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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지성론

 

다중지성론
 
다중지성 혹은 떼지성이란 개념은, 대중은 스스로 본능적으로 가장 창조적이고 훌륭하게 지성에 도달하고 실천한다는 주장이다.
다중지성과 관련하여 대중의 자율, 자주성, 창조성은 고무되어야 하지만, 대중의 자율을 (변혁을 추구하려는 세력의) 목적의식적 노력에 대립시키고 적대시키려는 조정환의 태도는 이택광과의 논쟁에서는 반지성적이라고 비판되었다. 기존 운동권을 비난하고 대중을 예찬하면서 양자를 대립시키려는 이런 태도는 무엇을 뜻하는가?
 
대중의 자발적인 노력이 창의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공이 많으면(다 중심 혹은 중심없음)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과, 대개는 목적의식적인 집단적 노력이 훨씬 더 창의적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자발성에 맡겨버리는 다중지성론의 한계는 명백하다.
 
중심이 없는 매끄러운 다중 속에 노동계급의 주도적이거나 중심적인 역할을 부정하려다 보니, 다중지성이 발휘되어 반자본과 반세계화를 위한 대탈주나 봉기가 일어날 날을 기다리자는 입장이니, 자연발생적 저항을 예찬할 수 밖에 없겠지만, 투쟁을 준비하고 키워나가려는 중심과 계획이 없는 저항의 한계는 명백하다.
 
당장 용산만 하더라도 여러 투쟁단체들이 범대위를 구성하고 연대하여 목적의식적으로 투쟁을 전개하고 있음에도 한계에 부딛치고 있는 판에, 이러한 노력을 하지 말고 대중의 자발적 투쟁을 기다리자고? 다중지성에 맡기자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일까?
네그리가 주장하듯 규율과 위계적 구조를 갖는 조직인 범대위가 비민주적 조직인가? 대중에게 혹은 소속한 개인 활동가들에게 억압적인가? 그들은 왜 현실과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을까?
 
다중지성론이란, 뭉치지도 말고, 목적의식적인 노력으로 집단적인 투쟁과 계획의 중심도 세우지 말고, 다중의 창조적 자발성에 방치하자는 주장이 된다. 다중지성이 훨씬 창조적이고 훌륭하다면 혁명세력이 앞장서거나 노력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촛불시민 하나 하나가 스스로 알아서 잘 할 것이라는 얘기지만, 만약 민주노총이 오천이나 만명만 앞장서서 밀어부쳤으면 투쟁이 어떻게 되었을까? 개인의 자율과 창조성을 강조하면서 뭉치지 말자는 주장(개인주의)과 규율을 갖는 대중적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집단주의)의 차이를 굳이 비교할 필요가 있을까?
 
내버려두면 대중은 스스로 알아서 잘 할 수 있다는 수작이 멋진 말처럼 들리고 참으로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민주적인 주장으로 들리겠지만, 작년의 촛불항쟁이든 용산투쟁이든 거대한 적과의 투쟁 앞에선 이상한 주장이 되어버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국가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황에서 대중 혹은 개인들의 자율과 자발성에 맡기자는 수작은 목적의식적 투쟁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을 장악해서 그 반민주적 성격을 바꿔나가자는 노력을 부정하는 자율주의자들의 궤변이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 남미에서 반동권력에게 대중을 맡기는 황당한 결과를 가져온 것은 차치하고, 궁극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건 맑스가 밝힌 코뮤니즘 사회의 이상이다. 혹은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사회라고도 표현한다. -을 이루는 대중의 자기지배의 이상의 실현방법에 대하여, 국가나 권력을 주관적으로 부정하든지(자율주의) 혹은 즉각적으로 부정하자든지(아나키즘) 그런 주장과 실천이 오히려 정반대의 현실 즉 반동적 결과밖에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은 더 논쟁의 대상도 안되는 사안이다.
 
개개인의 진정한 자유란 대중을 억압하는 계급과 국가가 존재하는 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들 억압적 계급과 국가는 개인이나 소그룹이나 네트워크로 묶인 공동체의 힘으로 극복되거나 타도될 수 없다는 것도 명확하지 않은가? 오직 오직 대중의 집단적 힘과 조직적 투쟁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그 조직이 어떻게 민주적인 조직으로 될 수 있을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인데-나는 그것을 파리코뮌이나 소비에트에서 보여준 혁명적 민주주의 혹은 평의회 민주주의로 보지만-, 이런 집단적 노력을 부정하는 일체의 주장은 인류의 진정한 해방을 떠들지만 그들이야말로 인류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투쟁을 방해하는 주장이 된다.
 
단결하고 투쟁해야 할 때 개인의 자유, 자발성, 자율을 운운하며 뭉치지 말자는-뭉치면 위계제가 발생하고 개인의 억압이 된다는 이상한 소리가 네그리의 핵심주장이다.- 지극히 개인주의적 결국 소부르조아적 헛소리가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지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투쟁하는 사람들이 네그리와 조정환의 주장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는, 가령 해고는 살인이라며 투쟁하는 쌍차 노동자들에게 기껏해야 자본의 노예가 되려는 투쟁이라고 빈정댄다든지, 촛불들이나 철거민들이 공권력의 방패와 군홧발에 짓밟히고 있을 때, 혹은 FTA(세계화)로 절망에 빠진 농민들이 맞아 죽거나 자살을 하고 있을 때, 국가권력과 싸우거나 (세계화에 저항하는) 국지적 기획이 무의미하다면서, 투쟁하는 조직(투쟁을 책임지고 앞장서는 결국 혁명적 조직이나 당적 조직)은 죽어도 만들어서는 안되고, 자율공간이나 만들자고 헛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공권력에 짓밟히고 있는 판에 국가와의 싸움이 무의미하고 자율공간이나 만들어야 한다고 우기고 있지만, 반자본의 의식은 자본이나 국가에게 핍박받거나 투쟁할 때 생기는 것이지, 자본으로부터 도주한 혹은 절연된 공동체에서는 생겨날 수가 없다. 기껏해야 공동체에 안주하는 소부르조아나 만들 뿐,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 자본과 시장에 적응할 수 밖에 없고, 못하면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수많은 역사적 사례로 결론이 난 사안이다.
 
노동을 거부하고 탈주하자라는 수작이 멋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실 속에서 삶을 위협받는 노동자들에게는 참으로 개 같은 수작이다. 투쟁의 논리가 될 수 없는 것을 참다운 실천이나 투쟁이라고 포장하여 요사스러운 말로 전선을 교란시킨다. 혁명적 시기가 아닌 일상적 시기에서 노동운동을 포함한 모든 생존권투쟁은 기본적으로 방어적이고 적의 존재를 인정하는 개량적 투쟁이다. (다만 타협적이냐 비타협적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이건 투쟁의 ABC이고 한번이라도 싸워본 사람이라면, 한번이라도 생존을 위협당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네그리와 조정환의 말에 구역질이 날 수 밖에 없다.
 
자율주의건 아나키즘이건 처음 들을 땐 혹은 얼핏 들을 땐 참으로 멋진 말로 생각되겠지만, 진정으로 인간과 인류의 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아니 현실의 자그마한 투쟁에서라도, 그들의 주장이 상식과 경험에 반한다는 것, 그들의 주장대로 실천하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되어버린다는 것,
진정한 인간과 인류해방의 이상이란 집단적 노력을 혐오하는 개인주의적 소부르조아적 발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민주주의의 원칙이 관철되는 집단주의적 노력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 억압적인 계급과 국가의 지배하에 있을 때 개개인들이 주관적으로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는 것(자율주의) 혹은 즉각적으로 파괴해버리자는 무책임한 주장(아나키즘)이 오히려 억압세력에게 복무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
 
이런 모든 것은 진실로 억압받고 소외받는 대중과 한 순간이라도 진지하게 함께 투쟁해보면 안다는 것. 누군가 어떤 생각이나 사상을 갖는 것은 자유이겠지만 단순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을 진실로 실현하기 위해서 혹은 투쟁과 저항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진지하게 고민하고 반성할 실천할 필요가 있다는 것. 자신과 다른 주장에 장점도 있지 않을까 곰곰히 경청할 필요는 있겠지만, 세상에 일리도 없는 주장은 없다는 것과 수많은 나뭇잎 중 어느 하나가 멋진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본질적 주장 혹은 그 몸체와 뿌리를 봐야 한다는 것.
 
핵심은집단적단결의노력속에서대중의자주성과창조성그리고집단지성을어떻게보장할것이냐인데, 그렇다면목적의식성과집단적단결을부정하고수평적네트워크를얘기하면서자발성(다중지성)만을찬양할것이아니라, 자발성과목적의식성을대립시키지말고통일시켜야하고, 집단적노력을불가능케하는절대적민주주의가아니라대리주의를극복한직접민주주의를추구하는혁명적민주주의여야한다는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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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과 조정환 논쟁

 

이택광과 조정환 논쟁
 
지난 5월 조정환이, ‘그대는 촛불을 왜 끄셨나요’라는 책의 일부 필자들이 촛불을 비판하는 것은 무능한 좌파들의 불편한 심기 때문이라고 공격하자, 이택광이 조정환의 ‘미네르바의 촛불’이 3류 수필집보다 못하다고 혹평하면서 한달간에 걸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택광은 모두가 부자되고자 하는 욕망이 이명박을 선택한 것처럼, 촛불을 중간계급의 정상국가에 대한 욕망으로 본다. 대통령이나 정치가 비정상적인 것이 고쳐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욕망론은 대중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측면이 있다. 나는 내가 주장하는 소외론이 더 나은 관점으로 보지만 다음으로 미루자.
 
어쨌든 촛불이 중간계급 혹은 소부르조아 운동이고 좌파적 운동이 아닌 것은 명백한데, 좌파운동이 아닌 것을 좌파운동이 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도 문제지만, 좌파운동이 아닌 것을 좌파운동이라고 찬양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택광은 있는 그대로의 촛불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으로 분석평가 하는 것과, 촛불을 비난하는 것은 다르다고 주장한 것인데, 촛불을 비판하거나 봉기로 평가하지 않으면 운동도 모르는 무능한 좌파라는 조정환의 반론은 불쾌감만 주었다. 조정환이 맑스를 30년간 읽었다느니 네그리를 10년간 읽었다는 소리는 자신의 인격의 수준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결국 논쟁은 촛불이 무엇이었느냐의 규정으로 넘어간건데,
놈현 서거시 촛불의 절대다수가 보여준 추모와 추앙의 감정이나, 친일파나 민족반역자와 같은 담론이나 그에 이은 안중근 추모나 시주모에 쏠리는 것을 보면, 촛불을 반자본, 반체제, 반세계화 투쟁의 담지자인 다중(그것도 빈자의 정체성을 갖는)이라고 찬양하는 조정환은, 이택광에게 뇌내망상증 환자라고 공개적으로 씹히는 수 밖에 없었다.
 
네그리에 의하면 다중은 비물질노동에 종사하는 창조적인 부의 생산자이고, 빈곤의 정체성을 갖는다고 엄격하게 정의한다. 또한 다중지성으로 반자본 반세계화 과제를 창조적으로 수행할 담지자이기도 한다.
결국 촛불이 다중이라는 주장은, 촛불이 노동자이거나 생산자로서 빈곤의 정체성을 가지고 광장에 나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촛불이 광장에 나온 것은 명박으로 상징되는 통치세력에 대한 분노나 정의감 때문이지, 가난해서(빈자의 정체성 혹은 분배문제) 나온 것이 아님은 명백하지 않은가? 쇠고기나 국가행정의 소비자라면 혹시 몰라도 생산자와 노동자의 정체성이 없었던 것도 명확하지 않은가?
 
(촛불이나 4대강, FTA 세계화, 전쟁반대 등의 의제나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의 문제는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는 의제들이고, 노동자나 생산자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 혹은 중간계급의 운동으로 현상한다. 착취관계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자본과 국가의 수탈과 억압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는 대중운동론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의 자본과 국가의 운동을 분석하는데서 출발해야 하는데, 연초부터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약간의 문제가 남아있다.)
 
더구나 명박보다 관대한 통치자의 상징인 놈현을 추앙하는 것이 부르주아 대리주의의 극단(이것은 결국 애국주의와 국가주의에 경도된다)인데-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혹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으려는 것이 아니라, 혹은 자본이나 체제나, 국가를 뛰어 넘으려는 것이 아님은 최근의 후보단일화운동이나 시주모와 같은 친노세력과의 결합에서도 명백하지 않은가?
 
결국 촛불은 네그리와 조정환이 정의한 반자본, 반체제, 반세계화 투쟁의 담지자이고 빈자의 정체성을 갖는 다중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슨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인 코뮌에의 지향을 내포하는 다수의 촛불이 있었다느니, 촛불이 다중이었다고 주장하고 창조적이었다고 예찬하면서, 평범한 시민들의 운동을 자칭 첨단 좌파운동인 것처럼 혹은 그런 경향이 있는 것처럼 찬양하는 수작은, 마치 김정일이 촛불을 보고 드디어 남조선 인민이 미제의 앞잡이들에게 떨쳐 일어났다고 하는 소리와 비슷하다며 순진한 대학원생들 현혹시키지 마라는 비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택광과의 논쟁을 보면, 조정환이 ‘미네르바의 촛불’이라는 글을 썻다가 3류 수필집이라고 혹평당하자, 비겁한 반론이나 펴다가 완패한건데, 학자들간의 논쟁에서 까마득한 후배에게 정신병자로 공개적으로 규정당하고도 대꾸도 못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것도 감정적 매도가 아니라 학문적 결론으로…
 
기실 ‘미네르바의 촛불’의 머리말에는 조정환이 글을 쓴 입장과 목적이 밝혀져 있다.
‘보수세력만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자주의자, 급진주의자가 신성동맹을 맺어, (위대하고 영원한) 촛불을 광기나 유령이나 중간계급운동으로 공격하면서 관에 넣고 못질을 하고 있으므로’ 자신이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말은 조정환이 ‘피라미드와 촛불’이란 글에서 ‘사노준 사노련까지 대의주의 세력이고 대다수 촛불은 자신과 같은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적 감수성을 가졌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작년 여름 광화문에는 촛불의 깃발만이 아니라 온갖 좌파와 운동권의 깃발이 함께했다. 이후에도 기륭이든 용산이든 쌍차에서든 좌파들이 촛불을 이해하고 함께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이들을 촛불과 대립시키면서, 촛불이 공권력에 짓밟히고 있을 때 국가권력과의 싸움이 무의미하다면서 구경이나 하던 자들이 얼렁뚱땅 자신들만이 촛불의 벗인 냥 나선다. 좌파와 운동권은 촛불의 적이고 자신만이 촛불의 동지라는 이런 수작만큼 뻔뻔한 모략질과 이간질이 있을까? 조정환은 인생을 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을까? 사실 조정환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당하기 그지없는 과장과 왜곡 그리고 소부르조아적 선동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니 3류 수필집보다 못하다고 소리를 듣는거고…
 
네그리와 조정환의 주된 주장은 좌파나 운동권이나 사회주의 세력들의 주장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 자본과 국가에 대한 투쟁을 건설하자고 할 때 투쟁이 무의미하다면서 도주 탈주 혹은 자율공간이나 얘기한다든지, 좌파들이 진정한 개개인의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 우리들이 맺어야 되는 사회적 관계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탐구하고 투쟁할 때, 절대적 민주주의나 차이에 대한 존중 운운하면서 결국 속박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이런게 소부르조아적 가치이다)를 선동하면서 단결하지 말고 투쟁하지 말자고 한다.
 
우리 모두의 사회를 우리 모두가 단결해서 바꾸자는 집단주의 혹은 집단적 민주주의(그속에서 관철되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한사람 한사람의 소중한 개인의 존중!-맑스가 말하듯 개개인의 자유로운 연합이란 이상이나,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사회,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성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사회적 관계의 극복을 위한 집단주의적 실천-혁명적 민주주의)와의 차이를 개인주의적인 소부르조아지의 삐뚤어진 심성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의 신도가 아니기 때문에 맑스주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억압받는 대중을 위해서 투쟁한다. 투쟁과 실천 속에서 반성하고 검증받고 고쳐나간다는 게 맑스주의의 기본인 실천의 변증법이다.
결국 잘못된 이론에 기반했다는 맑스주의자는 항상 억압받는 대중과 함께 실천하고 반성하면서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측면을 고쳐가지만, 아나키스트와 스탈린주의자도 실천하면서 자기 과오를 고쳐가지만, 실천의 철학이 아닌 자발성주의(결국 회피주의)인 네그리주의자는 실천이 무의미하므로 좌파와 자신들의 대립점(즉 좌파나 맑스의 부정적 측면)을 밝히는 것이 존재이유가 된다. 여기에서 그들이 촛불에 아첨하면서 좌파를 모략질하고 대중이나 촛불과 이간질시켜야만 하는 슬픈 운명이 밝혀지는 것이다.
 
결국 용산과 쌍차 혹은 촛불에서 보듯, 좌파는 억압받는 대중과 함께 하면서 투쟁하고 있을 때, 단결해서는 안되고 투쟁이 무의미하다는 자칭 첨단 좌파인 조정환은 소부르조아적 가치나 선동하면서 좌파를 씹는 일이 자기 운명일 수 밖에 없다.
 
고전은 차치하고 허다 못해 스탈린 시절의 철학교정에도 (경제나 토대가 아닌!)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과 반작용을 언급하고 있고, 그람씨도 시민사회론과 헤게모니론(이 두 이론은 경제결정론의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을 얘기하고 있음에도 맑스주의가 경제결정론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스탈린이 자신의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생산력우선주의(이것은 경제가 발전되야 잘 살수 있다는 박정희의 경제성장론과 동일한 통치선전용이다)를 주장한 것 역시 경제결정론과는 맥락이 다르다. 맑스주의가 국가주의라는 비난이나, 국가에 대한 사회의 즉자적 대립과 독립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는, 국가가 사회로부터 태어나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소외시켜간다는 국가의 폐지와 사멸에 관한 엥겔스와 레닌의 통찰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네그리와 조정환은 물론 그의 제자들까지도 맑스주의를 비난하는 글을 발견하면 기쁜 마음이 되어 날뛴다. 고전 한번 읽어보지 않은 채로 그 주장의 실천적 함의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뉴라이트 게시판 수준의 모략하는 글을 인용하면서 한심한 소부르조아적 이상이 뭔가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즐거워한다.
 
현실과 실천을 보는 눈 그리고 반성과 비판의 방법론은 혼자 힘으로 얻어지기 어렵다. 인류의 이상을 위한 이론과 실천은 탁상머리 지식의 범주가 아니다. 지식의 다과에 달린 문제도 아니고 고전을 읽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진정으로 비판적 지성을 얻고 싶다면 억압받는 대중과 함께 실천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함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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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반MB 대동단결론, 맞는 길일까요?" -박노자

[연합논쟁-세화 선생께] "이명박 정권, 독재가 아닙니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6714

 

최근 오늘날 대한민국의 상황을 "고문만 없을 뿐, 독재와 다를 게 없다"고 판단하시고 현 정권을 반대하는 일체 세력, 즉 제도권 야당(민주당)과 각종 진보 정당, 단체 등의 '대동단결'을 사실상 촉구하는 홍세화선생님의을 보고 생각에 푹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독재인가?
일면으로는, 대선배인 홍세화 선생님의 주장에 선뜻 반대하기가 쉽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국외에서 상주하는 저와 달리 영구 귀국을 선택하신 홍세화 선생님은 저보다 현장감이 훨씬 뛰어나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4대강 죽이기'와 삼성회장 살리기, 철거민 죽이기와 건설경기 살리기 등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권력의 횡포를 매일매일 보시고 당하시는 분이 "거의 독재의 수준"이라고 진단하신다면, 귀를 기울여야 할 주장은 아닐 수 없습니다.
'체감경기'라는 것은 경제학에서 하나의 '지표'로 다루어지듯이, 특정 정권의 대한 체감도 중요시해야죠.
한데, 동아시아의 정치, 사회, 특히 노사관계 등이 제가 밥벌이 삼아 가르치는 부분이기도 하기에, 민주와 독재에 대한 약간의 이론적 검토를 시도해보고 현 정권이 정말 제도권(부르주아) 야당하고라도 손잡아 반대해야 할 '독재'인지, 그리고 제도권 야당의 성격이 무엇인지 밝혀볼까 합니다. '현장'의 입장에서라기보다는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말씀입니다.

싱가포르 등 약간의 예외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세계체제에서 핵심부에 속하거나 준핵심부 나라 중에서 핵심부와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거의 모든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로 운영됩니다. 즉, 적어도 자본계급의 이해관계를 서로 약간 다르게 표방하는 제도권 정당 2개 이상이 경쟁하는 투명 선거를 통해야 권력에 정통성이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준핵심부에 진입한 1980년대 초반 이후로는 바로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이와 같은 구조를 본격적으로 이식시켜놓았습니다.
재벌들에게 편한 정치 구도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요? 일면으로는 대기업 중심의 노동운동과의 손을 잡은 중산계급의 급진화된 전위(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등)의 압력도 있었지만, 더 일면으로는 대한민국 영향력 1위의 집단인 대기업들에게도 '2개의 이상 제도권 정당의 투명한 선거경쟁'이라는 구도가 나름대로 편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군부 독재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발길질이나 당하고 돈 상납을 강요 받아왔는데, 이제는 그 '투명 선거 경쟁'을 벌이는 2개 이상의 제도권 정당에게 '보험금'을 다 내며 잘 조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도권 정당뿐만 아니고 검찰 등 국가의 모든 주요 기관을 그들이 대체로 어떻게 '관리'하는지, 노회찬 전 의원이 발표한 X파일을 보시면 다 알 만할 것입니다.
'군바리' 시대 같았으면 그냥 요구한 대로 주었을 뿐인데, 이제는 국가의 주요기구에서 '장학생'을 포진시키는 주체적인 행위까지 할 수 있기에 민주주의란 참 좋은 세상이죠? 뭐, 재벌 출신의 대통령까지 만들 수 있기에 이게 요순시대 내지 그 이상입니다. 갖고 있는 돈, 그리고 지불한 돈 만큼 '공평하게' 대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만사형통의 시대인 셈이죠.

