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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 전야제와 반아펙투쟁 참석기

노대 전야제와 반아펙투쟁 참석기

 

바쁘게 살다보니 며칠 전 일도 아주 옛날 일처럼 생각된다.

지난 11월 12일 노대 전야제에 참고하고 나서 자꾸 미루던 글을 이제야 정리해 본다.

 

여의도 한강둔치에서 있었던 노대 전야제는 한국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공식적인 무대를 등지고 비공식의 제2의 노동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11시부터 예정되었던 제2부 전국현장활동가 대회는 새벽 1시가 넘어서 시작되었다.

 

두개의 전야제!

 

두개의 전야제가 열리게 된 배경은 작년 노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지만, 요지는 새로운 집행부의 행사책임자가 자신의 정파와 다른 입장을 가진 문화활동가들에게 행사참여를 봉쇄하였기 때문에, 배제된 경향의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도 알려야 입장에서 별도의 무대를 만든 것이다.

이 대립을 혹자는 통일노선과 계급노선의 대립으로 말하기도 하고, 타협파와 현장파간의 대립으로 보기도 하고, 우파와 좌파로 표현하기도 한다.

노조 혹은 총연맹이라는 대중조직에서 특정한 정치노선 이외의 모든 주장을 봉쇄하는 것이 정당하거나 바람직한 것인지는 각인의 판단에 맡기겠다.

 

여하간 비주류측이 진행한 문화제에도 많은 활동가들이 참여하였고, 또 엄청 진지하였다. 주류쪽에서 의례적인 인사와 주장 및 문화제가 진행된 것에 비해, 비주류측의 주된 명분은 유실된 전선과 투쟁의지를 복원하여 비정규투쟁과 총파업의 조직에 떨쳐 나서자는 기조였고, 여러 비정규 사업장의 투쟁사례와 연대의 호소가 가슴에 와 다았다.

특히 KT노조의 여성동지는 IT연맹 건과 관련하여 물러난 이수호집행부와 자본을 강력히 성토하였다. 요지는 최근에 진행된 노조 선거에서도 현집행부의 반대파들은 조합원추천조차도 못받도록 사측이 엄청난 탄압을 하여 상당히 많은 지부에서는 출마조차 봉쇄되었다는 것이다. 노조의 생명이 자주조직이라면 집행부의 선거에 사측이 개입하고 탄압하는 것은 군사독재시절에서나 들어볼 수 있는 얘기임에도, 21세기 민주공화국이라는 한국에서 이런 만행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고, 그러한 사측의 비호 속에 당선된 집행부가 IT연맹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즉 명백한 어용노조임에도 전임 이수호 집행부는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이들과 야합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조합원 수가 많기 때문에 총연맹 비대위까지 자리를 배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한국노총과 다르다고 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조직원칙조차 선거나 자파의 이해관계속에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현실속에서 주류측과 그들의 행사를 성토하는 그 여성 노동자의 절규에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이어 구권서 비정규 연대회의 의장이 등단하여 같은 호소를 두 무대에서 해야하는 아픔과 동지적인 연대와 고민을 얘기하였다.

 

또 빼뜨릴 수 없는 것이 민노총 서명파 얘기다.

강승규수석의 비리와 관련하여 이수호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사퇴서를 냈던 14명의 민노총 간부들의 사직서가, 이수호위원장이 사퇴를 발표하기 직전에 수리해 버린 얘기를 들으면서 참으로 기가막힘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퇴하는 사람이 그것을 주장했던 사람들의 사직서를 수리한다는 이런 더러운 짓거리가 전 위원장 독단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안다. 또한 그들의 머리속에는 노동운동의 발전이 아니라 자파세력의 확장만이 들어있을 뿐이고, 차기 선거에서의 유불리와 헤게모니의 장악만이 유일한 행동과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도 명백하다. 그들이 아무리 노선과 정파를 들먹거려도, 이건 정파의 대립이 아니라 종파들의 지랄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나는 지금의 운동의 문제는 무슨 좌우파나 정파간의 분열이라고 보질 않는다. 그냥 정파가 될 수 없는 패거리들이 종파질을 하면서 정파들이 하려는 운동을 말아먹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 정파간 노선에 따른 견해의 차이라면 토론과 실천을 통해서 극복할 전망이라도 있지만, 해방되는 사회의 목표와 방도에 따른 차이가 아니라, 아예 투쟁과 실천에는 관심이 없는 타락한 관료들이 자신들이 무슨 정치적인 비전이나 있는 것처럼 정치적인 슬로건으로 포장하고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운동의 현실이다.

 

먹고 살기에 바빠 부산에 일찍 내려가질 못하고, 17일 아침에야 국제민중포럼에 결합하였다. 전쟁과 빈곤을 확산하는 아펙에 반대하는 투쟁의 의미와 비중을 생각할 때, 비정규투쟁, 반 아펙투쟁, 반 WTO각료회의 반대투쟁(홍콩)은, 신자유주의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의 기본전선이라고 할 수 있고, 때문에 거의 1년전부터 고민하고 공동행동을 건설하고 투쟁을 준비해 온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특히 농민과 전농의 입장에서는, 농업형상 비준반대와 쌀시장 개방 반대와 맞물려, 조직의 사활이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주되는 동력으로 적극적으로 결합해 왔다. 홍콩에만 1,800명의 농민 투쟁단을 보내는 것만 보아도 이 절박한 투쟁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0만으로 예정되었던 공동행동은 대략 12,000~13,000명 정도가 참석하였고, 농민이 대략 절반 정도였고, 부산 현지의 동력보다는 타지에서 결합한 공공과 금속의 활동가들과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주를 이루었다. 뭐 최선을 다 했다면 꼭 수가 문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하간 내가 수영만(수영1교 맨앞)에서 본 것과 참세상에 올라온 글, 그리고 여러 동지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투쟁의 의미와 목표의 설정부터 실패한 것이고 투쟁의지의 부족은 명백하다.

