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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3/31
    고종석, <코드 훔치기> 중에서...
    구르는돌
  2. 2009/03/30
    반다나 시바,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1)
    구르는돌
  3. 2009/03/21
    정치의 스포츠화? - 대중정치에 대한 소고(2)
    구르는돌
  4. 2009/03/17
    반다나 시바의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중에서...
    구르는돌
  5. 2009/03/14
    관심가는 책 -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2)
    구르는돌
  6. 2009/03/13
    공지영의 <도가니> 중에서...(2)
    구르는돌

고종석, <코드 훔치기> 중에서...

이 책은 아버지가 고물상에 팔려고 여기저기서 주어온 신문지, 중고생 참고서 더미 속에서 발견한 것. 왠지 사회과학책 처럼 생겼길래 일단 챙겨 놨는데, 나름 소득이 있었다. 사실 난 고종석이라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아예 모르고 있었는데,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는 완전 이 사람을 박노자, 진중권, 유시민과 동급의 '논객'으로 쳐 주더라. 사상적으로야 뭐 나랑 크게 겹치는 부분은 없는 것 같긴 하지만, 다음 문장은 쫌 와 닿는다. 그간 내가 생각해 오던 '정치의 스포츠화'라는 명제와도 상통하는 듯. ㅋㅋㅋㅋ

 

 

그리고 기타 등등 여러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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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권력의 중요한 거처는 언론 매체 특히 텔레비전이라고 할수 있다. '매개학(Mediologie)'이라는 학문의 창시자인 레지스 드브레(Regis Debray)는 <유혹하는 국가>에서 기술 혀겸ㅇ이 권력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더듬는다. 드브레는 기술과 권력을 짝지으면서 역사를 세 시기로 나눈다. 첫째는 '언어권'의 시대 도는 구전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다. 그 다음은 인쇄술의 보급과 함께 시작된 '문자권'의 시대다. 마지막은 사진술의 등장과 함께 시작돼 텔레비전과 인공위성의 등장 이후 전성기를 맞고 있는 '비디오권'의 시대다.

언어권의 시대는 마술사-주권자의 시대, 선지자의 시대다. 곧 신권(神權)의 시대다. 근세 초기에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신권과 '말씀'의 자리는 이성이 물려 받았고, 설교의 공간은 공교육이 차지했다. 문자권의 시대는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정치적 논쟁을 유행시키고 공교육을 보편화했다. 그런데 이제 세계는 이 문자권과 본질적으로 다른 비디오권으로 진입했다. 문자권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 본질적으로 상징의 수준에서 이뤄졌다. 태양 문양을 간직한 루이 14세의 문장(紋章)은 권력의 존재를 표상했지만, 권력이 그 표상 안에 있지는 않았다. 반면, 사진의 등장 이후에, 특히 텔레비전의 등장 이후에, 사람들은 살과 뼈를 지닌 진짜 대통령을 현실 속에서 보게 되었다.

