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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9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그리고 긴급출동 SOS(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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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췌독]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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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의 유혹, 가장 현실적인 드라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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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신당 강령 전문(前文)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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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그리고 긴급출동 SOS

 

어젯밤 집에서 우연히 SBS에서 하는 <긴급출동 SOS>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얼마 전에도 14살 짜리 아들이 엄마를 폭행하는 사건을 보도해 나에게 충격을 줬던 프로였는데, 어제 방영된 내용은 동생네 부부가 지적장애를 가진 64세의 형(방송에서 불렀던 대로 아래부터는 '김씨'로 통일)을 학대하고 폭행한 것에 관해서였다. 동네 주민들은 동생네 부부, 특히 동생 부인이 김씨의 집안 살림을 해 주는 등 장애를 가진 형을 보살펴 주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김씨에게 고물 주워오는 일을 강제로 시키고 매일 같이 그에게 폭행을 일삼고 있었다. 게다가 종이 박스같이 돈이 안되는 고물을 주워올 경우 폭력은 더 심해지고, 고철류 같이 돈이 되는 고물을 주워오도록 해 결국 그에게 절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그러나 (방송이 사용했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김씨는 제보를 받고 그를 도우려 달려온 주위의 손길(방송국, 경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같은 전문가 집단)을 피하려 했다. 여기서 심리 치료 전문가가 등장해 그의 상태를 진단한다. 결국 경찰과 '전문가'가 동행한 채 카메라는 김씨의 집에 '급습'한다.

 

흡사 삼자대면이 벌어지는 상황. PD와 '전문가'는 번갈아가면서 김씨와 동생 부인에게 폭행사실을 추궁한다. 동생부인은 길길이 날뛰고, 김씨는 카메라를 외면하려 한다. 카메라는 집안 곳곳과 김씨, 동생 부인,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동생의 얼굴을 수시로 옮겨가며 이를 전파에 담아낸다. 그러는 동안 김씨는 초조함에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입고 있던 추리닝 바지를 만지작 거리고만 있는다.

 

방송은 당연하게도 동생 부부가 자행한 폭력의 잔인함과 비인간성을 드러내고 김씨의 노예와 같았던 삶에 대한 연민을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연민에 공감하고 김씨의 삶의 끔찍함에 경악하기 전에, 방송국 카메라가 향하는 시선들에 불편함을 먼저 느꼈다. 그런 불편함을 수시로 연발하다가 같이 TV를 보고 있던 엄마에게 심한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아마 엄마에게는 내가 동생 부부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불편함은 이와는 많이 다르다.

 

우선 왜 동생과 동생 부인의 얼굴엔 모자이크 처리를 하면서 김씨의 얼굴은 있는 그대로, 머리에 난 상처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드러내는가? 또한 김씨에 대한 여러차례 대화시도가 실패하자 방송은 진상을 파악하겠다고 김씨의 집 가까이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한다. 대체 이런 조치는 누구의 허락을 받고 하는 것인가? 방송은 심리 치료 전문가의 발언을 반복적으로 전달하지만, 김씨의 심리에 대해서는 조금의 고려도 없었던 듯 하다. 김씨 입장에서는 어디서 뭐 하던 놈인지 알 수 없는 PD가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밀어 "도와주러 온 것이니 집에서 맞은 적이 있는지 말해보라"고 목청을 높인다. 내 생각엔 PD의 이런 행동은 김씨에게 동생 부인의 폭력보다 더 두렵게 느껴졌을 것 같다.

 

며칠 전에 읽었던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이런 상황, 즉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있는 현실의 기만성과 가증스러움을 낱낱이 폭로한다.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저, 이재원 역, 이후, 2004)

 

매혹적인 육체가 외부의 공격을 받는 광경을 보여주는 모든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그라피이다. 그렇지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담은 이미지들도 매력적일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자동차 충돌 현장 옆을 지나칠 때 운전자들이 차의 속도를 늦추는 이유가 단지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대부분 운전자들은 뭔가 소름끼칠 만큼 섬뜩한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바람을 '병적'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 표현이 뭔가 보기 드문 일탈 행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끔찍한 광경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 현상은 영원히 계속될 내적인 고문의 원천이라고 할 만하다. ([타인의 고통], 144-145쪽) 

타인의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고통을 충격적인 사건 전개, 탐정과 같은 PD의 추적을 통해 '관람'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고통을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이는 확실히 고통과 한참 먼 '수직적' 거리를 두고,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행위다. 혹여나 그 시선이 연민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한들, 그것은 무능력하기만 할 뿐이다. 그런 시선으론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개입도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고통을 해결하기 보다는 고통의 비극성을 증폭시킨다. 개인의 고통이 만인의 관람대상, 즉 포르노그라피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른바 '고통의 사회화'인가?

 

물론 김씨의 육체가 일반적인 의미로 손택이 말한 것처럼 '매혹적인 육체'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육체가 매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방송국 카메라가 그를 향해 'Shot'(손택에 따르면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사람을 쏘는 총은 'Shot'이라는 용어가 갖는 두 가지 용법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동일한 성질을 갖는다고 말한다)을 날릴 수 있던 것이다. 윤금이씨가 미군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음부에 우산이 꽂힌채로 죽임을 당한 사진이 대중에게 여과없이 공개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육체가 매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팔루자에서 학살당한 이라크 어린이들이 팔다리가 잘리고 피를 흘리며 처량한 눈빛을 보이는 사진이 지구 반대편까지 전해질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이라크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백인이며 게다가 미국인이고, 상류계층에 속한 이었다면 이런 이미지들이 '살포'될 수 있었을까? 이런 이미지들은 폭력의 외부에 남아있는 우리(그런 폭력적 이미지를 '시청'할 여유와 권리를 가진 '시.청.자.들.')에게 폭력의 끔직함을 일깨워줘서 그런 폭력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고 하지만, 이는 오로지 '우리'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킬 따름이다.