어차피 그들의 정상회의를 물리적으로 파산시키기가 불가능한 것이 명백하다면, 한국민중은 그들의 모임에 반대하는 강력한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전략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고 다리를 사이에 둔 측면 그것도 자루처럼 봉쇄된 계곡 같은 공간에 모든 동력을 밀어 넣었는지 진정 투쟁할 의지가 있었다면 어떻게 공격로를 그렇게 잡을 수 있는지 격분하는 동지들이 많았다. 또한 어차피 버스나 컨테이너 봉쇄를 못 뚫을 바에야 차라리 놈들의 방어가 허술한 시내의 상징적인 건물이나 도로를 점거하고 활발한 타격이나 공격투쟁을 벌이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행진이 시작되기 전부터 불만이 터져 나왔다.

 

어찌됐건 준비회의에 따라 두 트럭분의 대나무와 쇠파이프 그리고 로프는 공급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전농의 대오는 하나의 단위로서 전면에 배치되어 기능하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전농이 적극 참여한 투쟁에서 전농이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 것도 처음일 것이다.

 

수영1교에서는 리더도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로프를 동원하여 물대포를 맞으며 컨테이너를 6개정도 끌어내렸고 그중 두개는 물속에 빠뜨렸다. 하지만 1만 2천명 중에 적극적으로 앞장 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은 그저 나를 포함하여 구경만 할 뿐 그나마 로프라도 당긴 사람들이 적극적인 참여자라고 해야 될까. 사정은 비슷하였지만 수영3교쪽에서는 별반 투쟁의 경험도 없는 공공쪽 노동자들이 파이프를 들고 조금씩 싸움이 달아오르며 자신감을 회복하여 그래도 쪼금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후 6시 정각에 내가 들은 방송은 경찰이 수영 3교쪽으로 진격해 오고 있기 때문에 많은 희생이 예상되므로 수영 3교쪽으로 철수한다는 내용이었다. 날이라도 어두어지면 좀더 적극적으로 싸움이 전개되려나 생각하고 있던 차에 그저 평화로운 시위대를 3교쪽으로 철수하라는 방송에 많은 사람들은 맥없이 후퇴하였고 이때 술집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참세상에 올라온 글을 보면, 많은 희생이 예상되므로 수영 1교 쪽으로 철수하라는 방송과 곧이은 정리집회가 있었다는 글을 보면서, 전화질 운동가들이 매양 해 오던 장난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작년에 파병반대투쟁을 하면서 매양 벌어졌던 일을 그때도 그랬다. 대학로에서 모여서 연설하고 행진하여 광화문 교보빌딩까지 가서 정리집회를 하는데, 행여 대오의 일부라도 경찰과 마찰을 일으키고 계속 싸울려고 하면 대회를 주관하던 인간들이 온갖 지랄을 하면서 투쟁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을  사실 그들은 투쟁을 리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투쟁을 적정한 수준으로 관리해주는 역할을 자기 임무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적당히 싸우는 모습을 보이다가 적당히 정리집회하고 해산하는 가끔은 경찰과 청와대에 전화질도 하면서 언제 어떻게 끝낼 것이니 서로 체면을 지켜주라고 하는 전화질 운동가들.. 요번에 강승규도 출두하기 전에 청와대에 전화질 하고 갔다던가 울산 플랜트 노대 때 투쟁을 팔아먹으려 지랄을 하던 그 K모수석- 소위 영업운동가들의 문제가 심각하게 노출된 투쟁이었던 것이다. 이 글은 부산 투쟁에 순수하게 참가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한 동지들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 폼잡기 좋아하면서 자기 일신은 조금도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는 것에 이골이 난 P모등 극소수의 운동 영업가들에 대한 것이니 괜히 시비걸지 않기 바란다.

 

여하간 비참한 현실이고, 홍콩투쟁 역시 관리된 투쟁으로 변질될 수순을 밟고 있는 현실에서, 이제 상층연대의 동원행사의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업운동가들, 이벤트 운동가들이 극복되고, 종파들이 극복되고, 견해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제대로 된 순수한 정파들이 서로 비판하고 연대하면서 투쟁의 전선을 복원하는 데는 많은 시일이 걸릴 것이다. 그러다가 운동이 소멸한 나라들도 많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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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he Free Market Killed New Orleans*

How the Free Market Killed New Orleans*

By Michael Parenti

The free market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destruction of New Orleans and the death of thousands of its residents. Armed with advanced warning that a momentous (force 5) hurricane was going to hit that city and surrounding areas, what did officials do? They played the free market.

They announced that everyone should evacuate. Everyone was expected to devise their own way out of the disaster area by private means, just as the free market dictates, just like people do when disaster hits free-market Third World countries.

It is a beautiful thing this free market in which every individual pursues his or her own personal interests and thereby effects an
Optimal outcome for the entire society. This is the way the invisible hand works its wonders.

There would be none of the collectivistic regimented evacuation as occurred in Cuba. When an especially powerful hurricane hit that island last year, the Castro government, abetted by neighborhood citizen committees and local Communist party cadres, evacuated 1.3 million people, more than 10 percent of the country's population, with not a single life lost, a heartening feat that went largely unmentioned in the U.S. press.

On Day One of the disaster caused by Hurricane Katrina, it was already clear that hundreds, perhaps thousands, of American lives had been lost in New Orleans. Many people had "refused" to evacuate, media reporters explained, because they were just plain "stubborn."

It was not until Day Three that the relatively affluent telecasters began to realize that tens of thousands of people had failed to flee because they had nowhere to go and no means of getting there. With hardly any cash at hand or no motor vehicle to call their own, they had to sit tight and hope for the best. In the end, the free market did not work so well for them.

Many of these people were low-income African Americans, along with fewer numbers of poor whites. It should be remembered that most of them had jobs before Katrina's lethal visit. That's what most poor people do in this country: they work, usually quite hard at dismally paying jobs, sometimes more than one job at a time. They are poor not because they're lazy but because they have a hard time surviving on poverty wages while burdened by high prices, high rents, and regressive taxes.

The free market played a role in other ways. Bush's agenda is to cut government services to the bone and make people rely on the private sector for the things they might need. So he sliced $71.2 million from the budget of the New Orleans Corps of Engineers, a 44 percent reduction. Plans to fortify New Orleans levees and upgrade the system of pumping out water had to be shelved.