옛날에는 정치 담당자들이 소문이나 출판물들의 느린 리듬에 실린 상징들을 통해 국민과 의사를 주고 받았다. 그 상징들은 전통적 교통, 통신의 속도에 실려있었기 때문에,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정책을 다듬고 설명할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감각적 이미지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즉각 시청자에게 도달해서 여론에 영향을 주고, 우리들은 여론조사를 통해 그 여론의 동향을 항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정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오늘날의 대중은 펄펄 살아있는 이미지를원하고, 그 이미지들에 감동 받기를 원한다. 브라운관은 장르 사이의 구별을 지워버렸다. 대중은 스포츠든 문화든 버리어티든 정치든 리얼리티쇼든 가장 인상적이고 자극적인 이미지를 향해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댄다. 그래서 정치는 살아남기 위해 하나의 문화 상품이 되었다. 정치인들은 정책결정과 수행이라는 본업을 제쳐놓은 채, 시시각각 미디어에 볼거리를 공급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시청률 경쟁이 미디어의 논리라면, 미디어에 대한 경쟁이 정치의 논리가 돼버린 샘이다. 장기적인 방향 감각을 가지고 어떤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가치인가를 숙고하는 정치인은 사라지고, 정치 마케팅 논리의 노예가 돼 카메라 앞에 서는 데 골몰하는 정치적 유령들만 남았다. (92-3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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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체제 이래 민주화 운동 시기에 운동 단체들은 흔히 서울의 명동 성당이나 종로 5가의 기독교 회관에서 집회를 열거나 농성을 벌였다. 종교의 위엄이 배어 있는 곳이어서 공권력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공권력이 명동 성당이나 기독교 회관에 들어가길 망설인 것은 꼭 그 곳이 거룩한 곳이어서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작용하고 있는 종교의 실질적 힘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제 6 공화국 이래 민주화가 진척되면서도 종교 시설은 노조나 운동 단체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1993년의 지하철 노조 파업 때 노조 지도자들은 기독교 회관에서 농성을 벌였고, 1995년의 한국 통신 노동쟁의 때 노조 지도자들은 명동 성당과 조계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바로 그 1995년의 한국통신 노동쟁의 때 경찰이 명동 성당과 조계사에 들어가 노조 지도자들을 연행하자,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여러 종교 지도자들은 공권력의 '성소' 침입을 강력히 비난했다. 신자들과 일반 시민들도 입을 모아 '성소'가 짓밟혔다는 점을 개탄했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이런 비판은 근거가 약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판의 각도가 잘못된 것이다. 만약에 노조나 운동 단체의 집회나 농성이 정당한 것이라면, 그 집회나 농성이 어디서 열리든 공권력에 의한 강제 해산이나 연행은 부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집회가 부당한 것이라면, 그것이 종교 시설에서 열렸다고 하더라도 공권력의 투입은 정당한 것이다. 말하자면 법의 집행은 일반적이 되어야지, 예외를 남겨서는 안 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리 가운데 하나인 세속주의다. 종교 단체의 관련 건물이라고 해서 치외법권을 누릴 수는 없다.

물론 공권력의 집회 해산이 합법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구정한 법 자체가 악법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그 법의 개폐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 종교단체 관련 건물을 치외 법권 지역으로 남겨 두는 일이 아니다. 요컨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성스러움을 이유로 법의 적용을 면제받는 공간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한국통신 노동쟁의 당시 공권력이 정작 비판 받았어야 할 점은 초기의 준법 투쟁 당시부터 검찰이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가 자신들이 각자 쓴 복음서에서 전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예수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느냐 아니면 그래서는 안되느냐를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세금으로 내는 돈에 새겨진 초상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그 초상이 황제의 것이라고 바리새인들이 대답하자 예수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치라"고 말했다. 물론 신약의 복음서들이 묘사하고 있는 이 장면은 미묘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그 질문을 한 것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다. 예수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이민족의 유태인 지배를 당연시한다고 비판할 참이었고, 예수가 그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하면 바리새인들은 로마 사람들에게 예수를 위험한 선동가로 고발할 참이었다. 이런 악의적 질문에 예수는 멋들어지게 반격을 한 것이고, 그래서 예수의 이 대답이 담고 있는 참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가 갈린다. 그러나 예수의 이 발언이 일차적으로 뜻하는 것이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기독교의 창시자가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얘기하면서 세속주의를 지지한 것이다.

명동 성당에 공권력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런 세속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이 곳이 민주화의 성소로 추앙받던 특별한 시기에 그런 예외가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그것이 법의 일반성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가서는 안 된다. (109-111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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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슨이 이 책(<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지 30년 쯤 지난 뒤,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1994)에서 노동자가 이상한 방식으로 노동의 고역과 착취에서 해방되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18세기에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결정적으로 거든 것이 기계였듯이, 미래 세계애서 그 착취를 사라지게 할 것도 기계다. 그러나 노동자가 착취에서 해방된 세상, 리프킨이 그리는 그 '노동해방'의 세상은 고래의 혁명가나 반역자들이 꿈꾸어 왔던 평등한 세상이 아니다.

