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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리 원전 5·6호기 중단? 50대 50, 국민 결정에 승복해야죠”

 

탈핵 운동가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 인터뷰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7-07-26 19:15:32
수정 2017-07-26 20: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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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김익중 교수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김익중 교수ⓒ이승빈 기자
 

"50대 50, 장담 못 합니다. 저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탈핵 운동가로 8년 가까이 일해 온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에게 신고리 원전 5·6호기 중단 여부에 대해 물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예측하지 못하겠어요"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탈원전 이슈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라, 팽팽한 찬반의 공론장이었다. 앞으로 3개월 간 원전 찬반 측의 설득전이 펼쳐질 것이다.

정부는 지난 24일 공론화 위원회를 꾸렸고, 앞으로 3개월 간 시민 배심원단을 선정하고 토론의 과정을 거쳐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한다. 그는 시민 배심원단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결론이 나와도 승복해야 합니다. 국민 대표가 논의해서 결론을 내면 정부가 100% 그대로 승복한다고 했어요. 민주주의가 더 중요합니다"

그의 말에서 '페어플레이' 정신이 보였다. 그의 말처럼, 민주주의가 없이 탈원전은 없다. 그는 기본원칙인 민주주의가 정착한 나라에서 탈원전이 이뤄졌다고 설명한다.

김 교수는 "신고리 5·6호기 건설된다 하더라도 로드맵이 살짝 바뀌는 것"이라며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탈원전 여부는 국민이 결정해야”

신고리 5·6호기 운명을 결정할 공은 왜 국민에게로 패스됐을까? 의대 교수인 그는 '원전 전문가와 국민'을 '의사와 환자'에 비유했다.

"병원에 가면 전문가인 의사가 결정을 합니까? 아니요. 환자가 결정합니다. 의사는 병에 대해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죠. 원자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원자력 전문가는 여태까지 국민에게 원전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설명하는 일은 하지 않고, 비밀리에 자기들이 결정을 해왔어요."

그는 원자력에 대한 결정은 국민이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왜냐하면 원자력에 의해서 혜택을 받는 것도, 사고가 나서 피해를 보는 것도 국민입니다. 물론 병원에 가는 수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병에 대한 의학적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자기 몸에 대한 결정이니까 본인이 해야 합니다. 원전에 관해서도 국민들이 공학적 이해가 높지 않더라도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공대 나온 사람이 수백만명, 잘 모르겠지만 2백만명이 넘을 거예요. 원자력 안전성 보고서는 공대 나온 사람들은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가 아니라고 국민을 바보 취급하는 태도는 아주 기분 나쁘죠, 시대착오적인 거죠"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원자력 지지자들은 돈과 권력과 풍부한 인맥을 갖고 있는데 반해서 원자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성과 상식, 윤리의식 이외에 가진게 없다는 사실 때문에 원자력에 관한 진실이 끊임없이 은폐되고, 거짓말이 횡행하는 사태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시민들의 인식의 깊이와 실천적 자세가 결정적인 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김철수 기자

"괴담교수가 됐어요"

어느날 그는 일부 보수 언론에 '괴담 교수'로 찍혔다. 발단은 된 사건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6년동안 천 번도 넘게 해온 탈핵 강의였다. 이 강의는 '한국 탈핵'이라는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일반인뿐만 아니라 원전 전문가들에게도 똑같이 원전의 위험성에 대해서 강연했다. 하지만 일부 보수언론들은 '원전 괴담 강의'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괴담이라는 기사를 보고 다른 기자들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괴담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난 괴담교수가 됐어요. 다른 매체에서는 궤변이라고 살짝 틀었어요. 창조적이죠. 이젠 궤변교수가 됐네요 (웃음)"

"6년 전부터 꾸준히 똑같은 내용을 강의했는데 이 시점에서 갑자기 강의 내용을 잡아서 검증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도리에 맞는 짓인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 강의가 부정확하고, 틀렸다라고 생각이 들면 저를 불러다가 검증 토론회를 해도 돼요.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어요. 그들이 지적한 내용 전부를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원전 비전문가'라고 비난도 받고 있는 그는 의대 교수이다. 의대 교수가 탈핵 운동에 뛰어든 이유가 무엇일까? 경주에 있는 동국대 의대 교수인 그는 경주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 그곳은 원전 6호기가 밀집한 곳이고, 십만년이 넘도록 핵폐기물을 보관해야 할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도 있다.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 얘기니까 관심을 갖게 됐고, 2009년 경주 방폐장 중지 운동에 뛰어들었다. 김 교수에겐 아쉽게도 경주 방폐장은 유치가 됐다.

"경주 방폐장은 방사능이 샐 겁니다. 암반이 나쁜 곳에 건설이 됐고, 지하수가 아주 많은 곳에 건설이 됐어요. 그래서 건설하는 동안에는 하루에 5천톤씩 지하수를 퍼내면서 공사를 했어요. 공사가 끝났는데 지금도 2천톤씩 퍼내요. 운영이 끝나고 난 다음에 폐쇄하면 못 퍼냅니다. 그때부터는 지하수를 통해서 방사능이 새기 시작할 겁니다. 한번 나가기 시작하면 보수공사도 안합니다. 시간 문제일 뿐이지 다 나갑니다. 그런데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는 것은 의사로서 인정 못합니다"

원전은 일본에서는 '화장실 없는 맨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원전은 '무책임'하다고 말한다. 부모세대들은 원전으로부터 혜택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미래세대에 핵폐기물은 재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결정적으로 2011년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나는 것을 보고 원자력이 안전 문제는 의학적인 문제라고 생각돼 본격적으로 탈핵 운동에 나섰다.

그는 핵사고가 나면 그 이후엔 인간이 통제하거나 다룰 수 없다고 경고한다. 원전의 안전성을 묻는 질문에 김 교수는 "고장 안 나는 기계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또 그는 핵사고는 교통사고처럼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예측하지 않았던 일이 오는 겁니다. 그렇게 큰 지진이, 큰 쓰나미가 올지 누가 예측했습니까? 또 후쿠시마의 노후원전인 1~4호기만 딱 골라 터질지 누가 예측했습니까? 다 안전한 줄 알았죠. 예측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이 오만한 겁니다"

"만일 방사능이 눈에 보였다면 원자력은 가장 더러운 발전 방식이었을 거예요. 이게 눈에 안 보이고, 냄새도 안 나고, 맛도 없고, 우리 오감으로 느낄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클린에너지, 깨끗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굉장히 위험하죠."

"원자력계가 그동안 원자력을 싸다고 해왔어요. 그런데 핵폐기물을 십만년간 보관할 기술도 없다는 걸 국민들이 알고 있어요. 그래서 비용을 얼마로 산정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싸대요... 결국 대부분 국민들이 원전이 위험하고 경제성도 의심되지만 대안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대안이 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김익중 교수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김익중 교수ⓒ이승빈 기자

"대안이 있다"

김 교수는 세계 통계 수치를 예로 들었다. "전 세계의 전기 생산량 중에서 원자력은 10%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재생에너지는 25% 차지합니다. 지금 현재 이미 원전 전기 생산량의 2.5배를 전 세계에서 재생에너지로 만들고 있어요. 5년 후에는 5%가 더 증가해 30%가 될 거예요. 재생에너지는 1년에 1%씩 증가하는 반면 원자력은 30년 전부터 10% 근처에 머무릅니다"

그의 말대로 세계 통계만 봐도 원전 사업은 '사양산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어가는 사업이지만, 그곳에도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이에 그는 "원전은 폐쇄하는데 30년 걸립니다. 그래서 고리1호기에 근무하는 사람들 다 짤렸습니까? 이 분들은 30년 정도 더 일을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원전기술을 가진 우리가 사양산업인 원전 건설 시장보다 더 큰 시장인 폐로 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60년 후에 탈원전을 해요. 그동안 원자력 하는 사람들이 다 필요합니다. 또 10만년간 핵폐기물을 보관해야합니다."

탈원전은 하루 아침에 원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이뤄지는 정책이다. "실제로 원전은 30년 정도 후에 많이 줄어들어요. 그러니까 30~40년 후에 대한민국 에너지에 관해서 지금 논의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당장 전기료가 오를 것처럼 얘기하고 전기가 부족할 것처럼 얘기하는 건,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을 했지만 오히려 5년 사이에 원전은 줄지 않고 늘어난다. 원전 5개를 짓고 있는 중인데 신고리 5·6호기 2개의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한다. 건설이 중단된다고 해도 3개는 완공되는 것이다. 탈원전 운동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은 게 사실이다. 5년 사이에 전 정부에서 건설을 시작한 원전들이 완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게 무슨 탈원전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탈원전과 에너지 전환은 세계적인 대세다. 이미 다른 나라들은 30년 전부터 재생에너지 사업을 시작을 했고 현재 꽃을 피우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늦게 탈원전 문제의 논의가 시작됐다.

"'후래자(後來者) 삼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술자리에 늦게 온 사람은 세잔을 한꺼번에 마셔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늦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빨리 따라 잡을 수 있습니다. 재생에너지 생산률 꼴찌로 출발했지만 10~20년 내로 세계 평균만 따라가면 탈원전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는 원전 개발의 장미빛 환상에서 벗어나 재생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재생에너지는 안전합니다. 아마 풍력발전기의 프로펠러가 떨어지는 게 최대 사고일 거예요. 이산화탄소·방사능·미세먼지 제로죠. 오염물질이 안 나옵니다. 햇빛과 바람은 아무리 가져다 써도 고갈되지 않는 무한대 에너지입니다. 햇빛과 바람은 연료비가 공짜라 세금도 못 붙여요. 우리나라 에너지 해외의존도 97%인데, 전부 수출에서 번 달러로 사와야 하는 것들 이잖아요. 햇빛과 바람은 국산 에너지입니다"

탈원전 정책은 5년 안에 단기에 가능하지 않다. 그도 탈원전은 국가의 '장기적인 에너지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탈원전 정책은 정권에 따라 왔다갔다 할 겁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의견이 한 곳으로 모아지면 그 다음에는 뒤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국민을 얼마나 설득해내냐가 승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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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는 김일성의 속을 단단히 태웠다

 

중국이 휴전협상을 지연시킨 이유

17.07.27 10:29l최종 업데이트 17.07.27 10:29l

 

 한국전쟁 휴전협정 조인식.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한국전쟁 휴전협정 조인식.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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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간 전개됐다. 그런데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이 사실상 고착된 것은 1951년 3월경이다. 전국적 범위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처음 9개월뿐이다. 

1951년 7월부터는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부전선에서 소모적인 고지 쟁탈전이 반복됐다. 일례로, 1952년 10월 6~15일 강원도 철원군의 백마고지에서는 12차례나 전투가 벌어져 7차례나 고지 점령자가 뒤바뀌었다. 이 하나의 전투에서, 중국군(중공군)은 1만여 명의 인명피해(전사·부상·행방불명·포로)를 입고, 한국군은 3500명 정도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전체 기간에 인명피해를 입은 한국 군인은 약 62만 명이다. 이 중에서, 전선이 고착된 1951년 3월까지 피해를 당한 한국 군인은 약 17만 명이다. 이보다 근 3배인 45만 명 정도는 그 이후에 피해를 입었다. 주로 휴전협상 기간에 피해를 당한 것이다. 협상 중에 벌어진 고지 쟁탈전이 그런 비극을 양산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했다. 이참에 미군의 힘으로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 또 통일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이 전쟁을 끝내고 철수하면 안보를 기약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휴전협상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유엔군 명의로 참전한 미군이 협상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김일성도 처음엔 휴전을 반대했다. 애초의 경계선인 북위 38도선 이북에서 전선이 고착됐으니, 영토를 손해 보는 상태로 전쟁을 끝내는 게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1년 6월부터는 김일성도 휴전을 적극 찬성했다. 중국과 소련의 휴전 압력을 뿌리칠 수 없었던 데다가, 소모적 전쟁에 더 이상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은 협상에 참여하지 못하고 휴전을 찬성하는 북한·중국·미국에 의해 회담이 진행됐지만, 이 협상은 2년간이나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는 동일한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소모적 양상이 되풀이됐다. 그로 인해 애꿎은 병사들만 죽어갔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데가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팽덕회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백마고지역.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소재.
▲  백마고지역.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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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끝까지 주도하지 못했다. 미군의 반격으로 나라를 잃을 뻔한 그로서는 중국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1950년 12월 3일 '조선·중국 연합지휘부 성립에 대한 조·중 쌍방 협의문'을 체결하고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펑더화이)한테 지휘권을 넘겨야 했다. 이승만은 물론이고 김일성도 최종 지휘권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당초, 김일성은 북한군과 중국군이 각각 별개의 지휘체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이 때문에 팽덕회와 갈등을 빚었다. 팽덕회는 지휘권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11월 16일자 서신에서 "중국 동지가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데 동의한다"고 밝힘으로써 김일성은 자존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39세)은 이승만이나 맥아더보다 팽덕회(53세)가 더 미웠을지도 모른다. 작전지휘권 말고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1950년 10월 19일 참모 1명 및 경호원 2명과 함께 지프차로 압록강 철교를 넘은 팽덕회는 군사행동을 최대한 천천히 전개했다. 1950년 8월 15일 이전에 끝낸다는 계획으로 전쟁을 시작한 김일성으로서는 그런 '만만디' 태도가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팽덕회한테는 중국의 이익이 최우선이었다. 1945년 이전 항일전쟁에서부터 공로를 세운 그는 임표(린뱌오)로 대표되는 반대론자들을 제압하고 한국전쟁 참전을 관철시켰다. 팽덕회가 그렇게 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참전 문제가 논의된 10월 5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그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 대치하면, 미군이 무슨 빌미든지 만들어 압록강을 넘을 수 있다'는 논리로 중국 지도부를 설득했다. 

미군 몰아내기보다 중국군 현대화에 중점
 

 팽덕회.
▲  팽덕회.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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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열렬히 참전을 주장했던 팽덕회는 자기 부하들이 청천강(평북과 평남의 경계) 이남으로 미군을 밀어내자 심리적 여유를 갖게 됐다. 북한·중국 경계선에서 미군이 점차 멀어지자, 그는 호흡을 길게 하면서 전쟁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팽덕회는 미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세계적인 냉전 구도에 따라 한반도에서도 두 개의 힘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을 북·중 국경에서 최대한 멀리 밀어내되 중국군을 불필요하게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이런 가운데 팽덕회가 최고의 역점을 둔 것은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애초부터 소련은 중국군을 참전시킬 목적으로 대규모 군사지원을 약속했다. 이를 이용해 이참에 중국군을 현대화시키자는 게 팽덕회의 계획이었다. 미군을 몰아내기보다는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는 데 중점을 뒀던 것이다. 

그런 계획에 따라 팽덕회는 주요 전투가 끝날 때마다 일부러 긴 휴식을 가지면서 소련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전투 장비도 보내주고 수송용 차량도 보내주고 미그기도 날려주고 금전 차관도 지원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한국근대사연구> 제33집 속에 양영조의 '6·25 전쟁 시 중국군의 지구전 전략과 군사개혁'이란 논문이 있다. 이 논문에 인용된 중국군 간부 섭영진의 <섭영진 회고록>에 따르면, 중국 인민해방군은 팽덕회의 기획 덕분에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전체 부대의 3분의 2가 현대식 장비를 갖추는 성과를 얻었다. 미군과 싸우는 대가로, 전쟁 중에 소련한테서 단단히 지원을 받아냈던 것이다. 

이처럼 팽덕회는 김일성의 희망사항을 들어주기보다는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는 쪽으로 전쟁을 활용했다. 이를 위해 남진을 최대한 늦췄다. 덕분에 미군은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애타는 쪽은 김일성이지 팽덕회가 아니었다. 

팽덕회가 시간을 끌며 노골적으로 국익을 추구하니, 김일성은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1951년 1·4 후퇴 이후로는 더 그랬다. 1월 4일 국군이 서울에서 후퇴하고 1월 5일 중국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로, 팽덕회는 또다시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화가 난 김일성이 1월 10일 박헌영과 함께 팽덕회를 찾아가 따졌지만, 팽덕회는 "내가 총사령관으로서 부적격하다고 생각하시면, 내 목을 베시오"라며 으름장만 놓을 뿐이었다. 

팽덕회, 휴전회담마저도 만만디 작전
 

 한국전쟁 당시의 중국군(중공군).
▲  한국전쟁 당시의 중국군(중공군).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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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는 휴전협상 과정에서도 김일성의 속을 단단히 태웠다. 휴전을 거부하는 김일성을 제압하고자 스탈린까지 동원해 휴전 합의를 관철시킨 팽덕회였다. 그랬던 팽덕회가 막상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또다시 '만만디' 작전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김일성이 휴전을 서두르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는데도, 오히려 팽덕회가 느긋해진 것이다.    