Bush took to the airways and said that no one could have foreseen this disaster. Just another lie tumbling from his lips. All sorts of people had been predicting disaster for New Orleans, pointing to the need to strengthen the levees and the pumps, and fortify the coastlands.

In their campaign to starve out the public sector, the Bushite reactionaries also allowed developers to drain vast areas of wetlands.
Again, that old invisible hand of the free market would take care of things. The developers, pursuing their own private profit, would devise outcomes that would benefit us all.

But wetlands served as a natural absorbent and barrier between New Orleans and the storms riding in from across the sea. And for some years now, the wetlands have been disappearing at a frightening pace on the Gulf' coast. All this was of no concern to the reactionaries in the White House.

As for the rescue operation, the free-marketeers like to say that relief to the more unfortunate among us should be left to private charity. It was a favorite preachment of President Ronald Reagan that "private charity can do the job." And for the first few days that indeed seemed to be the policy with the disaster caused by Hurricane Katrina.

The federal government was nowhere in sight but the Red Cross went into action. Its message: "Don't send food or blankets; send money." Meanwhile Pat Robertson and the Christian Broadcasting Network---taking a moment off from God's work of pushing John Roberts nomination to the Supreme Court---called for donations and announced "Operation Blessing" which consisted of a highly-publicized but totally inadequate shipment of canned goods and bibles.

By Day Three even the myopic media began to realize the immense failure of the rescue operation. People were dying because relief had not arrived. The authorities seemed more concerned with the looting than with rescuing people. It was property before people, just like the free marketeers always want.
But questions arose that the free market did not seem capable of answering: Who was in charge of the rescue operation? Why so few helicopters and just a scattering of Coast Guard rescuers? Why did it take helicopters five hours to get six people out of one hospital? When would the rescue operation gather some steam? Where were the feds? The state troopers? The National Guard? Where were the buses and trucks? The shelters and portable toilets? The medical supplies and water?

Where was Homeland Security? What has Homeland Security done with the $33.8 billions allocated to it in fiscal 2005? Even ABC-TV evening news (September 1, 2005) quoted local officials as saying that "the federal government's response has been a national disgrace."

In a moment of delicious (and perhaps mischievous) irony, offers of foreign aid were tendered by France, [Venezuela,] Germany and several other nations. Russia offered to send two plane loads of food and other materials for the victims. Predictably, all these proposals were quickly refused by the White House. America the Beautiful and Powerful, America the Supreme Rescuer and World Leader, America the Purveyor of Global Prosperity could not accept foreign aid from others. That would be a most deflating and insulting role reversal. Were the French looking for another punch in the nose?

Besides, to have accepted foreign aid would have been to admit the truth---that the Bushite reactionaries had neither the desire nor the decency to provide for ordinary citizens, not even those in the most extreme straits. Next thing you know, people would start thinking that George W. Bush was really nothing more than a fulltime agent of Corporate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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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기분 좋고 감격스러웠던 투쟁!

7.10 평택 투쟁 참가기

투쟁에 참가하는 많은 사람들의 참여하는 동기와 소감은 각각 다르겠지만, 나로서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투쟁이었다.

 

투쟁의 배경은 이렇다.
해방후 평택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았긴 대추리의 주민들이 근처에 있던 갯벌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든지 60년! 이제 그 땅마저 빼앗으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군기지 확장반대 투쟁이다.

 

과연 이 투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문제를 일개 지역주민의 문제로 보고 적절한 배상을 촉구하는 투쟁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철거민들처럼 지역주민의 생존권투쟁에 다름 아니게 된다.

그러나 이 투쟁이 우리 역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주한미군의 재배치계획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첫째, 평택 이북의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통합한다는 것은, 먼저 전쟁 발발시 북의 장사정포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고, 보복이나 반격에 의한 공포의 균형 속에서 억제되던 전쟁을, 선제공격을 하고서도 보복을 두려워 않게 되는 상태, 즉 그만큼 전쟁 가능성을 높이는 조치라는 점이다.

 

둘째, 이 시기에 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을 운운하며 신속기동군 전략에 따라 전 세계적인 미군재배치 계획의 일환으로 이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에 냉전의 시대가 끝났음에도 전 세계에 미군기지가 무수히 늘어나고 있고, 미국이 군비를 확장하고 있는 이유는 실질적인 적국이나 적대세력과의 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원과 시장과 수탈을 보장하기 위한 군사적 뒷받침을 위해서 바로 유일 패권적 군사적 제국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군사적 제국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가상의 적이 중국이고 미국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 중에 미군기지가 없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뿐 아니라 아마도 대만해협에 매장되어 있다는 석유자원도 한 몫을 했을 터이지만, 중국과 대만의 분쟁시 군사적 개입을 위해서 한반도의 미군을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남한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미군이 미군만의 결정으로 대만해협의 분쟁에 개입하게 될 때, 남한 역시 곧바로 전쟁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다.

즉 주한 미군 재배치 계획은 북에 대한 전쟁도발과 동북아 전장에 대한 개입을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한반도 뿐만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러한 미제국주의의 전략을 파탄시키는 것은 실로 거대한 의의가 있다.

 

2차대전 후로 남미를 비롯하여 수많은 진보적인 정권과 진보적인 세력들을 짓밟아 온 세력이 누구인가? 바로 미제국주의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북에서 ‘미국은 우리민족의 철천지 원수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미국은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가 아니고 ‘전세계 인민의, 전세계 진보적인 세력의 철천지 원수’라고 표현해야 옳다. 이 차이 즉 우리 민족이 아니라 전세계 인민의 원수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릇된 실천에 빠지게 된다.

 

2차대전후로 사실 반제 반미제국주의 투쟁은 활발하지 못했고 물론 거기에는 여러 까닭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라도 미제국주의를 반대하고, 그들의 유일 패권적 군사적 제국주의 전략을 파탄시키는 것은 전세계 진보세력의 엄중한 과제임이 명백하다.