<노동의 종말>은그 책 한 장(章)의 제목대로 '노동자 계급을 위한 진혼곡'이다. 리프킨이 그 책에서 우울하게 전망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 없는 세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동화를 핵심으로 진행된 제3차 산업혁명에 따라, 로봇화된 컴퓨터 시스템이 궁극적으로는 지금의 노동자들을 대치하리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 지능 기계는 이미 제조업 분야의 블루 칼라 노동자들에게서 많은 일자리를 빼앗았고, 그것은 점차 서비스 분야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실상 새로운 컴퓨터 기술을 적용하기 위한 작업장의 리엔지니어링으로부터 가장 커다란 타격을 입은 계층은 중간 관리자들이다. 전통적인 조직 위계에서 위아래의 작업 흐름을 조정해왔던 중간관리자들의 역할을 컴퓨터가 무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능 기계는 의료나 법률 상담 같은 전문 분야나 심지어 예술창작에까지 파고들고 있다. 노동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생산성은 점점 높아진다. 그것은 인사 관리를 짜증스러워하면서도 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경영자에게는 꿈같은 세상이다. 노동자가 줄어든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노동자 계급은 그들의 역사가 목격해본 적이없는 기괴한 방식의 세대 교체를 겪고 있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자리를 물려받을 그 신세대 노동자는 플러그가 끼워진 종족, 리프킨이 '실리콘 칼라'라고 부르는 기계 노동자다. 이 실리콘칼라 노동자는 하루 스물네시간계속 노동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고, 배고픔이나 피곤을 느끼지도 않는다. 불평도 하지 않고 노동조합도 만들지 않는다. 이런 세대 교체에 따라 가장 중요한 생산 요소로서의 인간의 역할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데모크라시(인민의 지배)를 대치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 테크노크라시(기술의 지배)는 리프킨이 보기에 기술 유토피아가 아니라 기술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최초의 목화따는 기계가 미국 남부의 흑인들을 농장 겨제의 착취로부터 '해방'시켰을 때,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북부 도시의 산업 프롤레타리아로 변신해 제조업 분야로 흡수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 1차 산업에서 서비스 부문까지 생산 활동의 전 영역을 감당하고 있는 실리콘 칼라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21세기의 노동력은 어디로도 흡수되지 않는다. 이 노동자들이 재교육을 통해서 다가올 세계의 엘리트 직업 집단인 물리학자, 컴퓨터 과학자, 분자생물학자, 경영컨설턴트 등으로 거듭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리프킨이 '새로운 세계인'이라고 부르는 이 미래의 엘리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시간은 넘쳐나고 일은 없다. 이제 노동자들은 더이상 착취당하지 않는다. 그들으 쓸모없는 존재로서 무시당할 뿐이다. 중산층이 와해되고 실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테러를 비롯한 폭력범죄가 기승을 부릴 것이고 그에 따라 세상은 점점 더 살기 위험한 곳으로 변할 것이다. 외국인 혐오증이 파시즘의 토양을 만들 수도 있다.

