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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방중 빛과 그늘… 우병우 마침내 구속

[아침신문 솎아보기] 문재인·시진핑 한반도 비핵화·평화 4원칙 합의…중국 경호원 한국기자 폭행 논란에 중국 측 조사 돌입

노지민 기자 jmnoh@mediatoday.co.kr  2017년 12월 15일 금요일

취임 후 첫 국빈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 비핵화 및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핵 해결에 뜻을 모았다. 한·중 정상의 회담은 지난 7월 독일, 지난달 베트남에 이어 세 번째다. 주요 조간 신문들은 모두 이날 정상회담 소식을 비중있게 다뤘다.

다음은 15일자 주요 종합일간지 머릿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   “한·중 관계 일시적 후퇴…새출발 하자” 
국민일보   한·중 정상 “한반도 전쟁 절대 반대” 
동아일보   사드 또 꺼낸 시진핑 “적절 처리 희망” 
서울신문   한·중 정상 “한반도 전쟁 절대 용납 못한다” 
세계일보   “사드 반복되지 않도록 관리해야”…“양국관계 조속한 회복·발전 중요”
조선일보   韓·中 정상 “한반도 전쟁 절대 안된다” 
중앙일보   한·중 정상 “한반도서 전쟁 용납 못한다” 
한겨레   한-중 정상 “전쟁 절대 용납못해” 한반도 평화 4원칙 합의
한국일보   中 경호원에 집단 폭행당한 ‘한국 언론’
 

이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확대 정상회담과 소규모 정상회담을 가진 두 정상은 △한반도에서 전쟁 절대 용납 못해 △한반도 비핵화 원칙 확고히 견지 △북핵, 대화·협상 통해 평화적 해결 △남북 관계 개선, 한반도 문제 해결 공감 등 4가지 원칙에 합의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긴밀한 소통을 이어나가기 위한 한·중 정상 간 핫라인 구축에도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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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움츠러들었던 경제, 환경, 미래 산업 등에 관한 교류 협력도 재개·확대하기로 했다. 양국 정상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서비스·투자 분야 후속 협상 개시 양해각서(MOU), 미세먼지 관련 협조 MOU 등 7개 MOU 채택했다. 내년 2월 평창 겨울 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도록 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동북아 긴장 완화에 기여하도록 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회담을 마친 문 대통령은 15일 베이징대에서 강연하고, 리커창 국무원 총리·장더장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장과 면담한 뒤 중부내륙 도시 충칭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두고 한·중 관계가 “더디지만 나아지고 있다”(경향)는 평가가 지배적인 가운데, 14일 중국 경호원들의 한국 사진기자 폭행사건 논란이 불거졌다. 한국일보는 1면 머릿기사로 관련 소식을 다루며 중국 측에 대한 비판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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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베이징 국가회의중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중 경제무역 파트너십 행사 도중 중국측 경호인력 10여 명이 문 대통령의 한국 기업 부스 시찰 장면을 취재하던 한국 사진기자들을 가로막았다. ‘취재 비표’를 받아 취재 중이던 기자들이 이에 항의하자 중국측 경호원이 한국일보 기자의 멱살을 잡아 넘어뜨렸고, 이에 항의하는 매일경제 기자를 복도로 끌고 가 구타했다. 10여 명의 중국 경호원들은 매일경제 기자가 바닥에 넘어진 뒤에도 구타를 멈추지 않았고, 한 경호원은 기자의 얼굴을 발로 가격했다. 해당 기자는 안와골절(외상에 의해 안구를 둘러싸고 있는 뼈에 골절이 생긴 상태)을 입은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가 한국 경호팀 측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청와대 경호팀은 상황 종료 후 도착했다. 폭행당한 기자들은 문재인 대통령 숙소에서 대통령 주치의로부터 치료를 받다 부상이 심해 외부 병원으로 옮겨진 상태이다. 청와대는 폭행현장에서 채증한 동영상과 사진을 공안에 증거로 제출했고, 중국 공안은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폭행당한 기자들은 15일 중국 공안에 출석해 피해 진술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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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측은 폭행을 가한 경호원들이 “코트라 중국지사가 계약한 경호업체 직원들이라는 보고가 있어 상황을 파악 중”이라며 사실관계를 엄밀하게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코트라 관계자는 “코트라는 행사장(국가회의중심)으로부터 지정된 보안업체와 계약해 신고했고, 현장 지휘와 관리감독은 중국 공안에 따랐다”는 입장이다. 앞서 사건이 알려진 뒤 루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이번 행사는 문재인 대통령 방중에 맞춰 한국 측에서 주최한 자체 행사”라고 밝혀 책임 회피라는 지적이 제기된 바 있다.

 

일부 언론은 이번 사건을 ‘한국 홀대론’으로 연결하고 있다. 특히 동아일보는 2면 머릿기사에서 이 사건을 ‘국빈 행사 초유의 폭력’이라고 표현하고, 하단 기사에서는 ‘세끼 연속 따로 밥먹은 국빈’, ‘왕이 文대통령 팔 툭툭 치며 인사…결례 논란’ 등 기사를 배치해 문재인 대통령이 ‘국빈’으로서 푸대접받았다는 프레임을 부각했다.

최순실 25년형 구형·‘법꾸라지’ 우병우 구속 

박영수 특별검사팀과 검찰이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재판장 김세윤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최순실씨 결심공판에서 최 씨에게 징역 25년과 벌금 1185만원, 추징금 77억 9735만원을 구형했다. 현행법상 유기징역은 최대 30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최대 구형이다. 함께 기소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에겐 징역 6년에 벌금 1억원, 추징금 4290만원이 구형됐고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겐 징역 4년, 추징금 70억원이 구형됐다. 

 

20171215_서울신문_檢 “비선실세의 탐욕·악행”… 崔 “사회주의 재산몰수보다 더해”_종합 08면.jpg
 
최 씨는 최후진술에서 “1000억원대 벌금은 사회주의에서 재산을 몰수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다. 나는 어떤 사익도 취한 적 없다”며 흐느껴 울었다고 전해진다. 특검은 “권의주의 정부의 유산으로만 알고 있던 정경유착 병폐가 현재에도 그치고 있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며 “온 국민을 도탄에 빠트린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법꾸라지’로 불려온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15일 새벽 3번째 영장 끝에 구속됐다. 지난해 11월 우 전 수석 첫 검찰 소환조사가 이뤄진 지 13개월 만이다. 우 수석은 그간 5번의 검찰 조사, 3번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권순호 영장전담부장판사는 “혐의 사실이 소명되고 특별감찰관 사찰 관련 혐의에 관해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서울중앙지검 국정원 수사팀(팀장 박찬호 2차장검사)은 11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우 전 수석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우 전 수석은 청와대 민정수석 재직 시절 추명호 전 국정원 국장에게 이석수 전 대통령 직속 특별감찰관과 박민권 1차관 등 문화체육관광부 간부 및 민간인을 불법 사찰하고 자신에게 비선 보고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른바 ‘교육·과학계 블랙리스트’ 관여 의혹도 받고 있다. 우 전 수석 구속으로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 불법 사찰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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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는 “국정농단 의혹 최정점에 위치한 박근혜 전 대통령 1심만 현재진행형으로 남게 됐다”고 짚었다. 박 전 대통령이 지난 10월 ‘재판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진행되고 있는 ‘궐석’ 재판은 이르면 내년 1월 늦어도 2월 내 마무리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40억 원 상납 및 사적 유용, 친정부 성향 보수단체를 불법 지원한 ‘화이트리스트’ 사건 등과 관련해 뇌물수수 직권남용 등 혐의가 추가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온수역 또 ‘지하철 선로 작업 중 사망’ 

14일 아침 8시쯤 국철 1호선(경인선) 온수역과 오류동역 사이에서 배수로 작업을 하던 일용직 노동자 전 모씨(25)가 열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인력사무소에서 일감을 얻어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인 전 씨는 현장에서 일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신참’으로 알려졌다. 선로 작업 시 현장 관리자가 사전에 공사 시간이나 위치를 관할 역사에 알리고 승인을 받는 ‘작업 협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이번 사고에서 관련 협의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1년 새 벌써 네 번째 선로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13일 오후 2시 35분쯤 충남 당진 현대 제철 공장에서는 설비 보수 작업을 하던 노동자 주 모 씨(28)가 기계장치에 몸이 끼어 숨졌다. 해당 장치는 비상시 작동정지 스위치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사고 당일 현대제철 관할 근로감독기관인 고용노동부 천안지청이 사흘 째 정기근로감독을 벌이고 있었지만 작업 중단 조처 등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관리·감독 부실이 입사 3년차, 결혼 3개월인 주 씨가 임신한 아내를 두고 떠나게 만들었다. 

노후원전 10기 ‘수명연장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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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통상자원부는 14일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17~2031) 통해 한울 1·2호기 등 노후 핵발전소 10기의 수명연장을 금지하기로 했다. 전체 핵발전소는 2017년 24기에서 2030년 19기로 감소할 예정이다. 다만 환경단체는 신한울 1·2호기 등 5기의 핵발전소와 고성하이 1·2호기 등 석탄발전소 7기가 예정대로 지어진다는 데 우려를 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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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단 18개 범죄’ 최순실 1심 마지막 재판, 최대 무기징역 가능

강경훈 기자 qa@vop.co.kr
발행 2017-12-14 11:16:06
수정 2017-12-14 11: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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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 비선실세로 불린 최순실씨가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결심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 비선실세로 불린 최순실씨가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결심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대통령 탄핵 사태를 촉발시킨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인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1심 마지막 재판이 14일 시작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이날 오전 10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최씨의 결심 공판을 진행했다. 지난해 11월 20일 기소된 지 13개월 만이다.

최씨와 함께 기소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비서관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재판도 이날 마무리된다.

이날 재판은 검찰과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의견 진술(논고)과 형량을 제시하는 구형, 변호인단의 최종 변론, 최씨 등 피고인들의 최후진술 순으로 진행된다.

최씨는 형법상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강요, 강요미수,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등 18개 혐의를 적용받았다.

이 중 딸 정유라씨의 승마지원을 명목으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측으로부터 77억9천여만원을 받은 혐의와 미르·케이스포츠재단 후원금 명목으로 삼성으로부터 204억원을 받은 혐의(이상 뇌물 등)와 박 전 대통령 등과 공모해 미르·케이스포츠재단 출연금 774억원을 대기업들로부터 강제 모금한 혐의(직권남용 및 강요)가 대표적이다.

특히 특가법상 뇌물 혐의의 경우 뇌물로 받은 액수가 1억원 이상인 경우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따라서 최씨의 경우 최대 무기징역 구형 및 선고가 가능하다.

검찰 관계자는 전날 “최씨는 국정농단 사태의 시작과 끝이었다. 중대 범죄에 대해 법과 상식에 의한 처벌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이라며 중형을 구형할 의지를 내비쳤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공범으로 기소된 안 전 수석에게도 높은 형량이 구형될 것으로 보인다.

강경훈 기자

낮은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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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T KBS! ‘국민의 방송’으로 돌아가는 길

[언론포커스] 여전히 한겨울 속인 KBS, 권력의 부역자들 청산이 답이다

박태순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미디어로드 소장 media@mediatoday.co.kr  2017년 12월 14일 목요일
MBC 해직 언론인들이 모두 MBC에 복귀했다. 5년간의 긴 인고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출입증을 받아 MBC사옥 안으로 출근하는 모습에 시민들은 감동했다. 이용마 기자는 지난 시간의 악몽을 되새기며 촛불시민들의 위대한 항쟁 덕분임을 상기시켰다. 이 엄동설한에 MBC는 오히려 긴 동토의 시간을 지나 따사한 봄을 맞는 듯하다.

그러나 KBS는 여전히 한겨울 속에 있다. 지난 7일 성재호 KBS 새노조 위원장이 KBS 정상화를 위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KBS 노조는 100일이 넘도록 파업 중에 있다.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은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해 고대영 사장과 비리 이사들이 퇴진해야 한다고 또다시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다.  

 

2012년 KBS 경영진은 공정방송을 외치며 95일간 파업을 했던 노조 집행부들을 징계했다가 대법원으로부터 집행부가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권력의 언론장악을 위해 하수인 역할을 했던 가해자들과 공범들은 여전히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언론노동자들만 부당한 징계로 고통을 받았다.  

 

▲ KBS 비리 이사 해임을 촉구하는 24시간 릴레이 발언을 하고 있는 KBS 조합원의 모습. 사진=KBS 새노조 유튜브 화면 갈무리
▲ KBS 비리 이사 해임을 촉구하는 24시간 릴레이 발언을 하고 있는 KBS 조합원의 모습. 사진=KBS 새노조 유튜브 화면 갈무리
 
KBS 이사는 ‘업무추진비 사적 전용’, KBS는 ‘재허가 탈락 점수’

 

지난달 24일 감사원의 KBS 감사 결과 11명의 이사 중 9명이 업무추진비를 부당하게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다수 이사들은 업무추진비를 개인 선물비나 가족회식비, 술집접대비같이 사적인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원은 비위 내용에 따라 적절한 인사조치를 하도록 방통위에 건의했다. 이에 방통위는 비위사실이 가장 큰 강형규 이사의 해임 절차에 들어갔다. 일반 기업이나 민간단체에서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 공영방송 KBS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다른 어느 단체나 기관들보다도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이 공영방송이라는 점에서 KBS 이사들의 이러한 행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부도덕한 탈법행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KBS는 MBC, SBS와 더불어 방송통신위원회의 재허가 심사에서 탈락 점수를 받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KBS새노조는 “3년의 평가기간이 고대영·이인호 체제와 대부분 겹친다”며 고대영 사장과 이인호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KBS가 재허가 심사에서 낙제 점수를 받은 것은 창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탈락 점수를 받은 주요 원인이 방송의 공정성과 공적 책임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KBS의 존립근간에 의문을 던지는 중대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수많은 시민들과 시청자들이 KBS 수신료 인상 거부운동을 해야 했던 이유가 명백히 드러난 결과였다. 

이처럼 김인규→길환영→고대영으로 이어지는 사장들과 경영진들의 권력의 방송장악을 위한 부역의 결과, 오늘날 KBS는 참담한 모습으로 국민 앞에 서 있다. 방송의 공정성을 외치는 언론인들을 탄압하고, 이사들은 업무추진비를 사적으로 전용하는 도덕적 해이의 극치를 보이고, 방송의 공정성과 공적 책임 점수의 미달로 인해 방송재허가 심사에서 탈락 점수를 받은 현실이 오늘날 공영방송 KBS의 모습이다.

 

▲ 지난 12월8일,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센터 앞 ‘돌아와요 리셋 고봉순-불금파티’에 참여한 새노조 조합원과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 지난 12월8일,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센터 앞 ‘돌아와요 리셋 고봉순-불금파티’에 참여한 새노조 조합원과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경영진의 법적·도덕적 책임이 KBS 정상화의 시작

 

그럼에도 이인호 이사장과 고대영 사장은 아무런 책임도 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사퇴요구를 정치적 탄압으로 몰아가고 있다. 고 사장은 지난달 10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방송법이 개정되면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본인의 업무와 책임이 방송법 개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임에도 이런 식의 버티기 작전을 하는 것은 공영방송 사장 자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얼마 전 KBS의 막내PD가 적나라한 반성문을 올렸다. “시청자이자 피디 지망생이던 시절 비판을 가장해 쉽게 KBS를 욕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유족들이 KBS본관 앞에 찾아갔을 때, 언론사로서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하고도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걸까 싶었다. 청년 실업문제가 이렇게 심각한데 왜 공영방송이라는 곳에서는 이 문제를 더 다루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도 했다. - 그럼에도 나는 공영방송사에 입사하고 싶었다. – 입사하고 가장 먼저 마주했던 건 많은 선배들의 비관과 자조였다. ‘KBS 망했어, 여긴 안 돼.’ 내가 어떻게 준비해서 들어왔는데 저런 말을 가벼운 농담처럼 던지는 걸까. 처음에는 자신들이 수년간 받은 상처를 면죄부 삼아 갓 입사한 우리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섭게도 나 역시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겁고 짙게 그 비관에 젖어들었다.”  

안팎으로 곪고 상처투성이인 공영방송 KBS를 리셋(Reset)하고, 국민의 방송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책임자들이 법적,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 아닐까!! 

