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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국가 자존감 회복할 수 있는 기회됐으면”

민문연 등, 이준 열사 110주기에 안국동 집터 표석 제막식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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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4  18: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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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 열사 110주기인 14일, 서울 안국동 152번지 해영회관 앞에 이준 열사 집터 표석이 설치됐다. 왼쪽이 이준 열사 집터에 포함되는 안국동 153번지로 지금은 'ANGUK 一五三' 빵집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준 집터

이준(1859~1907)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될 때 살던 집이 있었다. 이준의 아내 이일정이 1905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부인상점을 연 곳이기도 하다.

2017년 7월 서울특별시”

1907년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으로 출발했던 이준 열사의 집터에 그의 110주기인 14일, 자그마한 표지석이 자리잡았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 152, 153번지 일대, 지금은 덕성학원 해영회관 좌측 앞쪽이다.

이준 열사는 1907년 4월 22일 이 집에서 떠나 서울역에서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이상설과 합류,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 을사늑약의 부당성 등을 알렸지만 일본측의 방해 등으로 회의 참석을 거부당해 분격을 참지 못한 채 음력 7월 14일 순국했다.

   
▲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집터를 비정하게 된 과정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이준 집터(안국동 152번지, 장송루 자리)와 주요 인접 공간의 위치 관계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1927). [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이 집터를 비정한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날 오후 1시 해영회관 8층에서 열린 제막식에서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당시에 특사의 출발지로서 이준 열사의 집터에 대해서는 기존에 안국동에 있었다는 정도만 알려졌고, 구체적인 지번 위치는 최근까지 미확인 상태에 있었다”며 그간 문헌과 현지조사 과정을 설명한 뒤 “소유주 변천 관계를 대조해 본 결과 이준 열사의 집터는 안국동 152번지와 아울러 153번지도 함께 포함한 구역일 가능성이 높다”고 특정했다.

또한 “이 집은 1905년 2월부터 1907년 헤이그사건 직후까지 이준 열사와 가족이 거주했던 곳”이라고 소개하고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상점’이 있었던 공간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1905년에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에 의해 개설된 부인상점에 대해서는 황성신문 1905년 6월 16일 소개기사가 남아있다”는 것. 실제로 이 집터를 비정하는데 ‘안국동가로변(현 지나요리점 장송루 자리)에는 일정상회라는 한 부인상회가 생기었으니 그것은 정미년에 해아사건으로 내외의 이목을 경동케 하던 고 이준 씨의 부인 이일정 씨의 경영한 바이다’라는 『별건곤』제16.17호(1928년 12월) 기사가 중요한 단서가 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올해 3월 종로구청을 통해 표석 설치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했고, 지난 3월 20일 서울시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의 심의를 거쳐 표석설치 안건이 확정돼 이날 110주기 기념일에 제막식이 진행된 것.

   
▲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인 함세웅 신부가 여는말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70여 명의 참석자들은 이준 열사 110주기에 집터 표석이 제막된데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준 열사 맏딸 무섭의 손자인 조근송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유족대표는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사의를 표하고 “후손이라고 해서 덕은 못 보고 피해만 많이 봤다”며 “연좌제보다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준열사기념사업회를 전횡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일반인들이 이준 열사에 대해 “헤이그에서 할복 자살했다 밖에 모른다”며 월남 이상재, 도산 안창호와 더불어 3대 웅변가였고,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보광학교 설립, 초대 검사보 활동, 개혁당 활동 등이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인 함세웅 신부는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며 “2017년 우리 시대에 새로운 특사, 이준 열사의 삶과 정신을 주변 분들에게 알리는 주역이 돼야겠다”고 당부했다.

조광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이준 열사의 발자취를 찾아 방대한 문헌자료를 조사한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여러분들의 헌신적 노력에 감사드린다. 표석 설치의 장소를 제공해준 학교법인 덕성학원 이사장에게도 고마운 말씀을 전한다”고 인사하고 “일성 이준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우리는 이 표석의 설치를 통해서 더욱 지향하고 우리의 미래의 지표로 삼아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임 덕성학원 이사장 직무대행은 “이준 열사의 집터가 우리 덕성학원 산하건물이라는 데 무한한 영광을 느낀다”면서 “오늘 이준 열사의 순국 110주기 집터 표석이 역사교과서를 입맛대로 바꾸려 시도하고 친일을 미화하고 독재를 찬양하는 반민족적 행위들을 넘어 우리사회의 상식회복 초석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 제막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박원순 시장(오른쪽)이 함세웅 신부와 박상임 덕성학원 이사장 직무대행 등과 함께 덕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런 일은 대한민국 정부가 먼저 나서서 해야 할 일인데 미처 다하지 못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이 한편으로는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부끄럼움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민족문제연소에 고마운 마음이다”고 사례하고 “우리들이 할 일이 있으면 서울시도 함께 이런 일에 나서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박 시장은 특히 “2년 후면 2019년 3.1만세 그리고 상해임시정부, 건국 100주년이 돌아오는데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새로운 정부가 취임했으니까 이런 많은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우리가 정말 독립국가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영종 종로구청장도 “종로구는 많은 역사적 흔적들, 문화적 흔적들,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곳들이 너무 많다”며 “이 시설들이 더 잘 관리되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편하게 보실 수 있도록 잘 안내하고 잘 관리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이 제막식에 앞서 전시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1920-30년대 광목에 그려 실전에서 사용한 태극기(오른쪽), 혈흔이 선명하다. 왼쪽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광목 위에 찍어 100부를 제작한 태극기.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제막식 기념행사를 마친 참가자들은 해영회관 전면 좌측에 마련된 표석 앞에서 제막식을 갖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편, 이날 제막식장에는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이 ‘이준 열사와 그의 동지들’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개최, 1920-30년대 독립군 태극기와 이준 열사 친필 유묵, 이준 열사 부인 이일정 여사의 기고문이 실린 <동아일보> 창간 3호(1920.4.3), ‘105인 사건 검찰 조서’ 원본 2책 등 50여 점의 자료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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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저격수' 김상조 "삼성, 재판부 속이고 있다"

 

[39차 공판] 공정위 휴가내고 증인 출석... '승계작업' 조급함이 화불렀다고 지적

17.07.14 23:41l최종 업데이트 17.07.14 23:41l

 

 

이재용 재판 증인으로 출석하는 김상조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 이재용 재판 증인으로 출석하는 김상조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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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단의혹 특별검사팀의 '삼성 과외선생님'으로 알려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다. 시민운동가에서 장관급 공무원으로 신분이 달라졌지만, 그의 '삼성 저격'은 여전했다. 

재판 초반 김 위원장은 "취임한 지 딱 한 달인데, 공직자로서 증인으로 나오는 데에 많은 부담을 가진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재판이 이 부회장과 삼성, 한국경제의 미래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며 "시민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휴가를 쓰고 관용차 말고 개인 차량을 직접 운전해 개인 자격으로 왔다"고 했다. 

증인 신문이 본격적으로 이뤄지자 그는 거침없었다. 김 위원장은 삼성 뇌물사건의 밑바탕에는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목적이 깔려있다고 강조했다. 또 삼성이 그동안 비자금 사건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던 만큼 대통령이 '부의 세습도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원론만 말해도 이 부회장의 지배력 강화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통령이 우호적이지 않으면 승계 작업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거침없는 김상조 "물산 합병 등은 경영권 승계의 부분"

 

특검은 삼성이 이 부회장의 원활한 경영권 승계를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비선실세'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 승마훈련 지원과 미르 등 재단 출연이란 뇌물을 건넸다고 본다. 또 그 대가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무사히 합병시켰고, 삼성생명의 금융지주회사 전환을 추진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삼성과 변호인단은 이 일들은 승계와 전혀 무관한, 경영활동일 뿐이라고 반박해왔다.

김 위원장은 삼성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문지석 검사 질문에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삼성물산 합병이나 삼성생명의 금융지주회사 전환은 개별회사 차원의 경쟁력 제고라는 의미가 없지 않지만, (경영권 승계의) 기승전결에서 한 부분들을 차지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특히 이 작업들이 "그룹 전체,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미래전략실 결정 아래 이뤄졌다"며 주요 사안들의 이사회 결의가 있기 전 김종중 당시 미래전략실 전략팀장(사장)에게 들었다고 설명했다.

금융지주회사 전환을 국제보험회계기준 변화(IFRS4 2단계 도입)에 맞춰 추진했을 뿐이라는 삼성 주장을 두고는 "잘 모르거나 재판부를 속이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IFRS4 2단계는 금융그룹 통합감독시스템으로 삼성이 이해 못했을 리 없다. 정확히 알고 있다. 왜냐면 이걸 가장 많이 주장한 게 저다. 삼성은 당연히 (강한 비판세력인) 김상조가 뭘 하는지 안다. 모를 리 없다. 그런 삼성이 금융지주회사 전환을 IFRS4 2단계 도입 대비라 하는 것은 재판부를 기만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는 "이 부분이 특검 참고인으로 갔을 때 가장 놀라웠다"고도 했다. "삼성이 정말 너무 무리한 방식으로 일을 추진한 것 아닌가 의구심이 들어서였다"는 것. 

김 위원장은 삼성생명을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하려면 지분과 자산, 부채 등을 정리하는 일에 많은 시간과 재원이 필요하고 유배당 보험계약자 배당문제도 걸린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삼성이 이 방식을 택한 것을 두고는 "국민이나 보험계약자를 무서워하지 않는 건 이해했는데, 감독당국을 아예 바이패스(우회)하려 한 것 같다, 과연 (금융위원회가) 승인해줄 것이라 생각했는지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묵인 없인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삼성은 강력한 정황증거로 꼽히는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수첩에 '경영권 승계'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의 독대 때 '거래'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삼성이 감독당국이나 청와대와 얘기할 때 이 일들을 '경영권 승계 때문에 한다'고 얘기할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는 안종범 전 수석 수첩의 금융지주회사 관련 내용 중 '은산분리'는 '금산분리'의 오기 같다며 "삼성은 금산분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지주회사를 만들어 국제경쟁력을 높이려 한다는 명분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삼성, 박근혜 정부에서 빨리 승계작업하려다..."
 

재판 출석하는 이재용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재판 출석하는 이재용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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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장은 삼성 에버랜드 사건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건 '기승전결'에서 기에 해당할 뿐이라고 했다. 그는 "삼성이 현재 소유구조를 유지하는 한 이 부회장은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CEO가 될 수 없다"며 승과 전에 해당하는 작업이 삼성물산 합병과 삼성생명 지주회사 전환 등이라고 했다. 이어 결은 바이오로직스 등 새로운 사업부문에서 성과를 내 이 부회장의 경영능력을 인정받는 것이라며 "삼성이 이 일을 (우호적인) 박근혜 정부에서 빠르게 진행하려 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삼성의 조급함, 그리고 무리수가 이번 사건의 근본 원인이라는 게 김 위원장 생각이다. 그는 "불가능한 일, 불법적인 것을 만들어주려는 미래전략실 참모들의 판단을 이재용 부회장이 끊지 못했다"고 했다. 또 "다른 그룹은 아예 이렇게 할 생각을 안 하는데 삼성만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모든 가능성을 사전에 틀어막는 방식으로 일한다"며 "삼성이 많은 비판을 받는 이유"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 부회장이 다시 경영 결정을 할 때 제가 말한 방향으로 간다면 오늘의 불행이 궁극적으로 축복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변호인단은 그가 "정확한 사실을 모르면서 추측과 단정을 하고 있다"며 평가절하했다. 이현철 변호사는 "승계작업의 의미를 굉장히 포괄적이고 막연하게 말한다"며 "이건희 회장 와병 후 이뤄진 일이면 정상적인 구조개편 모두 승계작업이라고 한다"고 했다. 또 "특검 수사와 프레임을 맞추려고 평소 견해를 바꿨다"며 "오늘 진술은 증거가치가 없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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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자들: 살아서 쫓겨난 나라로 죽어서 돌아간 남자

 

등록 :2017-07-15 09:44수정 :2017-07-15 10:54

 

 

추방입양인의 죽음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5월21일 아파트 14층에서 투신했다. 그는 한국인 상필로 입양 갔다가 미국인 필립으로 추방됐다. 7월13일 오후 그의 유골함이 54일 만에 납골당 밖으로 나와 미국행 비행기(양부모 전달)를 탔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중 첫 사망자였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상필의 투신 이틀 전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한국인 모원(가명)으로 입양 갔다가 미국인 이언(가명)으로 추방됐다. 7월14일 상필이 미국행 비행기를 탄 다음날 그는 재판을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중 정부가 파악한 첫 사례였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들이 2009년(1명), 2011년(2명), 2012년(1명), 2014년(1명), 2016년(1명) 한국으로 추방됐다. 그들은 모두 한국인으로 태어나 미국인으로 살다가 ‘미국인이 아니다’라며 추방당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6명(정부 파악 인원 전체)이었다. 상필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경로를 좇았다. 한 존재가 버려지고, 양도되고, 추방되고, 거부되는 입양 정책의 모순이 그의 길에서 선연했다. 상필과 모언의 뒤섞이고 엇갈리는 경로를 좇았다. 추방 사실조차 인지되지 못한 ‘무중력 인간’이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추방된 두 사람의 길에서 타들어갔다. 한국과 미국이 탁구 치듯 주고받은 6명의 경로를 한데 모았다. 입양과 추방의 ‘이중 환란’이 밀어붙인 동정 없는 세계가 보였다. 유골함 앞에 세워진 액자에서 상필은 살았을 때 볼 수 없던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 위에서 두 개의 언어가 두 개의 이름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상필!” “SORRY, PHILLIP!”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5월21일 아파트 14층에서 투신했다. 그는 한국인 상필로 입양 갔다가 미국인 필립으로 추방됐다. 7월13일 오후 그의 유골함이 54일 만에 납골당 밖으로 나와 미국행 비행기(양부모 전달)를 탔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중 첫 사망자였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상필의 투신 이틀 전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한국인 모원(가명)으로 입양 갔다가 미국인 이언(가명)으로 추방됐다. 7월14일 상필이 미국행 비행기를 탄 다음날 그는 재판을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중 정부가 파악한 첫 사례였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들이 2009년(1명), 2011년(2명), 2012년(1명), 2014년(1명), 2016년(1명) 한국으로 추방됐다. 그들은 모두 한국인으로 태어나 미국인으로 살다가 ‘미국인이 아니다’라며 추방당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6명(정부 파악 인원 전체)이었다. 상필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경로를 좇았다. 한 존재가 버려지고, 양도되고, 추방되고, 거부되는 입양 정책의 모순이 그의 길에서 선연했다. 상필과 모언의 뒤섞이고 엇갈리는 경로를 좇았다. 추방 사실조차 인지되지 못한 ‘무중력 인간’이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추방된 두 사람의 길에서 타들어갔다. 한국과 미국이 탁구 치듯 주고받은 6명의 경로를 한데 모았다. 입양과 추방의 ‘이중 환란’이 밀어붙인 동정 없는 세계가 보였다. 유골함 앞에 세워진 액자에서 상필은 살았을 때 볼 수 없던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 위에서 두 개의 언어가 두 개의 이름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상필!” “SORRY, PHILLIP!”

 

 

▶ 미국에서 추방된 한 입양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친부모로부터 버려졌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국으로부터 버려졌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첫 양부모로부터 버려졌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국으로부터 버려졌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지로 행한 것은 죽음뿐이었으나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내몬 것은 누구의 의지였는지 그는 죽어가며 물었을지 모릅니다. 그를 추방한 나라로 그의 뼛가루를 돌려보내며 입양인들은 ‘해외입양 종결 선언’을 대통령에게 촉구했습니다.

 

 

2017년 7월13일 상필 혹은 필립이 밤 10시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김 혹은 클레이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그의 삶 대신 죽음을 태웠다. 김상필 혹은 필립 클레이는 살아서 쫓겨난 나라로 6년 만에 죽어서 귀국했다. 두 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어느 이름으로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모여 그를 배웅했다. 모원 혹은 이언은 상필 혹은 필립이 날아오를 때 구치소에 있었다. 장 혹은 테일러는 김 혹은 클레이가 투신하기 이틀 전 고시원에서 체포됐다. 장모원(가명) 혹은 이언 테일러(가명)의 길이 김상필 혹은 필립 클레이의 길과 겹쳐졌을 때 장은 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 뒤를 ‘사건’이 따랐고 사건 뒤엔 길도 나뉘었다. 두 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어느 이름으로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김상필 혹은 장모원의 길을 걸어오고 걸어갔다.

 

지난 5월24일 김상필씨(필립 클레이)의 장례식에서 동료 입양인들이 운구를 준비하고 있다. 중앙입양원
지난 5월24일 김상필씨(필립 클레이)의 장례식에서 동료 입양인들이 운구를 준비하고 있다. 중앙입양원
‘에스코트’로 인계된 상필

 

1974년 12월 한국인 김상필이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기록되지 않았다. 상필보다 3개월 먼저 장모원이 태어났다. 그의 고향도 기록되지 않았다. 상필의 출생 두 달 앞서 최남철(가명·1973년생)이 미국으로 입양돼 노먼 모스(가명)가 됐다.

 

1978년 11월 천규호(가명·1970년생)가 미국으로 입양돼 앨빈 카터(가명)가 됐다.

 

1979년 3월 신성혁(1975년생)이 미국으로 입양돼 양부모에게 5년간 학대당한 뒤 파양(1984년)됐다.