자유민주주의를 한다고 해서 사실 저들은 못할 일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미국처럼 '테러리스트'로 지목되는 자국의 시민들까지 영장도 없이 잡아다가 몇  년간 감옥에 썩힐 수도 있고, 아프간을 침략할 수도 있고, 이제 예멘 침략 준비까지도 할 수 있죠.
이를 비판하는 세상의 촘스키들이 물론 다소 있겠지만, 그들을 잡아 고문할 하등의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말을 폭스뉴스에 열광하는 다수의 미국인들이 어차피 구조적으로 들을 수도 없고, 들었다 해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배계급 최적의 통치 형태
체코처럼 공산당이 총선에서 13%의 표를 얻는 위기의 동유럽 '민주' 국가에서 공산당 금지법을 논할 수도 있지만, 미국처럼 반체제 세력들이 대중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그런 수고도 필요없는 것이죠. 피지배자들이 철저하게 원자화된 상태에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돼 있는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제도권 거대 정당 위주의 제도적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으로서는 최적의 통치형태입니다.
피지배자들이 하나의 반체제 세력으로 뭉쳐 정말로 선거를 통해 집권해 체제를 바꾸거나 본격적으로 수정하려는 태세를 보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갑자기 파쇼정당들이 각광을 받거나 세상의 피노체트들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지만, 이는 아직은 한국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좌파 민족주의와 온건 사회주의 정당 두 개가 각각 약 4%나 1~2%의 지지를 받는 나라, 진정한 의미의 급진세력이 잘해봐야 자그마한 섹트밖에 만들 수 없는 나라에서는 각종 재벌의 장학생들이 대리 운영하는 '민주주의'는 바로 적격입니다.

그러면, 이제 현 정권으로 눈을 돌립시다. 용산참사부터 아프간 재파병까지, 저 같은 사람에게 분통을 터지게끔 하는 모든 일들을 다 골라서 하는 사람들이지만, 저들이 대한민국의 선거법 등을 어긴 일이라도 있나요? 정확하게 묻자면, 선거법을 어길 필요라도 있었나요?
답은 자명하죠. 거대여당이 지속적으로 최고의 지지를 받는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진정한 주인네들에게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파괴할 필요성조차 생기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의 내용을 보면, '독재'라는 수사는 자연스레 나오지만, 적어도 절차적으로는 (대단히 보수적이고 제한이 아주 많은) 자유민주주의는 맞습니다.
이명박은 김대중-노무현 10년의 계승자
그 절차적 자유민주주의가 철거민부터 비정규직까지, 이 사회 피지배계급의 약자그룹을 전혀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용적으로 다른 문제죠. 물론 동계 철거가 가능한 나라는 '가난뱅이에 대한 독재'를 실시하는 나라임에 틀림없지만, 가난뱅이 중에서도 이 자본의 독재를 지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부터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독재라고 하자면 정치영역의 독재가 아닌 사회영역에서의 독재에 준하는 계급적 역학관계라는 단서를 달아야 하지 않을까 라고, 홍세화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만약 정치적인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사회적인 독재 관계가 확대재생산된다고 하면, 이 퇴치방법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지배세력의 정치적 대리인 중에서는 지금 일시적으로 수세, 약세에 처하게 된 민주당 등을 '상위 파트너'로 삼는다고 해서 과연 경찰의 장화 밑에서 밟히는 이들의 고통은 줄어들까요?
사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 대한 '비판적 지지'는 '운동'의 세계에서는 거의 대세였습니다. 그 뒤로는 저만 해도 평소에 민노당을 지지했다가 "그래도 차악"이라고 하며 노무현을 찍은 수십 명의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압니다.
즉, 여태까지 지배세력 중에서 비교적으로 '덜 나쁘게, 더 민주적으로' 보이는 정파와 연합해온 역사는 꽤 깁니다. 그 결과는? 4대강 죽이기 등의 무리한 토건업 부양은 약간 새롭지만 이번 정권의 대부분의 행동은 이미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에 다 그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었습니다. 파병이나 각종의 무리한 재개발부터 말씀입니다.
연합보다 대안적 정당 건설이 중요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이명박이 노무현의 정적이지만, 경제, 사회 정책의 차원에서는 많은 면에서 계승자에 가깝습니다. '차악'을 모색하는데에 이미 익숙해진 분들에게 아주 억울한 이야기일 순 있지만, 엄연히 현실입니다.

'계급'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돼온 나라,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계급투쟁보다 관리자에 대한 충성 경쟁이 더 자주 보이는 나라에서는 제도권 전체를 반대할 줄 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안적 정당을 건설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이 일은 미래에 대한 올바른 준비일 순 있죠. 지금 세계 평균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수준의 부양책으로 경제지표들이 그럭저럭 괜찮아보이지만, '출구 정책'을 시작만 한다면 한국 경제는 다시 한 번 추락 일로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출구 정책을 계속 유보한다면 일본처럼 미래가 없는 과다채무국이 될 것도 뻔합니다.

생각보다 한국 지배계급의 미래는 그리 낙관적이지만 않기에, 저들에 대한 계급적 대안이 어쩌면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지지를 받을 날도 언젠가 올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과거의 '비판적 지지'의 늪에 빠지는 것보다, 미래를 지향해보는 것은 낫지 않을까요? 물론 이는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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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성性인권] 결혼과 성(性)을 일치시키지 말라 - 마광수

  • 분류
    자료실
  • 등록일
    2009/12/31 19:24
  • 수정일
    2009/12/31 19:24
  • 글쓴이
    서른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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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쉬즘] 생식적 섹스에서 비생식적 섹스로

마광수 (연세대 교수, 국문학)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여권신장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성적 대리배설수단이 다양하게 개발됨에 따라, 생식적 섹스(genital sex)는 비생식적 섹스(non-genital sex)로 급격한 전환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프로이트 학파의 이론에서는 절대적 비정상으로 간주되던  동성애조차 선진국의 경우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파급되기에 이른 것이다.

여타의 다른 변태성욕들, 이를테면 관음증(觀淫症), 자기애(自己愛), 피-가학 성애(sadomasohism), 페티시즘(fetishism) 같은 것들은 이젠 소설이나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될 정도로 아예 현대문화를 설명하는 일반적 성심리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유아기 때 비생식적 변태성욕을 얼마나 충분히 충족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성격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질 수 있다고 진단한 프로이트의 학설은 이젠 별로 의미가 없다. 유아기든 사춘기든 청장년기든 노년기든 간에, 이젠 어떤 형태로든지 자기의 성적 욕망을 적절히 직, 간접적으로 배설시킬 수만 있으면 신경증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결혼을 통해서, 그리고 생식적인 성교를 통해서 얻어지는 성적 쾌감에 의해서만 인간은 정신의 평형상태 (즉 super-ego와 id의 평형상태)를 유지할 수 있고, 거기서 정상적인 사회활동과 행복의 추구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화가 이제 서서히 깨져가고 있다.

잘못된 결혼으로 인한 운명의 파탄 같은 것 역시 이제는 결혼관과 성관(性觀)의 수정에 의해서 방지될 수 있다. 즉 결혼은 생존의 무거운 짐을 나눠지기 위한 일시적 도피행위가 되어서는 안되고 영원무궁하게 싫증나지 않는 성애(性愛)를 위한 성적 계약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 또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다 하더라도 누구한테서나 부성애나 모성애가 무조건 우러나와 자신의 여생을 자식을 위한 희생으로 바치게 되는 것 역시 아니라는 사실이 우선 새롭게 인식돼야 한다.

이럴 때 당장 강하게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은, 그럼 대체 누가 자식을 낳을 것이며 자식의 양육문제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하는 문제다. 아닌게아니라 유럽이나 한국의 경우에는 자식낳기를 기피하는 풍조가 늘어나 인구문제가 점점 심각한 사회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낳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낳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이미 정이 식을 대로 식어버린 부부가 자식을 위해 가면을 쓰고 무작정 붙어 있으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럴 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다원주의적인 성관과 결혼관의 확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성생활과 결혼생활에 있어 획일적 윤리를 강요하기보다는 ‘각자 선택’의 기회를 폭넓게 허용해주자는 얘기다.

결혼문제든 순결문제든, 이제는 도저히 획일적 규준을 강제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혼전에 죽어라고 순결을 지킨다고 해서 꼭 ‘순결한 사람’ (아니면 촌스러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혼전에 프리섹스를 한다고 해서 ‘방탕한 사람’ (아니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즉, 모든 것이 다 ‘각자선택’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결혼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결혼을 한다 안한다의 문제나, 하더라도 언제 해야 한다는 혼기(婚期)의 문제 역시 각자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아직은 일부일처제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므로, 다부다처제식 모계사회를 지향하여 좀더 융통성있게 성의 자유를 확보하자는 주장은 아직 그 실현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반드시 강조돼야 할 것은 결혼과 성을 일치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노처녀, 노총각이라고 해서 꼭 성에 굶주릴 필요는 없다. 독신주의를 고수한다는 것은 성의 자유를 만끽하겠다는 의도로 이해돼야지 성적 결벽증과 관계지워져서는 안된다.

또한 무분별한 이혼의 남발을 막기 위해 혼전에 시험적 동거기간을 거친다거나 하는 식으로 보다 신중한 결혼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만약 결혼을 단행하더라도 최소한 2년 정도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혹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자식이 없을 경우 후유증이 훨씬 적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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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한국인권뉴스는 ‘성性인권운동/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그동안 선진적인 성담론을 주장하다 보수수구세력은 물론 그를 이해하지 못한 진보진영에게도 외면당한 채 제도 권력으로부터 고초를 겪은 바 있는 마광수 교수(홈페이지)와 '웹2.0' 교류를 진행 중입니다. 그의 철학적 세계관이 유교적 성문화에 침윤된 한국사회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진보적 성담론의 공론화로 변혁의 한 축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사에 대한 반론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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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에 관한 토론자료]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자료]
1. 곽노안, 강남훈 교수의 주장
기본소득의 정의
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
다양한 기본소득 주장
기본소득 운동 현황
두 교수의 기본소득 전략
2. 다른 논자들의 주장-르몽드 디플로마크에 기고된 최우성의 글에서 인용
3. 전 지구적 기본소득
4. 제갈현숙의 문제 제기의 요지
5. 쟁점의 정리와 입장-토론문 초안 by SS
5-1. 전지구적 기본소득
5-2. 일반적 기본소득에 대하여
5-3. 곽노안, 강남훈 교수의 주장에 대하여
[참고자료] 제갈현숙의 토론문 전문
[참고자료 목록]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자료]

기본소득이 무엇이고, 어떠한 내용인지에 대하여,
비슷한 내용의 글이 많으므로 곽노안 강남훈 두 교수가 공동집필하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에서 발표한 ‘모든국민에게 기본소득을’이란 글과, 강남훈이 발표한 ‘한국에서 기본소득 제도의 경제적, 정치적, 이행적 가능성‘을 주로 인용하여, 두 교수의 주장을 우선 소개한 후 쟁점을 정리하기로 한다.

 

1. 곽노안, 강남훈 교수의 주장

기본소득의 정의
‘기본소득은 심사와 노동 요구 없이,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이고, 기본소득은 미성년자를 포함한 전체 사회 구성원에게 지급되며 아무 자격조건이나 의무사항이 없다.’고 정의하고 있다.

기존의 연금 및 실업급여?사회부조금?대학생 생활보조금?집세보조금?자녀양육보조금 등 현금지급형 사회복지제도를 대체하는 것으로, 심사절차가 없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복지국가들에서 엄청나게 낭비되는 사회복지관리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기본소득이 모든 사회복지제도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의 지지자들은 의료보험, 무상교육, 장애인보조금, 환자요양보험 등은 최소한 유지하거나 확대할 것을 동시에 주장한다.

 

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
서유럽의 경우는 추가세수 없이 기존의 현금지급형 사회복지만 기본소득으로 통폐합해도, 모든 국민이 1인당 평균 매월 140만원 정도의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미국식 시장중심주의적 자본주의제도를 택하여 사회복지제도가 미비한 한국과 같은 나라들의 경우에는, 기존 현금지급형 사회복지비의 통폐합만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기본소득은 인간다운 생존이 아니라 기아를 면할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의 경우 각종 연금을 포함하여 2007년 기준으로 현금지급형 사회복지예산은1인당 평균 매월 10만원 수준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국에서 인간다운 생존을 보장해주는 기본소득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재원이 필요하다. 이 추가적인 재원은 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에 대한 세율을 인상하거나 세제를 신설하고 소득세율을 인상하여 조달할 수도 있다. 좀 더 급진적으로는 자본주의를 폐기하여 기존 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 전체를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충당할 수도 있다. 후자의 방안을 택할 경우, 한국에서는 2007년 기준으로 1인당 평균 매월 50만 원 정도의 기본소득이 가능하다.

 

다양한 기본소득 주장
그런데 지구적 차원에서 기본소득 논의는 기존 사회복지제도의 문제점과 한계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크게 보아 보수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되는 흐름과 급진적인 정치세력들에 의해 주창되는 흐름의 2가지 상반된 모델이 있다.

보수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의 모델은 최저임금제 폐지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노동유연화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독일의 거대 자본가 베르너의 모델 등), 급진주의자들의 모델은 최저임금제 강화와 비정규직 축소 내지 폐지 및 지구적 기본소득으로의 확대 등을 포함하고 탈자본주의적 대안경제체로의 이행전략의 성격을 갖고 있다(독일 녹색당 내 개혁파 및 독일 좌파당 내 ‘연방노동공동체 기본소득’ 그룹과 ATTAC 독일지부의 모델 등).

그러나 미국식 시장중심주의의 자본주의제도를 택하고 있는 한국 등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이 기본소득을 주창할 여지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막대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본가계급의 불로소득 내지 투기소득에 대한 중과세 및 소득세의 누진적 인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자는 주장은 그 자체로 진보적인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고, 진보적인 세력에 의해서 제기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 운동 현황
그리고 최근 미국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세계공황을 야기하면서 위기에 직면하자, 대안경제체제로의 이행전략에 대한 담론이 활성화되면서 급진적인 기본소득모델이 대안지구화운동의 한 축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현재 기본소득 담론이 가장 대중화된 나라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독일어권 나라들이라 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기본소득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는 ATTAC 독일지부 및 좌파당 내 ‘연방노동공동체 기본소득’ 그룹 등 진보적인 운동단체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세계적인 기본소득 담론은 서유럽에서 출발하여 현재는 나미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일본 등 전 대륙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2008년 일본, 멕시코 등 4개국에서 기본소득 운동단체들이 BIEN에 가입하면서 BIEN 지부가 있는 나라들은 16개국으로 늘어났다.

현재 기본소득을 실시하는 나라로서는 브라질, 나미비아 등이 있고, 리비아에서도 올해부터 실시하려고 하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룰라가 2003년1기 집권과 함께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 빈곤층 생계수당지급 프로그램) 정책을 실시하였다. 각 가정에 매달 평균 85레알(약 5만원)을 지급하는데, 이 금액은 가구 수입의 40%에 해당된다고 한다. 현재 국민 1억9천만 명 가운데 약 4분의 1이 혜택을 받고 있고, 올해 200만 가구에 추가로 지급할 예정이다. 룰라 정부는 2010년부터 전체 국민과 5년 이상 거주 외국인에기 기본소득을 지급하려고 계획하고 있다.(강남훈, 곽노완. 2009) 미국의 알래스카 주는 석유 자원을 바탕으로 알래스카 영구 기금(Alaska Permanent Fund)을 만들어서 주민들에게 배당(dividend)이라는 이름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나미비아의 오미타라 지역은 2006년 1월부터 기본소득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지역의 60세 미만 거주자들은 2008년부터 모두가 매달 100나미비아달러(원화로 약 19,100원)를 ‘기본소득’으로 받고 있다. 현재 오미타라 지역에서 실시되고 있는 기본소득제도는 과거에 만연했던 식량구걸행위를 완전히 소멸시켰으며, 이 지역민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크게 향상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오미타라 지역으로 국한되어 있는 나미비아의 기본소득제도는 조만간 전국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또한 리비아의 가다피 정부도 2009년초부터 ‘석유 화폐몫(share of oil money)’의 형태로 전체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을 천명했다
하지만 브라질과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재원확보가 어려워, 이미 실현되었거나 향후 도입예정인 ‘기본소득’이 기아를 면할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에 반해 서유럽의 경우, 이미 확보되어 있는 현금지급형 사회복지기금을 향후 ‘기본소득’으로 통폐합하면 세수를 늘리지 않고도 ‘기본소득’의 재원이 확보된다. 나아가 ‘기본소득’의 규모도 매달 1인당 140만원 수준을 상회하여 명실상부 기본 의식주뿐만 아니라 문화·교육·취미생활 등을 향유할 경제적 여건을 보장할 수 있다.

 

두 교수의 기본소득 전략

기존의 현금지급형 사회복지비만으로 충당된 ‘기본소득’은, 한국과 같이 미국식 시장주의 경제모델을 갖춘 나라들이나 후진국에서는 재원이 적어 미미한 효과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과 같이 미국식 시장중심주의 경제모델을 갖춘 나라들에서는 이자, 지대, 배당 등 자본소득 및 주식양도차익 등 투기소득에 대한 진보적 과세를 통해 재원을 늘려야만 서유럽 수준은 아니더라도 인간다운 생존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제도를 갖출 수 있다. 그리고 적립된 연기금 및 은행을 통해 주식회사를 전사회적 소유로 전환하여 자본주의적인 모든 불로소득을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전환함으로써 서유럽의 기본소득 논의를 넘어서서 대안경제체제로의 이행전략으로 ‘기본소득’을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이는 한국과 같이 미국식 시장주의 경제모델을 따르는 국가에서는 기본소득 논의가 진보운동에서만 가능함을 뜻한다.

이 글에서 제시한 기본소득은 이러한 것들과 달리 이행기로서 연대사회의 구성요소의 하나이다. 연대사회란 연대사회적인 강령을 제시하고 헌법 개정 등을 통하여 그것을 변혁적으로 구현하겠다고 공약을 한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받아 집권함으로써 시작되는 사회를 말한다. 연대사회에서는 노동자 계급이 정치권력을 잡고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사회이고 사회주의적 요소는 막 도입된 상태이다. 따라서 연대사회는 목표대로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도 있지만 목표와 달리 자본주의로 퇴행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연대사회는 경제부문에서는 사민주의적 복지국가의 틀 안에 속하는 강령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지만, 자본주의로부터의 탈피와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의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도입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에서 기본소득의 재정적, 경제적, 정치적, 이행적 가능성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재정적 가능성은 경제적 가능성의 한 부분으로 기본소득 지출에 필요한 만큼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경제적 가능성은 재정적 가능성보다 넓은 영역의 문제로서, 기본소득제도를 채택한 경제가 유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정치적 가능성이란 기본소득에 대하여 대다수 국민이 동의를 하고,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집권을 계획하는 정치 세력이 존재할 가능성을 말한다. 이행적 가능성이란 기본소득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계기들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기본소득 지급액은 오로지 연령에 의해서만 차이가 나며, 어렸을 때에는 연간 400만원을 받다가 55세 이상이 되면 연간 600만원을 받는다. 기본소득 도입과 더불어 비정규직을 제한하고 최저임금제도를 개선한다. 그리고 매년 명목GDP 증가율만큼 최저임금과 기본소득을 인상한다.
기본소득은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 무상교육?무상의료 필요예산 25조원은 기존 교육비 예산 및 국민건강보험에 추가되는 부분이다.
기존 연금제도 가입자에게는 기본소득과 기존 연금제도 중 선택권을 부여하되, 사학연금,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가입자들이 기본소득을 선택할 경우 연금 금액과 기본소득 금액의 차이만큼을 적립된 연기금에서 추가적으로 지불한다. 19세 미만의 인구에 대한 기본소득금액은 부모에게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기본소득 재원은 <표 2>와 같이 일부는 기존의 각종 연금을 비롯한 사회보험 일부, 공공부조 일부를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부분은 조세를 통해서 조달하는 것으로 한다. 기본소득 재원에는 무상의료?무상교육에 필요한 재원이 포함된다.
기본소득 필요예산은 약 240조원인데,
근로소득 및 종합소득에 대하여 기본소득세를 부과한다 상속증여세, 환경세 도입 및 세수확대, 증권양도소득세(증권, 파생상품 포함) 도입, 이자소득세, 배당소득세 인상, 토지세 도입, 고소득 자영업자 종합소득세원 포착, 국방비 절감등을 통하여 조달할 수 있다.