※ 이 칼럼은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발행하는 웹진 ‘e-시민과언론’과 공동으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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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 구상권 청구소송 철회한 정부, 여전히 남은 국가의 손배소

'구상권 철회' 찍고, 이제는 '살인 손배 철회'다
강정마을 구성권 청구소송 철회한 정부, 여전히 남은 국가의 손배소
2017.12.14 00:18:28
 
 

 

 

 

문재인 정부가 제주 강정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제기한 34억여 원의 구상권 청구 소송을 철회하기로 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6년, 해군은 강정마을 주민들의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방해로 공사가 지연됐다며 34억4800만 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 소송금액은 해군이 시공사 삼성물산에 물어준 공사지연 손실금 275억 원 중 일부다. 
 
그간 강정마을 주민들은 제주 해군기지 공사 관련해서 약 600건이나 기소됐다. 2016년 말 기준으로 465건은 판결이 완료됐지만 나머지 120~130건은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2017년 6월 기준으로 총 4억여 원의 벌금을 내야 했다. 현재 진행 중인 재판의 결과가 나오면 또다시 얼마나 많은 벌금이 부과될지 모르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34억 원 구상권 청구는 △ 형사처벌권을 가진 국가가 손배소로 이중처벌했다는 가중처벌금지원칙 위배 논란과 △ 국가가 사인(私人)으로 천문학적 금액을 국민에게 청구했다는 점 등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 관련기사 바로가기 : [인터뷰] 나라는 어떻게 시민을 괴롭히는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진행된 국가의 손배소 
 
그간 해군의 구상권 청구소송은 제주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강정마을 주민들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주목할 점은 그러한 의도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진행된 국가의 손배소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정부는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열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범국민대회에 참여한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국민대책회의), 4월 16일의 약속국민연대(416연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총 3개의 단체와 인권활동가 박래군 씨를 비롯한 5명의 활동가 등을 상대로 약 9000만 원의 배상액을 청구했다. 이날 집회로 차량 및 장비 등의 물적 피해와 경찰관들의 치료비 등 인적피해 배상이 이유였다. 2015년 7월에 제기된 이 소송은 현재 1심이 진행 중이다.  
 
2008년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관련해서는 집회참가자 중 일부에 의해 파손된 경찰 장비 등에 대해,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와 소속단체, 담당 활동가 등에 대해 국가가 약 5억17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3년 10월 31일, 1심과 2심 재판부는 이를 기각했고 현재는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2015년 5월 열린 민주노총 노동절 집회에서도 경찰은 약 2200만 원의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며 국민대책회의, 416연대, 민주노총 등에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현재 이 사건은 1심이 진행 중이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한진중공업 크레인 고공농성을 지지하는 희망버스 관련해서도 참가자들에 의해 물품 및 인적 피해가 있었다며 약 1500만 원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하기도 했다. 1심 재판부는 일부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고, 현재 형사재판 결과가 대법원에서 확정될 때까지 소송이 중단돼 있는 상황이다.  
 
이외에도 국가는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사망한 민중총궐기 참여자들에게도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집회 중 발생한 물적 피해 등을 이유로 약 3억8700만 원을 청구했다. 이 재판은 현재 1심이 진행 중이다.  
 
대표이사가 부당노동행위로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고, 원청회사인 현대자동차 임직원 등 5명이 노조파괴의 공동정범으로 기소된 유성기업의 경우도 국가는 쟁의행위를 막는 과정에서 장비 등이 파손됐다며 노조와 조합원에게 1억1000만 원을 청구하기도 했다. 1심 재판부는 127명의 경찰관 개인에게 34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 유성기업노조는 1심 판결 금액을 변제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됐다.  
 

▲ 경찰 헬기가 쉴새없이 도장공장 옥상 위에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봉투를 떨어트린다. 이 액체가 닿으면 무엇이든 녹아버린다. 회사 측이 가져다 놓은 차량에서는 가요와 노조에 대한 비방, 협박, 심지어 팝송까지 흘러나온다. 해가 완전히 사라진 밤이 되어도 잠을 잘 수가 없다. ⓒ프레시안

"법무부 장관이 소를 취하할 수 있다" 
 
이렇듯 강정마을 이외에도 국가가 개인이나 단체 등을 대상으로 손배소를 제기한 사건은 상당하다.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이 역시도 문재인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묶은 매듭을 문재인 정부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강정마을의 경우, 법원에서 내린 강제조정 내용을 그대로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해결됐으나, 이러한 소극적 태도에서 한발 나아가 정부가 직접 손배소를 철회하는 적극적인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지영 변호사는 최근 열린 '국가/기업 괴롭히기 소송 남발,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회에서 "지금의 문제가 되는 손배소는 원고, 즉 국가가 소를 취하하면 된다"며 "국가소송에서는 법무부 장관이 국가를 대표하기에 법무부 장관이 대표권의 일환으로 소를 취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가소송법 제2조(국가의 대표자)를 보면 '국가소송에서는 법무부 장관이 국가를 대표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는 법무부 장관에게 국가소송의 대표권을 부여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소를 취하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다고 윤 변호사는 해석했다. 
 
실제 국가소송법 제3조에는 법무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사항 관련, '소의 제기 및 취하, 상소의 포기 및 취하, 화해, 청구의 포기 및 인락, 소송대리인의 선임 및 해임의 소송행위'라고 명시하고 있다. 
 
윤 변호사는 "반면, 소 취하 요건이나 기준은 법령에 명시되어 있지 않기에 법무부 장관은 다양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후 재량권을 행사해 소를 취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손배소 취할 경우, 배임죄 처벌 받는다? 
 
반면, 국가 입장에서는 제기된 손배소를 취하할 경우, 배임죄 처벌을 받을 수 있음을 우려한다. 윤 변호사와 같은 토론회에 참여한 송길대 법무부 국가송무과장은 "국가 소송 영역에서 고려되는 것은 국가 측의 최종 승소 가능성"이라며 "국가 측이 일부 혹은 전부 승소하거나 1심과 2심의 결과가 엇갈리는 사실관계 속에서 담당 공무원이 이를 취하하는 것은 배임죄의  주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소송 취하에 어려움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송 과장은 "이미 하급심에서 국가의 승소 판결 후 상급심 소송 진행 중인 사건의 경우, 더욱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며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해결수단을 제도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공론의 장에서 좀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명백히 국가가 재판에서 이길 수 있음에도 이를 포기하고 소송을 취하할 경우, 배임죄로 고발조치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경우에 속하는 대표적인 곳은 쌍용자동차노조다. (☞ 관련기사 바로가기 : 끝나지 않은 쌍용차 "새총으로 헬리콥터를 파괴했다고?")
 
쌍용자동차노조의 경우, 2009년 정리해고를 반대하며 77일 옥쇄파업을 벌이던 과정에서 이를 해산하려는 경찰과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 당시 경찰은 헬기, 기중기 등을 동원, 진압작전을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각장 장비와 차량, 헬기, 기중기 등이 손상을 입었고, 경찰관들이 상해를 입었다며 16억7000만 원을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쌍용자동차노조 및 조합원 등에게 청구했다.  
 
법원은 국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약 11억6800만 원을 노동자들이 국가에 배상하라고 판결했고 현재는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현재 이 배상금 관련, 매일 62만 원의 지연손해금, 즉 이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2017년 12월 기준으로 지연손해금만 약 7억3500만 원이나 된다. 또한 이로 인해 조합원 67명에게 임금 및 퇴직금에 가압류가, 조합원 22명에 대해서는 부동산압류가 이뤄졌다. 
 

▲ 쌍용자동차 노조의 옥쇄파업을 진압하는 경찰. ⓒ이명익

풀리지 않는 매듭, 문재인 정부는? 
 
지금 국가가 제기한 손배소, 즉 고의에 의한 불법 행위 채무는 개인파산 신청을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형사처벌로 인한 벌금은 그에 맞춰 감옥을 다녀오면 사라지지만 이 손배소는 그렇지 않다. 국가가 집행을 포기하거나 누군가가 갚을 때까지 평생 따라다닌다. 
 
그렇다 보니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는 이중고, 삼중고일 수밖에 없는 노릇. 쌍용자동차노조는 2009년 파업으로 94명이 구속되었고 300여명이 벌금 및 형사처벌을 받았다. 2017년 5월말 기준으로 29명의 쌍용자동차노조원, 그리고 관계자들이 사망했다. 
 
쌍용자동차 사측에서도 점거파업으로 손해를 봤다며 47억 원의 손배소를 제기했지만 2015년 말 노사 간 합의에서 손배소는 취하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만은 이를 취하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의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남겨져 있다. 
 
윤지영 변호사는 업무상 배임혐의 관련 "대법원은 사기업의 경우, 재산상의 이익 형량을 중요한 요소로 보지만 공무원의 경우, 재산상의 손익 관계뿐만 아니라 다수인의 이해관계, 사회적 파급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며 "즉 재산적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유·무형의 모든 이해관계와 파급효과를 고려한 정책 판단은 배임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례"라고 설명했다.  
 
윤 변호사는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 보건대, 손배소에서의 소 취하는 업무상배임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기본권의 수범자로서, 기본권의 소지자인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 내지 실현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책임과 의무는 국가소송을 하는 때에도 변함이 없다"고 지적했다.  
 
공무원이 그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로써 제3자로 하여금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게 하여 국가에 손해를 가한 경우에 업무상배임죄가 성립하지만, 다수인의 이해관계가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면서 정면으로 충돌하고 법적으로 명쾌하게 해결하기도 어려워 사회적 물의와 공론이 계속되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소·수습하는 직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담당공무원이 고질적인 문제의 발생 원인과 그 책임자, 이해관계인이 제시하는 근거, 재산적인 손익관계뿐 아니라 유형·무형의 모든 이해관계와 파급효과 등을 전반적으로 따져 그 해결책을 강구하여, 그 해결책이 맡은직무를 집행·처리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으로서 직무의 본지에 적합하다는 신념하에 처리하고 그 내용이 직무범위 내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는 정책 판단과 선택의 문제로서 그 방안의 시행에 의해 결과적으로 국가에 재산적 손해가 발생하거나 제3자에게 재산적 이익이 귀속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만으로 임무위배가 있다 할 수 없으므로, 배임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대법원2008. 6. 26. 선고 2006도2222판결)
 
 
허환주 기자 kakiru@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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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TF, 북 여종업원 사건 킨타나 유엔북한인권특별보고관과 협력해 갈 것

민변 TF, 북 여종업원 사건 킨타나 유엔북한인권특별보고관과 협력해 갈 것
 
 
 
박한균 기자 
기사입력: 2017/12/13 [23:4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기획탈북의혹사건대응 TF팀장을 맡고 있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장경욱 변호사는 “김련희씨는 평양시민이다. 본인 의사로 한국에 입국하지 않았다는 것이 본인 의사로 명백히 확인되었음에도 정부당국은 가족들과의 상봉을 막고 있다. 나아가 김련희씨의 페이스북 활동 등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일체의 활동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려 하고 있다. 이는 적대적인 분단 대립 구조의 모순 덩어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현실”이라면서 “김련희씨와 보안수사대에 함께 들어가서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고 퇴거할 예정이다. 그리고 서울 UN인권사무소에 오헤아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을 만나서 이 상황을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오헤아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이 12일 유엔 총회 보고서에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사건’을 포함시킨 것에 대해 “인권과 인도주의 관점에서 자신이 검토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고 특히 북 여종업원들 가족들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고 이유를 밝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사건 대응TF'는 12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같이 전했다.

 

이날 TF 소속 4명의 변호사들은(장경욱, 채희준, 천낙붕, 오민애 변호사) 오전 11시 30분 서울 유엔인권사무소에서 방한 중인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과 만나 이 사안과 관련해 1시간 20여분 동안 면담을 진행했다.

 

이 면담에서 변호사들은 킨타나 보고관에게 인신보호구제심사청구, 변호인 접견거부처분 취소소송 등 국내 소송 진행경과와 유엔 자유권위원회에 대한 개인진정, 자의적구금실무그룹에 대한 긴급청원 및 유엔 인권이사회 ‘법관과 변호사의 독립을 위한 특별보고관’, ‘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에 대한 긴급청원의 진행경과를 설명하였고, 유엔 개인진정서와 긴급청원서, 한국 정부 답변서 등 유엔 내 인권구제절차에서 제출된 자료 일체를 전달했다.

 

변호사들이 킨타나 보고관의 관할권에 대하여 질의하자 “북한 내외의 북한 주민의 인권과 인도주의 위기 전반에 걸쳐 관할권이 있다”고 답했으며, 변호사들은 “향후 이 사안을 비롯하여 한국 내 탈북자 인권침해 문제(북송 희망 탈북자 문제, 탈북자 간첩조작 사건, 한국 내 탈북자 차별 문제)에 대하여 킨타나 보고관과 연계를 갖고 적극적으로 진정 및 청원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과 관련하여 킨타나 보고관은 “이 사안은 인권의 문제로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에 따라 처리해야 할 것이고, 그 전제로서 변호인들이 자유롭게 여종업원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하고, 여종업원들과 북 가족들이 만날 수 있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확인된 의사에 따라서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면서 “본인 의사에 반해서 왔으나 여기 남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의 경우에는 귀순공작의 결과로 그런 의사를 가지게 된 개연성이 있으므로, 이에 유엔에서 신속히 변호인 접견을 중재해달라는 것과 함께 판문점이든 서울 유엔인권사무소이든 북 가족들과 종업원들의 상봉을 신속하게 주선해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한편 킨타나 보고관에게 이 사안과 관련하여 그가 제72차 유엔총회에 보고한 보고서 내용 중 종업원들이 한국행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다는 기술을 한 것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조사결과에 대하여 질문하자 “자신의 의견이며, 한국 정부의 설명에 의문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변호사들을 만났다”고 밝혔다. 이어 “유엔 내에서 이 사안을 계속 다루고 있고 그 과정에 여종업원들을 추가로 만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위 보고서에 ‘여종업원들이 현재 구금상태에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했다’고 했으나 변호사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국정원이 여전히 여종업원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설명하자 “현재 서울 유엔인권사무소에서 계속 확인 중인 사항”이라고 답변했다.

 

마지막으로 킨타나 보고관은 변호사들에게 “나는 인권과 인도주의 관점에서 객관성, 공정성, 독립성에 기반해서 활동하는 유엔 보고관으로 우선, 북측 부모들에게 킨타나 특별보고관을 만났고 이 사안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달라”면서 “북한을 방문하여 북측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도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변호사들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킨타나 보고관과 협력하여 이 문제해결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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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알고있던 홍준표는 가짜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12/14 11:00
  • 수정일
    2017/12/14 11:0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여운환, 홍준표를 쏘다 ①] 그는 왜 말하려고 하는가

17.12.14 09:33l최종 업데이트 17.12.14 09:33l

 

지난 1991년 홍준표 당시 광주지검 강력부 검사에 의해 조직폭력단 '국제PJ파 두목'으로 기소됐던 여운환씨가 입을 열었다. 그는 <오마이뉴스>와 이틀간 총 7시간에 걸쳐 자신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사이에 있었던 '사나웠던 운명'을 숨가쁘게 털어놨다. <오마이뉴스>는 20회에 걸쳐 그 '사나웠던 운명의 증언'을 풀 스토리로 연재한다. 이 기사는 여는글에 이어 본격 인터뷰 연재 첫번째다. <오마이뉴스>는 여 대표의 인터뷰 내용과 관련해 홍 대표의 해명과 반론을 듣고자 수차례 접촉을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다만 홍 대표의 한 측근인사는 "그것은 검찰(검사)이 불의한 깡패세력을 소통한 사건"이라고 반박했다. <오마이뉴스>는 이후라도 언제든지 홍 대표의 반론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힌다. [편집자말]
 여운환 아름다운컨벤션 대표가 지난 10월 25일 광주의 한 호텔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여운환 아름다운컨벤션 대표가 지난 10월 25일 광주의 한 호텔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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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이야기가 많다고 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홍준표한테 원한이 얼마나 깊겠어? 지금도 집사람은 (이야기가 알려지는 것을) 마다해. 내 얘기가 사회에서 거론되는 것 자체를 굉장히 염려할 정도여. 나는 홍준표라는 희귀한 정치인 때문에 졸지에 조직폭력배 두목으로 알려지면서 내 인생은 완전히 혼돈에 빠져들었어. 홍준표에 의해 이런 굴레('국제PJ파의 두목'으로 낙인찍힌 것 - 기자 주)가 씌워져 버리니 내가 받는 불이익이 너무 엄청나버려. 대한민국에서 조직폭력배 두목으로 각인되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겠어?