 

1981년 12월 상필은 생후 7년을 꽉 채운 날 버려진 아이로 발견됐다. 태어난 날짜(12월30일)와 발견된 날짜(12월30일)가 우연히 일치했을 수도 있었고, 발견된 날짜에 맞춰 태어난 날짜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었다. 어디서 버려졌고 얼마나 오래 버려졌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상필은 서울 남대문경찰서를 거쳐 ㅁ수녀회 보육원으로 인계됐다. 모원은 출생 직후 인천의 거리에서 발견됐다. 추정된 날짜가 그의 생일로 기록됐다. 누가 그를 모원으로 부르기 시작했는진 알 수 없었다.

 

1982년 3월 상필은 ㅁ수녀회 보육원에서 ㅊ의집(고아원·서울에서 경기 성남으로 이전해 폐원)으로 보내졌다. 인천의 고아원에 맡겨진 모원은 1976년 4월 대한사회복지회로 보내졌다.

 

1982년 6월 ㅊ의집 의뢰를 받아 홀트아동복지회가 상필의 해외입양 수속을 밟았다. 상필은 추정되는 아이였다. 상필이 버림받는 과정은 기록에서도 흐릿했다. 친부의 폭력을 피해 아들을 데리고 도망한 친모가 상필을 포기했다는 사실만 홀트는 기록(ㅊ의집 관계자 면담)할 수 있었다. 상필의 앞날은 기록된 시간보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이 규정했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을 기억해줄 사람이 상필에겐 없었다. 모원도 추정되는 아이였다. 그의 출생과 유기는 상필만큼의 윤곽조차 갖지 못했다.

 

1983년 10월 상필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로 입양됐다. 만 9살이 차가고 있었다. 만 6살 이상은 ‘연장아’라고 불렸다. 생을 얻은 지 10년도 안 된 아이들이 입양의 세계에선 나이가 너무 많았다. ‘수요’가 적은 연장아 상필에겐 1년4개월 만에 희망자가 나타났다. 상필을 낳은 나라는 버려진 아이를 키워낼 의무를 민간과 국경 밖으로 떠넘기며 책임을 내려놓았다. 상필을 보내며 ‘해외입양 1위의 아동수출국’이란 지위와 입양 수수료를 외화로 얻었다. 한 해 1천명 이상(916명이었던 2011년에야 1천명 이하로 감소)이 국외로 입양되던 시기였다. 한국에 와서 만나보지 않고도 양부모는 아이를 ‘고르고 배달받을 수 있던’ 때였다. 한국인 상필은 ‘에스코트’(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유학생이나 기업체 직원이 아이를 데려가 공항에서 양부모에게 넘겨주는 일종의 자원봉사)로 양부모에게 인계되며 미국인 필립이 됐다. 모원은 상필보다 6년 빨리 이언이 됐다. 1977년(만 2살) 2월17일 미국 위스콘신주로 에스코트됐다. 비행기 안에서 자다 깬 순간이 그의 인생 기억의 첫 장면으로 남았다.

 

1984년 7월 필립이 미국 부모로부터도 버려졌다. 기억이 형성된 ‘연장아 필립’은 첫 양부모를 만났을 때부터 아팠다. 버려지고 입양되고 이국의 나라로 보내질 때마다 충격과 당혹이 차곡차곡 쌓여 그의 마음을 갉았다. 양부모는 상필을 오래 인내하지 않았다. 입양 9개월 만에 필립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재입양 가정도 필라델피아에 있었다. 그 집엔 6명(친자녀 4명+필리핀 입양아 1명+위탁아 1명)의 아이가 있었다. 부부는 필립을 인내해줬다. 두 번째 양부를 따라 필립의 성은 클레이가 됐다. 이언의 양부는 의사였고 양모는 레스토랑 체인을 운영했다. 친자녀 셋을 두고 있었다. 이언도 양부의 성을 따라 테일러가 됐으나 테일러로서 좋은 기억은 없었다고 훗날 말했다. 4자녀 이상에게 주어지는 복지혜택과 세금감면을 위해 자신이 입양됐다고 이언은 생각했다. 버려지고 입양된 기억은 없었지만 버려지고 입양된 자로서의 삶이 모원의 마음을 갉았다. 8살(1982년)이 됐을 때 양부모는 이언에게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치료제를 투약했다. 12살(1986년) 땐 이언을 위스콘신주의 기숙 군사학교에 입학시켰다. 사격과 군사훈련을 하는 학교가 이언에겐 교도소와도 같았다. 이언이 2년 만에 퇴학당하자 양부모는 다른 주의 군사학교로 멀리 보냈다.

 

1988년 8월 박진수(가명·1981년생)가 미국으로 입양돼 마이클 로스(가명)가 됐다. 88올림픽 개막 20일 전이었다. 매년 ‘해외입양 금메달’을 목에 거는 나라는 올림픽 개최 자격이 없다며 국제사회가 비난했다.

 

1989년 4월 신성혁이 미국 오리건주로 재입양돼 아담 크랩서가 됐다. 두 번째 양부모로부터도 죽음의 경계까지 가는 학대(양부모 체포)를 당했다.

 

1993년 3월 INS(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Services·이민귀화국) file number: A23 509 133 TC/RCS. 양부모가 필립의 미국적 취득을 시도한 기록이 입양기관의 문서에 남았다. 병원과 소년원을 오가는 동안 필립은 시민권 심사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어떤 양부모들은 입양 절차를 시민권 취득으로 잘못 알았다. 어떤 양부모들은 절차와 비용 문제를 이유로 책임을 간과했다. 미국인이 됐다고 믿었으나 ‘공식 미국인’이 아니란 사실을 모른 채 살아온 입양인들이 많았다. 여권을 만들거나 투표를 하거나 범죄기록 조회 과정에서 ‘미국인 아님’이 확인된 입양인이 속출했다. 이언의 양부모는 이언의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지 않았다. 이언이 18살(1992년) 때 양부모는 ‘가족의 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이언은 테일러의 집을 나왔지만 테일러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경기도 고양시 벽제중앙추모공원에 안치된 김상필(필립 클레이)씨의 유골을 납골당 관계자가 반출하고 있다. 이문영 기자
경기도 고양시 벽제중앙추모공원에 안치된 김상필(필립 클레이)씨의 유골을 납골당 관계자가 반출하고 있다. 이문영 기자
‘내 나라’에서 거듭 쫓겨나는 사람들

 

2001년 필립은 아동시민권법(Child Citizenship Act)의 ‘예외인간’이 됐다. 1940년대 이후 전세계에서 35만여명의 아이들이 미국으로 입양됐다. 3분의 1인 11만1100여명이 한국에서 갔다. 시민권을 얻지 못한 입양인들은 법적 불이익과 ‘비국민’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됐다. 입양과 동시에 시민권자가 되도록 하는 법이 이해 미국에서 시행됐다. 법은 만 18살(1983년 출생) 미만만 적용 대상으로 했다. 성인이 된 입양인들은 심사를 받고 자력으로 시민권자가 되라며 제외했다. 필립은 만 26살이었다. 원하지 않았어도 주어졌던 ‘미국인 됨’이 원해도 따기 힘든 자격증이 됐다. 상필의 정신질환과 약물중독도 이 무렵부터 악화됐다. 이언도 예외인간이 됐다. 양부모의 집을 떠나 한인들이 많이 산다는 도시를 찾아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는 5년 동안 노숙인으로 살았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에게 안정된 일은 주어지지 않았다. 길에서의 시간은 자신을 잊어야 버틸 수 있었다. 이언은 거리에서 약을 접했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2009년 11월 앨빈 카터가 입양 31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다시 천규호가 됐다. 사장의 지시에 따라 트럭 배송을 한 그가 자신도 모르게 마약운반범이 돼 있었다.

 

2011년 3월 필립이 코카인 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0년 사이 우울증이 심해졌다. 폭행, 절도, 약물복용 등이 잦아졌고 정신병원 입원과 수감 횟수도 늘어났다. 최소 20여차례 체포됐고, 18차례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9차례 수감됐다고 필라델피아 법정은 기록(7월4일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보도)했다. 교도소 수감 중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이 미국 당국에 확인했다. 30년 가까이 살아온 땅에서 필립은 그날부터 ‘불법체류자’가 됐다. 이언은 2004년부터 아시아인들이 많은 하와이로 건너가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흔들려온 몸과 마음을 고정해줄 못은 하와이에도 없었다. 약물복용으로 다시 체포됐다.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이 하와이 경찰에 확인됐다. 34년 동안 ‘내 나라’로 알고 살아온 땅에서 이언은 법을 어겨 체류하는 ‘남의 나라 사람’이 돼버렸다.

 

2011년 7월 한국이 입양 보낸 필립을 미국이 28년 만에 추방했다. 한국이 포기해 필립이 된 그에게 미국은 ‘다시 상필이 되라’고 통보했다. 그의 삶은 버려짐의 연속이었다. 친부모로부터 버려졌고, 한국으로부터 버려졌으며, 첫 양부모로부터 버려졌고, 미국으로부터 버려졌다. 2001년 9·11 이후 미국은 추방에 온기를 두지 않았다. 구금 상태에서 비시민권자로 확인되면 추방과 기약 없는 구금생활 중 선택해야 했다. 미국 이민국 직원들은 상필을 인천공항에 내려둔 채 돌아갔다. 여비도 제공하지 않았고 도움을 청할 연락처도 주지 않았다. 이언은 필립보다 3개월 먼저 추방(4월4일)됐다. 이언 테일러가 입양 34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다시 장모원이 됐다. 정체성은 누가 골라주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상필과 모원은 스스로 고민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한국과 미국이 그들의 정체를 주고받았고, 주고받는 대로 따를 것을 강요당했다. 버려진 입양인들을 미국이 추방하는 절차도 버리는 것이었다. ‘이태원을 찾아가면 한국어를 몰라도 살 수 있고 찜질방에서 자면 방값을 줄일 수 있다’는 정보가 이민국이 모원에게 베푼 호의의 전부였다.

 

2012년 6월 상필이 강원도 횡성의 ㅅ선교회로 보내졌다. 그는 서울 영등포의 공원에서 노숙 상태로 교회 목사에게 발견됐다. 미국 땅에 처음 내렸을 때 이상의 충격과 공포와 분노가 한국으로 쫓겨온 그를 휩쓸었다. 상필로 돌아왔으나 그는 필립이었다. 상필일 때의 언어를 잃었고 상필일 때의 기억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에게 한국은 물기 한 방울 얻을 길 없는 사막 한복판일 뿐이었다. ㅅ선교회는 추방 한인들에게 쉼터를 제공해왔다. 그들을 돕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부터 소개받은 추방인들이 찾아왔다. 2000년대 중반까진 입국 공항의 경찰 외사계가 선교회로 보내기도 했다. 1990년대말부터 거쳐 간 추방인들 중 4~5명의 입양인이 있었다고 선교회 대표는 전했다. 입양을 민간에 맡겨온 국가는 추방입양인들의 돌봄도 오랜 기간 민간에 넘겼다. 모원은 이민국 직원이 알려준 대로 이태원을 찾아가 찜질방 생활을 했다. 갖고 있던 돈이 떨어졌을 때 모원의 노숙은 다시 시작됐다. 37살의 모원이 출생 직후 버려진 상태 그대로 되돌아갔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갔으나 되돌리고 싶은 삶은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모원은 2011년 8월 이태원 거리에서 한 해외입양인에게 발견됐다. 그는 찢어진 바지를 입고 짝이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과 나이, 노숙 경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 여름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 노숙인 상필과 모원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몸을 스쳤을지도 모른다. 내리지도 않은 뿌리를 두 번이나 통째로 뽑힌 그들에겐 땅을 더듬을 실뿌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7월13일 저녁 인천공항 지하 식당에서 오명석(존 컴프턴. 해외입양인연대 자문위원)씨가 김상필(필립 클레이)씨의 유골을 들고 출국(미국 양부모에게 전달)하기에 앞서 입양인들과 마지막 추도식을 준비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7월13일 저녁 인천공항 지하 식당에서 오명석(존 컴프턴. 해외입양인연대 자문위원)씨가 김상필(필립 클레이)씨의 유골을 들고 출국(미국 양부모에게 전달)하기에 앞서 입양인들과 마지막 추도식을 준비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파악되지 않는 ‘무중력 인간’

 

2012년 7월 상필이 경북 청송의 ㅈ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ㅅ선교회에서도 그는 추방의 고통을 호소했다.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땐 거리를 나체로 헤매기도 했다. 선교회는 “건강이 너무 안 좋아 협력 관계에 있는 ㅈ병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어불통으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던 상필이 두 차례 병원 탈출을 시도했다. 모원을 발견해 돕던 사람들(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 대표, 김도현 뿌리의집 원장)은 2011년 가을부터 보건복지부와 중앙입양정보원(중앙입양원의 전신)을 찾아다니며 사태 파악과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모원은 한국 정부가 처음 접한 추방입양인(시민권 취득 여부 조사 계기)이었다. 모원의 존재가 확인된 뒤에도 비영리단체와 개별 의료인들의 도움이 있었을 뿐 행정지원은 준비되지 않았다. 2016년 6월 이태원에서 노숙하던 모원은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라’는 노인을 때려 경찰에 체포됐다. 며칠 뒤엔 진료받던 정신과의원에서 소란을 피우다 ㅇ시립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됐다.

 

2012년 8월 입양 38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된 최남철이 은행강도로 체포(2017년 2월 가석방)됐다. 살아남으려고 그는 장난감총을 들었다. 그도 상필이 다녀가기 전 ㅅ선교회에 머물렀다.

 

2012년 9월 상필이 홀트일산복지타운으로 거주를 옮겼다. 중앙입양정보원에서 전환한 중앙입양원(입양특례법에 따라 설립)이 상필의 입양기관이었던 홀트에 요청했다. 홀트는 상필의 추방 사실을 이때 인지했다. 홀트 이사장이 미국 양부모에게 상필의 옷과 진료기록 등을 받아와 건넸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모원이 폭행 건으로 경찰서에 신고됐다. 정부가 추방 사실을 파악했지만 여전히 중력은 모원에게 미치지 않았다. 상필도 모원도 ‘무중력 인간’이었다. 최남철도 천규호(추방 뒤 정부 파악까지 5년)도 잡아당겨줄 끈 하나 없이 한국에 던져졌다. ‘연고 제로’의 대기로 쏘아올려진 그들은 삶을 지탱해줄 공적 자장에 들어가지 못한 채 둥둥 떠다녔다.

 

2012년 12월 거친 행동으로 마찰을 빚은 상필이 ㅁ병원(경기 고양)에 입원했다. 추방은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국가와 국가가 벌이는 외교 사안이었다. 미국은 입양인들을 쫓아내면서 그 사실을 한국에 통보하지 않았고(외교부 재외동포과 “현재 추방 통보는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구금 상태의 입양인이 한국에 영사조력을 신청해야 사실 확인 가능”), 통보받지 못한 한국은 입양인의 추방과 입국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현재 한국 정부가 인지(복지부 입양정책과 “추방 뒤 국내 입양인 사회를 통해 알음알음으로 알 뿐 정확한 수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하고 있는 추방입양인은 6명(에이케이 샐링 해외입양인연대 사무총장 “내가 아는 경우만 최소 10명”)이다. 정부가 미리 알고 있었던 사례는 신성혁(2016년 11월 추방)뿐이었다. 방송(문화방송 <휴먼다큐 사랑>)으로 추방이 예고됐던 그는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픽업(중앙입양원)될 수 있었다. 파악되지 않는 시간 동안 파악되지 않는 사람들은 거리잠을 자고, 정신병원을 떠돌고, 장난감총을 구했다.

 

2013년 10월 상필이 중앙입양원 긴급구호시설 ㄹ의집(위탁운영. 현재 폐쇄)에 입소했다. 추방 2년 만에 그는 한국 정부의 긴급구호대상이 됐다. 상필은 목소리가 좋았다. 그는 환청을 들었고 그 좋은 목소리로 환청 속 누군가와 대화했다. 세상의 시끄러움을 견딜 수 없을 땐 귓속에 씹던 껌을 끼워 넣었다. 모원은 상필 입소 한 달 전 ㄹ의집에 와 있었다. 서울역에서 벌거벗고 노숙하던 모원은 ㅇ시립정신병원에 두 번째 강제입원(8월)된 뒤 퇴원했다. 석 달 차이(기록상)로 태어나 석 달 차이로 추방된 상필과 모원이 한 달 차이로 입소해 ㄹ의집에서 만났다. 방 두 개짜리 집에 네 명이 살았다. 상필과 모원이 같은 방을 썼다. 모원이 상필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사진 속에서 모원의 미소와 상필의 무표정이 대비됐다.

 

2013년 11월 상필과 모원 사이에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마음을 앓는 두 사람을 한방에서 지내도록 한 것이 잘못이었다. 모원이 두 차례 입원했던 ㅇ시립정신병원에 상필이 강제입원(2014년 2월 퇴원)됐다.

 

2014년 4월 마이클 로스가 입양 26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다시 박진수가 됐다. 금지약물 소지로 수감 중 ‘시민권 없음’이 확인됐다.

 

2014년 11월 상필(5월 ㄹ의집 재입소)과 모원 사이에 두 번째 폭행 사건이 있었다. 모원이 자신의 물건을 훔친다고 상필이 오해했다. 상필의 폭행으로 모원의 두개골이 함몰됐다. 모원은 뇌수술을 받았고 상필은 교도소에 수감(2년)됐다.

 

2015년 7월 모원이 이태원에서 폭행사건으로 구치소에 수감(징역 8개월)됐다. 뇌수술을 받은 뒤 그는 ㄹ의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공포의 기억이 깃든 방에서 사는 게 무섭다고 했다. 고시원에서 자고 이태원 식당에서 일하다 폭행에 연루됐다. 2016년 3월 출소한 그는 법무부 보호복지공단(옛 갱생보호공단) 서울지부에 입소됐다.

