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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하철 미화원들이 의식화 되었습니다

부산지하철 미화원들이 의식화 되었습니다
 
 
 
김욱 | 2016-02-02 08:56:5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부산지하철 미화원 노동자들이 바뀌기 시작한 건 7년 전이다. 그 전에도 노동조합이 있기는 했지만 미화원 노조의 활동이 본격화 되기 시작한 건 부산지하철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서비스지부로 편입되면서부터다.

그러나 당시의 변화엔 한계가 있었다. 스스로 상황을 돌파하면서 만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비스지부의 출범은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의 비정규직사업에 힘입은 바가 컸다. 미화원 노조 자체의 투쟁력이나 조직력은 아직 탄탄하지 못했다.

정규직 노조와 함께 한다는 기대가 컸지만 그만큼 위기의식을 느낀 용역업체의 견제도 심했다. 서비스지부의 투쟁에 대한 사측(용역업체)의 압박이 점점 세졌고 이를 견디지 못한 미화원들이 노조를 탈퇴했다. 그 때문에 조합원 가입자 수가 서비스지부 출범 때보다 오히려 줄어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소득이 없지 않았다. 서비스지부가 단련되었다. 미화원 노동자들의 처우가 일부 개선되면서 조합의 필요성을 조합원들 스스로 깨닫게 되었고 여러 투쟁을 겪으면서 서비스지부에 맞는 운영과 투쟁 방식도 터득했다.

서비스지부가 처음으로 자신들의 힘을 실감한 것은 선거였다. 부산에서 가장 크고 활발한 노조라는 부산지하철노동조합위원장을 뽑는데 자신들의 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부산지하철노동조합위원장 선거는 보통 100표 내의 차이로 결정되는데 서비스지부 조합원은 300명이 넘었다. 표를 얻기 위해 고개 숙이는 정규직 노조위원장 후보들을 보고서야 자신들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서비스지부가 그냥 노조에 곁불이나 쬐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간의 단련과 자각이 힘을 발휘하면서 서비스지부는 지난 투쟁에서 몇차례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중에서 출퇴근 차비 확보 투쟁에서의 승리는 조합원들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준 쾌거였다.

지난해까지 미화원들은 지하철에 출퇴근하면서 차비를 내고 다녔다. 만약 차비를 내지 않고 출퇴근하다 발각되면 일반인처럼 30배의 과태료를 물어야 했다. 돈이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였다. 자신이 일하는 작업장에 돈을 내고 다니는 것에 서비스지부 조합원들은 서러움마저 느꼈다. 지난 12월 서비스지부의 출퇴근 차비 확보 투쟁이 전국적 이슈화에 성공하면서 이 문제는 즉각 해결되었다.

부산지하철 미화원 31년만에 출퇴근용 승차권 받는다

이제 서비스지부 조합원들은 예전의 그 조합원들이 아니다. 선거를 통해, 투쟁을 통해 자신들에게 힘이 있다는 것과 그 힘을 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7년 동안 이어져온 사측의 탄압에도 단련되었다.

한마디로 ‘의식화’된 것이다. 주어진대로 생각하고 시키는대로 따르면 그대로지만 의식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면 자신의 노동조건과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의식화된 미화원 노동자들은 이제 거칠 것이 없다. 힘이 없는 게 아니었다. 힘이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자신들에게 힘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힘을 쓰면 된다.

▲부산과 대구를 제외하고 다른 지하철은 정부 권고대로 미화원들에게 시중노임단가를 주고 있다. 최저임금 시급은 6천 원대이고 시중노임단가는 8천 원대다.

부산지하철 미화원들은 최저임금만을 받는다. 그 이상 절대 넘지 않는다. 고로 부산지하철 미화원들의 임금을 결정하는 건 최저임금위원회다.

이게 얼마나 모욕적인 상황인가? 부산지하철 사측은 미화원들의 적정임금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이다. 이건 부산지하철 미화원들은 최저임금을 받아도 당연하다는 말과 다름없다. 최저임금은 법적 하한선이지 적정임금이 아닌데 말이다.

서비스지부 조합원들은 서울, 인천, 광주가 시중노임단가를 받는데 자신들은 최저임금을 받고 있는 이유를 안다. 그건 노사의 문제를 벗어난 정치의 문제다. 부산지하철만을 상대해선 결코 풀릴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부산시 민원실에 들어서는 서비스지부 조합원

자신들에게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의식화된 서비스지부 조합원들에게 이제 넘어서지 못할 벽은 없다. 지부장은 부산시장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조합원들은 시내 곳곳에서 일인시위를 펼치고 있다.

50대 이상의 아주머니가 대부분인 서비스지부 조합원이 부산 곳곳에서 만드는 일인시위 모습은 부산시민에겐 낯선 풍경이다. 눈길을 돌리게 하는 그 낯선 풍경이 또 다른 의식화의 씨를 심어주게 될 수 있다. 서비스지부 조합원들의 의식화는 그래서 그 어떤 의식화보다 가치가 있어 보인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0&table=wook_kim&uid=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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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위성발사가 임박했다고 말하는가?

[개벽예감190] 누가 위성발사가 임박했다고 말하는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6/02/01 [10:19]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흰색 가림막 쳐놓은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
2. 위성은 하늘문이 열리는 시간에 발사된다
3. 경비와 노력을 소모하는 어리석은 탐지작전
4. 별지도 보면서 전천후 지구관측위성 쏘아올린다
5. 사드기동군 전진배치해도 수도피폭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사진 1> 위의 사진은 2015년 9월 미국의 인터넷언론매체 에 실린 상업위성사진인데, 촬영날짜는 2015년 9월 6일이다. 위의 위성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이동식 전이구조물(Movable Transfer Structure)'에 흰색 가림막을 쳐놓은 것이 보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1. 흰색 가림막 쳐놓은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

 

일본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교도통신> 2016년 1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최근 며칠 동안 조선의 서해위성발사장을 촬영한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 위성발사를 준비하는 조짐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같은 날 일본 텔레비전방송 <NHK>의 보도에 따르면, 서해위성발사장에 있는 발사대에 거대한 흰색 가림막이 덮여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발사대라는 것은 위성발사탑이 아니라, 위성발사탑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movable transfer structure)을 뜻한다.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 안에서 3단 로켓을 조립하여 세우고, 거기에 위성을 탑재한 다음, 그 구조물을 두 줄기 궤도로 이동시켜 150m 떨어진 위성발사탑에 가닿게 하여 위성운반추진체를 위성발사탑으로 옮겨 세우고 나면, 추진연료를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정보기관 당국자의 추산을 인용한 <조선일보> 2012년 3월 31일 보도에 따르면, 현대화된 서해위성발사장의 각종 시설들을 건설하는 데 8억5천만 달러가 들었을 것으로 추산된다는데,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이야말로 서해위성발사장에 도입된 여러 현대화된 시설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을만하다.


외신들은 서해위성발사장의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 안에서 진행되는 작업상황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으려고 최근에 흰색 가림막을 쳐놓은 것처럼 보도하였지만, 그 가림막은 최근에 설치된 게 아니라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원래부터 거기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1년 365일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은 자국의 정보수집위성이 조선의 서해위성발사장을 촬영한 영상자료를 분석하면서 위성발사징후를 확인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징후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최근 미국과 일본에서 나온, 서해위성발사장에 관한 외신보도들에서 언급한 위성발사징후들은 위성발사탑 주변에 쌓였던 눈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 그리고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차량왕래가 잦아지고 현장작업인원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 <사진 2> 서해위성발사장을 촬영한 위성사진을 보면,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을 최종조립공장에 붙여놓고 3단 추진체를 조립한 뒤에 그 구조물을 위성발사탑으로 이동시키게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사진은 2012년 12월 20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기록영화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령도밑에 인공지구위성 <광명성-3>호 2호기 성과적으로 발사'에 나오는 한 장면인데, 당시에는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이 없었기 때문에 은하-3호를 최종조립공장 안에서 옆으로 눕혀놓고 조립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중앙일보> 2016년 1월 29일 보도기사에서 한국 정보기관 당국자는 2016년 1월 29일 현재 서해위성발사장 위성발사탑 인근에 있는 최종조립공장에서 위성운반추진체가 조립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서해위성발사장을 촬영한 위성사진을 보면,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을 최종조립공장에 붙여놓고 3단 추진체를 조립한 뒤에 그 구조물을 위성발사탑으로 이동시키게 되어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지적한 대로 지금 최종조립공장에서 위성운반추진체가 조립되고 있다면, 최종조립공장에 붙여놓은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 안에서도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므로 위성발사가 임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진 2>


하지만 옅은 파란색 지붕을 씌운 최종조립공장과 흰색 가림막을 쳐놓은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 안에서 위성운반추진체가 조립되고 있는지 외부에서 확인할 길은 없다. 위성운반추진체를 조립하려면, 조립작업에 요구되는 각종 설비와 물품을 실은 수송열차와 수송차량들이 서해위성발사장으로 분주히 들락날락해야 하는데, 아직 그런 분주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므로 위성운반추진체가 조립되고 있다는 한국 정보당국자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그는 왜 사실과 다른 말을 언론매체에 전해준 것일까?

 

▲ <사진 3>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에 세워진 위성운반추진체를 150m 궤도를 따라 이동시켜 위성발사탑에 옮겨 세우면 1단 추진체와 2단 추진체에 액체연료를 주입하는 공정이 시작된다. 위의 사진은 2012년 12월 조선의 기술자들이 서해위성발사장 위성발사탑에 수직으로 세워진 은하-3호 1단 추진체 곁에서 작업하는 모습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2. 위성은 하늘문이 열리는 시간에 발사된다


외신들은 현대화된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위성발사준비를 매우 짧은 기간에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보도했는데, 그런 보도내용은 사실과 부합한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조선이 제작한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추진체는 1단 추진체와 2단 추진체에 각각 액체연료를 주입하고, 3단 추진체에는 고체연료를 장입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에 세워진 위성운반추진체를 150m 이동시켜 위성발사탑에 옮겨 세우면 1단 추진체와 2단 추진체에 액체연료를 주입하는 공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진 3>


둘째, 액체연료는 자동화된 시설에서 주입된다. 이를테면, 연료수송차량들이 위성발사탑 인근에 있는 지하화된 연료주입시설 안으로 들어가 연료주입기에 액체연료를 공급하면, 그 연료주입기가 도관과 케이블을 통해 1단 추진체와 2단 추진체에 액체연료를 자동적으로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연료주입시설이 이처럼 지하화, 자동화되었기 때문에 서해위성발사장을 공중에서 정탐하는 미국의 정찰위성과 일본의 정보수집위성이 연료주입여부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연료주입시간도 매우 짧아져 연료주입을 24시간 만에 신속히 끝낼 수 있다. 이 현대화된 연료주입시설이 건설되기 전에는 연료주입에 사흘이나 걸렸다. 


셋째, 위성운반추진체에 주입되는 액체연료는 추진연료와 시동연료로 구분된다. 추진연료는 위성운반추진체를 지구중력에서 벗어난 지구궤도로 밀어올릴 때 사용되는 것이고, 시동연료는 발사순간에 로켓엔진을 점화할 때 사용되는 것이다. 추진연료는 발사시각보다 48시간 앞서 주입되고, 시동연료는 발사시각보다 24시간 앞서 주입된다.


넷째, 위성은 추진체 내부에 장입된 각종 전자장치들에서 정전기가 발생하여 오작동을 일으킬 위험을 피하기 위해 습도가 낮고 바람이 적게 부는 시각을 택하여 발사하게 된다. 이런 기상조건을 고려하여 발사시각을 먼저 정한 다음, 발사시각보다 24시간 앞서 마지막으로 시동연료를 주입하는 것이다.


넷째, 무릇 인공위성은 하늘문이 열리는 시간에 발사된다. 하늘문이 열리는 시간이란 위성이 태양에너지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만일 지구궤도에 진입한 위성이 지구 그림자 속에서 비행하게 되어 태양에너지를 받을 수 없게 되면 자기 안에 장입된 축전지의 전기를 너무 많이 소모하여 운행수명이 짧아지기 때문에, 태양에너지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시간에 맞춰 발사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몇 가지 사정을 살펴보면,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이 이동하여 위성운반추진체를 위성발사탑에 옮겨 세워놓은 시각으로부터 48시간 뒤에 발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위성운반추진체가 위성발사탑에 세워진 때로부터 이틀 뒤에 발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위성운반추진체가 위성발사탑에 세워졌더라도 그것을 어느 시각에 쏘아올릴 것인지는 외부에서 알 수 없다. 이를테면, 2012년 12월 12일 조선이 지구관측위성을 발사하였을 때도, 미국 정부 고위관계자는 조선이 위성을 발사하려면 앞으로 1주일 이상 지나야 할 것 같다고 예견했지만, 그가 그런 예견을 꺼내놓은 때로부터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조선의 지구관측위성이 전격적으로 발사되는 바람에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사진 4>에서 보는 것처럼, 조선의 위성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위성발사 2시간 전에 최종명령을 내려야 발사되는 것이다.

 

▲ <사진 4>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위성운반추진체를 위성발사탑에 옮겨 세워놓은 시각으로부터 48시간 뒤에 위성이 발사된다. 그러나 조선의 위성운반추진체가 위성발사탑에 세워졌더라도 그것을 어느 시각에 쏘아올릴 것인지는 외부에서 알 수 없다. 조선의 최고영도자가 직접 명령을 내려야 발사되는 것이다. 위의 사진은 2012년 12월 12일 오전 10시에 위성을 발사하라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친필명령을 촬영한 것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이 친필명령을 하달한 시각은 위성이 발사되기 2시간 전인 2012년 12월 12일 오전 8시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3. 경비와 노력을 소모하는 어리석은 탐지작전


일본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교도통신> 2016년 1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이 “이르면 1주일 전후로 (위성을) 발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미국 국방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교도통신> 2016년 1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이 지난 시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위성을 발사하겠다고 예고한 뒤 발사할 공산이 큰데, 아직 그런 예고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한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며 앞으로 몇 주 안에 발사할 가능성이 보인다고 하였다.


2012년 12월 12일 위성을 발사하기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조선은 위성을 발사하기 전에 위성발사를 공식적으로 예고할 것이며, 위성발사를 예정한 대략적인 시점과 위성이 발사된 직후 위성운반추진체의 1단계 추진체와 덮개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해상위치좌표를 국제해사기구(IMO)에 미리 통보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에서 2012년 11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위성발사준비절차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 <사진 5>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했다는 징후는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수송열차와 수송차량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현장작업인원의 움직임이 크게 증가하며, 조선이 위성을 어느 날부터 어느 날 사이에 발사할 것이라고 공식발표하는 것 등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위의 사진은 서해위성발사장 위성발사탑, 최종조립공장, 궤도이동식 전이구조물이 자리잡고 있는 구역을 촬영한 상업위성사진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첫째, 일본 <아사히신붕> 2015년 9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2012년 11월 6일부터 서해위성발사장에서 각종 차량이동이 잦아지고 작업인원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위성발사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명백한 징후였다. <사진 5>


둘째, 2012년 12월 28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보도화면을 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위성발사를 최종적으로 승인한 친필명령을 하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보도화면에 따르면, 2012년 11월 14일 김정은 제1위원장은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올린 ‘인공지구위성 광명성 3호 2호기를 발사하기 위한 인원들과 기재들을 서해위성발사장에 전개시킨 정황과 대책적 의견’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받아보고, 그 표지에 “비준함. 12월 10일~15일 사이에 발사하는 것으로 계획해서 준비사업 진행하며 정확한 발사날짜와 시간은 차후 지시. 대기할 것! 김정은 2012. 11. 14”라고 썼다. 이것은 위성발사를 준비하고 차후지시를 기다리라는 친필명령이었다.


셋째, 2012년 12월 1일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는 대변인 담화를 통해 2012년 12월 10일부터 22일 사이에 지구관측위성을 남쪽 방향으로 발사할 것임을 예고하였다.


위와 같은 위성발사준비절차에서 알게 되는 것은,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수송열차, 수송차량, 작업인원이 늘어나고, 최고영도자가 친필명령을 하달한 뒤 약 1개월이 지나 위성이 발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서해위성발사장에서는 수송열차, 수송차량, 작업인원의 움직임이 크게 증가하지 않았으므로,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2016년 1월 27일 해상자위대 소속 미사일구축함 한 척을 출동시켜 그 무슨 ‘감시태세’라는 것을 시작하였고, 2016년 1월 28일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조선의 위성발사에 대처하겠다고 부산을 떨었고, 한국과 미국도 우주, 지상, 해상, 공중에서 탐지수단을 총동원하여 조선의 위성발사징후를 파악하기 위한 입체적인 탐지작전에 돌입하였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위성발사준비를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한국, 미국, 일본이 대규모 탐지작전에 돌입하였으니 경비와 노력을 소모하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인다.

