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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매체의 반응

졸저 [2008년 촛불항쟁-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문화과학사)의 반응들

 

주간경향 인터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102091800541&code=115

 

레디앙 추천글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1430

 

참세상 배성인 교수의 책서평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9885&page=1&category2=137

 

알라딘 소개글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6598957

 

저자 자평

http://blog.jinbo.net/rn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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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물신론 비판

***이 글은 졸저 [2008년 촛불항쟁-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박석삼 지음, 2010, 문화과학사)의 부록에 실린 글이다.***

 

보론: 다중 물신론 비판

 

이택광과 조정환 논쟁 / 제국론의 허구 / 네트워크 투쟁 / 미네르바의 촛불 / 동일성과 특이성 그리고 공통성 /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 / 민중, 대중, 다중 그리고 엑소더스 / 공통으로 생산한 비물질적 형태의 부 / 절대적 민주주의 / 관념과 몽상의 세계

 

이택광과 조정환 논쟁

 

2009년 4월 조정환은, 2009년 1월에 발간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란 책의 일부 필자에 대하여 “논술의 기초조차 파탄 난 이 사고전개 위에 기초한 ‘무조건적 단어들’의 나열”(조정환, 2009: 38) 운운하면서, “지금 촛불은…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자주의자, 급진주의자 등을 포함하는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부터 전방위의 공격을 받고 있다. 물대포, 경찰기동대, 전경, 방패, 방망이를 동원한 지난해의 기나긴 촛불사냥에 이어 이제 한국의 온갖 정치세력이 신성동맹을 구축하여 이론의 물대포를 앞세우고 촛불 잔불을 끄고자 총출동하고 있는 시간이 지금이다.”(같은 책, 6)는 참으로 황당한 내용의 글을 <<미네르바의 촛불>>이라는 책으로 발간했다.

이에 대해 2009년 5월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의 필자 중의 한 사람인 이택광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조정환의 촛불론 책읽기>라는 글을 통해, “조정환 선생의 <미네르바의 촛불>을 읽었다. … 좀 실망스러웠다. 정교한 분석이라기보다, 그냥 정치팸플릿을 읽는 느낌이랄까. 누구는 거대한 농담을 듣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런 면도 다분했다. … <그대는>에 대한 비판은 함량 미달이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 결국 책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 ‘자율주의 최고’라는 말로 결론이 나는 것 같아서 아스트랄(황당)했다.”*1라면서 소위 이택광과 조정환 간의 촛불논쟁이 시작되었다.

한 달여를 끈 논쟁 끝에, 조정환은 학술적 논쟁에서는 보기 드물게 ‘현실감각을 분석해보고 싶다’는 까마득한 후배로부터 ‘뇌내 망상’증 환자로 씹히면서도, 끝내 ‘왜 촛불이 다중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못한 채로 논쟁은 끝이 났다.

한편 참세상에 <<미네르바의 촛불>>에 대한 서평이 실리자, “어이가 없네”, “처음부터 끝까지 헛소리만 나열해 놓은 책”, “노빠를 다중이라고 생각하는 남한의 자율주의자들의 해괴한 행태가 노무현의 죽음으로 적나라하게 고발되는 모습을 보게 되네요.” 등의 댓글이 달렸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과 댓글은 촛불이 다중이 아니라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촛불이 다중이고 다중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황당하고 반동적인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조정환의 ‘촛불 다중론’ 혹은 ‘다중 물신론’(=예찬론)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가 기반하고 있는 네그리의 핵심주장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들은 존재하는 세계가 국민국가가 각축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라 제국의 시대이기 때문에 국민이나 민중이 아닌 다중이라고 부른다. “촛불봉기의 주체들은 누구인가? … 이들은 국가로부터 쫓겨난 망명자들이며… 국가 없는 국민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며 새로운 유형의 권력을 창출함으로써만 해방될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인 다중이다.”(조정환, 132) 이처럼 다중론은 국민국가쇠퇴론 즉 제국론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하에서는 네그리의 <<제국>>, <<다중>>그리고 조정환의 <<미네르바의 촛불>>을 중심으로 그들의 핵심 개념과 주장들을 살펴볼 것이다.*2

 

제국론의 허구

 

미친 소, 미친 교육 등에 분노한 촛불은 ‘고시철회’와 ‘명박퇴진’을 외치며 청와대로 가고자 했다. 그런데 이러한 촛불들의 투쟁을 해롭고 반동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네그리의 말을 들어보자.

 

“국민국가들―심지어는 가장 지배적인 국민국가들의 주권적 권위는 쇠퇴하고 있으며 그 대신 하나의 초국적 주권형태 즉 전지구적 제국이 출현하고 있다.”(<<다중>>, 27)

“오늘날 다음과 같은 ‘국지적인’ 좌파전략의 다양한 형태의 핵심에서 작동하는 추론은 완전히 반동적인 것 같다. 즉 자본주의적 지배가 훨씬 더 지구적으로 되고 있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국지적인 것을 방어해야 하고 자본의 가속화하는 흐름에 장애물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 오늘날 이러한 국지적인 입장이 잘못되고 해롭다고 주장한다.”(<<제국>>, 81)

“제한된 국지적 자율성을 겨냥하는 기획으로 제국에 저항할 수는 없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가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을 가속화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제국>>, 276-77)

“우리는 국민에 의거하는 모든 전략을 그러한 근거에서 거부해야 한다.”(<<제국>>, 434)

“더 이상 민중이 기초로서 가정되지 않으며, 더 이상 주권적인 국가구조의 권력을 잡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다중>>, 118)

 

이러한 네그리의 주장은, 지구화로 인하여 국민국가가 쇠퇴하고 제국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며, 국지적인 기획으로는 제국에 저항할 수 없으니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지 말고 가속화해야 하고, 국민에 의거하는 전략 혹은 민중에 기초하여 국가권력을 잡는 국지적인 기획은 목표가 아니고, 잘못되고 해롭고 반동적이라는 것이다.

어머나 세상에! 국민국가가 쇠퇴하고 제국의 시대가 도래했다니⋯ 그렇다면 G20에 모인 중국, 러시아, 브라질, 일본 등은 국민국가가 아니고 제국인 미국의 식민지나 제후국이고, 각국의 정상들은 오바마가 임명한 똘만이들이란 말인가?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2008년 촛불의 도화선이 된 광우병 쇠고기의 수입은 한미 FTA의 4대 선결조건 중의 하나였다. 미국의 사료자본과 축산자본의 이익을 위해 한국국민에게 미친 소를 먹이기 위한 것이 광우병 협상이다. 즉 자본의 이익을 위한 전지구화이다. 여기에 저항하여 한국국민은 이명박에게 재협상과 퇴진을 요구했다. 즉 국민국가에 기반한 국지적 기획이다. 그리고 촛불시민들이 이명박의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을 때 국민국가의 공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네그리와 조정환은, “한국국민 여러분! 국민국가는 쇠퇴하고 있습니다. 미친 소 수입과 같은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해서는 안됩니다. 촛불시민들이 국민에 의거하거나 민중에 기초하는 전략인 ‘재협상’을 요구하거나 명박퇴진의 투쟁을 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되고 해롭고 반동적인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시민들이 국민국가의 공권력인 이명박의 경찰들에게 짓밟히고 있을 때, 혹은 노무현 시절 농산물수입개방을 반대하다가 농민들이 두 명이나 경찰들의 방패에 찍혀 죽을 때, 고매하신 네그리와 조정환은 촛불시민과 농민들이 반동적인 투쟁을 하다가 짓밟히고 맞아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국민국가가 시퍼렇게 살아 있음에도, 국민국가가 쇠퇴하고 존재하지도 않은 제국의 시대*3가 도래했다면서 국민국가와 싸우는 짓은 반동이라는 이 허무맹랑한 주관적 관념론이 바로 네그리주의의 실체이다. 이러한 네그리의 주장을 조정환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광우병 사태는 국민국가가 전 지구적 자본의 단순한 관리기구로 축소되는 한편에서 미국 같은 국가의 경우에는 영토를 넘어서 주권을 행사하는 제국 질서의 모순적 양상을 보도록 만든다.”(조정환, 53)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국민국가가 초국적 금융자본, 지구제국의 마디로 형해화되고, … 그러면 다시 와해된 공화국의 재건, 국가재건을 주장해야 되는 것일까? … 오늘날 지구화하는 생산, 삶정치적 생산의 국면에서 와해되는 국가형태의 재건을 통해서 안전보장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 다중은 민중, 인민, 국민이라는 주체성들이 구성했던 안전보장 장치인 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조정환, 61-62)

 

이처럼 조정환은 “국민국가가 지구제국의 마디로 형해화되고, 지구화하는 생산의 국면에서 와해되는 국가형태의 재건을 통해 안전보장을 추구하지 말고, 다중은 민중, 인민, 국민이라는 주체성들이 구성했던 (국민)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발명하자”는 네그리의 핵심적인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사파티스타 선주민 공동체마저도 “반군이 장악한 지역조차… 커피, 수공업제품, 노동력, 목재, 천연자원 시장에서 고립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재배되는 옥수수로는 3개월밖에 연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음식, 의약품, 옷 같은 다른 물건들은 시장에서 돈을 내고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 군대는 숲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순찰하면서 사실상 선주민 공동체를 감금하고 있다.”(하먼, 2009: 16) 사파티스타는 제국으로부터의 탈출은커녕 멕시코 정부와의 협상과 선거개입으로 국민국가 내에서 생존을 꾀하고 있는 중이다. 사파티스타마저도 잘못되고 해롭고 반동적이라는 ‘국지적 기획’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12월 아르헨티나 민중들이 한국의 촛불항쟁처럼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나 독재자를 몰아내었을 때, 자율주의자들은 조직되지 않고 뭉치지 않은 자생성(자발성)이 위대하다고 칭송했지만, “급진좌파의 상당부분은 사회운동의 자율성이란 미명 하에 대통령 선거를 무시하였다. 그 때문에 페론주의를 앞세운”(캘리니코스, 2009: 242)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정권을 갖다 바친 적이 있었다. 존재하는 국민국가와 국가의 변혁을 무시하는 자율주의자들의 이론이 전 세계인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네트워크 투쟁

 

온갖 비정규직과 파견직을 양산하고 구조조정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대하여, 노동자계급은 단결하여 싸워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의 총연맹과 같은 조직으로 뭉쳐서 통일된 투쟁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네그리의 얘기를 들어보자.

 

“더 이상 민중이 기초로서 가정되지 않으며, 더 이상 주권적인 국가구조의 권력을 잡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게릴라 구조의 민주적 요소들은 한층 더 네트워크 형식으로 확장되며, 조직은 점점 더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된다.”(<<다중>>, 118)

“중앙집중적 동일성 아래 통일된 투쟁인가 아니면 우리의 차이들을 긍정하는 독립된 투쟁인가 사이에서 하나를 확연히 선택하도록 한다. 다중의 새로운 네트워크 모델은 이러한 선택들 둘 다를 대체한다. … 새로운 전지구적 투쟁순환은 개방적이고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을 취하는 공통된 것의 기둥이다.”(<<다중>>, 267-68)

 

조정환의 얘기도 들어보자.

 

“민중에서 다중으로, 당에서 네트워크로, 국가에서 코뮌으로.”(조정환, 7)

“복수적인 다중들이 그 환원할 수 없는 복수성 속에서 하나의 다중으로 행위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이제 이념적 당이 아니라 횡단적 네트워크의 형태에서 찾아지기 시작했다.”(조정환, 43)

“네트워크주의는 그 특이한 힘들의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그 힘들이 공통의 목표를 위해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조정환, 269)

 

이처럼 네그리와 조정환은 “중앙집중적 동일성 아래 통일된 투쟁”을 하는 민주노총 같은 조직을 해체하고, 탈모던하게 “개방적이고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을 취하는 메신저질이나 하자고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자율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아우또노미아’ 운동이란 노조를 통하지 않는 ‘살쾡이 파업’과 같은 것으로 ‘대장없는 오합지졸’들이 자본가들을 곤혹스럽게 하여 임금인상에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율주의자들은 그처럼 훌륭한 투쟁이 이탈리아 자본주의에 대하여 손톱만큼의 상처도 주지 못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는 함구하고 있다.

노조가 관료적이고 비민주적으로 타락했다면 그 노조를 바꾸면 된다. 자신들이 만든 노조조차 민주화할 수 없으면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 뭉치면 위계와 억압이 발생한다는 ‘과두제의 철칙’을 운운하며 ‘중심없는’ 네트워크질이나 하자는 것은 자본가들과 제국주의자들의 이익을 위해 네그리가 고안해낸 참으로 악의적인 요설일 뿐이다.

 

미네르바의 촛불

 

조정환이 <<미네르바의 촛불>>을 쓴 목적은 첫째는 촛불과 진보적 지식인들간의 이간질이다. 둘째는 촛불에 빌붙기 위한 것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자율주의와 네그리주의를 끼워 파는 것이다. 이 점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만약에 누군가가 “지금 남조선에서는 헐벗고 굶주린 촛불이라고 부르는 다중들이 미제의 괴뢰인 이명박 도당에 반대하여 떨쳐 일어났습니다. 촛불다중은 제국과 자본의 세계를 끝장내고 공산주의의 과업을 완수할 창조적 역능을 가진 존재로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한다면, 정신병자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김정일 위원장이 한 말이 아니다. 조정환의 말을 들어보자.

 

“맨 위에 신자유주의 제국의 군주국 미국이 있다… 이때의 미국은 단순한 국민국가가 아니다. 그 아래에 신자유주의 우파, 그 아래에 신자유주의 좌파가 있다.

그 아래에 사회민주주의 우파… 그 아래에 사회민주주의 좌파가 있다. 사노련, 노동자의힘, 노동해방실천연대 등이 이에 속한다. … 이상의 대의주의 정파들에 의해 대의되지 못하거나 혹은 그러한 대의를 거부하는 사회적 존재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학적 차원에서 노동의 공통되기에 기초한다. 이들의 이념은 주권, 자본, 국가, 민족, 사회학적 의미의 계급 등에 묶이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 삶, 자유, 사랑 등이 이들의 이념을 더 잘 표현한다. 앞서의 대의 정치세력에 의해 대의되지 못하는 여성, 아이, 청소년, 노인, 다수의 네티즌 등은 물론이고 촛불봉기에 참가했던 이름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른바 ‘나홀로파’) 중의 상당수가 자각적이든 무자각적이든 이러한 감성에 따라 움직였다. 직접행동주의적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은 이러한 경향을 정치화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조정환, 192-95)

 

미국과 한국이 단순한 국민국가가 아닌 제국의 군주국이나 제후국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황당한 수작인지는 앞서 얘기했다.

그런데 세상에! “촛불봉기에 참가했던 이름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른바 ‘나홀로파’) 중의 상당수가 대의되지 못하거나 대의를 거부”했다니… 사회민주주의 좌파에게도 대의되지 못했다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호감을 보였다는 말인가? 아니면 정상배들을 싹 쓸어버리고 혁명정부라도 세우려고 했다는 말인가? 촛불은 ‘명박퇴진’을 열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한 적도 없고,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를 부정한 적도 없다.

촛불의 정치성향은 노사모라고 불리는 노무현 지지자들이나 의료민영화를 굳게 밀어붙인 유시민과 열린우리당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좌파부터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등 사회민주주의까지 다양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나 부르주아 정치체제를 부정하고 이루어질 수 있는 혁명적 대중의 직접통치는 아니었다. 이 점은 촛불 속에 나타난 무수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적 담론이나 노무현 서거 시에 드러난 관대한 통치자에 대한 흠모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조정환은 “여성, 아이, 청소년, 노인, 다수의 네티즌 등은 물론이고 촛불봉기에 참가했던 이름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른바 ‘나홀로파’) 중의 상당수”가 대의주의 정파에 의해 대의되지 않거나 대의를 거부하고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의 지향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용산투쟁과 쌍차투쟁에서 사노준(사회주의노동자당건설준비위원회)을 비롯한좌파들이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제도 투쟁정당론과 대체권력론에 입각한 ‘노동자의힘’의 후신인 사노준은 최근에 사노련(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일부와 합하여 사노위(사회주의노동자당건설 공동실천위원회)를 발족한 바 있다. 이런 변혁추구세력을 체제 내에서 활동하는 사회민주주의 세력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모욕적이고 악랄한 모략중상이다. 모략과 중상은 단결할 줄 모르는 소부르주아 개인주의자들의 고유한 특성이다.

그리고 무슨 직접행동주의적 아나키즘 운운하는데, 2006년 가을 한미 FTA 반대투쟁 때, 시위대가 동대 후문에서 차벽에 막혀 있었다. 그 때 검정 옷 입은 몇 사람이 대오 근처에서 얼씬거린 적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아나키스트가 대중들 앞에 얼굴을 비춘 것은 그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물론 쇠파이프는커녕 결코 전투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촛불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정치적 자기표현이다.”(조정환, 324) “다중은 모두 가난하다.”(<<다중>>, 173) 이처럼 촛불이 다중이고 다중의 정체성이 빈자(가난한 자)라는 것은 네그리와 조정환의 핵심주장이다. 결국 이 말은 촛불이 분노와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가난해서 거리에 나섰다는 얘기다. 기륭의 비정규직은 자본의 부당한 처사 때문에 싸운다. 단지 가난 때문이라면 노점상이나 식당 종업원으로 취업을 하면 되지, 월 80만원도 안 되는 일자리의 회복을 위해서 1,000일이 넘게 노숙투쟁을 할 필요가 없다. 촛불도 가난 때문에 춥고 배고파서 거리에 나선 것이 아니다. 이명박정권의 부당한 처사에 분노하고 항의하기 위해 싸운 것이다. 모든 투쟁은 이기주의적인 목적이 아니라 부당함에 대한 정의로 싸우는 것이다.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다중인 촛불이, 가난 때문에 거리에 나왔고, 무수한 ‘나홀로파’의 상당수가 혁명적 봉기를 일으켜 부르주아 대의제 정당체제와 정상배들을 쓸어버리고 혁명적인 대중의 자기지배 즉 직접민주주의인 아나키즘과 코뮤니즘를 갈구하는 감성을 가지고 움직였다는 이 황당함!

 

이 문장을 양심적으로 쓰려면, “촛불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이명박정권에 대한 분노와 정의감 때문에 거리로 나섰지만, 형식적 민주주의인 87년 체제의 회복을 바랐을 뿐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를 벗어나려는 꿈을 꿔본 적이 없었다. 촛불은 신자유주의 좌파와 사회민주주의 사이에 있었다. 친미반공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입으로만 반자본과 코뮤니즘을 외치면서도 세계화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자율주의자들은 이명박이나 노무현과 같은 신자유주의 우파나 신자유주의 좌파와 가까웠지만, 착취제도를 부정하고 투쟁하기보다는 보장소득이나 운운한다는 점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우파에 가까웠다. 실천적 변혁세력인 노동자의힘과 사노련 등은 자신의 깃발을 들고 촛불과 함께 싸웠다. 그러나 조정환 등의 자율주의자들은 국가권력과 싸우는 촛불들의 투쟁이 해롭고 반동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뒤에서 구경이나 하면서 변혁세력들을 모략중상이나 하기에 바빴다”라고 써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이간질과 모략중상질은 자율주의자들의 특성인 모양이다. 사실상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의 필자들은 촛불 속에서 열심히 싸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촛불을 ‘운동의 정치’라는 측면에서 “촛불의 주체를 정치적 주체로서 반성하는 작업”(서동진, 2009: 9) 즉 촛불이 넘지 못한 지점을 분석해 보려고 했다. 분석과 비판은 완벽하지 못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정환이 “지금 촛불은…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자주의자, 급진주의자 등을 포함하는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부터 전방위의 공격을 받고 있다. … 한국의 온갖 정치세력이 신성동맹을 구축하여 이론의 물대포를 앞세우고 촛불 잔불을 끄고자 총출동하고 있는 시간이 지금이다.”(조정환, 6)고 한다든지, “억압, 냉소, 기만, 환멸을 넘어 촛불이 승리한다”면서 자신만이 촛불의 편이고, 좌파 지식인들이 마치 촛불에 대해 “억압, 냉소, 기만, 환멸”을 보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수작이고 명백한 이간질이다. 이런 점들은 <논쟁>에서 이미 거론된 바이다. 투쟁 속에서 이간질만큼 나쁜 짓은 없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약과다.

 

동일성과 특이성 그리고 공통성

 

기륭전자와 성모병원의 비정규직은, KTX 여승무원과 이마트의 비정규직과 결코 단결하면 안 되고 차이로 남아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네그리 등 자율주의자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탈근대의 사회에서 비물질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헤게모니적”(<<다중>>, 146)이 되었으며, “산업노동자들, 비물질적 노동자들, 농업노동자들, 실업자들, 이주자들 등등은 다중이며”(<<다중>>, 199) 그리고 “다중은 특이성들의 집합이고, 특이성은 그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주체, 차이로 남아있는 차이를 뜻한다.”(<<다중>>, 135)고 주장한다.

이 나라는 전체 봉급생활자의 절반이 넘는 840만명이 월 평균 123만원의 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인 참으로 야만적인 자본주의 사회이다. 일터의 광우병이라고 부르는 비정규직의 철폐를 위해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정규직이 단결해야 한다는 것은, 그가 어느 회사 어느 공장에 다니든 혹은 산업노동에 종사하든 비물질노동에 종사하든, 비정규직이라는 처지의 동일성에 기초하여 단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네그리의 주장에 따르면, 이마트의 비정규직 판매원들과 성모병원의 비정규직 간병인들은 비물질노동자들이고, 기륭전자의 비정규직과 동희오토의 파견노동자들은 산업노동자들이다. 즉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이성들의 집합인 다중”이기 때문에 차이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단결해야 한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노동자라는 처지의 동일성과 통일성을 기초로 하여 단결해야 한다. 그럼에도 네그리는 산업노동자와 비물질노동자를 가르고 차이와 특이성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주장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해치는 참으로 범죄적인 이간질이다. 단결해도 시원찮을 판에 분열과 이간질을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을 이간질하기 위해 분열주의자인 네그리와 비르노 등 자율주의자들이 비물질노동과 다중론을 제기한 반동적 목적이다. 탈근대의 특수성으로 비물질노동을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변함이 없음에도 혁명의 주체와 성격이 바뀌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조정환도 네그리를 본받아 “20세기 중 후반…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주권의 변화를, … 대중노동자에서 사회적 노동자로의, 민중에서 다중으로의 주체성의 변화를 가져왔다. 촛불은 지구상황 속에 편입된 한국에서 산업노동과 대중노동이 주도했던 투쟁의 한 순환이 종결되고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기존의 산업적 공간적 지역적 세대적 경계를 넘어 구성되는 다중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의 형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조정환, 58)이며, “다중은 그 환원할 수 없는 특이성 속에서는 다중들이며, 그것의 공통되기 속에서는 다중이다.”(조정환, 42)고 말하고 있다.

 

비물질노동자와 산업노동자가 차이와 특이성을 고이 간직한 채 결코 노동자라는 동일성으로 단결해서는 안 된다면 무엇으로 단결할 것인가? 네그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다중은 서로 모순적인 ‘동일성-차이’의 쌍을 서로 보완적인 ‘공통성-특이성’ 쌍으로 대체한다. … 새로운 전지구적 투쟁순환은 개방적이고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을 취하는 공통된 것의 기둥이다.”(<<다중>>, 267-68)

“특이성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을 기초로 해서 행동하는 다중은 능동적인 사회적 주체를 나타낸다. 다중의 구성과 행동은 정체성이나 통일성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기초한다.”(<<다중>>, 136)

 

결국 처지의 동일성으로 단결하지 말고, 착취와 피착취라는 적대의 관계 속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로 단결하지 말고, “노동자와 빈자들 사이의 분할의 선을 넘어, 다중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난”(<<다중>>, 173)이라는 정체성으로 단결하자는 것이다.*4 그리고 이 가난이라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만일 모두를 위한 보장소득의 요구가 국가의 영역을 넘어 전지구적 요구로 확대된다면, … 부의 분배를 위한 이러한 공통적인 기획은 빈자들의 공통적인 생산성에 상응할 것이다.”(<<다중>>, 175)고 주장한다.

네그리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조정환은, “무조건적 소득보장 요구는 비정규직의 생명불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규직의 해고불안을 해소하는 수단일 것이며, 정규직/비정규직의 분할을 통해 지배하는 자본의 통치를 파괴하는 방식일 것이다.”(조정환, 166-67), “노동기본권에 기초한 고용안정이라는 방어적이고 복고적인 주장을 넘어설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야 한다. 그 디딤돌은 무조건적 보장소득 요구이다. … 이것은 촛불의 취지와 완전히 일치한다.”(조정환, 204)고 말하면서, 기륭과 쌍차 노동자들이 방어적이고 복고적인 잘못된 투쟁을 하지 말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특이성들로서의 다중이니까 빈자라는 노동의 공통되기를 통해서, 탈모던한 첨단투쟁인 보장소득 운동을 해야 한다고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5

 

비정규직, 파견제, 구조조정 등 불안정 노동은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비정규직이나 파견제를 허용하고 양산하는 법과 제도를 바꾸면 된다. 그럼에도 이들 자율주의자들은 쌍차 노동자들이 ‘해고는 살인이다’며 쇠파이프를 들고 피터지게 싸우고 있을 때 자본의 노예되는 투쟁이라고 빈정대면서, 노동자라는 이름을 버리고 가난한 빈자라는 다중의 공통되기를 통해서 자본가들에게 부를 분배해 달라고 하자는 것이다.

이 세상이 지옥 같다면, 인구의 3%도 안 되는 자본가들의 착취 때문에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이 동물적 삶을 강요당하는 이 야만적 자본주의에 분노한다면, 국가권력이나 정권을 장악해서 변혁하면 된다. 하지만 국가 혹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율을 외치는 자율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비물질노동을 들먹이면서 차이로 남자며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더니, 이제는 동일성이 아닌 공통성을 주장하면서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투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끊임없는 이간질과 훼방 그것이 바로 자율주의의 본질이다. 자율주의자인 조정환이 촛불과 (노동)운동과의 결합과 연대를 얘기하는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의 좌파 필자들을 매도하고 이간질해야만 하는 그 뿌리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

 

국가란 공적 영역의 가장 완성된 형태이다. 그런데 국가와 권력으로부터 회피하고 싶은 네그리는 공적 영역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대신 등장한 것이 ‘공통이익’이다.

 

“공통된 것의 생산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전통적인 분할을 제거하는 경향이 있다.”(<<다중>>, 250)

“공동체(community)라는 용어는 종종 인구들 및 인구들의 상호작용 위에 주권적 권력으로서 군림하는 도덕적 통일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공통된 것은 공동체나 공적인 것이라는 전통적인 개념들과 관계가 없다. … 공동체의 통일성 속에서 개별적인 것(개인적인 것)이 용해되는 반면, 공통된 것 속에서 특이성들은 사라지지 않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한다.”(<<다중>>, 252)

“일반이익 또는 공공이익 개념을, 이러한 재화와 서비스들의 관리에 공통적인 참여를 허용하는 틀로 대체하는 것이다. … 오히려 공공이익에서 특이성들의 공통적인 틀을 향해 전진한다는 것을 믿는다. … 즉 그것은 관료의 수중에 있지 않고 다중에 의해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일반이익이다. 이것이 공적인 것에 기반을 둔 국가에서 공통된 것에 기반을 둔 코뮌(communis)으로의 이행을 이루어낼 것이다.”(<<다중>>, 254)

 

조정환 역시 “다중이 자신의 생명과 삶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 다중은 민중, 인민, 국민이라는 주체성들이 구성했던 안전보장 장치인 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조정환, 62)고 주장한다.

 

자, 우리의 생명과 삶의 안전보장을 위협하는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이것은 공적 업무를 관장하는 국가가 재협상이나 검역주권의 문제를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존경하는 이명박 각하께서는 “다중은 민중, 인민, 국민이라는 주체성들이 구성했던 안전보장 장치인 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되고, 공적인 것에 기반을 둔 국가가 아니라, 공공이익에서 특이성들의 공통적인 틀로”라는 조언에 따라, 국가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고(관료의 수중에 맡기지 않고) 민간수입업자의 자율규제에 맡기셨다. 쇠고기 수입업자나 판매상이나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특이성을 간직한 채 다중의 자율공동체를 건설하여 소통과 협력을 통해서 참으로 훌륭하게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적인 것에 기반을 둔 국가의 시대는 끝났다. 결코 국민이나 민중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세계화에 반대하지 말고 국가를 변혁시키려고 하지 마라! 그것은 해롭고 반동적인 것이다.” 이상이 위대한 네그리 사마와 조정환 사마의 말씀이시다.

쇠고기 수입문제가 공적인 문제인 것은 상식이다. 공적인 영역을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로빈손 크루소처럼 무인도가 아닌 사회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공적인 영역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해관계나 이익으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공적인 것은 정의의 영역이다. 촛불이 거리에 나선 것은 정의감이었다. 공적인 영역인 국가와 정권의 배신에 대한 분노이고 정의감이었지, 예비군과 유모차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면서 공통의 이익이 될 미친 소 수입반대에 일시적으로 함께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식민지 민중으로 단결한 것은,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정체성 이전에 식민지 민중이라는 더 큰 처지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한 정의의 투쟁을 위한 것이었지, 이익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이익으로 단결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차이로 남아 있으면서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있다. G20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한국,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등의 국가는 서로 국익이 충돌한다. 하지만 자본이 야기한 경제위기의 부담을 자국의 민중들에게 돌리는 데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 이것은 정의에 기초한 모임이 아니다. 정부에 대한 재벌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전경련도 공통이익에 기반한 조직이다. 현대와 삼성은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일자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성이며 복수성이고 특이성이다.”(<<다중>>, 141) 또한 “공통적으로 행동하는 특이성들”이다.

하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보병과 포병은 차이에 기초한 서로 다른 이익이 없다. 그들은 한 나라의 군대일 뿐이다. 공통의 이익이 없어지면 차이로 돌아가야 하지만, 유모차와 예비군 역시 차이에 기초한 서로 다른 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지구화와 신자유주의에 유린당하는 민중이라는 통일성으로 투쟁한 것이다.

 

정의감에 기초한 도덕적 통일체는 공동체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운동을 코뮌주의*6라고 부른다. 그러나 특이성으로 남아있으면서 즉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공통의 이익을 조절하고 따지는 것은 도적적 공동체가 아닌 야만이 지배하는 이익단체협의회다. 도덕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코뮤니스트와, “다중의 공통체, 다중의 코뮌만이 다중의 삶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해 줄 수가 있다.”(조정환, 355)라면서 ‘공통체’라는 이익단체협의회를 추구하는 네그리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공동체주의자(communist)가 아니라 ‘공통이익체주의자’(commonist)들이다.

“관료의 수중에 있지 않고 다중에 의해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일반이익”은 얼핏 보아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국가가 사멸한 후에도 혹은 대중의 자기지배가 실현되는 코뮤니즘 사회에서도 공적 업무는 있을 수밖에 없다. 5,000만이 검역업무에 매달릴 수는 없지 않은가? 소수나 일부가 맡을 수밖에 없는 공적 업무를 일부의 시민에게 위임하고 민중의 통제 하에 두던지 혹은 시민들이 번갈아 가면서 맡을지는 업무의 성격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차이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다중들의 이익을 관리하는 공통업무는 아니다.

 

민중, 대중, 다중 그리고 엑소더스

 

네그리와 비르노가 스피노자에게서 빌려온 ‘다중’이란 개념은 ‘민중’과 대립되는 주체성이고,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체하기 위한 개념이다.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과는 다른 민중이란 먼저 권력으로부터의 피억압의 정체성이다. 일제 때 ‘식민지 민중’이란 용법이 그것을 보여준다. 대중이란 동일한 처지나 동일한 요구와 감정을 가진 집단이다. 노동자대중 혹은 농민대중이라고 할 때 보여지는 용법이다. 이에 비하여 다중은 일자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특이성의 집합인 다양성이다. “국가라는 일자(one), 국가라는 중심으로 구심력 운동을 하는 것이 민중 개념이라면 다중은 국가로부터 멀어지는 원심력 운동을 하는 개념이다.”(이득재, 2008: 102) 그리고 계급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처지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어보자.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 대중과 농민 대중은 강도 일본과 투쟁하기 위하여 신간회를 구성하였다. 노동자와 농민의 차이와 특이성을 앞세우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식민지 민중이라는 통일성으로 뭉쳤다. 만약 일제가 식민지 민중이라는 처지의 동일성에 기반한 공동의 적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상이한 이익을 갖는 공통의 적이었다면 일제를 몰아내고 난 다음에는 흩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결하여 정의가 실현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와 농민의 처지의 동일성은 식민지 민중이라는 더 큰 처지의 통일성으로 뭉쳤다.

이승만 독재나 전두환 독재와 한마음이 되어 싸운 학생과 시민과 노동자는 대중이면서 독재정권에 억압당하는 민중이었다. 촛불예비군과 촛불유모차와 안티엠비는 차이를 고집하면서 미친 소 반대라는 공통이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찰독재 하에 고통받고 억압받는 처지의 동일성에 기반한 민중으로서, 즉 하나의 통일성인 촛불시민으로서 싸웠다. 이명박과 싸우는 촛불의 정체성은 하나였지, 특이성으로 남아있는 복수성인 다중이 공통의 문제로 싸운 것이 아니었다. 촛불은 “무수히 많은 계급들이 하나의 공통의 의제 앞에서 정치적으로 결집된 무리라는 점에서 다중”(조정환, 133)이 아니다. 촛불은 하나다!!!

 

이처럼 동일성과 통일성은 단결의 정체성이다. 그러한 단결 속에 하나된 민중들이 자기 내부의 어느 집단을 억압하거나 노동자계급의 농민에 대한 억압은 있을 수 없다. 이익이 충돌하지도 않는다. 예비군의 이익과 유모차의 이익이 따로 있기 때문에 복수의 특이성과 환원할 수 없는 다양성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가? 이명박 앞에서 촛불은 하나였다. 제발 차이와 다양성 운운하며 분열을 조장하지 마라!

 

보통의 사람들은 현실이 힘들더라도 적응하고 산다. 권력의 횡포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불만스럽고 고통스럽더라도 적응하면서 당하고 살기도 하고, 때로는 권력에 저항하고 투쟁하면서 처지를 개선하거나 세상을 변혁하려고 하기도 한다. 즉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현실의 개선과 변혁에 관심을 갖는다. 정책을 반대하거나 정권교체를 바라거나 체제를 변혁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중앙정치 즉 권력에 관심을 갖는 구심력적인 존재이다.

이에 비하여 양반의 수탈을 피해 지리산 속에 들어간 화전민이나 산적들은 때로는 관군과 싸울지라도 세상의 변혁을 바라지 않는다. 체제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없는 집시나 유목민 역시 권력의 횡포에 저항은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중앙(권력)에 관심이 없고, 떠나는 사람들이고 원심력적이다. 마적들, 마약 재배자들, 깡패들, 룸펜들, 군벌, 해적 등등은 그들을 핍박하는 정치권력의 희생자이면서도 세상을 바꾸는 데는 관심이 없다. 떠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다중이다. 그들은 권력에 맞서 세상과 정치를 바꿀 의사가 없는 뜨내기인 유목민과 같은 존재이다.*7 그들은 체제와 정권과 싸우기 위해서 단결해야 할 이유가 없다. 차이로 남아 있어야 한다. 자율주의자들이 숭배하는, 권력과 체제로부터의 도주와 탈주란 바로 이런 정체성이다. 떠나고 싶지만 못 떠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떠날 수 있고 떠나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차이를 넘어선 단결을 외칠 필요가 없다.