 

2016년 11월 아담 크랩서가 입양 37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다시 신성혁이 됐다. 두고 나온 물건을 찾으러 양부모 집에 들어간 그는 주거침입과 절도죄 등으로 전과자가 됐다. 상필, 모원, 규호, 남철, 진수, 성혁 6명은 모두 1983년 이전 출생자였다. 1950년대부터 2016년까지 한국이 전세계로 보낸 해외입양인은 16만6512명(복지부가 성가정입양원·대한사회복지회·동방사회복지회·홀트의 입양기록을 토대로 파악)이었다. 복지부가 밝힌 ‘미국 시민권 취득 미확인 입양인’은 1만9429명이다. 한국펄벅재단과 수백 개의 고아원이 직접 입양시킨 사람들을 놓친 수치다. 태미 고 로빈슨 한양대 교수(입양과 시민권 문제 연구)는 전체 입양인 수를 20여만명으로 추정했다. 시민권 미확인자들 중 6%의 ‘상필들’(시민권 취득 최종 거부)이 있을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허상’이 만든 비극

 

2017년 3월 교도소 출소(2016년 12월) 뒤 머물던 보호복지공단(경기북부지부)에서 상필이 ‘위험행동’으로 퇴소 처리됐다. 두 달 전 상필은 새벽에 휘발유를 마시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이유를 묻는 중앙입양원 상담팀장에게 그가 말했다. “아마 죽고 싶었던 것 같다.”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의사소통이 힘들고, 많이 외롭다고 했다. 상필은 미국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최소한 영어권 나라로라도 갈 수 있길 바랐다. 그 바람을 준비하고 실행하기에 상필은 너무 지쳐 있었다. 은평구 정신요양시설에서 입소상담을 받았으나 생계급여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입소를 거부했다. 상필은 교도소 수감으로 끊긴 일반수급(생계급여+의료급여)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보호복지공단에서 퇴소(1월)된 모원은 서대문구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새벽에 고함을 지르는 그를 경찰이 출동해 ㅇ시립정신병원에 강제입원(3번째)시켰다.

 

2017년 4월 상필은 홀트일산복지타운(고양시) 건너편 원룸에서 지냈다. 한 달 전 정신요양시설 입소를 거부한 그가 택시를 타고 홀트로 찾아왔다. 원룸(홀트가 방값·생계비 지원)에서 살며 근처 지역도서관을 찾아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모원은 정신병원을 나와 고시원(서대문구청이 사례관리)에 방을 잡았다.

 

5월19일 모원이 고시원에서 체포됐다. 다툼을 벌이던 고시원 총무가 신고했다. 경찰이 출동해 신원을 조회했을 때 모원의 수배 사실(지난해 경찰 출석 요구 불응)이 조회됐다. 모원은 생활의지가 강했다. 보호복지공단에 있을 때도 생선포장을 하며 돈을 벌었다. 모원은 본래부터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어소통이 안 될수록 자극을 받았고 자극을 받을수록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모원의 거듭된 수감은 고시원 생활과 무관치 않았다. “고시원은 안 된다고 관계기관에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고시원은 평생 한국에서 산 사람도 버틸 수 없는 최저 생활공간이다. 이 땅에서 살 권리를 보장하지 못한 국가의 실패를 반성하는 차원에서라도 원룸 수준 이하는 안 된다. 풍부한 언어 서비스와 의료지원, 일대일 사례관리가 주거와 함께 제공되는 센터가 시급하다.”(김도현) 모원은 구치소에 수감됐다.

 

5월20일 상필이 원하던 일반수급을 회복했다.

 

5월21일 밤 11시45분. 상필은 고양시의 이름 고운 아파트에 있었다. 원룸에서 10여㎞(차량으로 30분 거리) 떨어진 장소였다. 원룸에서 아파트로 가는 길마다 ‘도시의 평소’가 즐비했다. 물오른 가로수가 초록으로 생동했고,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 신호등 앞에서 시계를 봤다. 그에겐 없는 가족들이 도로 양쪽 아파트마다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상필이 결코 진입할 수 없는 공고한 일상이 도처에 충만했다. 그가 왜 그 아파트로 들어섰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14층 복도 시시티브이(CCTV)에 찍힌 상필이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원룸에선 휘발유로 추정되는 액체가 페트병에 담겨 발견됐다. 상필은 추방 뒤 사망(폐파열, 팔다리 및 골반 골절, 흉부손상)한 첫 입양인이었다. 유서는 없었다.

 

5월24일 상필의 장례가 치러졌다. 두 개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어느 이름으로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성혁도 상필의 관을 들었다. 그는 “(상필의 영정에서) 나의 내일을 본다”고 했다. 한국 입양정책의 개선은 입양인들이 스스로의 눈물을 닦는 과정이었다. 2011년 그들의 노력으로 입양특례법이 개정(법원의 허가해야 입양 인정 등)됐으나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상필은 끝나지 않는 해외입양의 역사와 부재하는 추방통제 시스템(복지부 “인구아동정책관이 3월말 미 상·하원 의원 보좌관 면담 때 1983년 이전 출생자의 시민권 보장 법안 발의 요청”)의 틈에서 죽었다. 미국 내 입양인들이 로스앤젤레스 한국 총영사관 앞에서 필립의 죽음을 애도하며 항의(5월30일)했다.

 

6월23일 모원에게 검찰이 징역 8개월(폭행)을 구형했다.

 

7월11일 입양인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문재인 대통령에게 ‘해외입양 산업’의 종결을 촉구했다. 입양 활성화 대신 미혼모 등 원가정 보호를 우선하고, 시민권 취득 실패를 해결할 입양 사후 시스템을 시행하며, 추방입양인들을 위한 주거·의료·취업 등 복지 서비스 제공을 요구했다. 88올림픽 때의 수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평창동계올림픽(2018년 2월9일) 전 종결 선언’을 호소했다. 시몬 은미(뿌리의집 대외협력팀장)는 물었다. “쫓겨 되돌아오는 입양인들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가. 입양이 우리에게 더 좋은 삶을 제공할 것이란 믿음은 허상이다.”

 

7월13일 오후 3시. 벽제중앙추모공원에 안치된 상필의 유골을 입양인 오명석(미국명 존 컴프턴. 해외입양인연대 자문위원)이 반출받았다. 오후 6시. 입양인들이 인천공항에 모여 상필을 보내는 마지막 추모 모임을 열었다. 밤 10시. 오명석이 상필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날아올랐다. 상필의 유골은 7월19일 필라델피아의 양부모에게 전해질 것이었다. 사망 직후 유골 인수 의사를 묻는 오명석의 이메일에 양부모는 “고맙다”고 답했다. 상필의 미국 재입국은 죽었으므로 가능했다. 그는 자신을 추방한 나라로 뼛가루가 돼서야 돌아갈 수 있었다. 모원도 날고 싶어 했다. 그는 영화 <스타워즈>의 제다이가 되길 꿈꿨다. 자신을 떠넘겨온 두 나라의 하늘을 자유롭게 걸어다니고(skywalker)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동댕이쳐져온 그의 시간을 ‘포스’가 붙들어주길 소망했는지도.

 

7월14일 모원의 재판이 속행했다. 선고가 예정돼 있던 7월5일 재판에서 새로운 사건이 병합됐다.

 

*해외입양인연대(02-325-6585) 후원: 국민은행 375301-04-000710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02935.html?_fr=mt1#csidxd6ef9012627e37aaa6167c3ddc172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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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가 매일 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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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 2017.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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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3.jpg» 종교 달라도 이렇게 친밀할 수가. 파키스탄 국경지역 누브라 방문한 달라이라마가 환영 나온 무슬림들 중 한 할아버지의 염소수염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치고 있다. 

 

이곳 다람쌀라는 심한 우기로 연일 비와 찐한 운무속 입니다.

인도에서 유일하게 우기가 없는 지역아니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 라닥 지방 입니다.

달라이라마 존자 노구에 건강이며 여러가지 이유로 우기철에는그쪽 방문과 당신 정진의 시간으로 보내시지요.

누브라 지방은 바로 파키스탄 국경과 맞닿은 지역이라서 아주 민감한 곳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쪽에 매년 들어가는데 미리 특별 허가서(딱 주일)를 얻고가는 도중에 가며오며 대여섯번 검문검색을 당하는 곳이기도 합니다제가 애정을 가지고 가는 곰빠()이 세군데 기가막힌 자리에 있답니다또 히말라야 주 능선을 넘는데 고개는 만년설로 세계 최고 높은 차량 고개로칸둥라(5608m)를 넘어야 합니다가끔은 한여름에도 폭설로 며칠간 두절되기도 하지요인도 군인들이 늘 비상 대기 한답니다.

 

-달라이1.jpg» 달라이라마가 군용 헬기로 이동하는 중

 

 

 

-달라이2.jpg» 험한 고개 넘어 법문을 듣고자 많은 주민 차량이 고개를 넘어간다. 

 

 

-달라이4.jpg» 파키스탄 국경이라서 무슬림 신도들이 많은데 그들도 달라이라마에 대해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환영을 나온다.

 

 

-달라이5.jpg» 절 밑에 마을 학교 아이들이 피리소리에 맞춰 환영 노래를 부른다.

 

 

-달라이6.jpg» 달라이라마를 보는 얼굴들에 모두가 감사와 희열, 감동이 베어있다.

 

 -달라이7.jpg

 

이 세상에서 많은 유명인사가 있지요만 달라이라마는 사람을 위한 성직자로 우리에게 늘 빛과 희망이다.

당신께서 많은 나라를 다니시며 불교 말씀 보다는 미래의 인류를 위한 두가지 말씀 ㅡ 인간성의 향상과 종교간의 화합을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다.

달라이라마가 늘 하는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행복은 부처가 줄 수 있는 기성품이 아니다행복은 당신의 행위로 부터 나온다.

 

세 가지 R을 따라야 한다.

자신에 대한 존중타인에 대한 존중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Follow the three Rs : Respect for self, Respect for other, Responsibility for all your actions.

 

성공여부는 성공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했는가라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늘 반복해서 말씀드리는거지요만 또 다시 한번!

 

매일 매일깨어날 때 생각하라,

오늘은 내가 살아있어서 행운이고,

나는 소중한 인생을 가지고 있고,

나는 그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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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한국정부, 고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통계조차 없다

 
[심층 취재- 한국 해외입양 65년] 1. 추방 입양인 - ①
2017.07.14 00:06:05
 

 

 

 

이 기사는 이경은 국제인권법 전문가, 제인 정 트랜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 필립 이야기

필립 클레이, 한국 이름 김상필. 2017년 5월 21일, 그는 경기도 일산의 한 아파트 14층에서 몸을 던져 42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죽었지만, 생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그는 여덟살 때 미국으로 입양돼, 29년을 미국에서 살았다. 그러다 2011년 한국으로 추방됐다. 필립의 양부모가 그의 시민권 획득 절차를 밟지 않아, 미국 시민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 입양인 필립은 왜 고국 아파트 14층에서 뛰어내렸나?)

생전에 필립과 교류했던 존 컴프턴(해외입양인연대 자문위원) 씨는 "한국에 입국할 당시 그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고, 아는 사람도 한 명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미국 정부는 '범죄를 저지른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필립을 '출생국'으로 추방했다지만, 그에게 한국은 타국이나 다름없었다.  

필립은 한국에서 5년 동안 매우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필립은 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기도 했고, 노숙자 보호시설, 교도소 등을 전전했다.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입양원에서 그의 한국 생활을 도왔다지만, 턱없이 부족한 지원이었다. 그는 결국 '자살'로 미국과 한국에서의 힘겨웠던 삶을 내려놓았다. 컴프턴 씨는 "필립을 입양 보낸 입양기관과 한국 정부는 그에게 적절한 관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필립의 비극은 적절한 행정적 도움과 교육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생전에 컴프턴 씨 등 지인들에게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여러 번 밝혔던 필립은 죽어서야 미국으로 돌아간다. 입양인들의 노력으로 양부모에게 연락이 닿아 유골을 인도받겠다는 의사가 확인됐다. 홀트는 '개인 정보'라는 이유로 필립의 양부모의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는 컴프턴 씨의 요구마저 거부했다. 필립의 유해는 7월 13일 한국을 떠나 19일 양부모에게 인도된다고 컴프턴 씨는 밝혔다.  

 

 

▲ 필립 클레이 씨의 유골이 13일 인천공항을 떠나 19일 미국에 있는 양부모에게 인도된다. 사진은 13일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가진 필립을 위한 작은 추도식 장면. ⓒ프레시안(전홍기혜)



# 팀 이야기 

팀, 한국 이름 모정보.('고아호적'에 기재된 이름으로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팀은 3살 때인 1977년 미국으로 입양됐으나, 34년 만인 2011년 서울 이태원에서 노숙자로 발견됐다. (관련기사 : 미국 입양된 아이가 34년만에 이태원 노숙자로 발견된 사연)

노숙자로 발견됐을 당시 팀은 신분증도 없었고, 본인의 이름, 나이 등에 대해서도 정확히 이야기하지 못했으며,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당한 의미도 제대로 몰라 스스로를 '세계시민'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가 가진 돈은 1달러도 안 됐고, 찢어진 바지에 짝짝이 신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팀은 어릴 때부터 정신분열증 증상이 있었고, 아마 이런 이유로 양부모와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숙자로 발견된 팀을 돕기 위해 트랙에서 양부모들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팀이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했다"며 더 이상 연락을 취하지 말아달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팀은 '뿌리의 집'(해외 입양인 지원을 위한 비영리 민간단체)의 도움으로 겨우 주민등록을 하고 주민등록증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과정을 도와준 제인 정 트랜카 씨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추방 입양인들이 한국의 관공서를 통해 신분증을 만들고, 일시 거주 지원 등 입양인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에 신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뿌리의 집 김도현 목사는 보건복지부와 팀을 입양 보낸 입양기관인 대한사회복지회에 팀의 장기적인 치료와 보호를 책임지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대한사회복지회 측은 팀에게 '모텔비 200만 원'을 지원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김 목사는 밝혔다. 결국 팀은 서울시립 은평병원에 강제 입원조치 됐다. (관련기사 : 34년만에 노숙자로 발견된 팀, 그 후 이야기) 정신분열 증상이 종종 폭행으로 표출되는 모습을 보인 팀은 이후 정신병원과 교도소를 왔다갔다하면서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 격리된 상태로 지내고 있다. 

# 아담 이야기 

아담 크랩서, 한국 이름 신성혁. 그는 3살 때인 1979년 두 살 위인 누나와 함께 미국으로 입양됐다.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뒤, 혼자서는 도저히 남매를 키울 수가 없어 보육원의 권유로 입양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으로 가면 잘 먹고 교육도 잘 받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첫 번째 양부모는 아담을 가죽벨트로 때리고 지하실에 가두는 등 학대를 했다. 5년 뒤 아담과 누나는 버림을 받았고, 누나가 다른 가정으로 입양이 되면서 남매는 헤어져야 했다. 

2년 정도 보호시설을 전전하다가 아담은 크랩서 부부에게 다시 입양이 됐다. 크랩서 부부의 집에는 3명의 친자식, 5명의 입양아동 이외에도 위탁아동 등 늘 10여 명의 아이들이 함께 지냈고, 때문에 지역 언론 등에는 '모범적인 입양 가정'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크랩서 부부는 입양아와 위탁아동들을 상대로 구타, 폭행 뿐 아니라 성적학대까지 일삼았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악행은 1999년 위탁아동 중 1명이 친부모에게 알리면서 외부로 드러났다. 이들은 강간 3건, 강간 미수 1건, 학대 14건, 폭행 2건 등으로 기소됐으나 재판 기간 동안인 3개월간 투옥됐다가 5000달러의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아담은 또 다시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재판에서 '학대를 받지 않았다'고 거짓 증언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재판이 끝난 뒤 크랩서 씨에 의해 길거리에 버려졌다. 2번의 입양과 2번의 버림, 16살에 거리의 노숙자로 전락한 아담은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이처럼 학대만 일삼던 양부모들이 아담의 시민권 문제에 신경을 써줬을 리가 없었다. 

아담은 2015년 가정폭력 등 범죄로 이민국 구치소에 수감됐고, 2016년 10월 24일 이민국 재판에서 추방 결정이 내려졌다. 아담의 이야기는 MBC 다큐멘터리 <사랑> 등 국내 언론 뿐 아니라 <뉴욕타임스>에도 보도되며 추방 입양인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미국에 자녀가 3명이 있는 아담은 추방 이후 미국에 있는 가족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 아담의 사연을 다룬 다큐멘타리 ⓒMBC 화면 캡처



입양 보내면 끝? 아니다 

'입양'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다. 특히 해외입양은 아동이 태어난 가정과 문화, 국가라는 개인 정체성 형성의 기본 조건 자체가 바뀌는 일이다. 그러나 아동은 이 결정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못한다. 태어난 가정에서 떨어져 나와, 출생 국가가 아닌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서, 생면부지의 부부를 새로운 부모로 맞아 그 가족의 일원이 되기까지 입양 아동의 의사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결정을 하기에 불가능한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모든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맡겨진다. 

입양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다. 입양 아동에겐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 과제로 주어진다.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진 가족 구성원들, 전형화 시켜본다면 백인 부모 (형제들) 속에서 동양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해야 하는 일이다. 2002년 스웨덴의 국제입양아동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입양인은 현지인보다 자살률이 3.7배 높고, 약물 중독은 3.2배, 범죄 경력(투옥)은 1.5배 높았다. 또 결혼하는 비율도 현지인 56퍼센트의 절반인 29퍼센트, 취업률은 현지인 77퍼센트 대비 60퍼센트다. 취업을 하더라도 입양인의 50퍼센트는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수입 범주에 속했다(연구 대상 아동 1만1320명 중 8700명이 아시아 출신이었고 대부분이 한국 출신이었다).