 

방송에 따르면 다행히도 김씨는 동생 부부의 폭력에서 벗어나 재활원에 들어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불편하다. 문제의 원인이 오로지 '동생 부부'에게만 있을까? 그들과 격리시키면 일은 다 해결된 것인가? 오히려 카메라의 시선이 동생부부에게 책임을 몰아가는 동안 나를 포함한 시청자들은 이 사건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이 사건과의 물리적 거리 뿐만 아니라 '책임감'의 거리 또한 확보한 것은 아닐까? 방송이 김씨의 생활을 그 속살까지 드러내 보인 것도 시청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씨는 우리('시청자들')에게 있어서 지극히 낯선 존재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화려한 '스펙터클'로서 그의 삶을 편안하게 바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희생자들, 슬픔에 빠진 친지들,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들 -- 이들은 모두 자기들 나름대로 전쟁과 어느 정도 덜어져 있거나 근접해 있다. 전쟁을 가장 솔직하게 재현해 놓은 것, 어떤 재앙으로 부상을 입은 신체를 가장 솔직하게 재현해 놓은 것은 우리에게 지극히 낯선 존재들, 그래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피사체가 우리에게 더욱 더 친숙할수록, 사진작가는 훨씬 더 신중해지는 법이다. (98쪽)

장애를 가진 김씨와 같은 이들이 이렇게 '구경거리'로만 남게되면서, 이들의 타자화는 더욱 공공해 진다. 우리가 폭력에 노출된 그의 삶을 아무 불편한 없이 그저 '연민'만으로 보고 있다면, 이 화면을 전송해 준 전파를 통해 '나는 그런 폭력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고 안도감을 확인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방송이 끝날 때 쯤에 자막으로 나온 광고 한마디. "다방에서 감금된 적이 있거나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신 분들의 제보를 받습니다." 손택이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겹쳐지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포위되어 있을 당시의 사라예보에서는 폭격의 와중이나 저격수의 총탄이 빗발치는 와중에서도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을 호통치는 사라예보 주민들의 고함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은 목에 두른 장비 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다. "시체들 사진을 찍으려고 포탄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요?" (164쪽)

그리고 손택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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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뉴스가 소위 '전 세계'라는어법으로 말하는 세계는 -- 어느 라디오 네트워크는 한 시간에도 수차례씩 이렇게 읊조린다. "우리에게 22분만 할애하십시오. 우리가 당신에게 전 세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 (전 세계는커녕) 지리적으로나 관심 여부로나 아주 국한된 장소일 뿐이며, 뭔가 알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매우 짧고 굵게만 방송되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에서도 고작 몇 개만이 추려내질 뿐이니, 그처럼 선택된 전쟁들 속에서 [대중매체가] 모아놓은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다. 게다가 카메라에 찍힌 형태인 한, 그 의식은 금방 불타올랐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뒤, 곧장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져갈 것이다. (복잡한 사유, 문헌, 어휘에 기대기 때문에 비교적 소수의 독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글로 씌여진 이야기와 대조적으로, 사진은 단 하나의 언어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잠재적으로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41p)

 

 

 

 

텔레비전 카메라가 매일같이 보여준 최초의 전쟁, 즉 미국이 개시한 베트남전쟁 상시에는 머나먼 곳을 상세히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장치를 통해서 죽음과파괴의 모습이 가정의 코앞에까지 찾아들어 왔다. 그때 이래로, 발생할 때마다 곧바로 필름에 담겨지게 된 각종 전투와 대량 학살은 정기적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올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작은 화면으로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곳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극적인 사건들에 노출된 시청자들이 어떤 분쟁을 중요하다고 의식하도록 만들려면, 이제는 그 분쟁을 다룬 단편적인 필름들을 일상적으로 확산시키고 또 확산시켜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들이 가져다 주는 충격을 통해서 전쟁을 이해한다. (43p)

 

 

 

 

[사진이] 실제적인 사회 문제를 손쉽게 추적 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합의가 새롭게 대세를 이루게 되자, 사진작가들의 생계와 독립성이라는 쟁점이 전면에 부각됐다. 그 결과, 카파와 그의 친구들 몇 명(칭과 앙리 카르티에-브레송도 이들 중 하나였다)은 1947년 파리에서 일종의 조합인 <매그넘 포토 에이전시>(이하 매그넘)를 설립했다. (곧 가장 영향력 있고 명망 높은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의 조합이 된) 매그넘이 직접적으로 표방했던 취지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 사진 잡지들이 할당해준 일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한 채 자유 계약으로 일하는 사진작가들을 대변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취지였다. 이에 덧붙여, 종전 직후에 새롭게 창설된 각종 국제 조직이나 동업 조합의 창립 선언문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이었던 매그넘의 선언문은 윤리적인 부담이 가중되고 예전보다 확대된 포토저널리즘자각들의 사명을 명쾌하게 밝혀 놓았다. 전쟁의 시게에서든 평화의 시기에서든, 광신적 애국주의의 편견에서 벗어난 채 공정한 목격자의 한 명으로서 자신들이 활동하던 시대를 기록할 것. (59p)

 

 

 

 

 

초창기 전쟁 사진들 중 걸작이라고 칭송 받은 사진들이 대부분 연출된 것이었다거나 피사체에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암실이 딸린 마차를 타고 세바스토폴 근처의 첩첩이 층이 진 계곡에 도착했던 팬턴은 삼각대를 고정한 뒤 똑같은 위치에서 두 차례 촬영을 개시했다. 훗날 팬턴이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인 계곡"(그렇지만 제목과는 달리, 이곳은 영국의 경기병단이 숙명의 돌격을 감행한 바로 그곳이 아니었다)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는 저 유명한 사진의 첫 번째 판본에는 길가 왼쪽에 포탄들이 첩첩이 쌓여 있었다. 그렇지만 두 번째 사진(오늘날 늘 복제되는 사진)을 찍기 전에, 펜턴은 포탄들을 길가에 이리저리 흩어놓았다. 실제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활양한 장소를 찍은 사진, 즉 피사체에 손을 댄 흔적이 더 많은 베아토의시칸다바그 궁전 사진은 전쟁의 무서움을 최초로 묘사한 사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궁전이 공격을 당한 것은 1857년 11월이었다. 승승장구한 영국군과 영국에 충성을 바쳣던 일군의 인도인 부대가 이 궁전의 모든 방을 샅샅이 뒤져,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1천8백 명의 세포이 반란자들을 총검으로 굴복시키고 난 바로 직후였다. 이제 죄수가 된 이들의 주검은 궁전 안마당에 던져졌으며, 독수리들과 들개들이 뒷일을 처리했다. 1858년 3월이나 4월경 이곳의 사진을 찍었던 베아토는 사진 뒤쪽에 나외 있는 궁전 기둥에 몇몇 인도인들을 세워두고, 궁전 안마당에 인간의 뼈를 이리저리 뿌려둔 뒤, 폐허가 된 이것에서 마치 주검들이 수습되지 않았다는 듯이 짜 맞춰 놓았다. (84-5pp)

 

 

 

 

 

희생자들, 슬픔에 빠진 친지들,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들 -- 이들은 모두 자기들 나름대로 전쟁과 어느 정도 덜어져 있거나 근접해 있다. 전쟁을 가장 솔직하게 재현해 놓은 것, 어떤 재앙으로 부상을입은 신체를 가장 솔직하게 재현해 놓은 것은 우리에게 지극히 낯선 존재들, 그래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피사체가 우리에게 더욱 더 친숙할수록, 사진작가는 훨씬 더 신중해지는 법이다. (98p)

 

 

 

 

 

1991년의 걸프 전쟁 당시 미국의 정부 관료들이 촉진했던 것은 테크노 전쟁의 이미지였다. 죽어 가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미사일들과 포탄들이 날아가며 그려낸 섬광의 흔적으로 가득 찬 하늘,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적보다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미지였다. 미국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NBC가 획득한 영상, 즉 미국의 이런 군사적 우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수 있는지 보여준 영상을 볼 수 없었다(그 때 당시 이 텔레비전 네트워크는 방영을 거부했다). 전쟁 막바지인 2월 27일, 호송선을 타거나 걸어서 쿠웨이트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도망치던 중 이라크의 바스라와 연결되어 있는 도로에서 네이팜탄, 방사능 무기(열화우라늄탄), 집속탄 같은 각종 폭발물의 융단 폭격을 받게 된 이라크 징집병들 수천 명의운명, 미국의 어느 정부관료가 '칠면조 사격'이라고 묘사한 바 있던 저 악랄한 살육의 장면을. 게다가 2001년 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수행한 대부분의 작전도 보도 사진작가들의 접근이 금지됐다.