 

반공 지랄의 60년의 세월을 넘어 반제의 투쟁의 싹을 틔우고 키워나가는 것은 자본의 착취의 사슬을 끊는 것만큼이나 참으로 소중한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평택의 이 투쟁은 결코 일개 지역주민의 생존권 투쟁이나, 혹은 반북책동의 저지라는 차원이 아니라, 이 시기 반제투쟁의 중대한 고리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광주항쟁때에도 감옥에 있는라 참여하지 못했던 것을 내 인생의 큰 불행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런 역사적인 투쟁이 진행되고 있고, 나 또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문정현 신부님의 노력으로 기아 화성동지들이 매일 200명씩 교육을 받아 왔다는 것, 노동자들도 단사나 조합주의적인 전망이 아니라, 전체 민중의 대의에 공감하고 결합했다는 점 또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뿐 아니라 집회에는 감상적인 민족주의와 통일만 외치던 사람들도 있었고, ‘노동자의 힘’이나 ‘사회진보연대’, ‘이윤보다 인간’ 등 계급적 좌파들도 참여하였고, 전국에서 몰려온 노동조합 동지들만이 아니라 전농과 전노련 등 수많은 농민과 노점상과 도시빈민들까지도 자신들의 일로 받아들이고 참여하고 있었다.

파병반대 초기집회 이후 이렇듯 다양한 세력이 한반도의 한 시골구석에 모여 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 동참했다는 것도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보다 더 감격스러웠던 점은, 평화적 기조와 같은 똥밟는 소리가 아니라, 역사가 대중의 연대와 단결과 투쟁으로만 전진된다는 것을 굳게 자각하고, 타격투쟁을 벌였다는 점이었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철조망을 몇미터 걷어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몇 사람이 싸우다 다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근래에 보기 드물게 평화가 아니라 투쟁을 기조로 삼았다는 점에서 나는 우리 역사의 희망을 보았다.

 

전번에 내가 쓴 울산 플랜트 투쟁 참가기를 본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순박한 무지렁이 대중들이 두달 석달씩 생계의 한계를 무릅쓰고 투쟁을 키워왔음에도 불구하고, 투항파 기회주의자들이 그 투쟁을 방해하고 팔아먹은 사실을 목도한 것이 불과 한달 전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오늘이 있기까지 수년간 이 투쟁의 싹을 키우고 준비한 허신적인 동지들에게 이 공을 돌려야 한다.

 

우리들의 영원한 투쟁을 위하여! 건배!!!
이 투쟁을 위하여 헌신해온 동지들을 위하여,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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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싸이트

최근 한달-울산플랜트노조투쟁 참관기-

최근 한달
-울산플랜트노조투쟁 참관기-


지난 5월13일이었던가…, 울산플랜트노조가 처음으로 SK앞에서 상경투쟁을 하였다. 그동안 화장실을 지어달라는 등 21세기 선진한국에서 참으로 기가막힌 요구조건을 내걸고 수십일을 싸워도 오히려 짓밟히기만 했던 그들의 투쟁이기에 이 투쟁에 연대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이 투쟁의 의미는 일개 노조의 투쟁이 아니라 독점자본과 정부가 한패가 되고 비정규투쟁을 중심으로 삼는 노동이 한패가 되어 전선을 심화시키고 있었기에, 하이닉스 매그나칩스투쟁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투쟁이었다. (기대됐던 덤프는 내분으로 투쟁을 종료했었다.)

이 투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종료할 것인가가 향후 비정규전선에 끼칠 영향은 실로 막대한 바 있었기에 그 중요성을 올바로 평가하고 제대로 키워나갈 책무가 있었던 것이었다.

여하간 5.13. 약 150명에 달하는 대오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상경단 4-50명과 다함께 30여명 기타로 이루어진 대오는 전 노동자의 분노와 연대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울산에서 싸울 때에도 연대는 제도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립된 채로 2달여를 싸워온 바 있다. 투쟁에 대한 연대가 운동의 기본이라면 이것이 오늘 이땅의 투쟁의 현주소일지 모른다.

5.23. 대학로 집회후 삼보일배를 하려던 상경노동자 전원이 연행되는 만행이 일어났다. 그날 밤 경찰청 앞에서 처음으로 자발적인 연대가 이루어졌다. 소식을 듣고 분노한 동지들이 몰려들었다. 족히 6-700명은 되지 않았을까? 덤프동지들이 마련한 주먹밥과 담요 깔판도 흐믓했고 각 연맹 동지들도 많이 결합하였다.

다음날인 5.24.밤 SK옆에서 열린 연대행사에는 1,500 여명의 동지들이 모였다.  그곳에서 유기수 동지를 보았다. 그 전주에 울산에서 고공농성이 진압되던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유동지. 누군가에게 찍혀서 인터넷에 올라온 유동지의 사진을 보면서 곱디 고운 노동운동가의 심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전날 잡혀 갔다가 오후 5시에 풀려 나왔다는 그는 세수도 안한 채 며칠째 집에 못간 꾀죄죄한 옷차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쉰 목소리로 집회를 조직하려고 집회장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집호장에서 풀려나온 나이 먹은 노동자들과 대화하면서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강인한 투쟁으로 이끌었는가를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것은 결코 그깟 더러운 처우개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땅의 주체로서 한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고, 그들은 투쟁속에서 자신들의 존엄성과 해방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하라 우리의 요구는 한갖 돈 몇푼 더 받자는 소리도 아니요, 처우 좀 개선해 달라고 니들 좆같은 놈들한테 매달려 사정하는게 아니다.  

 

울산에서 싸웠으면 잡혀가지도 않했을 텐데 괜히 서울까지 와서 연행되었다는 푸념도 했지만 전술적으로 보면 삼보일배하자는 그런 평화적인 투쟁까지도 집압하는 경찰과 노무현에 대해 여론이 분노하고 우리 편이 되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잘 된 일이다.

다음날 퇴근하려는데 유동지의 전화가 왔다. 광화문에 왔다가 일이 끝났는데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얘기다. 이보다 큰 영광이 또 있으랴…

여전히 엊그제 본 옷차림 그대로다. 아마 오늘은 일정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려는 것이려니 하고 물었더니, 확인해야 될 일이 많아 사무실에 가야만 한단다.