이 우울한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리프킨이 제시하는 방도는 두 가지다. 첫째는 기술진보의 열매를 공정히 나누기 위해 생산성의 향상을 노동시간의 단축과 임금의 지속적인 인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시장부문에서 축출된 사람들에게 자원봉사나 공도체  서비스를 포함한 제3부문의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정부가 노력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흔히 '사회적 경제'라고 부르는 이 제3부문은 비영리적 공동체 활동을 뜻한다. 공공 부문도 시장 부문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제3부문이라고 불리는 이 영역은 일본에서는 흔히 공익법인이나 사회복ㅈ법인이라고 불리는 자선단체나 사회복지 조직들의 활동으로 이뤄지고, 요새 유행어로는 NGO활동의 일부를 포함한다. 리프킨은 이 제3부문이의 활성화가 노동의 종말 이후의 세계를 파국에서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구체적으로 자원봉사에 대해서는 정부가 세금 공제의 형태로 그림자 임금을 제공하고, 공동체 서비스(비영리 조직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복지 지출의 대안으로서 사회적 임금을 제공하라고 제안하고 있다. 제3부문은 리프킨이 보기에 '포스트-시장시대'의 실업자들을 흡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감과 연대의 식을 함양함으로써 공동체의붕괴를 막을 수 있다. 그러니까 제3부문은 사회를 결속시키는 박애의 산실이 될 수 있다. (150-15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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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예감했고 슘페터가 '혁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명료하게 이론화했듯, 모든 생산체계는 결국 과학기술의 진보에 기댄다. 그리고 그 과학기술의 진보가 이뤄지는 것은 늘 시행착오를 통한 배움에 의해서다. 시행착오를 통한 배움은 말을 바꾸면 실패를 통한 배움이다. 그런데 살로몽에 따르면, 우리가 살아온 산업사회에서 그 시행착오를 통한 배움, 실패를 통한 배움은 '파국을 통한 배움'의 형태를 띠게 됐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제어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그래서다. (1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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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문화의 주체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에 사회주의 정권들이 들어선 뒤부터다. 진보의 열정으로 무장한 이 새로운 정권 담당자들은 문화에서 선전/선동의 힘, 새로운 인간형을 창출할 수 있는 거푸집의 역할을 발견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함께 문화는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적극적인 '정책'의 대상이 되었고, 당과 정부에 설치된 문화 부서들은 흔히 선전/공보 부서를 겸하고 있었다. (...)

퓌마롤리는 프랑스를 '문화 국가'로 만든 가장 큰 책임을 드골 정권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와 미테랑 정권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자크 랑에게 돌린다. 앙드레 말로가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하기 전까지는, 프랑스 국가는 정치적, 사회적 사업을 지도하는데에 만족하고 예술 창작자들과 예술 애호가들을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말로 이후로, 특히 자크 랑 이후로, 국가는 진정한 '문화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틀어쥐고 그것을 자기 선전이나 대중의 여가 조직의 도구로 사용해 왔다. 그 결과 문화는 일종의 국교(國敎)가 되었다. [문화 국가]의 부제가 '한 근대적 종교에 대한 에세이'인 것은 시사적이다. (...)

저자에 따르면 문화 국가의 기원이 되는 이데올로기들은 1870년대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가톨릭 교회에 맞서 수행한 문화 투쟁, 20세기 들어 좌파 지식인들을 매료한 마르크스주의 예술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시 정부하에서 민족의 문화적 중흥을 외쳤던 '청년 프랑스'운동, 문화를 프랑스 민족의 '세포조직'으로 만들어버린 말로의 메시아적 꿈 같은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일종의 '문화당' 안에서 화해하고 혼합돼, 권력을 틀어쥐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앙드레 말로는 1959년에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문화를 배급하고 전세계에 프랑스 문화를 선양하는 국무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 경건한 바람의 면사포 안에는 불길한 현실이 숨겨져 있었다. 프랑스의 예술과 문학은 무엇이 '문화적'이고 무엇이 '비-문화적'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부여받은 한 줌의 문화 관료들에게 차압되었다. 이 경향은 자크 랑이 문화부를 맡았던 시절에 더 심회되었다. 퓌마롤리에 따르면, 이 시절의 프랑스는 파리의 문화적 성직자(곧 자크 랑)가 자신의 초현대적인 광기로 전체주의 국가에나 얼루릴 법한 전시 문화 행정을 전국토에서 수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퓌마롤리는 여기서 랑 시절의 프랑스에서 건축된 수많은 대형 건조물들과 끊임없이 조직된 떠들썩한 문화 축제들을 지적하고 있다. (...)

'문화 권력'은 무대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프랑스라는 '스펙터클 공화국'에서 유명해지고 싶은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서임(敍任) 장소로 삼는다. 당연히, 텔레비전은 신성함의 아우라를 부여받았다. 이 상설쇼의 가장 큰 패배자는 책과 대학이다. 책들은 이 '문화의 슈퍼마켓' 안에 진열된 수많은 무화 상품들 가운데 가장 눈에 안 띄는 곳에 처박혀 있다. 예전엔 진정한 앎에 접근하는 통로였던 대학은 이제 '문화 관광'을 위한 공간들로 대치되고 있다. 이 공간 안에서 국가는 '모두를 위한 문화'의 신도들로 변한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면, 할인판매와 자기 자랑에 열중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문화 국가'의 가장 걱정스러운 대목이라고 퓌마롤리는 말한다. 즉 문화 국가는 '집단적 여가활동의 정치 경제학'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의 문화는 여가활동이나 취미생활로 변했고, 프랑스의 문화 공간은 일종의 라스베가스로 변했다.

