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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셨습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8/6 옥쇄파업 77일째, 공권력투입 18일째,

해고는 살인이다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온 쌍차 상균 지부장은 합의안을 보고하면서, "동지들이 많이 착잡하고 만감이 교차할 걸로 안다. 원안대로 정리해고를 철회하지 못하고 이런 내용을 말씀드려서 끓어오르는 분노는 있지만 지부장으로서 동지들에게 제 한계에 대해 변명하지 않겠다"면서 "동지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동지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미안합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정리해고를 다 막아내지 못하고 수십명의 동지들 앞엔 구속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동지들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살아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을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목숨을 담보로 최선을 다해서 싸웠는데 누가 평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한번도 제대로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한 것이 너무 죄송할 뿐입니다.

 

물도 전기도 없는 찌는 듯한 공장에서 밤낮으로 굉음을 울리며 괴롭히는 헬기와 용역과 구사대와 한몸이 되어 도발해오는 경찰을 볼 때마다, 살인진압 중지하라며 소리만 지르고 있는 자신이 너무 한스러웠습니다.

 

몸은 가 있었지만 물 한 모금 전달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이 한스러웠고, 몸은 함께 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죄불안석인 채로 마음만은 함께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산별노조의 전환 이유가 단위사업장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는데, 동지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총파업과 연대투쟁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강제진압이 시작되면 즉각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결의는 살인진압이 시작된 8/5 오후 최대한 빨리 총파업이 이루어지도록 하겠다임성규위원장의 말장난으로 휴지조작이 되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금속과 총연맹이 동지들의 투쟁을 배반한 것이지요. 같은 노조와 산하 노조의 조합원들이 죽어가는데 투쟁을 결의하고 조직하기는커녕 행여라도 싸우게 될까 봐 고의적으로 동지들을 배반한 것입니다.

 

어쨋거나 죽은 사람 없이 투쟁이 마무리된 이 시점에서,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 자신이 한탄스럽고 남 탓할 일은 아니지만, 금속과 총연맹의 지도부의 배신행위만큼은 비난받아 마땅할 일입니다.

 

옥쇄파업이 두달이 다되던 7/11(토) 서울역 용산추모대회에서 임성규 위원장이, 쌍차와 비정규 투쟁을 제대로 못해 죄송하고, 용산에 연대하지 못해 죄송하고, 지금이라도 투쟁과 총파업을 조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얘기하기는커녕, 벼락이 떨어져서 명박이가 죽으면 좋겠다는 둥, 삼각산이 무너져서 청와대가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둥 내년 지자체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심판하자’는 떡같은 얘기를 할 때부터, 죽기로 싸우고 있는 조합원들에게 달려가기는커녕 보신에만 신경쓰는 줄은 알았습니다.

 

8/2 오전 협상이 결렬된 후 기자회견에서, 다음 계획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금속의 지도부는 '휴가 중이어서 아직 아무 것도 검토된 것이 없다'고 말하고, '협상이 결렬될 수 있고 결렬되면 당연히 진압이 들어올텐데 아무런 대비책도 안 세워놨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곧 상집을 소집해서 논의해 보겠다'고 하더군요. 회사 방송에서 제대로 싸울 생각도 없는 놈들이 눈도장 찍으러 왔다는 비난이 빈말로 안들렸습니다

 

8/5일 아침 구사대에게 밀렸을 때, 200명이 넘는 학생들은 이안 아파트 못미쳐서 돌을 깨고 가로수에서 뽑은 몽둥이를 들고 저항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결합하고 있었고 그런데 갑자기 두시에 평택역에서 집회를 한다고 공지를 하더군요. 앞장서줄것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차라리 아무 말 없었으면 거기서 한판 싸움이 이루어졌을텐데 싸우지말고 모이라고 하니 몽둥이 버리고 밥먹고 평택역으로 모였지요.

 

강제진압시 즉각 파업한다고 결의한지가 언제인데 '최대한 빨리 총파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힘을 모아주라'는 임성규위원장의 발언을 들으니 코웃음밖에 안 나오더군요. 그래도 3시쯤 집회가 끝날 때 현장에서 모이자고 공지를 해서 당연히 심익아파트 앞으로 모이는 줄 알고 쫒아갔지요. 그런데 가는 도중 민노총은 오후 7시에 촛불문화제를 하기로 했다면서 한판 싸움을 결의한 각 연맹소속의 많은 활동가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더군요.

 

1000명 정도는 이안아파트 근처에서 이제나 저제나 합류할 민노총을 기다리면서 그저 그늘에서 시간만 때울 수 밖에 없었지요. 조금 나아진게 있다면 문화제를 평택역에서 안하고 현장에서 한다고 변경된 정도 돌이라도 깨서 한판 붙을려고 하는, 한시라도 빨리 공장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을 관리하기 위해, 연맹의 지도부가 장난질 친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겁니다.

 

낙담하지도 말고, 나약해지지도 말고, 남 탓 하지도 말고, 연대와 저항의 기풍을 다시 세워나가야 할 시점인 줄 알지만, 한마디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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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와 자율주의 비판

네그리와 자율주의 비판
 
김광석 | 진보전략회의


목차

1. Prologue

   ― 네그리 주장의 핵심과 그 배경


2. 제국주의인가 제국인가?

   2-1. 노동의 이동이 자유롭다는 주장은 허구이다.

   2-2. 국민국가의 부정으로서의 제국의 허구성

   2-3.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은 팍스 아메리카의 찬양일 뿐이다.

   2-4.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과 신자유주의 경찰독재국가의 성립

        ― 국민국가는 약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화되고 있다.

   2-5. 반세계화와 반자본 투쟁의 방법론


3. 비물질적 노동과 다중

   3-1. 비물질노동의 특징과 허구성

   3-2. 노동시간이 가치의 척도가 아니라는 궤변

   3-3. 산업예비군과 노동자중심주의

   3-4. ‘경향’이라는 방법론

   3-5. 네트워크적인 노동의 허구성

   3-6. 네트워크 조직론과 네트워크 투쟁의 허구성

   3-7. 절대적 민주주의와 혁명적 민주주의

   3-8. 다중, 민중, 대중, 그리고 노동자와 빈자의 차이

   3-9.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


4. 네그리의 제안들

   4-1. 도주와 탈주(exodus) 그리고 삐딱한 자세와 변증법적인 투쟁

   4-2. 보장소득

   4-3. 사랑의 공동체란 무엇인가?


5. Epilogue

   ― 네그리의 묘비에 바치는 헌사!

 

 

 

 

1. Prologue

 

 

 

-네그리 주장의 핵심과 그 배경 

 

 

이 글에서는 네그리(Antonio Negri)가, 특히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의 공저인 ≪제국(Empire)≫(2000)(윤수종 역, 이학사, 2001) 및 ≪다중(Multitude)≫(2004)(조정환ㆍ정남형ㆍ서창현 역, 세종서적, 2008)에서, 발명하고 의존하는 ‘제국’, ‘다중’, ‘비물질 노동’, ‘네트워크’, ‘떼지성’ 등의 주된 개념(패러다임)들이 현실에서 지지될 수 있는 것인가와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네그리의 글은 사회와 역사를 내적 연관과 모순의 필연으로서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계보학 운운한다든지, 이 사람의 주장은 어떻고, 저 사람의 주장은 어떻다면서도, 막상 자신의 주장은 정리된 형태로 제시하지 않으면서 독자들을 지루하게 끌고 다니 있기 때문에 그의 글들을 완독하는 사람이 드물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지겹기는 하지만 네그리 본인의 언사를 가급적 많이 인용하려고 한다.

네그리는 오늘날은, 국민국가인 열강들이 각축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라, 세계화로 인하여 상품의 교역만이 아니라, 금융 등 서비스는 물론 노동력까지도, 국민국가를 형해화시키면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는 시대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국적 질서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탈근대 즉 제국의 시대에는 산업노동이 아니라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으로 되었으며, 이들 비물질적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다중은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하고 협력하며, 창조적으로 가치를 생산하는 존재이고, 반제국 투쟁의 담지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포드주의 시대의 산업노동자에 기반하는 위계적이고 중앙집중적인 노동조합과 당운동은 그 자체가 비민주적일 수밖에 없고, 또 이미 형해화된 국민국가에 대한 저항은 무의미하다며,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는 변화된 생산형태에 맞게 비물질적 노동자가 중심이 되고 다중의 차이가 존중되는 네크워크를 통해 소통하면서 사보타지와 엑소더스를 감행하자고 주장한다.

우선 그의 사고의 배경을 보면, 국가주의와 당적 운동 그리고 노동자 중심주의에 대하여 반대한다.

네그리는 첫째로,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에서 자본의 지배도구이자 폭력장치인 국가에 대당하는, 즉 국가의 전복을 꾀하고 새로운 국가권력을 세우려는 운동은,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비민주적으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앙집중적일 수밖에 없는 당운동과 국가권력의 장악을 반대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고, 두 번째로, 세상을 변혁하는 주체 또는 핵심적 동력은 (산업)노동자계급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신념은, 국가권력을 접수하여 혁명적 방안을 실천하는 것은 스탈린의 ‘국가사회주의’(그는 ‘국가자본주의’라고 한다)나 체제내화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의 실천처럼, 또 다른 중앙집권적인 위계와 비민주성을 가져올 것이므로 당적인 조직과 권위를 만들지 말고, 결국 절대적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수평적이고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이라는 의미의) 자율주의적인 소그룹들이 네트워크로 소통하면서 저항만 하자는 주장으로서, 국민국가가 각축했던 제국주의 시대가 세계화(globalization)의 완성으로 제국의 시대로 이행하면서 국민국가의 주권이 형해화되고 있기 때문에 국민국가를 장악하여 변혁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며 곧바로 제국에 저항하자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두 번째 신념은, 기왕의 변혁운동은 세상을 변혁시킬 힘을 산업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사고해 왔으나, (생산력의 발달로) 산업노동자의 비중과 중요성은 낮아지고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으로 되었고, 가치도 물질적인 생산현장만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생산과정에서 더욱 주되게 생산되며, 노동만이 아니라 자연과 기계에서도 생산되고 있다며, 이러한 생산과정은, 포드주의적인 육체노동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기반한 소통과 협력을 통하여 비물질적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다중에 의하여 창조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자본가의 창조적 역할을 대체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산업예비군의 개념을 부정하고 빈자의 개념을 제시한다.

즉,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 혹은 탈근대의 시대에는 네트워크에 기반하여 소통과 협력 속에서 가치를 창조하는 비물질 노동이 중심이 되어가고 있고, 그들이 새 시대를 이끌고 갈 주체성이자 구성력(주권을 구성하는 힘)이라는 것이고, 그들은 세계화의 결과로서의 제국에 네트워크에 기반하여 거부와 탈주 등으로 잘 저항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인 사보타주로 제국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전쟁이 없는 민주적인 사회를 이룰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이 네그리 주장의 핵심이다.



2. 제국주의인가 제국인가?


네그리는 생산과 소비와 교환이 전지구적으로 됨에 따라, 상품과 금융과 지식과 노동이 전세계적으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으며, 이를 규제하고 뒷받침하기 위해 민족국가와 국제기구들을 자신의 마디로 포섭한 초국적인 네트워크적 주권인 제국이 출현하는데, 제국은 여러 주권들의 합성체이며, 탈영토적인 질서이고 총체적인 질서로, 단일 국가의 주권이 쇠퇴하고 제국의 주권은 강대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제국에 대한 네그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제국이라는 문제설정은 맨 먼저 세계질서가 있다는 하나의 단순한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이 질서는 사법적 구성체로 표현된다.(≪제국≫, p. 27.)


세계시장은 국민국가의 경계들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이전 시기에는 국민국가가 전 지구적인 생산 및 교환을 근대 제국주의적으로 조직하는 데 있어서 주된 행위자였으나, 세계시장에게 국민국가는 점차 단순한 장애물로 나타난다.(≪제국≫, p. 209.)


국민국가들―심지어는 가장 지배적인 국민국가들의 주권적 권위는 쇠퇴하고 있으며 그 대신 하나의 초국적 주권형태 즉 전지구적 제국이 출현하고 있다.(≪다중≫, p. 27.)


왜냐하면 일국적 공간이 더 이상 주권의 효과적 단위가 아니기 때문이다.(≪다중≫, p. 28.)


기업과 그 법률회사가 국제적이고 심지어는 전지구적인 국제상관습법 체제를 발전시키고 그럼으로써 전지구화를 규제하는 규범적인 과정을 수립하는 만큼, 바로 그 만큼 자본은 일종의 “정부없는 전지구적 통치”형식을 가장 약한 형태로 창출하는 것이다.(≪다중≫, pp. 212-13.)


진정으로 전지구적 권위형식들을 창출하는 경향이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아마도 이러한 전지구적 기구의 가장 명백한 사례일 것이다. WTO는 전지구적 귀족국가들을 위한 실제적인 포럼이며...(≪다중≫, p. 214.)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세가지 수준의 규제적 장치들이 자본주의 시장 세력들과 법률적ㆍ정치적 기구들이 결합된 구조 속에서 ‘유사-전지구적 정부 또는 유사-정부를 형성하기 위하여 함께 작동하는 전반적인 구도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첫 번째 수준은 이윤보장을 위한 자본들의 상호작용의 자기 조절이다. 두 번째 수준은 국제적인 수준에서 합의를 수립하는, 국민국가들 사이의 중재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세 번째 수준은 새로운 전지구적 권위의 창출이라는 구성적 기획이다.(≪다중≫, p. 218.)


결국 네그리의 주장은 상품과 금융과 지식, 그리고 노동까지 국민국가의 장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으며, 국민국가를 초월한 초국적 질서인 제국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WTO 등의 국제기구를 예로 들면서 “제국은 탈중심화하고 탈영토화한 지배장치(우-토피아 ou-topia, non place)”라 주장하고, 심지어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전 역시 제국주의적인 침략이 아니라 제국의 경찰행위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완전한 허구이며, 초국적 주권으로서의 제국은 국민국가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현실에서 결코 인정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2-1. 노동의 이동이 자유롭다는 주장은 허구이다


먼저 노동의 이동이 자유롭게 되었다면서 이를 찬양하는 네그리의 주장을 살펴보자.


인구의 이동성 때문에 국내 시장(특히 국내 노동시장)을 개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점점 어렵게 된다. 자본주의적인 명령의 적용을 위한 적절한 영역은 더 이상 국가 경계나 전통적인 국제적 경계선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제국≫, p. 339.)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 속에서 공간적 이동성과 시간적 유연성은 대도시 노동자들과 시골의 토착 원주민들 모두에게 본질적인 요소들이었다.(≪다중≫, p. 320.)


이주자들은 이러한 풍성함과 생산성을 설명해주는, 빈자의 특수한 범주이다.(≪다중≫, p. 171.)


하나의 유령이 세상에 출몰하는데 그것은 이주라는 유령이다. ... 도주와 탈출은 제국적 탈근대 안에서 대항하는 강력한 계급투쟁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성은 자생적인 투쟁수준을 이루고 있으며...(≪제국≫, p. 285.)


네그리는 제국의 시대에는 상품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노동까지도 자유로운 이동을 하고 있고, 심지어 이러한 이주노동을 자본에 저항하는 대탈주이고 강력한 계급투쟁의 한 형태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복지와 고용정책이라는 고려 하에 고용허가제나 이주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주장은 완전한 사기일 뿐이다. 한국에서도 40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주노동자들 중 무려 20만 명을 추방하기 위하여 인간사냥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이런 게 자유로운 이동인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확산되고 있는 이주노동은, 아프리카와 동남아, 남미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초국적 자본의 수탈로 농촌에서 양극분해되어 쫓겨난 도시빈민이, 자국 자본에 의한 노동 흡수력이 미약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수가 없어 고국을 떠나는 현상이다.

남미의 주요도시들이 수백만에서 1,000만이 넘는 도시빈민들의 소굴이 된 것도 이를 반영하는 것이고, 동남아의 여성들이 일본과 한국에 노예적 결혼계약에 팔려오는 것도 그 뿌리는 같다. 즉 자신들의 나라에서 먹고 살 수가 없어서 떠나는 것인데, 이를 위대한 탈주로 칭송한다는 것은 네그리의 비민중성과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을 팔려는 이러한 욕구는 선진국에서 ‘3D’라고 불리는 저임금의 고역과 만난다. 그리고 이들 이주노동자는 호황기에는 저임금노동자로 착취당하고, 불황기에는 배출된다. 올해 초 세계적인 경제불황에 두바이에 진출한 수많은 (주로 방글라데시와 인도와 중국 등) 이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이들은 맑스가 말하는, 자본의 필요에 따라 자본에게 가장 먼저 수탈당하는 산업예비군일 뿐이지, 무슨 비물질노동에 종사하는 칭송받아야 할 창조적인 다중이 아님은 명백할 것이다.


2-2. 국민국가의 부정으로서의 제국의 허구성


세계화(globalization, 단순한 지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현상이므로 지구화 대신 세계화라는 표현을 쓴다)의 시대에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구라 치더라도, 상품과 금융, 서비스, 투자 등의 시장이 개방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WTO와 같은 세계적 질서의 존재도 사실이다. 과연 이러한 현상이 국민국가의 주권을 형해화시키고 초국적 주권인 제국을 성립시켰는지에 대하여 우선 네그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거대 초국적기업이 국민국가의 사법권과 권위를 효율적으로 넘어섰다. ... 국가는 패배했고 기업들이 이제 지구를 지배한다!(≪제국≫, p. 400.)


현실적인 측면과 이데올로기적 측면 모두에서 일국적인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국가는 자멸하고 있다. 단일정부의 통일성은 해체되어 일련의 독립기구들 (전통적인 독립기구들 외에, 은행, 국제적 계획기관들 등)에게 맡겨져 왔으며, 여기서 독립기구들은 모두 점차적으로 정당성을 권력의 초국적 수준에서 찾는다.(≪제국≫, p. 403.)


그러나 우리는 국민국가의 역능에 대한 그 어떤 향수를 간직하거나 국민국가를 찬양하는 그 어떤 정치라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라고 믿는다. ... 즉 국민국가의 쇠퇴는 구조적이고 불가역적인 과정이다. 국민은 문화적 형성체, 소속감, 공동유산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로 사법적-경제적 구조였다. 이러한 구조가 지닌 효과가 쇠퇴한다는 것은 확실히 GATT체제와 세계무역기구 WTO, 세계은행, 그리고 IMF와 같은 완전하게 전지구적인 사법적-경제적 기구들의 진화를 통해 추적할 수 있다. 이러한 초국적인 사법적 체제에 의해 지탱되는 생산과 유통의 전 지구화는 일국적인 사법 구조들이 지닌 효과를 넘어선다. ... 국민은 완전히 억압적인 구조들과 이데올로기들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국민에 의거하는 모든 전략을 그러한 근거에서 거부해야 한다.(≪제국≫, p. 434.)


네그리는 우선 국민국가가 세계화를 관철하는 WTO 등 국제기구나 질서에 따르는 것을 보고 국민국가의 주권이 형해화되고 초월적 주권이 형성된 것으로 주장한다.

세계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즉 초국적 자본의 활동의 자유를 위해 국민국가의 장벽을 개방하는 것이다. 이는, 상품무역에 관한 관세장벽만이 아니라, 선진국 즉 제국주의 열강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금융(투기)자본, 지적재산권, 서비스, 투자 등등의 시장 개방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세계화는 자본을 위한 모든 분야의 시장의 개방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단, 네그리의 주장과는 달리, 노동시장만은 제외하고.

그런 측면에서 WTO 협정이나 우루과이 라운드 협약은 전세계적인 국민국가 간의 개방수준에 관한 합의이고, 결국 전세계적 총자본의 활동의 자유를 위한 합의이고 질서이다. 이러한 세계화 혹은 개방이 전세계 민중의 이해에 반하여 진행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이러한 합의된 질서를 국민국가가 존중하고 복종한다는 외견 때문에 국민국가의 주권이 형해화되었다는 것은 환상이다.

네그리 자신도 알고 있듯이, 2003년 멕시코 캔쿤에서 열린 WTO 정상회담은, 농산물시장의 개방을 둘러싸고 남반부 22개국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후 전세계적인 합의가 어렵게 되자 미국 등 선진국, 소위 G8은 다자간 혹은 양국간 FTA의 추진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 국민국가의 장벽의 개방으로 나타나는 세계화는 이처럼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혹은 선진국 내부의 갈등 즉 각국 자본의 이해와 갈등의 조정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라든지, 혹은 쇠고기 검역주권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던 한미 FTA라든지, 이들 협정은 (네그리가 없어졌다고 우기고 싶은) 국민국가 간 즉 각국 자본의 갈등과 조정의 산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네그리의 말대로 미국과 한국이 합의하여 관세장벽을 폐기했다고 하면, 미국과 한국의 관세 주권이 형해화되어 제국으로 이전되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당사국 중 일국이 이러한 합의를 위반했을 때, 보복관세를 할 때는 제국에서 주권을 찾아오는 것이고? 양국간이든, 다국간이든, 혹은 전세계적인 협약이든 간에 관세장벽이나 투자장벽을 완화하거나 없애는 협약은 주권의 불사용이나 억제일 뿐 결코 주권의 포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협약의 체결과 시행, 보복, 폐기, 탈퇴는 여전히 국민국가가 수행하고 있는 주권적 작용이기 때문이다. 권총을 겨누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 겨누기를 멈추고 옆구리에 차고 있자고 한 걸 가지고, 즉 언제든지 다시 뺄 수 있는 권총이 형해화되었다느니 초월적 존재에게 이전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말장난일 뿐이다.

결국 이들 세계적인 협정이나 질서는 자본의 지배도구이자 그 이해를 관철하는 대리인인 국민국가가 각국 자본의 이해를 조정하고 협의하는 가운데에서 합의한 협정이자 협약일 뿐인 것이다. 이때에 전세계적인 총자본의 이익과 개별자본 혹은 개별 국가의 자본이 충돌할 때, 때로는 강대국에 의하여 불리한 협약을 강요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고받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성립되는 질서를 국민국가의 형해화로 표현하는 것은, 네그리 등 자율주의자들이 국민국가를 부정하고 싶은 욕망, 아니 사실은 국민국가에 눈을 감고 싶은 욕망에 급급하여 객관적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적 질서란 제국주의 열강 상호간의, 그리고 열강과 약소국 간의 갈등과 각축의 산물일 뿐이다.


2-3.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은 팍스 아메리카의 찬양일 뿐이다.


네그리는 다른 모든 국민국가의 주권을 형해화시키는 초월적 주권의 성립을 주장하고 있다. 근대의 주권이라는 게 결국 내란의 종식과 평화적 질서를 위해 무력의 유일한 담지자로서 성립한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은 독점적  (즉 유일한) 무력의 담지자여야 한다. 그리하여 미제국주의를 독점적 무력, 즉 제국의 화신으로 미화한 네그리는 미제국주의가 수백만 이라크 민중을 학살한 이라크 침략전쟁까지도 세계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제국의 경찰권의 발동으로서 찬양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전 지구적 권력의 모습을 ... 분석할 때, 세 층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구조를 인식할 수 있다. ... 피라미드의 좁은 정점에는 하나의 최강 권력이, 즉 전 지구적 무력사용에 대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미국이 있다.(≪제국≫, p. 404.)


실제로 걸프전은 목적, 지역적 이익, 그리고 관련된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의 관점에서는 별 이득이 없는 억압 작용이었다. 이라크는 국제법을 어겼다고 비난받았으며 따라서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아야 했다. 걸프전의 중요성은 미국 스스로의 국민적 동기의 작용으로서가 아니라 전지국적 권리의 이름으로 미국을 국제적 정의를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에서 도출된다. ... 미국이라는 세계경찰은 제국주의의 이익에서가 아니라 제국의 이익에서 행동한다.(≪제국≫, p. 244.)


오늘날 국제조직들(유엔, 국제통화조직들,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주의적 조직들조차도)은 미국에게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소말리아에서 보스니아까지 20세기 후반의 모든 지역 갈등에서 미국은 군사개입을 요청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요청들은 미국의 공적인 반대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선전행위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이며 실질적인 것이다. 내키지 않을지라도 미군은 평화와 질서의 이름으로 이 요청에 응답해야만 할 것이다.(≪제국≫, pp. 245-46.)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유럽의 구시대 세력에 대항해 새로운 제국이 형성돼왔다는 사실은 좋은 소식일 뿐이다.(≪제국≫, p. 478.)