 

4. 별지도 보면서 전천후 지구관측위성 쏘아올린다

 
2012년 12월 12일 조선이 위성운반추진체 은하-3호에 실어 쏘아올린 지구관측위성 광명성 3호 2호기가 극궤도에 진입하였다. 위성발사에 성공한 것으로 하여 한껏 고무된 조선에서는 2013년 4월 1일에 발표된 최고인민회의 결정에 따라 국가우주개발국이 창설되었고,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5월 초에는 평양에 국가우주개발국 위성관제종합지휘소가 현대적인 시설로 완공되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2015년 5월 2일 조선에서 새로 건설된 국가우주개발국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현지지도하면서 “주체조선의 위성은 앞으로도 당중앙이 결심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련이어 우주를 향하여 날아오를 것”이라고 하면서 우주정복을 향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조선의 최고영도자가 우주개발사업에 대해 그처럼 강한 의지를 가졌으므로, 그를 따르는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합심하여 우주개발에 전력을 기울여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사진 6>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우주개발사업을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세우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조선의 최고영도자가 우주개발사업에 그처럼 강한 의지를 가졌으므로,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합심하여 우주개발에 힘써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신형 지구관측위성을 제작하였으며, 정지위성에 대한 연구사업에서도 커다란 진전을 이룩하였다고 한다. 위의 사진은 2015년 5월 초 현대적 설비를 갖춰 완공된 조선국가우주개발국 산하 위성관제종합지휘소를 촬영한 것이다. 이 위성관제종합지휘소는 평양 시내 한 복판에 건설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2015년 9월 14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조선국가우주개발국 국장의 대담기사에 따르면,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은 “새로운 지구관측위성개발을 마감단계에서 다그치고 있”으며, “정지위성에 대한 연구사업에서도 커다란 전진을 이룩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은 광명성 3호 2호기보다 더 발전된 신형 지구관측위성을 개발하기 위해 지혜와 노력을 기울였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지위성을 개발하기 위한 사업에도 힘써온 것이다. <사진 6>  


3년 전에 발사된 위성운반추진체 은하-3호는 길이가 30m, 발사초기추진력이 120톤이었고, 거기에 실린 지구관측위성 광명성-3호 2호기의 무게는 100kg이었는데, 이번에 새로 쏘아올린 신형 위성운반추진체와 신형 지구관측위성이 얼마나 발전된 것인지는 서해위성발사장에 그 실물이 나타나야 가늠할 수 있다.


지난 3년 동안 조선의 우주개발사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척되어왔는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3년 전에 비하여 크게 발전된 신형 위성운반추진체와 신형 지구관측위성을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신형 위성운반추진체와 신형 지구관측위성을 만들려면, 그것의 설계와 제작에 관련된 과학기술수준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연구를 앞세워야 한다. 신형 위성운반추진체와 신형 지구관측위성을 설계하고 제작하는데 필요한 과학기술연구를 진척시키기 위해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왔다는 사실은 대규모 우주과학기술토론회를 연속 두 차례 진행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은 2014년 12월 10일과 2015년 11월 25~26일에 대규모 우주과학기술토론회를 각각 진행한 바 있다. 


2015년 11월 25~26일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진행된 우주과학기술토론회 소식을 전해준 조선의 언론보도를 통해 지난 3년 동안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이룩해놓은 과학기술성과들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데, 그들의 여러 성과들 가운데서 세 가지만 선별하여 언급하면 아래와 같다. 

 

▲ <사진 7> 조선의 우주과학자들이 컴퓨터로 만든 별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외부에서 알 수 없다. 위의 사진은 고구려의 천문학자들이 평양에서 돌에 새겨넣은 별지도 비석의 탁본을 가지고 1395년에 다시 만든 별지도다. 천상렬차분야지도라는 이름의 이 별지도는 국보 제228호로 보존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고인돌을 만들던 청동기부터 천문학을 당대 최고 수준에서 발전시켜왔다. 그래서 고구려의 천문학자들은 그런 우수한 별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첫째,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은 위성이 우주공간에서 자기 궤도를 따라 안정적으로 비행하는데 필요한 별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로동신문> 2015년 12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만든 별지도는 “천체들의 운동과 지구의 미세한 진동, 중력마당에서의 빛의 특성은 물론 영향을 줄 수 있는 자그마한 요소들도 모두 찾아내여 측정하고 분석, 종합”한 천체물리학의 완성판이다. <사진 7>


둘째, 위에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은 도형합성법으로 작동하는 광학수감부마스크를 만들었다고 한다. 도형합성(graphic composition)이라는 것은 컴퓨터그래픽으로 작성한 매우 복잡한 도형들을 합성하여 3차원 영상을 만들어내는 컴퓨터기술이며, 광학수감부(optical sensor)라는 것은 무중력상태인 우주공간에서 위성의 비행자세를 바로잡아주는 보정장치다.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이 도형합성법으로 작동하는 광학수감부마스크를 만들어냄으로써 조선이 발사하는 위성들은 미리 정해진 자기 궤도에 오차 없이 진입할 수 있는 과학기술적 담보가 마련된 것이다. 


셋째, 위에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은 “일기에 관계없이 지상의 대상물들을 관측”할 수 있는 전천후 지구관측위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지구관측위성에 장입된 광학관측장비는 구름이 끼는 날씨에는 지구를 내려다볼 수 없기 때문에 관측할 수 있는 시간이 크게 줄어드는 단점이 있었는데, 조선의 우주과학자, 기술자들은 구름이 낀 날씨에도 지상의 대상물을 관측할 수 있는 신형 지구관측위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5. 사드기동군 전진배치해도 수도피폭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2016년 1월 25일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 ‘백악관 비밀회의에서 대북핵타격씨나리오 검토하는 중인가?’에서 서술한 것처럼, 미국군 태평양사령부는 일곱 가지 대북전쟁씨나리오를 작성해놓고 조선과의 전면전을 준비해왔다. 미국군 태평양사령부가 대북전쟁씨나리오를 작성해놓은 것은 미국이 조선과 전쟁을 벌이는 경우 전시작전을 태평양사령관이 직접 지휘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조선이 말하는 ‘최후결전’에서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전술핵탄미사일로 타격할 우선타격대상이 미국군 태평양사령부로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전시상황을 예견한 미국군 태평양사령관이 조선의 전술핵탄미사일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미국군 태평양사령관 해리 해리스(Harry B. Harris)는 2015년 5월 25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 대담하면서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조선”이며, “나는 그런 조선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고 답변하였으며, 2016년 1월 25일 <연합뉴스>와 대담할 때는 “내가 매일 매일 직면하는 최대 위협은 바로 북한이다. 지금까지 중국을 최대 위협이라고 말해왔지만 지금 북한이 가장 큰 위협이다....본능적으로 느끼는 실제적인 위협이다”고 말했던 것이다. 

 

▲ <사진 8> 조선이 말하는 '최후결전'에서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전술핵탄미사일로 타격할 우선타격대상은 미국군 태평양사령부다. 위의 사진은 미국 하와이주 캠프 스미스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국군 태평양사령부 본부청사인 '니미츠-맥아더 태평양사령부센터'를 촬영한 것이다. 겉을 보면 평온한 호텔처럼 보이는 이 건물 안에서 조선을 파괴하려는 일곱 가지 핵타격씨나리오가 작성되었으며, 그 씨나리오에 따른 대북침공작전모의가 계속되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미국군 태평양사령관이 그런 실제적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해낸 방도는 태평양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는 하와이주에 미사일방어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2016년 1월 27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진행된 토론회에서 하와이주에 ‘지상배치 이지스미사일방어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와이주에는 2009년 6월부터 사드기동군(THAAD Task Force)이 배치되어 있는데도, 가중되는 피폭공포에 떠는 태평양사령관은 사드기동군만 믿을 수 없어 지상배치이지스미사일방어체계도 하와이주에 추가로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진 8> 


그런데 조선에서 말하는 ‘최후결전’이 벌어지면, 조선인민군 전략군은 태평양사령부만 타격하는 게 아니라, 워싱턴 D.C.도 타격하게 되어 있다. 조선은 전시에 평양을 타격하려는 미국의 핵공격에 맞서 워싱턴 D.C.를 타격하겠다는 대응전략구상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미국은 전시에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발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북극상공궤도를 타고 워싱턴 D.C.로 날아갈 때 도중에서 요격하기 위해 알래스카주에 지상배치요격체(Ground-based Interceptor)를 배치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지상배치요격체를 알래스카주에 배치해놓은 것만으로는 피폭악몽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시에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발사할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북극상공궤도만이 아니라 남극상공궤도를 타고서도 워싱턴 D.C.를 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화성-13호를 실은 8축16륜 자행발사대에도 싣지 못할 만큼 큰 초대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남쪽 방향으로 쏘면 그 미사일이 남극상공궤도를 타고 지구를 돌아 워싱턴 D.C.를 타격할 수 있다. 그처럼 큰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있을까? 러시아 전략로케트군이 보유한 R-36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있다. 그것의 길이는 32.2m, 지름은 3.05m, 무게는 209톤이며, 사거리는 16,000km다. R-36은 그처럼 크고 무거워서 8축16륜 자행발사대에는 싣지 못하고, 수직갱발사대에 설치한다. 조선이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수직갱발사대에 설치된 목성 계열의 초대형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이 바로 그런 전략무기들이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거리가 12,756km이므로,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험준한 산악지대에 건설한 수직갱발사대에서 사거리 16,000km의 초대형 목성-3호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남쪽 방향으로 쏘면 남극상공궤도를 타고 날아가 워싱턴 D.C.를 남쪽 방향에서 타격할 수 있다. 전시에 화성-13호는 북극상공궤도를 타고 날아가고, 목성-3호는 남극상공궤도를 타고 날아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워싱턴 D.C.를 남쪽 방향에서 방어해줄 미사일방어체계가 없다는 점이다. 미국 수도권의 남쪽 하늘은 그야말로 뻥 뚫려있는 셈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평화적인 우주개발사업에 따라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추진체를 남쪽 방향으로 쏘아올리는 데도, 그럴 때마다 미국이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날아오르는 것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극단적인 거부반응을 보이는 까닭을 알 수 있다.


추진체발사기술에서 위성운반추진체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서로 ‘사촌지간’이므로, 조선국가우주개발국이 위성운반추진체를 남극상공궤도로 쏘아올리는 것은,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초대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남극상공궤도로 쏘아올리는 실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 <사진 9> 최근 미국은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한 것처럼 여론을 조작하면서 사드기동군을 한국에 전진배치하려는 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사드기동군은 미국 육군이 운용하는 미사일요격부대인데, 도로이동식 미사일발사차량 6대와 요격미사일 48발로 무장하였으며, 배치병력은 약 205명이다. 위의 사진은 사드기동군이 도로이동식 미사일발사차량을 작전구역으로 이동시키는 모습이다. 경계병력이 그 발사차량을 호위하며 따라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이 사드기동군을 한국에 전진배치해도 전시에는 조선인민군 금성친위여단의 기습침투전술에 걸려 파괴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수도피폭악몽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드기동군 전진배치가 아니라 평화협정체결과 주한미국군 철군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워싱턴 D.C.가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에 파괴되는 피폭악몽에서 미국이 벗어나는 길은 한국에 최후요격수단을 전진배치하는 것뿐이다. 바로 그 최후요격수단이 사드기동군이다. 사드기동군은 미국 육군이 운용하는 미사일요격부대인데, 도로이동식 미사일발사차량 6대와 요격미사일 48발로 무장하였으며, 배치병력은 약 205명이다. <사진 9>


전시에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남쪽 방향으로 발사한 목성-3호 대륙간탄도미사일을 1차로 요격할 수 있는 최적의 지리적 위치는 한국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에 사드기동군을 전진배치하려는 계략을 오래 전부터 꾸며왔고, 지금은 그 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위성발사준비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미국이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한 것처럼 소문을 내면서 위성발사에 대처하는 그 무슨 탐지작전까지 벌여놓은 것은 상황을 오판한 행동이 아니다. 미국은 임박하지 않은 조선의 위성발사를 구실로 내세워 사드기동군을 한국에 전진배치하려는 것이다. 


사드기동군의 미사일요격고도는 40~140km이므로,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남쪽 방향으로 발사한 목성-3호가 서해 상공에서 상승궤도를 타고 빠른 속도로 솟구쳐 오를 때, 100km 정도의 고도에서 요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에 사드기동군을 전진배치해도 수도피폭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조선에서 말하는 ‘최후결전’에서 조선인민군은 사드기동군부터 제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드기동군이 조선인민군의 작전구역에 가까이 다가가 전진배치될수록, 조선인민군이 사드기동군를 공격할 조건은 그만큼 더 유리해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에 배치된 사드기동군을 전시에 제거하게 될 조선인민군 전투단위는 복엽기를 타고 기습적으로 침투하는 금성친위여단이다. 금성친위여단의 기습침투전술에 대해서는 <자주시보> 2015년 4월 27일에 실린 나의 글 ‘금성친위여단은 복엽기 타고 어디로 날아가나’에서 자세히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사드기동군에는 1개 헌병중대가 호위대로 배치되는데, 조선인민군 중에서도 최정예전투단위인 금성친위여단은 자기들이 미국군 1개 헌병중대를 ‘벼락 같이’ 제압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다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은 사드기동군을 한국에 전진배치하려는 자기의 계략에 따라 조선의 위성발사가 임박한 것처럼 여론을 조작하고 있지만, 미국이 조선의 요구대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수도피폭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19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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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폰서 검사님!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2/01 10:51
  • 수정일
    2016/02/01 10:5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삭제요청까지 했는지 궁금합니다
 
임병도 | 2016-02-01 09:30:5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뉴스타파와 인터뷰중인 박기준 전 부산지검장 ⓒ뉴스타파

 

지난 1월 14일 뉴스타파가 ‘총선에 뛰어든 그때 그 사람들’을 보도했습니다. 4.13 총선에 출마한 예비 후보 중 과거에 비판을 받거나 논란이 됐던 사람들을 취재한 기사였습니다. 뉴스타파가 취재한 사람 중에는 유독 아이엠피터의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박기준 전 부산지검장입니다.

박기준 전 부산지검장을 아느냐고요? 제대로 대면해서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전혀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만나고 싶었느냐고요? 박기준 전 검사장이 아이엠피터가 쓴 글을 명예훼손으로 삭제 요청을 했기 때문입니다.

 

박기준의 대리단체가 명예훼손으로 게시물 삭제 요청을 했다고 통보한 Daum 클린센터 안내문

 

 

박기준의 대리단체가 명예훼손으로 게시물 삭제 요청을 했다고 통보한 Daum 클린센터 안내문

 

2015년 11월 20일 박기준 전 검사장의 대리단체는 아이엠피터가 쓴  [‘김영란법’ 범죄를 꿈꾸는 자에게 유린당하다]는 글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게시물 삭제 요청을 했고, 그날 해당 글은 임시조치(글이 블라인드 처리돼 외부에서 볼 수 없는 상황) 됐습니다.

불과 10여 일 뒤인 12월 2일 박기준의 대리단체라는 곳에서 또다시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글에 명예훼손으로 게시물 삭제 요청을 했습니다. 물론 똑같이 임시조치됐습니다.

불과 2주 사이에 썼던 글 두 개가 임시조치됐으니 글을 천천히 읽어봤습니다. 언론 보도에 나온 팩트를 기반으로 작성했던 글이라 사실관계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만약 사실이 아니었다면 다른 언론사의 기사들도 언론중재위에 제소가 됐을텐데 그런 말도 없었습니다. 글에서 박기준 전 검사장은 주인공도 아닌 보조출연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명예훼손으로 글이 임시조치되니 이 사람이 총선 출마를 앞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기준 전 검사장은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지역의 건축업자에게 뇌물을 받아 면직처분된 전력이 있는데.
– 뇌물 받고 그랬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판결문에 스폰서로부터 호텔비, 회식비를 받았다고 명시돼 있는데.
– 특검을 통해서 혐의가 없는 걸로 다 정리가 된 사항이다.