저녁을 먹으면서 유동지 하는 말이 ‘요새는 눈물나는 일이 너무 많아요.’ 잡혀간 노동자 중에 중국교포가 있는데 가족들도 모두 한국에 와 있고 자신만 추방될 운명이란다. 플랜트 노조에 왜 가입하고 왜 상경하였느냐고 묻는 유동지의 질문에 그 교포동지는 ‘떳떳하고 싶었단다’. 무었이 무슨 사정이 마음 착한 유동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는 다 물어보지 못했다.

다 다음날 5.27. 플랜트 동지들에게 아무런 힘도 보태지 못한 것이 너무나 짐이 되어 작심하고 울산에서 열리는 노동자대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처음에 부탁했던 공공연맹의 버스는 만원이라고 전날늦게 연락이 와서 부랴부랴 다른 동지들을 수배해서 승용차로 울산으로 향했다.
사실 이날 싸움의 의미는 실로 중요했다. 이미 80여일을 끈 투쟁. 이날이 클라이맥스가 될 터이다.

가면서 핸드폰을 통해서 전달되어 오는 울산의 상황은 심각했다. 집회의 기조를 총연맹이 투쟁이 아닌 평화로 잡자고 우겨서 관철시켰다는 얘기와, 그럼에도 텍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안 강승규가 오후 2시에 교섭장을 쫒아가서 개지랄을 했다는 소식과 울산에 도착했을 때, 합의가 되었고 승리로 마감되었다고 사기치는 것을 보아야 했을 때, 강승규 이수호 이들은 이미 노동자 계급과 투쟁의 배반자였다.

사회적 합의로 붙어먹기 위해서 행여나 투쟁이 커질까봐 온갖 지랄을 하면서, 투쟁을 팔아먹고 사기치는 이들을 뭐라고 불러야 될까? 청산주의자? 투항주의자? 기회주의자? 아니 딱하나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배신자들이라는 것뿐이다.

울산에 도착하여 건설연맹의 간부들과 울산본부의 간부들 그리고 현자 집행부들의 얘기를 종합하면서 원없이 싸우고도 사기당한 스토리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경험이 없는 노조원들과 큰 그림이 없는 집행부, 그들을 돕고자 했던 연맹, 제대로 연대하지 못한 울산, 연맹중집의 비관주의, 그리고 총연맹의 사기극 이 모든 것이 영웅적인 투쟁을 패배로 끝나게 한 것이었다.

그들은 일용직노동자이고 이미 3달 가까이 파업을 해서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렵기 때문에 마지노 선으로 노조만 인정받고 교섭은 내년으로 미루자’는 결론을 내렸다는 연맹 중집.’
‘대회가 끝나면 플랜트 노조만 따로 빠져서 도로를 점거하고 쇠파이프로 제대로 싸워보기로 했다’는 울산본부.

이미 전전날 협의에서 퇴장하면서 태도변화가 있을 때 연락하라고 했는데, 어떻게든 이 싸움을 적당히 정리하려는 총연맹은 쪽팔리게 대화를 먼저 요청하였고, 이 요청 자체가 양보하지 않는 자본가들에게 포장의 협조를 요청한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평화기조를 강요했던 총연맹과 강승규는 울산본부의 텍을 알자 부랴부랴 협의장에 쫒아가서 노동자들에게 사기치는데 협조해 달라고 사정해서 알맹이 하나없는 공허한 합의문을 승리적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니들이 아무리 사기치고 투쟁을 팔아 먹어도 그리고 오늘 당장 힘을 모으지는 못하더라도 싸여진 분노는 또다시 투쟁으로 일어설 것이다.

 

 

엊그제 6.10. 보건대학원에서 열렸던 비정규투쟁 토론.

이영섭 민노총 충북본부장의 얘기가 가슴에 와 닫는다.

사실 요즘 투쟁을 제대로 하고 투쟁이 살아 있는 곳은 충남북밖에 없다. 최근 수년간 충북대 병원, 정식품, 네슬레, 우진교통 투쟁 등 강고한 연대와 끈질긴 투쟁으로 지역연대투쟁의 모범을 만든 곳이다.

플랜트노조가 민주노조운동의 성지인 울산에서 변변한 연대없이 외롭게 싸웠다면, 하이닉스 매그나칩스 노조 투쟁은 지역연대투쟁의 모범을 보여왔다.

지난 메이데이 날에도 수천명의 전경과 맞붙어서 광장을 점거하고 주유소를 점거하고 싸웠다. 그날 민노총은 광화문 집회에서 청주에서 노동자들이 피터지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중들에게 한마디도 발표하지 않았다. 개새끼들!!!! 행여 투쟁이 알려질세라 행여 투쟁이 발전할까봐, 행여 지들보고 싸우라고 할까봐 총연맹의 집행부라는 놈들이 온갖 지랄을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 주둥아리로만 투쟁과 연대를 외치는 이 잡놈들을 그냥 개새끼들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여하간 이영섭 본부장의 말,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투쟁을 발전시켜 올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수년간의 연대투쟁의 경험과 현장과 투쟁 속에서의 꾸준한 맞춤교육, 거기에서 성장한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두터운 활동가층, 이것이 답입니다. 그런데 이달 22일과 29일 전국대회가 잡혀 있는데 지역연대만으로 해결하기가 너무도 벅찬 이 싸움을 전국적으로 발전시켜 전선을 만들어 내야 되는데 총연맹이 나서서 플랜트 노조처럼 꼬추가루 뿌리고 팔아먹지 않을까 그것이 제일 걱정됩니다.

이제 기회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총연맹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공조직을 넘나드는 투쟁하는 활동가조직을 건설해야 됩니다.’