네그리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이렇게 된다. ‘저 네그리는 엎드려 비옵나니, 제국의 화신인 미국이시여! 별 이득이 없고, 내키지 않으시더라도 세계평화를 위해서 불량국가들을 짓밟아 주시옵소서!’ 이보다 더한 미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찬미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미국이 제국주의적이 아닌 제국적 무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네그리의 주장은, 바로 자신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워싱턴은 다른 지배적인 권력들과의 협력없이는 전지구적 질서에 대해 군주제적인 통제를 행사할 수 없다.(≪다중≫, p. 94.)


예를 들어 미국은 점차 (환경, 인권, 형사법정 등등에 관한) 국제적 협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 이런 의미에서 미국적 예외는 가장 강력한 나라가 향유하는 이중 기준을, 즉 명령하는 자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관념을 지칭한다.(≪다중≫, p. 33-34.)


미국이 자국의 입장 때문에 기후변화에 관한 교토 의정서나 대인지뢰금지협정을 거부하고 있는 현실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제국이 초국적인 유일한 질서라면서, 권력의 행사를 다른 주권국가인 열강들과 상의해야 되고, 때로는 그 질서를 어기기까지 한다고요? 미국이 제국 그 자체라는 네그리씨! 도대체 미국은 제국의 위에 있는 존재요? 아래에 있는 존재요?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은 팍스 아메리카의 찬양일 뿐이다. 결국 팍스 아메리카나, 즉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찬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네그리가 아무리 칭송하여도 미국의 막대한 대외수지의 적자나 위안화와 유로화의 강세에서 보듯이, 미국 중심의 일극적 질서는 무한하지 않을 것이다. 질서라는 게 결국 무력과 돈이 아니던가? 중국과 러시아, 유럽 등 강대국들의 군비지출은 날로 늘어만 가고 있는데, 이것이 국민국가의 무력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오늘날 세계가 초강대국인 미국의 패권 대신에 다자적 질서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렇다면 제국에서 제국주의 시대로 돌아갔다고 할 것인가? 네그리씨! 대답 좀 해보시오!


2-4.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과 신자유주의 경찰독재국가의 성립

     ― 국민국가는 약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화되고 있다


이처럼 현실에서 인정되지 않는 제국을 창설하신 네그리씨는 이제 국민국가에 대한 모든 투쟁이 무가치하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네그리의 말로 들어 보면,


우리는 제국과 제국의 세계시장에 도전하고 저항한다는 목적을 위해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전 지구적 수준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인종적, 종교적, 지역적 조건들에 의해 규정되고 제국과의 “연결이 끊기고” 정해진 경계들에 의해 제국열강들로부터 보호되는 고립적인 어떤 특수한 공동체를 제안하는 것은 모두 일종의 게토로 끝날 것이다. 제한된 국지적 자율성을 겨냥하는 기획으로 제국에 저항할 수는 없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가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을 가속화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 전지구화는 틀림없이 대항 전지구화와 만날 것이며, 제국은 틀림없이 대항제국과 만날 것이다.(≪제국≫, pp. 276-77.)


오늘날 다음과 같은 “국지적인” 좌파전략의 다양한 형태의 핵심에서 작동하는 추론은 완전히 반동적인 것 같다. 즉 자본주의적 지배가 훨씬 더 지구적으로 되고 있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국지적인 것을 방어해야 하고 자본의 가속화하는 흐름에 장애물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본의 실제적인 전 지구화와 제국의 구성은 강탈과 패배의 신호들로 생각되어야 한다. ... 오늘날 이러한 국지적인 입장이 잘못되고 해롭다고 주장한다.(≪제국≫, p. 81.)


전 지구화에 대한 저항과 국지성의 방어라는 이러한 좌파의 전략은 많은 경우에 국지적 정체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율적이거나 자기 결정적이지 않고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기계의 발전에 연료를 공급하고 그 발전을 지지하기 때문에 해롭기도 하다. ... 오히려 적은 우리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전 지구적 관계들의 특정한 체제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국지적인 것을 방어한다는 이러한 전략은 제국 안에 현존하는 현실적인 대안들과 해방을 향한 잠재력을 흐리게 하고 심지어 부정하기 때문에 해롭다.(≪제국≫, p. 82.)


베르덩의 도살장, ... 애국 전쟁터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융단폭격 ... 대량학살의 목록은 계속된다. 자 그러한 근대성이 종결된다면, 그리고 제국주의적 지배와 수많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 기여한 근대국민국가가 세계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잘 떨쳐버린 것이다!(≪제국≫, p. 84.)


더 이상 민중이 기초로서 가정되지 않으며, 더 이상 주권적인 국가구조의 권력을 잡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게릴라 구조의 민주적 요소들은 한층 더 네트워크 형식으로 확장되며, 조직은 점점 더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된다.(≪다중≫, p. 118.)


여보쇼!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네그리씨!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을 가속화해야 된다고요? 한줌도 안 되는 초국적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 전 세계 민중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세계화에 대해서 비난하고 저항하기는커녕 그 과정을 가속화해야 된다고요? 국지적인 입장이 잘못되고 해롭다고요?

한마디만 합시다. 오늘날 세계화에 반대는 어떠한 투쟁도 그 앞잡이인 국민국가의 공권력에 잔인하게 진압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국지적인 입장 즉 국민국가에 저항하고 변혁하자는 것이 해롭고 반동적이라고요? 완전히 맛이 가도 한참 갔군요!!!

차베스를 비롯한 남미 좌파 혹은 진보적 정권들의 노력에서 보듯, 미국을 맹주로 한 제국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하여, 일국의 진보적 변혁과 진보적인 여러 정권의 협력 하에 초국적 자본의 국유화와 초국적 투기자본의 억제, 나아가 평등 호혜적이고 공존적인 민중무역과 같은 새로운 무역질서를 창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일국적이거나 지역적인 노력들이 반동적이고 해롭다고 주장하는 당신들의 정체는 도대체 뭐요?

자본의 이익을 위해 전 세계 민중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세계화에 대하여 저항하기보다 가속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와 같은 반동들과 함께 네그리는, 국민국가가 형해화되었다면서 국민국가에 대한 저항이나 국민국가를 통한 변혁의 경로를 무시하나, 국민국가는 반자본과 반세계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피할 수 없는 고리이다.

우선 네그리도 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고 반자본의 과제를 얘기하고 있는 바, 자본주의 사회란 무엇보다도 자본과 노동,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모순 속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모순은 자본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과 분열책동으로 나타난다는 점과, 자본 내에서는 노동에 대한 공동대응과 헤게모니를 위해서 협력하는 측면과 상호 갈등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가령 현단계의 자본의 운동양식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란 무엇보다 자본의 노동에 대한 공격을 본질로 하고 있고, 그것은 복지의 축소, 노동의 유연화(실업과 비정규노동으로 나타나는 불안정 노동의 강요)로 나타나고 있으며, 의료나 철도, 물, 전기 등 공공재의 사유화 정책과 상품의 교역만이 아니라 금융을 비롯한 서비스와 지적재산권 시장 등의 개방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강요되고 추진되는 배경은 무엇인가? 한편에서는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같은 노동계급의 위축을 배경으로 한 공세적 측면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이윤율 경향적 저하의 법칙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상대적 과잉자본이 있다. 과잉자본의 투자처를 찾기 위한 욕구가 국내적으로는 공공재의 사유화와 부동산 투기 등으로 나타나고, 전세계적으로는 금융을 비롯한 서비스와 투자의 개방, 즉 초국적 자본의 운동에 방해되는 장애물의 철거로 나타난다.

이러한 자본의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WTO와 같은 국제기구나 우루과이 라운드 혹은 FTA와 같은 국제적인 협정과 협약이, 자본의 도구인 국민국가 간의 협력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국적인 협약과 질서는 독점자본 간의 갈등을 숨기지 못한다. 자본은 보다 넓고 자유로운 세계시장을 요구하지만, 한편으로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경쟁위기 속에서 GM이나 크라이슬러, AIG에서 보듯 개별자본의 생존을 위해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요청하면서 서로 시장을 놓고 적대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가장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민중이다. 전체 근로자의 70%가 월 100만 원도 안 되는 비정규노동에 시달리고 있고, 청년들을 비롯한 광범위한 실업은 전체 민중에게 굴욕적이고 동물적인 삶을 강요하고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고, 이를 억압하기 위한 자본의 독재형태가 신자유주의 경찰독재국가이다. 즉, 자본은 노동과의 대립 속에서 국가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지 네그리의 주장처럼 국민국가를 형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과 노동의 모순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자본 간의 모순과 협력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을 사상하고, 심지어 자본 간의 갈등에도 눈을 감은 채, 오직 총자본의 공통의 이익의 반영물인 국제적인 협약과 질서만을 가지고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제국의 시대가 되었고, 국민국가는 제국에 주권을 양도하면서 형해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총자본이 아무리 공통의 이해를 위해 협력하더라도, 노동을 억압하고 개별자본의 경쟁과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 국가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는 측면과, 그리하여 제국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있는 측면에 눈을 감는 것이다.

총자본의 이해를 위하여 개별자본들이 자신들의 도구인 국민국가를 동원하여 협력적 질서와 협약을 만든 것을 가지고, 혹은 상품과 서비스 등의 교역의 장벽이 완화된 것을 가지고, 혹은 인터넷이 활발하게 되었다는 것만을 보고, 국민국가 혹은 개별 독점자본의 각축장인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 하나의 질서와 의지를 갖는 제국의 시대와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칭송하는 것은, 네그리가 자본의 논리와 선전에 세뇌된 투항주의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008년의 촛불항쟁은 미국의 축산자본과 사료자본의 이익을 위해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게 강요한 미친소에 대한 불만으로 분출되었다. 그런데 그때도 역시 시위대를 물대포와 방패로 진압한 것이 바로 공권력이라는 국민국가의 경찰이 아니던가? 시애틀의 반세계화 투쟁이든, 또 다른 반세계화에 대한 저항이었던 2008년의 촛불항쟁이든, 우리의 모든 저항과 투쟁은 경찰에 의해 진압되고 있고, 그 공권력의 행사를 통해 합법적 폭력의 유일한 담지자인 주권이 국민국가로 나타나고 있는 이 현실에서, 국민국가와 싸우는 것은 해롭고, 무익하고, 반동적이라는 이들 자율주의자들을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폭력장치인 국가가 자본의 지배도구라는 점은 오늘날 체제에 대한 어떠한 저항과 도전도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국가의 폭력에 의해 진압되고 있는 현실에서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자본가의 수중으로부터 노동자 민중의 수중으로 빼앗아 오는 것은 변혁운동의 핵심적 고리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권력이 위계적이고 비민주적인 속성을 가졌다는 것은, 새로운 권력이 직접민주주의의 원칙을 최대한 반영한 혁명적 민주주의의 원칙을 관철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이지, 권력의 파괴와 새로운 권력의 창출을 포기하자는 것은 청산주의에 다름 아니다.

결국 스스로 ‘맑스를 뛰어넘었다’는 네그리의 주장은, 새로운 현상과 추세를, 그 본질적 연관을 탐구하지 않은 채, 걸핏하면 계보학을 들먹이면서 현상에 굴복하는, 달리 말하자면, 구체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며 현상에서 본질을 탐구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아니라 현상에서 현상으로 나아가는 비변증법적이고 경험주의적인 방법론에 의지하는 청산주의자의 궤변일 뿐이다.


2-5. 반세계화와 반자본 투쟁의 방법론


WTO나 IMF 등 세계화를 강요하고 조정하기 위한 이러한 ‘제국적’ 질서가, 초국적 자본 혹은 총자본의 일반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대응책일 뿐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들의 강요는, 이른바 ‘악의 축’에 대한 적대나, 걸프전과 같은 전쟁이나, 우루과이 라운드처럼, 혹은 G8 정상회담처럼, 궁극에는 여러 국가들 간의 협약이나 국민국가의 정책에 대한 강요나 강제로 나타나고 있을 때, 여기에 대한 유효한 저항과 투쟁은 국민국가에 대한 압력을 통하여 이러한 회의와 합의를 무산시키는 것이다.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위해 강요되는 이러한 시도(이 시도를 ‘제국’이 하든지 혹은 다수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하든지 상관없이)는, 피해 받는 민중의 입장이 관철되도록 일국적 혹은 다국적으로 국민국가를 통하여 저항하고 투쟁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이지, 네트워크적인 주권(네그리는 제국은 네트워크 주권이라고 한다)이라고 해서 그들에게 장악되어 있는 네트워크를 교란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며, 어느날 갑자기 전세계적인 노동거부로 파괴될 체제가 아니다.

정상회담의 무산을 위한 시위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할지라도 무력에 의해 진압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진압을 넘어서는 힘은 전 세계민중의 항의로 각국의 입장과 정책을 바꾸는 길이다. 즉 장소에 대한 시위는 더 안전한 장소와 방어를 강구하는 적들의 노력에 부딪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전쟁인 이라크전 때 파병 국가들 내에서 반전운동을 통한 각국 의회의 철군결의가 유효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각국의 입장과 정책에서 민중의 입장이 관철되도록 전세계적인 연대 속에서 국민국가내의 투쟁과 저항을 조직하는 것이 올바른 방도라 할 것이다.

즉, 설령 제국의 시대라고 할지라도 제국의 의지라는 게 결국은 각국 자본과 세계적 총자본의 입장이 국민국가들의 정책의 갈등과 조정으로 형성되는 현실에서, 국민국가를 초월한 제국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은 황당할 따름이다. 제국의 의지란, 국민국가를 초월하여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들 간의 각축과 조정의 결과이고, 그 의지는 다름 아닌 민중과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국민국가, 즉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각국 정부들의 정책의 야합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화 정책에 반대하는 반세계화ㆍ반자본의 투쟁이 아니라, 국민국가를 무시하고 실체도 없는 추상적인 제국에 저항하자는 입장 역시 정당한 투쟁을 회피하는 청산주의적 입장에 다름 아니다. 이들 청산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생적인 투쟁을 찬미하면서 네트워크로 강대하게 뭉쳐질 그날이 오기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아무리 다중과 비물질노동자와 반세계화 투쟁을 찬미하고, 촛불은 영원하다고 찬미하여도, 국가적 질서에 대한 저항과 투쟁으로 이러한 저항과 투쟁을 연대할 것을 제안하고, 추동하고, 리드한다는 의미에서의 혁명적 운동 혹은 당적 운동체를 부정하는 네그리와 조정환 등 자율주의자들의 주장은, 궁극적 승리를 꿈꾸지 말자는 의미에서 청산주의자의 변명과 궤변으로 가득 찬 소부르주아 잡사상일 뿐이다.

우리에게 문제는, 네그리 등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국가적 변혁을 꿈꾸는 당적 운동의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혁명적 당적 운동과 노동자ㆍ민중이 장악한 국가권력이, 대중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조직 내부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의 원칙을 어떻게 하면 관철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화를 찬미하면서 허무맹랑한 제국이란 개념을 내세워 시퍼렇게 살아 있는 국민국가를 부정하고 국민국가를 변혁하는 실천을 해롭다고 주장하는 자율주의자들(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조정환 등)의 주장은 참으로 해롭고 반동적이다.



3. 비물질적 노동과 다중


네그리는 산업노동자들이 헤게모니적이었던 포드주의 시대와는 달리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 즉 탈근대의 시대에는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으로 되었으며, 맑스의 노동가치설은 폐기되어야 하며, 민중이나 대중이 아닌 다중이 제국과 맞장 뜰 그날이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3-1. 비물질노동의 특징과 허구성


노동자계급 중심주의에 대해 혐오하는 네그리는, 맑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나 임노동자계급이 아니라 그 일부인 산업노동자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왜곡하면서, 산업노동이 아닌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으로 되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비물질 노동은 뭐고, 네그리는 왜 이런 개념을 발명해 내었을까? 이제 그 베일을 벗겨보자.


20세기의 마지막 수십년 동안에 산업노동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며, 그 대신 비물질적 노동 즉 지식, 정보, 소통, 관계 또는 정서적 반응 등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들을 창출하는 노동이 출현했다. (≪다중≫, p. 145.)


우리의 주장은 비물질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헤게모니적이 되었고, … 오늘날 노동과 사회는 정보화될 수밖에 없으며, 지적으로 되고, 소통적으로 되며, 정동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다중≫, p. 146.)


선진국들에서 비물질적 노동은 음식적 종업원들, 판매원들, 컴퓨터 공학자들, 교사들, 의료노동자들과 같은 …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직업들 대부분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 예를 들어 종자의 정보를 통제하는 것이 농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말이다. 셋째, 비물질노동의 중심성은 그것이 생산하는 비물질적 형태의 재산이 갖는 중요성이 증가하는 데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나중에, 최근에 사유재산으로서 보호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특허권, 저작권, 그리고 다양한 비물질적 재화와 관련해서 제기된 복잡한 법적 논점들을 논의할 것이다.(≪다중≫, p. 151-52.)


그래서 정동적 노동은 편안한 느낌 웰빙, 만족, 흥분 또는 열정과 같은 정동들을 생산하거나 처리하는 노동이다. 예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서비스하는) 법률적 지원노동, 항공 승무원들, 패스트푸드 노동자에게서 정동적 노동을 인식할 수 있다.(≪다중≫, p. 145.)


우리는 현대경제에서 비물질노동의 주요한 세가지 측면을 다룰 것이다. 즉 정보네트워크 속에서 새로이 연결되는 산업생산의 소통적 노동, 상징분석과 문제해결을 하는 상호작용적 노동. 그리고 정서를 생산하고 조종하는 노동이 그것이다.(≪제국≫, p. 62.)


좀 헷갈리지 않는가? 네그리의 말을 따르면, 돌봄 노동이나 패스트푸드 노동자와 같은 서비스 노동이 비물질적 노동이고 정동적 노동인 것 같은데, 이런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많아졌다고 하더라도, 이런 노동의 산물이 정보, 지식, 아이디어, 이미지, 관계, 정동(이건 빼고)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들이며 중요성이 점증하는 비물질적 재산일까? ‘생산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거나 아이디어나 관계를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비물질적 노동은 뭘까?

음식점 종업원들, 판매원들, 컴퓨터 공학자들, 교사들, 의료노동자 중에서 컴퓨터 공학자를 빼면 이 사람들은 정보네트워크 속에서 일하거나 상징분석과 문제해결을 하는 노동의 수행자가 아니다. 네그리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전형적인 비물질 노동자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게임을 개발하는 컴퓨터 공학자나 종자의 정보 따위를 다루는 유전공학자이다. 바로 이들의 생산물이 전형적으로 특허권과 저작권의 대상이 되고 있고 중요성이 증가하는 비물질적 형태의 재산이 아닌가?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네그리의 말장난을 알 수 있다. 일단 네그리는 물질적 노동이 아닌 A, B, C, D를 죄다 비물질적 노동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다음 비물질적 노동은 a, b, c, d 적인 측면이 있다고 한다. 즉 비물질노동 중에서 오직 D만 d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도, 모든 비물질노동은 d의 측면이 있다는 식이다.

즉, 네그리는 소위 지식자본가라고 할 수 있는 공학자들의 특수한 노동을 비물질적 노동이라고 한 다음에, 정보와 지식과 아이디어가 비물질적 특성이라고 규정하면서, 마치 패스트푸드 노동자나 음식점 판매원도 그런 노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야바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보슈! 네그리씨! 음식적 종업원이나 판매원이나 교사들이나 의료노동자가 정보네트워크 속에서 소통적 노동을 하고 상징분석과 문제해결을 하는 상호작용적 노동자들이라고요? 부분 혹은 일부의 특수성을 마치 전체의 특징인 것처럼 얘기하는 당신과 서울역 앞의 야바위꾼과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냉정하게 말해서 네그리가 말하는 비물질적 노동의 중요한 특징, 즉 정보네트워크 속에서 소통하면서 중요성이 증가하는 비물질적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는 대기업의 연구소나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근무하는 고급 두뇌들인 것이고, 이들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지식자본가라고 불러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가령 유전정보나 프로그램 혹은 Windows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예컨대 5억 달러가 들었고, 그것들을 복제하는 데는 별 비용도 안 드는데, 특허권과 지적재산권이라는 이름 하에 50억 달러어치를 판매했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복제물의 총 가치는 5억 달러(+α)이지만 지적재산권이라는 이름 하에 45억 달러가까이나 시장에서 더 수탈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탈하는 힘은 거대 독점기업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미FTA 협상 때 지적재산권을 20년간 인정할 것인지 50년간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옥신각신한 것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권리가 상품이 갖는 본래적 가치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기생적 수탈권을 보장하는 국민국가의 인정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이런 황당하고 부당한 권리를 부정하기는커녕 새로운 비물질적 부라고 침을 흘리는 네그리의 반노동자적, 반노동가치적, 친자본적인 반동성이 여실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2. 노동시간이 가치의 척도가 아니라는 궤변


네그리는 이렇게 현대 사회의 극히 일부인 지식자본가들의 노동을 비물질 노동의 전형인 것처럼 야바위 짓을 한 다음에, 비물질 노동은 노동일이나 노동시간과 같은 척도로 잴 수 없다며, 아예 반동으로서의 본성을 드러낸다. 네그리의 수작을 들어보자.


공장생산의 규칙적인 리듬과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명확한 구분은 비물질노동의 영역에서는 쇠퇴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시간의 맨 꼭대기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회사들이, 피고용인들이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가능한 한 사무실에서 보내도록 하기 위해 무료음식과 운동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 노동자들에게 부과되는 유연성과 이동성이 점증하며 공장노동에 전형적인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고용이 쇠퇴함에 따라 ... 새로운 패러다임은 노동시간과 삶의 시간 사이의 분할을 침식한다. 우리가 포스트 포드주의 생산에서 보게 되는 노동과 삶 사이의 이 밀접한 관계, 시간 구분의 흐려짐은 비물질노동의 생산물들의 경우에 훨씬 더 명확하다. 물질적 삶은 사회적 삶의 수단을 창출한다. ... 이와 달리 아이디어, 이미지, 지식, 소통, 협력 그리고 정동적 관계들의 생산을 포함하는 비물질적 생산은 사회적 삶의 수단이 아닌 사회적 삶 자체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비물질적 생산은 삶정치적이다.(≪다중≫, p. 186.)


삶정치적 생산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고정된 단위로 양화될 수 없기 때문에) 측정 불가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결코 삶 전체를 포획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이 그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치를 언제나 초과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견해를 수정해야 된다.(≪다중≫, p. 187.)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는 여러 근로자들 혹은 직장인들이 작업의 성격에 따라서 엄밀하게 잔업수당이나 특근수당을 받는 직장도 있고, 수당을 뭉개거나 얼렁뚱땅하는 직장도 있다. 아무리 출퇴근 시간이 들쑥날쑥 하고 잔업수당제도가 없이 악착같이 오랜 시간을 근무시키는 직장이라고 할지라도, 자본의 입장에서는 총노동일에 대한 보수를 지급하고 있는 것이고, 노동자 역시 그러한 잔업을 자신의 노동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즉, 포드주의 시절에 비교해서 정시퇴근이 불분명해졌고 더 오랜 시간을 자본에게 착취당한다고 하여도, 대부분의 노동자는 회사를 위해 일하는 시간과 사적인 시간을 구분하고 있다.

설령 노동시간이 길어져서 잠만 자고 출퇴근을 반복한다고 하여도 착취당하는 시간과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사적인 시간은 구분이 가능하고, 자본이 노동일이나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임금을 주는 현실은 변함이 없다. 이러한 착취형태를 무슨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의 특징으로 제기한다는 것도 황당하려니와, 지급받지 못한 초과 착취된 노동시간(부불노동)에 대해서 투쟁하라고 하기는커녕 이를 근거로 맑스에 대한 적대감에 불타올라 노동가치설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네그리의 반노동자적 심정의 발로일 뿐이다.