국민의 대표자가 되기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나.
– 나름대로 행정적인 책임도 졌고 4~5년 넘게 성찰의 시간을 통해서 스스로 다듬었다고 생각한다.

저는 4~5년 넘게 성찰의 시간을 통해서 스스로 다듬었다는 생각에 갑자기 웃음이 터졌습니다. 보통 성찰의 시간을 보낸 사람은 굉장히 온화한 표정과 행동을 합니다. 그는 총선 예비 후보로 등록하기 불과 20여 일 전에도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자신이 보조 출연한 글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한 사람입니다.

 

명예훼손으로 삭제요청을 했던 박기준 전 부산지검장의 심의대리가 접수되지 않아 자동으로 복원됐다는 안내문

 

 

 

박기준 전 검사장의 대리단체가 명예훼손으로 삭제 요청해 임시조치된 글은 지난 1월 2일 복원됐습니다. 이유는 박기준 전 검사장으로부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받을 수 있도록 심의대리 접수를 해야 했는데 아무 연락이 없어서 자동으로 복원된 것입니다.

진짜로 성찰의 시간을 통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를 포기했는지 아니면 싸워봤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리라 예상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단 하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심의받더라도 글은 복원됐을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의 최시중 게이트 관련 글도 김학인 전 이사장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삭제요청을 받았지만, 방송통신심의위원회까지 가서 위반내용이 ‘해당없음’으로 복원됐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담긴 글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위반 내용이 없어 복원됐다.

 

아이엠피터는 글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명예훼손으로 삭제요청을 했으면 제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가서 심의를 받았으면 합니다. 임시조치가 된 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심의 요청을 하면 훨씬 빠르게 글이 복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 연락이 없으면 30일 후에나 복원이 됩니다. 30일 동안은 사람들이 글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글에 문제가 있거나 오류가 있다면 당당하게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고, 그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는 판정을 객관적으로 받기 원합니다. 무조건 자기 이야기가 비판적으로 나오니 명예훼손이라고 하니 참 답답합니다. 특히 총선 예비 후보로 출마하실 분은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전과와 학력 등 정보를 모두 공개해야 하는 공인에 속합니다. 그런 분이 마음대로 삭제 요청했다가 정작 심의 때는 연락이 없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이상합니다.

 

▲MBC PD수첩 ‘검사와 스폰서’ 편에 연루된 박기준 부산지검장이 취재진에게 협박성 발언을 하는 장면, ⓒMBCPD수첩 화면 갈무리

 

박기준 전 검사장이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고 했지만, 명예훼손으로 삭제요청을 하는 모습을 보면 과거 PD수첩 취재진에게 협박하는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정치블로거에게 명예훼손으로 글 삭제를 요청했다는 것은 가장 큰 위협 중의 하나입니다.

지면을 빌려 박기준 전 검사장에게 묻고 싶습니다.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삭제요청까지 했는지 궁금합니다. 총선 전에 알려주실 수는 없나요?’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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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와 민족

외세와 민족
 
 
 
정설교 화백
기사입력: 2016/01/31 [11:2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조선인민군을 환영하는 학생들,   출처-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 정설교 화백

▲  조선인민군 서울입성을 환영하는 인파와  미군 전쟁포로 , 출처- 한국전쟁의 전재과정

© 정설교 화백

 

   [▲인민군과 조선일보]

 

 

노동자자농민에게 미군과 북한의 인민군은 어떤 존재였을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 같이 미군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의의 용사고 북한의 인민군은 불법남침과 야만스런 학살을 저지른 전쟁도발자들일까?

 

한국전쟁을 치르는 동안 대전전투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된 미국의 고위 장교였던 미 24사단장인 딘 소장은 후일 자신의 회고록에서 “남한지역에서 이승만은 나쁘게 평가되고 타도의 대상이었지만 북한 인민군에 대한 지지열기가 매우 높았다고 했다.” 미국의 CIA 조지프 굴든은 이승만 군대가 후퇴한 뒤 서울의 상황에 대하여 “서울시민 상당수가 이승만과 그의 정부가 사라져버린 것을 환영하고 있었으며 거리는 북한군에 동조하는 학생들로 붐볐다”고 미국정부에 보고하였다.

 

미국의 데이비드 콩트는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뭔가 죄지은 반동들만 빼고는 모든 서울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28일은 굉장한 휴일이었다".했다. 당시 국회의원 60명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고 북한군에 협조할 자세를 취했으며 북한 인민군 대다수의 한국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월스트리저널이 전했다. 조선일보도 인민군 서울입성을 보도하며 우리민족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장군 만세!라고 보도했다.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던 이승만정권과 미군이 그래서 거창, 노근리 등 전국 곳곳에서 국민을 적으로 여기고 민간인 학살을 마구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토마스 매그로우 중령은 UP통신 기자에게 “북과 남 모든 노동자, 농민은 미국인들을 싫어하고 있다”고 말하고 미군은  대다수 한국인을 적으로 한다고 말했다. 1951년 2월 미군은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을 내렸다.

 

작전지역 안의 모든 양민은 총살하라.

공산유격대의 근거지 모든 건물을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과 은신처는 모두 소각하라

 

한국인의 머리에 총탄이 명중될 때 기분이 정말 통쾌했다. 두개골이 날아가고 눈에서는 눈동자가 뽀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야말로 명사수가 아닌가? (브루스 커밍스 존 할리데이 224쪽)

 

미군은 한국인의 손과 귀, 코를 쇠줄로 꿰뚫었다. 이마에 못을 박고 그가 죽을 때 까지 고문했다. 아내가 남편의 고문을 제지하려하자 미군은 여성의 머리채를 잡고 나무에 비끌어매고 발가벗겨 젖을 베고 여자의  음부에다 막대기를 막았다. 그리고 기름을 부은 다음 산채로 불을 질렀다. (출처-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미군은 이성을 잃어갔고 그들이 주둔하는 곳에서 저지른 수많은 엽기적인 만행은  한국에서 계속되었다. 미국은 한국인을 국(gook)이라고 불렀는데 gook이란 오물찌꺼기를 말한다.

 

한국인들은 늘 미국을 좋게 말하지만 치외법권을 누리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한국인을 없애치워야할  오물로 보고 있다. 1950년 7월 13일  맥아더는 자신의 목표를 이렇게 공언하였다. "나의 임무는 한반도 전역의 오물들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라고... 

 

한국인은 한국인의 운명을  주한미군에게 맡기고  얼룩무늬 가스통 늙은이들은  성조기를 흔들며  침략자로 우리의 국민들을 국(Gook)으로하는 미군을 찬양하며 한핏줄기 같은 언어에 민족을 아는지 모르느지 역사를 배반하며 너무 태평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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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실험 때마다 반복 보도되는 단둥의 '긴장감'

수소탄 터질 때, 北 사람은 <내부자들> 보면서…
[강주원의 '국경 읽기'] 북한 4차 핵실험 이후, 단둥 ①
 
| 2016.02.01 08:08:34



핵실험 때마다 반복 보도되는 단둥의 '긴장감'

2006년 10월, 장기간 현장 연구를 계획하고 단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북한의 1차 핵실험(2006년 10월 9일)이 연일 방송과 신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주변 동료와 선배들은 "뭐 대단한 박사 학위 논문을 쓴다고, 위험한 중-조 국경 지역에 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진심어린 걱정을 해 주었다. 핵실험과 관련된 '긴장감 감도는' 단둥 현지 소식을 읽으면서, 나 역시 무모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단둥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10년 전 일이지만 단둥에 도착 한 다음 날, 눈앞에 펼쳐진 압록강변의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핵실험 직후 문을 닫았다는 북한 식당은 영업을 하고 있었고, 강변 광장에는 산책하던 중국 사람들이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여러 쌍의 신랑과 신부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한국의 언론을 통해서 접한 중-조 국경 지역에 대한 선입견을 하나 둘 없애는 작업이 필요했다. 

2009년 5월, 한창 연구실에서 박사 논문 초안을 고민하던 나는 북한의 2차 핵실험(2009년 5월 25일) 소식과 함께 보도되는 단둥 소식에 망연자실이 되었다. 단둥과 신의주 두 도시 사람들의 삶의 수단인 국경 넘나들기에 관한 3년 동안의 연구가 허사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언론의 보도와는 다르게 그 이후에도 단둥과 신의주의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2013년 2월 12일) 이후에도 '단둥의 긴장감'과 함께 '압록강의 황량함'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익숙한 내용은 반복되었다.

 

▲ 북한의 핵실험이 있을 때마다, 단둥은 긴장감이 감도는 도시로 묘사된다.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에 목격한 단둥의 풍경은 평화로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2006년). ⓒ강주원


나는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2016년 1월 6일)이 보도되는 순간 단둥의 날씨를 체크했다. 이번에도 단둥과 압록강의 영하 10도 내외의 기온은 고려하지 않은 채 기사가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서 3번의 핵실험 때와 마찬가지로 다음 날부터 한국 언론은 단둥을 "북한 접경 중국 단둥…고요 속 긴장감 고조"라는 비슷한 머리기사로 묘사하였다.

북한의 핵실험 소식이 전해진 6일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접경한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분위기는 외견상 고요한 가운데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 북한 신의주 맞은편 단둥 압록강변 공원에는 평소 산책 나온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북적댔으나 이날따라 오가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 단둥 열차역 부근에 조성된 '조선 한국 민속거리'에 있는 음식점과 가게도 종일 썰렁한 모습을 보였다. (<연합뉴스> 2016년 1월 7일)

특파원이 긴장감이 가득한 단둥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전해왔습니다. (MBC 2016년 1월 8일) 

"도대체, 매번 반복 보도되는 '긴장감이 가득한 단둥'의 근거는 무엇일까?", "영하 10도의 날씨에 압록강의 칼바람을 맞으면서 산책을 할 사람들과 관광객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일까? 정말로 단둥의 상황이 바뀐 것일까?"라는 질문을 계속하자 와이프가 한마디 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단둥에 갔다 오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여행용 가방을 찾았다.

 

▲ 인천공항에서 단둥행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 만에 삼국이 공존하는 단둥에 도착한다(2016년). ⓒ강주원


북한 4차 핵실험 일주일 이후, 찾아간 단둥 

1월 13일, 점심 때 대학로에서 회의를 마치고 귀가한 나는 저녁 6시쯤 집을 나섰다. 2015년 가을에 시범 취항을 한 인천-단둥 비행기의 출발 시간은 22시 05분이다. 전세기 형식이었던 이 비행기는 약 3달 동안 운행되었지만 이번이 마지막 비행이다. 언제 다시 인천-단둥 간 비행기가 뜰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북한의 핵실험과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미 한 달 전부터 운행 중단이 공지되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한국 언론 보도 내용에 대한 확인 및 핵실험 직후의 변화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숙제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나는 인천공항에서 이날 발표한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전문을 읽었다. 그 속에서 단둥에서 무엇을 봐야 되는지를 고민했다.

이륙한 후 한 시간 남짓 지나, 단둥 공항에 도착한 나는 자신이 부탁한 이런저런 물건을 받기 위해서 마중 나온 조선족 H 덕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두 시간도 안 되어서 단둥 시내 호텔에 도착하였다. 로비 한쪽에서 북한 여성 4명이 단장(부한 무역일꾼들의 대표)을 찾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단둥에 도착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였다.

조선족 지인과 함께 호텔 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요즘 단둥에 북한 사람들이 없다고 한국 언론이 보도"한다는 말을 그에게 던졌다.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연말연시에 단둥에 나와 있던 무역일꾼들이 신년 학습 때문에 고향(북한)에 돌아가는 것은 연례 행사인데, 그들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며칠 전부터 다시 단둥에 북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던데…." 

그는 핵실험 이후에 북한 사업 파트너들과 나눈 이야기와 어제 그들과 함께 본 한국 영화 <내부자들>(2015년)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늘어놓았다. 그 사이 해는 압록강 너머 신의주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 호텔 창 너머 단둥의 풍경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 어디에도 한국 언론이 보도하는 긴장감은 없었다. 다만 삼국이 공존하는 그 자체였다(2016년). ⓒ강주원


언론의 보도대로, 호텔 조식을 먹는 동안 북한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20명 정도의 북한 사람들이 주변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 호텔 객실이 140여 개이고 1년 내내 주로 북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대북제재를 하면 호텔은 어떻게 될까?"라는 대화를 조선족과 나눈 뒤, 나는 북한 화교 C 사무실로 걸어갔다. 역시 추웠다. 평소와 달리 걸어가는 약 10분 동안 북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도 보기 힘들었다. 

북한의 2016년 달력이 걸린 사무실에 들어가자, 그는 "신의주 공장에 하청을 준 물건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반겨준다. 

"신의주에 1000명의 월급을 주는 날이 다가왔고, 월급 가운데 일부분은 현금 대신에 식자재를 사서 보내는 날이기 때문에 바쁘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3000만 원 정도의 쌀과 콩기름 등을 보낸다. 며칠 전 신의주에서 건너 온 30명의 남자 노동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40평 아파트에서 잠시 머물고 있다." 

그는 나와 함께 "그들이 먹을 식자재를 사기 위해서 시장에 같이 가자"고 했다. 얼떨결에 따라가서 며칠 동안 먹을 부식과 내일이 생일인 북한 노동자를 위해서 맥주까지 구입한 그가 1500위안을 지급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단둥의 북한 노동자 2만여 명이 하루에 구입하는 중국 쌀과 채소 그리고 고기의 양은 얼마나 될까? 북한 노동자 계약 서류에 보면 한 달 평균 한국 돈으로 약 8만 원이 1인 식비로 책정되어 있으니까, 어림잡아 한 달에 그들을 위해서 중국 재래시장에서 구입하는 식비 총액은 15억이 넘는다. 그럼 단둥의 북한 노동자가 1년에 300억 넘게 중국 재래시장에 돈이 돌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다 월급 대신에 신의주에 보내는 식자재 구입 금액까지 합치면 얼마나 될까!' 

 

▲ 북한 노동자들의 식재료 구입처로 이용되는 시장 풍경이다(2016년). ⓒ강주원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간 한국 식당에는 북한 사람 4명이 식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은 예의상 안 찍었지만 그들이 떠난 테이블 위에 남겨진 한국 소주 빈 병을 사진에 담았다. 

방금 북한 사람들이 먹었던 똑같은 음식으로 식사를 하면서 몸을 녹인 나는 일본 언론이 "북한 접경 지역 관광 업체들에게 관광객들을 북한 쪽으로 접근시키지 말라는 중국 당국의 긴급 지시도 내려졌다"고 보도한 압록강변의 선착장에 가보았다.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영하의 날씨에 유람선을 타고자하는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다.

 

▲ 식사를 하는 북한 사람들은 사진을 촬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와 한국 소주 빈병은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2016년). ⓒ강주원


조선족 거리에 지난 가을에 개업했다는 북한 식당과 북한으로 수출하는 물품 내역이 빼곡히 적힌 간판을 찍은 뒤 북한 화교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북한 무역 일꾼들 5명이 진을 치고 있는 관계로, 옆방에서 커피만 3잔 마시다가 한국 지인의 저녁 식사 자리에 합석을 했다. 마침 그는 한국에서 어제 온 사업 거래처 사람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북한의 4차 핵실험이 술자리의 주제가 되기보다는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냉면 기계 1000여 대 이상을 평양의 냉면 식당에 팔았다"는 사업 이야기가 술 잔 사이로 오고갔다.
 

▲ 조선족 거리의 한국어 간판은 북한으로 수출하는 물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중국은 북한으로 석유만 수출 혹은 원조하지 않는다(2016년). ⓒ강주원


(이번 단둥 현장 연구의 후반부 내용은 다음 연재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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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냄새 맡았는데 화약 냄새 없었다? 말이 되나”

 

[인터뷰] 천안함 전문가들 “재판 결과에 실망… 여전히 많은 의혹, 판사가 판단할 문제 아니다”

조현호 기자 chh@mediatoday.co.kr  2016년 02월 01일 월요일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현 서프라이즈·민진미디어 대표)의 재판에서 천안함이 북한어뢰의 공격으로 침몰됐다는 결론을 내린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에 대해 의혹을 제기해왔던 학계 및 전문가들이 비과학적 판결이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천안함 진실규명은 판사가 아닌 과학자가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황수 경성대 명예교수와 양판석 캐나다 매니토바대 지질과학과 분석실장(박사) 등 일부 과학자들은 미디어오늘과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재판부의 결론에 일일이 반론을 제기했다.