1951년 하반기에 벌어진 휴전협상 당시, 중국측은 '38선을 기준으로 휴전하자'는 북한의 주장을 물리치고 '현재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휴전하자'는 미국측 요구에 동의해줬다. 미군이 확보한 영역이 38선 이북에 있었으므로, 중국의 태도는 미국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어느 경우든 자국 영토 밖이기 때문에, 이 문제로 과도한 에너지를 소모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휴전선은 이렇게 북한의 의사를 무시한 채 중국과 미국의 합의로 생겨난 것이다.  

휴전회담에서 지금의 휴전선이 군사분계선으로 합의된 때는 1951년 11월이다. 정상대로라면 휴전회담은 이때부터 몇 달 안에 끝났어야 한다. 1951년 12월이나 1952년 연초에 끝났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점부터 협상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포로송환 문제를 놓고도 팽덕회가 또다시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포로송환 문제와 관련해 팽덕회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보다는 중국군 체면을 살리는 것을 우선시했다. 미국은 희망하는 포로에 한해 본국으로 송환하자고 주장했다. 미군 포로보다 중국군 포로가 훨씬 더 많고, 중국군 포로 중에는 본국 송환을 꺼리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팽덕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군 포로들이 타이완(대만)이나 미국행 혹은 한국행을 선택할 경우, 자기 조국의 명예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체면을 살릴 목적으로, 또 소련의 지원을 최대한 얻어낼 목적으로 그는 휴전협상을 질질 끌었다. 

그러는 동안, 백마고지를 비롯한 중부전선에서는 한 뼘의 땅이라도 더 뺏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 무한정 벌어졌다. 이로 인해 무고한 병사들만 곳곳에서 죽어갔다. 

결국 팽덕회는 미국측 주장을 많이 반영하는 쪽으로 포로송환 문제를 매듭지었다. 포로의 자유의사에 맡기되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나왔다. 팽덕회는 비록 휴전협상에는 실패했지만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그의 어깨가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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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와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박석률 대표

자주와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박석률 대표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07/27 [05: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5일, 심장병으로 별세한 박석률 선생. 고인은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해왔다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26일 박석률 선생 영정 앞으로 많은 추모의 꽃바구니가 놓여졌고 끝없이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예를 올리러 찾아왔다.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평생을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헌신해온 박석률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가 25일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 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고인의 심장은 영면에 들고 말았다. 잠을 자다가 벌어진 일이어서 가족들에게조차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그렇게 애석하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26일 소식을 듣고 도봉구 쌍문동 한일병원 장례식장 5호실을 찾아갔다. 장례식장은 앉을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동지들과 지인들이 와서 고인을 추모하였다.

상복을 입은 아내와 대학생 딸은 끝없이 찾아오는 조문객을 맞이하느라 틈을 내기 어려워 몇 마디 취재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 재학 중인 딸의 친구들이 많이 와서 고인의 가는 길이 더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 사이버노동대학  김승호 대표의 위로를 받고 있는 박석률 대표의 아내와 딸     © 자주시보


“아빠의 삶과 지향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누지 않았지만 아빠가 늘 책을 많이 권해주셔서 아빠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는 늘 느끼며 자랐습니다.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치원 때 가방에 귤과 같은 먹을 것을 넣어주고도 아무 말도 안 해 뭉개져서 ‘귤을 넣었다고 말이라도 하지~!!’ 투정을 부렸던 생각도 나고 어디서 좋은 수첩이라도 하나 구하면 ‘우리 딸을 위해 기가 막힌 선물 가져왔다’며 건네주셨습니다.”

 

수학을 아주 좋아한다는 딸은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통계학까지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나라에 유능한 인재로 자랄 훌륭한 재목이었다. 유전적으로 딸은 아빠도 많이 닮는다. 공부를 잘했던 박석률 대표는 민족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싸우느라 대학시절 이후엔 공부에서 손을 놓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하는 데나 썼었는데 그 못다 피운 공부의 꽃을 딸이 훌륭하게 피워가고 있었다. 

 

물론 작은 아빠가 있긴 하지만 결혼식을 올릴 때면 아버지가 얼마나 그립겠는가. 이렇게 훌륭한 딸을 두고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수 있었는지, 눈을 제대로 감기는 감았겠는지...

 

유신독재치하에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해온 선배들은 구속과 고문 나아가 사형까지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여 가족들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난과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 전사들의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시련 중에 하나가 가족고생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족들이 더욱 애틋하게 가슴깊이 새겨져 있다. 언젠가는 가족들도 그 마음을 알게 되면 동안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한꺼번에 느끼게 될 것이다.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 박석률 대표의 외동딸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박석률 대표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7년을 선고받은 뒤 10개월의 수감생활을 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김남주 시인 등과 함께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0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이후 1995년 범민족대회와 관련해서 또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민청학련 사건과 남민전 사건 때는 조사 과정에 참혹한 고문과 구타를 이겨내야 했다. 옥중 고초를 겪었던 선배 투사들이 나이를 들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것도 이 고문 후유증 때문이다.

 

“박석률 대표의 투쟁에서 후대들이 꼭 잊지 말아야할 점이 민주화 투쟁만이 아니라 자주와 통일 투쟁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민청학련 투쟁은 반 유신 민주화 투쟁이었다. 서강대 민청학련 투쟁 속에는 민주화 중심 투쟁흐름과 자주, 민주, 통일을 아우르는 진보적 투쟁 흐름이 있었는데 박석률 대표는 후자를 주장했었다. 나도 뼈저린 가난 속에서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왔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박석률 선배의 주장에 동조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민주화만 해서는 이 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박석률 선배가 옳았던 것이다. 그래서 박석률 선배는 민청학련 사건 이후 남민전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었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박석률 대표의 서강대 후배 김택춘 선생이 장례식장에서 강조한 이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남민전 활동을 했던 김남주 시인, 박석률 대표와 같은 투사들이 없었다면 80-90년대 그렇게 기세 차게 타올랐던 반미투쟁, 통일투쟁의 들불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고 말고를 여전히 지금도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결정한다. 핵심 군 지휘권을 미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 미군사령관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적폐를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하고서는 초보적인 민주화도 이룰 수 없다. 종북몰이, 공안광풍이 불면 누구든 빨간 칠 뒤집어쓰는 것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범민련에서 활동했던 한 통일운동가는 “많은 민청학련 관계자들이 국회의원 뱃지를 달고 제도권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박석률 대표는 그런 진보적이고 본질적인 자주 통일 투쟁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평생 재야인사로 어려운 투쟁의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오히려 깨끗한 투사의 모습으로 우리들 가슴에 남아있다”며 고인을 뜨겁게 추모하였다.

 

박석률 대표의 추도식은 27일 오후 7시 열며, 28일 오전 발인할 예정이다. 장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의 민족민주열사 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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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ICBM 능력에 미국이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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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개발 속도가 생각보다 빠른 모양이다. 내년쯤에는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을 것이란 보도가 나왔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의 북한 ICBM에 대한 평가 보고서에 “북한 정권이 핵을 운반할 수 있는 ICBM을 2018년의 어느 시점에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고 25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북한이 미 본토를 핵미사일로 공격할 능력을 갖추기까지 최소 2년이 걸릴 것이라는 미 정보기관들의 전망 보다 절반 이상 앞섰다.

워싱턴포스트는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북한의 ICBM이 현재의 시험제작 원형 단계에서 내년까지 실제 생산 라인 단계로 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더힐에 따르면 미국 하원 군사위원회 맥 손베리(공화∙텍사스) 하원 군사위원장은 7월25일(현지시간) 비공개로 진행된 북한 미사일 브리핑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지난 7월4일 성공한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의 분명한 성공은 북한이 핵무기로 미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상황을 가속하는 걱정스러운 진척"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또 "지난 8년간 우리는 미국의 미사일방어를 게을리해왔다"며 "방어해야 할 광대한 땅이 점증하는 위협에 직면했다. 하원에서 통과된 국방수권법은 그 목표를 향한 괄목할만한 진전이지만, 의회와 행정부 모두 책임감을 느끼고 미국과 우리 동맹이 보호받도록 조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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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ICBM 시험 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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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NA KCNA /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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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국민이 촛불로 이룬 성과, 누가 짓밟나

[민교협의 정치시평] 광우병, 최순실, 그리고 촛불의 무게
2017.07.26 01:16:55
 

 

 

 

유럽을 초토화시킨 기존 광우병과 달리 비정형 광우병은, 비교적 나이든 소에서 발생한다는 점, 강화된 사료 정책 및 기립불능 소를 도축에서 제외하는 조치 등이 시행되는 현실 등을 통해 볼때, 식품 위험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기존 광우병에 비해 낮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비정형 광우병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이미 높은 감염력도 확인되어 있다. 광우병 통제에 성공하고 있는 유럽에서도 비정형 광우병은 장기간 증상 없이 진행되기에 공중방역 상의 어려움이 있는 인수공통전염병으로 간주하고 있다. 장차 발생할 광우병의 주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는 유형이기도 하다.  
 
수입국으로서는 자국민의 식품 안전을 위해 발생국의 광우병 발생 상황과 식품으로의 유입 여부 등을 공식적으로 검토한 역학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잠정적으로 수입 중단을 하는 것이 상식이자 타당한 조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12년 나왔던 미국의 광우병 발생 소식에 한국 정부는 발생국의 공식 역학조사 결과도 기다리지 않은 채, 광우병 발생 소식을 통보받은 첫날부터 수출국 입장을 대변하는 공식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정작 발생국인 미국은 한달여의 역학 조사를 한 후에야 비로소 공식 결론을 내렸다. 역학조사도 없이 미국산 소고기 안전을 강조한 한국 정부의 비과학적 행보 내지는 '신기'에 찬 점쟁이 수준의 행보는 국제적으로 웃음거리가 된 바가 있다. 이처럼 수입 당사국이 광우병 발생국의 공식 역학조사가 이뤄지기도 전 성급하게 '안전 결론'부터 내놓고 어설픈 조치를 제시하는 이유는, 지난 2008년 광우병 위험성으로 인해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국민들이 촛불을 들었던 기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도 한국 정부 입장은 검역 비율만 강화하는 정도다. 이와 함께 미국에 관련 정보를 요청하는 것이 전부다. 무상원조도 아니고 돈을 내어 소고기를 수입하고 있는 측의 입장으로는 누가 보아도 미진한 대처다. 이때문에 국민들은 공식 역학 조사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수입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수입하는 입장이라면 미국 현지에 가서 도축 상황이나 식품 안전 관리 수준을 확인해야 하지만, 그런 상식적 조치는 거론되고 있지조차 못한 상황이다. 현 정부가 왜 이렇게 미온적일까. 자국민의 식품 안전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현 상황의 본질과 진정한 문제점은 다른 곳에 있다. 현재 정부가 미국과 맺고 있는 소고기 수입 공식 조건, 그리고 대미 협상의 현실 때문이다. 
 
정부는 2012년도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미국으로부터 30개월 이하의 쇠고기를 수입하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30개월 이하 쇠고기를 수입하고 있어 안전성이 확보되고 있는 것은 미국과 기존에 합의했던 공식 수입 조건 때문이 아니다. 2008년에 촛불을 든 국민들 덕분이다. 그렇다고 해도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한국민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라는 단서가 붙은 한시적 임시 수입 조건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불행히도 현재 한미간 공식 소고기 수입 조건은 이명박이 2008년도에 공식 체결한 것인데, '연령 제한 없는 죄고기'와 폐기 처분되어야 할 특정 위험 부위에 속하는 내장까지 수입하는 것이다. 2008년도 맺어놓은 이런 비과학적 수입 조건은 당시 극심한 국론 분열을 불러왔다. 10년이 지난 현재 한국을 제외하고 주변국 어느 나라도 수용하지 않는 조건이다. 대만은 지난 2011년, 일본은 2013, 중국은 올해 되어서야 비로소 30개월 이하 미국소고기 수입을 허용한다. 
 
결국 30개월 이하 쇠고기만 수입되기에 안전하다는 정부 발표는, 과거 촛불 시민이 주장했던 '30개월 이하 쇠고기 수입 요구'가 타당했음을 말해준다. 이 조건이 1년 후인 2009년도 당시 이미 북미FTA를 체결하고 있던 멕시코가 미국과 맺은 수입조건임을 생각한다면, 2008년도 촛불을 들고 30개월 이하 쇠고기 수입을 요구했던 한국민에게 '과학을 더 공부해야 한다'면서 주재국의 국민을 무시했던 버시바우 당시 미 대사의 발언이 얼마나 오만하고 부적절했던가를 알 수 있다. 
 
더욱이 당시 미국은 광우병 통제에 필요한 '강화된 사료 정책'이 실행되지 않던 때였다. 심지어 광우병 위험성이 높은 '기립 불능소'도 도축되고 있었던 때였다. 그나마 식품 안전 차원에서 '기립 불능소'의 도축을 금지한 것은 당시 부시 대통령에 이어 부임한 오바마 대통령 때였다.식픔 안전과 관련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갑의 입장인 수입국 정부에서 을의 입장인 수출하는 나라의 정보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란, 2008년도 이명박이 스스로 상납함으로서 우리가 잃어버린 검역 주권의 굴종적 현실이기도 하다. 수입국이면서도 수입 제품에 대한 권리는커녕 수출국 측의 설명에 따라 수입 여부가 결정되는, 국제적으로도 유래 없는 우스운 내용의 수입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2008년도 이명박이 만들어 놓은 미국과의 공식 수입 조건이다 보니, 이번 상황에 있어서도 현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대책이나 조치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일반 시민이 보기에는 납득되지 않고 무기력한 정부로 비춰지게 되는 현실은 이명박 정부가 지었던 원죄의 무게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광우병 발생과 이에 대한 부족한 대응으로 드러나는 현 상황의 진정한 문제점을 볼 수 있다.  
 
최근 미국은 과거 김종훈 통상본부장(전 새누리당 의원)이 '글자 하나 안고치겠다'고 장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폭 양보하고 맺은 한미FTA에 대해, '죽는 소리'를 하면서 재협상을 하자고 거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양국 모두 얻고 잃은 것이 있어 미국에 유리하면 유리했지 결코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굳이 자신들이 손해 보았다는 식으로 주장하면서 재협상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미국 정부의 행동 이유는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한국 정부와의 다른 여러 논의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기 쉽게 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간의 이런 행보가 자국의 이익을 위한 국제외교에서 당연한 전략이라면, 정부는 과학적으로나 국제 기준으로 보나 전혀 타당하지 않은 한미 소고기 수입 공식 조건을 내세워 광우병이 발생한 미국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현재 수입되고 있는 30개월 이하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이란 2008년도 촛불 시민들의 요구에 의해 겨우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것일 뿐, 공식 수입조건은 주변국 어느 나라도 생각도 못하는 굴종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이나 중국도 30개월 이하 쇠고기를 수입하고 있으니 '주변국과의 형평성'을 요구하면 된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가 부당한 조건으로 타결한 쇠고기 협상을 질타하는 국민들에게 '주변국이 30개월 이하 쇠고기 수입으로 협상을 타결하면 즉시 미국과 재협상 하겠다'고 약속했던 바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2008년도에 촛불을 든 사람들은 노무현 정부 시절 수입되던 30개월 이하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서는 아무 불평을 하지 않던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들을 '미국산 쇠고기가 무조건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비이성에 의해 선동된 이들'로 매도했다. 하지만 그 후 위키리크스를 통해 밝혀진 데 따르면 쇠고기 수입 대폭 개방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자가 비밀리에 미국에 사전 약속으을 했던 것이고, 당시 이명박 당선자도 자신의 그런 행위가 사회 혼란과 국론 분열을 불러일으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국제 기준에 따르 것이라고 국민을 호도하면서 오히려 정당한 요구를 하는 이들을 '괴담에 선동됐다'는 식으로 매도했다. 그래서 진보 보수를 떠나 국민은 분노했고,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진보·보수를 떠나 국민이 촛불을 든 기억이라면 최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이뤄낸 촛불이 있다. 2008년과 2016년의 모습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국민을 기만한 정부에 대한 분노이자, 비상식적 상황에 대한 시정 요구를 하고 있다. 이는 광우병이나 최순실을 넘어,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문제의 본질과 함께,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우리의 현실을 보게 한다. 
 
그나마 검역 조건이 '30개월 이하 쇠고기 수입'을 관철시키려 노력한 국민들 덕분에 다소나마 좋아진 것인데, 오히려 '촛불 시민이 괴담에 선동됐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또한 국정 농단이 실제했음에도 박근혜 탄핵을 여전히 '국모에 대한 천민들의 경거망동'으로 믿는 이들이 있다. 또한 '한국에 은혜를 베풀어주는 공정하고 아름다운 미국에 대해서 감히 한국인들이 전시작전권 환수, SOFA 개정, 사드 배치, 쥬피터 생물무기 프로그램 철폐 등을 할 수 있느냐'며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것은 배은망덕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결론을 말하자. 공식 역학조사 결과도 없이 정부가 사전에 스스로 나서서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미국의 광우병 발생을 기회로 최악의 조건으로 타결되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 대해 미국에 재협상 요구를 하는 적극적 자세가 요구된다. 
 
