 4대강 사업에 반대했던 사례 등 정부 출연연구소의 ‘다른 목소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외국의 경우 정부 출연연구소 내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가진 연구자들이 상호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다양한 목소리를 막는 건 연구자의 양심이나 생각을 제약한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문제는 원자력계의 이러한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나 ‘소수 의견’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자력계는 그간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발전해 왔다. 이런 면에서 이번 신고리 공론화 과정에서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건설 재개측’ 활동 문제는 단순히 몇몇 개인이나 특정 기관의 문제라기보다는 탈핵정책 추진과정에서 원자력계 전체의 반발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정부 출연연구소의 ‘건설재개측 활동’ 문제는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원자력계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공론화 보이콧’도 불사하겠다는 내용의 기자회견도 한 상태이다. 합숙토론과 최종 투표를 앞둔 상태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주요한 것은 앞으로 정부가 수차례 공론화를 더 진행할 예정이라는 점이다. 이미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계획에 대한 공론화를 조만간 진행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다른 갈등 사안에 대해서도 공론화 계획이 추진 중에 있다. 즉 공기업과 정부 출연연구소의 역할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공론화 과정에서 정부, 시민단체, 공기업, 정부출연연구소의 역할이 명확히 재정리되었으면 한다. 이는 국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보수 여당들은 신고리 5,6호기를 국회에서 논의하자고 제안했으나, 정작 전력계획이나 핵발전소 문제를 국회에서 논의하기 위한 법 개정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반면 여당은 한차례 소나기만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형국이다. 정책 결정을 국민들에게만 던져놓고 국회나 정치권이 뒷짐지고 있는 것 역시 올바른 모습이 아니다. 이것이 이 문제가 논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발전된 모습으로 나아가는 최소한의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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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사과'도 '쿼터제'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심층 취재-한국 해외입양 65년] 2. 입양의 정치경제학 ④
2017.10.06 00:24:47
 

 

 

 

※이 기사는 이경은 국제인권법 전문가,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나는 한국의 고아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은 가난하다며 돈을 받고 나를 스웨덴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경제사정이 좋아진 지금도 여전히 아이들을 해외에 팔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로서 이런 해외입양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1989년 야당 총재로 스웨덴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계 입양인 레나 김 씨로부터 이런 질문을 들었다. 이 질문에 김 전 대통령은 "죄송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이날 간담회 자리는 울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정치인 김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대통령은 임기 첫해인 1998년 10월 23일 청와대로 8개국에서 온 29명의 해외입양인들을 특별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우리가 정말 잘못을 저질렀다. 과거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기도 했고 한국의 불행한 관습 때문이기도 했다"고 입양인들에게 사과했다.

 

 

▲ 김대중 정부 시절 해외입양인 초청행사에 참석한 영부인 이희호 ⓒ국가기록원

 

▲ 김대중 정부 시절 한국을 방문한 미국 입양부모회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영부인 이희호 ⓒ국가기록관


김대중 정부는 1999년 친가족을 찾기 위해 모국을 방문하는 해외입양인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시작했고, 준정부적 성격의 글로벌 입양 정보 사후서비스 센터를 설립했다. 그 후 입양정보센터, 중앙입양정보원(2009년 7월)을 거쳐, 현재 보건복지부 산하의 중앙입양원(2012년 8월)으로 자리 잡았다. 김대중 정부는 또 1999년 입양인들에게 해외동포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그 결과 이들은 2년까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가 허용되고, 취업, 투자, 부동산 취득, 의료보험 취득, 연금 취득이 가능하게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009년 8월 서거했을 때 입양인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도사(바로 보기)를 따로 내기도 했다.

이처럼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계 해외입양인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국가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사과했던 김대중 정부도 입양정책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1997년 IMF 경제위기로 해외입양에 대한 규제를 풀어 해외입양 아동 숫자는 오히려 증가했다. 또 김대중 정부는 매년 국가예산을 들여 입양인 초청행사를 가졌는데, 애초 의도와 달리 '성공한 입양인'의 존재만 부각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한국의 허술한 입양 관련 법과 제도 때문에 양부모의 나라로 보내져서 입양이 되지 못해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거나, 학대, 방임, 극단적인 경우 살해까지 당하는 어려움에 처한 입양인들의 문제는 오히려 정책 시야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2기 민주정부인 노무현 정부에서도 입양정책에 큰 변화가 없었다. 노무현 정부 들어 2004년 국내입양 가정에 양육수당(당시 월 10만 원, 현재 월 15만 원)을 보조하는 정책이 도입됐다. 또 2005년 '입양의 날(5월 11일)'이 제정되고, 국내입양 가정에 입양수수료(당시 200만 원, 현재 270만 원)를 보조해주는 정책도 도입됐다. 김근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4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인입양인대회'에 참석해 "여러분을 사랑한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겪어야만했을 아픔과 고통, 상처를 알고 있기에 그냥 사랑한다고 말 못하지만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해야만 하겠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정부 차원에서 입양인들에게 사과했다. 김근태 장관은 이어 2005년 국정감사에서 "향후 4-5년 내에 해외입양이 완전히 중단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앞서 박정희 정권, 노태우 정권에서 '해외입양 중단 계획'을 밝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언'에 그치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가 다시 끄집어낸 '쿼터제' 

1990년부터 노무현 정부 중반기인 2005년까지 16년간 해외입양 아동 숫자는 2000명 선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노무현 정부에서는 해외입양을 줄인다며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 시행한 정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인 2007년 국내입양 우선제(5개월 동안 국내입양을 우선적으로 추진한 뒤 이에 실패할 경우 해외입양을 추진하도록 함)와 쿼터제(해외입양 아동 숫자를 줄이기 위해 입양기관들에 국내입양 추진 실적에 따라 해외입양 아동 숫자를 배분함)를 도입했다.  

'쿼터제'는 박정희 정권 이후 정부가 해외입양을 근절하겠다고 발표할 때마다 등장하는 정책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6년 북한이 '남한은 고아를 수출한다'는 비난하자 '요보호 아동에 대한 입양 및 가정위탁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쿼터제'를 도입했다. 1975년 당시 5000여 명이던 해외입양 아동 숫자를 국내입양 500명, 가정위탁 500명씩 증가시켜, 매년 1000명씩 줄이겠다는 '단순무식'한 계획이었다.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쿼터제는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때도 반복된 정책이다. 입양은 아동이 출생 가정에서 분리돼 다른 가정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마치 상품이 왔다 갔다 하는 일처럼 '숫자'로만 접근하는 정책은 그 자체로 반인권적인 발상이며, 성공하기도 어렵다. 안타깝게 노무현 정부도 입양이 발생하는 사회적 조건이나 배경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국내입양을 늘려 국제입양을 줄이겠다는 안이한 접근을 했던 셈이다.  

이경은 박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입양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지난 세월 정부가 사적인 입양기관에 취약한 미혼모들과 그 자녀들을 내맡겨온 정책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선한 의도와 달리 한국 해외입양 정책은 오히려 더 왜곡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이 박사는 "쿼터제는 보건복지부의 국외입양 아동 수 규제 정책의 골간을 이루는 정책 수단이었다"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쿼터제는 관료집단에 의해 정권의 의지로 받아들여졌고 더 굳건해졌다"고 비판했다.  

이 박사는 "국외입양 문제는 보건복지부라는 한 부처를 넘어 민법과 아동보호체계 전반을 변혁해야 하는 과제"라며 "가정과 국가의 양육 지원, 부적절한 친권에 대한 국가의 개입, 아동보호체계의 정비와 같이 오랫동안 미뤄왔던 법제 정비를 해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1993년-2007년까지 연도별 해외입양 아동수 (출처 : 보건복지부) ⓒ프레시안

 

 

'냉온탕' 오간 국내입양 촉진 정책...아동 노동 착취 부작용도

박정희 정부 이후 해외입양 정책은 '냉온탕'을 왔다갔다 했다. 아동보호 비용을 아끼기 위해 해외입양을 보내는 것이 기본 정책 방향이었다가, 북한이나 서구에서 '고아 수출'이란 정치적 비난이 쏟아지면 쿼터제 등을 동원해 일시적으로 입양 아동 숫자를 줄이는 방식이 되풀이 됐다. 어느 정부도 입양이 왜 일어나는지, 입양이 친생부모와 그 아동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일인지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국내입양을 늘리겠다며 도입한 정책에서 아동 인권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박정희 정부 때 1962년 국내입양을 늘리겠다며 '고아 한 사람씩 맡아 기르기 운동'을 벌였던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 입양이나 위탁을 보냈는데, 이런 '강제 결연'은 입양된 어린이의 일부가 다시 시설에 수용되거나 버려져서 부랑아가 되는 일로 귀결됐다. 또 맡겨진 아동이 가사노동자나 단순 노동자로 노동착취를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우리나라 입양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9 참고)

또 쿼터제나 직접적인 양육비 지원 이외의 국내입양 활성화 정책은 입양기관들이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정부가 입양아동의 '이주허가서'를 발급하는 것 이외 모든 입양과정을 입양기관들에게 맡겨놓은 상태에서 관련 정책을 강제할 행정적 수단이 없었고, 무엇보다 의지도 없었다. 2008년 복지부의 입양기관들에 대한 감사 결과를 보면, "홀트아동복지회는 입양대상 아동에 대해 국내입양 우선추진 기간 중 국내입양은 시도하지도 않고 국외입양을 추진하고, 국외에 입양된 아동의 국내입양 추진 기록을 유지 하지 않고 있다"며 "홀트아동복지회의 경우, 2007년 12월 및 2008년 4월부터 6월까지의 기간 중에 국외에 입양된 153명 중 139명(90.8%)은 국내입양 우선추진기간 중에 국내입양 추진기록도 유지하지 아니하고 국외입양을 위한 성.본 창설을 신청했다"고 위반 사실을 지적했다. 

이같은 행태는 2013년 있었던 홀트아동복지회에 대한 특별감사에서도 지적됐다. 홀트는 당시 입양특례법 개정안이 실시된 2012년 8월 5일 이후 출생한 아동 115명 가운데 17명(14.8%)에 대해 국내 양부모를 찾아보지도 않고 해외입양을 추진한 것이 감사 결과 드러났다.

 

▶ [한국 해외입양 65년] 연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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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직통전화, 80년대 이후 최장기 중단

개성공단 중단 이후 22개월 째 연락채널 폐쇄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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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05  1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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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2월 개성공단 전면중단 이후 남북간 연락채널이 20개월 간 끊긴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사진은 개성공단이 운영되던 시기의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남북간 연락채널이 22개월째 중단된 상태이다. 1980년이후 가장 오래된 중단 상태로 정부는 북한에 육성으로 통보할 뿐이다.

박주선 국민의당 국회의원은 5일 "작년 2월 개성공단 전면중단 이후 남북간 핫라인이 끊어진 지 20개월이 지났으며, 이 기록은 1980년 2차 단절사태 이후 최장기간"이라고 밝혔다.

박주선 의원이 통일부로부터 제출받은 '남북 핫라인 구축현황' 자료에 따르면, 1971년 9월 22일 남북 직통전화(핫라인) 설치 이후 단절된 사례는 지금까지 모두 6차례이다.

남북 간 핫라인이 처음 단절된 때는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로, 북한이 핫라인은 단절해 약 3년 5개월간 지속됐다. 이후 1980년 2월 6일 남북총리회담 개최를 위한 제1차 실무대표 접촉을 계기로 재개통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25일 북한이 남북총리회담 실무접촉 중단을 발표하면서 약 4년간 남북 간 연락채널은 막혔다.