오죽하면 내가 집사람에게 이렇게 얘기했겠어? '아들들한테도 다 변명하고 사돈들도 다 알게 됐지만, 지금 손녀가 셋인데 그 애들한테 어떻게 일일이 대답할 수가 없지 않냐? 그래서 내가 포기할 수가 없다. 혹시라도 지금 사는 모습이 흐트러질까, 생활이 깨질까 두려운 모양인데, 내 생각도 좀 해주라. 당신은 이대로가 행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내가 홍준표에게 거짓을 만들어서 말하면 내가 당할 수 있으나, 팩트를 갖고 이야기하는 거니 아무리 거대 야당의 대표라고 하지만 내가 뭔 불이익을 받겠냐? 세상이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잃을 게 있다면 얼마나 더 잃겠냐? 사업 안하면 그만이고.' 

 

집사람도 반듯한 전남도청 공무원이었지. 도지사 비서실에서 죽 근무했던. 그런 집사람으로 봐선 얼마나 기가 막혀겠어? 집사람은 나랑 초등학교 동기야. 한 5년 연애하고 결혼했어. 내가 1977년 1월에 결혼했으니 올해로 41년 됐어. 만난 지는 46년 됐고. 누구 말대로 천생연분이라고 할 정도로 권태 한번 안 느꼈어. 그런데 나 땜에 어머어마하게 고생했어. 내가 몇 년씩 감옥살이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 재산은 재산대로 엄청나게 없어지고. 그러니까 여자로서는 두려울 수 있어. 얻을 것은 미비하고."

- 내가 잡지사 기자로 근무할 때 한국 조폭의 역사를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 기사의 마지막 대목이 당신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래서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질문지를 받아보고 내가 할 이야기가 많겠구나 생각했다. 내가 홍준표의 '모래시계 검사' 타이틀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이것 이상으로 홍준표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게 어디 있겠어? 내 말이 합당치 않은 이야기고 나 혼자서 만들어낸 이야기라면, 홍준표가 나를 찍어 죽일라고 할 거 아녀? 가만 두겄어? 자기가 알고 있는 비하인드(숨겨진 이야기)라도 꺼내지 않겠어? 그런데 말 한자리 못하고, 말하자면 노 코멘트 해불잖아. 홍준표가 노 코멘트할 사람이야? 절대 안 할 사람이야. 나는 홍준표를 너무 잘 알아. 

내가 조사받을 때 타자수가 여자였어. 근데 홍준표가 막 서서 왔다갔다 하면서 조사를 하더라고. '이때 검사는 창문 밖을 내다본다' 별 소설 같은 지문도 다 쓰라고 해. 재판부에 (검사의 고뇌 등) 현실적인 것을 막 얘기하고 싶은 거야. '이때 피의자는 고개를 숙인다'라고 쓰라고 해. 내가 인자 반성한다는 그런 것을 지가 연출한 거야. 

난 그런지도 모르고 듣기 싫어서 '검사님, 내가 뭘 반성합니까? 내가 뭘 반성할 게 있다고 반성을 해요?'라고 따졌어. 그러면 홍준표가 '지금도 당신은 말이야' 하면서 얘기해. 홍준표 말하는 투가 정말 싫었어. 수갑 찬 손으로 주둥이를 한 대 쳐불고 싶을 정도였어. '긍께 검사님, 좀 앉아서 조사하시라고요. 어지럽게 왔다갔다 하지 마시고.' 나도 얼마나 전라도 말을 (많이) 써불었겠어? 긍께 홍준표는 어쨌든 내가 싫은 거야. 오죽하면 내가 재판 중에 '저 검사 정신감정 좀 하는 게 좋겠다'고 했겠어? 글고 내가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디 홍준표가 우리 변호사한테 욕을 하더라고. '저 새끼' 어쩌구 하면서." 

"날 활용해 홍준표는 모래시계 검사가 되고"

- 원래 2부짜리 인터뷰를 생각하고 왔다. 1부는 국제PJ파사건이고, 2부는 이용호 게이트다. 그래서 인터뷰 시간도 굉장히 길 수밖에 없다. 오늘 이야기가 안 끝나면 내일 다시 시간을 내서 인터뷰를 이어갔으면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내가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 것이 있어. 인자 이용호 문제와 홍준표 문제를 섞으면 안돼. 이용호 문제는 우습지도 않아. 3류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친구의 현란함에 당시 검사가 놀아났어.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들려드릴게." 

- 이용호 게이트를 얘기할 시기는 아니다? 
"이용호 게이트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황당한 스토리가 전개됐는지 알 수 있는데 그렇게 가면 내가 바라는 취지가 소설화 돼버려. 남한테 소설같이 들려선 절대 안되는 이야기인데." 

- 그럼 이번 인터뷰에서는 홍준표와 국제PJ파 관련 이야기만 하고 싶다? 
"이용호 게이트는 나한테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녀. 홍준표로부터 시작된 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이어진 고통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럼 이야기를 풀어나가 볼까? 우선 내 이야기를 하자면, 1974년도에 폭력 전과가 한 번 있었어. 그리고 홍준표를 1991년에 만났지. (폭력 전과가 있었던 1974년 이후부터) 1991년도까지 내가 경찰서나 파출소에라도 잡혀가서 조사받거나 입건된 적이 한 번도 없었어. 홍준표가 내가 국제PJ파를 만들어서 활동한 두목인 것처럼 만들었는데 그것 자체가 너무 잘못됐어. 홍준표가 나를 국제PJ파 두목으로 기소했지만, 그 공소사실 전체에 대해 조목조목 무죄를 받았다. 

내가 1심부터 대법원까지 무죄를 받은 사건을, 홍준표는 자기가 기소한 대로 유죄를 받았다고 지금까지 얘기해왔어. 내가 조폭 두목으로 활동해온 사람처럼 매도하고. 본인은 나중에 나를 적절하게 활용해서 무슨 턱도 없이 모래시계 검사가 되고, 나도 드라마 <모래시계>의 일부 모델이 됐어. 홍준표 인생과 내 인생이 너무 많이 바뀌었어. 나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홍준표는 나를 잘 활용해서 오늘날의 홍준표가 됐고. 

하지만 홍준표는 사실 조작된 과거로 날조된 영웅담을 만들어냈던 거야. 대한민국이 알고있던 홍준표는 가짜다. 옛날에 흔하게 보안사범이나 간첩으로 조작한 것들이 많은 시간이 지나서 다 밝혀지고 있는데, 그런 데만 조작이 있는 게 아니라 내 사건도 완전히 조작됐어. 판결문에서 다 밝혀진 내용이야. 지금이야 그런 일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 환경이지만 30년 전에는 정말 안 그랬어. 

나는 그때 검사의 권력이 죄만 없으면 별 거 아닌 걸로 생각하고 세게 싸움을 붙었어. 조금도 굽히지 않고, 검사의 부당함에 많이 반발하고 그랬제. 그런데 나는 검사의 권력이 저렇게 함부로 쓰여지면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직접 체험했어. 당시 홍준표는 자기 혼자 힘으로 안되니까 당시 검사장을 꼬드겨서 이런 일들을 만들었어." 

- 그 검사장이라면 문정수 광주지검장을 말하나? 
"그렇다. 그분은 마치 홍준표의 말이 사실인 것처럼 믿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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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제8차군수공업대회에서 핵무력 질량적 강화 천명

북, 제8차군수공업대회에서 핵무력 질량적 강화 천명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12/13 [04:5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017년 12월 11일 평양에서 진행된 제8차 군수공업대회 

 

▲ 2017년 12월 11일 제8차 군수공업대회 주석단의 김정은 국무위원장   

 

12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11일 평양에서 제8차 군수공업대회가 김정은 국무위원장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고 12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하였다.

 

통신은 "대회에는 대륙간탄도로켓(ICBM) '화성-15'형 시험발사 성공에 기여한 성원들을 비롯하여 나라의 국방력 강화에 크게 공헌한 국방과학연구부문, 군수공업부문의 과학자, 기술자, 노력혁신자, 일꾼들과 연관 단위 일꾼들, 근로자들이 참가했다"고 밝혔고 태종수 노동당 부위원장은 이날 보고를 통해 "최고영도자(김정은) 동지의 눈물겨운 애국 헌신과 굴함 없는 공격 정신에 의하여 우리 조국은 남들이 수십 년을 두고도 이루지 못할 군사적 기적들을 불과 1∼2년 안에 이룩하며 세계적인 핵강국, 군사강국의 전열에 당당히 들어설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중앙통신은 태종수 부위원장이 "다시 한 번 영웅적 투쟁을 벌여 우리 식의 위력한 주체무기들을 더 많이 개발·생산할 데 대하여 언급했다"라며 "오늘의 대성공을 더 큰 승리를 위한 도약대로 삼고 계속 박차를 가하여 국가핵무력을 질량적으로 더욱 강화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유튜브에 소개된 북 보도 영상을 보니 태종수는 항일무장투쟁시기 '두 자루 권총정신'과 한국전쟁 시기 '군자리정신'을 계승하여 '국방과학연구사업과 국방공업을 세계 최고의 경지로 올려세울 수 있는 자립적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평하고 관련 일꾼들이 최선을 다해 "혁명무력 강화와 전민무장화에 적극 이바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2017년 12월 11일 제8차 군수공업대회에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 핵무장력을 질량적으로 강화에 전민 첨단무기 무장화까지

 

이는 수소탄과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지금까지 이룬 위력적인 국방력은 더 높은 국방력 구축의 자신감의 토대로 작용하고 있어 이를 기반으로 더욱 그 위력을 높이고 더 많은 양의 핵무기를 만들어실전 배치할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의 무기만으로도 미국에서 불안으로 잠 못 이루겠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오고 있는데 이보다 더 위력적인 핵과 미사일을 대량생산하여 실전배치하게 되면 미국에게는 끔찍한 악몽이 아닐 수 없을 것같다.

 

특히 인민군을 중심으로한 혁명무력 강화는 물론 전민무장화에도 이바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을 보면 구형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노농적위대도 곧 첨단무기로 완벽하게 무장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게 되면 노농적위대의 구형무기는 세계 반미반제진영으로 수출, 이전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고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길 결정을 내리자 온 세계의 무슬림들이 성조기를 불태우며 일전불사를 외치고 있는데 미국과 이스라엘이 세계 곳곳에서 무슬림들과의 치열한 피의 전쟁에 말려드는 것이 아닌가 우려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어서 국제적인 북 무기 수요는 더욱 많아질 우려가 높다. 

유격전이 중심인 반미반군들은 작고 가벼워 휴대하기 편한 북의 기관총, 7호발사관 등 북한제 무기를 매우 선호하고 있어 수요는 무궁무진한 상황이다.

 

그렇게 구형무기를 판 돈으로 신형무기를 개발하여 인민군대만이 아니라 전민을 신형첨단무기로 무장시키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 2017년 12월 11일 제8차 군수공업대회 

 

✦ 못만들 무기가 없다는 자신감

 

태종수의 발표가 끝나고 여러 토론자들의 발언이 있었는데 지난 기간 "국방공업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 정보화" 추진과 국가핵무력 완성, 그리고 "우리식의 위력한 주체무기생산에서 거둔 커다란 성과 경험"을 발표, 공유하였으며 단시일에 최첨단 무기의 일대비약을 이루어 낸 방도들도 발표되었다.

 

특히 토론자들은 "김정은 최고영도자동지가 하라고 하시는 대로만 하면 그 어떤 첨단 요새도 다 점령할 수 있으며 세계가 알 수도 없고 흉내낼 수도 없는 주체조선의 영웅신화들을 끊임없이 창조해 나갈 수 있다는 혁명의 천리를 심장에 깊이 새겼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와 올해 세계 최첨단을 뛰어넘는 위력적인 재래식무기와 전략무기를 한달이 멀다하고 연이어 공개하여 세계적인 충격파를 일으켜왔는데 그런 위력적인 무기 하나하나 개발하는과정에 구체적인 지침을 주며 지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토론자들은 "당의 병진로선을 결사관철하는데 있어서 과학기술에 의거하여 자력갱생의 무궁무진한 위력을 발휘해나간다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귀중한 경험을 얻게 되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토론에서는 국방과학부문과 군수공업부문의 결함과 교훈도 분석총화되었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북 언론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낡은 사고방식, 외국을 무조건 모방하려는 자세 등이 그 내용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 2017년 12월 11일 제8차 군수공업대회에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

 

✦ 화성-15형은 초대형 중량급 핵탄두 장착 미 전역 타격 가능

 

이번 대회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태종수 노동당 부위원장이 이날 보고를 통해 "최고영도자(김정은) 동지의 눈물겨운 애국 헌신과 굴함 없는 공격 정신에 의하여 우리 조국은 남들이 수십 년을 두고도 이루지 못할 군사적 기적들을 불과 1∼2년 안에 이룩하며 세계적인 핵강국, 군사강국의 전열에 당당히 들어설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정말 수십년 걸릴 국방무기개발을 단 1-2년만에 만들어내는 속도 그 자체가 공포가 아닐 수 없다. 남측의 과학자 전문가들도 한 달여 간격으로 신형 미사일을 마구 시험발사하는 북을 보며 "놀라운 일"이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고 일부 기자들은 아마도 오래 전에 만들어 놓은 것을 꺼내서 시험발사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추정을 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번 8차 군수공업대회에서는 순전히 자력갱생의 정신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탁월한 지도로 그때그때 개발한 무기임을 확인해준 것이다. 아마 이런 속도라면 내년이면 미국을 능가하는 최첨단 무기들이 본격적으로 공개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실 지금까지의 무기는 미국도 가지고 있는 무기이다. 물론 수소탄의 구체적 성능, 탄도미사일의 요격회피기동능력 등은 지금도 미국보다 더 우수할 지 모르나 북이 그렇게 찍어서 발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북이 공개하는 무기들에는 미국에도 없는 신기술들이 많이 접목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정말 북의 무기개발 속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은 미국편이 아니라는 아우성이 왜 미국 워싱턴타임스, 뉴욕타임스와 같은 제도권 보수언론에서 나오는지 이해가 된다.

 

태종수 부위원장은 더불어 '북극성'을 수중과 지상 임의의 공간에서 전략적 타격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핵공격 수단으로, '화성-12'를 대형중량 핵탄두를 장착해 태평양 전 지역을 타격권에 두는 로켓으로, '화성-14'를 수소탄을 미국의 심장부에 날려 보낼 핵운반 수단으로, '화성-15'를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초대형 중량급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완결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각각 자평했다.

 그러면서 그는  "화성-15형 시험발사의 대성공은 국가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 로켓 강국 위업을 빛나게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이룩된 민족사적인 대승리, 조국청사에 특기할 대사변"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북이 북극성과 화성-12, 14, 15형을 어떤 목적으로 개발한 것인지를 이렇게 명백히 밝힌 것이다. 특히 화성-14형은 대형 중량급 핵폭탄을 미국 심장부로 보내기 위한 것이고 화성-15형은 초대형 중량급 핵탄두를 미국 전역에 보내기 위해 개발한 것이라는 지적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화성-14형은 미 본토의 주요 거점 타격용이라면 화성-15형은 단 발로 미국 전역을 마비시킬 수 있는 초대형 EMP탄을 장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임을 암시한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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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기지 반대” 강정마을 10년 투쟁사···구럼비의 상처 치유될까

[정리뉴스] “해군기지 반대” 강정마을 10년 투쟁사···구럼비의 상처 치유될까
입력2017-12-13 11:32:00
 
준공식을 하루 앞둔 2016년 2월25일 제주 해군기지 모습. 연합뉴스

준공식을 하루 앞둔 2016년 2월25일 제주 해군기지 모습. 연합뉴스

정부가 지난 12일 제주 해군기지 공사 지연의 책임을 묻기 위해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를 상대로 제기한 34억5000만원의 구상금 청구 소송을 철회했다. 참여정부 때부터 추진된 제주 해군기지는 10년 동안 갈등이 계속되면서 주민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강정마을의 거센 반대에도 결국 해군기지는 완공됐고 주민에게는 수십억대의 구상금과 전과 기록이 남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구상권 철회와 사법처리 대상자의 사면을 공약한 바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강정마을의 투쟁사를 되짚어봤다.