국제학술지에 잠수함충돌론을 게재했던 김황수 교수는 30일 미디어오늘과 이메일 인터뷰에서 “천안함 사건 진실을 가리는 것은 한 재판관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해당 과학자들이 모여 판단할 문제라고 본다”고 평가했다. 양판석 박사도 이날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 재판이 신상철 대표의 명예훼손 사건이었지만 재판과정을 통해 천안함 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길 기대했던 저는 합조단 보고서와 동일한 판결내용에 실망했다”고 평가했다.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이강훈 변호사도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천안함 사건은 추가 조사를 통해 사고원인을 보다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며 “합조단 조사보고서를 주된 근거로 하는 법원의 판결로서 논란이 잠재워질 사안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물기둥을 못봤다는 증인들의 증언에도 물기둥을 목격했을 것이라고 판단한 재판부의 판단에 대해 학자들은 한목소리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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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평택 해군2함대 안보공원에 전시된 천안함 함수. ⓒ연합뉴스

김황수 경성대 명예교수는 천안함 폭발당시(추정) 30여 미터 직경의 물기둥이 100미터 가량 솟았다는 합조단 보고서(계산으로는 물기둥 높이 82미터) 내용을 들어 “호주에서 보여준 이 실험에서 보면 물기둥은 배 전체 영역을 넘어 떨어진다”며 “그런데 물방울만 견시병 뺨을 때렸다는 것은 소가 웃을 판단”이라고 반박했다.

 

양판석 캐나다 매니토바대 박사도 물기둥에 대해 “합조단 모델에 따르면 물기둥이 생성되기 약 1.1초 전에 먼저 충격파가 선체에 도달한다”며 “충격파는 물기둥과 마찬가지로 승조원과 선체에 수직으로 전달되므로, 견시병은 물기둥이 생기기 약 1.1초전에 위로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면서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견시병이 앞만보고 있어서 뒤에서 생성된 물기둥을 보지못했을수도 있다는 재판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반박했다.

양 박사는 “설령 다시 떨어지면서 넘어지지 않았더라도 1초라는 시간은 충격파가 온 쪽으로 직감적으로 몸을 돌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라며 “이런 추론을 근거로 수십미터에 달하는 물기둥이 있었다면 견시병이 놓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또한 좌현 견시병 발목이 빠질 만큼 물이 고여있었다는 것을 물기둥의 정황으로 제시한 재판부에 대해 양 박사는 “작은 양이어도 배가 기울어진 상태라면 물이 한쪽으로 몰려 발목까지 빠질수도 있으므로 배의 상태가 전제되지 않은 물의 양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반박했다.

초병이 본 방향을 임의로 수정 판단한 재판부 결론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천안함 조사결과 언론보도 검증위원회 책임연구위원을 했던 노종면 전 YTN 노조위원장도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천안함 폭발원점이 초소 기준 230도(서남)인데 초병들은 일관되게 북서, 그것도 북쪽에 있는 두무진 돌출부와 함께 ‘무엇’을 봤다지 않느냐”며 “더욱이 늘 경계하는 곳이라 착각할 수 없다는데 이런 판결문이 가능하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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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서방 연화리 초소에서 본 사고해역. 사진=조현호 기자


노 전 위원장은 “초병들이 붕어요? 엄격하고 적확해야 할 법관의 논리도 버블제트를 맞은 것인가”라며 “내가 두번이나 증인 출석해서 한 말”이라고 지적했다.

 

화약냄새를 맡지 못한 증언을 ‘고속으로 버블가스가 공기중으로 방출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 재판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반박이 나왔다.

김황수 교수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폭발 화약에 생성된 가스(화약냄새)는 공기중에 방출된 것이 아니라 수중에서 구 대칭으로 방출되고 솟구치는 물기둥과 함께 대기중으로 방출된다”며 “호주 실험에 의하면 물기둥에는 바닷물과 함께 검은 화약재(화약냄새)가 다량 석여 나오고 배 전체를 커버한다(덮는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그런데 견시병 뺨에 물방울만 튀겼으니 물기둥은 없는 것이고 또한 화약냄새도 없다라는 것이 과학적 합리적 판단”이라며 “재판부는 전혀 이치에 닿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판석 박사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화약냄새 대신 대부분 생존장병이 맡았다는 기름냄새에 주목했다. 어뢰폭발이 있었다면 기름냄새와 함께 화약냄새도 동시에 나야 한다는 것이다. 양 박사는 “대부분의 선원이 사고 직후 화약냄새는 없었고 대신 기름냄새를 맡았다고 증언했다”며 “기름이 어뢰에 의해 파괴된 가스터빈 및 주변장치에서 왔다면 당연이 그 곳을 타격한 버블에 있던 화약냄새도 동시에 맡아야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재판부는 천안함이 충돌했을 가능성도 부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천안함 측부에 충돌선 선수 형상이 없고 충돌선 잔해 미발견 △해군전술자료처리체계(KNTDS) 및 선박위치자동식별체계(AIS)에 천안함 5.5마일 이내 항해 선박 미확인 △사건 직후 TOD 영상에서도 천안함 주변 선박 미확인 등을 들어 수상 선박과의 충돌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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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투브에 있는 호주 토렌스함 폭발장면.

특히 재판부는 TOD 동영상에 나타난 미상의 물체(점)에 대해 “사고 당시 남서풍이 20~25노트로 불고 있었던 점 등에 비춰 보면, 함체에서 떨어져 나간 프라스틱 재질의 구명정 등이 바람의 영향으로 주변을 떠다니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인다”라고 추정했다.

 

이 같은 분석과 관련해 실제로 수상함과 충돌했을 가능성이나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없다. 잠수함 충돌 가설을 언급한 것을 수상함과 충돌 가설과 혼용했다는 지적이다. 수상함은 레이더에 잡히지만, 잠수함은 잡히지 않는다.

이를 두고 양판석 박사는 “수상함과의 충돌은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다. 잠수함이면 충돌방향에 따라 천안함이 입은 유사한 형태의 피해양상을 보일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천안함의 피해양상엔 좌우로 작용한 횡방향의 손상흔이 남아있고 이는 수중 폭발로 기대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양 박사는 “TOD 상의 미상물체가 구명정일거란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며 “구명정이라면 수중에 잠긴 부분이 수면위에 드러난 부분보다 훨씬작아 조류속도보단 바람의 영향을 더 받아 표류속도가 함수 보다 빠르게돼 함수보다 더 좌측에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흡착물질이 폭발물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재판부 판단에 대해서도 반박이 이어졌다. 양판석 박사는 “소위 (천안함과 어뢰의) 흡착물은 수화물이며 수화물은 폭발로인해 생성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양 박사는 “수중폭발이던 공기중 폭발이던 폭발과정은 폭발후 에너지가 공기를 통해 전달되느냐 아니면 물을 통해 전달되느냐의 차이 뿐이고 최초 폭발생성물은 따라서 동일해야 한다”며 “장약에 불이 붙어 주변 폭발물이 연소되고 외피가 파괴되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까지 계속되는 연소반응에 의해 고온-고압의 환경이 만들어진다. 산화알루미늄을 포함한 이 같은 폭발생성물은 어뢰외피가 터지기 전에 생성돼 외피가 터진 후에야 대기 또는 수중과 같은 외부환경으로 방출된다. 한번 생성된 고온-고압의 폭발생성물은 다이아몬드가 수중에서 단기간에 변질되지 않듯 수화물로 쉽게 변질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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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촬영된 국방부 조사본부 천안함기념관에 전시된 1번어뢰의 프로펠러에 붙은 백색흡착물질. ⓒ연합뉴스

양 박사는 “(천안함 선체와 어뢰추진체에서 채취한) 문제의 흡착물은 다수의 물질이 섞인 혼합물이지만 에너지분광분석이나 전자현미(경)분석은 ‘전자빔’의 크기를 해당물질의 크기에 맞춰 조절함으로써 분석한 것”이라며 “이렇게 혼선을 없앨수 있음에도 합조단의 이근득 박사(국방과학연구원)가 혼합물이어서 물질규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변명”이라고 비판했다. 양 박사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해당 물질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폭발생성물이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5년6개월간 신상철 대표의 변호를 맡아온 이강훈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하여 사고원인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재판부가 합조단 조사보고서와 실질적으로 거의 동일한 결론을 내려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천안함 좌우견시병을 포함해 물기둥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물기둥이 있었다거나 초병들이 목격한 섬광의 방향이 천안함과 유사하다고 한 판단은 실제 증인들의 진술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며 “또한 합조단의 조사결과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세가지 중 하나는 수중 폭발 시뮬레이션 결과와 천안함 선체의 절단 형상이 정성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이나 수중 폭발 시뮬레이션이 천안함 절단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백색 흡착물질에 대한 합조단의 조사결과는 국내외 학자들의 검토 결과 매우 불완전한 것이어서 합조단이 내린 결론을 뒷받침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점을 법정 증언 및 관련 학자들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천안함 사건은 추가 조사를 통해 사고원인을 보다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하는 과제가 있으며 합조단 조사보고서를 주된 근거로 하는 법원의 판결로서 논란이 잠재워질 사안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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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상 지키는 대학생들과 24시간, 그 6가지 기록

소녀상 옆에서 24시간
절망했다 "전기장판이 모자라요"

[현장 12시간] 소녀상 지키는 대학생들과 24시간, 그 6가지 기록 ①

16.01.31 21:02l최종 업데이트 16.01.31 21:02l

 

 

빠른 취재와 짧은 기사가 미덕인 이 시대 저널리즘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저는 천천히, 차근차근, 깊숙이 현장을 기록하려 합니다. 짧게는 12시간에서 길게는 24시간 현장을 지키려고 합니다. 제 글은 짧지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글을 쓴다면, 여러분은 이를 허투루 넘기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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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8일 새벽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대학생들이 침낭 속에 한뎃잠을 자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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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새벽 1시 평화의 소녀상 옆. 거리에 은박 깔개를 깔고 그 위에 매트를 덮었다. 이제 전기장판을 찾을 차례다. 영하 6도의 날씨. 오전 9시부터 16시간을 꼬박 소녀상 옆에서 취재했다.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24시간 현장 취재고 뭐고, 어서 빨리 전기장판 위 침낭에 들어가고 싶었다. 곧 대학생들한테서 절망적인 얘기가 들려왔다.

"전기장판이 모자라요."

눈에 불을 켜고 노숙 물품더미를 샅샅이 뒤졌더니, 전기장판이 나왔다. "어라, 전원 코드가 없어요." 필사적으로 다시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전기장판은 여학생들에게 양보하고 기자를 비롯한 남자들은 매트 위에 몇 겹의 이불을 깔고 침낭을 폈다. 핫팩을 양쪽 양말 안으로 넣었다. 2개의 핫팩을 손에 들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올겨울 가장 고단한 하루를 보낸 만큼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느 순간 깼다. 몸이 덜덜 떨렸다. 침낭 밖에 얼굴을 빼꼼 내미니, 아직 깜깜한 새벽이다. 소녀상 앞 일본대사관 터에서 중장비가 움직이는 소리에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억지로 눈을 붙이려 노력했다. 

자고 싶어도, 더 잘 수가 없을 정도로 춥다고 느꼈을 때 일어났다. 새벽 6시 30분. 한 여고생이 '박근혜 정부는 경술국치 재현 말고 석고대죄하라'는 팻말을 들고 있었다. 어젯밤 대학생 언니 오빠들과 노숙을 하겠다며 불쑥 찾아온 학생이었다. 밤을 꼬박 지새운 뒤, 팻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후 일어난 대학생들은 출근길 시민을 상대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부당함을 알리는 1인 시위에 나섰다. 오전 9시 소녀상을 지키는 대학생과 함께 한 지 24시간이 흘렀다. 돌아가는 길, 취재수첩을 살폈다. 많은 이들이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많은 기록 중 6개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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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대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노숙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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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①] 스무 살을 경찰서에서 시작하다

서울 종로구 율곡로2길. 평화로라고 더 많이 불리는 이곳에 소녀상이 있다. 앉은키 130cm의 단발머리 소녀의 마음은 어지럽다. 그 자리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일본은 지난달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소녀상 이전을 정해진 일로 보고 있다. 

합의문에는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함'이라고 명시돼있다. 우리 정부가 소녀상 이전을 약속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소녀상 이전은 민간단체의 일"이라며 선을 긋고 있지만, 정부 말을 믿는 이들은 많지 않다.  
                                           
위안부 합의 이후 한 달이 지났지만, 소녀상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녀상 지킴이 대학생들 덕분일 것이다. 위안부 합의 이후 첫 수요시위가 열린 지난달 30일부터 소녀상을 지키고 있다. 학생들은 교대로 한뎃잠을 잔다. 오전 9시에 교대한다.

기자가 찾은 1월 27일 오전 9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게 분명한 기색의 학생들이 몸을 일으켰다. 인터뷰 요청에 손사래를 친다. 곧 팔팔한 학생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에게 "오늘 함께 24시간을 보낸다"라고 하자, 깜짝 놀라는 눈치다. 청년단체 '청년하다'에서 활동하는 중앙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에게 춥다고 엄살을 피우자, 전기장판 쪽에 앉으란다. 이양선(20)씨는 "저는 '히트택'을 입고 왔다"며 깔깔 웃었다. 오늘 처음 소녀상 지키기 노숙농성을 한다고 했다. 한껏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선배를 따라온 철없는 대학 새내기 아닐까. 양선씨는 지난달 31일 일본대사관 기습시위로 스무 살의 첫날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냈다고 했다. 멋모르는 건 나였다.

- 무섭지 않았어요? 
"일본이 '미안, 이제 됐지?' 하는 식의 사과 방식은 잘못됐잖아요. 많이 화가 났어요.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간 게 아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고, 떳떳했어요."

경찰 조사는 배후 찾기에 바빴다. "누가 교육을 시켰나", "누가 주동자인가"라는 경찰의 물음에 양선씨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서에서 48시간을 보낸 뒤 나올 때, "태어나서 이렇게 당당하게 나온 건 처음이었다"라고 했다. 

-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을 것 같아요.
"경찰서에서 나온 뒤 엄마랑 통화하는데, "두부 먹었어?"고 물으셨어요. 그 말에서 걱정이 묻어났어요."

그 길로 고향 울산에 내려갔다. 엄마한테 "내 이익을 좇기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딸의 신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②] 배후를 찾다

1시간이 지나니, 다리가 저려왔다. 영하의 거리에서 전기장판의 힘은 제한적이다. 그런데 대학생들은 힘들지 않단다. 즐겁단다. 

쌍화탕 네 박스가 배달됐다. 쌍화탕뿐이랴. 따뜻한 커피는 셀 수 없었고, 햄버거·피자·치킨·김밥·토스트 등 각종 먹을거리가 배달됐다. "필요한 거 없느냐"고 묻는 많은 시민들을 돌려보냈는데도, 농성장 한 편에 다 소화하지 못한 먹을거리가 쌓여갔다. 점심때는 '성동구 중구 엄마들 모임'(성중맘)의 밥차가 와서, 학생들에게 따끈한 북어국밥을 퍼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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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낮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대학생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이날 점심은 '성동구 중구 엄마들 모임'(성중맘)의 밥차가 마련한 것이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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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대학생 이태우(27)씨가 시민들이 후원금을 마련해 제작한 식권 뭉치를 기자에게 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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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생들이 가장 맛있게 먹었던 건 25일에 배달된 피자였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학생들은 배달원을 통해 연락처를 알아냈다. 전화를 했더니 여중생이었다. 대학생들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니, 이 여중생은 "페이스북으로 대학생들이 밤새 소녀상 옆에서 지키는 걸 보고 도움 될 일이 없을까 해서 간식을 보내드렸다"라고 말했다. 

대학생들이 비싼 피자라고 걱정을 하자, 이 학생은 "저도 처음 먹어본 피자였는데..."라며 쑥스러워했다. "용돈도 많지 않을 텐데" 하는 걱정에, 이 학생은 "어떤 아주머니께서 후원금을 주셔서 피자를 샀다"라고 까르르 웃었다. 대학생들은 전화통화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 대학생대책위원회 상황실에서 일하는 이태우(27)씨는 식권 뭉치를 기자에게 내보였다. 소녀상 사진과 함께 '힘내서 소녀상을 꼭 지켜주세요'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누군가가 프린터로 뽑아 오려 만든 식권이었다. 태우씨의 말이다. 