 

전쟁이 점점 더 적을 추적하는 정밀한 광학 장치들로 수행되는 행위가 되어갈수록, 전선에서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카메라를 사용할수 있는 조건도 점점 더 엄격해졌다. 사진 없는 전쟁, 즉 1930년 에른스트 윙거가 관찰했듯이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위거는 이렇게 썼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우 꼼꼼히 보존하려는 행위와 자신이 지닌 무기로 적들의 위치를 정확히 몇 초, 몇 미터 단위까지 추적해 그들을 섬멸하려는 행위는 모두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수행된다." (102-104pp)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이면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식민지화된 아프리카는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일반 대중들의 의식 속에 (그곳의 육감적인 음악을 제외한다면) 주로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희생자들의 모습이 담긴 일련의 잊지 못할 사진들로 존재한다. (... ...) 이런 사진들이 보여주는 광경에는 이중의 메시지가 있다. 이 사진들은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 ...)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인들, 그리고 머나먼 아시아 국가에 살던 외래인들은 런던, 파리, 그밖에 유럽 수도들에서 개최된 인종 전시회에서 마치 동물원의 동물처럼 대중에게 공개되곤 했다. (109-112pp)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전시회와 책들을 뒤덮고 있는 그의 기교, 즉 독실한 신자 가족의 일원인 척하는 그의 스타일은 그가 찍은 사진들에 오히려 해가 됐다. 살가도의 사진들은 특히 그가생생하게 묘사해 놓은 비참함이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상업적인 맥락 때문에도 심술궂은 대접을 받았다. 그렇지만 정작 문제는 그의 사진이 어떻게 어디에서 전시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닐, 사진 자체에 있다.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진들의 초점, 모든 것을 그들의 무능함으로 환원하는 그 초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의 사진들에 달려 있는 설명에 그가 찍은 무력한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아무리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피사체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인물 사진은 이와 정반대 형태의 사진을 무절제하게 탐닉하도록 만들어 왔던 유명인 숭배 풍종의 공범이 되어버린다. 간단히 말해서, 오직 유명인들만 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을 그들의 직업, 인종, 곤경을 상징하는 일종의 본보기로 환원하는 셈이되는 것이다. 39개국에서 이주민들의 못브을 직은 살가도의 사진은 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 버린다. (120-122pp)

 

 

 

 

 

 

1890년대와 1930년대 사이에 미국의 소도시들에서 린치를 당한 흑인 희생자의 사진들이 좋은 사례이다. 이 사진들은 지난 2000년 뉴욕의 한 미술관에서 그것을 본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계시 같은 경험을 던져줬다. 린치 장면을 담은 이 사진들은 인간의 사악함과 비인간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사진들을 보고 난다면 우리는 인종주의가 악을 어느 정도까지 풀어헤쳐 놓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악이 저지른 범죄의 한가운데에는 이런 범죄를 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파렴치함이 존재한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일종의 기념품으로 간직하기 위해서 이 사진들을 찍었으며, 그 중 몇 장을 우편 엽서로 만들기도 했다. 상당수 사진들에는 이 장면을 보면서 히죽 웃고 있는 구경꾼들의 모습이 찍혀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선량한 사람들이 틀림없을 테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은 뒤 벌거벗긴 채로 나무에 목매달려 까맣게 타버린 린치의 희생자들을 배경으로 삼아 카메라 쪽으로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이 전시됨으로써 우리도 이들과 똑같은 구경꾼이 되어버린 셈이다.

(... ...)

전시회가 끝난 직후 [성역 없이]라는 제목으로 이 전시회에 전시됐던 사진들이 책으로 묶여 나오면서 위와 같은 질문들이 제기됐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듯 소름끼치는 사진을 전시할 필요가 있었는가 반문하며, 이런 전쇠가 흑인 희생자들의 이미지를 둘러싼 대중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부추기고 영속화하지 않을까, 혹은 사람들을 이런 의미지에 무뎌지게 만들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렇지만 이 사진들을 "꼼꼼히 검토해 볼" 의무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는 이런 사진을 보게된 시련을 달게 받을 때에야, 이와 같은 잔악 행위를 그저 '야만인들'의 행위라고 이해하기보다는 인종주의 같은 일종의 신념 체계, 즉 어떤 인종을 열등하다고 규정해 그 인종을 고문하고 살인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신념 체계가 반영된 행위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 ...)

만약 미국인들이라면, 원자폭탄의 화염에 타버린 희생자들이나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 중 네이팜탄에 맞아 육체가 갈가리 찢긴 민간인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려고 출타하는 행위를 병적인 행위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린치를 당한 흑인들의 사진을 보는 행위는 의무라고 생각한다.  (138-142pp)

 

 

 

 

 

 

매혹적인 육체가 외부의 공격을 받는 광경을 보여주는 모든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그라피이다. 그렇지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담은 이미지들도 매력적일 수 있다. 고속도레엇 발생한 끔찍하기 이럴 데 없는 자동차 충돌 현장 옆을 지나칠 때 운전자들이 차의 속도를 늦추는 이유가 단지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대부분 운전자들은 뭔가 소름끼칠 만큼 섬뜩한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바람을 '병적'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 표현이 뭔가 보기 드문 일탈 행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끔찍한 광경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 현상은 영원히 계속될 내적인 고문의 원천이라고 할 만하다. (144-145pp)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54p)

현실이 일종의 스펙터클이 되어가고 있다는 주장은 깜짝 놀랄 만큼 지역성을 띠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이 세계의 부유한 곳, 그것도 뉴스가 오락으로 뒤바뀌어 버린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극소수 교육받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습관을 보편화하고 있는 셈이다. (...) 모든 사람들을 일종의 구경꾼으로 보는 것이 바로 이들의 방식이다. (...) 마찬가지로 전쟁, 엄청난 불의, 테러리즘 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는 뉴스 소비자들의 사고방식에 근거해 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일반화하는 것도 우스꽝스럽다. 자신들이 텔레비전 상에서 보는 것들에 전혀 단련되어 있지 못한 텔레비전 시청자들도 수십억이 넘는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에 선심을 베푸는  호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162-163pp)

 

 

 

 

 

 

포위되어 있을 당시의 사라예보에서는 폭격의 와중이나 저격수의 총탄이 빗발치는 와중에서도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을 호통치는 사라예보 주민들의 고함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은 목에 두른 장비 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다. "시체들 사진을 찍으려고 포탄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요?"