네그리 씨! 노동자가 제 시간에 퇴근하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가치법칙을 포기해야 한다고요? 잔업수당을 따로 주지 않는 연봉제나 정액 월급제에서 자본가가 한 시간이라도 노동을 더 시키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예를 들어 월 200만 원에 200시간이 정상근무이고, 이때에 400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240시간의 노동을 했다면 480의 가치를 생산한 것이고, 자본가의 몫 즉 잉여가치가 200에서 280만큼 늘어났을 뿐이다. 즉, 가치는 시간에 비례했지만 착취율이 높아진 것이고, 부불노동이 확대되었을 뿐인 것은 초등학생도 알 얘기인데, 노동 시간과 삶의 시간의 구별이 흐려졌다느니 시간이라는 양으로 측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더 대꾸할 만한 가치도 없는 궤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간과 삶의 시간이 불분명한 사람들도 물론 있다. 대기업의 간부들처럼 근무시간에 골프 치면서 영업을 하는 사람들과 연봉이 수십만 불에 달하는 고급두뇌들이나 예술가들은 휴식과 노동시간이 불분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네그리 씨! 이렇게 고급인재들 외에 진정으로 노동과 삶의 시간의 구분이 헷갈리는 노동자들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요? 당신은 항상 노동자들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자본가와 다름없는 사람들만 얘기합디다! 이주가 자본에 대한 저항이고, 위대한 탈주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자 역시 더 많은 고액 연봉을 위해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만의 얘기 아니요?

이러한 노동가치설을 폐기해야 된다는 주장은 “노동자의 주체성은 착취의 경험이라는 적대 속에서 창조”되며 “비물질적 생산이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우리 시대에는 빈자가 생산의 패러다임적 형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다중≫, p. 192)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착취당하는 게 중심문제가 아니라 가난이 중심문제라는 몰역사적인 주장으로 발전한다.


3-3. 산업예비군과 노동자중심주의


자본의 착취를 부정하고 싶으신 네그리는 가치법칙을 부정하더니, 이번에는 산업예비군이란 개념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가르고, 생산적 노동과 재생산적 노동을 가르는, 언제나 의심스러웠던 낡은 맑스주의적 구분은 이제 완전히 내던져야 한다. 산업예비군 개념처럼 이 구분들도 여성, 실업자, 빈자들을 중심적인 정치적 역할에서 배제하고, 혁명적 기획을 주요한 생산자들이라고 간주된 (공장에서 굳은 살이 박힌) 남성들에게 위임하는 데 종종 사용되었다.(≪다중≫, p. 174.)


얀 물리에 부탕은 맑스의 “산업예비군” 개념은 우리가 말한 이동성이 지닌 힘을 이해하는 데 특별히 강력한 장애물임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 모든 노동력 형태는 자본에 의해서만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업인구와 이주 인구들조차 자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그리고 자본에 의해 “예비군”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력은 자본의 철의 법칙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주체성과 차이를 강탈당한다.(≪제국≫, p. 284-85.)


자본주의 초기에 토지로부터 분리된 농민들이 도시빈민이 되어 자본을 위한 노동력 공급의 풀(pool)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산업이 발전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소생산자가 몰락하여 대다수는 임노동자나 도시빈민으로 전락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고 지금도 그렇다. 수많은 동네 수퍼들이 대형마트의 입주로 몰락한다든지, 선진국(결국 초국적 농업자본)을 위한 수출작물의 생산을 위해서 대농지경영(라티푼디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무토지 농민이 발생하여 남미의 여러 도시들이 1,000만이 넘는 도시빈민으로 넘쳐나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남아나 아프리카 북부에서 발생하는 빈민들과 이주노동자 역시 동일한 사정이다. 이것은 세계화에 의해서 혹은 자본 또는 초국적 자본의 수탈과 착취에 의하여 분해된 소생산자들을 자본이 충분히 포섭하지 못했을 때 도시빈민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빈민들은 모든 것이 상품화 되어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존재―프롤레타리아―임에는 변함이 없다. 즉, 자본에게 고용이 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혹은 실업자이건 이주노동자이건 파트타이머이건 혹은 도시빈민이건 간에, 노동력 공급의 풀로써 호황기에는 고용되어 착취당하고 불황기에는 내팽개쳐지고, 최근에는 호황기에도 높은 실업률에 고통 받는, 이들의 정체성은 자본에게 착취당하고, 이용당하고, 착취를 대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산업예비군일 뿐이지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주체성과 차이를 강탈당했다고 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비물질 노동자이고 다중이라는 말인가? 이들 노동력이 자본의 철의 법칙에 종속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자본의 세상과 싸워야 하지만, 네그리의 말처럼 주체성과 차이를 강탈당한 다른 존재라면 자본의 세상과 싸울 필요가 없다. 바로 그 다른 존재가 비물질노동자이고 다중이다. 바로 여기에서 네그리가 그렇게 사기적으로 설명하면서 만들어낸 다중과 비물질노동자라는 개념이 자본과 싸우지 말자고 선동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3-4. ‘경향’이라는 방법론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이 양적인 면에서 지배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 하나의 경향을 부과해 왔으며… 헤게모니적 지위를 차지했다는 것 ... 그러므로 산업노동과 공장이 모든 맑스주의적 분석을 이끄는 핵심으로 남아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경향’에 대한 맑스의 방법을 상기시켜주어야 한다”(≪다중≫, p. 181)고 주장한다.

우선 네그리 씨가 말하는 맑스가 내가 알고 있는 맑스와 동명이인이 아닌가 생각되고, 맑스주의자들을 얘기할 때도 네그리 씨 옆집에 사는 맑스주의자들을 얘기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맑스는 ‘역사적 경향’에 대해 언급할 때에 네그리 씨처럼 주관에 입각한 경향만 얘기한 적이 없다. 양적으로 지배적이지 않더라도 사물과의 연관 속에서 내적인 필연으로서 헤게모니를 관철할 모순들의 운동을 밝히는 것이었지, 무슨 계보학이나 들먹이면서 헤게모니적으로 될 필연적 연관을 설명하지 못하는 그런 ‘경향’이라는 방법론을 쓴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아는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임노동의 관계에서 총자본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을 규명했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인 공장에서 일하는 산업노동자만을 중심에 두고 사고한 적이 없다. 네그리 씨! 제발 얼렁뚱땅 사기나 치면서 노동자계급과 게급운동을 이간질하지 말아주세요!


3-5. 네트워크적인 노동의 허구성


네그리는 탈근대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이 되었으며, 이들 비물질 노동자들은 주로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하고 있는 생산적인 노동자라고 주장한다. 네그리의 말을 들어보자.


노동협동의 네트워크는 영토적이거나 물리적인 중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제국≫, p. 388.)


정치용어로 전 지구적 정보인프라는 네트워크 체계의 서로 다른 모델에 따라 작용하는 민주주의적 메커니즘과 소수 독점적 메커니즘의 결합체로 특징지울 수 있다. 민주주의적 네트워크는 완전히 수평적이고 탈영토화된 모델이다. ... 인터넷이 이러한 민주주의적 네트워크 구조의 가장 좋은 예이다. 비결정적이고 잠재적으로 무수한 수의 상호 접속된 노드들은 어떠한 통제 중심점 없이 소통한다. ... 인터넷은 중심이 없고 거의 모든 부분이 하나의 자율적 전체로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네트워크는 자신의 일부가 파괴되었을 때조차도 계속해서 기능할 수 있다. 생존을 보증하는 동일한 설계요소인 탈집중화는 또한 네트워크를 통제하기 매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 이 민주주의적 모델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리좀, 즉 위계적이지 않고 중심이 없는 네트워크 구조라 부르는 것이다.(≪제국≫, p. 392.)


사실은 우리가 소통과 사회적 네트워크들, 상호작용적 서비스들, 그리고 공통 언어들로 구성된 생산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 상품을 사용하고 상품의 점유에서 유래하는 모든 부를 처분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로 이해되는 사적 소유 개념 자체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점점 더 무의미해진다. 이러한 틀에서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상품들은 더욱 적어진다. 즉 공동체가 바로 생산하는 것이며, 생산하는 동안 바로 그 공동체는 재생산되고 재규정된다. 그러므로 고전적이고 근대적인 사적 소유개념의 근거는 탈근대적 생산양식 속에서 어느 정도 해체된다.(≪제국≫, p. 395-96.)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구조들과 제도들은 오늘날 점차 사라지고 있다. ... 제도들의 붕괴, 시민사회의 소멸, 훈육사회의 쇠퇴는 모두 근대적인 사회적 공간의 홈패임을 매끄럽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통제사회의 네트워크들이 생겨난다.(≪제국≫, p. 426.)


네그리가 꿈에 그리는 네트워크로 소통하면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을 하고 있는 비물질적 노동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오늘날 우리들이 대부분 PC를 가지고 있듯이, 대부분의 생산설비 역시 인공지능 즉 컴퓨터가 내장되어 있다. 대부분의 공장에서도 과거에 근육노동이었던 작업이 버튼 하나로 수행되는 것이 현실이다. 산업노동자를 공장에서 '굳은 살이 박힌 사람'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황당하지만, 이와 같이 컴퓨터 혹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여도 노동의 강도와 집중력은 별로 변함이 없다. 즉, 인공지능라는 생산력은 자본에게 전유되었을 뿐 노동의 절약이 노동자에게 혜택을 준 것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컴퓨터를 앞에 두고 컴퓨터로 노동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 역시 자본주의하에서의 노동이 고역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컴퓨터로 작업하는 노동자들이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니던가? 이점에서 노동의 현장에 인공지능이나 컴퓨터가 다량으로 도입되었다고 해서, 혹은 압도적으로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천국이 온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문제가 있다.

어쨌든 네트워크란 장소적으로 분리된 존재들이 소통하는 망이고, 여기에는 대부분 컴퓨터가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 노동의 대표적인 예는 은행원들일 것이다. 즉 금융산업의 종사자야 말로 전형적인 네트워크 산업이다. 그런데 네트워크로 연결된 이들 은행원들이 더 수평적인 소통을 하고  있고, 더 생산적이라고?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든 안 되어 있든, 혹은 작업에 컴퓨터를 이용하든 안 하든 간에, 자본주의하에서의 노동은 똑같이 고역이다. 그리고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노동을 하고 있다고 해서 결코 민주적 소통에 친화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자신에게 부과된 분절되고 협소한 작업의 수행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함께 모여서 서로 의논하면서 작업을 하는 것이 소통적이겠는가? 아니면 서로 떨어진 채로 인터넷을 이용하여 소통하는 게 더 소통적이겠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네트워크로 연결된 작업을 한다고 해서 더 민주적이라든지 더 소통적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사회적 조직과 활동에 있어서 위계적이지 않은 수평적인 결합의 경우에 민주적인 소통이 고무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이 조직하고 강요하는 작업의 현장에서는 아무리 컴퓨터를 사용하고 인터넷을 활용하고 네트워크로 조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자본의 위계적인 지휘 하에 노동하는 한 그 자체가 민주적 소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이 네트워크적으로 되었다고 해서, 혹은 초국적 자본이 부품은 A국가에서, 조립은 B국가에서 한다고 해서, 하나의 대공장에서 생산하던 것과 노동자들에게 뭐가 달라진 점이 있겠는가? 네트워크로 운영되는 콜택시 기사들에게 민주적 소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국가가 전 공무원을 정부종합청사에 모으지 않고 전국에 분산시켜 네트워크적으로 소통한다고 해서 더 민주적인 행정이 되었다는 것인가?

자본의 전세계적인 확장에 발맞추어 네트워크적인 생산도 많아졌고,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산업도 있으며, 분절된 작업의 통일을 위해 팀장급(책임자급) 회의도 있지만, 즉 탈근대화 시대에 컴퓨터와 인터넷과 네트워크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노동의 현장에서 노동자의 민주적인 품성이나 소통에 기여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고, 여전히 자본에 의해 강요되는 고역인 점도 변함이 없다.

결국 설령 네트워크적으로 소통하는 노동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특별히 소통적이라든지 생산적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고, 네트워크적으로 연결되는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의 차이는 거의 무의미하다. 자본의 조직 하에서 자본의 지휘 하에 있는 위계적인 네트워크가, 간부급에게라면 몰라도, 평노동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네트워크적 노동이라고 하여 마치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인터넷에서 서핑하고 소통하는 것과, 자본에 의해 조직되고 분산된 노동공간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것이 무슨 비슷한 것처럼 논지를 전개하는 데서도 네그리의 사기성이 들어난다고 할 것이다.


3-6. 네트워크 조직론과 네트워크 투쟁의 허구성


계속하여 네트워크 찬양론자인 네그리의 얘기를 들어보자.


911 이후 ... 그들이 대면하는 적이 단일한 주권적 국민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네트워크라는 점이다.(≪다중≫, p. 87.)


인민군의 형성에 수반되는 중앙집중과 위계는 다양한 지역 게릴라 조직들과 반란 주민들 전체의 자율성의 극적인 손실을 초래한다.(≪다중≫, p. 108.)


마지막으로 시애틀에서 제노바로, 그리고 포르토 알레그레와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으로 확대되었으며,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들에 생명을 불어 넣었던 지구화운동들은 분산된 네트워크 조직들의 지금까지로서는 가장 명확한 사례이다.(≪다중≫, p. 124.)


더 이상 민중이 기초로서 가정되지 않으며, 더 이상 주권적인 국가구조의 권력을 잡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게릴라 구조의 민주적 요소들은 한층 더 네트워크 형식으로 확장되며, 조직은 점점 더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된다.(≪다중≫, p. 118.)


전지구적 투쟁순환은 분산된 네트워크의 형식으로 발전한다. 각각의 지역적 투쟁은 하나의 마디로 기능하면서 지성의 어떠한 중추나 중심이 없이 다른 모든 마디들과 소통한다. 각각의 투쟁은 특이한 채로 남아 있고 자신의 지역적 조건들에 묶여 있지만 동시에 공통적인 웹 속에 몰입된다.(≪다중≫, pp. 266-67.)


전통적인 조직형식은 투쟁의 동일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그 통일성은 당과 같은 중앙의 지도아래 조직된다. ... 소수자적 ... 운동은 ... 통일성의 이름 아래 일차적인 투쟁에 종속되어야 한다. ... 두 번째 모델은 각각의 그룹이 자신의 차이를 표현하고 자신의 고유한 투쟁을 자율적으로 수행하는 권리 위에 기초하고 있다. 이 차이 모델은 일차적으로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에 기초한 투쟁들을 통해서 발전되었다. 이 두 지배적인 모델들은 중앙집중적 동일성 아래 통일된 투쟁인가 아니면 우리의 차이들을 긍정하는 독립된 투쟁인가 사이에서 하나를 확연히 선택하도록 한다. 다중의 새로운 네트워크 모델은 이러한 선택들 둘 다를 대체한다. ... 다중은 서로 모순적인 ‘동일성-차이’의 쌍을 서로 보완적인 ‘공통성-특이성’ 쌍으로 대체한다. ... 새로운 전지구적 투쟁순환은 개방적이고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을 취하는 공통된 것의 기둥이다.(≪다중≫, pp. 267-68.)


다양한 친연집단들이 합류하지만 이들이 하나의 커다란 중앙집중화된 집단 속으로 통일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차이와 독립을 유지하지만 네트워크 구조 속에서 함께 연결된다.(≪다중≫, p. 345.)


네그리는 네트워크적인 생산형태 하에서는 네트워크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설령 네트워크적으로 분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조직도 네트워크적으로 하자는 소리는 결코 바람직하지가 않다. 가령 우체국 노동자들이든, 혹은 전국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금융기관이나 건강보험공단 노동자들이건 간에,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작업장의 분산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이해를 갖는 전국적인 노조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은 상식일 텐데도, 즉 설령 네트워크로 분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집중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할 텐데도, 생산의 형태에 맞게 분산과 차이를 유지하면서 네트워크로 메신저질이나 하자는 것은 노동자의 단결에 해를 끼치는 반동적인 주장일 뿐이다.

아마도 네그리는 2000년도에 들어와 전개된 반세계화 투쟁이 네트워크로 동원된 것에 고무된 듯한데, 시애틀을 예로 들어 보면, 이들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슨 비물질 노동에 종사하는 다중이 아니라 1인당 수백만 원씩을 개인부담으로 지출하면서 시위를 불사한 활동가들이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이 다수 참여한 이러한 회담 반대투쟁은 일부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위가 책임 있는 전술지도부나 중앙이 없는 채로 국제적 회담의 무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 때, 잔인한 진압은 물론 회담장의 변경만으로도 무력화되는 운명이었다.

이것은 네트워크로 수평적으로 소통한다고 하여 집단지성이 작동하여 창조적인 투쟁을 만들어 낸다는 보장이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네트워크를 장악한 권력과 자본은 언제든지 이들 네트워크를 폐쇄하거나 교란하거나 감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참으로 유약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나라에서 계급대중과 결합하는 투쟁을 도외시함으로써 대중의 뿌리가 없는 소부르주아적 투쟁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예찬만 할 일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반세계화 투쟁에서 유일하게 유의미한 승리를 거둔 캔쿤 투쟁은, 네그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중앙집중적 운동체인 국제 소농조직인 비아 캄뻬씨나와 한국의 전농과 민주노총, 그리고 평등한 소통만이 아니라 의지의 결집을 모아낼 수 있는 아나키스트 그룹과 결코 스스로를 자율주의적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미주와 유럽의 수많은 활동가 소그룹들이 활동가 연대체에 결합하여, 이들 네 단위들(즉 비아 캄페시나와 한국원정단과, 아나키스트그룹과 활동가 연대)이 연대하여 투쟁지도부를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소그룹이 소그룹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그룹으로 중층적인 네트워크와 연대를 형성하고 민주적인 상층연대를 구성했을 때 쟁취할 수 있었던 승리였다.

또 포르토 알레그레와 뭄바이를 구경만 하신 네그리 씨는 네트워크적 참여만 보았는지 모르지만, 이러한 행사마저도 인터넷 상에서 게나 고동이나 제안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뢰받는 영향력 있는 그룹들의 내부 논의를 통해서 정리된 제안에 의한 것이고, 행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력과,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리딩 그룹들이 있어서 가능한 행사였다. 마치 2008년의 촛불집회 때의 대책위처럼 최소한 권위 있게 판을 까는 유능한 그룹이 있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들 리딩 그룹이 지도부로서, 혹은 군림하는 권위 있는 중앙으로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역량 있고 신뢰받는 헌신체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고, 이점에서 군림하지 않는 평등한 주체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대책위는 이 원칙을 넘어서 대중을 지도하고, 때로는 억압하려 했기 때문에 불신을 받았던 것이고 .... 즉, 시애틀이건 포르토 알레그레이건 간에 중추적인 리딩 그룹과 이에 호응하는 소그룹들이 서로 존중하는 중층적 네트워크였던 것이지, 네그리가 말하듯 절대적으로 수평적인 존재들의 네트워크가 자생적으로 이뤄낸 결과가 아니었다.

네그리는 네트워크를 절대시하면서 민주적 운동형식을 강조하지만, 요즘 어떠한 연대투쟁도, 그 속에 당이나 노동조합이 결합을 하든 않든 간에, 민주적인 소통과 의결구조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은, 한국사회의 수많은 사안별, 의제별, 연대 투쟁체에서 증명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까닭은 어느 단체도 특정한 권위를 갖지 않은 상황에서는 민주적 결정구조가 상식이고 자연스러운 귀결이기 때문에 사실 이는 당연한 얘기이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용산투쟁을 예로 들면, 당사자인 용산 4지구의 철거민과 유가족들만이 아니라 도시빈민조직이라 할 수 있는 전철연을 비롯한 다양한 철거민 단체와 진보신당과 사노준, 사노련을 비롯한 수많은 당 운동체와 인권단체, 나아가 민주노총과 사회적 실천에 관심이 있는 정의구현사제단 등 여러 종교단체들까지 범대위라는 사안별 연대투쟁체에 결합되어 있다. 물론 이 연대체는 결코 네트워크 조직도 아니고, 또한 일국적 투쟁이 무의미하다는 자율주의자들은 참여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각 조직은 다양한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면서 훌륭한 저항과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또 ‘외부 좌파세력의 선동에 놀아나지 말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에도, 다양한 당적 운동체들만이 아니라 많은 시민단체와 정치투쟁단체들이 결합하여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해고 반대는 결코 자본-임노동 관계를 극복하자는 반자본의 투쟁이 아니다’라고 빈정대는 자율주의자들은 결합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파업지도부와 상황실은 민주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고 대중은 그들을 신뢰하고 있다. 네트워크적으로 노동하는 쌍차노동자들은 결코 조립부와 도장부, 운반부, 혹은 1공장, 2공장, 3공장으로 나뉘어서 차이성이나 씨부랑거리면서 네트워크적인 소통이나 하자는 수작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네그리는, “분산된 네트워크는 떼(swarm)를 이루어 자신의 적을 공격한다. ... 전통적인 모델들에 의해서만 사고를 할 수 있을 뿐인 사람들 ... 그들은 단지 자생성과 무질서만을 보는데 ... 네트워크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실제로는 조직적이고 합리적이며 창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네크워크는 떼지성을 가지고 있다. ... 어떤 중앙통제 없이 지능체계를 형성한다. 떼지성은 근본적으로 소통에 기초하고 있다”(≪다중≫, p. 127)든지,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갖가지 다양체의 소통과 협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집합적 지성”(≪다중≫, p. 128)이라면서, 자꾸 떼지성이니 집단지성을 얘기하지만, 개방적이고 진정한 민주적 토론구조라면 집단지성과 창조성은 보장되는 것이고, 굳이 네트워크적 연대만이 독점하는 장점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네트워크란 자본이 장악하고 국가권력이 통제하고 감시하는 도구이다. 네트워크로 소통하고 동원하는 투쟁은 자본의 도구인 국가의 단 한 번의 결정만으로 폐쇄되고 무력화될 뿐 아니라, 도청과 감청을 통하여 감시되고 있고, 선동과 조작을 통해서 교란되고 있다.

강력한 조직을 만들고 연대를 구축할 것이 아니라 오직 소그룹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네트워크로 소통하면서 한날한시에 전세계적으로 노동의 대거부를 하여 제국을 끝장내자는 네그리의 대기주의적이고 한탕주의적 주장은, 보다 강고한 투쟁을 건설하려는 노동자계급의 발목을 잡고 투쟁의 모든 정보를 자본과 국가에게 갖다 바치자고 선동한다는 의미에서 자본의 첩자들의 주장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네그리가 말로써 들먹이는 코뮤니즘의 실현은 국민국가의 혁명적 변혁을 통해서 시작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을 회피하고 무시하면서 끼리끼리만 만족하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자율적 공동체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나아가 자연발생적인 저항체들의 투쟁이 네트워크로 단결해서 제국으로부터 대탈주가 일어날 날을 기도하자는 수작에 대해서는 경멸을 보낼 수밖에 없다.

이점에서 크리스 하먼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네트워크는 없다면서, “네그리와 자율주의자들이 (반세계화) 운동 자체의 추동력과 모멘텀을 칭송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지금 체제에서 희생자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희생 때문에 결국 저항을 할 것이고, 조직화할 필요가 없이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될 수 있기 때문에, 정당은 우리 운동에서 설 자리가 없고, 해야 할 역할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반자본 운동이 성장할수록 국가 권력의 폭력적인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도 국가와 국가의 폭력을 무시하고 모든 운동들이 자동적으로 네트워크로 단결해서 제국이 끝장나길 바라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중이 저항과 투쟁 속에서, 그리고 공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을 때에, 그들이 더욱 강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뭉쳐야 하고, 연대해야 하고, 강력한 조직을 건설해야 할 필요를 깨우치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파리코뮌이나 광주항쟁 때에 수만 명의 시민이 단결하여 계엄군을 몰아냈을 때에도, 네그리의 주장처럼 강력한 중앙집중적 항쟁지도부를 건설하면 개인의 창의성을 해치는 비민주적 기구가 될 것이므로, 그냥 소그룹이나 개인으로 남아 절대적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네트워크적 연대나 하자는 수작 역시 혁명을 포기한 청산주의자의 궤변일 뿐이다.


3-7. 절대적 민주주의와 혁명적 민주주의


그러나 자신의 탈영토화된 자율성 속에서 대중이 이렇게 생체 정치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자율적인 많은 지적 생산성으로, 절대적 민주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생산, 교환 그리고 소통에 대한 자본주의적 지배는 전복될 것이다.(≪제국≫, p. 442.)


혁명적 시기에 나타나는, 즉 대중이 주체로서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직접민주주의란 모든 대중이 중요한 결정에 대하여 직접 참여하고, 논의하고, 결정하고, 보고받고, 검증이 보장되는 민주주의의 이상으로서, 역사 속에서는 무엇보다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라는 측면과, 소환제를 특질로 하고 있으며,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비권위적이고 대리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참여하는 대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함께 모여서 결정하고, 결정된 결과에 따르는 것은, 대중의 자기 지배의 이상인 바, 필연적으로 실천의 주체인 대중이 직접 결정에 참가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로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광주항쟁 때나 러시아 혁명기의 수병 소비에트에서는, 수백, 수천 명의 군중이 중요사항에 대하여 광장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발언하고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었다. 때로는 파리코뮌의 군사위원회에서 보는 것처럼, 대대에서 군단평의회 위원을 선출하고, 군단평의회에서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에 파견할 대표를 선출하였다. 이것은 수천, 수만 명이 함께하는 광장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조건에서 상향식, 즉 아래로부터의 구성이었으며,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다는 점과, 간부라고 하여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없다는 규정과 함께 더욱 중요한 것은 파견의 성격이었다.