우리 정부가 '글자 하나 수정할 수 없다'고 했음에도 결국 대폭 양보한 한미FTA 협상마저 '재협상 하자'고 들고 나오는 미국에 대하여 우리 정부가 이렇게 정당하고 타당한 재협상 요구를 하지도 못하고 끌려 다닌다면 문제가 크다. 이는 마치 총을 들고서도 칼 든 이에게 끌려 다니는 모습과 같다. 여러 분야에 걸친 한미 간 협정에서 '불공정한 내용'과 '굴종에 가까운 조건'을 받아들이는 한국 정부의 태도는 오히려 우리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다. 
 
촛불에 의해 태어난 새 정부는 이런 굴종의 국내 문화를 극복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요구받고 있다. 당당하고 자신있는 적극적 자세로 대내외의 문제에 임하기를 바란다. 이번 미국 광우병 발생 상황에서 정부는 국민을 대상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을 대상으로 '액션'을 취하는 것이 10년을 두고 이어 온 촛불의 의미이자 국민이 현 정부에 거는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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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 “김현종 내정은 촛불혁명 배신”

농민들, “김현종 내정은 촛불혁명 배신”
 
 
 
편집국
기사입력: 2017/07/26 [10:16]  최종편집: ⓒ 자주시보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압력이 거센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한미FTA 체결을 주도했던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을 통상교섭본부장에 내정했다는 언론 보도들이 나오고 있다.

 

이에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25일 긴급호소문을 통해 즉시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전농은 김현종씨는 농민들의 고통과 호소를 외면하고 한미FTA를 추진하였던 장본인으로써 일고의 반성도 없이 삼성에 입사해서 관피아(정경유착)의 본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 사람이라며 이런 사람을 본부장에 앉히는 것은 적폐 대상을 등용시킨 것으로 해방 이후 친일파를 다시 등용시킨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전농은 특히 농민들은 문재인대통령이 벼 수매가 환수밥쌀 수입 문제도 해결 하지 못하면서 김현종을 임명하게 되는 순간 문재인정부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폭발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04년부터 노무현 정부 통상교섭본부장을 맡게 된 김 전 본부장은 노 전 대통령에게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설득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김 전 본부장은 2007년 6월 한미 FTA 서명식을 마친 후 2009년 3월 삼성전자 해외법무 사장으로 영입됐다. 2011년 말 삼성전자 퇴직 후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고 2016년 2월 민주당에 영입됐다가, 11월 WTO 상소기구 위원으로 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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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대통령에게 보내는 농민들의 긴급 공개 호소문>

 

언론보도에 따르면 문재인대통령은 통상교섭본부장(차관급)에 김현종씨를 내정했다고 한다.

 

김현종씨는 농민들의 고통과 호소를 외면하고 한미FTA를 추진하였던 장본인으로써 일고의 반성도 없이 삼성에 입사해서 관피아(정경유착)의 본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본부장에 앉히는 것은 적폐 대상을 등용시킨 것으로 해방 이후 친일파를 다시 등용시킨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문재인대통령이 만약 김현종을 임명한다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며촛불혁명을 배신한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특히 농민들은 문재인대통령이 벼 수매가 환수밥쌀 수입 문제도 해결 하지 못하면서 김현종을 임명하게 되는 순간 문재인정부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폭발하게 될 것이다.

 

문재인대통령은 김현종을 내정한 것이 사실이라면 즉시 철회해야 할 것이며 민중과 나라의 자주권을 행사할 사람으로 고쳐 생각해야 한다.

 

2017년 7월 25일 

전국농민회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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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사장 공모 서류심사에서 탈락한 노종면 기자의 소회

 
YTN 사장 공모 서류심사에서 탈락한 노종면 기자의 소회
 
 
 
정운현 | 2017-07-26 09:57:2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YTN 사장 공모 서류심사에서 탈락한 노종면 기자가 소회를 밝혔습니다. YTN 내부에 적폐세력이 엄존하고 있군요. 공감과 함께 지지, 성원을 보냅니다.

 

X에게

“이번 사장 공모 서류심사에서 탈락하셨습니다.”

문자통보를 받은 직후 나는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웃고 있을까? 안도하고 있을까?

이미 판을 짜고 결과를 알고 있었을 테니
당신은 내가 어떤 심정일까 상상하는 중이었을지도…

내가 왜 떨어졌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YTN 대주주들은 왜 내게 일괄적으로 0점을 줬을까?

왜 담합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무리수를 뒀을까?

대주주 측 심사위원 3명에게서 내가 단 1점이라도 받는다면
나를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평가방식이었기 때문이더군요.

입후보자 중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의 동생이 있습니다.

내게는 1점이 절실했는데
그가 2점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치밀하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무척이나 절박했구나 생각합니다.

YTN 대주주들은 공기업입니다.

그들 회사의 경영진이 아무리 박근혜 정권 사람들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절박한 결행이 가능한 것일까?

이 의문의 끝에서 X, 당신을 봅니다.

사실 두 달 전만해도
나는 YTN 사장 입후보를 꿈도 꾸지 않았지만,
당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고
어떻게든 YTN 개혁을 막아 자리보전을 하려는 시도였기에
그 시도를 깨기 위해 비밀작전 하듯 나서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서자 당신은 어찌 했습니까?

‘노종면은 피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통제 불능의 소영웅주의자다’ 따위의 흑색선전으로
나에 대한 YTN 안팎의 지지여론에 균열을 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요.

‘노종면이 YTN 사장이 될 경우 적폐세력의 저항을 자극해
MBC 등의 개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궤변까지 늘어놓았더군요.

입후보를 공식화 한 뒤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의 대부분은
흑색선전과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당신은 권력을 참칭하거나
YTN에서 누리는 알량한 지위를 지렛대 삼아 대주주와 결탁했고
나를 배제하는 작전에 성공했습니다.

X, 당신은 당신이 누군지 압니까?

당신은 공정방송 투쟁에 동참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한때 인사 불이익을 받았을지 모르나 징계 전력은 없습니다.
당신은 결국 배석규와 조준희 품으로 투항해 보도훼손과 경영악화를 주도 내지 방조했습니다.

이것만으로 X 당신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정권교체가 기정사실화 된 시점부터 새로운 권력의 끈을 잡으려 시도해 왔습니다.
당신은 대표적인 적폐세력과 거리두기를 하며 자체 세력화를 시도해 왔습니다.
당신은 해직자 복직을 자리보전의 조건쯤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 X를 변종적폐라 규정합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나는 당신과 잘 해보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당신이 나로 상징되는 개혁세력과의 동거 내지 타협을 모색했다고 판단합니다.

나는 당신과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당신도 그것을 알고 무모하고 무도한 일을 저지른 것이지요.

좀 더 싸웁시다.
아니 끝까지 싸워야겠습니다.

이번 사장 공모 인정할 수 없습니다.
동지들을 규합해 투쟁에 나서겠습니다.
조작된 심사를 통해 사장 선임이 시도된다면 주저 없이 2008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장 복직부터 해야겠습니다.

조작 음모로 사장 공모의 정당성이 훼손된 마당에
내가 약속을 지킨답시고 복직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참 좋아하겠지요.

그럴 생각 없습니다.
복직으로 당신과 대면하는 투쟁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당신에게 복직을 막을 음모도 마련돼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2008년 7월, 격렬했던 YTN 주총 투쟁이 또렷이 떠오르는 아침입니다.

2017년 7월 26일, 해직 3216일
노 종 면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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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1000억짜리 '녹조라떼 카페'

 
[2017 전국일주 - 대구·경북 16] 2년 연속 녹조 창궐한 영주댐, 대안은 '내성천 국립공원'

17.07.26 07:40 | 글:정수근쪽지보내기|편집:김지현쪽지보내기

우리나라 언론에는 소위 '중앙'이라는 '서울발' 기사만 차고 넘칠 뿐 내가 사는 곳을 다룬 기사는 찾기 어렵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지역이 희망'이라는 믿음으로 지역 시민기자를 만나러 가면서 해당 지역 뉴스를 다룹니다. 첫 행선지는 대구입니다. [편집자말]
영주댐은 지금 '녹조라떼' 배양소

"이야, 저게 다 뭣이다냐? 완전히 녹색이네. 녹색. 금강 녹조보다 더 심각하구먼."

'4대강 독립군' 일환으로 낙동강과 내성천 취재에 나선 금강요정 김종술 시민기자의 일성이었다. 그랬다. 내성천 중상류에 들어선 영주댐은 지금 짙은 녹색의 호수다. 영주댐에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녹조가 창궐했다. 
 
▲ 녹조라떼 배양소가 된 영주댐. 온통 초록이다. ⓒ 김종술

지난 20일 나가 본 내성천의 영주댐은 역한 냄새가 올라오는 녹조라떼 배양소로 변해 있었다. 수십 대의 폭기조(인위적으로 산소를 불어넣어 녹조를 저감해주는 장치)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온통 녹색이다.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영주댐에 심각한 녹조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녹조제거선이 돌아다니며 녹조를 제거해보지만, 이미 창궐한 녹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낙동강 수질개선용이라는 목적으로 건설된 영주댐에서 심각한 녹조가 두 해 연속 창궐하면서 국민혈세 1조1000억이 들어간 이 댐의 용도와 기능에 대해 또다시 심각한 의문이 뒤따른다. '녹조라떼 영주댐'이 되면서 '녹조라떼 낙동강'의 수질개선이란 어불성설임이 증명됐다. 따라서 영주댐이 4대강사업과 마찬가지로 대국민 사기극에 기반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 온통 초록이다. 녹조라떼 배양소가 된 영주댐. 이 물로 낙동강의 수질을 개선하겠다고? ⓒ 정수근
 
▲ 수십대의 폭기조가 돌아가고, 조류제거선이 떠 있어도 이미 창궐한 녹조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 정수근

마지막 4대강 공사인 영주댐의 주목적은 무엇이었나. 환경영향평가서 초안을 보면 편익의 90% 이상이 낙동강의 수질개선이다. 나머지 10%가 지역의 용수공급이나 홍수예방 편익이다. 즉 영주댐에 가둔 물로 낙동강의 수질을 개선시켜보겠다는 것이 영주댐의 주목적이다. 그러나 영주댐에 낙동강보다 더 심각한 녹조가 발생하면서 낙동강 수질개선용이라는 말은 무색해져버렸다. 

영주댐이 들어선 내성천은 또 어떤 강인가? 사시사철 1급수의 청정 강물이 흐르던 곳이자, 사행하천과 물돌이마을 그리고 넓은 모래톱이 만들어주는 경관이 일품인 하천이었다. 그 내성천 중에서도 압권의 비경을 간직한 영주시 평은면 용혈리 일대에 들어선 영주댐 때문에 내성천은 1급수 강물과 절경마저 심각하게 손상됐다. 
 
▲ 비록 상류에 오염원이 존재하더라도 내성천의 풍부한 모래톱을 거쳐오면서 내성천의 수질은 1급수를 유지하게 된다. ⓒ 정수근

내성천이 1급수 수질을 유지했던 이유는 비록 상류 봉화 등지에 오염원이 있더라도 강물이 풍부한 모래톱을 쉼없이 흘러오면서 수질이 정화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주댐 공사가 진행되면서 3~4년 기간에 무려 350만㎥의 모래를 준설하고 댐에 물을 채워 가뒀다. 그러다 보니 본격적인 담수가 아닌데도 녹조가 창궐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이로써 영주댐으로 말미암아 1급수 내성천의 수질마저 악화되고, 이제 되레 내성천 자체의 수질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영주댐을 시급히 철거해야 한다

문제의 영주댐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영주댐은 마지막 4대강사업으로 대국민 사기극에 기반한 공사였다. 그동안 대구환경운동연합은 이렇게 주장해왔다.

"원래는 한반도 대운하를 염두에 둔 4대강 공사였기에, 낙동강 운하로 물을 넣어주고, 6미터 깊이로 준설해 둔 낙동강으로 모래가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든 운하조절용댐이 영주댐이다. 이런 댐에 낙동강 수질개선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목적을 끼워넣어 급조했다."

그렇다. 영주댐이 없을 때 내성천의 맑은 물과 모래의 50% 이상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1급수 낙동강을 만들었다. 가만히 놔두면 내성천이 스스로 알아서 낙동강의 수질을 개선시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 가까이 내려가자 녹조 썩은내가 진동했고 시궁창을 방불케했다. ⓒ 정수근

하지만 1조1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국민혈세가 영주댐 공사에 투입됐고, 내성천 수질은 '녹조라떼' 수준이 됐다. "이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라는 환경단체의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영주댐은 가고, 국립공원 내성천이여 오라

그리고 그 대안으로 환경단체는 내성천의 국립공원화를 주장한다.

"내성천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 댐이 들어선 자리와 수몰지는 이미 주민들도 모두 떠나버렸다. 따라서 그 일대는 온전히 하천의 영역으로 되돌려줄 수 있다. 그래서 그 일대만이라도 우리 하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으로 만들자. 결국에는 내성천 110㎞ 전 구간을 국립공원으로 만들자."
 
▲ 매년 내성천을 찾아오는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종인 먹황새. 이 귀한 새가 찾는 유일한 곳 내성천. 이 귀한 새를 위해서라도 내성천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야 한다 ⓒ 정수근

어쩌면 내성천에 영주댐이 들어선 현실보다 내성천 국립공원이 더욱 바람직한 대안일지 모른다. 환경은 지금 우리들 것이라기보다는 미래 세대의 몫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환경운동 진영의 주장처럼 대국민 사기극에 기반한 영주댐은 지금이라도 사라져야 한다. 대신 남녀노소 누구나가 누릴 수 있는 '국립공원 내성천'이 하루빨리 와야 한다. 이것이 영주댐의 대안이자 인간과 자연의 이상적인 동거가 아닐까 싶다.

"영주댐이여 가고, 국립공원 내성천이여 오라!"
 
▲ 녹조라떼 배양소 영주댐은 가라, 대신 국립공원 내성천이여 오라! ⓒ 정수근
 

덧붙이는 글 | 녹조라떼 배양소가 된 영주댐의 '4대강 독립군' 취재기입니다. <평화뉴스>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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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인류 최초의 핵 홀로코스트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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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7/07/25 12:15
  • 수정일
    2017/07/25 12:1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전쟁국가 미국] '히로시마'를 둘러싼 기억투쟁 (1)
2017.07.25 08:31:21
 

 

 

 

미국의 역사학자 마틴 셔윈은 2차 대전의 가장 중요한 결과로 "인류의 생존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됐다"는 점을 꼽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이 인류 절멸의 위험성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I. I. 라비는 셔윈의 지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히로시마 이후) 갑자기 내일이 심판의 날이 됐다. 이후 언제나 내일은 인류 최후의 심판의 날이었다" 

전면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인류 전체가 몰살될 수 있다는 것, 바로 내일이 그날이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미국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공격을 '핵에 의한 집단 학살(nuclear genocide)'이라고 규정했다. 또 다른 역사학자 리차드 미니어는 히로시마를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전쟁범죄, 즉 핵 홀로코스트(atomic holocaust)라고 말했다.  

또한 브루스 커밍스는 히로시마를 '정당한 전쟁의 부당한 마무리'라고 지적하면서 이로부터 절멸주의(exterminism)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승리를 위해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으며 도시와 국가, 그리고 세계까지도 파괴하는 것, 즉 핵무기에 의한 전면적 파멸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전쟁의 목적은 무력의 사용을 통해 상대방을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핵전쟁은 부도덕하다. 아니, 도덕 이전에 허망하다. 적과 우리 모두 파멸되기 때문이다.  

학자들만의 의견인 것도 아니다. 도쿄 전범 재판(1946~1948년)에 참여했던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은 소수 의견을 통해 미국의 원폭 공격은 "(태평양전쟁에서 일어난 사건 중) 나치 지도자들이 저지른 만행에 가장 근접한 유일한 사례"라고 지적했다. 

일본 공습을 지휘했던 미군 지휘관들도 자신들의 행위가 전쟁 범죄에 해당된다는 점을 인정했다. 도쿄 대공습을 비롯해 일본 64개 도시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자신의 부하였던 로버트 맥나마라(1961~1967년 국방장관 역임)에게 "만일 미국이 전쟁에서 진다면 미군 지휘부 전원이 전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국이 잔학행위 면에서 히틀러를 능가한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왜 '히로시마 원폭'을 사과하지 않았을까 

이상과 같은 학자들의 지적과 경고, 전쟁 당사자들의 자기 고백은 대부분의 미국인이나 한국인들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트루먼 등 2차 대전 당시 미국 지도자들의 공식 발언과 너무도 상반되기 때문이다.  