 

(213-216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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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창세기에 따르면 신(神)은 빛을 만든 지 닷새째 되는 날과 엿새째 되는 날에 사람을 포함한 온 갖 생명체들을 창조했다. 오늘날 성성의 이 부분을 곧이곧대로 믿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그들은 찰스 단위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난 세기 중반까지는 인간이 생명의 창조에 간섭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과학자들도 거의 없었다.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든 자연의 질서라고 부르든, 생명은 특히 인간의 생명은, 어떤 무제약적 존재의 소관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넘볼 수도 없고 넘보아서도 안 되는 거룩한 영역이었다. 인간이 그 성역 안으로 불경스러운 첫걸음을 내딛은 것은 1953년이다. 이 해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생명복제의 신비를 간직한 세포 내 디옥시리보핵산(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밝혀냈다. (...)

인체게놈 사업은 우선 의학의 중요한 기능을 치료에서 예측으로 바꾸어놓을 것이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생물학적 운명을 높은 확률로 미리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체게놈 사업은 인류의 지성사를 관통한 선청성 대 후천성(nature versus nurture)논쟁에서 전자의 손을 들어주며 생물학적 결정론, 곧 유전자 결정론을 널리 유포시킬 것이다.

 

(299-300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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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나 시바,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요즘 사람들이 나에게 뭐에 관심이 많냐고 물어보면 서슴없이 '생태주의'라고 말한다. 그래, 나는 생태주의자다. 그 전까지 나는 '어렴풋이' 맑스주의자였고, '희미하게' 알튀세르주의자(??) 였는데, --왜냐면 사실 나는 이 사람들이 '직접' 쓴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복잡하고 꼬불꼬불한 해설서들만 읽었을 뿐... -- 이제는 자신있고 분명하게 나를 ~~주의자 라고 소개할 수 있다. 나는 '생태주의자'라고!!

 

그렇다고 내가 '생태'라는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게 오래된 일도 아니다. 작년 금융위기와 함께 불어닥친 식량위기, 먹거리위기 등을 접하면서 생태위기를 인식할 수 있는 길들이 조금씩 엿보이기 시작했고, 그런 길들을 조금씩 따라가다보니 생태주의라는 신비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생태주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니 맑스주의도, 알튀세르주의도, 나아가 페미니즘도 나의 시선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생태주의는 나에게 '빛'과 같은 존재다. ㅋㅋㅋㅋ

 

 

이런 생각에 쐐기를 박아 준 책이 바로 반다나 시바의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이다.

 

내가 기존에 읽었던 생태주의에 관련된 책들이 생태계 파괴에 자본주의라는 구체적인 생산체제가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분석했다. 그런데 시바의 이 책은 한 단계 더 들어간다. 이런 생태파괴를 가능했던 자연과학이 밑바탕에 깔고 있던 철학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것이다. 바로 근대과학의 '환원주의'말이다. 생명공학은 그런 환원주의가 낳은 이 시대의 '괴물'이다.

 

이런 논의 속에서 그녀는 최근의 생명공학이 여성의 모성에 대한 권리를 파괴하는 사례들을 들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에코 페미니즘'에 대한 주장을 펼쳐낸다. 생태주의를 매개로 근대과학비판, 페미니즘, 자본주의 농업 비판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정말 내공이 장난 아니다!!!

 

 

이 정도 찌질한 서평으로는 이 책의 위대함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빨리 내공을 쌓아서 더 잘 표현해 봐야지... 이제 본격적으로 생명공학 비판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다음 도전 상대는 리처드 르원틴의 이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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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스포츠화? - 대중정치에 대한 소고

좀 전에 저녁을 먹으면서 TV를 보는데, <무한도전>에서 '전국 돌+아이 선발대회'라는 걸 하더라. 얼마 전에 1차 예선을 했고, 오늘은 본선이라던가? 여튼 뭐 전국에 노홍철틱한 사람들 다 모아놓고, 그야말로 '또라이'들의 축제를 벌이더라.