이후 남북 간 핫라인 중단은 모두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발생했다. 2008년 유엔총회 북한 인권결의안에 남한이 공동제안자로 나서자 북한은 약 9개월 동안 연락채널을 중단했다. 김대중 대통령 북측 조문단 파견으로 재개된 핫라인은 2010년 '5.24조치' 발표에 반발해 북한이 7개월 동안 중단했다.

2013년 3월 유엔 안보리 제제결의 및 한미합동군사훈련으로, 북한은 약 3개월 동안 직통전화 단절을 발표했으며, 3개월 뒤 북한이 남북당국실무접촉을 제의하면서 다시 재개됐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2016년 2월 개성공단 전면중단 조치를 내리자, 이에 북한은 군 통신선 및 판문점 연락통로를 폐쇄한다고 발표했으며, 1년 10개월 째 남북 간 연락채널은 막힌 상황이다.

남북 간 연락채널 중단이 장기화되면서, 정부는 북측 주민 송환 등을 통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엔사 정전위원회의 협조로 판문점에서 확성기를 이용한 육성을 활용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7월 17일 문재인 정부가 처음으로 군사분계선 상 적대행위 중단을 위한 남북군사당국간회담, 이산가족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등을 제안할 때는, 언론성명 식으로 발표하는 등 남북 간 직접 통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통일부는 매일 두 차례씩 판문점 연락채널로 북측과 연락을 시도하고 있지만, 북한은 여전히 묵묵부답인 상황이다. 북한이 연락채널을 열지 않는 한, 남북 간 핫라인 단절 상황은 지속될 전망이다.

박 의원은 "핫라인 재개는 대화의 시작점이며, 대통령 취임 후 5개월이 지나도록 핫라인조차 재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첫발도 떼지 못했다는 방증"이라며 "군사적 긴장 고조로 우발적으로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까지 나오고 있는 만큼, 정부는 조속히 남북 핫라인이 가동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판문점을 경유하는 남북 직통전화는 총 33회선으로,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 5회선, 서울-평양 21회선, 항공관제용 2회선, 해사당국 2회선, 경협사무소용 3회선 등이 있다. 그리고 판문점을 경유하지 않는 군 통신선 9회선, 남북열차운행을 위한 직통전화 6회선 등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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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개정협상 착수 사실상 합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10/05 12:32
  • 수정일
    2017/10/05 12:3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한-미, FTA 개정협상 착수 사실상 합의

등록 :2017-10-05 09:05수정 :2017-10-05 11:3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 둘째)이 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무역대표부에서 ‘제2차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에 참석해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왼쪽 둘째) 등과 양국 FTA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 둘째)이 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무역대표부에서 ‘제2차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에 참석해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왼쪽 둘째) 등과 양국 FTA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한국, ‘협상 전 효과분석 먼저’ 기존 주장 철회
산업부 “호혜성 강화 위해 개정 필요성 공감
개정협상 개시 필요한 제반 절차 진행 예정”
한국과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에 착수하기로 사실상 합의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4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에서 제2차 한-미 자유무역협정 공동위원회 특별회기를 열어 이같이 의견을 모았다고 산업통상자원부가 전했다. 이날 협상은 지난 8월 22일 서울에서 열린 1차 공동위 이후 한달 반 만에 이뤄진 것이다.

 

 산업부는 이날 협상이 끝난 뒤 보도자료를 내어 “양쪽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상호호혜성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개정 필요성에 인식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미국 쪽은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한 각종 이행 쟁점들과 일부 협정문 개정 사항들을 제기했으며, 우리 쪽도 이에 상응하는 관심 쟁점들을 함께 제기하면서 향후 자유무역협정 진전방안을 논의했다”며 이같이 전했다.

 

 산업부는 “이에 따라 우리 쪽은 ‘통상조약의 체결절차 및 이행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경제적 타당성 평가·공청회·국회보고 등 한-미 자유무역협정 개정협상 개시에 필요한 제반 절차를 착실히 진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공식적으로 개정에 합의했다는 언급은 없었지만, 개정을 염두에 두고 관련 절차를 밟아 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미 무역촉진권한법(TPA)에 따라, 미국 행정부는 개정협상 개시 90일 전에 의회에 협상 개시 의향을 통보해야 한다. 연방관보 공지, 공청회 등 절차를 거쳐야 하고 협상 개시 30일 전에는 협상 목표도 공개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양쪽은 개정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한다.

 

 우리 쪽이 개정 협상에서 앞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효과부터 먼저 분석하자는 기존 입장에서 물러선 것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폐기’까지 거론하며 강하게 협상을 압박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국 쪽은 지난 8월22일 서울에서 열린 1차 공동위 뒤 한국의 ‘지연 전략’에 상당한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1차 공동위 종료 열흘 뒤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폐기를 준비하도록 참모들에게 지시했다는 미국 언론 보도가 나왔다. 김현종 본부장도 지닌달 27일 워싱턴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미국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위협이 실제적이고 임박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우리 쪽은 이날 2차 특별회기에서 “한 미 자유무역협정의 상호호혜성,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미국 무역적자와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하는 효과분석 내용을 미국과 공유했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효과분석 결과, “한국의 대미 수출보다 한국의 대미 수입과 관세철폐 효과 간 상관관계가 더 크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특히 “대미 수입 규모가 대폭 증가한 자동차·정밀화학·일반기계·농축산물 등의 품목에서 관세철폐와 수입증가 간 연관성이 뚜렷했다”고 밝혔다. 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무역적자 폭이 커졌다는 미국 쪽 주장을 반박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라이트하이저 대표는 이날 회의 종료 뒤 성명을 통해 “중요한 이행 쟁점들을 해결하는 한편, 상호 공평한 무역으로 가는 개정 협상을 위해 신속한 방식으로 한국과 강도높은 협상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김미나 기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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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민소환법 발의한 박주민 “‘국민 위해 정치한다’는 국회의원들, 국민 눈치 보나요?”

 

다음 총선까지 3년, 그 전에 불량 국회의원 해임할 수 없을까?

남소연 기자 nsy@vop.co.kr
발행 2017-10-05 09:09:54
수정 2017-10-05 09: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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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정치권의 '막말' 경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적절한 막말 사례를 찾기 위해 포털사이트에 한 국회의원의 이름과 '막말'을 함께 검색해봤더니 그 역사도 유구하다. 처음에는 '막말' 뿐인 기사 제목이 '또 막말', '연이은 막말', '계속되는 막말' 등 수식어도 제법 화려해졌다. 막말 분야도 다양하다. 철 지난 색깔론 공세가 더 이상 먹히지를 않는지 이제는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아무리 '말로 먹고사는 국회의원'이라지만 이 정도면 도가 많이 지나쳤다.

비단 거친 말뿐만이 아니다. 사사건건 발목 잡고 몽니를 부리는 탓에 빈손 국회를 만들기 일쑤고, 다수 국민의 뜻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통해 일부로 국정에 차질을 빚게 한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바로 그 국회의원, 그 의원의 왼쪽 가슴에 달고 있는 금배지를 당장이라도 떼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현재로서는 그 국회의원이 자진사퇴하지 않는 이상 다음 총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참고로, 21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은 2020년에 실시된다. 앞으로 3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방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심지어 대통령도 국민들이 소환하고 탄핵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국회의원만은 내 손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아무리 자질이 없는 국회의원이더라도, 내 속을 후벼 파는 국회의원이더라도 이들을 파면시킬 '법'이 없다. 이 때문에 '국회의원 국민소환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요구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그러자 정치권에서도 국민소환제를 입법화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논의로 온 국민의 시선이 국회로 쏠렸던 2월,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민의 뜻을 외면하거나 무능하고 부패한 국회의원에게 국민들이 직접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유권자에 의한 직접적인 통제가 가능토록 하자는 게 법안의 취지다. 그러나 법안을 발의한 후 반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국민소환법은 소관 상임위원회 논의 테이블에도 한 번 올라가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말은 국민 위해 정치한다면서…"
쟁점 법안 하나 통과 시키기 어려운 국회 현실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제정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한 어린이와 참가자가 피켓을 들고 있다.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제정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한 어린이와 참가자가 피켓을 들고 있다.ⓒ뉴시스

박주민 의원은 지난 26일 국회에서 가진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정치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했다. 국회의원 당선 후 수많은 법을 발의해 '박주발의'라는 별명도 얻은 박 의원이었지만, 그가 발의한 개혁 법안들은 번번이 특정 정당의 당리당략에 의해 발목 잡히기 일쑤였다. 평소와 달리 박 의원의 목소리에도 짙은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박 의원은 "국민을 위하는 일이라면 정당이 다르거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해나가야 한다"며 "그런데 실질적으로 보면 정치적인 이해타산만 따지면서 개혁과제나 국민들이 원하는 일을 안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국민들이 실망한다. 그런데 또 말은 '국민을 위해서 정치한다'고 하니, 정치인들에 대한 괴리감이 더 커 보이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박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면서 몸소 느꼈던 아쉬움은 국민소환법 발의로 이어졌다. 박 의원은 "국회라는 곳이 정치 불신의 핵심 대상이 되고 있다"며 "그런데 국회가 제대로 일을 하고, 국회의원들이 말하는 것처럼 국민을 진짜 위한다면 처리해야 하는 법들이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다 보니까 저 자신도 무력감을 많이 느끼는 상황이었다"며 "국민소환제가 도입되면 조금 더 국회가 생산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발의 배경에 대해 밝혔다.

박 의원이 발의한 국민소환법의 주 내용은 임기 중인 국회의원이 위헌적이거나 위법한 행동, 부당한 행동을 하면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서 해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현재 20대 국회에는 국민소환과 관련된 법안은 3건이 발의된 상태다. 박 의원뿐만 아니라 민주당 김병욱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회의원의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안, 바른정당 황영철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회의원의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안도 모두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국회의원을 소환할 때 필요한 요건이 조금씩 다른 정도다.

다만 박 의원의 제정안은 지역구 국회의원을 소환할 경우 해당 지역의 유권자뿐만 아니라 타 지역의 유권자도 소환 청구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박 의원은 자신의 팟캐스트를 통해 국민소환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예시를 들었다.

"예를 들어, '춘천' 지역의 의원을 소환할 때 기존에 발의된 법안은 '춘천'에 사는 분들만 소환이 가능할 수 있는데요. 제가 발의한 법안은 '춘천'에 거주하지 않은 유권자라도 소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박 의원이 발의한 국민소환법은 ▲지역구 의원을 소환하는 경우(①지역구 주민이 소환하는 경우 ②타 지역구 주민이 소환하는 경우)와 ▲비례대표 의원을 소환하는 경우로 나눠진다.

이중 해당 지역구 주민이 국회의원 소환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해당지역 투표권자 수×직전 총선 투표율×15/100 명 이상의 서명이 필요하다.

타지역구 주민이 소환하는 경우와 비례대표 의원을 소환을 청구하는 경우에는 (전국투표권자÷지역구 수)×(투표율×15/100) 명 이상의 서명이 필요하도록 규정했다.

이 같은 요건이 충족되면 국민소환투표를 실시하게 되고, 그 투표 결과에 따라 국회의원의 소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박 의원은 기존의 법안과 달리 타 지역구 주민도 지역구 국회의원을 소환하도록 한 이유에 대해서 "국회의원은 해당 지역구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지위가 헌법 기관이고, 전체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특정 지역 정치인을 지역감정에 기반한 정치적 목적으로 소환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한 지역에서 소환 투표를 요구하는 사람이 전체의 1/3을 넘으면 안 된다는 규정을 안전 장치로 마련하기도 했다.