 

2007년 4월 제주도청 회의실에서 김장수 국방부 장관이 김태환 제주지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 해군기지와 관련한 국방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2007년 4월 제주도청 회의실에서 김장수 국방부 장관이 김태환 제주지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 해군기지와 관련한 국방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수용 결정(2007년 5월14일)
 

김태환 제주지사는 2007년 5월 기자회견에서 “제주도민 여론조사 결과 해군기지 건설에 대한 찬성의견이 높게 나옴에 따라 서귀포시 대천동 강정마을을 제주 해군기지 최우선 대상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최우선 대상지로 선정된 강정마을 주민들은 찬반으로 나뉘어 갈등했고 시민단체는 김 지사의 퇴진과 해군기지 철회를 요구하며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제주, 해군기지 수용 결정…반대委 “승복못해”▶제주 해군기지 유치 주민갈등 ‘부글부글’
 

■제주 시민단체들, 해군기지 반대 릴레이 단식농성(2008년 10월13일)
 

제주도 내 시민단체들이 서귀포시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릴레이 동조 단식농성에 나섰다. 강정마을회 강동균 회장은 제주도청 앞 인도에서 단식농성을 벌였지만 제주도는 공무원과 경찰을 동원해 농성 천막을 강제 철거했다.
 

▶[지자체소식]제구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릴레이 단식▶제주 해군기지 법정싸움 조짐…주민 찬반 갈등 격화
 

■제주지사 주민소환 투표율 미달로 부결(2009년 8월31일)
 

강정마을 주민과 제주지역 3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김태환 제주지사 주민소환운동본부’가 해군기지 문제로 김 지사에 대한 주민소환투표를 실시했으나 11%의 투표율로 무산됐다.
 

▶김태환 제주지사 직무 정지▶김태환 제주지사 “대화하겠다”
 

2010년 1월 오전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인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 해안에서 굴삭기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던 주민들을 경찰이 끌어내려 연행하고 있다. 한라일보 제공

2010년 1월 오전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인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 해안에서 굴삭기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던 주민들을 경찰이 끌어내려 연행하고 있다. 한라일보 제공

■헷갈리는 제주 해군기지 판결(2010년 7월15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위한 국방부 변경승인 계획은 위법하진 않으나 절차에는 하자가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반대 주민 측은 “국방부의 절차적 잘못을 인정한 것”이라며 “기본계획을 전제로 이뤄졌던 모든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해군 측은 “새로 변경고시된 계획이 유효하다는 것인 만큼 전체적으로 문제는 없다고 본다”라고 말해 같은 판결을 놓고 양측의 해석이 달랐다.
 

▶헷갈리는 ‘제주 해군기지 판결’ 논란 증폭▶“제주 해군기지 사업, 법으로도 정당성 없음 입증”
 

■제주 해군기지 부지 재선정 논의(2010년 9월9일)
 

강정마을회는 2010년 8월 주민투표를 통해 “강정마을을 제외한 해군기지 후보지역을 대상으로 마을총회나 주민투표 등 민주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유치를 희망하는 곳이 없으면 해군기지를 수용할 수 있다”는 ‘조건부 수용’ 제안서를 제주도와 도의회에 제출했다. 이를 받아들여 제주도는 9월 안덕면 화순리·사계리, 남원읍 위미1리 등 3곳 주민에 해군기지 유치 찬반 의견을 물어 부지를 재선정하기로 했다. 10월 3개 마을 모두 해군기지 유치를 반대한다는 공식입장을 통보해 입지 선정 문제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11월 강정마을회는 “단 한 차례 마을총회조차 개최되지 않았다”라며 ‘조건부 수용’을 백지화했다.
 

▶제주 해군기지 부지 선정 ‘처음부터 다시’▶제주 해군기지 입지선정 원점으로▶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 반대” 재천명
 

■제주도, 해군기지 공식 수용(2010년 11월15일)
 

우근민 당시 제주지사는 제주도의회 본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제주도정은 강정마을에 제주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정부정책을 받아들이고 적극 지원하겠다”라고 밝혔다. 중단됐던 건설공사도 3개월만에 재개되면서 시민단체들이 반대운동을 벌였다. 일부 주민들이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제주도, 해군기지 공식 수용▶제주 해군기지 반대투쟁 본격화
 

2011년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기지 공사현장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제주군사기지 반대대책위원회 제공

2011년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기지 공사현장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제주군사기지 반대대책위원회 제공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운동 전국으로 확산(2011년 6월19일)
 

전국 116개 시민사회단체들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를 구성해 서울과 제주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다. 해군기지 공사가 진행 중이던 서귀포시 강정마을 중덕 구럼비 해안가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시민단체들의 천막이 세워졌다. 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 등 5개 야당은 진상조사단을 구성했다.
 

▶‘해군기지 건설 논란’ 야 5당 진상조사단 구성▶국내 대표적 미술인들도 제주 해군기지 반대▶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전국 확산▶“시민단체와 연대해 해군기지 건설 막는다”
 

■강정마을에 공권력 투입(2011년 9월2일)
 

해군이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사회단체로 법원에 제기한 공사방해금지 등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졌다. 2일 새벽 강정마을에 전격적으로 공권력이 투입됐다. 경찰 병력 1000여명은 이날 오전 6시쯤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주민과 시민활동가에게 퇴거명령을 내린 뒤 농성 컨테이너 철거를 시도했다. 해군은 공사에 차질을 빚게 되자 주민 등 40여명을 공사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시공사들은 주민 10여명에게 수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경찰, 제주 강정마을 점령… 주민들 “계엄 방불”▶[사설]제주 강정마을 공권력 투입 자제해야▶법원 “해군기지 공사방해 안된다”▶경찰, 강정마을 공권력 투입…주민 연행▶‘해군기지 반대’ 연행자 197명에 달해
 

2012년 3월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공사 관계자와 경찰이 한 활동가를 끌어내고 있다. 연합뉴스

2012년 3월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공사 관계자와 경찰이 한 활동가를 끌어내고 있다. 연합뉴스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 발파작업 개시(2012년 3월7일)
 

해군이 갑작스럽게 구럼비 바위를 발파하며 공사를 강행하자 제주도는 태도를 강경하게 전환해 공사정지 행정명령을 검토하겠다며 일시 공사정지를 요청했다. 제주도는 2009년 국방부·국토해양부와 기본협약을 체결하면서 크루즈선박이 입·출항할 수 있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건설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러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봤다. 발파를 저지하는 마을 주민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경찰이 강제 진압하면서 연행자가 속출했다.
 

▶강정마을 구럼비 발파 ‘초읽기’…7시 경찰 진압작전 실시▶경찰, 구럼비 바위 발파 저지 주민 강제 진압…12명 연행▶반대 한목소리 제주도와 밀어붙이는 중앙정부의 ‘정면 충돌’
 

■제주 해군기지 예산 ‘날치기 통과’(2012년 11월28일)
 

국회 국방위원회가 2013년도 제주 해군기지 건설 예산안을 새누리당 단독으로 처리했다. 반발한 강정마을 주민들과 문정현·문규현 신부 등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예산안을 전액 삭감할 것을 요구하며 삭발식을 했다.
 

▶제주해군기지 예산 ‘날치기 통과’에 거센 반발▶“제주해군기지 예산안 날치기 처리 반대” 삭발·단식
 

2013년 1월 강정마을 주민들이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사 중단과 철저한 검증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2013년 1월 강정마을 주민들이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사 중단과 철저한 검증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제주해군기지 명칭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변경(2013년 2월14일)
 

국방부가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추진되고 있는 제주해군기지 건설사업 계획의 명칭을 공식적으로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건설사업으로 변경했다. 강정마을회는 이에 대해 형식적인 명칭변경일 뿐 제주해군기지는 여전히 국방·군사시설로 건설되고 있다며 규탄했다. 제주도는 크루즈선박의 안전한 입·출항이 공식 확인됐다며 해군기지를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수용’ 입장 정리▶제주해군기지 명칭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변경
 

■원희룡, 주민 진상조사 제안(2014년 6월24일)
 

원희룡 제주지사 당선자가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 사태 해결을 위해 주민들이 직접 진상조사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주민들의 조사 결과를 검토한 뒤 사과나 보상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강정마을회는 마을총회를 열고 진상조사를 수용할 것인지 토론을 벌였으나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해 진상조사 일정은 기약없이 연기됐다.
 

▶원희룡 제주지사 당선자 “강정마을, 주민이 진상조사”▶강정주민 “속고 또 속아, 제주도 진정성 어떻게 믿나”▶해군기지 골 너무 깊었나 … 진상조사 일정 기약없이 연기
 

■강정마을 군 관사 반대 농성천막 강제철거(2015년 1월31일)
 

국방부가 제주 해군기지 내 관사를 건립하기 위해 부지에 설치된 반대 농성 천막을 강제철거했다. 국방부는 철거에 해군측 용역 100여명과 경찰병력 900여명 등 1000여명을 투입했다.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
 

▶강정주민 “동의없이 마을에 군 관사 건립” 반발··또다시 일촉즉발▶제주 강정마을 농성 천막 31일 철거… 충돌 불보듯▶해군 군 관사 철거 강행 강정마을 충돌
 

2015년 8월5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 해군기지 공사 전후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2015년 8월5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 해군기지 공사 전후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제주 해군기지 앞 연산호 군락 폐사(2015년 8월5일)
 

강정마을회, 제주군사기지저지범도민대책위원회 등은 제주와 서울에서 동시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해군기지 인근 연산호 군락지의 해상공사 전후 변화상’을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을 공개했다. 범대위는 모니터링 결과 2012년 이전에 비해 연산호의 상당수 종이 사라졌으며 남은 종도 개체 수가 줄어들거나 생육상태가 악화돼 위기를 맞고 있다고 밝혔다.
 

▶해군기지 공사 3년… 제주 강정 앞바다 죽어간다▶[사진]해군기지 공사 3년, 제주 강정은 죽음의 바다 1▶[사진]해군기지 공사 3년, 제주 강정은 죽음의 바다 2▶[사진]해군기지 공사 3년, 제주 강정은 죽음의 바다 3
 

■제주 해군기지 완공(2016년 2월26일)
 

제주 민군복합항(제주해군기지)이 서귀포시 강정해안을 건설부지로 확정한 지 9년 만에 완공됐다. 강정마을회는 같은 날 해군기지 정문 맞은편에서 강정마을을 ‘생명평화문화마을’로 선포하고 생명평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가기로 했다.
 

▶[정리뉴스]제주해군기지, 그리고 강정마을의 지난한 9년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의 구상권 청구 철회를 촉구하며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박미라 기자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의 구상권 청구 철회를 촉구하며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박미라 기자

■해군, 강정 주민에 34억 구상권 행사(2016년 3월29일)
 

해군이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한 강정 주민과 시민단체 등을 상대로 구상권 행사에 나섰다. 강정 주민과 시민단체 활동가 등 120여명이 해군기지 건설공사를 방해해 손실이 발생했다며 34억5000만원을 물어내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해군, 제주기지 반대 주민들에 “34억 물어내라”▶[현장에서]“수십억 물어내라니…” 다시 천막농성 나선 강정주민▶“해군, 강정주민 등 구상권 철회를”
 

■정부, 구상권 소송 철회(2017년 12월12일)
 

정부가 제주 강정마을 구상권 청구소송을 사실상 철회하는 법원의 ‘강제조정안’을 수용했다. 지난달 30일 법원은 “상호간 일체의 민·형사상 청구를 제기하지 아니한다”라는 내용의 강제조정 결정문을 정부로 송달한 바 있다.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사회단체는 환영의 입장을 밝히면서도 최종적으로 구상권 소송이 철회된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며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속보]정부, 제주 강정마을 구상권 소송 취하···“갈등 치유와 국민 통합 위해”▶강정주민 “구상권 소송 철회 환영…최종 확인까지 마음 놓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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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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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러슨 미 국무, “북과 전제조건 없이 만날 준비 돼”

(추가) 맥마스터 보좌관, “지금이 충돌을 피할 최후, 최선의 기회”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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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3  1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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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12일(현지시간) 국제교류재단 주최 세미나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출처-미 국무부]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 측에 전제조건 없는 대화를 제안했다고 <연합뉴스>와 <CNN>이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북미 직접대화의 조건으로 북한 측의 진지함, 비핵화 의지를 강조하던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이전 입장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한때 대북 전문가들 사이에서 회자되다 가라앉은 ‘탐색적 대화’ 구상에 가까워 보인다. 

이날 한국 국제교류재단 등이 워싱턴DC에서 주최한 ‘환태평양 시대의 한·미 파트너십 재구상’ 토론회에 참석한 틸러슨 장관은 “우리는 언제든지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전제조건 없이(without precondition) 첫 만남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 일단 만나자”라고 말했다.  

“그런 후에 우리가 로드맵을 그리기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이 당신의 (핵)프로그램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테이블에 올 때만 우리가 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그것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해왔다.”

틸러슨 장관은 “일단 만나서 날씨 얘기라도 하자”고 했다. “당신이 흥미가 있다면 사각 테이블인지 둥근 테이블인지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다.” 다만, ‘탐색적 대화’가 진행 중일 때 도발은 없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우리는 ‘조용한 시기(a period of quiet)’가 필요하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틸러슨 장관의 발언은 “(북한과의 대화는) 시간 낭비”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과 엄청난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틸러슨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입장 차이로 인해 계속 사임설에 시달리고 있다. 

<CNN>에 따르면, 이날 오전 국무부 직원들과의 대화에서 틸러슨 장관은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박 캠페인은 한계가 있다면서 “그들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결정은 그들 정권이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현재의 경로를) 계속 간다면, 외교관들에게는 속수무책인 지점을 넘어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허버트 맥마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영국 씽크탱크 ‘폴리시 익스체인지’ 주최 행사에 참석해 “(지금이 북한과) 충돌을 피할 최후의 최선의 기회”라며 “시간이 소진되고 있다”고 밝혔다고 <뉴스위크(인터넷판)>이 보도했다. 맥마스터 보좌관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은 김정은 축출이 아닌 한반도 비핵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12일 베이징공항에서 기자들로부터 ‘미국과 직접 대화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자성남 유엔 주재 북한 대사는 “조건이 갖춰지면 대화할 수 있다”고 답했다. ‘조건’에 대해서는 “우리가 요구하는 조건”이라고만 했다.

한국 정부 당국자는 13일 “대화에는 열려 있는 데 결국 ‘비핵화 대화’라는 점에서 맥락은 기존과 같은 것”이라고 과도한 해석을 경계했다. 다만 “평화적 외교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걸 미 국무장관이 강조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 

새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도 ‘국무장관 발언에 대한 성명’을 통해 “북한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는 변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북한은 일본, 중국,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불안하게 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북한의 행동은 누구에게도 좋지 않고 북한에도 확실하게 좋지 않다”고 주장했다. 

(추가,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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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언론’ 오보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언론이 오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수록 생존을 위협받게 될 것
 
임병도 | 2017-12-13 08:17:4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시민이 올린 SNS 글을 검증 없이 보도한 동아닷컴

 

12월 11일 동아닷컴에는 <복직 박성호 기자, 신동호 저격 “기왕이면 사표 쓰시지>라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MBC에서 해직됐다 <뉴스데스크> 신임 앵커로 낙점된 박성호 MBC 기자가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을 저격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사는 오보였습니다.

MBC 신동호 국장이 물러난다는 동아일보의 기사를 공유하고 ‘기왕이면 사표도 쓰시지’라는 글을 쓴 사람은 MBC 박성호 기자가 아니라 동명이인인 일반 시민이었습니다.

동아닷컴의 기사가 나오자 여러 매체에서 앞다퉈 같은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당연히 모든 보도 내용은 ‘오보’가 됐습니다.