트루먼 등은 일본군의 극단적 저항에 직면해 미군 병사들과 일본 국민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원자탄 사용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해 왔다. 트루먼은 원자탄 사용으로 미군 병사 50~10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했다.  

대다수 미국인들의 히로시마 인식은 바로 이러한 정치지도자들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다. 히로시마 원폭 공격은 정당한 전쟁을 조속히 끝내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투쟁으로 독일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를 물리치고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회복했다고 믿고 있다. 나아가 도덕적 우월성을 자부한다. 세계를 이끌 자격과 의무와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2차 대전은 '좋은 전쟁'을 넘어 '역사상 최고의 전쟁'이었다. 이런 미국인들에게 히로시마가 집단학살이자 핵 홀로코스트라고 한다면 커다란 도덕적 오점이자 모욕일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의 경우 교과서 등을 통해 두 방의 원자탄으로 일본이 패망하고 나라의 독립을 되찾았다고 배워왔다. 원자탄이 해방의 은인인 셈이다. 또한 대다수 월남민들은 6.25전쟁 당시 북한에 대해 원폭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을, 그리하여 미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4만 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고, 원폭 공격이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히로시마의 진실'은 무엇인가? 핵 홀로코스트였는가, 아니면 조기 종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는가? 민간인에 대한 원폭 공격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없는가?

이 문제는 핵무기의 운명과 인류의 미래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만일 대다수 미국인이 히로시마가 핵 홀로코스트였고, 민간인에 대한 원폭 공격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믿는다면 핵무기는 미국의 전쟁 도구로서, 나아가 대외정책의 수단으로서 설 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유일하게 남겨진 건물이다. ⓒ위키피디아


불행하게도 지난 70여 년간 대다수 미국인들은 히로시마가 조기 종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앞으로도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정책당국자들의 주장을 맹신해 왔다. 미국 핵이 존속돼 온 이유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지난 1980년대 미국과 소련은 유럽에 경쟁적으로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서유럽 시민들은 수년간 2차 대전 후 최대의 반핵 시위를 벌였다. 자신들은 미소 간 핵 대결의 인질도, 희생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들의 반핵 시위는 1987년 미소 간 중거리미사일폐기조약(INF)으로 귀결됐다.  

특정한 종류의 핵무기가 완전 폐기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INF가 성사된 데는 1985년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역할도 컸지만 그 원동력은 바로 서유럽 시민들의 반핵 시위였다. 그만큼 국민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히로시마는 군사적으로 필요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한 조치였는가? 지난 70여 년간 미국 핵의 역사는 히로시마에 대한 기억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한쪽에는 히로시마는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핵무기는 정당한 군사무기라고 주장하는 정치‧군사 지도자와 일단의 지식인들이 있다.  

다른 한 쪽에는 히로시마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조치였고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으며, 핵무기는 군사무기로 사용돼서는 안 될 '절대악'이라고 주장하는 양심적 지식인과 평화운동가, 비판적 시민 등이 있다. 지금까지는 전자가 다수 의견이다. 핵 위협이 계속되는 이유다.

하지만 미국 학계에서는 대중들의 인식과는 다른 결론이 이미 나와 있다. 히로시마는 군사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새뮤얼 워커라는 역사학자는 "미국은 수십만 미군 병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원폭을 투하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원폭 공격이 없었어도 전쟁은 비교적 이른 시일에 끝났을 것이며, 일본 본토 상륙은 필요 없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말한다. 

1945년 11월로 예정됐던 규슈 상륙, 46년 3월의 혼슈 상륙 작전에서 예상되는 미군 희생자는 2만 5000~4만 1000명, 아무리 많이 잡아야 5만 명 이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트루먼과 스팀슨 등은 일본 상륙작전으로 미군 병사 50~100만 명의 희생이 예상됐다고 주장했다. 엄청나게 과장된 수치다.  

워커는 미 정부 기관인 핵통제위원회(NRC)의 공식 역사가로, 온건 성향의 제도권 학자다. 제도권 학자인 그가 이런 정도의 발언을 했다는 것은 '히로시마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조치'였다는 것이 미국 역사학계의 일치된 견해임을 말해준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20여 년간 미국에서는 트루먼 등 정부 당국자의 발언이 곧 히로시마의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65년 가 알페로비츠가 <핵 외교(Atomic Diplomacy)>란 책에서 '원폭 투하의 주요 이유는 군사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었으며 '소련에 겁을 주어 전후 상황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신화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2차 대전 당시의 비밀문서들이 비밀 해제되면서 정부 당국자의 주장은 허구임이 드러났다.  

1975년 마틴 셔윈은 저서 <파괴된 세계(A World Destroyed)>에서 트루먼이 히로시마에 핵 공격을 가한 것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이해할 만한' 처사이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선택'은 아니었으며 분명 핵 공격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히로시마 원폭이야말로 2차 대전이 남긴 최악의 유산이라고 말한다. 미소 간 극단적 핵 군비경쟁이 벌어지면서(한때 핵탄두가 7만 개 가까이 이르렀다) 민생에 쓰여야 할 수 조 달러 이상의 소중한 자원이 낭비됐고,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45년 여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이 직면한) 선택은 재래식 군사력에 의한 상륙작전이냐 핵전쟁이냐가 아니었다. 다양한 형태의 외교냐 아니면 전쟁(의 지속)이냐였다. 트루먼의 선택은 이해할 만하지만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피할 수도 있었다"

즉 트루먼 등은 당시 미국의 선택지가 상륙작전 아니면 원폭 투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외교적 방식에 의한 전쟁 종결이라는 다른 대안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셔윈은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항복 조건의 변경(천황제 유지 인정), 둘째 소련군의 참전, 셋째 기존 해상 봉쇄와 공습의 지속 등이 그것이다.  

첫째 대안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일본은 1945년 6월부터 최대한 유리한 조건의 항복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천황제 유지만 보장된다면 항복할 심산이었다. 미국 고위층은 암호 해독을 통해 이러한 일본의 내부 사정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스팀슨 등 일부 참모들은 천황제 유지를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루먼으로서는 1943년 루스벨트가 선언한 '무조건 항복'을 거스르기가 어려웠다. 자칫 국내정치적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루먼은 원폭으로 무조건 항복을 관철시켰으나 종전 후 천황제는 유지시켰다. 무조건 항복이란 명분을 지키기 위해 수십만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셈이다. 

둘째 대안은 미국 지도자들이 원치 않는 것이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독점적 지배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셋째 대안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쟁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끝낼 수 있는 대안이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셔윈은 히로시마 이후 수 십 년에 걸친 역사학자들의 연구 끝에 '히로시마의 진실'이 거의 밝혀졌으나 이러한 역사 연구의 결과들이 미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면서 이는 미국에서 역사가의 역사 해석이 정치적 통제하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개탄했다. 나아가 역사가는 진실을 밝혀냈으나 그 진실이 일반에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야말로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개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995년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이 추진했던 원폭 50주년 기념전시회가 정치적 압력에 의해 사실상 무산된 사건이 그것이다. 스미소니언 측은 원폭 50주년을 맞아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폭격기 에놀라 게이를 복원해 전시하는 한편 피폭자들의 참혹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원폭 투하에 이르는 의사 결정의 전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셔윈은 이 전시회의 역사 자문위원이었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기획 단계부터 정부와 의회 및 재향 군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1995년 1월 사실상 무산됐다. 참전 군인들은 이 전시회가 일본 편향적이며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원폭 투하가 정당한 것이었다면, 모욕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있었을까?). 언론들은 반미적이라고 규탄했고 상원과 하원은 이 전시회가 미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것이며 비애국적이라는 이유로 규탄 결의안을 채택하기까지 했다. 

미국 사회 전체가 찬반으로 갈려 격렬한 논란을 벌였다. 결국 1월 30일 스미소니언 측은 전시회를 사실상 철회했다. 전시장에는 에놀라 게이의 동체와 명패, 원폭 투하 당시 승무원들의 회고담 녹음 테이프만을 전시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셔윈은 "1995년에도 핵의 역사는 정치의 인질로 잡혀 있다"고 개탄했다. 나아가 2차 대전을 '우리 최고의 시간'으로, 스스로의 도덕적 우위를 굳게 믿고 있는 미국인으로서는 이러한 자기 이미지(self-image)에 어긋나는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차 대전에 대한 미국인의 집단적 기억은 '역사상 최고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잔인하고 위험한 파시즘을 제거했고 아시아에서는 사악한 전쟁 기계를 파괴했다. 그리하여 세계의 평화와 자유, 질서를 회복했다.  

또한 승전 후에는 관대함을 베풀었다. 이전의 적들을 먹여 살리고 경제를 재건시켰으며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미국인에게 2차 대전은 단순히 좋은 전쟁이 아니라 완벽한 전쟁의 모델이다. 정당한 전쟁이고 올바른 전쟁이며 인류를 위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좋은 전쟁의 끝이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핵 공격에 의한 수십만 민간인의 학살이라니, 이러한 역사적 해석을 미국인은 정치적‧문화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의 지도자나 국민 대다수가 히로시마의 진실과 정직하게 대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소련과의 냉전은 이러한 진실 회피를 부추겼다. 냉전 기간 내내 미국은 소련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강조해 왔다. 또한 소련의 막강한 지상군을 막기 위해서는 핵 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만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군사적으로 불필요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는 공격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소련과의 대결에 필수적인 도덕적 정당성과 군사적 무기를 잃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미국 지도층으로서는 히로시마 핵 공격이 유일한 선택지, 정당한 조치였다고 고집할 수밖에 없다. 다른 대안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미국 대외정책의 도덕성 및 정당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원폭 사용의 부도덕성을 인정한 경우는 아직 없다. 지난해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 피폭 장소를 방문했으나 원폭 공격에 대해 사과, 또는 유감 표명은 하지 않았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2016년 5월 27일(현지 시각) 일본의 2차대전 피폭지인 히로시마를 방문,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에서 헌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는 취임 직후인 2009년 4월 프라하 연설에서 '핵 없는 세계'를 주창하면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발언을 한 바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핵무기의 확산은 막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더 많은 국가와 더 많은 민족들이 궁극의 파괴 무기를 갖게 되는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숙명론은 인류의 치명적 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핵무기의 확산이 불가피하다고 믿는다면, 이는 바로 핵무기의 사용도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2016년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투하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유감 표명도 하지 않았다. 트루먼이 '원자탄으로 50만 미군 병사의 목숨을 구했다'고 강변하거나 오바마가 히로시마를 방문하고도 핵 공격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미국에게 핵무기는 '사용할 수 있는 무기'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70여 년 핵의 역사는 히로시마를 둘러싼 기억 투쟁의 역사였다. 핵의 역사는 또한 자기기만, 정보 통제(은폐와 왜곡), 여론 조작의 역사이기도 했다. 핵을 쓰려 하는 세력은 핵무기가 초래한 참상과 핵무기의 진실을 한사코 은폐, 왜곡하려 한다. 반면 원폭 피해자를 비롯한 대다수 양심세력은 핵의 참상을 알리고 그 진실을 밝히려 한다. 원폭 피해자가 그러하듯이 핵이 초래한 참상과 진실을 안다면 결코 핵무기를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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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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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공학자 “한국 원자력 학계, 동문으로 엮인 패밀리”

 

[인터뷰] 417명 교수성명 반대한 박종운 동국대 에너지원자력공학과 교수 “이전 정권에서 사회이슈 침묵, 현 정부는 공격”

조현호 기자 chh@mediatoday.co.kr  2017년 07월 25일 화요일
 

지난 5일 원자력 공학과 교수 및 이공대 교수 417명이 문재인 정부 탈핵‧탈원전 정책을 반대하는 성명을 냈을 때 끝까지 동참하지 않은 원자력 공학 관련 교수가 이들의 주장을 정면 비판했다.

현직 원자력공학과 교수 가운데 탈원전 반대 주장을 편 교수들과 정반대의 목소리를 낸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 학자는 박근혜 정부가 고리1호기에 대해 2015년 6월 2차 수명연장을 하지 않은 채 영구중지 결정을 했을 때 이들 학자들과 한수원 노조 등이 침묵한 점을 지적했다. 당시에는 침묵했다가 새 정부의 신고리 5‧6호기 중단 공론화 논의조차 반대하고 들고 일어선 것은 학자로서 명분과 일관성이 없는 집단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이밖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원인은 쓰나미였으며 동일본 대지진은 원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우리 원전의 격납건물 두께가 두꺼워 안전하다는 원자력공학자들과 조선일보의 주장에 대해서도 이 학자는 반박했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원인은 복합적”이라며 “스리마일,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인재와 설계 결함 사고였다”고 지적했다. 격납건물 두께와 관련해서도 “관통하는 수십여개의 배관 중 하나만 손상돼도 원자로 냉각에 큰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며 “또한 원자로 바깥의 건물에 있는 기반시설(비상냉각탱크)은 외기에 노출돼 있고, 두께도 매우 얇다”고 반박했다.

미디어오늘은 새 정부의 탈핵‧탈원전 정책에 반대하는 두차례 성명을 낸 원자력 관련 학과 등 이공대 교수 417명의 명단에 이름을 넣지 않은 박종운 동국대 에너지원자력공학부 교수를 지난 21일, 24일 국제전화로 인터뷰했다. 현재 박 교수는 프랑스 학회에 출장중이다. 

박 교수는 “원자력 관련 교수들의 지난달 1차 반대 성명 때와 이번 2차 (7월5일) 반대 성명 때 모두 나는 서명하지 않았다”며 “원전이 아닌 다른 많은 사회적 이슈들에는 한 번도 의견을 낸 적도 없는 교수들이 자신 이익과 관련된 분야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어서 안했다”고  두차례 탈원전 반대 성명에 동참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특히 박 교수는 “(지난 정부에서) 고리 1호기를 영구정지시켰을 때 원자력 계에서 성명을 낼 이유가 될 수도 있었는데 안했다”며 집단행동의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난달 19일 영구정지된 고리1호기를 폐쇄하기로 결정한 것은 박근혜 정부였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2015년 6월12일 에너지위원회를 열어 경제성‧수용성‧해체산업 육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한국수력원자력에 영구정지를 권고했다. 한수원도 당시 이사회에서 2차 수명연장을 신청하지 않기로 의결했다.

 

 

▲ 박종운 동국대 에너지원자력공학부 교수. 사진=본인제공
▲ 박종운 동국대 에너지원자력공학부 교수. 사진=본인제공
 

이를 두고 박종운 교수는 “러시아는 체르노빌 원전폭발 후인 1989년 크림반도에 원전을 짓고 있다가 활성단층이 발견되자 짓던 원전을 중단시켰다”며 “그곳은 사람이 거의 안 사는 지역인데도 그렇게 결정했는데, 우리는 활성단층이 확실시 되는 지역이 경주와 양산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어떻게 10개나 몰아짓는다는 것이냐. 그 주변에 400만 명이 살고 있다”고 우려했다.  

신고리 5, 6호기 반대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박 교수는 “지금까지 정부가 원전 반대의견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 한 번도 안하고 묵살하다가 새 정부에서 정책을 바꾸겠다는 것에는 합의하자고 요구하는 것은 논리에 안맞다”며 “그런 논리대로라면 고리 1호기의 경우 10년 더 수명연장을 더 할 수도 있었는데, 접겠다고 결정했을 때 한수원과 노조, 원자력계 교수들은 왜 가만히 있었는가. 당시에도 전기판매금’ 수 조원이 손실된다, 불법이다라는 말조차도 못하다 왜 지금 이러느냐”고 반문했다. 스위스의 경우 원전 지을 때부터 수명연장 여부까지 모두 다 국민투표 했다. 탈원전만 투표한 것 아니라고도 박 교수는 전했다. 