17대 국회부터 잇달아 발의된 국민소환법
번번이 통과는 무산, 대체 왜?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과 은평구 지역 협의회장들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민원지원센터에서 관계자에게 국민소환제 제정 청원서 제출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주민 의원, 오덕수 역촌동 협의회장, 김현수 녹번동 협의회장, 정남형 응암1동 협의회장.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과 은평구 지역 협의회장들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민원지원센터에서 관계자에게 국민소환제 제정 청원서 제출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주민 의원, 오덕수 역촌동 협의회장, 김현수 녹번동 협의회장, 정남형 응암1동 협의회장.ⓒ뉴시스

과거에도 국회의원에 대한 자질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국민소환제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나왔다.

특히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 이후인 17·18·19대 국회에서는 잇따라 국민소환제 법안이 발의됐다. 그러나 결국에는 흐지부지되면서 무산됐다. 당시에도 국회는 민심과는 동떨어진 선택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박 의원은 "국회의원 스스로 자기 목에 방울을 다는 법이다 보니까 (국민소환법을) 통과 시키는 것에 대해 썩 내켜 하지는 않았다"며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국민소환제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가 굉장히 세기 때문이다. 상황은 달라졌다고 본다"고 내다봤다.

박 의원의 설명처럼 국민소환제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앞서 지난 대선 과정에서도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들은 국민소환제 도입을 공약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당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였던 홍준표 대표도 포함됐다.

그러나 국회 통과 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현재 국민소환제 도입을 위한 3건의 법안은 모두 상임위에서 계류 중이다. 전체회의에서 올라오지도 못한 채 법안을 심사하는 소위원회에서 가로막히는 상황이다.

박 의원은 "지금 현재 국회 전체적인 상황이 무쟁점 법안 중심으로 통과되는 상황"이라며 "만장일치제인 법안심사 소위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검토해보자'라고 한다면 전체회의에도 못 올라온다. 논의조차 안 하는 상황"이라고 답답해했다.

박 의원은 "5개 정당(민주당·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정의당)의 후보들이 대선 때 국민소환제를 도입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만장일치 아닌가"라며 "그런데 대선이 끝났다고 국민소환제가 또 논의가 안 된다? 그러면 국민 입장에서는 '우리들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정치인들이 또 거짓말했네'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들이 이렇게 원하고, 또 실제로 대선 때도 국민소환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통과시키기 위한 노력을 안 하지 않느냐"라며 "그런데 이런 국회의원들을 통제할 장치가 없다. 지금 국회의원들이 국민들 눈치를 크게 보나? 국민소환제가 도입되면 국회의원들이 적어도 국민들 눈치는 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의원은 국민소환법을 둘러싸고 오남용의 우려나 위헌 논란이 제기되는 데 대해서도 단호히 일축했다.

박 의원은 우선 오남용의 우려에 대해선 "오남용이 되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하면 되는 것"이라며 "그리고 나머지는 이제 국회의원을 소환할 수 있는 국민들이 현명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을 기대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제 우리 국민들은 단순한 선동과 선전에 현혹돼 일 잘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국회의원을 날려 버리진 않을 것 같다"고 강한 믿음을 드러냈다.

국민소환법이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는 국회의원 임기를 4년으로 규정한 헌법이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이 조항을 두고 국회의원의 임기 4년은 무조건 보장받아야 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에는 허점이 존재한다. 국회가 자율적으로 국회의원을 제명하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박 의원은 "4년이라는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조항은 국회의원의 임기를 '최대' 4년으로 보장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며 "국회 윤리위원회에서 결의하면 국회의원을 제명할 수 있다. 그러면 이것도 위헌이라고 할 것인가"라고 맞받아쳤다.

20대 국회에서 국민소환법의 운명은?
"이번에 통과 안 되면 사실상 어려워"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열람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국민소환법 통과를 위해 자발적으로 서명 운동에 나선 시민들도 생겨났다. 벌써 13만여 명의 목소리가 모아졌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국민소환제의 조속한 제정을 위한 청원서가 국회에 접수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민소환법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박 의원은 지금과 같은 높은 열망을 다시 모으기 어렵기 때문에 20대 국회가 국민소환법을 도입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고 내다봤다.

박 의원은 "국민들은 국민소환제 도입을 굉장히 원하고,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 찬성한다고 말은 한다"면서도 "그러나 실제로는 얼마나 심도 있게 논의될지 자신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는 "국민들이 지금 같은 관심을 계속 표명해준다면, 국민소환법이 통과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며 "이번에 통과가 안 된다면 사실상 (다시금 국민소환제 도입을 위한 열망을 모아내기가) 어렵다. 다음 대선 때 또 대통령 후보들이 국민소환제를 도입한다고 약속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약속을 어겼는데 별탈이 없었으니, 다시는 안 할 것"라고 단호히 말했다.

'너무 험난한 것 같다'는 혼잣말에 박 의원은 쓴웃음으로 답했다.

 

 

 

"험난하다고 느껴지면서 특정 정당이 머릿속에 떠오르죠. 그분들을 소환하고 싶죠. 그러면 국민소환법을 위해 조금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요. 트위터든, 페이스북이든, 기사 댓글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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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든 모바일이든 ‘진보’ 이름값 하는 좋은 콘텐츠가 답이다”

[창간 기획-신문의 미래]“종이든 모바일이든 ‘진보’ 이름값 하는 좋은 콘텐츠가 답이다”

노도현·허남설·권도현·김지혜·심윤지 기자 hyunee@kyunghyang.com

입력 : 2017.10.05 10:00:00 수정 : 2017.10.05 10:00:09

 

 

ㆍ‘경향신문의 길’ 시민에게 묻다

종이신문만으로 뉴스를 보는 이용자는 1%다.<br />가판대에서 신문을 찾는 이들을 찾기 힘들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전통의 신문사들은 생존이 화두가 됐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종이신문만으로 뉴스를 보는 이용자는 1%다. 가판대에서 신문을 찾는 이들을 찾기 힘들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전통의 신문사들은 생존이 화두가 됐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경향신문은 팔리지 않았다. 지난달 20일 오후 5시부터 한 시간 동안 종로1가 가판대를 맴돌았다. 중년 남성과 노인이 신문을 1부씩 사갔다. 하루 3부 갖다놓는 경향신문은 그대로 남았다. 가판대 앞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여기 신문이 22종이나 있다는 걸 모르겠지. 사람들 눈은 스마트폰을 향한다. 

“경향신문 망할 것 같지 않아요?” 신문을 팔아서는 가판대 깔고 접는 수고비도 안 나온다는 주인 아저씨에게 자조 섞인 말투로 물었다. “에이, 망하지는 않지!” 3개월차 수습기자인 나를 위로한다. “인터넷으로, 휴대폰으로 읽잖아. 종이는 10년이면 거의 없어질 거야.” 주변 가판대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마찬가지. 1시간 동안 7명이 음료를, 2명이 각각 초콜릿과 껌을 사갔다. 주인 할머니는 냉장고 빈자리에 음료를 채워넣었다. 신문은 팔리지 않아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신문 1부 가격은 800원. 주인 할머니는 600원이 신문을 가져다주는 ‘박 서방’ 몫이라고 한다. 1부 팔면 200원이 남는다. 이날은 400원을 벌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쏴야 5부 팔린단다. 한때는 하루에 100부를 팔았다고 한다. 20년 전 이야기다. “신문 팔아봐야 종이값도 안 나오지 않아?” 할머니가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40대 회사원은 퇴근길 아이와 함께 볼 영자신문을 샀다. “온라인에는 얕은 정보밖에 없잖아요. 속보 말고 심층기사를 다룰 언론은 필요하죠.” 작은 희망을 주고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가판대를 유심히 쳐다보다 신문을 사진 않은 50대 김모씨는 말한다. “전자책 나왔을 때 일반 책이 금방 사라질 것 같았죠. 실제로 물성을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죠. 종이신문도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더 반가운 손님을 만난 건 광화문의 한 가판대에서다. 

40대 직장인 ㄱ씨는 경향신문 1부를 사서 청록색 크로스백 안에 넣었다. 2년 전 스마트폰을 없앤 이후 매일 신문을 사서 읽는다고 한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오피니언면을 열심히 읽는단다.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아쉽게도 다시 목이 말라왔다. 

거리에 나가지 않아도 종이신문을 읽는 사람이 확 준 건 안다. ‘1%.’ 닐슨코리아 ‘2017 뉴스미디어 리포트’ 조사에 ‘한 달간 뉴스를 볼 때 이용한 매체’를 묻는 질문에 종이신문만 읽는다고 답한 비율이다. 나부터 기자 지망생 시절부터 신문 읽는 것을 썩 즐기지 않았으니…. 큰 흐름을 파악하고 싶다면 스마트폰으로 포털 뉴스 제목을 훑어도 충분하다. 읽을 만한 기사? SNS에 알아서 퍼진다. 힘들게 입사한 경향신문과 수습기자인 나의 존재 이유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사람들을 붙들고 ‘신문의 미래’라는 식상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창간 기획-신문의 미래]“종이든 모바일이든 ‘진보’ 이름값 하는 좋은 콘텐츠가 답이다”
웹을 보는 이들은 줄어간다. 모바일 독자가 확 늘진 않았다. ‘경향 뉴스’나 ‘뉴스 자체’를 외면하는 건 아니다. 기사의 플랫폼 유통도 언론사의 고민거리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웹을 보는 이들은 줄어간다. 모바일 독자가 확 늘진 않았다. ‘경향 뉴스’나 ‘뉴스 자체’를 외면하는 건 아니다. 기사의 플랫폼 유통도 언론사의 고민거리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그들이 뉴스를 보는 법 

종이신문을 열심히 읽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김모씨(32)가 일하는 공공기관에는 매일 여러 조간신문이 배달된다. 김씨는 신문 1면을 쭉 보면서 북핵 ICBM 관련 기사 제목을 어떻게 뽑는지, 어떤 이슈를 비중 있게 다루는지 관찰한다. “전통신문의 장점은 ‘1면에 어떤 걸 보여주겠다’같이 지향점을 확실히 드러내는 거죠. 경향은 청년·민주주의 등 기획이 괜찮아요. 기획은 지면으로 보면 느낌이 확 달라요.” 기자 지망생 송모씨(24)도 매일 신문을 읽는다. 같은 사안이라도 신문마다 제목과 맥락이 달라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금준경씨(28)는 종이 맛을 아는 기자다. ‘미디어오늘’에서 미디어산업정책 분야를 담당한다. 팔을 뻗어 자신이 만든 종이신문을 펼칠 때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여기까지다. 

금씨가 주요 일간지를 모니터링하는 방식은 정반대다. “지면 스크랩 프로그램으로 봐요. 검색도 되고 편하거든요. 저도 기자지만 종이신문을 보는 데는 익숙하지 않아요. 온라인 뉴스는 담당 분야 지인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것을 참고해요.” 송씨에겐 신문사 지망생 외에 신문 읽는 지인이 있냐고 물었다. “한 명도 없어요.” 취업준비생 장모씨(27) 집은 10년째 일간지를 구독한다. 장씨가 보는 일은 거의 없다. “흥미가 없어요.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신문 읽으려고 시간을 투자하고 싶진 않아요.” 직장인 박성연씨(25)는 입사 전 취업을 위해 신문을 구독했다. ‘기득권’의 사고방식을 익히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면접 답안을 짜기 위해 일부러 보수성향 일간지를 골랐다. 취업과 동시에 구독을 끊었다. 예상한 답이지만 듣고 나니 울적하다. 