즉, 대의제 민주주의의 국회의원처럼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인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한 단위에서 사전 논의와 사후보고를 통하여 전체 성원이 동일한 의제에 대하여 논의하고 결정한 결과를 전달하는 사자(使者) 즉 심부름꾼인 것이다. 때문에 대표라고 하여 단지 보수만 동일할 뿐 아니라 자기 성원보다 높은 지위와 권위가 주어지지 않고, 평등한 위치에서 때로는 성원의 의사에 복종하는 심부름꾼으로서의 위상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구성원이 다수여서 한자리에 모일 수 없을 때, 전체 성원의 민주적인 참여와 결정을 보장하기 위하여 혁명 대중이 창조적으로 찾아 낸 방안이었다.

또한 이처럼 평등한 참여가 보장될 때에 대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혁명의 와중 속에 모두가 적극적인 실천의 주체이자 자기운명의 주체로서 참여했을 때 얼마나 많은 창조적인 실천이 나왔는지는 예를 들 필요가 없다. 대중이 혁명적이어서만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 결정에서 소외되지 않은 주체로서 참여했을 때 창조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촛불항쟁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모든 저항은 공권력의 탄압에 직면하고 진압되는 운명에 놓여지는 것이고, 이러한 폭압적 물리력을 저지하고 깨부수는 방법은 강고한 조직력밖에 없다. 이러한 때에 위계제와 중앙집중적인 구조는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문제는 이러한 중앙집중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민주주의를 관철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그 해답은 파리코뮌과 같은 혁명적 시기에 등장한 혁명적 민주주의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위계제와 중앙집중적 구조는 비민주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연대와 단결로써 강고한 실천체를 만들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로 소통하는 소그룹만이 정답이라고 주구장창 외치는 자율주의자들은 투쟁의 승리를 포기한 패배주의자에 다름 아닐 뿐 아니라, 심지어 네그리처럼 이제는 국민국가가 형해화되어 제국의 시대가 되었으므로, 국민국가에 대한 저항은 무의미하고, ‘타이밍이 중요하다’면서 날 잡아서 한 일주일 동안 전 세계의 다중이 노동과 생산을 거부하고 대탈주를 감행하면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절대화라는 가면 뒤에 숨은 청산주의자의 요설일 뿐이다.

무장한 집단적 폭력인 공권력에 대하여 원자화된 다중이 네트워크로 소통하여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은, 정권이 중요한 시기에 아고라를 비롯한 소통의 장을 폐쇄시키는 것만으로도 네트워크가 무력화 된다는 점과, 나아가 중심을 갖지 않은 네트워크는, 즉 민주적으로 선출된 중심이 없는 네트워크는,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에 누구나 제안하고 선동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음모와 교란을 목적으로 한 선동 역시 똑 같은 권리로 제안되고 선동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즉 6ㆍ10에 광화문에서 모이자는 제안이 있다면, 청계광장이나 시청에서 모이자는 제안과 선동도 동일한 권리를 갖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는 모든 성원이 함께 모여 결정하고 실천하는 광장의 민주주의가 이상적이겠지만, 설령 중앙집중적이고 위계적인 조직일지라도 투쟁 속에서 획득된, 민주적이고 비권위적 신뢰에 기반하여 헌신할 의무 외에 아무런 특권이 없는 (즉 전권을 가진 대표자나 대리인이 아니라) 사자(심부름꾼-머슴)들의 아래로부터 쌓아 올린 혁명적 민주주의에서 관철되는 것이지, 뭉치지 않고 분자화된 개인이나 소그룹이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할 때에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네그리 씨! 나는 절대적 민주주의가 실현될 그날(결국 무책임한 선동가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다가 죽느니보다는, 강고하게 뭉치면서도 민주적으로 실천하는 혁명적 민주주의를 신봉한답니다!


3-8. 다중, 민중, 대중, 그리고 노동자와 빈자의 차이


국민국가와의 투쟁을 부정하는 네그리는 민중과 대중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다중으로 나아간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인민군 모델과 게릴라 모델 모두에서 ‘민중(인민)’이라는 생각이 조직의 권위를 확립하고 폭력사용을 합법화하는 데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 민중은 지배적 국가권위를 대체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주권형태이다.(≪다중≫, p. 113.)


다중 속에서 융합하는 형상들―산업노동자들, 비물질적 노동자들, 농업노동자들, 실업자들, 이주자들 등등―은 구체적인 장소들에서 삶의 독특한 형식들을 대표하는 삶정치적 형상들이다.(≪다중≫, p. 199.)


다중은 특이성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 특이성은 그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주체, 차이로 남아 있는 차이를 뜻한다. 민중의 구성부분들은 무차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들의 차이를 부정하고 단념함으로써 하나의 정체성이 된다. 따라서 다중의 복수적인 특이성들은 민중의 획일적인 통일성의 반대편에 서있다.(≪다중≫, p. 135.)


특이성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을 기초로 해서 행동하는 다중은 능동적인 사회적 주체를 나타낸다. 다중의 구성과 행동은 정체성이나 통일성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기초한다.(≪다중≫, p. 136.)


일국적으로건 전지구적으로건 노동자들과 빈자들 사이의 분할의 선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공통적인 조건내부의 위계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중은 모두 생산적이며 다중은 모두 가난하다.(≪다중≫, p. 173.)


노동자의 주체성은 착취의 경험이라는 적대 속에서 창조된다. 비물질적 생산이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우리 시대에는 빈자가 생산의 패러다임적 형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다중≫, p. 192.)


만일 모두를 위한 보장소득의 요구가 국가의 영역을 넘어 전지구적 요구로 확대된다면, ... 부의 분배를 위한 이러한 공통적인 기획은 빈자들의 공통적인 생산성에 상응할 것이다.(≪다중≫, p. 175.)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네그리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는 산업노동자들, 비물질적 노동자들, 농업노동자들, 실업자들, 이주자들 등등, 다양한 존재들이 있는데, 이들을 민중이라는 통일성 하에 묶어서 국가권위에 대항하는 것은, 국민국가가 형해화되어 이미 의미가 없고, 나아가 그 투쟁 속에서 다양한 존재들의 차이성이 무시되기 때문에, 제국의 시대에는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이성과 차이가 존중되는 다중으로 파악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착취 받는 계급 혹은 대중이라는 개념으로 묶을 수 없으므로 빈자가 공통적인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국민국가가 형해화되고 제국의 시대가 되었다고 우기더니, 이제는 착취가 중심문제가 아니라 가난이 문제라면서, 자본-임노동 관계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착취를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가난한 자이니까 소득을 보장해달라는 보장소득의 요구로 나아간다(보장소득의 허구성은 뒤에서 다룸).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것이 총자본과 초국적 자본의 공격으로 관철되고 있는 것이나, 노동의 유연화와 복지의 축소 역시 자본의 노동에 대한 공격이고, 자본이 생산의 과정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상품화하고 있든 현실에서, 사유화―결국 상품화에 반대하고 공공성을 확보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이윤을 위한 상품생산을 본질로 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폐지하는 반자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그런데 대중의 절대 다수가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지 않으면 안 되는 프롤레타리아라고 했을 때, 그가 자본에 직접 고용이 되어 있든, 혹은 도시빈민으로서 산업예비군을 이루든 간에, 프롤레타리아(무산대중)나 노동자계급의 주체성을 가질 문제이지, 착취관계는 제쳐 놓고, 즉 반자본은 제쳐 놓고 가난의 문제로 싸우자는 것은, 가난과 빈자가 수천 년간 계속 존재해왔다는 점에서 몰역사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러한 네그리의 주장은, 반자본 계급운동을 방기하자는 것으로서 더 논할 가치조차 없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소위 비물질노동에 종사하는 공무원, 교사, 과학기술 연구자(과기노조) 나아가 연예인과 프로야구 선수들까지도 자본에 대립하여 노조를 결성하고 있는 판에, 그들도 역시 노동을 팔아야만 하는 노동자이고 프롤레타리아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깨우치고 뭉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네그리가 노동자계급의 중심주의가 마치 산업노동자만을 중심에 두는 것으로 왜곡하면서, 무슨 비물질노동과 다중이란 개념을 창작하여 전체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이간질하는 행위는 역사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반동적 행위라고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계급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 생태, 평화, 소수자 등의 정체성이 있고, 이들의 차이와 주체성을 존중한다. 그러나 대중의 절대다수가 프롤레타리아인 한에서, 착취의 문제를 버리고 결국 노동자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가난한 자로 행세하자는 네그리의 수작에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다.


3-9.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


이번에는 소위 공통적인 것에 대한 네그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오늘날 비물질적 생산의 패러다임에서 가치이론은 측정된 시간의 양이라는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그래서 착취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가치의 생산을 공통된 것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또한 착취를 공통된 것의 강탈로 간주하려고 해야 한다. 달리 말해 공통된 것이 잉여가치의 장소가 된 것이다. ... 예를 들어 정동적 노동에서 뽑아내는 이윤에 대해 생각해보라. 언어, 아이디어, 지식을 생산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공통적으로 생산된 것이 사적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민공동체에서 생산된 전통적인 지식이 혹은 과학공동체에서 협동적으로 생산된 지식이 사유재산이 된 경우가 그러하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통적인 특징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자본이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여 부를 뽑아내는 모호한 논리를 화폐가 그리고 경제의 금융화가 요약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금융자본의 이윤들은 공통된 것의 강탈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일 것이다.(≪다중≫, p. 191.)


공적 재화와 서비스들이 국민국가의 수중에 있는 근대적 주권의 바로 그 토대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떻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낡은 대립 속에 빠지지 않고 공통적인 재화와 서비스들의 사유화에 저항하는 방법을 구상할 수 있을까?(≪다중≫, p. 253.)


일반 이익, 또는 공공 이익 개념을, 이러한 재화들과 서비스들의 관리에 공통적인 참여를 허용하는 틀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정치적 생산의 탈근대적 변형에 연결되어 있는 법률적 문제가 공공이익에서 후퇴하여 상이한 사회적 정체성들을 기초로 한 사적 통제를 향해가지 않고 오히려 공공이익에서 특이성들의 공통적인 틀을 향해 전진한다는 것을 믿는다. 공통이익은 국민국가의 법률적 도그마를 정초한 공공이익과는 대조적으로, 사실상 다중의 생산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공통이익은 국가의 통제 속에서 추상화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인, 삶정치적인 생산 속에서 협력하는 특이성들에 의해 재전유된 일반 이익이다. 즉 그것은 관료의 수중에 있지 않고 다중에 의해 민주적을 관리되는 일반 이익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법률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앞에서 분석한(긍정적인 외부효과들에 의해, 또는 새로운 정보네트워크들에 의해,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모든 협력적이고 소통적인 노동형태들에 의해 창출된 공통성과 같은) 경제적 삶정치적 활동과 일치한다. 요컨대 공통적인 것은 주권의 새로운 형태, 즉 민주적인 주권을 나타내는데, 여기서 사회적 특이성들은 자신들의 삶정치적 활동을 통해 다중 자체의 재생산을 가능케 해주는 재화들과 서비스들을 통제한다. 이것이 공적인 것에 기반을 둔 국가에서 공통된 것에 기반을 둔 코뮌으로의 이행을 이루어낼 것이다.(≪다중≫, p. 254.)


결국 네그리는 공적인 문제, 즉 교육이나 물, 전기, 의료 등등의 공적인 영역을 상품화하지 말자는 우리의 입장과는 달리, 다중이 공통적으로 생산한 지식이나 이익 즉 주민공동체에서 생산된 전통적인 지식, 과학공동체에서 협동적으로 생산된 지식, 정동적 노동에서 뽑아내는 이윤, 금융자본의 이익 그리고 외부효과, 즉 도로의 신설로 주변의 주택이 얻는 이익 같은 것을 공통으로 참여하여 관리하자는 주장이다. 사적소유제도 때문에 자본가가 전유하였던 소위 공통적인 것은 사적소유를 폐지하거나 특허권이나 지적재산권의 법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해결되는 것인데, 이것을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뜻에서 공통으로 생산하였으니 공통으로 관리하자는 주장은 자본의 권리 전반을 폐지하자는 주장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즉, 국가권력과 자본에 대항하는 주체성인 민중과 프롤레타리아라는 통일성을 부정하고, 따라서 국가권력과 그에 따른 주권적 법률적 통제인 사적소유의 폐지와 부정이 아니라, 단지 자본이 전유할 권리가 없는 공통적인 생산물을 공통적으로 관리하자는, 예를 들어 공통적으로 생산된 종자 정보나 특허권ㆍ지적재산권을 공통적으로 참여하여 관리하자는, 엄청나게 혁명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로서의 권리에 의해 전유되는 잉여가치가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와는 무관하거나 애매하게 발생한 가치만을 공통적으로 관리하자는 것이다. 네그리는 바로 이걸 주장하기 위해서, 즉 착취관계와 싸우지 말자고 하기 위해서, 노동가치론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4. 네그리의 제안들


... 우리는 정치적 행동주의, 계급투쟁, 혁명조직의 몇몇 기본적인 전통적 모델들이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무용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그것들이 종지부를 찍게 된 더욱 중요한 이유는 다중 자체의 변형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회계급들의 전지구적 재구성,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그리고 네트워크 구조들에 기초하는 의사결정 형태들 등은 모두 모든 혁명적 과정의 조건들을 급진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예컨대 파리코뮌에서 10월 혁명에 이르는 많은 에피소드들 속에서 일차적으로 규정된 전통적인 근대적 반란관은, 대중들의 반란적인 활동에서 정치적 전위들의 창출에 이르는, 대항권력조직의 구축에서 국가권력의 장악에 이르는, 그리고 제헌과정의 개시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확립에 이르는 운동에 의해 특징지워졌다. 혁명적 활동의 이러한 연속은 오늘날에는 상상할 수 없다. 그 대신 반란의 체험은 다중의 살(flesh) 속에서 재발견되고 있다. 반란활동은 더 이상 그러한 단계들로 분할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동시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저항, 탈출, 적의 권력의 공동화 그리고 다중에 의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동일한 과정이다.(≪다중≫, p. 103)


자본과 세계화에 반대하는 듯한 네그리가 제국에 대항할 주체로서의 ≪다중≫이라는 책을 쓰면서, 자본과 세계화가 강요하는 착취와 수탈과 억압과 소외에 대한 일언반구의 묘사도 없이 오직 전쟁과 민주주의만 거론하면서, 저항의 형태면에서 포드주의적 시절에는 인민군이 유효했고, 농촌에 중심을 두거나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에는 다중심적 게릴라전이 유효했지만, 이들 운동은 결국 중앙집중적 단일체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는데, 비물질노동이 헤게모니를 갖는 네트워크 시대에는 특정한 중심이나 중앙이 없이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다중의 네트워크 운동이 시대에 적합한 이행형태라고 주장하며, “전쟁에 저항하기, 그리하여 이 전지구적 질서의 정당화에 저항하기는 공통적인 윤리적 과제이고 ... 자본은 다중의 저항에 의해 끊임없이 위기에 처해지고, 다중과 제국의 육박전에서 다중은 자신의 토대로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이 민주적 운동은 탈출(exodus)의 과정이며, 제국적 주권의 권위를 종속된 사람들의 동의에 연결시키는 끈을 다중이 끊는 과정”(≪다중≫, p126)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향한 이 싸움은,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WTO 회담에서의 극적인 사건들에서부터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의 집회에 이르는, 지구화 문제를 둘러 싼 일련의 항의들과 시위들 전체를 관통한다. 민주주의를 바라는 욕망은 또한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대항하는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항구적 전쟁상태에 대항하는 다양한 운동들과 시위들의 핵이다.(≪다중≫, p. 101.)


국민국가를 부정하고, 노동가치설과 노동자계급 중심주의를 부정하는 네그리는, 당연한 귀결로서 착취관계에 기반한 반자본 투쟁(자본의 착취권은 결국 국민국가가 인정한 소유권이고, 국민국가의 변혁 없이 자본운동은 제약되거나 폐지되지 않는다. 즉 반자본은 국민국가의 변형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 눈을 감기 위해서, 착취 받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저항의 주체로서 빈자라는 정체성인 다중을 제시하고, 다중의 정체성은 공통된 것(종자정보와 같은 공통의 지식이나 지적재산권)을 강탈당한 데서 찾자고 한다.

세계화를 찬양하고 미제국주의를 찬양하더니, 결국 반자본의 이념을 폐기하고 지적재산권 등으로 얻는 자본의 폭리를 공동으로 참여하여 관리하자는, 사민주의보다도 못한 자유주의적 이상을 향해 달려가자는 이런 헛소리까지 따로 비판할 필요가 있을까?

친세계화와 자본(의 특별이윤)에 빌붙기를 주장하는 네그리에게 남은 것은, 직접적으로는 계급투쟁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전쟁반대나 민주주의와 같은 주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다중≫이란 책이 제1부 전쟁, 제2부 다중, 제3부 민주주의로 구성된 이유이고, 바로 여기에서 네그리의 본질이 독점자본의 특별이윤을 질투하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들의 사상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여보슈! 네그리씨! 나도 전쟁반대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누구나 앞장서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평화와 민주주의란 반자본의 투쟁으로 완성된다고 믿는다우!


4-1. 도주와 탈주(exodus) 그리고 삐딱한 자세와 변증법적인 투쟁


보편적 유목주의에서 새로운 형상들과 주체성들이 생산된다. 대중이 지닌 탈영토화하는 힘은 제국을 유지하는 생산력이자 동시에 제국의 파괴를 요청하고 제국의 파괴를 필연적이게 하는 힘이다.(≪제국≫, p. 102.)


하나의 유령이 세상에 출몰하는데 그것은 이주라는 유령이다. ... 도주와 탈출은 제국적 탈근대 안에서 대항하는 강력한 계급투쟁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성은 자생적인 투쟁수준을 이루고 있으며…’(≪제국≫, p. 285.)


대항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간조건의 국지적이고 특별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면서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삶을 구축하기 위해 시도해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폭력적인 야만적 이행이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이 말하듯이, 이것은 긍정적인 야만행위이다.(≪제국≫, p. 287.)


이러한 야만적 전개과정은 ... 무엇보다도 젠더와 성이라는 신체적 관계 및 배치에서 인식할 수 있다. 젠더 사이에서 그리고 젠더 안에서 신체적 성적 관계들이 지닌 관습적 규범들은 점점 더 도전과 변형에 열려있다. 신체들 자체가 변형되고 변하여 새로운 탈인간적 신체를 창조한다.(≪제국≫, p. 288.)


오늘날의 신체적 돌연변이들은 인류학적인 탈출을 구성하며...(≪제국≫, p. 289.)


대항의지는 실제로 명령에 완전히 복종할 수 없는 신체를 요구한다. 대항의지는 가족생활에, 공장 규율에, 전통적 성생활의 규제 등에 적응할 수 없는 신체를 요구한다.(≪제국≫, p. 339.)


나는 이 따위의 신체적, 인류학적 탈출에는 관심이 없으니 비판을 생략하겠다.


횡단적 이동성이야말로 수목적이라기보다는 리좀적이다. ... 훈육된 노동력이 지닌 새로운 횡단적 이동성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실적이고 강력한 자유추구를 훈육체제 안에 제한되고 통제될 수 없는 새롭고 유목적인 욕망들의 형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제국≫, p. 339.)


인구의 이동성 때문에 국내 시장(특히 국내 노동시장)을 개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점점 어렵게 된다. 자본주의적인 명령의 적용을 위한 적절한 영역은 더 이상 국가 경계나 전통적인 국제적 경계선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제국≫, p. 339.)


자본은 다중에 의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명령과 권위에 대한 다중의 저항에 의해 끊임없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삶정치적 장에서 벌어지는 다중과 제국의 육박전에서, 다중은 자신의 정치적 토대로서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 민주주의는 ‘절대적 민주주의’이다. 우리는 또한 이 민주적 운동을 ‘탈출(exodus)’의 과정으로 부를 수 있다. 제국적 주권의 권위를 종속된 사람들의 동의에 연결시키는 끈을 다중이 끊는 것이 거기에 포함되는 한에서 말이다.(≪다중≫, p. 126.)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첫 번째 층위의 공화주의적 원칙을, 즉 도주, 탈출, 유목주의를 본다. 훈육시대에는 사보타주가 저항의 기본관념이었던 반면, 제국의 통제시대에는 도주가 저항의 기본관념일 것이다. 근대에서의 대항은 종종 직접적인 그리고/혹은 변증법적인 힘의 대립을 의미했던 반면, 탈근대에서의 대항은 애매하거나 삐딱한 자세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당연하다. 제국에 대항하는 전투는 삭제와 태만을 통해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주는 어떤 장소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권력의 장소를 철거하는(비우는) 것이다.(≪제국≫, pp. 283-84.)


일주일간의 전지구적 파업은 그 어떤 전쟁도 저지할 것이다.(≪다중≫, p. 413.)


허허허! 제국에는 경계도 없고 안도 밖도 없다면서 어디로 탈출을 하자고? 이주 노동이, 자본의 요구에 의한 것일 뿐, 자본에게 부담을 주기는커녕 자본의 축적에 기여하는 판에, 탈영토 운운하면서 고국을 떠나 사회의 최하층으로서 착취당하는 것을 창조적인 저항이라고 칭송하더니, 변증법적으로 대립하지 말고, 즉 anti로서 반자본의 전면전을 하지 말고 삐딱하게 태만으로 저항하자고? 그러다가 짤리면 어떡하려구? 권력의 장소를 비우는 도주란 뭔데? 날 잡아서 전세계적으로 일주일만 파업하면 끝난다는 그 얘기 하는 거요? 일국에서의 총파업도 제대로 하기 힘든 판에, 아니 지난 10년 동안 연맹 총파업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판에, 뭔 세계적인 총파업? 솔직히 말해서 그냥 그런 날이 오기만 기다리자는 수작 아니우? 자본과 제국주의자들이 (노여워하는 척하며) 무척 고마워하실 발언이군요.

물론 삐딱한 저항도 때로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작년에 시위의 자유가 없는 중국에서 우보산책의 제안이 있었다. 그냥 시 중심가 광장에서 서로 어울리지 말고 천천히 어슬렁거리면서 산책만 하자는 제안이었다. 벨로루시에서는 독재자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웃으면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자는 실천도 있었고, 작년 겨울 광화문에선 촛불산책도 있었다. 이러한 저항은 저항이 극도로 억압당하고 위축되었을 때, 공권력이란 폭력 앞에서 시민의 힘이 너무나 보잘 것 없을 때, 즉 역관계가 극도로 불리할 때 저항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권력에 대한 조롱이고 해학이다.

2008년 광화문에 수십만 명이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어도, (물론 촛불이 많이 나와 거리와 광장을 장악했을 때는 굳이 촛불을 들지 않았지만,) 노골적인 폭력 앞에선 속수무책이지 않았던가? 저항의 힘이 극도로 약하고 위축되어 있을 때에는 삐딱한 저항이라도 하자는 것,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궁극에는 변증법적인 정면대결을 하지 않으면 권력의 타도도 없고, 설령 이승만처럼 독재자가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다른 정상배들에게 혁명의 성과를 도둑질 당한다는 것, 이런 게 역사의 교훈이다.

삐딱한 투쟁은 스스로 약자임을 인정하는 약자의 투쟁이다. 그러나 오늘은 비록 약자여서 삐딱하게밖에는 저항할 수 없지만 내일은 당당하게 정면의, 즉 변증법적인 투쟁을 꿈꾸는 투쟁이다. 어떠한 투쟁도, 설령 그 잘난 탈근대화의 시대에도, 저항이 성장하면 더 이상 삐딱할 필요 없이 당당하게 싸워 나가야 하는 것이 상식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네그리가 변증법적인 대결을 시대에 낡은 것으로 매도하면서, 오직 삐딱한 것만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절대화하고 있는 것은, 행여나 대중의 저항이 성장하여 삐딱함을 벗어 던져야 될 때에도 당당하면 안 된다며 투쟁의 발목이나 잡을 훼방꾼으로서의 역할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고, 그가 궁극의 승리를 포기한 패배주의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세계화와 미제국주의의 어마어마한 힘에 굴복한 것처럼 ... 네그리 씨! 제발 요사스러운 소리는 그만하고 구경만 하세요!