 

박 교수는 원자력 공학자들의 성명 내용에 대해서도 “탈원전 반대성명의 논리에 ‘제왕적 조치, 전문가 배제’ 등 현 정부를 공격하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었다”며 “원자력 전문가만 전문가인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성명의 내용이 ‘원전의 안전성 등이 과장된 면이 있다면 수정하고, 앞으로 에너지 전환에 원전이 기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인력들이 불안해하니 이에 고려해달라’고 건의하는 정도이기를 원했으나 투쟁적이고 전투적으로 써왔다며 “단체행동을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또한 “원자력 학계 교수들의 의견이 이렇게 같을 수가 있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는 동문으로 엮여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동문으로 엮여있다. 서울대, 한양대, 경희대 출신이 선배와 후배 제자로 묶여있다. (마피아를 넘어) 한가족, 즉 패밀리”라며 “원자력의 필요성에 대한 정보가 시민단체나 국민들에 전달되지 못하는 것은 이들에게 친화력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기들끼리만 해왔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이들의 성명이 학계와 정부-원자력업계의 이해관계에 의한 것도 주된 이유일 것이라는 의심이 들어 동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한수원의 대형 용역비) 지원을 받아온 점이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원전하자’고 한 것 아니냐는 편향성에 대한 의심이 있을 수 있다”며 “반발하는 논리도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박 교수는 국내 원전이 지진에도 끄덕없고, 항공기가 부딪혀도 견뎌낸다는 원자력공학자와 조선일보 주장에 대해서도 과학적 반박을 폈다.

 

▲ 지난달 12일 부산 기장군 장안읍 해안에 있는 고리1호기(왼쪽 돔-19일 영구중지). 오른쪽 돔은 고리2호기. 사진=연합뉴스
▲ 지난달 12일 부산 기장군 장안읍 해안에 있는 고리1호기(왼쪽 돔-19일 영구중지). 오른쪽 돔은 고리2호기. 사진=연합뉴스
 

특히 조선일보는 지난 13일자 3면 머리기사 ‘原電공포 몰고온 ‘판도라’… 억지설정 장면 한국原電선 가능성 ‘0’’에서 영화 ‘판도라’에 나오는 내용을 물고 늘어졌다. 조선일보는 후쿠시마 원전이 지진이 아닌 쓰나미 때문에 발생했고, 지금까지 지진으로 원전사고가 난 적이 없다는 황일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의 주장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당시 9.0 규모의 지진도 발생했지만 지진 자체는 원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정말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9.0의 동일본대지진은 무관한 것인가, 지진으로부터 한국의 원전은 안전한가. 이런 주장은 타당한가. 후쿠시마 원전은 복합적으로 발생했다고 봐야지 지진은 전혀 무관한 것처럼 호도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후쿠시마 사고는 (해저에) 지진이 났기 때문에 쓰나미가 발생했다. 1차 원인은 지진이다. 주변이 어떻게 됐는가를 봐야 한다. 지진규모 9.0의 동일본대지진으로 원전주변이 초토화됐다. 송전탑이 붕괴되고, 도로가 무너졌다. 원전에 대한 지원 시설이 접근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지진 후 파괴된 송전시설이 전기공급을 불가능하게 했다. 외부의 전원을 못쓰니 냉각시켜야 하는데 이를 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원전 내부의 비상디젤발전기를 가동해야 하는데, 곧바로 이어진 쓰나미에 의해 물에 잠겨서 외부 전원도 내부 전원도 공급을 못했다. 따라서 원자로를 식혀줄 냉각수 공급을 못하는 심각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전의 파괴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주변의 악조건과 설계결함의 복합적인 것이다.”  

박 교수는 “후쿠시마 이전에도 체르노빌, 스리마일 사고, 윈드스케일 원자로 용융사고 등 6건 정도의 원전사고가 있었다”며 “이들도 설계 결함이나 운전원의 실수, 정비 불량, 매뉴얼 숙지불량, 전원상실에 의한 사고이며, 후쿠시마도 단지 지진이냐 쓰나미냐에 원인을 갖다 붙이는 것은 초점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태에서 쓰나미 높이만큼 방벽을 높였으니 안심하라는 것은 땜질에 불과하다고 박 교수는 반박했다. 

더구나 후쿠시마 원전사고 원인이 지진과 전혀 무관하다고 결론 내리기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지진 발생 이후 후쿠시마 원전사고 관련 어느 부분에 손상이 났는지는 정확한 정보가 안나온다”며 “일본 원자력계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어딘가 얇은 배관이나 주변의 배관, 냉각수 출입 배관 등 여러 배관이 많이 있는데, 어디에 손상을 입었는지 전혀 나오는 정보가 없다”면서 “다만 전원상실과 냉각실패로 이어지는 과정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발생한 경주대지진 이후 국내 활성단층 존재 여부와 원전과의 관련성에 대해 박 교수는 가능성이 낮다고 하기 보다는 원인을 없애거나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원자력 공학이나 기계공학을 하는 교수들은 지진 전문성이 없고, 나 역시 지진 전문가는 아니다”라면서도 “과거 활성단층은 아킬레스건인데도 그동안 원전 건설과 관련해 ‘활성단층에 가깝다’는 연구결과를 인용하지 않아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4~5년 전만 해도 (지진과 관련해) 원전에 대해 말하는 것이 거의 묻혔다. 언론도 책임이 있다”며 “과거시절 산업통상자원부 입장이라는 것은 원전을 아파트 짓듯이 생각했다. 그러니 울진과 고리 지역에 원전을 10개씩이나 과밀하게 지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활성단층의 문제가 불거졌는데도 그런 의심이 되는 지역에 원전을 몰아짓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규모에 대해 명확히 확증할 수 없을 때엔 활성단층 가능성이 낮다고 하기 보다는 원인을 없애야 한다”며 “그런데 정부는 한 지역에다 몰아짓고, 주민들 역시 돈 받으면 찬성, 없으면 반대하는 상황이 이어지니 원전부지 결정에 갈등이 생겨왔다”고 말했다.

그는 “활성단층의 증거가 나오면 이를 받아들이고 여기의 원전은 최소화해야 한다”며 “연구결과도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 신고리 5, 6호기는 건설 허가 자체를 막았어야 했다. 못했으니 그것을 문재인 정부에서 대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지난 5일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등 이공대 교수 417명이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탈핵정책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진=연합뉴스
▲ 지난 5일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등 이공대 교수 417명이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탈핵정책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진=연합뉴스
 

일본 원전과 달리 우리 원전의 격납건물의 두께가 1.2m의 철근콘크리트 외벽 포함 5중 방호벽 체계라 안전하다는 원자력 공학자와 조선일보 보도에 대해 박 교수는 “본질은 놓치는 주장”이라며 “두께가 얼마냐, 지진 규모가 얼마냐만 따지는데, 원자로가 들어있는 건물(격납건물) 바깥의 많은 기반시설에 손상을 입는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항공기가 사용후핵연료가 저장된 건물과 충돌하면 연료에 화재가 발생한다. 원자로를 보조하는 시설이 잘못돼서 망가지면 후쿠시마처럼 발전할 수 있다. 어디에나 아킬레스건이 있다. 비상냉각탱크는 원자로 바깥에 있다. 항공기가 비상 냉각수 탱크를 부수면 냉각수가 사라진다. 원전사고가 시작되는 것이다. 격납건물을 통과하는 배관이 수십여개 되는데 하나라도 손상을 입히면 큰 사고가 난다. 아무리 매뉴얼을 잘 만들어도 이를 벗어나는 상황이 벌어지면 매뉴얼 대로 해도 안된다. 후쿠시마가 마지막이 될 수 있겠느냐. 확률적으로도 50년동안 6회차례나 발생했다.”

전력수급 정책에 대해서도 원자력 공학자들이나 한수원이 나서서 할 말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전문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박종운 교수는 “모든 전력수급계획은 국가가 수립하는데 원자력계가 왜 난리를 피우는지 의문”이라며 “원자력 학계와 한수원은 전기료 인상이나 블랙아웃을 말할 전문성이 없다. 오히려 (이 문제에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기료 인상에 대해 박 교수는 “(나 역시 전문성이 없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2030년까지 원전 10%가 줄어들고 재생에너지 20%가 늘어나고, 석탄을 우선 가스로 바꾼다고 하면 이는 세계적 추세에 가까우므로 무리가 아니다”라며 “신재생 에너지 비율이 1년에 1.5%씩 늘어나고, 이 에너지가 아무리 비싸도 2020년이면 그나마 인상폭이 꺾일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를 과장해서 오를 것이라고 몰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원전이 값싼 에너지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박 교수는 원전에너지의 비용이 대단히 저평가돼 있다고 지적했다. 원자력발전소를 폐로할 때의 비용, 사용후 핵연료(고준위 폐기물) 처리 비용, 방사능폐기물 처리 비용 등을 감안할 때 결코 싼 에너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우선, 폐로 비용의 경우 해외사례만 보면 조 단위”라며 “우리는 고리 1호기가 5000억 원 수준이라고 했다가 지금 나오는 얘기는 8000억 원이라는 것이다. 믿을 수가 없다. 최근 독일 북동부 작은 원전을 폐로하는데 3조원이 들어간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사용후 핵연료 처리 문제의 경우 박 교수는 “사용후 핵연료를 (원전 내의) 물(저장수조) 속에 넣어뒀다가 다 차면 공기중에 저장하고, 추후 나중에 영구처분장을 설치한다는데, 이 비용이야말로 상상할 수조차 없다”며 “결국 이 돈은 누가 내느냐. 다 우리가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다른 원자력 학자와 달리 이 같은 주장을 펴는 것이 정부나 원자력업계로부터 용역과제 선정에서 배제돼 있는 이유탓은 아니냐는 질의에 대해 박종운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박 교수는 “제가 한수원으로부터 용역지원을 받지 않았지만 미래창조과학부에서 (선정하는) 정부 과제를 해왔고, 원자력안전위원회 과제도 받아왔다”며 “한수원에서 안 받은 것은 큰 의미는 없다. 연구과제가 없어서 이랬다(이들을 비판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오히려 연구과제 받으면서도 당당히 원전 정책과 위험도에 대해 솔직하게 지적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가 이 같은 원전의 문제점에 대한 시각을 갖게 된 이유는 다른 교수와 달리 한수원에 근무했던 현장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전력부터 한국수력원자력까지 13년 동안을 근무한 적이 있기 때문에 현장에 대해 잘 안다”며 “원전 내의 실물들도 녹슨 것, 고장난 것, 특히 안전 기준에 미달했던 것들을 실제 많이 봐 왔다. 그래서 다른 교수들과 생각하는 게 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6년전 사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의 원자로 건물 외부 모습. 지난 2월27일 촬영. 원자로 건물 외부는 사고 당시처럼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고 지붕 쪽에서는 수소 폭발로 무너져 내린 지붕이 자갈 더미가 돼 남아 있다. 사진=연합뉴스
▲ 6년전 사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의 원자로 건물 외부 모습. 지난 2월27일 촬영. 원자로 건물 외부는 사고 당시처럼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고 지붕 쪽에서는 수소 폭발로 무너져 내린 지붕이 자갈 더미가 돼 남아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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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CIA요원 죽기 직전, 9.11은 자작극이라고 고백

미 CIA요원 죽기 직전, 9.11은 자작극이라고 고백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07/25 [09:2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017년 7월 13일 유어뉴스와이어의 CIA요원 하워드 씨의 9.11테러가 자작극이라는 고백 보도, http://yournewswire.com/cia-911-wtc7/     © 자주시보

 

16일 모 인터넷게시판에 미주동포 이인숙 논평가가 13일자 유어뉴스와이어(Your News Wire)의 CIA요원의 죽기 전 고백 보도를 소개하였다.(http://yournewswire.com/cia-911-wtc7/)

 

이인숙 논평가가 번역한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36년간 미국CIA에서 일해왔던 하워드 씨-Mr. Howard(79살)가 죽음을 몇 주일 앞두고 9.11에 있었던 건물 중 #7을 상관의 명령을 받고 자신이 직접 철거폭발을 했노라고 고백했다.

이 건물이 무너지는 데 겨우 30초 걸렸다. 그 건물이 무너질 때 사람도 다치지 않고 그들의 계획이 잘 성사되어 하워드와 그 동료들은 위스키를 마시고 담배를 피며 축하파티까지 했다. 

 

특히 이 건물은 World Trade Center#1, #2가 무너진 7시간 후에 무너졌는데 그시간은5:20pm이었다. 그런데 BBC 방송은 이 빌딩이 무너지기 20분 전에 방송하였다. BBC가 무너질 것을 미리 알고 방송했다는 것이다. 

 

하워드는 당시 그의 동료들과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진실을 알려고 할까 두려워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주류언론은 그 의혹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거들도 보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80층의 건물까지도 폭발할 수 있는 엔지니어 전문가인데 그는, 그 당시 애국자라면 더 좋은 것을 위해 정보부나 백악관에 질문하지 않고 거짓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니 뭔가 잘못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이런 엄청난 흑막을 공개하였다고 한다.

 

끝으로 하워드는 누가 이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말했는데 “전 세계에서 오직 하나있는 조직이다, 알카이에다는 절대 아니다” 라고 고백했다.-“There is only one organization that spans the entire world, and let me tell you now, it isn’t and it never was al-Qaeda.” 

 

 

 

9.11테러가 자자극이었다는 주장은 사건 당시부터 프랑스 기자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펜타곤에 뚫린 구멍이 항공기 형태의 구멍이 아니라 크루즈미사일 형태였으며 항공기 잔해는 발견된 것이 없다는 등 수도 없는 명백한 증거들이 나왔지만 미국과 세계의 주류 언론들은 이런 주장들을 근거 없는 음모설이라고 뭉개버리고 알카에다의 테러로 몰아갔다. 이는 이후 미국에 애국법이 만들어지고 아프간전쟁, 유고전쟁, 이라크전쟁 등이 줄줄이 벌어지는 핵심 명분이 되었다. 

 

9.11 테러는 2001년에 일어났다. 소련의 해체로 상대를 잃어버린 미국의 군산복합체 자본가들은 새로운 적을 만들어야 무기를 소모하고 돈을 벌 수 있었다. 미국의 관변학자들은 이데올로기의 충돌에서 ‘문명의 충돌’로 전환될 것이라는 요설들을 이미 몇 해 전부터 펴왔었다. 그리고 9.11이 터지고 미국은 신형 순항미사일 등을 선보이며 컴퓨터게임과 같은 전쟁을 중동과 유럽 곳곳에서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부시 정부는 중동을 정리하고 나면 북한도 무력으로 제압하려고 했었다. 부시는 그 명분이 바로 ‘악의 축’이라고 밝혔다. 그렇게 해서 소련과의 양극체제에서 미국 중심의 일극패권체제를 완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미국의 세계 일극패권을 위해 이라크, 유고, 아프간 등에서는 수백만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되었으며 지금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참혹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리비아, 시리아, 예멘 등에서는 지금도 전쟁의 포성이 계속 울려나오고 있다. 

 

어떻게 세계 지배를 위해, 무기를 팔아먹기 위해 이렇게 많은 인류를 죽일 수 있는가. 그것도 수천명의 자국민을 자작극 테러로 학살하여 만든 명분으로...

 

그이 미국이 북에게 핵만 포기하면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북이 과연 미국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한국 정부와 언론들도 오로지 미국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받아 외우며 북이 핵포기만 하면 번영을 누리게 해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인 인질을 구하기 위해 북을 직접 방문했던 제임스 클래퍼 전 미국정보국장은 ‘북은 미국이 완전한 안전담보를 해주지 않는 한 절대로 핵무장력 강화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핵동결도 주한미군철수, 평화협정체결과 같은 선물을 주지 않으면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하  싫지만 북의 핵무력 강화를 여기서 막기 위해서는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지난해 말부터 지속적으로 펴오고 있다. 

 

이는 미국의 패권붕괴를 의미한다. 그간 미국이 별별 조작을 다 해가며 구축한 일극패권이 북과의 대결전의 패배로 일거에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도 쉽게 클래퍼의 주장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며 북미 사이에 첨예한 대결전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북미대결전은 두 나라의 운명만이 아닌 세계의 운명이 걸린 대결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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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의 끝판왕, 죽은 자도 살려냈던 조선시대 ‘아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07/25 10:49
  • 수정일
    2017/07/25 10:4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더 강력해진 박원순표 공직쇄신안, 부정부패 뿌리 뽑을 수 있을까?’
 
임병도 | 2017-07-25 09:38:0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중 청백리는 단 218명에 불과할 정도로 조선시대는 부정부패가 심했다.

 

‘청백리’는 조선시대 청렴하고 강직한 신하를 뜻합니다. 의정부 및 사헌부, 사간원 등의 추천을 받아 임금의 결재를 받아 내리는 칭호입니다. 청백리는 후손들에게 벼슬을 할 수 있는 특전을 줄 만큼 명예롭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공무원에게 주는 상의 이름을 ‘청백리상’이라고 할 정도로 그 의미를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청백리로 인정받은 사람은 단 218명에 불과했습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조정에 청백리의 자손을 등용하라는 명은 있으나, 오직 뇌물을 쓰는 자들이 벼슬을 하고 청백리 자손들은 모두 초야에서 굶주려 죽고 만다’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왜 조선시대에는 청백리가 그토록 적었고, 뇌물과 비리를 저지른 자들이 많았을까요?