 


하지만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낸 한국 사회는 입양을 보낸 것으로 '끝'이라고 여겨왔다. (한국은 1953년 해외입양을 시작해 약 20만 명의 아동을 해외입양 보냈다고 추산한다.)  

'추방 입양인'의 존재는 한국 정부가 자국의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내는 일을 얼마나 무책임하게 처리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디오피아, 과테말라, 필리핀도 이렇게 자국의 아동을 방출시키진 않았다. 아동의 국제입양은 출신국의 입양법, 수령국의 이민법, 입양법, 국적법적 절차를 모두 거쳐야 완료되는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절차다. 한국의 입양법과 제도가 60여년 동안 이런 과제에 무지하거나 외면해온 탓에 성인이 된 입양인들이 이중, 삼중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미국에 추방 위기 한국인 입양인 더 있다…오스트리아도 국적 미취득 문제 있다

미국과 같은 아동 수령국 입장에서 입양은 '이민'의 한 종류이기도 하다. 때문에 입양을 위한 입국과 국적 획득 과정을 분리해 관리할 수밖에 없다. 필립, 팀, 아담 등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들은 모두 양부모가 아동의 국적 취득 절차를 따로 밟지 않았다. 이런 입양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미국 정부 입장에서 이들은 추방 대상인 '불법 체류자'가 된다. 컴프턴 씨에 따르면, 현재 미국 네바다와 텍사스 주에도 추방 위기에 처한 한국 출신 입양인들이 있다. 

또 입양인들의 국적 취득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태미 고 로빈슨 한양대 교수는 "미국으로 입양된 입양인들만 시민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며 "오스트리아에서도 한국 출신 입양인들의 국적 미취득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정부에 이들 입양인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한국에서 입양을 보낸 나라가 20여개 나라가 되기 때문에 정부 대 정부의 협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12일 입양인들이 산업화된 해외입양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프레시안(전홍기혜)



미국 내 국적 미취득 입양인 중 과반 이상이 한국 출신이다

미국 해외입양인들의 시민권 취득을 위한 단체인 '입양인 권익 캠페인(The Adoptee Right Campaign)'은 현재 미국 해외입양인 중 약 3만5000명이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한다. 보건복지부는 현재 미국으로 입양된 이들 중 1만9429명의 국적 취득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국적 미취득 입양인 중 절반 이상이 한국 출신 입양인인 셈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한국과 미국의 입양제도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로빈슨 교수는 "추방 입양인 문제는 한국의 입양 역사를 제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해외입양의 가장 큰 특징은 민간 국제입양기관이 입양 업무를 위탁, 대리하며, 그 과정에서 외국의 양부모로부터 수수료를 챙긴다는 것이다. 4대 입양기관(홀트아동복지회, 동방사회복지회, 대한사회복지회, 한국사회봉사회)가 입양 실무를 담당하는 기관이며, 2012년 입양특례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국가 기관이나 사법 절차는 입양 과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이 '자국 국민의 보호'라고 본다면, 입양 과정을 민간기관에 맡겨놓았다는 것은 그 기본적인 역할을 방기했다는 말이다. 미국에서 해외입양 실무를 담당하는 기관 역시 미국 정부의 사회복지체계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사설 기관이다.

국제인권법 전문가인 이경은 박사(서울대학교 법학과)는 "한국에서 국제입양은 시장 원리에 의한 사적기관이 주도했다"며 "그러다보니 송출국이나 수령국이 아동보호를 강화하는 법제가 아니라 국제입양의 절차와 기준을 대폭 간소화하여 사적기관의 입양의 중개과정을 수월하게 하는 법제로 대응했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해외입양이 60년이 넘도록 '국가'라는 틀 밖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해외입양 아동의 가장 기본적인 안전망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적 취득' 문제마저 발생하게 됐다는 지적이다. 입양특례법에서 '입양인의 국적 취득 여부를 입양기관이 확인해 정부당국에 보고'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이 박사는 이 조항이 그나마 국외로 입양된 아동의 최소한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라면서 "그 최소한의 의무조차 정부와 입양기관은 외면해 왔다"라고 말했다.  

복지부는 지난 2011년 이태원에서 팀이 노숙자로 발견된 사실을 알고 난 뒤에서야 미국으로 입양된 이들의 시민권 취득 문제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이를 통해 2012년 당시 2만3000여 명의 입양인들의 시민권 취득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이전까지는 관련 통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혜지 보건복지부 아동복지정책과 사무관은 "2012년 첫 조사 이후 입양기관들을 통해 통계를 계속 업데이트해서 1만9000여 명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복지부의 조사 역시 정확한 통계라고 보기 힘들다. 이 숫자는 4대 입양기관을 통해 해외로 입양된 아동의 국적 취득 여부를 확인한 수치다. 로빈슨 교수는 "4곳 이외 다른 입양기관을 통해 간 입양인들을 포함하면 한국이 지난 65년간 입양을 보낸 아동의 수는 복지부가 집계한 16만5000명보다 훨씬 많은 20만 명이라고 보는 게 맞다"며 "미국과 호주 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펄벅재단을 통해서도 상당 수의 한국 아동이 입양됐지만 이 숫자는 한국 정부 통계에 들어와 있지 않다"고 했다. 그는 또 지난해 60세인 한국 출신 입양인이 미국 시민권을 뒤늦게 취득한 사례를 언급하며 "이 분은 고아원을 통해 직접 입양이 보내진 경우"라면서 "65년 동안 400여 개의 고아원을 통해 직접 입양 보내진 숫자도 누락돼 있다"고 밝혔다. 

외교부 "추방 입양인 통계 없다" 

추방 입양인 문제는 한국과 미국 정부의 책임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정책의 가장 기본이 되는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외교부 영사서비스과는 "미국에서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상태로 우리나라에 추방된 입양인에 대한 통계는 없는 상황"이라며 "이는 입양 여부, 범죄 여부 등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이 영사접견 등 당사자의 진술에 기초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외교부는 "해외입양인이 미국 사법당국에 의해 추방이 확정될 경우 본인 또는 미국 사법당국이 우리나라 재외공관에 입국을 위한 여행문서(여권 또는 여행증명서) 발급을 요청하게 된다"며 "재외공관은 여권법 등 관계법령에 의해 여행문서를 발급하되, 우리나라 국적 진위 여부 및 인도적 사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도록 하고 있다"고 추방 절차에 대해 설명했다. 

이경은 박사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추방되는데 입양인인지 몰랐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며 "적어도 해당 업무를 맡은 담당자 차원에서는 인지했으나 이런 현황을 파악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 아닐까 한다"고 문제제기했다.  

복지부 김혜지 사무관은 "복지부에서는 중앙입양원을 통해 추방 입양인에 대한 현황 파악과 지원 업무를 하고 있다"며 "현재 중앙입양원이 관리하고 있는 추방 입양인은 5명이다. 6명이었는데 김상필(필립) 씨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컴프턴 씨는 "내가 알고 접촉한 추방 입양인은 8명"이라고 말했다.

 

 

 

▲13일 필립의 유해가 미국으로 돌아가기전 인천공항에서 입양인들은 작은 추도식을 가졌다. 생전에 필립과 알고 지낸 컴프턴 씨가 고인의 유해를 꺼내고 있다. ⓒ프레시안(전홍기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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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배치 1년 되던 날... 성주는 여전히 '전쟁터'

 

성주 주민들 366회 촛불 집회 개최...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들은 사드 찬성 집회

17.07.14 11:42l최종 업데이트 17.07.14 11:42l

 

 경찰은 13일 오후 사드가 배치된 소성리 마을회관 입구에서 서북청년단 등 보수단체와 주민들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도로 양쪽을 완전히 막았다.
▲  경찰은 13일 오후 사드가 배치된 소성리 마을회관 입구에서 서북청년단 등 보수단체와 주민들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도로 양쪽을 완전히 막았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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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들어오기 전에는 가족들이랑 영화도 보고 놀러 다니고 가족모임도 하고 좋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왜 우리 지역에 와서 가족과 이웃들을 망가뜨리는지, 북핵에 대응한다는데 사실이 아니잖아요. 우리 지역 사람들은 다 알아요..."

조유련(48)씨는 지난해 정부가 사드를 성주에 배치하겠다는 발표를 한 이후부터 성주는 지옥이 되었다며 "제발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 우리 가족 4식구가 함께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흘렸다.

평범한 가정주부 사드 반대에 발벗고 나서 "사드 반입 생각하면 눈물만 나"
 
평범한 직장인으로,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았던 조씨는 지난해 7월 13일 정부가 성주 성산포대에 사드를 배치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삶이 변했다. 막연한 우려에 인터넷도 찾아보고 이웃들과 대화를 통해 안전과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사드를 반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김항곤 성주군수도 삭발을 하고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쓰며 "사드는 결코 우리 지역에 들어올 수 없다"고 강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군민들이 힘을 합하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조씨는 SNS를 통해 주민들과 많은 의견을 나누며 사드 반대 촛불 집회에 열심히 나갔다.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인 '1318'방에서 매일 다양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평화를 상징하는 '파란나비' 리본을 만들고 팔찌도 만들어 주민들과 나누었다.

하지만 김 군수가 군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성산포대 대신 제3의 부지를 선택해 달라며 기자회견을 한 후, 많은 사람들이 돌아서는 것을 보고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성주군청 앞마당에 모여 "소성리도 성주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사드 반대"를 외쳤지만 이미 사드 배치 쪽으로 돌아선 관변단체 등은 오히려 아픈 가슴을 헤집어놓았을 뿐이다.
 
 13일 오후 서북청년단 등 보수단체가 사드가 배치된 성주 소성리 입구에서 집회를 하자 경찰이 충돌을 우려해 주민들을 고착시키는 과정에서 한 주민이 바닥에 넘어졌다.
▲  13일 오후 서북청년단 등 보수단체가 사드가 배치된 성주 소성리 입구에서 집회를 하자 경찰이 충돌을 우려해 주민들을 고착시키는 과정에서 한 주민이 바닥에 넘어졌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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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는 지난 1년 중 사드가 반입된 4월 26일이 가장 소름끼치는 날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25일 저녁에 성주읍에서 열린 촛불집회를 마치고 소성리에 올라왔다"면서 "그날따라 경찰들이 엄청 많았다"고 말했다.

조씨는 "할머니들이 불안해 할까봐 노래도 부르고 기분도 풀어드리며 시간을 보내다 자정이 넘어 '여자들은 집에 갔다가 상황이 터지면 오자'고 해 집으로 갔다"며 "집에 가니 이미 1시가 넘었고 딸은 혼자 자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만일을 대비해 씻은 후 외출복을 그대로 입고 누워 있었는데 비상이 걸렸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곧바로 소성리로 차를 몰았는데 가로등이 다 꺼져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 상향등을 켰더니 경찰차가 새까맣게 올라가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씨는 "현장에 도착하니 경찰들은 주민들을 막고 있었고 할머니들은 밑에 깔려 한 분은 팔이 부러졌다"면서 "앰블런스 차량이 들어와야 하는데 경찰이 못들어오게 막아 군대 응급차량이 병원으로 이송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조씨는 "지금도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자다 보면 환청이 들리고 몇 번씩 깨게 된다"면서 "사드 때문에 마을이 쑥대밭이 됐는데 성주군은 '생명문화축제'를 열었다. 분해서 눈물만 계속 나왔다"고 말했다.

"사드는 북핵 막기 위한 방어용이 아니라 주한미군 위한 무기"

이혜경(48)씨는 "첨엔 사드가 뭔지도 잘 모르고 왜 반대해야 하는지도 몰랐다"면서 "휴대폰도 머리맡에 두고 자면 전자파가 나와 안 좋은데 사드레이더의 전자파는 얼마나 많이 해롭겠나"라고 말했다.

이씨는 "처음엔 주민들도 사드가 건강에 해롭다며 들어오는데 반대했지만 니중에는 북핵을 막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주한미군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라는 걸 알았다"면서 "사드는 한반도 평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사드 배치가 발표된 후 군수가 삭발을 하면서 막아내겠다고 해 물리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다"면서 "하지만 3부지를 찬성하면서 주민들이 길거리로 내쫓기고 애원해도 만나주지 않아 믿음을 저버렸다"고 김항곤 군수를 비판했다.

이씨는 이어 "제3부지를 찬성하면서 군수와 함께 움직인 단체들이 다 빠져나갔다"면서 "집회에 참석하면 군에서 지속적으로 전화가 오고 군에 관계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압박을 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무슨 일이 터지면 너희들이 참아라 한다. 국가가 하는 일인데 왜 희생을 하지 않느냐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며 "사드의 본질을 안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무조건 종북,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은 소성리에 와서 주민들 처지를 본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미국은 괌에 사드를 영구배치 한다고 발표하지 않았다. 4년째 환경평가를 하고 있고 레이더 방향도 바다를 향하고 있다"며 "인근에는 주민들도 살지 않고 돼지 한 마리, 박쥐 한 마리만 있어도 환경영향평가를 하는데 우리는 인근에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무조건 안심하라고만 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서북청년단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13일 오후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 몰려와 사드 찬성을 외치며 주민들과 충돌했다.
▲  서북청년단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13일 오후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 몰려와 사드 찬성을 외치며 주민들과 충돌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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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성주 롯데골프장에서 불과 1.2km에 있는 김천시 남면 월명리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정부는 환경영향평가도 실시하지 않은 채 기습적으로 사드 장비를 배치해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이씨는 "직장에 다니면서 3명의 자녀를 키우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동안 안타깝고 화가 나는 일을 보더라도 그냥 지나갔다"면서 "사드 배치 과정을 겪으면서 직접 행동하지 않으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호 유족들이나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드 배치 1년 되던 날 전쟁 방불케 한 보수단체 집회

사드배치를 발표한 지 1년이 되는 날도 성주 소성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들이 몰려와 사드 찬성 집회를 갖고 롯데골프장 부지가 있는 곳까지 행진을 하려다 마을주민들과 충돌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날도 마을주민과 극우단체 회원들을 갈라놓기 위해 수백 명의 경찰이 출동했다. 소성리 마을회관 입구를 둘러싸고 두 집단 간의 충돌을 막았다. 경찰이 마을 주민들을 막는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이 넘어지기도 했다.
 
 국회 안전행정위 소속 윤재옥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일행이 13일 오후 사드가 배치된 성주군 소성리 입구를 방문해 주민들이 차량을 검문검색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지적했다.
▲  국회 안전행정위 소속 윤재옥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일행이 13일 오후 사드가 배치된 성주군 소성리 입구를 방문해 주민들이 차량을 검문검색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지적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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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에는 두 야당 국회의원이 성주를 찾았으나 서로 다른 행보를 보였다. 먼저 국회 안전행정위 소속 윤재옥 의원 등 자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 4명이 오후 4시 50분경 소성리를 찾았다. 윤 의원은 "경찰이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고 있어서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찾았다"면서 소성리 주민들이 롯데골프장 부지로 가는 차량을 검문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윤 의원 일행은 하지만 소성리 입구 삼거리에서 보수단체와 마을주민들 간의 대치상황만 바라보았을 뿐, 마을주민들이 검문검색을 실제로 하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은 채 "경찰청에 법질서를 확립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개선이 안 되는 것 같다"는 말만 하고 발길을 돌렸다.

사드 반입부터 이미 불법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불법적인 통행을 막아선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윤 의원은 "국가가 불법적인 일을 했겠는가"라며 "그건 법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라고 말했다.
 
 성주 주민들은 13일 오후 8시부터 주민 300여 명이 모여 366일째 사드 반대 집회를 열었다.
▲  성주 주민들은 13일 오후 8시부터 주민 300여 명이 모여 366일째 사드 반대 집회를 열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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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은 13일 오후 8시부터 성주군청 앞 주차장에서 열린 사드 반대 366일째 집회에 참석해 주민들과 함께 했다.
▲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은 13일 오후 8시부터 성주군청 앞 주차장에서 열린 사드 반대 366일째 집회에 참석해 주민들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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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저녁 성주군에서 열린 366차 촛불집회에는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이 참석했다. 김 의원은 "전 세계가 성주를 바라보고 있고 이제 성주는 덩치 큰 강대국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고 위로했다.

김 의원은 "저는 미국 가서 사드배치 빨리 안 한다고 귀싸대기 맞고 중국 가서 사드배치 한다고 또 귀싸대기 맞고 국내 돌아와서 말 함부로 한다고 보수언론들에게서 또 맞았다"면서 "성주 와서 위로받으니 싸대기 세 대가 아니라 열 대라도 상관이 없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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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다음 100년 평화운동으로 대응'

(추가)사드1년 평화대토론, 비대위 해소 상시대책위로 전환
익산=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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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3  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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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는 사드배치 발표1년을 맞아 13일 익산총부에서 평화토론회를 개최, 교단차원에서 발족한 원불교성주성지비상대책위원회를 '상시'대책위원회 전환할 뜻을 밝혔다. [사진제공-원불교성주성지비상대책위원회]

원불교는 13일 사드 배치 반대 투쟁 1년에 즈음해 지난해 8월 말 교단 차원에서 발족시켰던 '원불교성주성지비상대책위원회'(원불교비대위)를 해소하고 '상시' 대책위원회로 전환할 뜻을 밝혔다.