이처럼 네그리가 삐딱함만을 찬양하는 이유는, 국민국가에 반대하는 일국적 투쟁,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지적 기획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반자본의 계급투쟁을 부정했을 때, 이미 예견되었던 주장이다. 강고하게 뭉치는 것은 낡은 것이니까 다양성과 차이성을 존중하면서 네트워크만 하자는 사람이 어떻게 적을 부정하는 변증법적인 힘의 대립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계급이여! 제발 뭉치지 말고 자본과 국가에게 정면으로 힘의 대결을 하지 마시오! 당신들의 투쟁은 이미 낡았습니다. 삐딱함이라는 첨단적인 방법으로 인생을 즐깁시다! 이것이 바로 투항주의자인 네그리가 ≪다중≫이란 글을 쓴 목적이다.


4-2. 보장소득


다중의 정체성이 빈자들인 한 소득을 얘기하는 것은 필연이다. 착취관계의 폐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세상의 주인이 되자는 얘기가 아니라 자본의 소득을 좀 나눠 주시라는 말씀이다.


언젠가는 가난의 공통적인 조건에 반대하는 항의들이 구성적인(입헌적인) 정치적 기획들 속에서 이 공통적인 생산성을 들어내야 할 것이다. ... 보장소득―고용과 상관없이 모든 시민에게 지불되는 소득―에 대한 요구는 가난을 겨냥하는 그와 같은 구성적 기획이다. 만일 모두를 위한 보장소득의 요구가 국가의 영역을 넘어 전지구적 요구로 확대된다면, 이것은 지구화의 민주적 운영을 위한 기획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의 분배를 위한 이러한 공통적인 기획은 빈자들의 공통적인 생산성에 상응할 것이다. (≪다중≫, p. 175.)


이제야 부의 분배, 즉 착취관계의 폐절이 아니라 착취자의 온존을 주장하시는 네그리씨의 소부르조아적 본색이 드러나는군요.

네그리는 ≪제국≫과 ≪다중≫이라는 책을 통하여 국민국가와 싸우는 것도 무의미하고, 비정규직 복직투쟁이나 임금인상 투쟁도 반자본의 의미가 없다고 빈정대면서 제국과 맞장 뜰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그 하나는 강고한 조직운동 같은 것은 만들지 말고, 네트워크로 메신져나 하면서, 날 잡아서 한 일주일만 전세계적으로 노동거부를 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장소득을 요구하는 운동을 하자는 것이다. 대거부(사보타지)에 대해서는 위에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보장소득에 대하여 논하기로 하자.

보장소득 혹은 기본소득이란, 노동에 참여하든 않든 간에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소득을 달라는 주장인 바, 고용과 노동의 제공 여부와 상관없는 보장이라는 점에서 얼핏 진보적인 것 같지만, 바로 이 주장이야말로 네그리가 소부르주아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먼저 이 주장은 자본에 반대하거나 자본의 철폐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게 자본의 돈으로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는 사회민주주의적 요구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작년도 GNP는 1,000조 원이고, 국가예산은 230조인데, 곽노안 교수의 추산에 의하면 기본소득액은 280조 원이 된다. 그런데 이 재원을 불로소득에서만 조달하자고 했을 때는 자본이 자본임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게 되고, 결국 그 재원은 국민의 세금이 되는 것이어서 일정소득 이상의 사람은 자기 돈을 내었다가 자기 돈을 되돌려 받는 것이고, 따라서 극빈층만이 이해관계를 갖는다. 허경영이 이미 이와 비슷한 선동을 하였지만, 설령 실현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층의 소수일 뿐 국민적 운동이 될 수도 없다. 또한 전국민적 요구로 국가와 자본이 이 제안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의 이해에 맞게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국민의 보장소득 혹은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국가인 브라질에서도 시행되고 있고, 복지강국인 독일에서도 관리비용의 축소 면에서 검토되고 있다. 자본의 폐절의 이념을 담지 않은 이러한 주장과 운동은 결국 서구 사민주의의 현실에서 보듯 자본과의 공존, 나아가 자본에 대한 구걸로 귀결될 운명이고, 더구나 화폐로 지급되는 이러한 소득은 삶의 상품화에 더욱 기여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이 역시 소부르주아적 발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요구를 국민국가의 형해화를 주장하는 네그리가 주장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지만, 설령 전 세계적으로 요구한다고 하면 그 기준소득을 몇 달러로 할 것인지도 궁금해진다. 인도는 100달러로 하고, 한국은 1,000달러로 할 것인가?

결국 보장소득이란 제대로 실현될 전망도 없는, 나아가 자본과의 공존을 운명으로 하는 소부르주아적인 발상일 뿐이다.


4-3. 사랑의 공동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사회체를 창조하는 것이고, 이 새로운 사회체는 거부를 훨씬 능가하는 기획이다. 단순한 거부를 넘어서 또는 그 거부의 일부로서 우리는 또한 새로운 삶의 양식과 무엇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벌거벗은 삶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간 homohomo, 즉 집합적 지성과 공동체의 사랑에 의해 알맞게 되고 풍부해진 인간성으로 향한다.(≪제국≫, p. 274.)


이러한 내부는 ‘대중의’ 지성과 정서의 네트워크의 생산적인 협동, 즉 탈근대적 생체정치의 생산성이다. 이러한 전투성은 저항을 대항권력으로 만들고 반란을 사랑의 기획으로 만든다.(≪제국≫, p. 520.)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 모두 다중의 공통적인 물질적ㆍ정치적 기획 속에 표현되고 구체화된다. ...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다중≫, p. 417.)


타이밍이 결정적이다. ... 폭력과 모순, 전지구적 내전, 제국적 삶권력의 부패 그리고 삶정치적 다중의 무한한 노력의 오랜 시기가 지난 후에, 엄청나게 축적된 불만들과 개혁제안들이 어느 시점에선가 강력한 사건에 의해, 급진적인 반란의 요구에 의해 변형될 것임에 틀림없다. ... 머지않아 하나의 사건이 그와 같은 살아 있는 미래 속으로 우리를 화살처럼 쏟아 넣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진정한 행동이 될 것이다.(≪다중≫, p. 424.)


결국 네그리가 주장하는 것은 네트워크적으로 소통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오랜 시기가 지난 후에 급진적 반란이 일어날 그날까지 메신저질이나 하자는 얘기인데, 여기서 사랑을 들먹이는 이유는, 착취관계에 기반한 적대에 기반하면 자본에 반대하자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적대의 통일성에 기반한 민중이나 대중이 아닌, 빈자들의 사랑에 기반한, 그리하여 공통으로 생산된 독점자본의 특별이윤을 보장소득으로 나눠달라고 하면서, 말하자면 신앙촌운동이나 하면서 예수가 재림할 그 날을 기다리자는 게 네그리 주장의 핵심이다.

최근에 네그리의 수제자를 자처하는 조정환이, 전기를 자급하는 방법을 찾자느니, 스스로 건강을 돌보자느니, 공동체 정원을 만들자느니 등등, 체제와 변증법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삐딱하게 혁명을 흉내 내는 자율적 공동체를 만들자는 제안을 담은 책을, “세상을 바꾸는 즐거운 상상”이라는 부제를 달아 <<혁명을 표절하라>>는 책으로 내고 있는 것도, 네그리 등이 주장하는 자율주의라는 게, 적대에 기반한 투쟁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한 자위(masturbation)나 하자는 운동임을 잘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5. Epilogue

  ― 네그리의 묘비에 바치는 헌사!


위대하신 철학자 네그리 선생님께 바칩니다.


그대는 있지도 않은 제국이란 개념을 발명하시어, 국민국가의 법과 질서를 위해 발동되는 저희들의 방패와 물대포와 고무총과 군홧발에 저항하고 대드는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고 해롭다고 주장하여 주시고,


저희들 자본과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위해 관철하고 있는 세계화를 가속화해야 된다고 들뢰즈와 가타리 등의 동료와 함께 열렬히 칭송하시면서, 일국적이거나 국지적인 기획과 투쟁이 무의미하다고 바람잡아 주시고,


석유전쟁인 이라크전까지도, 내켜하지 않으시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이해가 아니라, 제국의 평화를 위한 경찰행동이었다고 칭송하여 주시고,


“만국의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는 맑스의 주장을 얼렁뚱땅 산업노동자만 단결하라는 주장으로 바꾼 다음에, 비물질 노동이 헤게모니를 갖는 세상이 왔고, 세상에는 산업노동자만 있는 게 아니라 실업자와 이주노동자도 있으니까,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기 위해서 다중이란 표현을 쓰자면서 프롤레타리아와 노동계급과 그들의 운동을 이간질 하여 주시고,


적대에 기반한 대중이나 민중이란 말을 쓰면서 국가나 자본에 저항하는 것은 낡고 해롭다고 하시어, 대중의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의 발목을 잡아 주시고,


나아가 노동과 삶의 경계가 무너져서 착취된 가치를 측정할 방법이 없으니, 누구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공통적으로 생산된 지식으로 얻어지는 특별이윤만 보장소득으로 좀 나눠달라고 애교도 떨어 주시면서,


노동자들은 결코 강대하게 뭉치지 말고, 저희들이 속속히 들여다보고 있고, 언제든지 교란하고 폐쇄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통해서 메신저질이나 하자고 설득하시어,


저희들 제국주의자들과 독점자본이 발 뻗고 자게 해주시었으니 참으로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혹자는 선생님을 소부르주아 잡사상가라고 폄하하지만, 선생님이야 말로 진정으로 저희들 제국주의자와 독점자본가들의 위대하신 이데올르그로서 역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이에 전 세계 제국주의자들과 자본가와 독점자본가들의 뜻을 모아 선생님의 묘비에 헌사를 바칩니다.


전 세계 제국주의자들과 자본가와 독점자본가 일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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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민주노총 지도부 조문 유감

민주노총 지도부 조문 유감

다시 두 통의 유서를 아프게 읽으며

이성우 미디어충청 편집위원장  / 2009년05월26일 17시38분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40대의 후반에 작고한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은 죽음이 갖는 생물학적 의미를 넘어서서 죽음을 애도하는 정치, 사회적인 근원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며, 그의 육체가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에 대한 기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추모의 열기는 그에 대한 기억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뜨겁고, 또한 그의 죽음이 그 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더욱 커지거나 줄어든다. 젊은 연예인의 자살이나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나, 그런 의미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니까 지금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추모의 열기는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의 급작스런 죽음은 그에게 열광하고 그에게 표를 던졌던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큰 충격이고 슬픔일 수 있으며, 누구라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애도할 수 있다. 비록 모양새는 자살이지만 많은 국민들은 ‘살아있는 권력이 죽은 권력을 괴롭혀서 살해’했다고 믿고 있으며 서슴없이 그렇게 말하고들 있다. 더 부패한 정권이 전직 대통령의 ‘옥에 티’를 압박하여 못 견디게 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대중적인 공분은 이명박 정부 아래 자신들이 15개월여 동안 겪은 핍박과 굴종의 경험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폭발력을 응축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죽은 대통령의 유령이 현실 정치를 움직이는 전무후무한 사건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2004년 탄핵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를 심각하고 강력하게 양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른바 인물 중심의 ‘3김 정치’ 시대를 종식하고 탈권위주의의 시대를 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 내부의 공고한 시스템으로 구축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는 민심을 거스르면서까지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은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다. ‘노무현’이냐 ‘이명박’이냐를 놓고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이 봉하 마을을 비롯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 아닌가. 양 극단의 사이를 채우고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진영, 특히 노동운동진영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급변하는 흐름에 동요하거나 휩쓸리지 말고 중심을 제대로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근 수년간 민주노조진영은 상층부의 잇따른 비리와 성폭력 사건 등으로 말미암아 혁신해야 할 대상으로 부각되었고, 정부와 언론의 민주노조 죽이기 공세는 끝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그 집요한 공격이 일정하게 성공한 것일까, 현 시점에서 민주노총과 민주노조운동은 안타깝게도 노동자 민중의 희망이 아니며, 미래의 대안도 아니다. 이러한 때, 범국민적인 추도의 열기가 아무리 뜨겁더라도 노동운동진영이 그것에 편승하여 섣불리 부드러운 화해의 손길을 내밀다가는 악수와 공감을 얻기는커녕 내부의 상처를 헤집고 억울함에 사무치는 통곡소리를 더욱 크게 할 뿐이다.

 

“한 소중한 생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늘, 그것도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크게 진척시킨 전직 대통령인데, 애도 성명도 내지 말고 조문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혹여 이렇게 따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말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범국민적인 추모의 열기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떤 누구라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민중운동진영이나 민주노조진영이 조직의 이름을 걸고 죽음에 대한 예의를 빌미로 자기 조직의 정체성을 해치는 행위를 합리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했던 역대 정권에서 죽어간 수많은 혼백들을 일일이 불러대지는 않더라도, 용산참사로 숨진 시민들 5명의 비통한 외침과 정권의 탄압에 자결로 맞선 노동자 박종태의 처절한 절규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 온 국민의 애도에 둘러싸인 전직 대통령의 영전에 국화꽃 한 송이 더 바치는 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외롭게 떠돌고 있는 노동자 민중의 영혼을 달래고 그 뜻을 기리고 이 땅 위에서 구현하는 일이다.

 

나는 민주노조운동의 간부들에게 ‘특별한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와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가 남긴 유서를 다시 읽어 보라고 감히 권한다. 온 국민이 애도하는 ‘특별한 사람’의 유서에는 한 개인의 상처와 고통만이 크게 차지하고 있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에는 이 땅을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 민중의 상처와 고통이 오롯이 배어있다. ‘특별한 사람’은 국익을 내걸고 이라크 파병을 감행하고, 비정규악법을 강제하고, 한미FTA를 밀어붙였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단이 국익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는 국익의 근본이 노동자 민중의 행복한 삶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것을 죽음으로 실천했다. 나는 감히 주장한다. 유서를 통해서 나타난, 죽음을 앞둔 두 사람의 자세로 견주어 보면,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였지만 ‘특별한 사람’은 그저 평범한 개인에 불과했다. 그래서 난 이 땅 소수의 ‘특별한 사람’보다 다수의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이끌고 가는 것이라고 또다시 확인한다.

 

노파심에 한마디 더 하겠다. 혹시라도 민주노조의 이름으로 봉하 마을에 가거들랑, ‘특별한 사람’에 대해 남몰래 보냈던 경외심은 버리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과 함께 하는 새로운 투쟁에 대한 다짐과 각오를 단단히 벼리고 오라! (이성우 미디어충청 편집위원장)

 

두통의 유서를 다시 읽으며
1.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2009. 5. 23. 05:21)

 

2.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들이 투쟁의 제단에 재물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동지들을 희생시킬 수 없었습니다. 동지들을 잃을 수 없었습니다.
저의 육신이 비록 여러분과 함께 있진 않지만, 저의 죽음이 얼마만큼의 영향을 줄 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 대접 받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큰 나라를 반토막내서 배부르고 등 따신 놈들 미국과 극우보수 꼴통들이 이번 참에 아예 지네들 세상으로 바꿔 버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는 실종된 지 오래됐고,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하거나 고분고분 노예로 살라고 합니다.

 

그 속에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안락만을 위해서 투쟁할 것이 아니라 통큰 목적을 가지고 한발 한발 전진하기 위해 손을 잡고 힘을 모으는 적극적이고 꾸준한 노력과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자의 생존권, 민중의 피폐한 삶은 사상과 정견을 떠나서 무조건 지켜져야 하고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기득권을 버리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 민중은 이론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죽음이 세상을 바꿀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최소한 화물연대 조직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 힘 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기 위해 선택한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깜깜할 겁니다. 어떻게 승리하는지 저는 보지 못할겁니다. 그것이 아쉽고 억울합니다.
꼭 이렇게 해야, 이런 식의 선택을 해야 되는지, 그래야 한 발짝이라도 전진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속상하고 분합니다.
이름을 거론하자니 너무나 많은 동지들이 떠오릅니다.
저를 이만큼 건강한 간부로 활동가로 있게 해 준 소중한 분들. 저를 믿고 따라 준 형님, 동생, 친구들. 이 의미있는 투쟁, 힘겨운 투쟁에 끝까지 남아 준 동지들 모두가 저에겐 희망이었습니다.

 

광주라는 곳도 사랑합니다.
날고 싶어도 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행복하고 서로 기대며 부대끼며 살아가길 빕니다.
복잡합니다. 동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속에 저도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 올림.

 

(2009. 5. 3. 자결 확인된 이후 발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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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단계 촛불조직론 소고

  • 분류
    운동론
  • 등록일
    2009/01/29 16:37
  • 수정일
    2009/01/29 16:37
  • 글쓴이
    서른즈음에
  • 응답 RSS
현단계 촛불조직론 소고
 
1.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서의 촛불
2.       신자유주의 세력의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억압과 독재에 대하여
3.       대체권력의 맹아로서의 자주적 조직의 민주적 특질에 대하여
4.       촛불조직의 민주주의
5.       새로운 형태의 조직으로서의 촛불조직
6.       민주적 조직의 사례검토-촛불연행자모임과 815 평화행동단
7.       연대와 관련하여-위로부터인가 아래로부터인가? 지도체인가 헌신체인가?
8.       결어
 
1.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서의 촛불
 
2008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 주체의 측면에서 계급이나 대중의 틀로 파악되지 않는 다중의 자주적이고 직접적 행동이었다고 본다면, 대상 또는 지향의 측면에서는 형식적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의 폭발로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의 노래가 폭발적인 공감을 얻은 것은 이를 반증한다.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근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대의제 민주주의의 극단으로서, 아무리 보통 직접 평등 비밀의 선거를 하더라도,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은 단지 이념일 뿐이고 실제로는 4년에 한번 투표권을 행사할 때만 유권자일 뿐, 평상시에는 통치의 대상 혹은 피치자일 뿐이다. 즉 국민이 뽑은 정치인들이 국민으로부터 독립된 권력으로서 국민에게 대립물로 서서 국민을 소외시키는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마치 1844년 경제철학초고에서 맑스가 언급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하에서는 인간이 생산한 상품과 사회적 관계가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에 대한 적대적인 대립물로서 나타난다 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은 단지 광우병 협상이라는 행정행위가 위험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국민이 뽑은 권력과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받들고 복종하기는커녕 배반하고 적대하는 것에 대한 분노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형식적이고 기만적인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분노로서, 그 자체에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포함하고 있다. 즉 자신들이 뽑아 준 권력이 맘에 안들 때 4년이나 5년 후에 표로 심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분노가 너무 커서 당장 갈아치우자는 열망이 명박퇴진으로 나타난 것이고, 이는 기껏해야 조작과 동원의 대상이었던 유권자인 시민이 정치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받는 피치자이기를 거부하고 주권자로서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행동이다.
 
2.      신자유주의 세력의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억압과 독재에 대하여
 
또한 촛불의 촉발 요인이 미국산 소고기 수입 협상이었고,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한미 FTA협상의 전제조건이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2008년 한국에서의 촛불항쟁은 단순히 반민주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대통령이나 강부자 뉴라이트 세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서 축적위기에 몰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에서 강요되는 반민중적 억압에 대한 필연적인 반발과 저항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고, 그 점에서 저항의 지향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이 항쟁은 불충분한 미완의 혁명이 될 수도 있다.
 
한국적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의료보험의 민영화라든지, 물 전기 수도 가스 철도의 민영화와 사유화,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유연화, 금융의 개방과 자유화, 복지의 축소, 이 모든 것들은 70년대말 영국의 대처나 레이건으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인 것이고, 그 본질은 축적위기에 몰린 자본의 노동에 대한 공격이다. 이러한 공격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위기의 폭발이 바로 작금의 경제위기인 바, 이는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와 권력이 반민중적인 억압을 심화시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이 파쇼적 독재로 나아가는 것은 단지 그가 정신병자여서가 아니라, 시민과 민중을 억압하지 않으면 안되는 신자유주의 세력에 기반한 정권이라는 본질 때문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촛불을 단지 반동적이고 반역사적인 하나의 정권이나 집권자에 대한 저항으로 보고, 단지 매국집단이나 뉴라이트 반대 혹은 MB악법이나 MB정책의 취소로서 똑 같은 신자유주의 세력인 (광우병 협상보다 100배나 반민중적인 한미 FTA협정을 국민에게 강요한) 노무현 정도의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은, 왜 국민이 뽑은 정권이 국민을 배반하고 대다수 민중을 억압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는 MB의 모든 정책이 한줌도 안되는 신자유주의 세력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서 그 반민중적 본질 때문에 민중과 촛불을 억압하고 끝내는 파쇼독재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는 점만 지적하자.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적 소외의 극단적 형태로서의 대의제 민주주의 혹은 민주주의를형해화한 이명박 정권의 억압과 탄압이 전 세계의 축적위기에 몰린 신자유주의 세력의 생존을 위한 발악의 일환이란 점에서, 촛불의 꿈과 지향은 단순히 보다 품성이 좋은 대통령을 뽑고, 보다 서민적인 당을 다수로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할 것이다. 따라서 촛불은 형해화한 대의제 민주주의(대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직접민주주의의 열망과 최소한 반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분명히 하지 않는 한, 반동적이고 반민주적인 억압세력과 올바르게 싸울 수가 없을 것이다.
 
3.      대체권력의 맹아로서의 자주적 조직의 민주적 특질에 대하여
 
그렇다면 촛불의 미래 혹은 촛불의 이상 즉 정치적 소외의 극복은 어떠한 모습일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촛불이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대중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직접행동에 기반한 광장의 민주주의 혹은 집단지성이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어떠한 기성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광장에 평등하게 나서서 모두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참여한다는 점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을 품고 있는 것이고, 실은 이러한 직접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도 프랑스혁명 때의 파리콤뮨이나, 러시아혁명 때의 평의회(소비에트), 광주항쟁 때의 시민광장과 시민군에서 보듯 피치자에 대한 억압의 도구로서의 본성을 갖는 국가라는 권력장치를 부정하는 즉 억압과 소외의 기제를 부정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억압과 소외를 부정하고 참다운 민주주의와 평등세상을 꿈꾸는 모든 실천은 이처럼 궁극적으로 직접(혁명적)민주주의의 틀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직접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대중의 자기 통치, 혹은 자기 지배의 실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냉정히 생각해보면, 비록 우리들이 비민주주의에 대해 분노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중이 자기지배를 관철할 때에 민주주의가 관철되기 위해서는 민주적 경험으로 단련된 수많은 민주적 조직들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즉 비민주에 대한 혁명적 분노를 통해 대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 민주주의를 관철할 수 있는 것은 민주적 경험으로 단련된 수많은 자주적이고 민주적 조직들이 있어야만 한다.
 
즉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지 못하고 4년마다 그렇고 그런 정상배들이 표를 구걸하는 대상으로서의 유권자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결정을 모든 국민이 직접 참여하여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쟁취는, 사회의 모든 단위와 단계에서 직접민주주의를 관철할 역량이 선행되어야 혹은 최소한 맹아적으로라도 키워내고 쟁취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촛불의 자주적 조직들이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할 담보로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고 허구적 민주주의 위에 선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국가를 대신할 대체권력의 맹아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촛불조직에서의 민주주의는 단지 카페 성원간의 소통과 단결을 진작시키는 도구라는 점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억압과 소외를 극복하고 인류의 이상을 관철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담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촛불조직의 민주주의
 
그런데 어떤 결정과 행동이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쉽지만,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는 우리들 자신이 한번도 제대로된 민주적인 조직생활을 경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군대는 물론이고 가정, 직장, 학교, 이 모든 것들이 실은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원리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우리 자신이 세뇌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리 말하여 대기업의 주주총회에서 다수결로 이사회가 선출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아가 대표이사의 독단이 아니라 이사회가 충분한 토론과 만장일치로 모든 일을 결정하여 집행했다고 해서, 전체 주주나, 모든 회사원에 대하여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이사회의 결정에 참여하기는커녕 복종의 의무만 있는 다수의 종업원에게는 독재일 것이고, 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다수의 주주는 위임권만 행사했을 뿐 냉정하게 말하여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갖은 평등한 주체는 아닌 것이다
 
가령 누군가를 카페 대표로 선출하면 회원들과 상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장처럼 혼자서 결정한다든지, 집행부를 선출하면 회원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자기들끼리만 판단한다든지 하는 것은 냉정히 말해서 민주주의가 아니다.
 