다중에게는 타자(他者)가 없고 투쟁의 대상이 없다. 노동자에게는 자본가라는 대상(타자)이 있지만, 빈자에게는 부자가 투쟁 대상이 아니다.(서관모, 2009: 156-57) 즉 투쟁의 대상이 없으므로, 그들은 해방되기 위해서 떠나야만 한다. 투쟁이 아닌 도주와 탈주 바로 이것이 자율주의자들의 실천론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주노동을 극찬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첫 번째 층위의 공화주의적 원칙을, 즉 도주, 탈출, 유목주의를 본다. 훈육시대에는 사보타주가 저항의 기본관념이었던 반면, 제국의 통제시대에는 도주가 저항의 기본관념일 것이다. 근대에서의 대항은 종종 직접적인 그리고/또는 변증법적인 힘의 대립을 의미했던 반면, 탈근대에서의 대항은 애매하거나 삐딱한 자세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당연하다. 제국에 대항하는 전투는 삭제와 태만을 통해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주는 어떤 장소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권력의 장소를 철거하는(비우는) 것이다.”(<<제국>>, 282-84)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신음하는 전 세계 민중 가운데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못사는 사람들이 탈주를 한다고 해서 그 나라가 바뀔 수 있을까? 이주노동이라는 게 결국은 선진국의 3D업종에 취직해서 돈 버는 것이다. 한 개인에게는 보다 나은 소득을 얻는 일이겠지만 결국은 선진국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것이다.

비르노는 “미국의 동부 노동자들이 토지를 얻을 수 있는 서부로 대탈주해서 자본가들에게 타격을 주었다”고 말한다.(비르노, 2004: 122) 그래서 동부의 자본주의가 망했던가? 미국의 자본주의가 망했던가? 단지 남겨진 노동자들의 일시적인 임금상승에 조금 기여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조정환은 “이주에 대한 네그리와 하트의 긍정은 이 유목적 운동이 갖는 역사적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진단에 기초한 것으로서 비참에도 불구하고 이주가 갖는 변형의 힘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조정환, 229) “이주하는 다중의 유목적 운동은 그것이 비참에 의해 조건지워진 것이라 할지라도 인류인들의 국경을 넘는 혼종과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기이며 코뮤니즘을 새로운 수준에서 구축할 잠재력의 축적이라고 보아야 한다.”(조정환, 230)고 주장한다.

그들은 현대의 대중이 떠나는 자의 정체성이라면서 대탈출을 감행하여 자본의 세계를 무너뜨리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삶이 힘들어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새롭게 찾아갈 곳도 무한정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곳도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촛불은 재협상을 바라고, 이명박이 물러나기를 바라는 정권퇴진운동이었다. 이것은 정치를 바꾸고자 하는 전형적인 민중의 모습이다. 결코 자율규제나 믿는 원심력적인 다중이 아니었다. 유모차부대와 예비군과 소울드레서는 차이를 앞세운 다중이 아니라, 이명박과의 싸움에서 촛불로 하나가 된 민중이고 대중이었다. 촛불이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었고 조직되지 않은 자발적 창의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다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광우병, 의료민영화 등등의 문제는 차이를 넘지 못하는 공통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찰독재정권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처지의 동일성에 기초한 통일된 민중들이 제기한 의제였다.

오직 단결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뭉칠 줄 모르는 자율주의자들만이 외견상의 차이에 매달리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혁명적 사건이 그러하듯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봉기란 오히려 드문 것이다. 그리고 대중의 자발성은 고양기에는 언제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광주항쟁 때 양동시장의 아주머니들이 김밥을 만들고, 전남대 병원의 간호원들이 시민군을 숨겨주고, 야학 노동자들이 전단을 뿌리고, 택시 운전사들이 무기고를 턴 것은 차이 즉 특이성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두환의 공수부대의 학살 앞에서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통일성에 기반한 민중이고 대중이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발적이고 창조적이었다는 것은 다중의 특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운동의 고양기에 나타나는 대중과 민중의 특성이다.

 

“홉스에 따르면 다중은 정치적인 통일(단일성)을 기피하고, 복종을 거부하며, 지속가능한 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 또 다중은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주권자에게 결코 양도하지 않기 때문에 법적 인격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다중은 (다원적 특성이라는) 자신의 존재양식과 행동양식에 의해 이러한 양도를 금지한다. 위대한 저술가였던 홉스는 다중이 얼마나 반-국가적인가를,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얼마나 반-민중인가를 존경스러울 정도로 세련되게 강조했다. … 말하자면 민중이 있다면 다중은 없다. 또한 다중이 있다면 민중은 없다.”(비르노, 2004: 41)

 

이처럼 비르노가 흐뭇한 심정으로 인용한 홉스의 주장이야말로 다중에 대한 참다운 정의이다. 물론 탈모던한 현대사회에도 이러한 정의에 딱 맞는 존재들이 있다. 소말리아 해적이나 중남미의 마약 재배자나, 이라크의 군벌들이나, 양은파와 같은 깡패들이 바로 홉스가 올바르게 파악한 전형적인 다중이다. 국제인신매매단이나 국제마약밀매단 역시 “정치적인 통일(단일성)을 기피하고, 복종을 거부하며, 지속가능한 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주권자에게 결코 양도하지 않기 때문에 법적 인격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채로, 제국의 기관인 인터폴과 싸우는 전형적인 다중이다.

A가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라고 주장하려면, A에게 포유류와 영장류의 특성이 있다는 것은 전혀 증명이 되지 못한다. 촛불이 민중이 아니라 다중이라고 주장하려면 촛불이 대중이나 민중은 가질 수 없는 다중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다중의 고유한 특성이란, 정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데에 관심이 있는 구심력적인 것이 아니라, 특이성을 고집하면서 일자로 환원되지 않고 떠나는 유목민과 같은 원심력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촛불은 그런 특성이 없었다. ‘명박퇴진’과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이 어떻게 원심력적일 수 있는가? 그것은 국가와 중앙정치에 관심을 갖고 변혁시키려는 전형적인 구심력적인 운동이었다. 촛불을 다중이라고 하는 것은 모욕이다! 자본의 지구화에 맞서 자국의 신자유주의 정권과 싸우고 있는 전 세계 민중을 다중이라고 하는 것은 모욕이다! 촛불이 국가권력과 싸우고 국가권력을 변혁시킬 민중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떠나야 하는 원심력적인 다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반동적 주장이다. 자본의 전자구화에 저항하는 것이 반동적이 아니라 국가라는 형태를 통해 안전보장을 축구해야만 하는 전 세계 민중에게 다중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 반동이다!

 

공통으로 생산한 비물질적 형태의 부

 

노동자계급을 이간질하기 위해 ‘비물질노동’을 강조하는 자율주의자들은 비물질노동의 결과물인 지식재와 정보재 그리고 금융산업이 올리는 부를 중시한다.

 

“비물질노동의 중심성은 그것이 생산하는 비물질적 형태의 재산이 갖는 중요성이 증가하는 데 반영되어 있다. … 최근에 사유재산으로서 보호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특허권, 저작권, 그리고 다양한 비물질적 재화….”(<<다중>>, 152)

“우리는 금융자본이 또한 또 다른 얼굴, 즉 미래를 가리키는 공통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금융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다른 형태들보다 덜 생산적이지 않다. 자본의 모든 형태들처럼 그것도 화폐로 재현될 수 있는 축적된 노동일뿐이다. … 금융자본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미래의 공통된 생산능력들의 일반적 재현으로서 기능하는 경향이 있다.”(<<다중>>, 337)

“엄청난 추상의 힘을 갖고 있는 금융의 세계가 다른 공통적인 사회적 부뿐만 아니라 미래의 잠재력까지 훌륭하게 표현해준다.”(<<다중>>, 371)

 

이어서 조정환이 네그리 사마의 말씀을 암송한다.

 

“오늘날 부의 지배적 형태는 비가시적이며 비물질적인 형태로, 또 금융자본의 형태로 존재한다. 금융자본은 개별적 노동시간의 응축을 넘어 생산자들 사이의 사회적 보편적 협력이 가치형태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즉 생산자들의 공통되기가 가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소통과 신용이 금융사회에서 가치실현의 핵심적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금융자본의 유통이 필요로 하는 확대하는 부채관계(대부와 원리금 상환)는 비물질적 사회적 노동협력이 필요로 하는 확장하는 소통과 신뢰관계의 가치적 재현이다. 탈근대의 부는 절대적으로 사회적 생산자들의 협력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근거한다. 금융자본의 파생성(파생상품의 가능성)은 사회적 협력의 창조성과 풍부성에 의지한다.”(조정환, 326)

 

결국 금융이 부의 지배적인 형태이고 그것은 비물질적으로 그리고 공통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통으로 생산된 공통의 부의 분배를 위해 소수의 통제에서 다중의 공통되기로! 바로 이것이 공통체주의자들의 핵심적인 기획이다.

세상에! 특허권, 저작권 특히 금융이 얻는 부가 다중이 공통적으로 생산한 창조적인 부라니! 2008년 가을 전 세계 민중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던 경제위기의 주범인 파생상품이 사회적 협력의 창조성과 풍부성에 의존하는 탈근대적 부라니! 에이즈 치료제의 독점적 특허와 지적 재산권은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 약을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길을 막았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적 특허권은 전 세계의 사용자들에게 불법복제의 잠재적 범죄자라는 위협을 가하면서 천문학적인 이윤을 챙겼다. 그들의 이윤은 개발비보다 10배, 100배를 넘는 판매가를 강요하여 민중의 부를 약탈한 강도짓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생산한 부가 아니라 범죄적인 약탈이다. 그들이 올리는 이윤은 분배의 대상이 아니라 부정되어야 할 범죄적 부당이익이다. 금융산업이 올리는 막대한 이윤 역시 금융산업 종사자들이 협력과 소통을 통해 공통적으로 창출한 부가 아니다. 그들이 올리는 이윤은 서브 프라이머들과 같은 민중들을 재물로 삼아 얻어진 것이다.

네그리주의자들의 이런 수작은 가령 깡패 조직원 30명이 시장의 상인들로부터 자릿세를 부당하게 뜯어 막대하게 부를 축적했을 때, 그들이 얻은 화폐적 부가 깡패들이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공통적으로 생산한 부라고 찬양하면서, 공통으로 생산한 것이니 깡패두목님만 가지지 마시고 졸개들에게도 나눠주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모든 공동체주의자들이 범죄적 부를 부정과 금지의 대상으로 보고 있을 때, 오직 자본주의에 찌들은 공통이익체주의자들만이 이런 범죄적 부를 찬미하면서 공통으로 생산했으니 보장소득으로 나눠 갖자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네그리가 말하는 ‘공통적인 정치적 기획’(<<다중>>, 277)의 핵심이다. “이른바 분배를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도대체 잘못된 것이다.”*8

 

절대적 민주주의

 

네그리는 다중의 민주주의 혹은 절대적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하지만 명료한 정의는 없다. “다중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해 주권을 파괴하는 것이다. 주권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건 불가피하게 권력을 일자의 지배로 제시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침식한다.”(<<다중>>, 419) 그리고 “다중의 민주주의가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직접민주주의와 거의 아무런 유사성도 가지고 있지 않고, … 경제적 생산과 정치적 생산은 일치하며, 생산의 협동적 네크워크들은 사회의 새로운 제도적 구조를 위한 틀을 제시해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삶 정치적 생산을 통해 협동적으로 창출하고 유지하는 이러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절대적이라고 부른다.”(<<다중>>, 416)는 네그리의 주장은, 네트워크란 말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맑스주의도 국가사멸론을 얘기하고 대중의 자주관리 등을 얘기하니까 시비 걸지 말자. 그런데 네그리는 그 다중의 절대적 민주주의에 대해 “공통된 것에 기초한 다중의 이 새로운 과학은 다중의 어떠한 통일화도 또는 차이들의 어떠한 종속화도 포함해서는 안 된다.”(<<다중>>, 421)고 말하는 것이다.

 

맑스가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사회”*9라고 할 때에는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와 통일이 있다. 하지만 “다중의 어떠한 통일화도 또는 차이들의 어떠한 종속화도 포함해서는 안 된다”고 할 때에는, 개개인의 권리와 이익은 결코 양도되거나 제약되지 않는다. 결국 개인은 공동체와 필요한 한에서만 소통하는 극단적 개인주의이고 이기주의자일 뿐이다. 뭉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자율주의자들은 통일성을 인정할 수 없다. 소부르주아의 절대적이고 극단적 이기주의에 기반한, 그리하여 차이(개인)에 대한 어떠한 억압도 없는 민주주의가 바로 네그리가 선동하는 이상사회다. 그러나 그 세계는 개인주의자들과 이기주의자들로 넘쳐나는 야만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다.*10 결국 네그리가 말하는 절대적 민주주의란 전경련민주주의 혹은 아파트 값을 올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부녀회민주주의인 것이다. 그것은 정의와 사랑에 기반한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기반한 공통이익체인 것이다.

 

관념과 몽상의 세계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네그리를 지금까지 15년째, 그리고 맑스를 30년째 읽고 있다”는 조정환은, 소부르주아 반동철학자인 네그리의 주장을 마치 암송경연장에 출전한 것처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촛불이 다중이고 다중이어야 한다고 우기고 있다. 그러면서도 “‘네그리주의자’나 ‘다중주의’란 말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나로서는 금시초문이고 앞으로도 쓸 생각이 없다”*11며,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비웃을 수밖에 없는 참으로 썰렁한 개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은 국민을 배반한 정권이 물러나길 바랐다. 위정자가 잘못되면 그 위정자를 몰아내고, 체제가 민중을 배반하면 체제를 바꿔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혐오하고 국가권력의 장악과 변혁론을 부정하는 자율주의자들, 특히 친미반공주의조차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금융자본이 약탈하는 재화마저도 창조적 부라고 찬양하는 네그리는, 존재하는 국민국가를 부정하면서, 노동자라는 처지의 동일성이나 민중이란 통일성으로 단결하지 말고, 위계적인 민주노총과 같은 낡은 조직도 만들지 말고, 자본의 노예되자는 비정규투쟁도 하지 말고, 촛불도 노동자도 노점상도 비정규직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니까 공통의 이익을 위해 자본가들에게 빌붙어서 보장소득을 나눠주기를 간청하자고 한다. 다중에겐 적대하는 타자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할 대상이 없다. “타이밍이 결정적이다. … 삶정치적 다중의 무한한 노력의 오랜 시기가 지난 후에, 엄청나게 축적된 불만들과 개혁제안들이 어느 시점에선가 강력한 사건에 의해, 급진적인 반란의 요구에 의해 변형될 것임에 틀림없는”(<<다중>>, 424) 그날을 기다리며, 절대로 뭉치지 말고 ‘중심 없는 투쟁’이나 찬미하면서, 민주노총도 해체하고 네트워크로 뭉쳐서 메신저질이나 하자고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겐 투쟁이 없고 실천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존재를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은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변혁적인 실천좌파들을 씹고 이간질하는 것뿐이다. 네그리가 뉴라이트 게시판 수준에도 못 미치는 반공의 열망에 불타올라 <<제국>>과 <<다중>>에서 맑스주의를 씹는 것이나, 조정환이 좌파 지식인과 촛불을 이간질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장점이 있다. 현대사회가 개인주의화하고 이기주의적으로 되면 될수록, 특이성을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차이로 남자는 극단적 개인주의는 호소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적대적 투쟁은 낡은 것이라며 비대칭 투쟁을 찬양하고, ‘중심 없는 투쟁’과 운동의 ‘자생성’과 ‘떼지성’을 찬양할 때, 유구(唯口)좌파는 입만 놀리며 폼만 잡으면 된다. 지휘자가 없어도 오케스트라는 떼지성을 발휘해서 훌륭하게 연주될 것이다.

 

2009년 3월, 네그리는 런던대학교에서 열린 컨퍼런스의 발제문에서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2며 제국으로의 이행 테제 등을 포기했다.(서관모, 2009: 142) 2000년 <<제국>>을 발간하여 세계화를 찬양하고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까지 제국의 경찰작용으로 칭송하면서 전쟁광 부시와 월스트리트의 기쁨조 역할을 하던 네그리의 대사기극이 9년 만에 막을 내리던 순간이었다. 허무맹랑한 제국론에 기초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유린당하는 전 세계 민중들이 국가와 관련한 정체성인 국민과 민중이 아니라, 제국과 자본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탈주를 감행할 다중이라는 반동적인 헛소리도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자율주의자란 ‘코뮤니즘의 모자를 쓴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네그리주의를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정의하면, 코뮤니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공통이익체주의’라는 외투를 입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찌들은 소부르주아지들의 반동적 요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도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에 종사하면서 연봉 수십만 달러가 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프로그래머와 월가의 투자상담사와 같은 혁명전위들이 소통과 협동을 통해 창조적으로 ‘공통되기’를 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건설할 그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채만수 소장이라면, 이런 네그리주의자들의 수작에 대해 무조건적 보장소득을 주장하는 기본소득론자들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여, 제발 사기 좀 작작 처라! 그리고 부끄러워할 줄 알라!”(채만수, 2010)고 말하겠지만, 필자는 이들 ‘공통이익체주의’ 판매업자들이 더 이상 노동자계급이나 변혁세력들에 대해 이간질이나 중상질만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후주

1_ 이택광, “조정환의 촛불론 책읽기”, <논쟁>, 09.05.05.

2_ 네그리의 <<제국>>과 <<다중>>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광석(2008)을 참조하라. 필자가 필명으로 쓴 이 글이 나온 후에 서관모 선생이 동지적인 애정에 입각하여 참으로 소중한 비판을 해준 바 있다.

3_ 네그리가 주장하는 제국은 실체로서의 제국이 아니라 관념으로서의 제국이다. “제국주의적 권력들 사이의 갈등 또는 경쟁이었던 것”은 하나의 현실이었음에도, 이 현실이 ‘단일한 권력이라는 관념’으로 대체되어 왔다고 주장하면서, 제국으로의 이행이 주권의 ‘내재성의 평면’으로의 이행(<<제국>>, 430), 즉 근대주권의 ‘홈패인 공간’으로부터 제국주권의 매끈한 공간’으로의 이행(<<제국>>, 257)이라고 주장하여, … 제국 장치를 ‘내재적 장치’로 규정함으로써 초국민적 권력장치들에 대한 유효한 공격을 위한 이론적 수단을 제거했다”(서관모, 2009: 140-41).

4_ 가난 혹은 빈자란 그것을 낳는 사회경제적 처지가 아니라 그 결과만을 나타내는 몰역사적 개념이다. 노동자가 가난한 것은 자본가 때문임을 알 수 있지만, 누군가가 빈자인 것은 부자 때문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결국 다중이 빈자이고 촛불이 가난하다는 소리는 국가권력과 자본과의 투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점은 “다중에는 적대하는 타자가 없어서 투쟁이 불가능하다”는 서관모의 앞의 글을 참조하라.

5_ 무조건적 보장소득론=기본소득론은 교육, 의료, 보육과 같은 공적 분야나 주택, 전기, 수도 등 공공재를 탈시장화/탈상품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화폐의 분배를 통해 복지를 상품으로 소비하게 한다는 점, 안정적인 재원확보를 위해 결국에는 소비자인 민중의 부담으로 돌아갈 화폐주조 이익세나 탄소배출 거래세나 네이버iN 등에 참여하는 네티즌들의 나눔을 무슨 ‘그림자없는 노동에 대한 대가’ 운운하며, 자본을 부정하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조세에 의존하여 자본과의 동반성장론을 편다는 점, 한국의 2009년 총생산=총소비는 약 1,000조인데, 총투자 29.9%, 정부지출 15.6%는 피할 수 없다면, 민간지출은 55.5%인데, 1인당 50만원의 기본소득은 263.9조원(26.4%)으로 추산되는 바, 개개인의 소비적 지출 혹은 화폐적 지출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이 민간지출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이런 점은 독일과 같은 유럽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그 부담의 대부분은 결국 자본이 아니라 급여생활자가 지게 된다는 점, 무상이어야 할 교육과 의료, 주택 등 공적 복지를 심각하게 제약한다는 점 등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한 북유럽 복지국가의 GDP의 50%가 넘는 조세는 기본소득과 같은 무차별적인 복지가 아니라 임신, 보육, 질병, 노후보장, 실업수당과 같은 선별적 복지에 지출되고 있다. 결국 기본소득론은 사회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가치인 선별적 복지를 해체하는 데에 이른다(박석삼a, 2010 참조). 요즘 얘기되는 무상급식, 무상의료와 같은 보편적 복지란 선별적 가치를 접근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관철하는 것을 말하는데, 보편적 복지의 반대말은 (수급자격에 제한을 두는) 잔여적 복지이고, 기본소득은 보편적 복지와는 별 상관이 없는 개념이다.

6_ 공산주의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공동체주의가 적절할 것이다.

7_ 자율주의자인 들뢰즈는 현대인이 유목민적 심성을 가졌다며 노마디즘이란 단어를 퍼뜨린 바 있다.

8_ 맑스, <<고타강령 비판>>.

9_ 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10_ “여기서, 네그리가 이야기하는 절대적 민주주의의 작동이 곧 권력관계의 한 변용태라는 점이 아주 확실하게 드러난다. 절대적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처럼 주권의 영역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민주주의는 특이성들이 극한까지 발현되어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상태를 가리키므로 주권의 영역을 통해 매개된 개인의 계약에 의해 작동되는 직/간접 민주주의 모델과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엔 없다. 그동안 난 네그리가 근대 주권의 형식이라고 매개를 엄청 강조했기에 매개, 매개 이러기만 했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는데, 이런 식으로 정의를 하게 되니 매개라는 기제가 무엇인지 아주 정확히 눈에 들어온다. 주권적 권력의 작동이 곧 매개라는 기제이다. 이것이 제거되어야지만 민주주의는 그 논리적 극한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직접적으로 세계 경제, 비물질적 경제라는 공통성을 형성하고 있는 특이성들의 극한에 이르는 발현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지, 매개에 의해 통합되고 억제되는(되어야 하는) 개인이 극한에 이르는 발현을 통해서는 모순에 이를 뿐이다. 즉 자유로운 개인이 그 극한에 이르게 되면 홉스의 전쟁상태가 나타날 따름이며,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인 자유가 그 모순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나타낼 뿐이다.” 저련, <주권, 권력관계, 절대적 민주주의>, http://cafe.naver.com/abcde1.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68.

11_ 조정환, <논쟁>, 09.05.11.

12_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네그리가 마치 communist(공동체주의자)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그는 실은 communism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commonist(공통이익체주의자)라는 점이다. 또한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변혁시키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대항하자(be against)’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등의 신자유주의 정권을 몰아내고 민중적인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대항만 하자는 얘기이다.—적대적 투쟁대상이 없는 대항(자본가 계급과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에 대항하자는 것과 같은 얘기)에 대해서는 서관모의 앞의 글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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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실험의 평가

베네수엘라 실험의 평가

 

들어가며

1. 조돈문의 서술

2. 마이클 레보위츠의 서술과 주장

3. 조지프 추나라의 주장

4. 쟁점과 전망

 

들어가며

차베스는 2005년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하여 ‘21세기 사회주의’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과연 현재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실험들이 혁명적인 것인지 아니면 진보적인 개혁인지… 평가와 전망은 어떻게 할 것인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조돈문, 마이클 레보위츠, 조지프 추나라의 글들을 살펴보고, 쟁점과 관점을 도출해 보기로 한다.

 

1. 조돈문의 서술

1-1. 차베스의 정권장악 과정

1998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차베스가 당선되어 다음해 2월에 취임한 이후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2001년 특별법 제정이후 2001년 12월 특별법 반대 총파업이 있었고, 2002년 4월에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48시간 동안 대통령이 납치되었다.

2002년 12월 석유산업을 중심으로 한 총파업이 10주간이나 계속되었고, 야당들은 제헌의회 국민투표와 총선 등 일련의 선거를 보이코트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차베스측은 의회와 지방정부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2. 차베스 등장의 배경

1958년 1월 군부 내 자유주의 세력이 합류하여 히메네스 장군을 축출하고,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반한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AD와 Copei가 양당정치를 통하여 권력을 분점하였고, 그 성격은 친미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1977년까지 석유수입에 기초하여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보편교육과 건강보험의 무상제공 등 복지도 진전을 보았으며, 석유산업과 철, 금속, 광산들을 국유화하는 한편 적극적인 산업화 정책 등 개입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석유산업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화폐가 고평가되어 수입품 가격은 하락하고, 수출경쟁력은 상실되었다.

1978년 이후 석유수입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자, 77년부터 85년까지 GDP는 24% 감소하였고 경기침체에 빠졌다. 89년에 집권한 빠레스와 94년에 취임한 깔데라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공세적으로 추진하였다. 빠레스와 깔데라는 국유항공사를 사유화하고, 전화회사와 철강회사를 매각하고, 석유산업의 점진적 사유화를 추진하는 한편, 산업에 대한 각종 지원금을 폐지하였다.

경기침체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시민들의 삶의 조건을 전반적으로 악화시키는 한편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실업율이 상승하고 실질임금이 하락하였다. 81년과 97년 사이 최하층 40%의 소득점유율은 19.1%에서 14.7%로 축소된 반면, 상위 10%는 21.8%에서 32.8%로 증가하였다. 중간계급은 27%에서 23%로 축소된 반면, 노동계급은 44%에서 48%로 증가하였으나, 노조 조직률은 절반수준으로 하락했는데, 이는 주로 일자리가 비공식부문과 하급 서비스 노동자층의 증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양극화의 추세 속에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정치 권력자원의 불평등으로 이어져, 지배세력은 자본가 계급과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노동계급내 특전적 조직노동부문이 결합된 반면, 피지배세력은 비공식부문 쁘띠부르주아와 주변적·미조직 노동자들과 함께 실업자들로 구성되었다. 농촌부문의 급격한 위축과 함께 도시의 팽창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피지배 세력의 구성원들은 도시빈민 형태로 도시지역, 특히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속에서 서민들의 삶의 조건은 악화되었고, 석유수입 하락에 따른 추가적 재정악화로 인해 정부의 사회적 지출이 크게 줄어들면서 시민들의 불만은 물적 조건을 넘어 부동점 체제로 향하게 되었다. 장기화된 양당체제 하에서 부정부패는 심화되었고, 석유수입은 국가와 석유산업 엘리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는 판단이 확산되는 가운데, 빠레스 대통령의 IMF 차관 도입에 따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및 긴축정책이 식료품 가격의 600% 인상과 함께 가스 등 에너지 가격의 폭발적 인상을 가져옴으로써 1989년 2월 27일 까라까스에서 시민들 주로 도시빈민들의 봉기 즉 까라까소가 발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89년부터 94년 사이에 851건의 정치적 저항행위들이 있었고, 92년 2월에는 차베스의 쿠데타를 포함한 두 차례의 쿠데타와 대통령 탄핵사태가 발생했을 정도로 제4공화국은 경제위기를 넘어 총체적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93년 대선에서는 Copei의 창건자이고 대통령을 역임했던 깔데라가 Copei를 탈당하여 대선에 출마하는 사태까지 이를 정도로 양대 정당의 정권재창출 가능성이 급격히 감소했다.

 

 

제4공화국과 부동점 체제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양대 정당을 포함한 기존 정당들을 통해 해소되지 않자, 선거 기권율은 갈수록 증대하였다. 기권층은 주로 하층민들이었다. 하층민들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석유수입을 서민들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차베스에게서 대안을 찾았던 것이다.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최대 피해자는 주변적 노동계급과 비공식부문 쁘띠 부르주아로서 확대된 의미의 도시빈민층을 구성한다. 이들이 98년 대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사회세력으로 형성된 것이다.

 

1-3. 차베스 정권의 변혁성과 체제이행의 정치

1) 권력체계 재편과 구지배세력의 무력화

AD와 Copei의 양대 정당 정치인들은 연방의회, 주정부와 시정부를 포함한 지방자치단체들을 장악하고 있었고, 사법부와 행정부처 고위직들뿐만 아니라 사유 언론사들, 국유 석유회사를 포함한 주요 대기업들과 Fedecamaras 등 사용자단체들, 카톨릭 교회와 CTV 등 시민사회권력기구들에도 구지배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차베스는 1999년 2월 취임하자마자, 제헌의회 조직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4월에 실시하여 81.7%의 찬성으로 통과시킨 다음 7월에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8월에 구성된 제헌의회는 친차베스 세력이 121석을 장악하고 반대파는 7석에 머물러 친차베스 세력에 의해 독점적으로 장악되었다. 12월 5일 제헌의회는 신헙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쳤고, 볼리바르 헌법은 72% 찬성으로 확정되었다.

볼리바르 헌법은 입법 사법 행정부 3부에 시민부와 선거관이위원회를 더한 5부 체제를 규정하여 연방정부를 포함한 국가기구들에 대한 시민들의 감시통제기능을 강화했다. 시민들이 국가중대사에 대하여 국민투표를 제안할 수 있고, 유권자 10%의 발의로 헌법개정을 제안할 수 있으며, 선출직 공무원을 해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부동점 체제의 대의민주주의 대신 시민들이 직접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주체적 직접민주주의의 기초를 구축했다. 의회를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바꾸는 한편 대통령 임기는 5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을 허용했다. 대통령이 내각제에서와 같은 의회 해산권을 가지고 연방위원회를 통해 주정부를 포함한 지반자치단체들의 예산을 통제할 수 있게함으로써 의회와 지방정부에 대한 권한을 강화했다. 제헌의회는 볼리바르 헌법을 제정하는 외에도 의회 기능을 예산과 조세 심의에 한정한 반면 대통령에게 의회의 입법권을 1년간 위임함으로써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부가 의회와의 관계에서 절대적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차베스 정권은 제헌의회가 제정한 볼리바르 헌법과 관련법규들에 근거하여 권력체제를 재편하는 동시에 부동점 체제의 구지배세력을 입법사법행정부를 포함한 국가기구들로부터 축출하는 작업도 전개했다. 신헌법은 대통령, 주지사, 시장을 포함한 모든 선출직 공직자들의 재신임을 요구하여 2000년 7월 30일에 실시된 초대형 선거에서 차베스는 59.8%로 재신임되었고, 친차베스 세력은 연방의회 165석 가운데 104석을 장악했고, 주지사 23명 중 17명 시장의 절반 정도를 확보했다.

구지배세력이 국가기구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한데는 자체적인 전략적 오류도 크게 기여했다. 구지배세력은 제헌시도 자체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99년 4월 제헌의회 조직 국민투표와 7월의 제헌의회 선거를 보이코트했다. 이에 따라 기권율은 각각 62%와 54%로 차베스가 당선된 98년 12월의 대선의 37%보다 20% 정도 더 높아져 구지배세력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러한 구지배세력의 선거보이콧은 2005년 지방의회 선거와 연방의회 선거에서도 계속되어 각각 70%와 75%의 높은 기권율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 밖에도 차베스는 제헌의회 구성 여부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총연맹 지도부 퇴진여부까지 국민투표 방식으로 시민들의 직접의사를 물음으로써 의회를 우회하고 주요한 국가적 의사결정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하는 한편 구지배세력에 맞서 시민들이 스스로 조직화·세력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2) 차베스 정권의 경제정책과 사회주의적 변혁

차베스는 재임초기 전 정부의 재무장관을 그대로 임명하는 등 여타 경제부처 장관들도 대체로 재계가 수용하기 좋은 인사들로 구성했다. 저조한 석유수입과 재정적자 누적으로 인한 공공부채의 증대 속에서 전임 정부의 긴축재정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차베스는 외채지불을 공언하고 외국인과 내국인의 재산몰수는 없다며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제의 원칙에 충실할 것임을 명확히 했다.

하지만 신헌법에 따라 대통령과 의회의원 등 모든 선출직 공직자들의 재선거를 통해 권력체계를 재편한 다음 2001년 11월 차베스 정부는 권한위임법에 의거하여 49개 특별법을 제정·공포했다. 49개 특별법에는 석유산업의 모든 합작기업들에 대해 사유화를 금지하고 정부가 과반수 지분을 확보하도록 하는 한편 농지소유규모의 상한을 설정하고 유휴상태 토지는 몰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가가 사유재산권을 규제하며 적극적 시장질서 개입에 나설 수 있게 했다.

특별법으로 통과된 탄화수소법에 따라 정부는 석유산업에 대한 국가통제를 확보하며, 석유추출 채굴 사용료를 16.6%에서 30%로 배가시켰고, 국제유가 인상을 위해 OPEC 생산쿼터를 엄격하게 지키고, 석유수입을 보건, 교육재정 및 거시경제조정기금을 지원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했다. 국유석유기업인 PDVSA의 사유화를 중단하고 2005년 초 PDVSA와 사업계약관계에 있는 석유산업 32개 사기업들을 모두 PDVSA와의 합작기업으로 전환하며 PDVSA가 지분의 60% 이상을 점유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04년 8월 15일 국민소환투표에서 차베스가 59%로 재신임을 확보한 뒤 변혁적 정책들을 공세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2005년 1월 30일 제5차 세계사회포럼에서 21세기 사회주의 건설을 선언한 바 있고, 2006년 12월 재선승리 이후에는 정부의 혁명의제 심화계획을 발표하는 등 대안적 사회체제로의 이행을 공개적으로 선언·추진하여 나갔다. 21세기 사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와는 달리 국가중심성을 거부하고 인민의 주체적 참여에 기초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로 지칭되었지만 선언적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차베스 정권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경제질서를 초월하여 사회주의체제로 이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확인시켜주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주의적 변혁정책의 중심에 사기업의 국유화와 공동경영 전환정책이 있다.

반정부 총파업 혹은 재정·경제위기 등의 사유로 폐쇄된 노동자들이 점거하여 자주관리하며 정부를 향해 국유화를 요구하자 차베스 정부는 심사를 거쳐 일부 기업들을 국유화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국유화된 기업들은 석유산업, 전화통신산업, 전기산업, 철강산업, 금속산업, 제지산업, 식품산업 등 기산산업을 넘어 거의 모든 산업에 걸쳐 분포되어 있으며, 이들은 노동자와 정부의 공동경영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사기업에서 시작하여 노동자 통제를 거쳐 국유화된 기업들뿐만 아니라 알미늄회사 Alcasa처럼 국유기업이 공동경영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차베스는 노동계 일각에서 요구하는 석유산업과 기간산업의 전반적 국유화와 노동자 자주경영 전환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하는 한편, 자본이 국익과 사회주의 프로젝트를 따르는 한 사유재산제를 존중할 것임을 거듭 천명함으로써 변혁정책의 경계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3) 사회정책과 주체적 직접민주주의:이행주체의 형성

차베스 정부는 뻬레스· 깔데라 정부시기 연평균 10-11% 수준의 사회예산 지출규모를 점차 증대하여 2006년과 2007년에는 21%를 넘게 했다. 이 가운데 1/3 정도가 PDVSA에 의한 사회적 지출로서 제4공화국 시기 외국자본에 배당되거나 사내에 축적되었던 부분들을 차베스 정부들어 사회적 투자를 위해 지출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증대된 사회예산은 교육, 보건, 주거, 사회보장 서비스 등을 탈상품화함으로써 구매력이 낮은 도시빈민 등 중하층 시민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큰 혜택을 주게 되었다. 차베스 정부는 사회적 예산을 크게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달방식에서도 행정기구들의 고나료적 절차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수혜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도입하는 등 혁신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차베스 정부는 2003년부터 다양한 사회개발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운영했으며, 대표적인 영역들로 교육개발, 보건의료, 생필품유통을 꼽을 수 있다. 교육개발 프로그램은 문맹퇴치와 초등교육을 위한 미션 로빈슨, 중등교육 미이수자들의 재교육을 위한 미션 리바스, 대학수준의 고급교육을 제공하는 미션 수크레, 그리고 고용창출과 숙련형성을 위한 기술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8년 9월 현재 각종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110만명을 넘으며 이미 340만명 이상의 졸업자를 배출했다. 보건의료 프로그램은 2만명의 쿠바의사들을 초빙하고 인민병원과 빈민지역 의무실등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도시빈민 지역과 농촌지역 빈민층을 중심으로 기초의료와 일련의 특별치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 1, 2 프로그램을 통해 2003년부터 2008년 9월가지 시행된 보건의료 서비스 제공 건수는 3억 1,324건에 달한다. 생필품 유통은 Mercal이라는 국유 유통체인을 통해 식료품을 포함한 다양한 생필품들을 시장가격보다 40% 이상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2008년 현재 전국적으로 16,000여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증대된 사회예산과 사회개발 프로그램의 주된 수혜자는 도시와 농촌의 빈민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찹스 정부는 이들을 단순히 수동적인 복지서비스의 수혜자가 아니라 참여민주주의의 핵심적 주체로 형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구상은 ‘사회주의를 향한 5대 엔진’ 가운데 ‘권력의 새로운 기하학적 구도’와 ‘공동체 권력 강화’에 잘 나타나 있다. 국가권력의 행사가 권력을 중앙의 국가기구들이 아니라 공동체로 돌려주고 부동점 체제 하에서 국가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대표적 장치가 공동체위원회 제도이다.