"거리에서 밥을 먹으면 체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얼마 전 몇몇 시민들이 돈을 모아 식권을 만들어주셨어요. 주변 식당에 120만 원가량 내고 식권을 만든 거예요. 식권 한 장 내면 7000원짜리 따뜻한 밥 한 끼 먹을 수 있어요. 그러면 힘이 납니다. 큰 감동입니다."

[기록③] 정권이 원하는 것

"왜 텐트 안쳐요?"

한 시민이 농성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렇게 묻는 이가 여럿이었다. 소녀상 옆에 텐트를 칠 수 있다는 기사가 나왔던 탓이다. 실제로는 소녀상에서 20m 떨어진 곳에서 텐트를 설치할 수 있다. 소녀상 지킴이를 자처한 학생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다.

소녀상 주변엔 경찰버스가 포위하듯 지키고 서있다. 많은 경찰이 소녀상 주변을 감시했다. 경찰은 학생들의 방한 용품 반입을 막고 있다. 학생들은 당초 농성장에 침낭, 텐트, 천막을 들이려고 했다. 경찰은 불법 시위 용품이라며 막았다. 학생들의 항의에 침낭만 허용했다. 대학생 대책위 상황실장 정수연씨의 말이다. 

"우리 대학생들도 '춥고 힘든데 매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노숙농성을 시작했어요. 경찰도 천막, 텐트 등을 허용하면 농성이 장기화될 수 있으니까 (학생들이) 알아서 그만두도록 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돼요."

수연씨 추측이 맞다면, 경찰의 판단은 오판이다. 수연씨는 "이미 1000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노숙농성을 했고, 2월에도 지역에서 많은 학생들이 올라온다. 대학생들은 즐겁게 노숙농성을 하며 소녀상을 지키고 있다. 힘들어서 포기할 일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활동 범위를 넓힌다. 2월에는 소녀상 지키기를 넘어, 한일 합의 전면무효 활동을 펼쳐 나간다. 

* 소녀상 지키는 대학생들과 24시간, 그 6가지 기록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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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앞에 놓인 핫팩에 한 '꼬마 손님'이 붙인 쪽지가 눈에 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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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돌린 돈으로 삼겹살 파티? 정말 끔찍

아들 빈소에서 "건배", 군 지휘관 잊을 수 없다

[대한민국 군 인권 18년의 기록④] 군인 장례비로 지원하는 영현비, 투명하게 집행해야

16.01.30 17:39l최종 업데이트 16.01.30 17:3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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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기난사 사건으로 숨진 장병들을 단체조문 하러 가는 군인들.(기사내용과 관련 없음)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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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된 계기는 2011년 12월, 육군 모 부대 소속 김아무개 일병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였습니다. 당시 군 헌병대는 김 일병의 유족에게 "평소 고인이 앓고 있던 우울증이 악화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자살'이라고 통보했습니다.

하지만 김 일병의 아버지는 반발했습니다. 군 수사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며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아버지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매우 충격적인 글과 만나게 됩니다. 글을 쓴 이는 숨진 아들과 함께 근무했던 전역병. 한 때 세상에 큰 화제가 되었던 그의 양심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살인을 방관했고, 나 또한 살인자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전역병은 김 일병이 사망하게 된 전후 과정에서 벌어진 부대내 비밀을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김 일병의 죽어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왜곡과 은폐, 조작. 김 일병의 죽음에 부대측의 잘못이 없었다는 군 헌병대 수사와 전혀 배치되는 폭로였습니다. 

이러한 전역병의 도움으로 김 일병의 아버지는 국민권익위원회에 '사건의 경위를 밝혀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권익위는 진실을 밝혀냅니다. 알고 보니 김 일병은 입대한 후 선임병에게 폭언과 잠 안 재우기 등의 가혹 행위를 당했으며 또 자살하기 전, 이미 여러 차례 자살도 기도했으나 부대측이 이에 따른 적절한 조치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권익위는 더 놀라운 비밀을 알게됩니다. 부도덕한 군의 치부가 드러난 그 사건, 이른바 '조의금 횡령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빼돌린 조의금으로 헌병대 격려금도 줘

김 일병의 아버지가 권익위에 진정한 내용은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들의 사망 원인 규명'과 또 하나는 '수상한 돈과 관련한 의혹'이었습니다. 내막은 이렇습니다. 김 일병의 아버지는 아들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찾고자 부대를 상대로 정보 공개 청구를 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문서를 입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문서 중 김 일병의 아버지는 매우 뜻밖의 문장을 읽게 됩니다. 장례 과정에서 단 1원도 부대에서 받은 사실이 없는데 그런 아버지에게 부대가 '조의금을 전달했다'며 쓴 보고서였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자신에게 줬다는 이 조의금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혀달라고 진정서를 낸 것입니다.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권익위에 따르면 김 일병의 장례가 진행되던 이틀째 밤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김 일병의 장례를 지원한다며 김 일병이 속한 부대의 이아무개 상사가 빈소에 있었는데 이때 이 상사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 상사가 유족의 돈인 조의금 부의함을 멋대로 연 후 그 안에 든 300만 원을 꺼내 가져간 것입니다. 

한편 이 상사는 이 날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이런 방식으로 조의금을 더 꺼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런 후 추후 보고서에서는 이 돈을 "유족에게 전달했다"며 쓴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돈은 유족에게 전달된 적이 없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권익위가 확인한 이 돈의 사용처였습니다. 이 상사는 이 돈 중 일부를 김 일병의 사건을 수사중인 헌병대와 기무반장에게 '격려금' 명목으로 줬습니다. 이 상사는 왜 김 일병의 사망 경위를 조사하던 헌병대에게 돈을 줬을까요? 더구나 죽은 김 일병의 조의금으로 왜 수사중인 자에게 돈을 준 단 말입니까?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상사는 이후 부대 대대장에게도 30만 원을, 그리고 대대와 여단 주임원사에게 80만 원을 격려금으로 줬다고 합니다. 죽은 사병의 조의금을 빼돌려 군 간부끼리 '격려금'이라며 나눠 쓴 황당한 사건, 이른바 '조의금 횡령 사건'이었습니다.

빼돌린 돈으로 삼겹살 파티? 정말 끔찍

이 사실이 알려진 후 국민들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군이 썩어도 이정도로 썩었나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김관진 국방부장관 역시 대노했다고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즉각 수사에 나서도록 군 검찰에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사에 나선 군 검찰은 이후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발표합니다.

김 일병이 사망한 그해, 김 일병이 사망한 해당 부대에서 연말을 맞이하여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날 여단장을 비롯하여 부대의 주요 간부가 전원 참석했는데, 이날 구입한 삼겹살과 술 등을 빼돌려진 김 일병의 조의금 중 일부로 샀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 부대 간부가 다 같이 나눠쓰고 먹어버린 기가 막힌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군 검찰은 이들 부대 간부 중 3명을 횡령 혐의 등으로 기소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피해 사례가 과연 김 일병만의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친 김에 저는 군 사망사고 피해 유족을 상대로 확인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자식을 잃은 유족에게 군이 장례 중 제대로 예우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저는 아주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몰랐고, 유족도 몰랐던 또 다른 군의 '추악한 민낯'. 오랜 기간동안 관행적으로 벌어진 '군 영현비' 집행과 관련한 비리였습니다. 

경위는 이렇습니다. 복무중인 군인이 사망할 경우 국방부는 장례 비용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영현비'로 불리는 이 돈은 한국 전쟁중인 1951년 9월 28일 첫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군 복무중인 군인이 사망할 경우 국방부는 계급과 상관없이 유가족 접대비와 화장비, 장의비 등의 명목으로 영현비를 지급해 왔는데 2011년 12월까지는 이 금액이 총 2,674,000원 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액수만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민원이 거듭되자 국방부는 2012년부터 300만 원 늘린 5,674,00원을 영현비로 지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꾼 규정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영현비 중 1,674,000원은 '유족 여비'로 반드시 유족 통장에 지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400만 원은 유족의 장례를 지원하라는 지침이었습니다. 

빼돌린 돈은 김 일병의 '조의금' 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국방부의 지침과 달리 영현비가 바르게 집행되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국회 김광진 의원실에서 유족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유족에게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 1,674,000원의 '유족 여비'도 군 부대가 주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조의금 뿐만 아니라 '유족 여비마저' 빼돌린 것입니다.

만약 영현비가 정상 집행되려면 이렇게 되어야 했습니다. 먼저 부대측이 유족에게 영현비에 대해 설명한 후 '유족 여비'를 받을 통장 계좌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게 될 영현비 400만 원을 장례 기간중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유족과 협의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장례 비용이 초과되지 않도록 계획적 지출을 도와야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족들의 경험은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자식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다들 넋이 빠진 상태로 영안실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대측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이 이후 술과 고기, 음료와 떡 등 음식물을 빈소로 가져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족들은 처음, 부대가 참 고맙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전우가 죽었다고 부대가 장례는 치러주는구나"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돈이 국방부가 주는 장례비였음을 알게 되는 것은 마지막 발인 날이라고 했습니다. 장례 비용을 전부 부대가 내는 줄 알고 뭘 사 오든 참견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부대 행정 보급관이 종지 한 장을 가져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장례 중 지출 비용이라며 유족에게 "지급받은 영현비보다 초과한 비용"이라며 그 돈을 유족에게 달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요구받은 초과 비용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 보니, 최소 수 십 만 원에서 많게는 최대 800만 원을 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가 없는 기억은 발인날 경험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장례 후 당연히 음식과 음료, 술, 과일이 남게 됩니다. 그런데 부대측은 유족에게 의사도 묻지 않고 전부 자기들이 가져 갔다고 합니다. 남은 술과 음료는 반품도 가능할 텐데 왜 부대측이 그것을 일방적으로 가져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초과 비용은 유족에게 달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더구나 아들이 군에서 자살했다는데, 부고를 널리 알리는 유족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니 대부분 가까운 친인척 20~30여 명 정도가 조문객의 전부인데 어떻게 국방부가 지급한 영현비 5,674,000원을 전부 다 장례 비용으로 썼다는 것일까요?

군인 장례비로 지급하는 '영현비'는 눈먼 돈?

도대체 그 많은 음식과 술, 음료, 떡은 누가 다 먹었을까요. 바로 장례기간 중 조문한 부대의 간부 등 군인들이었습니다. 유족들은 '자살로 처리된' 아들의 빈소로 매일같이 군인들이 조문을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술과 고기, 밥과 떡과 국, 과일, 음료수를 먹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 모습이 유족에게는 마냥 고맙기만 했을까요?

더구나 부대측이 이러한 음식을 구입하다 보니 영현비로 지급된 총액 5,674,000원을 다 썼다고 하는데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어 믿을 수도 없다고 유족은 말합니다. 추후 권익위가 확인해 본 결과 영수증도 제대로 구비하지 않았으며 또 있다 해도 대부분이 간이 영수증이었습니다. 얼마든지 허위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문제로 유족 중에서 부대측과 다퉜다는 사람은 또 없었습니다. 자식이 죽었는데, 그래서 아들을 화장하러 가는데 이런 문제로 싸울 기력이 없어 황당하지만 '그냥 부대측이 원하는 대로' 해줬다는 것이 대부분의 유족 말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확인한 후 국회 김광진 의원실은 2014년 9월경, 유족 여비를 받지 못한 세 가족과 함께 국민권익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유족 여비를 받지 못한 또 다른 피해자를 밝혀주고 또한 미지급된 유족 여비를 어디에 썼는지도 분명하게 밝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밝혀진 사실. 권익위는 지난 2012년 이래 육군에서만 모두 360건의 영현비가 집행되었는데, 그중 64명의 유족에게 군이 1,674,000원의 여비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부대측은 이처럼 지급해야 할 유족 여비를 장례 비용으로 전부 다 써 버렸다고 변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변명을 믿는 유족은 없었습니다.

권익위는 이후 육군본부에 미지급한 유족 여비를 전부 지급하도록 결정하는 한편 관련자와 해당 부대를 징계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후 육군본부는 영현비 집행 과정을 투명하게 정비하는 등 후속 조치를 취했습니다. '영원히 계속될 뻔 했던' 영현비 비리 관행이 그나마 바로 잡히는 계기가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요. 

아들 죽은 빈소에서 진급 축하 건배 '참담'

그런데 이 영현비 문제를 조사하던 중 듣게 된 한 어머니의 사연은 정말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육군에서 복무중이던 아들을 잃은 이아무개 하사의 어머니였습니다.

이 어머니 역시 영현비와 관련한 설명을 부대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례 중 어머니는 부대에 미안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부대가 자기들 돈으로 음식과 술을 사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너무 미안해서 "우리 돈으로 사 올테니 그만 사라"는 말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돈이 유족에게 주는 돈까지 주지 않은 채 제 멋대로 부대가 썼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어머니는 '우롱당한 기분'이라며 언성을 높였습니다. "부대가 돈을 쓰게 해서 미안하다며 쩔쩔매던 우리가 얼마나 바보처럼 보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머니 가슴에 남은 일은 장례 중 빈소에서 본 한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아들이 죽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같은 부대 장교들이 조문 와서 빈소 한쪽에 앉더라구요. 그런데 그때 귀에 들리는 말이 있더라구요. 장교 중에 한명이 진급을 한 것 같아요. 그걸 축하한다고... 큰 소리로 떠들면서 빈소에서 축하 건배를 하더라구요. 건배를. 제가 정말 그 장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거기서 건배를 하는게 사람입니까?"

어머니는 "이게 전우애냐"며 울부짖었습니다. 아들은 죽었는데 그 빼돌린 조의금으로 삼겹살 파티를 하는, 그리고 유족에게 지급해야 할 여비도 주지 않은 채 그 돈으로 술과 떡과 고기로 회식을 하는, 그러다가 죽은 동료의 빈소에서 진급을 축하하는 건배를 외치는 모습에 어머니는 한이 맺힌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게 정말 말이 되나요?

군은 바뀌어야 합니다. 예능 프로인 '진짜 사나이'에서 포장되는 전우애가 아니라 목숨을 잃은 전우와 그 유족에게 '정말 같이 울어주고 배려해 주는' 대한민국 군대가 되기를 요구합니다. 적어도 전우와 그 전우의 유족에게 이런 문제로 한을 품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정말 비극입니다. 

만약 군 고위 관계자가 이 기사를 읽는다면, "우리 군을 매도하는 참 나쁜 기사"라며 불쾌해 하실까요?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시한번 '이런 문제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대한민국 군, 이젠 정말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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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값의 총알받이 용병, JP가 말하지 않은 베트남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6/01/31 11:00
  • 수정일
    2016/01/31 11:0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 김종필에게 묻는다 ] 민주주의는 빵을 먹고 자란다? 명분도 실리도 없었던 비참한 전쟁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6년 01월 31일 일요일
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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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먼저 빵을 먹고 자란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JP)가 중앙일보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군부독재시절 경제성장을 치적으로 내세우며 한 말이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남긴 명언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가 변형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통용되던 것을 빗댄 것이다.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는다. 당시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에 받은 청구권 자금(무상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과 1964년부터 1973년까지 9년간 베트남(월남)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내 번 돈(전쟁특수 포함 약 10억 달러)이었다. JP가 말한 ‘빵’은 국민의 핏값이었다.
 
베트남전, 뭘 위해 싸웠나?
 
베트남전에 파병된 군인은 32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만1000여명, 정확한 집계조차 힘든 고엽제 피해자들이 있다. 박정희 정권은 뭘 위해 국민의 피를 이국땅에 뿌렸을까? JP는 “월남이 사실상 공산군에 포위된 상태였다”며 “자유 우방들은 월남을 시급히 구출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참전 이유를 설명했다. 
8-김종필 백마부대.jpg
▲ 1966년 10월13일 김종필 공화당의장이 월남에 파병된 백마부대를 방문했다. 사진=국가기록원
 
1967년 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전 유세에서 “만약 한국군이 파견되지 않았다면 당시 내 추측으로 주한미군 2개 사단이 베트남으로 갔을 것”이라며 “한국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종합하면 베트남의 공산화돼 중국 하에 놓이는 걸 막아야 하는데 주한미군이 빠져나갈 수 있으니 한국군이 대신 간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캄보디아·라오스 등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돼 중국 영향력에 놓일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을 주장하며 전쟁에 뛰어들었다. 사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1954년부터 있었다. 베트남은 한국과 다르게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고도 프랑스의 지배가 끝나지 않다가 1954년 제네바협정 결과 17도선에서 남북으로 분단돼 북베트남(월맹)에는 공산당, 남베트남에는 친미정권(베트남공화국)이 들어섰다. 
 