‘경향뉴스’나 ‘뉴스 자체’를 외면하는 건 아니다. 유모씨(28)는 3년째 언론사 입사 준비를 하고 있다. 유씨는 주요 언론사 홈페이지와 포털에서 뉴스를 본다. 종이신문을 보는 건 1주일에 한두 번. 대학 언론고시반에서 보거나 가판대에서 사본다. “정기구독을 할까 했는데 자취생이라 돈도 없고 신문 보고 나면 쓰레기가 나와서 안 했어요. 스크랩도 인터넷이 더 편해요.” 건설업계에서 일하는 임세현씨(32)는 틈날 때마다 경향신문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주로 정치 기사와 사설, 만평 ‘장도리’를 본다. “홈페이지가 많이 촌스럽긴 해요. 앱은 콘텐츠가 없어서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형식이 올드한 게 아쉽죠.” 또 다른 과제, 걱정거리가 생긴다. 

신문사의 경쟁 상대는 ‘신문사’가 아니다. 박성연씨는 출근 전 화장을 하면서 팟캐스트 뉴스 프로그램을 듣는다. “업무 기사만 보면 현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잖아요. 현실 감각이 떨어질 것 같아 팟캐스트를 틀어놔요.” 언론사 홈페이지, 포털, 팟캐스트, 페이스북 같은 갖은 플랫폼이 스마트폰 모니터를 놓고 경쟁하는 꼴이다. 

인테리어 기업 인사팀에서 일하는 김대원씨(30)가 말했다. “‘내일 전쟁 날 것 같다’ 이런 속보는 네이버를 통해서 보고요. 출근할 때 좋은 기사를 소개해놓은 경제·정치학 전문가들 페이스북을 봐요. 전문가들이 ‘이 기사 한번 읽어보시라’ 평가해주니 믿을 만하죠.” 김씨는 언론 전문성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 경향은 들어라 

경향신문도 신뢰 위기를 겪었다. 지난 5월 대선 전후 진보 성향 언론인 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를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한경오’라는 말이 번졌다. 입사 전 그 말을 들으면 그러려니 했다. 6월 입사 후 ‘한경오’는 달리 다가온다. 그저 넘길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임세현씨는 열렬한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다. ‘한경오’에 할 말이 많다. “요새 온라인 커뮤니티에 정치 기사나 기자 발언을 재생산한 글이 많이 올라와요. 그걸 보면 ‘한경오’가 쓰레기구나 싶죠. 사안을 왜곡하는 건 ‘한경오’나 다른 언론사나 다를 바 없잖아요. 경향은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편을 든 것 같아요. 홍준표, 안철수는 까지 않고 문재인은 작은 티끌 가지고도 뭐라 하는 느낌이에요.” IT업계 종사자 박모씨도 경향신문에 ‘한경오’ ‘가난한 조중동’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경향신문이 거만하다고 생각한다. “독자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나요? 내부적으로 ‘한경오’ 프레임을 고민했다고 하지만 미디어 소비자들은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그럼 그냥 노력 안 한 거죠.” 그가 보기에 경향신문의 소통방식은 일방적이다. ‘한경오’ 비판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는다. “비판이 나왔다면 공개적으로 기사를 썼어야죠. 경향신문이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공유해야 소통이 돼요.”

경향신문을 좋아하는 이들도 부족함을 가감 없이 지적한다. 언론사 입사준비생 유씨는 여성혐오를 다루는 시각을 예로 든다. “경향신문은 적당한 수준의 진보지죠. 여성·환경·노동 문제에 관해 확실히 진보적 색채를 드러냅니다. 다만 공정성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요. 여성혐오를 부각하기 위해 사건을 제멋대로 재단해요. 남성혐오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건 문제가 있어요. 그래도 경향을 보는 건 사회적 약자를 적극 대변하고 환경을 제대로 감시하는 언론이기 때문이죠.” 취업준비생 조민경씨(28)는 젠더나 청년 이슈에 관심 많다. 경향신문의 여성 이슈 제기는 좋은 제스처라고 생각한다. “경향신문은 젊고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은데 가끔 헛발질을 해요. ‘문제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 이슈를 선별할 때 젊은 시각을 반영하지만 다루는 방식이 고루하다고 할까요. 기본 방향은 잘 잡고간다는 생각입니다.” 

200명에 가까운 기자들이 경향신문을 만든다. 정치·이념 성향이나 페미니즘·성소수자 등 사회문제를 보는 시선도 제각각이다. 여러 선배들은 5월 대선 때도 지금도 불편부당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젠더·여혐 기획도 고민을 반복한 끝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한경오’ 비판이 억울하다는 한 선배는 “대나무숲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독자들과 머리를 맞댄 설득·해명·대화를 했다면 억울함이 핑계 아닌 진심으로 통했을까? 권력의 ‘불통’을 비판해온 언론이 정작 자신의 기사를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건 아닐까?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널리즘, 미디어 문화, 매체비평을 연구한다. 언론 소비자와 기자들을 직접 만나 여러 책과 논문을 썼다. 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기자들이 수용자들에게 좀 더 낮은 자세로 다가가야 합니다. 기자들이 건방지다는 인식이 많아요. 기자들은 정치인이 아니라서 수용자에게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죠. 기호에 영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고 보고 싶어 하는 뉴스가 무엇인지 공부해야 합니다.”

■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입사 후 취재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경향신문이 ‘진보지’라는 막연한 이미지만 갖는다. 어떤 의제에 주목하고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이름값’ 못한다는 소리다. 이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김대원씨에게 경향신문은 ‘진보적이지만 덜 과격한’ 신문이다. 지면을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다른 신문도 마찬가지란다. 언론이 어떻게 변해야 존재감을 높일 수 있을지 물었다. “가끔 일간지를 보면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종이 문제는 확실히 아니라고 봐요. 일간지는 다 얕고 넓게 다루는데, 굳이 차별점 없는 걸 볼 필요가 있는가 싶은 거죠. 뭔가 다르고, 또 깊어야지 보겠죠.” 

금씨는 경향신문이 잘하는 것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난해 ‘부들부들 청년’ 같은 기획보도를 강점으로 꼽는다. “경향이니까 앞으로도 더 젊은 느낌으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신문이 살아 있다는 걸 보여줄 만한 시도를 했으면 좋겠어요.” ‘경향이니까’ 한마디가 가슴에 훅 들어온다. 가능성을 알아주니 기분은 좋다. 

어쩌면 기자보다 신문을 많이 볼 기자 지망생의 시각도 다르지 않다. 매일 신문을 읽는 송씨는 저출산과 육아 문제를 다룬 ‘맘고리즘’ 기획을 기억한다. “페미니즘이라든지 사회적 약자라든지 앞으로도 경향만이 할 수 있는 걸 했으면 해요. 시대가 변해도 기본을 지키는,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쓴 기사는 통한다고 생각해요.” 

김 교수는 ‘신뢰’ 키워드를 제시한다. “출처는 오래 기억되지 않고 결국 메시지만 남아요. 그럼에도 가장 믿을 만한 정보는 전통신문에서 나온다는 것을 신문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내용과 더불어 지면과 온라인에서도 새로운 형식을 찾아야 하고요. 유용한 정보를 다양한 포맷에 담아내는 종합정보매체로 나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취재를 하면서 ‘아프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사람들이 건넨 모든 말들이 달다가도 쓰다. 두번째 형용사를 꼽자면 ‘갑갑하다’이다. 속보도 쓰고, 탐사·기획도 내보내야 한다. 특종은 말할 것도 없다. 텍스트도, 비디오도, 오디오도 해야 한다. 힘든 노동의 결과물을 홈페이지에도, SNS에도 유튜브에도 올려야 한다. 들어와보니 인력이 부족하다. 수습기자들은 이번 창간기획에도 여기저기 불려다녔다. 이 기사도 마찬가지다. 

“인스타그램까지 채널 6개 관리…‘뷰수’에 울고 웃고”. 사회부·정치부에서 오래 일하다 신설한 SNS팀으로 간 선배가 ‘SNS팀은 뭐하는 데야’라는 내부 일각의 차가운 눈초리에 어려움과 절실함을 토로하며 노보에 쓴 글 제목이다. 태어나서 처음 본 가산동 경향신문 윤전기도 떠오른다. 경향신문의 길을 구하는 거창한 기획에 동원한 선배들이 야속하다. 앞으로 더 험난할 미디어 생태계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왜 ‘경향신문’이어야 하는지 현장 취재와 좋은 기사로 증명하는 것 말곤 다른 답은 잘 모르겠다. 미래에 관한 고민은 잠시 미뤄두련다. 

※ 경향신문 수습기자 3명과 모바일팀 기자 2명의 취재를 수습기자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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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선언 10년, 여전한 '금단의 선'

[친절한 통일씨] 10.4선언 발표 10주년 그리고 문재인 정부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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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04  12: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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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일 오전 9시경. 북으로 향하는 도로 위 군사분계선(MDL)을 표시한 폭 30cm의 노란색 선이 상징으로 그려져있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가 노란색 선을 걸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일성.

"오늘 이 자리에 서고보니 심경이 착잡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놓고 있는 장벽입니다.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또한 발전이 저지돼왔습니다. 다행히 그 동안에 여러 사람들이 수고를 해서 이 선을 넘어가고 또 넘어왔습니다. 이제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MDL를 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길'로 향한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3일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4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남북정상선언')에 서명했다. 7년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맞잡았듯, 이날도 양 정상은 손을 잡고 들어올렸다.

10.4선언이 발표된 지 꼭 10년이 됐다. 하지만 10.4선언 서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 2개월 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고,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9년동안 말그대로 휴지조각이 됐고, 국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준비위원장이던 문재인 대통령. 10.4선언은 부활할 것인가.

7.4성명, 6.15공동선언을 이은 10.4선언

10.4선언은 1972년 7.4성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을 계승하고 있다. 또한, 2005년 9.19공동성명, 2007년 2.13합의도 잇고 있다.

"군사적 신뢰조치가 확대되고 한반도 평화체계를 구축하는 발판이 마련되는데 의미가 있다. 남북경협, 교류협력 관계를 양적, 질적으로 한단계 진전시키는 새로운 한반도 구상을 논의하여 다음 정부에서도 화해협력기조가 지속돼 나가는데 확고한 기반을 조성하는데 여할 것이다."

10.4선언은 총 8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1항은 6.15공동선언을 명시해 이행을 약속하고, 2항은 남북기본합의서에도 담겨있는 상호존중과 신뢰 원칙을 재확인하고 있다. 3항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보장 협력을 담고 있다.

1.2항의 원칙에 따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수역을 공동어로수역으로 지정해 평화수역으로 만든다는 것.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노무현 정부가 NLL을 포기했다고 비방하지만, 정작 공동어로수역은 1972년 7.4성명 발표 이후 박정희 정권이 검토를 시작했다. 그리고 1982년 전두환 정권이 북한에 제안했고, 1992년부터 본격 논의가 됐다. 이를 받아 10.4선언에 명시된 것이다.

4항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이를 위해 남북.미.중 4자가 만나며, 9.19공동성명과 2.13합의를 준수해 핵문제를 해결하자는 원칙을 담고 있다. 

   
▲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4정상선언'에 서명한 뒤 손을 잡고 기자들을 위해 다시 포즈를 취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5항은 남북경제협을 골자로 하는데, △민족내부협력사업 특수성 인정,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를 통한 해주 개발, △개성공단 2단계 개발 착수, △개성-신의주 철도,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및 공동이용, △안변.남포 조선협력단지 건설, △이를 위한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구성 등이다.

6항은 △백두산-서울 직항로 개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북응원단 경의선 열차 이용 등 남북교류.협력을 담고 있다. 7항은 △이산상봉 확대, △금강산면회소를 통한 상시 이산상봉, △자연재해 등에 상부상조 원칙 협력 등 인도주의 협력사업 추진을 밝히고 있다. 8항은 국제무대에서의 남북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10.4선언'은 유엔 총회에서 지지를 받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물거품이 됐다. 14조 원을 퍼준다며 공격을 하던 보수정부는 10.4선언 이행에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 결국, 2010년 천안함 사건을 빌미로 '5.24조치'를 발표, 경제협력을 주요 골자로 한 10.4선언은 폐기 수순을 밟았다. 박근혜 정부도 이를 이어받았고, 9년 동안 10.4선언은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았다.