 

2. 다른 논자들의 주장-르몽드 디플로마크에 기고된 최우성의 글에서 인용

프랑스의 ‘생존소득진흥협회’(AIRE)를 이끌고 있는 욜랑 브레송 대표는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생산을 늘리는 데만 경쟁을 벌였다면, 이제는 안정적인 수요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중요해진, 전혀 다른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다"며, "기본소득이야말로 생산·소비의 선순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해법"이라고 말했다.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더 넓은 사회계층과의 연대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독일 좌파당의 정책보좌관인 로날드 불라시케는 "기본소득은 ‘노동중심주의’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기존 노동운동을 여성운동·문화운동·실업자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 영역과 맺어주는 연결 고리 노릇을 한다"며, "경제위기 속에 진행되는 각국의 일자리 나누기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노동력의 부분적인 탈상품화의 길을 열어주는 기본소득이라는 안전판에 대한 고민이 절실할 때"라고 강조했다. ‘코뮤니즘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길.’ 현대판 기본소득 모델의 핵심 이론가로 꼽히는 파레이스 교수는 일찍이 기본소득을 일러 이렇게 한마디로 표현한 적이 있다. 여기에선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로 단칼에 정의되던 전통적 의미의 사회주의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정작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사회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본격적으로 끌어낸 당사자들은 되레 ‘보수·우파’ 진영이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부터 몰아친 보수주의의 광풍을 타고, 이들은 기본소득을 구체적인 ‘사회개혁 프로젝트’로 현실화하려는 행보를 재촉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복지제도 유지 비용을 줄여 복지국가를 ‘대수술’하는 해법으로 기본소득을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80년대 이후 미국을 필두로 대부분의 서유럽 나라들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부쩍 활기를 띤 비밀도 여기에 있다. 모든 복지제도망을 해체해버리는 대신 그 재원을 전 국민에게 일정액씩 나눠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자는 게 그들의 메시지였다. 이처럼 노동력의 상품화를 거부한다는 애초의 급진적·사회비판적 발상은, 이제 공평하게 일정액의 돈을 손에 쥐어주는 대신 모든 것은 오로지 개인의 책임에 넘기자는 개인주의적·신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한때나마 방향을 잃기도 했다. 다시금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기본소득 논의에 대해 각국의 좌파·진보 진영 일각에서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이유다.

 

3. 전 지구적 기본소득
(이 절의 인용문은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민노총)에서 인용한 것임.)

“위기가 다가오는 금융시장들을 위한 국제적 원조계획을 배경으로, 주최 측은 최소한 또한 높은 결의로, 굶주림과 빈곤에 대응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재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금융시장들 그 자체를 위한 수 조(兆) 유로의 구제로 반박된다. 아프리카 전문가이자 ATTAC 연구그룹 “모두를 위해 충분한”(Genug f?r alle)의 구성원인 다그마 파터노가(Dagmar Paternoga)는 빈국들의 기아퇴치를 위한 기본소득을 위해 700억 유로의 금액으로도 족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빈곤퇴치를 위한 EU차원의 기본소득의 가능성에 대한 검토를 EU-위원회에 위임하는 EU-의회의 결의에 고무되어, ATTAC 오스트리아 지부의 클라우스 잠보어(Klaus Sambor)는 EU가 유럽연합의 모든 구성국에게 전국적인 기본소득을 국가 경제력에 따라 지불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기본소득이 전유럽적 사회정책(Sozialpolitik)에 대한 접근을 나타낼 수 있고, 그 외에도 모든 나머지의 사회보장비(Sozialleistungen)는 각 국 스스로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며, 경제력이 강한 국가들은 조정세(Ausgleichssteuer)를 통해 재정약국들의 기본소득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판 더 벤과 빠레이스의 논문은 지구적 차원의 기본소득운동 네트워크인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Basic Income Earth Network)'의 학술지 BIS(Basic Income Studies) 창간호(2006)에 다시 실리면서 커다란 반향을 얻었다. 그들은 이후 2006년에 쓴 또 다른 논문 ?지구적 정의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길?에서 이러한 반향에 답하고 있다. 특히, 부유한 나라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것보다 세계적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수백만 명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도리스 슈뢰더(Doris Schroeder)의 논평에 답하고 있다. 판 더 벤과 빠레이스의 응답은, 선진국에서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후진국으로 산업과 서비스 활동이 이동하는 것에 대해 선진국 노동자들의 저항이 약해짐으로써 세계가 경제적으로 보다 평등하게 되는 것을 촉진하게 된다는 것이다(van der Veen & Parijs, ?지구적 정의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길?, 2006b: 12 및 곽노완, 2008a, 앞의 글 참조). 또한 세계가 경제적으로 보다 평등해지면,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이민하려는 동기가 축소되어 국경을 개방하는 것이 용이해진다는 것이다. 나아가 판 더 벤과 파레이스는, 비록 도입단계에서는 특정한 연령에 제한되긴 하지만 지구적 차원의 ‘기본소득’의 도입을 주장한다. 전체적으로 판 더 벤과 빠레이스의 응답은, ‘기본소득’의 도입을 점차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함으로써 세계적으로 평등한 경제가 촉진된다는 주장이다.”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민노총에서 인용)에서 보는 것처럼, 파레이스의 주장은 선진국에서 시작되는 기본소득 운동이 지구를 더 평등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임.

이외에 “네그리와 하트는 사회전체성원이 비물질노동을 통해 ‘코뮌재’인 인식재를 생산하며 이 인식재에 잉여가치가 집중되어 있으므로 사회전체성원이 잉여가치를 증대시킨다고 본다. 그런데 각자가 잉여가치의 증대에 기여한 비물질노동은 “측정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전체성원이 동등하게 “사회적 임금과 모두에게 보장된 수입”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빈자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제국에 맞짱 뜰(국민국가는 쇠퇴의 경향이 있고 국민국가와의 투쟁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음) 다중이 전지구적으로 기본소득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지구적 기본소득은 최빈국의 기아퇴치를 위한 선진국의 지원형태로, 각국의 경쟁력에 따라 기금을 재원을 조성하자는 내용과, 선진국에서부터 기본소득을 확대하자는 주장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전인류에게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운동을 하자는 주장이 있다.

 

4. 제갈현숙의 문제 제기의 요지
(진보전략회의 5월 워크샾에서 발표된, 제갈현국의 경제위기 대응으로서 기본소득 전략-토론문에서 인용)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손을 대지 않으면서 분배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나?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반자본주의적 제도의 형성과 강화를 위해서는 계급운동과 사회운동의 주체역량 강화가 핵심에 놓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본소득전략에서 고려하고 있는 운동주체는 누구인가? 또한 반노동의 전선이 어떻게 반자본의 전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모호하다.
실업이 이렇게 구조적이며 필연적이라는 측면에서 생산 영역과 노동시장에서 이탈된 사람들에 대한 ‘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먹을 권리'는 1980년대 이후 유럽 좌파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그 이전까지 주류 경제학은 물론 맑스주의자들과 노동운동에서도 사람들이 개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오로지 생산영역으로만 국한시켜왔다. 이로 인해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이라는 명제는 이론적으로는 맑스주의 틀로부터의 이탈된다는 점에서 노동계급 내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고려되지 못해왔다.
실업이 이렇게 구조적이며 필연적이라는 측면에서 생산 영역과 노동시장에서 이탈된 사람들에 대한????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먹을 권리'는 1980년대 이후 유럽 좌파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이에 더 이상 일자리에 대한 요구보다는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거나 상당시간 반실업과 실업상황에 머무는 사람들에 대한 생존권이 부각되었다.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을 보장한다는 것은 개인의 물질적 조건을 생산 영역의 차원에서 아니라, 재생산의 영역에서 생산영역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에게 생존권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일자리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총 사회의 부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과 소득을 분리”시키는 전략은 이와 같은 보수적인 사회복지 급여원칙을 파괴할 수 있는 전략적 노선으로 유의미하다.
사회복지제도는 출발부터 오늘날까지 노동유무와 노동시장과의 차별성을 둔 급여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로 인해 급여발생을 위해 노동력의 유무와 노동력이 있을 경우 반드시 일을 해야만 하고, 이들에게 제공되는 급여는 열등처우의 원칙에 입각해 노동시장에서 제공되는 임금보다는 항상 낮게 책정되도록 했다. 오늘날 공공부조제도에서 조건부 수급권과 최저임금 이하의 최저생계비로 설정함으로써 구빈법의 핵심 원리가 유지되고 있다. “노동과 소득을 분리”시키는 전략은 이와 같은 보수적인 사회복지 급여원칙을 파괴할 수 있는 전략적 노선으로 유의미하다.
일의 유무, 일할 의사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일정한 사회적 부를 나눠 갖자는 주장은 실현가능성을 떠나, 노동을 바탕으로 하는 소득이라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공격일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메시지는 모든 사회관계를 시장관계로 단일화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기본소득(basic income)이 대안 전략으로 갖는 논리적 취약성은 매우 명확하다. 기본소득에 대한 좌파적 아이디어와 신자유주의자의 버전 사이의 실질적 차이는 다만 양적 차이만 존재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사회적 연대란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정상적인 임노동관계에 놓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국가가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을 재원으로 이들에게 소득을 마련한다는 것을 말한다.
노동윤리감소, 피할 수 없는 복지수준감소, 복지국가 철폐에 따른 분배의 축소, 사회분리, 재정안정성, 실현가능성 등이 일반적인 비판요소로 제기되었다.
기본 소득의 재원은 사회보험료와 조세로 형성된다. 이전과 다른 것은 조세원칙의 변화인데 소득세, 법인세, 불로소득 등의 개혁을 통해 국가 일 년 예산과 맞먹는 240조를 확보한다는 내용이다.
계급갈등의 문제는 연대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복지국가에서 상시적인 이데올로기로 문제가 되었던 조세납부자와 수혜자 간의 갈등은 다른 형태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제도운영을 위해 국가재정 확보는 우선적 과제가 되고, 결국 국가의 경제성장률에 의존적인 모형이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자본의 계속적인 재생산구조의 왜곡된 확장과 집적의 문제에 대해 전면적인 반대가 불가능한 딜레마를 가지게 된다. 또한 생태에 대한 관심이 사상과 입장을 초월해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성장론에 대한 기본적 철학이 파악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주택 등이 먼저 달성된 후 기본소득이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탈상품화된 형태의 교육, 의료, 주택의 확대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기본소득을 위한 선결과제로 제시한다는 것은 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더더욱 의문스럽게 하는 절차이다.
현금으로 지급되는 사회적 임금이 가지는 가장 큰 맹점은 노동자와 시민들이 결국 시장으로 순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띤다.
소득보장을 위한 현금급여 형태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반할 수 있는 기재로까지 작동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득보장의 측면은 항상 생산관계와 공급측면의 반자본주의적 기재와 함께 고려되고 설계되어야 한다.

 

5. 쟁점의 정리와 입장-토론문 초안

 

5-1. 전지구적 기본소득
먼저 전지구적 기본소득이란 극빈국의 외채탕감을 위해 국제적인 자본이동에 대하여 과세하자는 토빈세처럼, 극빈국의 기아모면을 위해 선진국에서 매년 700억 유로의 재원을 만들자는 제안은, 초국적 자본에 대한 선진국의 시민운동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빈국의 기아퇴치를 위해 식량원조보다 기본소득으로 원조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은, 식량자급생산의 여건이 안되는 최빈국에게 화폐급여를 개인에게 지급할 경우, 값싼 수입농산물 시장으로 기능할 뿐 식량자급생산능력의 향상에 해가 될 것이다. 이점은 식량원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구조적인 외채탕감이 먼저인지, 기아퇴치가 먼저인지, 혹은 기아퇴치의 경우 현물로 할 것인지 현금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하는지?
기아선상에 있는 인류에게 원조나 부조가 있어야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최빈국이 된 구조적인 원인이 아닌 기아나 외채라는 결과만을 완화시키는 원조방안이 구조적이고 원칙적인 해결방안이 안되는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러한 기본소득지원운동은 토빈세와 마찬가지로 최빈국에 대한 도덕적 원조를 위한 선진국의 시민운동의 차원이므로 천착하는 작업을 미루기로 한다.

마찬가지로 국민국가라는 매개없이 전세계의 다중이 제국에 대항해서 전지구적인 기본소득을 요구하자는 네그리 등의 주장은, 사회보장의 시행주체가 국민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허무맹랑하지만 어쨌든 결국에는 여러 국가의 기본소득운동으로 귀결되므로, 일국적인 측면에서 분석하기로 한다.

 

5-2. 일반적 기본소득에 대하여
기본소득의 주장이란 노동과 연계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보장제도인 바, 자본주의하에서의 사회보장이란, 자본의 노동에 대한 통제전략의 측면과 자본의 질서를 제약하는 노동의 성과의 측면을 갖고 있는 바, 일반적으로 소득재분배의 기능과 사회적 약자나 탈락자에 대한 배려의 측면을 갖고 있다.

기본소득이 기존의 형태와 다른 점은 노동과 연계되지 않은 무차별적인 급여이고, 그점에서 우파는 관리비용 절감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좌파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실업자나 고용불안층, 극빈층 등의 사회보장의 사각지대를 없앨 수 있고,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배경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노동의 유연화와 도시빈민의 증가, 경제위기로 인한 실업 등등으로, 자본에 포섭되지 못하거나 소득이 불안정한 계층에 대하여 노동과 연계되지 않은 생활보장적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운동은, 자본-임노동 관계에서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소득이 아니라 생존권의 요구로서 반자본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 점이 필요에 따른 분배 운운하며 이행전략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실업자나 고용불안층 극빈층 등 사회보장의 사각지대를 없앨 수 있고,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노동 등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은 기본소득 주장의 장점이다.

기본소득운동에 대하여 현재 사회당과 자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기본입장으로 삼고 있고, 캘리니코스도 주장하고 있으며, 많은 좌파적 지식인들이 동조하고 있는 현실이다.

판단을 위한 관점은, 과연 기본소득 요구운동이 운동의 성장에 기여하고, 반자본 혁명에 기여할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5-3. 곽노안, 강남훈 교수의 주장에 대하여
기본소득 요구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착취제도 등에 대하여 정면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신자유주의 하에서 주로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 과정에서 배제된 도시빈민의 생존권 요구라고 할 수 있는 바, 운동이 거세어질 경우 궁극적으로는 사회통합을 위한 자본의 배려로 왜곡될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점에서 서유럽처럼 기왕의 사회복지제도의 효율성을 위해 도입되든지 혹은 브라질처럼 자본의 체제유지전략으로서 기아모면 수준의 복지제도로 도입되든 것 역시 그 자체로 전혀 반자본의 운동에 기여하고 있지 않는데도, 이러한 사례를 마치 기본소득 운동이 성공할 수 있고 유의미하다 사례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의식해서 곽노안 등은 필요재원의 대부분을 불로소득에 대한 공격으로 얻을 것이며,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정책이며, 진보세력 집권 후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의 시행 후 실시될 수 있는 정책이며, 210조원에 달하는 연기금으로 800조원의 상장주식 중 중요부분을 매입하여(결국 주식사회주의를 염두에 둔 국유화나 사회화에 기여한다고 주장함) 경영성과를 기금으로 사용할 수 있고, 필요에 따른 분배를 추구하는 코뮌주의를 위한 이행전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먼저 화폐로 지급되는 급여는 자본이 강요하는 상품화와 시장화에 기여할 수밖에 없는데도, 이 점을 소득재분배를 통한 내수중심의 성장에 기여한다고 하고 있는 바, 이것은 결코 반자본의 논리가 될 수 없고, 시장에 대한 종속을 강화시키는 소부르조아적 주장인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기본소득이 과연 사회주의 세력이 집권했을 때 무상의료나 무상교육처럼 시행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그 기준은 탈 시장화 탈 상품화를 추구하는 사회주의적 정책과 합치하는지의 여부이다. 이점에서 현금급여가 탈 시장화와 탈 상품화에 반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성장제일주의와 대량소비, 생태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가치추구에 해롭다고 말할 수 있다.

두 교수의 주장대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등이 보장된 상태에서 가령 3인가족(성인2명+미성년자 1명)의 경우 월 140만원, 4인가족(미성년자 2명)의 경우 월 180만원의 현금이 지급된다면, 사실상 추가적 소득없이 근검한 생활이 가능한 수준이고, 이것은 결국 노동의 이탈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근로의욕을 북돋우고 GDP의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두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 간의 사회적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다.

곽노안 등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등 현물급여를 시행한 토대 위에 현금급여를 시행한다고 하면서 무상주택은 언급하지 않고 있지 않은데, 이것은 주택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지출의 가장 큰 부분은 주거비이고 그 다음에 교육비인 바, 주택의 문제를 시장원리에 맡긴 채 현금급여를 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한마디로 좌파가 정권을 잡아야만 그리고 정권을 잡고 나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의 현물급여를 존중하면서 불로소득에 대한 공격으로 재원을 마련한다고 주장한다면, 과연 전제조건인 좌파의 집권과 무상의료, 무상교육은 어떤 방법으로 이룰 것인지 그 주체와 주된 슬로건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전혀 제시하고 있지 않다. 유의미한 기본소득이란 목표보다 전제조건이 달성하기가 훨씬 어려운 과제라면 이러한 목표를 당면 슬로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한국사회처럼 기왕의 복지제도가 불안정하고 체제에서 소외된 실업자나 빈곤층에게 기본소득의 요구는 생존권 나아가 반자본적 불만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국민총생산이 1,000조원이고 국가 1년 예산이 240조인데, 평균 월 50만원의 기본소득을 위해서는 또 다른 280조원이 필요한 바, 그 실현방도가 주로 투기와 불로소득에 강제과세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면, 이는 결코 지배계급이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요구임이 명백하고, 설령 분배의 형태에만 집착하는 이 운동이 성장하여 지배계급이 어쩔 수 없이 이 요구를 수용하든지 혹은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아 강요하든지 간에,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격렬하여 왜곡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불로소득은 근절의 대상이지 온존시키면서 중과세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좌파의 집권시 중과세이든 전액 환수이든지 간에 불로소득(에 대한 총 투자액)은 급감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를 통해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사회적 총생산의 30%나 되는 280조원이라는 재원을 기본소득으로 분배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과연 그 재원을 현금급여로 분배하는 것이 국가가 다른 용도의 지출 즉 공적인 입장에서 재투자나 주택 등의 사회보장을 위해 지출하는 것보다 합리적인 적인 것인지에 대하여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무주택자 1,000만 가구에게 국가가 무상으로 주택을 공급한다면 가구당 5,000만원(현재 수도권만 아파트 값이 비싸고 지방은 3,000만원대임)으로 환산해도 총 예산은 500조원인데 이는 기본소득이 추산한 1년 예산의 2배도 안되는 돈이다. 이 경우 무상주택운동이 기본소득운동보다 열등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주의 사회의 총생산에서 재생산 유보분을 제외한 부분이 급여와 기본소득 등으로 지급되는 개인소비 몫과 공적인 관점에서 사회적인 투자와 사회보장 등의 분배 몫으로 나뉘어진다면, 총생산의 30%를 차지하는 기본소득은 국가의 공공적 투자와 분배를 현저히 제약할 수밖에 없다.

결국 기본소득 논자들은 사회보장의 형태에만 집착하면서 그 가능성과 유의미성을 설득하기 위하여, 연봉 1억원 이하 즉 사회성원 대다수에게 소득이 늘어나는 방안이며, 소비를 진작시켜 내수중심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얘기하면서 대다수의 대중과 자본을 설득하고, 주로 불로소득을 공격하므로 진보세력의 집권 후에야 시행이 가능하고 따라서 이행전략이 될 수 있다면서 좌파에게까지 호소하고 있는데, 과연 지구상의 어떠한 운동과 주장이 대다수의 국민과 자본과 진보세력 혹은 좌파까지 만족시킬 수 있을까?

기본소득의 요구를 당당하게 반자본의 요구로 내걸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포함한 절대다수에게 득이 되는 정책이라고 설득하면서 대중의 이기심에 호소하는 것은, 자본과의 타협적 공생일 수밖에 없는 사민주의적 정책보다도 못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 국민이 공감할만한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내건 민노당의 지지도가 10%도 안되는 한국의 현실에서, 생경한 기본소득의 주장에 대하여 동조할 세력은 그보다 훨씬 낮을 것으로 예상되고, 결국 지식인들이 주로 관심을 보이겠지만, 구체적인 확신을 줄 수 없는 막연한 소득분배 정책을 무슨 이행기 전략 운운하면서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요구를 제기하여 자본에게 타격을 주는 운동으로 성장하기도 어렵고, 설령 성장하더라도 자본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자본이 수용하더라도 왜곡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기본소득의 주장은 반자본의 전선을 교란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좌파는 기본소득이 사회주의적 원칙과 합치하지 않는다면 실업자 등 도시빈민과 사회적 부불노동인 가사노동에 대한 대안은 찾을 필요가 있고, 당면의 현실에서 빈곤층을 포함한 대중을 결집시킬 담론과 요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참고자료] 경제위기 대응으로서 기본소득 전략-토론문
(이글은 진보전략회의 5월 워크샾에서 발표된 글인데, 원문 전체를 인용함)
제갈현숙(사회학, 사회정책)

 

1. 문제제기

□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손을 대지 않으면서 분배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나?
□ 자본주의에서 사회복지는 양면적인 성격을 띤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사회질서를 유지하지위한 자본의 지배 및 통제전략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피지배계급의 혁명적 투쟁으로 달성된 자본주의 시장질서에 반대하는 전략이다. 후자의 성격이 강할수록 탈상품화 지수가 높게 나타나고 후자의 강화는 권력자원을 기반으로 형성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반자본주의적 제도의 형성과 강화를 위해서는 계급운동과 사회운동의 주체역량 강화가 핵심에 놓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본소득전략에서 고려하고 있는 운동주체는 누구인가? 또한 반노동의 전선이 어떻게 반자본의 전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모호하다.