공동체위원회는 도시지역에서는 200-400 가구, 농촌지역에서는 20-30가구 단위로 구성되며, 공동체 내 15세 이상 성인들로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시민총회를 구성하고, 집행기구는 공동체내 보건위원회 교육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들의 대표들로 구성한다. 공동체위원회는 중앙정부로부터 자원을 직접 수령하며, 자원의 운영방식은 시민총회가 결정한다. 지역사회의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주어진 자원을 이용하여 자체적으로 결정하여 해결하며, 쓰레기 수거에서 학교건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지역사회 현안을 다룬다. 공동체위원회는 w지방정부와 지방의회의 권력을 분점함으로써 반발을 사고 견제를 당하기도 하는 한편, 중앙정부로부터 직접 수령한 자원만 운영할 수 있을 뿐 지방정부 예산에 대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또한 공동체위원회는 대통령의 지시를 직접받는 한편 다른 정부기구들이나 지방자치단체 기구들과 연계관계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아서 여타 기구들의 협력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공동체위위원회는 참여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공간인 동시에 공동체 구성원들이 하나의 집합체로 형성되어 가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공동체구성원들이 이미 볼리바르 서클로 조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볼리바르 서클은 지역경계에 따라 통상 7-11명 단위로 조직된 차베스 지지자 네트워크 조직체로서 지역 공동체 내에서 차베스 지지자들을 동원하고 정치의식을 고양하는 한편 차베스 정권에 대한 지지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 이들은 2002년 4월 쿠데타 당시 대중적 동원을 통해 차베스를 복권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이후 전국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2002년 12월의 총파업 때에도 파업을 무력화·종료시키기 위해 경영진과 파업노동자들을 압박하는 동원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볼리바르 서클의 구성원들은 주로 비공식부문 쁘띠부르주아나 주변적 미조직 노동자들로서 도시 빈민층이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다.

 

98년 차베스 투표의향 <표1>과 2004년 도시지역 투표성향 <표2>를 비교하면, 하위층의 경우 차베스 지지율이 55%에서 64%로 9% 상승한 반면, 상위층의 경우 47%에서 31%로 16%포인트만큼 크게 하락함으로써 차베스 정권에 대한 공포심을 잘 보여준다.

98년 대선과 04년 소환투표의 도시지역 투표성향을 비교하면, 차베스의 지지율은 49%에서 54%로 5%포인트 소폭 상승했지만, 계층별 지지율 등락은 훨씬 더 큰 폭으로 이루어졌다. 극 uf과 상위층과 하위층의 차베스 지지율 격차는 98년 8%에서 04년 33%로 네배나 확대되었으며, 이는 차베스 정권을 둘러싼 정치적 양극화가 급격하게 진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4공화국 시기에는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크게 진전되었으나 정치적 양극화로 전환되지 않는 반면, 차베스 정권하에서는 사회졍제적 양극화는 후퇴했으나 정치세력화의 진전으로 인해 정치적 양극화가 급진전된 것이다.

 

1-4. 총괄

구지배세력이 국가권력을 부분적으로 상실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사적기업 시장경제, 가톨릭 교회, 유력 언론사들을 포함한 시민사회 주요 부분들을 장악하고 있고, 연방의회와 지방정부들을 분점하고 있다. 정치권력문제는 힘의 균형에서 우위정도의 차이에 불과할 뿐 쿠데타 등을 통한 사활을 건 투쟁의 핵심동기로 보기는 어렵다. 구지배세력의 기반을 구성하는 중산층 계급의 경우 제4공화국 하에서도 석유수입 증대에 힘입어 복지지출을 확대한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부의 재분배도 차베스 정권에 대한 핵심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다. 2001년 총파업의 명시적 요구사항이나 2002년 4월 쿠데타의 첫 번째 조치가 49개 특별법을 우선적으로 폐지한 것은 중상층 계급과 구지배세력이 49개 특별법을 통한 사유재산권의 침해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차베스의 변혁정책이 중상층계급의 공포심을 유발한 핵심요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중상층계급과 구지배세력의 차베스 정권에 대한 공포심의 중심에는 체제이행에 대한 공포심이 있으며, 그러한 공포심은 개인적 수준에서 정치권력과 물적 자원의 상실에 반발하는 개인적 합리성을 넘어서 체제이행에 반발하는 계급적, 집합적 합리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제4공화국 하에서는 AD, Copei의 양대 정당 엘리트들이 부동점 체제의 핵심을 구성하며 구지배세력을 주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베스에 의한 권력체제 재편과 의회 및 지바정부 내 영향력 약화로 차베스 정부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저지권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반면 자본가 계급과 그 조직체인 Fedecamaras는 기간산업의 사적 소유권과 석유산업에 대한 통제력에 기초하여 차베스 정부 하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저지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본가계급과 Fedecamara는 2001.12. 총파업을 포함한 일련의 자본주도 총파업 과정에서 저지권력을 행사하면서 구지배세력을 주도하게 되었다. 임시정부시기 양대정당은 재편된 권력체계를 부동점체제로 복원시키는 것에 우선권을 둔 반면, 까르모나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핵심세력은 49개 특별법을 폐지하고 사유재산권 원칙을 재확립하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재구축하는 데 우선권을 두었으며, 이처럼 자본가 계급과 그 정치적 대행자들이 구지배세력 즉 반차베스 진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정치권력 문제보다 체제이행 문제가 더 첨예한 쟁점으로 부각되게 되었다.(이상 조돈문, 2007)

 

2. 마이클 레보위츠의 서술과 주장

(민주주의 전투의 개시)

여기에 되풀이 하여 인간발전의 주제로 돌아가고, 인간잠재력의 실현을 위한 존엄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인간가족, 즉 권리와 의무의 평등, 연대, 공동의 노력, 상호이해, 상호존중에 기초한 인간가족의 개념을 체현하는 헌법이 있다. 연대, 사회적 책임과 인도적 지원의 미덕에 의해 사적인 개인들에게 능력에 따라 의무가 부여되는 사회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자신을 생각하는 새로운 볼리바르 주체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 정치적 영역(공적 업무의 운영을 형성 수행 통제하는데 대한 민중의 참여가 개인과 집단, 그들의 완전한 발전을 보장하는데 필요한 방식이다.)이 경제적 영역(자주관리, 공동경영, 금융적 성격의 것을 포함하여 모든 형태의 협동조합, 저축기금, 공동체기업, 그리고 상호협력과 영대의 가치에 의해 인도되는 다른 형태의 협회)에서 이것은 민주적, 참여적, 주체적 사회를 요구하는 사회, 주체로서 인간의 완전한 발전이 국가 정체성의 일부인 가치에 체현된 사회변혁의 과정에 대한 능동적 의식적 공동참여에 기초하는 것이 전제인 헌법이다.

이것은 자본의 언어가 아니다. 자본의 논리도 아니다. 헌법전체를 관통하는것 은 인간의 필요, 활동, 발전의 논리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반자본주의 헌법인가? 21세기 사회주의 헌법인가?

전혀 아니다. 볼리바르 헌법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핵심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헌법은 소유권을 보장하며, 성장과 고용을 창출함에 있어 사적 주도의 역할을 확인하고, 국가가 사적 주도를 촉진하도록 요청하며, 균형예산의 요구를 헌법에 명시하고 통화정책을 정식화하고 실행하는데,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의 자율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헌법은 자본주의를 상당히 뒷받침하는 한편, 민중이 권력의 대상이자 주체인 전복적 요소(인간발전과 민주적 참여적 주체적 사회에 대한 초점)를 포함한다.

볼리바르 헌법은 그 당시 세력균형의 한 장면을 반영한다고 인정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헌법은 모순적 또는 양립불가능한 요소들을 포함할 수 있다. 한편에서 자본의 논리에 대한 지지와 다른 한편에서 인간발전과 혁명적 실천에 대한 전복적 집중. 비록 이 특수한 결합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제3의 길이 가능하다는 차베스의 원래의 믿음과 일치함에도, 궁극적인 문제는 어느 요소가 승리할 것인가이며, 여전히 그러하다.

(경제의 지향)

2001-07년 국가발전계획에 제시된 원래의 경제적 방향을 보면, 지배적 경향은 분명하다. 베네수엘라는 경제를 다양화할 필요가 있었다. 경제균형을 획득하여 석유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나서 국내와 국제시장에 기여할 농업과 공업같은 부문들의 발전을 촉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계획은 전략적 산업에 국가의 참여와 함께 사적 주도와 투자에 의존함으로써 이를 획득할 수 있다고 제시되었다. 여기에 사회적 경제, 사적 부문과 공적 부문에 대한 대안적-보안적 경로, 가족 협동조합, 자주관리 소기업 구성된 부문이 추가되어야 했다.…

사실 한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은 민중들의 완전한 개인적 집단적 발전이 획득할 자주관리 및 협동적 활동에 대해 얼마나 적은 역활이 부여되었는지이다. 보여지는 사회적 경제의 단위들은 작았고, 자본의 민주화, 여성개발은행과 같은 기구들로부터의 소규모 대출을 통해 장려되는 것이었다. 규제와 세금부과를 축소하고 훈련을 제공함으로써, 비공식부문은 사회적 경제에 통합될 수 있다. 계획에 따르면, 비공식 노동자들을 소경영자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국가의 목적은 등장하는 경영계급을 창출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는 핵심에 있지 않았다. 경제를 변혁하려는 제안의 진정한 초첨은 국내외 민간자본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국가는 보다 유리한 투자조건을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금융적 안정성을 발전시키고, 천연자원의 가공을 위한 생산체인의 창출을 장려하고, 경영자본주의의 점증하는 민주화를 창출할 주식시장을 촉진하고, 환율을 안정시키고, 일반적으로 국내적으로 외국소유자의 투자에 대한 신뢰분위기를 발전시키는 것.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지만, 확실히 반자본주의적 대안은 아니었다. 이는 이 대안에 영감을 준 이론적 개념에서 볼 때 아주 분명하다.: 라틴 아메리카 경제학자들의 집단적 저작인 오스발도 순켈의 <<내부로부터의 발전: 라틴아메라카의 신구조주의적 접근을 위하여>>. 순켈의 설명에 따르면, 신구조주의는 정통 신보수주의적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서 등장했고, 라틴아메리카 저발전의 일차적 원인을 내생적 구조적 요인들로 인식한다. 발 이 문제들은 뿌리깊은 것이고, 주변적 구조조정에 의한 해결책을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가 능동적-역동적 역할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내향적으로 바라보면서, 과거에 수입되는 상품을 지역에서 생산되는 상품으로 대체함으로써(과거의 구조주의자들이 강조했던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가지로 그 전략은 현대적이고 경쟁적인 일국적 기업가 계급을 창출하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새로운 구조주의에서 국가의 지향은 국내자원을 동원하고 그 효과적인 결합에 대한 장애를 제거함으로써 내부로부터 발전의 토대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 내생적 발전을 위한 전략에서 능동적 국가는 공급측면을 작동하며, 이는 기업가로서가 아니라 촉진자로서 시장실패를 교정하고 테크놀로지의 발전, 생산성 증가와 축적을 장려할 것이다.

여기에 순켈의 제안대로 오늘날 산업화 축적, 기술발전의 발생과 확산,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본적 내생적 핵이라고 부르는 것을 창출하기 위한 필수적 축이라고 생각되는 산업들을 확립함으로써 시작하는 산업전략이 있었다. 그 목적은 지역시장에 기여할 뿐 아니라, 어렵지만 침투불가능하지는 않은 국제적 상황으로의 삽입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는 일국내 부문들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 비교우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써 기술진보의 축적과 창출의 내생적 메카니즘의 창출. 그책은 라틴아메리카 신구조주의에 의해 제안된 국가와 시장의 균형은 정부지원 자유시장전략이라고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베네수엘라의 내생적 발전에 대한 지속적 집중은 여기에서 기원한 것이다.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의 수립)

…2001년 11월 협동조합, 소규모 대부, 토지개혁, 어업, 석유에 대한 법률을 포함한 49개 법률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자본이 이끄는 반대파는 즉각 정부에 대한 공격을 가속화했다.

(급진적 내생적 발전)

베네수엘라늬 바람직한 발전경로(자본주의, 제3의길, 여러 종류의 사회주의)에 관한 어떤 현실주의적 토론도 베네수엘라인들의 필요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식품, 의료, 교육, 주거, 이를 뒷받침할 기반시설에 대한 다수의 기본적 필요는 압도적이다. 그런 필요의 충족은 많은 부분 베네수엘라인들이 볼리바르 혁명에 의해 정의하는 척도이다. 자본주의는 실패했다. 그러나 순켈롸 그의 동료들이 제시한 신구조주의적 대안은 베네수엘라의 발전을 위한 해법이 아니다.

베네수엘라는 일본과 한국의 특수한 자본주의적 기관들을 결여할 뿐만 아니라, 토지개혁과 교육투자의 결과인 상대적 소득평등도 결여하고 있었다. 오히려 베네수엘라는 빈곤, 광범위한 비공식부문, 엄청난 사회적 부채를 가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하나의 매우 중요한 내향적 요구가 있다.: 식량의 70%를 수입하게 된 나라로서 볼리바르 혁명은 식량주권을 발전시키고, 안정적 식량공급을 민중에게 보장할… 의무가 있다.

…기술적-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특수한 지역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통합한 내생적 발전의 핵은 지역공동체에 뿌리바Rf은 지속가능한 농업발전 프로그램이었다.

2004년 3월 미션 부엘반 카라스(얼굴을 돌려라)가 시작되었다.… 부엘반 카라스는 농업발전을 강조했다. 프로그램의 장학금 가운데 50%가 농업부문에 배정되었고, 30%는 산업활동에 배정되었다.(식품가공, 섬유, 신발 생산을 강조) 나머지는 관광 10%, 기반시설 5%, 서비스 5%에 분배되었다. 여기에서 명확한 개념은 새로운 인간능력과 기술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교육과 노동은 내생적 발전과정의 핵으로써 끊임없이 가조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주체의 형성은 단지 기술훈련을 통해 획득될 수 없다. 발 처음부터 부엘반 카라스는 협동과 자주관리 코스를 통해 민중들을 새로운 생산관계에 준비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생각하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간의 분열을 공격하고, 임금노동 자체를 거부하고, 집단적 소유를 강조하는 것이 이 과정의 모든 핵심적 부분이었다.

부엘반 카라스를 졸업하고 협동조합을 결성하는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대출과 기술지원(트랙터와 같은 생산수단을 포함하여)을 받는데 특혜를 주겠다고 약속했다.…2005년 8월에는 100만명에 가까운 조합원을 가진 거의 84,000개의 협동조합들이 있었다.

간단히 말해 부엘반 카라스의 특징은 단지 내생적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항상 내생적 발전과 사회적 경제의 특수한 결합과 연관되어 있었다. 헌법에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적 경제의 개념(자주관리, 공동경영, 민중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형태로서의 혀동조합에 대한 강조와 함께)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었고, 계속 진화하여 자본의 논리에 대한 보완물에서 점차 대안으로 발전했다

“사회적 경제는 그 논리를 인간, 노동, 즉 노동자와 노동자의 가족, 즉 인간에 기초하고 있다.” 이 사회적 경제는 또한 경제적 이득, 교환가치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경제는 주로 사용가치를 창출한다.” 그 목적은 “새로운 남성, 새로운 여성,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다.

그런데 이것이 부엘반 카라스가 등장한 상황이다. 교육과 노동의 결합은 자본의 논리에 대한 대안, 인간의 논리인 사회적 경제의 논리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베네수엘라에서 내생적 발전은 명확히 인간발전, 내부로부터의 진정한 발전으로 이해되었다. 교육과 노동은 인간능력을 발전시키는 과정이었고, 뿌리인 인간에게 다가가기 때문에 “근본적인 내생적 발전”으로 가장 잘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런 근본적인 내생적 발전은 사회의 생산관계의 근본적 변혁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협동, 연대, 주체적 민주주의, 집단적 소유의 원칙에 기초한 새로운 관계와 함께, 빈곤은 패배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서 빈곤을 종식시킬 수 없다고 차베스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점증하는 숫자의 베네수엘라인들은 민중들이 새로운 프로그램이 제공한 기회와 인센티브에 반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얼마 만큼의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가? 부엘반 카라스를 통해 양성된 새로운 협동조합들은 소규모이며(확실히 처음부터), 그 기원을 보면 축적과 성장의 주요한 원천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은 자본의 논리에 대한 대안의 소우주이다. 볼리바르혁명의 핵심을 드러내주고 정부가 헌법의 약속을 실현하는 데 헌신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좌파를 기다림: 조직된 노동자계급운동의 운동

 

시위, 차베스가 연설하는 집회, 바리오의 조직활동을 목격한 사람은 틀림없이 볼리바르 혁명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가난한 민중들(그리고 특히 여성들)임을 인식할 수 있다. 그들은 아주 처음부터 이것이 그들의 혁명임을 이해했고, 미션의 주요한 참가자들이었다.

다른 한편, 전통적인 조직된 노동자계급은 이 혁명에서 주체적이지 않았다(현재까지 계속 그렇다). 산업노동자들은 베네수엘라 제조업의 붕괴로 주변화되고 노조 조직화에 대한 사용자들의 저항으로 탄압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직된 노동자 일반의 지배적 목소리는 차베스의 선출과 통치에 반대하는 낡은 사회민주당이 통제하는 노동조합인 CTV였다. 비록 CTV에서 민주주의의 부재, 부패, 신자유주의 지지에 대해 반대가 있었지만, 이런 반대가 CTV의 사용자 지지와 직접적 단절의 형태로 결정화된 것은 2002-2003년 자본가들의 총파업이었다. “그동안 산업노동자계급이 잠자고 있던 것 같다”고 여성개발은행 총재 노라 카스타네다가 말했다. 새로운 석유 노동자들과 다른 여러 부문의 노동자들은 기업을 계속 가동시킬 힘이 있음을 증명했다. “이 순간부터 베네수엘라의 산업 노동자계급은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13]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신감의 분위기가 생겼고, 특히 공사를 잘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비용을 상당히 절감시켰다(추가적 비용없이)고 자신하는 PDVSA 노동자들 사이에 가장 명백했다. 현장마다 노동자들이 자주관리와 공동경영, 기업접수와 협동조합으로서의 운영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자본파업의 위협은 사라졌다. 굴복하는 대신에 노동자들은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2003년 4월 새로운 노동조합연맹을 창출하려는 과정이 시작되었고, 이 단체인 전국노동조합(UNT)은 8월초 창립대회를 가졌다. 여기에 120개 이상의 노동조합과 25개 지역연맹을 대표하는 1,300명 이상이 대표자들이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자주관리 사회로”의 변혁, “인간을 계급착취, 억압, 차별, 배제로부터 해방시키는 새로운 반자본주의적-자주적 발전모델”에 대한 분명한 호소가 제출되었다. 또한 “은행을 국유화하라! 폐쇄된 기업을 접수하여 노동자들이 경영하게 하라!, 노동자 통제 아래 새로운 기업을 창출하라!”는 구체적 요구들이 제출되었다.

폐쇄된 기업을 접수하는 것은 명확히 추상적 요구가 아니었다. 많은 기업들이 석유총파업 동안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파업이 몇주 동안 계속될 예정이었지만, 나중에 폐쇄되었다(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임금체불을 남기면서). 카라보보 주의 제지회사인 베네팔은 1개월 전인 7월에 문을 닫았고, 노동자들의 대응은 공장을 점거하고 77일간 노동자 통제 아래 공장을 운영했다(지역사회와 지역 군사령관의 지지로). 비록 노동자들이 정부에 회사를 접수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에 이전하라고 요구했지만, 회사는 나중에 정부가 제공한 값싼 대부의 지원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되지 못했다. 2004년 9월 폐쇄했다가 다시 점거한 이후에, 베네팔은 정부에 의해 공익을 위해 접수된 최초의 민간기업이 되었다. 2005년 1월, 베네팔은 인베팔로 이름을 바꿨고, 국가가 50%, 노동자 협동조합이 49%를 소유하는 회사가 되었다. 그래서 베네수엘라 공동경영 형태의 하나가 시작되었다.

공동경영과 자주경영, 민중주도 일반에 대한 헌법의 지지, 새로운 생산관계에 대한 차베스의 강조를 고려하면, 조직노동자들이 동일한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어쨌든, 인간능력을 발전시키고 인간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주도력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산업체에서도 필요하지 않은가? 자본의 논리가 뿌리깊다는, 그것은 모든 곳에 침투해있지 않은가?

노동자경영에 대한 열광은 2004년 4월의 연대회의에서 명백했다. 자주관리에 대한 유고슬라비아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었던 교훈을 논의하는 외에도, 노동자들은 패널은 베네수엘라에서 노동자 통제를 위한 구체적 투쟁을 고려했다. 노동자들의 동기는 PDVSA 특히 “지도위원회”의 발제에서 분명했는데, 이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PDVSA를 경영한 노동자들의 경험(이사회에 의해 임명된 두 명의 노조 지도자들과 달리)에 기반했다.

동일한 열광과 자신감은 2005년 4월 연대회의의 노동자 패널에서 분명했다. 특히 베네팔의 접수와 함께 차베스가 폐쇄되거나 버려진 공장들을 접수하겠다고 되풀이하여 말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노동자들의 지도자들이 이 경로를 따를 것을 촉구한다”고 차베스는 말했고, 분명하게 다른 폐쇄된 기업들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할 것을 장려했다. 다른 경험들에 의해서도 단호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2003년 4월 시작된 공동경영의 사례는 국영 전력배급회사(CADAFE와 CADELA)인데 거기에서 민영화에 대한 투쟁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이 고양되었고, 새로운 사례인 국영 알루미늄회사인 ALCASA는 정부주도의 공동경영에 기초하여 재편되었다. 이런 경험들의 결합은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회의들은 생산의 공동경영이 볼리바르 혁명을 보장하고 공고화하는 데 필수적이며, 노동자들 사이에서 의식을 고양하는 중요하고, 그 목적은 “자본주의적 소유 및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노동이 자본에 대해 우위인 다른 관계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참석자들은 정부가 “국영회사들을 이 과정에 동참시키는 일정을 계속”하고 베네팔에서 시작된 과정을 계속할 것을 촉구하였다. 참석자들의 결론은 “노동자관리와 공동경영을 인도하는 원칙은 노동자들과 민중에게 권력을!”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2주후인 메이데이에, 노동자들은 “공동경영 없이 혁명은 없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대규모 행진을 했다. UNT가 주최한 행사의 주요 슬로건은 “공동경영은 혁명이다”와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은 볼리바르 혁명을 건설하고 있다”였다.

10개월 후에(이 글을 쓰는 시점에), 이 행진은 궁지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PDVSA 지도위원회들은 사실상 더 이상 존속하지 않게 되었고, CADAFE에서도 공동경영을 할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그리고 접수해야 할 800개 폐쇄기업들에 대한 UNT의 확인(그리고 노동자들이 주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정부 측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단지 몇 개의 회사들만 베네팔(인베팔)의 길을 따랐다.

만약 노동자경영이 볼리바르 혁명의 공고화와 21세기 사회의 건설에 핵심적 조건이라면, 이 외형적 정지의 순간이 심각한 문제이다. 여러 가지 요소가 많이 관련되어 있지만, 두 가지 문제가 개인들이나 베네수엘라에 특수한 것이라기보다 일반적인 것 같다. 한편에서, 일부에서 공동경영이 “전략산업”에서 설 자리가 없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다. 더 나아가, 심지어 암묵적 신조가 있는 곳에서도, 공동경영에 필수적인 조건, 즉 공동경영(즉, 노동자들이 결정하는 것의 결정적 중요성)을 신뢰하는 경영자들이 있어야 되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이런 저런 방식으로), 노동자경영의 진전을 없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임금노동자의 지위에 남을 것이다.

다른 측면에는 사회 내에의 연대에 대한 초점과 대립되는 노동자들의 자기이해의 문제가 있다. 특정한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자기이해에 대한 지향은 유고슬라비아 자주관리의 경우에 치명적인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연대의 부재는 2005년 연대회의에서 인베팔 대표자들의 발제에서 극적으로 표면화됐다. 우리 협동조합의 회사의 49% 소유에서 100%로 나아가길 원한다고 그는 지적했고, 이것이 다른 경우도 따라야할 일반적인 경우라고 옹호했다. 왜? 왜냐하면 협동조합은 세금을 납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4월 회의에서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에 의해 분명하게 거부되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기업이 국가에 속할 때에 노동자들이 회사를 운영하는 지식을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노동자들은 공공경영 또는 노동자관리 공장의 노동자들을 소소유자로 전환시키는 어떤 생각도 거부했다. 오히려, “이들 기업의 이윤이 새로운 사업적 벤쳐를 지향하는 대신에, 베네수엘라 민중의 광범한 부문의 빈곤을 역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사회적 기금의 일부가 되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사업벤처를 지향하지 않고 헌법에 수립된 민중주권의 보장자로서 노동자들의 역할을 행사는 것”이 공공경영 노동자들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노동자들 일반의 의식수준이 이 정도라면, 조직화된 노동자들과 비공식부문에 속한 노동자대중 간의 엄청난 격차에 대해 별로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장점거와 그에 이은 접수요구는 직업을 구하기 위한 방어적 행동이었고, 협동조합은 유리한 수단이었다. 이런 경향은 조직노동자들의 임금요구에 대한 강조, PDVSA 노동조합의 직업판매의 낡은 관행으로의 복귀는 일부 차베스주의자들이 조직된 노동자계급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특수한 이해를 지향한다고 믿도록 했다. 우리 노동조합들은 제4공화국에서 왔다고들 한다.

모순은 명백하다: 조직 노동자들 측에서 보면, 문제는 “관료들”이었다. 다른 측면에서, 노동자계급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노동귀족이었다. 그러나 일종의 모순해결을 가리키는 징후도 있다. 한 곳에서 공동경영이 성과를 내고 있다: 안데스의 국영전기배급회사인 CADELA.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노동자들은 지역공동체와 함께 일하고 봉사하는 데 헌신적이었다(차베스 이전의 시대에 민영화과정에 대한 투쟁에서 발전한 의식), (2) 노동자들에 의해 선출된 경영자들은 공동경영을 믿었다. 그러면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는가?

 

자본을 넘어

 

노동자경영과 노동자계급 전체의 필요에 봉사하는 결의가 동시에 존재하는 사회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노동자경영의 자기이해를 향한 경향에 대해 우려하는 한명의 차베스주의자는 대통령 자신이다. 비록 차베스가 되풀이하여 우리가 아직 건설하고자 하는 미래의 사회주의의 요소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진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의 사회주의 개념에 는 일관되고 핵심적인 특징이 있다: 공동체, 연대, 사회주의적 도덕의 필요성. 2005년 6월 20일 파라과이에서 그는 선언했다. “우리에게 사회주의적 도덕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가능하지 않다.” 서로 공유하고, 공동체에 살고, “우리 모두를 단결시키는 분리불가능한 유대”를 느끼고, 사랑, 부에 대한 야망과 이기심(“얼마나 뿌리깊은 것인가!”)을 버리는 것의 가치, 이런 것들이 사회주의적 도덕, 사회주의적 윤리의 개념들이다.⋯

그것은 상품교환에 기초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에 대한 메자로스의 비판이었다. 맑스가 <그룬트리세>에서 묘사한 공동체 사회는 사물의 교환이 아니라 활동의 교환, 공동체의 필요와 공동체의 목적에 의해 결정되는 활동의 교환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메자로스는 지적했다. 이것이 체제의 “아르키메데스의 점”이라고 메자로스는 강조했다. 우리가 교환을 위해 생산하는 한, 우리들 사이의 관계는 숨겨지고, 우리는 지배로부터 피할 수 없다.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교환, “개인들이 활동하는 인간으로의 필요에 따라 참여하는” 활동의 교환을 필요로 한다. 이런 교환의 공동체적 필요와 공동체적 목적에 기반한 교환으로의 근본적인 재정향은 진정한 계획, 위로부터의 계획이 아니라 “조정된 사회적 자기관리”의 발전이다.

 

사회주의의 재창조

 

“우리는 사회주의를 재창조해야 한다”고 차베스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2005년 세계사회포럼의 폐막연설에서 선언했다. “그것은 소련에서 우리가 보았던 종류의 사회주의 일 수 없지만, 그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에 기초한 새로운 체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세계의 다수의 빈곤을 종식시키고자 한다면 자본주의를 초월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소련과 동일한 왜곡인 국가자본주의에 호소할 수 없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하나의 테제, 하나의 프로젝트이자 하나의 경로로서 복원해야 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사회주의, 모든 것보다 기계나 국가가 아니라 인간을 앞에 놓는 인간적 사회주의를 복원해야 한다.”…

베네수엘라 내부에서도 약속이 있다. 미션들에 의해 빈민들에게 제공된 이득은 볼리바르 혁명의 가장 구체적인 효과이다. 그러나 이런 성과를 비전으로 승화시키고 그것이 더 나은 세계로 가는 길에서 첫걸음임을 보여준 것은 헌법에 체현된 존엄성, 인간발전, 주체적 민주주의의 개념들이다. 차베스 연설의 결과, 더욱더 많은 베네수엘라인들에게 새로운 세계가 자본의 논리의 거부와 사회적 경제의 포용의 논리적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적 사회주의, 21세기의 사회주의로.

그런 약속은 현실화될 수 있는가? 베네수엘라의 첫걸음은 기존의 국가에 대한 통제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어떤 시인들의 아름다운 관념과는 반대로,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 국가는 이제 새로운 생산관계의 기초를 창출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다. 처음에는 석유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을 재장악하고(과거의 PDVSA 경영진으로부터, 그리고 또 외주 생산을 초국적 기업과의 공동벤처를 통해), 다음으로 석유수입을 협동조합들의 발전과 국유산업의 확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법령에 의해, 두 가지 소유형태가 사적 자본(현재까지 특히 미디어, 은행, 통신, 식품가공 등의 고립영역을 유지하는)에 비해 확대하고 있다

국영산업과 협동조합의 결합은 베네수엘라에서 현재 가시화되는 새로운 생산모델의 기초가 되고 있다. 기초산업, 통신, 항공(여기에 트랙터, 자동차, 철도, 인공위성, 가공식품생산과 같은 영역에서 다른 나라 국영기업들과의 공동벤처)의 새로운 국영기업들은 현대적 테크놀로지를 통합하고 경제발전을 촉발할 새로운 세력으로 인식된다. 이런 국영기업들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공급자이자 가공처리자로서 새로운 생산체인의 일부로 클러스터화 된 것이 사회적 생산기업들로 재구성된 협동조합들이다. 따라서 “두 다리로 걷는다”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대기업과 소기업, 국영기업과 사회적 생산기업, 집중적 발전과 포괄적 발전.

이런 프로젝트들은 새로운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석유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부터 탈피하는 기초를 창출하고, 실업자들과 배제계층에게 새로운 직업을 창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주의인가? 이것이 건설되고 있는 사회주의적 관계인가? 법률적 소유권과 생산관계는 어쨌든 동일한 것이 아니다. 1장에서 지적했듯이, 생산자로부터 생산수단의 분리와 함께 일어났던 소유권의 결렬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조건이었다. 자본가들이 생산을 소유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생산을 지휘하는 것이 필요했다.

국영기업은 그 성격상 국가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일 수 있다. 그리고 협동조합들은 집단적 자기이해 또는 공동체의 필요에 기초할 수 있다. 구별점은 차베스가 인정했던 바이다.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 그리고 사회적 생산기업(EPS)의 발전개념에서. 어쨌든, 조합원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운영되는 협동조합들이 있지만, 아직은 부족한 것으로 보였다 왜? 상품교환은 구매자와 판매자가 서로에 대해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활동의 교환에서 초점은 통합, 사회구성원들 간의 연대에 맞춰진다.

사회적 생산기업에 대한 현재의 토론에서(이 글을 쓰는 시점에도 상당한 논쟁이 벌어지는), 두가지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1) EPS와 그 핵심축을 구성하는 국영기업들 간의 관계, (2) EPS와 공동체들 간의 관계. 국영기업/EPS 축의 경우, 상품관계의 거부는 이 생산단위들이 독립적이지 않고, 전체의 부분을 이루며, 이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특정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집단적 노동자 그룹이라는 주장이다. EPS/공동체 연계에서, 초점은 “생산과 소비의 공동체 체계”, 공동체적 필요와 생산활동의 직접적 결합의 창출에 맞춰진다.

두가지 경우에 전제는 민주적 의사결정이다: 집단적 생산자가 “권력의 대상이자 주체”인 관계의 발전. 공동체들이 자신의 필요를 집단적으로 확인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만큼, 공동체적 필요와 공동체적 목적에 진정으로 기초한 생산활동의 기초가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영기업의 생산자들이 자신들 사이에서 그리고 EPS 생산자들과 함께 계획된 활동에 대해 결정하는 만큼, 그들의 활동은 사회의 필요에 기여함에 있어 협력과 연대에 기초한 것이다. 공동체의 주체적 민주주의와 현장의 주체적 민주주의의 이 특수한 결합은 생산단위와 사회의 연대를 생산단위 자체로 통합한다(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것의 부재가 유고슬라비아의 문제였다).

여기에 민중들이 상황을 변혁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변혁할 수 있는 틀이 있다. 현장과 지역사회에서 권력의 주체로 기능함으로써, 민중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리고 맑스가 언급했듯이, 이런 발전은 생산적 노동력 그 자체에 대해 최대의 생산력으로 반응한다. 이런 인간 생산력의 성장은 “새로운 유형의 사회주의, 모든 것에 앞서 기계나 국가 아닌 인간을 우선하는 인간적 사회주의”의 핵심이다.

 

볼리바르 혁명은 어느 길을 갈 것인가?

 

볼리바르 혁명이 발전시킨 두 가지 기관은 이 비전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공동체 수준에서, 공동체 평의회(도시지역에서 200~400 가구, 농촌지역에서 20가구에 기반한)의 창출이 공동체의 필요와 우선순위를 민주적으로 진단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장수준에서, 국영기업에서 공동경영의 발전. 이는 기업과 사회 간의 연계를 강조하는 공동경영의 독특한 베네수엘라적 개념으로, 노동자들이 전체사회의 이익에 부합하게 기업을 운영하고, 자신을 “민중주권의 보장자”로 간주한다.

이런 새로운 요소들의 출현은 하나의 과정, 학습과정이자 발전과정이다. 민중들은 활동을 통해 발전하기 때문에, 공동체와 현장에서 주체적 민주주의는 그들을 변화시키고, 장기적으로 그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노동자들과 사회의 특수한 파트너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두 기관들의 발전에 대한 반대는 있다. ALCASA와 CADELA에서 공동경영이 전진한 반면, 다른 곳의 경영(정부 자체를 포함한)에서 노동자관리를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 확실히 그들은 노동자들이 사소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예를 들어, CADELA의 경우처럼 크리스마스 장식의 선택), 중요한 결정은 안전한 손(그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된다고 믿는다.

동일한 지향은 공동체 평의회에서 진정한 결정권한의 발전에 저항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경제적 결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외에도 추가적인 요소가 있다. 기존의 국가 공직자들과 차베스파 정당의 관료들 사이에, 권력의 하향이전에 대한 일정한 저항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위로부터 직업과 선물을 분해할 능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전통적 형태의 선거행위와 부패에 영향을 준다).