그래! 더 이상 그들을 국민파니 연합파니 하면서 씹지말자. 더 이상 그들을 기회주의니 타협주의니 출세주의자니 하면서 욕하지 말자. 선거에 연연하지도 말고 우리끼리 배짱맞는 놈들끼리 속편하게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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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요 며칠 플랜트 노조 따라다니느라고 바빴다.  울산에도 내려가 결합을 해야지… 심장은 터질 듯한데 투쟁의 중심에 있지 못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회에 결합하여 쪽수채워주는 것이 전부다. 그거라도 해야지…

 

요새 읽은 책들

 

바만 아자드 / 영웅적 투쟁과 쓰라린 패배
장시복 / 세계화 시대 초국적 기업의 실태
프리드만 /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경제저격수
그 외에도 더 있었을 텐데 제목도 생각이 안나는군

 

많이 읽기보다는 읽고 꼭 정리하는 것이 중요할 것같아 독후감을 쓰기로 하고서도 제목도 제대로 기억을 못하고 있으니 하물며 내용이야…

 

ML주의자라면 바만 아자드의 글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
10월혁명이 성공한 이후 전시공산주의와 NEP 그리고 스탈린에 의해 진행된 급속한 공업화 모델,  후루시쵸프의 잘못된 스탈린 비판과 급속한 소비성장 모델의 문제, 그리고 발달한 사회주의 모델과 안드로포프, 뒤를 이은 고르바쵸프등의 반동에 따른 사회주의의 포기에 대해 절절하게 공감이 가게 쓴 역작이다.

무엇이 문제엿든가?  경제법칙과 화폐와 시장법칙은 하루아침에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 낮은 단계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필요에 따른 분배가 아니라 능력과 일한 양에 따른 분배가 경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노동대중의 자발성과 하부단위의 자율성, 나아가 당과 국가의 분리 즉 당으로서의 기능과 국가의 기능의 분리가 제대로 안되어 발생한 여러 문제들을 단지 스탈린 개인의 악행과 관료주의로 돌리는 것은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에서 국체적인 권력과 정책을 평가해야 된다는 점에서 시초부터 잘못되었다는 점을 얘기하고 있다.

전위는 끝까지 행정권력의 비판자로서의 역할과 대중의 조직 및 교육의 역할을 맡아야지 행정의 역할을 맡으면서 권한의 집중을 추구함으로써 비판자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서 그에 기생하는 관료층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새로이 시작되는 혁명이 처한 위치는 소련과 다를 것이다. 온갖 부르주아적인 제도와 유물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가운데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훈고파나 청산파 모두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읽은 지 오래되서 감동만 남아있고 내용이 별로 생각이 안나는 군. 나중에 다시 정독을 해봐야 겠다.

 

프리드만에 대하여는, 초국적 자본의 축적에 순응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통제가 아니라 개방을 함으로써 생산자본만이 아니라 투기자본까지 몰려들어와 주식시장 등 경제가 투명해지고 그에 따라 합리적으로 자본이 발전한다는 논리를 편다.  그대로라면 맞는 말인데 그 부작용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구 사회주의권조차도 세계체제에 순응하기 위하여 개방을 한다는 것이고 개방을 한 이상 개방의 논리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점과, 과연 세계화의 극복의 대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경제저격수는 제국주의 특히 미제가 제3세계의 자원등을 약탈하기 위해 먼저 경제적인 술책(저격수)가을 벌리고 안되면 자칼이라는 암살 등의 방법을 사용하고 안되면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주적인 정부를 뒤집어업고 종속적인 정부를 세운다는 점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때에 제국주의의 의도와 관련해서, 그 이익의 관점은 자원,  군사적 요충, 노동력의 수탈, 상품시장, 과잉자본의 해소처로서의 역할을 강요하는 바, 그 여건에 따라 반제의 극복방법이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자주적인 권력이 자원의 수탈과 종속적인 경제, 빈곤과 저개발의 재생산의 악순환을 끊는 방법은 단절과 자주적인 공업화의 방안과 ALBA와 같은 대안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에 와있는 제국주의 자본의 이해관계는 어떠한가? 군사적인 요충지로 활용하고 무기시장으로서의 역할을 강요하는 점을 제외한다면, 한국은 남미와 많은 점에서 다르다. 초국적 자본도 성장하고 자본수출까지 하고 있으며 상품시장과 값싼 노동력의 착취를 위해서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자주적인 정부가 이러한 초국적 자본과 동거할 수 있을 것인가는 그들 나라의 입장에서 살펴 볼 일이다. 어찌됏건 한국에서는 국제투기자본의 극복과 과도한 수출의존의 극복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요하다.

FTA의 영향은 어떻게 평가하고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는 러다이트 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 볼 일이다.  북유럽의 사민주의 정권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취하는 것은 종국적으로 자본의 승리를 말해주는 것인데, 노동의 승리란 단지 생산수단의 사회화나 국유화만으로 혹은 복지정책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즉 우리는 생산관계만을 고찰하고 있는데 생산력이란 사실은 구체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생산력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성의 반도체나 현대의 자동차 공장을 국유화한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오늘날 사회화나 사회주의의 대안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 어떻게 판매나 교환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한마디로 경제를 전인민의 생산력을 놓고 볼 때에 시장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인민의 필요를 위한 생산을 추구한다고 할 때, 과연 삐삐가 핸드폰이 되고 핸드폰이 DMD가 된다고 했을 때, 그러한 유의 생산력의 성장이 진정 인민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냐? 바꿔 말하여 DMD가 없으면 인민이 불행한가의 문제이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생산과 노동을 하는가?  참다운 인민의 복지와 행복은 무엇인가?  세계경제나 한국경제를 보았을 때, 과잉자본은 투기를 하고 불로소득의 몫을 키우고 결국은 보다 세련된 소비수단과 건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국민소득이 만달러이건 4만달러이건 그들 대중의 생활수준과 양식은 비슷하다.  안락한 주거와 편리한 가전제품과, 사치스럽게 치장하는 것과 비싼 오락과 여가를 상품으로 구입하는 것외에는 없는 듯하다.

 

200달러도 안되는 베트남에서도 무상의료를 실현하고 있다면 무상교육과 의료 보육의 문제는 생산력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삶의 가치관에 관련된 문제인데 답은 무엇일까?

