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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sia


옮긴 방이 너무 삭막해 보였다. 그래서 너무 욕심을 부린게다.
한단만 샀어야 했는데, 아주 작은 꽃병에 두단을 넣었더니 그녀는 숨막혀한다.
그럼에도 내가 숨쉬는 구석을 화사하게 색칠하면서, 봄을 들고 찾아와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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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gue, Czech

on Karl Bridge, Prague 200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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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불의 강

 


 

단편을 읽는 건 아주 오랜만이다. 짧은 소설이 주는 강인한 인상은, 서서히 고삐를 조이고 푸는 장편과는 대조적으로 '울컥'하는 기분이다. 오정희의 단편 묶음인 '불의 강'(문학과 지성 소설 명작선 10, 1977)의 몇편을 읽었다.

 

그 중에, 나이들고 몸을 가누기 힘든 노인이 써내려가는 '적요'는 압권이다. 집청소해주는 여인이 계속 머물기를 바라고서 일부러 월급을 숨겨놓을 때만 해도 뭐 그러러니 했는데, 소설의 내용은 따돌림당하는 동네 아이를 사탕발림으로 방으로 초대해 수면제를 타서 음료수를 먹이는 부분에 당도하니, 섬뜩하다.

 

혼자 지내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주는 불완전함 혹은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잔혹해질 수 있는 끝은 어디일까라고 되물어 본다. 그 노인과 같은 불안함을 잊기 위해,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12편의 소설이 실린 이 책은 더운 여름날에 제격이다. 인간군상의 어두운 여정 - 안개의 둑, 적요 - 에 간담이 써늘해지며 주인공의 격정 - 불의 강 - 도 함께 옅볼 수 있다. 5번째 소설을 읽는 중이다.아주 오랜만에 뒷편이 고대되는 흥미로운 소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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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그리고 월급봉투

'노동과 사용은 착취를 두고 있어 본질적으로 대립적이다 혹은 반목한다.'라고 생각하는데, 현실에에서는 아주 무력한 말처럼 보인다. 착취라는 단어는 노동운동의 맨 첫마디여야 할 것 같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공간에서의 양상은 사실 이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70%이상의 노동조합원을 보유한 조합인데도, 월급봉투를 두고 벌어지는 노동과 사용의 동거동락은 가히 압권이다. 아니, 사실은 노동이 일방적으로 '떼쓰고 엉겨붙는' 모양처럼 보인다.  '회사 주식이 올라야 내 돈도 커지는데...'라는 생각은 사용자만의 것이 아닌, 내 동료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베른슈타인이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1899)'에서 지적한 근대사회의 경제적 발전 양상중 하나, 즉 '주식(Stock)의 공유'라는 사탕발림으로 어느새 '노동'과 '사용'을 같은 편으로 아주 깊숙히 몰아넣었다. 잔업과 노동으로 얻은 임금이 주가의 급락으로 휴지조각이 되는 일은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또한 그는  임금하락이 법적인 장치나 노동조합의 보호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는 현실을 부각시켜 이론의 빈틈을 비판한다. 투쟁의 양상은 이미 달라지고 있다는 선견지명 말이다.

 

베른슈타인 그가 적었던 100년전의 통찰이 왜 아직도 유효해야 하는지?

내가 속한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복리후생과 그와 관련된 제도의 개선을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삼는다. 물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노사간의 타협(?)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는 노조간부의 설명도 있었지만, 노동자의 돈봉투를 버린 임단협이 정말 가능키나 한것인지? 뼈아픈 현실은 바로 내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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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노향림, 창비시선 250

댓잎 소리 도원(挑園)동엔 복숭아밭이 없다. 대신 담양에서 이사 온 작은 키의 시누대들이 산다. 커단 조경석 바위 옆 착검을 한 듯 부딪는 댓잎 소리 높은 층에 사는 내 방에도 부서져 들어와 잠 못 드는 날이 많다. 댓잎들도 불면증에 시달리는지 겨울철이 아닌데도 늑골을 보이며 마른다. 제 그림자를 얇은 요처럼 펴고는 비스듬히 드러눕는 놈 언제라도 우듬지 버리고 땅속의 제집으로 돌아갈 채비다. 한밤중까지 몰래 나직나직 사운대는 소리 낯선 몇사람이 그렇게 빠르게 지나쳐 간다. 멀리 흐린 밤의 끝에서 시동 끈 시간만이 엎드려 한강 물줄기쯤에서 기어가고 기어가서 아득하다. /* 겨울밤의 기다림이나 불면을 떠올리는 시를 읽다 보면 항상 '국경의 밤'이 떠오른다. 추운 날 밖에서 떨며, 생사를 걸고 두만강을 건널 남편을 생각하는 아내의 심정은 지옥일테다. 생각의 속도는 시공간을 갈르며 어느새 천지개벽까지 닿는가 하면, 조금씩 맞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죽음의 시간까지도 짐작할 수 있으니. 아주 대단한 녀석인데, 요즘은 내 생각은 거의 못하고 단지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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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그리운 지난 것 혹은 두려운 올 것로의 떠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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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얘기나 써볼까라고 생각한 2004년 7월 27일이 처음이었다.
  • 소유자
    RE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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