원불교비대위는 이날 오후 원불교 익산총부 법은관에서 150여명의 교무 등이 참가한 가운데 '원불교 평화대토론-성지 수호를 넘어 평화운동으로'를 개최한 후 집행위원장인 김선명 교무가 토론 결과를 수렴해 발표한 '사드철회와 원불교 평화운동 제안'을 통해 "비상대책위원회를 해소하고 상시 대책위원회로 전환하여 성지수호와 사드 철거운동을 해갈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또 지난 1년간 '원불교는 평화입니다'라는 표어아래 현장에서 기도와 명상, 그리고 법회로 함께 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평화의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깊이있는 연구와 외연확장을 선도할 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김 교무는 이번 제안이 "지난 1년여의 시간을 넘어 지나 온 교단 백년을 반추하고 이를 다음 백년의 에너지로 승화시켜 교단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지혜를 모아 보자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정부가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걸음에 발맞춰 좀 더 긴 호흡으로 그간의 긴장과 피로도를 풀어내고 효율성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원불교 평화운동을 선도할 수 있는 조직은 교단창립 초기의 조합정신을 되살려 '소태산평화연구조합'이나 원광대 대학원의 '종교평화학과' 등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의견은 즉시 교단에 전달되어 필요한 절차를 거쳐 곧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원불교 대구경북 교구장인 김도심 교무는 축사를 통해 "장기화되는 국면에서 '비상' 字는 떼어야 겠죠"라고 운을 떼고는 "지금이야말로 교무님 각자가 순행해 온 결과 얻은 삼대력(정신수양으로 얻는 수양력과 사리연구로 얻는 연구력, 작업취사로 얻는 취사력)이 아니라 교단적, 집단적 삼대력을 도출해 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교무들의 활발한 토론을 주문했다. 

   
▲ 원불교성주성지수호비상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인 김선명 교무가 토론회 참석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 건의안을 발표했다. [사진제공-원불교성주성지비상대책위원회]

토론회 참석자들은 사드철회 및 성주성지 수호운동으로 촉발된 원불교의 대 사회활동으로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이웃종교와 시민사회에 원불교의 평화운동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됐다며, 이번 계기에 관성과 관행에 젖어 있던 지난 백년을 성찰하고 원불교 다음 백년을 위한 유연한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명은 원불교비대위 상황실장은 '사드철회 및 성주성지수호 활동' 보고에서 "지난해 7월 13일 성주 사드배치 결정이 공식화된 직후인 14일 원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가 사드배치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교단 차원에서는 8월 31일부터 원불교대책위원회로 확대 개편해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지난 1년간 교단내에서는 '성주성지 수호'를 외치는 사드반대 입장과 '북핵안보 지지'를 앞세운 사드찬성 의견이 계속 대립해 온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토론회가 열리는 이날도 성주 소성리에서 극우단체와 경찰의 개입으로 주민들과 교도들이 탄압받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런 쉽지 않은 상황때문에)교단 일부에서 소성리 평화교당, 진밭교 교당의 기도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기도 하지만 그 교당은 평화시민들이 만든 것이므로 그들과 함께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 진행중 성주 소성리에서 발생한 경찰과 우익단체의 폭력사태로 원불교 교무 2명이 부상을 당한 상황에 접해 참석자들은 규탄 결의를 발표하기도 했다.
   
정상덕 교무는 '여섯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원불교 평화운동'이라는 주제발표에서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의 '정신개벽운동'을 '평화운동'으로 바꿔 불러도 손색없다며, 르 코르뷔지에(예술), 라이너스 폴링(과학), 무함마드 유누스(경제), 함석헌(종교), 넬슨 만델라(정치), 마리아 몬테소리(교육) 등 각 분야 '평화운동가'의 성과에 비추어 소태산을 적극적으로 연결해서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

낮선 시선으로 원불교 교법을 바라보는 가운데 고리타분하지 않은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 있고, 여러 분야를 아울러 고민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자발성.창의성, 공익성을 중심으로 광장에서 새로운 힘을 만들어가는 신신사회(New New Society)운동의 맥락과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원불교는 종교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종교로 자리매김되어 일상에서 세상으로 평화가 확장되도록 하고, 평화가 평화에게 말을 걸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도록 하는 실천방향을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음공부를 통해 내면의 평화가 일상이 되고, 남북통일과 평화운동, 반전반핵 평화운동, 사드배치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평화운동,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평화운동이 일상의 평화와 동시성 및 균형을 이룰 때까지, 이런 평화의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키우고 실천활동을 하는 것이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영원한 평화라는 것이다.

   
▲ 이날 토론회에는 150여명 이상의 원불교 교무.교도들이 참석해 사드배치 철회 진행상황과 원불교 교단 개혁방향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사진 - 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원광대 정역원의 원익선 교무는 '원불교의 평화운동과 전환기 교단의 변혁'이라는 주제발표에서 '이전 정부의 불법적이고 일방적인 사드배치는 원불교인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었으며, 무엇보다 원불교 교단에 큰 화두를 던지고 있다'며, 이번 사드배치 철회 투쟁이 원불교에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했다.

"사드 그 자체도 그렇거니와 불법으로 배치된 상황에 대해 어떠한 양보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타협도 용납할 수 없는 종교 그 자체의 생명이다. 자신의 성지에서 불법이 저질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에 대해 교법에 의거 항의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원 교무는 이 하나의 사건만으로도 원불교의 이상이 점점 쇠퇴하고 있는 징표로 읽을 수 있다며,  "오늘날 그 이념은 점점 쇠퇴하고 조직은 무기력해지고 있으며, 방편은 구태의연하고, 인적자원은 점점 감소하고 있다. 거의 모든 분야에 있어 근대적 방식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지금의 원불교를 진단했다.

이어 사회교화를 내건 원불교가 정면으로 현대사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무여한'의 법인 정신을 회복하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교단을 확립하며, 일상의 결사를 통해 원불교의 사회적 공약을 실천하는 원불교 스스로의 대변혁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 당초 이날 오후 5시까지로 예정됐던 토론회는 6시를 훌쩍 넘기도록 열띠게 진행됐다. 토론회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원불교성주성지비상대책위원회]

(수정, 추가-14일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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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녹색당·민중연합당, 선거제도 공동개혁안 발표

노동당·녹색당·민중연합당, 선거제도 공동개혁안 발표
 
 
 
편집국
기사입력: 2017/07/14 [01:5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노동당, 녹색당, 민중연합당 등 3개 원외 진보정당들이 선거제도 개혁안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녹색당)     © 편집국

 

노동당녹색당민중연합당 등 3개 원외 진보정당들이 모인 정치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제정당 연석회의는 13일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선거제도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들 3개 정당은 정치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지 못하고 국정농단과 권력형 부정부패정경유착을 끊임없이 발생시키면서 기득권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불공정한 선거제도에서 기인한다며 최다 득표 후보만이 당선되는 현행 승자독식 위주의 선거제도는 다양한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기득권정치를 더욱 공고화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들 3개 정당은 정당득표율과 의석수의 비례성을 높이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 단체장선거에 결선투표제 도입 선거권 16피선거권 18세로 선거연령 인하 국회의원 정수 인구 13~14만명당 1명으로 확대 지역구 당선자가 정당비례득표율을 초과할 경우 초과의석만큼 의석 증가지역구와 비례는 1:1로 연동 지방선거 광역의원선거는 전면적 혹은 1:1 연동형 비례대표제기초의원 선거는 3~5인 선출하는 중선거구제 도입 국회진출 정당득표율 진입장벽(봉쇄조항)은 ‘1/의석수로 바꿔 실질적으로 봉쇄조항 폐지 등의 내용을 담은 개혁안을 제안했다.

 

나아가 연석회의 참여 정당들은 선거제도 개혁에 머무르지 않고 시민들의 자유로운 정치참여와 다양한 정치세력의 정치활동을 확대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며 오늘 1차 기자회견에 이어 시민과 정당의 정치활동을 제약하는 정당법과 정치자금법 등 전반적인 정치관련 제도의 개혁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연석회의는 정치선거제도 개혁에 공감하는 제정당 및 제정치단체의 참여를 넓혀나갈 것대시민 캠페인과 정치선거제도 개혁 공론화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국회 정치개혁특위가 기득권을 유지한 채 독단적으로 운영되지 않도록 감시비판할 것 등의 계획을 밝혔다연석회의는 2230여개 노동·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정치개혁 공동행동과의 연대활동도 모색하고 있다.

 

이날 회견에는 민중의 꿈’ 주도로 지난 9일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한 새민중정당()의 김종훈 의원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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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선거제도 개혁으로 기득권 정치를 바꾸고 국민의 삶을 바꾸자!

 

– 기득권 정치를 유지시키는 불공정한 선거제도는 최우선 개혁과제 

– 정당득표율과 의석수 일치하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 2018년 지방선거 전올 정기국회 안에 선거제도 개혁되어야 

– 정치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시민들과 공동행동에 힘을 모아 나갈 것 

 

정치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지 못하고 국정농단과 권력형 부정부패정경유착을 끊임없이 발생시키면서 기득권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불공정한 선거제도에서 기인한다최다 득표 후보만이 당선되는 현행 승자독식 위주의 선거제도는 다양한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기득권정치를 더욱 공고화시키고 있다.

 

현행 선거제도는 정당이 얻은 득표와 이에 따른 정당의 의석수간 불일치가 심각하며그럼으로써 다수의 사표를 발생시켜왔다특정 거대 정당들이 정치를 독점함으로써 여성청년사회적 약자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사표에 묻혀 배제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선거제도의 공정한 개혁만이 다양한 계층과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다.

 

노동당녹색당민중연합당 등은 선거제도의 불합리성과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여 <정치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제정당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를 구성하였다연석회의는 몇 차례 실무회의를 거쳐 정당득표율과 의석수를 일치시키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합의하였다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만이 유권자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고 혁신적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연석회의가 합의한 선거제도 개혁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회의원 선거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개혁하자정당득표율과 의석수가 일치하는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만이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다.

2.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의 단체장선거는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결선투표제는 유권자들의 전략투표를 방지함으로써 민심의 왜곡을 없앤다유권자 과반의 득표를 유도함으로써 정당성도 얻을 수 있다다만 단체장 선거는 선거비용 부담을 덜기 위해 영국 런던시장선거처럼 결선투표제 효과를 발휘하는 보완투표제 등의 도입도 가능하다.

3. 선거권은 16세로피선거권은 18세로 선거연령을 인하하자. OECD국가들 대부분은 우리나라보다 선거권과 피선거권 연령이 낮다. OECD 수준에 맞추자.

4. 국회의원 정수는 인구 13-14만 명 당 1명으로 확대하자점진적으로 OECD 평균에 맞추자.(OECD국가 평균은 인구 10만 명 당 1명의 국회의원)

5. 국회의원 지역구 당선자가 정당비례득표율을 초과할 경우 초과의석만큼 의석을 증가시키고지역구와 비례는 1:1로 연동하자.

6. 지방선거 광역의원선거는 전면적 혹은 1:1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꾸고기초의원 선거는 3-5인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개혁하자

7. 국회의원선거의 국회진출 정당득표율의 진입장벽(봉쇄조항)은 ‘1/의석수로 바꾸자실질적으로 봉쇄조항 폐지함으로써 진정한 다당제체제로 전환하자.

 

이번 연석회의 기자회견은 선거제도 개혁에 초점을 맞추었다그러나 연석회의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시민들의 자유로운 정치참여와 다양한 정치세력의 정치활동을 확대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따라서 오늘 1차 기자회견에 이어 시민과 정당의 정치활동을 제약하는 정당법과 정치자금법 등 전반적인 정치관련 제도의 개혁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다.

 

또한 연석회의는 정치선거제도 개혁에 공감하는 제정당 및 제정치단체의 참여를 넓혀나갈 것이며대시민 캠페인과 정치선거제도 개혁 공론화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이다국회 정치개혁특위가 기득권을 유지한 채 독단적으로 운영되지 않도록 감시비판에도 소홀하지 않을 것이다한편으로 필요하다면 국회 정치개혁특위와의 선거제도 개혁방향에 대한 토론의 장이 마련된다면 적극 참여할 예정이다그 동안 선거제도 개혁에 앞장서 왔던 <정치개혁 공동행동>(220여개 노동시민사회단체로 구성)은 정치개혁의 중요한 파트너다. <정치개혁 공동행동>과도 긴밀한 협력을 통해 다양한 연대활동도 전개해나갈 것이다.

 

정치가 바뀌지 않는다면 국민의 삶도 바뀔 수 없다유권자의 한 표가 제대로 선거결과에 반영되는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가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정신에도 부합한다국민의 평등권을 지키고 지역주의를 없애며기득권정치를 타파하는 정치개혁은 선거제도를 공정하게 개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제 대한민국도 공정한 투표방식을 가질 때가 됐다지금이 그럴 때다더 늦추지 말자.

 

2017년 7월 13

<정치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제정당 연석회의>

참가정당 노동당녹색당민중연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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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한미FTA 개정협상 공식 요구...‘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 명분 내세워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07/13 10:55
  • 수정일
    2017/07/13 10:5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USTR, ‘트럼프 대통령 공약 사항, 무역 적자 2배 증가’ 주장... 다음 달 미국서 특별공동위 소집 요구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자료사진)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자료사진)ⓒ뉴시스/AP
 

미국 정부가 우리나라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을 시작하자고 공식 통보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12일(현지 시간) 발표한 성명에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대표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미국 무역의 장벽을 제거하고 협정의 개정(amendments) 필요성을 고려하고자 한미 FTA와 관련한 특별공동위원회(Joint Committee)를 개최를 요구한다고 한국 공식 정부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USTR은 또 "무역 손실을 줄이고 미국인이 세계 시장에서 성공할 더 좋은 기회를 제공하려는 대통령의 의도에 따라 행동했다"고 밝혔다. 라이트하이저 대표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노동자, 농부, 농장주, 사업가를 위해 무역 적자를 낮추고 보다 나은 무역 협상을 진행할 것이라는 약속을 계속해서 지켜오고 있다"면서 이번 개정협상 통보 이유를 설명했다.

라이트하이저 대표는 또 "한미 FTA가 발효된 이후 우리의 대한국 상품수지(goods) 적자는 132억 달러에서 276억 달러로 두 배로 증가했고, 미국의 상품 수출은 실제로 줄었다"면서 "이는 전임 정부가 이 협정을 (급히) 인준하도록 요구하면서 미국민들에게 홍보(sold)했던 것과 꽤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미국)는 더 좋은 것(협상)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라이트하이저 대표는 특히, 주형환 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한국은 어떠한 무역 파트너보다도 중요해 관계를 강하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평하며, 균형된 무역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양국 정상도 6월 정상회담에서 “양국 간 상호적 혜택과 공정한 대우를 창출하면서 확대되고 균형된 무역을 증진하기로 공약했다”면서 한미 FTA 개정협상이 시급(imperative)하다고 주장했다.

미 무역대표부가 7월 12일(현지 시간) 한국에 보낸 FTA  개정협상 통지문에서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정 무역'을 합의했다는 점과 FTA 체결 이후 미국의 무역적자가 두배로 증가했다고 주장했다.
미 무역대표부가 7월 12일(현지 시간) 한국에 보낸 FTA 개정협상 통지문에서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정 무역'을 합의했다는 점과 FTA 체결 이후 미국의 무역적자가 두배로 증가했다고 주장했다.ⓒ해당 문서 캡처

이는 청와대는 한미 정상회담 당시 한미 FTA 재개정 협상에 관해 합의한 바 없다고 밝혔으나, 미국 측이 해당 합의 문구 내용을 재개정 협상의 명문으로 활용하고 있는 대목으로 해석된다.

특히 라이트하이저 대표는 해당 서한에서 "특별공동위는 중요한 무역 불균형 문제를 다루고 미국의 대한 수출의 시장 접근성과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며 "더욱 균형 잡힌 무역 관계와 진실로 공정하고 평평한 운동장을 조성하는 진전을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개정협상 의지를 분명히 했다.

USTR은 또 "한미 자유무역협정문(KORUS) 22.2조의 규정을 들면서 30일 안에 양국 특별공동위를 개최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양측 실무진들이 구체적인 사항이나 어젠더(agenda)를 마무리 짓기 위해 다음 달(8월) 워싱턴 D.C,에서 특별위를 개최하자고 요구했다.

현재 한미 FTA 협정문에는 한쪽이 공동위원회 특별 회담 개최를 요구하면, 상대방은 원칙적으로 30일 이내에 응해야 한다. 미국 행정부는 다른 나라와의 무역 협정 내용을 개정하려면 협상 권한을 보유한 의회로부터 협상권을 위임받고자 본협상 개시 90일 전 의회에 통보하고, 30일 전 협상 목표와 전략 등을 의회에 보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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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영유권 분쟁’과 ‘강제징용노동자 문제 사죄 및 배상’의 전망

 
김이경의 민족이야기 한일관계, 독도이야기 세 번째
  • 김이경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7.07.12 12:51
  • 댓글 0
 
 
▲사진 : 경상북도 사이버독도 홈페이지

1. 우리의 반일투쟁을 가라앉히는 명약 ‘일본의 독도문제 국제분쟁화 협박’

한동안 잠잠하던 독도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된 것은 1965년 한일수교협정 때였다. 우리정부가 ‘식민침탈에 대한 반성이 한일협정문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일본은 반성은커녕 ‘경제협력기금도 줄 수 없다’며 들고 나온 카드가 독도문제였다. 1962년 3월 일본의 고사키 젠타로 외상은 최덕신 당시 외무장관을 만나 “현안이 해결되더라도 영토문제(독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교정상화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알려졌다. 1962년 9월 일본에서 열린 한일 예비 절충 4차 회담에서 일본측 인사가 “사실상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도쿄에 있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파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고 망언을 했다. 그런데 어이가 없는 것은 우리측 인사의 “중요하지도 않은 섬이니 한일회담의 의제도 아니므로 국교 정상화 후에 토의하는 식으로 별개 취급함이 어떠냐”는 대응이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과의 모든 교섭에서 독도문제가 제기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우리가 독도문제를 실질 지배하고 있는데, 굳이 ‘국제 분쟁화’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주장하였다. 결국 일본의 독도 분쟁화 주장은 식민침탈에 대한 반성 없는 한일기본조약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다.