“MBC 복직 박성호 기자, ‘기왕이면 사표도 쓰시지’ 신동호 저격”(매일경제)
“‘앵커 낙점’ 박성호 기자 ‘신동호, 기왕이면 사표도’”(데일리안)
“뉴스데스크 박성호 앵커, 신동호 국장 교체에 ‘기왕이면 사표도 쓰시지’”(아시아경제)
“복직 박성호 기자, 신동호 국장에 ‘기왕이면 사표도’ 일갈”(스포츠 서울)

이런 오보가 나오게 된 배경은 최승호 PD가 MBC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과거 언론 부역자들에 대한 거취 문제가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언론은 이들의 싸움을 부추기려고 했고, 때마침 MBC 기자와 같은 이름의 계정에 글이 올라오자 옳다구나 하고 검증 없이 쓴 것입니다.

언론의 오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오보는 사라지지 않을까요? 오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언론이 여론을 어떻게 조작하려고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북풍을 위한 외신의 오역’

 

▲연합뉴스는 트럼프 대통령과 페리 전 미국 국방 장관의 말을 오역 보도했다.

 

연합뉴스는 12월6일 <페리 전 美국방 “北, 실전형 ICBM보유때까지 시험발사 안멈출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미국의 전직 국방 장관이 무기 관련 세미나에서 ‘미국과 일본이 독립적인 핵전력을 갖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보도했지만, 이 기사는 오보였습니다.

특히 발언 당사자인 월리엄 페리 전 장관은 직접 트위터에 연합뉴스와 조선일보 등을 지목하며 “나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어떤 나라에서든 핵무기 배치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연합뉴스 워싱턴 특파원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서 기름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Long gas lines forming in North Korea)라며 북한 상황이 ‘나쁘다’고(Too bad!) 말한 내용을 ‘가스관’이라고 오역한 적도 있습니다.

기레기 대참사,트럼프 트윗 ‘오역’을 그대로 받아쓴 언론사들

외신 오역이 발생하는 이유는 북한과 관련한 일명 ‘북풍’ 때문입니다. 북한과 관련한 기삿거리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보도하니 오역과 오보가 난무합니다. 단순 오역의 문제가 아니라, 북풍을 통해 정치적 여론을 형성하려는 의도로도 풀이될 수 있습니다.


‘오보라도 괜찮아, 노무현만 죽일 수 있다면’

 

▲참여정부 시절, 조선일보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왜곡 보도했다.

 

오보 사례를 조사하면 제일 많이 나오는 언론사 중의 하나가 ‘조선일보’입니다. 참여정부 시절, 아니 훨씬 이전부터 조선일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오보를 수십 차례 쏟아냈습니다.

2004년 조선일보는 <검찰 두 번은 갈아 마셨겠지만>이라는 제목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의 측근 비리 수사에 불만을 나타냈다고 보도했습니다. 검찰 수사권의 독립을 강조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무너뜨리는 보도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5년 조선일보는 “확인 결과 (갈아 마시겠다는) 발언을 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바로 잡는다”며 정정 보도를 했습니다.

조선일보는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 책임 있습니다. 회피하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민생파탄 책임 없다”라고 보도했습니다. AP통신의 기사를 인용해 노무현 대통령이 ‘수개월 간에 걸친 비판’을 받았다고 보도했지만, AP통신 원문에는 노 대통령이 ‘악의적인 비판을 받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오보임을 알면서도 조선일보가 왜곡 보도를 한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매장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악의적인 왜곡 보도가 연일 언론에 등장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시절 내내 ‘무능한 대통령’으로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소릴 들었습니다.


‘속보 경쟁, 검증 따윈 필요 없어’

 

▲ 메르스 사태 당시 보건복지부는 한국일보의 오보를 지적했다. 그러나 YTN은 해명 자료가 나온 뒤에 오보를 냈다. 연합뉴스는 기상청 직원의 통지문을 검증 없이 보도했다.

 

재난 사고 때마다 오보는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세월호 참사 때는 ‘전원 구조’라는 오보가 나와 국민의 분노를 유발했습니다.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던 2015년 6월 11일 저녁 8시 30분경 YTN은 ‘메르스 감염 삼성병원 의사 사망’이라는 속보를 내보냈습니다. 메르스 감염 사망자가 대부분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기에 젊은 의사의 사망 소식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그러나 YTN의 뉴스 속보는 오보였습니다.

YTN보다 먼저 오보를 낸 언론은 한국일보입니다. 한국일보는 오후 6시 33분 ‘메르스 감염 삼성서울병원 의사 뇌사’라고 보도했습니다. 이후 보건복지부는 8시 10분 해명자료를 배포했습니다. 그런데도 YTN은 검증 없이 8시 30분에 오보를 냈습니다.

2016년 연합뉴스는 강원도 횡성에서 6.5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속보를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지진은 횡성이 아니라 에콰도르에서 발생했습니다. 기상청 직원이 실수로 보낸 통지문을 검증하지 않고 보도해서 난 오보입니다.

포털사이트로 뉴스를 소비하는 시대에서 먼저 속보를 내는 언론사는 수십 만의 조회수를 선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검증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무조건 포털 사이트 메인에 배치될 수 있고, SNS에 공유될 수 있다면 오보라도 괜찮습니다. 이제 언론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클릭 수 ‘장사를 하는 인터넷 회사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오보’

▲ 해외 언론은 오보를 낸 기자에게 징계를 내리고, 방송사 사장 등은 오보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도 했다.

2015년 1월 조선일보는 ‘지상파 광고총량제’ 도입을 비난하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종편을 운영하는 조선일보 입장에서 광고가 지상파에 몰린다면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 기사는 자사 언론사를 보호하기 위한 오보였습니다.

오보를 낸 기사의 지면을 보면 대문짝만합니다. 그러나 정정 기사는 구석에 아주 조그맣게 나옵니다. 왜 정정기사는 오보의 크기만큼 나오지 않을까요? 자신들의 실수를 드러내기 싫다는 언론의 오만함입니다.

트럼프 관련 오보를 낸 미국 ABC방송은 담당 기자 브라이언 로스에 대해 1개월 정직 징계를 내렸습니다. 일본 니혼TV 사장은 허위 증언에 따른 단 한 건의 오보에 책임지고 사퇴를 했습니다. 정치인 성범죄 오보를 보도한 영국 공영방송 BBC 사장 조지 엔트위슬은 “방송국의 최고 편집권자로서 ‘뉴스나이트’가 보여준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unacceptable) 언론 보도에 대해 책임지고 사퇴하는 것이 명예로운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라며 사퇴했습니다.

오보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 언론은 오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누구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기자들은 처벌도 없고 징계도 무겁지 않으니 오보를 내도 무감각해집니다. 당연히 오보가 사라지지 않고 또 나옵니다.

과거에는 오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민들은 캡처 또는 특정 사이트의 페이지를 영구 저장하는 방식 등을 통해 오보를 기록하고 공유하기도 합니다. 가짜 뉴스가 무분별하게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뉴스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과 판단력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사는 ‘저널리즘’의 원칙과 기본을 지키기보다 ‘클릭 장사’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오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수록 신뢰도는 떨어지며, 생존을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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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차 막아 세우고, 크레인에 오른 '깡패 신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12/13 11:48
  • 수정일
    2017/12/13 11:4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작은책 올해의 인물] 길 위의 신부, 문정현

17.12.13 09:38l최종 업데이트 17.12.13 09:38l

 

이 글은 직접 취재 외에 <한겨레> 2010년 6월 1일자부터 10월 8일자까지 김중미 작가가 구술 정리한 '다시 길을 떠나다', <통일뉴스>의 '문정현-죽음을 건너 순교자의 삶 살고파', <인물과 사상>(2008년 3월호) 등을 참고했습니다. -기자말 
 

전쟁은 생명을 죽이는 끔찍한 폭력이다 11월 8일 광화문에서 서각기도를 하시는 문정현 신부
▲ 전쟁은 생명을 죽이는 끔찍한 폭력이다 11월 8일 광화문에서 서각기도를 하시는 문정현 신부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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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9일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옆에는 문정현 신부가 13일째 서각 기도를 하고 있었다. 트럼프 방한에 반대하는 기도였다. 문정현 신부 앞에는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온몸으로 깎는 반전 평화 새김展', 그 뒤로는 '반전 평화'라고 글자가 쓰인 커다란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문정현 신부는 나무에 새긴 글자를 조각칼로 정성스럽게 파고 다듬었다. '평화로운 한반도 나라다운 나라', '반전 평화', '전쟁은 생명을 죽이는 끔찍한 폭력이다'라는 글자를 새겼다. <작은책>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올곧게 한길을 걷고 있는 문정현 신부를 올해의 인물로 뽑았다. 문정현 신부의 일생을 엿본다.
   
문정현 신부는 어떤 사람일까. 1990년 폭로된 보안사의 디스켓에 담긴 그의 신상은 이렇다.

 

"개인 번호 169 문정현. 전북 지역의 대표적 문제 인물. 외고집에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별명은 '깡패 신부'. 3, 4공화국 당시 반정부 활동으로 수감." 

문 신부는 그 뒤로 깡패 신부, 전문 시위꾼 등으로 불렸다. 하지만 문정현 신부는 누구보다도 생명과 평화를 사랑한다. 생명을 경시하고 폭력을 숭배하는 자들 때문에 1966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거의 일생을 길에서 보냈다. 아직도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와 싸우고 있고, 미 공군기지로 의심되는 제2공항 건설을 저지하는 싸움을 하고 있다. 
 

문정현은 1940년 8월 20일, 전북 익산시 황등면 황등리에서 태어났다. 옛날 지명이 이리였던 현 익산시는 충남 논산과 전북 군산 사이에 있다. 황등면은 조그만 마을이다. 서쪽으로는 아직도 전라선 완행열차가 다니는 황등역이 있고 동쪽으로는 KTX 기찻길이 지나가고 있다. 

문정현의 집안은 5대째 천주교 가정이었다. 친가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 무릎'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는 주일이 되면 황등에서 익산(당시 이리) 시내까지 8킬로미터가 되는 길을 걸어서 미사를 다녔는데 문정현도 늘 따라다녔다. 

열 살 무렵 익산본당(이리본당, 지금의 창인동성당)의 이기순 신부가 문정현을 보더니 세례명을 불렀다.

"바르톨로메오, 이리 와 봐라. 너 신부님 안 될래? 신학교 가라."

문정현은 어리둥절했지만 그 말이 머릿속에 탁 박혔다. 문정현은 그때부터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문정현이 열 살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 말께 남하한 인민군과 남쪽 경찰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실탄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나고 대포 소리가 요란했다. 곧 이어 살던 마을은 인민군 세상이 되었다. 문정현이 다니던 황등초등학교는 인민군 의용군 훈련소가 됐다. 

인민군들이 떠나자 다시 미군이 들어와 황등초등학교를 차지했다. 미군들은 동네 아이들을 뽑아서 설거지를 시켰다. 아이들은 난로에 주전자 물을 데워서 설거지를 해 주고 시레이션(C-Ration)이라는 미군 전투식량과 다른 먹을 것들을 받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앞에서 미군 두 명이 문정현을 불렀다. 흑인과 백인 병사였다. 손짓 발짓으로 문정현을 언덕배기에 세우고 머리 위에 국방색 깡통을 올려놓았다. 문정현은 군것질거리라도 생길까 싶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그들이 5~6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카빈총을 꺼내더니 머리 위에 올려놓은 깡통을 겨냥해서 쏘는 것이 아닌가. 문정현은 혼비백산했다. 미군 병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훗날 문정현은 그 미군 녀석의 하얀 이가 두고두고 떠올라 화가 났다.

문정현은 신학교를 거쳐 1958년,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평범한 신학생이었던 문정현은 순종하는 모범생이었다. 신학교는 보수적이고 엄격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정치의식이나 사회의식은 전무했다. 철학과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지만 문정현은 그냥 군사정변이 일어났나 보다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군에서 전역한 뒤 2년 만에 복학을 했다. 

문정현은 1966년 12월 16일, 스물일곱 살에 전주 중앙성당에서 한공렬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을 받을 때 선택한 성서 구절은 '주의 제단에 돌아가리라'였다. 사제로서 첫 미사는 바로 다음 날 고향 본당인 이리의 황등성당에서 올렸다.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첫 부임지는 전주 전동성당이었다.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일본에서 김포공항으로 오던 중 행방불명이 됐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연행된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민청학련의 관련자 180여 명이 불온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 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한 것이다. 1972년 10월 '유신 체제 발족'과 1973년 8월 8일에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반대 투쟁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이 반대자들의 뿌리를 뽑고자 조작한 사건이었다. 

1974년 5월 27일 이철, 김지하를 포함한 55명이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으로 사형과 징역 2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민청학련에 자금을 대 준 혐의로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 지학순 주교가 구속됐다. 문정현은 "감히 주교를 구속해?" 하는 분노로 정권의 실체와 사회를 깨닫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정현은 명동의 서울대교구청을 갔다. 김수환 추기경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서자 초췌한 모습으로 바닥에 앉아 있던 부인들이 문정현이 입고 있는 신부복의 로만칼라를 보고는 대뜸 서명용지를 내밀었다. 그이들은 1964년 8월 박정희가 조작한 인민혁명당(인혁당) 주범으로 몰린 우홍선·이수병·김용원 씨의 부인들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0년 뒤인 1974년 4월 25일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으며, 이들이 인민혁명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국가 전복 활동을 지휘한 것'으로 발표했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구속된 인혁당 관련자 23명 가운데 8명은 사형, 나머지는 무기에서 15년까지 중형을 받은 상태였다. 이들은 빨갱이로 몰려 그 가족들까지도 친척과 이웃들에게 기피 인물이 되어 있었다. 서명용지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윤보선 전 대통령, 윤형중 신부의 서명이 있었다. 문정현은 두말없이 서명을 했다.

"그때 나는 인혁당에 대해 처음 들었다. 이럴 수가 있나. 그때부터 나는 성당에서 강론할 때 인혁당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바로 정보부, 경찰, 보안대 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밀착 감시였다. 전주 효자동 성당 주임 신부로 있었는데 내 침실 창문 바로 밑에서 나를 감시하고 길 건너 남의 집 담, 소금집이라는 데가 감시 본부였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수시로 내 방문을 따고 들어와서 뒤졌다. 통장을 찾으려고. 솔직히 난 통장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회에 발언하기 시작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을 판결하는 날이었다. 그때 문정현 신부는 대법원에 와 있었다.

"BBC 방송하고 국제앰네스티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취재하러 왔는데 난 통역과 안내를 맡았다. 법정에 올라가는데 판결이 끝나고 가족들이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들이 들고 있는 가방이랑 물건들을 가지고 법대고 뭐고 막 까무러치듯이 휘젓고… 사복 경찰들이 몸부림치는 유족들을 끌어내리고, 처절했다."

그날 문 신부를 비롯한 다른 신부들은 응암동 성당에서 잤다. 새벽에 유족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함세웅 신부가 받았는데 얼굴이 노래졌다. 처형한 거다. 우리는 바로 서대문구치소에 갔다. 전투경찰이 꽉 차고 유족들이 와 있었다. 선고하고 바로 사형시킨 거니까. 거기서 몸부림치고 유족들 끌어안고. 그런데 시신 한 구를 태운 장의차 한 대가 응암동로터리에서 잡혔다고 하더라. 택시 타고 쫓아갔다. 장의차를 못 가게 하루 종일 씨름했다. 함석헌, 윤보선 씨 부인, 문동환 목사. 또 누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없었으니까. 나는 장의차 바퀴 바람을 빼기도 하고, 껌을 씹어서 키를 넣는 구멍에 집어넣기도 하고, 신문지를 말아서 머플러(배기통)에 집어넣기도 했지. 경찰이 나를 끄집어내려고 기를 썼다."

경찰은 결국 크레인을 동원해 그 장의차를 달고 가려고 했다. 

"정권은 고문한 흔적을 없애려고 벽제화장터에 넣으려고 했던 거지. 나는 크레인을 타고 올라가 그 위에서 연설했다. '인혁당은 조작이다, 하루도 안 돼서 죽이는 법이 어딨냐'고."

경찰이 문정현 신부를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아스팔트로 떨어졌다. 무릎 연골이 파열됐다. 문 신부는 그때 다친 무릎 때문에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장애인이 됐다.