2. 담론의 배경과 장점

□ 배경
- 2차 대전 이후 포디즘적 생산관계의 해체이후 실업은 자본주의의 핵심 사회문제로 자리하게 되었다. 더욱이 탈산업화시대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은 노동사회의 위기를 더욱 가시화시켜왔다. 우리가 직면한 대량실업은 더 이상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예외적인 현상이기보다는 자본주의 자체의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문제이자 결과가 되었다. 실업이 이렇게 구조적이며 필연적이라는 측면에서 생산 영역과 노동시장에서 이탈된 사람들에 대한????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먹을 권리'는 1980년대 이후 유럽 좌파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 그 이전까지 주류 경제학은 물론 맑스주의자들과 노동운동에서도 사람들이 개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오로지 생산영역으로만 국한시켜왔다. 이로 인해????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이라는 명제는 이론적으로는 맑스주의 틀로부터의 이탈된다는 점에서 노동계급 내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고려되지 못해왔다.
- 노동권, 즉 일할 권리, 일자리 지키기, 일자리 나누기와 같은 방식이 처음에는 노동계급의 요구로 시작되어 점차 자본과 국가의 요구로 확산되어 왔다. 자본주의 정당들은 고용과 경제 성장을 상품으로 선거시기마다 판매했으며,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신자유주의 전략에 적합하도록 법과 사회질서를 변화시켜왔다. 그 결과 노동은 매우 유연해 졌고, 보편주의에 입각했던 소득보장제도는 선별적인 노동연계복지로 전환되었으며 노동과 자본의 권력은 심각한 불균형 상황에 이르렀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로 전파된 이후 거의 모든 부분이 자본의 요구대로 관철되어 진행되어 왔다.
- 끊임없이 반복되는 경제위기마다 일자리는 감소했고 그만큼 불안정한 노동층은 두터워졌다. 산업구조조정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신자유주의 전략은 필요노동시간의 절대적 감소를 달성했다. 이에 더 이상 일자리에 대한 요구보다는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거나 상당시간 반실업과 실업상황에 머무는 사람들에 대한 생존권이 부각되었다.
- 종합적으로 완전고용의 불가능성, 수준 낮은 공공부조와 실업급여의 한계, 강제노동과 자격조건 및 급여심사(means test)에 대한 대안으로 기본소득이 제시되었다.

□담론의 장점
-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을 보장한다는 것은 개인의 물질적 조건을 생산 영역의 차원에서 아니라, 재생산의 영역에서 생산영역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에게 생존권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일자리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총 사회의 부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복지 기원을 영국의 구빈법(poor law, 1601)에서 찾는다. 사회복지제도는 출발부터 오늘날까지 노동유무와 노동시장과의 차별성을 둔 급여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로 인해 급여발생을 위해 노동력의 유무와 노동력이 있을 경우 반드시 일을 해야만 하고, 이들에게 제공되는 급여는 열등처우의 원칙에 입각해 노동시장에서 제공되는 임금보다는 항상 낮게 책정되도록 했다. 오늘날 공공부조제도에서 조건부 수급권과 최저임금 이하의 최저생계비로 설정함으로써 구빈법의 핵심 원리가 유지되고 있다. “노동과 소득을 분리”시키는 전략은 이와 같은 보수적인 사회복지 급여원칙을 파괴할 수 있는 전략적 노선으로 유의미하다.

3. 기본소득전략 운동의 궤적

-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 아우토노미아 운동이 노동에서 분리된 소득을 주장했고, 1980년대 독일에서 전개되었던 이른바 Jobber운동에서도 이와 같은 시도가 이어졌다. Jobber란 사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두 개 이상의 임시직 사업장에 동시에 고용된 사람들을 뜻하고, 이들에게 자본주의적 임노동관계에 내포된 구조적 강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1980년 대중반 이후 자본의 적극적????유연화'공세가 시작되면서 이에 대응하는 전략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했던 "모든 이들에게 1500마르크씩을!"이라 구호에서 노동권에서 생존권으로 운동의 전략이 전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일의 유무, 일할 의사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일정한 사회적 부를 나눠 갖자는 주장은 실현가능성을 떠나, 노동을 바탕으로 하는 소득이라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공격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처럼 노동과 소득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자유주의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복지국가에서 나타나는 비효율, 재정적자, 관료제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회보장제도를 완전히 철폐(독일의 경우 백여 가지 이상)하고, 대신 일정한 소득 한계를 정해 그 이하의 소득자들에게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M. Friedman, Negative income system)하는 방식이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의 메시지는 모든 사회관계를 시장관계로 단일화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기본소득(basic income)이 대안 전략으로 갖는 논리적 취약성은 매우 명확하다. 기본소득에 대한 좌파적 아이디어와 신자유주의자의 버전 사이의 실질적 차이는 다만 양적 차이만 존재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Ernst Rohhoff, 1999)
- 사회적 연대 방식도 사회관계의 시장관계로의 단일화라는 점에서 역시 취약하다. 사회적 연대란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정상적인 임노동관계에 놓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국가가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을 재원으로 이들에게 소득을 마련한다는 것을 말한다. 국가로부터 소득을 지원받게 되는 사람들은 생산관계로부터는 배제되었으나 시장관계 내로 단일화될 수 있는 수단을 취할 수 있게 된다. 국가의 관료주의적 개입 없이 스스로 어떤 조건에서도 노동할 준비를 갖출 수 있다.
- 90년대 이후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이라는 명제는 실업에 대응하기 위한 좌파운동의 새로운 화두였다. 문제는 소득을 노동으로 환원시키는 한계를 넘어서면서도, 동시에 이런 흐름들이 모든 사회관계를 시장관계로 다시 환원시켜 버리려는 자유주의적 대세에 맞설 수 있는 전략에 달려 있다.

4. 반자본 운동으로서의 기본소득 전략의 한계와 쟁점

□일반적 비판: 노동윤리감소, 피할 수 없는 복지수준감소, 복지국가 철폐에 따른 분배의 축소, 사회분리, 재정안정성, 실현가능성 등이 일반적인 비판요소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실현가능성과 기존 제도와의 비교 관점에서 쟁점을 찾기보다는 기본소득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 한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 연대사회를 위한 국가재정투쟁인가?
-기본 소득의 재원은 사회보험료와 조세로 형성된다. 이전과 다른 것은 조세원칙의 변화인데 소득세, 법인세, 불로소득 등의 개혁을 통해 국가 일 년 예산과 맞먹는 240조를 확보한다는 내용이다. 즉 국가재정 수입구조의 혁신적 전환과 지출구조의 개혁을 통해 기본소득이 제도화된다고 볼 수 있다. 국가 재정의 이와 같은 변화는 선거를 통해서는 불가능하고 결국 정치투쟁의 장에서 권력의 이전으로 가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바꾸기 위한 이행전술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인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다.
-또한 국가재정을 통한 재분배모델은 연대공동체(Solidargemeinschaft) 사회를 지향하면서 국민들은 연대제공자(Solidarit?tgeber)와 연대수혜자(Solidarit?tnehmer)로 구분된다. 즉 사회총생산을 재분배하는 데 있어 계급갈등의 문제는 연대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복지국가에서 상시적인 이데올로기로 문제가 되었던 조세납부자와 수혜자 간의 갈등은 다른 형태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사회의 총생산을 재분배하는 방법에 있어 직접적으로 자본이 취한 잉여가치분을 피지배계급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 소득세 중심의 형태는 고용되어 노동하는 사람들과 고용되지 못한 사람들 간의 분화를 촉발할 수 있다.
-안정적인 제도운영을 위해 국가재정 확보는 우선적 과제가 되고, 결국 국가의 경제성장률에 의존적인 모형이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자본의 계속적인 재생산구조의 왜곡된 확장과 집적의 문제에 대해 전면적인 반대가 불가능한 딜레마를 가지게 된다. 또한 생태에 대한 관심이 사상과 입장을 초월해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성장론에 대한 기본적 철학이 파악되지 않는다.

□ 기본소득 급여형태와 시장으로의 순응
-현금급여의 원칙과 욕구(need)가 더 많이 발생되는 사람에게 현금급여뿐만 아니라 현물급여도 유지된다는 원칙이다. 이를 위해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주택 등이 먼저 달성된 후 기본소득이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탈상품화된 형태의 교육, 의료, 주택의 확대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기본소득을 위한 선결과제로 제시한다는 것은 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더더욱 의문스럽게 하는 절차이다. 각각의 과제가 자본의 이해와 매우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더욱이 교육의 경우, 한국사회의 총체적 문제가 모두 집결되어 있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 과제들이 이행을 위한 선결과제라고 한다면 이에 따르는 구체적 전략역시도 제시되어야 기본소득의 실현성에 힘이 실릴 수 있다.
-현금으로 지급되는 사회적 임금이 가지는 가장 큰 맹점은 노동자와 시민들이 결국 시장으로 순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띤다. 즉 재화의 생산구조와 서비스의 공급구조는 여전히 시장 메커니즘이 유지된 채 노동자와 시민에게 소득만을 보충할 경우, 포디즘 시기 소비자로 활약했던 노동자들의 소비자로서의 지위가 확대될 것이다. 현재도 사회서비스 이용자들에게 현금급여의 한 형태인 서비스이용권(바우처)이 제공되고 있다. 이전에 비해 서비스 적용률은 확대되었고 급여의 수준도 상대적으로 발전했으나 공급구조의 시장 메커니즘으로 인해 다양한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즉 소득보장을 위한 현금급여 형태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반할 수 있는 기재로까지 작동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득보장의 측면은 항상 생산관계와 공급측면의 반자본주의적 기재와 함께 고려되고 설계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기본소득 전략이 대안담론으로 더욱 내실을 갖기 위해서는 생산영역과 재분배 영역의 분리보다는 통합적 전략에서 반자본 운동으로써의 전망과 탈시장적 요소의 강화, 그리고 주체형성에 대한 전술이 더욱 요청된다.

 

[참고자료 목록]
모든국민에게기본소득을-민노총
issue-최우성
B3소득-이행전략으로서의한계와가능성-곽노안
준비모임강령특위_강령토론4_21c사회주의와노동_20090514곽노안
소득과_사회연대소득의_경제철학(수정-곽노안
경제위기_어떻게_대응할_것인가-강남훈, 제갈현숙
기본소득의재정적경제적정치적가능성(강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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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민주주의 투쟁과 사회주의 투쟁은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노정협

 

민주주의 투쟁과 사회주의 투쟁은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민주노동당의 민주당 2중대 노선과 다함께의 3중대 노선



이명박정권의 반동성 강화, 집시법 개악, 파업권 제약, 인터넷 억압, 국가보안법 강화, 파쇼적 억압기구 강화 등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각계의 투쟁이 강화되고 있다. 반한나라당 투쟁을 위해 민생민주국민회의가 만들어졌으나 민주당과의 공조를 둘러싼 비판이 제기되자 최근 민주노총은 민주당을 제외한 반이명박 공동투쟁체를 건설하려 하고 있다.

이명박의 민주주의 파괴에 맞서서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농민, 용산철거민 투쟁에서 보듯 소부르주아 하층, 지식인, 종교인, 학생 등 각계각층의 요구와 힘을 모아서 투쟁해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민주주의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주도성과 독자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과 민주주의 투쟁이 그 자체로 사회주의 투쟁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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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주의 투쟁을 투쟁의 전략적 목표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었다. 군사독재에 맞서는 민주주의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은 해방 이후 강요된 수십 년 동안의 반공체제와 폭압적인 억압으로 인한 투쟁의 오랜 단절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80년대 민주주의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앞장서 투쟁했지만 그 성과는 노동자와 민중을 배신한 부르주아지들에게 돌아갔다
.

우리 운동은 대중 같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게 독자성과 자주성을 상실하고 저 악명 높은 비판적 지지의 망령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이러한 비판적 지지를 뚫고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자주적 정치 세력화의 과제가 오랜 기간 제기됐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열망을 안고 태어났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으로 대변되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개량주의적 성격과 민주당 2중대 노선으로 대변되는 의회 중심의 노선, 분단이라는 민족문제 해결을 몰계급적으로 바라보는 자민통 노선 등의 문제로 인해 끊임없이 왜곡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조직적 독자성은 그것이 가진 계급화해성으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흔들렸다. 이 점은 민주노동당의 친북노선을 비판하면서 분리되어 나온 진보신당도 예외가 아니다. 진보신당의 반북노선은 그 자체로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제국주의와 뉴라이트 같은 우익들의 노선과 하나로 결속되었다
.
  
특히 최근에는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과 김대중의 죽음 이후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민주노총 같은 대중조직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을 상실하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있다. 이러한 몰계급적 노선은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대중들의 애도가 깊어지자 무차별적으로 대중들의 눈치를 보고, 대중들의 정서에 영합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두 정당이 대중들의 표를 인식한 의회주의였기 때문에 더 심각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이명박정권의 민주주의 파괴의 강화로 인해 반한나라당, 반이명박 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보궐 선거에서 민주당과의 연대 움직임도 일고 있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안팎에는 민주당과의 공조를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독자적 집권이 아니라 민주당과의 공동정부 구성에 대한 주장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

진보-민주야당들이 반이명박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싸우는 것은,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이 공동으로 집권하여 중도연립정권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준다”(한호석 재미 통일학연구소 소장, 민주주의의 길은 하나다).

한호석
소장이 자민통 세력에게 끼치는 이데올로기적 영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은 민주노동당이 부르주아 정당으로부터 가지는 형식적 독자성마저도 상실하게 하면서 민주노동당을 한층 더 우경화 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노동당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함께는 민주노동당 개량주의의전위대노릇을 하고 있다. 다함께는 민주주의 투쟁에 있어서 민주당과의전술적 제휴를 운운하고 있지만 이 제휴가 현실적인 힘의 역관계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민주당 주도의 힘을 강화한다는 것과 이것이 민주노동당 같은 개량주의 세력들의 입장을 강화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파시즘이라는 특정한 조건 속에서 민주주의적 부르주아 정당과의 일시적, 조건적 제휴는 노동자통일전선의 강화라는 기초 위에서 성립 되어야 하고,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진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명박정부는 공황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위기 속에서 파쇼적 요소를 강화하고 있지만 민주주의 투쟁의 성과를 완전히 부정하고 파시즘이 된 것은 아니다.
  
다함께는 민주주의 투쟁의 결합을 강조하지만 민주주의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폭로를 하지 못하고 있고, 민주주의 투쟁을 일면적으로 강조하지만 사회주의 투쟁과의 결합에 대해서는 사고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다함께의 문제는 민주당과의전술적 제휴자체보다도 사회주의 투쟁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전략노선의 부재 혹은 전략의 기회주의성에 있는 것이다
.

다함께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변증법적 사고는 과거에는 김대중과 조순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민주주의의 토대를 제공해줄 것이라는 몰계급적인 기회주의로 나타났고, “사회주의자들은 적어도 수십만 노동자들에게 민주노동당의 실체가 사회민주주의임이 입증될 때까지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현명하다”(최일붕)는 경제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를 폭로한다고 해서 민주노동당과 통일전선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주노동당과의 통일전선 속에서 민주노동당을 투쟁으로 견인하거나 민주노동당이 투쟁을 배신할 때 개량주의의 본질을 더욱 더 효과적으로 폭로할 수 있는 것이다
.

민주노동당의 실체가 수십만 노동자들에게 사회민주주임을 입증했을 때 민주노동당 내에서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오던 다함께가 어떻게 개량주의의 한계를 폭로하고 혁명정당을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민주노동당이 개량주의 정당이라는 한계를 입증하고 혁명적으로 변화한 수십만의 노동자계급에게 기회주의가 폭로될 때 다함께는 각성한 수십만 노동자들의 꽁무니를 따라가는 처량한 처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다함께의 기회주의와 경제주의, 대중 추수주의적 논리에 의하면, ‘사회주의자들은 적어도 수십만 노동자들에게 민주당의 실체가 부르주아 독재임이 입증될 때까지는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결론으로까지 도달할 수 있다. 다함께 식이라면 민주노동당은 되는데 민주당은 안 될 이유가 있는가? 다함께는 민주주의 투쟁에 있어서 민주당과의전술적 제휴운운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수백 배 강조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

우리 운동 내에서 비판적 지지라는 형태가 얼마나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적 조직화를 가로막았던가? 이것이 최근에는 민주노동당의 민주당 2중대 노릇으로 나타나면서 대중투쟁을 파괴하고 노동자계급의 혁명성을 거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성과 자주성에 대한 강조는 민주당과의 전술적 제휴 보다 전략적으로 백배나 값어치 있는 일이다. 민주당과의 전술적 제휴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미디어법 개정 반대투쟁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투쟁했지만 대중투쟁이 강화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의회 내에서의 투쟁에 머물렀다. 민주당과의 전술적 제휴는 의회 내에서의 전술적 제휴에 그칠 것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의회주의를 강화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당의 2중대 노릇을 하고 있다면 다함께는 민주당의 3중대 노릇을 하고 있는 격이다
.


노동자계급에게 민주주의는 왜 필요한가
?


한국의 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한지 오래되었다.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은 자본의 저발전이 아니라 한국자본주의의 발전과 자본의 과잉으로 인해 억압 받고 고통 받고 있다. 독점자본주의에 의한 억압과 착취는 비단 노동자계급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과 철거민, 노점상 같은 소부르주아 하층에게도 빈곤과 생존권의 몰살 같은 고통을 당하도록 하고 있다. 농민은 농가부채에 이어서 금융자본에 토지와 기계를 저당 잡히고 독점자본을 위한 자유무역협정 등으로 인한 수탈과 억압이 강화되면서 소부르주아로서의 안정성이 파괴된 지 오래되었다. 도시의 소상인들 역시 은행에 종속되어 있고, 거대 상업자본과의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몰락하고 있다
.

독점자본주의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본가 국가는 자본주의 공황이 심화되면서 그 억압적, 폭력적, 반동적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 용산학살과 쌍용차 노동자들에 가해지는 국가의 폭력은 독점자본주의 모순이 얼마나 심화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

이러한 독점자본주의의 성장과 모순의 심화로 인해 한국사회 변혁의 성격이 이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임이 더욱 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 자체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노동자 민중의 피로써 쟁취한 민주주의 투쟁의 성과를 이명박정권이 파괴하고 있고, 민주주의 투쟁의 주도자를 자처했던 자유주의 부르주아의 반노동자성, 반민중성이 분명하게 드러난 지금에서 민주주의 투쟁은 노동자계급의 몫이 되고 있다. 노동자계급은 민주주의 투쟁을 어떻게 사고하고, 이것을 사회주의 혁명과 어떻게 연결시킬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
우리는 민주주의 투쟁의 요구에 있어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상실하고 민주주의 투쟁을 사회주의 투쟁과 전략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개량주의 정당과 민주노총의 우경적 경향을 막아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투쟁의 성격을 부정함으로써 민주주의 투쟁을 왜곡하는 경향과도 동시에 투쟁해야 한다
.

노동자계급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고, 노동자계급의 해방에 있어서 민주주의 투쟁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
먼저 민주주의 요구를 쟁취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레닌은민주주의를 위한 전면적이고 일관된 혁명적 투쟁을 수행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승리를 준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집시법 개악, 파업권 제약, 국가보안법 강화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위축시키고 있다.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민주주의 파괴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그 자체로 사회주의 요구가 아닐지라도 이러한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 요구를 쟁취한다면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투쟁은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민주주의 투쟁을 철저하게 수행해서 해방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

노동자계급은 민주주의 투쟁이 오로지 노동자계급에게만 유리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투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계급은 노동자 자신의 요구뿐만 아니라 가장 앞장서서 민주주의 투쟁을 하는 투쟁의 전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계급동맹에 있어서 노동자계급이 어떻게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는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은 민주주의 투쟁의 전위가 되어 민중들을 사회주의 혁명의 동맹자로 삼아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민주주의 투쟁을 주도할 때만이 이 계급동맹에서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이 민주주의 투쟁의 과정에서 단련되고 훈련되고 각성하게 되지 않고서 혁명은 불가능하다
.
레닌은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요구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에 대한 계급적 인식을 총체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계급은 자신들의 직접적인 이해가 달린 생존권 요구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고 전체 인민의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는 것을 통해 진정한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획득할 수 있다
.