 

나도 거의 정신을 놓고 국가대표 또라이들의 '또라이짓'을 넋놓고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저 넋을 넣고 볼 수만은 없는 장면들이 보였다. 약간 쌩뚱맞지만 이 얘기를 시작으로 오늘 날 남한사회에서의 대중정치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한바탕 또라이짓이 끝나고 장면이 방송국 스튜디오로 바뀌더니 이제 '전국 돌+아이 연합회 창립총회'를 하겠단다. 총재는 노홍철. 양 측면에 연합회의 전국회원들이 각자의 개성에 따라 '돌+아이'짓을 하며 총재님을 연호한다. 창립총회의 사회를 보던 유재석은 총재님의 기념사가 끝나자 귀빈으로 초대된 박명수에게 축사를 부탁한다. 그런데 박명수 왈, "저는 지금 이 행사가 맘에 들지 않아요.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이런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네요. 이런 1%의 사람들을 위해서 전파를 낭비해서 되나요? 이 1%를 제외한 대다수의 저와 비슷한 보수층들은 이 행사를 원치 않아요!" 박명수식 호통개그로 받아친다. 이에 노홍철 총재는 회원들에게 야유를 선동한다. 일순간 모든 회원들은 보수논객 박명수를 향해 팔뚝질을 하며 "물러가라"를 외친다.

 

그리고 이어진 전진과 정형돈의 축사. 우선 전진이 선빵을 날린다. "저는 박명수 의원(?)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이 행사는 참 뜻깊은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톤을 이어받은 정형돈 왈, "저는 여러분들이 진정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발언에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물론 다 웃자고 하는 짓인거 안다. 덕분에 나도 주말 저녁에 밥먹다 말고 실컷 웃었다. 그런데 위에서 보여진 장면에서 출연자들이 얼핏 드러낸 보수와 진보(='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물론 출연자들이야 별 뜻 없이 한 소리겠지만) 나에게 밥 숟가락을 놓을 때까지 밥알을 씹는 횟수만큼 '정치'의 의미를 곱씹게 만들었다. (우선 미리 전제를 깔아두자면, 여기서 내가 주장하는 위 장면에 대한 해석은 그저 상징분석일 뿐이다. 그러므로 <무한도전> 출연자들의 발언 의도 같은거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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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돌+아이 연합회 회원들은 노홍철에게 광기어린 신앙을 보여준다. 정형돈은 이들을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고 찬사를 전한다. 그리고 박명수는 이들은 단지 1%에 불과한 소수일 뿐이라고 한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 듯 하다. 작년 5월, 수십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이명박 탄핵을 외쳤고, 이명박은 이들은 그저 소수의 사람들, 또는 그들에 의해 선동된 '정신나간' 사람들로 보았다. 아마도 이명박 눈에는 군중의 행동이 마치 노홍철과 그의 신도들이 벌이는 것과 같은 '돌+아이'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한 마디로 '집단광기'라고 말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정형돈이 그런 것처럼 이 집단광기에 찬사를 보냈다.

 