이때부터였다, 독도 문제만 나오면 우리는 전략적 인내(?) 정책(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것도 그냥 침묵이 아니다. 한일관계의 쟁점만 불거지면 일본은 ‘독도문제 국제분쟁화’를 들고 나오고, 우리는 그들이 더 시끄럽게 굴기 전에 알아서 쟁점을 조용히 잠재우는 기현상…. 최근에도 올해 초 경기도 의회가 독도에 소녀상을 세우겠다고 결의하자, 외무부가 일본이 독도는 자기의 땅이라며 발끈했고, 연이어 파랗게 질린 외무부 담당자가 경기도 의회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독도소녀상 설치를 반기던 경상북도 도지사까지 신중 모드로 돌아서는 해프닝을 벌이고, 급기야 경기도 의회의 모처럼의 결심은 온데간데없이 사그라졌다. 이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독도문제를 ‘국제 분쟁화’시키겠다는 일본의 협박은 전가의 보도처럼 우리의 반일 소동을 가라앉게 하는 특효약이 되어왔다.

2.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1965년 1월) 박정희가 일본과 맺은 독도밀약이 있다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1962년 한일수교 논의가 제기되면서 식민지 침탈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우리측 주장에 대해 일본이 ‘독도 국제분쟁화’로 맞서자, 다급해진 박정희는 이 문제에 대한 일본과의 절충을 시도하기 위하여 독도밀약을 맺는다. 일본 정부의 특명을 받은 우노 소스케 의원과 정일권 국무총리간의 독도에 관한 비밀 합의사항인데, 박정희의 재가를 받았고 일본의 사토수상에게도 전달되었다고 하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사진 : YTN 뉴스 캡처

① 두 나라가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것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②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두 나라가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긋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③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늘리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하지 않는다.

박정희야 독도를 우리가 실효 지배하고, 어차피 일본은 자기네 것이라고 떠들어대니, 이정도의 절충안은 한일수교를 위해서는 불가피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밀약은 두고두고 일본이 한일관계에 우리를 협박할 수 있는 시비 거리를 만든 원천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역시 이 밀약대로 점거한 현상을 유지하려 할뿐, 일본이 독도를 들고 나오며 우리에게 시비를 걸 때 찍소리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넘어가기만을 바라게 된 원죄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 문서는 밀약이며 이리저리 알려지긴 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니다(여기서는 그 과정은 생략한다). 이 문서의 법적인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이렇게 해서 사실상 독도문제는 가장 심각한 한일관계의 핵심쟁점으로 부각되게 된다. 혹자는 한일수교가 급한데 이렇게 해서라도 독도에 대한 우리의 실효 지배를 인정받으며 넘어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지 않느냐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1905년 독도부터 점령함으로써 한반도 강제병합의 신호탄이 되었던 우리의 영토 주권을 이런 식으로 처리함으로써 이후 두고두고 굴절된 한일관계를 만들어낸 원인이 되었다.

3. 독도는 우리가 실효 지배하는 이상 조용히 있으면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진짜 다케시마(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믿고 있으며 틈만 있으면 이 문제를 거론하며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자고 한다. 물론 양 국가가 다 동의하지 않는 이상 국제사법재판소는 현실화 전망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이 문제를 가지고 군사화한다면?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된다면? 국제정치학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논하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겠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군사적인 시위라도 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에서의 해결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지금 일본이 틈만 나면 독도문제를 거론하는데, 그들은 당장 독도를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 그들의 계산을 대략 짐작해보자. 첫째, 한번에 K.O승을 거둘 수는 없지만 어퍼컷을 연속해서 날리고 우리가 계속 무방비로 당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의 무력함과 대한민국 독도 실효 지배 주장이 얼마나 내용 없는 것인가를 국제사회에 널리 각인시키자는 것이다. 둘째, 일본 자국 내 국민들에게 혐한 감정을 부추기려는 것이다. 일본 자신이 근대화시켜주었고 경제협력자금으로 돈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징징대는 대한민국을 용서할 수 없다는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일본 군국주의화의 불쏘시개 감으로 매우 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사진 : 일본 해상자위대 홈페이지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의 독도 방문처럼 이런저런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전 국민이 독도문제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저들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군국주의화를 위한 저들의 강력한 ‘패’이자 상징이다. 다음으로 역대 우리 정부가 그 문제를 쉬쉬하고 은폐한 채 때로 일본 시위용으로 압박 이벤트를 꺼내든 것은 한일관계의 본질을 은폐하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국민들의 반일감정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알지 못하는 진실이 많다. 우선 현재 일본 군국주의화의 본령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미일동맹의 하위동맹으로 위치 지워진 한일관계 밑에서 미국의 의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국민적 반일감정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이 위태로운 정황은 알지 못한다. 박근혜가 국민들의 반일정서 눈치를 보느라 일본과의 군사정보협정을 맺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애도 썼지만, 결국 10억 엔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배신하고 군사정보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알지 못한다. 결국 문재인 정권이 위안부 문제는 재협상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을 빌미로 맺어진 군사보호협정을 어떻게 할지는 한마디 말이 없다.

또 우리 국민들은 일본이 독도영유권 문제, 강제징용노동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 역사교과서 왜곡 등 모든 한일관계의 주요 쟁점들을 어떻게 치밀하게 일본 국내와 국제사회에 미리 포석을 깔고 대비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선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볼 일이다. 가장 현명한 정치인은 민중이라고 했던가? 국민들에게 알리고 판단을 물어야 한다. 가장 올바른 정치인과 정치세력이 늘 해야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 기본을 강화하면서 독도에 대한 저들의 논리의 허구성을 논파하고 한일 역사 왜곡의 실체에 과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강제징용노동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은 지금 한일관계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중 동력 중 하나이다.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운동이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여론 마련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면 앞으로 정치적 해결의 방향을 찾아서 노력해야 한다. 이미 대법원은 2012년 강제징용노동자의 임금 청구 재판이 적법한 것임을 판결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외면하는 일본 기업과 정부, 또 마치 남의 일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 바라보는 정부의 태도, 이 모든 것을 바로잡고 강제징용노동자 선배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의 각성과 대책을 요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시금 생각해본다. 독도 강치 멸종사를 잊지 말자고….

김이경 우리역사연구가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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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핵무기를 어떻게 활용했나

 
['전쟁 국가' 미국] 대외 군사 개입을 위한 최후 보루
2017.07.13 01:29:55
 

 

 

 

미국의 평화운동가 조셉 거슨은 저서 <제국과 폭탄 : 미국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어떻게 핵무기를 이용했나>에서 핵무기는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핵심 수단이라고 단언한다. 

거슨에 따르면 1945년 이래 미국의 핵무기는 다음 다섯 가지 용도로 사용됐다.

첫째, 실제 전투용.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공격이 그것이다.

둘째, 미국의 적들과 동맹국들을 암묵적으로 위협함으로써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만일 미국이 핵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본이 항복했다면, 한반도의 분단 대신 패전국 일본이 미‧소의 공동 관리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핵공격을 가함으로써, 즉 소련에 대한 무력 과시를 통해 미국은 일본을 단독 점령했고 동북아에 대한 독점적 지배력을 행사했다. 

셋째, 선제 핵공격 위협을 통해 상대를 위협함으로써 미국에 유리한 조건의 협상을 받아들이도록 강요(1946년 3월 북부 이란 주둔 소련군 철수 강요. 베를린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넷째, (1949년 소련의 핵무기 확보 이후) 미국의 재래식 병력을 '의미 있는 군사 및 정치적 도구'로 만드는 최후 보루. 예컨대 미국이 공격하려는 제3세계의 적을 소련이 돕는 것을 핵 위협을 통해 저지(1973년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를 돕기 위해 소련이 개입하려 하자 미국은 핵위협으로 이를 저지했다). 또한 미국의 핵공격에 화학무기 등으로 대항하려는 제3세계 국가를 억제(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은 이라크 주변에 핵무기 700~1000기를 배치해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저지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군이 공격해 온다면 이스라엘에 화학무기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했었다.) 

다섯째, (1970년대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과 대등해진 이후) 비로소 '억제'가 등장한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 군사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억제'란 일반인들이 이해하는 억제와 그 의미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억제란 미국에 대한 타국의 선제 핵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펜타곤 지도자들에 따르면 억제란 '다른 국가들이 미국의 국익을 침해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2005년 채택된 미국의 합동핵작전교리(doctrine for joint nuclear operation)에 따르면 "억제의 핵심은 (핵 위협으로) 잠재적 적국의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쳐 (미국의 국익에) 해가 되는 행위를 스스로 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아가 이 문서는 "분명히 말하건대 핵무기는 앞으로 50년간 미 군사력의 초석으로 건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핵무기는 미 제국의 유지를 위한 핵심 도구 

한마디로 말해 미국은 지난 70여 년간 핵무기의 위력을 앞세워 세계에 미국의 요구를 강요해 왔고 타국이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해 온 것이다. 

거슨은 "핵무기의 역할에 관한 미국의 대부분의 문헌들은, 핵무기의 본질적 기능이 선제공격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억제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과 연구자들은 미국의 핵무기가 제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것이라는 핵심적 사실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아이젠하워의 '대량 보복'에서 케네디의 '유연 대응', 그리고 클린턴의 '풀 스펙트럼 도미넌스(full spectrum dominance: 모든 군사력 부문에서의 압도적 우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선제 핵공격은 제국의 유지를 위한 핵심 수단"이라고 강조한다.

거슨의 이러한 지적, 즉 '미 대외정책에서 핵무기의 중심성'은 역대 미 정치지도자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닉슨 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 레이건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한 알렉산더 헤이그는 1979년 7월 24일 상원 군사위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이 '핵 선제 불사용' 원칙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방의 일부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징병제를 부활하거나 병력 규모를 3배로 늘리거나 또는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까지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런 조치들을 취하지 않고 '핵 선제 불사용'을 서약할 경우, 서방은 재래식 전력과 지정학적 위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소련의 군사력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핵무기 믿고 재래식 군사개입, 비밀공작 자행 

한편 미국의 비판적 지성 노엄 촘스키는 미 대외정책에서 핵무기의 쓸모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우리의 전략핵무기 시스템은 미국의 재래식 군사행동에 대해 일종의 우산 역할을 한다. 즉 침략과 정부 전복 활동을 벌일 때 어떤 형태로든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해준다(미국의 핵무기 보복이 두려워 소련 등 제3자가 미국의 재래식 군사행동을 방해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 

카터행정부에서 국방 장관을 역임한 해롤드 브라운은 이것이야말로 미국 안보시스템의 핵심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핵무기가 있음으로써 미국의 재래식 병력이 '군사력 및 정치력의 의미 있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략핵무기라는 우산이 있기 때문에 (중략) 미국은 우리의 공격 대상 국가를 도우려는 국가를 마음 놓고 충분히 협박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시키고 싶다면 (중략) 또는 중동지역에 신속기동군을 파견하려 할 때 (중략) 또는 인도네시아의 군부 쿠데타를 지원하고 싶을 경우 (중략) 또는 베트남을 침공하려 할 때 우리의 군사행동이 저지될지도 모른다는 아무런 걱정 없이 이를 실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방해하려는 그 어떤 세력도 겁을 주어 쫓아낼 수 있는 충분한 힘(전략핵무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핵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기에 타국에 대한 재래식 군사 개입, 중앙정보국(CIA) 등에 의한 비밀공작을 마음 놓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기본적으로 핵무기에 의존해왔다. 다른 대량살상무기와는 달리 핵무기의 효과는 즉각적이며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중략) 엄청난 파괴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겁을 주는 효과가 있다. (중략) 미국은 다른 모든 나라의 국민들에게 제대로 겁을 주기 위해 제멋대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미친놈이라는 국민적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됐다"고 비판했다. 
 

▲ 미국의 전략폭격기 B-1B '랜서'(가운데)가 지난해 9월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의 핵무기는 세계를 향한 국가테러의 핵심 수단이다. 1971년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해 베트남전 종식에 기여한 다니엘 엘스버그는 "피해자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금품을 요구하는 무장강도처럼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국제적 위기나 갈등, 또는 전쟁이 있을 때면 언제나 핵무기라는 총을 꺼내 들었다. 2차 대전 이후 제럴드 포드를 제외한 모든 대통령들이 (다른 나라들에) 핵전쟁의 위협을 가해 왔다"고 말한다.  

나아가 노르웨이의 저명한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관총을 들고 학교 교실로 들어와 학생들을 인질로 잡은 채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학생 모두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한다면, 우리는 그를 위험하고 미친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국가 지도자가 수백만의 민간인들을 핵무기의 인질로 잡아두고 있는 상황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전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이중기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핵무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핵무기는 테러를 위한 도구이다"  

미국은 핵무기를 가질 권리가 있고 미국의 핵무기는 세계 평화를 위한 좋은 무기인 반면, 다른 나라들은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되며 타국의 핵무기는 세계 평화를 해치는 나쁜 것이라는 이중기준이 지난 70여 년간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해 오면서 핵무기는 이제 미국인의 정체성의 일부가 됐다. 미국 소설가 E. L. 독토로프는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1945년 이후 우리 마음속에는 누구나 폭탄을 품게 됐다. 그것은 처음에는 폭탄이었다가 다음에는 외교가 됐고 이제는 우리의 경제가 됐다. 어쩌다가 그토록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그 무엇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게 되었을까? 당초 적을 무찌르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거대한 골렘(자동기계, 로봇)이 이제는 우리의 문화, 우리의 폭탄의 문화가 됐다. 우리의 논리, 우리의 신념, 우리의 비전이 됐다"  

미국 핵무기는 세계적 불안정의 근원 

필리핀 출신의 사회학자 월든 벨로는 미국의 핵무기야말로 세계적 불안정의 근원이며 핵무기 확산의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이 핵무기를 앞세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려 하는 한, 이에 대한 저항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핵무기 확산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요컨대 미국의 핵무기는 지배의 수단인 반면, 소련에서 북한에 이르는 후발 핵보유국의 핵무기는 기본적으로 저항, 또는 억제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핵무기를 먼저 없애지 않는 한 세계적인 핵무기 철폐는 불가능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핵무기 철폐를 위한 캔버라 위원회'는 1996년 '핵확산의 공리(axiom of proliferation)'라는 원칙을 발표했다. '어느 한 국가가 핵무기를 갖고 있는 한, 다른 모든 국가들은 핵무기 보유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위원회의 일원인 리차드 버틀러 호주 핵무기철폐 특임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원칙을 내놓은 근본적 이유는 정의, 즉 공정함이야말로 전 세계 모든 시민들에게 가장 심원한 중요성을 갖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핵확산 공리와 연결시켜 본다면, 핵보유 국가들이 자신들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비핵 국가들에 대해서는 핵 없이도 안보를 확보할 수 있다며 핵 포기를 설득하는 것은 완전한 실패로 드러났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UNSCOM(유엔 이라크핵감시위원회)의 마지막 의장을 역임한 버틀러 대사는 2002년 시드니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일생 동안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위해 일해 왔다. (중략) 핵 보유국과 비핵 국가들 간의 문제는 핵심적이며 영구적인 것이다. (중략) 바그다드에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이라크인들이, 200개가 넘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은 놔둔 채 왜 자신들의 핵무기 개발만을 추궁하는지 그 이유를 대라고 했을 때였다.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대량의 핵무기를 자랑스럽게 보유하고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사람들이 자신들의 핵무기는 국가 안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앞으로도 계속 보유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편으로 다른 나라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비난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저 놀랄 수밖에 없다고" 

"이런 경험들에서 내가 얻은 결론은, 명백한 불공정함과 이중기준 등이 일시적으로는 거대한 권력의 압력에 의해 용납되겠지만 결국에는 본질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그러한 불공정함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물리학의 기본 법칙만큼이나 자명한 것이다" 

"나는 미국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중기준을 설득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완벽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높은 교육 수준에 사회의식이 투철한 미국 인들도 자국의 이중기준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비핵 국가들의 원망과 불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인들의 지독한 불감증 때문에 때때로 나는 화성인들과 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낄 때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핵무기가 이라크(가 보유하려 했던, 또는 북한이 개발하고 있는) 핵무기와 똑같이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중국의 핵무장과 북한의 핵개발 

버틀러 대사가 이라크 관리의 항변에 대해 직면했던 곤혹스러움을 중국 측도 느꼈다. 지난 4월 26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미중 관계와 중국의 북핵 대응'이라는 강연에서 중국 인민대 청샤오허 교수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려줬다.  

"2003년 미국의 파월 국무장관이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의 협조를 요청해 왔다. 당시는 2002년 10월 미국이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문제 삼으면서 제네바 기본합의가 파기된 이후였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고 핵 개발을 재개했다(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 이후 8년간 북한은 핵연료 생산 및 미사일 시험을 중단했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 등과 함께 6자회담 개최를 추진하고 있었다. 중국의 고위관리 다이빙궈와 푸잉이 평양을 방문해 강석주 외교부 부상에게 핵 개발 중단을 설득했다. 이에 대한 강석주의 대응은 '당신들도 (미국과 소련의 핵 위협에 맞서) 1964년에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다이빙궈 등은 '밥이나 먹자'며 대화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 제네바 합의 당시 미국측 수석대표였던 R.갈루치(왼쪽) 대사와 북한측 수석대표였던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 ⓒ연합뉴스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북한을 설득할 마땅한 명분을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중국 자신이 걸었던 길을 북한도 가겠다는데, 무슨 명분으로 말릴 수 있겠는가. 중국은 한국전쟁과 대만해협 위기 등에서 미국의 무수한 핵 위협을 받아온 데다 1958년 소련과 결별한 이후에는 소련으로부터도 핵 위협을 받고 있던 터였다. 결국 중국은 1960년부터 핵 개발을 본격화해 결국 1964년 10월 16일 첫 번째 핵실험에 성공했다.