간단히 말해 베네수엘라에서 경제혁명은 시작되었지만, 정치혁명(새로운 헌법과 함께 극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권력이 아래로부터 나오는 국가로의 변혁을 요구하는)과 문화혁명(지속적인 형태의 부패와 후견주의에 대한 진지한 공격을 요구하는)은 한참 뒤처져 있다. 이 두 전선에서 전진이 없다면, 볼리바르 혁명은 훼손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국영기업에서 위로부터 서열제와 권력의 유지의 함의를 고려해 보라. 즉각적인 결과는 혁명이 현장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노동자들의 실망이다(반면 신념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냉소와 무관심을 갖게 된다). 그 결과는 소외의 강화이며, 따라서 사회에 대해 기존의 지식과 인식, 노동들의 잠재력 성장의 상실, 간단히 말해 인간 생산력의 상실이다. 민주적, 참여적, 주체적 생산이 없다면, 민중들은 자본주의가 생산한 파편화된 불구의 인간으로 남아있다.

사회의 결정적인 문제들에 대해 노동자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서 수행하는 적대적 역할을 계속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셈이다: 임금인상, 수당인상과 특권, 노동시간의 감소와 노동강도 완화를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출 것. 낡은 사회의 모든 자기중심적 경향을 강화하고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침해하게 된다. 그 논리는 사회적 프로그램과 새로운 생산력의 발전에 헌신하기 위해 잉여를 최대화하려는 욕망인가? 인간능력과 역량의 발전을 제한함으로써 잉여를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신을 위해 임금인상을 요구하도록 보장하게 된다. 전략적 산업에 공동경영의 자리는 없다는 동일한 논리는 그 부문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의 자리가 없다는 입장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련의 왜곡”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

국영기업내 서열제의 문제도 기업 자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국영기업내 서열관계는 그들과 사회적 생산기업들 간의 관계로 확장되지 않을 수 없다. 결정이 위에서 내려지는 기업과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업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민주적 토론이 있을 수 있는가? 이 관계에서, 후자는 결정을 내릴 독립적 집단도 집단 전체에서 민주적 주체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활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생산단위로 전환된다. 어떤 시점에 EPS 구성원들이 자신을 단순히 집단적 임금노동자들로 보게 될 것인가?

비슷하게, 지역공동체의 필요를 확인하는 진정한 기관이 부재하면, 누가 그들의 필요에 대해 결정할 것인가? 지역의 당간부?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생산은 어떠한가? 메자로스가 묘사한 “조정된 사회적 자주관리”보다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기업들(협동조합, EPS, 국영기업)에 의해 결정될 것이며,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 입증은 단지 “세금”, 사업비용이 될 것인가. 그것이 공동체의 필요와 목적을 위한 생산을 의미하는가?…

볼리바르 혁명은 어느 길을 갈 것인가?

 

볼리바르 혁명이 발전시킨 두 가지 기관은 이 비전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공동체 수준에서, 공동체 평의회(도시지역에서 200~400 가구, 농촌지역에서 20가구에 기반한)의 창출이 공동체의 필요와 우선순위를 민주적으로 진단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장수준에서, 국영기업에서 공동경영의 발전. 이는 기업과 사회 간의 연계를 강조하는 공동경영의 독특한 베네수엘라적 개념으로, 노동자들이 전체사회의 이익에 부합하게 기업을 운영하고, 자신을 “민중주권의 보장자”로 간주한다.

이런 새로운 요소들의 출현은 하나의 과정, 학습과정이자 발전과정이다. 민중들은 활동을 통해 발전하기 때문에, 공동체와 현장에서 주체적 민주주의는 그들을 변화시키고, 장기적으로 그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노동자들과 사회의 특수한 파트너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두 기관들의 발전에 대한 반대는 있다. ALCASA와 CADELA에서 공동경영이 전진한 반면, 다른 곳의 경영(정부 자체를 포함한)에서 노동자관리를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 확실히 그들은 노동자들이 사소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예를 들어, CADELA의 경우처럼 크리스마스 장식의 선택), 중요한 결정은 안전한 손(그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된다고 믿는다.

동일한 지향은 공동체 평의회에서 진정한 결정권한의 발전에 저항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경제적 결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외에도 추가적인 요소가 있다. 기존의 국가 공직자들와 차베스파 정당의 관료들 사이에, 권력의 하향이전에 대한 일정한 저항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위로부터 직업과 선물을 분해할 능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전통적 형태의 선거행위와 부패에 영향을 준다).

간단히 말해 베네수엘라에서 경제혁명은 시작되었지만, 정치혁명(새로운 헌법과 함께 극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권력이 아래로부터 나오는 국가로의 변혁을 요구하는)과 문화혁명(지속적인 형태의 부패와 후견주의에 대한 진지한 공격을 요구하는)은 한참 뒤처져 있다. 이 두 전선에서 전진이 없다면, 볼리바르 혁명은 훼손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국영기업에서 위로부터 서열제와 권력의 유지의 함의를 고려해 보라. 즉각적인 결과는 혁명이 현장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노동자들의 실망이다(반면 신념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냉소와 무관심을 갖게된다). 그 결과는 소외의 강화이며, 따라서 사회에 대해 기존의 지식과 인식, 노동들의 잠재력 성장의 상실, 간단히 말해 인간 생산력의 상실이다. 민주적, 참여적, 주체적 생산이 없다면, 민중들은 자본주의가 생산한 파편화된 불구의 인간으로 남아있다.

사회의 결정적인 문제들에 대해 노동자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서 수행하는 적대적 역할을 계속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셈이다: 임금인상, 수당인상과 특권, 노동시간의 감소와 노동강도 완화를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출 것. 낡은 사회의 모든 자기중심적 경향을 강화하고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침해하게 된다. 그 논리는 사회적 프로그램과 새로운 생산력의 발전에 헌신하기 위해 잉여를 최대화하려는 욕망인가? 인간능력과 역량의 발전을 제한함으로써 잉여를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신을 위해 임금인상을 요구하도록 보장하게 된다. 전략적 산업에 공동경영의 자리는 없다는 동일한 논리는 그 부문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의 자리가 없다는 입장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련의 왜곡”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

국영기업내 서열제의 문제도 기업 자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국영기업내 서열관계는 그들과 사회적 생산기업들 간의 관계로 확장되지 않을 수 없다. 결정이 위에서 내려지는 기업과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업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민주적 토론이 있을 수 있는가? 이 관계에서, 후자는 결정을 내릴 독립적 집단도 집단 전체에서 민주적 주체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활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생산단위로 전환된다. 어떤 시점에 EPS 구성원들이 자신을 단순히 집단적 임금노동자들로 보게 될 것인가?

비슷하게, 지역공동체의 필요를 확인하는 진정한 기관이 부재하면, 누가 그들의 필요에 대해 결정할 것인가? 지역의 당간부?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생산은 어떠한가? 메자로스가 묘사한 “조정된 사회적 자주관리”보다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기업들(협동조합, EPS, 국영기업)에 의해 결정될 것이며,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 입증은 단지 “세금”, 사업비용이 될 것인가. 그것이 공동체의 필요와 목적을 위한 생산을 의미하는가?

 

베네수엘라를 넘어

 

볼리바르혁명은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투쟁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내부적 문제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일반은 이 혁명이 대표하는 것 때문에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어쨌든 볼리바르 혁명은 그 의제에서 인간의 필요와 인간발전에 초점을 맞춘다. 혁명은 사회주의가 목적이 아니라고 상기시켰다. 오히려, 목적은 인간잠재력의 완전한 발전이다. 사회주의는 그 목적으로 가는 경로이다. 유일한 경로.

자본주는 가장 분명히 그 경로가 아니다. 바로 자본의 논리는 노동자들을 그들의 생산물로부터, 그들의 공동체로부터, 서로에게 분리시킨다. 자본주의는 그 본성에 의해 집단적 노동자를 분열시키고, 인류를 분열시킨다.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계속 인간협력의 열매를 독식하려면 그래야만 한다. 자본의 목적이 잉여가치의 증가, 자본 자체의 성장이기 때문에, 자본은 노동자의 발전의 필요가 지배하는 사회의 생산물로서 맑스가 시각화했던 인간을 결코 생산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필요와 인간발전을 강조하는 비전을 가진 볼리바르 혁명은 맑스주의를 다시 의제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맑스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맑스가 <자본>을 쓸 때의 전제가 진정한 부는 인간의 부, 인간능력, 역량이라는 이해였다고 이전하는 맑스주의. (이 점을 이해하면 틀림없이 <자본>의 첫 문장에 나오는 맑스의 비난, 즉 부가 엄청난 상품의 집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혁명은 실천의 중심성에 관심을 집중한다: 민중들은 상황을 변혁하는 과정에서 활동을 통해 자신을 변혁한다는 맑스의 핵심 포인트.

이런 측면에서, 볼리바르 혁명은 체 게바라의 맑스주의를 다시 불러냈다. 특히 낡은 사회의 카테고리, 특히 물질적 이해의 지렛대를 제거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새로운 인간을 건설할 것이 필요하다는 게바라의 인식. 어떤 종류의 생산관계가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가? 체 게바라는 이것이 소외된 관계일 수 없고, 집단적 노동자가 숨겨지는 관계일 수 없다고 이해했다. 그것은 투명한 관계, 연대에 기초한, 따라서 사회 내에서 더 많은 연대를 건설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새로운 사회관계, 민중의 통일성에 대한 의식(맑스가 묘사한 차이의 인정에 기초한 통일성)에 기초한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체 게바라는 이런 의식은 발전이 물질적 인센티브보다 생산의 발전에 더 많은 것을 한다고 주장했다. 공동체의 필요를 위한 생산, 상품(분리의 개념에서 시작하는)이 아닌 활동의 교환에 대한 토론에서, 체 게바라의 맑스주의는 볼리바르혁명, 인간발전에 초점을 맞춘 혁명, 근본적 필요의 혁명에 체현되어 있다.

베네수엘라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석유자원이 분명히 떠오른다(엄청난 사회적 부채가 그렇듯이). 그러나 볼리바르혁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구체적으로 베네수엘라와 별로 관계가 없다. 인간발전, 근본적 필요를 위한 투쟁, 주체적 민주주의(현장과 공동체 내에서)의 중심성, 민중들이 정의와 존엄을 위해 투쟁하면서 변혁된다는 이해, 민주주의 실천이며, 사회주의와 주체적 민주주의는 하나라는 이해, 이런 것들이 새로운 인간적 사회주의, 모든 곳에서 21세기 사회주의의 특징이다.(이상 레보위츠, 2006)

 

3. 조지프 추나라의 주장

볼리바르식 혁명은 근본적으로 모호하다…. 누가 혁명의 주체인가? 차베스의 정치는 자신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해서 위로부터 개혁을 선사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는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현실이 날마다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에서 우리의 목표가 사적소유 폐지나 계급없는 사회의 건설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선사한 개혁들은 다시 빼앗길 수 있고, 지금까지 그런 개혁들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은 고유가에 달려 있었다. 만약 유가가 하락하거나 사회하층민의 기대가 석유자원만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면, 여전히 베네수엘라 자본가 계급의 손으로 들어가는 이윤을 둘러싸고 투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미션들이 비록 인상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베네수엘라늬 심각한 계급불평등을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그런 미션들이 극빈층에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노동자들이 창출하고 소수의 자본가 특권층이 지배하는 부를 되찾아오지는 못했다.

마르타 하네커는 “지금 사적소유를 공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 급진적 구호들은 실제 상황에 대한 분석과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빈곤을 제거하려면 생산적 고용을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중이나 국민에세 유익한 발전을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 혁명적 과정을 진전시켜온 계급분열을 은폐할 수 있다. 혁명적 과정은 권력-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 둘 다-이 사회 하층민들에게 이양될 가능성과 베네수엘라 전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투쟁들과 창의적 행동들이 기존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볼리바르식 혁명은 혁명의 목표가 단지 신자유주의의 일부 폐해들을 바로잡는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착취체제 전체에 도전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회피한다….

지배계급은 단지 경제권력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국가권력도 갖고 있다. 대통령, 내각, 의회 등 눈에 잘 보이는 국가기관들 배후에는 산출되지 않은 위계구조들이 버티고 있다. 전세계의 지배계급은 모두 자신들의 지배를 실현하기 위해 공무원들, 사법부, 군대, 경찰같은 위계구조들의 원활한 기능에 의존한다….

베네수엘라 국가기구는 아래로부터의 운동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베네수엘라 국가는 지난 몇 년 동안의 사건들 때문에 파편화했지만, 아직 분쇄되지는 않았다. 운동은 그런 국가기구가 개혁을 시행하도록 한동안 강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에 의존해 근본적으로 사회를 변혁하려 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이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l 국가를 무시하거나 국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소수 자본가 특권층의 권력이 집중되고 집적된 것이다… 사회 하층민이 국가권력을 분쇄하지 않는다면 모든 단계에서 그 국가권력이 위험요인으로 등장할 것이다.

헌법에 의존하는 위험성은 1973년 칠레의 경험에서 분명히 들어난다…. 차베스와 마찬가지로 앙ㄴ데도 일부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 사회지출 증가를 주장했다. 1972년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지배계급의 주요부문들이 기업주들의 파업을 조직했다. 그것은 2002년말 베네수엘라에서 조직된 직장폐쇄와 비슷했다. 노동자들은 그 파업에 대항하기 위해 코르돈이라는 독자적인 조직들을 건설했다. 여러 작업장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노동자 위원회인 코르돈은 아래로부터 생겨난 새로운 노동자 권력의 맹아였다. 1973년 6월의 쿠데타 기도를 좌절시킨 것은 대규모 거리시위였다. 그런 시위 때문에 군대가 분령했고, 지백급은 후퇴해야 했다.

한동안 코르돈이 칠레 사회를 운영하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토대가 된느 듯했다. 그러나 아옌데의 사회당은 노동자들에게 코르돈의 활동을 축소하라고, 그리고 헌법을 준수하는 군대에 의존하라고 설득했다. 아옌데는 서로 다른 사회세력들을 화해시키는 방안의 일환으로 심지어 피노체트 자운을 내각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한숨돌린 지배계급은 다시 조직화에 나섰고, 1973년 9월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성공시켜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아옌데와 수천명의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코르돈처럼 민주주의와 노동자투쟁의 힘을 표현하는 기구들은 20세기의 혁명적 위기상황에서 거듭거듭 나타났다. 1979년 이란 혁명 때는 ‘쇼라’라는 조직이 등장했고,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 때는 소비에트가 등장했다. 볼리비아에서는 2005년 6월 민중항쟁 때 주민자치 의회들이 등장해 안데스 산지의 원주민 지역사회 전통과 혁명적 노동조합주의 전통을 결합시켰다. 그런 기구들이 서로 연결된다면 자본주의 국가의 권력과 조직에 도전할 수 있는 대안적 노동자 권력을 형성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런 기구들은 이중권력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잠시 동안 노동자권력이 기존 사회통치기구들과 나란히 존재할 것이다. 만약 기존국가가 분쇄된다면 아래로부터 건설된 이 새로운 민주주의가 사회주의 사회의 토대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은 1973년의 칠레와 견줄만한 계급투쟁수준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고, 노동자 위원회들도 대규모로 건설되지 않았다. 그러나 직장폐쇄 기간과 그뒤의 경제적 혼란기에 문을 닫은 공장들을 접수한 노동자들의 경험은 가능성을 보여준다. 일부 혁명가들이 지도부에 포함된 새 노총 UNT는 그런 투쟁 속에서 등장했다. 베네수엘라 정부통계들을 보면 공공부문에서 체결된 새 단체협약의 4분의 3과 민간부문에서 체결된 새 단체협약의 저반이 UNT 산하 노조들과 체결된 것이다. 오늘날 몇몇 주요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공동경영을 하고 있고, UNT의 일부 노동자들은 완벽한 노동자 통제를 위해 애쓰고 있다….

인베팔 제지공장, 인베발 밸브공장, 인베텍스 섬유공장이 있다. 노동자 협동조합과 국가가 이 세공장의 지분을 각각 분할 소유하고 있다…. 국영부문에는 흥미로운 사례들이 두 건 있는데, 그것은 서로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는 유명한 알카사 알루미늄 공장이다. 이 공장의 공동경영을 주도한 측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기간산업을 담당하는 새 장관이었다. 노동자들은 알카사 공장에 대한 자신들의 부분적 통제력에 그저 감탄하고 있다…. 알카사 옆에 있는 또 다른 알루미늄 공장은 공동경영 방식으로 운영되지는 않지만 훨씬 더 효율적이다.

국영부문의 다른 흥미로운 사례는 전력공급 서비스이다. 노동자들은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던 전력공급 회사를 자신들이 더 잘 운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회사 지점 가운데 안데스 지역의 칼데라에 있는 지점은 그런 견해가 가장 강력하게 표명된 곳으로 아주 잘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카다페 지점은 그리 잘 운영되지 않는다. 그 회사를 운영하는 문제나 전략적 산업들을 노동자들이 통제해야하는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노동자들과 기업주들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다.

 

현재 가동이 중단된 다른 많은 공장들에서도 공동경영이나 노동자 통제를 둘러싼 투쟁들이 혁명적 과정의 발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할 가능성이 크다. 베네수엘라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통제가 국영석유회사로까지 확대돼야 할 것이다.석유산업 노동자들은 2002-3년 직장폐쇄 반대투쟁 당시 자신들의 힘과 주도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부는 재빨리 통제력을 회복한 뒤 전략적 산업들의 공동경영이 필ㅇ하다는 노동자들의 생각이 화간되지 못하도록 막았다.

차베스 정부는 또 조직 노동자 집단들, 예를 들어 임금과 노동조건을 둘러싸고 독자적 요구를 내건 공공부문 노동자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일부 차베스 지지자들은 이런 조직 노동자들과 훨씬 더 가난한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을 대배시킨다. 그러나 이른바 특권적 조직 노동자들이 누릴 수 있는 생활양식은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진짜 소수 특권층의 생활양식과 완전히 다르다. 2002-3년 기업주들의 직장폐쇄 당시 노동자들의 동원을 보면 사회를 나누는 핵심단층이 어떻게 형성돼 있는지 알 수 있다. …

라틴 아메리카의 새 정부들은 가끔 미국의 지배력에 대항했다. 양키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국내의 불평등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는 유용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반제국주의 주장은 일부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브라질의 거대 농업자본가들은 세계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 한다.

국제 좌파들은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한가지는 아주 분명하다. 우익 소수 특권층이 차베스를 전복하는 것은 운동에 재앙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가지 중요한 논쟁은 정치조직에 대한 논쟁이다. 차베스와 연계된 정당들은 혁명을 심화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차베스의 MVR은 의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정당이고 기성 정당 출신의 기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쫒는 해바라기처럼 MVR로 대거 몰려들었다. 차베스가 결성한 볼리바르 서클들은 근본적으로 위에서 내린 결정들을 집행하는 상명하달식 기구들이다. 지반선거에 출마할 친차베스 후보들을 위에서 선택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과 그들이 아래에서 선출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미 여러 차례 충돌이 있었다.

새 노총 UNT의 일부 사람들과 판자촌 조직가들은 정부의 주장과 무관하게 행동하는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노동계급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부문은 공장을 접수하고 공장위원회나 지역위원회를 설립해서 운동을 조정하고 일반 병사들을 설득해서 우리 VS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광범한 세력들에게 이런 전략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혁명명적 과정에 참가하는 가장 선진적인 인자들이 먼저 하나의 조직-혁명정당-으로 단결해서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 주변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도구와 주장으로 스스로 무장해야 한다.… 오직 그런 조직을 통해서만 혁명적 과정의 지지자들은 잘 조직된 지배계급과 국가기구의 중앙집권적 권력에 대항할 수 있다.(추나라, 2006)

 

4. 쟁점과 전망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조돈문의 글은 베네수엘라의 진행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한편 레보위츠는 기왕의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한 반성적 경험을 토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 사회주의적 가치를 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추나라는 혁명은 더 전진해야 하며 본격적 계급투쟁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추나라의 입장이 대체로 올바르다고 본다.

베네수엘라는 석유수출에 의존하는 경제라는 것, 그리고 그 이익을 소수의 특권층이 장악하였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세 속에서, 인구의 90% 가까이 도시화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도시빈민이라는 것, 특권층에 반발하는 도시빈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차베스가 정권을 잡았다는 것과 친민중적 정권이고 진보적 개혁정권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자본에 대한 공격은 시작되지 않았고, 여러 미션으로 민중들의 삶이 개선되고, 경제가 호전되며, 사회 양극화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고, 한편에서 공동경영과 노동자 통제와 공동체 위원회가 성장하고 있음도 사실이지만, 자본의 극복을 위한 공격은 시도되지 않았고, 따라서 정치적 양극화와 갈등을 내포하고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자본의 반격을 받을 위험이 잇다. 이 상황에서 과연 도시빈민으로 이루어진 민중들이 혁명을 수호할 수 있을 것인가는 미지수이다.

과연 공동체위원회가 민중의 대체권력으로 되고 있는가는 아주 의문이고 지방정부 즉 제도정치와 권력을 분점하는 자치기구라는 점이 문제이다. 제도와 관료제에 대한 투쟁없이 동반할 수 있다는 사고는 매우 위험하고 진정한 정치해방을 방해할 것이다. 또한 협동조합적 소유는 소부르주아적 의식을 잔존시킬 것이다. 공동경영 역시 집단적 이기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 유일하게 바람직한 것은 노동자 통제인데, 이는 제도를 장악한 차베스 권력과 갈등관계에 있다.

결국 현재의 상황은 계급의 발전과 투쟁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소부르주아 사회주의가 약간의 헤게모니를 쥐고 개혁을 추동하는 상황이지만, 노동자계급과 혁명정당이 성장되지 않는 한 이 혁명은 반전될 가능성이 있다. 즉 계급투쟁은 억제되고 이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점은 확실히 낭만적이고, 여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레보위츠의 시각에 동의할 수도 있겠지만, 레보위츠가 존중하는 그 가치는 현재와 같은 방법으로는 달성되기 어렵다. 그는 이점에서 반자본의 과제를 너무 탈계급적으로 보는 측면이 있다.

한편 현실의 상황은 도시빈민이 압도적이고, 괜찮은 일자리와 산업의 발전이 과제로 되어 있는 현실에서, 시장을 억압할 수는 없겠지만, 소유에 대한 제약이 없는 점과 혹은 협동조합적 소유의 고무는 분명 장애로 작용할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이기 때문에...

분명 권력과 소유는 총계급에게 맡겨져야 한다. 공동경영은 잘못된 방향이다. 자주관리를 허용하되 소유를 분점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거대기업의 생산설비는 당해 공장의 노동자들의 것이 아니라 총계급 혹은 사회적 소유이어야 한다. 사회주의에 21세기 사회주의란 없다. 자본주의가 바뀌지 않았는데, 20세기와 21세기의 자본주의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21세기 사회주의를 운운하며, 사회적 소유의 확립없이 착취와 소외가 없는 사회로 전진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결국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귀결될 것이다.

 참고문헌

조돈문, 2007.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의 변혁성과 체제이행의 정치”, <<동향과 전망>>, 77호

마이클 레보위츠, 2006.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원영수 옮김, 메이데이

조지프 추나라, 2006.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21세기의 혁명>>, 이수현 옮김, 다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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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혁명

국가와 혁명

 

들어가며

 

이 글에서는 국가와 혁명 그리고 이행기 국가와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와 레닌 등의 언급을 살펴보면서, 실천상의 함의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1. 사멸시켜야 하는 국가

 

“현대 산업과 세계시장이 확립되면서부터는 마침내 (부르주아지는) 스스로의 힘으로 현대의 대의제 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현대국가의 집행기구는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사를 관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다.”(공산주의자 선언)

 

“국가는 사회가 화해불가능한 자기모순관계에 빠져 있다는 점과 그 사회가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화해불가능한 적대감으로 분열됐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계급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이 계급들 간의 적대감으로 인하여 자신과 사회가 무익한 투쟁을 벌이지 않기 위해서는 외견상 사회 위에 군림하는 하나의 권력이, 즉 질서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 사회를 유지하고 계급간의 갈등을 조화시킬 권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 즉 사회로부터 나왔지만 사회보다 상부에 위치하며 사회로부터 그 자신을 점점 소외시키는 권력이 바로 국가인 것이다.…

계급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필연적으로 사멸한다. 그때의 사회는 생산자들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상호결합에 기초하여 생산관계를 재조직하게 될 것이며, 모든 국가기구들을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로, 즉 고대 박물관으로 보내어 물레나 청동도끼 옆에 나란히 전시하게 될 거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을 잡고 나서는 먼저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 또한 그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신을 폐지하고 모든 계급차별과 계급 적대감을 폐지하며 또한 국가로서의 국가를 폐지한다. … 마침내 국가가 진정 사회전체를 대표하게 될 때에 국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복종해야 할 그 어떠한 사회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그리고 현재와 같은 생산의 무정부성에 기초한 자신의 존립을 위한 개별적 투쟁과 이 투쟁에서 발생한 갈등 및 과잉생산 등이 계급통치와 함께 사라지게 되자마자, 복종을 위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되며, 그 어떤 특수한 강제권력 즉 국가는 필요없게 된다. 국가가 진정 사회전체를 대표하게 되고 사회전체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될 때, 제일 먼저 취하는 행동은 바로 국가로서의 최후의 독자적 활동으로 되어버릴 것이다. 차츰 모든 영역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에 대항 국가의 개입이 불필요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사멸하게 되는 것이다. 개별적 인간들로 구성되었던 정부는 자원에 대한 통제기능과 생산과정에 대한 관리기능으로 대체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하는 것이다.”(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사회적인 힘 즉 분업 속에 조건지워진 다양한 개인들의 협업에 의해서 성립한 다기한 생산력은 그 협업 자체가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성장적인 것이기에 이들 개인들에게 자신들의 단결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밖에 있는 하나의 낯선 힘으로 나타나는 바,…

오직 생산력들의 보편적인 발전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의 보편적 교류가 확립되며, 따라서 한편으로는 모든 민족들 속에 ‘무산자’대중이라는 현상이 동시에 만들어지고(보편적 경쟁) 각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의 변혁에 의존하도록 되어 결국에는 세계사적인 경험적으로 보편적인 개인들이 지역적 개인들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이것 없이는 1. 공산주의는 하나의 지역성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며, 2. 교류의 힘들 자체도 보편적인 힘들, 그리하여 견딜 수 없는 힘들로서 발전할 수 없을 것이고, 향토적 미신적 상황에 머무르고 말 것이며, 그리고 3. 교류의 모든 확장이 지역적 공산주의를 폐지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경험적으로는 오직 주된 민족들의 ‘일거의’또한 동시적인 행동으로서만 가능하며, 이는 생산력들의 보편적인 발전 및 그와 결부된 세계적 교류를 전제로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노동이 완전히 불안정한 처지에 놓이는 것은 세계시장을 전제로 한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트가 오직 세계사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음은 그들의 사업인 공산주의가 세계사적 존재 일반으로서만 현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토대, 즉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생산을 공산주의적으로 조절하고 그러한 조절을 통하여, 인간들이 그 자신들의 생산물에 관계할 적에 가지게 되는 낯설음을 철폐하는 것과 함께 수요 공급관계의 힘이 소멸되어버리는 일이, 인간이 다시 한 번 교환, 생산, 인간들의 서로서로에 대한 행위의 방식을 장악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공산주의적 혁명을 통하여 전면적인 의존성, 즉 개인들의 세계사적인 협업의 이 최초의 자연성장적 형태는, 인간 상호간의 작용으로부터 창출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힘으로서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 왔던 이러한 힘들에 대한 통제와 의식적 지배로 바뀌게 된다.”(독일 이데올로기)

 

이처럼 국가는 화해할 수 없는 계급적대의 산물이고, 따라서 계급적대가 종결되었을 때에만 그 필요성도 종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 특히 현대 자본주의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국가는 신분제 국가가 아니라 만인의 국가, 국민의 국가라는 외양과 형식을 가지고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1조의 가사처럼 모두의 국가 즉 보편성으로서의 국가를 형식으로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현대국가의 집행기구는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사를 관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다”는 맑스의 언급처럼 국가가 지배계급의 도구라는 입장도 있고, 국가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는 입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실천의 차이를 가져온다. 국가가 무계급적인 공간이고, 의회에서 다양한 세력이 각축하는 장이라면 개량의 여지도 있고, 평화적 이행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모두의 국가라는 형식 속에서 그들만의 이익이 관철되는, 즉 보편의 형식 속에서 특수의 이해가 관철되는 것은 본질과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겠고, 우연 속에서 관철되는 필연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즉 총자본의 이해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서 궁극적으로 관철된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을 본질로 환원하려는 태도도 문제이겠지만, 형식의 보편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부르주아지도 겉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모두의 국가라는 명제는 모두의 국가이어야 한다는 당위의 투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당위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투쟁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의 이용가능성을 열게 된다. 보편적 정의를 궁극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부르주아 국가의 허구를 폭로하는 데에 중요하다. 또 한편으로는 체제에 대한 환상 혹은 개량주의에 대한 환상을 없애기 위해서 항상 비타협적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고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본질을 폭로할 필요가 있다.

 

2. 혁명

 

“폭력혁명 없이 부르주아 국가를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대체할 수는 없다. 즉 국가 일반의 폐지는 사멸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국가와 혁명)

 

“공산주의 혁명은 전통적 소유관계와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혁명의 발전은 전통적인 사상과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을 포함한다.…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 민주주의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차로 일체의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총생산력을 가능한 한 빨리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조아적 생산조건에 대한 전제적 침해를 통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으로는 불충분하고 무리한 듯이 보이지만 발전해 가는 가운데 스스로를 뛰어 넘어 낡은 사회질서에 대한 더 이상의 침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조치, 생산양식을 전면적으로 혁명화하는 수단으로서 불가피한 조치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물론 나라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매우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잇을 것이다.

1. 토지소유를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한다.

2. 소득에 대해 높은 누진과세를 적용한다.

3. 모든 상속권을 폐지한다.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한다.

5.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6. 전달`운송 수단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7. 국가소유의 공장과 생산도구를 증대한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공동의 계획에 따라 토질을 개선한다.

8. 모두가 똑같이 노동의 의무를 진다. 특히 농업을 위한 산업군을 편성한다.

9.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한다. 인구를 전국적으로 보다 균등하게 분배함으로써 도시와 농촌간의 차별을 점차 폐지한다.

10. 공립학교에서 모든 어린이를 위한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현존하는 어린이의 공장노동을 폐지한다. 교육과 산업적 생산을 결합한다, 등등.

발전과정에서 계급적 차별이 없어지고 모든 생산이 광범위한 전국적 단체의 손에 집적되면 공권력은 정치적 성격을 잃게 된다. 이른바 정치권력이란 본래 단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조직된 힘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와의 싸움에서 상황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하게 되면, 또 혁명을 통해 지배계급으로 자라나고, 그 자체로 낡은 생산조건을 무력으로 없애버리게 되면,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 생산조건과 더불어 계급적대와 계급일반의 존재조건을 없애버리게 될 것이며, 또 그럼으로써 한 계급으로서 가지는 자신의 지배권도 폐지하게 될 것이다.”(공산주의자 선언)

 

“노동자 계급이 투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국에서 계급으로 조직되어야 하며, 국내가 그들의 투쟁의 직접적 무대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러한 한에서 그들의 계급투쟁은 내용상으로가 아니라 ‘공산주의당 선언’에 씌여 있듯이 ‘형식상으로’ 일국적이다.…

계급차이의 폐지와 더불어 그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사회적 및 정치적 불평등도 저절로 소멸한다는 점을 말해야 했다.”(고타강령 비판)

 

“즉 국가가 화해불가능한 계급적대감의 산물이고 사회의 상부에 위치하면서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점점 소외시키는’ 권력이라면,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창출했고, 또한 이러한 소외를 이루고 있는 몸체인 국가권력기구의 파괴를 통하지 않고서는 계급해방이 불가능하다는 명백한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 권력은 자신들 마음대로 사람들을 처분할 수 있는 감옥 등을 지닌 특수한 무장조직체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가 특수한 무장조직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모든 국가의 속성인 공권력은 무장한 대중과도, ‘자활적인 무장조직’과도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엥겔스에 의하면 부르주아 국가는 사멸되는 것이 아니라 폐지되는 것이다. 혁명 후에 사멸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 또는 준국가(semi-state)이다.”(국가와 혁명)

 

“인간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완벽한 양과 질의 먹을 것과 마실 것, 집과 옷을 조달할 수 없는 한 해방될 수 없다는 것. 해방은 하나의 역사적 행위이지 사상 속의 행위가 결코 아니다.

현실에 있어서, 그리고 실천적 유물론자들 즉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존 세계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 기존의 사태를 실천적으로 공격하고 변화시키는 것…

분업은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분할이 등장하는 시점으로부터 비로소 진정으로 분업이 된다.

특수이해와 공동이해 사이의 이러한 모순으로 말미암아 공동이해는 현실의 개인 및 전체 이해에서 분리된 채 국가로서 그리고 동시에 환상적 공동(체)성으로서 독자적 형태를 취한다…. 국가 내부의 모든 투쟁들, 민주제 귀족제, 군주제 사이의 투쟁, 선거권을 쟁취하려는 투쟁 등등은 상이한 계급들간의 현실적 투쟁들이 수행되는 환상적인 형태-일반적으로 보편적인 것은 공동적인 것의 환상에 불과하다-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를 추구하는 모든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처럼 비록 그들의 지배가 모든 낡은 사회 형태 전체와 지배 일반의 폐지의 조건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 계급의 이해를 다시 보편적인 것-정치적 지배를 추구하는 모든 계급은 최초의 순간에는 이를 지향해야 한다-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독일 이데올로기)

 

“지배계급의 사상들은 어떠한 시대에도 지배적 사상들이다. 즉 사회의 지배적 물질적 힘인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힘이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제 마음대로 처분하는 계급은 이로써 동시에 정신적 생산수단도 제 마음대로 처분하며, 그 결과 정신적 생산수단이 박탈된 계급의 사상들은 이로써 동시에 대체로 지배계급에 종속된다. 지배적인 사상들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들의 관념적 표현, 즉 사상들로서 파악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들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한 계급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관계들의 관념적 표현, 그러므로 그 지배계급의 지배사상 이상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모든 새로운 계급은 그들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반드시 그들의 이해를 사회의 모든 성원의 공동이해로서 제사할 필요가 있는 바, 그들의 사상들에 보편적인 형태를 부여하고 이것들을 유일하게 이성적이며 보편타당한 사상들로서 제시할 필요가 있다. 혁명을 일으키는 계급은 바로 그들이 하나의 계급에 대립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계급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전체의 대표자로서 등장하며, 그 유일한 지배계급에 맞서서 사회의 전체 대중으로 나타난다.”(독일 이데올로기)

 

“뿌리를 박은 현실주의적 파악을 다시 민주주의자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 익숙한 이데올로기적 권리설이나 다른 속임수를 통해 왜곡하려는 것이 얼마나 나쁜지…

이른바 분배를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도대체 잘못된 것이다.…

소비수단의 그때그때의 분배는 생산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 그런데 생산조건의 분배는 생산방식 자체의 특성이다.”(고타강령 비판)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생각은 “폭력혁명 없이 부르주아 국가를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대체할 수는 없다. 즉 국가 일반의 폐지는 사멸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공산주의 혁명은 전통적 소유관계와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혁명의 발전은 전통적인 사상과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을 포함한다.…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 민주주의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보았다.”라는 문장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모든 혁명은 궁극적으로는 폭력적인 투쟁이지만 평화적인 이행의 가능성을 소진한 후에야 폭력혁명이 현실성을 가지게 되고 선동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혁명은 현실대중의 공감과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할 때, 활동가가 아닌 대중에게 체제와의 모순을 심화시켜 노골적 적대의 국면으로 발전시키기 전에는 폭력이 공감을 받기 어렵다. 최선을 다한 비타협적 투쟁만이 이행의 전망을 열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남미 좌파정권의 집권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들이 자본주의를 부정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인가? 좌파의 제도내 집권은 이행에 유리한 고지임은 분명하다.