‘월급을 받지 않았던 조선시대 공무원’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관리를 ‘아전’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공무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엄밀히 따지면 정식 공무원보다는 대를 이어 지방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명예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앙관청에서 일하는 이들을 가리켜 ‘경아전’, 지방관아는 ‘외아전’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세금 징수나 지방의 잡무, 수령의 둔전을 관리하는 업무 등을 맡았습니다.

 

▲ 황구첨정, 백골징포 등의 폐단이 조선 시대에 만연했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군포나 공납의 폐단을 없애려고 했지만, 비리는 끊이지 않았다. ⓒ오늘의조선왕조실록 유튜브 화면 캡처

 

조선시대 지방행정이 부정부패로 얼룩진 이유 중의 하나가 아전입니다. 왜냐하면, 아전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아전’은 원래 녹봉이 지급됐지만, 나라에서 지급하지 않거나 생활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습니다. 지방 아전은 아예 월급 자체가 없었고, 오히려 관아에서 쓰는 비용 등을 자신의 돈으로 채워야 할 때가 잦았습니다. 고정적인 급여가 없다 보니, 아전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부정부패와 비리를 통해 모자란 급여를 대신했습니다.

아전의 비리가 제일 심한 것이 ‘세금 착복’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세금은 ‘군포’와 ‘공납’이 대표적입니다.

군대에 가야 하는 장정이 농사 등의 생계를 위해 일 년에 베 2필을 내면 ‘군역’을 면제해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전들은 성인이 되지 않은 어린이에게 군역을 물리는 ‘황구첨정’,이미 죽은 사람을 산 사람으로 둔갑해 군포를 물리는 ‘백골징포’, 군역을 피해 도망간 사람의 군포를 이웃이나 친척과 이웃에게 물리는 ‘족징’과 ‘인징’을 통해 세금을 착복했습니다.

공납은 원래 세금을 지방 특산물로 내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수확한 농산물이나 특산물 대신에 방납업자의 물건을 구입해 내도록 했습니다. 당연히 아전들은 상인과 짜고 시가보다 수십 배 비싼 물건을 사도록 했습니다. 당연히 아전은 상인으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겼습니다.

조선시대 세금을 거둬들이는 행정 실무를 맡은 아전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각종 세금을 착복하면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조정의 재정은 약해졌습니다.


‘양반까지 무시했던 아전의 권력’

 

▲조선시대 고을 관아의 모습. 수령과 아전이 서 있고 백성이 앉아 있다 ⓒ구글이미지

 

근래 아전의 풍속이 나날이 변하여 하찮은 아전이 길에서 만나도 절을 하지 않으려 한다. 아전의 아들, 손자로서 아전의 역을 맡지 않은 자가 고을 안의 양반을 대할 때 맞먹듯이 너나하며 자(字)를 부른다. (정약용, 목민심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보면 아전이 얼마나 위세가 높았는지, 중인 계급임에도 양반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전이 이토록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역 사정과 실무에 밝아 수령조차 함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령이 아전을 무시하면 태업이나 파업 등으로 수령을 골탕 먹이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지방 관아로 내려오는 수령은 지방 사정을 잘 몰라 아전에게 실무를 맡겼습니다. 아전들은 수령에게 뇌물을 바치고 뒤로 더 많은 세금을 빼돌려 자신들의 곳간을 채우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수령은 임기를 떠나면 그만이니, 백성들은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아전을 더 무서워했습니다.

요새도 공무원 사회에서 선출직 시장이나 도지사는 선거 때면 사라져도, 공무원은 평생 그 자리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담당 공무원의 입김에 따라 인허가 업무가 지연되느냐 마느냐를 놓고 본다면, 시민 입장에서는 시장보다는 오히려 말단 공무원이 더 껄끄럽습니다.


‘더 강력해진 박원순표 공직쇄신안, 부정부패 뿌리 뽑을 수 있을까?’

 

▲서울시가 발표한 서울시 공무원 부정비리 차단 종합대책 ⓒ라이브서울 화면 캡처

 

지난 7월 19일 서울시는 ‘부정비리 차단 6대 종합대책’을 발표했습니다. 동일 인‧허가 업무 5년 이상 담당 공무원의 전보 의무화로 부정부패를 사전 차단하는 등의 공직쇄신안을 담고 있습니다.

박원순 시장이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차단하겠다고 나선 이유가 있습니다. ‘박원순법’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최근에 버스업체의 노선 신설 조정과 증차 등과 관련해 서울시 도시교통본부 전‧현직 공무원이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박원순법 (서울시 공무원 행동강령): 서울시 공무원이 직무와 관계없이 단 돈 천 원만 받아도 중징계, 한 번만 걸려도 ‘원 스트라이크 아웃된다. 고위공직자와 가족 보유 재산이 직무와 관련이 있는지도 심사받는다.

과거보다 현저히 줄었지만, ‘김영란법’보다 더 강하다는 ‘박원순법’이 있음에도 서울시 공무원들의 비리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관련 업무를 맡았던 퇴직공무원이 현직 공무원에게 뇌물과 압력 등을 통해 비리를 저지르는 사례도 발생했습니다.

서울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현직 공무원이 퇴직 공무원과 골프, 사행성 오락, 여행, 행사 등의 사적 접촉을 제한하고, 만약 만났다면 서면보고를 의무화하는 내용으로 ‘박원순법’을 개정하기로 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근절하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마치 조선시대 아전처럼 실무에 밝은 공무원들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공무원들이 비리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이중,삼중의 감사 시스템을 구성하는 일입니다.

다행히 서울시는 이번에 안전, 토목, 소방, 수도 등 기술 감사 분야 전문가 21명으로 구성된 ‘시민감사자문단’과 시민들의 제보와 제안을 받을 수 있는 ‘시민 감사요청란’을 홈페이지에 개설할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지금은 조선시대 아전처럼 비리를 저지르는 공무원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퇴근하라고 해도 퇴근하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공무원도 많습니다.

문제는 소수의 비리 공무원 때문에 대다수 공무원이 더 힘들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런 면을 놓고 본다면 비리 공무원은 더 철저하게 처벌하고,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에게는 진급 등의 혜택을 줘야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아전들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방안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들이 부정부패를 발견하면 신고할 수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불법 민원이나 단순 불평불만이 아니라 서울시민 모두를 위한 정의로운 감시 활동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서울시도 이번 기회를 통해 법과 시스템을 한층 강화해 부정부패를 원천 차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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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38선 분단, 피할 수는 없었을까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⑬]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나간 원인

17.07.25 07:36l최종 업데이트 17.07.25 09:52l

 

 

 소련의 스탈린(가운데) 수상이 군함을 순시하고 있다.
▲  소련의 스탈린(가운데) 수상이 군함을 순시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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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원인

한국전쟁은 자유-공산 양측에 150만여 명 전사자와 360만여 명 부상자를 낳았다. 그리고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이 문명 세상에 이산가족들은 아직도 자유롭게 혈육을 만나지 못하는, 비인륜적 삶을 이어가고 있다. 3년 1개월 2일 17시간 동안 계속된 한국전쟁은 아마도 세계 전사(戰史)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더티(Dirty)한' 동족상잔의 잔혹한 전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했다. 50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에 어찌 그 원인(原因)이 없겠는가. 그래서 이번 회에서는 그 원인(遠因)을, 다음 회에서는 근인(近因)을 살펴보고자 한다. 
 

 1945. 9. 2. 일본 도쿄만. 미 미조리 호 함상에서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  1945. 9. 2. 일본 도쿄만. 미 미조리 호 함상에서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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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북 길이는 약 1000km요, 동서 너비는 약 300km요, 면적은 약 22만 ㎢다. 그 모양은 마치 쇠불알 같기도, 고구마 같기도 하다. 지구의를 보면, 한반도는 동북아시아 대륙에서 바다 쪽으로 좁다랗게 돌출한 지형으로 대륙과 해양을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곧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위치에서 서로 간 문물을 이어주는 거점이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예로부터 대륙의 세력이 남하하는 통로로, 해양세력이 북상하는 길목이 됐다. 한반도 백성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크고 작은 전쟁을 겪어야 했다.
 

  1945. 9. 9. 서울. 미군들이 중앙청 앞 시가지를 행진하자 연도의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  1945. 9. 9. 서울. 미군들이 중앙청 앞 시가지를 행진하자 연도의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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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해양 잇는 교두보, 한반도 

 

13세기인 1274년 몽고, 곧 원(元)나라는 고려를 그들의 말발굽 아래 무릎 꿇린 다음, 제1차 일본 원정에 이어 1281년 제2차 일본 원정에 나섰다. 당시 고려는 원의 일본 원정으로 본의 아니게 전쟁에 휩싸여 막대한 물적·인적 피해를 입었다. 

그로부터 두 세기 후인 1592년, 일본은 조선에 명(明)나라를 정벌하러 가고자 길을 열어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과 명은 형제지국 이상으로 섬기는 관계로, 외교 관계상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조선은 일본군이 한반도를 '게다짝'(나막신을 낮잡아 부르는 말)으로 짓밟고 지나가는 것을 묵과할 수 없기에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이 이를 트집 잡아 조선을 침략했다. 바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었다.

그 이후에도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조선 침략을 호시탐탐 노렸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1853년 개항 후 서양 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뤘다. 그러자 지난날 자신들에게 문물을 전수해준 이웃 조선을 가장 먼저 강탈하고자 덤벼들었다. 그러기 위해 일본은 1894년 조선 침략에 앞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이에 러시아가 간섭하고 나서자 다시 러일전쟁(1904)을 일으켜 승리를 거뒀다. 두 전쟁이 끝난 이후 그들은 한반도를 꿀꺽 삼켜버렸다.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다시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해 만주국을 세운 뒤 점차 중국대륙마저 야금야금 잠식해 갔다. 이에 미국·영국 등이 중국을 도우며 견제하자 일본은 1941년 12월에 이들 두 나라와도 선전포고해 마침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을 주축으로 하는 진영과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 진영의 대립 구도를 낳았다. 1945년 2월에는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에 앉아있는 미군대표들.
▲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에 앉아있는 미군대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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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9. 아베 조선총독(가운데)이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에서 미 진주군 앞에서 항복 선언하고 있다.
▲  1945. 9. 9. 아베 조선총독(가운데)이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에서 미 진주군 앞에서 항복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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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

그때 연합국의 지도자인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 세 거두는 크림반도 얄타에서 독일의 최종 패배와 그 점령지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을 개최했다. 그때 일본의 최후 항전에 고전하고 있던 미국의 루스벨트는 소련의 스탈린에게 독일 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전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이에 스탈린이 호응하자 연합국은 그 대가로 소련에 1904년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하고, 또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등의 협정을 맺었다. 

이에 소련은 그 협정에 따라 약속대로 1945년 8월 9일에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이로써 소련은 1945년 8월 12일 조선의 북부 해안에 상륙하게 됐다.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지 닷새 만에 일본은 항복했다.

소련은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북을 할양하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1945년 8월 14일 밤,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느닷없이 한반도 38도선 분할 제의 전문을 받은 것.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전대미문의 원자탄 위력에 놀란 나머지 이 제안을 앞뒤 생각 없이 덥석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한다. 

당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가운데 인적·물적 희생이 가장 컸던 나라로, 그 보상에 대한 가장 큰 지분을 가진 나라였다. 그런 소련은 한반도 전체가 아닌, 38도선 이북만을 분할받은 지 한참 지난 뒤에야 자신들의 보상이 매우 적었음을 깨닫고 절치부심했다. 

더욱이 한반도는 러시아가 이전부터 무척 탐냈던 부동항(不凍港)이 즐비한, 그들로서는 몽매에도 그리던 축복의 땅이 아닌가. 그래서 지난날 자신들보다 덩치가 한참 작은 일본과 한판 벌이다가 패배해 망신당하고, 일본의 조선 병탄을 멀뚱히 구경만 했다. 그들에게는 뼈아픈 전력이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이런 날을 대비해 자신들이 보호하고 있던 극동군 88여단 소속 항일연군 출신의 젊은 김일성 대위를 북한 지도자로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하여 언젠가 때가 되면 한반도 전체를 그들의 판도에 넣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북위 38도선
▲  북위 38도선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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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선, 북위 38도

역사에서 가정은 쓸데없는 공론이다. 만약 미국이 원자탄을 1개월 전 먼저 일본 열도에 떨어트려 일본의 패망이 한 달 앞서 발생했다면, 그때 소련은 대일전 참전 이전이기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 38선 이북을 소련에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해 한반도를 통째로 점령한 한두 달 뒤에 일본이 패망했다면, 한반도는 그대로 소련의 몫이 됐을 것이다. 

이로 미뤄볼 때 1945년 8월 15일, 그 시점에서 한반도의 38선 분단은 피할 수 없었던, 국제 강대국간의 땅따먹기 거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8선 분단은 당시 나약했던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치욕스러운 결정으로 두고두고 단장의 선이 됐다. 

그날 이후 현재까지도 그 분단은 겨레의 큰 아픔으로 지속되고 있다. 다음 회에서는 그 분단으로 촉발된 한국전쟁 발발 직접적 원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을 미군 측 카메라맨들이 
촬영하고 있다.
▲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을 미군 측 카메라맨들이 촬영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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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을 일본 측 카메라맨이 역사적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을 일본 측 카메라맨이 역사적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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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9. 서울. 서울역 광장에 입성한 미군이 장갑차 위에서 환영 인파에 답례로 손을 흔들고 있다.
▲  1945. 9. 9. 서울. 서울역 광장에 입성한 미군이 장갑차 위에서 환영 인파에 답례로 손을 흔들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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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9. 서울. 서울에 들어온 미군이 일본군 담뱃불을 빌려 불을 붙이고 있다.
▲  1945. 9. 9. 서울. 서울에 들어온 미군이 일본군 담뱃불을 빌려 불을 붙이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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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16. 한 미군이 “한국인은 미군을 환영한다”는 게시판을 바라보고 있다.
▲  1945. 9. 16. 한 미군이 “한국인은 미군을 환영한다”는 게시판을 바라보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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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28. 인천. 30년 전, 미국인 기술자의 손으로 건설한 인천항 도크에 미군 군함이 들어오고 있다.
▲  1945. 9. 28. 인천. 30년 전, 미국인 기술자의 손으로 건설한 인천항 도크에 미군 군함이 들어오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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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인천. 연합군 환영아치 앞에서 미 해군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1945. 9. 인천. 연합군 환영아치 앞에서 미 해군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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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10. 28. 서울. 서울에 진주한 미군들이 시장에서 물물교환을 하고 있다.
▲  1945. 10. 28. 서울. 서울에 진주한 미군들이 시장에서 물물교환을 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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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미국의 오판, 북한군 탱크에 '날개'를 달다

[리워드 안내]

<오마이뉴스> '좋은 기사 원고료'로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는 '한국전쟁 사진 2매'를 메일로 랜덤 전송합니다. 그 견본 이미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또 후원자 분들을 위해 기자의 저서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을 준비했습니다. 

종로에서 진행될 '박도 기자와의 차 한잔' 초대권과 강원도 횡성군에서 열릴 '작가와의 대화' 초대장도 리워드로 마련했습니다. 

<오마이뉴스> '좋은 기사 원고료'로 후원해주신 독자분들께서는 기자에게 쪽지로 성함과 우편물을 받을 주소,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워드 발송 기준은 스토리펀딩 기준과 동일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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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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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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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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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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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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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14형 출현 이후 돌출된 몇 가지 위험요인들

[개벽예감258] 화성-14형 출현 이후 돌출된 몇 가지 위험요인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7/07/24 [11:30]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불상용적이며 비타협적인 제2차 핵대결
2. 조선의 핵무력 완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백악관의 행동
4. 조선이 미국에 보내려는 두 번째 ‘선물보따리’

 

 

1. 불상용적이며 비타협적인 제2차 핵대결

 

조미핵대결에서 이기기 위해 조선이 만든 강력한 핵타격수단들 가운데 하나가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조선은 2017년 7월 4일 화성-14형 시험발사를 성공시킴으로써 조미핵대결을 조선의 승리와 미국의 패배로 종식시킬 최종단계로 끌어갔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화성-14형의 출현으로 조성된 새로운 국면이 양면적이라는 점이다. 양면적이라는 말은, 조선이 화성-14형 시험발사로 조미핵대결을 승리로 이끌 국면을 열어놓은 측면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쪽에서는 미국이 조선의 핵타격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압박강도를 더욱 끌어올리는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전자가 외교담판으로 나아가는 순리적 요인이라면, 후자는 무력충돌을 불러오는 위험한 요인이다. 나는 이전에 <자주시보>에 발표한 여러 글들에서 긍정적 측면을 논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부정적 측면을 논하려고 한다.