(... ...)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재현되는 데에 관심을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뭔가 유일무이한 것으로 보여지기를 원한다. 1994년 초, 포위 상태에 놓여 있던 사라예보에서 일 년 이상 거주해 왔던 영국의 포토저널리즘 작가 폴 로우는 절반 이상이 파괴되어 버린 어느 미술관을 빌려 자신이 찍어 왔던 사진들을 전시했다. 그 당시까지도 파괴되어 가고 있던 자신들의 도시를 찍은 새로운 사진을 간절히 보고싶어 했던 사라예보 주민들은 소말리아의 사진들이 포함된 데에 적잖이 언짢아했다. 로우는 소말리아의 사진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전문 사진작가이며, 그저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느 두 개의 작품을 전시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사라예보 주민들로서도 언짢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타인들의 고통과 나란히 보여준다는 것은, 사라예보가 겪은 수난을 그저 [잔악행위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라고 일축하면서, 양자의 고통을 비교하는 것 (어느 지옥이 더 나쁜가?)이었다. (164-166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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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유혹, 가장 현실적인 드라마.

무슨 개소리냐구?

 

아, 나도 아내의 유혹이 막장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시청자들을 우롱한다고 느끼며 매일 저녁 분노를 표하고 있지만,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오늘 발견하고야 말았다.

 

뭐냐구?

 

이 드라마는 엄청 끔찍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다.

남편이 부인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 하고,

사기쳐서 건설회사를 빼앗으려고 하고,

뭐 기타 등등....

 

극악무도한 사건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이 많은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경찰'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안 나온다는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신애리가 만취한 민소희를 한강변에 냅다 버리고 온 사실을

구은재, 민회장, 민건우 등이 알았을 때,

경찰이 한 일이라곤 고작 이들에게 민소희가 한경변에서 머리를 크게 다친 채로 발견됬다는

사실을 알린 것 뿐이다!!

 

그리고 범인을 잡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은 오로지!!!

자기들이 직접한다!!!

이들의 감정상태는 가희 원초적이다.

민소희 주머니에서 정교빈 명함이 나오자 꼭지가 돌아버린 민건우는

정교빈에게 냅다 달려가서 멱살잡이를 한다.

(실제로 정교빈은 그 사건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증거라고는 예전에 천지건설 사장일때의 명함이 발견됐다는 것 뿐인데도!!!)

 

구은재가 바다에서 죽지않고 살아났을 때도 경찰에 바로 신고하지 않고

복수하겠다며 제2의 인생을 산 것도 그렇다.

 

이것만으로는 이들이 경찰을 신뢰하지 못해서 직접 행동에 나선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떤 순간에도 경찰은 처음에 수사하는 척만 하다가 어느순간 사라져버리는

기가막히게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푸코의 말대로 근대 권력이 국민을 '살게 만들고 죽게 놔두는' 것이라 했을 때,

이 놈의 경찰들은 죽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쓰고 오로지 가족들에게 정보전달자 역할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한다!!!!

 

아, 뭐 이렇게 지극히 현실적인 드라마가 다 있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덧붙임1) 더 생각해 볼 점 하나.

 

가만 보면 이 드라마, 정상적으로 사는 인간이 없다.

대사만 봐도 거의 2/3 이상이 악다구니다.

신애리만 그런게 아니라, 민소희, 구은재, 정교빈, 민건우, 민회장.... 할 것 없이 다 소리지르고 집어던지면서 "복수할꺼야"를 외친다.

 

하지만, 단 한사람만이 '복수'를 말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며 산다.

누구냐고?

바로 얼마전 구강재(구은재 오빠)와 결혼한, 극중에서는 정신연령이 심히 딸리는 장애(이걸 장애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를 가진 것으로 나오는 정하늘(오영실 분)이다.

 

그녀는 가족들이 복수심을 품고 있는 어떤 이해관계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은재, 그리고 은재 오빠 구강재를 열열히 사랑할 뿐이다.

그리고 가끔 교빈이 아들 민호랑 장난감 놀이하면서 논다.

요새는 강재식구들과 떡볶이 장사도 한다.

 

그래서...

결국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악다구니 쓰지 않고 정상적인 감정상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정하늘 뿐이라는 거다. 그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있든 아니든 간에. 오히려 그녀가 정신연령이 낮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지도 모르지...

 

 

 

덧붙임2) 더 생각해 볼 점 둘

 

이 드라마에서 가장 '쎈' 캐릭터는 뭐니뭐니해도 신애리다.

모든 사건은 신애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신애리로 끝난다.

따지고 보면 이 드라마 인기의 최대 수혜자는 장서희가 아니라 김서형일 것이다.

 

그런데 그 신애리의 악다구니의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극이 결말로 치달아가면서 정신나간 정교빈은 다시 은재를 자기 마누라 삼겠다고 설쳐대면서 애리를 떨쳐내려고 하고, 시어머니도 그녀를 빨리 나가주기만을 고대하는데도, 신애리 꿈쩍도 않는다. 오히려 아주 강한 귀소본능을 보인다. "난 누가 뭐래도 천지건설 며느리야!"

 

이야~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며느리도 아니고, 천지건설 며느리랜다.

자본의 인격화된 숭상화!!! 님 좀 짱인듯!!!

그래서 본인은 바라지도 않는데, 정교빈은 다시 천지건설 사장 자리에 앉혀 놓고야 말겠단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며느리 자리로 돌아가고... 그게 원래 자기 자리라는 거다.

 

근데 이상하다.

신애리는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세고,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뭐가 아쉬워서 자기 싫다는 집에 며느리로 굳이 남겠다고 바득바득 버팅기는 걸까?

 

이유는 단 하나, '민호' 때문이다.

그녀는 민호를 아빠 없는, 또는 엄마 없는 자식으로 키우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게다가 민호만 함께 있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쩌면 민호가 이 드라마의 결말을 좌지우지하는

최종적인 지배자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 이 드라마는 '민호'라는 상징으로 대표되는 정상적, 그리고 부르주아적 가족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신애리의 욕망이 극한에 치달으면서 주변인물들과 좌충우돌하는 과정을 그린, 아주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막장' 드라마라고 부를 만큼 거부하고 싶은 현실을 그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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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당원 모임을 시작하며....

다시 학생운동을 고민한다

- 대전시당 학생당원 모임을 시작하며

 

 

 

 

1. 우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나를 법적인 '성인'으로 인정해 준 그 순간부터 유기체적 사회관념을 가지신 높으신 분들의 눈으로 보기에 이 사회의 암세포 같은 일들만 골라 해왔다. 주로 복무해 온 분야는 '학생운동'. 작년 이맘때쯤부터 암세포의 세포분열이 난관에 부닥치자 암세포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2.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는가?