또한 혁명은 전통적인 소유관계와 사상과의 결별을 포함한다고 한다. 사적 소유의 사회적 소유로의 이행은 험난할 것이다. 인구의 3%도 안되는 자본가계급이지만 그들은 소부르주아지와 소유권 절대의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수많은 개미떼 주식투자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임대소득 혹은 불로소득으로 먹고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부득이 사회적 소유로의 이행은 단호하지만 점진적인 방식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대독점 자본과 금융자본이 해당될 것이고, 공공적 이익을 위해서 전기 수도 기타 통신과 같은 인프라 산업이 해당될 것이다. 또한 외국인 주식소유 비중도 문제가 된다. 결국 유상몰수 국유화의 방향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혁명 직후 자본의 사보타지나 저항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섬세한 계획이 필요하고, 혁명 이전에 대중의 광범한 요구로 되어야만 한다. 한국은 자본의 집중도가 높은 만큼 대독점자본만 국유화하면 혹은 재벌 소유지분만 국유화해도 경제에 있어서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낡은 사상과의 투쟁 혹은 헤게모니 영역에서의 투쟁은 매우 중요하다. 대중이 사회주의를 꿈도 안 꾸는데 어떻게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겠는가? 사회주의에 대한 일상적 선전 혹은 강령에 입각한 일상적이고 과감한 선전은 반공에 쩔은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고, 이점은 현장활동가들의 몫이라기보다는 유기적 지식인들의 몫이어야 한다. 이점에서 지식인들은 분발해야 한다.

또한 최근 ‘보장소득론(기본소득론)’ 혹은 ‘건강보험 하나로’ 등의 담론에서 보듯, 분배나 복지란 결국 계급투쟁의 결과임에도 자본의 부정이나 자본과의 적대적인 투쟁없이 조세만으로 무슨 복지를 이룰 수 있다고 헛소리를 하는 소부르주아지들이 있는데, 가차없는 사상투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대중에게 자본에 적대하고 사회주의를 꿈꾸게 하는 작업은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지겠지만, 전면적인 선동과 선전을 통해서도 이루어내야 할 작업이기도 하다.

 

3. 이행기 국가-프롤레타리아 독재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있다.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며,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다.”(고타강령 비판)

 

“노동계급에 의해 주도되는 혁명의 첫 단계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며, 민주주의를 위한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차적으로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박탈할 자신의 정치적 대권을 사용하게 될 것이며,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의 수중,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 집중시키게끔 자신의 정치적 대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총체적인 생산력을 가능한 한 급속하게 증대시킬 것이다.”(철학의 빈곤)

 

“맑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지 사멸해가고 있는 국가 즉 성립과 더불어 즉시 사멸해가기 시작하는, 사멸해 갈 수밖에 없는 국가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노동대중은 국가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만을 필요로 한다.

국가는 특수한 권력체이다. 그것은 계급억압의 수단인 폭력으로 조직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떠한 계급을 억압해야 하는가? 물론 오직 착취계급인 부르주아지뿐이다. 노동대중은 단지 착취자를 억압하기 위한 국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러한 억압을 지속할 수 있고 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국가만을 필요로 한다. 지속적으로 혁명적일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기 때문이며,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에 있어서 모든 노동대중과 피착취대중을 통일시킬 수 있고, 부르주아지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 곧 프롤레타리아 계급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타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만 즉 자신의 경제적 전제조건이 이러한 임무에 대한 사전 기초가 되며, 임무수행 가능성을 제공하고, 그 임무 성취에 필요한 권력이 주어지는 특수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나뉘어지고 농민층과 여타 쁘띠 부르주아지를 분열시키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함께 뭉치고 단결하고 자신을 조직화한다. 대규모 생산에서 담당하게 되는 경제적인 역할 적분에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모든 노동대중과 피착취대중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기존의 착취자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를 구성하는 작업에 있어서 농민과 쁘띠 부르주아지와 반프롤레타리아트 등의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 중앙집중화된 권력, 폭력의 조직화를 필요로 하게 된다.

노동자당을 교육함으로써 맑스주의는 권력을 쥘 수 있고. 전인민을 사회주의로 이끌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전위대를, 그리고 새로운 체계를 지도하고 조직할 수 있으며, 부르주아지 없이 그리고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모든 노동대중과 피착취대중이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스승과 안내자와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전위대를 교육하게 된다.”(국가와 혁명)

 

“보다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가 도래하기까지는, 노동정책과 소비정책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최고로 엄격한 통제가 요구된다고 사회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 통제는 자본가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의 수립과 함께 자본가들이 지니고 있던 생산수단의 몰수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관료로 이루어진 국가가 아닌 무장한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에 의해 실행되어야만 한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국가의 한 형태이다. 결론적으로 여타 모든 국가와 같이 민주주의는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권력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용을 표현해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의 평등에 대한 형식적 승인과 모든 시민이 국가의 구조를 결정하고 국가의 행정가일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지녔다는 사실에 대한 형식적인 승인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민주주의의 일정한 발전단계에서 민주주의는 처음에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투쟁을 치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융합되고, 이어 자본주의를 산산조각내며, 모든 부르주아 계급과 공화적인 부르주아지와 국가기구 그리고 상비군과 경찰과 관료제까지도 이 지구상에서 싹쓸어버리고 그 대신에 보다 민주적인 국가기구로, 그것도 모든 대중을 포함하는 시민군을 형성하는 무장한 노동자들이라는 측면에서 본 국가기구로 그것들을 대체하게 된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만약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이 국가의 행정업무에서 자기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면 자본주의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근거를 존속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진정으로 모두가 국가의 행정업무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전제조건을 창출한다. 이러한 전제조건들 중 일부 즉 일반적으로 일고 쓸 수 있는 능력은 대부분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미 획득되어졌고, 또한 우편업무 철도 대규모 공장 대규모 상업 은행 등의 거대하고 복잡하며 사회화된 장치에 의해서 수백만 노동자들의 훈련과 학습은 이미 이루어졌다.…

회계와 통제-이것은 초초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순탄한 노동과 적절한 기능을 위해 필요한 주된 것이다. 모든 시민은 무장된 노동자로 구성된 국가의 고용원으로 전환된다.”(국가와 혁명)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있다.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며,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다.”라는 문장을 도해하면, 자본주의 사회-> 혁명적 전환기(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대)->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의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주의 사회의 성립은 생산수단의 사회화 혹은 자본가 계급의 일소로 적대적 계급의 소멸을 지표로 삼는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 즉 낮은 단계에서도 아직 국가는 소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적 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란 부르주아적 권리가 완전히 소멸된 사회, 더 이상 억압이 필요없는 사회이고, 국가의 소멸이 완성된 사회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자본가 계급과 그 잔당과 그 사상이 힘을 쓰고 있는 한 계속되어야 한다. 분명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성립된 그 순간부터 소멸하기 시작하지만 착취계급과 반동계급에 대한 억압은 낮은 단계에까지 계속된다.

이행기의 국가 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기에 중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이다. 사회를 어떤 구성원리로 조직할 것인가?

 

4. 코뮌의 경험

 

“노동계급은 기존 국가기구를 쉽사리 장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휘두를 수도 없다.

코뮌은 각 지역에서 보통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지방자치 위원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은 책임성이 있었고 언제나 국민소환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적으로 코뮌 구성원의 대부분은 노동자들이거나 아니면 노동계급의 덕망있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자들이었다.…

그때까지 정부의 도구였던 경찰은 일시에 정치적 속성이 제거되었으며, 책임성있고 항상 소환될 수 있는 기구로 변했다. 행정부의 여타 모든 기관의 관리도 그렇게 변했다. 공화국은 코뮌의원 이하 모든 공직자들에게 노동자의 임금에 상응하는 보수를 지급했다. 국가기관의 고관이 지니고 잇던 특권과 대표에게 지불되던 고임금은 고관 자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져갔다. … 한꺼번에 상비군·경찰 등과 같은 구정부의 물리력 행사수단을 제거한 후에 코뮌은 즉시 정신적인 억압수단이었던 성직자 권력을 파괴해 나가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허울에 불과했던 독립성을 지니고 있던) 사법기관들도 그 거짓된 독립성을 잃었고, 그들은 인민에 의해 선출되고, 인민에 대해 책임을 지며, 국민소환의 대상이 되는 진정한 사법기관으로 변했다.”(프랑스의 내전)

 

“고급 국가관료의 급료를 노동자 임금 수준과 같이 낮춘 것은 ... (그것 말고는 어떻게 한 사람도 예외없이 대다수 및 인민대중 전체가 국가 기능의 수행을 인계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 문화는 대규모의 생산, 공장 철도, 우편제도, 전화시설 등을 창조해 왔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 기존의 국가권력의 대부분의 일이 단순화되고-등기나 정리나 점검하는 것처럼- 아주 간단해졌기 때문에, 교육받은 모든 사람이 쉽게 그러한 일을 할수 있게 되고, 평범한 노동자 임금 정도로 그러한 일이 수행될 수 있는 바, 이러한 기능들은 또한 기존의 모든 특권의 그늘과 관료적 위엄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예외없이 모든 관료는 항시 선출되고 국민의 소환에 복종하며, 그들의 급료는 일반 노동자 임금 수준으로 삭감되었다.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민주주의적 대책은 노동자와 대다수 농민의 이익을 통일 시키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교량 역할을 하게 된다.”(국가와 혁명)

 

“코뮌은 모든 부르주아 혁명의 슬로건이었던 값싼 정부를 두 가지 거대한 낭비의 원천이었던 군대와 관료제의 폐지를 통해서 현실화했다.…

코뮌은 단순한 의회가 아니라 활동하는 행정기관이면서 동시에 입법기관이어야만 했다.”(프랑스의 내전)

 

“코뮌은 부르주아 사회의 매판적이고 부패한 의회제도를 의사발표의 자유와 토론의 자유가 기만으로 전락되지 않는 기구로 대체했다. 그것은 곧 의회구성원 자신들이 일해야 하고, 그들 자신의 법에 따라 업무를 집행해야 하며, 실제로 얻어진 결과에 따라 스스로 평가하고, 그에 따라서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의기구는 잔존한다. 그러나 여기서 잔존하는 대의기구는 결코 입법과 행정의 노동을 분리시키거나 의원들의 특권적 지위와 같은 특수한 체계로서의 의회는 아니다. 우리는 대의없는 민주주의, 특히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도 없다.… 노동자들의 표나 얻으려는 단순한 선거가 아닌 우리의 진실되고 성실한 열망이라면 의회없는 민주주의가 상정될 수도 있고 상정되어야만 한다.…

관료제를 일시에 모든 곳에서 완전히 폐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유토피아일 뿐이다. 그러나 낡아빠진 관료기구를 일시에 때려부수고 모든 관료제의 점진적인 폐지를 가능케 할 새로운 것을 즉각 세워 나간다는 것은 결코 이상이 아니며, 그것이야말로 코뮌의 경험이 시사하는 바이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해야 할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임무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국가 행정의 기능을 단순화한다. 그것은 즉 지배함을 포기하고 (지배계급으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에 장애가 되는 모든 문제점들을 최소화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바, 그것은 곧 사회전체의 이름으로 ‘노동자들, 십장들 및 재정관리인들’을 고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며, 모든 행정기관과 모든 예속상태가 일시에 없어지리라는 몽상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임무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한 이와 같은 무정부주의적인 몽상은 전체적으로 맑스주의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단지 대중이 변할 때까지 사회주의 혁명을 연기하는 것에 일조하고 잇을 뿐이다. 반면에 우리는 현상태의 인민, 예속과 통제와 ‘십장들과 재정관리인들’을 떨쳐버릴 수 없는 현 상태의 인민과 더불어 사회주의 혁명을 꾀하고자 한다.

하지만 복종은 모든 피착취 노동대중의 전위 즉 프롤레타리아에게로만 행해져야 한다. 이것의 시작은 일시에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국가관료의 특수한 지배를, 십장들과 재정관리인들의 단순한 기능 즉 평균수준의 도시 거주자들의 능력과 노동자 임금만으로도 충분히 수행될 수 있는 기능으로 대체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이루어져야만 한다.

우리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이제까지 창출해 놓은 것을 토대로 하여 대규모 생산을 조직하게 될 것이고, 노동자로서 이제껏 쌓아온 경험을 신뢰하면서, 무장한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엄격하고 견고한 원칙들을 정립시켜 나갈 것이다. 우리는 국가관리의 역할을, 앞으로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언제나 해임시킬 수 있고, 우리들의 지시를 책임지고 단순히 수행만 하는 역할로 축소할 것이다.(물론 모든 종류의 방식과 수준의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대규모 생산에 기초한 그러한 출발은 자연스럽게 모든 관료제를 점진적으로 사멸시키고, 하나의 질서-인용부호 없는 질서, 임금농와 유사한 그 어떠한 것도 배태하지 않은 질서-를 점진적으로 창출하는 일로 일어질 것이고, 그 아래에서 통제와 계산의기능이 점점 단순해질 질서가 하나씩 하나씩 순차적으로 형성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것이 차츰 습관화되면, 마침내 공중의 특수부분으로 이루어졌던 특수한 기능으로서의 국가기구는 사라져버릴 것이다.”(국가와 혁명)

 

이상에서 알 수 있는 코뮌의 경험은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이고, 선출제와 소환제가 이루어졌으며, 보수 등에 있어서 탈특권의 원칙이 관철되었다는 것이다.

대중의 자기지배는 대리주의와 관료제에 대립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처럼 대의제는 유지된다. 그러나 피선출직은 선출한 시민들에게 복종한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사전사후 보고의무와 결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전문적 위임은 어떨 것인가? 분명 위임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역시나 대중의 통제 혹은 피선출직들의 통제에 의존할 것이다.

전문직과 관료제를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다. 실을 거둘 수 있는 세련된 통제의 방법론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코뮌의 구성원칙(의결과 집행의 통일체, 선출제와 소환제, 보수 등의 탈특권) 외에 필자는 탈특권과 탈권위의 헌신의 원칙을 추가하여 이러한 원칙에 입각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저항체를 대체권력의 맹아로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저항체만이 아니라 이행기의 생산현장과 사회적 조직의 모든 구성원칙으로써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을 필자는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을 추구하는 혁명적 민주주의’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원칙은 생산현장만 염두에 둔 평의회 민주주의와는 다른 한 차원 높은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전세계적으로 대중들의 봉기 뒤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혁명적인 대중기관들 즉 파리코뮌만이 아니라 동학혁명시의 집강소라든지, 광주항쟁시의 광장집회라든지 시민군, 러시아의 소비에트 등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대중의 혁명기관의 구성 원리는 이러한 4가지 원칙이 관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무장한 전인민의 국가라는 주장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군대가 장군과 장교들에게 맡겨져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국민의 군대에서 인민의 군대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시민들이 과연 현대와 같이 고도로 발달한 무장을 소유하고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첫째 군령과 군정의 분리부터 시작될 것이다. 러시아의 병사 소비에트는 군정에 있어서 소비에트가 통제하였다. 때로는 혁명 군사위원도 필요할 것이다. 전문가에 대한 대중의 통제는 군대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부딪치는 문제일 것이다. 병사들의 자주적인 통제가 필요하다.

 

5. 공산주의 사회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

 

“계급과 계급 적대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 우리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단체를 가지게 될 것이다.”(공산주의자 선언)

 

“사회적 총생산물에서 경제상의 필연(1. 소모된 생산수단의 보전분, 2. 확대재생산을 위한 부분, 3. 예비기금 또는 보험기금)을 먼저 제외하고, 사회적 공동부담(1. 일반관리비용, 2. 학교 등 공동의 수요, 3. 노동 무능력자 등을 위한 기금) 등을 제외하고, 노동제공에 비례하여 분배 받는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생산물의 가치로 나타나지 않는다. 노동수익도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는, 낡은 사회의 모반이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으로 아직도 둘러붙어있는 사회이다.

개별 생산자들 사이의 소비수단의 분배는 상품 등가물의 교환에서와 같은 동일한 원리가 지배한다. 생산자의 권리는 그의 노동제공에 비례한다. 내용상 불평등의 권리이다.…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서, 즉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욕구로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 넘치고 난 후에-그때 비로서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는 필요에 따라!”(고타강령 비판)

 

“생산수단은 이제 더 이상 개인들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그때에 생산수단은 전체사회에 속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의 그 어느 한 부분을 수행하고 있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은 사회로부터 자신이 얼마만큼의 노동을 했는가 하는 그 결과물에 대한 증명서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증명서를 가지고서 그는 공공 소비재 상점에서 그 노동에 상응하는 양만큼의 생산물들을 받게되는 것이다. 공공기금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의 일정부분을 공제한 후에, 그에 따라서 모든 노동자는 자신이 공제했던 만큼의 사회복지 혜택을 사회로부터 받게 된다.

모든 부분에서 평등이 극명하게 실현된다.…

맑스가 말하기를 우리는 분명히 동등한 권리를 여기서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부르주아적인 권리이며, 여타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불평등을 함축하고 있다고 했다. 모든 권리는 실제로 동일하지 않으며 서로 동등하지 않은 각기 다른 인민들에게 동등한 척도를 적용하고 있다. 그것은 곧 왜 동등한 권리가 평등의 장애이고 또 하나의 불평등인가 하는 이유가 된다. 사실 타인과 동일한 양의 사회적 노동을 수행하는 만인은 (위에서 언급한 공제를 한 후에) 사회적 생산의 균등한 몫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인민은 동일하지 않다. 즉 강한 자가 있는 반면 허약한 사람도 잇고, 결혼한 사람이 있는 반면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자녀를 많아 두고 적게 두고 등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흔히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공산주의 사회의 첫째 국면에서는 부르주아적 권리가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는다.…

동일한 양의 노동에 따른 동등한양의생산물이라는 사회주의의 원칙도 이미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가 실현된 것은 아니며, 불평등한 개인들에게 불동등한 양의 노동의 대가로 동등한 양의 생산물을 주는 부르주아적 권리도 아직 완전히 철폐된 것이 아니다.”(국가와 혁명)

 

“보다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즉 개인을 노동분업에 노예적으로 복종시키는 대립이 제거되고 그와 더불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간에 존재했던 대립이 제거된 후에 또한 노동이 생산만이 아니라 삶의 제1의 욕구가 된 후에 생산력이 개인의 전반적인 발전과 더불어서 신장되고 모든 협동적인 부의 신장이 보다 광범위하게 물결친 후에 -바로 그때에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지평은 그 조종을 울리게 되고, 사회는 자신의 진정한 기티아래 굳건하게 성립되는 바, 그 가치는 곧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가자는 필요에 따라!’가 될 것이다.”(고타강령비판)

 

“인간이 자연 성장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 따라서 특수이해와 공동이해간의 분열이 존재하는 한 그래서 활동이 자유의지에 의해서 분할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성장적으로 분할되어 있는 한, 인간 자신의 활동은 인간에 대립하는 낯선 힘, 인간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인간을 굴복시키는 힘으로 전화한다는 사실에 대한 최초의 실례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즉 노동이 배분되기 시작하자마자 모든 개인들은 그들에게 강요되는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특정한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게 된다…. 반면에 아무도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독일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사회는 인류의 이상이고, 끊임없이 그 실현방도와 구현의 형태를 탐구해야 할 주제이다.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의 표지는 정식화되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만큼 분배받는 사회에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로의 이행이 그것이다.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다툴 필요가 없을 것이고 부르주아적 권리도 소멸할 것이다.

문제는 역사적 사회주의가 생산력의 발달에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사장의 경쟁 속에서 무수한 낭비를 거쳐 생산력의 발전이 강요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사회는 무엇으로 생산력 발전의 추동력으로 삼을 것인가? 사회적 투자의 판단과 결정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일국의 혁명은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을 종식시키지 않는다.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의 변화만으로 이런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소유관계의 변화혹은 ‘어떻게’라는 문제만이 아니라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과연 상품이든 상품이 아니든 부르주아 사회와 똑같은 생산물을 생산해야할 것인가? 역사적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왜 그 사회에서는 소비재 생산의 발전을 이루지 못했는가? 과연 관료제 때문이었는가? 각 생산단위의 합리성은 부르주아 사회보다 발휘되지 않았다. 이 문제의 해결은 시장 혹은 시장 사회주의밖에 없는 것인가? 물론 전면적인 시장이 아니라 소비재에 한한 시장이기는 하지만... 경제는 합리적으로 조직될 필요가 있다. 의료나 교육 보육 노후와 같이 전 사회적으로 탈시장화하여 해결해야 할 영역이 있고, 전기 수도 에너지처럼 이윤이나 시장의 작용을 억제하는 국가적 관리가 가능하고 필요한 분야가 있다. 그러나 의류나 먹거리 가전제품처럼 다양한 소비 즉 양으로 환원할 수 없는 소비재의 문제가 대중의 욕망에 부응하고 생산력을 고양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분야가 일정정도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다. 결국 중앙집중적인 지령적 계획경제가 아니라, 막연한 민주적인 참여 계획경제가 아니라, 중앙은 거시적 계획에 종사하고 개별단위의 생산의 자율성은 은행 등을 총한 간접적인 통제와 생산대중과 주민의 통제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조돈문의 생각과 많은 점에서 같고 많은 점에서 다르다. 특히 국민 모두에게 주식분배 운운하는 것은 전혀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회주의란 죽은 노동의 권리의 부정의 방향이다.-(조돈문, 2002))

이행기의 사회에서 소생산을 어느 단계까지 허용하는 것도 필요하고 어느 정도 규모의 자본가적인 경영도 허용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배고픈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중앙집중적인 결국 중앙지령적인 계획경제는 실패하였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이전부터 교환의 장으로서 기능하였던 시장의 긍정적 역할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혁명적 권력이 부딪치는 무수한 문제가 있다. 자본가와 소부르주아지의 저항은 물론이고, 외국자본의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도 일자리의 문제와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그동안 이론들은 ‘어떻게’만 탐구하였다. 그러나 봉쇄될망정 고립을 자초해서는 안되는 혁명권력은 대중의 자기지배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물론 대중의 자발성과 창조성은 발휘되겠지만) 구체적인 세계경제 속에서 대중에게 보다 낳은 삶을 제공하지 않으면 실패할 것이다.

 

6. 나가며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자본주의 국가 안에서의 혁명은 심각한 고민을 요구하는 많은 문제가 있다. 고전은 방향만 제시했을 뿐이다. 혁명적이고 비타협적인 실천과 심장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까지도 만족시킬 수 있는 이행 프로그램의 제시를 위해, 혁명적 지식인들의 지성을 모아 과제를 도출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제는 멈출 수 없다. 그 실천은 오늘 우리가 처해 있고 함께 하고 있는 현실 대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이어야 한다. 그 프로그램은 진지하게 탐구할 주제이고, 대중에게 선명하게 제시될 필요가 있다. 유기적 지식인은 더욱 분발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레닌, 『국가와 혁명』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맑스, 『프랑스의 내전』

맑스, 『철학의 빈곤』

맑스, 『고타강령 비판』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조돈문, 2002. “국가사회주의의 실패와 대안체제의 가능성-민주적 시장사회의 모색”, 『동향과 전망』, 봄호(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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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핑 앤더슨의 주장과 복지국가론의 검토

에스핑 앤더슨의 주장과 복지국가론의 검토

 

들어가며

1. 복지국가 발전의 제도적 배경

2. 복지국가 위기론의 등장

3. 에스핑 앤더슨의 주장

4. 앤더슨의 주장에 대한 비판들의 검토

-페미니즘으로부터의 비판

-세 가지 레짐 이상이 존재한다는 비판

-복지국가 환경변화에 근거한 비판

5. 복지국가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

6. 위기 수렴론과 분기론의 위치

7. 논의의 한계들: 스웨덴 사례의 검토와 앤더슨의 한계

8 결어; 관점 정립을 위한 시도

 

들어가며

이 글에서는 먼저 복지국가가 발전하게 된 배경과 당면한 위기 등을 살펴보고, 복지국가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과 앤더슨의 주장을 소개하고, 그 한계점이나 문제점을 검토한 후, 충분하지는 않지만 복지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1. 복지국가 발전의 제도적 배경

“전후에 본격화된 복지국가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축적체제로서 포드주의와 제도적 적합성을 가지고 출현하였다. 축적체제로서의 포드주의는 숙련수준이 높지 않은 노동력을 대규모로 고용하는 것을 가능케 함으로써 완전고용 노동시장이 성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베버리지 사회보장체제가 보편적인 사회보장을 약속할 수 있었던 것도 완전고용 노동시장이 형성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완전고용하의 일자리는 노동자들에게 일차적인 소득으로서 임금을 보장해주고, 이 임금의 일부는 다시 조세와 사회보장 기여금의 형태로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위한 물적 재원이 되었다. 물론 이때의 완전고용은 표준적인 전일제 남성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며, 임금 또한 가부장으로서 남성노동자가 가족의 재생산을 위한 비용의 명목으로서 가족을 대표하여 수급하는 가족임금이다.

 

복지국가의 또 하나의 제도적 기초이자 경제의 조직화 원리는 케인즈주의에 기초한 거시경제관리이다. 케인즈주의에 의한 인위적인 경기부양과 유효수요의 진작을 위한 임금보장은 인플레이션의 위험을 상시화하여 임금압박을 심화하는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또한 전후 복지국가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 계급의 계급타협의 산물이기도 하다. 국가의 중재적 위상을 매개로 신조합주의라는 삼자 협력주의 또는 화해적 정치구조를 성립시켰다. 신조합주의는 경제성장을 추동하는 핵심적인 갈등관리체계로서 국가에게는 지배의 정당성을, 자본에게는 경영전권과 이윤을, 노동에게는 높은 임금과 복지를 제공해주는 포지티브 섬의 제도적 틀로 정착하게 되었다.

 

끝으로 전후의 복지국가는 동반자적 혼인관계에 이해 성립되었다는 이데올로기적 외피 아래 가부장적이고 성적 분절화가 뚜렷한 핵가족을 그 미시적 토대로서 태동하였다. 핵가족에서 가장은 가족의 물질적 정신적 재생산을 위한 가족임금의 유일한 수급자이자 가족 전체의 사회보장 수급권을 대표적으로 확보하는 존재이다. 핵가족은 표준적인 전일제 노동자로서 포드주의 생산체제에 진입하여 가족임금을 수령하는 가부장으로서의 남성과 가사 및 육아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가정주부로서의 여성이라는 차별적인 성분업을 핵심적 특징으로 한다.”(박시종, 393-396)

 

2. 복지국가 위기론의 등장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에 들어 자본주의 축적체제의 동요와 두 차례에 걸친 석유위기에 의해 가속화된 경기침체는 실업과 물가가 반대방향으로 움직인다는 필립스 곡선의 타당성을 역사상 처음으로 무너뜨렸고, 실업과 물가가 동시에 폭증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전개되었다.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경제개입에 따른 복지국가가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주범이라고 몰아치기 시작했다. 국가는 자유로운 시장의 메카니즘을 교란해서는 안되며, 복지 또는 노동유인을 저해하지 않는 최소한의 범위에 국한해야한다는 최소주의 국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배경에는 경제성장의 둔화와 그에 따른 복지국가의 재정압박이었다. 인구학적 고령화에 따라 복지수급자들의 규모가 급증하고, 세계화에 수반하여 경쟁압력이 강화되었으며, 산업은 전통적인 제조업을 밀어내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서비스경제가 지배적인 범주로 등장하였다.”(박시종, 396-397)

 

결국 복지국가가 처한 위기는 70년대 이후 혹은 포스트 포디즘적 변화 이후 자본의 축적위기와 맞물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의 분절화, (괜찮은) 일자리의 축소, 인구의 노령화, 재정압박 그리고 각국 자본의 경쟁 등과 맞물려, 결국 자본은 축적위기, 국가는 재정위기, 노동은 일자리의 위기로 복지정책(체제)의 계속성을 위협하였다. 여기에 자본과 국가는 신자유주의 즉 노동과 복지에 대한 공격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각국의 계급의 역량과 정치적 구조, 역사적 배경은 위기에 대한 대응과 극복방향에서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에스핑 앤더슨은 서구의 복지국가를 유형화하고 위기 수렴론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3. 에스핑 앤더슨의 주장

세계화론자들은 복지국가가 완전고용 시장의 붕괴와 그에 따른 노동의 유연화, 사회적 덤핑, 밑바닥을 향한 질주 등을 지적하면서 위기의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앤더슨은 사회보장 지출이 전체 예산 혹은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 즉 양적지표만을 가지고 비교하는 단선적이고 선형적인 연구를 비판한다. 그러면서 복지국가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어떤 세력, 어떤 이데올로기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지, 노동자계급만이 아니라, 좌우정당의 구조와 계급연합의 구조가 어떤 패턴으로 진행되었는가에 따라 복지국가의 발달궤적은 질적으로 서로 구분되는 다양한 복지체제로 군집하며, 내외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 체제의 발전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로의존적이며, 제도의 고착효과가 있다는 신제도주의적 관점을 취한다.

이외에도 앤더슨은 권력자원이론이 노동자계급의 동원만을 강조하는 데에 비해 계급연합의 구조가 복지국가의 초기형성과 그 이후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앤더슨은 영미중심의 자유주의 복지체제와, 절대주의와 카톨릭주의, 국가주의의 전통이 강한 대륙유럽의 보수주의 복지국가 체제, 사민주의에 바탕을 둔 스칸디나비아형이라는 세 가지 복지체제로 구분한다.

 

또한 그는 복지국가의 새로운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탈상품화와 사회계층화 개념을 동원한다. 탈상품화는 어떤 사회가 구성원으로 하여금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도 기본적인 복지를 충족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하고, 사회계층화는 복지국가가 평등화를 추구하는 경우에도 복지국가의 역사적 형성과 정치체제, 계급연합의 구조 등에 따라 그 결과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포착하고자 하는 개념이다. 결국 앤더슨은 신제도주의적 시각과 계급연합론의 시각에 서있다.

 

“앤더슨의 복지국가 레짐 논의에 따르면, 자유주의 복지국가는 자산조사형 사회부조와 낮은 수준의 보편적 소득 이전, 낮은 수준의 사회보험을 특징으로 하고, 급여가 저소득층에 집중된다. 조합주의 복지국가는 기여중심의 복지제도를 중심으로 하며, 전총적인 가족제도의 유지와 보존을 강화한다. 사회보험은 주부를 비롯한 노동시장 외부자들을 적용범위에서 배제하며, 대신에 가족급여를 통해 모성을 장려하며 주간보호 등의 여타 가족 서비스들은 거의 발달하지 않아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낮다. 또한 권리들이 계급과 지위에 부착되는 특징을 보인다. 즉 시장에서의 지위와 복지제도를 통한 보장 수준이 대체로 비례한다. 사회민주주의 체제 유형은 보편적 복지 서비스의 제공을 강조하며, 개인의 탈상품화와 탈가족화 즉 시장과 가족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최대화시킨다. 여성도 중요한 복지서비스의 제공대상이 되며, 복지와 일의 조화를 강조한다.

이에 따라 사민주의 복지국가, 보수주의 복지국가, 자유주의 복지국가가 레짐 별로 노동시장, 복지정책, 가족의 기능과 연계가 달라지며, 계층의 결집과 분화에 차이가 난다. 우선 복지정책에서 시장이 지배적인 자유주의 복지국가에서는 시장이 분배갈등의 원인이기 때문에 시장에서의 자원배분 결과인 계층간 균열이 지배적으로 된다. 이 경우 국가복지는 공공부조의 형태로 소수에 대한 복지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빈곤층과 비빈곤층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인다.

보수주의 복지국가 레짐에서는 노동시장을 둘러싸고 내부자와 외부자간의 갈등 즉 좋은 노동시장 지위와 사회보험 혜택을 누리는 남성 정규직 노동자와 실업자 사이의 갈등이 있게 된다.

사민주의 복지국가에서는 높은 수준의 복지와 고율의 세금을 통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계층간 평등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계층간 갈등보다는 성과 부문간 갈등이 제기될 수 있다.”(백정미 등, 322-323)

 

앤더슨이 주장하는 복지국가의 이러한 유형화는 유의미하고, 또한 유형을 구분짓는 도구로서 탈상품화와 사회계층화 개념도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4. 앤더슨의 주장에 대한 비판들의 검토

“-페미니즘으로부터의 비판

복지국가가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과 서비스에 의해 재생산되며, 오코너는 앤더슨의 탈상품화 개념이 모든 집단이 똑같이 상품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무시하고 있으며, 노동시장 진출기회가 차단되어 있는 여성에게는 오히려 상품화가 시급히 달성해야 할 과제라고 주장한다.

울로프는 탈상품화 개념이 남성노동자를 전제로 하여 성립한 개념이라는 한계가 있음에 주목하고, 유급노동에의 접근과 자율적으로 가정을 형성하고 꾸릴 수 있는 능력이라는 두 가지 지표를 추가하자고 주장한다.

루이스는 여성의 가족책임을 얼마나 완화시키는가를 기준으로 새로운 복지국가 유형론을 전개하자고 주장한다.

앤더슨은 이러한 비판을 감안하여 탈가족화 개념을 추가하지만, 가족주의가 강한나라와 보수주의가 강한 나라 사이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세 가지 레짐 이상이 존재한다는 비판

캐슬스와 미첼은 앤더슨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처럼 노동운동이 강력하면서도 복지국가에 제동이 걸린 나라와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이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철저했던 나라들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자유주의와 다른 맥락에서 자산조사를 도입함으로써 중간계급을 급여대상에서 배제하고 평등주의를 강화하고자 했고, 복지국가의 팽창에 의한 사회임금의 증대보다도 고용안정과 임금상승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임금소득자 복지국가라는 성격을 강화하게 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계층화 지표로 보면 보수주의 모델에 가깝고, 탈상품화 지표로 보면 자유주의 모델에 가까우며, 여성과 가족의 책임을 기분으로 보면 자유주의 모델에 가깝고, 고용 성과면에서 보면 사민주의 체제에 가깝다고 한다.

 

-복지국가 환경변화에 근거한 비판

미쉬라는 세계화로 인해 완전고용 시장이 붕괴되고 사회보장체계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강조하면서, 앤더슨의 복지국가 체제 유형론은 복지 자본주의의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자본주의 축적의 위기와 그에 따른 복지국가의 축소 추세를 과소평가하는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포스트 포디즘적인 변화 이후, 스웨덴과 같은 사민주의 체제를 포함하여 탈상품화가 역전되고 재상품화가 진전되며, 그런 점에서 복지국가의 일본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한다.”(박시종, 408-415)

 

이처럼 앤더슨의 주장에 대하여, 유형화를 위한 유의미한 틀로서 여성 혹은 탈가족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자는 주장이나, 세 가지 레짐으로 구분하기 곤란한 다른 유형도 있다는 주장 혹은 위기수렴화 경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비판들은 모두 수긍할 만하다.

그런데 이러한 유형론 혹은 복지국가의 척도에 관한 논의 그리고 유형의 차이를 가져 온 원인이나 배경에 대한 탐구나 앤더슨의 주장은 유의미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은 현상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줄 뿐 전략적 관점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가령 스칸디나비아 유형이 바람직하다고 해서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의 탐구만으로는, 한국사회에서 그와 동일한 계급적 여건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점은 사회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관점과도 관련이 되어 있는 문제이고, 반자본 세력에게는 별 도움도 안 된다고 할 것이다.

 

5. 복지국가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

서구 혹은 북구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국가가 성립하게 된 배경을 둘러싸고, 보다 근원적인 관점의 차이가 있다. 이하에서는 복지국가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50년대 영국에서는 중상류층의 집단적인 사회양심이 복지국가을 발전시킨 주요요인라고 설명했으나, 이러한 사회양심이론은 실제로는 많은 중산층들이 복지의 확대에 무조적적인 지지를 보이기는커녕 반대에 앞장서고 있다는 현실과 충돌한다.

 

보나파르티즘 내지 음모이론은 기존지배질서의 안정과 사회통제에 그 목적이 있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지배계층이 사회적 위기가 진정되고 지배질서가 공고화되었다고 판단할 경우 사회복지가 후퇴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지배질서가 안정된 후에도 복지수준이 계속 발전하는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

 

마샬은 영국의 경험을 분석하여 18세기에는 자유권, 19세기에는 정치권, 20세기에는 사회권이 발달함으로써, 사회적 시민권이 누적적으로 완성되어간 것으로 파악한다, 이 이론은 불평등한 계급구조와 평등주의적인 시민권 이념이 양립할 수 잇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에 일반화하기 어렵고, 사회적 시민권의 세가지 요소가 동시적으로 발전한 국가들의 현실과도 맞지 않는다.