물론 작년 그 찬란했던 촛불에 대해 '집단광기'라는 말로 일갈해 버린다면, 조갑제 일당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 둘 것은 나는 '집단 광기'라는 말에 대해 별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물론 '돌+아이'짓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 내가 좋아하는 연구자 중 한 사람인 김원씨는 그의 책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에서 졸버그의 표현을 빌어, 80년대 남한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을 '광기의 역사'였다고 표현한 바 있는데, 나는 그 표현에 잠시나마 전율을 느낄만큼 감동했었다. 뭐 더 고상한 표현을 찾자면야 그 당시 대학생들만이 공유했던 집단 지성의 문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 또한 분명히 폭압적 근대로의 전환을 겪었던 8년대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던 '이성'의 스케일로는 도저히 포용 불가능한 비이성의 사건, 즉 '광기의 역사'였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종류의 광기에서건 '광기와의 거리두기'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비록 지나간 역사이지만 80년대 학생운동에 대해 찬사만이 존재하지 않고, 반성적 거리두기 또한 존재하는 것일테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런 반성적 거리두기가 지나간 역사에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이 곳에서의 대중운동이 그저 '광기'로만 남지 않기 위해서도 '광기'와의 아슬아슬한 거리가 요구된다. 그 팽팽한 긴장의 간격을 유지해 주는 것이 바로 지성과 이론의 힘일 것이다. 그 지성과 이론의 인력이 혼돈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려는 광기의 관성의 힘을 끄잡아내어 '역사의 정방향'을 찾아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 나가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우리의 80년대 이후의 역사가 비록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수줍게라도 '민주주의'라는 말을 꺼낼 수 있게 한 것일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년 5월은 물론이고, 아직 촛불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금에도 이런 '비판적 거리두기'의 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광기의 귀환'만을 목을 놓아 기다리고 있을 뿐이고, 반대로 이명박과 그의 일당들은 충격요법으로 머리를 백지상태로 만들어 버려 정신병을 치료한다는 미국의 한 정신과 의사마냥 양 손에 전기충격기를 들고 항시대기하고 있을 뿐이다. '광기'와 그것에 반대하는 '광기'의 대립.

 

그런데 여기, 이 두 '광기' 사이를 비집고 욕먹을 각오하고 이론의 얼굴을 내민 자들이 있다. 저자들에게 들은 바는 없지만, 이들은 분명 '욕먹을 각오'를 했음이 틀림없다. 원래 흥분한 상태에서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잰채하며 깍쟁이마냥 바른 소리 하는 사람들은 양쪽으로부터 모두 공격받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그런 말을 한다. 쫌 용감하다. 바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 2009)의 저자들이다.

 

 

 

 

당대비평 기획위원회의 주도로 출간된 이 책에서 저자들은 "촛불을 통해 '지금 우리는 어떤 식으로 정치를 사유하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조망"하고자 한다. 그래서 " '웹2.0세대의 민주주의', '다중과 직접민주주의의 장엄한 출현'등 인상적 비평과 비난에서 벗어나, '기억의 자리'로 물러난 듯 보이는 촛불을 다시 혹은 전혀 새롭게 반성"하자고 말한다.

이 책에서 앞서 언급한 나의 주장과 가장 일맥상통하는 것은 바로 백승욱 교수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촛불집회를 분석하는 이론들이 보여주는 ‘낙관주의’는 매우 우려스럽다. 이론은 촛불집회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자율성의 낙관적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그 자율성이 넘어서지 못하는 경계들을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그 한계를 드러내는 입장을 채택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론은 늘 오히려 ‘비관주의적’이어야 하며, 대중에 대한 상찬으로 가득한 이론적 낙관주의는 결국 대중 스스로 환상에 빠져들게 하고 정세의 엄혹함을 회피하게 만드는 알리바이에 불과할 수 있다. 더욱이, 정세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기초해, 절망 속의 대중들이 표출하는 탈정치화의 전망을 대중적 봉기로 오해해서는 안 되는 시점에 등장하는 이론적 오해는 대중에게 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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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욱 교수의 이 발언이 담긴 글의 제목은 "경계를 넘어서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이다. 그런데 나는 '경계를 넘어 연대로 나아가는' 문제는 일단 살짝 미뤄두고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가 따로 있다. 그가 여기서 말한 '경계'라는 것은 촛불 내부에 그어진 경계, 그러니까 촛불을 든 순수한 시민과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또는 운동권을 비롯한 온갖 단체 회원 등을 가르는 경계를 말한다. 만약 그 경계를 꼭 넘어서야만 하는 것이라면,  촛불은 왜 그것을 넘어서지 못했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그래서 다음 기회에는 꼭 그 경계를 넘어서도록 디딤돌을 놓아주어야 한다. (혹시라도 촛불은 그 경계넘기에 실패했으므로 앞으로 벌어질 경제위기에 맞선 대중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촛불에게 안녕을 고한다면 이보다 더 무책임한 행동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소위 '대중없는 사회주의자'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딱 한가지, 한국사회의 아주 '개성있는' 정치문화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여기서 내가 겪은 사례 하나를 더 얘기해야 겠다.