 

이외에도 일자리는 어떻게 창출되는 것이냐? 생산력의 실제란 무엇이냐? 세계체제속에서의 바람직한 일국경제는 무엇이냐? 비교가격론의 온당한 평가는 FTA와 관련하여 어떠한 것이냐? FTA의 극복방안 혹은 세계화의 제대로 된 극복방안은 무엇이냐? 아무래도 자본론과 정치경제학비판을 다시 읽어봐야 할 듯하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고 어떻게 가야하는 지에 대해 이제 즉자적인 운동을 극복하고 대자적인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은 결코 훈고파나 청산파가 제시할 성질은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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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대하여

  • 분류
    건설론
  • 등록일
    2005/03/17 17:13
  • 수정일
    2005/03/17 17:13
  • 글쓴이
    서른즈음에
  • 응답 RSS

요즘 너도 나도 사회주의를 얘기한다. 그러나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얘기할 때,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과제이고 난문제인가를 생각할 때, 과연 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얘기하고 있는지 의심이 간다.

 

최근에 읽은 몇권의 책들-스위지와 베텔하임의 사회주의 이행논쟁과, 노브의 소련경제사, 노브의 실현가능한 사회주의라는 책을 읽은 독후감은 이렇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극복없이는 사회주의를 얘기할 수 없다는 것.
소련과 동구가 왜 망했는지 규명하고 누구나 공감할만한 올바른 건설방도가 마련되지 않는 한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
절대다수의 대중이 사회주의를 갈구하지 않는데, 혹은 확신하지 않는데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염불이라는 것.- 이것은 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고 기본모순이 노자간의 모순이라고 했을 때, 필연적으로 pt혁명단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맨날 주요모순이나 들먹이는 단계론이 아니라 모든 운동이 기본모순의 해결을 위한 사회주의 운동의 전면화에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87년 이후 지나간 20년간 우리는 전면화에 실패한 혹은 전면화를 이루지 못한 것의 원인을 근본부터 반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스탈린 치하에서 공업을 위해 농민에 대한 악랄한 착취와 억압이 있었다는 것-소위 사회주의 원시적 축적문제-
혁명이 지주를 몰아내었을 뿐, 해방이 아니라, 소수의 pt당이 다수의 농민에 대한 독재로 변질되었다는 것.
계획경제가 명령경제가 되고, 민주주의와 법치의 소멸 뒤, 거대하고 무능하고 기생적인 당관료들의 채찍질에 의해 중공업이 발전되고 건설이 이루어졌다는 것.

 

이 체제를 어떻게 볼것이냐에 대하여, 혹자는 국가자본주의라고 얘기하지만, 우리가 고유의 의미로 쓰는 자본주의와 자본가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결코 국가자본주의나 관료자본주의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물론 그들의 얘기를 좀 더 들어봐야 겠지만…
그렇다면 국가사회주의였는가? 사회주의가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획경제를 의미할 때, 확실히 그것은 사회주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과 소외를 극복하는 운동이라고 할 때, 본건적 자본가적인 착취는 없었는지 몰라도, 노동자와 농민이 그들 운명의 주인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변형된 노동자국가론이나 혹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변종으로 규정할 것인가?

 

자유와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사회보다 더 발전해야만 한다. 결국 대중이 수동적으로 동원되고 억압되는 대상인 한 민주주의는 없다.
맑스는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하여 남겨 놓은 게 없다. 다만 엥겔스와 함께 모든 악의 근원을 사적 자본주의적 소유로 보고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주장하고, 무정부주의적인 생산의 폐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계획화를 얘기하였을 뿐이다.

 

나의 지금까지의 결론은 이렇다.
국가가 사라져 갈 뿐이듯이 상품과 시장 또한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기에 걸쳐 그 역할이 축소되고 사라져 갈 것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압도적인 권력을 갖은 점령군이 아닌 이상 사회화 혹은 국유화가 단기에 이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가치법칙은 폐절되면 재앙을 낳는다는 것. 중앙집권적인 계획은 다양한 사용가치를 갖는 품목을 계획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것. 계획은 양적인 것에 가능하지 질적인 것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철에 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의복과 신발을 보라. 각양의 재질과 디자인과 색상의 상품이다. 그것들은 개개의 생산단위에서 시장을 위해 결국 소비자의 기호를 위해 경쟁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상의 몇벌 하의 몇벌로 합산하고 계획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력이나 철강, 곡물처럼 양으로만 규정해도 문제없는 것이 있다. 결국 질적인 것, 다양성, 기호는 가치로 표시하는 외에 수치로 표시한들 별 의미가 없고, 결국 계획과 소비자의 만족과는 괴리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계획이란 가능한 한도내에서 끊임없이 넓혀가고 심화되는 것이지 모든 것이 국유화되었다고 일거에 실천해서는 안되는 문제로 본다. 이 문제는 개개 생산단위의 자율성과 거시경제적인 접근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한다.
결론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사회적인 긴박성이 있는 만큼 사회화와 계획화의 영역을 넓혀가는 과제이고, 그 긴 시간동안 시장과 가치법칙과 소생산자 혹은 부르주아까지 온존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사회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피지배계급을 얼마나 수탈하고 억압할 것인지 혹은 관용을 베풀 것인지는 역관계와 전망에 따라 다를 것이다. 사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에 노동계급의 이익과 입장이 관철되고, (여기까지는 경제주의라고 할 수 있다), 착취와 억압과 소외의 완전한 극복을 위해 프로그램을 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 이것이 이행기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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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가, 역사와 전망> 인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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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가 (Billy Bragg






international

[노래제목] : 인터내셔널가 (Billy Bragg)



[노랫말] :
1.
Stand up, all victims of oppression
For the tyrants fear your might
Don't cling so hard to your possessions
For you have nothing, if you have no rights
Let racist ignorance be ended
For respect makes the empires fall
Freedom is merely privilege extended
Unless enjoyed by one and all.