 

사회복지정책의 확대과정이 국제적 모방과정이라는 확산이론 또는 전파이론이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복지국가들 사이에서도 발달수준이나 그 성격에 있어서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윌렌스키는 산업화된 사회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해결의 욕구에 대응하여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의해 대규모로 증가한 자원에 의해 사회문제가 해결되고 사회복지가 발전한다는 기능주의적 관점이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일정한 경제발전 수준에 도달한 나라에서도 복지발전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 도구주의적 관점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독점자본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도구 내지 수단으로 보고, 국가가 복지를 확대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구조주의적 관점에서는 국가가 지배계급으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면서 총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고 주장하는데, 국가가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침해하면서까지 복지를 확대하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한편 권력자원 이론은 복지를 쟁취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결실이라고 주장하는데, 경제발전 수준이 비슷한 미국과 스웨덴이 복지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박시종, 397-401)

 

마샬의 이론, 전파이론 윌렌스키의 이론은 산업화나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민주주의가 확립되면 자연스레 복지가 발전된다는 이론으로, 현상적으로 꼭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앤더슨의 주장처럼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권이 성장하였어도, 각국이 나라마다 차이를 보이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주 무시할만한 주장은 아니지만 전혀 충분한 주장도 못되고, 모두 자유주의자의 관점 혹은 찬미의 관점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복지 혹은 분배라는 것이 계급투쟁의 결과라는 점을 전혀 포착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크게 논할 가치가 없다.

그런데 음모론, 도구론, 구조주의의 상대적 자율성론, 권력자원이론은 좌파적인 관점이라는 점에서 좀 더 평가가 필요하다.

먼저 음모론은 자본 또는 지배계급의 선제적 대응으로서 그에 부합하는 역사적 사례들이 있다. 보나파르티즘이나 비스마르크 체제와 같은 경우 체제의 안정을 위해 자본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지배권력이 노동계급이나 하층민을 회유하거나 체제의 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해 추진된 사례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복지 정책을 음모로 보는 것은 별 설득력이 없고, 당해 사회에서의 여러 계급간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지배계급의 필요에 따라 때로는 선제적으로 추진된다는 점으로, 그러한 정책이 추진되는 궁극적인 힘은 결국 계급갈등이나 투쟁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음모나 시혜로만 보는 관점은 이를 협소하거나 혹은 일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도구론은 국가가 계급지배의 도구라는 관점 혹은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이해관리자라는 관점인데, 모든 국가는 지배계급의 국가라는 본질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관철되는 경향적 힘이라고 보았을 때, 본질로의 환원은 항상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국가는 사회계약론의 발상처럼 자유로운 개인의 모두의 국가 혹은 국민의 국가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혹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보편성의 국가라는 형식 속에서 자본가라는 특수한 계급의 이해가 궁극적으로 관철된다는 점에서 보편과 특수, 본질과 현상,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적인 대립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도구론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론으로서는 유효하지만, 개개의 현상의 원인 또는 환원하는 기계적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구론의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국가가 지배계급으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면서 총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 역시 좀 더 세련된 도구론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총자본의 이익이 궁극적으로 관철된다고 볼 때, 상부구조로서의 국가의 자율성을 확장하면 국가 혹은 의회는 제 계급의 균형을 반영하는 비계급적인 장이 된다. 사민주의란 바로 이점 즉 국가가 제계급의 각축의 장으로서 의회의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반영하는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본질론 혹은 도구론과는 다른 관점이다.

결국 도구론은 토대와 상부구조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서 궁극적으로 관철되는 본질을 곧바로 본질로 환원하는 위험이 있다면, 상대적 자율성론은 보다 현실에 부합하지만, 국가중성론 혹은 자본주의 국가의 이용가능성론에 연결될 위험이 있고, 이점은 파괴의 대상으로서의 자본주의 국가라는 맑스적 관점과 충돌할 수도 있다.

아무튼 현대 자본주의 국가는 그 보편적 형식 속에서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관철한다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고, 여전히 그 운동 양식이나 본질의 관철 양식을 잘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주제이다.

 

6. 위기 수렴론과 분기론의 위치

현대자본주의 국가에서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의 이해가 궁극적으로 관철된다는 본질론은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가 경제성장을 이루고, 시민권이 확장되고 복지가 발전해 왔다는 역사적 현실 앞에서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축적 위기에 몰린 자본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진하고, 포스트 포디즘이 가져온 여러 변화 즉 (괜찮은) 일자리의 감소, 경쟁 등등으로 기왕의 복지국가가 내외의 위기에 직면하여 복지국가도 결국은 위기로 수렴할 것인가 혹은 사민주의적 복지국가의 주체적 대응에 따라 복지국가의 큰 틀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의 대립이 있다. 즉 위기수렴론과 분기론의 대립이다.

 

복지국가들이 정도나 시간의 차이는 있을망정 위기로 수렴할 것이라는 위기수렴론에 대하여, 앤더슨은 이를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각 복지국가들이 초기에 형성될 때부터 그 역사적 경험이나 계급구조에 따라 서로 질적으로 구분되는 궤적을 그리며 발전해간다”는 주장을 편다.

박시종은 복지국가 위기론을 주장하는 네오 맑스주의와 신자유주의자들은 복지국가 그 자체가 내부모순 때문에 혹은 국가의 과도한 복지개입에 의해 필연적으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시차를 두고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복지국가의 재정위기에 강조점을 두든지, 복지국가의 비효율성에 초점을 맞추든 위기로 수렴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수렴론에 맞서 사민주의자들은 복지국가가 형성된 초기의 역사적 경험이나 초기 개혁주도세력의 정치적 성격 그리고 그 이후의 발전을 이끈 계급연합의 구조 등에 초점을 맞추어 복지국가가 그 형성 초기부터 서로 다른 길을 걸어 왔으며, 따라서 복지국가의 변화를 추동하는 안팎의 힘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도 경로의존적인 방식으로 서로 다르게 대응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즉 복지국가 위기의 위기론에 맞서 위기 대응의 분기론을 주장한다.

위기론은 세계화와 경쟁압력의 고조에 따른 자본주의의 축적위기가 곧 복지국가의 위기로 발현될 수밖에 없으며, 자본주의의 이기는 보편적인 법칙적 현상이므로 복지국가가 위기 역시 정도를 달리 하면서 보편적으로 관철되어 갈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에 맞서 분기론은 설사 자본주의 축적위기가 보편적인 법칙적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제도의 특수성에 의해 매개될 수밖에 없으므로 위기의 발현형태는 국가특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논거를 제출한다. 결국 수렴은 보편에 분기론은 특수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보편은 특수를 매개로 하여, 특수 속에 보편이 있다면, 분기론을 주장한다고 하여 위기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박시종, 415-418)

 

7. 논의의 한계들: 스웨덴 사례의 검토와 앤더슨의 한계

사민주의적 입장 혹은 동일한 위기에 대응하는 주체적 조건에 따라 차별성이 있다는 분기론의 관점을 논의하기에 앞서, 잠시 스웨덴의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기로 한다.

앤더슨은 스웨덴의 사민주의가 정착한 요인으로 역사적 특수성을 들고 있다.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보통 농민계급이 유권자 집단 중 가장 큰 규모였는데, 농촌경제가 대부분 대규모의 저임금 농업노동자집단에 의존하는 데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자본 집약적인 가족농 경영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경우 정치연합의 잠재력이 훨씬 더 컷고,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농민들이 농산물 가격지지를 위한 보조금을 받는 대가로 완전고용 복지국가에 동의함으로써 특히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경우 광범한 적록동맹의 조건이 형성되었다. 이들 나라는 농업의 경영기반이 극히 불안정하여 국가의 지원에 의존하였다. 2차대전 이후 복지국가들의 공고화는 근본적으로 신중간계급의 정치연합에 의존하게 된다. 사회민주주의 입장에서 그 도전은 연대를 위한 노력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노동계급과 화이트 칼라의 요구들을 종합해 내는 것을 의미하였다.... 소득 평준화를 급격하게 달성하려는 프로그램은 중간계급 고객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아졌다. 스칸디나비아 모델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민주주의가 신중간계급을 새로운 종류의 복지국가 진영 안으로 포섭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하였다. 새로운 복지국가는 중간계급의 취향과 기대에 부합하는 급여를 제공하되, 권리의 보편주의를 견지하는 그런 국가였다. 사실 이 모델에서는 사회 서비스와 공적 고용을 확대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에 도구적으로 헌신하는 중간계급을 만들어내는 데에 직접 참여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복지국가의 발전을 설명하는 단순한 계급동원 이론에 견주어 하나의 대안을 제사하였다.... 배후에서 체제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역사적 힘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는 힘들이다. 그러한 역사적 용인에는 첫째, 노동계급의 정치적 형성의 역사가 포함되고, 둘째로는 농업경제로부터 중간계급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결성된 정치연합이 관련된다. 셋째 과거의 개혁은 계급의 선호와 정치적 행동의 제도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조합주의 체제에서 위계적인 지위 분화적 사회보험은 독특한 복지국가 유형에 대한 중간계급의 충성심을 공고화하였다.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중간계급이 제도적으로 시장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지난 수십년 동안 전통적인 노동계급 고객은 물론 새로운 화이트칼라 계층에게도 혜택을 주는 중간계급 복지국가를 확립하는 커다란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앤더슨, 69-73)

 

이러한 앤더슨의 설명은 스웨덴에서 복지국가가 성립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런데 빠진 것이 있다. 사민주의 정권을 유지하는 힘 혹은 복지국가를 떠받치는 힘은 분명 복지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과 중간계급과의 동맹에 의해 가능했던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복지란 결국 분배의 문제이고 그것은 계급간의 힘의 대결의 문제인데, 앤더슨의 설명에는 이에 대응하는 자본의 처지와 자본의 힘이 서술되고 있지 않다.

 

“스웨덴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대공항의 충격을 덜 받았고, 2차대전을 전후하여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1933년 대공항 이후 당시 생산직 노동자들 중 가장 높은 임금을 받던 건설부문 노동자들이 열달 동안이나 벌인 강력한 투쟁의 여파로 1935년에 ‘공적 연금 혜택의 범위를 급격히 확대하는’ 연금개혁이 시작되었고, 살쮀바덴 협약이 체결된 1938년은 스웨덴이 노르웨이 영국 등과 함께 노동쟁의 빈도가 가장 높은 나라였으며, 1945년에 잇었던 스웨덴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파업은 2차대전을 핑계로 시행되었던 임금통제정책을 무너뜨렸고, 1946년에 ‘공적연금을 질적으로 한단계 상승시킨’ 기초연금이 도입되었다.

40년대말 이후 스웨덴 사민당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고의 정책과제로 부각하고, LO(스웨덴 노총)에 임금인상을 억제하라고 요구했다. 50년대 초에 LO의 제안은 렌-마이드너 모델로 정식화되었는데, 그것은 연대임금과 긴축재정정책과 노동력의 원활한 이동을 지원하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더한 것이었다. 긴축재정 정책은 시행되지 않았지만, 복지재정의 부족을 이유로 간접세가 도입되고 세율도 꾸준히 인상되었다. 연대임금정책은 실질임금의 하락, 노동강도 강화, 노조의 무력화를 낳았고... 이것은 60년대 말 스웨덴 광원 노동자들이 계급협조적 지도부에 반발하여 강력한 비공인 파업을 벌였고, 그 결과로 69년에 공적연금의 최저선 보장을 강화하는 특별보충급여가 도입되었다. 이런 반란에 직면하여 사민당은 노동법 개정을 추진했는데 그것은 개별기업의 의사결정에 노동자들의 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76년에 제정된 공동결정법은 고용주가 노동조건과 고용조건에 중대한 변화를 낳을 결정을 하기 전에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을 의무화했다.”(장호종, 179-181)

 

스웨덴의 복지국가의 형성과정을 이렇게 보면, 노동계급의 투쟁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열망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노동자계급의 당 혹은 노동자계급과 중간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이 총자본의 위기를 관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분배나 복지는 제로섬 게임이다. 해당 정세 속에서 어느 만큼을 뺏고 양보를 얻어내느냐의 점에 있어서 자본가계급은 노동에 대하여 노골적인 적대가 아니라 최소한의 양보(혹은 선제적 양보도 포함하여)를 사민당 권력을 통해 관철하고 있다. 즉 복지국가가 형성 또는 발전된 것은 단지 노동자계급이 중간계급과의 성공적인 동맹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조건이라기보다는, 자본이 양보할 수 있는 여유와, 노동계급의 역량과 투쟁이 주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앤더슨이 복지국가를 유형화하고, 그것을 위한 유효한 틀을 제시한 점은 인정할 만하지만, 그 유형화된 틀이 그 자체의 생명력과 동력을 가지고 새로운 위기에도 복지적 성격을 관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기론은, 자본의 위기와 그에 따라 격화되는 계급대립이라는 본질적 성격을 몰각하게 할 위험이 있다고 할 것이다.

 

8. 결어; 관점 정립을 위한 시도

자본의 축적위기와 세계화는 각국 자본의 경쟁을 격화시키면서 복지국가에게 커다란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본의 대응은 위기털출의 비용을 노동에게 전가하는 것이고 이는 복지의 축소와 노동의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나타난다. 또한 축적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상대적 과잉자본에게 투기처와 투자처를 제공하기 위하여 공공재의 사유화와 개방으로도 나타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이다. 결국 신자유주의 세계화란 현단계 축적위기에 몰린 자본이 국가와 함께 노동과 민중에 대한 철면피한 공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외적 조건은 복지국가에게도 똑같이 가해지는 위협이고 복지국가의 자본 역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동일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사민당의 제3의 길로의 전향은 이러한 자본의 욕구에 부응한 것이다. 결국 사민당은 노동자계급의 이해 대변자이면서도 자본의 동반자 혹은 자본의 이해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국가가 과연 중립적인 도구인가 혹은 계급지배의 도구인가 혹은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자본의 이해가 관철될 수밖에 없는 장치인가의 점에 있어서, 기왕의 맑스적 관점은 장기에 걸친 본질적 측면을 설명하는 훌륭한 틀이기는 하지만, 우연 속에 관철되는 필연론만으로 현실을 풍부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계급투쟁에 있어서 복지국가의 달성이 목표가 아니라 변혁임에도, 혁명적인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도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계급역량을 키워나가야 하는 변혁세력으로서는 자본주의적 분배의 장에서 계급정치를 올바르게 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분배와 복지란 결국 투쟁의 결과이고, 제로섬 게임이라는 점에서 계급화해적인 혹은 계급타협적인 관점을 철저히 배격할 필요가 있다. 복지투쟁이란 자본과 싸워 양보를 강요하고 빼앗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점을 잘못 세우면 집단이기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고, 체제에 순응하고 안주할 조합주의적 투쟁에 머무를 수 있다.

결국 현단계 신자유주의하에서의 투쟁이란 신자유주의가 자본과 국가의 노동과 복지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에, 이러한 공격을 막아내고, 공세적으로 자본의 양보를 강요하는 공세적인 투쟁(일자리에 관한 것이든 복지에 관한 것이든)을 통해서 변혁성을 고양시켜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복지투쟁은 이처럼 계급투쟁이란 관점에 섰을 때에만 운동의 매개로서 기능할 것이다.

 

참고문헌

박시종, 2007. “옮긴이 해설”, <<복지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 390-418

백정미·주은선·김은지, 2008. “복지인식 구조의 국가간 비교”, <<사회복지연구>> 제37호 (2008 여름) 319-344

에스핑 앤더슨, 2007. <<복지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 박시종 옮김, 성균관대학 출판부

장호종, 2009. “복지위기 시기 복지국가 전략의 의미와 한계”, <<마르크스21>> 4호 (2009년 겨울), 다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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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6.2 지방선거 평가와 전망

6.2 지방선거 평가와 전망
-남의 깃발을 들고



민심이반은 계급적 분노의 표현

6.2지방 선거는 한 마디로 한나라당의 패배와 민주당의 승리였다. 이명박정권과 한나라당은 천안함 사건을 빌미로 북풍을 내세웠다. 결과적으로 이명박정권이 주문을 외워 불러들인 북풍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북풍 때문에 이명박이 패배했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한때 노동운동가였다가 지금은 적 진영으로 투항한 김문수의 표현을 따르자면 북풍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것이다. 이명박정권이 선거 승리의 유일한 카드로 내세운 북풍마저 없었다면 이명박정권은 더욱 더 참패를 당했을 것이다.

이번 선거는 이명박정권에 대한 심판이다. 그것도 아주 가혹한 심판이다. 이명박정권은 지방선거에서의 패배로 임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권력누수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번 선거 패배로 한나라당 내부는 친이계와 친박계의 분열이 한층 더 심해지고 있으며, 초선의원들의 쇄신요구도 더 커지고 있다. 민주당의 승리는 민주당에 대한 적극적 지지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명박정권에 대한 분노와 불신이 유력한 제2당인 민주당으로 표가 몰렸기 때문이다. 반사적 지지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개량주의 진영의 선거결과를 현상적으로 평가하자면 진보신당의 패배와 민주노동당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승리는 민주진보진영 단일화의 승리였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에게 승리를 안겨다 준 연합정치는 민주노동당의 독자성을 해체하면서 위기를 재촉하는 부메랑이 될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142명의 당선자를 내는 성과를 냈으나 독자성을 잠식당하면서 서울에서 정당득표율은 진보신당의 3.87%보다 떨어진 3.86%에 머물렀고, 경기에서는 4.63%에 불과한 선거결과가 그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진보신당에게 이번 선거는 명분도 실리도 챙기지 못하는 처참한 패배였다. 이 패배의 결과 진보신당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으며, 심상정이 징계위에 회부되는 등 당의 지도력이 붕괴되고 분열은 가속화되고 있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세력관계가 변화하고 있으며 각 정치세력의 재편이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개량주의 정치세력들은 노동자계급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흔히들 경제에 의해 정치가 규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는 경제에 의해 단순하게 규정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변수와 교란요소를 거치면서 반영된다. 이번 선거에서는 경제위기를 노동자 민중들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고 있는 이명박정권의 실정에 대한 민심이반이 표출되었다. 그런데 민심이반은 계급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말이다.

투표행위에서는 계급모순을 흐리는 지역주의, 투표기권, 천안함 북풍과 반공주의, 계급의식을 흐리는 부르주아 사상의 영향, 민주당과 연합에서 보듯 개량주의 정치 진영이 노동자의 계급적 이해를 정확하게 대변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선명한 계급적 분석을 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적 투표행위의 집단적 결과물 속에서 핵심적인 흐름과 경향성을 끄집어내야 한다.

이번 선거는 이명박정권의 경제 살리기와 기만적인 수사로 내세워 왔던 중도실용 정책이 파산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명박정권 하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말살 공세, 고용불안과 2%대의 명목임금 인상으로 사실상의 실질임금 동결과 삭감, 복지의 후퇴 등으로 생존권의 위기를 겪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경제위기의 집중적인 전가대상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집단적 계약해지, 임금삭감, 무권리 등으로 기초적인 생존의 권리조차도 붕괴되고 있다. 통계청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정규직에 비해 줄어들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정규직으로 평가하는 통계방식의 문제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집단 계약해지가 늘어난 결과이다.  

소부르주아 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영세 상인들의 경우에도 용산학살에서 보듯 독점자본과 정권의 폭력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이들 소부르주아 계급은 높은 임대료와 이자로 건물 소유주와 금융자본에게 수탈당하고, 자영업자들의 증가로 자신들 사이의 과당경쟁에 내몰리는 동시에 거대 상업자본과의 경쟁에서 몰락하고 있다. 따라서 자영업자는 정리해고자, 실업자, 파산한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끊임없이 충원되는 데도 불구하고 지난해에는 97년 경제공황 당시 25만 명이 줄어든 이래 최대인 25만 9천명이 감소했다. 실제 지난 한해에만 파산은 25만을 훨씬 넘고 여기에 가족 무급종사자를 합치면 자영업자의 파산은 절망적 상황인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젊은 층들의 투표참여가 늘어났고 이들이 한나라당에 대한 집중적인 반대세력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등록금 문제나 청년실업의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경우도 저곡가, 한미FTA 등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한편 이번 투표에서 세종시 문제, 4대강, 언론법 개악, 이명박정권의 일방적인 독주와 민주주의 파괴에 대한 반발도 반이명박 흐름에 한 몫을 했다. 이명박정권이 독재권력을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은 바로 독점자본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더욱 더 폭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명박정권이 독점자본의 위기탈출을 위해 착취와 억압을 강화하고, 여기에 저항하는 것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독재권력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공황은 이명박정권에게 야만적인 폭력성을 강화할 것과 타협과 양보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다.  


진보양당의 우경화를 촉진한 선거

이명박정권의 폭압에 맞서서 반이명박, 반한나라당 투쟁이 펼쳐지고 있다. 이명박정권이 형식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투쟁의 성과마저도 부정하면서 파쇼적 탄압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투쟁전선에서 민주당과 제한적으로 공조할 수 있고, 지배계급 분파 내부의 분열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집권 기간 내내 독점자본의 또 다른 대변자였던 김대중, 노무현정권의 계승자인 민주당은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집권한 이명박정권을 반대하는 것이지, 독점자본의 대변자로서의 이명박정권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과의 공동전선이나 협정은 반이명박, 반한나라당이라는 공통의 요구를 내걸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반대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은 반이명박, 반한나라당 투쟁에서 한미FTA,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 노동법 개악 등의 문제를 내거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민주연합 전선에서 공통의 가치는 친환경 무상급식, 일자리 창출, 4대강 반대, 세종시 원안 사수, 전쟁반대의 요구였다. 물론 이 요구들 대부분이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요구를 확장해서 투쟁해야할 과제이지만 노동자계급의 사활적인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쟁반대의 문제에 있어서도 추상적인 평화의 문제를 내걸었을 뿐, 한반도에서 위기를 격화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인 한미동맹의 문제나 미군철수의 문제 등 노동자계급의 사활적인 요구와는 분리됐다.

반이명박, 반한나라당 투쟁은 독점자본의 폭력적이고 노골적인 대변자인 정권과 이 사회를 지배하는 독점자본에 대한 반대여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민중의 정당을 자처하면서도 이번 선거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깃발을 내걸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은 야권 단일후보와 공동 지방정부 구성, 총선에서의 공조, 대선에서의 단일후보와 공동정부 구성이라는 일련의 집권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에게 공동정부 구성은 최종적인 집권으로 향하는 과도기 전략이다. 이 과도전략을 위해서 민주노동당은 반독점 요구를 일관되게 내걸 수 없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당과의 전략적 공조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민주당이 반대하는 계급적 요구를 과감하게 버렸다. 민주노동당은 서울시장 선거, 경기지사 선거, 부산시장 등 전략지역에서 야권연합에 나서면서 심지어는 민주당의 대변인 노릇을 자처하고 나섰다.

민주노동당은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당의 깃발 아래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선거 이후에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 등과의 진보진영 대통합을 주장하는 것은 민주당과의 전략적 공조에서 병력을 더 끌어 모으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민주노동당은 민주당과의 전략적 공조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지분을 더 많이 보장받으려고 하고 있다. 민주대연합이냐 진보대연합이냐의 논란이 있었는데 민주노동당에게 이것은 결코 대립적인 가치가 아니다. 이번 선거에서 일시적으로 민주대연합에 더 집중했지만 그것은 진보신당이 5+4회의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노동당에게는 진보대연합은 전술이고 민주대연합은 장기적인 전략인 것이다.

진보신당은 5+4회의에 참여했다가 지분보장이 되지 않자 탈퇴하고 독자성을 강조했다. 진보신당은 야권 단일화의 문제 앞에서 좌충우돌하면서 부산시당과 고양시에서는 야권단일 후보인 민주당 김정길과 최성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심지어 당의 간판 격인 심상정은 유시민을 지지하면서 중도사퇴하기도 했다. 진보신당은 당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선거연합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선거의 주요 요구에서는 복지혁명, 무상급식의 문제처럼 민주노동당, 민주당의 구호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노회찬이 사퇴하지 않고 완주하여 오세훈을 당선되게 만들었다는 대대적인 비판이 일어나고 있는데 여기서 문제는 사퇴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명숙이 내건 요구와 근본적인 차별성이 없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자신의 깃발을 내리고 남의 깃발을 내걸었다면 진보신당이 내건 자신의 깃발은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깃발이었고, 자신의 깃발에 남의 구호를 새겼다. 민주노동당이 독자성을 상실하고 일관되게 남의 깃발을 내건 덕택으로 인천에서 두 개의 기초단체장을 배출하는 등 성과를 냈다면 진보신당은 독자성이라는 전략적 측면에서도, 득표와 당선이라는 전술적 측면에서도 다 처참한 실패를 하고 분열에 휩싸여 있다. 진보신당 내에서 이후 전망과 관련해서 독자성의 강화를 통한 진보대연합이냐 국민참여당 등 친노세력까지 광범위하게 포함하는 진보대통합이냐의 논란이 일고 있다. 이러한 노선논쟁은 진보신당의 분열의 뇌관이 될 수 있고, 자유주의자와의 연합으로 진보신당의 소부르주아적 측면이 더욱 강화되는 노골적인 우경화로 치달을 수 있다.

결국 개량주의 양당에게 이번 선거는 외형적인 성공과 실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의 독자성을 상실하고 더욱 더 우경화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부르주아 야당의 이중대에서 선봉대로 전락하였고, 진보신당은 촛불집회 이후에 소부르주아 당원의 대거 유입에 이어서 소부르주아적 경향이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민주대연합은 직접적인,
진보대연합은 궁극적인 독자성의 상실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의 하나의 수단인 선거에 있어서도 원칙이자 생명과 같은 정치적, 조직적, 이데올로기적 독자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곳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파 입후보자들과 나란히 노동자 후보자들을 내세울 것. 후보자는 가능한 한 동맹원들 가운데서 내세우고 모든 가능한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들이 당선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노동자 입후보자가 당선될 가망이 전혀 없다 할지라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입후보자를 내세워야 한다.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역량을 가늠하며 자신들의 혁명적 입장과 자신들의 당의 관점을 공공연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이때 노동자들은 예를 들어, 그렇게 하면 민주주의 당파를 분열시키며 반동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줄지 모른다고 하는 민주주의자들의 허튼소리에 농락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모든 공문구들은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기만하기 위해서 하는 소리들이다. 그러한 독자적인 진출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당이 이루게 되는 진전은 몇 명의 반동 분자들이 대의 기관에 들어감으로써 생길 수 있는 불이익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동맹에 보내는 중앙 위원회의 1850년 3월의 호소」, 『저작 선집2』,박종철출판사, p.123)

독점자본의 대변자인 김대중, 노무현정권의 반노동자성과 반민중성을 온 몸으로 경험한 우리의 지금 현실에서, 한나라당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 독자성을 포기하라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압력이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원칙은 더욱 더 소중한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다.
자민통의 이론가인 한호석은 정반대로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중도4당이 반이명박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공동집권전략을 추진하여 중도연합정부를 세우는 것은, 중도좌파정부를 세우는 것과 다르다. 정부의 성격에 대해 말하면, 중도연합정부 수립은 우파정부를 중도좌우연합정부로 교체하는 것이다. 중도좌파당의 시각에서 보면, 우파정부를 중도좌파정부로 교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이 땅의 변태적인 정치현실은 진보적 정권교체를 향한 단번도약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보적 정권교체는 중도연합정부라는 중간단계를 거친 뒤에 실현될 수 있다. ... 반이명박 연합전선은 전략을 요구하는데, 그 전략은 중도4당 민주대연합이 추진하는 공동집권전략이다. 연합전선은 공동투쟁전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동집권전략이므로, 중도4당 민주대연합은 공동집권전략을 합의해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중도4당은 반이명박 연합전선을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준비하는 득표전술거점으로 구축할 것이 아니라, 공동정부를 세우는 집권전략거점으로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중도4당이 공동집권전략을 합의하고 공동정부를 세우는 것은, 연합전선 구축이 득표전술이 아니라 집권전략이라는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다.(한호석 재미 통일학연구소 소장, 6.2 지방선거와 야4당의 앞날)

한호석의 주장은 민주노동당 핵심전략을 이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호석의 공동집권전략은 중도 우파인 민주당, 국민참여당, 중도 좌파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반이명박 연합전선으로 2012년 대선에서 중도좌우연합정부를 세우고, 이러한 과도적 단계를 거쳐서 중도 좌파가 독자적으로 집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호석의 연립정권론은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자유주의자에게 통째로 갖다 바칠 수밖에 없는 대단히 우경적인 전략이다. “국가권력은 항상 단일한 계급의 정치권력이다.” 현재의 세력관계를 볼 때 설사 야4당이 연립정부를 세운다 하더라도 그 정권의 성격은 자유주의자들의 헤게모니가 주도하는 독점 부르주아지의 권력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중심이 되어 진보진영 대통합을 이루고 이 성과를 바탕으로 연립정부에서 진보양당의 지분이 더 커진다 하더라도 독점자본의 권력이라는 정치권력의 성격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2012년 대선에서 과도기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나서 독자권력을 잡는다는 현실론도 현실성과는 동떨어져 있는 주관적 공상에 가깝다.

2012년 대선에서 공동정권이 탄생하여 그 권력이 성공적인 집권을 한다면 그 성과는 민주당으로 귀착될 것이고, 노무현정권처럼 실정을 거듭하게 된다면 연합정부의 한 축인 개량주의 진영에서는 그 책임을 부분적이라도 나눠가지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보궐선거, 총선, 대선을 거치는 연합정치는 이번 지방선거 이상으로 진보정당의 독자성을 점점 더 포기하도록 할 것이다. 진보정당이 독자성을 강화한다면 이 연합정치는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연합정치가 강화될수록 진보양당은 우경화되면서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포기하고 민주당과의 연합론을 펼친 미국의 사례나 일본 사회당의 민주당과의 연립정부 등 전 세계의 연합정권의 사례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정치세력화의 무덤이 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민주대연합과 자유주의자들과의 공동정부 구성에 대해 비판하면서 진보대연합론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민주대연합론이 자유주의 부르주아와의 정치연합이라면 진보대연합론은 개량주의 정치세력 내부의 정치연합이다. 자본주의 권력은 부르주아 양당체제를 통해 안정적으로 권력을 독점해 왔다. 개량주의 정당이 이 양당체제를 뚫고 독자적으로 집권한다고 하더라도 독점자본의 지배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의 사례처럼, 개량주의 정당의 권력장악은 위기에 빠진 독점자본의 지배를 구출하는 최후의 구원자 역할을 하였다. 사민주의 정당은 집권한다 하더라도 독점자본의 지배체제의 보루인 사적소유를 전혀 침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 과정에서 성취한 복지는 자본주의 체제가 위협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독점자본이 양보한 결과이고 이것도 노동자계급의 대중투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복지체제는 자본주의 공황이 심화되고 노동자계급의 대중투쟁이 약화되면서 무너지고 있다. 사민주의 정당은 이러한 자본주의 위기 앞에서 사민주의 복지체제도 포기하고 노동자계급의 정리해고와 임금삭감, 복지에 대한 공격에 나서고 있다. 멀리는 독일사민당과 영국 노동당이 그러했고, 가까이는 브라질 노동당의 룰라와 집권 그리스 사회당의 역사는 노동자계급을 배반하고 독점자본에 투항하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미래의 어느 날에 성공한 진보대연합의 참담한 결과인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혁명적 깃발을 내걸자!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명박은 패배했지만 그렇다고 노동자계급이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선거에서 주요한 이슈 중의 하나는 천안함 침몰과 더불어 4대강과 세종시의 문제였다. 이명박정권은 선거패배에도 불구하고 세종시 수정안과 4대강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고 있지만 이 요구가 선거에서 전면화 되고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명박정권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명박정권이 세종시 문제와 4대강을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일수록 이명박정권과 한나라당 내부의 분열과 정치적 위기는 가속화될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정권이 추진하는 노동 유연화와 정리해고, 노동법 개악, 한미FTA의 문제는 선거의 주요한 요구에서 실종됐다.

이처럼 한나라당의 선거 패배는 다만 이명박정권의 분열과 정치위기의 가속화로 노동자계급이 투쟁하는데 유리한 객관적 조건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명박정권에 맞서는 투쟁의 구심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민주노총은 지방선거를 대중투쟁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기 보다는 대중투쟁을 기만하고 회피하는 수단으로 선거심판론을 제기함으로써 대중투쟁 동력은 더욱 약화됐다. 7월에 타임 오프제가 실시되는 데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철회하면서 투쟁전선을 해체시키고 있다. 이명박정권은 선거에서의 패배와 정치위기를 노동법 개악과 노동조합 말살을 통해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천안함 문제와 4대강, 세종시 문제는 이명박정권의 분열과 권력누수를 불러오는 중대한 정치적 요인이 될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투쟁하기에 유리한 객관적인 정세를 활용하여 노동자계급의 투쟁역량을 강화시켜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사활이 걸린 요구인 노동법 개악과 노조말살 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반격에 나서야 한다. 월드컵으로 인해 유럽경제 위기 문제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남유럽을 시발로 해서 동유럽까지 파급되는 경제위기는 유럽의 중심부인 영국경제 등 유럽 중심부를 강타하면서 세계경제를 또 다시 전면적인 공황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높다. 한국경제의 위기도 이러한 상황에서 전면적으로 강타당할 것이다. 이명박정권의 정치적 위기에다가 경제적 위기가 가속화된다면 숨죽이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투쟁도 또 다시 전면화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투쟁을 강화하는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독점자본 한 분파에 종속시키는 연합정치로 우경화하는 것을 폭로하고 투쟁해야 한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열망을 배신하고 독자적 깃발을 내렸다. 이제 노동자계급은 민주대연합이냐 진보대연합이냐의 왜곡된 논란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혁명적 정치세력화의 깃발을 내걸어야 한다. 이 독자적, 혁명적 깃발 아래 자신의 요구를 선명하게 내세우고 당당하게 역사 속으로 진군해야 한다.<노/정/협>
http://lmagit.jinbo.net/bbs/view.php?id=newspaper&no=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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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관계 재설정

  • 분류
    운동론
  • 등록일
    2010/06/07 11:05
  • 수정일
    2010/06/07 11:05
  • 글쓴이
    서른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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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관계 재설정

[기후변화와 노동자](8) 노동체제의 재형성은 필수적이다

김경근(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2010.06.07 08:27

 

노동체제의 의미와 중요성
 

 

기후변화 협약은 직접적으로 에너지산업의 노동조합·노동자에게 특정한 변화를 낳지는 않는다. 기후변화 협약은 ‘노동체제’를 매개로 에너지산업의 노동조합/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부와 자본이 어떠한 전략을 취할 때, 그 전략은 아무런 제한 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실현될 수는 없다. 그들의 전략은 ‘노동체제’에 의해 일정한 굴절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노동체제’에는 노동의 대응과 저항이 존재하며, 동시에 기존에 형성된 질서·규칙이 존재하므로 일정한 경로의존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와 자본의 논리와 이해관계가 일방적으로 관철될 수는 없다. 결과는 노동운동의 역량에 따라 일정한 변화를 수반하게 된다.

 

노동체제는 기후변화 문제에 따른 작업현장의 변화에서도 당연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기후변화에 따른 에너지 산업의 재편이 직접적으로 구조조정이라는 결과를 발생시키지는 않는다. 탄소 배출량이 감소된다고 할 때, 그것이 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결과도 선험적으로 예정되어 있지 않다. 노동체제가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탄소 배출량 감소는 엄청난 구조조정을 발생시킬 수도 있고 전혀 발생시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에너지 산업의 재편이 어떻게 진행될지조차 노동체제의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기후변화 문제에 의해 필연적으로 구조조정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이러한 ‘노동체제’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구조조정을 필연적 결과로 받아들인 후 이에 대한 대응으로 고민을 한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전략적 행위의 범주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노동체제의 변화 가능성의 여지를 스스로 봉쇄하고, 정부와 자본이 제시하는 질서·규칙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물론 구조조정이라는 규칙, 즉 생산량이 줄어들면 고용인원도 줄어든다는 규칙은 현재 한국의 노동체제의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질서이다. 그러나 이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체제에서 노동운동이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이라는 규칙에 대한 대응의 실패와 부재가 현재의 노동체제를 형성시킨 것이다.