북베트남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남베트남 농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남베트남 정부가 친불(한국으로 보면 친일)정권에서 친미정권으로 주인만 바꿨을 뿐 부정부패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전쟁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내전이었고, 미국의 개입은 명분이 부족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는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베트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갈등이 조기에 나타났을 것”이라며 “베트남이 통일된 지 4년도 되지 않아 양국이 충돌한 것을 봐도 그렇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도미노 이론’이 오판이었다는 분석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 개입과정도 매끄럽지 않았다. 
 
JP는 “64년 8월 미군의 구축함이 월맹군의 어뢰정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통킹만 사건’이 벌어져 월남전은 전면전으로 확대됐다”며 자신이 64년 9월 미 상원의원들에게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이 통킹만에서 미국 매독스 호를 선제공격했다는 ‘통킹만 사건’은 조작됐다는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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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8월18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백마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사진=정부기록사진집
 
2003년 ‘전쟁의 안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2004년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 수상)에서 로버트 맥나마라 베트남전 당시 미 국방부 장관은 미 의회에서 참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1964년 8월4일 북베트남의 미국 공격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미 국무부 ‘특별국가정보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참전 반년 전인 64년 5월 미국 존슨행정부는 북베트남에 대한 적극적 군사작전을 고려했고, 통킹만 사건 초기에도 곳곳에서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렇게 참전한 미국은 선전포고조차 없었다. 미군들조차 이 전쟁의 목표가 무엇인지, 왜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적이 북베트남인지,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인지 알 수 없었다. 베트콩에 우호적인 남베트남 민중은 포섭해야 할지 배척해야 할지도 기준이 없었다. 
 
미국은 23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물론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던 일본도 파병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에 수당을 지급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대만, 필리핀 등 6개국이 참전했다.  
 
미국은 용병 수당뿐 아니라 박정희 정부에 1억5000만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다. 왜 그랬을까?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종전쟁’이라는 비난을 피하고자 아시아 군인의 비용을 부담했다는 증언이 있다. 
 
강원용 목사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인터뷰에서 “미국이 결국 한국군의 무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프랑스가 싸우다 나가서 백인 대 황인종의 전쟁인데 미국으로서는 이것을 면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며 “황인종 나라가 전쟁에 참여했어야 한다”고 주한 미 대사관 정무참사관 필립 하비브의 말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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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호 6호 작전은 1966년 1월 19일부터 1월 10일까지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1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최초의 연대급 작전이다. 이 작전중 병사를 공중투입시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작전 결과 적 사살 196명, 포로 49명, 용의자 773명, 소화기 58정, 공용화기 2정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진은 비호 6호 작전 수행중 헬리콥터가 지원하는 장면. 사진=정부기록사진집
 
6개국 중 대규모 전투병력 파병은 한국이 유일했다. 한국의 월남 파병은 이렇게 시작됐다.  
 
피 팔아 얻어낸 빵은 충분했나? 
 
한국군 베트남 파병으로 미국은 명분만 얻은 게 아니다. 1970년 미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열린 월남 참전국 미국 지원내역에 대한 ‘사이밍턴 청문회’에 따르면 1인당 군 유지비용은 미군이 1만3000달러, 한국은 5000달러였다. 미국 입장에서는 1인당 8000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 한국군 32만명을 파병했으니 미국은 약 25억6000만 달러를 아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내에서도 한국군 파병이 늘어날수록 실제 비용도 적게 들고 미 참전군 숫자를 줄일 수 있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한국군 수당은 심지어 자기 나라를 지키는 월남군보다도 낮았다. 1967년 합동연감에 따르면 이병 수당을 보면 미군은 235달러, 월남군 55달러였지만 한국군은 51달러였다. 장교들 수당도 낮은 수준이었다. 미군은 569달러, 필리핀 475달러, 태국 406달러였지만 한국군은 190달러였다. 미군과 동일한 수준으로 대우하겠다던 미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쓴 돈이 총 1조110억 달러인데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한국이 받아온 총액은 10억3600만달러였다. 군 병력 10%를 채워주고 미국 전비의 0.1%를 얻어온 것이다. 그런데도 JP는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한국으로선 군이 살아있는 전투경험을 쌓고,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추켜세웠다. 
 
피로 얻어낸 빵은 어디로 갔나?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도 충분하지 않았다. 1966년 기준으로 하사 이하 사병들의 경우 전사 및 장애 1급인 경우 34만원(1320달러)이 지급됐는데 당시 직장인 1년 치 월급을 조금 웃도는 액수였다. 베트남전쟁 특수가 있었던 건 사실이며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임은 사실이지만 돈을 번 과정이 정당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박태균, ‘베트남 전쟁’ 참고)
 
군인뿐 아니라 기업 소속 기술자·근로자로 간 사람들도 대가를 제대로 못 받긴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1971년 2월에는 ‘한진 파월기술자 미지불임금 청산 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서울 남대문로 대한항공 빌딩에 몰려가 매표실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농성자 13명에겐 징역 1~5년이 선고됐지만 한진이 어떤 제재를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윤충로, ‘베트남 전쟁시기 월남 재벌의 형성과 파월 기술자의 저항’ 참고)
 
전쟁으로 번 돈은 노동자들에게 가지 않고 어디로 흘러갔을까?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과 박정희 정권의 밀월관계를 살펴보자. 백악관 출입기자 출신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따르면 김대중 납치사건을 해결한 사람은 조중훈이었다. 그는 박정희 비자금의 운반책이었다.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사건’ 무마를 위해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를 정치자금 3억~4억엔으로 매수하는데 조중훈이 핵심 역할을 했다.
 
1973년 11월에는 JP가 박정희 친서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사죄했다. 당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돼 있었다. 문명자에 따르면 오사노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반(半)국영기업인 대한항공 주식을 10%나 가지고 있었고, 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조중훈씨가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에게 1억엔을 헌금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1주일 후인 1973년 8월15일 청와대로 불려간 조중훈은 박정희로부터 김대중 사건 해결을 위해 다나카를 매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문명자에 따르면 조중훈은 다음 날 도쿄로 가서 오사노를 통해 이 뜻을 전하고 일본 돈 1억 엔을 건넸고, 그리고 8월18일 귀국하자마자 바로 청와대로 가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9월21일 드디어 하코네에서 다나카를 만나 외환은행에서 인출해 상자에 넣은 김대중 사건 정치적 해결 사례금 2억 엔을 다나카에게 건넸다.
 
이후 한진은 박정희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했다. 조중훈의 자서전에 따르면 한진은 790만 달러 규모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체결하는 등 베트남 전쟁 특수를 누렸다. 한진은 66년부터 71년까지 1억5000만 달러를 베트남에서 벌어들였다. 
 
그렇게 얻은 빵은 떳떳한가?
 
JP는 증언록에서 “무엇보다 5000년 한민족사에서 우리 군사력의 해외 진주는 전례 없는, 역사의 드문 경험”이라며 “맨날 침략만 받던 나라가 대의를 위해 파병한 경험은 민족의 진취적 기상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국 방어조차 힘들었던 한국의 베트남전쟁 참전은 과연 자랑스러웠던 일일까. 
 
당시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등의 구호를 내걸며 월남 참전군을 ‘평화의 십자군’으로 포장했다. 전시 인권유린의 위험성은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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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파병 당시 포스터.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평화의 십자군' 등의 포스터를 통해 베트남전 참전을 독려했다.
 
베트남 평화활동가 구수정 박사에 따르면 베트남전쟁 기간 중 한국군이 80여건에 걸쳐 약 9000명의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했다. 베트남엔 3기의 한국군 증오비와 50여기의 위령탑이 서있다. 
 
최용호 전쟁평화연구소장의 ‘통계로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에 따르면 한국군 재판기록에 65년~72년까지 총 1384건의 범죄행위가 발생했는데 이중 살인 35건, 강간 21건, 과실치상 523건 등이 있다. 대부분 민간인 학살과 관련돼 있다. 당시 베트남에선 한국군에 대해 ‘잘 싸우지만 잔인하다’고 평가했다.  
 
박태균 교수의 저서 ‘베트남 전쟁’은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JP 말대로 “역사의 드문 경험”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해 한국 사회는 한국군이 저질렀던 학살의 기억은 잊은 채, 오로지 전쟁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만 기억하고 있다. 베트남전 전사자는 총 110만명이고, 민간인 사망자는 이보다 많은 150만명이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희생당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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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호 6호 작전은 1966년 1월 19일부터 1월 10일까지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1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최초의 연대급 작전이다. 이 작전중 병사를 공중투입시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작전 결과 적 사살 196명, 포로 49명, 용의자 773명, 소화기 58정, 공용화기 2정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진은 비호 6호 작전 수행중 숨어있던 베트콩을 생포하고 있는 모습이다.
민주주의는 빵을 먹고 자랐나?
 
한국이 미국과 함께 남베트남을 지원했다면 북한도 북베트남을 지원했을까? 당시 한국군이 참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한미군이 있어서다. 베트남 파병은 60년대 미국에서 제기됐던 주한미군 감축 정책을 지연하는 역할을 했다. 북한은 전투 병력을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을 높여 한국의 추가 파병을 막는 형식으로 북베트남을 지원한 것으로 평가된다.
 
1967년 11월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대남 도발건수는 67년에 급증했다. 비무장지대 주요 사건이 65년 42건, 66년 37건이었지만 67년 423건으로 약 10배가 늘었다. 1968년은 안보위기의 해로 불린다. 1월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부대는 청와대를 습격하려했고, 1월23일에는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울진·삼척에 침투했다. 
 
한국 내에서 베트남 전쟁의 명분은 ‘자유와 안보를 지키자’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불안감이 커졌다. 북한의 전략은 유효했다. 실제로 1968년 여름에 예정됐던 5차 파병은 1968년 안보위기로 무산됐다.   
 
같은 시기 국내 독재체제는 공고해졌다. 박정희는 대통령을 3연임할 수 있는 개헌을 69년에 통과시켰고, 72년에는 유신체제를 만들었다. 징병제가 강화됐고, 주민등록제 제도화도 이 시기에 완료됐다. 적어도 베트남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민주주의는 급속도로 후퇴했다.
 
베트남 전쟁이 남긴 것, 생명보다 돈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했던 64년으로 돌아가 보자. JP는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피해 2차 외유(6월18일~12월31일)를 떠난 상황이었다. ‘4·19혁명 계승·민족주의’를 집권이념 중 하나로 제시했던 군사정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정권의 실체적 성격을 드러낸 상태였다. JP가 “2차 외유 중 파병을 계획”한 이유는 악화된 여론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파병을 계기로 1965년 5월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하자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은 잦아들었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 특수로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얻었고, 이를 이용해 장기집권을 이어갔다. 박정희 정권의 권력은 공고해졌지만 그들이 내건 베트남전의 애초 목표는 얼마나 달성됐을까?
 
베트남 파병을 통해 공산화와 중국 영향력 확대를 막자는 목표는 1975년 월남이 패망하면서 실패했다. 1968년 안보위기와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감축을 보면 한미동맹이 굳건해지고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자는 목표 역시 실패했다. 
 
베트남전 이후 해외파병을 판단하는 잣대는 경제적 득실로 굳어졌다. 지난 2003년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경제적 이득만이 강조됐다. 이제 한국에서는 전쟁은 ‘누군가의 고통’이라는 이미지보다 ‘돈 벌러 가는 곳’이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됐다. 이 역시 베트남전의 후유증이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한 국가 이미지 실추, 수십만 명이 국가 폭력에 쉽게 동원되는 현상, 지금은 조용하지만 언젠간 제기될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잊혔다. JP는 이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해야 할 사람이다. JP에게 듣는 베트남전은 반쪽의 기억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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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나라’, 이토록 불행한 나라의 우리들

[김원 발뉴스] “세월호에서 온전히 건져내야 할 것은 살고 싶었던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김원 문화평론가  |  balnews21@gmail.com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알고 싶다면 ‘피해자’가 돼 보면 된다. 대부분 사건에서 ‘피해자’가 되는 순간 당사자는 바로 알게 된다. 대한민국 피해자는, 피해사실을 확인 받는 순간부터 고립된다. 그리고 제일 먼저 ‘입’이 없어진다. 입도 목소리도 없이 재갈이 물린 채로, 피해자가 직접 피해사실과 사건 경위를 밝혀내고 증명하고 심지어 주변을 ‘설득’해야 한다. 이 높고 험한 철벽 앞에 좌절하지 않기란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실은 불가능해 보인다. 눈물과 신음소리만으로 뭘 어찌해볼 수 있겠는가.

   
 

반면 많은 경우 가해자는, 할 일이 없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 ‘혐의’가 돌아오려면 웬만해서는 아주 오래 걸린다. 그 사이에 정황은 잊히고 증거는 점차 사라지기도 한다. 가해자가 ‘조직’일 경우 책임자가 누구인지조차 웬만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여럿일수록 밝혀지지 않고, 강자일수록 숨겨진다. 때로는 ‘피해자’가 너무 극성스럽게 억울함을 호소한다면서, 여론이 악화되다 못해 주변이 가해자를 편들어 주기도 한다. 두둔하고 동조까지 한다. 이제 그만하라고. 시끄럽다고.

피해자는 뼛속까지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피해자는 굉장히 빨리 ‘국민’에서 제외된다. ‘국민’에서 제외되는 방식은 이미 오랜 인습과 관례는 물론이고 분단 체제 이용은 필수이며 아주 광범위하고도 다채롭다.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지키고자 행동에 나서려는 순간 알게 된다. 그들에게는 입이 없다. 들어줄 타인들의 귀도 없다. ‘피해자’는 제일 먼저 사건 현장으로부터 배제된다. 목소리를 빼앗긴 데 이어, 눈도 가려진다.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그 특수한 ‘신분’ 때문에 그때부터 발이 묶인다. 이후로는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피해자들에게는 소식조차 제한적인 것만 제공된다. 피해자가 외치는 ‘진실’은, 풍문으로도 떠돌지 않고 묻힌다.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돌아온다. 손도 묶인다. 피켓 하나도 들기 힘들어진다. 만약 들게 된다면, 그 하나의 피켓을 묻어버릴 산더미 같은 대응 공세에 압사될 각오를 해야 한다. 피해자는 머지않아 ‘투명인간’으로 취급된다. 이 사회는 피해자를 외면하는 것으로 사건 자체를 묻어버리고 싶어 한다.

세월호와 함께 바다에 수장된 희생자 중 단원고 학생들은 미수습자 9명 포함 262명이다. 현재 추정으로는 304명이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이고, 희생자 대부분이 당시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었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유가족’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유가족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참사의 사고 경위는 무슨 이유인지 처음부터 오리무중이었고, 공식 직함을 가진 ‘관계당국’의 모든 ‘관계자’들은 묵묵부답으로 시간만 끌었다.

그렇다. 그 아이들의 부모와 가족들은 점차 ‘피해자’가 되어갔다. 지켜보는 국민들은 지나친 언론 공세에, 만에 하나라도 반대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희생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라도 유가족은 뭔가 ‘대우 받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자식 잃은 부모는 그저 피해자가 되었다. 피해자에 대한 당국의 매뉴얼은, ‘가만히 있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쪽에 가까웠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더 잃을 것은 없다’며 맞섰던 “세상 물정 모르던” 부모들은, 그 슬픔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던 세월호 유가족들은, 어느 순간부터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지독한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2014년 4월16일 이후부터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 어떤 비극보다 참혹했던 이 참사는,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피해자들보다 가혹하게 이 새끼 잃은 부모들을 몰아세웠다. 영화 <나쁜 나라>는 그 탄압처럼 무자비했던 1년여의 시간을 고스란히 필름에 담았다. 세월호 시민 참사기록위원회 작업의 일환으로 정일건, 이수정 감독이 공동 연출을, 김진열 감독이 책임 연출을 맡았다. 영화를 보기 전의 예상과는 달리, 압도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기막힘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탄식조차 그냥 삼켜야 했다. 이것은 지난 1년 9개월이 넘도록 우리가 매일 보아온 상황. 어느 것 하나 새로운 것은 없지 않은가. 그저 1년 9개월을 두 시간으로 압축했을 뿐이다.

하나의 일관성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관계자’로 오신 높으신 분들의 모두 한결같고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다. 모두 짠 듯이 표정도 안색도 없었다. 누구도 말다운 말을 하지 않았다. 한국어임에도 전혀 언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분절되고 엉켜버린 말들조차, 그나마도 그날의 ‘대표’만 입을 뗄 뿐이었다. 나머지는 입조차 열지 않았다. 실은 ‘공직자’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는 분위기였다. 침묵의 오기 같은 게 느껴졌다. 기다림에 지치고 지친 유가족들의 푸념과 항의가 터지면,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잘못’에만 지적이 오갔다. 그게 다였다. 아니 어쩌면 그마저 드물게 얻어낸 ‘성과’에 가까웠다.