노동자계급이 민주주의 투쟁을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쟁취되어야만 자본주의 모순이 민주주의의 부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있다는 것을 인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마르크스주의자는 민주주의가 계급적 억압을 폐지하지 않는다고 것을 알고 있다. 민주주의는 단지 계급투쟁을 보다 노골적이고 보다 광범위하며 보다 공공연하게 그리고 보다 격렬하게 만들뿐이며, 그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이다. 이혼의 자유가 보다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여성들은 그들이가사노예의 근원이 권리의 결여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점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정부체제가 보다 민주적이면 민주적일수록 노동자들은 악의 뿌리는 권리의 결여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점을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민족 간의 평등이 보다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이것은 분리의 자유 없이는 완전하지 못하다) 억압받는 민족의 노동자들은 그들 억압의 원인이 권리의 결여 등등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점을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레닌, 마르크스주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민주주의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레닌의 이 같은 언급은 민주주의에 대한 대단한 통찰력과 심오함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우리에게 있어서 군사독재는 대중들로 하여금 모든 악의 근원을 자본주의가 아니라 파쇼적 통치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했다. 지금에 와서는 이명박정권의 민주주의 파괴와 독재는 그것이 독점자본주의 국가의 모순이 아니라 이명박정권의 억압적이고 반동적인 통치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사회의 성격은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안고 있는데 이 때문에 한국사회는 민족문제의 해결을 과제로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일반화하여 분단모순을 최대모순으로 사고하고 있는 민족주의자들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이라도 민족문제의 해결은 절실하게 필요하다. 분단문제는 제국주의 모순과 계급모순의 외화적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를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제국주의 문제를 제국주의 국가 대 약소국가의 문제로, 민족문제를 몰계급적인 민족문제의 해결로만 사고하고 실천하고 있다. 민주당과의 몰계급적인 연합시도는 대중투쟁 보다는 의회 내에서의 정책으로 요구를 해결하는 의회주의의 문제와 더불어 통일문제를 몰계급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측면도 있다. 통일을 위해서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와 전략적으로 손잡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은 김대중은 바로 통일의 화신이고, 죽은 독점자본가인 정주영 역시 통일에 기여하는 민족자본이므로 이들과 연대를 해야 한다고 사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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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촛불투쟁에서 대중들은 이명박정권에 맞서는 투쟁을 했지만 그것을 독점자본주의의 모순으로 돌리지 못하고 이명박정권의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통치방식과 소통의 부재로만 화살을 돌렸다. 이 때문에 대중들은 민주공화국이 바로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억압과 지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민주공화국을 외쳤던 것이다
.

레닌의 심오한 말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강화되면 될수록 노동자들은 정치적, 사회적 권리의 부재가 단지 민주주의의 부재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도 부르주아 독재의 지배형태로서 그것이 노동자계급과 인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한다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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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초기에 부르주아지가 봉건제에 맞서 싸우면서 만들어졌다. 물론 이 투쟁을 주도한 세력은 부르주아였지만 이 투쟁의 실질적인 담당자는 프롤레타리아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초기에 부르주아는 봉건제에 맞서는 부르주아 혁명에서 혁명적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부르주아 혁명은 과거의 봉건적 지배에 맞서 부르주아를 새로운 억압자로 만들었다. 부르주아 혁명은 사적소유를 철폐한 것이 아니라 소유의 형태만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

부르주아 혁명이 달성된 이후 노동자계급은 새로운 지배자인 부르주아 계급과 권력에 맞서 싸웠다. 부르주아는 자신들이 봉건제에 맞서 싸우던 당시 자신의 동맹자였던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요구에 맞서 노동자계급을 학살하고 진압했다. 봉건제에 맞서 싸우던 독일의 부르주아는 프랑스에서의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에 겁을 먹고 봉건세력과 손잡고 노동자계급을 억압했다. 이로써 부르주아의 혁명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

그들은 민주주의 혁명에 멈추지 않고 사회주의 혁명을 열망할 노동자들의 너무나 지나친 혁명적 행동을 두려워하며, 천개의 끈으로 유산계급들의 이해와 자신의 이해를 연결시키는 관료, 관료주의와의 결별을 두려워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유를 위한 부르주아적 투쟁은 악명 높게 유약하고 일관되지 않으며 열의 없다”(레닌,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민주주의적 임무).  

이명박정권의 독재 강화와 민주주의의 파괴로 인한 불만이 죽은 노무현김대중에 대한 지지와 향수로 나타나고 있지만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같은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얼마나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인지를 직접 경험했다.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반동적 부르주아와의 타협을 통해 국가보안법조차도 철폐하지 못했을 뿐더러 여전히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탄압하였고, 반동적,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활용하여 노동자민중을 억압하고 탄압했다. 김대중, 노무현정권 하에서도 노동자 민중들은 파업권과 집회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수천 명씩 구속과 수배를 당해야 했다. 심지어는 백주대낮에 집회를 하다가 폭력경찰에게 죽임을 당하기조차도 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역시 반동적 부르주아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정치세력 역시 독점자본의 반동적 이해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다만 반동적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다른 점은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방식만 달랐을 뿐이다.


사노련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와 그것의 정치적 배경



사노련은 민주주의 요구가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현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이고 민주주의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투쟁은 혁명적 노동자당의 강령에서 최소강령의 일부로써 표현된다. 민주주의 요구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실현 가능한 개량의 요구다(최소강령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문제는 노동자정치신문 53최근 당건설 토론과 강령논의에 대한 비판과 입장3’을 참고하라).

이 강령은 우리 당의 최소강령 전체, 한편으로는 현존하는 사회경제적 관계에 기초하여 완전히 실현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 발걸음을 위해, 사회주의의 성취를 위해 없어서는 안될 즉각적인 정치경제적 개혁의 강령이다”(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전술).

레닌은 당시 러시아가 자본주의의 발전이 아니라 불충분한 발전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에 남아 있는 황제체제와 봉건제적 유산을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없이 노동자계급은 다음 단계의 온전한 해방을 쟁취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레닌의 이러한 입장이 단지 당시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단계가 봉건제의 유산에 대한 철폐를 담고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였기 때문에만 그런 것인가? 레닌은 결코 민주주의 요구가 단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럽에서의 민주주의 혁명의 시기는 수많은 사회주의 운동 및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시도들과 교차하지 않았던가? 또한 유럽에서의 미래의 사회주의 혁명은 아직도 민주주의의 전장에서 수행되지 않고 남겨진 많은 것을 완수해야 할 것이지 않은가?”(레닌, 같은 글)

맑스와 엥겔스는 유럽에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시기에 부르주아와 동맹을 맺을지라도 부르주아지의 배신에 대비해서, 부르주아 혁명 이후에 노동자계급의중단 없는 혁명을 위해서 계급적 독자성과 자주성을 사수할 것을 강조했다. 유럽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완성되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민주주의 요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적소유와 계급지배에 대한 부르주아의 이해관계 때문에 부르주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요구조차도 실현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고 있다. 부르주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의 실현이 자신들의 계급지배를 위협하고 노동자계급의 해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레닌은 1917 2월 혁명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달성되었다고 보고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달성된 것은, 오직 짜리즘이 격퇴되고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았다는 이유 때문인데 부르주아는 더 이상 민주주의 요구조차도 실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미완성의 부르주아적 요구는 오직 노동자계급의 혁명만이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 사회주의적 과제와 부르주아가 이루지 못하고 회피하는 민주주의적 과제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한국사회는 고도의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를 앞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 요구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르주아의 반동성이 극에 달한 지금 시점에서 노동자계급은 자유주의 부르주아나 반동적 부르주아나 할 것 없이 실현할 수 없는 민주주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

물론 사노련은 국가보안법의 탄압을 직접 당하면서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에 나서기도 했으며 이명박정권의 민주주의 후퇴에 맞서 투쟁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노련은 현재의 민주주의 요구가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투쟁에 있어서 최소강령으로 표현되는 민주주의 투쟁을 이행기 강령으로 대체함으로써 무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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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기 민주적 권리들을 방어하는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는 이행적 요구들(노동자 생산통제, 경찰 군대 등 폭압기구 해체/노동자 정당방위대 구성, 노동자정부)과 분리된 별개의 과제일 수 없다. 최대강령과의 연결을 끊고 그것과 담을 쌓는 사민주의적 최소강령 투쟁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 후퇴에 맞선 투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뗄 수 없이 연결시켜야 한다.(사노련 양효식, '민주주의 후퇴에 맞선 투쟁과 이행강령)

사노련은 민주주의 후퇴에 맞선 투쟁을 사회주의 투쟁과 연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민주주의적 요구(최소강령)과 최대강령(사회주의)의 결합이 아니라 이행기 강령으로의 대체이다. 쌍용차 투쟁에서도 사노련은 생존권 투쟁의 중요성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강조하는 대신에 국유화와 노동자통제를 이행기 강령으로 제출함으로써 최소강령을 사실상 외면했다. 마찬가지로 촛불투쟁에서도 언론통제위원회, 쇠고기 통제위원회 등 최대강령적 내용이 담긴 이행기 강령을 제출함으로써 사실상 최소강령을 포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노련은 결국은 최소강령의 일환으로써 제기되는 민주주의 투쟁에 기권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사노련은 “‘민주주의 후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정이 아니라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오늘날 불가피하게 취하는 모습이다”(같은 글)이라면서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키고 확대하는투쟁을 반대한다. 사노련은 부르주아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구제불능의 혼란에 빠져 있다. 부르주아 독재는 계급지배의 본질이고 부르주아 국가의 계급적 성격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의 통치형태, 계급지배의 한 방식이다. 사노련은 어처구니없게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이 강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사고하는 것이다
.
자본주의 체제는 부르주아 독재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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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국가는 아주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그들의 본질은 동일하다. 즉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그들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끝까지 본질을 분석해보면 부르주아지의 독재라는 동일한 본질이 드러난다”(레닌, 국가와 혁명).

이처럼 부르주아 국가는 다양한 통치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본질은 계급지배를 강화하는데 있다.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지배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억압을 강화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단순히 억압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지는 계급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동의와 설득, 매수와 개량의 방식도 빈번하게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주아지가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취하는 계급지배의 방식 즉, 통치형태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부르주아 독재의 통치형태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방식의 통치형태도 있고, 파시즘적 방식의 통치형태도 있다. 군사독재는 넓게 보면 파시즘적 통치의 한 형태이다. 다만 한국에서 군사독재는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한 것이 아니라 독점자본의 성장을 위해서 원시적 축적을 위해 억압적인 통치를 강화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다양한 통치형태와 계급지배 방식을 사용하고 있고, 때로는 동의와 설득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본질은 계급지배를 강화하고 용이하게 하는데 있다. 억압을 강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계급지배를 강화하는 하나의 유력한 수단인 것이다. 다만 부르주아 체제는 소수의 지배계급에 의한 압도적 다수 노동자 인민에 대한 지배에 본질이 있으므로 억압에 더욱 더 의존할 수밖에 없다
.


사회주의의 전략적 목표에 종속되는 민주주의 투쟁



수정주의의 대표격인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는 점진적인 민주주의 심화발전을 통해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는 아무리 심화 발전하더라도 부르주아 독재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순수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독재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보편적 성격이 있다면 그것의 본질은 지배와 억압이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하에서도 이러한 지배와 억압의 성격을 가지는 민주주의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인데 그것은 혁명 이후에도 남아 있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지배와 억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배와 억압이 없다면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제대로 유지, 강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의 반혁명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 의한 부자들, 노동자민중의 압도적 다수의 소수에 대한 억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점진적 민주주의 발전과 심화로 사회주의를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서 민주주의의 성격을 왜곡하는 것이고, 개량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계급적 본질이 바로 부르주아 독재임을 모르는 소치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비해서 훨씬 더 후진적이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보통선거제가 정착이 되면서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와 함께 평등한 표를 던지지만 자본주의는 생산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법률적 평등은 형식적인 것이 되고, 보통선거제는 독점자본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형식적 절차로 전락하게 되었다. 독점자본은 선출되지 않지만 생산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한 힘을 바탕으로 사회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한다
.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부르주아 독재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점진적 발전으로, 부르주아 체제 내에서의 개량의 양적 축적으로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해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발전이 아니라 부르주아 독재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권력의 원천인 생산에 대한 지배력을 타파하고 생산수단을 노동자계급이 장악하지 않고는 부르주아의 지배를 끝장낼 수 없다. 단순히 사적소유를 그대로 두고 분배의 변화만으로 부르주아의 힘을 약화시킬 수 없다. 자본주의 내에서의 분배의 모순은 바로 생산에서의 착취와 무관하지 않다
.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사회화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해야 한다.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타도하는 정치혁명이라는 질적 변화 없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점진적 발전으로 부르주아 지배를 끝장낼 수는 없는 것이다
.
  
독점은 정치적 반동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자유경쟁 자본주의 시대의 부르주아의 상대적 진보성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독점자본주의의 반동적 성격은 강화되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의 경제위기인 공황의 시대에 독점자본주의 국가의 반동적, 폭력적, 억압적 성격은 더욱 더 강화되고 있다. 제국주의는 약소국 노동자, 민중들에 대한 침략과 억압, 착취를 더 노골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

반동적 독점자본주의 하에서 민주주의 투쟁을 강화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 투쟁은 사회주의 투쟁과 결합되어야 하고 이 결합은 사회주의의 전략적 목표에 철저하게 종속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독점자본주의의 모순과 독점자본주의의 상부구조로서 제국주의의 반동이 심화되면서 군국주의가 강화되고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운동의 최종목표를 잃어버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심화발전만을 주장하는 개량주의자들이 판치는 운동현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 말은 더욱 더 의미심장하게 들리고 있다.

사회주의 운동의 운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민주주의 발전의 운명이 사회주의 운동에 연결되어 있다. 또한 민주주의는 노동자 계급이 해방투쟁을 포기하는 경우가 아니라, 반대로 사회주의 운동이 세계 정책과 부르주아의 이탈이 가져오는 반동에 대항해 강력히 투쟁할수록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사회주의 운동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되기를 원해야 하며,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노력을 포기한다는 것은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도 포기하는 것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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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김혁동지가 금속사무처에게 보낸 쌍차관련 평가 서신 전문

사무처 동지들께

 

이곳에 들어온 지가 엊그제 같았었는데 벌써 한 달 여가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비 한 점 없이 내리쬐던 직사광선 탓에 팔이 마치 토시를 낀 듯이 새까맣게 그을었었는데, 햇빛을 보기 어려운 이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검은 피부는 흔적으로만 남은 채 자취를 감춰가고 있습니다.

사무처 동지들 모두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계시지요? 선거 때문에 다른 경황이 없이 바쁘게 돌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면회와 주신 동지들에게 무어라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영등포구치소라면 모를까 이 곳 수원까지는 최소한 하루를 꼬박 비워야만 할 텐더 다시금 고맙다는 이사를 전합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바깥에 있을 때는 술이다 뭐다해서 몸을 챙기지 못했고, 쌍용에 있을 때는 씻는 것, 먹을 것 등이 모두 부족해서 몸이 많이 부실해졌다 싶었는데 이곳에 들어와서는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을 통해 오히려 건강은 많이 회복된 듯 합니다.

얼마 전까지는 조사가 채 끝나지 않아서 어느 것 하나 집중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조사도 끝나고 해서 학습과 생활을 조금은 더 계획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 간간이 실려있던 쌍용차 투쟁과 관련된 평가 틀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을 포함하여 많은 노동, 사회, 정치 단체들이 투쟁에 결합하였던 만큼이나 적극적인 평가를 조직하는 것 역시 이후 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대단히 고무적이라 생각됩니다.

평가의 내용과 관련하여 자신이 처해있는 위치와 조건에 따라 그리고 투쟁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몇 가지의 관점들은 대단히 우려스럽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 이 투쟁에 대하여 한 단면만을 바라보면서 ‘졌다’ 또는 ‘패배한 투쟁’이라고 규정하는 패배주의적 시각입니다.

이런 시각은 8월5일 공권력에 밀려 도장 공장으로 후퇴한 이후 8월6일 회사 측과의 협상 타결에 의해 투쟁은 종료되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쌍차 투쟁은 종결된 것입니까? 회사와 경찰의 기만적인 협상안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간부를 포함하여 60명이 넘는 활동가들이 구속되어 있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투쟁했던 조합원들이 아래로부터 결의하여 ‘정원투’를 조직해 들어가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말합니까?

저는 쌍차 투쟁을 평가하는 데 있어 핵심은 구조조정 저지라고 하는 전쟁의 관점에서 77일 전투를 바라보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봤을 대에도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했던 사례가 적잖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77일간의 옥쇄파업을 군 사저 측면에서의 전투로만 바라보지 말고 이 투쟁이 쌍용차 조합원과 민주노조 운동에 미친 영향, 정부와 자본의 구조조정에 대한 저지선의 형성, 정리해고 구조조정에 대한 전 국민적인 여론화 등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측면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전쟁의 관점을 명확히 해야만 쌍차 투쟁이 끝난 투쟁이 아니라 구조조정을 분쇄하기 위하여 어떤 전망을 갖고서 다시 투쟁의 불씨를 살려야 할지에 대한 계획이 세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둘째, 협상으로 끝날 수 있었는데 투쟁으로 일관한 나머지 시기를 놓쳤다고 하는 타협주의적 시각입니다.

저는 얼마 전 신문에서 민주노총의 모 간부가 이와 유사한 얘기를 했었다는 기사를 보고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제가 처해있는 조건으로 인하여 과정 전체를 밝힐 수는 없지만 그 협상안이 8월6일 공권력에 밀려서 회사와 체결한 협상안보다 나았는지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대정부 협상안에 대하여 농성투쟁하고 있던 조합원들이 압도적으로 거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합원들의 정서는 투쟁다운 투쟁을 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구조조정이 철회되지 않는 협상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더누가 조합원들이 그 안을 거부하였던 핵심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안을 받는 순간 ‘민주노조 운동의 깃발’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합원들이 협상안을 압도적으로 거부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협상안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를 놓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중을 주체’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 대중을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지극히 관료적이며 타협적인 발상이라 거듭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경찰이 이 투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 ‘안양지역 민주노동자 일동’ 사건이라는 조직사건으로 구속되어 당시 악명이 높았던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던 바 있습니다.

이들의 일관된 시각은 온갖 종류의 미행과 전화 도청, 감시 등 일련의 행위가 노동운동세력과 정당한 게임을 하고 있다고 사고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사과정에서 일관된 요구는 ‘게임에서 졌으면 이제 룰에 따라 모든 행위를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고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보안수사대로 바뀌고 또한 수사관들도 악명이 높았던 이근안 대신에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지만 이들이 바라보는 시각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조합원들은 목숨을 걸고 생존을 위한 옥쇄 투쟁을 전개했지만 이들이 진압작전에 임했던 것은 하나의 ‘게임’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고무총, 테이전 건에 최루액 등을 무참하게 살포하고 다시금 조합원들을 조사하면서 온갖 협박을 가하였기 때문에 결국 한 조합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극단적인 행동을 하였음에도 이들은 ‘게임의 룰’에 따른 정당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쓰다 보니 조금 길어졌습니다. 아무튼 아직도 쌍용차 구조조정 저지 투쟁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궁극적 승리를 위해 금속노조가 어떻게 지원과 결합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동지들의 힘찬 건투를 바라며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00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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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종파주의 비판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종파주의 비판

민주당ㆍ개혁주의자들과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는가

전지윤 기자 ratm71@left21.com

 

올해 상반기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ㆍ반노동 공격에 맞선 투쟁에서 민주당에 대한 비판을 삼가지 않으면서 특정 사안을 놓고 민주당과 전술적으로 제휴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예컨대 1917년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우익 장군 코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부르주아 정부의 수장인 케렌스키와 함께 코르닐로프에 맞섰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이 과정에서 케렌스키를 지지하지 않[] 민중에게 케렌스키의 약점과 동요를 지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로츠키도 케렌스키를 코르닐로프를 맞출 총의 조종대로 사용하자. 케렌스키는 나중에 처리하자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민주당의 동요와 약점을 지적하면서, 민주당을 이명박을 맞출 총의 조종대로 이용하는 전술이 필요했다. 그러나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민주당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면서 정치적으로 민주당을 추수하는 인민전선적 동맹을 추구했다. 

<레프트21>다함께는 이런 인민전선적 동맹 추구가 이명박의 공격을 막아낼 진정한 동력인 노동자ㆍ민중의 힘과 사기를 떨어뜨리며 이명박 정부가 언론법 날치기 등을 강행할 수 있는 틈을 제공했다고 비판해 왔다. 

그런데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은 이런 인민전선적 동맹뿐 아니라 민주당과의 전술적 제휴를 포함한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전술 수준에서까지 일관되게 반대한다.(효식, <가자! 노동해방> 37) 

나아가 사노련은 개혁주의 단체들 NGO, 한국진보연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과의 연대마저 사실상 거부한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은 자본가당과 어울리며 이중대 노릇이나 하는 가짜 노동자당(양준석, <가자! 노동해방> 29)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노련은, 민주당과 전략적 동맹은 안 되지만 불가피할 때 전술적 제휴는 가능하다다함께도 비판한다. [다함께는] 민주주의 요구와 반자본주의 요구의 결합을 이야기하지만, 민주당과의 동맹 일시적이든 상설적이든 요구는 이러한 이야기를 모두 공문구로 만든다. 실제로 다함께는 노동자 생산 통제, 정방대 구성, 노동자 정부와 같은 어떠한 반자본주의적 이행 요구도 제출하지 않 고 있다(양효식, <가자! 노동해방> 34)

최대강령(전략적 과제)과 당면 투쟁을 분리시키는 기회주의가 바로 민주당과의 전술적 제휴론에 깔려 있는 본질(양효식, <가자! 노동해방> 37)인데, 다함께“‘4당 연합노선에 대한 굴종[을 통해] 현실에서는 인민전선 세력의 힘을 북돋아주는 역할(오연홍, <가자! 노동해방> 37)을 한다는 것이다.