10.4선언 10년, 문재인 정부에서 부활할까

그러나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발표 10년을 맞은 10.4선언은 문재인 정부의 공약으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않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핵심은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이다. △금강산, 원산.단천, 청진.나선을 남북이 공동개발해 동해안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동해권 에너지.자원벨트 구축', △수도권, 개성공단, 평양.남포.신의주 연결 서해안경협벨트 건설 및 경의선 개보수, 서울-베이징 고속교통망 건설 등 '서해권 산업.물류.교통벨트 건설', △설악산.금강산.원산.백두산 관광벨트 구축 및 DMZ 생태.평화안보 관광지구 개발 등을 담고 있다. 10.4선언 5항을 그대로 옮겨온 셈이다.

   
▲ 문재인 대통령은 9월 26일 열린 '10.4선언 발표 10주년' 기념식에 참석, 연설을 통해 북한을 향해 10.4선언의 정신으로 돌아오라고 촉구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통일부 내 '한반도 신경제지도 TF'를 설치하고, 관련 예산으로 내년도 경제협력기반 세부사업 예산을 1천억 원 이상 증액.편성해 2천 480억 원을 책정, 장기적인 사업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10.4선언 발표 10년을 맞은 현 상황은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꺼낼 형편이 못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은 두 차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을 시험발사했고, 중장거리탄도미사일 '화성-12형'은 두 차례 일본 열도를 넘어갔다. 탄도미사일 장착용 수소탄 실험(6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에 맞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대북제재를 보다 강화하는 추세이다. 당장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신규투자를 금지하고 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구현하려면 미국 정부의 도움없이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문재인 정부가 별다른 실력발휘를 하고 있지도 않다. 강력한 대북응징력을 보인다며 자체 개발한 탄도미사일 '현무-2'를 대응발사했다. 미국의 전략무기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 전략폭격기 'B-1B'는 처음으로 동해 NLL을 넘어 함흥지역까지 날아갔다.

   
▲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 일행이 북녁으로 향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평화의 운전수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는 남북 관계 물꼬를 트기는커녕, 악화시키는 주범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대화로 풀어야 한다더니 아직은 대화할 때가 아니라고 하고, 꾸준히 제기되는 특사 파견 요구에도 귀를 닫은 모양새이다. '긴 호흡' 필요성에 '신 한반도평화비전'(베를린구상) 발표, 남북대화 제안 등 성급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왜 서두르냐고 주변을 탓하고 있다.

인도주의 문제는 정치.군사와 무관하다고 강조하지만, 정작 문재인 정부는 국제기구에 800만 달러를 공여하는 문제를 두고서도, 오락가락하더니 '정치적 상황과 분리'한다면서도 '남북관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여론 설득에 실패한 듯하다.

"10.4정상선언은 한반도 평화지도였다.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신북방정책 역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며 "핵과 미사일 도발을 멈추고, 10.4정상선언의 정신으로 돌아오라"고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다. 

하지만 10.4선언 발표 10년. 정작 문재인 정부가 10.4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는 것일까.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넘은 금단의 선은 여전히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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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라는 불교와 범불자 결집대회

 
  •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교수
  • 승인 2017.10.03 08:55
 
 

지난 학기 ‘불교윤리’라는 제목의 강의를 시작하면서, 수강생들에게 ‘나에게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진 후에 한 주 동안 생각해보고 발표하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주로 윤리 교사가 될 준비를 하는 20대 초반 대학생들 개개인에게 불교가 과연 무엇으로 인식되고 있을까가 궁금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을 알아야 이후 강의 진행이 제대로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각각의 배경과 성향에 따라 여러 답들이 나왔지만, 불교에 비교적 긍정적인 답변은 크게 나누면 다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과목에서 배운 원효와 지눌, 연기와 공 같은 개념지식을 불교와 동일시하면서 수능시험 준비 과정에서 애를 먹은 것이 불교라는 답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이 어지럽고 고통스러울 때 떠올릴 수 있는 휴식처로서의 절을 불교와 동일시하면서 무언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대상이라는 답이다. 후자에는 일부이기는 하지만 템플스테이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그 과정을 인상적으로 묘사하면서 다른 학우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는 사례가 포함되어 있다.

조계종 교육원과 한국불교문화사업이 개최한 제3회 청년출가학교. 불교포커스 자료사진.

이 둘에 속하지 않는 대부분의 답변은 불교에 대한 거부감과 무관심, 스님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다. 특히 스님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외제차를 타고 거드름을 피우며 고급 식당에서 나오는 스님과 도박에 빠진 스님, 나이 든 보살인 자신의 할머니를 함부로 대하거나 거짓말을 일삼는 스님 등과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수행자로서의 본 모습을 잃어버린 승려에 대한 직ㆍ간접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떤 학생은 그런 스님들과 자신이 알고 있는 불교이론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2015년을 기준으로 우리 한국사회를 평가해본다면, 급속한 개인화와 물질화, 분단구조의 고착화로 인한 전쟁 위험의 상시화 등을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꼽을 수 있지만, 탈종교화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에 속한다. 사람들의 삶이 근원적으로 불안해지면서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높아지고 있지만 기존의 제도종교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는 종교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의 분석과 진단은 우리사회에서도 이제 충분한 유효성을 갖는다. 10년 사이에 거의 10%가 줄어든 종교인구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고, 특히 불교의 경우 300만 불자가 준 사실에서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탈종교화 현상에 대응하는 방안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각 제도종교, 즉 불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전통종교들이 시대의 흐름을 이끌면서 그 변화를 주도해가는 방안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인구수와는 달리 점차 늘어가고 있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껴안을 수 있는 다양한 대안들을 제도종교 안에서 마련하는 방안이다. 후자에는 이미 일정한 한계에 봉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의 심화와 다양화, 종교를 초월해서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명상공간의 확충, 도심사찰 중심의 불교인문학 강좌의 확산 등이 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에 앞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각 제도종교가 본래의 모습을 간직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정신과 삶을 중심에 두어야 하고, 불교는 붓다와 보살의 삶과 정신을 그 중심축으로 오롯이 간직해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백약이 무효일 수밖에 없다. 불행히도 우리 개신교와 불교는 그 점에서 내부와 외부 사람들 모두에게서 불신 받고 있다. 목사와 스님에 대해 욕설에 가까운 비속어를 남발하는가 하면, 신도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일반인들이 헤아림의 범위를 넘어선다.

우리 승가공동체와 재가공동체에는 물론 그런 비난을 훌쩍 뛰어넘는 수행과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성원이 없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분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고, 특히 법정스님이나 성철스님으로 상징되는 탁월한 정신적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점이 문제다. 우리 시대가 정신적 영웅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객관적 여건과 상황도 충분히 고려해야겠지만, 그럼에도 청정비구와 비구니로 상징되는 승가공동체가 엄존하고 있는 한국불교계에 그런 기대를 쉽게 접을 수는 없다. 더 나아가 보살불교인 한국불교에서는 유마힐과 같이 석가의 제자들도 경외할 만한 청정한 재가보살에 대한 기대 또한 접을 수 없다. 재가보살과 출가보살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기반삼아 깨달음을 구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우리 시대 중생인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건강한 사부대중공동체가 바로 우리가 바라는 불교의 미래다.

9월14일 열린 '조계종 적폐청산과 종단개혁을 위한 범불교도대회' 모습. 불교포커스 자료사진.

유례가 없이 긴 한가위 연휴가 지나고 나면 ‘범불자 결집대회’가 조계사와 인사동 로터리 사이의 공간에서 열릴 예정이다. 10월 11일 수요일 저녁 6시 30분부터 시작되는 이 대회는 ‘청정승가 구현과 조계종단 적폐청산’을 끈질기게 외쳐온 우리들의 함성이 방점을 찍는 자리가 될 것이다. 한 보살의 조계사 앞 1인 시위로 시작해서, 그런 재가자들 보기가 부끄럽다며 단식에 돌입한 명진스님과 그 뒤를 이은 효림, 용상, 대안, 허정스님, 비구니 선광, 석안스님의 간절하고 절박한 외침, 매주 목요일 저녁 보신각 앞 광장을 채운 촛불법회, 그리고 지난 9월 14일 범불교도대회를 잇는 대장정의 한 정점을 이룰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함께해온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은 더위와 한기, 모기, 소음 등을 나누며 동지애를 지닐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이날 대회를 기점으로 새로운 한국불교의 미래를 꿈꾸고자 한다. 그 미래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불교이고, 출가 수행자들이 수행과 포교에만 몰두할 수 있는 불교이며 재가불자들이 자신의 일상 속에서 깨달음과 자비의 지향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불교이다. 그런 미래는 우리 앞에 다가와 있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상당한 성공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11일 저녁 범불자 결집대회에서 그런 열망과 함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설렘과 경외감이 함께 요동치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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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는 민주열사의 주검까지도 서울 밖으로 쫓아냈다

 
[르포] 민주열사 묻힌 모란공원, 이제 기념관 건립 논할 때
2017.10.04 13:38:46
 

 

 

 

많은 이가 지난 겨울 길거리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새삼 깨달았다. 과거 한국은 혁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민이 피 흘려 독재체제를 민주공화정으로 바꿨다. 동북아에서 한국처럼 민주의 의의를 국가 정체성으로 확고히 새긴 나라는 없다. 
 
하지만, 달리 보면 우리는 지난겨울 촛불을 들기 전까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생생하게 경험해 보지 못한 탓이다. 우리는 4.19민주혁명의 의의가 무엇인지, 전태일의 항거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반추해보지 않았다. 수십 년간 이어진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사를 밑줄 그어가며 공부해본 경험도 없다. 기성세대 대부분이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해 볼 겨를이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몸으로 체득한 이전 세대의 반민주적 교양을 자식에게 대물림할 뿐이었다. 
 
마석 모란공원 묘역이 특별한 이유다. 이곳은 방문한 이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의 의의를 되새기게끔 하는 곳이다.  
 

▲ 김근태 전 의원의 묘 인근에서 바라본 마석 모란공원 전경. ⓒ프레시안(최형락)


모란공원 묘역은 민주주의 산 교육장 
 
지난 19일 한국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인 모란공원을 찾았다. 모란공원 묘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위치한 경춘선 마석역에서 도보로 약 20분가량 거리에 있다. 범 민주계열 정치인들이 중요한 시기마다 찾는 곳이다. 현재 약 13000기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약 160여 명의 민주열사가 묻혔다.  
 
공원 입구에서 위로 쭉 뻗은 길을 중심으로 묘역은 크게 좌우로 나뉜다. 오른편이 주로 민주열사가 묻힌 곳이다. 오른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민주열사 묘역 안내 책자 비치대와 민주열사가 묻힌 곳을 표시한 묘역도가 들어서 있다. 이들은 2013년 세워졌다. 묘역도는 구글 지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모란공원 묘역은 사설 묘지이기에 희망하는 누구나 안장은 가능하다. 실제 대부분 묘소는 일반인의 묘역이다. 3년에 25만 원가량 정도의 관리비, 약 1500만 원가량의 묘역비, 15년의 묘역권 등 묘역 이용 기준도 민주열사와 일반인에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모란공원 묘역이 상징성을 띈 이유는 1970년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이곳에 묻혔기 때문이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이하 추모연대)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 등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노동권 존중을 요구하며 분신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낳은 전태일 열사의 유해가 서울시내에 묻히길 원치 않았다. 이에 보안당국은 유가족에게 전태일 열사의 묘지를 서울과 먼 거리에 조성하길 종용했다. 이에 유가족이 고른 곳이 모란공원이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기란 쉽지 않았다. 대중교통도 하루 두세 대 뿐이었고, 눈이 오는 날엔 접근도 어려웠다"며 "당시 정권은 최대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전태일 열사를 떨어뜨려두려 했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만 해도 모란공원은 새 묘지라 다른 묘를 찾기도 어려웠다"던 이소선 전 유가협 회장의 말과 일치한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전 회장은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평생을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이 전 회장은 지난 2011년 타계 후 전태일 열사 묘소 왼편 두 칸 뒤에 안장되었다. 대부분 언론이 이소선 전 회장을 '이소선 여사'로 표현하는데, 남성에게는 대체로 전 직책을 붙여 호명하는 것과 비교하면 부당한 표기로 보인다.  
 
