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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3. 제도개선투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태도는 무엇인가

발제 3. 제도개선투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태도는 무엇인가


 




  1. 민주주의투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원칙적인 입장에 대해




  부르주아 정치권에서 국가보안법 개/폐를 둘러싼 논란이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현재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등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성명서 발표, 일인시위 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사회적인 논란 속에서 노동계급이 가져야할 원칙적인 태도일 것이다. 노동계급의 역량에 따라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의 힘이 부르주아에게 위협이 될 정도가 되면 부르주아의 수많은 법과 제도들은 단지 형식에 불과했음을 지난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시민단체 중심의 투쟁에 대해 진정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부분까지 포함한 원칙적인 입장이 필요한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은 민주주의적 제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민주주의투쟁’이기에 이러한 민주주의투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역사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아직 봉건제적 질서가 강하게 남아있던 19세기 중반 프로이센에서는 구체제의 유산인 반동적 귀족세력이 실질적으로 군대 등 사회전반을 아우르는 지배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에게 있어 정치적 지배권력을 쟁취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당면과제였지만 노동계급의 그 혁명적 힘의 분출을 두려워하여 소극적인 자세로 머물고 있었다. 이는 프로이센의 공장제 공업의 발전이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덜 발전한 사회/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엥겔스는 무엇을 주장했을까? 엥겔스는 봉건적 질서가 남아있는 경우보다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에 있어 더욱더 유리한 공간이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이 요구하는 자유에 관한 다양한 법과 제도들이 노동계급의 무기가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1). 그렇다고 하여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제는 부르주아의 문제이니 노동계급은 봉건적 질서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로의 변화를 지켜만 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엥겔스는 분명히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 있어 부르주아들이 반동적인 봉건귀족과 싸우는 과정에서 이를 끝까지 추진하겠는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부르주아들의 꽁무니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2) 이는 1905년 러시아의 당면 혁명의 과제인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 있어 레닌의 주장과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 있어 노동계급의 태도에 대해 정치적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야 함을 주장하였다.3) 그러면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분명 ‘민중의 혁명’이라고 언급하며, 이 속에서도 ‘민중’ 그 자체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들’로 구분해야 하며, 계급적 독자성에 대해 단호하게 주장하기도 했다.4) 그러면서 레닌은 명확한 실천 방향은 러시아의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앞당기는 데 있어서 완전한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적 공화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독재 이외에는 다른 길이 현재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 할 수 도 없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며 노동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독재를 제시하였다. 이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서 혁명의 주체는 부르주아들이니 노동계급은 이에 전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기회주의적 조류와 확실한 선을 긋는 동시에 실제 투쟁에 있어 물리력을 담보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엥겔스와 레닌의 주장을 살펴보았을 때,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서 노동계급은 독자적인 당파성을 확고히 쥐고 가면서, 보다 자유로운 공간에서 계급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을 만들어가는 데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상황을 그대로 남한에 적용시키기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얼마 전 탄핵사태를 경험했듯이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이미 안착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혁의 과제 역시 그 당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엥겔스와 레닌의 주장은 상황은 다를지라도 그 주장에 담긴 보편적인 입장은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투쟁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2.구체적인 우리의 실천방안은 무엇인가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할 지점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입장을 실천적으로 어떻게 벌여낼 것인가이다. 앞서 노동계급의 역량에 따라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들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현재의 노동계급의 역량부터 살펴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요즘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어느 회사 노조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다고 하는 소식을 알리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한번 파업이라도 벌어지면 국민경제를 위기에 빠뜨린다면서 노골적으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펴고 있다. 그래서 지하철노조에서 파업을 할 때는 사회적 명분(?)을 얻기 위해 ‘청년실업해소’라는 슬로건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만큼 노동계급의 힘이 집약되어 조직적으로 나타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임금인상을 매개로 한 파업투쟁만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정치적 주체로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이 분명 노동계급의 투쟁에 있어 ‘친북-좌익-용공’으로 몰아붙이면서 탄압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누구보다 먼저 국가보안법 폐지의 운동적 흐름을 만들어 가야할 노동계급은 뒷전에 있고. 