결국, 민주당과는 어떠한 타협도 안 되며, 노동자 정부 구성 등 최대강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개혁주의자들과도 절대 타협할 수 없고, 개혁주의자와 연대하는 다함께는 기회주의라는 게 사노련의 주장이다.  

정치적 무능력  

혁명적이면서도 누구보다 현실적이었던 레닌은 이처럼 어떤 것이든 타협 일반의 허용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 그것은 진지하게 고려하기조차 어려운 어리석은 짓(≪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레닌은 볼셰비즘의 온 역사가 유연한 대응, 협조, 부르주아 정당을 포함한 다른 정당들과의 타협의 사례로 가득차 있음을 강조하며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것은 산을 올라가면서 때로는 지그재그로 올라가고, 때로는 되돌아가고, 때로는 일단 선택한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구하고 하는 일들을 미리 포기해 버리는 것과 완전히 똑같[]고 비판한다. 

물론 민주당은 자본가 계급에게서 돈ㆍ인력ㆍ자원을 충원하고 따라서 이명박과 근본에서 다르지 않은 정책을 추구하는 자본가 정당이다. 민주당을 추수하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근본적 변혁이 아니라 자본주의 내에서 점진적 개혁을 추구한다는 한계가 있다. 레닌은 그러나 이로부터, 이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은 혁명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혁명가들은 혁명을 위해서 이러한 신사양반들에게 어느 정도 의회적인 지지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우리에게 폐물이 된 것을 계급에게 폐물이 된 것으로, 대중들에게 폐물이 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오늘날 진보와 개혁을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이 민주당이 이명박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가? NGO, 한국진보연대, 진보정당 등도 결국은 자본주의 내에서 개혁을 추구하기 때문에 민주당과 똑같다고 보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민주당은 이명박과는 다른 개혁정당으로 알려져 있고 진보진영의 단체들은 모종의 좌파로 알려져 있다. 

물론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면서 민주당에 대한 기대가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차악 논리 속에 다시 민주당에 대한 환상이 살아나고 있다. 촛불 이후 급진화한 청년들도 곧바로 무슨 혁명적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로 옮아온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대체로 민주당 좌파나 급진적 개혁주의 정도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올해 언론악법 등 MB악법에 맞선 투쟁에서 다수 대중은 민주당이 미덥진 않지만 이명박에 맞서 민주당까지 포함한 광범한 연대가 이뤄지길 기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가들은 대중 속에서 활동할 줄 알아야 하고 불가피하다면 이를 위해 부르주아 정당과도 일시적으로 타협할 수 있다는 게 레닌의 강조점이었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나 개혁주의] 지도자들 로부터 오는 어려움들, 곧 고통, 속임수, 모욕, 박해 등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대중이 있는 곳에서 작업해야만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참된 과제는 후진 분자들을 설득하고, 후진 분자들 사이에서 작업할 줄 아는 것이지, 억지로 고안해 낸 유치한 좌익슬로건들로 그들을 둘러막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마치, 민주당과 일시적ㆍ전술적 제휴조차 할 수 없다며 대중과 자신들 사이를 둘러막은 후 노동자 생산 통제, 노동자 정부 구성을 외쳐대는 사노련을 겨냥하고 한 말처럼 들릴 정도다. 이런 종파적 태도는 역설적으로 민주당에게 반이명박 투쟁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결과를 낳는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주도한다는 이유로 어떤 투쟁에 관여하기를 꺼리는 자들은 사실상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지도적 지위를 점하게 하고 정치투쟁의 헤게모니를 넘겨주고 있는 것(≪레닌저작선≫)이다.   

헤게모니 

실제로 올해 상반기 정치 투쟁의 정점이었던 6.10 대회가 그것을 보여 줬다. 당시 노무현 사망 이후 뜨겁게 달아오르던 정세 속에서 좌파는 이명박의 반민주적 개악에 맞선 투쟁과 쌍용차 등 노동자 투쟁을 결합시키며 반이명박 정치투쟁을 발전시켜야 했다. 6만여 명이 결집한 6.10 대회는 그 가능성을 보여 줬다. 

그런데 사노련 등 종파적 좌파들은 민주당이 공동 주최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6.10 대회에 개입하는 것과 쌍용차 노동자들이 이 집회에 참가해 연대를 호소하는 것 모두를 마뜩찮아 했다. 반면 민주당을 추수하던 개혁주의 지도자들 또한 6.10 대회에 급진좌파들이 개입하거나 쌍용차 투쟁의 요구들이 결합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개혁주의자들의 민주당 추수와 종파적 급진좌파들의 정치적 무능력 덕분에 민주당은 6.10 대회 후 투쟁의 열기를 식히며 별 저항 없이 국회로 복귀했고, 이어서 이명박 정부는 언론악법 날치기와 쌍용차 살인진압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레닌은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좌파들에게 이런 따끔한 지적을 한다. 

당신들은 스스로를 겁나게 혁명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당신들은 노동운동 내의 부르조아지의 영향력에 맞선 투쟁에서 비롯하는 비교적 사소한 어려움조차 두려워하고 있다.

당장 9 26일에도 용산참사 해결을 위해 야4(민주당,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용산범대위가 공동 주최하는 집회가 있을 예정이다. 용산범대위 소속 단체인 사노련은 이 집회에도 불참할 것인가? 이 집회 개최를 합의한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 등 다른 좌파 단체들도 기회주의라고 비난할 것인가? 

ⓒ사진출처 민주노동당

물론 민주당은 나름의 정략적 계산 때문에 이 집회를 공동 주최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는 민주당이 이 집회를 주도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이 집회에 개입해 용산참사에 분노하는 대중 속에서 이 투쟁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사회주의자의 분석과 전술을 제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노련에게는 이처럼 공동 행동을 통해 대중운동을 건설하고 운동의 전진에 기여한다는 마인드 자체가 없는 것 같다. 민주당뿐 아니라 진보정당들조차 민주당과 똑같이 취급하며 어떠한 지지도 없이 비판만 하는 것, 공동 투쟁의 건설에는 관심 없고 진보정당들을 폭로하며 노동자 정부 구성, 혁명적 당 건설 등 자신들의 의제만을 선전하려 하는 것은 사노련의 구제불능의 종파성만 보여 준다. 이런 종파주의 때문에 사노련은 지난해 촛불항쟁 때도 아주 뒤늦게야 운동에 뛰어들어 별다른 구실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개혁주의적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정치적 운동에 개입해 대중들과 접촉하려는 활동과 노력을 평가절하하면서 사노련의 오연홍 동지는 신문 팔고 피켓 시위하고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8 27쌍용자동차 투쟁과 한국 사회 변혁운동의 과제 토론회에서)

사회주의자들에게 정치 신문을 제작하고 판매한다는 것과 피켓팅을 한다는 것은 대중운동에 개입하며 정치적 주장과 선전ㆍ선동을 한다는 의미다. 혁명적 원칙에 기반해서 당면 정세를 분석하고 필요한 방향과 전술을 제시하는 정치 신문은 사회주의자들이 운동에 개입하고 조직을 건설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무기이다.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전국적 정치 신문을 통한 당 건설을 그토록 강조한 이유도, 지배자들이 국가보안법에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판매를 특별히 규정해서 탄압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신문 판매야말로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활동인 것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혁명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노동자당을 조직(사노련, 우리의 입장)하겠다는 사람이 이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다니 이런 모순도 없다. 그것은 혁명적 정치와 주장을 통해 운동에 개입하고 조직을 건설하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실제로 사노련 동지들은 자신들의 신문 <가자! 노동해방>을 집회 등에서 자신감있게 판매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고 언제나 무료로 배포할 뿐이다.       

혁명적 원칙만 되뇌는 

레닌은 이런 정치적 무능력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었다. 레닌은 다양하고 모순적인 배경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투쟁들에 개입해서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혁명적 원칙만 되뇌는 혁명가들을 경멸했다.   

식민지와 유럽에서 소수민족들의 반란이 없이도, 온갖 편견을 가진 프티부르주아지의 혁명적 분출 없이도, 정치의식이 없는 프롤레타리아와 반()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지주ㆍ교회ㆍ왕정의 억압과 민족 억압 등에 저항하는 운동 없이도 사회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혁명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군대가 한 장소에 죽 늘어서서 우리는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외치고 맞은편에서 다른 군대가 우리는 제국주의를 지지한다고 외치는 것이 사회혁명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순수한 사회혁명을 기대하는 사람은 살아서 혁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혁명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말로만 혁명을 떠드는 사람이다.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정부의 탄압과 용산참사 항의 투쟁에서 경찰 소환에 대한 태도를 보면 사노련이 말로만 혁명을 얘기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명박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사노련 활동가들을 탄압하는 것에 맞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이들을 방어해야 한다. 

실제로 다함께는 지난해부터 사노련 탄압에 반대하는 공동 대책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해 왔고 <레프트21>도 사노련을 방어하는 기사를 여러차례 실었다. 그런데 사노련 활동가들은 국가의 탄압에 맞서 철저하고 일관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경찰의 컴퓨터 등에 대한 압수 수색에 사실상 협조했으며 조사 과정에서 진술을 거부하며 묵비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대책위 내에서도 사노련 활동가들이 국가보안법 이용 탄압에 대해 가장 기본적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우려와 지적이 거듭 나왔고,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에서도 사회주의 혁명가라는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에 대한 투쟁의 기본 원칙도 지키지 않느냐는 실망의 목소리가 나왔다.  

올해 초 용산참사 항의 투쟁에 대한 경찰 소환에 대해서도 사노련의 파견자는 소환에 응해서 조사를 받았고 적당히 말하고 나왔다며 실용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당시 다함께투쟁의 정당성을 알리며 소환에 불응해야 하고 연행되더라도 철저히 묵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우리는 떳떳하니까 숨기거나 도망다닐 필요가 없다, 나와서 열심히 활동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자본가 권력을 철폐하고 노동자 권력을 수립(사노련, 우리의 입장)하자면서 자본주의 국가의 탄압에 이처럼 실용주의적이고 무원칙한 태도로 응하는 것은 완전한 모순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무엇보다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서 단호하고 원칙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정말 타협하지 말아야 할 자본주의 국가의 탄압에 대해서는 실용주의적으로 타협하면서, 운동의 단결과 전진을 위해 불가피하게 필요한 전술적 타협은 한사코 거부하는 사노련은 레닌의 다음과 같은 충고를 곱씹어 봐야 한다. “‘어떠한 타협도 없고, 어떠한 유연한 대응도 없다!는 성급한 판단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영향력을 확대하고 세력을 강화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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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다중’은 대안세계화운동의 희망인가?*-장시복

마르크스주의 연구

일반 논문

 

‘다중’은 대안세계화운동의 희망인가?*1)

- 하트와 네그리의 ‘다중’을 중심으로 -



장시복**1)


이 논문은 하트(M. Hardt)와 네그리(A. Negri)가 『제국』과 『다중』에서 제기한 ‘다중’의 실체, 구성과 정치적 기획을 대안세계화운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그들에 따르면 자본의 세계화에 저항하고 대안세계를 구축하는 핵심동력인 다중의 실체는 비물질노동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의 2절에서는 다중의 물질적 기초를 이루는 비물질노동의 개념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 절의 핵심 주장은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한 비물질노동이 애매한 개념이며 다중의 논의에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3절은 비물질노동의 물질적 기초를 통해 형성된 다중이 어떻게 ‘구성’되고 그들의 ‘정치적 기획’이 무엇인지를 대안세계화운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 절의 핵심 주장은 비록 하트와 네그리가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탐구하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그들의 논의가 대안세계화운동의 관점에서 구체적인 정치적 기획으로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 논의를 통해 이 논문이 내린 결론은 비록 그들이 제시한 다중이 현실 운동의 한계에 대해 여러 가지로 여론을 환기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현실 운동에서는 여전히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용어: 비물질노동, 다중, 대안세계화운동



1 들어가는 말


하트(M. Hardt)와 네그리(A. Negri)의 『제국(Empire)』과 『다중(Multitude)』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기의 세계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자본주의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새로운 주체성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문제작이다. 그들은 마키아벨리(N. Machiavelli), 스피노자(B. Spinoza), 헤겔(G. W. F. Hegel), 홉스(T. Hobbes), 칸트(I. Kant), 마르크스(K. Marx), 푸코(M. Foucault), 들뢰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와 같은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을 다루며 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역사학 등을 통합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그들은 로마 제국, 1953년 베를린 반란, 베트남 전쟁, 미국의 헌법, 걸프전, 시애틀 전투 등 인류 역사의 흔적들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을 그들의 단일한 이론체계 내에서 재해석했다.

하트와 네그리의 저작들은 장엄하고 변화가 풍부하며 패배주의와 방어주의에 빠진 운동에 환희를 전달해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방대한 분량의 두 저작은 한 편의 웅대한 교향곡이며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에 새로운 활력, 환희와 낙관을 제공해 주는 한 편의 서사시로 불린다. 이런 이유로 두 저작은 “21세기의 『공산당 선언』”이라는 찬사를 받기까지 했다(Zizeck, 2001).

그러나 비록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이 사람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의 저작은 그 만큼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비판자들에 따르면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은 “골동품 수집 양식의 역사적 의식성”, “권력, 화폐, 유동성이 지배하는 현실을 사변적으로 희화화 한 것” 등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패니치와 긴딘(Panitch and Gindin, 2002)은 하트와 네그리가 묘사한 세계가 “가상 제국과 가상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들어진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가 수많은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저작들이 “은유와 이론에 지나치게 의존”(Arrighi, 2003: 73)하고 있으며 “어떤 체계에서 처음으로 정식화된 관념들을 맥락적 공명(contextual resonance)을 가정하지 않은 상태로 빌려”옴으로써 만들어진 혼합물이 일관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Brennan, 2003: 199). 이러한 이유로 하트와 네그리의 저작들은 읽기가 무척 난해하고 주장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한 경우가 많다. 또한 글 전체에서는 반전과 역설이 끝임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트와 네그리의 저작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다중(multitude)’이다. 그들에 따르면 다중은 제국에 대항하는 정치적 주체성이자 대항권력이며 제국을 끝장내는 구성권력이다. 또한 다중은 수많은 내적 차이를 하나의 통일성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공통된 것을 끊임없이 생산하며 제국에 저항하여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글의 목적은 다중의 실체, 구성과 정치적 기획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논의의 타당성을 따져 보는 것이다. 이 글이 다중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하트와 네그리 논의의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다중에 대한 이론적 타당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그들의 주장을 평가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고리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동안 한국에서는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과 관련해서 ‘제국’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고 다중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는 아직까지는 없었다.1) 마지막으로 다중에 주목하는 것은 대안세계화운동의 관점에서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이 어느 정도 실천적 타당성을 가지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우선 하트와 네그리의 논리에서 다중이 어떤 실체를 가지는지를 평가한다. 이 작업은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비물질노동(immaterial labor)’과 ‘다중’의 개념에 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특히 비물질노동은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서 다중의 경제적인 토대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글의 2절에서는 이 개념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후 이 글의 3절에서는 다중의 구성과 기획을 검토한다. 이 문제는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듯 “다중의 행위는 어떻게 정치적으로 될 수 있을까? 다중은 제국의 억압 및 끊임없는 영토적 분할에 저항하여 어떻게 자신의 에너지를 조직하고 집중할 수 있을까?”(Hardt and Negri, 2000: 505)와 관련한 질문에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답하고 있고, 이 답이 과연 대안세계화운동에서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2. 다중의 ‘실체’에 대한 비판적 이해


(1) 다중의 물질적 기초, 비물질적 노동


1) 비물질노동의 개념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서 다중의 형성의 물질적 기초는 무엇보다도 ‘공통된 것의 생산’, 다시 말해 ‘노동의 공통되기’이다. 특이한 차이들의 다양체들이 구성적 힘의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의 주체성으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즉 ‘다중들’이 아니라 ‘다중’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다중의 소통과 협력의 물적 기초가 되는 공통성(commonality)2) 아주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런데 하트와 네그리에 따르면, 정치적 주체성은 “생산의 지형 위에서만 나타날 것”이고 “생산의 지형에서 작동 중인 형상들을 살펴보기 위해 숨겨진 생산의 장소”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Hardt and Negri, 2000).

생산의 장소에 대한 분석은 ‘제국’의 물적 토대를 규정하는 생산영역의 변형으로부터 포착된다. 그들에 따르면, 제국의 시대에는 생산영역이 경제적 탈근대화에서 나타나는 서비스화와 정보화를 바탕으로 변형된다. 중세 이래, 경제 패러다임의 추이를 지배적 경제부분에 의해 규정할 때, 첫 번째 패러다임은 농업과 원료채취가 경제를 지배한 형태였으며, 두 번째 패러다임은 산업과 내구재 제조가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던 시기였다. 세 번째이며 최근의 패러다임은 서비스와 정보의 지배, 즉 생산의 정보화로의 이행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새로운 변화인 정보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이것이 노동의 질과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이 보기에 포디즘이 포스트포디즘으로 전환하고 정보와 소통이 생산과정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하트와 네그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생산의 장소에서 작동 중인 형상들을 ‘비물질노동’으로 개념화한다.3) 그들에 따르면 비물질노동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서비스업은 실제로 정보와 지식의 지속적인 교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서비스 생산물이 물질재와 내구재로 귀결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생산에 포함된 노동을 비물질노동―즉 서비스, 문화 상품, 지식 또는 소통과 같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규정한다(Hardt and Negri, 2000: 강조는 필자).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에 산업노동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며, 그 대신 ‘비물질노동’, 즉 지식, 정보, 소통, 관계 또는 정서적 반응 등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을 창출하는 노동이 출현했다(Hardt and Negri, 2004: 강조는 필자).


이 두 정의는 『제국』과 『다중』 두 저작에서 각 각 인용한 것이다. 이 두 정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비물질노동은 ‘생산된 생산물의 최종형태의 물질성 여부’, 다시 말해 그것이 물질적 생산물이냐 비물질적 생산물이냐를 통해 구분된다. 하트와 네그리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비물질적 생산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이 여전히 물질적임을 강조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노동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신체와 두뇌를 필요로 한다. 비물질적인 것은 그 생산물이다”(Hardt and Negri, 2004). 이 언급만 보면 비물질노동의 정의는 아주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비물질노동을 판단하는 핵심 기준은 ‘최종형태로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이 기준을 바탕으로 한 정의를 제시한 이후  하트와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의 주요 형태를 지적한다. 그런데 그들은 『제국』과 『다중』에서 비물질노동의 형태와 관련해서 미세한 차이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저작에서 그들이 제시한 비물질노동의 중요 측면을 각각 나눠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제국』에서 그들은 비물질노동 중 중요한 측면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컴퓨터 사용이 늘어나면서 실제로 모든 사회적 실행 및 관계와 함께 노동 실행 및 관계를 차츰 다시 규정하는 경향”으로부터 발생한다. 이에 따르면 비물질노동은 컴퓨터 기술에 정통하고 능숙한 노동이나 컴퓨터 작동모델에 따라 상징들과 정보들을 처리하는 노동이다(Hardt and Negri, 2000). 두 번째는 상징적-분석적 서비스이다. 이 개념은 미국의 노동부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가 제시한 것을 차용한 것으로 그 정의는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명시하며 전략적으로 중개하는 활동들을 포함하는 과업들이다.” 마지막으로 비물질노동의 중요한 측면인 세 번째 노동형태는 ‘정동적 노동(affective labor)’이다. 이 노동은 인간의 접촉과 상호작용을 양산하는 노동으로 “신체적이고 정서적일지라도, 노동의 결과물들, 즉 안심, 행복, 만족, 흥분 또는 정열을 만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비물질적이다”(Hardt and Negri, 2000).4)

다른 한편 2004년에 발간된 『다중』에서는 비물질노동이 『제국』의 첫 번째 측면을 제외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측면으로 정의되며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개념화된다. “첫 번째 형태는, 문제해결, 상징적․분석적 과제들 그리고 언어적 표현 등과 같이 일차적으로 지적이거나 언어적인 노동을 가리킨다. 이러한 종류의 비물질노동은 아이디어, 상징, 코드, 텍스트, 언어적 형상, 이미지, 그리고 이러저러한 여타의 생산물을 생산한다. 우리는 비물질노동의 또 다른 주요 형태를 ‘정동적 노동’이라고 부른다.…정동적 노동은 평안한 느낌, 웰빙, 만족, 흥분, 또는 열정과 같은 정동들을 생산하거나 처리하는 노동이다”(Hardt and Negri, 2004: 144).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하는 비물질노동은 최종생산물의 형태가 가진 물질성의 여부를 기준으로 개념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비물질노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정보혁명이 야기한 탈근대화 과정에서 “오늘날 생산성, 부, 그리고 사회적 잉여의 창조는 언어적 소통적 그리고 정서적 네트워크를 통한 협동적 상호작용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비물질노동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서, 비물질노동은 일종의 자생적이고 초보적인 코뮤니즘을 위한 잠재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2)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와 삶정치적 노동


비물질노동의 개념을 분석한 이후 하트와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은 비물질노동이 “전 지구적 노동에서 소수를 차지하며, 지구 전체의 지배적인 지역들의 일부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비물질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헤게모니적이 되었고, 다른 노동형태들과 사회 자체에 대해 그런 경향을 부과해왔다”고 주장한다(Hardt and Negri, 2004: 146).