전태일 열사가 묻힌 후, 점차 더 많은 민주열사가 모란공원 묘역에 안장되기 시작했다. 1971년 5월 노조 활동 중 구사대에게 피습 당해 살해된 김진수 열사(당시 한영섬유 노동자), 1973년 10월 이른바 '유럽거점대규모간첩단' 명단에 포함돼 안기부의 고문으로 숨진 최종길 열사(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 1979년 신민당사 점거 투쟁 중 경찰의 살인진압으로 사망한 김경숙 열사(당시 YH무역 노동자) 등이 모두 모란공원에 묻혔다. 이들 모두 문민정부가 들어서 시민권을 인정받기 전까지는 이른바 '빨갱이'로 모욕당한 민주화의 산증인들이다. 
 
추모연대에 따르면 사실 전태일 열사 이전 이곳에 묻힌 민주열사가 있다. 권재혁 열사다.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던 열사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추진하려 했으나, 1968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소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주범으로 내몰려 1969년 사형 당했다. 권재혁 열사는 사망 다음 날인 1969년 11월 5일, 모란공원 묘역에 안장됐다. 
 
모란공원이 본격적으로 세간에 알려진 계기는 박영진 열사 장례 투쟁이다. 박 열사는 1986년 신흥정밀에 입사해 임금 인상안을 놓고 사측과 맞서던 도중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했다.  
 
노동계는 박 열사 유해를 모란공원에 안장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상당수 민주열사 묘역이 모란공원에 조성된 터라 부담감을 느낀 정권과 대립, 한 달 열흘간의 투쟁 끝에 유해를 안장했다. 이 사건이 회자되면서 모란공원은 중요한 민주화의 성지로서 존재감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가 이곳에 안장된 사건은 20년 넘게 지속된 독재에 지친 시민이 대대적 항쟁에 나서는 도화선이 되었다. 
 
자발적으로 조성된 민주화 성지 
 
전두환 정권 붕괴로 형식적 민주화를 이룩한 다음에도 이곳의 상징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직장 투쟁으로 노동 현장의 민주화를 이루자는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이후 모란공원에는 많은 노동열사를 비롯해 사회 각계의 누적된 모순과 싸우던 이들이 안장되었다. 수은 중독으로 15세 당시 입사 2개월 만에 사망한 문송면 열사, 백골단의 학생운동 폭력 진압으로 사망한 김귀정 열사, 원진레이온에서 근무하다 얻은 직업병으로 사망한 김봉환 열사와 고정자 열사 등 숱한 이가 이곳에 묻혔다.  
 
평생을 통일운동에 전념한 문익환 목사, 정부의 강경한 노점상 철거에 맞서 싸우다 위법적 공권력 행사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이덕인 열사,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평생을 바친 계훈제 전 <사상계> 편집장, 효순이미선이 사건 당시 시민운동을 이끌다 귀가 도중 의문사한 제종철 열사, 레미콘 노동자 노동권 보장을 위해 사측과 협상 도중 사측이 고용한 대체차량에 치어 사망한 김태환 열사, 한미FTA 반대를 요구하며 분신한 허세욱 열사 등 숱한 이가 이곳에 묻혔다. 정권의 폭력적 철거에 맞서다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숨진 이상림·양회성·한대성·이성수·윤용헌 열사는 나란히 이곳에 묻혔다. 민청련 사건으로 군부의 살인적 고문을 받았던 김근태 전 국회의원도 이곳에 묻혔다. 
 
모란공원이 일방적으로 주입받은 화장한 한국의 얼굴이 아닌,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역사의 장인 셈이다. 이창훈 추모연대 집행위원장은 "모란공원은 자연스럽게 조성된 민주열사 묘역"이라며 "권력의 인위적 조성이 아니라, 시민의 열망이 만든 일종의 성지"라고 강조했다.  
 

▲ 전태일 열사의 묘소 뒤로 이소선 전 유가협 회장의 묘소가 자리했다. 전태일 열사가 모란공원에 묻힌 후, 이곳은 점차 민주열사의 성지가 되어갔다. ⓒ프레시안(최형락)


언제까지 시민 손으로 관리를... 
 
그간 민주열사 묘역은 그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관리가 쉽지 않았다. 유가족을 중심으로 한 각 열사 추모단체가 개별적으로 개별 묘를 관리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어디에 묻혔는지 확인키도 어려웠다. 추모연대 등 여러 단체가 민주열사 묘역을 전반적으로 관리했지만, 인력과 자금의 부족으로 한계가 있었다.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때는 2013년이다. 최재성 의원 등이 주도해 지역구 예산 2억 원을 관리에 투입했다. 묘역을 크게 가로지르는 이동로가 시멘트로 포장되고, 약자의 이동을 돕기 위한 손잡이가 이동로에 설치되고, 주요 묘소를 안내하는 나무 표지판이 설치된 게 이 때다.  
 
이창훈 집행위원장은 "예전에는 길이 전부 흙이라,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노약자는 이동조차 어려웠다"며 "그나마 지금은 예전에 비해 민주열사를 찾기가 쉬워진 셈"이라고 말했다.  
 
유가협 등 각 단체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이 매월 둘째 주 일요일마다 전반적인 묘역 관리에 나선 때도 2013년이다. 이에 따라 개별 열사 묘역이 따로 관리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민주열사로 확인된 이들의 묘역이 함께 관리되고 있다. 묘역 관리자를 위해 공원 입구에 컨테이너 박스가 세워진 것도 이 즈음이다. 자원봉사자들의 주요 업무는 묘역 잔디 관리, 이동로 관리, 표지판 관리 등이다.  
 
하지만, 더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해 보였다. 안내 책자 비치대는 외력으로 추정되는 힘에 의해 찌그러져 있었고, 안내 책자는 모두 바닥났다. 일부 나무 표지판은 이미 썩어 조금만 손을 대도 흔들렸다. 한편으로 크게 기운 표지판도 눈에 띄었다. 
 
개별 민주열사 묘역에는 그들의 행적을 간략히 소개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일부 표지판은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훼손한 듯 부러져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후 사망해 이곳에 묻혔음에도, 자원봉사단 관리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이가 여전히 많다는 데 있다. 통상 민주열사는 매년 6월 열리는 범국민추모제에서 확인하는 민족민주열사 안장 명단에 들어간 이로 구성된다. 이 명단에 든 이 중 모란공원 묘역에 묻힌 이의 묘지가 자원봉사자들의 관리 대상이다. 하지만 유가족 중 이 절차를 모르는 이는 서류신청이 필요하다는 절차조차 알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이창훈 집행위원장은 "그나마 노동열사는 상급 단체 등이 추모사업회를 꾸려 관련 절차를 밟아주기에 괜찮지만, 개별적으로 우리 사회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가신 이의 유족은 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여기 묻힌 이 중에도 실제로는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음에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가 많다"고 말했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사진 왼쪽)과 이창훈 추모연대 집행위원장(사진 오른쪽)이 모란공원 기념관 설립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제 기념관 건립을 논할 때 
 
무엇보다 유가족 단체는 모란공원의 상징성을 후대에 더 적극적으로 알릴 방안을 우리 사회가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 아니냐고 묻는다. 
 
모란공원은 사설묘지여서 민주열사와 일반 안장자의 무덤이 혼재되어 있다. 이미 묘역이 꽉 차, 더 많은 이를 받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일부 민주열사의 묘지는 이동로에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단순히 공권력의 힘으로 해결하기란 어렵다. 묘지란 기본적으로 함부로 손대선 안 되는 공간인 데다, 이런 혼재성이 역설적으로 모란공원이 시민의 자발적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임을 알리는 상징성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가족 단체는 모란공원의 상징성을 살리되, 무엇보다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 장소인 이곳의 의의를 시민에게 더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안을 범정부 차원에서 논의해주기를 원했다. 구체적 대안으로 이들이 요구하는 안이 기념관 건립이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모란공원을 비롯해 전국에 산재한 민주열사 묘역은 그 어느 곳보다 한국 현대사를 생생하게 공부할 수 있는 장소"라며 "궁극적으로 모란공원 기념관을 설립해 시민 누구나 이곳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의의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제화된 묘역보다, 살아있는 역사인 이곳에서 청소년이 우리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며 "자라는 세대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가장 좋은 곳이 모란공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정부는 과거 기념관 설립을 검토한 바 있다. 모란공원 입구에 위치한 모란미술관을 정부가 매입한 후, 이곳을 추모시설로 바꾸는 방안이다. 당시 정부는 약 200여억 원의 사업비가 소요될 것으로 봤다. 하지만, 일반 묘역이 민주열사 묘역과 섞인 만큼 당시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와 관련해 최근 유가협, 추모연대 등 민주열사 관련 단체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모란공원 재정비 방안을 마련해 다시금 정부에 관련 논의를 이어줄 것으로 요청할 예정이다.  
 
이창훈 집행위원장은 "엄밀히 말해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은 관리가 어렵다기 보다,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대통령을 비롯해 주요 민주계 정치인이 찾는 곳인데, 그에 걸맞은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올해로 시민의 힘으로 군부 독재를 끝내고 민주화 체제를 이룩한 지 30년이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기를 위해 시민이 흘린 피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선거권 획득이라는 중대한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민주화의 의의를 상징할 모란공원은 더 큰 관심을 원한다. 
 
민주화의 상징 묘역들
 
모란공원 외에도 전국 각지에 한국 현대사의 상흔을 보여주는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 
 
먼저 손꼽을 곳은 광주 망월동 구 묘역(3묘역)이다. 망월 구 묘역은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상징성을 얻었다. 1980년 신군부는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숱한 이를 학살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이 사건의 희생자 상당수가 망월 묘역에 묻혔다. 이후 이곳은 80년대 학생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광주에 빚을 진 숱한 민주화운동가들이 망월동을 찾았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망월동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민주화 운동이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는 유족마저 망월동을 방문하기 어려웠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망월 구 묘역에서 추모제를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징역형을 살았다. 
 
이후에도 숱한 민주 열사가 망월 구 묘역에 묻혔다. 이한열 열사가 대표적이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한열 열사는 사후 망월 구 묘역에 묻혔다. 1991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다 숨진 강경대 열사도 망월 구 묘역에 안장됐다. 경찰의 물대포로 인해 숨진 백남기 열사도 망월 구 묘역에 안장됐다. 
 
망월 구 묘역은 최근까지도 접근이 쉽지 않은 공간이었다. 지난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곳을 찾을 당시 8000여 명의 전투경찰이 망월동 인근을 에워싸, 구 묘역을 참배한 후 신 묘역으로 이동하던 유족을 막았다. 현재 구 묘역에는 민주열사 묘지 40여기와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149명의 가묘가 조성돼 있다. 본래 망월 구 묘역에 있던 5.18 희생자들의 묘소는 1997년 신 묘역이 완성된 후 그곳으로 이장됐다. 신 묘역은 2002년 국립 묘지로 승격됐다. 
 