[후렴] So come brothers and sisters
For the struggle carries on
The Internationale
Unites the world in song
So comrades come rally
For this is the time and place
The international ideal
Unites the human race

2.
Let no one build walls to divide us
Walls of hatred nor walls of stone
Come greet the dawn and stand beside us
We'll live together or we'll die alone
In our world poisoned by exploitation
Those who have taken, now they must give
And end the vanity of nations
We've one but one Earth on which to live
And so begins the final drama
In the streets and in the fields
We stand unbowed before their armour
We defy their guns and shields
When we fight, provoked by their aggression
Let us be inspired by l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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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2004/11/03

  • 분류
    단상
  • 등록일
    2005/03/13 15:03
  • 수정일
    2005/03/13 15:03
  • 글쓴이
    서른즈음에
  • 응답 RSS
아침에 한겨레에 와다 하루끼의 글이 실렸다. 최근 공개된 소련의 자료속에서 코민테른과 한국전쟁 등의 자료를 뒤지다가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의 대담록을 확인했다는 글이었다.

1952년 김일성은 정전을 원했고 박헌영은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까닭은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남노당이 기반인 박헌영으로서는 자기의 정치적인 기반의 몰락을 의미하는 정전을 원하지 않했을 것이다. 이 때에 중요한 것은 판단의 기준이 남북의 민중의 삶이 아니라 자기의 입지였다는 점이다.

그가 후에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숙청을 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증거가 명백했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 또한 스탈린이 사용했던 정적을 제거하는 더러운 방법의 희생양이었을 것으로 생각은 된다.

 

유명한 진보적 학자였던 김대환이나 노동운동가였던 김문수가 변절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변절했다고 보지 않는다. 조국과 민족, 혹은 민중과 운동을 위해서 차선 혹은 차악의 선택이었다고 강변하는 그들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다. 나는 그들이 항상 운동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의 그릇에 따라서 일찍 드러나기도 하고 늦게 드러나는 차이는 있겠지만, 박헌영이 조선의 민중보다 자신의 입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항상 자기를 먼저 생각하면서 운동을 위해 산다고 대중과 자신을 기만하고 살아온 것 뿐이다. 이건 고문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동지를 분 것하고는 다르다.

 

 

한 2-3년 전에 꽤나 유명한 지금은 민노당의 최고간부이기도 한 어떤 운동가를 만난 적이 있다. 여러 얘기 끝에 나보고 부위원장도 시켜줄 테니까 자기 지역구에 와서 같이 일하자고 한다. 이 얘기 속에 그가 그 지구당을 자기 사유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가끔 어떤 지구당이나 운동단체가 (보수당은 물론이고) 봉건영주들의 당이나 운동체라고 느낄 때가 있다.

모두의 운동, 함께하는 운동이 아니라 지도부 몇사람이 좌지우지하는 혹은 끼리끼리 음모가적으로 작당질하는 운동, 이런 모든 것들이 모두를 위하고 민중을 위하고 운동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실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 혹은 자기 소그룹이나 종파, 당파를 중심에 두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 나는 그 속에서 해방되지 못한 인격 즉 소외된 인격을 본다.

 

이들과 대중의 차이는 무었일까? 대중들 역시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를 먼저 생각하지만 최소한 자기나 남에게 자기 행동이 남이나 민중을 위한 행동이라고 기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착한 사람은 어려운 사람 보면 도울 줄도 알고, 나눠 먹을 줄도 안다는 것이다.

 

보수신문을 보면 여야의 정쟁과 정책이 나오고 배경설명이 나온다. 수도이전이 충청권 표심을 위한 것이었다는 둥, 이명박이나 이해찬이 대권을 염두에 두고 그런 행동을 했다는 둥, 한마디로 정치가 한 개인을 중심에 두거나 한 정당의 당리당략적인 관점에서 보기를 강요한다. 아니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진보와 운동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이런 사고에 물들었을지도 모른다. 싸우다가 닮는다고 했으니까..

 

자기를 앞세우는 것,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것, 자기중심 혹은 자기가 속한 그룹이나 조직이나 당파를 먼저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병이다. 어떤 운동체나 조직이 자기 것이라는 생각, 혹은 자기의 공적과 기여, 자기 몫이 있다는 생각, 조직의 대의보다는 자기 입지나 위치를 앞세우는 생각, 이런 모든 것들이 병이다.

 

결국 운동 역시 자기를 버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불교에서는 아집을 버리는 것, 내가 있다는 생각, 내가 잘났다는 생각, 내가 공이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들을 버리라고 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모든 진리는 나라는 게 없는 것이다)나 무주상보시 無住相布施(나도 없고 남도 없고 주었다는 생각도 없이 베풀어라) 등이 그런 삶을 표현하고 있다.

 

어찌됐건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도덕뿐만 아니라 엄청 높은 수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게 누가 책을 권하라고 한다면 나는 금강경과 최인호의 길없는 길을 권하고 싶다. 금강경은 모든 것을 다 버리라는 혹은 진리에는 내가 없다는 것과 세상에는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양나라(수나라 다음 왕국)의 무제를 만났다. 양무제가 불심이 깊어 많은 탑과 절을 지었기에 자신의 불심과 공덕을 자랑할 만 하였다. 양무제 왈 ‘스님 저의 공덕이 어떠합니까?’ 달마 왈 ‘무(없다)’

제왕의 심기를 건드린 달마가 신변의 위험을 피하고자 소림의 깊은 동굴에 가서 9년동안이나 면벽하였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는 얘기다. 물질적인 것, 내가 뭔가를 했다는 것, 그런 모든 것이 참된 가치는 없다는 게 불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경허스님은 구한말의 한국불교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로마교황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제자 만공에게 ‘자 이제 떠나자’고 말했다. 교황과 맞먹는 대선사라는 지위도, 심지어 깨달음의 세계도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니 다 버리고 가자는 뜻이다.

경허는 혼자서 시골촌부로 꾸미고 북만주의 어느 시골농가에서 훈장일을 하면서 밥을 얻어 먹고 살다가 입적하였다. 원효가 무애 無碍(걸림이 없다)가를 불렀다지만 제대로 된 무애는 경허가 실천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운동가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 헌신한 성직자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버렸다는 생각과 헌신했다는 생각까지 다 버려야 제대로 된 경지다.
나는 언제쯤이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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