 

국제정치관점에서 바라보면, 조미핵대결을 발생시킨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적대관계다. 조선은 제국주의국가와 공존할 수 없고, 미국도 역시 사회주의국가와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조미핵대결이 끝난 뒤에도 사회주의조선과 아메리카제국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다. 물론 조미핵대결이 끝나면, 조미관계의 적대성이 일정한 수준으로 완화되겠지만, 적대관계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쌍방 사이에 그런 적대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미핵대결은 운명적이다. 피할 수도 없고, 비길 수도 없고, 중지할 수도 없으므로, 끝까지 싸워 반드시 어느 한 쪽이 이기고, 다른 한 쪽이 질 수밖에 없는 불상용적이며 비타협적인 대결이라는 점에서 운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 1>

 

▲ <사진 1> 위의 사진들은 2017년 7월 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성대히 진행된 대륙간탄도로케트시험발사성공 기념 음악무용종합공연 중에 무대 뒤에 설치된 대형 배경화면에 나타난 영상들이다. 위쪽 사진은 구름이 약간 덮힌 하늘 아래에 보이는 미국 본토를 촬영한 위성사진이고, 아래쪽 사진은 미국 본토가 핵타격을 받고 핵화염 속에 완전히 소멸되는 장면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두 가지 연속되는 장면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방영된 것은 조선이 화성-14형으로 미국을 멸망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미핵대결은 운명적인 대결이다. 피할 수도 없고, 비길 수도 없으고, 중지할 수도 없으므로, 끝까지 싸워 반드시 어느 한 쪽이 이기고, 다른 한 쪽이 질 수밖에 없는 불상용적이며 비타협적인 대결이다. 위의 영상들은 조미핵대결을 벌이는 조선의 적대감과 결전의지를 형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미핵대결을 발생시킨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적대관계를 역사적 경험에 투영하면, 1962년 10월 16일부터 28일까지 지속되었던 쿠바미사일위기가 부각된다. 그것은 사회주의진영과 제국주의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냉전시대에 사회주의소련과 아메리카제국이 맞붙은 핵대결이었다.

 

쿠바미사일위기를 일으킨 도발자는 미국이었다. 1962년 3월 미국은 100발이 넘는 주피터(Jupiter) 중거리탄도미사일들을 터키와 이탈리아의 미국군기지들에 전진배치하였다. 메가톤급 열핵탄두를 장착하고 2,400km를 날아가는 주피터 중거리탄도미사일을 터키와 이탈리아에서 쏘면 모스크바를 날려버릴 수 있었다. 모스크바가 미국의 핵타격사정권 안에 놓인 것이다.  

 

미국의 핵무력이 소련을 그처럼 직접적으로 위협하게 된 사태의 배경에는 핵무력의 불균형이 자리잡고 있었다. 1962년 당시 소련은 사거리가 10,000km 이상 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아직 갖지 못했으나, 미국은 1959년 10월 31일 사거리가 14,000km인 애틀러스(Atlas)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하였다. 사거리가 10,000km인 RT-2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소련에 처음 실전배치된 때는 1968년 12월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서 미국보다 10년이나 뒤졌을 뿐 아니라, 자기 수도권이 미국의 핵타격사정권 안에 놓이게 되자, 소련은 화급히 비상대책을 세워야 하였다. 그래서 소련은 1962년 8월에 R-12 중거리탄도미사일 6발과 R-14 중거리탄도미사일 3발을 쿠바에 전진배치하려고 미사일기지건설을 서둘렀다. 사거리가 2,000km인 R-12 중거리탄도미사일과 사거리가 4,500km인 R-14 중거리탄도미사일에는 각각 메가톤급 열핵탄두를 한 발씩 장착할 수 있었으므로, 워싱턴이 소련의 핵타격사정권 안에 놓이게 될 판이었고, 그로써 소련은 미국의 핵위협을 상쇄할 핵억제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쿠바에서 진행되던 소련의 미사일기지건설공사가 미국의 U-2 고고도정찰기에게 노출되자 미소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존 케네디(John F. Kennedy) 당시 미국 대통령은 긴급히 국가안보회의 집행위원회를 소집했는데, 거기서 아래와 같은 다섯 가지 선택방안들이 검토되었다.

 

(1) 미국에 대한 소련의 미사일위협은 새로운 위험이 아니므로 대응하지 않는다.
(2) 소련을 최대로 압박하여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하게 만든다.
(3) 쿠바 해상을 봉쇄한다.
(4) 소련이 쿠바에 건설하는 미사일기지들을 공중폭격으로 파괴한다.
(5) 쿠바와 비밀접촉을 하여 소련과 갈라서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이를 거부하면 무력침공으로 쿠바정권을 뒤집어엎고 쿠바를 점령한다.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선택방안들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조미핵대결을 종식시키기 위해 검토하였다는 선택방안들과 일치한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검토한 전략적 인내, 최대 압박, 해상봉쇄, 선제타격, 무력침공, 정권교체 등은 이미 55년 전에 나왔던 선택방안들이다.

 

그런데 당시 미국군 합동참모본부와 중앙정보국은 무력침공으로 쿠바를 점령하는 선택방안을 지지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까닭은 당시 혁명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던 쿠바의 군사력을 아주 얕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쿠바혁명군(FAR)에게는 미국의 무력침공을 막아낼 방어수단이 없었다. 또한 소련에서 쿠바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소련군이 쿠바에 도착하기 전에 미국군이 쿠바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무력침공으로 쿠바를 점령하는 경우, 소련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베를린을 침공하여 점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미국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동유럽전선에 강력한 지상군을 배치해둔 소련은 당시 동독 영토 안에 고립된 섬처럼 갇혀 있던 베를린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만일 미국이 쿠바를 점령하면, 소련은 베를린을 점령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핵전쟁을 동반하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고심을 거듭하던 케네디는 결국 소련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당시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려는 의사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핵전쟁을 동반하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쿠바를 감히 침공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소련이 지상군과 전략로케트군을 독일에 가까운 서부전선으로 증파하여 베를린을 점령할 것처럼 강하게 압박하였더라면, 미국은 겁을 먹고 쿠바 해상을 봉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겁쟁이 니키타 후르쇼브(Nikita S. Khrushchev)에게서 그런 담대한 공세전략을 기대할 수 없었고, 더욱이 제국주의와 타협한 변절자로 전락하였다는 비난을 받게 된 그에게는 최후결전도 불사하려는 공격정신이 전혀 없었다. 결국 소련이 미국의 협박에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미소핵대결은 12일 만에 끝났다.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제1차 핵대결에서 사회주의소련이 치욕스런 판정패를 당한 것이다.

 

55년 전에 벌어졌던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제1차 핵대결은 그처럼 사회주의소련의 판정패로 끝났지만, 오늘 벌어지고 있는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제2차 핵대결은 반대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회주의조선은 사회주의진영이 사라지는 바람에 전 세계가 아메리카제국의 일극지배체제로 끌려간 최악의 역경 속에서도 물러서거나 주저앉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독으로 아메리카제국에 맞서 1993년부터 24년 동안 비타협적인 핵대결을 계속해왔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7년 7월 4일 오전 화성-14형을 실은 8축16륜 발사대차가 미사일조립시설을 출발하여 발사지점으로 이동하는 장면이다. 발사대차 맨 뒤쪽에 있는, 차탄분리식 발사에 사용되는 발사판이 매우 크고 육중해 보인다. 조선은 사회주의진영이 사라지는 바람에 전 세계가 아메리카제국의 일극지배체제로 끌려간 최악의 역경 속에서도 물러서거나 주저앉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독으로 아메리카제국에 맞서 1993년부터 24년 동안 비타협적인 핵대결을 계속해왔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은 조미핵대결에서 조선의 승리를 예고하는 결정적인 전환계기로 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소련은 미국과 핵대결을 벌인 지 불과 12일 만에 판정패를 당했으나, 조선은 장장 24년 동안 미국과 치열한 핵대결을 벌이며 최후결전을 준비하였다. 미국과 끝까지 싸우지 못하고 12일 만에 서둘러 타협해버린 소련은 쿠바에 배치하려던 핵타격수단들을 철수하는 것으로 핵대결을 끝냈지만, 미국과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우려는 조선은 화성-14형을 시험발사하여 워싱턴을 핵타격사정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55년 전 제1차 핵대결에서 미국은 소련의 핵타격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쿠바 해상을 봉쇄함으로써 압박강도를 최고로 끌어올렸는데, 오늘도 그들은 조선의 핵타격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압박강도를 최고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런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감지되는데, 몇 가지 사례들을 열거할 수 있다.

 

2017년 6월 29일 미국 재무부는 조선이 핵무기 및 미사일프로그램을 포기할 때까지 최대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하면서, 조선과 거래하는 중국 단둥은행, 다롄국제해운, 중국 기업인 2명을 제재하였다. <아사히신붕> 2017년 7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조선과 거래하는 중국 기업들 및 개인들에 대한 독자제재범위를 더 확대하는 방침을 지난 7월 19일 워싱턴에서 진행된 미국-중국 포괄적 경제대화 중에 중국측에 통보했다고 한다. 이런 독자제재는 유엔안보리에서 대조선제재결의안을 채택하는 것이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힘들게 되자, 독자제재로 방향을 바꾸면서 대조선경제제재를 중국에까지 확장하여 조선에 대한 압박강도를 최고로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2017년 7월 21일 렉스 틸러슨(Rex W. Tillerson)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인의 조선방문을 전면 금지하는 행정명령서를 결재하였는데, 그 행정명령은 오는 8월 말부터 발효될 것이다. 미국 행정부가 미국인의 방문을 전면 금지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조선밖에 없다. 그들이 이런 강경조치를 발동한 것은 조선에 대한 압박강도를 최고로 끌어올리려고 하는 것이다.

 

조선에 대한 압박강도를 최고로 끌어올리면, 그에 맞서 싸우는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미핵대결이 전쟁으로 폭발할 위험은 임계점에 접근하고 있다.  

 


2. 조선의 핵무력 완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반도 정치상황에서 조미핵대결을 발생시킨 요인들을 살펴보면, 한국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미국과 그에 맞서 미국의 ‘남조선 강점’을 끝장내려는 조선 사이에 조성된 적대관계가 드러나 보인다. 한국이 ‘북한’을 자기 영토의 절반이라고 인정하는 것처럼, 조선도 ‘남조선’을 자기 영토의 절반라고 인정하는데,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미국군이 장기주둔하면서 자기 영토 절반을 점령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따라서 조선이 격렬히 비난하는 ‘미제의 남조선 강점’은 자기 영토의 절반을 아메리카제국에게 빼앗기고, 자기 주권을 심하게 침해당하는 사태로 조선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영토와 주권에 관한 문제는 타협하지 않는 법인데, 그런 점에서 조선도 결코 예외로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조선의 어법으로는 ‘미제의 남조선강점’이고, 나의 어법으로는 미국의 한국지배체제인 한미동맹을 강제로 해체하는 것이 조선이 추구하는 최대, 최상의 국가목표인 것이다. 그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선은 희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핵무력을 건설해왔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으로 핵무력을 완성한 목적이 거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조선이 말하는 핵무력 완성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첫째, 조선이 말하는 핵무력 완성이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핵공격력을 갖춘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화성-14형 시험발사가 성공한 것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강력한 핵공격력을 갖추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둘째, 조선이 말하는 핵무력 완성이란 핵공격을 받고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핵방호력을 갖춘 것이다. 6.25전쟁을 끝내지 못한 위태로운 정전상태에서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과 맞서 핵대결을 벌이는 조선에게 핵방호체계는 나라의 생사존망에 직결되는 문제다.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진 것처럼, 조선 각지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막대한 자금과 노력을 들여 건설해놓은 깊고, 넓고, 큰 지하방호시설들이 있다. 지하방호시설들을 전국적으로 건설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인민군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각계각층 인민들도 핵방호훈련을 전국적 범위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며 숙달해왔다. 그리하여 조선은 핵공격을 받고서도 살아남을 고도의 핵방호력을 가진, 전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로 될 수 있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7년 7월 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성대히 진행된 대륙간탄도로케트시험발사성공 기념 음악무용종합공연 중에서 무대 뒤 대형 배경화면에 펼쳐진 영상들 가운데 하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하미사일기지 차폐문 앞에 세워놓은 6축12륜 발사대차 곁에서 야전지휘관들과 담화하는 장면이다. 이 발사대차에는 화성-10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은폐포에 덮혀 실려있다. 지하미사일기지를 동굴식으로 건설하였고, 입구가 잘 은폐되어 있어서, 적국의 공중정찰에 노출되지 않는다. 조선은 규모와 양식과 사용목적이 다른 각종 핵방호시설들을 전국 도처에 수없이 건설해놓았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핵공격력과 핵방호력을 겸비함으로써 핵무력을 완성한 조선에게는 미국의 한국지배체제를 강제로 해체하는 일, 조선의 어법을 빌리면, ‘미제의 남조선강점’을 강제로 해체하는 일만 남았는데, 그것이 조선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이다. 그러므로 조선이 핵무력을 완성한 것은 ‘미제의 남조선강점’을 해체하는 조국통일대전이 임박하였음을 의미한다.

 

물론 조선은 핵무력을 보유하기 이전에도 조국통일대전을 준비하였지만, 핵무력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조국통일대전을 벌이면 미국의 핵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화성-14형이 출현한 이후 조선이 미국의 핵공격을 받을 위험은 사라졌다. 왜냐하면, 미국이 조선에게 핵공격을 감행하는 경우 조선은 미국 본토를 핵공격으로 파괴할 핵억제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구도 조선을 건드릴 수 없게 되었으며, 누구도 조선의 조국통일대전을 막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미국은 핵타격수단을 동원하는 대조선전쟁연습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3월과 4월 두 달 동안 ‘키리졸브-독수리’ 전쟁연습을 진행하면서 조선을 극도로 자극한 미국은 오는 8월 하순에 ‘을지프리덤가디언’ 전쟁연습을 진행하면서 조선을 더욱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

 

2017년 7월 22일 조섭 던포드(Joseph F. Dunford) 미국군 합참의장은 국가안보부문 관리들과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콜로라도주 애스펜(Aspen)에서 진행된 토론회에서 “북조선의 핵능력에 대응하여 군사적 선택방안을 가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은 (조선이) 핵무기를 콜로라도 덴버에 떨어뜨리는 능력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 임무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군사적 선택방안들을 개발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조선의 미국 본토 핵타격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군사전략을 개발하겠다는 뜻이며, 핵무력을 강화하여 조선의 핵무력에 맞서는 핵대결을 계속하겠다는 의사표명으로 해석된다.