경남 양산 솥발산 공원묘역은 한국의 대표적인 노동열사 묘역이다. 경남 일대는 중공업 단지가 밀집된 탓에, 일찍부터 노동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 상당수가 솥발산 공원묘역에 묻혔다. 이곳이 ‘노동운동의 성지’가 된 까닭이다. 
 
2003년 사측의 탄압에 항의하다 살인적 손배소에 짓눌린 끝에 분신한 배달호 열사가 이곳에 묻혔다. 배달호 열사의 죽음은 형식적 민주화가 완성됐다 여겨진 당시 사회에 직장 민주화가 여전히 요원함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이후 노동운동가와 싸우던 주요 회사는 가장 손 쉬우면서도 잔인한 무기로 손배소를 꺼내들어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현재 이곳에는 노동열사 30여 명이 묻혀 있다. 
 
'보수의 성지'로 알려진 대구에도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 대구 현대공원 묘역이다. 
 
현대공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악명 높았던 인민혁명당 사건 희생자들의 유해가 남은 곳이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의 유신에 반대하리라 점찍은 인물들을 증거 없이 연행해 대법원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 속칭 인혁당 사건으로 불리는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도예종 삼화토건 회장, 여정남 전 경북대 학생회장, 서도원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김용원 경기여고 교사 등 8명이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현대공원에는 인혁당 희생자 8명을 비롯해 민주열사 17명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이들의 죽음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음을 발표한 후, 2007년 정부가 희생자 유가족에게 245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뒤늦게 바로 잡혔다. 인혁당 사건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희생자 유가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처럼 전국 각지에 자리한 민주열사 묘역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의 성지로 자리 잡게 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마석 모란공원과 대구 현대공원, 양산 솥발산 묘역은 지금도 사설 묘지다. 망월 구 묘역은 현재 광주광역시가 관리하는 시립묘다. 
 
민주열사를 모시는 유일한 국립 묘역은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있다. 지난 2001년 민주공원 묘역 사업이 결정된 후 수년 간 적절한 후보지를 물색하던 정부는 2007년 12월 이천시 모가면 공원로를 최종 부지로 확정했다. 이후 2016년 6월, 총예산 497억 원을 들여 시공한 국립 묘역을 개원했다. 
 
이곳에는 90년대 초반 학원 민주화와 노태우 정권 타도, 노동 해방 등을 요구하며 민주화 이후에도 학생운동이 이어지게끔 산화한 강경대 열사를 비롯해 민주열사 56명이 안장되어 있다. 전체 안치 규모는 136기다. 일정한 조건에 부합하는 국가 인정 사망자만 안장될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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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다 잊었다” 말하지만...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족의 명절

 

67년 세월 동안 수많은 미제사건으로 남아

구자환 기자 hanhit@vop.co.kr
발행 2017-10-04 10:15:23
수정 2017-10-04 10: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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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자료사진
민중의소리 자료사진ⓒ구자환 기자


 ‘사랑의 자리’낙엽이 떨어져도 생각이 나고
강물이 흘러가도 생각이 난다.
돌아온다고 약속해놓고 오지않는 무정한 님아.
사랑이 머물던 자리 그님은 어디가고
어디가고 돌아올 줄 모르나.

할머니는 불쑥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둘째 딸이 ‘어머니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다’는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88세의 고령에 맞지 않게 고운 음색과 음정을 갖춘 노래가 잔잔한 침묵을 뚫고 있었다.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며 먼저 가버린 남편의 그리움과 원통함을 애써 달랬다. 어떤 때 할아버지(남편)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이젠 다 잊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대답은 외려 무덤덤했다. 수십년이 흐르면서 눈물도 말라버렸다. 숱한 세월이 흐르면서 죽은 사람을 슬퍼하기보다 당장 삶을 이어가는 것이 급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하는 것이다. 가해자들이 침묵을 강요하며 노린 것이 ‘시간’이었을까. 통한의 아픔도 숱한 세월 속에 묻혔다. 당시 농사를 지으며 마산소방서에 다녔던 남편 황치원씨는 21세 나이의 청춘이었다. 20세인 할머니는 첫딸에 이어 둘째 딸을 태안에 품고 있었다. 다행히 열서너 마지기의 논이 있어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 수가 있었지만 남편이 없는 농사일은 ‘골병’ 그 자체였다. 홀로 어린 딸을 키워야 했던 가혹한 시간이 어느새 67년이 흘렀다. 할머니는 가혹한 시간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하느냐고 했다.

20세의 나이에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이귀선 할머니
20세의 나이에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이귀선 할머니ⓒ구자환 기자

노래를 마친 이귀선 할머니는 잠시 자리를 벗어낫다. 67년의 세월이 흐른 동안 국가는 할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 진상조사에서 진실규명이 되었지만 법원은 증거능력이 부족하고 마산형무소 수감된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심마저 기각했다. 현재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부역 사건 등 다수의 유족들은 법원으로부터 ‘국가 잘못’이라는 판결을 받고 보상을 받았으나 유족 일부는 법원으로부터 비슷한 이유로 기각 당했다. 보도연맹학살 사건 등 진실규명 미신청 유족은 신청자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다.

“돌아와서 들에 풀어놓은 소를 찾아오겠다고 나갔어. 그리고 안 돌아오데”

2일 찾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8월 11일 미군 폭격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2002년 영국 BBC에서 이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 방송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침묵했던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국민보도연맹학살 사건이 그 이전에 있었다. 당시 마산과 진주일대 국민보도연맹원은 한국전쟁 초기인 음력 6월1일 소집 통보를 받고 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산의 계곡과 인근 바다에서 집단 학살됐다.

“아침에 ‘나중에 돌아와서 들에 풀어놓은 소를 찾아오겠다’고 하고 나갔어. 그리고 안 돌아오데”

남편은 진전지서에서 ‘가입하면 군에도 안 가고 좋다’는 권유를 받고 가입했다. 그것이 국민보도연맹인 줄은 알지 못했다. 1949년 이승만 정권은 좌익세력을 대상으로 사상을 전향하고 계도하기 위한 관변단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역 할당제가 실시되면서 국민보도연맹원에는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농민이 다수 가입됐고, ‘말 깨나 한다’는 지식층과 중고등학생까지도 가입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은 위협하고, 농민에게는 대출과 농기계 대여를 해주고,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취급한다고 협박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가입시켰다. 시골마을에서는 이장이 주민에게 알리지도 않고 지니고 있던 도장을 찍기도 했다. 이때부터 ‘도장을 함부로 주지 말라’는 말이 생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37만명으로 추정되는 국민보도연맹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에게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예비 검속되고 전국 곳곳에서 무차별 학살됐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에는 가입하지 않은 인사들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논과 밭을 팔아 뇌물을 주고 풀려난 보도연맹원도 곧잘 회자된다. 집안이 부유했던 아버지는 자식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논과 밭을 팔아 포대자루에 담아 뇌물을 전했다. 그럼에도 돌아오지 못한 자식도 있었다. 뇌물을 받은 순경 등은 ‘담배 사가져 오라’는 등의 말로 풀어주었지만 순박했던 사람은 담배를 사들고 다시 되돌아와 죽임을 당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한 순경이 자신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를 살리기 위해 ‘선생님, 목욕하고 오시라’고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가 역시 목욕을 하고 다시 돌아왔다. 죄가 없으니 도망갈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순경은 크게 탄식을 하면서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욕설을 마구 퍼부으며 울었다고 한다.

유족들이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헌화하고 있다.
유족들이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헌화하고 있다.ⓒ구자환 기자

남편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풀려난 마을주민으로부터 남편의 소식을 들었다. 이 마을에는 진전면장의 힘으로 주민 3명이 살아서 돌아왔다. 마을로 돌아온 주민 중 한 사람은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음력 7월 10일 제사를 지내라’는 단 한마디만 전했다. 이날이 남편인 황치원씨가 마산 구산면 ‘괭이바다’에서 수장 학살된 날이었다.

마산 괭이바다에 수장된 음력 7월 10일

“우짤거고, 아무리 한이 맺혀도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

할머니는 끝내 그 비통했을 순간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랜 고통을 되새기는 질문을 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던 것에 비해 무척 허탈한 답변이었다. 듣고 있던 둘째 딸이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는 듯이 대신 거들었다. 당시 할머니의 태안에 있던 유복자다.

“말 안 해도 뻔 한 거 아닙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을 치고 대성통곡을 했겠지. 죽은 사람은 그렇다 치고 산 사람의 원이라도 풀어줘야 하지 않습니까.”

할머니는 참혹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이제는 남편의 생각도 잊었고 눈물도 말라버렸다. 담배와 술을 먹으며 지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애써 웃었다. 살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체념이다. 너무 어이없고 황당한 일을 당하면 사람은 웃는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이 벌어진지 67년이 지났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당시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수많은 민간인학살 사건 등에 대해 진실규명을 했지만 이명박 정부로 접어들면서 활동기간을 연장하지 못하고 종료됐다. 짧은 활동기간은 여전히 수많은 미제 사건을 남겼다.

문재인 정부는 ‘민간인학살 사건’을 10대 국정과제로 설정하고 2018년 초 ‘제2의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재조사 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현재 남편을 잃은 유족들 대부분은 기억을 상실하거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나마 생존한 유족들도 오랜 시간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 체념하거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이것이 제2의 진실위가 하루빨리 활동을 재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침묵을 강요당하고, 역대 반공우파 정권에서 배척한 대한민국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 이제 살아있는 자들을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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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원래 ‘하루’만 쉬는 날이었다?

 
등록 :2017-10-04 09:29수정 :2017-10-04 09:51
 
추석 풍경 변천사
1970년 고향길 대표 풍경은
‘만원 열차·무임 승차’
첫 ‘연휴’는 전쟁 중인 1951년
작년까지 최장 추석연휴는 5일
가족·친척들과의 긴 만남보다 해외여행과 ‘방콕’이 일상이 되고, 극장가가 붐비는 지금 추석 모습은 예전과 어떻게 다를까? 대체휴일과 임시공휴일이 만나 사상 초유 ‘10일 연휴’를 갖게 된 2017년 추석을 맞아, 추석 연휴의 역사와 모습을 살펴봤다.

 

 

■ 추석은 원래 ‘하루’만 쉬는 날이었다

 

추석이 법정공휴일로 제정된 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이다. 이후 1986년에는 추석 다음날, 1989년에는 추석 전날이 휴일로 지정되면서 지금과 같은 ‘3일 연휴’ 체제가 완성됐다.

 

하루만 쉬던 추석이 2일 이상 쉬는 ’연휴’가 된 건 추석 다음날 일요일이 붙은 1951년이 처음이었다. 이후 연휴가 법제화된 1986년에 이르기까지 일요일을 앞뒤로 낀 추석연휴는 1951, 1954, 1958, 1967, 1974, 1975, 1981, 1984년 등 모두 8번 있었다. 10월3일 개천절과 이어진 이틀짜리 연휴는 1963년 한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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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연휴가 법제화된 1989년 전까지 3일짜리 추석 연휴는 이틀짜리 추석 연휴(10월7일, 8일) 뒤로 한글날이 맞물린 1987년 단 한 차례 뿐이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하루 또는 이틀 안에 고향을 다녀오려는 귀성객들로 열차와 버스가 몸살을 앓았다. 추석 3일 연휴가 5일로 길어진 때도 있긴 했다. 1990년 당시 법정공휴일이었던 국군의날(10월1일·월)이 일요일과 추석 연휴 사이에 끼면서 사상 첫 5일 연휴를 만들어냈다. 그 탓이었을까. 국군의날은 그해 11월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됐다.