이 주장은 “비물질노동이 150년 전 산업노동이 전 지구적 생산의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세계의 몇 안 되는 지역에 집중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생산형식들에 대해 헤게모니를 행사했던 때에 차지했던 것과 동일한 지위를 오늘날 차지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제기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보화가 지배적인 포스트포디즘 시대에는 노동과 사회는 정보화될 수밖에 없으며, 지적으로 되고 소통적으로 되며 정동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물질노동 헤게모니는 생산조직을 일관작업의 선형관계에서 분산된 네트워크들의 무수한 불확정적인 관계들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 정보, 소통, 협력은 생산의 규범이 되며, 네트워크는 그 지배적인 조직형식이 된다”(Hardt and Negri, 2004: 150). 또한 그들은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매개로 비물질노동의 특징을 소통, 사회적 관계들, 협력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하트와 네그리에 따르면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사회적으로 전면화 되면서 비물질노동은 삶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 즉 ‘삶정치적 노동(biopolitic labor)5)으로 전화한다. 비물질노동이 삶정치적인 것으로 전화하면 “비물질적 생산은 사회적 삶의 수단이 아닌 사회적 삶 자체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하트와 네그리는 삶정치적 노동이라는 용어를 경제적인 의미에서 물질적 재화의 생산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문화적․정치적인 것에 걸친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을 생산하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런데 삶정치적 노동은 삶 자체를 생산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것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삶정치적인 생산은 시간단위로 양화될 수 없기 때문에 측정이 불가능하며 자본이 결코 삶 전체를 포획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이 그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치를 언제나 초과한다.” 또한 삶정치 노동은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그리고 문화적인 것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 “생산의 다양하고 특이한 형태들 사이에 충분한 공통적인 토대, 상호작용, 그리고 소통이 존재”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삶정치적인 것을 통한 ‘공통된 것의 생산’, 즉 ‘노동의 공통되기’는 소통과 협력을 통해 ‘삶정치적 노동’(산업노동자, 비물질적 노동자들, 농업노동자들, 실업자들, 이주자들 등등)을 융합하는 용광로가 되고 “협력과 소통을 통해 주체성을 생산하고 이 생산된 주체성 자체가 협력과 소통의 새로운 형태들을 생산하며, 이것이 다시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는 과정이 계속된다(Hardt and Negri, 2004).


(2) 비물질적 노동에 대한 비판


1) 비물질노동의 애매함


지금까지 설명한 하트와 네그리의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화로 인식된 생산의 정보화 과정에서 변형된 노동의 특징을 포착하고 이를 공통성의 물질적 기반으로 해석함으로써 그들의 이론적 논의의 완결성을 구축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비물질노동은 여러 측면에서 애매모호한 개념이며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를 과대해석한 결과로 보인다.

우선 비물질노동의 정의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기존의 이론들에서 노동을 어떻게 정의하고 구분해왔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비물질노동의 정의와 마르크스적 의미의 생산적 노동(productive labor)과 비생산적 노동(unproductive labor) 구분과의 차이이다. 이 차이를 명확하기 구분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하트와 네그리가 사용한 비물질노동이 마르크스적 이론화에서 어느 정도 이탈한 것이지를 드러낼 수 있는 계기가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물질노동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마르크스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은 두 가지 규정이 혼재되어 있다. 하나는 본원적 규정이다.6) 이 규정에서는 생산물을 생산하는 노동이 생산적 노동으로 규정된다. 또 다른 하나는 역사적 규정이다.7) 이 규정에서는 생산적 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며 노동이 수입(소득)과 교환이 되면 비생산적 노동이 된다.

물론 두 규정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두 규정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문제로 이해된다. 만일 역사적 규정만을 문제 삼을 경우, “자본의 의해 고용된 모든 노동은 자본의 가치증식에 도움이 되어서 고용된 것이므로 생산적이다”(강남훈, 2002). 따라서 역사적 규정은 생산적 노동을 아주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이 규정만을 가지고는 엄밀함 의미의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을 제시하기 힘들다. 따라서 역사적 규정은 본원적 규정을 한정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문제는 본원적 규정에서 생산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좁은 의미에서 생산물을 물질적 생산물로 규정하게 되면 생산적 노동은 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노동으로 규정되며 비생산적 노동은 서비스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간주된다. 다른 한편 비물질적 생산물인 서비스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지는 한 상품으로 생산되며 이 경우 서비스를 생산하는 노동도 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8)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을 염두에 두며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하는 비물질노동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비물질노동을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노동으로 정의하는 한 좁은 의미에서 비생산적 노동에 가까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한 이 기준을 적용하면 비물질노동은 비생산적 노동 중에서 서비스 노동과 동일시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잉여가치이론을 부정하고 있고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 자체를 부정한다.9) 그들의 논의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이 노동시간을 양화하고 여가와 노동을 구분했던 것은 현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또한 생산적 노동을 넓게 해석할 경우 서비스노동도 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되며 이 경우 비물질노동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과는 다른 차원임이 보다 분명해 진다. 더욱이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이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인 잉여가치의 원천에 대한 해명을 목적으로 한 것과는 달리,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는 노동과정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의 최종형태를 강조하면서도 비물질노동의 특성을 주목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적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다른 한편 비물질노동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구분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트와 네그리에게 육체노동=물질노동, 정신노동=비물질노동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그들은 “모든 비물질적 생산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이 여전히 물질적임을 강조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노동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신체와 두뇌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Hardt and Negri, 2004: 145). 이 언급으로 볼 때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비물질노동이 생산물의 최종형태의 물질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비물질노동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구분하는 논의는 별 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10) 

이상의 논의를 통해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하는 비물질노동은 기존의 노동을 구분하는 방식과는 아주 상이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이 비물질노동을 최종생산물의 물질성 여부를 기준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특이한 노동의 구분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의 구분이 노동과정의 특성이나 노동계급의 형성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중심으로 개념화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Camfield, 2007).11) 다시 말해 정의 자체로만 본다면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과정 자체에서 노동이 수행하는 기능이 아니라 과정의 결과로 나온 노동의 결과물을 기준으로 한 개념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물질노동의 개념이 최종생산물의 물질성의 여부를 기준으로 했지만 이후 하트와 네그리가 이 개념을 스스로 수정하면서 개념에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그들은 『제국』에서는 ‘제조업도 서비스’라는 표현으로 컴퓨터 관련 노동을 비물질노동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노동은 이후 발표한 『다중』에서는 제외되고 제조업에서 나타나는 비물질노동의 특성과 관련지어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의 문제로 대체된다.

이러한 개념상의 변화는 비물질노동의 정의를 보다 엄밀하게 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 논의는 그들이 정보혁명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제조업부문마저도 서비스로 간주하면서 비물질노동을 과대해석한 오류를 잘 보여 준다. 다시 말해 비물질노동은 최종생산물의 형태가 비물질적이어야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제조업의 대부분의 생산물은 최종형태가 물질적이기 때문에 제조업에서도 비물질노동을 사용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며 설령 비물질노동의 특성이 제조업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더라도 이를 특권화해서 제조업을 서비스로 간주하는 것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또한 하트와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의 정의에 기준이 되는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산업을 서비스 산업과 등치시키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들은 정보혁명으로 산업생산이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언급을 통해 은연중에 비물질노동=서비스 산업이라는 정식화를 제공하고 있다.12) 게다가 그들은 비물질노동의 예로 공공의료, 엔터테인먼트 산업, (미소를 지으면서 서비스하는) 법률적 지원 노동, 항공 승무원들, 패스트푸드 노동자, 건강관리 노동자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직군에 속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비물질노동의 엄밀한 정의에 따르면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는 서비스 부문에서도 대부분의 노동은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물질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트와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의 예로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을 들고 있다. 그러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노동자 모두가 비물질노동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노동자 중 햄버거를 만드는 노동자는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노동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모두 비물질노동을 수행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하트와 네그리는 ‘물질적 업무’라는 모호한 개념을 사용해서 문제를 더욱 애매하게 만들고 있다. “건강관리 노동자들은 정동적이고 인지적이며 언어적인 업무들과 함께 변기청소와 붕대 교환과 같은 물질적 업무를 수행한다.” 이 때 변기청소와 붕대 교환이 물질적 업무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물질적 업무가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물질적 생산에 따르는 노동’을 의미한다고 해석될 소지가 있다. 이 경우 물질노동과 비물질노동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오히려 이것은 물질노동과 비물질노동이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김세균, 2004). 결국 이 논의로 본다면 정동적이고 인지적이며 언어적인 노동이 비물질노동에서 특권화할 이유는 전혀 없다(정성진 외, 2008).


2) 삶정치적 노동의 문제


더욱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하트와 네그리도 비물질노동의 개념이 가진 모호함을 인정하면서 ‘삶정치적 노동’이라는 개념이 더 유용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비물질적인 것은 그 생산물이다. 우리는 비물질노동이 이러한 점에서 매우 모호한 용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새로운 헤게모니적 형태를 삶정치적 노동, 즉 물질적 재화뿐만 아니라 관계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삶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Hardt and Negri, 2004: 145: 강조는 필자). 이 언급에서 삶정치적 노동은 물질적 재화뿐만 아니라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정의된다. 더욱 엄밀하게 말하자면 삶정치적 노동은 물질적 생산물이냐 비물질적 생산물이냐의 경계를 초월해서 삶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전화된다. 

그런데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삶정치적 노동은 직접적으로 비물질노동의 정의와 모순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비물질노동은 최종형태로 생산되는 생산물이 비물질적인 경우에만 성립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삶정치적 노동은 물질적 재화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고 나아가서는 삶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이다. 따라서 비물질노동과 삶정치적 노동은 논리적인 차원에서 일치할 수 없는 개념이 된다. 이로 인해 이 두 개념을 동시에 병렬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다중의 물질적 기초에 대한 규정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매개로 비물질노동이 삶정치적 노동으로 전화되는 논리를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비물질노동의 개념적 정의만으로는 노동 전반을 통분가능케 하는 노동의 공통되기의 물질적 기초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에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매개로 해서 비물질노동의 특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삶정치적 노동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미 네그리는 ‘사회화된 노동자(socialized workers)13)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시도를 전개한 적이 있다(Negri, 1989). 네그리는 잉여가치이론과 유통이론을 결합하고 정보화로 인한 기술변화에 주목해서 자본의 실질적 포섭을 매개로 자본-임노동 관계를 사회적 수준에서 재정립하여 사회화된 노동자라는 개념을 정립했다.14) 이에 따라 대중 노동자들은 사회적 자본에 대립하는 사회화된 노동자로 되며 착취는 사회적 규모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회화된 노동자에서 제시되었던 논리에는 실질적 포섭을 매개로 잉여가치이론과 유통이론을 통합하고 생산영역과 유통영역, 그리고 나아가 소비영역까지 자본주의적 착취를 확대해석하는 논리적인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이에 따라 사회화된 노동자는 전통적인 의미의 산업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생, 주부, 실업자 등도 포함되게 되며 노동의 의미는 보다 포괄적인 차원에서 재정립되게 된다.15)

그러나 사회화된 노동자를 설명하는 논리와는 달리, 하트와 네그리가 비물질노동으로부터 출발해서 삶정치적 노동으로 전화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논리는 그다지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념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개념을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적 특성만으로 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령 이것이 가능하더라도 두 개념 중 하나는 논리적으로 모순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논리적 연관이 약한 상황에서 비물질노동이라는 매개 없이 삶정치적 노동을 통한 노동의 공통되기가 다중의 기초를 이룬다는 설명만으로도 다중의 특징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비물질노동은 ‘군더더기(redundancy)’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하는 삶정치적 노동은 개념적인 차원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뿐만 아니라 다른 생산양식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삶 자체의 생산은 인류가 탄생한 이후 늘 지속되었던 것이 때문이다. 이 경우 삶정치적 노동과 비물질노동은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아주 강력한 연관을 가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보다 보편적인 개념인 삶정치적 노동과 자본주의의 특수한 단계에서만 성립되는 비물질노동이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통해 전화되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비약이거나 우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네그리와 하트가 제시한 삶정치적 노동에서는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16) 그들은 삶정치적 노동의 특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시간측정이 불가능해지면서 경제적인 것의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함으로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측면을 이해한 것과는 달리 삶정치적 노동을 통해 변화한 자본주의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할 수 있다.17) 게다가 삶정치적 노동이 자본에 포획된 노동을 해방시킨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할지는 모르지만,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본이 적극적으로 노동을 포획하려는 시도를 과소평가할 위험을 안고 있다.

지금까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하트와 네그리가 비물질노동을 제시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들의 논의에서 비물질노동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환과정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기초를 확립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나아가 이 개념은 ‘제국’의 경제적 토대와도 관련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화는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를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한편으로 비물질노동과 삶정치적 노동을 병렬적으로 제시한다면 두 정의의 개념적 규정이 충돌하기 때문에 다중의 물질적 기초에 대한 이론적 기반은 약화되고 모호해질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물질노동과 삶정치적 노동의 연관을 설명하는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두 개념을 연관시키는 논리는 약해보이며 비물질노동 개념 자체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논의는 다른 철학적 저작들이나 이론서들에 비해 경제적 토대를 해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이지만, 비물질노동을 무리하게 정의하고 있으며 차원이 다른 삶정치적 노동으로 전화하는 논리가 분명치 않다는 점에서 그들이 다중의 실체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3. 다중의 ‘구성’과 ‘기획’에 대한 비판적 이해 


지금까지 다중의 실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수행했다. 그러나 다중의 실체만으로 온전히 다중을 총체적으로 비판적인 평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서 다중은 대안세계화운동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중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중의 역사적 구성과 그들의 정치적 기획을 이해하고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절은 다중의 구성과 정치적 기획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1) 다중의 구성과 기동


1) 다중, 공통적인 특이성


다중의 논의와 관련해서 중요한 문제는 다중이 공통되기를 통해 수많은 내적 차이를 하나의 통일성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네트워크를 통해 공통된 것을 끊임없이 생산하며 제국의 대항권력으로 형성되는 문제이다.18)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핵심적인 것은 다중이 공통적으로 행동하면서도 특이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모순되지 않게 해명하고 이것이 전 지구적인 정치적 신체를 형성하며 어떻게 조직되고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고 있는가이다.

우선 하트와 네그리는 다중을 민중, 대중, 노동자 계급과의 차이를 통해 설명한다.19) 그들에 따르면, 민중은 “통일의 관점에서 파악된 것이다.…민중은 저 다양성을 통일성으로 환원하며 인구를 하나의 동일성으로 만든다. ‘민중은 하나이다.’ 이에 비해 “다중은 하나의 통일성이나 단일한 동일성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내적 차이로 구성되어 있다”(Hardt and Negri, 2004). 다중은 다양한 문화들, 인종들, 민족들, 성별들, 성적지향성들, 다양한 노동형식들, 다양한 삶의 방식들, 다양한 세계관들 그리고 다양한 욕구들과 같은 모든 특이한 차이들을 가진 다양체(multiplicity)로 존재한다.

또한 다중은 대중(mass)과도 차이가 난다. 대중은 하나의 통일성이나 하나의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온갖 유형들과 종류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는 다중과 비슷하다. 그러나 대중의 본질은 무차별성이며 모든 차이는 대중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다중에서는 사회적 차이들이 서로 다른 상태로 남아 있다. 다중 개념에 의해 제기된 도전은 사회적 다양체가 내부적으로 다르게 남아 있으면서도 공동으로 소통하고 공동으로 활동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노동계급은 가장 좁은 의미에서는 산업노동자를 지칭하며 이 개념은 농업 노동자, 서비스노동자 그리고 여타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배제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노동계급은 모든 임금노동자를 뜻하며 이 경우 빈민들, 임금을 받지 못하는 가내노동자들 그리고 임금을 받지 못하는 여타의 모든 사람들은 배제된다. 이와는 달리 다중은 개방적이며 포괄적인 개념이다. 다중은 잠재적으로는 사회적 생산을 하는 온갖 다양한 주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다중은 통일성과 단일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차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모든 차이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표현될 수 있는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네트워크로, 우리가 공동으로(in common) 일하고 공동으로 살 수 있는 마주침의 수단들을 제공하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주체이다”(Hardt and Negri, 2004: 18)

이러한 논의 이후 하트와 네그리는 다중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본 다중’과 ‘역사적 다중’으로 개념적으로 분리하여 설명한다. 첫 번째로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본 다중은 “역사적 힘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 이성과 열정을 통해 스피노자가 절대적이라고 부르는 자유를 창조하는 다중이다.” 이 다중은 “존재론적이며, 우리는 이 다중 없이는 사회적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역사적 다중,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직 아닌’ 다중(the not-yet multitude)이다. 이 다중은 아직껏 존재하지  않았다.” 이 두 번째 다중은 정치적이다. 따라서 “이 다중을 이러한 출현 조건들의 토대로 해서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하나의 정치적 기획이 필요할 것이다”(Hardt and Negri, 2004: 271-2).

비록 영원의 관점에서 본 다중과 이분법적으로 분리할 수는 없겠지만, 개념적인 수준이나 현실적 맥락과 관련해서 문제는 역사적 다중인 ‘아직 아닌 다중’의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누가 이러한 다중인가?”이다. 이에 따르면 “다중 속에 융합되는 형상들―산업노동자들, 비물질적 노동자들, 농업노동자들, 실업자들, 이주자들 등등이 구체적인 장소들에서 삶의 독특한 형식들을 대표하는 삶정치적 형상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점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Hardt and Negri, 2004: 199)

그런데 하트와 네그리는 『다중』에서 지구화의 정치적 형식들, 즉 제국의 구성적 요소들의 위치를 확인하며 사회적 존재 속에 잠재해 있고 내재해 있는 다중의 존재를 구체적인 수준에서 확인하는 작업을 충분히 수행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다중의 기동, 다중의 정치적 저항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다중의 존재를 확인하고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의 등장과 이들이 제국에 맞서는 대항권력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탐구한다.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는 구성적 대안권력은 제국 내부에서 생성된다. 따라서 “다중의 삶정치적 생산은, 다중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것 그리고 전 지구적 자본의 제국적 권력에 대항해 공통적으로 생산하는 것을 동원하는 경향이 있다. 곧 다중은 공통된 것에 기초하여 자신의 생산적 형상을 발전시키면서, 제국을 꿰뚫고 나가 자신을 자율적으로 표현하고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Hardt and Negri, 2004)

그런데 이러한 다중의 자율적 운동은 투쟁의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지구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며 다중은 ‘매개 없이’ 제국과 직접 대면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매개 없이 다중과 직접 대면한다. 따라서 변증법, 즉 사실상 한계와 한계의 조직에 관한 과학은 소멸한다. 국민국가를 폐지하고 따라서 국민국가에 의해 설정된 장애물을 넘어서려는 계급투쟁은 제국의 구성을 분석과 갈증의 장소로 제시한다”(Hardt and Negri, 2000). 따라서 국가라는 장벽이 없이 투쟁의 상황은 완전히 열려 있으며 다중은 국민국가의 주권에 대항하는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주권에 저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중이 하나의 정치적 형상으로서 자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다중은 노동과 부의 위계들에 의해 지리적으로 나누어지고 경제적․법적․정치적 권력들이 이루는 다층위적 구조에 의해 지배당한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고 “다중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정치적 기획을 필요”로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은 ‘다중의 반란’에 주목한다. 반란은 “부를 기초로 해서만, 즉 지성, 경험, 지식, 욕망 등의 잉여를 기초로 해서만 나타나며” “각 투쟁의 강렬함을 높이고 다른 투쟁들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가동된다.” 

이러한 반란은 “공통적인 실천들과 욕망들의 소통을 통해 전염병처럼 한 지역적 맥락에서 다른 지역적 맥락으로 확산되는―투쟁들의 국제적 순환이라는 형태를 띤다.”20) 투쟁의 국제적 순환은 한 지역의 투쟁이 다른 지역의 투쟁과 소통하는 가운데 기동해서 전 지구를 가로질러 소통하는 공통된 것을 생산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들 순환은 19세기 카리브 해 전역으로 퍼져나갔던 노예 반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유럽과 북미 전역으로 확산된 산업노동자들의 반란, 20세기 중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를 가로질러 만개했던 게릴라 투쟁과 반식민지 투쟁, 그리고 1968년 산업 노동자들, 학생들, 그리고 반제국주의 게릴라 운동들의 전 지구적 투쟁을 거치며 발전해 왔다.

그리고 새로운 국제적 순환은 1990년대 후반 세계화 문제를 둘러싸고 출현했으며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정상회담에서의 시위들로 나타났다. “한 나라에서 일어난 IMF 긴축경제프로그램에 맞선 폭동들, 또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세계은행의 기획에 맞선 시위들 그리고 제3세계에서 일어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맞서는 시위들이 모두 투쟁들의 공통적인 순환의 요소들임이 시애틀 투쟁에 의해 갑자기 드러났던 것이다. 투쟁들의 순환은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사회포럼과 다양한 지역사회포럼들의 연례모임들에서 공고화되었다”(Hardt and Negri, 2004).

그런데 시애틀 전투로 상징되는 새로운 국제적 순환은 분산된 네트워크의 형식으로 발전했고 지역적 투쟁이 하나의 마디로 기능하면서 어떤 중심이 없이 다른 모든 마디들과 소통했다. 각각의 투쟁은 특이한 채로 남아 있고 자신의 지역적 조건들에 묶여 있지만 동시에 공통적인 것을 공유한다.  하트와 네그리는 이러한 조직화 형식을 다중 개념의 정치적 사례로 높게 평가한다. 공통된 것의 전 지구적 확산은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것들 각각의 특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새로운 전 지구적 투쟁순환은 다중을 조직하고 기동시킨다.