 

이러한 현재의 노동체제는 노동운동의 무기력 속에서 안정적으로 공고화된 듯 보인다. 그런데 기후변화 문제는 노동체제의 규칙·질서를 변화시키는 객관적 외부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노동체제를 둘러싼 외부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이를 수용하고 적응하기 위한 노동체제의 내적 질서의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변화의 결과가 예정된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전략과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능동적 대응이 필요하며, 이러한 능동적 대응은 ‘노동체제’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이처럼, ‘노동체제’의 의미는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응에 많은 시사점을 가진다.

 

첫째, 기후변화 문제에 따라 발생하게 되는 작업현장의 모든 변화는 노동체제에 영향 받은 결과이며, 다시 그 변화는 노동체제에 영향을 주게 된다.

 

둘째, 기후변화 문제로 인해 기존의 노동체제의 질서·규칙은 불가피하게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때의 변화는 선험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셋째, 따라서,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대응은 노동조합 운동과 분리된 특수한 사안이 아니라, 노동조합운동의 전반적 전략에 기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노동체제의 재형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연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넷째, 결론적으로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대응은 지구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환경운동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노동자를 지키기 위한 노동운동이다.

 

노동체제의 재형성: 고용과 노동조건과 환경

 

신자유주의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관심사는 거의 전적으로 ‘고용’에 집중되어 있다. 구조조정이 정부와 자본의 주요한 전략으로 활용됨에 따라, 고용이 축소되고 실업률이 증가하며 비정규직 일자리가 확대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노동운동의 역량이 고용 문제에 집중됨에 따라, 노동체제는 고용이라는 단일한 의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고용이라는 단일 의제를 가진 노동체제는 노동자들에게 구조적으로 제한된 선택지만을 제공하게 되고, 그 결과 다른 의제들은 물론 고용이라는 의제에서조차 자본과 정부의 전략에 의미있는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고용안정에 대한 노동자들의 열망은 현존하는 노동체제를 매개하면서 엉뚱하게도 비정규직의 확대와 노동조건의 하락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고용이 절대적 관심사로 부각됨에 따라, 노동자들은 고용안정을 위해 다른 조건을 양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용을 위해, (자신의) 고용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양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몸에 대한 양보(노동시간 증가와 노동강도 강화)를 통해 고용안정을 확보하거나, 자신보다 더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을 용인(비정규직 활용에 동의)함으로써 고용안정을 확보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로 인해, 노동자와 기업간의 위계적 갈등은 한정된 수의 일자리를 둘러싼 노동자들간의 수평적 갈등으로 전환되고, 기업의 경쟁력과 고용안정을 동일시함에 따라 기업의 경쟁력과 생산성 향상에 자발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근대적·자본주의적 합리성을 내면화하고 있다.

 

‘고용은 생산량에 따라 결정된다’는 규칙을 가진 노동체제에서, 즉 ‘고용=물량=임금’이라는 조건에서 노동운동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은 지속될 수밖에 없으며, 비정규직 일자리는 확산될 수밖에 없고, 유연화는 더욱 더 심화되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 스스로 근대적·자본주의적 합리성을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탈출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런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동체제의 재형성이 필요하다. 노동체제의 재형성은 노동·자본·정부의 상호작용의 방식을 바꿔내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현재의 합리성을 극복하고 다른 합리성을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노동운동은 고용과 노동조건과 환경을 함께 추구해야 하며, 이를 통해 현 노동체제의 규칙을 변화시켜야 한다. 고용-노동조건-환경이 노동체제의 삼각 축으로 구성된다면, 고용은 생산량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일자리의 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적정한 노동시간과 노동강도의 설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고용에 국한된 노동체제로 인해, 한국의 노동자들은 지속불가능할 정도로 노동시간이 길고 노동강도가 강한 상황을 감내하고 있다. 사회공공성의 확장을 통해, 노동자들의 생명이라는 가치가 이윤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강도 완화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의 한국의 노동조건이 너무나도 비정상적이라는 점에서, 이런 조건들이 정상적으로 지켜진다면, 한국의 고용은 생산량이 줄어든다 할지라도 오히려 더 늘어날 여지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고용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세 축을 모두 고려할 때 오히려 고용 문제를 더욱 더 쉽게 풀어갈 수 있게 된다.

 

사회공공성의 구성 요소

 

노동체제의 재형성은 노동운동의 영향력 회복뿐만 아니라,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올바른 대응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주체가 바로 노동조합/노동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에너지산업과 같이 기후변화와 큰 연관성을 지닌 영역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경우 중요성은 더욱 커지게 된다. 따라서 노동체제의 재형성을 통한 노동운동의 역량 강화와 의제 변화는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 노동조합이 관심을 가지게 되고 또한 실질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한편, 노동체제의 재형성은 사회공공성의 확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사회공공성 개념이 정치적 차원에서는 ‘실질적 민주주의’, 경제적 차원에서는 ‘탈이윤화·탈시장화’ 그리고 사회적 차원에서의 ‘기본권의 보편적 보장’으로 확장되었다고 정리한 바 있다. 이러한 사회공공성 개념의 확장은 현재의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극복을 통한 고용-노동조건-환경으로의 노동체제 형성과 밀접한 논리적·실천적 연관성을 가지게 된다. 사회공공성은 생산의 공공성, 운영의 공공성, 소비의 공공성, 생태의 공공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생산의 공공성은 노동권의 확보를 의미한다. 안정적인 고용과 적정한 노동조건, 그리고 이 둘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정상적 노동조합 활동이 보장되어야 생산의 공공성이 지켜질 수 있다. 이러한 노동권은 노동자의 생명과 행복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가장 기본적 차원의 공공성이다.

 

둘째, 운영의 공공성은 거버넌스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개입력 확보를 의미한다. 운영의 공공성은 기업, 산업, 정부의 경영/운영에서 성장중심적 논리와 이윤지향적 논리를 벗어나서, 사회에 바람직한 재화․서비스를 바람직한 방식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거버넌스에 대한 개입력 확보는 다른 공공성들이 원활하게 확보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의 역할을 하게 된다. 사회 구성원들의 삶에 대한 결정을 자본이나 정부에게 일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주체적인 참여를 통해 결정함으로써 실질적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리를 지향하고 있다.

 

셋째, 소비의 공공성은 필수적 재화․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권 확보와 이에 더해 적정한 소비를 의미한다. 먼저 소비의 공공성은 탈시장화·탈이윤화라는 원리를 통해 기본권에 대한 보편적 접근을 보장한다. 이러한 탈시장화와 탈이윤화라는 원리는 생태적 공공성을 확보해나가는데, 즉 지구 환경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아울러 소비의 공공성이 생태의 공공성과 결합되면서, 대량소비에 대한 반성과 함께 지속가능한 소비를 지향하게 된다.

 

넷째, 생태의 공공성은 생태적 지속가능성 확보를 의미한다. 지구 환경은 특정 계급, 특정 국가, 특정 세대의 귀속물이 아니라 공동체 모두가 공유한다는 특성을 가진다. 또한 구성원 모두가 지구 환경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이처럼 지구 생태계는 사회공공성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게 된다. 환경운동에서 제기되고 있는 지속가능성 개념은 현재의 근대적·자본주의적 합리성을 변화시키는 핵심적인 키워드로 활용될 수 있다.

 

생산의 공공성과 생태의 공공성의 결합

 

노동체제의 세 의제 중에서 ‘환경’을 통해 생산의 공공성과 생태의 공공성이 결합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지구는 지속가능한 작업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동시에 지속가능한 작업장은 지속가능한 지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노동체제가 재형성되어야 하는 이유이며, 사회공공성이 확보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지속가능한 지구가 지속가능한 작업장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노동자는 지속가능한 지구를 만들어내는 유력한 주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들의 힘이 강화되기 위해서는 노동권의 보장이 필수적이다. 지속가능한 작업장이 지속가능한 지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지구가 생태적인 문제를 발생하게 되면,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또한 생태적 문제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 큰 비용을 부담지우기 때문이다. 전자와 후자에 공통되는 이유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바로, 성장과 이윤 중심적 사고가 작업장 차원부터 지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다른 사고방식으로 대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과정은 단순히 생산물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생산 과정은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효과들을 지닌다. 즉 노동자들은 원료를 유용한 물건으로 전환시키면서, 특정한 사회 관계에 대한 경험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회 관계 자체도 재생산한다. 이처럼 노동과정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측면들의 결합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이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노동하면서 무엇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어떤 의식들을 내면화하게 되는지를 주목해야함을 의미한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과정에서 자신의 건강 심지어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감수하고 있다. 이윤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위해 자신을 도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노동자 분할과 위계화에 동의하면서, 경쟁과 효율성의 원리를 내면화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생명조차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료와 생존을 두고 경쟁해야하는 조건에서, 지구 생태계 나아가 미래 인류의 생존에 대한 고려가 존재할 수는 없다. 작업장에서조차 지속가능성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지구에서 지속가능성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거꾸로, 지구적 차원에서의 문제를 해결할 때조차 기존의 시장 원리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작업장 차원에서 시장 원리가 관철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인류의 공통적인 문제이자 절대적 중요성을 가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조차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노동운동의 여러 조건들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열악한 한국에서 그리고 기업의 영향력이 극도로 발휘되는 작업장에서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속가능성의 추구는 현재 사회의 가치체계와 운영원리의 변화를 반드시 필요로 하며, 이러한 변화는 작업장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에서부터 전체 지구라는 가장 큰 단위에까지 모두 진행되어야 한다. 이처럼 생산의 공공성과 생태의 공공성은 서로 독립적이거나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의 정합성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각각의 사회운동이 연대를 창출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은 공통의 관심사항을 찾아내고, 그로부터 출발하여 상호작용 경험을 쌓고 신뢰를 형성하면서 진전된다. 미국의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사례들에서 ‘일자리 대 환경’의 구도가 ‘일자리와 환경’의 구도로 변할 수 있었던 데는 노동안전보건(넓게는 공중보건) 분야에서 연대했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연대의 초기 모습은 미국에서 ‘노동계급 환경주의’라는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 노동계급 환경주의는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산업생산이 증가하고 고독성의 화학산업 등이 번성하면서 환경과 작업 조건이 악화되자. 전국에 걸쳐 작업장과 환경의 오염과 그에 따른 안전과 건강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노동계급 환경주의는 이러한 안전과 건강에 대한 노동자의 우려에 기반하였다. 작업장 환경 오염에 대한 걱정이 늘어나면서 노동자와 환경주의자들 사이의 연계가 늘어났고, 이들은 대기업과 통제되지 않은 자본주의가 사회적 불평등과 환경오염의 뿌리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초기 연대의 모습은 이후 ‘노동권’과 ‘환경정의’의 결합으로 발전하게 된다. ‘환경정의’는 환경문제가 사회 계층간 불평등의 지형을 따라 발생하고 그 결과로 환경 피해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중되는 점을 주목한다. 따라서 환경정의는 사회적 약자이자 환경 약자인 이들의 사회환경적 불평등과 차별화의 문제를 환경운동의 중심 과제로 삼는다. 대부분의 환경불평등은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환경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러한 기존의 불평등을 낳는 사회구조의 개혁이나 불평등의 완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정의를 위한 투쟁과 노동권을 위한 투쟁은 네 가지 이유에서 상호관련이 있다. 첫째, 환경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근본적 목적은 오염된 환경에 불공평하게 노출된 사회적 약자나 경제적 약자를 위하는데 있다.

 

둘째, 작업장은 지역사회 주민들이 독성물질에 최초로, 그리고 흔히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노출되는 장소이다.

 

셋째, 환경정의 활동가들이나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환경을 ‘사람이 살고 일하고 활동하는 곳’으로 정의해왔다. 또한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유해물질들과 일터에 존재하는 유해물질들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기존의 환경 개념을 폭넓게 재해석한 것으로, 작업장에서 발생한 독성물질이 가정과 지역사회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와 환경운동가들이 힘을 합치도록 해준다.

 

넷째, 사람들은 자신의 작업장에서부터 환경 유해물질이나 불의에 맞서기 시작하곤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지역사회 최초의 환경운동가가 될 수도 있다. 환경정의를 위한 투쟁이 가지고 있는 두 측면, 작업장 영역과 지역사회 영역의 측면을 연결해 보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노동과 환경의 이분법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노동권과 환경정의가 결합한 형태의 일자리 개념으로 ‘녹색 일자리’가 등장한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지난 2008년 9월 ‘녹색 일자리들: 지속가능한 저탄소 세계에서의 괜찮을 일자리를 항하여 란 제목의 보고서를 펴냈다. 이 보고서는 농업과 제조업, 연구와 개발, 행정 작용과 서비스 활동에서의 환경 질을 보전하거나 복원하는데 실질적으로 기여해야만 녹색일자리라고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녹색 일자리는 적절한 보수와 안전한 작업 조건, 일자리의 안정성, 합리적인 전망, 노동자의 권리 등을 만족시키는 괜찮은 일자리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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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누가 신자유주의에 산소호흡기를 달았나

묻지마 반MB연합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6.2선거를 말한다](1) 누가 신자유주의에 산소호흡기를 달았나

박준형 (공공노조 활동가) 2010.06.03 07:04

지방선거 결과, 예상보다 야당이 선전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반MB연합’을 구성했던 정당, 정파들이 환호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친노인사들이 대거 출마하고 선전했다는 점에서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심판했다’는 분석도 있다. 선거가 임박해서는, 젋은 층의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캠페인이 넘쳤고, 이 효과 덕분인지 투표율이 다소 상승하였다. 이제, 이 환호 뒤에 남겨진 뒷모습을 돌아보자고 제안한다.
 

 

‘반MB연합’의 성과?

 

이번 선거의 키워드를 몇 가지 떠 올려보자. 무상급식, 전교조탄압, 4대강 사업, 세종시, 천안함 침몰과 북풍, 반MB연합 등. 선거과정에서 전국적인 정치 쟁점 외에 지역이슈들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나마 지방자치단체 자체 기능 중 쟁점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는 무상급식 이슈도 선거 초반 이후에는 힘을 잃었다. 요컨대, 전국적인 정치쟁점을 중심으로, 특히 한나라당-이명박정부 대(對) 반MB연합이라는 대립구도가 부각되었다. 지방자치단체 선거라기보다는 (그런 것이 있다면) 대통령선거 투표인단을 선출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우선, 이명박 정부의 무지막지한 일방통행 정책들과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년여간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행태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도 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무능하고 대중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민주당을 중심으로 반MB연합이 만들어졌다. 이유를 생각해보자. 노무현의 후광을 이번 선거에 활용하려고 한 민주당 내외의 친노세력과 사회운동, 민중운동의 일부가 민주당의 주도성을 인정한 가운데 선거연합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로 인한 결과를 ‘단일화 효과’라고 부른다.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친노 정파들이야 민주당과 연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전환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 중에 하나는 민주노동당의 선택이었다. 민주노동당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에 활용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야권 단일화의 일등공신’이니 비경합 지역후보나 정당투표에서라도 선택해달라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그저 강기갑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혹은 민중운동내 ‘자주파’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정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은 자신이 ‘과잉대표’하는 민중운동, 사회운동을 함께 이 ‘반MB연합’에 끌고 들어갔다.

 

노동자운동도 반MB?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운동도 이렇게 딸려간 민중운동 중 하나다. 민주노총은 정치방침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내내 내부 논란에 빠졌다. 급기야 최종 결정과정에서는 문제점들을 겨우 미봉하고, 실천적으로는 민주노동당의 반MB연합에 동조했다. 조직적 결정도 아랑곳없이 심상정 진보신당 경기지사 후보에 대한 민주노총 경기본부의 (사실상) 유시민 후보로 단일화 요구는 빙산의 일각이다.

 

이명박 정권이 반노동자 정권이라는 점에 ‘반MB’라는 포지션은 당연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MB연합’이라는 ‘정치연합’ 형태로 나타날 때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는 민주당과 친노 정파들과 연합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조합 현장은 혼란스러웠다. ‘반MB연합’에 합류하지 않은 진보신당 후보와 ‘야권단일후보’들 사이에서, 그리고 민주당이라는 정치세력을 지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그렇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민주노동당 활동가들은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민주당에 투표할 것을 설득했다. 노동조합 집행부는 당혹스러워했지만, 이미 강력하게 형성된 반MB연합을 비판하지도 못했다. 더욱이 이미 많은 현장에서 조합원들 사이에도 ‘후보단일화’에 동조하는 여론도 많았다.

 

조합원 여론을 탓할 수는 없다. 이미 이명박 정권 출범 후 오랜기간 동안 민주노총은 ‘반MB’를 정치적 입장으로 하고 조합원들을 설득해왔기 때문이다. 다른 정치세력을 구성하려는 노력도 사실상 없었다. 그러니 조합원들의 여론, 반응도 오히려 일관성이 있다. 민주노총은 이미 촛불집회 때부터 형성된 반MB 프레임을 계속 확대-강화해왔다.

 

이 점에서는 비록 이번 반MB연합에 동참하지는 않았더라도 진보신당과 이 당과 친화성을 갖는 노조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진보신당 스스로 5+4 단일화 연석회의에 참여해왔을 뿐 아니라, 노조 내 많은 활동가들도 ‘반MB'를 중심 투쟁의제로 부각하고자 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노동운동 내 ’현장파‘들은 내내 침묵하였다. 민주노총이 개악노동법 폐기 투쟁 등 노조운동 스스로가 제기해야할 쟁점에 대한 투쟁을 포기한데 대한 항의였던 셈이지만, 지방선거 정국에서 별다른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실천을 조직하지도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묻지마 투표선동은 정당한가

 

한편, 선거 막판에 진행된 투표참여 캠페인은 주로 젊은 층에서 야당 지지가 많다는 점에서 이들의 투표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 노동자대회(광주항쟁정신계승5.18대회)에서 중앙선관위의 구호인 ‘투표로 말하세요’가 공식 유인물에 등장한다. 노동자운동마저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투표로 말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세에 따라 투표가 필요할 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자본가의 착취를 보장하는 기관으로서 국가를 정당화하는 것이 선거와 투표행위다. 투표는 다만 ‘정세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뿐인데도, 투표 자체가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진 것처럼 선전되기 시작했다. 가히 ‘투표 물신주의’라 할만하다.

 

그런데 더 문제는, 이들 ‘젊은 층’에게 투표를 요구하는 이유다. 민주노총조차 ‘반MB'외에 청년들을 설득할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미 수년간 청년들이 ’88만원 세대‘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이고, 따라서 이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뭉치고 투쟁해야한다는 토론이 있었던 후인데도 말이다. 비정규직 청년노동자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그들의 힘든 삶에 정치가 아무런 희망이 되어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MB연합으로 선거에 나온 후보들의 공약과 정책이 과연 한나라당의 것과 달리 비정규직 청년노동자들에게 의미있는 것이 있는가? 내가 살펴본 공약집에는 그런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것은 20대라는 ’세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파견, 용역, 하청, 최저임금, 영세사업장, 실업 노동자들의 문제이고, 이 점에 대해 반MB연합은 침묵했던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총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청년 노동자들을 ’정치무관심 층‘이라고 비하할 수 있는가. 청년층에 대한 투표 독려와, 오히려 이들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에 바로 이들을 조합원으로 [전략]조직하겠다고 하는 ’노동자 조직‘인 민주노총마저 다르지 않았다. 묻지마 반MB 투표독려 수준으로 진행된 이번 선거에서 가장 기괴한 지점이다.

 

개표 후에도 반MB연합이 계속된다면

 

선거 선전으로 재미를 본 반MB연합은, 이런 상황이라면 대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미 일각에서는 반MB연합을 발전시켜 안정적인 정치연합체는 물론 합당까지 검토하자는 논의가 제기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상황은 2010년 대선에서는 물론, 대선까지 가는 2년반 동안의 정세를 규정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2년반 동안, 현재와 같이 한나라당-이명박 대(對) 반MB연합이라는 방식으로 형성된 대립 구도에서, 정치적 쟁점은 딱 이 구도가 제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다. 이번 선거의 주요 이슈들이 중요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좋게 말해도 ‘변죽을 울리는’ 것들이다. 심지어 일부 쟁점은 한나라당이 수용할 수도 있는 정치적 결정이다. 무상급식은 민주진보교육감으로 불리는 김상곤 경기교육감이 제기하지 않았다면 한나라당 공약이 될 수도 있었다. 4대강 사업은 불황기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이라는 점에서, 아마 민주당 정권이었다면 적당히 다른 곳을 파헤쳤을 것이다. 북풍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연초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예상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 이명박 북풍을 지지하는 것이 ‘진보주의자’들이 열광한 미국 오바마 정권이라는 점을 상기해야한다.

 

이에 비해서 자본주의 모순을 드러낸 세계금융위기와, 부실 금융기관에 대한 70~80조의 구제금융기금 등 이 위기 부담을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는 정부 정책이 문제가 된 적이 있는가. 노무현 사망 1주기 직전에 있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 파업 1주년, 따라서 경제위기에 따른 노동자 구조조정은 누가 기억했는가. 노동자들의 임금격차를 오히려 넓히고 있는 최저임금,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자파견 대상업무 확대는 누가 언급이라도 했는가. 사람잡는 재개발 정책과 부동산 경기부양은 쟁점이 되었는가? (마지막 질문은 단 한번, 노회찬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가 TV 토론에서 언급했을 때 기억되었다.)

 

이명박 정권의 반노동자 정책, 반민주 정책에 많은 이들이 치를 떤다. 그렇다. 정당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반MB 정치연합마저 모두 정당한 것일 수는 없다. 아마도 다음 대선, 2012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은 안 된다고 말하겠지만, 다음 선거의 한나라당 후보는 이명박이 아니다. 이명박이 아니면 어떤 대안이냐고 물을 때, 이미 실패한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는 후보를 또 지지하고 신자유주의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줄 것인가.

 

적어도 노동자들에게 이명박-노무현과는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면, 앞으로 2년 반은 그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들이 해야 할 일이다. 선거 직후부터 이런 질문을 시작해야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따라서 반MB연합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위기의 진정한 원인과 노동자 민중의 삶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쟁점을 제기해야한다. ‘투표’가 아닌 노동자 민중 스스로의 운동, 투쟁으로 말할 수 있어야한다(그래야 비로소 ‘투표로 말하는’ 것도 의미가 있게 된다).

 

그것을 제기하기 위한 다른 방식의 정치연합을 구성하고, 이 정치연합을 위한 정치적 쟁점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사회운동, 민중운동, 특히 노동자운동이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이미 실패한 신자유주의를 2010년 대선에서 또 부활시켜주는 우를 범할 것인가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비록 이번 지방선거에 아예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라고 해도 2년 반을 환멸만 하고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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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와 그람시 그리고 레닌

  • 분류
    건설론
  • 등록일
    2010/05/22 13:49
  • 수정일
    2010/05/22 13:49
  • 글쓴이
    서른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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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와 그람시 그리고 레닌

 

1. 서언-세 혁명가들의 실천의 배경

우리는 이들 위대한 실천가이자 이론가들의 저술과 주장이 어떠한 실천적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후세 사람들이 글의 배경을 무시하고 세 사람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에서 국가는 모든 것이었으며 시민사회는 초보적이었고 유동적이었다. 서구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존재하여 국가가 흔들리면 시민사회의 견고한 구조가 즉시 나타났다. 국가는 단순히 외곽의 도랑에 불과하며, 그 뒤에는 요새와 토루의 강력한 체제들이 버티고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엄청나게 많은 국가별 사례가 있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각 개별 국가에 대한 엄밀한 검토가 필요하게 된다.(그람시, 옥중수고)

 

레닌이 활동했던 러시아는, 부르주아 혁명도 추진할 세력이 없을 만큼 뒤떨어진 나라, 빈농이 인구의 다수이고, 대공장 노동자는 소수인 그런 까닭으로 노동자 농민의 동맹으로 혁명을 추진해야 했던 나라였고, 짜르 전제와 비밀경찰의 감시와 탄압 하에서 조직의 보호가 중요한 그런 나라의 혁명의 지도자였다.

 

로자는 카우츠키로 대변되는 사회민주주의당이 의회의 다수를 차지한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활동했다. 또한 당이 체제내화하면서 당의 중앙이 관료화되어, 개량을 쌓아가면 체제가 극복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개량주의자와 타협주의자 그리고 기회주의자가 판치는 그런 환경 속에 있었다. 그 당이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표를 던질 때까지 로자는 당의 중앙과 관료와 투쟁하면서도 새로운 당을 만들 생각은 가져보지 못했다. 그러한 로자에게 관료주의와 기회주의를 극복하는 힘은 대중의 열정과 자발성이었다. 당의 목적의식성과 지도성에 대립하는 자발성과 자생성이 아니었다. 그가 만든 스파르타쿠스단 역시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목적의식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점에서 그녀는 레닌과 전혀 의견의 차이가 없다.

 

그람시는 산업화된 북부와 봉건적 잔재가 남아있는 남부로 확연히 구분되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다. 그 역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강조했다. 특히 카톨릭의 존재감이 큰 나라에서 그리고 근대국가의 형성이 뒤진 나라에서 활동했고, 무엇보다도, 혁명의 고양기가 지난 다음에 파시즘의 성장을 보았다. 파시즘이 중간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혁명세력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 현상, 왜 노동자계급이 노동자계급의 사상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사상에 포획되는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혹은 이데올로기의 국가기구로서 교회와 정당과 학교, 언론 등의 계급적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레닌이 억압에 의존하는 짜르 치하에 있었다면, 그람시는 상대적으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레닌에게는 모순이 심화되고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지배계급을 파탄시킬 기동전의 준비가 과제였다면, 그람시에게는 상부구조의 제 영역에서 지적 도덕적 우월성에 기반한 대항 이데올로기의 창출과 헤게모니의 장악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회에서 활동했다. 혁명의 궁극적 형태는 기동전이겠지만, 그 과정은 진지전의 역할이 필수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했고, 이러한 사정은 언론과 문화의 영역에서 대중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있는 현대자본주의의 혁명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점진주의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그람시에게 있어서 진지전이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이고 따라서 가차없이 수행되어야 할 성질의 투쟁이었지, 선 이데올로기 투쟁 후 기동전의 개념이 아니었다.

그람시 역시 자발성에 대한 당의 역할 즉 목적의식적 지도체로서의 당을 위해 헌신했다.

레닌주의를 구분하는 표지란, 대중과 당과의 관계에서 자발성에 대한 목적의식성의 강조에 있다. 나는 이것을 자발성의 목적의식성과의 통일 혹은 수렴으로 부르고자 한다. 바로 이점에서 로자나 그람시는 레닌주의자이고, 맑스주의를 발전시킨 실천가들이다. 그럼에도 소부르조아 사이비들이 이들 삼자를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것으로 몰아가는 것은 황당한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이하에서 로자와 그람시의 주된 주장을 요약해보고 그것이 현대 혁명과 실천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로자의 주장의 검토

로자의 기여는 먼저 혁명에 있어서 대중파업의 성격과 중요성을 밝힌 데에 있다. 일상투쟁과 혁명적 투쟁,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기계적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특정시기의 파업이 그 발단이 경제적 요구일지라도 투쟁의 의미는 다를 수 있다. 쌍차 해고자들의 투쟁을 자본의 노예되는 투쟁이라고 빈정대면서 탈주나 선동하는 자율주의자들의 반동적 언설까지는 고려할 필요도 없이, 해고는 살인이라면서 해고반대와 구조조정의 반대를 내세우고 장렬한 투쟁을 전개하고 수많은 계급투쟁세력이 합류한 것은, 완성차 업계의 구조조정을 앞두고 자본가들이 가장 조직력이 미약한 쌍차를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싸움은 총자본과 총노동자 계급간의 전초전이고 대리전의 성격이 있었다. 단순히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투쟁이 아니라 자본과의 일전이었다. 그점에서 쌍차는 자본과 국가를 한편으로 하고 노동자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정치투쟁이고 결렬한 계급투쟁이었다.

물론 이 투쟁은 많은 한계를 노정했다.

 

09 8월초 5키로씩 하염없이 달려야 했을 때, 연속 2주나 달려야 했을 때, 내가 본 것은 이 땅에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이럴거면 종이호랑이로라도 남아야 했을텐데, 총연맹이 참여하고 이끈 연대대오가 헬기에서 내던지는 색소주머니와 몇중대 되지도 않은 전경들에게 밀려버린 것은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수치였다.

대중 속에는 전투할 대오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투쟁할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보도블럭을 몇가마나 깨서 투석전을 준비한 대오도 있었고, 죽창과 파이프를 준비한 대오도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그것은 노동계급의 수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소환장조차 받지 않으려는 지독한 보신주의 때문이었다.

 

또한 쌍차 해고자들이 77일간 투쟁할 때, 총연맹은 아니더라도, 금속연맹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완성차 노조만은 연대파업을 했어야 했다. 당장 내 목의 칼이 아니라고 외면할 때, 식수나 보내고 성금이나 보낼 때 그 동지들은 얼마나 야속하게 생각했을까? 당신들도 당해보면 그리고 당신들 혼자 힘으로 투쟁을 승리로 이끌 힘이 없으면 그때 얼마나 다른 동지들의 연대가 소중한 것을 알게 된다. 같은 처지의 동지와 연대하는 것 그것이 노동자 계급의 연대다. 그것이 계급의식이고

이 땅의 노동운동이 위기라는 것은 노동자들이 계급으로서 서지 못했다는 것. 계급으로서 사고하고 저항하고 투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용산투쟁은 보상금의 다과를 둘러싸고 시작되었지만, 공권력에게 학살을 당함으로써 국가와 공권력의 시민에 대한 살인의 차원이 제기되고, 그 본질에 건설자본과 지주자본의 이해에 복무하는 계급국가로서의 공권력의 본질이 관철되는 성격 나아가 상대적 과잉자본인 투기적 자본의 운동이 야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순에 대한 저항과 그에 대한 억압을 담당하는 신자유주의 경찰독재체제와의 모순도 노정되었다. 투쟁의 깊이에 따라 여러 차원의 성격과 모순을 갖는 이 싸움 역시 쌍차 투쟁과 마찬가지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일상투쟁과 혁명투쟁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어리석음을 질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로자는 독일 사민당이 관료적 중앙집권제하에서 대중을 수동적 대상과 동원의 대상으로 사고하는 현실 속에서, 관료제의 위험과 중앙집권제의 위험, 그리고 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대중의 자생성에 굴복한 것이 아니었음도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역사적 운동은 소수의 또는 소수의 이익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압도적인 다수의, 압도적인 다수의 이익을 위한, 자작적이고도 독자적인 운동이다.(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각성되지 못한 대중의 선봉에 선 각성된 소수가 혁명을 수행하던 시기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사회조직의 완벽한 변혁이라는 과제가 있는 곳에서는 대중이 스스로 변혁과정에 참가하여 그들 스스로 과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며 그들이 몸과 마음을 바쳐 행동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엥겔스, 프랑스 계급투쟁 서문)

맑스와 엥겔스의 정신은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각성된 의지와 행동이 없다면 사회주의란 있을 수 없다라는 로자의 주장은 서로 상통한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강령에서 로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단지 자신의 목표를 굳게 확신하는 노동자계급의 한 부분일 뿐이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광범위한 노동운동을 이 운동의 역사적 책무로 향하도록 모든 국면에서 지도하는 그런 부분일 뿐이다.

전 독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모호하지 않고 분명한 의지에 의하지 않고서는, 즉 이 정치조직의 관점. 목표, 투쟁방법에 대한 의식적인 동의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결코 정부적 권위를 가로채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당이 대중의 선진부대이며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지도의 관점이 관철되고 있다. 다만 오늘날의 의식에서 볼 때 당이 시민사회의 일부분이라면 즉 임의단체라면 시민사회로부터 독립한 국가와 정부의 초월적 권위를 당이 갖는 것은 무리이다. 즉 대중의 자치조직인 소비에트나 평의회가 국가기관 혹은 정부로 전화하여 권력의 담지자가 될 수 있어도 당이 권력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당은 대중조직 속에서 혹은 소비에트 속에서 그의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실천을 통하여 대중의 신뢰 속에서 지도를 관철해야 한다. 당은 다른 당이나 정파와 함께 대중조직 속에서 신뢰와 권위를 다투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무오류 혹은 이성의 화신으로서의 당이 소비에트의 위에 서서 보다 높은 선험적 권위를 가지고 대중을 지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스탈린주의의 오류이다. 당은 지도체가 아니라 헌신체여야 하는 것이다.

 

로자가 레닌의 지난친 중앙집권주의를 비판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 레닌 역시 러시아와 같은 엄혹한 사정이나 대중의 낮은 의식이 아닌 발달한 서구에서는 당이 다른 모습을 가졌을거라고 말한 바 있다. 레닌은 유연하고 유능하고 현실적인 지도자였다. 달리 말하여 레닌의 주장 중 러시아적인 특수성에서 나온 주장과 혁명 일반에 관철되는 보편적인 주장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혁명조직에서 관철되는 민주집중제는 의결의 민주주의와 실천의 통일성에 관한 것이다.

문제는 당내 민주주의가 어떻게 관철되어야 하는가이다. 일반적으로 세포에서 분회, 지역, 중앙 등등 중층적으로 대의제가 시행될 때 중층적 대리주의의 위험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엄혹한 상황 속에서 총회 민주주의를 관철하기 힘들고, 또는 일상사를 모두 총회에서 다루기 힘든 만큼, 유능하고 헌신적인 인재에게 권한과 대리의 위임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이 위임의 단계는 적을수록 좋다. 군림하지 않은 중앙, 언제든지 소환되는 선출직, 총회 또는 그에 버금가는 대의원대회에서의 중요사항의 결정과 일상사와 집행의 위임 이러한 모습은 어느 정치조직이나 갖추고 있는 문제이다.

콤뮨이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라고 하는 것은 대중의 자기지배의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대중이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조직은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일 수 박에 없다. 여기에서 아무리 중층적으로 상층 집행부나 대표를 선출하고 위임한다고 하여도, 그들은 권위를 가진 대리인이 아니라 대행인으로서의 혹은 그를 선출한 단위의 머슴으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즉 헌신할 의무 외에는 아무런 특권도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헌신의 원칙과 탈권위주의의 원칙이 갖춰진다면 과두제의 철칙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3. 그람시의 여러 주장과 개념의 검토

 

토대와 상부구조-국가 그리고 수동적 혁명

 

우리가 대중들에게 훌륭한 역사적 분석과 제국주의의 모순에 대한 경제적 논문들을 제시했을 때, 히틀러는 그들의 감정적 존재인 가장 깊은 뿌리를 움직였다. 맑스가 언급했듯이, 우리들은 주관적 요인의 실천을 관념논자들에게 넘겨 주었고,, 스스로는 기계론적인 경제적 유물론자들처럼 행동했다.

 노동자 대중의 총체성 속에는 갖가지 차별적인 의지가 존재한다. 극좌주의적 의지, 개혁주의적 의지, 자유민주주의적 의지 등이 존재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또한 일정한 한계 내에서는 심지어 파시스트적인 의지도 존재한다. 자본가들의 수중에 언론매체가 독점되고 따라서 일반이익으로 표현되는 그들의 이익에 따라서 정부와 정당이 정치적 이슈들을 강요할 가능성이 높은 부르주아 체제가 존속하는 한, 갖가지 상이한 의지들을 내포하는 노동자 계급의 의지는 필연적이다.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모든 변동은 구조[, 토대]즉각적인 표현으로 제기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사적 유물론의 핵심적인 주장은 일반적으로는 초보적인 소아주의로 비판되어야 하며, 실천적으로는 맑스의 진정한 입장과 구분되어야 한다.