 

 

얼마 전 사무처장님의 제안으로 학생당원모임의 초동주체를 하겠단 결심을 했다. 이 모임이 그냥 학생'모임'인지, 학생'운동'모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정당에서 20대 학생당원들이 모여서 뭔가를 하겠다는 모임이라 했을 때, 그 모임의 모습이 (내가 해 왔던 암세포질과 반대되는) 정상세포의 활동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그간 내가 해 왔던 고민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고 생각된다. 즉 나는 여기서 학생당원모임이 학생운동을 하는 모임이라 했을 때, 그것이 가져야 할 올바른 방향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3. '88만원세대'의 소심한 변명

 

 

작년 촛불집회 이후 전 사회적으로 세대담론이 폭발했다. 주된 화두는 역시나 '촛불소녀'로 대표되는 10대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었지만, 이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얘기는 항상 "동생들이 저렇게 고생하는데 20대 대학생은 대체 뭐하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대다수의 여론은 "몇날 며칠을 토익책을 끼고 도서관에서 씨름해야 하는 88만원세대들에겐 너무 버거운 일"이라는 소심한 항변으로 맞섰다. 즉 취업을 비롯한 경제적인 문제가 대학생들을 옥죄고 있기에 너무 힘들다는 것.

그러나 이런 변명을 '이해' 할 수는 있으나, 100% '동의'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88만원세대를 386세대와 비교 하면서, 386세대의 대학생활은 졸업이후 안정적인 취업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경제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운동에 뛰어들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보다 80년대의 경제적 상황이 비교적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근거에서인가? 게다가 따지고보면 386세대라고 말하는 집단은 사실 그 시절 20대 전체라기 보다는 일부 엘리트 대학 재학생을 지칭하는 것인 반면, 88만원 세대는 20대의 대부분이 대학에 진학하는 작금의 현실에 비춰봤을 때, 20대 전체라고 볼 수 있다. 흔히들 '3저호황'같은 말로 80년대의 경제적 상황을 특징짓지만, 이것도 80년대 말에 가서 나타난 특징일 뿐이고, 오히려 80년대는 79년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사실상 한국에서 최초의 신자유주의 개혁이라 할 수 있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의 자기장 안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에 대한 피해는 오롯이 (최근의 88만원 여성에 비견되는) 여성 노동자 등 하위계층들이 짊어졌고, (그 명칭 자체에서도 대학입학년도가 들어가 있는) 386세대는 이런 위기비용 전가를 피해간 극소수에 해당할 뿐이다.

따라서 두 집단의 단순비교는 불가능하다. 분석의 대상은 <386세대 vs 88만원세대>가 아니라 <80년대 20대 vs 2000년대 20대>로 대체되어야 한다. 분석의 대상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질문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과 다를 바 없이 경제적인 불평등과 억압이 존재했던 20년 전에는 사회변화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게다가 '학생운동'의 주축이 될 수 있는 '학생'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지금, 학생운동이 이렇게 왜소한 이유가 무엇인가?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먹고 살기 힘들기는 386세대를 뺀 나머지 80년대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경쟁을 강요하는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 때는 경쟁 이데올로기보다 더 무시무시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이러한 모든 통속적인 설명은 항상 2%, 아니 20%는 부족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 비어있는 20%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4. 2000년대의 대학사회와 학생운동의 역사적 기원

 

 

내가 통속적인 설명이라고 부른 것들은 대부분 사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경제적 상황, 사회적 분위기 등등. 그러나 여기서 빠진 20%는 바로 대학과 대학사회 그 자체, 또는 더욱 구체적으로 학생운동 그 자체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변화의 출발점은 당연히 80년대이다. 2000년대 대학 현실에 대한 원인을 80년대에서 찾는다고? 오해는 금물, 뭐 내가 족보를 따지고 올라가서 학생운동사의 명인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역사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나는 학생운동이 전체운동의 기능적인 일부분, 즉 시스템 전체에서 하나의 부품으로서가 아니라 전체의 운영원리에 귀속받으면서도 능동적으로 그 시스템에 역반응하는 독립적인 체계라고 했을 때, 그것이 대학과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변화시키려 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지금 대학의 현실은 정확히 90년대 학생운동의 부정적 성과물, 그 자기장 안에 머물러 있다. 90년대 학생운동은 소멸했지만, 그 부정적 효과는 여전히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고, 그것이 지금의 학생사회를 질식하고 있는 한 축이다. 이를 굳이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반지성주의'라고 할 수 있다.

 

 

 

1) 또 다른 지식의 세계를 만들어 낸 80년대

 

 

한국이라는 공간적 특수성을 배제하고 생각해 본다면 대학이라는 공간은 이념형적으로나마 '지식'의 세계를 통해 민주주의를 약속하는 공간이다. 지식의 광대한 세계에 접근함을 통해 시민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존엄성을 인정받겠다는 것은 체계가 약속하는 유토피아를 실제로 획득하겠다는 각 개인들의 의지가 실현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현실속의 대학은 그러한 약속을 수시로 배반하는 공간이다. 오히려 지식의 위상을 그것을 차지하여 계층상승 욕구를 실현하려는 것으로 추락시킨다. 이러한 약속과 배반의 순환은 프랑스 혁명이 약속했던 보편적 시민권의 약속이 역사속에서 지배층에 의해 끊임없이 배반당했던 순환과 정확히 맞물린다.

대학에서 '생산'되어 사회로 '유통'되는 지식이 보편적 시민권이 부정되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대학생은 지식의 보편성, 지식의 진리성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그 끊임없는 의심의 결과, 그들은 대학 그리고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지식의 세계 외부에 또 다른 지식의 세계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우리의 80년대가 바로 그랬다. 광주항쟁은 모든 대학생들에게 그들이 배우는 지식이 학살당하는 민중들의 현실을 조금도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고, 그래서 그들은 다른 지식의 세계를 만들어 갔다. 그 다른 지식의 세계의 중심에 바로 맑스-레닌주의가 있었고, 그들은 맑스-레닌주의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바꿔 나가려 했다.1)

다른 지식들은 교수가 강단에서 지휘하는 강의실에서가 아니라 학회와 써클을 통해 유통되었다. 학회가 1,2학년 학생들의 적극적인 '의식화의 장'이었다면, 써클은 3,4학년들이 또 다른 지식세계를 대중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이런 움직임의 가장 적극적인 표현이 바로 '위장취업', 즉 학출 노동자가 되는 것이었다.

80년대의 이런 활동구조에 대해서는 다양한 비판이 존재한다. 교조적인 이론체계의 답습, 폐쇄적인 조직문화,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인텔리적 습성 등등. 그러나 이런 비판을 어느 정도 수긍한다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실은, 이들의 실천이 '국가공인 지식공장'인 대학에서 해방 이후 처음으로 그 지식생산에 균열을 내고자 했으며 그들 스스로 만들어냈던 독자적인 지식체계를 대중들에게 돌려주면서 민중의 힘으로 사회를 변혁 할 수 있다는 맹아적 가능성을 발굴해 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들을 지탱했던 이론과 이념의 힘이다.