당시 중국의 핵 개발은 미국에게 최대의 골칫거리였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중국은 미국에게 세계 최대의 깡패국가였다. 요즘의 이란이나 북한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이자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치른 최초의 전쟁, 즉 한국전쟁의 적대국이었던 중국이 핵무기를 가진다는 것을 미국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케네디 행정부는 중국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해 미소 합동으로 중국의 핵 개발 현장 로프노르에 대한 선제 핵 공격을 하자고 소련에 제안했으나 소련의 거부로 무산됐다. 또 중국이 최초 핵실험에 성공한 이후 존슨 행정부에서는 중국에 대한 단독 공습이 논의됐고, 핵 무장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숙적인 인도에게 미국의 핵무기를 제공하자는 기발한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미국의 대응은 핵클럽의 문을 닫는 것이었다. 1968년 체결되고 1970년부터 효력을 발휘한 핵확산금지조약(NPT)이 그것이다. NPT 체제가 성립하면서 국제적으로 공인된 핵보유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개국으로 한정됐다. 

NPT 체제 성립 이후 핵무기를 가진 나라는 인도와 파키스탄뿐이다. 인도는 1974년 5월 첫 번째 핵실험을(스스로 '평화적'이라고 주장한) 했으며 1998년 5월 11일과 13일 파키스탄 국경에 가까운 포크란에서 다섯 차례에 걸친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에 대항하여 파키스탄도 뒤이어 같은 달 28일, 단 하루에 발루치스탄 주(州)에서 여섯 차례에 걸친 지하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스라엘은 1960년대 중반부터 핵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도 백인 인종차별 정권 당시 6, 7개의 핵무기를 보유했었으나 1994년 만델라의 흑인 정권이 출범하면서 미국의 압력에 의해 핵무기를 해체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얼떨결에 핵보유국이 됐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은 미국이 주도하는 넌-루가 프로그램(Nunn-Lugar program)에 의해 보유 핵무기를 모두 해체했다.  

현재 세계에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개의 공인된 핵 보유국과 함께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3개의 비공식 핵보유국이 있다. 뒤의 세 나라는 핵을 갖게 된 것은 미국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인도는 라이벌 중국에 대한 대항마로, 파키스탄은 서아시아 최대의 미 동맹국이기 때문이다.

이제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 하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북한이 미국의 적대국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후세인과 리비아 가다피의 운명을 보면 알 수 있다. 1970년대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던 후세인은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죄로 13년간 미국 주도의 가혹한 경제제재에 시달리다 2003년 있지도 않은 핵무기를 이유로 미국에 의해 제거됐다. 

가다피는 영국의 중재로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미국과 국교를 회복했으나 내부 반란을 틈탄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개입에 의해 권력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북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이 핵 개발을 확고하게 결정한 것은 2003년 4월이라고 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2003년 3월 20일) 직후다. 후세인의 운명을 보면서 핵 개발을 결심했다는 얘기다.

군사력으로 북한 핵 개발을 저지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군사력으로 타국의 핵 개발을 저지한 사례는 딱 한 차례 있다. 1981년 6월 7일 이스라엘의 이라크 오시라크 원전 공습이 그것이다. 이라크 후세인은 1970년대 초부터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바그다드 남부에 오시라크 핵시설을 운용했는데, 이를 단 2분 만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등 서방측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어쨌든 공습 작전은 대성공이었다(한국의 경우, 1970년대 중반 프랑스의 도움으로 핵 개발을 시도했으나 미국의 압력에 의해 중도 포기했다). 

1940년대 후반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을 때, 미 군사지도자들은 소련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선제공격을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중국의 경우는 앞에 얘기했다. 북한의 경우 1994년 6월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정밀 타격(surgical strike)을 계획하고 실행 준비까지 들어갔으나 당시 북한을 방문 중이던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로 무산된 바 있다. 군사력을 동원한 핵 개발 저지가 시도되지 못한 것은 그 파장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현재 북한의 핵능력은 1994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화됐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전쟁 위협을 무릅쓰고 북한 핵시설에 대한 정밀타격을 시행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얘기다.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과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장(DNI) 등 미국의 전‧현직 고위관리들, 전문가들도 같은 의견이다.  

그런데 북한의 핵 개발 과정을 살펴보면 인도, 파키스탄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드러난다. 인도, 파키스탄은 하루 또는 사흘 만에 5, 6차례의 핵실험을 해치운 반면, 북한은 2006년 첫 핵실험 이후 2016년까지 만 10년에 걸쳐 다섯 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순식간에 핵실험을 해치운 이유는 자명하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반대와 제재가 현실화되기 전에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 하자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10년에 걸쳐 핵실험을 했다. 국제사회에 대해 보란 듯이, '누가 나 좀 말려줘' 하는 식으로. 북핵 개발 초기, 미국과 북한은 핵 포기와 북미 적대관계 청산을 골자로 하는 합의를 맺기까지 했다. 2007년의 2.13 합의가 대표적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핵 포기와 북한의 체제 보장을 맞바꿀 수도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1991년 미국을 방문한 김용순 당시 북한 외상이 아놀드 캔터 국무 차관과의 회담에서 주한미군 계속 주둔을 용인하면서까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열망했다. 이후에도 줄곧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해 왔다.  

과거 미국과 전쟁을 벌였던 중국과 베트남은 미국과의 화해 이후(중국은 1979년, 베트남은 1995년 국교 수립) 경제 개발에 나서면서 국제 사회에 완전히 복귀했다. 북한도 바로 그 길을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4년 10월의 제네바 기본합의와 2005년의 6자회담 9.19 공동성명 등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두 번의 기회가 무산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미국은 북한에, 북한은 미국에 돌리고 있다. 그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일이다. 단 필자는 미국 쪽에 더 책임이 크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거 실패의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다. 

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에서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 비핵화 추구'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 등 한반도 평화 체제를 위한 담대한 구상을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베를린 구상 5대 정책 방향의 첫 번째로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평화'라고 선언했다.  

올바른 출발이라고 본다. 물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정착은 쉽지 않은 과제다. 분단에 따른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 극우세력의 반발과 저항, 북한에 대한 남한 국민의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 남북한 관계 개선을 원치 않는 미국의 견제와 반대, 미국과의 협상을 중시하는 북한의 외면과 무시, 여기에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 등 첩첩산중이다. 

그러나 지난해 촛불 혁명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뜻과 지혜를 모을 수만 있다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니다. 민주화란 결국 '우리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 체제의 완성이란 결국 19세기 말 이래 외세에 의해 휘둘려온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의지와 힘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비상한 용기와, 지혜 그리고 무엇보다 단합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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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안중근 동상' 미스터리... 시진핑 지시 여부도 논란

 

의정부시 반응 '제각각', 6월엔 “모처에 보관 중” 7월엔 “한국에 없다”... 시민단체, 정보공개 청구

17.07.12 20:49l최종 업데이트 17.07.12 20:49l

 

 

 의정부시가 밝힌 '안중근 동상 설치 조감도'.
▲  의정부시가 밝힌 '안중근 동상 설치 조감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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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지시로 제작돼 국내에 반입된 뒤 현재 의정부시(시장 안병용) 모처에 보관 중이라는 '안중근 의사 동상'의 행방이 묘연하다. 의정부시가 안중근 동상의 소재 여부를 두고 각기 다른 입장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동상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지시로 제작됐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 안중근 의사와 연고가 없는 의정부시에 동상이 세워진다는 점을 두고 의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시민단체는 "의정부시가 혈세를 들여 과정과 배경이 불명확한 보여주기식 행정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 6월 의정부시 관계자는 몇몇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중근 동상이 5월 중순 인천항을 거쳐 의정부에 도착했다, 한중 관계를 고려해 그동안 공개하지 않고 모처에 보관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11일 의정부시 공보팀은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아직 안중근 동상이 국내에 들어온 게 아니다"라면서 "안중근 동상 제작이 추진 중에 있다"라고 밝혔다. 그동안 의정부시가 밝혀온 내용과는 다른 이야기다.

 

안중근 동상의 의정부시 유치는 안병용 의정부시장의 숙원사업이다. 의정부시는 그동안 "2013년 6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정상회담 당시, 시 주석이 안중근 동상 제작을 지시했다"며 "민간단체인 차하얼학회와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안중근 동상을 의정부시에 유치할 계획이다, 동상은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다"라고 밝혀왔다. 중국 동상 제작을 맡은 차하얼학회는 한화 16억 원을 들여 동상을 제작해 의정부시에 기증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안병용 시장의 관심 역시 지대하다. 안 시장은 2014년 9월 19일 차하얼학회가 개최한 차하얼 평화포럼에 참석해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고찰과 현대적 재조명>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동상 유치에 공을 들여왔다. 같은 해에는 2014 안중근평화상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6월엔 "동상, 모처에 보관 중"... 7월엔 "동상, 현재 한국에 없다"
 

 지난해 12월 5일 오후 의정부 장암동 인근에서 열린 동부간선도로 개설 준공식에서 안병용 의정부시장이 축사하고 있는 모습.
▲  지난해 12월 5일 오후 의정부 장암동 인근에서 열린 동부간선도로 개설 준공식에서 안병용 의정부시장이 축사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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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정부시 관계자들은 그동안 나왔던 의정부시의 반응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복수의 의정부시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안중근 동상 세우기 사업은 현재 추진 중"이며 "안중근 동상은 현재 한국에 없다"라고 밝혔다. 이 사업에 관여했던 관계자 A씨는 "사드 때문에 한중 관계가 안 좋지 않나, 중국에서 동상을 제작한다고 해서 (지금의 외교 상황 상) 한국에 (동상을) 줄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렇다면 지난 6월 의정부시는 왜 '의정부시가 안중근 동상을 보관 중'라는 보도에 대해 정정보도요청 등의 조처를 취하지 않았을까. 의정부시 공보팀 관계자 B씨는 "(해당 언론 보도에 대해) 따로 대응하라는 지시가 없어서 정정보도요청 등을 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두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자 안병용 의정부시장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공보팀은 "시장님 일정이 바빠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의정부 시민모임 '버드나무포럼'은 12일 안중근 동상에 대한 의정부시의 엇갈린 설명을 비판하고 나섰다. 버드나무포럼은 의정부시에 '안중근 동상의 의정부 도착에 관한 정보 일체'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구진영 버드나무포럼 이사는 "행정 기관이 시민을 상대로 거짓말하면 안 된다, 만약 동상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의정부시는 관련 언론보도에 대해 정정보도를 요청해야 하고, 기사에 언급된 '시 관계자'가 누군지 밝혀야 한다"라며 "만약 동상이 도착했다면 의정부시는 어느 곳에 동상을 보관 중인지 밝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시진핑, 동상 제작 지시했다" vs. "한중 정상간 동상 관련 약속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7일 오후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회견을 마친뒤 환한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다.
▲  박근혜 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6월 27일 오후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회견을 마친뒤 환한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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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동상의 제작 배경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의정부시는 그동안 해당 동상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지시에 의해 제작됐다'라고 밝혀왔다. 안 시장은 지난 2015년 5월 14일 의정부 예술의전당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한중 공공외교 평화포럼'(의정부시·차하얼학회 공동 주최)에서 "(2013년) 한중 정상회담 때 박근혜 대통령이 하얼빈역에서 역사의 흔적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자 시진핑 주석이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동상 제작을 지시했다"라면서 "이에 차하얼학회가 쌍둥이 동상을 만들어 한국에 기증하자고 제안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하얼빈역에서 만난 2013년 6월 당시 보도를 살펴보면 시 주석의 안중근 동상 제작 지시에 대한 내용은 일체 없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 기념 표지석을 하얼빈역에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 협조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시 주석이 "관련 기관에 이를 잘 검토하도록 지시했다"라고 답했다는 기록은 있다.

외교부 동북아3팀 관계자는 지난 11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시 주석의 안중근 동상 제작 지시가 있었는지 파악된 게 없다, 한중 정상간의 논의에 따라 진행된 것은 안중근 기념관 개관뿐이다"라고 밝혔다. 

주중 한국대사관도 같은 반응이다. 주중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안중근 동상 제작과 관련해 한국과 중국 정부간 약속된 사안은 없다"라면서 "시 주석이 차하얼학회에 따로 지시했을 수 있는데, 이는 중국 국내 정치 사안이므로 외교 라인에서 확인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차하얼학회의 대표인 한핑밍(韓方明) 주석은 2016년 12월 의정부·차하얼 공공외교 평화포럼 연설에서 "차하얼학회가 의정부시 시민들에게 선물할 '대한의사 안중근' 대형 동상이 이미 완성돼 적당한 시기에 의정부 기차역 평화공원에 설치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의 지시가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었다. 이와 관련해 차하얼학회에 시 주석 지시 여부를 확인하고자 문의했지만,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중근과 관련 없는 도시 의정부, 왜 동상 유치할까"

'왜 안중근 동상이 의정부시에 설치돼야 하나'라는 문제 제기도 있다. 구진영 이사는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나 왜 의정부시에서 이 사업에 적극적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의정부시가 밝힌 동상 설치 배경은 크게 세 가지다. ▲ 의정부시가 경기 북부 독립운동 활동의 근거지이며 평화·통일의 중추적인 곳에 있다는 점 ▲ 한중우호관계 증진 ▲ 중국인 관광객 유치가 바로 그것. 

하지만 안중근 의사 관련 단체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안중근의사숭모회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해당 인물과 연결고리가 있는 곳에 동상이 세워지는데 의정부시는 안중근 의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면서 "2006년에 중국 하얼빈에 세워졌다가 열흘 만에 중국 정부에 의해 철거된 안중근 동상이 (안 의사와 관련이 없는) 2009년 부천에 세워진 것도 부천시와 하얼빈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9년 부천시는 안중근 동상을 유치하면서 동상 주변에 '안중근 공원'을 조성했다. 또한 관련 단체는 이 공원에서 매년 안중근 의사 관련 행사를 열고 있다.

한편, 의정부시가 들여온다는 안중근 동상 디자인은 그동안 차하얼학회가 여러 단체 및 기관에 기증해왔던 동상 디자인과 동일하다. 차하얼학회는 2014년 4월 안중근의사숭모회에 소형 동상(높이 40cm가량)을, 같은 해 5월에는 북경은제예술관(北京银帝艺术馆)에 소형 동상을 기증했다.

안중근 동상을 둘러싼 의정부시의 불명확한 행보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구진영 이사는 "안중근 동상을 유치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의정부시가 투명하지 않은 과정으로 시민 세금이 투입되는 사업을 추진하는 건 큰 문제다"라면서 "게다가 시진핑 주석이 동상 지시를 했다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의정부 시정을 홍보하는 건 보여주기 행정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설령 안중근 동상이 설치된다고 하더라도 절차의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예산만 쓰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동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014년 4월 차하얼학회가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안중근 의사 소형 동상. 의정부시가 유치하겠다는 동상과 같은 디자인이다. 크기만 다를 뿐이다.
▲  지난 2014년 4월 차하얼학회가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안중근 의사 소형 동상. 의정부시가 유치하겠다는 동상과 같은 디자인이다. 크기만 다를 뿐이다.
ⓒ 안중근의사숭모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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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4년 5월 차하얼학회가 중국 북경은제예술관에 기증한 안중근 의사 동상. 의정부시가 유치하려는 안중근 의사 동상과 디자인이 동일하다.
▲  지난 2014년 5월 차하얼학회가 중국 북경은제예술관에 기증한 안중근 의사 동상. 의정부시가 유치하려는 안중근 의사 동상과 디자인이 동일하다.
ⓒ 차하얼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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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 재일동포의 자유왕래를 허하라"

(추가) 조선적 재일동포 입국모임, '광화문 1번가'에 정책제안서 제출
김치관/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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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2  14: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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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적 재일동포 입국실현을 위한 모임’은 12일 국민인수위원회가 설치된 ‘광화문 1번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조선적 재일동포의 조건없는 자유왕래를 위한 정책제안서’를 제출했다.[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재일교포입니다. 남기고 싶은 말이 태산과 같이 쌓여 있습니다.
여권신청시 애국가강요 선서강요등등 협박하듯이 진행되는 영사관의 면담 등 내 나라 내 고향에 가는것이 어찌나 어려운지요.
대사관이 영사관이 과연 이런 직권을 이용해도 되는건가요...“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각계의 적폐청산 요구가 거센 가운데, 조선적 재일동포의 자유왕래 실현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의 정책제언이 나왔다.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와 지구촌동포연대, 몽당연필 등이 참가하고 있는 ‘조선적 재일동포 입국실현을 위한 모임’은 12일 오후 1시 국민인수위원회가 설치된 ‘광화문 1번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조선적 재일동포의 조건없는 자유왕래를 위한 정책제안서’를 제출했다.

김명준 영화감독은 “작년 7월에 단체들이 모여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준비를 해왔고, 이번에 광화문1번가를 마감하는 시점에 정책제안을 하기 위해 모였다”며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도 열심히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조선적 재일동포들에게도 기회의 평등을’이라는 제목의 정책제안에서 “해묵은 적폐들 중에서도 항상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려왔던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재외동포들에 관한 문제”라며 “특히,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갔던 재일동포들은 일본정부의 차별과 탄압뿐만 아니라 분단으로 인한 체제경쟁의 희생자로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고 강조했다.

1947년 일본 정부가 외국인등록령을 실시할 당시, 재일동포들은 ‘조선’적을 부여받았으며, 1965년 한.일 국교수립으로 ‘한국’적자가 늘었지만, 여전히 ‘조선’적을 유지하는 재일동포는 3만여 명.