 

4일 이상의 연휴가 흔해진 건 2004년 토요일을 쉬는 ‘주5일제’가 시행된 이후다. 2014년 대체휴일제가 도입되면서 추석은 어지간하면 4일을 쉬는 ‘가을 휴가’가 됐다. 해외를 다녀오려고 여행객들로 공항이 붐비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사람들은 주변 휴일과 공휴일 사이로 개인 휴가를 끼워 일주일 안팎의 기간 동안 해외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 광복 이전: 하루만 쉬어도 텅~비었던 서울

 

가족끼리 모여 차례를 지내고 송편을 나눠 먹는 추석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장거리·대규모 귀성은 과거에 흔치 않았다. 일가친적이 가까운 곳에서 대가족을 이루며 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적 의미의 귀성은 일자리와 학업을 위해 타지로 나간 이들이 늘어난 일제시대부터 본격화했다. 당시 추석은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대규모 귀성은 없었으며, 고향이 가까운 사람들만 주말을 끼고 가족을 찾아갔다. 1924년 9월12일자 <동아일보> ‘임박한 추석과 가을의 선물’ 기사는 당시 모습을 이렇게 쓰고 있다.

 

 

“고향 가까운 사람들은 부모형제 모여앉아 송편 한 개라도 달게 먹으려고 고향으로 다니러 가는 사람이 많다는 바, 추석날은 마침 토요일이므로 학생들도 일찍 공부를 마치고 나오리라는 데 금년에는 여러 가지 재앙으로 연사가 전만 못함으로 따라서 추석 놀이도 전에 비하면 매우 쓸쓸하리라더라.”-1924년 9월12일 <동아일보>

 

 

그런 상황임에도 추석이 되면 서울은 텅 비었던 것 같다. 1921년 <동아일보>는 텅 빈 서울의 모습을 잘 묘사해 놓았다. 100여년의 세월 차이에도 불구하고 낯설지 않다.

 

 

“어제 16일은 음력 추석이라. 있는 집에서는 곰국을 푸지게 끓여놓고 아이들까지도 모두 재미있게 지내는 모양. 더욱이 어제 하루 동안은 시내의 각병문에 인력거 구경을 할 수가 없었고 3~4전 하던 무 한 단에 십전씩 주어도 얻어볼 수가 없었으며 관에는 고기가 동이 났다 함은 아무리 죽네 하여도 경황이 전보다 나은 것을 증명”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신세를 비관해 명절에 자살하는 이들이 있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사람마다 그 준비에 분망중인 지난 29일 밤 극도의 생활난으로 세상을 비관하여 사랑하는 자식 두 명을 양팔에 안고서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참극이 있었다.”-1933년 10월3일자 동아일보 3면 ‘명절이 고통 애자양명을 포옹코 진행차에 투신자살’

 

“한 노파가 (열차에) 뛰어들어 무참히도 자살을 하였는데, 조사 결과 그는 서성리 김씨(61)로서 추석 명절이 닥쳐왔건만 생활이 곤궁하여 한끼니의 밥도 지어 먹을 수 없음을 비관하고 추석날 미명에 목숨을 끊고 말았다 한다.”-1935년 9월14일 동아일보 5면 ‘생활난 비관 노파가 자살’

 

 

 

■ 광복부터 1950년대까지: 승차권 못구한 승객들 무임승차…미군 객차까지 투입돼

 

1949년 추석 당일이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고향을 찾는 이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귀성의 핵심은 기차였다. “서울역 광장에는 차 탈 사랑들이 문재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섰다. 서울역 오후 5시45분발 열차는 개찰도 하지 않았는데, 용산에서부터 초만원이 되었다” 1949년 10월7일자 <경향신문>이 묘사한 추석 하루 전날 서울역의 풍경이다.

 

1951년은 사상 첫번째 연휴였지만, 전쟁으로 명절 분위기를 한껏 낼 수는 없었다. <동아일보는> 9월15일자 신문에서 “고난과 궁색 중에서 맞이한 조상의 제례도 못 올리는 오늘의 추석 명절…(중략) 그래도 무심히 뛰노는 새 옷 입은 거리의 아이들이 조국의 꽃봉오리다. 그리고 변함없이 반가이 맞아주는 만월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새 희망으로 고난극복”이라고 짧게 썼다.

 

고향가는 길은 휴전선이 정해진 뒤인 1952년부터 다시 혼잡해졌다. ‘대규모 무임승차’로 열차가 연착하는 등 지연운행이 극에 달했다.

 

 

“추석을 앞둔 부산역의 혼잡은 극도에 달하여 비난의 초점이 되어있는데, 지난 2일 부산역을 출발한 서울행 급행열차와 대전행 여객열차는 승차권을 구입치 않은 여객들도 초만원을 이루어 여객차는 스프링이 주저앉아 이날 아침 8시에 출발, 6열차는 삼랑진에 이르러 2시간이나 늦어 대구역에 이르렀으나 극도의 초만원을 이루어 열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1952년 10월3일자 <경향신문> 2면 ’삼랑진 대구서 연발소동‘

 

 

 

열차 귀성객이 폭증하자 정부는 1955년에는 미군에 객차 10량을 긴급 요청해 투입했으며, 1956년에는 임시열차를 증편 운행했다. 하지만 열차만으로 장거리 여객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서민들이 정원 초과 열차표마저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일부 국회의원은 역무원에게 특권을 요구하는 등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추석의 명절을 앞두고 제각기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시민들은 서울역이 갑자기 좁아진 듯 터져라고 몰려들고 있다. 언제나 2~3할 정도의 여유를 보여주던 각선 열차는 그 전날에 벌써 정원을 초과하고 차표를 못산 승객들은 이리저리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특히 가족 수행원들을 이끌고 귀향하는 국회의원 제공들의 접대에 서울역장실은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1955년 9월29일 <경향신문> 3면 ‘혼잡한 추석 열차 어제 서울역 풍경’

 

 

 

무리하게 승객을 태우다보니 크고 작은 교통사고도 잇따랐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사고는 ‘평해호 침몰 사고’다. 1949년 10월 5일 인천항을 출발한 여객선 평해호가 강화군 작약도 100m 앞에서 전복해 71명이 숨졌다. 50인승 ‘똑딱선’에 귀성객을 비롯해 200여명이 넘는 승객을 태워 발생한 인재로, 당시 선장은 만취한 상황이었다.

 

 

■ 1960년대: 기차로, 비행기로…빈부 따라 갈라진 고향길

 

산업화로 고향을 떠난 ‘이촌향도’ 현상이 사회문제로 떠오른 60년대의 귀성길 혼잡은 극심했다. 몰려든 승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열차의 스프링이 내려앉는 등의 사고가 잇따랐다.

 

6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부유층이 이용하는 백화점과 아파트 상가를 중심으로 흥청거리는 명절 분위기가 퍼졌다. 1968년 10월4일자 경향신문 ‘추석경기 흥청-사치품이 날개돋혀’ 기사는 서울 시내 일부 백화점에서 매상목표 5천만원을 예상했던 상품권이 매진되는가 하면, 귀금속 등 사치품과 냉장고, 에어컨 등 고가 전자제품의 거래가 늘어나는 등 과거와 다소 다른 명절 분위기를 전했다. 항공편을 이용하는 귀성객이 부쩍 늘어 서울-부산을 비롯한 주요 노선의 예매가 완료됐다는 소식과 함께 ‘초만원’ 서울역에 질서 유지를 위해 사복경찰이 투입됐다는 소식이 함께 전해졌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의 1977년 추석 모습. 국가기록원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의 1977년 추석 모습. 국가기록원
■ 1970년대: ‘고속도로 시대’ 개막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대전-대구 구간을 끝으로 전 구간 개통하면서 본격적인 고속도로 시대가 열렸다. 철도를 이용한 귀성객은 1969년 60만5000여명이었으나 1970년에는 36만명 수준으로 줄었다. 귀성객들은 출발 간격이 짧고 정류장이 가까운 고속버스를 선호했다. 역 앞에서 펼쳐졌던 귀성길 혼잡은 고스란히 버스정류장으로 옮겨갔다. 고속버스가 입석 승객을 받는 위험천만한 일도 빈번했다.

 

고속버스로 승객이 분산된 데다 승차원 예매제도가 시작되면서 추석 당일 서울역 등 주요 기차역의 혼잡은 줄었다. 하지만 날짜가 옮겨졌을 뿐 매표소에 길게 늘어선 줄은 버스터미널과 기차역에서 여전했다. 1970년 9월12일 <매일경제>는 “추석을 사흘 앞둔 12일 서울역을 비롯한 시내 35개 열차표 매표소는 이날 낮부터 귀성객들로 붐비고 있으며, 이미 12일용의 호남선 특급열차 태극호와 백마호의 차표는 11일의 예매에서 매진됐다”고 전했다.

 

 

한꺼번에 몰린 귀성객들로 주차장이 된 1989년 경부고속도로 궁내동 톨게이트 모습. 연합뉴스
한꺼번에 몰린 귀성객들로 주차장이 된 1989년 경부고속도로 궁내동 톨게이트 모습. 연합뉴스
■ 1980년대 이후: 사라질뻔한 5일 연휴

 

1986년 추석 다음 날이, 1989년 추석 전날이 휴일로 지정되면서 지금과 같은 ‘3일 연휴’가 시작됐다. 길어진 휴일과 승용차 보급으로 명절 고속도로 혼잡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매표전쟁에 질린 시민들은 포니 엑셀, 프레스토, 르망, 프라이드 등 신형 국산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쏟아져 나왔다.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됐다. 마을로 묘지로 향하는 시골길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의 성묫길 풍경. 연합뉴스
80년대의 성묫길 풍경. 연합뉴스

 

“붐비는 건 고속도로뿐이 아니었다. 인터체인지를 빠져 국도와 시골길을 거쳐 고향 마을에 들어서자 황토길에도 서울 넘버의 포니와 르망과 시골택시와 봉고차에 경운기까지 뒤엉켜 마을안길 역시 차량들로 어수선했다.-1986년 9월19일자 <동아일보> 5면 ‘고향찾는 마음’

 

 

승용차의 증가로 고속도로 정체가 절정에 이르면서 사람들은 막히지 않는 철도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PC통신’의 전성기인 1990년대 중반부터 역과 터미널 앞에 길게 늘어선 예매 줄이 모니터로 옮겨갔고, 혼잡을 피해 서울의 가족 친지를 찾는 ‘역귀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1984년 추석 연휴를 맞아 서울역에 몰린 귀성객들. 연합뉴스
1984년 추석 연휴를 맞아 서울역에 몰린 귀성객들. 연합뉴스
지금은 5일 연휴가 비교적 흔하지만, 1990년대 전까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공휴일 조정’을 구실로 추석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990년 8월24일 국무회의에서 국군의날과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내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정부는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들었다. 5일 연휴가 ‘기사회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짧았던 일주일 동안 여행을 계획했다가 취소한 사람들도 있었다. 시민들은 정부의 오락가락 졸속행정에 분통을 터뜨기도 했다. 그해 유지됐던 국군의날과 한글날은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2017년. 역 앞에 늘어선 긴 줄은, 컴퓨터 화면을 거쳐 모바일로 들어왔다. 명절엔 반드시 고향을 찾아야 한다는 의식도 희미해지면서 3일 이상 연휴를 여행이나 긴 휴식으로 보내는 이들도 늘어났다. 올해는 ‘7일 연휴’도 아쉽다는 여론에, 정부가 10월2일 하루를 더 붙여 10일을 쉬기로 했다. 추석이 법정공휴일로 지정된 지 68년 만에 하루였던 휴가가 10일이 된 것이다. 5일 쉬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며 휴일의 허리를 자르고자 했던 과거 정부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세상이 바뀌었다. 다음번의 추석은 어떤 모습일까.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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