문정현 신부는 종로5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관에서 목사들이 진행하는 목요기도회를 알게 됐다. 그해 7월부터 시작된 기도회에는 여러 성직자들과 인혁당, 민청학련 학생 가족들이 함께했다. 문정현은 사제단의 시국 미사나 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며 억울함을 알렸다.
 

 문정현 신부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감행된 ‘3.1 구국선언’에 참여한 대가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수인번호 1003번이 그의 이름이었다.
▲  문정현 신부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감행된 ‘3.1 구국선언’에 참여한 대가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수인번호 1003번이 그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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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구국선언, '당당히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김지하 시인 구명 운동을 하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는 함께 뜻을 모아 1976년 3월 1일 저녁 6시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 미사를 거행했다. 문정현 신부는 2부 구국 기도회에서 김지하 시인의 어머니가 쓴 호소문을 대신 읽었다. 그리고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했고 마지막으로 이우정 교수가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했다.

유신정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3·1절 미사를 '3·1 명동사건'이라고 이름 붙이고 국가 전복 내란을 기도했다며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는 3·1절의 종교 행사를 개신교와 가톨릭의 성직자들을 한꺼번에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 경찰은 문정현 신부가 자고 있던 전주 해성학교 기숙사에 들이닥쳤다.

"기숙사에서 잠자는데 새벽에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됐다. 마당까지 다 파헤쳤더라. 전주경찰서에서 서울시경으로 갔다. 거기 들러서 남산 육본 밑에 한성산업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곳으로 갔다. 2층집이었다. 몇 사람이 와 있었다. 얻어맞지는 않았다. 안기부 요원 세 명이 붙어서 며칠 동안 잠을 한숨도 안 재웠다. 

다시 중정 6국으로 끌고 가더라. 거기서 4일 밤낮으로 조사받았다. 옆방에서도 누군가 조사를 받는지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에 겁이 나기보다는 더 이가 갈리고 용기가 났다. 다시 검찰청으로 가서 구속됐다.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신부 셋이 모두 구속됐다는 소문을 거기서 들었다."

문정현 신부는 연행된 뒤인 두 달 만에 면회가 허락됐다. 동생 문규현이 신부 서품을 받는 날인 5월 3일, 어머니와 문규현 신부가 면회 와 처음으로 만났다.

"언젠가는 어머니를 뵐 텐데 울까 봐 걱정 많이 했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는 쫓아오더니 허리를 잡고 '우리 아들 김대건 신부 돼야 돼' 아, 참. 대견한 어머니다. 울고 그럴 줄 알았더니. 대견한 어머니다. 평생 우리를 위해서…." 

문정현 신부가 감옥에 있던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다. 문정현 신부는 '유신정권'이 종지부를 찍는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지만 곧 공포심이 생겼다. 철창문이 열릴 때마다 '나를 데려가려고 오는 건가?' 무서움에 떨었다. 좁은 방을 뱅뱅 돌며 기도를 했다.

"'내 생명을 구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내가 끌려가 죽더라도 비굴하지 않게, 당당하게 죽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아무 일 없이 1979년 12월 8일 문정현 신부는 석방됐다. 1980년 1월 16일 전주 중앙성당으로 발령이 났다. 전주 중앙성당은 주교좌성당이었다. 감옥에서 갓 나온 문정현 신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것은 김재덕 주교가 대외적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을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문정현 신부는 전두환 정권에서도 굽히지 않았다. 미사 때마다 정치에 군인들이 나서면 안 된다고 말했다. 미사 중에 정보 계통 사람들이 눈에 띄면 미사를 중단하고 내쫓아 버렸다. 신자들 중에는 겁먹는 사람도 있었고, 문 신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1985년 문정현 신부는 전주 중앙성당에서 전북 장수군 계내면 장계리에 있는 장계성당으로 부임했다.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많이 했다. 함평 고구마 사건부터 노풍 피해 보상 운동, 취락 구조, 소 파동 싸움도 굉장했다. 군청을 점거하고 경찰지서에다 농민 깃발을 꽂고, 잡혀가고, 꺼내 오느라고 단식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 시골 바닥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성당에 최루탄이 날아 들어오고… 무전기를 뺏긴 경찰이 소방차를 가져와서 성당 화장실을 퍼 내고… 피 터지게 싸웠다."

'분신 같은' 오두희와의 만남, 노동운동의 시작 

문정현 신부는 1988년 익산(당시 이리) 창인동 본당 신부로 부임했다. 거기서 '익산 노동자의 집' 실무자로 온 오두희를 만났다. 학생운동 이후 '전북 지역 최초 여성 위장 취업자'였다. 수배 생활은 길었다. 꽤 오랫동안 공권력을 피해 성당에 숨어 살았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이른바 '유화 국면'이 시작됐을 때 많은 수배자들처럼 오두희도 수배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가톨릭 전주교구에서 운영하던 '군산 노동자의 집' 사무국장이 됐다. 지금도 평화바람에서 함께하고 있는 그는 26년 넘도록 분신처럼 문정현 신부의 사목 활동을 받쳐 준 동지가 되었다. 

그 무렵 익산에서는 쌍방울·한성·경성고무 따위의 크고 작은 사업장에서 노조 결성과 어용노조 반대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의 집'으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새로 부임한 문정현 신부에게 쉽게 신뢰를 보이지 않았다. 문정현 신부 역시 핍박당하는 노동자들 속에 있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소통에 미숙한 점이 많았다. 노동자의 집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마음에 안 들 때도 많았다. 어느 날 노동자의 집에 들렀다. 사제관 아래 아주 가까이 있던 노동자의 집에서 밤새도록 소주병 부딪치는 소리, '찍찍' 베 찢는 소리가 났다. 화염병을 만드는 소리였다. 참다못해 인터폰으로 소리를 질렀다. "밤새워 화염병을 만들 거야?" 노동자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집회 나가잖아. 경찰이 페퍼포그 쏘잖아. 시위 현장에서 어린 노동자들이 경찰한테 맞아 다친 채로 끌려가는 걸 보면서 '화염병 더 없냐? 왜 그거밖에 안 만들었어?' 하고 소리쳤어. 이율배반이야. 당하다 보니까 노동자 계급성을 깨달아. 그 사람들한테 뭐 이익, 도덕을 따지냐. 굼벵이가 밟혔어. 꿈틀거리는 건데. 이런 의식으로 변하더라고."

문정현 신부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노동자들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노조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코디언을 배우고 연주하게 된 것도 노동자들과 어울리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때 한참 유행하던 행진풍의 노동가요를 멋지게 연주해 노동자들과 같이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시위 현장에서는 격려해 주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성당은 늘 경찰의 사찰 대상이었고, 집회의 마지막 집결지는 항상 그곳이었다. 그때는 창인동성당이 '노동자 투쟁의 메카'라는 소리도 들었다. 노동자들이 성당으로 모이면 경찰들은 성당을 향해서 최루탄을 쏘아 대고, 노동자들은 돌멩이로 막으며 대치를 했다. 그때마다 문정현 신부는 노동자의 편에 서서 앞막이를 충실히 했다. 그렇게 차츰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어 갔다.

조성만의 유서, 실형 받은 동생... "이겨 내자"

5공화국이 막을 내릴 무렵 문정현 신부는 또 다른 의식을 일깨워 준 존재를 만난다. 그이가 직접 영세를 주었던 제자, 조성만이다. 조성만은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던 성당 벗들을 바라본 뒤 할복 투신했다. 스물넷 짧은 삶이었다. 유서에는 '한반도 통일, 미군 철수, 군사정권 퇴진, 서울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울시청에서 장례 행렬이 100만 인파였다. 모교에 왔고, 집을 들러서 망월동으로 갔지. 나보다도 걔가 지금도 눈을 부릅뜨고 있다니까. 당시는 내가 성만이의 스승이었지만 지금은 성만이가 나의 스승이지."

조성만의 죽음은 통일 논의에 물꼬를 텄다. 주한미군 문제와 통일 문제를 하나로 바라보게 해 준 계기가 됐다. 그동안 문정현 신부가 매달려 왔던 우리 사회의 모든 부조리들이 결국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됐음을 깨닫게 됐다. 그 무렵 임수경이라는 대학생이 방북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마침 문정현 신부의 동생 문규현 신부는 미국 메리놀 신학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새로운 부임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문정현은 정의구현사제단으로 하여금 문규현 신부를 이북으로 보내 임수경과 함께 분단의 장벽을 넘어오게 했다. 문규현은 판문점에서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3년 5개월 실형을 살아야 했다. 

"문규현 신부가 임 씨와 함께 걸어서 휴전선으로 들어온 뒤에 감옥에 갇혔을 때 어머니와 면회를 갔지. 몸이 반쪽이더라고. 이게 다 내 작품인데, 피눈물이 흘렀지. 동생을 사지로 몰아넣었지만 자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야. 어머니는 김대건 신부 이야기를 했고, 나는 '고생했다, 이겨 내자'라고 한마디 했지."

문정현 신부는 1995년 메리놀 신학교에서 신학석사(MTH) 학위를 받은 뒤에 페루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해 8월 말 전북 군산의 오룡동성당으로 발령이 났다고 연락이 와서 서둘러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군산에서는 미군기지 활주로 사용료 문제가 불거져 있었다. 우리 민항기들은 군산 미군기지 활주로를 사용했고 사용료와 유지보수비를 미군 측에 지불해 왔다. 그런데 1997년 초, 미군 측은 그 비용을 4배 이상 올려 달라고 요구했다.

"말이 되지 않지. 우리 땅을 공짜로 내주고 기한도 없이 사용하면서 우리 민항기가 활주로를 사용한다 해서 사용료를 받고 유지보수비까지 내고, 거기다 또 4배까지 올려 달라 한단 말인가?"

문정현 신부는 '활주로 사용료 반대를 위한 군산시민모임'을 조직해서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에 집회를 하기 시작했다. 문 신부는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했다. 반미 투쟁의 시작이었다. 결국 활주로 사용료 인상안 일부는 철회됐다. 문 신부는 또다시 1998년 5월 '군산 미군기지 우리땅 찾기 시민모임'을 만들었다. 

문정현 신부는 매향리 폭격장 폐쇄 투쟁과 3년간의 군산 미군기지 싸움에서 비로소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소파)의 불평등을 실감했다. 미군기지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피해나 미군의 범죄에 대해 한국 정부는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한국정부는 군산 미군기지에 무단침입을 했다는 혐의로 문정현 신부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런 모순은 군산만의 일이 아니라 미군기지가 있는 이 땅 곳곳의 문제이며, 오키나와·괌·하와이·타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정현 신부는 이런 모든 원인이 소파(SOFA), 즉 한미행정협정 또는 주둔군지위협정을 불평등하게 맺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소파 개정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끈질긴 투쟁 끝에 2001년, 소파는 또 한 차례 개정됐다. 살인, 강간, 유괴 등 12개 중범죄를 저지른 미군 범죄자의 신병 인도 시점이 '재판 종료 후'에서 '기소 시점'으로 바뀌었고, 미군은 한국의 환경 법령을 존중한다는 특별 양해 각서를 체결했다. 소파의 불평등 조약이 어느 정도 개선된 셈이다. 그 이후 미군 범죄가 꾸준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문정현 신부가 바라는 세상은 아직 아니었다. 2002년 여름, 미군 장갑차 사고로 두 명의 여중생이 죽었다. 한국은 소파협정을 맺은 이후 처음으로 미군 측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지만 미군 측은 이를 거부한 채, 자기들끼리 재판을 했고 가해자들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2002년 겨울, 분노한 시민들 10만이 광화문 일대에 모여 촛불 시위를 했다. 문정현은 그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봤다. 언젠가는 이 땅에도 평화가 흐를 것이라 믿었다.

"약장수처럼 평화를 공유하자" 평화유랑단의 시작 

그 무렵 미국이 9·11 사건을 빌미로 석유를 겨냥한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국정부에 파병을 요청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국익을 위해서 전투 병력이 아닌 의료·후방 지원을 맡는 지원부대를 파병한다고 결정했다. 문정현 신부는 놀랐다.

"우리도 이미 전쟁을 겪어 그 비극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분단이 된 상태이고, 이로 인해 아픈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박정희 정권 때도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전쟁에 파병한 아픈 역사가 있다. 그런데 또다시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 국익을 앞세워 참여한다는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였다. 정부가 파병을 하면 우리는 전범국가의 국민이란 오명을 써야 했다."

문정현은 평화유랑단을 만들고자 했다. 옛날 '약장수'처럼 사람들이 모인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담을 나누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유랑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각 지역의 환경운동단체·노동운동단체·인권운동단체·사회복지운동단체를 만나서 평화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자, 또 각 지역의 현장에서 판을 벌여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람이 모이면 같이 이야기를 나누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하려니 음향시설도 필요하고, 영상시설도 필요하고, 또 기본적으로 흥을 돋울 수 있는 악기도 필요했다. 다행히 70년대산 독일제 벤츠 미니버스를 마련했다. 미술행동센터에서는 차에 그림을 그려 주어 일명 '꽃마차'란 평화유랑단의 마스코트가 탄생하게 됐다. 

인터넷을 이용해 단원을 모았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다. 생태·환경·인권운동을 하던 사람, 아나키스트, 윤여관 선생, 노래 잘하는 보리, 고철. 전주·인천·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7명이 모여 '평화유랑단 평화바람'을 결성했다. 거기에 문정현과 오두희까지 아홉 명이 2003년 11월 14일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발대식을 했다.
 

9월 13일, 국방부는 빈집을 철거하겠다며 다시 포클레인과 용역깡패들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대추리 노영희 할머니는 경찰을 막아세우고 "당신들도 낳아 길러준 부모가 있을 텐데, 부모같은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절규했다. 국방부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마저 부수길 서슴지 않았다. 9월 13일, 국방부는 빈집을 철거하겠다며 다시 포클레인과 용역깡패들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대추리 노영희 할머니는 경찰을 막아세우고 "당신들도 낳아 길러준 부모가 있을 텐데, 부모같은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절규했다. 국방부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마저 부수길 서슴지 않았다.
▲ 대추리 노영희 할머니 지난 2006년 9월 13일, 국방부는 빈집을 철거하겠다며 대추리에 다시 포클레인과 용역깡패들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대추리 노영희 할머니는 경찰을 막아세우고 "당신들도 낳아 길러준 부모가 있을 텐데, 부모같은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절규했다. 국방부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마저 부수길 서슴지 않았다.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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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까지 옮긴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

평택에 미군기지를 확장한다고 했다. 문정현 신부가 2004년 12월 평택 대추리에 직접 들어가서 들어 보니 주민들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군이 들어와 군용 활주로를 만든다고 쫓아냈다. 새로 마을을 일궈 정착하나 했더니 1952년 한국전쟁 때 다시 미군 활주로를 연장한다고 해서 쫓아냈다. 

보상 따위를 꺼낼 수도 없는 시절이어서 미군들이 마구잡이로 불도저로 밀어 버렸다. 그래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갯벌에다 움막을 짓고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새로 땅을 만들어야 하니 일손이 모자라 도두2리에서는 네 살짜리 아이를 바구니에 넣어서 나무에 걸어 놓고 일하다가 아이가 도랑에 빠져 죽은 일도 있었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황새울을 문전옥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대추리에는 그때 생겨난 '황새울영농단'이 있었다. 김지태 이장을 중심으로 김택균·신종원 세 사람이 나서서 마치 형제처럼 이심전심으로 일을 했다. 영농단에는 온갖 농기계와 연장이 다 갖춰져 있어 그 넓은 땅에 짓는 농사를 모내기부터 추수까지 기계로 할 수 있고, 농기구도 스스로 고쳐 쓸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함께 일하며 밥을 먹고 술도 한잔 마시며 구수한 입담을 나누었다. 대추리만의 고유한 풍경, 오랫동안 만들어진 마을 공동체와 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삶 자체가 평화였다. 그 평화를 빼앗긴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새울영농단의 세 지도자는 공동체를 보존하려고 애썼다. 이들은 2003년 7월 1일 대추리·도두2리·안정리 주민들로 '미군기지 확장 반대 평택시 팽성읍 대책위원회'를 꾸려 줄기차게 투쟁했다. 그러던 2004년 9월 1일, 주민 동의 없는 국방부의 일방적인 특별법 공청회에서 항의하던 주민 대표들과 평택 지역 사회단체 회원들이 경찰에 강제 연행되었다. 그날 저녁부터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은 '우리땅 지키기 팽성주민 촛불행사'를 시작했다.