직접민주주의란 모두가 소외되어서는 안되는 평등한 주체라는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전체 성원의 정보의 공유와 충분한 토론을 통한 결정과 자발적인 역할의 분담과 집행, 그리고 투명한 보고, 모두가 겸허한 평가, 이런 모든 것들이 충족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
민주주의란 결코 다수결이 아니다. 민주주의란 참여하는 모든 성원이 결정되어야 하는 문제에 대하여 모두 자세히 알고 함께 판단하는 것이지, 어떤 판단과 결정이 가공되고 선별적으로 주어진 정보에 의해 유도된다면-이런걸 집행부 프리미엄이라고 한다-, 그것이 아무리 민주적인 절차를 거쳤을지라도 민주주의는 아니다. 마치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아무리 만장일치의 결정을 하더라도 민주주의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하나의 광장에 모일 수 있는 몇 백명이나 몇 천명이 아니라 수십만 수천만이 모였을 때는 어떻게 직접민주주의를 관철할 것인가? 매사를 국민투표에 부칠 수 없는 만큼, 이 경우 불가피하게 토의와 결정을 위해서 대표나 대리인을 선임하거나 선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선출된 소수의 대리인이 다수의 위임인에 대하여 위계적 특권적 권위적이 아니라, 특권이 없는 머슴이어야 한다면, 언제든지 해임 소환할 수 있고, 수시로 보고를 받고 중요사항에 대하여 주인의 뜻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명백할 것이다.
 
참고로 러시아 혁명 때는 전투의 지휘(군령권)는 지휘관이 하지만, 일상적 병영의 업무(군정권)는 병사평의회가 관장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문성과 도덕성의 조화 혹은 모순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보일지도 모른다. 또한 만약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국민의 뜻을 배반할 때 소환할 수 있는 제도 즉 국민소환제가 있었다면, 지난 쇠고기 정국 때 국민의 종이어야 할 그들이 그토록 국민의 뜻을 배반하지 못했을 거란 점에서 국민소환제의 관철은 미디어와 여론의 조작이나 일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직접민주적 견제장치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자주적 민주적 조직은 언제든지 대표를 해임하거나 소환할 수 있는 토대 위에서(소환권 recall), 모든 사항에 대하여 최대한 보고받을 수 있는 권리와(정보공유권), 함께 토론할 수 있는 권리(공동결정권, 참여권), 비판할 수 있고, 비판이 합당하다면 수용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비판권)는 기본적인 것이고, 그 대신 토의의 과정과 결정에 적극 참여하고, 민주적인 결정을 존중하는 품성이 요구된다고 하겠고, 이러한 참여와 존중을 끌어내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 역시 민주적 조직의 리더쉽이라고 할 수 있다.
 
5.      새로운 형태의 조직으로서의 촛불조직
 
오늘날 사회운동체를 보면, 먼저 시민단체는 직업적 상근활동가와 그들의 생계비와 사업비를 지원하는 후원조직으로 되어 있다. 이중에서 정부나 사회단체의 지원보다 후원조직에 의존하는 단체를 NGO라고 하는데, 어쨌든 소수의 활동가와 다수의 후원가의 구조로 되어있고, 이에 비해 대중조직인 노조를 보면 직접 선출된 대의원들과 위원장 등이 집행부를 꾸리고 일상적인 사업과 보고를 하면서 파업 등 중요사항은 대의원대회나 조합원총회를 통하여 결의하고 승인받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즉 노조는 조합원이 회비납부만이 아니라 선출된 집행부와 함께 결의하고 실천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고, 대부분의 활동가 운동체는 이러한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카페 조직은 카페지기와 운영자에게 게시판 운영권이나 등업권 강퇴권 등을 부여하는 등 중앙집권적으로 설계되어 있기는 하지만-즉 자칫하면 중앙집권적이고 비민주적으로 운영될 소지가 크기는 하지만- 회비나 실천 등의 의무를 강제하지 않고 낮은 참여율을 높이기 위한 소통의 노력(즉 민주적 운영을 위한 노력)이 운영진의 민주적 품성에 많이 의존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어쨌든 독재는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 수직적인데 반해, 민주주의는 수평적 참여를 지향한다고 볼 때, 즉자적 다중의 직접참여라는 특성을 갖는 촛불들은, 다수를 그저 회비나 내는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시민단체와 같은 상근자운동체와는 거리가 멀고, 노조나 여러 정치운동체처럼 비록 민주적으로 선출된 집행부와 민주적 의결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인 조직방식과도 친화하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직업적인 활동가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참여하는 촛불조직은, 활동과 참여와 의지의 강도가 시민단체나 대중조직과는 전혀 다른 참여 형태를 가길 수 밖에 없다. 즉 속박이 강하지 않은 혹은 성원의 자율을 침해하지 않고 나아가 강력한 참여나 결의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대의에 공감하고 참여하는 공동체인 바, 이 공동체는 개방적이고 수평적이며 민주적인 의결과 실천구조에서 낮은 단계의 실천을 추구하는 즉 즉자적 다중이 결합하여 대자적 다중으로 전화되는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촛불에 관한 글들을 보면 촛불을 다중으로서의 자주적 자율적 개방적 성격을 상찬하는 글들이 주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다중이 즉자적 다중으로만 멈춘다면 승리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목적과 지향을 분명하게 하는 의지와 실천의 공동체의 성원으로서의 대자적 다중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촛불은 카페라는 틀을 매개로 하여 온오프의 활동을 통해서 그러한 전화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체제 내에서 비판과 개량을 추구하는 시민단체가 다수의 참여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구조라면, 체제저항적인 대중운동체가 민주적이면서도 중앙집중적인 구조를 갖는 것과는 달리, 촛불조직은 낮은 단계의 참여와 실천을 수렴하는 직접민주적이고 개방적인 틀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제3의 새로운 형태의 조직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촛불조직 혹은 카페는, 즉자적 다중이 의지의 공감에 따른 자발적 가입으로 이루어지고 회비와 규율의 강제가 없는 카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수 성원은 즉자적 다중의 흔적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이 때문에 대부분의 카페는 회원의 결합도가 10% 내외에 그치고 있다.
 
즉 촛불조직을 평가하고 판단함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대중조직과 다중조직의 차이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카페에 가입한 회원이더라도 카페의 사업이나 결정에 따르는 것은 개별회원의 자율에 달려있다. 마치 광장의 토론이나 깃발모임에서 무엇으로 결정되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여전히 개인의 자율이란 점에서 카페는 위계적 집행부와는 친화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점에서 위계적이 아닌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집행부이어야만 한다.
 
나아가 혼자서 판단하고 실천하는 습성이 있고 실천의 동기가 자기설득(확신)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대안으로 성원의 다수의 공감이 없는 한 어떠한 동원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떠한 결정과 실천도 위임받은 집행부만의 결정이 아닌 성원들이 직접 참여한 합리적인 토론의 과정이 성패의 핵심일 것이다.
 
6.      민주적 조직의 사례검토-촛불연행자모임과 815 평화행동단
 
먼저 촛불연행자모임을 보면, 머슴단은 헌신할 의무 외에 아무런 특권이 없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으며, 모든 단위의 회의에 모든 정회원이 참여하여 머슴단과 동일하게 토의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의지가 다양할 수 있는 처지의 공동체에서 최대한의 민주주의를 위한 설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모든 회의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는 취지와 함께 사전에 공지되어야 한다는 것과, 모임의 사정과 사업에 대해서 수시로 보고하고, 안건에 대한 이해도의 공유를 위해 회의안 역시 충분히 사전 공지되어 토론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소흘히 할 때 연행자모임 역시 민주주의가 형해화 될 위험이 있다고 할 것이다. 최대한 함께 알고 함께 판단하고 함께 실천하고, 보다 더 많은 성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하는 것에 민주적 조직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815 평화행동단은 매우 독특하게도 위계적 집행부를 갖지 않고, 기획팀(짱구팀)을 비롯한 팀별 회의체 구조를 가지고 있고, 3개월마다 팀장직을 돌아가면서 맡는 점, 총괄적인 조정은 팀장회의나 사안별 회의에서 결정하는 것, 특히 기획팀의 사업안을 전체성원의 모임에서 토의하여 결정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등에서, 특권의 우려가 있는 대표나 집행부의 존재를 두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조직임을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표결이 아닌 설득을 통한 최대다수의 의지의 집결을 관행화하고 있는 점 역시 민주주의가 단순한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력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의지의 공동체인 이 모임은 각 성원간의 목표나 수단 의지에 대한 차이가 심각할 때, 혹은 비폭력 기조에 대한 공감이 깨어질 때 어떻게 될 것인지는 속단할 수 없지만,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조직으로서의 모범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7.      연대와 관련하여-위로부터인가 아래로부터인가? 지도체인가 헌신체인가?
 
촛불 승리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승리를 위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많은 토론과 실천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이다.
작년 가을이래, 투쟁승리를 위한 연대체의 건설 혹은 지도체나 지도구심을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자율적이고 자발적이고 느슨한 즉자적 다중들의 의지의 공동체인 카페와 그 성원은 민주집중제나 중앙집권제와 친하지 않고, 따라서 연대의 틀 역시 느슨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중앙집중적인 지도체나 연대체를 위로부터 건설하려는 시도는 대체로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권위가 아니라 동등함으로부터, 배제가 아니라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하는 문화로부터, 결정과 지시가 아니라 토론과 상의로 낮은 단계의 정보의 공유를 위한 네트워크로부터 점차 긴밀도와 결합도를 넓혀가는 작업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즉자적 다중의 자발성과 창조성이 최대한 발휘되는 것을 보장하면서, 마찬가지로 수많은 촛불 자주 조직이 서로 존중하고 상의하고 협력할 수 있는 연대의 틀을 우선 성격이나 지향이 같은 카페들부터 낮은 단계부터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2008년 8월 이전의 촛불들이 즉자적 다중 혹은 개별적 참가가 주된 형태였다면, 2008년 가을부터는 저항을 추구하는 지역별 의제별 카페들을 통하여 결합하고 실천하고 있고, 이러한 키페 역시 즉자적 다중의 흔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촛불을 동원의 대상 혹은 지도의 대상, 일사분란한 의지의 통일체-결국 중앙집중적 권위체-를 만들려는 시도는 개개의 촛불과 촛불조직의 특성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차이를 존중하고 개방적이고 느슨한 결합을 내세워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현단계에서 누군가가 혹은 어느 조직이 지도구심을 자임하거나 연합을 통한 상층 지도체를 건설하려는 것은 전혀 난센스일 뿐이다.
 
촛불들의 평균적인 결의는 승리를 위한 기획을 공유하고 전체 투쟁의 부분적 성원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잘 이끌면 강력한 소속감 없이 따라가고 참여하는 정도라고 했을 때, 이러한 촛불과 촛불조직들을 단일한 의지를 갖는 군대와 같은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는 벽에 부딛힐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차벽에 막혔을 때 누군가가 밧줄을 준비해 온다든지, 전대협과 같은 조직이 훌륭하게 리딩을 자임한다든지, 깃발회의를 소집한다든지, 내가 아닌 누군가가 스티로폼이나 마이크를 준비해올 때, 다중인 촛불은 그들을 신뢰하고 함께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올 여름에는 차벽을 넘기 위해 중장비를 준비하는 조직도 생겨날 것이고, 지난 가을과 겨울을 거쳐 다져진 신뢰를 기반으로 총괄기획을 전담하는 조직도 생겨날 것이다.
 
어쨌든 대중의 신뢰와 권위는 자임해서가 아니라, 대중보다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라면, 별로 공감할 수 없는 지도체를 건설하려 할 것이 아니라, 헌신체의 결성과 실천이 급선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무수한 부침을 통해 대중 속에서 도덕성과 능력을 인정받은 헌신체가 다중에 친화적인 민주적 권위를 형성해 갈 수 있을 것이고, 이들과 강력한 활동가 조직이 신뢰를 기반으로 한 역할 분담 속에서 촛불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8.      결어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촛불은 신자유주위에 대한 반대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최소한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소환제, 집회 시유의 자유 쟁취)을 분명히 해야한다는 점과,
촛불조직내에서 민주주의를 관철하는 것은 대체권력의 맹아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점과,
직접민주주의 혹은 최대한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함께 알고,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중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개방적이고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촛불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과,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다중에 기반한 촛불조직들이 승리의 전망을 갖기 위해서는, 각각의 특성에 맞는 헌신체로 전화하고, 이러한 헌신체들이 보다 합리적인 실천을 위해 네트워크와 다양한 형태의 연대를 통한 실천 속에서 신뢰를 쌓아가고, 신뢰에 기반한 역할분담의 강화와 확장 속에서, 승리를 위한 총괄기획의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촛불승리를 위해서는 즉자적 다중에서 대자적 다중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것과, 이 과정은 다중의 특성이 존중되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는 것, 이러한 조직 가운데에서 다중의 민주적 신뢰를 획득한 헌신체를 중심으로, 협력과 역할분담 그리고 연대의 수준을 높여가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낡은 운동권 역시 기존의 대중운동의 관점이 아니라 다중의 특성이 존중되는 개방적인 새로운 운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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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have or to be

이 책을 일고 나서 정말 감명을 받고 느낀 점이 많았음에도 오래 전에 읽고도 소감을 못 남겼다.

 

여러 측면에서 이 책을 평가하겠지만,

나는 내가 불교적 교양인인 까닭으로

원시 기독교의 교의와 불교의 근본 자리가 어쩜 이렇게 동일한 지에 대해 엄청 놀랐다는 것.

소유지향적 삶을 버리고 존재지향의 삶을 추구함에 있어서

불교는 자연과 우주와 하나되기 위하여 인간의 본래의 고요한 근본자리를 찾는데에 심혈을 기우렸다면,

기독교는 인간들이 모여사는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분명한 지향을 말하고 있다.

즉 불교가 인간이라는 점에 보다 촛점을 맞췄다면,

기독교는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적인 삶 즉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심이 더욱 크다.

어쨋거나

원시 기독교나 원시불교나 에크하르트나 맑스나 모두 동일한 진리와 지향을 말랗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존재지향의 삶과 존재지향의 공동체이어야한 다는 주장은 우리 인류의 최대의 지혜의 소산이다.

우리들 인간이 소유지향이 아니라 존재지향이어야 비로서 인간 본래의 성품을 회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리는 하나이되 다른 관점과 다른 언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역작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이 책의 후기를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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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운동과 촛불

  • 분류
    운동론
  • 등록일
    2008/11/21 23:50
  • 수정일
    2008/11/21 23:50
  • 글쓴이
    서른즈음에
  • 응답 RSS
변혁운동과 촛불 
이 주제를 얘기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촛불은 무엇인지 그리고 기왕의 소위 운동권이 느끼는 거리감의 실체가 무엇인지 살펴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이 시기의 사회적 과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에 있어서 어떻게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1. 촛불은 무엇인가
촛불은 무엇보다도 저항이다. 촛불은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정의에 기초한 순수한 열정의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저항으로 규정할 수 있다.
무도한 공권력에 대한 도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월성을 확신한 개미떼들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고, 자기 정의를 확신하고, 옳다고 믿는 자신부터 먼저 실천하는 순수한 헌신이고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촛불은 집단지성이고 그 자체에 기존의 허구적 권위를 용인하지 않는 광장의 민주주의 즉 혁명적(평의회) 민주주의의 성격을 내재화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2. 아날로그 운동권이 느끼는 당혹감의 실체
변혁을 꿈꾸어 왔던 기왕의 운동권들이 거대한 촛불과 맞부딪쳤을 때 느껴지는 당혹감의 실체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동원된 것이고, 이처럼 훌륭한 실천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정치적 훈련이나 정치의식은 낮은 것같은데, 어떻게 해서 그들은 정확하게 자기의 방향을 잃지않고 세련되게 싸우는 것인가?
 
몇가지 사례-투쟁의 전반기 5-7월까지
5월의 어느날 시청광장에는 미친소 복장을 입은 여성이 있었고, 독도문제가 나온 이후 몇 달 동안이나 계속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는 여성도 있었고, 조중동의 왜곡보도가 노골화되자 광고주에 전화를 걸자라는 선동이 아고라에 떴었고, 이를 실천하는 개미떼들이 있었고, 이 운동은 지난 8/30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행동)로 발전되었다. 또한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고주 명단을 정리한 글이 매일 베스트에 올라가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와대에 가려는 노력이 번번히 차벽에 막히자 어디선가 밧줄을 준비해온 사람들이 있었고,광화문에서 밤을 새면 어디선가 음료수와 먹을 것을 준비해 온 사람들이 있었다. 촛불다방이 생겨났고, 유모차 부대가 나왔고, 촛불자동차가 나왔고, 예비군과 의료진이 나왔다.
 
투쟁의 후반기 7-9월까지
주말마다 가투를 공지하는 권태로운 창이 있었고, 대통령과 대화하자며 아무리 연행해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다고 결의한 8.15 평화행동단(연행자원 연좌조직)이 있었다.
또한 가투나 집회를 책임지고 선동하고 이끄는 전대협, 386, 촛불승리 시민연대가 있었고, 마포, 강남, 관악, 은평, 경기, 성남 등에 지역촛불이 생겨났고, 날마다 명동에서 뉴라이트 홍보물을 돌리는 사람들(안티 2MB와 민처협), 부산이나 의정부에서 경향과 한겨레 신문을 돌리는 사람들(진실을 알리는 시민들-진알시), KBS, YTN, 조계사, 서울대 병원에서 몇 달째 노숙을 하면서 촛불을 드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을 관통하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지성이라는 점과, 이것은 기존 운동권의 조직적 사업과 같은 관성이 아니라, 인터넷상의 이용과 소통의 행위가 그 자체에서 주어지는 평등함과 자발적인 개인의 의지라는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네티즌은 기존 운동처럼 조직적인 틀을 통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확신만으로 집단지성에 합류한다는 것이다.
 
또한 네티즌 중에는 눈팅족도 있고, 키보드 워리어도 있지만, 다중 가운데는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즉 설득력있는 행동방안을 냈을 때, 이를 공감하고 따라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동일한 실천의지를 갖는 사람들이 카페를 결성했을 땐, 토론을 통해서 더 나은 방법론을 찾아 실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기존의 운동권들처럼 전략전술 혹은 기획목표와 실천방안을 먼저 고민하는 방식으로는 나올 수 없는, 혹은 그러한 사고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무모하다고 할만한 실천이 있다.
몇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저녁이면 KBS에 출근하여 날을 새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횟칼 테러가 났다고 했을 때 함께 해야 된다면서 서울대 병원의 주차장과 조계사에서 몇날 며칠 밤을 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성과 혹은 승리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그냥 분노와 공감 혹은 동참으로 족하고 그 이상 바라지 않는 사고방식이 있는 것이다.
 
운동권은 하나의 전투에서 동력과 전술을 고민하는데 익숙하지만, 네티즌은 처음부터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 아니라 그냥 다중 속의 일인으로서 자기의지만으로 자기행위를 결정해온 관성 때문에, 자기가 참여한 거대한 물결을 지도하는 그룹이 있다거나 누군가의 지휘 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병사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생각과 참여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얼마나 될른지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단지 옳고 정당하다는 자각만 있으면 실천에 옮기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아무튼 누군가가 조계사나 KBS에 가서, 그저 아무 말없이 촛불을 켜고 앉아 있는 사람을 봤을 때, 전망과 성과에 집착하는 운동권은 한 두시간 같이 할 수 있겠지만 날을 새야겠다든지 오늘만이 아니라 낼이고 모레고 날을 새야겠다는 사고는 결코 나올 수가 없고, 바로 이것이 촛불 혹은 촛불폐인과 운동권과의 사고방식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모하다고 보여지는 실천이 거대한 물결을 이룰 때 개미떼는 태산을 움직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고, 수많은 개미 중엔 참으로 발랄하고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지성이 있게 마련이고 그 실천이 보편성을 갖을 때엔 즉 모범이 되었을 땐 즉각 따라하고 함께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변혁을 꿈꾸는 운동가들은 완벽한 계획에 집착하지만. 역사의 전진은 결국 대중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참여로만 가능하다고 할 때, (즉 태산은 소수의 정예화된 계획이 아니라 무수한 이름모를 개미떼들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솟아 오를 때만 가능하다고 하면,) 즉 중앙집권적이 아니라 혹은 민주집중제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가 관철된 혁명적 민주주의 혹은 평의회 민주주의가 광범위하게 확산 성장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고, 이것은 누군가가 권위와 우월성을 가지고 개입하고 지도하고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면서 공감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변혁운동의 승리에 있어서 다중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참여가 필수불가결하다면, 주로 조직대중의 동원전략에 의존해온 기존의 모델은 바뀔 필요가 있는 것이고, 이러한 바로 이것이 21세기형 변혁모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3. 아날로그 운동과 버전 2.0의 운동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기왕의 소위 운동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상층 연대체로서 국민운동의 지도부를 자임하면서 민생민주국민회의 구성하여 촛불을 줄 세우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퇴행적인 시도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촛불은 시작부터 저항이었고 투쟁이었는데, 즉 촛불을 든 첫날부터 명박퇴진을 외치고, 이명박, 한나라당, 조중동, 뉴라이트를 그 주된 적으로 선언하고 퇴진과 해체를 주장하고 있는 데에도, 저항단체나 투쟁단체가 아닌 체제내의 개선과 개량운동을 목표로 하는 이러저러한 시민단체들이 주를 이룬 대책회의가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명박퇴진을 외지치 못하고 기껏해야 명박심판에 머물고, 대중이 투쟁으로 나아가고 확산될 때 발목을 잡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던 그 한계에 대한 단 일말의 고민도 없이, 심지어 신자유주의 세력인 민주당까지 끌어들여 그 구성원을 더욱 넓게 포괄한 것은 그들의 선언과는 정반대로 그들의 실천이 어떠할 지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투쟁을 할려면 투쟁을 하려는 세력과 연대를 해야지 투쟁은커녕 저항도 할 수 없는 세력을 광범위한 연대의 통큰 단결이라는 미명하에 꾸리는 사업방식의 허구성은 더 언급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애국촛불전국연대를 비롯한 수많은 촛불들이 이미 민민국을 대책회의가 옷만 바꿔 입은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처럼 그 구성원의 한계만이 아니라, 사업방식과 의사형성과 결정 그리고 동원의 방식에서, 조직의 틀에 입각한 하향식 사업방식과 동원방식, 광범위한 후원조직이 전제된 전업활동가들의 권위적 대리행동주의, 그리고 대중을 수동적인 관객의 입장에 머무르게 하는 엘리트주의 이 모든 것이 기왕의 특정한 권위를 부정하는 광장의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촛불과는 도저히 함께 할 수가 없는 사업방식인 것이다. 다함께의 권위적인 리딩방식이 촛불들에게 초반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때문에 진보세력과 촛불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촛불과 촛불의 행동양식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함께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촛불을 지도하고 이끌고 가려는 자세를 버리고 촛불의 사고방식과 언어로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아고라에서 출발한 촛불은 과거에 아날로그적으로 단절된 무기력한 개인들이 여론과 정보를 독점했던 구래의 통치자들에 대하여, 21세기의 쌍방향 인터넷 소통인 웹2.0이란 공간을 통해서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무너뜨리고, 집단적이고 자발적으로 학습을 시작하고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집단지성과 자유로운 의지의 표출하고 있다.
 
넷상에서의 자유로운 참여는 억제되지 않은 실천욕구의 배경으로 작용하여, 교육과 조직을 아날로그적 현장보다도 훨씬 능률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과정에의 참여가 순수히 개인의 자발적 의사에 기초하고 아무런 기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촛불은 6/25. 국민토성의 토론에서 보는 것처럼 광장의 민주주의 나아가 혁명적 직접민주주의의 즉 평의회의 정신을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고리언이라고 불리우는 촛불들의 광장민주주의와 집단지성은 대의제라는 미명하에 국민을 주권자가 아닌 유권자 그것도 4년에 한 순간만 유권자로 대우할 뿐 평소에는 억압과 통치의 대상이 되는 허구적 민주주의체제와는 친하기 어렵다는 것과 본질적으로는 다가올 평등세상의 직접적(평의회) 민주주의에 연결되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러한 광장민주주의 혹은 직접민주주의의 정신과 실험을 카페의 외관을 갖는 촛불의 자주적 조직에서 확장시키고 관철시켜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촛불 승리와 변혁운동의 과제
이제 촛불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고양기를 준비해야 하는 시즌2를 고민할 시점이지만, 변혁운동의 입장에서는 의제를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면서 기왕의 촛불과 하나되어 촛불을 고양시켜 새로운 결전을 준비해야 할 고민의 시점이기도 하다.
 