즉각적인 경제위기 그 자체가 근본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창출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 위기들은 단순히 어떤 사고양식의 유포에 더 유리한 영역 그리고 계속되는 민족적 삶의 전체 발전을 내포하는 문제제기 및 해결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역사적 정치적] 사건에 직면하여, 경제주의는 관련된 사람 중에 누가 처음부터 이득을 보게 되겠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며, 직접 이득을 보는 자들은 특정 지배계급의 분파라는 식으로 오류일 뿐 아니라 단순한 추론을 통해 대답한다.. 이러한 비오류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이론적 중요성도 지니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단지 실천적 효율성에 대한 최소한의 암시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오직 도덕적인 교훈과 인간성에 대한 무한한 의문들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람시가 예로 든 리소르지멘토(1860~1861)란 외세(오스트리아,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며 작게 쪼개져 있던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는 민족운동으로,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과거 봉건귀족의 후예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로 탈바꿈한 카부루(Cavour)가 이끄는 온건파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에 능했던 마찌니(Mazzini)의 급진파이다. 마찌니가 사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봉건사회의 '침전물'을 말끔히 제거하기 위한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이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급진파가 자신들이 점령한 남부를 온건파에 헌납하고, 이에 흡수됨으로써 끝을 맺게 된다. 이후 마찌니는 이탈리아 정치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수동적 혁명이란 대중의 급진적 변혁운동과 열망을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세력 때로는 지배계급의 보다 자유주의적인 분파, 혹은 불철저한 중간계급이 급진적 변혁 대신에 체제의 개량으로 수렴하는 변화를 말한다. 기층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배반당한 불철저한 혁명이라고 하겠다. 보나파르티즘이나 파시즘, 혹은 87항쟁으로 성립한 87년 체제 역시 그러한 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람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왜 기층민중은 배반당했는가이다. 압도적 힘의 우위나 헤게모니상의 우위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중의 동원에 한계가 명백할 때 기동전만을 사고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체제가 단지 물리적 힘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참호와 반발력 그리고 위기를 수렴하고 자기변신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 의미에서 헤게모니와 진지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낡은 반영론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유물론은 존재는 우리의 의지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라는 기본명제에서 출발한다. 이때 인식은 존재의 반영이겠지만 기계적인 반영이 아니라, 역사 혹은 사회는 의지를 가진 우리들 인간이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우리의 의식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 반작용을 한다.

상부구조 역시 토대의 반영 혹은 본질의 관철이라는 측면과 함께 반작용 즉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규정적인 것, 본질적인 것, 현상적인 것, 상대적 자율성의 개념은 현실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다.

오늘날 토대 또는 경제주의적 환원 혹은 본질환원적인 입장에 서는 사람은 드물지만, 우연이라는 현상 속에서 관철되는 필연으로서 본질환원적 사고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본질적이지 않은 제 계기와 반작용의 여지를 두지 않은 채 모든 현상이 본질의 관철임을 밝히려는 무수한 시도들이 있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구체에서 추상으로가 아니라 추상에서 추상으로 논리적 전개를 거듭한다. 그러한 결론이 궁극에 있어서 옳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문제는 경향 속의 관철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국가가 부르조아지의 공통사를 처리하는 위원회라고 할 때, 즉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도구라는 입장 결국 본질론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 국가의 행위가 총체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관철하는 것은 맞겠지만 현실 정치는 제 계급의 이해관계의 충돌의 장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본질론의 입장에 섰을 때 우리는 부르주아 정치체제의 다양한 형태인 보나파르트 체제나 파시즘의 체제, 그리고 사민주의적 체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성립을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 이 난관을 벗어나는 방법은 상대적 자율성이다.

 

이데올로기, 대항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지배계급이 광범위한 대중들의 주요한 정치적 수행(예를 들어 전쟁)에서 실패했을 때, 혹은 거대한 대중이 정치적 수동성에서 어떤 능동성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그 내용들이 합쳐져 혁명으로까지 나아가는 그러한 요구들을 내놓았을 때, 그러한 위기가 발생한다.

만약 지배계급이 합의를 상실하여, 즉 더 이상 지도하지 못하고 오로지 억압적 힘의 행사를 통해서만 지배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위대한 대중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되고 과거에 믿었던 것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위기는 바로 오래된 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못한 시기다. 이러한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증상들이 일어난다.

 그 성격상 진정으로 대중의 철학이 되려는 경향 때문에, 실천의 철학은 오직 논쟁의 형식 속에서 그리고 항구적인 투쟁의 형식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렇지만 출발점은 언제나 다수의 자생적인 철학이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일관성 있게 응집되어야 하는 상식이어야 한다.

이것은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단계이며, 하부구조로부터 복잡한 상부구조의 영역으로의 결정적인 이행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전에 싹 텄던 이데올로기가 으로 화해서 대결과 투쟁에 이르며 그것들 중의 오직 하나, 혹은 최소한 그것들 중의 오직 하나의 조합만이 주도적이 되고 우세하게 된다. 또한 그것은 정치적 경제적 목표의 조화만이 아니라 지적 도덕적 통일성까지도 주장하게 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투쟁이 조합주의적인 차원이 아니라 보편적 차원 위에서 전개되는 과정에서 모든 문제를 제기한다. 따라서 여러 종속그룹에 대한 중추적인 사회그룹의 헤게모니가 창출하게 된다.

 

상부구조인 국가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역시 동일하다.

국가는 그 본질적 요소가 폭력장치이겠지만, 폭력만으로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피지배자들이 동의, 공감, 수용하지 않는 한 그 체제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역할 특히 지배 이데올로기와 대항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은 그람시의 위대한 업적이다.

레닌의 주요 업적은 경제적 정치적 위기시의 기동전으로 부르주아 체제를 타파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론이었다. 체제의 정당성을 잃고 폭압에만 의존하는 러시아의 상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보다 자코뱅적인 강력한 혁명정당의 리드가 훨씬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레닌의 당은 물질적 힘이다. 대중을 동원하고 장악하는 힘에 관한 과학이었다.

그런데 부르주아 체제는 신분제 사회와 달리 소유권과 인신의 자유, 참정권 등에 있어서 보편적 자유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내용과 형식의 차원에서 볼 때 부르주아 국가는 만인이 평등한 보편의 국가라는 형식 속에서 부르주아의 이해를 총체적으로 관철하는 체제이다. 이러한 내용과 형식간의 모순은 피지배계급에 대한 노골적인 폭압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통제와 포섭을 필수적이게 한다. 어느 체제나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중요하겠지만 부르주아 국가는 그 태생적이고 본질적인 모순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자본과 노동이라는 화해할 수 없이 적대적인 모순이 관철되는 토대의 반영이 아니라, 적대적 이익을 관철하면서도 체제의 지속성을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적인 억압과 순치가 필연인 체제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이러한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면, 혁명은 단순히 국가 장치 혹은 국가권력의 쟁취의 과정이 아니라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의 투쟁과 제압 즉 대항이데올로기의 창출과 확산의 과정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계급투쟁은 토대 또는 경제의 영역 혹은 생산수단을 둘러싼 생산의 영역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수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들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사회 역시 단순히 생산의 적대적 성격을 지양하는 사회가 아니라 유적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고 전인적 발전을 추구하는 사회라고 했을 때,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은 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는 이것을 기동전에 대비한 진지전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람시를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진지전을 혁명주의가 아니라 점진주의로 왜곡하고 있다. 그람시의 주장은 이데올로기 영역을 매개로 혹은 단계적으로 접근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국가권력의 장악만을 중시하는 경향에 대하여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치열한 혁명적 투쟁을 애기한 것이다.

 

본질은 그 자체로 모습을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찰과 모순을 심화시켰을 때 나타난다. 우리는 거리를 걸을 때 경찰의 폭력적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우리들의 요구를 가지고 도로와 광장을 점거했을 때,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폭력적으로 진압을 당할 때 폭압기구로서의 국가의 본질이 들어나는 것처럼, 철거민들이 시키는 데로 순순하게 따르지 않고 망루에 올랐을 때 민중에 적대하는 친자본으로서의 국가의 본질이 명료하게 된다. 이때 본질은 현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억압에 대한 저항 그리고 억압적 이데올로기와 문화에 대한 저항은 그 이데올로기와 문화와 국가와 체제의 본질인 적대적 계급적 성격을 드러낼 것이다. 결국 그람시가 얘기하는 대항 이데올로기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계급투쟁을 전개하자는 것이고, 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유연성과 적응성에 비추어 볼 때 필수적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헤게모니 투쟁이란 지적 도덕적 우위를 빼앗는 싸움이다. 모든 투쟁에서 물리적 충돌 이전에 지적 도덕적 우위의 확보가 관건인 것은 이데올로기 영역의 문제만이 아니다. 총이 없는 시민이 무장한 군대를 이기는 것 역시 지적 도덕적 우위가 확보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일회적이거나 순차적 점진적 매개적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대항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고 헤게모니를 확보해 가는 싸움은 현대 혁명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대중과 조합과 당, 자발성과 의식성, 평의회,

‘… 조합관료는 산업적 합법성을 영구적인 상태로 인식한다. 그는 자산가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 합법성을 자주 옹호한다. 그는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 속에서 오직 혼란과 악의만을 발견할 뿐이다. 그는 노동자 투쟁을 이해하지 못한다.

러시아 혁명, 헝가리 혁명, 독일 혁명 이후에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는 생성될 수 없으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역사라기보다는 그들 관계에서 생성된 근본적으로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믿게 되었다.

조합의 본질적 속성은 공산주의적이라기 보다는 경쟁적이다. 조합은 급진적 사회변혁의 도구일 수 없다. 즉 조합은 프롤레타리아에게, 능란한 관료들과 일반적 산업문제에 관한 기술적 전문가를 제공할 수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기초가 될 수는 결코 없다. 조합이 스스로 사회를 지배할 수 있고 또한 그럴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개인적 역량을 생성할 가능성이란 전혀 없다. 조합은 공산주의 사회발전의 생명력과 리듬을 구현할 지도부를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정당과 노동조합의 혁명적 조직들은, 시민들간의 관계가 중요하게 존속되는 정치적 자유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영역 위에서,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인과 발전으로서 탄생한다. 혁명과정은 억압자와 피억압자, 착취자와 피착취자와의 관계는 존속하지만, 노동자를 위한 자유나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은 공장 내의 생산 영역에서 일어난다.

평의화가 존립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생산을 위한 직접적인 의무를 부여받고 그들의 작업을 개선하도록 하며,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규율을 창안하여 생산자, 즉 역사 창조자의 심리학을 만들어내도록 한다. 노동자들이 이 새로운 의식을 자각하면서 조합으로 들어가며, 조합은 계급투쟁이란 단순한 활동을 추구하는 대신, 경제생활과 노동기술을 새롭게 구성하는 근본적인 과업에 헌신할 것이다. 즉 조합은 공산주의적 문명에 적합한 경제생활과 전문기술을 정교화하는 데 헌신할 것이다.

공산주의사회는 생산 및 교환수단 위에 건설된 자연적인 구성체로서만 인식될 수 있다. 또 혁명은 이러한 구성체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역사적 인정의 행위로서만 인식될 수 있다. 따라서 혁명과정은 자본주의적 소유체제 아래에서 공동생활에 내재해 있던 모순의 충돌로 야기되는 노동자계급의 자발적인 운동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투쟁기구들은 이러한 거대한 투쟁의 집행자일 뿐이다. 이와 동시에 사회당은 이러한 타파 및 건설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집행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한 과정의 형식, 즉 지도자들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지는 유연한 형식은 결코 아니며 또한 그렇게 인식될 수도 없다.

 

그것[지도력]은 구체적인 감정과 외관, 세계에 대한 단편적 개념을 통해서 특정 역사관계 속에서 형성된 실제적인 인간에 적용되었다. 자발성이라는 요소가 무시되지 않았으며 경시되는 것은 더욱더 아니었다. 지도력은 교육되고 지도되며 외래의 오명으로부터 정화되었다. 그리고 지도력의 목표는 근대이론[즉 맑스주의]과 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동감있고 역사적으로 유효한 방식을 통해서였다. 지도자들 스스로 운동의 자발성에 대해 애기했으며 그러한 태도는 정당했다. 이 주장은 자극이자 강조점이었으며 깊이 있는 통일성의 한 요인이었다. . 그것은 대중들에게 역사적 제도적 가치의 창조자이자 국가의 건설자임을 이론적으로 자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자발성의식적 지도력 혹은 규율간의 통일은 이것이 단순히 대중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그룹들에 의한 모험이 아니라 (진정한) 대중정치인 한 정확히 예속된 계급의 실제적인 정치행동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각 개인은 자신의 직업적 행위 외에도 일정한 지적 행위를 수행하게 된다. 다시 말하여 그는 철학가이자 예술가이며 또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세계에 대한 특정의 개념을 가지고 참여하며 도덕적 행위에 대해서도 의식적인 지침을 가진다. 따라서 그는 세계에 대한 어떤 개념을 지지해주거나 아니면 그것을 교정하는데, 즉 새로운 사유양식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새로운 지식인이 되는 양식은 이제 더 이상 감정과 열정의 외관이나 순간적인 원동력인 웅변에 내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양식은 단순한 웅변가로서가 아니라 건설자, 조직자, 영구적인 설득자로서 실제 생활에 적극 참여하는 데 있다.

 

이중권력은 그 자체로 혁명적 이행기의 모습이다. 대립하는 어느 계급도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두 개의 권력을 낳는 것이고, 이 시기는 장기에 걸칠 수 없다. 오직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을 제압함으로써 종료된다. 이때에 머뭇거림은 단지 죽음일 뿐이다. 이 때에 필요한 것은 단호한 의지와 유능한 능력을 갖는 그리고 신뢰받는 항쟁의 지도부가 필요한 것이다. 당은 이날을 준비하는 것이고 이 날에 자기의 존재의의를 찾는다.

 

대중의 자발성은 고무되어야 하나 결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중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집단지성을 창출할 수 없다. 오직 훈련된 당적 지성만이 필요한 순간에 올바른 방향과 방책을 제시하고 대중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대중은 상승기에는 혁명가보다도 더 용감히 앞서 나가겠지만 쇠퇴기에는 누구보다 먼저 사라진다. 주객관 정세와 대중의 열망과 의식 그리고 처지를 냉혹히 타산하고 이끌어나가는 것이 당의 역할이다. 이때의 당은 그람시가 얘기하듯 마키아벨리의 군주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군주처럼 혜안을 가지고 제시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신뢰에 기반하여 그들의 동의와 공감 속에서 즉 군림하지 않고 존경받고 신뢰받는 지도세력으로서 혁명을 이끌 것이다. 이 점에서 군주에 비교한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 역시 당의 역할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평의회는 혁명적 시기에 대중이 깨우친 조직의 형태이다. 파리콤뮌만이 아니라 모든 혁명적 저항조직은 반체제의 열망으로 가득 찬 평등한 성원들이 어떠한 기성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전체의 성원이 함께 결정하고 함께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이다. 혁명적 양기에 이러한 평의회 특히 생산수단에 대한 지기지배와 자주관리를 관철하는 공장평의회는 오직 혁명적 고양기라는 특수한 시기에만 성립될 수 있다. 즉 일상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조직형태가 아니다. 다만 일상시기에는 평의회 민주주의를 작동원리로 하는 저항조직을 지속가능성이 담보되는 한에서 건설할 수 있다. 민주적 조직의 건설과 민주적 실천은 혁명조직만이 아니라 모든 대중조직 역시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관하여 선재적 투쟁이라고 하여 공장평의회 그 자체의 건설을 일상적인 목표로 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부르주아가 전복되기 이전에는 대중은 평의회를 지킬 힘이 없다. 고양기에 건설된 평의회는 쇠퇴기에 많은 보복을 수반한다. 그리고 대중은 상처입고 움츠러든다.

 

슬로건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반드시 관철해야 하는 대중의 열망과 의지를 담은 슬로건이 있는가 하면, 관철할 힘이나 전망이 없지만 의식의 고양을 위해서 혹은 선전과 선동용의 슬로건이 있다. 슬로건은 처음부터 제시되기도 하고 상황의 진전에 따라 바뀌거나 새로운 슬로건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람시가 평의회를 찬양했다고 해서 모든 시기에 선재적인 prefugurative 투쟁의 형태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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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그리스 위기의 전망과 사회운동의 대안

그리스 위기의 전망과 사회운동의 대안
경제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유럽통합의 모순
정책위원회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sola&id=677


이달 들어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은 재정위기에 빠진 그리스에 총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데 이어, 유로화 붕괴를 막기 위해 7500억 유로의 재정안정 기금 조성을 골자로 한 대책을 수립했다. 이로써 당장 그리스 채무불이행의 가능성은 줄었으나, 남부유럽 각국의 긴축정책으로 인한 성장둔화와 유로화 붕괴가능성이 이야기되면서 유로화 하락, 유가 하락, 금값 상승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나아가 이번 대책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지적과 함께, 그리스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살찐 돼지 국가들(PIIGS,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스페인)’의 재정위기로 전염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곳곳에서 제출되고 있다. 설사 이번 조치가 실효를 발휘하여 재정위기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더라도 장차 유럽연합이 ‘유럽 역내 불균형’을 근본적으로 시정하지 못하는 이상 유럽화폐동맹(EMU)의 균열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과연 그리스 재정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또 이에 대한 그리스 정부와 유럽연합의 해법이 지닌 문제점은 무엇인가. 향후 그리스 재정위기 사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와 같은 비상한 정세에서 그리스와 유럽 사회운동의 대안은 무엇인가. 아울러 최근 그리스 사태가 국내 사회운동에게 제시하는 교훈은 무엇인가. 아래에서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스 위기의 전개 추이

지난 해 10월 파판드레우 신정부가 2009년 예상 재정적자를 종전의 6%가 아니라 12.7%라고 발표하며 그리스 재정위기가 가시화되기 시작됐다. 독일과 프랑스 등 EU의 중심국은 그리스의 국가부도 사태를 방지하고 유로지역의 안정을 위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지만 한동안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올해 초 그리스 정부는 2012년까지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미만으로 축소한다는 요지의 안정및성장프로그램을 제출하고 EU와 IMF의 지원을 요청했다. 금년 중 530억 유로의 자금을 조달해야 하며, 특히 4-5월중 200억 유로에 달하는 국가채무의 만기가 도래하는 그리스로서는 필사적이었다. 2010년 내로 재정적자를 GDP 대비 4% 포인트를 감축하는 것을 시작으로, 예산제도 및 공공행정 효율성을 제고하고 투자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노동시장과 사회보장제도 개선 등 구조조정을 강력하게 실시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유럽 각국의 정상들은 3월 말, 금융시장에서 그리스의 자체 자금조달이 불충분할 경우 최종적인 수단으로 유로지역 회원국과 IMF가 공동으로 자금을 지원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물론 엄격한 지원조건을 부과하고 EU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ECB)의 평가에 기초하여 유로지역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지원 여부를 결정한다는 단서가 부가되었다. 하지만 국제 신용등급 평가회사들은 작년 말에 이어 4월 말 다시 한 번 그리스의 등급을 낮춘 것은 물론 포르투갈의 신용등급마저 강등했다. 재정위기의 전염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유로화 가치가 최근 1년간 최저치로 하락하는 등 유럽의 금융시장은 패닉으로 치달았다.

결국 5월 초 EU와 IMF는 그리스에 총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당초 예상치의 두 배를 훌쩍 넘는 규모로, 2012년까지 만기가 돌아올 그리스 국채(800억 유로)를 모두 막고 그동안 생기는 재정적자까지 보전할 수 있는 금액으로 평가되고 있다. 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 15개 유로지역 회원국 지원액 800억 유로의 80%를 부담할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의회도 그리스 지원 방안을 신속히 통과시켰다.

그리스 정부는 EU의 구제금융 지원 합의에 앞서 세금 인상, 공무원 급여 삭감, 연금 삭감을 골자로 하는 강도 높은 재정긴축 프로그램을 제출했고, 곧이어 그리스 의회도 거센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 안을 가결했다. ECB도 그리스 국채에 대한 신용등급 한도 적용을 중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국제 신용등급 평가회사들이 그리스 국채의 신용등급을 추가로 하향조정하더라도 ECB로부터 국채를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어서 EU 27개국 재무장관들은, 유로화 붕괴의 불안에 대비하기 위해 7500억 유로 규모의 재정안정 기금 조성을 골자로 한 전방위 대책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유럽집행위원회(EC) 대출을 유럽중앙은행(ECB)과 유럽연합 국가가 보증하는 것을 요체로 하는 EU 재정안정체제(ESM) 구축 방안에도 합의가 이뤄졌다. 여기에는 기존의 EU-IMF 지원금과 별도의 700억 유로 규모의 긴급 안정화기금을 조성하는 방안도 포함됐다고 알려졌다.

ECB도 200억 유로 상당의 그리스․포르투갈․스페인 단기 국채를 매입하는 방침을 수립했다. 그동안 그리스 등은 투기자본의 공격으로 국채 금리가 급등, 국채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ECB가 국채시장에 직접 개입해서 불안정성을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 연방준비제도(FRB)도 ECB, 영국중앙은행(BOE), 스위스중앙은행(SNB) 등과 통화 스와프 계약을 체결하여 유럽에 달러 유동성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EU-IMF 지원 방안의 한계

이번 종합 대책은 독일, 프랑스와 같은 유럽연합의 중심국들과 미국의 긴밀한 공조를 배경으로 한다. 유럽 정상회의에 앞서 독일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공동 기고문을 통해 회원국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경고했으며, 같은 시점에 미국 오마바 대통령은 두 정상에게 ‘보다 단호한 조치’를 주문한 바 있다. 그리스를 비롯한 남부유럽발 금융불안을 방치할 경우 유로화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고 그렇게 될 경우 2007-09년에 이어 제2의 세계 금융위기가 촉발될 수 있다는 공동의 위기의식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긴급 국제공조 방안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듯, 5월 중순에 접어들며 국제금융시장의 패닉상태는 다소간 진정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ECB 트리셰 총재도 그리스에 대한 지원 결정은 유로존에 대한 시장신뢰 회복과 재무안정성을 보장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번 구제금융 지원 조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할지 불분명한데다 재정적자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 재정위기가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속속 제기되고 있다.

우선 전문가들은 현재 그리스 재정위기를 단순한 유동성 문제가 아니라 지불능력의 문제로 보고 있다. 그만큼 그리스의 국가부채 문제는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뜻이다. 금융기관들의 분석에 따르면 2013년 그리스 국가부채 규모는 GDP의 150%로 팽창할 전망이다. 국채금리 6%를 적용하면 GDP의 9%를 이자로 지불하는 셈인데, 이는 그리스 정부 세수의 25%를 차지하는 것으로서 원천적으로 유지 불가능한 비율이다. 과거 아르헨티나 등의 채무불이행 사례에 비춰볼 때, 2013년 경 그리스가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금조달을 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EU-IMF의 지원 프로그램에 대해 ‘값비싼 도박’이라는 금융시장의 비난이 제기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리스의 부채 상환 능력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3년 뒤인 2013년 5월초까지 만기 도래하는 국가부채는 700억 유로로, 올해 그리스가 약속한 재정적자 목표를 지킨다고 해도 3년간 총 500억 유로에 달하는 누적 재정적자를 채권발행을 통해 메워야 한다. 이 경우 두 수치를 합친 것만 해도 1200억 유로로 이미 승인된 EU-IMF의 지원규모 1100억 유로를 초과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그리스가 추가적인 금융지원 없이 부채를 ‘돌려막기’ 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이러한 예상이 금융시장에 확산된다면 결국 구제금융 계획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종합할 때 이번 구제금융 조치가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부채구조를 조정하고 부채부담을 대폭 삭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지원방안이 결정된 직후 실시된 독일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기민당(CDU)이 패배해 상원 내 과반수 의석을 잃었다. 이는 향후 유럽 각국이 채무불이행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에게 추가적인 혜택이나 지원을 계속 부담할 가능성이 극히 불투명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른바 ‘도덕적 해이’가 만연한 취약국에 대한 재정 지원이 지원국의 국내 정치적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화폐동맹의 결함

EU-IMF 방안에 따라 그리스가 강도 높은 긴축재정을 추진한다고 해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재정긴축안은 그 자체로 노동자에 대한 사상 유례없는 공격을 의미한다. EMU 체제에 따라 자주적인 환율·통화정책을 구사할 수 없는 그리스는 결국 단위노동비용을 20~40% 삭감해 수출경쟁력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 민중들의 대대적인 출혈로 이어질 것이므로 정치적 실행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 게다가 EU의 자체 분석에 따르면, 그리스가 재정긴축안을 계획대로 실행할 경우 경제성장률이 -9%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 경우 오히려 재정적자가 심화되어 이 방안은 경제적 실행 가능성도 지극히 낮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 1990년대 말 환율위기 당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구조조정을 통한 노동비용의 가치절하와 함께 자국 통화의 대대적인 평가절하를 통해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세계경제가 금융화에 따른 경기상승 국면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방안은 실행 가능성이 있었다. 반면 구조조정이나 환율조정을 통해 수출경쟁력을 확보할 여지가 극히 협소한 그리스로서는 재정긴축에 따른 경기수축 압력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세계경제는 그리스 위기의 여파로 2007-09년 금융위기에 이어 재차 경기가 하강하는 ‘더블 딥’의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려면 그리스는 EMU를 탈퇴하여 자국통화를 대폭 절하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것은 곧 유럽을 비롯한 국제 금융시장으로부터의 분리, 즉 파국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는 왜 이와 같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일까. 그 원인과 배경을 EMU 체제에 내재한 근본적인 결함, 즉 ECB의 통화주의와 ‘유럽 역내 불균형’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보기로 하자.

1970년대 초 브레튼우즈체제의 붕괴 이후 환율변동이 경제에 미치는 파괴적 효과가 지속되자, 화폐공급과 금융에 대한 탈규제를 통해 위기를 관리하고자 하는 통화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78년 도입된 유럽화폐제도(EMS)는 회원국간 환율을 고정시킴으로써 환율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설정했다. 1992년 마스트리히트조약이 EMU를 위해 제시한 경제정책의 네 가지 수렴기준은 민족국가 화폐주권의 소멸을 의미했다(대표적인 기준은 정부의 연간 재정적자 폭은 GDP의 3% 이내, 공공부채는 GDP의 60% 이내로 한정하는 조항이다).

반면 EU에서 화폐동맹에 상응하는 재정동맹은 이뤄지지 않았다. 화폐정책에 비해 재정정책은 민족국가의 주권적 성격이 강한데다 조세제도, 재정지출 등은 국내 정치적 측면을 많이 반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의 위험을 내포하는 재정정책은 크게 제약됐고 회원국은 적자재정을 포기하고 균형재정의 범위 내에서 예산을 분배하는 선택지만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처럼 기술력과 생산성이 열세인 국가가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을 신축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독일 헤게모니 하 ECB의 화폐정책을 수용해야 하는 주변국들은 국내 거시정책을 모두 재정정책으로 부담하게 되었다. 화폐정책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면 적절한 금리인하와 유동성 확대정책을 통해서 부담을 재정정책과 함께 분담할 수 있지만, 이러한 정책조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내경제 여건을 고려할 때 확장적인 거시정책 수행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ECB가 긴축적 통화정책을 고수할 경우 팽창적인 재정정책을 수행할 수밖에 없어 재정적자가 확대되는 메커니즘이 확립됐다.

그 결과 EU 역내에서 수출경쟁력이 낮은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등 주변국들은 실질환율이 고평가되어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적으로 누적된 반면, 수출경쟁력이 높은 독일 등 중심국들은 실질환율이 저평가되어 경상수지 흑자가 지속적으로 누적됐다(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등 적자국의 상품수지 적자액 가운데 역내에서 발생한 부분이 90% 이상이었다). 전문가들은 “유럽 금융위기로 유로화가 10% 떨어지면 유로지역 경제는 5% 성장하고, 수출주도형 국가인 독일에게 더 높은 효과가 발생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스 위기의 전망

이러한 EMU 체제의 구조적 결함으로 말미암아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던 남부유럽 국가 등은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지출 확대 및 세입 감소로 재정 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EU 추정에 따르면, 2010년 아일랜드·스페인·그리스·포르투갈·이탈리아의 재정 적자는 각각 GDP대비 14.7%, 10.1%, 8.7%, 8.0%, 5.3%를 기록하여 적자 확대세가 지속될 전망이다. 또한 2010년 GDP 대비 국가부채 비중 역시 그리스 120%, 이탈리아 117%, 포르투갈 85%, 아일랜드 83%, 스페인 64%를 기록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ECB와 함께 남부유럽 국가에 대출을 제공한 독일과 프랑스와 같은 중심국들의 자산 부실화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남부유럽 국가들의 총대출 중에서 프랑스는 23%, 독일은 18%, 영국은 12%를 차지하고 있고, 남부유럽 국가 간 거래도 10%에 달한다. 게다가 유로지역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의 역내 교역 비중은 70% 내외로 교역의 연관성이 높기 때문에 개별 회권국의 문제가 빠르게 전이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러한 위기 확산 가능성에 직면하여 현재 EU 당국은 유럽통화기금(EMF) 창설, 유럽투자은행(EIB) 기능 확대, 유로채권(Euro Bond)의 발행과 같은 중장기 위기관리체계 구축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유로지역 회원국들간의 단기적인 재정이전을 비롯한 통합 예산관리 시스템과 재정규율의 엄격한 시행을 통한 재정통합 방안도 고려되고 있다. IMF도 유럽 국가 다수의 국가부채가 위험수준에 도달했으며 시급히 재정안정성 회복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권고에 따라 현재 유럽에서는 재정위기 가능성을 경고받은 영국·아일랜드·스페인은 물론 구제금융을 제공한 독일·프랑스도 임금 및 연금 삭감, 복지 축소 대책을 줄줄이 도입하고 있다.

한편 ECB가 그동안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채택하지 않았던 수량완화조치가 조만간 도입될 것이라는 관측도 제시되고 있다. 일단 현재까지 ECB는 물가안정을 핵심 목표로 삼는 ECB의 통화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하지만 ECB가 그리스 위기 대응 과정에서 담보규정을 완화하고 취약국의 국채를 매입한 것이 사실상 수량완화로 정책 운용의 기조를 전환한 것이고, ECB가 향후 6개월간 매입해야 할 국채의 규모가 무려 3천억∼6천억 유로 수준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바 추가적인 수량완화조치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ECB가 매입하는 그리스 국채가 사실상 정크본드 수준이고 유로화 가치도 계속 하락하는 추세여서 ECB의 자산이 부실화될 우려도 상당하다. 이는 그만큼 이번 그리스 위기의 충격이 막대하다는 징후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도적 보완책이 EU 재정동맹체제, 다시 말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유럽의 정치적 통합으로 발전한다는 보증은 결코 없다. 오히려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 위기는 결국 EMU 체제의 균열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편으로 그리스 사태의 여파가 여타 국가로 전염될 경우, 독일 등 주요 회원국의 구제금융 부담이 점차 확대되고 EU 회원국의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하면서 금리가 급등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구제금융의 실익이 적다고 판단하고 EU가 지원을 중단하면 부실 국가들의 연쇄적인 채무불이행은 불가피하다. 다른 한편으로 EMU 체제의 유지를 위해 당분간 구제금융을 지속하더라도 ‘유럽 역내 불균형’이 근본적으로 시정되지 못할 경우, 독일을 비롯한 중심국들이 강력한 통화정책의 도입을 위해 탈퇴할 가능성이 있다. 그밖에도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는 중심국과 디플레이션 우려가 있는 주변국 간 역내 불균형으로 인해 ECB가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큰 딜레마다.

사회운동의 대안

그렇다면 그리스와 유럽 사회운동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우선 그리스 노동자운동은 최근 양대 노총 주도로 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과 거리시위를 전개하면서 정부의 재정긴축안에 대한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들은 EU-IMF 지원 메커니즘이 그리스 민중들의 임금·연금·사회복지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본을 회생시키는 조치에 불과하다며 재협상, 부채탕감, EU의 안정및성장협약의 즉각적 폐기를 요구하기도 했다. 구제금융 조치의 본질은 금융자본, 특히 EU 중심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리스와 같은 주변국 민중의 출혈을 강요하는 ‘제국주의’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사회운동들도 그리스의 위기가 ‘마스트리히트 체제’의 모순의 산물이며 경제위기에 직면한 EU의 실패를 입증하는 첫 번째 사례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노동권에 대한 공격을 통해 수출경쟁력의 회복과 국가부채의 지불을 시도하는 EU-IMF의 해법이 비단 그리스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리스 민중들에 대한 연대를 표방하고 나섰다. 또 EU-IMF의 방안이 각국 화폐주권의 종속을 더욱 심화하고 금융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각국 정부가 도입하고 있는 재정긴축 방안에 대해 저항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럽 사회운동은 실패한 EU 모델을 바꾸고 ‘또 다른 유럽’을 건설하기 위해 어떠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먼저 “유럽 민중들은 위기비용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연대 유럽’을 위해 단결하자!”라는 공통의 구호에 주목할 수 있다. 이 구호는 현재 유럽 각국 정부의 공공지출 삭감 방안이 위기를 촉발시킨 금융자본을 위해 노동자계급에게 위기비용을 전가하는 메커니즘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일례로, 지난 3월 말 유럽노조연맹(ETUC)과 같은 유럽 노조들과 유럽좌파당(ELP)과 같은 정당들은 유럽공동행동을 통해, 유로화의 안정성을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 조치가 필요하다는 EU-IMF, 각국 정부의 제안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리고 이들은 노동권과 권력 및 소유의 민주화 없는 위기 탈출 전략은 기만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면서 유럽 노동자들의 연대를 호소했다.

다음으로 유럽 사회운동들이 이번 위기의 원인으로 금융화와 이를 지지하는 국제기구들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는 데 주목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ATTAC)의 경우, 금융거래에 대한 과세와 함께 ECB의 구제금융 혜택이 금융기관이 아닌 유럽 시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 각국의 정당들도 IMF의 구제금융이 ‘자본가의 이익에 복무하고 노동자의 실업과 빈곤을 증가시킨다’고 비판한다. 또 ECB의 대출은 ‘은행을 구원하지만 국가를 구원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재정위기에 몰린 국가의 정부채권이 금융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민간 신용등급 평가회사가 아닌 유럽차원의 공적 신용등급 평가회사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또한 ‘유럽 역내 불균형’이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바닥을 향한 경쟁’에 의해 상호 강화되어 왔다며, 유럽 수준의 초민족적 단체교섭을 활성화할 것을 주장하는 유럽 노동자운동의 흐름에 주목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EU의 ‘확대경제가이드라인’은 임금인상을 생산성 성장 이하로 억제하고 지리적·직종별로 임금을 차등화하는 내용을 명문화했고, ECB는 회원국이 임금 억제 정책에서 이탈할 경우 통화수단에 제한을 가하는 제재를 부과했다. 유럽의 노조들도 1980년대 이후 대체로 일정한 조정기를 거쳐 신자유주의적 ‘경쟁 지향 코포라티즘’으로 수렴됐다. 민족국가 수준의 사회협약과 함께 기업 수준에서는 양보협약-경쟁적 기업동맹을 통한 ‘조직화된 분권화’가 일반화되었다. 유럽 차원에서는 초민족적 수준에서 자본의 구조적 우위를 강조하는 ‘사회적 대화’를 통한 상징적 유럽 코포라티즘이 작동했다. 이때 개별 노조들의 대응은 ‘국가 대 국가’나 ‘기업 대 기업’의 경쟁으로 귀결되어 임금 및 노동조건 하향 압박을 강화하는 역설에 처하곤 했다. 장기 지속될 경제위기 아래에서 노동자의 민족적 분할 및 내부 노동시장 경쟁 압력도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바, 수출경쟁력을 위한 출혈적 ‘임금덤핑’을 지양하기 위한 유럽 차원의 공통 단체교섭 지침을 채택·적용하는 것과 같은 노동자 국제연대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유럽, 나아가 금융화한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은 그리스 위기 이후에도 줄곧 유사한 방안을 강요할 것이다. EU의 정치·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유럽 사회운동은 비상한 각오로 ‘또 다른 유럽’을 구체화하면서 대안적 정치·사회적 세력으로 부활해야 한다. 그들의 표현대로 ‘오직 유럽 민중의 저항만이 근본적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의 상황은 국내 사회운동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시한다. 2007-09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이어 그리스발 위기가 확산되면서, 결국 세계경제가 다시 한 번 침체에 빠지는 ‘더블 딥’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위기비용을 전가하려는 지배계급의 공세에 맞서 계급적 단결을 추구하면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민중적·국제적 대안을 구체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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