문정현 신부는 그동안 어떤 투쟁에 참여하든 이름만 얹고 마는 형식적인 투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는 곳까지 옮겨서 싸운 적은 없었다. 대추리 주민들과 함께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하기로 결정한 뒤, 아예 마을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2004년 12월 문정현 신부, 오두희, 여름, 반지, 밥, 마후라, 해밀, 팥공, 두시간, 이렇게 모두 아홉 명이 대추리로 들어갔다. 

정부는 2006년 5월 4일 '여명의 황새울 대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행정대집행을 저질렀다. 새벽 5시, 동틀 무렵 포클레인을 앞세운 용역 700여 명과 12000명이나 되는 전투경찰이 새까맣게 몰려왔다. 군 병력도 2700명이나 됐다. 아비규환이 일어났다. 평택 지킴이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대추초등학교에서 끌려 나왔다. 

노인들이 울부짖고 서러움과 분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까무러쳤다. 부상자가 200명이 넘었고, 연행된 사람이 600명이 넘었고, 200여 명이 입건되고 40여 명이 구속됐다. 다음 날 다시 전투경찰이 마을로 몰려와 군화를 신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는 사람들을 체포해 갔다. 935일 동안 들었던 평화의 촛불이 꺼졌다. 노무현 정부 때였다.

문정현 신부는 청와대 앞 화단에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하지만 세상은 대추리 주민의 삶이나 그의 단식에 관심이 없었다. 월드컵 응원하는 소리만 들렸다. 청와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문 신부는 21일 만에 단식을 접었다. 공황 상태에 빠졌다.

대추리에서 지적장애인들의 공동체인 '작은자매의 집'으로 돌아왔다. 텃밭을 일구어 보려고 했지만 힘에 부쳤다. 약해지는 자신이 서글퍼졌다. 문정현 신부는 작은자매의 집을 그만두고 은퇴하기로 했다. 교구의 허락을 받고 난 뒤에 2008년 1월 24일, 은퇴 미사를 했다. 

작은자매의 집을 눈물로 떠난 뒤 그는 그쪽으로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 마음을 다스려 보자고 대추리에서 어깨너머로 본 서각을 해 보기로 했다. 대추리에서 만난 이윤엽 작가가 인사동에 함께 가서 서각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문정현 신부는 '껍데기는 가라',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같은 문구를 붓글씨로 써서 서각을 했다. 

문정현 신부는 군산 옥봉리로 내려갔다. 2007년 1월 23일 무죄로 판결난 인혁당 사건으로 받은 배상금으로 허름한 집을 사서 수리했다. 그해 3월 15일 집들이를 하고 오두희, 구중서, 딸기와 함께 공동체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에서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제주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내린 뒤, 건설을 강행하고 있었다. 강정마을 해안엔 길이 1.2킬로미터, 너비 150미터에 달하는 보기 드문 거대한 단일 용암너럭바위로서, 용천수가 솟아나 국내 유일의 바위 습지를 형성하고 있어 매우 보전 가치가 높은 구럼비 바위가 있었다. 

문정현 신부는 2011년 7월 6일 제주도 강정마을로 이사했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 이어도로 000-0. 문정현 신부의 새로운 주소지다. 문 신부는 이날 새벽 5시에 군산 집에서 일어나 오전 10시 반에 장흥 노력항에서 선박 오렌지호를 타고 2시간 가까이 비안개를 헤치고 제주 성산포에 도착했다.

"정부와 해군에 대한 분노보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보다, 국가 권력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강정마을 주민들의 절규가 내 가슴을 치고 내 몸뚱이를 제주로 향하게 했다."
 

 평화바람 식구들과 시민들은 아직도 해군기지 앞에서 깃발을 들고 있다.
▲  평화바람 식구들과 시민들은 아직도 해군기지 앞에서 깃발을 들고 있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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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에서 활동하는 참모' 오두희는 망설였다. "대추리의 아픔이 너무 컸고, 국가가 한다고 하면 할 것이기에 신부님 혼자 갔다 오시라"고 했다. 며칠 뒤 모두가 싸움이 끝나 간다고 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이제야 공간이 열리고 있다"는 걸 역설하며, "진짜 평화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얘기해 나가겠다"고 말하면서 강정으로 갔다. 오두희는 강정마을 투쟁에서 시급한 건 '재정 사업'과 '장기 투쟁 대비'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하는 건 주민들 지원이다, 언젠가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정현 신부와 평화바람 식구들은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립 반대운동을 지원하려고 '강정평화상단'을 꾸렸다. 평화상단에서는 강정에서 직접 만든 소라와 전복젓갈을 비롯해 참조기젓갈, 다시마, 소금, 고등어를 판매하고 있다. 문정현 신부는 "많은 분들이 한 번이라도 제주 강정에 찾아오면 좋겠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고, 이곳이 콘크리트로 덮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직접 제주에 찾아오기 어려운 분들도 평화상단을 통해 제주 강정 바닷가를 지키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정현 신부와 평화바람 식구들은 2017년 제 18대 선거 때 문재인이 당선되기를 바라면서 선거운동을 했다. 하지만 박근혜가 당선됐다. 오두희는 박근혜가 당선된 뒤 주민등록을 아예 강정으로 옮겼다. 살려고 보니 공간이 필요했다. 2년 동안 준비한 끝에 2015년 '성프란치스코센터'가 완공됐다. 문정현 신부가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해 받은 국가배상금을 종잣돈으로, 시민 모금을 더해 강정에 평화의 거점을 세웠다.

문정현 신부는 해군기지 반대 미사를 하다가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2012년 4월 6일 미사 중 진입한 해경과 몸싸움을 하다 강정포구 방파제 주변에 쌓아 놓은 7미터 높이의 테트라포드(4개 뿔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추락했다. 허리뼈 세 곳이 골절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평소 지병인 심근경색증이 있는데다가 단식 투쟁도 한 적이 있어 쇠약해진 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건강을 회복해 다시 길 위에 섰다.
 

구상금 34억 원 박근혜 정부는 이들에게 구상금 34억 5천만 원을 청구했다. 문재인 정부는 아직 답이 없다.
▲ 구상금 34억 원 박근혜 정부는 이들에게 구상금 34억 5천만 원을 청구했다. 문재인 정부는 아직 답이 없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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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 해군기지의 이상한 이름

제주 강정 주민들과 문정현 신부는 9년 동안 저항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국가안보사업임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기지 건설을 강행했다. 이에 맞선 강정마을 주민과 활동가들의 저항은 처절했다. 하지만 결국 2016년 2월 26일 제주 해군기지가 들어섰다.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요상한 이름을 달았다. 

농사와 어로 작업밖에 모르던 주민들은 국가안보사업을 방해하는 '종북 세력'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게다가 해군은 해군기지 공사를 방해했다며 강정주민 등을 상대로 34억 5000만 원의 구상권을 청구했다. 기소된 피소송인이 121명이니 1인당 2850만 원가량 되는 돈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둘째 문제다. 중요한 건 "지난 10년 동안 발생한 국가 폭력의 실체"를 밝혀내는 '진상 규명'이다. 진상 규명이 되면 잘잘못이 가려지고 구상권은 자연스레 정리될 것이다. 이들의 투쟁이 정당했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구상권 청구 소송은 철회하고 사법처리 대상자는 사면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바 있다. 

그런데 요즘 국토부가 그 좁은 제주에 제2공항을 세우겠다고 나섰다. 세계자연유산이니 유네스코 3관왕이니 하며 선전하는 중이다. 지난 4월, 김방훈 제주도 정무부지사는 "제주 제2공항 건설 관련 10개 오름 절취 계획은 전혀 없다"고 밝혔지만 주민들의 걱정은 여전하다. 

문정현 신부와 활동가들은 제주 해군기지가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처럼, 미공군기지의 또 다른 위장된 이름으로 '제2공항'이라고 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 제주 시민단체들은 '제주 제2공항 반대 성산읍대책위'를 결성해서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김경배 위원장은 제주 제2공항 건설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 하라고 요구하면서 35일째(2017년 11월 13일 현재)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강정마을 평화미사 2017년 11월 13일 문정현 신부는 다시 강정으로 돌아가셨다. 바로 다음날부터 다시 평화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강정마을 평화미사 2017년 11월 13일 문정현 신부는 다시 강정으로 돌아가셨다. 바로 다음날부터 다시 평화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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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3번째 미사, 그는 어김없이 돌아갔다 

광화문에서 트럼프 방한에 맞서 2017년 10월 26일부터 2017년 11월 11일까지 '길위의 신부 문정현, 온 몸으로 깎는 반전 평화 새김展' 서각 기도를 했던 문정현 신부는 11월 12일 다시 제주 강정마을로 되돌아갔다.

11월 13일, 문정현 신부는 어김없이 해군기지 앞에서 강정 생명 평화 미사를 봉헌했다. 그날이 3833회째였다. 문 신부는 2010년 6월 1일부터 광화문에서 보름 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주며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가 끝난 뒤에는 또 '어김없이' 해군기지 앞,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해군제주기지' 표지판 앞에서 깃발을 들고 있었다.

"해군기지 없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없는 강정마을 강정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앞에서 투쟁하고 있는 문정현 신부
▲ 해군기지 없는 강정마을 강정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앞에서 투쟁하고 있는 문정현 신부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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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월간 작은책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안건모#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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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의 ‘노인 부양’ 9명에서 16명으로 증가

고령화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임병도 | 2017-12-12 08:52:0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서울시가 펴낸 ‘2017서울통계연표’ ⓒ서울시

 

서울에서는 하루 평균 206명이 태어나고, 119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서울시가 공개한 ‘2017 서울통계연보’를 보면 서울시 총인구는 1,020만 4천 명으로 전년 대비 9만3,081명이 감소했습니다.

작년 하루 157쌍이 부부가 됐고, 49쌍의 부부가 이혼했습니다. 781만 명이 지하철을, 428만 명이 버스를 이용했으며, 교통사고로 0.95명이 사망했습니다.

서울시가 펴낸 ‘2017 서울통계연보’를 보면 다양한 통계를 통해 지금의 사회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노인 인구의 증가입니다.


‘ 노인 인구는 증가, 출산은 감소’

 

▲2016년 서울시 인구구조 형태, 70세 이상 인구가 두 번째로 많다. ⓒ서울시

 

2016년 서울시의 평균연령은 41.1세로 2015년 40.6세보다 높아졌습니다. 2005년 35세와 비교하면 6세 이상 높아진 셈입니다. 평균 연령이 높다는 것은 인구의 구성비 중 노인 인구가 증가했음을 의미합니다.

서울시의 인구 구조 형태를 보면 70세 이상 인구가 849,073명으로 45세~49세 인구(893,889명) 다음으로 많습니다.

일일 출생 건수를 보면 2015년 227명에서 2016년 206명으로 거의 20명 가까이 줄어들었습니다. 2001년 251명과 비교하면 무려 46명이나 출산이 줄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니 당연히 학교에 다니는 인구(만6세~21세)는 2011년 180만 명에서 2016년 150만 명으로 30만 명이나 감소했습니다.

저출산 추세에 따라 어린이집 보육 아동 수도 23만7천 명으로 2015년에 비해 1천 명 가까이 감소했습니다. 어린이집 수도 6,368개소로 전년(2015년 6,598개소)보다 줄었고, 초등학교 교원 1인당 학생 수도 2011년 18.1명에서 2016년 14.8명으로 3.3명 감소했습니다.

결국, 서울시는 태어나는 아이들보다 노인 인구의 증가율이 훨씬 빠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인 부양, 2005년 9명에서 2016년 16.8명까지 늘어났다’

 

▲서울시 연도별 인구구성비 및 부양비 현황 ⓒ서울시

 

‘생산가능 인구’는 15세에서 64세까지의 연령대를 말합니다. 생산가능 인구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유소년(0세~14세)과 65세 이상 노인을 부양하는 일입니다.

유소년(0세~14세)인구 감소로 생산가능 인구(15~64세) 100명당 부양할 유소년은 2005년 21.9명에서 2016년 15.2명으로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증가하여 생산가능 인구 100명당 2005년 9.4명 부양하던 것이 2016년에는 16.8명까지 늘어났습니다.

‘노인 부양비’는 2005년 9.45에서 2016년 16.8%까지 증가했습니다. 생산가능 인구의 노인 부양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증가하는 노인 부양,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서울시 연령별 인구 비율 및 노인부양비율 추이 (윤민석, 서울연구원 도시사회연구실) ⓒ세계와도시

 

생산 가능 인구는 감소하지만 노인 인구의 증가 폭은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2012년에는 생산가능 인구 7.4명이 노인 1명을 부양했습니다. 그러나 2039년에는 생산가능 인구 2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합니다. 당연히 7명이 1명을 부양할 때보다 훨씬 큰 비용을 부담해야 합니다.

노동인구는 감소하면서 부양해야 할 노인이 증가하면 당연히 사회적 비용도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인 복지에 지출이 늘어날수록 출산 등의 예산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는 저출산의 증가로 이어져 생산가능 인구가 계속 감소하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됩니다.

앞으로 정부와 서울시는 고령화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노인 일자리 확대나 저출산 지원 대책 등은 효과가 그리 높지 않아 더 다양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2015년 서울지하철 무임수송인원 및 무임수송 손실 비용.

 

 

노인 기준 연령을 높이거나 은퇴 시기를 늦추는 방안 등을 마련해 사회적 비용 부담을 최대로 줄여야 합니다.

서울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일본의 몇몇 자치단체는 재정적인 문제로 노인의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를 없애거나 기준 연령을 75세로 조정하기도 했습니다.

유교 성향이 강한 대한민국에서 노인 부양 문제를 지적하면 비판이 따릅니다. 그러나 노인 인구의 증가에 따른 사회적 비용 부담 문제를 현실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단순히 비용으로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노인 인구가 사회구성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사회 제도를 변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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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방중 가장 큰 목표는 신뢰 관계 회복”

[CCTV] 인터뷰, “남북협력이 북 안보 지켜줄 수 있다”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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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2  07:2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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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 국빈방문을 앞두고 중국 관영방송 [CCTV]와 인터뷰를 갖고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캡쳐사진 - 통일뉴스]

중국 국빈방문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은 북핵 문제에 대해 △북핵 불용 △강력한 제재와 압박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이라는 원칙을 재확인하고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강인한 희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8일 오후 4시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중국 관영 [CCTV]와 인터뷰를 가졌고, 이 인터뷰는 11일 밤 11시 30분(서울시간, 북경시간 10시 30분) 첫 방송을 탔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선은 북한이 오판을 멈추고 인식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며 “북한과 같은 이런 작은 나라가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뒤처진 그런 나라가 오로지 핵 하나만 가지고 안보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오히려 남북 간의 평화와 협력이 북한의 안보를 지켜줄 수 있다. 과거에 남북관계가 좋았던 그 시기에 북한은 안보에서 아무런 위협이 없었다”며 “한국과 중국이 보다 긴밀하게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노력을 해 나간다면 나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미사일 능력이 정말 빠른 속도로 고도화하고 있다”며 이럴 때일수록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강인한 희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한국과 중국 양국이 긴밀히 협력해 나가면서 새벽을 앞당기는 그런 노력을 함께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10월 31일 ‘한중 관계 개선 관련 양국 간 협의 결과’로 봉합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체계)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한 거듭된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도입을 결정하게 된 것”이라며 “앞으로도 사드가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한 방어 목적을 넘어서서 중국의 안보적 이익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한국은 각별히 유의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미국으로부터도 여러 번 다짐을 받은 바 있다”고 덧붙였다.

   
▲ 질문자는 사드 배치에 대한 확실한 의사표명을 유도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캡쳐사진 - 통일뉴스]

대통령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질문자는 ‘10.31 협의’ 당시 공동발표문에 포함된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 등과 관련하여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우려”를 거론하며 “CCTV를 시청하고 있는 우리의 수억 명의 중국 시청자들을 위해서 한국 정부의 입장,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노력하겠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달라”고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은 이미 사드에 관한 한국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것은 결코 새로운 입장이 아니다. 과거부터 한국이 지켜왔던 입장을 말씀드린 것이다”고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그런 입장에 대해서 서로 깊은 이해를 이룬 것이 10 월 31 일자 양국 간 협의였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10.31 협의’에 표기된 중국의 우려를 ‘깊이 이해’한다는 수준의 기존 스탠스를 유지한 셈.