세상에 이런 불행한 참사도 또 없겠지만, 이런 잔인한 탄압도 또 없을 것이었다. ‘관계자’들은 만나려야 만날 수도 없고, 어마어마한 경찰병력만이 유가족들을 겹겹으로 포위했다. 전시 상황이 따로 없었다. 슬픔이라니. 그 또한 너무나 고와서,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았다. 매일 밤 부모들이 지쳐 쓰러지듯 몸을 뉘어야 했던 찬 바닥과 폭우 속의 노숙, 그것은 세월호 유가족이 되어보기 전에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진짜 고통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이토록 불행한 나라. ‘나쁜 나라’이기 전에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나라 같은 저기는 어디인가. 피해자에 대한 비인도적인 ‘매뉴얼’을 바로잡는 것조차, 피해자들이 그 입도 손도 발도 묶인 몸으로 맨바닥을 기어가며 해내야 하는 일인 것인가. 이 나라에 사는 우리들에게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이 나라에서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생명 자체가 존중 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그래도 나와 내 가족만은 무사할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가. 그 믿음과 희망을 지키는 방법은, 생명이 존중 받는 세상이 올 때까지 싸우는 도리뿐이라고 유가족들은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구하기 위해 연대하지 않는 이상, 안전 사회는 헛된 구호일 뿐이라고 말이다.

영화 <나쁜 나라>를 보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다. 인간의 고통 곁에서 잠시나마 그 여름과 가을 겨울을 함께 해봤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될 것이다. 나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며 함께 했다고 말할 수 있음이, 그나마 지금 우리에게는 위안이고 구원이라 믿고 싶다. 저 심연에 갇힌 세월호로부터 반드시 온전히 건져내야 할 것은, 그토록 살고 싶었던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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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나라> 상영관 및 시간표
☞ <나쁜 나라>와 함께 보는 영화 <다이빙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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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철한 통일투사 유영쇠 선생 타계

[부고] 투철한 통일투사 유영쇠 선생 타계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통일의 길에 함께 하기 위해 북녘 송환도 포기한 통일투사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1/30 [10:4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유영쇠 선생의 영정     © 전주 수요촛불 채주병@sanha9008

 

▲ 인정많은 마음씨, 투절한 애국심, 강직한 새사회 건설 의지로 평생 민족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안탑깝게 영면에 든 고 유영쇠 선생의 생전 모습 

 

▲ 유영쇠 장기수 선생

 

해방 후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0여년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유영쇠 선생이 1월29일(금) 새벽 6시 12분 영면에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은 원광대병원101호에 마련되어 있으며 발인은 내일 31일 일요일입니다.

 

30일 토요일 6시에 원광대 장례식장에서 추모식을 진행합니다.

 

유영쇠 선생이 얼마나 인정이 많고 투철한 진보적 미래 개척 의지를 지녔는지, 통일을 얼마나 절절히 염원하였으며 그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지 그 편린이나마 느낄 수 있는 약력과 이재봉 교수의 '내가 본 유영쇠 선생'을 아래 소개합니다.

 

이재봉 교수의 글에 담긴 유영쇠 선생님의 투철한 애국심, 남녘의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통일의 길에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해 안락하고 행복한 삶이 예정되어 있던 북녘 송환도 미룬 유영쇠 선생의 불굴의 통일의지가 가슴을 울립니다.

 

 

유영쇠 선생님 약력

 

1928년          • 10월 30일 2남 4녀 가운데 막내로 출생
1937년          • 가정형편 곤란으로 학교 진학 못하고 지역 야학에서 공부
1942년          • 금산 광산 등 임금노동자 생활
1945년          • 성인교육강습소 수학
1945~1947년    • 야학당 개설 및 운영, 동네 대소사 주관하면서 동네사람들의 신망 받음.
1947년          • 이리중 입학
1948년          • 형편곤란으로 김제중앙중 편입. 김제 누님 댁에서 숙식.
1949년          • 김제농고 1년 입학
1950년          • 김제농고 재학중 의용군 1기 자원 입대, 귀향 후 복학.
                   동료 7명과 같이 정읍 산외면으로 입산, 소대 교양사업 책임자 활동
1950년~51년3월 • 유격대 지원, 정찰대 활동
1951년 9월      • 금구 오봉리 박씨 의사 안내 후 복귀 중 1차 선 단절과 이후 선 복귀
1952년 3월      • 상목굴 자폭(군당위원장 박봉수 등 사망), 2차 선 단절
1952년 4월      • 2차 선 단절. (군사작전위주의 지대 개편. 유격대는 소부대 분산활동)
1952년 7월      • 2차 선 복귀 후, 현지지도책 임명
1954년 4월      • 김제군당 위원장 “온동수” 동지와 함께 황산에서 체포
1954년 4월 이후 • 온동수 군당 위원장 총살형, 유영쇠 선생 무기징역형 수감
1954~1983년    • 고법에서 무기형 최종확정, 감옥생활, 감옥투쟁. 
1983년 2월      • 장기수 복역 중 출옥 
1983~2013년    • 출옥이후 노숙인 시설인 익산 자선원 거주 및 업무 지원. 
                   양심수후원회, 통일광장, 범민련남측본부, 전주평통사 등 단체활동 참여
                   평화통일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현장투쟁에 지속 참여
2003년          • 이라크 파병 반대 국회앞 집회 참여
2004년          • 국가보안법 폐지 1000인 국회 앞 단식 농성 참여
2005년          • 쌀협상 비준안 반대 여의도 농민대회 참여
2006년          •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 국민대회 참여
2010년          • 제주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국민대회 참여
2011년          • 한미 FTA 비준 반대 국민대회 참여
2013년          • 전립선암으로 원광대 병원에 입원하시는 길에 4.19 희생자 추도식 참여 
2014~2016년    • 지병으로 익산 원광효도마을 실버의 집(요양원) 거주
2016년          • 1월29일 새벽 6시12분 지병으로 향년 89세 사망

 

 

내가 본 유영쇠 선생 

                                                           이재봉 (원광대 사회과학대학장, 남이랑북이랑 대표)

 

 

2001년인가 2002년이었다. <북한 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하던 법대 학생이 수업 후 면담을 신청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장기수 어르신을 알게 됐는데 그 분께서 내 강의를 한 번 듣고 싶어 하신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병실 옆 침대에 누워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빨치산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듣고 있던 북한 관련 수업에 관해 소개했더니 호기심을 표하시더란다. 매 학기 두 강좌를 개설하는데도 수강 신청 기간 첫날에 마감이 될 정도로 인기 있던 강좌인데다 일반인 청강생들도 더러 있을 때라, 누구든지 기꺼이 환영하겠다고 답했다.

 

그 다음 주 수업에 비쩍 마른 70대 노인이 맨 앞에 앉아 내 말 한 마디 놓칠세라 열심히 필기해가며 청강했다. 강의가 끝나자 그가 직접 물었다. 계속 들어도 되냐고. 한 달 쯤 지나 종강하게 되자, 학기 중간 이후부터 수강했으니 다음 학기 첫 수업부터 출석하고 싶다고 했다.

 

새 학기 개강부터 종강까지 16주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지각, 조퇴, 결석하지 않고 맨 앞자리를 지켰다. 서울에서 모임이 열려 동지들을 오랜만에 만나도 다음날 수업이 있으면 심야 버스나 기차를 타고 꼭 익산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아침 9시 시작하는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유영쇠 선생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연을 들어보니 1950년대 초 고향인 김제 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1954년 붙잡혀 1983년까지 29년간 감옥생활을 했단다. 그리고 출옥 후 갈 데가 없어 부랑인 수용시설인 이리자선원에 몸을 맡기고 있다니 기막히게 기구한 신세였다.

 

그러나 매사에 적극적이고 낙천적이었다. 내가 외부에서 강연하거나 무슨 모임을 가져도 꼭 참석하고 싶어 했다. 내가 이끌던 <남이랑 북이랑 더불어 살기 위한 통일운동>에도 기꺼이 동참했다. 한 달 생활비가 5만원이라 택시는커녕 버스도 맘껏 타지 못한 채 고물 자전거에 올라 여기저기 강연이나 모임에 참석하며 회비도 꼬박꼬박 냈던 것이다. 가진 게 적어 많이 내지 못한다고 안타깝고 미안해하면서.

 

이러한 과정에서 날 꽤 신뢰하게 된 모양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05년 무렵 장기수들을 북녘으로 송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자 은밀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남쪽에 남아 있어야 할지 북쪽으로 가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고향인 남쪽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더 가까울 북쪽에도 피붙이는 없다고 했다.

 

“선생님, 여기서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부랑인 수용시설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오셨는데, 북녘으로 가시면 우선 몸이 편하시겠죠. 당국에서 집도 마련해주고 원하면 결혼도 주선해준다니까요. 그러나 맘은 편치 않으실 것 같습니다. 기아와 궁핍에 허덕이는 인민들을 많이 보시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젊었을 때 목숨 내걸고 싸우며 추구했고, 감옥에서도 수십 년 동안 전향을 거부하며 추구해 오신 사회주의의 이상을 북녘 체제에서 찾지 못한다면 좌절감이나 배반감까지 맛보시지 않겠어요?”

 

“교수님, 나는 내 육신이나 마음이 편하고 편하지 않고는 전혀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쪽에 있어야 통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에요.”

 

“그렇다면 여기 계십시오. 북녘 인민들이야 모두 통일을 바라지 않겠어요? 원치 않는다고 해도 지도자가 통일 방침을 정하면 그대로 따를 테고요. 그러나 여기 남쪽에서는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절반이잖아요.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통일을 원하도록 이끄셔야죠. 거기서는 통일운동 하실 필요가 없겠지만, 여기서는 통일운동의 필요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다보니 선생이 더욱 존경스러워졌다. 남쪽을 택할지 북쪽을 택할지 갈림길에서, 난 맨 먼저 몸과 맘의 안락함을 떠올렸지만, 70 평생을 총각으로 살아온 노 혁명가는 육신의 고통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평화와 통일에 몸 바칠 생각만 하고 있지 않은가.

 

2013년 설날 아침 아내와 모처럼 선생의 거처 이리자선원을 찾았다. 거의 매월 수천 명에게 이메일로 보내는 내 글에 가끔 전화나 이메일로 지지하고 응원해주던 터였지만, 거동이 불편한 듯했다. 몸내가 역겨울 정도로 풍겼어도 80 중반의 노인이라 그러려니 했다.

 

2014년 3월 말 아침 선생이 전화를 해왔는데 받으니 말이 없었다. 두어 번 반복됐다. 오후엔 내가 몇 차례 전화했지만 선생이 받지 않았다. 다음날 통화가 이루어졌는데 00요양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겨우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였다.

 

4월 초 아내와 찾아간 요양병원에서 먼저 간호사를 만나 선생의 병세를 물어보니, 2013년 9월 입원했는데 치매와 전립선암 등 무려 14가지 병을 지니고 있단다. 병상에 누워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도 못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선생과 말과 글을 섞어 겨우 대화를 나눴다. 나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해 유골을 평양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유언이었다. 생전엔 남쪽에서 통일을 위해 헌신하라고 권했던 터라, 사후엔 북녘에서 사회주의 이상이 이루어지도록 힘을 보태는 게 좋을 듯해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선생을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처음 듣는 얘기지만, 당신의 생질이 있는데 그의 외할머니인 선생의 어머니 옆에 묻혀야 한다고 반대한단다. 유골을 둘로 나눠 어머니와 동지들 옆에 절반씩 묻히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둘째, 병원 체제를 개선해 달라고 했다. 환자를 먼저 배려하는 게 아니라 병원 운영의 편의를 앞세운다면서. 선생의 안전을 위해 가끔 몸을 병상에 묶는 간호사들을 탓하는 것 같아 병원을 바꿔 주겠다고 하자, 자신의 몸이 좀 불편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도 운영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육체적으로는 혼자 앉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며, 정신적으로는 오락가락하는 중증 환자지만, 역시 혁명가다운 발상이었다.

 

4월 중순, 지금까지 선생을 보살펴온 평화운동가들과 협의해 요양병원과 요양원이 어우러져 있는 원광효도마을로 옮겼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맘만 먹으면 틈틈이 들를 수 있는 곳이다. 십 수 년 전 <북한 사회의 이해>를 수강하며 선생을 소개했던 법대 졸업생이 경상도에서 달려오니 선생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치지 않는다. 바로 어제였다. 의 (義)로 맺은 할아버지와 손자의 행복한 모습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기를 염원한다.-2014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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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1인 시위 : 그녀는 왜 광장에 섰나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한국에 살던 시절, 길에서 그 흔한 '복이 참 많으시네요' 한마디 들어본 적 없지만 ('기운이 독특하시네요' 같은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딴지에서 '프랑스 특파원'이라는 직책 아닌 직책을 맡게 되면서부터 자신의 생각을 기꺼이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을 알게 되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음이 참 기쁘다. 그래서 내게 지면을 허락한 딴지 측에, 그리고 보잘것없는 내 글을 읽어 주시는 딴지 독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프랑스 시각으로 2016년 1월 26일 저녁, 파리 트로카데로 인권광장에서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기원하고, 한국 정부의 책임을 묻는 1인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제보를 받았다. 네덜란드에 있는 백남기 씨의 둘째 딸이 진행하는 1인 시위에 지지와 연대를 보여 주기 위해 기획한 것이라고. 지난 1월 1일 '희망나비' 단체의 위안부 문제의 진정성 있는 대처를 촉구하는 집회에 대한 제보 이후 두 번째. 부르면 가야지. 나를 불러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게다가 한국으로부터 9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외치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울림이 되고, 또한 메아리가 되려면 언론이라는 존재는 필수적이다. 딴지의 프랑스 특파원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혼잣말을 지껄이며 트로카데로 광장에 도착했다.

 

한국은 요즘 정말 살인적으로 춥다는데, 프랑스는 그 정도는 아니다. 대신 날씨가 참 우중충하다. 게다가 파리 테러의 여파로 관광객들도 확연히 줄었다. 파리 샹젤리제 근처, 온갖 명품 부티크가 모여 있는 8구의 몽테뉴 가(Avenue de Montaigne)에서 일하는 친구는 요새 워낙 손님이 없어서 이번 달에는 보너스가 거의 없을 지경이라며 울상을 짓는다. 트로카데로는 파리 인권 선언으로도 유명하지만 에펠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기에 파리를 관광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들르는 코스. 2016년 1월 27일 오후 2시 47분경 도착한 트로카데로 광장. 그마저도 방문하는 이들의 발길이 반 정도는 줄어든 듯, 우중충한 날씨까지 겹쳐 더욱 황량해 보이는 광장 구석에 두 명의 아시아인 여성이 눈에 들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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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서 내 정체를 밝히기 전 도촬. 예고한 1인 시위를 10여 분 앞둔 시각, 이들은 이미 준비를 모두 마친 듯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의 표정에 어딘가 모를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는 듯 하여, 도촬을 아니 할 수 없었다고 변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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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에서 나왔다고 인사를 했다. 포즈를 취해 달라니 플래카드 뒤로 숨어 주는 이 센스, 훌륭하다. 이번 1인 시위를 기획한 이는 현재 파리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박미리내 씨. 지난 11월 14일,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아직도 혼수상태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백남기 씨의 차녀 백민주화 씨가 네덜란드에서 1인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 혼자 외로울 것 같아서 동참했다고. 프랑스라는 타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현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빛이 따뜻하고 진지하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은 결국에는 그 사람의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이란 모두 그 사람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니다. 혼자일 수 없다. 가끔씩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하더라도. 그리고 2016년 1월 27일 오후,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의 한 구석에 온 몸으로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었다. 그 외침에는 그 어떤 물리적 요소도 없었지만 오히려 더 큰 울림이 있었고, 결국 파리에서 일어나는 집회에 항상 관찰자로만 참여했던 나 역시, 오늘만큼은 적극적으로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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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당신이 한국에서 당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① 집회 참가 시 경찰이 직사로 쏘는 물대포에 맞음 

② 응급 상황으로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중이라도 경찰의 물대포는 계속 따라옴 

③ 당신의 생명이 여러 개가 아니라면 집회 참가만으로도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함 

④ 물대포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짐 

⑤ 경찰과 정부는 사과하지 않음 

 

이라고 적혀 있다. 어쩐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서나 발생할 것만 같은 이 일들이 바로 우리나라, 한국에서 2015년에 실제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은 지금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아도 참으로 비현실적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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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에는 독재의 위협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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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카데로 광장은 세느 강을 사이에 두고 에펠탑을 마주하고 있어 언제나 강풍이 분다. 게다가 보다 많은 이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사방이 훤히 뚫린 곳에 자리를 잡은 탓에, 손이 얼 때까지 바람에 날아갈까 꼭 쥐고 있는 플래카드 아래에는 백남기 농민 이슈 말고도 세월호 문제, 국정화 교과서 문제가 함께 쓰여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참 문제들이 많기도 하다.