2) 다중의 정치적 기획 - ‘절대적 민주주의’


다중의 기동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하트와 네그리는 어떤 특정하고 구체적인 실천들이 다중의 정치적 기획을 활성활 수 있는가를 논의한다. 다시 말해 다중은 “현재의 제국권력 형식에 항의하고 어떻게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집중한다(Hardt and Negri, 2000: 13). 이와 관련해서 그들은 『제국』과 『다중』에서 상이한 추상수준을 가진 논의를 제시한다. 우선 『제국』에서 하트와 네그리는 ‘전 지구적 시민권(the right to global citizenship)’, ‘사회적 임금권(the right to a social wage)’, ‘재전유권(the right to reappropriation)’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전 지구적 시민권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세계 종속 지역의 노동자들의 유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노동자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 운동을 뜻한다. 또한 사회적 임금은 전체 다중에게, 심지어 실업자들에게까지 각자에 대한 응당한 시민권 수입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전유권은 생산수단을 재전유하는 권리, 전통적인 기계와 원료에 대한 자유로운 통제를 넘어서서 지식, 정보, 소통, 그리고 정성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의미한다(Hardt and Negri, 2000: 502-13)

그런데 『다중』에서 하트와 네그리는 이러한 구체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을 배제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형태로서 ‘절대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공통의 언어들, 공통의 실천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생산형식들은 명력의 형식들과 배치된다. 요컨대 우리의 꿈들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아직 가능하지는 않더라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전 지구적 규모는 점점 더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변화의 지평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실질적 민주주의는 점점 더 유일하게 가능한 해결책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Hardt and Negri, 2004).

그들은 다중의 민주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절대 민주주의 개념을 차용한다. 그들에 따르면 홉스와 루소가 사회계약을 통해 인민들이 주권을 국민국가에 양도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설명한 것과는 달리 스피노자에게서 다중은 어떠한 권력의 양도도 없이 절대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토대가 된다. “전적으로 절대적인 형태의 통치로서 민주주의는 권력의 어떤 양도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도, 권력의 형성에 있어서도, 혹은 집행 행위의 특정성, 즉, 사법권을 행사하는 직위의 특정성에 있어서도, 어떤 소외도 없다. 절대적인 것은 비소외이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긍정 속에서 있는 것으로, 모든 사회적 활력을 만인의 자유를 조직화하는 일반적인 노력 속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Negri, 1991: 77).

그들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창출이 다중의 힘을 결합시키는 유일한 길이며, 역으로 다중이 우리에게 오늘날 최초로 민주주의의 실현을 가능케 해줄 사회적 주체와 사회적 조직화의 논리를 제공해준다”(Hardt and Negri, 2004). 공통된 것의 생산증가를 통해서 다중을 구성하는 주체성들은 특이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전체 다중 사이에 상호교류가 존재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구성적 동력을 형성한다. 또한 이 공통적 생산은 협력적 생산의 네트워크들 자체가 사회의 제도적 논리를 가리키는 한에 있어서 구성적 힘의 한 형태를 함축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정치적 생산을 통해 협동적으로 창출하고 유지하는 이러한 민주주의를 ‘절대적’이라고 부른다”(Hardt and Negri, 2004: 416).

다중의 절대적 민주주의에서는 원칙적으로 권력에 대한 어떠한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다중에게는 불복종의 권리와 차이의 권리가 근본적이다. 다중의 헌법(구성)은 항상적이고 정당한 불복종의 가능성에 기초한다. 다중에게 의무는 오로지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다중의 적극적인 정치적 의지의 결과로서만 나타나고 그와 같은 정치적 의지가 계속되는 한에서만 지속된다”(Hardt and Negri, 2004: 404). 이러한 절대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주권을 폐지하고 시대에 발맞춰, 극적인 반전들과 자멸적인 실수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구성적 메커니즘들과 제도들에 의해 결정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기획을 조직해 나감으로써 이루어진다.

결국 하트와 네그리에게 있어 절대 민주주의는 현재의 전 지구적 체제의 불만을 표현하는 운동들과 개혁제안들을 토대로 한 다중의 구체적인 행동강령이 아니라 소통과 협력의 네트워크를 통해 공통된 것을 생산하여 형성되는 새로운 민주주의이다.


(2) 다중의 구성과 정치적 기획에 대한 비판


1) 다중의 정치적 기획의 문제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다중의 정치적 기획에 관한 비판은 상당한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다중의 정치적 기획을 구체적인 수준에서 제시하는 방식보다는 시적인 언어를 동원해서 “이미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현존하는 사회적․정치적 경향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제기”하고 있다.21) 또한 그들은 현실의 실천운동에서 변혁을 지향하는 구체적인 실천 강령을 제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22)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새롭게 변화한 현실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기획을 정립할 수 있는 개념적 기초를 다듬는 것이기 때문이다(Hardt and Negri, 2004: 21-2).

게다가 앞에서 언급했지만 그들은 다중을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그들의 논의에 따르면 다중은 존재론적으로는 “언제나 이미” 있어 왔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직 아닌(not-yet)” 존재가 된다. 따라서 다중의 정치적 기획에 대한 논의는 다중의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 측면과 현실적이고 정치적 측면을 혼동하지 않으면서 평가되어야한다. 게다가 그들이 제시하는 다중의 정치적 기획은 미래의 열린 가능성에 대한 경향을 지적하는 아주 추상적인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다중의 정치적 기획도 현실의 진행과정에서만 확립되기 때문에 다중의 정치적 기획에 대한 비판은 그들에게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중의 정치적 기획은 어떤 방식으로 현실운동, 특히 대안세계화운동(alter-globalization movement)에 접목될 수 있는가와 관련해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론적으로 언제나 늘 있지만 정치적으로 아직 아닌 다중의 정치적 기획이 미래의 열린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운동 형태에 대한 평가는 필요해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첫 번째로 제기되는 문제는 중심 없는 네트워크적 관계에서 제국에 대항하는 구성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조직되고 기획되는가와 관련한 것이다. 사실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서 권력의 장악 문제는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다중의 형성은 권력을 만드는 과정이자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논의에서 다중은 새로운 권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니치와 긴딘(Panitch and Gindin, 2002)이 주장하듯 “어떤 종류의 운동이 생산수단과 소통을 자본한테서 재전유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이데올로기적․조직적 능력을 실제로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의 문제는 중요하다. 다시 말해 현실의 운동에서 어떤 운동방식으로 어떠한 조직화를 통해 다중의 긍정적인 주체성으로 형성되고 새로운 권력으로 나서게 되는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하트와 네그리는 수직적 위계관계로 고착화되어 있는 기존의 조직된 노동운동, 좌파정당 혹은 전위당을 부정하며 다중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강조한다. 그들이 기존의 조직운동이 가진 한계를 비판하고 새로운 형태의 조직인 수평적인 네트워크 형성방식의 조직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로 보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수직적 위계를 통한 조직화 방식이 가진 한계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광범위한 비판을 받고 있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직적 위계를 통한 조직화의 문제점을 비판한다고 해서 수평적이고 네트워크적인 관계망을 어떻게 조직화 할 것인가와 관련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트와 네그리도 “우리가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은 어떻게 다중이 긍정적이고 정치적인 힘으로 조직되고 재규정되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조직화의 문제를 전혀 무시하고 있지는 않다(Hardt and Negri, 2000). 따라서 다중의 운동이 네트워크 조직 형태로 구성된다면 이것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제국에 대항해서 타격을 주는 일이 가능하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와 관련해서 김영수(2008)가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조직은 이론과 실천을 매개하는 형태이고 변증법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이론과 실천이라는 구성요소는 조직의 매개를 통하여 비로소 구체성과 현실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대중투쟁이 이론이나 조직과 결합되지 않는다면,…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권력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론적인 의미에서의 다중의 수평적 네트워크도 현실의 운동 공간에서는 조직화의 문제를 피해나갈 수 없다.23)

두 번째로 제기되는 문제는 국민국가 수준의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이 문제는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특히 그들이 다중이 매개 없이 제국과 직접 대면하며 국가의 장벽 없이 투쟁이 전 지구적 수준에서 전개된다고 언급한 부분은 큰 논쟁을 야기했다. 왜냐하면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에 따르면 국지적인 수준에서 국민국가를 매개로 한 운동은 해롭고도 잘못된 것이며 심지어 반동적이기 때문이다(손호철, 2004)

그러나 이 경우 우드(Wood, 2003: 136-137)가 지적한 다음의 문제에 대한 하트와 네그리의 대답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지구적 수준을 성취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발전은 매개 없이 다중과 직접 대면한다.…만약 이것이 철학적 추상화를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저항 투쟁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로서 국가의 매개를 과소평가하거나 심지어 부인하는 것이 낙관주의의 기초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설명에서 다중의 권력은 그 무권력에 있는 듯 하며, 반면 저항 권력의 현실적 가능성, 즉 현실 세계의 현실적 대항 권력은 사실상 부인된다.” 비록 하트와 네그리는 다중이 새로운 대항권력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현실 운동의 현실적 대항권력을 부인하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결되어야할 지점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국제적인 수준에서 전개되는 대안세계화운동의 문제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시애틀 전투’이후 새로운 국제적인 투쟁주기가 시작되었다고 언급하면 시애틀의 시위를 다중의 기동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투쟁주기라는 개념적 유형화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투쟁주기는 “특수한 투쟁들을 노동에 대한 자본의 의존의 전반적 운동의 맥락 속에서 분석하기…보다는, 특수한 투쟁들(예컨대 1970년대 초 피아트 노동자들의 투쟁들)로부터 투영하여 그 투쟁들을 자본주의 발전의 특정 단계에 전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에 ‘계급구성’ 개념은 모든 투쟁들이 분류되어 들어가야만 하는 이념형적인 유형 또는 패러다임, 즉 하나의 표제를 구성하기 위해 사용된다”(Holloway, 2002).24)

또한 시애틀의 전투는 다중의 네트워크적 성격이 표출된 자율적인 것이라고 특권화해서 주장할 수 있는 근거도 크지는 않아 보인다.25) 오히려 시애틀의 전투에 모인 “4만 명이 넘는 시위대는 일정한 사회집단으로 구성됐다. 즉 저임금과 인권 유린이 삶의 표준을 침해하고 착취를 강화할까봐 염려하는 상당수의 노동운동 분파와 주요 지도자들”이 참석했으며 미국의 노동조합 단체의 참여도 큰 역할을 했다(Arnowitz, 2003). 따라서 대안세계화운동을 다중의 구현과 등치시키는 주장은 다양한 형태의 대안세계화운동에서 조직화된 운동의 의의를 완전히 무시하며 부문운동의 힘을 병렬적으로 파악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2) 다중의 정치적 프로그램과 절대 민주주의


다음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다중의 기획, 정치적 프로그램과 궁극적 지향으로서 절대 민주주의이다. 우선 정치적 프로그램과 관련해서는 아리기(Arrighi, 2003: 76)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중요하다. “어떤 종류의 정치적 프로그램을 통해 제국적 주도권이 해방을 향한 다중의 욕망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재확립되는 한계를 가로지르고 무너뜨릴 것인가?”

이러한 문제제기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서는 중요한 문제제기는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다중의 기획은 현실에서만 확립가능하고 실현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으로 상징되는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변혁은 다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변혁운동의 주체와 실천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제국』에서 하트와 네그리가 구체적인 정치적 프로그램과 관련해서 전 지구적 시민권, 사회적 임금과 재전유권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제국』에서 제시된 구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은 그들의 개념적 기초를 중심으로 한 논의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며 그다지 적절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더욱이 정성진(2004)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하트․네그리의…수사학은 실제 대안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면 상투적인 개량주의 정치로 합류한다. 하트…네그리가 결론에서 제안하는 이른바 제국에 대한 세 가지 대안은…제국에 전혀 무해한 체제 내적 요구들이다.”26)

구체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보다 비록 추상적인 차원이기는 하지만 『다중』에서 제기한 ‘절대 민주주의’의 문제가 다중의 정치적 기획과 관련해서는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하트와 네그리가 설정한 다중과 절대 민주주의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이들 논의는 대체로 하트와 네그리가 스피노자의 다중과 절대 민주주의 개념을 차용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스피노자를 해석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 형태를 띠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불(Bull, 2003: 158)스피노자를 검토하며 하트와 네그리의 스피노자의 절대 민주주의의 해석이 가진 한계를 지적한다.27)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절대 민주주의는 ‘사회 계약 없는 정치학, 제한 없는 구성 권력’을 기초로 한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에게 권력을 장악하는 것과 권력을 만드는 것은 동일한 것이며” “스피노자에게 개인이든 다중이든 자연적이거나 권력적으로 자신의 것인 어떤 것에서도 소외되지 않으며,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힘에 대해서는 아무런 요구도 할 수 없다.

게다가 “구성 권력은 다수결이 아니라 합의를 통해 생산된다. 그런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빠질 것이기 때문에”, “합의를 향한 욕구는 포함되는 수를 제한하기 쉽다. 구성 원리의 구심적 동학은 제국이나 심지어 대항 제국보다는 소규모 공화국에서 더 작동한다. 다중이라는 ‘새로운 유목민 무리’가 오히려 소규모적인 것으로 판명된다면 어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하트와 네그리는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Bull, 2003: 162)

다른 한편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을 ‘생산 저항의 주체’인 동시에 ‘착취의 대상’ 즉 수동적 존재임을 인정한다. 이러한 다중의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중의 능동적 계기만을 강조한다. 이 주장은 “민중/인민은 수동적 존재로서만 파악하고 다중은 권력과 자본에 포섭된 수동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포섭에서 벗어나는 역능을 지는 능동적 존재로 규정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김세균, 2004).

그러나 다중의 역능에 의한 능동적인 계기만이 강조되어야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스피노자의 『정치론(Politics)』에서 다중은 네그리가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정념들에 종속되어 있고 따라서 변덕과 상호갈등에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박기순, 2006). 따라서 그들의 주장하는 다중이 긍정적 존재로서 파악되어야만 하는지는 여전히 해명해야할 과제로 남게 된다.28) 게다가  다중이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이 반드시 기존 권력에 저항하는 형태로만 나타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다중의 형성이 진보적인 운동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다중이 반동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면 이 또한 다중의 운동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29)

이러한 철학적인 차원의 질문을 넘어서서 절대 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제기도 존재한다. 우드는 “주권이 다중에 의해 구성된다는 관념에서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Wood, 2003). 따라서 하트와 네그리가 ‘절대적 민주주의’를 새로운 민주주의의 형태로 삼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중과 민주주의 사이에 이를 가능케 하는 매개가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트와 네그리의 절대 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사고를 필요로 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절대 민주주의가 어떠한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는지 명확하지 않고 현실 운동에서 그 유효성이 제한적일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는 절대 민주주의가 현실 운동, 특히 대안세계화운동의 관점에서 특권적으로 해석되어야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4. 결론 - 다중은 대안세계화운동의 희망인가?


지금까지 이 글은 비물질노동의 개념과 다중의 구성과 기획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글의 분석을 바탕으로 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다중의 경제적 토대가 되는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모호하며 이것의 헤게모니를 매개로 삶정치적 노동으로 전화하면서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군더더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들이 비물질노동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다른 철학적 저작들이나 이론서들에 비해 경제적 토대를 해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토대로서 비물질노동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그들의 분석이 목표로 한 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 분석과 새로운 주체성에 대한 탐구는 아직 미완성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 개념으로 인해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들의 논의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다중의 정치적 기획은 어떤 방식으로 현실운동, 특히 대안세계화운동에 접목될 수 있는가와 관련해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며 결국 현실로부터 검증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중의 정치적 기획이 제시하는 다양한 요소들은 여전히 해명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현실운동에서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현실운동의 현실 대항권력과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다중을 특권적으로 해석해야할 이유에 대해서는 더욱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과 『다중』에서 제시하려고 했던 것은 새로운 세계 자본주의의 변화에 대응하는 좌파의 새로운 정치적 기획에 필요한 개념적 기초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다중의 정치적 기획은 현재의 대안세계화운동에 직접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의 열린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경향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논의는 현실 운동에서 여전히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2009년 3월 24일 투고, 4월 2일 심사 5월 3일 게재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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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답글

비판과 답글

제가 쓴 네그리와 자율주의 비판이란 글에 S, P, 두분 교수님이 참으로 애정어린 소중한 비판과 지적을 해주셨는데, 그 지적을 공유하는 것이 책임있는 자세일 것 같아서 간단히 답하고자 합니다.

 

첫째 네그리는 이주가 자유롭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는 지적에 대하여,

네그리가 명시적으로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으므로 수긍합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네그리가 생산적인 기간요원들의 도주와 고도로 훈련된 기간요원들의 탈주가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에 실질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제국』 p286)는 지적과, 도주와 탈출은 제국적 탈근대 안에서 대항하는 강력한 계급투쟁의 한 형태이다. (『제국』 p285)라는 주장에 있다고 봅니다.

 

동구에서의 탈주가 동구 붕괴의 결과가 아닌 원인 나아가 실질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자본이 전일적으로 지배하여 다른 체제나 도망갈 곳도 없는 제국에서 탈주를 얘기하는 것도 황당하고, 봉건적 수탈을 피해 도주하는 화전민처럼 독자적이고 폐쇄적인 생산공동체로 도주할 수도 있겠지만, 네그리의 주장은 자본의 세계에서 혹은 생산의 현장에서 자본에 전면적으로 저항하는 투쟁의지를 발목잡는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더구나 본문에 든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계화에 의해 강요된 이주노동 즉 도주와 탈출을, 마치 은연중에 자발적인 의지로 감행할 수 있는 것처럼 상정하고, 반자본과 대항제국의 중요한 투쟁형태로 칭송하고 있는 것은 황당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둘째, 제국이 국민국가를 대체했다(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의 형태가, 그 특성이 달라졌고 주장하고. 지금까지 주권 관념은 초월성론에 기반한 것인데, 네그리는 ‘내재적’ 주권이라는 관념을 내세워 새로운 주권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하여, 수긍합니다.

 

그럼에도 일국적 (즉 국민국가에 대한) 투쟁이나 국지적 기획을 해롭다는(『제국』) pp. 81-84.) 네그리의 주장은 여전히 반동적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중과 제국적 주권(즉 권력과 착취의 전 지구적 질서)사이의 갈등(『다중』p 378), 제국적 질서의 다자주의적 귀족들,(『다중』p380), 미국은 귀족(국가)들에게 자금지원을 호소해야만 하는 군주의 입장에 처해있는 것으로 보인다.(『다중』p95), 개별국가적 통치에서 제국적 협치로, 고정된 개별국가적 권력들의 위계에서 전지구적 조직들과 네트워크들의 다차원적인 관계들로 이동해 왔다(『다중』p 386) 등등의 언설이나, 맨위에 신자유주의 군주국인 단순한 국민국가가 아닌 미국이 있고, (조정환지배의 피라미드와 촛불) 등등의 표현을 보면,

 

꼭 제국이 내재적인 주권형태만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질서가 군주국인 미국과 제후국들의 네트워크적인 협치로 관철된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자본과 상품이 국민국가의 장벽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현실에서 세계화로 관철되는 초국적 질서의 본질을, 네그리처럼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초국적 질서의 성립으로 보고 곧바로 대항제국으로 나아갈 것이냐, 아니면 초국적 질서라는 게 자본의 대리인인 국민국가를 매개로 하여 관철되기 때문에, 2003년 전세계적인 반전데모에서처럼 각국 정부와 의회를 압박할 것이냐의 실천상의 문제가 된다고 할 것입니다.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시절이 있었다면, 세계화로 강요된 질서는 자본과 초국적 자본의 전세계민중에 대한 공동전선 즉 강대국들의 협력적 질서로 볼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협력적 질서를 깨뜨리는 것은 국민국가를 매개로 한 투쟁에서 관철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셋째, 네트워크는 구조이며, 구조는 도구와는 다른 차원의 범주라는 지적에 대하여 수긍합니다.

 

그럼에도 위계제 혹은 중앙집중적 조직과는 다른, 자율성을 존중하는 중심이 없는 혹은 다중심적이란 의미에서 네크워크 조직론은, 단결과 연대를 통한 강고한 투쟁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반동적이다는 주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네트워크적인 구조 즉 자율적인 단위들이 공동의 적에 대하여 소통하는 방법이 또한 네트워크적인 도구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고 이점에서도 조직론과 투쟁론에서 취약하다는 점 역시 변함이 없습니다.

 

넷째, P교수님이 비물질 노동과 정서노동 즉 노동양태의 변화를 좀더 의미있게 봐야 한다는 지적에 대하여는, 육체노동 혹은 산업노동에 비하여 지식기반 노동과 서비스노동이 확대되었다고 하더라도, 자본에 대항하는 정체성인 임노동과 프롤레타리아라는 큰 틀을 재구성해야 할 만큼 실천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이외에도 많은 소중한 지적이 있었지만 그 취지가 좀더 다른 각도에서 세련된 비판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므로 생략합니다.

 

다시 한번 두분 교수님의 소중한 지적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비판은 연구자의 몫으로 돌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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