중국은 ‘10.31 협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우려 사항인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에 대해 이른바 ‘3 NO’를 한국 정부가 명시적으로 천명해줄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촉구하고 있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 결과를 공동성명 대신 ‘공동언론발표문’으로 내기로 사전 조율된 것도 이같은 이견 때문이다. 공동언론발표문은 ‘양자 간 언론에 발표할 내용을 서로 사전에 조율해서 각자 언론에 발표하는 형식’이다.

문 대통령은 “사드문제는 시간을 두면서 해결해 나가기로 하고, 또 그것 때문에 양국의 다양한 관계가 가로막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사드문제는 별개로 해결해 나가면서 양국 간에 경제·문화 또는 정치·안보 또는 인적교류·관광, 이런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25 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제 한.중 양국은 경제 분야 외에 다양한 다른 분야에서도 함께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정치.안보.문화.인적교류 분야 등을 꼽고, 경제분야도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 분야 협력과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 일본, 중국에서 연이어 이어지는 이 올림픽들을 잘 활용한다면 우리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이루어나가는 데 아주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그렇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남북 간의 평화를 위해서도 아주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중국의 협력을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이번 방중의 가장 큰 목표를 한.중 양국 간에 신뢰 관계를 회복하는데 가장 큰 역점을 두고 있다”며 “근래 얼마 기간 동안 양국 간의 신뢰 관계가 상당히 무너졌다”고 짚고, “이번 나의 방중으로 양국 관계 신뢰를 회복하고, 또 양국 국민들 간에 서로 우호 정서가 증진될 수 있다면 큰 보람”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아울러 “이번 중국 방문에서 시 주석과 세 번째 만나게 되는 만큼, 시 주석과 ‘라오펑요우’(老朋友), 오랜 친구 관계가 되고 싶다”며 “시 주석과 나 사이에 국정철학에서도 통하는 면이 많은 만큼, 앞으로 양국 관계를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열어나가고 싶다”고 각별한 친밀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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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EA는 미국의 하수인인가

2007년 '북한-시리아 핵 협력설'의 진상 <하>
2017.12.12 00:53:31

 

 

 

2007년 9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제기된 '북한-시리아 핵협력설'은 당시 진행되던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가로막은 중대한 걸림돌이었다. 특히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2011년 5월 발표된 보고서를 통해 북한이 시리아에 영변형 원자로를 지어준 것을 기정사실화 했다. 북한을 핵확산의 주범으로 지목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독립연구자 가레쓰 포터는 1993년부터 10년간 북한 핵시설을 모니터링 했던 IAEA 사찰관 등의 증언을 통해 이스라엘이 공습으로 파괴한 시설은 원자로가 아니라 이미 5년 전 폐기된 미사일 격납고였다고 밝혔다. (☞ 원문 보기 : How Syrian-Nuke Evidence Was Faked) 지난 기사에 이어 포터의 기사 중 2번째, '시리아 핵 개발 증거는 어떻게 조작됐나'를 소개한다. 편집자 (☞ 2007년 '북한-시리아 핵 협력설'의 진상 <상> : 북한은 어떻게 악마화되었나)  

최고의 북핵 전문가를 검증팀에서 배제 

2008년 5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 유스리 아부샤디는 안전담당 사무부총장 올리 하이노넨에게 곧 구성될 시리아 원자로 검증팀에 자신을 끼워달라고 요청했다. 아부샤디는 CIA가 '시리아 핵개발 증거'라며 공개한 동영상을 면밀히 분석해 불과 이틀 후인 2008년 4월 26일, 문제의 시설이 북한식 원자로일 수 없다는 점을 엘바라데이 사무총장 등에게 알린 바 있다. 그는 북핵 문제가 불거진 1993년부터 10년간 영변 원자로를 감시해 왔으며 이 문제로 북한을 15번이나 방문한 최고의 북핵 전문가였다.  

그러나 하이노넨 부총장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부샤디를 검증팀에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사찰관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사찰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IAEA의 불문율을 그 이유로 댔다. 아부샤디는 자신은 시리아가 아니라 이집트 출신이라고 항변했다. 이에 대해 하이노넨은 "하지만 자네는 아랍 국가 출신이고 무슬림이잖아!"라고 받아쳤다. 

결국 아부샤디는 검증팀에서 배제됐다. 아마도 그가 처음부터 CIA의 이른바 '시리아 핵증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레쓰 포터는 이 문제에 관해 하이노넨에게 논평을 요구했으나 하이노넨은 응답하지 않았다. 

2008년 6월 하이노넨 부총장과 2명의 사찰관으로 시리아 핵 개발 검증팀이 구성됐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공습한 알키바르 시설물 인근에서 시료를 채취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 첫 보고서를 통해 공습 현장에서 채취된 우라늄 입자들을 분석한 결과 "인위적 가공의 흔적이 보인다"고 밝혔다. 즉 누군가가 우라늄을 가공했다는 말이고, 이는 알키바르 시설이 핵프로그램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포터에 따르면 복수의 전 IAEA 사찰관들은 하이노넨의 시료 분석 및 결론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우선 2011년까지 IAEA 검증 및 안보정책 조정국장을 지낸 타리크 라우프는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의 방사성 동위원소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3, 4개 연구소에 분석을 의뢰해 그 결과가 모두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 IAEA의 원칙"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경우, 이 시료들을 분석한 연구소들에서 인공 처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시료 채취 3개월 후인 2008년 9월 말,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이 직접 "현재까지 우리는 어떠한 핵물질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후 다른 연구소에서 인공 처리의 흔적이 '처음 발견'됐고 이것이 11월 보고서의 근거가 된 것이다. 이는 IAEA의 핵물질 분석 절차 및 기준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포터는 지적한다.
 

▲ 이스라엘이 공습한 시리아의 건물. 위성으로 촬영됐다. ⓒ미 정부


알키바르 사찰관의 고백 

이보다 더 충격적인 고백이 있다. 하이노넨 검증팀에 참여했던 몽골 출신의 사찰관 오를로흐 도르즈카이다프의 고백이다. 그에 따르면 알키바르 시설물 주변에서 채취된 모든 시료들에서 인공 처리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반면 유일하게 양성 반응을 보인 시료는 이른바 원자로 건물 옆 지원 시설의 화장실에서 채취된 것이었다.  

그는 최초의 핵처리 증거가 '발견된' 직후 이 사실을 미국 출신의 전직 IAEA 고위 사찰관 로버트 켈리에게 털어놓았다. 켈리는 포터와의 인터뷰에서 도르즈카이도프가 이른바 최초의 핵처리 증거가 나온 직후 너무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누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전했다. 켈리는 미 에너지부 산하의 원격탐지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이라크에 대한 핵사찰에서 책임자로 일했던 인물이다.

도르즈카이도프는 이후 IAEA를 퇴직하고 몽골로 돌아갔다가 2015년 12월 사망했다. 켈리는 그의 사망 이후에야 그의 고백을 포터에게 전했다. 

포터는 이메일을 통해 하이노넨에게 켈리의 증언에 대한 논평을 요구했으나 하이노넨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포터는 미국의 저명한 핵전문가이자 하이노넨과 몇 차례 논문을 공동 저술한 바 있는 데이비드 올브라이트가 2013년 1월 자신이 속한 연구소의 웹페이지에 알키바르의 우라늄 입자 시료는 "원자로 옆 건물의 탈의실에서 발견됐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포터는 만일 알키바르 시설이 원자로이고 여기서 핵활동이 이루어졌다면 방사성 우라늄이 건물 내부에서만 발견될 수가 없으며 건물 외부에서도 다량으로 검출됐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켈리는 포터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가장 합리적 설명"은 '교차 오염', 즉 사찰관의 옷 등 외부에서 묻혀온 우라늄 입자가 내부에 원래 있던 것으로 오인된 경우라고 말했다. 교차 오염에 대해서는 앞에 말한 타리크 라우프도 같은 의견이었다.

1990년대 초 이라크 핵사찰팀의 책임자였던 켈리에 따르면, 당시 IAEA 분석 결과 이라크가 우라늄을 무기급인 90%까지 농축했던 것으로 나타나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는 IAEA 연구소에 있던 우라늄 입자가 실수로 시료에 포함된 결과였음이 밝혀졌다. 즉 교차 오염으로 인한 잘못된 분석이었으며 이러한 사례는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흑연감속로가 파괴됐는데 방사성 흑연이 전혀 없다? 

그러나 2008년 11월의 첫 보고서에서 아부샤디가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방사성 흑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영변 원자로는 흑연감속로이다. 만일 키바르 시설이 흑연감속로이고 이스라엘 공습 당시 가동 중이었다면 수 백 톤의 방사성 흑연이 사방으로 흩어졌어야 마땅하다. 당연히 하이노넨 검증팀이 방사성 흑연을 검출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검증팀은 알키바르 현장에서 방사성 흑연을 검출해내지 못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008년 11월 13일, 보고서 초안을 놓고 벌어진 회의에서 아부샤디는 이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하이노넨은 "아직 흑연 시료의 방사성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아부샤디는 "방사성 흑연이 뭔지 모르십니까? 방사성 흑연은 금세 확인할 수 있습니다"라고 쏘아붙였다. 

이 문제에 대한 포터의 질문에 대해서도 하이노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첫 보고서가 11월 중 발표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부샤디는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현 상태로 보고서가 발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저의 전문가적 소견으로는 (방사성 흑연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검증팀의 분석 결과와 결론은 서로 모순됩니다. 즉 알키바르 시설은 원자로(흑연감속로)일 수가 없습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예정대로 발표됐다. 그리고 며칠 후 엘바라데이의 특별보좌관 그레이엄 앤드루는 아부샤디에게 "이 문제에 관해 더 이상 (사무총장에게) 이메일을 보내지 말 것"과 "조직의 방침을 따를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IAEA 내에서 누구보다 북한 원자로를 잘 아는 전문가는 이른바 '북한-시리아 핵 협력'의 현장 검증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검증팀의 보고서에 대한 이의 제기도 묵살됐다. 이후 IAEA는 2년 반에 걸쳐 '북한-시리아 핵 협력'에 대한 보고서를 9차례 발표했지만 방사성 흑연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만 2011년 5월의 최종 보고서에서 흑연 시료 입자가 "너무 작아서 제대고 순도 분석을 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을 뿐이다. 그리고 보고서의 결론은 알키바르 시설은 북한 지원 하에 비밀리에 건설된 원자로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 오크리지 국립핵연구소에 근무했던 핵공학자 베라드 나카이는 흑연 입자가 방사성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반박했다.

하이노넨은 어떤 사람인가? 

알키바르 현장 검증을 책임졌던 IAEA 사무부총장 올리 하이노넨은 2010년 8월 IAEA를 떠났다. 그리고 한 달도 채 안 돼 하버드대의 과학 및 국제문제 벨퍼센터에 자리를 꿰찼으며 이후 이란 핵 협상에서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는 또한 민주주의수호재단의 과학 및 비확산 담당 선임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스라엘 리쿠드당 정부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 지난 2007년 올리 하이노넨 국제원자력기구(IAEA) 부총장(가운데 붉은 넥타이)과 칼루바 치툼보 안전조치국장 등 4명으로 구성된 IAEA 실무대표단이 북한 핵시설 폐쇄를 위한 사전 협의를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모습. ⓒ연합뉴스


시리아 핵보고서와 북핵 협상 

미 CIA가 북한-시리아 핵 협력의 증거라며 11분짜리 동영상을 공개한 것은 북핵 신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실무팀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2008년 4월 24일이었다. 즉 북핵 협상이 진전을 보이자 이를 가로막기 위한 의도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IAEA의 시리아 핵 검증과 북핵 협상은 관계가 없을까? 시기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IAEA가 시리아 핵 검증에 착수한 2008년 6월 북한은 영변 냉각탑을 폭파했다. 6월 27일이다. 2007년 2.13합의에 따른 북핵 불능화의 첫 가시적 조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8월 11일로 예상된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이다. 북한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영변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재가동에 들어갔으며 사용 후 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방사화학실에 대한 IAEA 감시요원들의 접근도 차단했다.  

다급해진 미국은 10월 1일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를 평양에 급파해 북한과 협상했고 결국 10월 11일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했다. 그리고 11월 IAEA는 북한-시리아 핵협력에 대한 첫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와 관련, 당시 IAEA 수장인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의 당시 발언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아스라엘의 공습 사실이 알려지고 한 달 여 후인 2007년 10월 28일 그는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스라엘이 공격한 시설물이 비밀 핵시설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증거도 제공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나아가 "어떤 국가가 핵 관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으면 우리(IAEA)에게 와야 하는 시스템이 있으며 가서 조사할 권한은 우리가 갖고 있다"면서 "선제 폭격을 하고 나중에 질문을 하는 것은 이 시스템을 허물고 어떤 의혹에 대한 해결에도 이르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IAEA의 시리아 핵 검증이 시작된 지 3개월 후인 2008년 9월 말에는 "현재까지 우리는 어떠한 핵물질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과연 무엇이 IAEA로 하여금 북한-시리아 핵 협력을 확신하게 만든 것일까? IAEA는 1957년 미국 주도 하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연구와 국제적 공동관리를 위하여 설립된 국제기구다. 하지만 미국의 하수인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예컨대 1993년에는 IAEA 헌장에도 없는 북한 군사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했다가 북한의 거센 반발을 샀다. 1990년대 초 이후 이라크에 대한 광범위한 사찰로 이라크가 핵무기 건설을 포기했음을 알고도 이를 빌미로 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막지 못했다. 

우리는 북한-시리아 핵 협력을 기정사실화한 2011년 5월 IAEA 보고서가 왜, 어떤 과정을 거쳐 채택됐는지 구체적 사정을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이 보고서가 실제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IAEA 보고서가 북한-시리아 핵협력에 대한 국제 사회의 공식 견해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도 북핵 문제 해결의 중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끝)  

 

inkyu@pressian.com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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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면이 직접 밝힌 'YTN 보도국장' 거부 이유

[영상 인터뷰] 노종면 "최남수 사장 내정자, MB 칭송하고 노 전 대통령 조롱한 사람”

17.12.11 19:13l최종 업데이트 17.12.11 19:15l

 

▲ [오마이TV] 노종면이 직접 밝힌 ‘YTN 보도국장’ 거부 이유
ⓒ 조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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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이명박 전 대통령)를 칭송하는 칼럼을 쓰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롱하는 칼럼을 쓴 사람을 YTN 사장으로 받는다?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9년 만에 회사로 돌아와 '보도국장'으로 내정됐던 노종면 YTN 기자는 망설임이 없었다. YTN 새 사장으로 선임된 최남수 내정자가 사장으로서 부적합한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며 "최남수 같은 사람이 사장으로 온다면, YTN 해고자들의 복직은 의미가 없다"고 단언했다. 

앞서 YTN은 사내 공지글을 통해 지난달 30일 "노사 간에 합의된 단체협약 제20조에 따라 차기 보도국장에 앵커실 부장 노종면을 내정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노 기자는 YTN 노조에 '최남수 사장 내정자의 적폐청산 의지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YTN 노조와 최남수 사장 내정자는 4차례 만났지만 인사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만 확인했다. 노조는 '구본홍·배석규·조준희 전 사장 체제에서 3년 이상 보직을 맡았던 간부의 보직 임명자격을 잠정 보류하자'고 제안했으나 최 내정자가 이를 거부했다.

결국 노 기자는 "사장의 적폐청산 의지, 언론개혁의 자격 등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떤 직을 맡는 것도 무의미하다"며 보도국장직을 거부했다. YNT 노조도 8일 오전 서울 상암동 YTN 사옥에서 사내집회를 열고, 최남수 내정자 퇴진 투쟁을 다시 시작한다고 밝혔다. 

오마이TV가 노종면 YTN 기자를 만나, 보도국장 내정과 거부까지의 고민을 직접 들어봤다.
 

 노종면 YTN 기자.
▲  노종면 YTN 기자.
ⓒ 조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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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김종훈 기자, 영상취재·편집: 조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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