 

 

"저기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단식하며 싸우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매일 쌀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 (SBS드라마 <모래시계>중에서 동일방직 노동자 투쟁을 보고 흐느끼는 한 여대생의 대사)

 

 

"현장에 가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일은 고등학교 때부터 써온 일기를 태우는 일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정리하는 것처럼 했지만, 사실 내용은 과거의 나와 결별하는 것이었다." (김원, "잊혀진 이름, 학출노동자" 중의 인터뷰 내용 발췌, <고대문화> 08년 10월호)

 

 

마음껏 쌀을 먹을 수 있다는 자신의 존재근거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결국엔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고 노동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는게 개인의 순수한 마음으로 가능한 일일까? 게다가 통계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많은 대학생들이 집단적으로 그런 결심을 한다는 것이 말이다.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준, 그들 스스로 만든 이론과 이념의 힘이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2) 90년대 운동의 몰락, 이념의 과소결정

 

 

그렇게 뜨거웠던 열기가 왜 이렇게 쉽게 냉각되어 버린 것일까? 집회와 투쟁, 자유, 행복, 정치적 충만감의 경험, 슬로건과 노래, 말의 격류 ― 누구의 말대로 ‘혁명의 마법’에 취해 있었던 이들은 왜 그렇게 빨리 마법에서 깨어났던 것일까? 이제 다시는 그 ‘광기’(狂氣)의 시대는 오지 않을 거라는 자기부정은 그들 세대를 넘어 지금의 88만원세대들에게 까지 이어져 지금의 세대에게 그런 상상의 기회조차도 거세시키고 말았다.

자기부정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부터 시작되었다. 흔히들 사회주의권의 붕괴, 91년 투쟁 패배, 3당합당을 통한 보수 대연합 등의 이유를 들지만, 이런 것들도 다 외인론일 뿐이다. 그런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어쩌면 그렇게 쉽게 무너져 내렸단 말인가? 그것을 가능케 했던 내적인 이유가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86-87년을 경과하면서 운동진영은 5공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래서 규모있는 대중동원이 가능한 학생운동의 힘에 많이 의존했다. 그래서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 학생운동은 필연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86년 NL노선이 대두하여 학생운동의 주류로 성장한 것을 한국 학생운동이 왜곡되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는 견해는 옳지 않다. 학생회 중심 운동이 먼저 제기되고, 사후적으로 NL의 대중노선, 사람중심 사상이 이에 적합한 운동론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의 사상 자체라기 보다는 그것이 실제로 작동해온 과정에 있다. 그 전까지 학회활동을 하던 학생들은 2학년이 되자마자 각급 학생회의 활동가들로 충원되고, 이들은 자기조직의 이데올로기에 맞춰 조합조직으로서 학생회의 임무와 정치투쟁체로서의 학생회의 임무를 동시에 책임지게 된다. 기존의 ‘학회-써클’이라는 지적공동체가 ‘학회-학생회’라는 틀로 대체되자 그들 스스로 생산해 낸 급진이념은 조직이데올로기 차원으로 제한된다. 학생회 간부가 된 활동가는 학생회의 조직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봉사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이념 자체의 역동성은 감소하게 된다.2)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3, 4학년 때 학생회 선거를 준비하면서 나는 90년대 초반 선배들이 만들었던 선거 자료집, 팜플렛까지 다 뒤져보곤 했다. 그 속에서 그려진 선배들의 활동 모습은 나에겐 거의 로망이었다. 첫 페이지부터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세계 재패전략’을 비판하고, 중간쯤 가면 타 선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이 쏟아진다. 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생의 정치활동이구나! ‘학우들이 무서워서’ 그런 말을 쓰는걸 두려워 했던 나를 포함한 당시 나의 동료들에게 그런 자료집을 보는 것은 매우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 기억한다. 대략 50페이지 안팎 되는 자료집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씨뻘갰던 정치색은 조금씩 옅어지고, 등록금 투쟁, 매점과 식당 개선, 강의평가제 개선 등 학우들의 구미를 당길 공약들이 보물상자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그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세계 재패전략’을 비판하는 것과 식당 밥 개선하는 것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요런 자료집을 맨날 끼고 앉아있던 나는 4학년때 치룬 선거에서 ‘신자유주의에 의해 가려진 성균관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자’는 멋들어진 총기조를 뽑아놓고는(그래서 선본이름이 'Zoom In'이었다) ‘셔틀버스 무료화’라는 강력한 복지공약을 전면에 내거는 코메디를 연출했다. 이러한 지적 교조성과 정서적 대중성의 묘한 공존은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지만,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대중 중심 사상이 불러온 기이한 역설인데, 사실 이는 대중의 지식인화가 아니라 지식인-대중의 분담 관계를 전제한 뒤 그 안에서 둘의 유대를 추구한 NL 주류 사상의 심층의 문제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를 비판한 좌파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들은 NL에 비해 학생회 상층을 얼마나 장악하느냐에 세력재편 구상의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3)

결국 문제는 학생회라는 자조직의 재생산을 중시하는 체계가 ‘학회-써클’이라는 지식공동체를 질식시키면서, 대항 지식인 주체 형성이 중단되고 대학내에 반지성주의의 토양이 확산되었다는 데 있다. 혹자는 80년대 이후 학생운동이 대중과 제대로 융합하지 못하고 쇠퇴한 데에는 과도한 이념에 대한 집착, 즉 이념의 과잉이 문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념의 과소화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외형적으로는 자조직의 이념에 집착해 그것을 확대재생산한 듯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이념의 잉여적 결과물인 대학생 하위문화에 대한 집착이었다.4) 9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대학생 하위문화인 신세대 문화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5)이 나온 것도 90년대 학생운동의 이념의 과소화에 따른 변종일 뿐이다. 나는 그래서 ‘이념의 시대’가 종결되었다고 선언된지도 이제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고리타분하게 다시 ‘이념’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참이다.

 

 

 

3) 2000년대, 반지성주의 그리고 대중의 역습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나는 1학년때 같이 하숙을 하던 고등학교 친구에게 조롱을 받으면서도 학생운동을 부여잡고 6년을 버텼다. 그래서 이 시절의 운동이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고 가슴아픈 기억이지만, 최대한 냉정하게 이 시절을 평가하려 한다.