현단계 촛불들은 단지 온라인 카페만이 아니라 오프상의 직접 실천을 통해서 스스로 단련시키고 있는 바, 즉 아고라와 카페를 소통과 전달, 선전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넷상의 연결이 실천으로 혹은 직접 행동으로 전화하면서 인터넷을 활용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므로, 촛불과 필드에서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최근의 몇가지 예를 보면,
수원촛불은 매일 수원역 앞에서 100여명이 촛불을 들고 있는 바, 서울처럼 단지 뉴라이트 반대나 횟칼 테러 반대의 홍보전만 하는 게 아니라, 매주 주제를 바꿔가면서 홍보전을 하고 있고, 여기에 비정규 노조나 공무원노조, 전교조, 인권단체 등이 함께 참여하여 노동과 촛불이 교류하면서 하나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기륭투쟁은 네티즌 연대를 통하여 많은 공감을 일으켜 낸 바 있고, 비정규 없는 세상 10,000인 선언에서도 대략 80%는 노동자가 아닌 촛불이었다고 생각해 보면, 촛불이 사회정의와 약자에 대하여 공감하고 반응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분노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촛불들의 표출의 장이라는 측면도 있다는 점에서, 이는 한편으로 촛불이 외롭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반드시 그 의제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이 사회에 저항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연대와 동참의 측면도 있다는 점에서 장단점의 양 측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단계 촛불은 더디지만 자주적이고 창조적으로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는 바, 강남에서는 강남역 출구에 매일 판넬을 전시하고 때로는 강남의 젊은 직장인들의 감수성에 맞는 퍼포먼스나 프리허그 등의 행사가 시도되기도 하고, 의료민영화와 같은 주제로 강연회를 갖기도 하고 자체적으로 학습 소모임을 운영하기도 한다. 광진, 관악, 은평 등의 지역 촛불은 최근에 등산로 입구에 판넬을 펼치고, 솜사탕을 나눠주고, 어린이들의 손톱이나 얼굴에 메이크업을 해주면서 조중동 반대나 뉴라이트 반대의 홍보물을 나눠주고 서명을 받는 행사가 등산객들에게 큰 호감을 불러 일으켰고, 이러한 행사는 확산되고 있다. 기왕의 운동권은 이처럼 발랄하고 흥미있는 홍보전을 펼친 적이 없다.
 
촛불 혹은 시민은 사회와 정치와 문화 그리고 소비의 영역에서 추상되는 것이라면, 노동자는 생산과정에서 추상되는 것인 바, 시민과 노동자가 이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의식을 심화시킬 때 비로서 하나로 나갈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노동자가 기왕의 촛불들과 경험과 정서를 공유하면서 촛불을 확대 심화시킬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노동자 촛불 실천단이든, 혹은 단위노조의 결의에 의해서든 간에, 노동자가 한 개인으로 촛불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촛불과 결합하는 것은 현단계 운동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위사업장의 조합주의적 사고가 아니라 아무리 미약하더라도 정치투쟁의 성격을 갖는 촛불에 합류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도 중요한 훈련의 장이 될 것이다.
 
최근에 결성된 자주적 촛불들의 연대인 애국촛불전국연대에서 보는 것처럼, 촛불은 의제에 있어서 아직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경향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KBS, YTN 지킴이들이나, 기륭릴레이단식과 비정규만인선언, 강남성모병원의 투쟁에 결합한 네티즌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처럼, 촛불들이 부당하고 불의한 권력에 대하여 정당하고 정의롭다는 확신만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촛불이 기왕의 정치경제학적인 용어로 어느 계층 어느 계급에 해당하느냐고 규정지으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대운하만이 아니라 의료민영화 반대, 공공재의 사유화 반대, 종부세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개개인의 촛불이 자기가 처한 사회경제적 처지의 자각에 기초한다기 보다는, 불의에 대한 정의의 공감이 주를 이룬다고 할 것이고, 굳이 규정짓자면 그 내면에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보다 철저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포함하고 있는 급진적 소시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현단계의 촛불을 사회과학적인 틀로 규정하자면, 10대부터 50대까지 참으로 다양한 세대와 생업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여 장기간의 일관된 저항을 굽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평범한 소시민이 사회진보를 꿈꾸는 급진적 소시민으로 단련되어간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프랑스 혁명기의 자코방과 같은 급진적 민주주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현단계에서 민족주의등 경계해야 할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료민영화나 수도민영화에 날선 반응을 보인 것처럼, 촛불이 20대 80의 신자유주의적인 공세에 맞설 수 있는 저항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향후의 한국의 변혁운동은 이들 촛불을 어떻게 단련시키고 고양시켜 나가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변혁운동은 촛불과 결합하여 촛불과 하나가 되어 진정한 변혁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자는 슬로건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즉 촛불과 하나되어 촛불을 키워낼 때에만 변혁운동은 승리의 전망을 갖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 다중 혹은 군중을 혁명적 대중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변혁운동의 책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촛불이 보여준 웹2.0의 광장의 집단지성은 설득력있는 합리적인 주장에 대하여 친화성을 갖는다는 것과, 개개인의 내면적 확신만 있으면 지도와 동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옳다고 하는 자기확신만으로 곧바로 실천에 나선다는 특성을 염두에 두면, 촛불의 의제를 심화시키는 방법론은, 신자유주의, FTA, 비정규직 문제, 사회 공공재의 민영화와 사유화 이 모든 의제들을, 촛불과 만나는 장에서 즉 아고라와 카페와 오프에서 촛불의 감수성과 촛불의 언어로 합리적이고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촛불을 교육받고 단련된 조직대오가 아니라, 촛불을 들기 이전까지는 사회와 정치 문제에 대하여 단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주를 이룰 만큼, 미성숙하고 중구난방인 참으로 다양한 소시민들이 대의제민주주의의 허구적 한계에 분노하여 나선 소시민 나아가 결코 자신을 운동가나 혁명가로 규정짓지 않는 정의감에 가득찬 소시민이라고 할 때,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대중이나, 사회운동체에서 활동하는 소시민적 활동가나, 혹은 정치조직의 직업적인 활동가와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자신에 대한 규정을 결코 운동세력이라고 하지 않는 생업을 갖은 정의감 있는 소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운동으로 묶어내는 사업방식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다중의 자발성을 존중하고 수렴하면서 혁명적 대중으로 나아가는 방법론은 이미 아고라와 다음 카페에서 그 단초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카페와 같은 자발적 조직에 모인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다중이 혁명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경험과 훈련을 통해 그리고 보다 정의롭고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열망을 학습하고 체험하는 것을 통해 우리 역사는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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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5일 투쟁 참관기

11월15일 투쟁 참관기
 
11월 14일 애국촛불과 한국진보연대는 불법시위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집회가 불허되었습니다. 이에 한국진보연대는 “집회시위는 ‘신고제’이지 결코 ‘허가제’가 아니다. 우리는 국민의 정당한 기본권 행사를 위해 경찰당국이 위헌적인 집회허가제를 남용하며 폭력적으로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기어이 촛불집회와 거리행진을 성사하고야 말 것이다.”, “집회, 시위 장소 부근에 대한 공포분위기 조성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긴급성명을 발표했고, 15일 오후 3시 민노당이 신고한 집회에 결합한 후 경찰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오후 6시에 청계집회와 ‘경제파탄 국정실패 이명박심판 내각총사퇴 촛불대회를 한 후 명동성당까지 행진하겠다는 결의를 공지했습니다.
 
11월 15일 토요일 오후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촛불들은 오랜만에 한국진보연대의 결의에 환호했고 기대를 가지고 서울역에 결합했습니다.
이 시점 즉 이 정권이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조폭적인 발상으로 공안탄압을 밀어부치고 있는 시점에서 일개 경찰서장의 허가와 불허에 연연하지 않은 당찬 대응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진보연대의 이 성명이 밀리고 있는 국면을 만회할 조직적인 반격으로서 참으로 중요한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서울역에 모인 500 여명의 참가자 중에는 민노당과 진보연대에서 동원한 사람은 몇십명도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집회중에 민노당 사무총장은 단호하게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제대로 된 아무런 동원이나 조직은 하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과격한 투쟁사를 하는 것이 몹시 맘에 안들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5부터의 경찰청 항의기자회견에서 한국진보연대 소속의 활동가 2명이 연행되기는 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공지한 청계광장의 촛불대회에는 단 한 명도 얼굴을 내 보인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기어이 성사시키겠다는 결의나 안 밝혔더라면 즉 이날 집회의 중요성이나 부각시키지 않았다면 나았을텐데, 광장이 봉쇄되고 청계천에서 올라오는 계단이 봉쇄되고 모이기만 하면 밀어부치는 겁박을 당하게하는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제 생각엔 민노당이나 진보연대가 정말 진정한 결의를 갖었다면 2,000 대오는 동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날의 투쟁은 경찰과 촛불이 향후의 투쟁에서 서로의 의지와 실력을 가름하는 전초전의 성격을 가졌던 것인데, 진보연대의 무책임한 허언으로 청계대회가 망가지고, 명동과 특히 홍대와 마포경찰서 앞에서의 침탈과 수모로 이어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날 한국진보연대가 보여준 작태는 비난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동에 집결해서 대략 밤 9시까지 구호와 노래로 촛불들이 저항의 의지를 보인 것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특히 롯데 건너편에서 경찰과 근접한 거리에서 대치를 한 것은 백미였는데, 침탈의 우려에 대해 충분히 고민한 리딩인지 아니면 침탈의 우려가 있는 약간 무모한 리딩이었는지는 판단을 보류합니다. 다만 일부가 롯데앞에서 가투를 시도하다가 7명이나 연행된 것은 무리했다고 할 것입니다.
 
어쨌든 밤 9시경 밀리오레 앞에서 (당시 대오는 150 명 정도) 해산을 결의한 것은 적절한 마무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항과 타격의 의지를 보이면서 큰 손실없이 치고 빠지는 전술은 칭찬할만한 리딩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다시 밤 10시가 넘어 명동골목을 행진한 후 정리하지 않고, (전대협과 386 이?) 홍대 5번출구의 택을 때린 것은 몹시 적절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시위대보다도 더 많은 사복들이 섞여 있는 상황에서 공공연하게 택을 전달한 것은 더구나 홍대에 결집하면 주말 밤 11시가 넘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가투를 시도하는 것은 제대로 된 시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에 분명한 상황이었습니다.
 
홍대는 명동보다 도로가 넓고 유동인구가 훨씬 적은데도 굳이 늦은 시간에 장소를 옮겨서 가투에 집착하는 것은 어느 점에서 보아도 잘못된 리딩이라고 할 것입니다. 특히 이날 명동에서는 11시이후에 해산하는 조건으로 명동에서의 시위를 묵인받았다는 말도 안되는 얘기가 있었던 바, 나아가 11 해산하면 앞서 연행된 사람을 풀어주겠다는 거래까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이런 거래에 개입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순수한 혹은 저항할려는 촛불은 아닌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10가 조금 넘어 홍대집결이 공지되었을 때, 소금사탕님이 평행단은 공식적으로 공동행동을 종료한다는 얘기를 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결단을 밝히는 것이 쉬운 건 아닌데 정말 평행단의 보배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후에 저는 개인적으로 어차피 홍대에 가봤자 늦은 시간이기도 하고 짭새들도 많아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할 것이라는 지레짐작 때문에 그리고 다음날 할 일도 있고 해서 일행들과 헤어졌습니다마는, 나중에 들은 바로는 평행단보다 먼저 도착한 분들이 전철역을 나와 대오를 정비하려하자 곧바로 사복들이 덮쳤고 이 과정에서 13명이 폭행당하고 연행되었고, 닭장차 안에서도 구타가 있었습니다. 이후에 도착하신 분들은 마포서에 가서 항의하고, 색소포를 맞고, 여고2년생은 전경이 가슴을 만지는 등의 성추행까지 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마포서에서도 끊임없이 촛불이 항의대를 해산하면 6까지는 석방을 해주겠다는 약속에 따라 5시경에 경찰서 앞 자리를 피해주는 일도 있었고, 이후에도 계속 9 혹은 오후 몇시에 석방을 해주겠다는 경찰의 기만이 있었고, 이를 전달한 촛불이 있었던 것도 특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실력이 충분하고 경험이 있었다면 견찰의 선이행 혹은 동시이행의 조건으로 항의를 풀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협상이나 거래 혹은 딜이란 서로 비슷한 역관계와 대치를 풀어야 할 필요를 쌍방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경찰의 기조 자체가 초기 강경진압으로 촛불을 짓밟는 것이 분명한 데도 불구하고, 촛불들의 행동 가운데서 처음으로 경찰의 장난질을 중개한 사람이 나왔다는 것은 몹시 경계해야 할 부분으로 생각됩니다.
 
횟칼 테러를 당한 친구야 놀자님은 홍대 앞 연행과정 중 목과 머리를 심하게 맞았는데도 서대문 넘들이 다음날 6에나 병원에 이송시키는 일도 있었고, 유치장에서 조사실에 이동 중에는 수갑을 채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항의와 경찰책임자 면담요청은 무시되었습니다.
 
11월 15일의 경과는 대강 이러합니다. 문제는 서로의 기싸움에서 첫번째는 한국진보연대의 무책임한 허언 때문에 촛불이 상처를 입었다는 점과, 기왕의 가투처럼 절도있게 싸움을 정리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냈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견찰과 터무지 없는 딜까지 거래하고 전달한 사람이 생겨났다는 점 등이 앞으로의 투쟁에 참고 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연행과정상의 경찰의 폭력, 닭장차 안에서의 폭행, 색소포, 성추행 등등 참으로 참을 수 없는 인권유린에 대해서 인권단체와 민변에 대응책을 상의했으나 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점이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지를 고민해야 할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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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공돌이님)한미 FTA 협정문 정리 - 공공서비스(공공분

단지 논쟁을 보내기 위해서 퍼 온 글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읽어보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논쟁도 내리자는 뜻에서 퍼 온 글입니다.

글 올려주신 공돌이님 감사합니다.

같이 있는 노래까지 무단으로 퍼 와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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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는 내국민 대우, 이행의무 부과 금지, 최혜국 대우, 시장 접근 제한

금지,  고위경영자의 국적 제한 금지 등 각종의 독소 조항을 통해 더욱

완벽한 민영화 정책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정책주권이 과도하게

제한되며 따라서 국민의  공공복리 등에 필요한 조치를 국가가 취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습니다

 

 

                  [ 한미 FTA와 공공서비스 ]

 

 

미국의 FTA 정책은 IMF와 함께 워싱턴 컨센서스를 관철하는 쌍두마차이다.

역진불가능이 양국간 신자유주의 협정의 형태로 입법화된 것이며,

이를 투자자 국가소송제도(ISD)로 강제하고 있다.

 

미국식 FTA가 공공서비스를 자유화하는 기본 원리는 공공서비스와 (미국의)

사적 서비스를 경쟁시키도록 한 후, FTA의 각종 비차별 조항 및 투자자 국가소송

(ISD) 등으로 공공서비스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아메리카 공공서비스 민영화의 실험장이었던 아르헨티나는 2004년 현재

공공서비스에 관한 30개의 투자자 국가소송(ISD) 분쟁 진행 중이다.

 

IMF에 의한 아르헨티나의 민영화 실패 (90년대)

 ► 86년에서 99년까지 396건의 공공자산을 사적 부문에 판매 또는 이전

    (발전도상국 민영화전체의 1/2에 해당)

 ► 89년 250,000명의 공공서비스 노동자가 99년 75,000명으로 감소

 ► 독점에 따른 가격 상승 : 전화요금 세계 2위, 비방디(물) 일부 지역 400%

                                        요금 인상, 버스요금 40-100% 인상

► 2004년 현재 30건이 넘는 ISD 진행 중이며, 이중 다수는 민영화

  기업이 제소

 

 

공공서비스는 한미FTA로 큰 타격을 받으며, 그 성격상 민중의 삶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공공서비스가 평등성, 공정성, 연대라는 비시장적 가치에

기초한 반면 FTA는 영리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시장화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서비스의 붕괴로 손해를 보고 또 투자자 국가소송(ISD)으로

보상까지 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ex) 메탈클래드 사건

 

한미FTA가 공공서비스에 미치는 영향은 참여정부의 의료법인의 (영리)법인화와

같은 시장화 계획(자율적 개방)과 한미 FTA의 각 조항이 상호작용하여 나타난다.

국민의 정부 이래 ‘민간 사업자’ 참여를 위한 기획예산처, 재경부 중심의

법 개정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예는 자본통합법 - 금융서비스 조항 - 한미

재계의 민간보험 확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립대학 법인화, 병원의 영리법인화 등 정부 부처의 자발적 시장화 정책으로 일단

국내 기업의 공공영역 침투를 허용하고, 이어서 한미FTA에 규정된 내국민 대우

등의 조항에 의거, 외국인 투자 유치가 이루어지며 이후에는 투자자 국가소송

(ISD) 등에 의해 완전 개방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 즉, “자발적 자유화와

한미FTA의 이중주”가 일어난다.

 

한미 FTA는 여러 대안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실패를 보정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데, 일단 한미 FTA가 비준 동의 되면 시간이 흐를수록 폐기의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핵심적인 조항들]

 

■ 투자계약(송기호 변호사)

 

한미FTA에는 표1과 같이 투자자가 공공서비스의 민영화에서 확보할 민영화

사업권을 "투자계약"이라는 범주에 독립적인 개념으로 진입시켰습니다.

이는 "FTA 발달사"에 최고 단계의 진화로 평가됩니다.

 

[표1] 투자자가 전력생산과 배전, 상하수도 및 통신과 같이 국가를 대신하여

대중에 서비스를 공급하는 권리, 또는대중이 이용하는 도로, 교통, 운하의

건설과 같은 기반시설 사업권 (한미FTA 11,28조)

 

국가가 전기, 상하수도, 통신, 도로와 같은 공공서비스 분야를 민영화하기 위하여,

투자자가 민영화 계약을 체결하고, 투자자에게 사업권을 부여하는 것을

"투자계약"이라는 독립적 범주로 법제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공서비스 전반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이를 투자 계약으로 범주화

한 것은 한미FTA의 뛰어난 성취입니다.

북미FTA, 미국-호주 FTA는 투자계약이라는 개념 자체를 시도하지도

못했습니다.그 곳에는 이러한 용어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국-칠레FTA, 미국-싱가포르 FTA에서는 투자계약이라는 낱말을 담을 수 있었지만,

한미FTA와 같은 고도의 공공서비스 문항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겨우 "자연자원 채굴권 및 기타 자산"정도의 표현에 그쳤습니다

 

한미 FTA가 투자계약, 곧 민영화 계약이라는 독립적 범주를 한미FTA에 포함한

것은 두 가지의 법률적 효과를 낳습니다.

 

첫째, 투자자가 민영화 계약 위반을 이유로 국가를 국제중재에 회부할 수

        있습니다.

둘째, 투자자는 국가의 조세권에 대하여도 민영화 계약 위반을 이유로

       국가중재에 회부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만일 애초의 민영화 계약서에 민영화 투자시의 조건을 보장한다는

취지로 해석될 조항(안정화 조항이라고 합니다)이라도 있다면, 이 분야의

공공서비스에 대한 국가의 신축적 규제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자의 동의 없이 민영화를 다시 공영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조차 어렵습니다.

 

투자계약의 또 하나의 효과는 투자자가 국가의 조세권에 대해 민영화 계약

위반이라며, 도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23.3조 6항)

 

 

■ “비차별”원칙(MFN & NT)

 

내국민 대우는 외국인에게 “경쟁기회의 평등”을 부여한다. 이 조항은 투자의

성립(설립) 단계에서부터 내국민 대우를 규정한다. 앞서 말한 '포괄주의'에

따라, 유보목록에 따로 들어가지 않는 한,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투자 진입을

제한할 수 있는 업종이나 영역은 존재할 수 없다. 그 결과, 미국인은 원칙적으로

투자 진입(설립)권을 가진다.

 

 

■ 이행의무 부과 금지

 

이행의무 부과 금지는 “효과적인 정책 수단”의 박탈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투자허가의 조건으로 이윤의 인프라에 대한 재투자 요구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 수용과 보상

 

“수용”과 보상은 공공서비스의 확대를 제한한다.

의료, 교육 등에서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 사적 이윤추구를 제한하는

정부의 행위는 직⋅간접 수용에 해당하고 이를 금전적으로 보상해야 한다.

특히 외국 기업이 이미 투자한 영역에 대한 공공서비스 확대는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미래유보라 할지라도 예외가 중요하며, negative 방식에 의한 새로운

서비스 개방이 공공영역과 겹치면 이것도 공공 서비스 축소를 불러온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의 무상의료 정책은 AIG의 이익을 침해한다.

 

 

■ 시장접근제한

 

시장접근 원칙에 포함된 모든 “수량 제한”의 금지는 비차별적 정책이라

하더라도 공공서비스를 제한한다.

예> 수도권의 대학교 숫자, 서울 등 수도권 병원 숫자, 환경보호 및 수질보호를

위한 위락시설 숫자 제한, 새로운 독성 물질의 취급 기업 제한, 비영리법인의

사회서비스 공급 우대, 시골지역에 대한 최소한의 특송 및 수송 요구 등

다양한 제한이 불가능해 진다.

 

 

보상의무

 

사기업이 공급하고 있는 서비스 분야로 공공서비스를 확대하는 경우 보상 의무가

발생한다. 새로운 공공독점의 설립권을 부여하고 있으나, 이것도 이미 민간기업과

경쟁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경우 공허한 권리가 된다.

 

또한 상업적 고려에 의해 행동할 것을 규정함으로써, 도서벽지나 서민을 위한

교차보조 정책은 반경쟁적 행위로 규정된다.

 

2004년 WTO 패널은 멕시코 통신규제에 대해 ⌜‘비용 지향, 합리적 요금,

계약 조건’을 미국 장거리 전화회사에 제공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일반적인 문제점]

 

미국 자문위원회는 “서비스 합의가 특별히 강력(particulraly strong)하다고

본다.”, “협정은 서비스 분야 미국기업에게 대단한 기회(substantial

opportunities)를 부여할 것이다.”고 평가하였다.

 

■ 일반

 

negativ list, ratchet, 미래의 MFN 등 대표적 독소조항은 현재의 개방에

멈추지 않고 끝없이 공공 서비스를 개방/민영화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16.2조 지정독점, 16.3조 공기업의 ‘상업적 고려에 입각한 내국민대우’는

상업적으로 더 우수한 외국 상품이나 서비스를 배제해서는 안 됨을 의미한다.

(공공질서 유지를 위한 투자유보는) “그 투자가 사회의 근본적 이익에 대하여

진정하고 충분한 위협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채택되거나 유지된다.”고 규정하며,

정부에게 입증 책임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공서비스 산업에서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인

투자지분 제한일 뿐이다. 그러나 이 조차도 최혜국 대우, 내국민 대우 조항에

의해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이렇듯 국내법에 상위하는 FTA 협상의 위력은

대단하다. 특히 에너지와 물과 같은 공공서비스의 경우 환경적 측면,

지역적 연계와 공공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강제되었던 여타의 법적 조치는

이행의무부과 금지 조항에 의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 네트워크 산업의 민영화

 

한미 FTA는 네트워크 산업 민영화와 개방의 계기가 될 것이다.

대표적인 네트워크 산업인 통신의 경우, 한통이 KT로 전면 민영화되었다.

전력산업 역시 1,2차 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분할 매각을 추진해왔다.

현행 유보안에 외국인 투자지분 제한이 유보되었지만, 독립사업부로 되어있던

송배전 분야가 50%로 그 지분이 확대되었다.

 

지역적인 독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전력산업은 경쟁 Chapter의

상업적 고려’에 의해 가격이 책정될 경우, 산간 도서 지역 등의 가격 인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물 민영화 등 환경서비스

 

환경서비스는 음용수 처리.공급 서비스, 생활폐수 수집⋅처리 서비스,

생활폐기물 수집⋅운반⋅처리 서비스, 위생 및 유사 서비스, 자연 및

경관보호서비스로 규정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어떠한 조치도 채택하거나 유지할 권리를 유보”하지만,

“관련 법 규정이 사적공급을 허용하고 있는 경우, 사인간 계약에 의하여

공급되는 해당 서비스에는 적용되지 아니한다.” 즉, 한국 법 개정에 따라

미국 기업과 경쟁 상태가 가능하며, 이 경우 ISD의 적용을 받는다.