시민단체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노동계급의 역량에 대한 현 주소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은 과연 국가보안법을 완전히 폐지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우리는 해 봐야 한다. 부르주아 정치권에서 말하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논란은 어디까지나 ‘형법대체입법/파괴활동금지법’ 등 법률적 장치를 마련한다고 하여 사실상 제 2의 국가보안법을 준비한 상태에서 개혁성을 가지고 말싸움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단체에서 벌이는 투쟁은 단순히 상징적인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렇지는 못하다. 대부분은 시민단체에서는 ‘인권’ 운운하며, 국가보안법의 인권침해를 부각시키며 사회적 여론을 환기하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가져가고 있어서 국가보안법이 가지고 있는 그 본질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폭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노동계급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를 개선시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체제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계급은 노동계급뿐이며, 노동계급이 투쟁에서 나서지 않는다면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는 개악되면 개악되었지 ‘개선’조차 따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한 논란에 있어서도 진정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즉자적인 실천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된 늦지만 가장 빠른 길을 우리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현재 역량이 부족하고 국가보안법 완전철폐에 대한 입장을 가자고 투쟁을 전면적으로 벌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냥 주저앉고 말아야 하는가? 노동계급의 역량이 더욱 강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이는 큰 틀에서는 옳은 말이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작은 실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기도 하다. 노동계급의 역량은 부족한 상태이지만 얼마 전 파견법 개악으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더욱더 투쟁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며, 이주노동자들은 아직도 강고하게 명동성당에서 농성단을 꾸리고 있다. 이렇게 투쟁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에게 대해 학생으로서 힘차게 연대하며 국가보안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투쟁을 평가하며 국가보안법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힘들 수도 있겠지만 분명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노동자들과 토론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행동일 것이다. 또한 학교에서 학우들과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입장이 필요한 가를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해 보면 우리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참으로 많을 것이다. 그 속에서 확고히 지녀야 할 원칙적인 입장은 유지하며 다양하게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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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러시아 민주주의혁명은 그 사회적, 경제적 본질에 있어서 부르주아혁명이다. 그러나 이 올바른 맑스의 명제를 반복하여 얘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 명제는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하며 정치적 슬로건에 적절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현재의 생산관계,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기초로 한 모든 정치적 자유는 부르주아적 자유이다. 자유에 대한 요구란 주로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들은 이러한 요구를 제일 먼저 내세운다. 부르주아지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이 획득한 자유를 어느 곳에서나 주인처럼 행사하면서 자유를 온건하고 소심한 부르주아지의 것으로 변형시켜서, 평화적 시기에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대단히 교묘하게 억압하고 격동의 시기에는 이들을 잔인하게 억압하는데 이 자유를 이용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이 부정되거나 또는 비난받아야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오로지 나로드니크 폭동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 경제주의자들뿐이다. 이러한 인텔리적이며 속물적인 교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이 의지에 반하여 그들을 기만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잠시일 뿐이다. 정치적 자유가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힘을 배가시키고 조직을 꾸리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며 그것도 다른 어떤 세력보다도 강렬하게 요구한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계급투쟁을 회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범위, 계급투쟁의 의식, 조직, 결연함을 확대시키는 데 있다. 정치투쟁사업을 경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사회민주주의자를 민중의 보호자라는 지위에서 노동조합의 비서로 전락시키는 사람이다. 민주주의적 부르주아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업을 경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사회민주주의자를 민중혁명의 지도자의 지위에서 자유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전락시키는 사람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녹진. p.122~123)








4) 그렇다. 민중의 혁명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중’이라는 말이 부르주아적이며 민주주의적으로 남용되는 것에 대해 싸워왔고 지금도 대단히 훌륭하게 싸우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이 단어가 민중 내부의 계급적 적대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는 완전히 계급적 독자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민중’을 ‘계급들’로 구분하는 것은 진보적 계급이 그 자체 내에 머물거나, 좁은 한계 내에 그 자신을 한정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세계의 경제적 지배자가 후퇴하지 않을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 행동을 마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중간계급들의 미지근함, 동요, 주저함 등과 인연이 없는 진보적 계급은 모든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전 민중의 대의를 위해서 전민중의 선두에 서서 싸우도록 하기 위해 ‘민중’을 ‘계급들’로 구분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녹진.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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