自繩自縛. 2000년대 학생운동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난 망설임 없이 이 단어를 선택하겠다. 2000년대는 90년대가 만들어놓은 반지성주의라는 척박한 토양을 걷어내지 못하고 학생회라는 비료와 화학약품에 의지해 연명하다가 수시로 ‘대중의 역습’을 받은 시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기억나는 사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직접 보고 겪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에선 거의 악몽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인 ‘00년도 사태’. 2000년에 당선된 총학생회가 등록금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한 달 가까이 대학 본관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총학생회는 여기서 학교 당국의 학생회와 비판적 성향의 교수에 대한 시찰문서를 발견하고 폭로한다. 이에 학교 당국은 점거사태가 계속되면 삼성재단이 대학에서 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재단 철수에 반대하는 일부 학생들은 ASA(Anti Student Association)를 결성하여 총학생회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총학생회가 삼성재단 퇴진을 주장한다는 거짓선전을 하기에 이른다. 이에 학우들 여론이 뒤숭숭해지고, ASA의 총학생회 퇴진 서명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터진 총학생회 사무국장의 공금횡령사건. 결국 이 사건 이후 성균관대에선 총학생회에 운동권이 영영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은 대체로 둘로 나뉜다. 하나는 운동권 총학생회의 극렬 투쟁방식이 문제라는 입장, 그리고 다른 하나는 ASA라는 조직은 학교에서 사주한 어용단체라는 입장. 나는 두 입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의 원인은 이미 학생운동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청년좌파여, 일어나라”라고 외치는 선본 자료집에서 쌩뚱맞게 식당 개선 공약이 튀어나올때 부터 말이다. 부실한 이념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조야한 대중성으로 대중을 현혹하여 수권한 세력(이건 어떤 특정 정파를 일컫는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운동세력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이 결국 대중과의 약속을 기만했을 때, 대중의 역습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가능성이 부정된 상황에서 여전히 그 ‘낡은’(즉 대중의 사상이 되지 못하고 그들만의 조직 이데올로기로밖에 기능하지 못하는) 사상에 기대어 학생회를 통해 자조직을 재생산하려는 세력에게 신뢰를 보내줄 대중은 어디에도 없었다. 맑스-레닌주의가 퇴각하고 생긴 일시적인 이념의 진공상태 이후 온갖 다양한 포스트주의 담론들이 자본주의 상품화와 기묘한 동맹관계를 형성해 대중의 의식을 지배해가기 시작했고, 대통령도 선거로 갈아버릴 수 있게 된 마당에 한 학교의 총학생회쯤을 권력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렇게 이념이 깨끗이 청소된 이후에 남은 것은 모든 종류의 저항적 정치행위에 대한 거부와 악무한적 비난 뿐이었다. 그렇게 학생사회는 앙상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 하나는 버스타고 15분 거리에 있는 고려대학교의 05년 이건희 철학박사 학위 수여 반대 시위. 이 사건은 당시 워낙 언론을 많이 타서 유명한 것이긴 하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05년 5월 2일, 그러니까 노동절 집회가 끝나고 바로 다음날 고려대는 삼성의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식을 진행하려 하고, 이에 반대한 운동권 학생들이 행사장 정문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인다. “노동탄압에 앞장 선 이건희가 무슨 철학박사 학위냐?” 시위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아니 그 반응은 차가워서 더 뜨거웠다. “너희들 때문에 삼성 취직 못하면 책임질래?”, “운동권이 학교 이미지 다 깎아먹는다.”는 내용이 인터넷 게시판을 달궜고, 운동권 학생들은 당황했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시위 참가 진영 중 일부는 “학우들과 소통이 미흡했던 점 사과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고, 이 성명 때문에 참가자들 내부에서 몇 달에 걸친 게시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이 때 당시 우리를 괴롭혔던 가장 큰 문제는 삼성 당국과 보수언론의 역공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습이었다. 대중들에게 사과성명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노동탄압의 전도사에게 철학박사학위는 안된다는 상식적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독한 반지성주의. 자신의 취업과 스펙쌓기에 방해되는 어떤 이념도 용서할 수 없다는 무(無)이념, 아니 반(反)이념의 이데올로기. 그렇다고 우리가 대중들의 그런 반(反)이념 공세에 어떤 분명한 이념으로 맞선 것도 아니었다. 철저한 무방비 상태에서 우리는 이념의 해체를 요구받았다.

 

 

 

4) 기이한 출현, 촛불집회

 

 

이렇게 정치와 이념 전반이 혐오의 대상이 되어가는 동안, ‘새로운 민주주의’라 불리는 것들이 출현했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추모 촛불집회부터 2004년 탄핵반대 촛불집회,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까지, 역사는 2000년대를 촛불의 시대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특히나 작년 광우병 촛불은 쟁점이 끝없이 확장되어 대운하, 민영화, 교육 문제까지 뻗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나 또한 촛불의 민주주의를 한껏 기대하게 되었다. 정치는 혐오받는데 민주주의는 칭송되는 기이한 현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글이 촛불집회의 성격과 전망을 논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말하자면, 정치에 대한 혐오와 촛불의 민주주의에 대한 칭송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촛불은 끊임없이 자신을 정치와는 거리를 둔 순수성의 영역에 안주시키려 했고, 그것은 ‘촛불소녀’라는 캐릭터의 이미지, 유모차 부대 등 여성적 이미지를 통해 재현되었다. 여성의 정치적 진보를 표현하는 듯이 보였던 촛불 속에서도 여전히 여성은 촛불의 비정치성, 순수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6)

나는 물론 ‘촛불’이 ‘횃불’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촛불이 꺼진 지금 촛불이 비추지 못한 ‘우리 안의 타자’들의 문제를 고민하고, 이들에게까지 빛을 비추기 위해 더 많은 촛대와 연료를 모아올 고민을 할 ‘정치’와 ‘이념’의 문제를 우리 앞에 다시 불러오는 문제가 여전히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5. 학생운동,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그래서 학생모임이 될지 아니면 그저 ‘청년학생사업’만 하다가 끝날지 알 수 없는 이 모임에 대해서 내가 너무 잔소리가 많았던 것 같다. 운동에 대한 생각과 경험이 나와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기에 이 글이 마치 나 개인의 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계적 경제위기에 청년들이 모여서 뭔가 해보겠다고 모였으면 무라도 자를 칼 정도는 갈아야 구색이 맞지 않겠나? 사업의 세부적인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중요한 논의는 이런게 아닌가 싶어서 괜한 종이와 잉크 낭비를 해 봤다.

앞에서도 길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세계적 경제위기라는 초유의 사태에 적합한 정치이념을 다시 사유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고루한 이념’은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시켜야 하는 것이다. 학생회 중심주의라는 왜곡된 질서가 질식시켜버린 대항 지식인 주체 형성이라는 학생사회 고유의 기능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를 중심으로 다시 ‘운동’을 재개해야 한다. 나는 이를 편의주의적인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를테면 대학생이라고 그들이 당면한 문제에 초점을 맞춰 등록금 투쟁이나 심지어 학자금 무이자 대출운동에 집중하자는 주장은 학생운동을 ‘중산층 운동’화 할 뿐이라고 본다.7) 학생운동은 당연히도 지식의 세계의 체계적 배반에 맞서 전후방 가릴 것 없이 억압받는 민중을 대변하는 역할을 다 해야 한다. 나는 이를 위해 필요한 이념의 무기가 바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그리고 생태주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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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최근에 알게 되어 깜짝 놀란 사실이 있다. 요즘 대학생들이 토익이네 토플이네, 거기다가 JPT네 하면서 외국어 공부에 열을 올린다고 하지만, 사실 7-80년대 대학생들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외국어 공부의 목적이다. 요즘엔 취업 또는 심지어 일본 애니메이션을 자막 없이 보기 위해서 외국어 공부를 한다하지만, 옛날에는 일본어 등으로 된 자본론을 읽기 위해 외국어 공부를 했단다. 아, 너무 수준차이 나지 않나?