 

던포드 합참의장의 그 발언은 조미핵대결이 더욱 격화되면서 정세가 험악해질 것임을 예고한 것인데, 정세가 그처럼 험악해지면 폭발임계점에 도달한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백악관의 행동

 

55년 전 쿠바미사일위기에서 경험한 것처럼, 국가지도자의 전략적 판단이 핵대결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렇다면 오늘 조선과 핵대결을 벌이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은 전략적 판단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워싱턴포스트> 2017년 7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여섯 달 동안 거짓말 또는 허튼 소리를 무려 836차례나 늘어놓았다고 한다. 이것은 거짓말 또는 허튼 소리를 매일 4.6차례씩 끊임없이 쏟아낸 것이다. 원래 워싱턴의 정객들은 ‘거짓말선수권대회’에서 상위권에 들어갈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말이 거짓말로 드러나 망신을 당하는 경우 거짓말을 자제하는데, 유독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말이 거짓말로 드러나 망신을 당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거짓말을 쏟아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그런 이상행동은 그가 측근들의 도움이 없이는 전략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정신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2017년 7월 5일 미국 언론보도에 따르면, 조선이 화성-14형을 시험발사한 7월 4일 오전(미국 동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긴급보고를 받고서도 골프장으로 떠났다고 한다. 화성-14형 시험발사에 관한 긴급보고를 받은 고위관리들은 화급히 백악관에 모여들어 장시간 대책회의를 네 차례나 연속 진행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은 버지니아주에 있는 골프장에 나가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NBC> 2017년 7월 4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20일 취임한 뒤 164일 동안 무려 35일을 골프장에서 보냈다고 한다.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골프에 미쳐 허송세월하는 거짓말쟁이 대통령이 조미핵대결에 대처하는 전략적 판단을 제대로 할 리 만무하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를 맞으며 골프를 치고 있는 장면이다. 그는 골프에 미친 사람이다. 지난 1월 20일 취임한 뒤 164일 동안 무려 35일을 골프장에서 보냈다. 조선이 화성-14형을 시험발사하였던 7월 4일에도 그는 골프장에 나타났다. 화성-14형 시험발사에 관한 긴급보고를 받은 고위관리들은 화급히 백악관에 모여들어 장시간 대책회의를 네 차례나 진행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은 버지니아 골프장에서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었다. 골프에 미쳐 허송세월하는 거짓말쟁이 대통령이 조미핵대결에 대처하는 전략적 판단을 제대로 할 리 만무하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미국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2017년 6월 25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MSNBC> 단독대담에 출연한 마이크 팜페오(Mike R. Pompeo) 중앙정보국장의 말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머릿속은 조선의 ‘핵문제’로 가득 차 있으며, 미국의 국가안보위험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백악관으로 불러 조선의 동향에 관해 묻고, 미국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묻는다고 한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대조선정보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른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 맏사위인 재럿 쿠쉬너(Jared C. Kushner) 백악관 선임고문의 조언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정책결정을 내리고 있다. 예를 들면, 트럼프 대통령은 쿠쉬너 선임고문의 조언과 막후협상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자신의 사저로 초청한 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쿠쉬너 선임고문에게 특명을 주고 이라크에 파견하여 중동정책을 결정하게 하였고, 쿠쉬너 선임고문에게 특명을 주어 미국과 러시아의 비밀연락통로를 개설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2017년 5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2016년 12월 초 쿠쉬너 선임고문은 뉴욕 맨해튼에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저 ‘트럼프 타워’에서 쎄르게이 키슬략(Sergey Kislyak) 워싱턴 주재 러시아 대사와 만났을 때, 러시아 대사관 또는 러시아 영사관의 통신체계를 이용하여 백악관과 크레믈린을 직접 연결하는 비밀연락통로를 개설하자고 제안하였는데, 그 제안을 받은 키슬략 대사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도청의 본산’으로 악명 높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워싱턴 주재 러시아 대사관과 크레믈린 사이의 통신을 도청하는 바람에 그 제안은 실행되지 못하였지만, 백악관과 크레믈린 사이에 비밀연락통로를 개설하자는 제안은 트럼프 대통령이 쿠쉬너 선임고문에게 국가안보부문에서 가장 민감한 비밀외교임무까지 맡겼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진 5>

 

▲ <사진 5> 재럿 쿠쉬너는 트럼프 대통령의 맏사위이며, 백악관 선임고문이다. 그는 정통파 유대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쿠쉬너 선임고문의 조언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정책결정을 내리고 있다. 그는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막후실권자다. 그래서 미국 언론매체는 그를 '만사장관'이라고 불렀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정운영 전반을 총괄하는 장관 중의 장관이라는 뜻이다. 만일 트럼프 대통령이 조선과의 협상을 시작한다면, 쿠쉬너 선임고문을 그 협상에 파견할 것으로 예견된다. 쿠쉬너 선임고문은 조선에 대해, 조미핵대결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막후실권자인 그는 언제나 막 뒤에서 조용히 움직이므로, 그의 견해가 언론에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화성-14형이 출현한 이후 백악관이 펼치는 대조선행동은 쿠쉬너 선임고문이 정세를 오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처럼 트럼프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쿠쉬너 선임고문은 대통령을 움직이는 막후실권자다. 그래서 미국 텔레비전방송 <CNN>은 2017년 4월 3일 보도기사에서 쿠쉬너 선임고문을 ‘만사장관(Secretary of Everything)’이라고 불렀다. 이 이상한 별칭은 트럼프 행정부의 국정운영 전반을 총괄하는 장관 중의 장관이라는 뜻이다. 미국의 언론매체 <인포워즈(INFOWARS)> 2017년 4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의 국정운영을 사실상 좌우하는 쿠쉬너 선임고문의 “독판치기(one-man show)”를 바라보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관리들, 국방부 관리들, 국무부 관리들은 불만과 좌절감을 느낀다고 한다.

 

위에 서술한 몇 가지 사실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중앙정보국의 대조선정보판단과 쿠쉬너 선임고문의 조언에 의존하여 조미핵대결에 대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중앙정보국의 대조선정보판단이나 쿠쉬너 선임고문의 조언이 정확한가 하는 것이다. 비밀활동을 벌이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대조선정보판단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는 길은 없으며, 쿠쉬너 선임고문도 자기 견해를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 터라, 그의 생각과 행동이 외부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화성-14형이 출현한 이후 백악관의 대조선행동은 그들이 정세를 오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백악관이 압박강도를 최고로 끌어올려 조선을 압박하면 조선이 굴복할지도 모른다는 정세오판에 빠지는 것은 대파국을 자초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멸요인으로 될 것이다.

 


4. 조선이 미국에 보내려는 두 번째 ‘선물보따리’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7년 7월 4일 화성-14형 시험발사를 현지지도하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오늘 우리의 전략적 선택을 눈여겨보았을 미국놈들이 매우 불쾌해 하였을 것이라고, <독립절>에 우리에게서 받은 <선물보따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할 것 같은데 앞으로 심심치 않게 크고 작은 <선물보따리>들을 자주 보내주자고 호탕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미국에 크고 작은 선물보따리들을 자주 보낸다는 말은, 각종 핵타격수단들을 동원하는 전략적 핵압박공세를 연발적으로 펼쳐간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중거리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 그런 핵타격수단들이다.

 

대조선군사정보를 다루는 미국 정부 관리 두 사람이 전해준 말을 인용한 <CNN> 2017년 7월 19일 보도기사는 조선이 그 3종의 핵타격수단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앞으로 2주 안에 시험발사할 준비에 착수하였다는 사실을 전해주었다. 그 보도에 따르면, 최근 미국 정찰위성들은 조선의 미사일발사통제시설들 또는 미사일부품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시험하는 것을 보여주는 “위성배치레이더방출(satellite-based radar emissions)”을 탐지하였다고 한다. 위성배치레이더방출이라는 말은 인공위성에 장착된 레이더가 지상으로 전파를 발신한다는 뜻인데, 놀랍게도, 이 짤막한 보도문장은 위성배치레이더, 미사일발사통제소, 미사일을 서로 연결하는 최첨단 미사일체계가 조선에 존재한다는 정보를 전해주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러시아의 위성항법체계인 ‘글로나쓰(GLONASS)’를 사용하는 일반적인 위성항법장치가 조선의 미사일들에 장착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다. 위의 보도기사를 고찰하면, 조선의 미사일발사통제소는 광명성-3호와 광명성-4호에 각각 장착된 레이더들이 발신하는 전파를 수신하여 비행 중인 미사일을 향해 발신하고, 미사일은 그 전파를 수신하여 자기의 비행방향을 수시로 보정하는 위성항법체계가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위성항법체계는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중거리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에 장착된 위성항법장치와 연계된 것인데, 그런 위성항법장치를 장착한 조선의 탄도미사일들이 정밀타격능력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2017년 7월 17일 <자주시보>에 실린 ‘화성-14형은 “세계가 알지 못하고, 흉내 낼 수도 없는 새로운 전략무기인가?”’라는 글에서 화성-14형이 초토화타격능력과 초정밀타격능력을 완전무결하게 겸비한 스크램젯추진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는 사실을 논하였는데, 이번에 미국 언론보도가 그 사실을 뒷받침해줄 증거를 준 것이다. <사진 6>

 

▲ <사진 3> 이 사진은 2017년 7월 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성대히 진행된 대륙간탄도로케트시험발사성공 기념 음악무용종합공연 중에서 무대 뒤 대형 배경화면에 펼쳐진 영상들 가운데 하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하미사일기지 차폐문 앞에 세워놓은 6축12륜 발사대차 곁에서 야전지휘관들과 담화하는 장면이다. 이 발사대차에는 화성-10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은폐포에 덮혀 실려있다. 지하미사일기지를 동굴식으로 건설하였고, 입구가 잘 은폐되어 있어서, 적국의 공중정찰에 노출되지 않는다. 조선은 규모와 양식과 사용목적이 다른 각종 핵방호시설들을 전국 도처에 수없이<사진 6> 위쪽 사진은 평양에 있는 3대혁명전시관에 전시된, 지구궤도를 따라 선회하는 광명성-4호 모형의 우주비행장면이고, 아래쪽 사진은 거기에 전시된 광명성-4호 모형의 일부를 촬영한 것이다. 광명성-4호는 지구관측위성이라고 하지만, 다목적위성이라는 사실이 이번에 미국 언론보도를 통해 밝혀졌다. 조선의 미사일발사통제소는 광명성-3호와 광명성-4호에 각각 장착된 레이더들이 발신하는 전파를 수신하여 비행 중인 미사일을 향해 발신하고, 미사일은 그 전파를 수신하여 자기의 비행방향을 수시로 보정하는 위성항법체계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 위성항법체계는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중거리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에 장착된 위성항법장치와 연계되는 것이다. 그런 위성항법장치를 장착한 조선의 탄도미사일들이 정밀타격능력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이치다. 건설해놓았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조선이 최근 그런 자기의 위성항법체계를 시험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조선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중거리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쏘아올리는 시험발사가 임박하였음을 말해준다. 

 

<CNN> 보도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찰위성들은 조선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중요한 부분(critical component)”을 시험하는 정황과 조선의 잠수함 한 척이 동해에서 “평소와 다른 배치활동(unusual deployment activity)”을 전개하는 정황을 각각 순차적으로 탐지하였다는 것이다.

 

첫째, 그 보도에 따르면, 조선은 함경남도 신포조선소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중요한 부분을 시험했다고 한다. 2017년 7월 20일 <38 노스(North)>에 실린, 상업위성사진을 분석한 기사에 따르면, 신포조선소의 지상사출시험장에서는 2016년 8월 이후 아무런 움직임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중요한 부분을 시험했다는 말은 지상사출시험을 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중요한 부분을 시험했다는 말은 위에서 언급한 위성항법장치를 시험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둘째,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조선은 신포조선소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중요한 부분을 시험한 날로부터 며칠 뒤에 로미오급 잠수함 한 척을 동해안에서 약 100km 떨어진 공해로 출동시켰는데, 그 잠수함은 그 해역에서 이틀 동안 머물며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 당국자의 말을 인용한 <아사히신붕> 2017년 7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그 잠수함은 약 1주일 동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그 잠수함의 활동이 앞으로 더 계속될 수도 있다. <사진 7>

 

▲ <사진 7> 조선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북극성-1 동체표면을 촬영한 사진을 확대하면, 멀리서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특이한 표면처리공법이 시야에 들어온다. 알루미늄 동체표면에 가는 실을 매우 촘촘하게 감아놓은 모양인데, 이것을 섬유강화성형(FRP)라고 하고, 그런 성형공법을 섬유실감기공법(FWM)이라 한다. 미사일동체표면을 섬유강화성형공법으로 처리하는 까닭은, 그렇게 하면 표면강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조선이 거기에 사용하는 섬유실이 어떤 소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기술을 다 적용하여 탄도미사일을 튼튼하고 우수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미국과 일본에서 나온 언론보도들에 따르면, 조선은 동해에서 북극성-1 시험발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언론매체는 조선이 앞으로 2주 안에 북극성-1을 시험발사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이번에는 어떤 '묘기'를 보일지 기대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 보도에 따르면, 평소에 조선의 잠수함들은 해안에서 가까운 연안수역에 머물며 활동하였는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약 100km 떨어진 공해로 나가 활동하였으므로, “평소와 다른 배치활동”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미국 정찰위성은 조선의 잠수함들이 수심 깊은 바다 속으로 내려가 잠항하기 때문에 평소에 어느 해역으로, 몇 척이 출동하는지 탐지하지 못하고, 해수면 위로 떠올라 항해하는 경우에만 탐지할 수 있다. 조선의 잠수함이 잠항하지 않고 1주일 동안이나 해수면 위로 떠올라 활동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다.

 

신포조선소에서 위성항법체계를 시험한 뒤에, 공해로 출동한 로미오급 잠수함이 1주일 동안 해수면에서 활동하였다고 하니, 북극성-1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초정밀타격능력을 판정하는 시험발사를 준비하는 수중작업을 하였던 것일까? <CNN> 보도기사만 읽어봐서는 구체적인 정황을 알 수 없지만, 조선이 앞으로 2주 안에 북극성-1의 초정밀타격능력을 판정하는 시험발사를 진행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2017년 7월 22일 중국 홍콩의 언론매체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존 리처드슨(John M. Richardson) 미국 해군 참모총장은 지난 7월 20일 선진룽(沈金龍) 중국 해군 사령원과 영상통화를 하면서 조선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진행하는 경우 그에 관한 정보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고 한다. 중국이 받아주지도 않을 요청을 보낸 것을 보면, 조선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예견하는 미국이 얼마나 다급한 처지에 빠졌는지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한 압박강도를 최대로 끌어올리며 정세를 악화시키는 백악관의 무분별한 행동에 격분한 조선은 전략적 핵압박공세를 연발적으로 단행하면서 백악관을 더 심각한 공포에 몰아넣을 것으로 예견된다. 조미핵대결이 최종단계로 들어선 오늘의 유동적인 정세는 위험계선으로 다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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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마피아, 침소봉대로 '밥그릇 지키기' 하나?

 
[기고]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은 매우 더디다
 
 
 
 
 
 
 
 
 
 
 
 
 
 
 
 
 
 
 
 
 
 
 
 
 
 
 
 
 
 
 
 
 
 
 
 
 
 
 
 
 
 
 
 
 
2017.07.24 09:23:47
 
 
 
후보 시절 40년 후 원전 제로 국가로의 탈원전 로드맵을 마련하겠다고 주장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1일 <한겨레>에 의하면, "현재 건설 중인 것만으로 원전은 2079년까지 가동된다. 앞으로 60여년 서서히 줄여나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이는 2019년 2월 가동 예정으로 현재 건설 중인 신한울 2호기의 수명이 60년임을 고려한 것일 텐데,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로드맵이 국내 원전의 현실 상황을 반영할 것임을 나타낸다.
 
5월 10일 문재인 정부 출범이래, 국내 원자력계는 관련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6월 2일과 7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했다. 일부 보수 언론 및 경제지 그리고 일부 야당 등도 이들에 편승하여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거세게 비난해오고 있다.  
 
<조선일보>에 의하면, 전국원자력대학생연합이 지난 2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면서 반대 운동을 선언했다. 이들은 마치 당장이라도 원전이 멈추고, 원자력산업이 끝날 것 같은 자세로 원자력 사수를 위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실상은 어떤가? 
 
지난 19일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발표한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은 탈원전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탈원전 로드맵 수립) 원전 신규 건설계획(추가 6기) 백지화, 노후 원전 수명 연장 금지 등 단계적 원전 감축계획을 전력수급 기본계획 등에 반영" 
 
현재 건설 중인 신고리 4호기, 신한울 1, 2호기가 예정대로 2017년, 2018년, 2019년 각각 준공되고, 신고리 5, 6호기는 미정 상태에서 그 이후 후속호기는 도입되지 않는다고 가정하여 본인이 추정한 국내 원자력발전의 전망은 표 1 및 그림 1과 같다. 
 
표 1 및 그림 1에서 1 GWe(1GWe=100만kWe, 예를 들어 신고리 1,2호기는 전기출력 100만kW급이다.) 전기출력의 경수로의 수명은 40년, 1.4 GWe 전기출력의 APR 1400 경수로의 수명은 60년, 월성 1호기 수명은 40년, 나머지 월성 2-4호기 수명은 30년을 가정하였다. 
 
표 1. 국내 원자력발전 전망 추정 (단위: GWe) 
 
그림 1. 국내 원자력발전 전망 추정 
 
 
신고리 5,6호기를 취소하더라도 현재 건설중인 원전으로 국내 원자력발전 규모는 증가하여 2019년에 26.7GWe에 이르며 2022년부터 감소한다. 신고리 5,6호기를 건설하게 되면 국내 원자력발전 규모는 더 증가하여 2022년에 28.9 GWe에 이르며 그 이후 감소한다.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국내 원자력발전은 앞으로도 수십 년간 어느 정도 비중 있는 발전원으로 남아 있을 예정이다.  
 
결론적으로 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원전 운영을 2080년경까지 지속시키는 더디고 더딘 정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당장이라도 원자력산업이 끝날 것처럼 침소봉대하며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난하는 국내 원자력계의 현 작태는 자기의 큰 밥그릇 지키기 싸움과 무엇이 다른가. 
 
재미 핵물리학자인 강정민 박사는 전세계 240만 명이 회원으로 있는 비영리 환경단체 연합인 NRDC(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 천연자원방어위원회) 선임연구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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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뉴스를 소비하는 많은 이용자들 상당수가 뉴스를 생산한 매체 브랜드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온라인 뉴스 유통 방식의 탓도 있겠지만, 대동소이한 뉴스를 남발하는 매체도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은 독립·대안언론의 저널리즘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저널리즘에 부합하는 기사에 한해 제안 드립니다. 이 기사에 자발적 구독료를 내주신다면, 프레시안의 언론 노동자, 콘텐츠에 기여하는 각계 전문가의 노고에 정당한 보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쓰겠습니다. 프레시안이 한국 사회에 필요한 언론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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