 

구호도, 노래도, 서명 운동도 없는 시위인지라 많은 이들이 장시간 머물렀던 것은 아니지만, 적잖은 이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이 전하는 메세지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오늘 시위의 특이할 만한 점이라면 한국 관광객이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다는 것 정도랄까. 어쩐지 어색하지만 용기를 낸 듯,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두 사람에게 와서 환히 웃으며 "힘내세요!"하고 멋쩍게 웃으며 갈 길을 재촉한 커플도, 모른 척 스쳐 지나가는 척 하며 한국어로 된 메세지에 눈길을 주고 지나가던 한국인 가족도 있었다. 

 

 

 

"왜 여기서 이런 걸 해요?"

 

같은 질문을 각기 다른 두 사람에게 받았다. 두 사람 모두 가족 단위로 파리에 여행을 온 이들인 듯했다. 프랑스에서 한국의 이슈를 접하는 것이 신기한 듯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쓰여진 플래카드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던진 질문,"왜 여기서 이런 걸 해요?"

 

한 사람은 곧이어 "백남기 씨가 누구예요?"라고 물어 보고는, (내 느낌상으로는 뭐하러 쓰잘데기 없이 프랑스에서 이런 걸 하고 있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시위를 하는 일행들을 훑어 보고서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몇십 분이 지났을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여기서 이런 걸 해요?" 아내와 함께 에펠탑 사진을 찍으러 트로카데로 광장에 들른 듯한 중년 남성은 한동안 우리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1차 민중 총궐기, 그러니까 지난 11월 14일 백남기 씨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고 혼수상태에 빠진 그 날의 사진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기에 말을 붙여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 역시 농민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었노라 이야기했다. 농촌의 많은 주민들이 여당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며 한탄도 했다. 백남기 씨의 가족에 대한 애정 어린 지지 역시 잊지 않았다. 백남기 씨의 일이 그저 남 일이 아닌 것이다. 잠시나마 한국을 떠나 잊고 싶었던 고국의 온갖 사회문제들은 결국 프랑스에서까지 그를 따라와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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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길' 소속의 김준식 씨는 결국 아내의 재촉에 트로카데로까지 와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채, 그를 기다리는 일행과 가이드에게로 돌아갔다. 에펠탑 사진보다 집회를 하는 한국의 젊은이들과의 사진을 선택한 그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 '왜 여기서 이런 걸 해요'에 대한 대답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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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두 시간 동안 칼바람을 맞으며 진행한 집회는 두 명으로 시작하여 네 명으로 끝을 맺었다. 그 사이 꽤나 진지한 질문들이 오고 갔다. 베트남에서 온 한 박사과정 학생은 한국의 박근혜 정부를 독재라 보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고, 우리는 꼭 폭력이 수반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만이 독재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 다시 "박정희는 독재자인 것이 확실하지만 박근혜까지 독재자로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독재 정치의 사전적 의미가 '민주적인 절차를 부정하고 통치자의 독단으로 행하는 정치'임을 감안할 때, 현재 한국에 독재의 위협이 산재해 있음은 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한국에는 수많은 이슈들이 정신이 없을 만큼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따라서 적지 않은 것들이 그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계속 묻히고 잊혀져 간다. 인간은 망각이라는 방어 기제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도 분명 있다. 우리 사회의 가치를 위협하는 그 모든 이슈들이 제대로 해결되지도 못한 채 잊혀져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알량한 딴지 특파원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계속 그 자리에 변변한 카메라 하나 없이도 스마트폰 카메라로 버티며 서 있을 것이다.

 

 

 

 

아까이소라

트위터 : @candy4s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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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근 “특조위 활동기한 선체조사 완료할 때까지 보장해야”

세월호 인양 7월로 늦어진다?…“애초에 6월 인양 가능성 거의 없었다”유경근 “특조위 활동기한 선체조사 완료할 때까지 보장해야”김미란 기자  |  balnews21@gmail.com
 

   
▲ <사진제공=뉴시스>

세월호 인양 완료 시점이 애초 계획했던 올해 6월에서 7월 말께로 한 달 늦어질 전망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연합뉴스> 등은 우리 정부와 선체 인양계약을 맺은 중국 상하이샐비지가 작년 8월부터 수중작업을 벌인 결과 현장여건이 복잡해 모든 단계의 작업 일수가 늘었기 때문이라며 이 같이 전했다.

그러나 세월호 특조위 권영빈 진상규명소위원회 위원장은 29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올 7월로 인양이 늦춰졌다’는 건 잘못된 것”이라며 “처음부터, 그리고 인양 작업 진척도를 보더라도 올 4월이나 6월 인양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작년 8월부터 3달 정도 인양작업을 수행한 상하이 샐비지가 그 시점에도 실제 세월호 인양 시기를 예측할 수 없었다면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라며 “남은 문제는 단 하나, 올 7월 말에는 실제로 세월호가 인양되느냐”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권 위원장은 “작년 8월에 상하이 샐비지를 인양업체로 선정했을 때, 인양 시기가 올 가을에서 올 7월로 당겨졌다”는 보도와 관련 “여기에도 트릭이 숨어있다”며 “해수부와 상하이 샐비지 사이에 인양작업 계약기간은 올 12월 말까지로, 상하이 샐비지는 올 연말까지만 인양하면 계약 위반이 아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그는 ‘go발뉴스’에 “상하이 샐비지와 해수부가 안정적으로 인양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국민에게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인양 시기가 수시로 바뀌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도 페이스북을 통해 “7월말에 인양을 완료한다면 특별조사위원회 활동기한은 최소 2017년 1월 말 또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강조,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를 전제로 했을 때 최소 6개월의 미수습자 수습 및 선체조사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유 위원장은 “정부가 협조하지 않으면 (인양에) 1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면서 “분명한 것은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기한은 선체조사를 완료할 때까지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특조위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라고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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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왜 트럼프를 좋아할까?

 
[주간 프레시안 뷰] 미 대외정책이 낳은 괴물 정치인, 트럼프
 
| 2016.01.29 17:51:43

 

미국인이 미국 내에서 1년간 테러 공격에 의해 사망할 확률은 350만 분의 1이라고 합니다. 0.00003%의 확률입니다. 로토 당첨만큼이나 확률이 낮다는 얘기죠.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에 반대하는 케이토연구소 존 뮬러 연구원의 분석 결과입니다.

반면 <뉴욕타임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 국민의 51%가 ‘자신, 또는 자신의 가족이 테러 희생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통계 수치에 근거한 객관적 테러 위험 확률(0.00003%)에 비해 무려 170만 배나 높은 수치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객관적, 통계적, 현실적 테러 위험보다 170만 배 높은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관련 기사 : Here’s the Thing About Terrorism Obama Won’t Tell You)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국 정부가 해외에서 저지른 파괴적 대외정책의 실상을 미국 국민이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실제와는 반대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비판적 정치학자 마이클 패런티는 "미국 국민이 알고 있는 미 대외 정책과 미국 정부의 실제 정책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역사상 최대의 프로파간다의 승리"라고 지적합니다.  

미국 정부는 실제로는 금융기관과 군산복합체, 대기업 등 상층부 지배계층의 이익을 위해 중동, 우크라이나 등 세계 도처에서 파괴적 군사 개입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에게 세계의 자유와 민주, 인권과 정의를 위해 대외정책을 펼친다는 거짓말을 끊임없이 해 온 때문이라는 얘깁니다.  

미 대외정책의 궁극적 역풍(Blowback), 트럼프 

한편 필리핀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 월든 벨로는 최근 미 공화당 대선 후보 경쟁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에 대해 미국의 대외정책이 불러온 최대의 '역풍(Blowback)'이라고 말합니다.  

'역풍(Blowback)'이란 말은 1980년대 일본 경제 기적의 비결을 파헤친 보수적 경제학자였다가 탈냉전 이후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로 변모한 고 차머스 존슨 교수가 처음 대중에 소개한 말입니다. 당초 '역풍(Blowback)'은 중앙정보국(CIA)이 벌인 비밀공작의 여파로 CIA 요원 또는 미국인에 대한 피해가 발생하는 사태를 지칭하는, CIA만의 은어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차머스 존슨이 <역풍(Blowback): 미 제국의 비용과 결과>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한 지 1년여 후, 9.11사태가 발생하면서 전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존슨의 예언이 적중했기 때문입니다. 1979년 아프간전쟁 이후 미국이 중동지역에서 벌여온 군사 개입이 9.11테러라는 비극을 초래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것이죠. 

하지만 9.11이후에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앞에 말한 것처럼) 미 국민의 근거 없는 안보 불안은 커져만 갔고, 이를 바탕으로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막말 정치인이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벨로 교수는 트럼프가 유력 대선 주자로 부상한 것이야말로 미국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미 대외정책 사상 가장 위험한 '역풍(Blowback)'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트럼프의 선거 전략은 무슬림 및 멕시코인들에 대한 증오 부추기기입니다. 무슬림이 미국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불법 입국한 멕시코인들이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트럼프의 선거 전략은 'M&M(Muslim & Mexican) 전략'으로 불립니다.

그는 3600킬로미터에 이르는 미국-멕시코 국경에 거대한 보안장벽을 세우고 불법 입국한 멕시코인과 가족들을 추방할 것을 주장합니다. 또한 무슬림의 미국 이민 및 입국 전면 중지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12월 2일 샌 버나디노에서 무슬림 부부에 의한 총격으로 미국인 14명이 사망한 이후 트럼프의 주장은 보수적 백인들로부터 열광적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이 이민을 제한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무고한 무슬림과 멕시코인들을 미국의 안보와 경제에 대한 위협으로 지목하는 것은 무책임한 선동정치라고 벨로 교수는 비판합니다. 무슬림과 멕시코인은 미국에 대한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의한 피해자라는 것이 진실에 더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벨로 교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설명합니다. 

이라크에서의 역풍 

2003년 부시 정부의 이라크 침공이 테러를 없애기는커녕 이슬람국가(IS)와 같은 거대한 테러 세력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 후세인 정권은 이슬람 테러 세력과는 앙숙이었던 데다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보유, 개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시아파가 다수인 이라크에서 소수파인 수니파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면서 시아-수니파 간의 내전이 격화돼 시리아, 예멘으로 번졌으며 수니-시아파의 종주국인 사우디와 이란이 국교를 단절하는 사태까지 이르렀습니다. 

특히 이라크 수니파는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와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의 지도에 의해 2014년 6월 이후 이라크와 시리아에 걸쳐 인구 600만 명을 통치하는 이슬람국가(IS)를 건설했습니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 다발 테러로 130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하는 잔혹한 테러극을 펼쳤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12월 2일 샌버나디노 테러는 IS 지도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닌 자생적 테러라는 점입니다. 즉 IS의 선전에 따라 지구촌 어디에서든 자생적 이슬람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세계적인 이슬람 테러의 단초가 됐다는 얘깁니다.

멕시코에서의 역풍 1: CIA 커넥션 

1980년 이후 멕시코에서 미국으로의 마약 유입이 급격히 증가합니다. 배후에는 CIA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 내내 레이건 정부는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 전복을 위해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미 의회의 금지명령(볼랜드 수정법)에 의해 미 정부의 공식 지원은 불가능했습니다. 레이건 정부는 콘트라 지원을 위해 두 가지 우회로를 뚫었습니다. 

하나는 이란-콘트라 거래입니다. 당시 미국의 적성국이었던 이란에 은밀히 무기를 팔고 그 대금 일부를 콘트라 반군에 전달한 것입니다. 레이건 정부 말기, 이 거래가 드러나면서 레이건은 탄핵 위기에까지 몰립니다.  

다른 하나는 멕시코에 대규모 마약 생산 및 대미 유통을 허용한 것입니다. 그 대금의 일부를 콘트라에 보내는 조건이었죠. 그 배후가 바로 CIA였습니다. 니카라과의 자주적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미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좀먹는 코카인 등 마약의 미국 유입을 눈감아 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까지 미미했던 멕시코의 마약산업은 1980년대 이후 급성장합니다. 지난 해 여름 극적 탈옥 이후 배우 숀 펜과 인터뷰했다가 체포된 멕시코의 마약왕 '엘 차포' 구스만은 사실상 CIA가 키워낸 것입니다. 멕시코의 저명한 탐사전문기자 아나벨 에르난데스가 쓴 <마약 왕국: 멕시코 마약왕과 배후의 대부들>이란 책에 그 실상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멕시코에서의 역풍 2: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1980년대 초 외채 위기 이후 멕시코 경제는 미국의 본격적 경제 침략을 당합니다. 일례로 20세기 초 멕시코혁명에 의해 확립된 농지의 공동소유제도가 미국 자본의 침탈에 의해 점차 사유화되고 농민들은 농토에서 쫓겨났습니다.  

특히 1993년 발효된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협정으로 멕시코 경제는 치명적 타격을 받게 됩니다. 2003년 카네기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협정 이후 10년간 130만 명의 멕시코 농민이 농지(와 직업)를 잃었습니다.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을 받은 값싼 미국산 농산품이 대거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생계 수단을 잃은 멕시코인들에겐 그냥 앉아서 죽느냐, 북으로('엘 노르테': 미국으로) 가느냐의 선택밖에 없었습니다. 

벨로 교수에 따르면 2006년 현재 멕시코 인구의 약 10%가 미국에 산다고 합니다. 멕시코 노동 가능 인구의 15%가 미국에서 일하고 있으며 멕시코인 7명 중 1명으로 미국으로 불법 유입되고 있다고 합니다. NAFTA가 멕시코 농업을 파괴한 결과입니다. 멕시코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릎 쓰고 미국으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대자본이 멕시코인의 삶의 기반을 파괴했기에 멕시코인은 미국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서민들은 멕시코인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비난합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난하는 꼴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대로 미국의 대다수 시민들이 자국 대외정책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멕시코의 서민들은 모두 미국 대자본의 피해자들입니다. 멕시코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지만 미국인 대다수는 잘 모릅니다. 
 

▲ 도널드 트럼프. ⓒ연합뉴스



이것이 바로 '트럼프 열풍'의 비밀입니다. 벨로 교수가 '미 대외정책의 궁극적 역풍'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농촌의 백인 등 미국의 대다수 서민들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곤경의 원인이 미국 대자본 및 이와 결탁한 미국 정부의 대외 정책 때문이란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 대외정책의 피해자인 무슬림, 멕시코인 등 외국인을 가해자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벨로 교수는 현재 미국의 대선 후보 중 오직 버니 샌더스만이 미국 내 불평등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인의 삶을 곤궁하게 만든 국내 민주주의의 위기와 잘못된 대외정책의 실상과 원인을 꿰뚫고 있다는 것이죠.

(☞관련 기사 : The Ultimate Blowback from U.S. Foreign Policy? Donald Trump.)

오는 2월 1일 아이오와 당원대회, 9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를 시작으로 2016년 미국 대선 경쟁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공화당에서는 트럼프의 압승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민주당에서는 힐러리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가 피 말리는 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힐러리는 리비아와 우크라이나 등에서 침략적 대외정책을 주도한 장본인입니다. 힐러리가 이긴다면 미국의 앞날은 별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샌더스가 이긴다면 미국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나올 것이며 미국의 진로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샌더스에 대해서는 박영철 전 원광대 교수의 <프레시안> 기사 등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관련 기사 : 2월 1일, 어쩌면 미국이 빨갛게 물든다 )
(☞관련 기사 : "취업난·정치불신…미국 젊은 층 샌더스로 움직인다")

한편 공화당 지도부에서는 트럼프가 후보가 될 경우 '본선은 필패'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고 하는군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조하십시오.

(☞관련 기사 : 공화당 지도부, 트럼프 버리고 블룸버그 택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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