 

2) 장석준, 「필요한 것은 운동이다 : 90년대 학생운동의 비판적 회고와 전망」,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中, 이후, 1998

 

3) 장석준, 같은 글

 

4) 김원,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이후, 1999

 

5) 이동연 외,『대학문화의 생성과 탈주-새로운 대학문화운동론을 제안한다』, 문화과학사, 1998

6) 이상길, 「순수성의 모랄 - 촛불시위에 나타난 ‘오염’에 관한 단상」, 『당신은 왜 촛불을 끄셨나요』中, 산책자, 2009

7) 이런 운동에 메몰되면서 어떻게 임금투쟁에만 메몰되어 조합주의화 되는 민주노총을 비판하고 혁신시킬 수 있겠는가? 특히나 그것을 자기 과제라 안고 있는 진보신당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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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강령 전문(前文) 예찬!!

 

 

 

 

 

 

 

 

 

1. 참된 자유와 만남이 실현된 나라를향해 현실 국가를 끊임없이 지양하는 활동이 정치이다.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형성할 때, 나는 자유이다. 하지만 나는 오직 너와 만나 우리가 될 때에만 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삶의 진리는 만남이요, 자유는 본질에서 사회적이다. 나의 자유는 그 만남의 공동체가 확장되는 만큼 넓어지고, 그 만남의 온전함만큼만 오전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로운 삶을 위해, 너와 내가 평등하게 만나 서로 주체로서 우리가 되고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활동이 바로 정치이다.

사람들의 수많은 만남이 정해진 범위와 형식 속에서 하나의 전체를 이룬 것인 나라이다. 그리고 나라가 역사 속에서 사회적 실체로서 실현된 것이 국가이다. 이처럼 국가는 나라의 현상인 한에서 언제나 불완전하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존하는 국가는 참된 나라를 위해 끊임없이 부정되고 지양되어야 한다.

국가는 그 형식에서 모든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모든 시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그 실질에서, 국가는 모든 시민을 위한 사회공화국으로서 평등과 평화, 공공성과 사회연대에 기반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는 만남의 최종적 전체가 아니므로, 더 큰 전체인 인류공동체를 향해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과의 참된 만남을 위해 생명의 터전인 자연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

 

 

 

2. 오직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의 참된 자유와 참된 만남의 공동체가 가능하다.

 

우리가 나의 자유를 너와의 만남에서 찾지 못할 때, 자유의 주체는 고립된 개인이 되고 객체는 사물이 되며, 둘의 관계는 강제와 폭력이 된다. 사람이 그렇게 홀로 자유의 주체가 되려 할 때, 다른 이를 평등한 주체가 아니라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사물의 욕망에 눈멀어 남을 도구화하는 자는 결국 자기도 사물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자본주의 아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본의 노예이다. 자본이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노동자는 오직 노동력을 파는 것 외에 다른 생존수단이 없는 사회에서노동은 자본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끊임ㅇ벗는 이윤추구를 통해 자기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상품화하고, 자연조차 수탈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 ...)

우리는 이 위기를 오직 자본의 지배 자체를 극복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인류가 이 문제를 새로운 기술이나 시장개척 또는 군사력으로 해결하려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기다리는 것은 인류 문명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과 죽음밖에 없다.

 

 

 

3. 사회연대와 공공성 대신 경쟁의 원리만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는 지옥이다.

 

시대의 위기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전체가 대응할 때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공유된 이상에 따라 사회공화국을 형성하는 것 자체가 미완의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혈연적 유대를 지양하고 보편적 이념에 따라 자유로이 결속할 수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부장적 족보는 신성시되어도, 아무런 공동의 이상도 없는 이 땅에서 국가는 모두를 위한 나라가 아니라 특정 집단에 의해도구적으로 장악된 권력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날 식민통치와 남북분단 그리고 전쟁의 비극이 모두 그런 공화국을 건설하지 못한 것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증식의 도구가 되고, 권력은 독재로 기울며 인간의 자유와 기본권은 억압된다. 그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민중을국가가 적으로 삼아 공격할 때 나라는 내부적 전쟁 상태에 떨어지고, 민중의지지 대신 외세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하려 할 때 나라는 외부적 식민 상태로 전락한다.

연대와 공공성의 원리는 사라지고 경쟁 원리만이 지배하는 곳에서 사회는 양극화되고, 약자는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며, 소수자는 박해와 배제의 대상이 된다. 도처에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빈민들은 생존의 곤간에서 쫓겨나며, 농민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긴다. 만남과 형성의 기쁨 대신 낙오의 공포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민중은 서로 연대하지 못하고 무한 경쟁의 지옥에서 자본의 먹이로 전락한다. 

 

 

 

5. 우리는 한국 역사 속에 이어져온 항쟁의 전통 위에 국가 전체를 다시 세워야 한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민중은 왕조시대부터 식민지 시대를 거쳐 독재 시대를 살아오면서 치열한 항쟁을 통해 자기를 억압과 차별에서 해방시켜왔다. 동학농민전쟁과 3.1운동은 물론 해방 공간에서 통일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각지에서 일어난 민중들의 투쟁 그리고 4.19혁명과 부마항쟁, 5.18 광주항쟁 및 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2008년 촛불항쟁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의 근현대사는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고 안으로는 국가폭력에 맞서 줄기차게 싸워온 역사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독재의 사슬을 끊어내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으며, 우리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임을 안팎에 증명했다.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노동자, 농민운동 그리고 기층 민중운동은 경제적 평등과 사회적 공공성을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여러 시민운동 및 소수자운동은 인권의 지평을 넓히고 생태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을불러일으켰으며 문화적 다양성을 북돋웠다.

그러나 6월항쟁 이래 한 시대가 지난 지금, 그 모든 진보적 성과가 자본의 폭력 앞에서 전면적으로 사라져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 민중의 피맺힌 항쟁으로 얻어낸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자본의 통제받지 않는 착취의 자유로 전도되었다. 고삐 풀린 자본은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언론, 교육, 문화예술 가릴 것 없이 온 사회를 총체적으로 장악하여 국가를 한갓 수탈기구로 만들었다. 인간을 착취와 억압에서 구하고 생명과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부를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새로 세우는 것이 절박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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