 

한국정부는 물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상하수도 민간위탁을 추진하였다.

(2007. 6.1 환경부 물산업육성과 운영 시작.)

 

에너지 산업 관련하여 남은 것은 자발적 상납을 위해 불필요하게 존재하는

국내법을 정비하고 경쟁과 시장을 촉진하기 위한 제반의 국내적 조치를 매우

“조용히” 추진해주는 일 뿐이다.

 

예> 현재 제주도 지방개발 공사가 갖고 있는 지하수에 대한 독점 개발 권한의 경우

 시장 접근 제한 등의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충분히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철도 운송 및 건설 개방

 

건교부장관 면허를 받은 외국인은 운송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고,

민투법을 충족시키는 외국기업은 건설을 할 수 있다.(부속서2, p13).

 

 

■ 건강 등 사회 서비스

 

의료 관련 서비스 개방은

 

1) 경제자유구역을 현재유보로 묶어 래칫이 작동되도록하여 구역의 범위와

규제완화를 확대한다

 

2) 보험의 민간 참여를 보장한 후 ISD에 의해 건강보험 등 공공의료를 축소하는

두 축으로 진행된다

민간보험영역의 확대 -> AIG 등의 ISD -> 미래유보라고 할지라도

건강보험의 확대 불가능 & 정부의 자발적 민영화

-> 건강보험의 축소 신 보험상품에 대한 신고제 폐지

 

3) 약의 접근권 제한

제네릭 이용가능성과 강제실시권의 약화

자료독점권의 강화 - 안전성과 효능 자료

제네릭 시판을 적어도 5년 이상 지연

 

 

■ 네거티브 방식유보/역진방지조항

 

네가티브 방식 유보로 미래에 성장하는 서비스에 대한 정부 정책권한을

포기하였으며, 역진방지(레쳇) 조항으로 자발적 개방이 이루어 진 분야나 지역에

대한 정책을 철회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GATS와 달리 한미FTA에는 서비스 양허목록의 수정에 대한 별도의 규정이

존재하지 않아, 서비스 양허목록의 수정이 가능하지 않다.

 

특히 역진금지(레쳇) 조항은 자발적 자유화를 반영구화하며, 정책실패를

수정할기회를 포기하게 만든 독소조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미FTA가 비준된 이후에는 경제자유구역이나 제주도 등에서 정부의

개방화 정책이 실패로 증명되고, 이 실패의 악영향이 국내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여도 이를 한미 FTA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개방이라는 명분으로 미래세대의 정책결정권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

 

 

■ 공공요금/조세정책

 

정부는 공공요금 및 조세 정책에 대한 정부 권한을 지켜낸 듯이 선전하지만

이미 “상업적 고려”, “간접 수용” 등을 통해 공공요금에 대한 정부 권한은

한순간에  휴지조각이 나기 쉽다.

 

저소득층에 대한 에너지 지원, 철도의 PSO, 농어촌에 대한 상수도 지원 등은

간접 수용에도 해당하고, 상업적 고려 조항을 위배하게 된다.

또한 이행의무부과금지 등에 위배되기 때문에 투자자-국가간 소송의 대상이 된다.

 

더욱 외통부에서 공개한 피상적인 협상문구에서도 역시 ‘포괄적’으로 공공요금을

언급했을 뿐, 전기․가스․철도 등 대중교통․상하수도 서비스에 대한 정부 권한을

명시하지 않았다. 네가티브가 아니면 개방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미 공공요금 시장가격 현실화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공공요금에

대한 정부 권한 유지 언급은 지금대로라면 별반 실효성이 없는 공문구이다.

 

 

 

 

                          [분야별 협정내용]  

 

■ 투자 분과

 

▶ 투자의 정의를 기업, 주식, 채권, 지식재산권 등 투자자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자산으로 규정

 

▶ 이미 설립된 투자뿐만 아니라 진입 단계의 투자 및 투자자에 대해 내국민 대우와

   최혜국 대우를 부여

 

▶ 외국인 투자자에게 국제관습법 상 인정되는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 및 보호와

   안전을 보장

 

▶ 투자와 관련하여 일정 비율 수출, 국내산 원재료 사용, 기술 이전 등의 이행요건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하고, 투자기업의 고위 경영자에게 국적요건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

 

▶ 내국민 대우, 최혜국 대우, 이행의무부과금지, 고위경영자의 국적요건 부과

   금지의 의무로부터 면제되는 조치(불합치조치)는 부속서에 명기

 

▶ 투자자의 재산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국유화하거나 수용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공공의 목적을 위해 국유화하거나 수용하는 경우

 내국민과 비차별적으로 공정시장가격에 따라 보상하도록 규정

 

▶ 투자 관련 자유로운 송금을 보장하되, 채권자 보호, 범죄행위, 소송에 따른

  판결이행  등을 이유로 송금을 제한 가능

 

▶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제도를 도입, 외국인 투자자는 동 협정에 따른 권리가

침해되고 발생한 경우, 투자유치국을 상대로 국제중재를 제기 가능

 

 

 

■ 간접수용

 

간접수용은 “외국인 투자자의 재산권을 박탈, 국유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 정부

조치로 인하여 투자자가 사실상 영업을 할 수 없게 되어 투자의 가치가 직접 수용과

동등한 정도로 박탈되는 경우“라고 한다.

 

간접수용은 론스타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론스타를 규제하는 것은 론스타의

간접수용을 명백히 침해한 것이기 때문에 론스타는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다,

나아가 공공복지 정책, 저소득층 에너지 지원, 장애인 고용 의무, 연구개발에서의

국가 권한 등 역시 그 범위를 고민하다 보면 역시 간접 수용 속에 포함될 수 있다

.

 

 

서비스 분과

 

▶모든 서비스 분야를 협정문 적용 대상으로 설정, 단 사행성 게임을 포함한

도박 서비스, 금융서비스, 항공운송서비스, 정부조달 정부제공 서비스 등은 제외

 

▶상대국 사업자에게 제공하는 일반적인 의무에서는 내국민 대우, 최혜국 대우,

시장접근제한 조치 도입금지, 현지 주재 의무 부과 금지

 

▶ 단 이러한 일반적 의무에도 불구하고 상기 의무에 부합하지 않는 규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경우, 비합치 조지 조항에 의거하여 유보안에 적시 가능

 

 현재 유보: 협정상 의무에 합치하지 않는 조치를 나열한 목록으로,

                 ratchet(자유화 후퇴 방지 장치)이 적용됨

  미래 유보: 향후 규제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는 현존 비합치 조치 또는 전혀

                 새로운 제한 조치가 채택될 수 있는 분야를 나열한 목록

 

▶ 유보안의 작성 범위: 서비스 챕터의 4대 일반적 의무(NT, MA, MFN, LP)에

 합치하지 않는 중앙정부(우리 측 중앙정부, 미측 연방 정부)의 모든 비합치 조치를

  유보안에 유보하는 것으로 합의

 

▶ 유보안: 초중고 교육, 의료 사회서비스 등 공공성이 강한 부분은 포괄적으로

  유보하되, 사업서비스 등 개방을 통해 우리 경제의 경쟁력 제고가 필요한 분야에

  대해서는  단계적, 부분적인 개방을 추진

 

▶ 교육 의료 및 사회서비스(국민연금, 보건, 탁아 등), 공공서비스 포괄 유보:

교육(초중고 교육) 의료 및 사회서비스, 사회적 약자를 위한 특별 조치,

음용수 등 공공서비스에 대한 정부의 모든 규제 권한을 포괄적으로 유보

 

▶ 에너지(전력 가스) 분야에 대한 투자 허용 기준 명확화

: 증권 시장에 상장되어 이미 유통중인 한국전력 및 한국가스공사에 대해서는 현재의

외국인투자지분(각각 40%, 30%)을 유지하는 한편, 여타 사항에 대해서는

Annex Ⅱ(미래유보)에 포괄 유보하여 정부의 규제 권한을 확보

 

 

 

정부 조달 분과

 

▶ 적용범위를 이미 대외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민자사업(BOT)을 정부조달에

  포함하여 국제 입찰을 실시키로 합의

 

▶ 참가조건의 경우 입찰참가 및 낙찰 과정에서 조달기관이 속한 국가 내 과거

실적 요구를 금지함으로써 공급자의 상대국 정부조달 시장 진입에 대한 제도적

장벽을 제거

 

▶ 양허안 주요 내용으로 중앙정부(연방정부) 양허하한선의 인하, 즉 양측은

중앙정부(연방정부) 상품, 서비스의 양허하한선(개방하한금액)을 현행 약 20만불에서

10만불로 대폭 인하하여 정부조달 시장의 개방폭을 상당 부분 확대

 

 

경쟁 분과

 

경쟁 챕터가 공기업의 독점적 지위와 의무 범위를 제한하여 공기업의 공공성을

해체하고 민영화의 효과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완전한 시장개방 체제로

전환할 것을 합의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 피심인이 공정위와 합의한 시정 방안을 취하는 경우, 위법성 판단을 받지 않고

공정위 절차를 종겷는 제도인 동의명령제의 도입

 

▶ 정부지정독점 공기업 관련 내용

독점 공기업을 설립 유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되, 이러한 기업을 통해 정부가

의무를 회피하거나 시장을 왜곡하지 않도록 몇 가지 의무를 규정

 

▶ 지정 독점 공기업의 의무

1) 정부 위임 권한 행사 시 FTA 제반 협정상의 의무 준수

2) 상대국 상품 서비스 투자에 대해 상품 서비스 판매 시 비차별적 대우 제공

 

▶ 지정 독점에게만 추가적으로 적용되는 의무

3) 독점 상품 서비스의 판매 구입시 지정조건을 준수하는 경우 외에는

상업적 고려에 따라 활동(다만, 정부의 공공저책에 따른 공공요금에 대해서는

상업적 고려를 따르지 않아도 되도록 명확화)

4)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비독점 시장에서의 상대국의 투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반경쟁적 행위 금지

 

▶한미 FTA에서 제기되고 있는 경쟁법 집행 및 반독점 불공정 거래 방지 등의

내용은 형식적으로는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이 문제를 공공서비스 분야로 한정하여 보았을 때 한미 FTA는

한국 재벌과 미국 자본 모두에게 유리한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해석하여야 한다. 경쟁챕터의 의미가 “FTA를 체결하더라도

경쟁제한적인 행위가 만연할 경우 무역자유화의 효과가 상쇄되기 때문에

경쟁챕터를 별도로 둠으로써 경쟁 제한적 행위를 억제하고 무역 자유화

효과를 제고”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조>협정문 분석보고서, 송기호 변호사님의 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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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회의는 해소되어야 한다.

저는 지난 4월말 촛불이 시작되던 날부터 촛불과 함께하면서, 촛불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첫날부터 명박퇴진이라는 구호가 나온 이래, 
촛불이 거리로 나왔을 때에 단 한번도 이 구호에 주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보았습니다.
5월과 6월이 지나도록, 대책회의는 단 한번도 공식행사에서
명박퇴진이나 명박심판이란 구호를 외쳐본 적이 없습니다.
말만 1800개 단체 운운하지 실제로 운영위회의에는 많아야 50여개의 단체가 참석해서,
명박퇴진을 구호로 내걸면 탈퇴하겠다고 무려 다섯시 간이나 협박하던 단체가 대부분이었습니다.
 
7월에 들어서 처음으로 명박심판이란 구호가 행사의 끝에 나왔었고,
행사가 끝나고 행진을 시작할 직후에 처음으로 대책위 마이크에서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잠깐 나왔었습니다.
그러나 광화문으로 행진을 하려는 대중을 의도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끌거나,
차벽 앞의 촛불이 싸울 때에 도망가는 것은 거의 매일 보던 풍경이었고
(단 하루만 약간 늦게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말집회를 낮에 해야만 제대로 투쟁할 수 있다는 수많은 항의를 묵살하면서
끝까지 밤7시 집회를 고집하여 수많은 비난을 받은 것은 여러분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6월말 10만이 넘는 촛불이 모였을 때,
투쟁을 가로막고, 싸우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고 고립시키기 위하여 밤새 음악회를 계속하면서 온갖 수단을 다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때 대책회의의 농간을 꾸짖는 저의 영상이 YTN에도 크게 보도된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대책회의가 단 한번도 촛불과 같은 구호를 외쳐본 적도 없고
투쟁을 같이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행여라도 투쟁을 할까바, 행여라도 투쟁이 커질까바 항상 방해하고 억제한 것만 보았을 뿐입니다.
 
결국 촛불을 뒷바라지 한적은 있지만 촛불과 함께 투쟁을 함께한 조직도 아니고,
항상 촛불의 투쟁을 방해하던 조직이었고, 따라서 진정으로 촛불의 승리를 위해 투쟁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 대한 저의 판단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가 없는 확신입니다.
촛불이 저항이고 투쟁이라고 할 때, 진정으로 승리를 바라고 싸우는 집단도 아니면서,
촛불의 뒤에서 혹은 촛불의 옆에서 촛불의 위신과 명망만 챙기는데 관심이 있는 조직이었다는 판단을 합니다.
 
저는 대책회의가 촛불을 뒷바라지 한 것에 대하여는 수고했다는 말을 할 수도 있겠으나,
촛불의 저항과 투쟁을 억제하고 방해하고 촛불을 결정적인 패배로 이끈 행동에 대해서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즉 대책회의는 촛불이 아니라 촛불을 배반한 조직이라는 소신에 대하여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이 시들자, 대책회의는 과거의 위신이 그리워서인지 여기저기 이러저러한 촛불과 연대를 하겠다면서 개입을 시작했고,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중입니다. 이 중에 저의 모임도 있습니다. 아마 저희와 연대하고 저희 이름으로 모금이라도 한다면 대중의 눈에는 그럴싸하게 보이고 모금함도 두툼해지겠지요.
 
그러나 어느 촛불조직이든 간에, 그 속에는 차벽앞에서 싸웟거나 가투를 했던 동지들이 있고, 그들 대부분은 대책회의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을 가지고 있는 현실도 부인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대중으로부터 신망을 잃어버린 조직이 자신의 신망을 되찾기 위하여 또다시 촛불을 이용하고 편승하려는 현실에 대하여 저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대책회의가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자신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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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그리고 촛불정신

  • 분류
    운동론
  • 등록일
    2008/09/06 12:38
  • 수정일
    2008/09/06 12:38
  • 글쓴이
    서른즈음에
  • 응답 RSS
촛불 그리고 촛불정신
 
1. 촛불은 무엇인가?
번개 때,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얘기는 한없이 즐겁고 함께하고 싶은 까닭은 무엇인가?
4달이 넘도록 KBS 앞에서 촛불을 들고 날을 새우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100여일 동안 함께 외쳤던 촛불은 누구이고, 위험과 두려움을 무습쓰고 가투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왜 우리는 촛불을 들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 저항하고 있는가? 이 투쟁을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아마 맨 처음엔 제 나라 국민들에게 미친 소를 못 먹여서 환장한 넘들이 국민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 방패로 찍고 군홧발로 밟아서 먹이려는 정권에 대한 분노였겠지요.
그 분노와 불신은 미친교육, 민영화, 뉴라이트, 조중동, 딴나라당에 대한 분노로 커져갔고 의제는 어디까지 확장될른지 우리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단지 이들 한무리의 세력들의 말도 안되는 처사에 대한 분노만이 우리를 이렇게 끈질기게 이끌어 온 힘일까요?
 
저는 우리가 비록 확실히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단지 분노만이 혹은 우리가 정당하다는 확신만이 우리를 여기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촛불을 들게 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학생과 시민과 임신부를 칼과 총으로 학살에 분노하여 일어선 시민군이 진압당한후에 즉 분노와 슬픔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저항을 계속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촛불에는 불의에 대한 분노외의 그 무언가가 촛불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날마다 kbs 에 가서 밤을 새우고, 어떤 사람은 자기돈으로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는 걸까요?
 
저는 이 모든 저항이 자기실현의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쟁사회에 찌들은 소시민으로서 더 많이 가져야 되고, 더 높이 올라가야 되고, 단지 나와 내 가족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했던 무기력이 세뇌된 인간들이, 처음으로 국가권력과 한줌의 세력들이 자신의 삶을 유린하고 부정하는 것을 깨우치고, 평화로운 촛불에 동참하면서 자신의 작은 실천이 유의미하고 역사를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실천 속에서 처음으로 내가 아닌 내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실천 속에서 자아의 해방을 맛 본 것입니다. 그 순간 존재의 합일화 즉 나와 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합일화의 과정을 통해서 소외된 자아가 해방된 기쁨과 희열을 맛본 것입니다.
 
새문안 교회에서 버스를 끌어내기 위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밧줄을 당길 때, 물을 가져오는 사람, 부채를 부쳐주는 사람, 떡을 가져 오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인생에 처음으로 정말 순수하고 정당한 열정 속에서 이름모를 사람들과 함께하는 희열감! 권위적이고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사회 속의 왜소하고 고립된 소아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타자와의 합일화를 통한 희열감과 행복감을 맛본 것이고, 그 속에서 의미있는 자아를 실현하면서 기왕에 쫒기듯 찌들어 살아왔던 소아가 무의미해지고, 매일의 작은 실천이 주는 자아실현의 행복에 빠져든 것이 아닐는지…
 
나와 내 주변이 모두 순수한 열정과 분노속에서 함께하고 있다는 것, 나도 그 속에서 존재의 해방감을 느끼면서 행복하다는 것, 바로 이 행복감과 해방감의 경험이 너무나 좋고(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합치하니까), 그 행복을 유린하는 권력이 너무나 밉고 용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류가 억압과 피억압의 역사를 시작한 이래 이처럼 뜨겁고 순수한 열정으로 희열과 행복을 느낀 경험이 거의 없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4.19 때 이승만을 쫒아 낸 기쁨이 우리에게 비할 수 있을까요?
 
도로에 나선 당당하고 수많은 촛불 속에서 느끼는 해방감과 수많은 사람과 함께하고 있다는 다시 말하여 나와 내 옆사람이 우리가 되어 서로 사랑으로 묶여가는 희열, 무의식 속에 잠재되었던 두려움과 억제로부터 벗어나 해방된 자아를 향해 나아가는 환희. 이 모든 해방감과 희열과 환희가 바로 촛불이 느끼는 행복감과 일체감의 근원인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면서도 함께한다는 마음과 순수한 열정으로 하나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엔도르핀을 주는 즉 인간의 본성에 합치하는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2. 광장민주주의에 대하여
 저는 촛불은 본질에 있어서 집단지성이 이끄는 광장민주주의이고 직접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국가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고, 국민은 말로만 주권자일 뿐 선거 때만 주권을 행사하고 평소에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주인인 국민을 주권자가 아니라 유권자로 보는 것이 이 체제의 비극의 시작인 것입니다.
 
고대의 아고라 후의 직접민주주의는 프랑스혁명 때였습니다. 당연하게 봉기군들은 스스로의 대표를 뽑고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었고, 함께 모여서 결정하고 함께 실천하고 투쟁했습니다. 앞장서는 사람에게 어떠한 특권도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직접민주주의이고 광장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100일간의 촛불 내내 우리가 위대했던 것은, 사이비인 대책위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우리에게 명령하고 지도하는 권위를 갖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주인이 되어 토론하고 결정하고 실천하고 함께 투쟁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촛불정신이 광장민주주의이고 직접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어느 조직이든 대표자와 운영진을 뽑고 그들에게 결정과 집행을 맡깁니다. 심지어 작은 계모임도 그렇고 작은 동창회도 그렇습니다. 조직이 크면 클수록 그 성원은 조직의 주인자리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으로, 저는 우리 조직이 촛불정신에 투철하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우리 주의의 조직처럼 회장을 뽑고 총무를 뽑고 그들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주인으로서 동등하게 참여하는 새로운 직접민주주의의 틀을 구현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운영의 편의상 대표와 머슴단을 두되 모든 일은 언제든지 함께 모여 결정하고 실천하자는 취지에서 모임의 기본운영방침과 틀을 제시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대표와 운영진에게 맡길 때 회원들은 수동적으로 되고 소외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머슴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잇는 것이고, 모든 종류의 회의에 가령 운영진 회의에도 모든 정회원이 마음대로 참석하여 동등하게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는 개방적인 운영을 할려고 해왔던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결정에서 최대한 모두에게 개방하여 함께하는 것이 촛불정신에 합치할 것입니다.
 
3. 우리들의 언어에 대하여
 
먼저 저는 촛불은 미친소 미친 교육이라는 말도 안되는 억지와 부당함에 대한 항의에서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법연행, 공포분위기 조성 등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을 빙자한 조폭들의 폭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저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모임에는 앞서는 사람도 있고 뒤쳐지는 사람도 있고, 시위도 마찬가지고 저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100일간의 촛불이 위대했던 것은 그리고 815 평화행동단이 숭고했던 것은, 불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폭압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저항을 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기가 옳다는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명칭은 존재를 규정지우는 것이고, 안티2mb나 민처협이나, 평화행동단처럼 그 조직의지향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우리 모임의 수식구는 그러한 저항의 지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친목을 위주로 하는 ‘연행자모임’, 그리고 벌금 등의 공동대응을 위주로 하는 가령 ‘민변과 함께하는 연행자 모임’, 마지막으로 부당한 공권력과 공안탄압에 저항하는 ‘공안견찰과 정치떡찰에 반대하는 연행자 모임’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 구성원의 성향이 변하여 친목위주의 모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친목 위주냐 자구 위주냐 아니면 저항 위주냐의 문제에 있어서 주로 저항 위주의 동지들이 앞장서고 있고 자구 위주를 바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저항 위주라고 할지라도 조직의 계속성과 투쟁의 지속성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므로 합법의 틀내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대다수의 성원이 동의해야 하기 때문에 낮은 강도의 저항부터 시작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나 자구만 할 것이냐 아니면 저항도 할 것이냐의 차이는 촛불을 계속할 것인지 아닌지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 우리가 촛불이었다가 아니라 촛불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한다면, 우리 존재의 가치는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저항과 촛불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작고 낮은 실천일지라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것이 우리 존재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항의 출발은 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넘들의 협박에 위축되어 스스로 정당하고 당당한 언어를 자기검열하는 것이야 말로 촛불인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스스로의 정당함을 확신하고 나아가기 위하여 당당하고 정당한 우리의 언어를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사파시스타의 부사령관인 마르코스가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무기 Our word is our weapon.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동지들이 우리들의 정당한 언어이자 무기인, 공안견찰, 정치떡찰, 공안탄압에 대한 저항 등의 표현을 결코 스스로 먼저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결국 저항과 투쟁이란 두려움을 극복하고 우리의 언어를 당당하게 되찾는 과정인 것입니다.
 
4. 촛불은 이름없는 촛불이고 실천하는 촛불이어야 한다
저는 촛불이라면 우리의 뇌리에 박혀있는 모든 종류의 비민주적이고 반인간적이고 차별적인 권위를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누군가가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무슨 지위에 있던간에, 촛불 속에서는 단지 순수함과 열정과 도덕만으로 판단된다는 것입니다.
촛불 속에는 기왕에 유명하고 명망있는 사람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겠지만, 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은 모든 종류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짜르 치하에서 반란을 일으킨 병사 소비에트(평의회)처럼 해방된 공간에서는 계급도 필요없고 단지 전제정치에 투쟁하는 동지애만 인정되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광주항쟁 때 도청에 모였던 시민군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택시운전을 하던 사람이 사령관이 되고, 고등학생도 당당히 총을 들고 회의에 참가하여 발언하고 자신과 관련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87년 세대나 386이 과거에 한때 순수했을지라도 기존의 권위에 굴복하고 물드는 순간 그들은 순수함을 잃고 단지 과거의 명망을 자산으로 삼아 기존의 권위에 편입되었지만, 촛불은 집단지성의 힘으로 순수함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순수한 정열로 남기 위해선 끝까지 억압적인 사회 속에서 형성된 복종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무슨 명망과 권위를 내세을 때 그는 이미 촛불정신과는 먼 사람과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촛불 정신만이 21세기의 인류가 실천하고 이루어 갈 기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끝까지 이름없는 하나의 촛불로서 저항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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