이들 중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과 관련있는 이들도 있고, 조국의 분단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는 등 각각 다양한 이유로 ‘조선’적을 보유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들에 대해 정부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10조에 의거,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야 하지만, ‘조선’적은 ‘북한’적으로 취급해 여행증명서를 쉽게 발급하지 않고 있어 문제라는 지적이다.

실제 지난해 7월 국내 책 출판기념회 참석차 입국하려던 정영환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는 정부가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입국을 불허한 바 있다. 이러한 정부의 차별적 태도는 민주정부를 지나 보수정부 들어 뚜렷이 드러났다.

   
▲ 조경희 성공회대 HK교수가 조선적 보유자로서 방한 과정에서 겪은 생생한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민변 공익권변론센터 소장인 송상교 변호사가 조선적 재일동포들에 대한 입국 제한 조치의 법적 문제점을 짚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지금은 한국 국적자인 조경희 성공회대 HK교수는 “저의 경우에는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로 대한민국에 보내 줄 수가 없다. 통일됐다고 생각하느냐. 말도 안 되는 말을 하지 말라’ 이런 식의 협박 수준의 이야기들이 계속 있어 왔다”며 “2000년대 초반의 일이기 때문에 민주정권 시기에도 계속 이런 일이 있어 왔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도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남한이라는 곳은 조선적자들한테 절대로 갈 수 없고 가고 싶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땅이었는데 일단 특히 2000년대 이후에 그들이 가고 싶은 땅,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는 것은 큰 변화”라고 평가하고 “그것이 점점 2008년 이후부터 다시 후퇴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외교부가 밝힌 ‘조선적 재일동포 여행증명서 신청 및 발급 현황’에 따르면, 2006년 99.7%, 2007년 100% 의 여행증명서 발급률이 보인 반면, 2010년 43.8%, 2011년 39%, 2016년 34.6%으로 급감했다. 게다가 정부가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자 신청건수도 2005년 3천329건에서 2010년 401건, 2012년 44건, 2016년 26건 등으로 줄고 있다.

시민사회는 △여행증명서 발급 심사 완화 등 여권법 개정, △무국적 동포를 포함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 개정, △인권침해 방지와 기본권 보장을 위한 행정지침 마련 등의 정책을 제언했다.

그러면서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 등 과거 국가로부터의 인권침해에 대한 진실규명과 후속조치들을 통하여 미래지향적인 재일동포와 정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더 나아가 통일지향적인 관계형성을 위해서 조선적 재일동포들에 대한 자유왕래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최상구 지구촌동포연대 사무국장(왼쪽)과 김명준 감독이 광화문1번가에 정책제안을 제출하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기자회견을 마친 참가자들은 김명준 감독과 최상구 지구촌동포연대(KIN) 사무국장을 앞세워 ‘광화문1번가’에 정책제안서를 접수시키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기자회견 사회를 맡은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은 “오늘 이 정책제안을 접수하기 위해서 10일부터 인터넷을 통해 서명을 받았다”며 “오늘까지 모두 개인은 1,210명, 단체 15개, 전체 1,225 분의 찬동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10년 가까이 이렇게 못 오고 있다는 건 너무나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고 덧붙였다.

   
▲ 정책제안을 접수한 뒤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광화문1번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수정,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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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연 1조 간접지원’하는데…분담금 협상엔 7년째 빠져

 

등록 :2017-07-12 05:00수정 :2017-07-12 09:12

 

[미군기지이전 잃어버린 10년] ③ 
올해 분담금 협정 직접비용만 9507억원 
면세, 공짜 임대 등 간접지원도 엄청나
국방부는 7년째 집계조차 안해 
분담금 한국 부담 낮출 지렛대 포기
주한미군이 최근 5년 새 경기도와 서울시에서 최소 676억원의 지방세를 면제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주한미군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서울시로부터 144억원의 재산세·자동차세·지방교육세 등을 감면받았다. 같은 기간 경기도가 주한미군에 면제해준 지방세 중 추산 가능한 금액은 약 532억원에 이른다. 경기도의 경우 지방세 수입 중 비중이 큰 자동차세가 빠진 금액이어서 실제 면제액은 이보다 훨씬 클 게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한겨레>가 최근 한달간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김종대 의원(정의당)을 통해 입수했거나 직접 취재로 파악한 주한미군 간접비 지원 현황을 분석한 결과다.

 

한국이 주한미군에 제공하는 비용 지원은 직접 지원과 간접지원으로 나뉜다. 우선 주한미군은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SMA)에 따라 매년 일정액을 현금과 현물로 받는다. 여기에, 주한미군 한국군지원단(카투사), 사유지 임대료 및 보상·매입비, 기지주변 정비, 민원 해결 비용 등을 더한 게 정부 예산으로 집행되는 직접 지원이다. 올해 직접지원비는 분담금 9507억원을 포함해 1조원 안팎이다.

 

그러나 감춰진 비용인 간접 지원 평가액도 직접 지원 비용에 맞먹는다. 주한미군은 한국 정부와 맺은 ‘주둔군 지위협정(SOFA·이하 소파)’에 따라 기지 땅을 무상으로 공여받는다. 그 평가액이 전체 간접지원비의 약 70%를 차지한다. 또 대부분의 세금과 공공요금을 면제받고, 전기·가스·상하수도 등 공공 서비스 사용료는 최저요율을 적용받는다. 올해 초 시민단체 평화와통일을찾는사람들(평통사)의 정보공개 청구로 관세청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미군은 2011~2014년 사이에만 무려 1907억원의 관세를 면제받았다.

 

 

2014년 1월  9차 미군주둔비부담 특별협정 체결을 위한 10차 협상이 열리고 있는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앞에서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미군주둔비부담금 삭감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키워드 : < 9차 미군주둔비부담 특별협정 체결 10차 협상 >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시민단체 < 미군주둔비부담금 삭감 요구 기자회견 >
2014년 1월 9차 미군주둔비부담 특별협정 체결을 위한 10차 협상이 열리고 있는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앞에서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미군주둔비부담금 삭감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키워드 : < 9차 미군주둔비부담 특별협정 체결 10차 협상 >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시민단체 < 미군주둔비부담금 삭감 요구 기자회견 >
2013년 국방부는 이듬해부터 적용될 9차 방위비 협정 협상을 앞두고 국회의 요구로 ‘2008~2010년 주한미군 직·간접 지원 현황’ 자료를 제출한 바 있다. 2010년의 지원 총액 추계는 분담금 7904억원을 포함해 1조6749억원이었는데, 이 중 간접지원 합계가 8188억원으로 총액의 거의 절반(48.9%)을 차지했다. 이런 비중은 3개년 모두 비슷했다. 이후 지금까지도 주한미군 지원 총액에서 간접비가 차지하는 항목과 비중에 큰 변화가 없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올해 주한미군에 대한 직간접 지원 총액은 분담금 9507억원을 포함해 합계 1조8000억원 안팎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한미군 간접비 지원의 전체 규모와 내역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과세의 근거가 되는 ’과표’ 산출이 불분명한데다 미군 쪽이 정확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다수 지자체들은 소파 규정에 따라 미군 차량의 과세대장이 아예 없으며, 등록 현황을 관리하지도 않는다. 미군 기지 안 건물 등 보유 재산도 파악할 수 없다. 지자체들은 물론 중앙정부도 주한미군에 대한 정확한 세금 감면액을 알지 못하거나, 실제 감면액에 견줘 턱없이 적은 추정액을 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행정자치부 지방세특례제도과 관계자는 <한겨레>의 지방세 감면 자료 요청에 “지방세는 전국 233개 지자체가 직접 관리하므로 중앙정부가 세세하게 알 수 없고, 자료를 집계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는 2011년 이후로는 간접비 추산액을 집계조차 하지 않았다. 2013년 정기국회에서 진성준 민주당 의원(국방위)은 국방부에 ‘공식·비공식으로 확인한 주한미군 주둔 비용에 관한 내역 일체’와 ‘2011~12년도 주한미군 직간접 지원 현황’을 요구했지만 국방부는 자료를 내지 않았다. “(주한미군에 대한) 우리 쪽 직·간접 기여 평가액에 양국이 합의한 바 없고 합의되기도 어려우며, (제9차) 방위비 분담 협상을 진행 중이므로 이를 공개시 우리 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지금까지 이런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방부 공보담당관실은 “2011년 이후 주한미군 간접지원 비용을 집계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다만 “내년부터 시작할 제10차 방위비 분담 협상을 앞두고 경제적 부담 경감 등 국익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간접비 재추산의 여지는 열어뒀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02415.html?_fr=mt1#csidx852fed8cf423ff4b84d66c92ba346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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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 '패닉'에 빠지다

 
국민의당 "제보 검증 못한 법적 책임…추미애 가이드라인 의구심"
2017.07.12 08:54:47
 

 

 

 

'문준용 특혜취업 제보 조작' 사건의 핵심 인물이던 이준서 전 국민의당 최고위원이 구속됐다. 검찰 수사는 국민의당 '윗선'으로 향할 전망이다. 국민의당은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안철수 전 대선후보도 더욱 곤혹스런 처지가 됐다.  

법원은 12일 새벽, 이 전 최고위원에 대한 검찰의 사전구송영장 청구를 받아들여 영장을 발부했다. 서울남부지법은 "범죄 사실이 소명되고 증거 인멸 및 도망 염려가 있다"고 발부 사유를 밝혔다.  

법원이 적시한 '범죄 사실'이란, 국민의당 당원 이유미 씨에 조작된 제보가 허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국민의당 대선캠프가 이를 공개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죄의 공범 혐의에 해당한다.  

이준서의 혐의는? 

검찰은 이 전 최고위원이 지난 4월 27일 이유미 씨를 만나 '문준용 씨와 미국 파슨스스쿨에서 같이 유학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증언 녹취를 구해 오라고 지시했다. 당시 이 전 최고위원은 안철수 대선캠프의 '2030희망위원회' 위원장이었고, 이 씨는 이 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이 전 최고위원은 녹취를 구해 오라고 시키면서 '이 일을 잘 처리하면 청년위원장이 될 수 있고, 청년위원장은 당연직 당 최고위원이어서 쉽게 비례대표 국회위원이 될 수 있다'고 대가를 약속한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  

이 전 최고위원은 이후 5월까지 수 차례에 걸쳐 이 씨에게 자료를 구해 오라고 압박했고, 결국 이 씨는 5월 1일 '카카오톡' 대화창 화면을 날조한 그림파일 11장을, 같은달 3일에는 남동생을 제보자인 것처람 꾸민 허위 음성파일 2건을 이 전 최고위원에게 보낸다. 이 전 최고위원은 이 자료가 언론에 보도되게 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여의치 않자 당 공명선거추진단에 전달, 같은달 5일과 7일 기자회견을 열게 했다.  

이 전 최고위원과 국민의당은 이 과정 전체에서, 당 지도부 및 공명선거추진단 간부들은 물론 이 전 최고위원 본인도 자료가 조작된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 전 최고위원과 당 간부들이 조작 사실을 알게 된 것은 6월 24일(이용주)·25일(이준서)에 와서였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5월 5일 기자회견 당시에는 이 전 최고위원이 조작 사실을 '알 수 있었'고, 5월 7일 기자회견 때에는 허위임을 알고 있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언급한 '미필적 고의'란 5일 기자회견 때의 상황을 말한다. 적어도 허위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응당 해야 할 사실 확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자료가 공개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미필적 고의'에 이어 '부작위에 의한' 범죄라는 쟁점도 있다. 

다만 검찰도, 영장 청구 단계까지는 이 전 최고위원이 이 씨에게 '자료를 조작하라' 내지 '조작을 해서라도 자료를 가져오라'는 등 명확한 조작 지시를 했다는 혐의는 밝혀내지 못했다. 

국민의당 향하는 검찰 칼끝 

이 전 최고위원의 신병을 확보한 검찰은, 지금까지 밝혀낸 그의 혐의에 대해 기소를 준비하는 한편 보강 수사를 통해 그가 이유미 씨에게 조작을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지시했는지 등을 더 캐물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전 최고위원이 5월 5일에는 제보 내용이 허위일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고, 5월 7일에는 이미 허위임을 알고 있었다'는 검찰의 관점이 법원의 영장 발부를 통해 힘을 얻었다고 보고, 각각의 시점에서 국민의당 지도부와 공명선거추진단 간부들은 이 내용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나 조사하는 과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공명선거추진단 단장이었던 이용주 의원, 부단장이었던 김성호 전 의원과 김인원 변호사는 기자회견 전인 5월 4일 이 전 최고위원으로부터 조작된 자료를 넘겨받아 회견을 연 당사자들이다. 검찰은 이들이 5일 기자회견 시점에서 자료가 조작된 것임을 인지했는지, 이때까지는 몰랐다 하더라도 민주당 측의 반박 기자회견 후였던 7일 시점에서는 알 수 있지 않았는지 추궁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들이 제보가 허위임을 알았거나, 최소한 허위일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기자회견을 강행했다면 이들 역시 미필적 고의에 따른 허위사실 공표 혐의를 받게 된다.  

검찰은 앞선 참고인 진술 등을 통해, 공명선거추진단 간부들 역시 제보가 허위일 가능성을 인식했을 개연성이 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김 전 의원과 김 변호사를 이미 소환 조사했고, 이번 주 안으로 이들 두 명을 재소환할 계획이다. 이용주 의원은 아직 보좌진만 조사를 받았으나, 이 의원에 대한 소환도 곧 이뤄질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또 이 전 최고위원과 박지원 당시 국민의당 대표 사이에 5월 1일 약 36초간 전화 통화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박 전 대표가 조작 사실 혹은 가능성을 인지했는지에 대해서도 검찰 조사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박 전 대표는 이를 직감한 듯, 이날 새벽 트위터에 "처음부터 검찰 수사와 사법부 판단을 기다리자고 했던 저로서는 법정에서 사실 다툼이 예상되지만 현 (영장 발부) 결정을 수용한다"며 "저와 우리 당은 향후 검찰 수사와 사법부의 재판 진행에 성실히 협력하겠다"고 했다.  

국민의당 '정치적 신뢰' 추가 타격…安, 입장 발표 타이밍 '실기'

검찰 수사가 '사법적 책임'의 영역이라면, 정치적 책임의 영역에서도 이번 영장 발부는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국민의당은 지난 3일 당 자체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이유미 씨의 단독 범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발표 시점부터 이미 '만약 검찰 수사 결과가 당 자체 조사 결과와 다를 경우 치명타'라는 관측이 나왔었다. 이날 이 전 최고위원이 구속됨에 따라, 사태는 바로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미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당 지지율 꼴찌를 기록하고 있는 국민의당의 고심은 더욱 깊어지게 됐다. 국민의당은 '당 붕괴설', '정계개편설'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당원 수가 전체적으로는 늘어났다며 애써 태연한 기색을 짓기도 했지만 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은 '당원 수도 조작한 것 아니냐'는 등 조롱과 불신 일색이었다. 

17일째 이어지고 있는 안철수 전 대표의 '침묵'도 더욱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안 전 대표는 사건 초기 '나도 잘 모르는 일이기에 섣불리 입장을 내기보다는 당 자체 조사나 검찰 수사 등을 통해 사실관계가 어느 정도 밝혀진 후에 정리된 입장을 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시기를 놓친 셈이 됐다. 국민의당 내에서도 '차라리 모르면 모르는 대로 초반에 입장을 발표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안 전 대표는 특히 자신의 총선 인재영입 '1호'였던 이준서 전 최고위원의 구속 여부를 주시했다고 한다.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안 전 대표는 이 전 최고위원 구속영장이 기각될 것으로 봤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측근인 김경록 전 국민의당 대변인은 지난 9일 페이스북에 "그 친구를 믿는다"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 전 최고위원이 구속되면서, 안 전 대표가 상황을 파악하고 입장을 정리하는 데 추가로 시간을 들이다 또다시 실기할 가능성도 있다. 

위기의 국민의당, 대응은? 

이런 가운데 나온 국민의당의 첫 반응은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 다시 한 번 국민 여러분께 진정으로 사과드린다"면서도 "추미애 민주당 대표의 '수사 가이드라인' 제시가 검찰 수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고 하는 등 상반된 논조가 혼재된 양상이었다.  

손금주 국민의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새벽에 낸 논평에서 이 전 최고위원의 구속을 받아들인다면서도 민주당을 향해 "앞으로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을 정략과 정쟁으로 왜곡·확대시키려는 시도를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했다.  

손 대변인은 이번 영장 청구로 인해 국민의당이 신뢰의 위기에 직면한 점을 의식한 듯 "영장(에 기재된) '범죄 사실'이 당 진상조사단의 조사결과와 다른 점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검찰은 이번 사건이 이유미 씨의 단독 범행이라는 사실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이 씨가 단독으로 조작한 제보 내용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 이 전 최고위원에 대해 법률적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지원 전 대표는 반면 수사와 재판에 성실히 협력하겠다고 밝히면서 "이러한 사태에 대해 당시 당 대표, 상임선대위원장으로서 머리숙여 용서를 거듭 바란다"고만 했다. 

국민의당은 추미애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정치인들의 공격에도 직면할 예정이다. 민주당은 이날 아침 7시경, 이례적으로 이른 시간에 대변인 논평을 내어 "국민의당 '셀프 조사' 결과는 꼬리 자르기였음이 명확해졌다"며 "허위사실 공표 과정에 대선 당시 책임 있는 인사들의 암묵적인 지시나 묵인, 방조가 있었는지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공격했다. 
 

▲이준서 전 국민의당 최고위원이 12일 새벽 구속된 상태로 검찰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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