약 두 달 전 쯤인가? 미네르바가 체포되고 사회 전체가 들썩일 당시, 나 또한 이 문제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MBC <100분토론>에서  이 문제를 다뤘고, 나는 근무하는 중에 한가한 틈을 타 인터넷 다시보기로 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 때 내 옆을 지나가던 나보다 나이가 3살 어린 동생이 지나가면서 뭐 보냐고 묻는다. 나는 어제 방송했던 <100분토론>이라고 말해 줬는데... 그 아이 하는 말 왈, "누가 이겼어요?" 나는 이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순간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대답해줬다. "야, 토론에서 이기고 지는게 어딨어? 다 서로 다른 의견 주고받는 건데..." 그러나 그 놈은 또 말한다. "에이,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나는 며칠동안 생각했다. 분위기? 대체 이 놈이 말한 분위기라는게 뭘까? 궁리 끝에 내가 내린 답은 이렇다. 그것은 "누가 말빨이 더 쌨냐"는 거다. 분위기 상으로 누가 더 상대방에게 맹공을 퍼붓고, 누가 더 선정적인 용어 사용으로 상대를 압도하는지, 그래서 누가 더 카메라에 얼굴을 더 많이 비춰 분위기를 '주도'하는지가 이런 방송용 정치토론에 관전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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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정치의 스포츠화'라고 명명한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100분토론 같은 프로그램 보는 것이 마치 WBC 생중계를 보는 것과 별 다른 점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잠깐 방향을 틀어서 '정치의 상품화'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87년 항쟁이 낳은 미완의 성과인 '직선제 개헌'은 많은 후과를 남겼다. 여기서 주목해 볼 후과 중에 하나가 바로 정치적 주체의 무게추가 군부세력에서 대중 그 자체로 옮겨진게 아니라 오히려 미디어로 옮겨진 것이다. 특히 2000년도 이후 선거에서는 옥회 연설회가 금지되고 미디어를 통한 선거광고가 대폭 허용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 증폭되었다. 그리고 대략 97년 대통령 선거에서 DJ가 'DJ와 함께 춤을'로 재미를 본 이후, 대중가요나 유명 연예인들의 얼굴이 선거에 적극적으로 이용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선거에서 대중의 능동적 참여가 배제되고 단지 표 찍는 기계가 되어버리면서, 선거운동은 갈수록 더 많은 표를 '벌기 위한' 판촉행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런데 상품화라는게 어딜가나 그렇듯이, 전국의 어떤 편의점에 가도 똑같은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것처럼, '정치의 상품화'로 인해 전국에 어떤 선거구에 가더라도 정책이라는 것은 어딜가나 고만고만하다. 그렇게 4년에 한번, 또는 5년에 한번 열리는 장날마다 불티나게 팔리는 상품이라는게 고작 '개발'과 '성장'이라는 신기루 같은 것 뿐이라는게 비극적인 사실이지만...

 

이로써 한국사회에서 정치참여의 가장 기본적 주체로 여겨졌던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소비자'로 재포장된다. 물론 소비자라고 해도 보통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상품사회의 소비자와는 다른 점이 있다. 어찌되었던 정치상품 시장에서는 '1인1표'의 원칙, 즉 평등선거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도 따지고 보면 교과서 상에서만 통하는 얘기고, 선거날에도 일하지 않으면 생계가 위태로운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투표권은 사실상 박탈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작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 때 공정택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휴일도 아닌 날에 시간내서 투표할 여유 있는 사람이 강남 부자들 말고는 별로 없었기 때문 아닐까?

 

이렇게 정치적 권리를 가진 시민이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행동권이 '투표권' 밖에 없고, (이제  1인 시위도 맘대로 못하게 하니 뭐...) 이것 마저도 행사할 수 없는 사람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관전'하는 것 뿐이다. 내가 직접 배트를 잡아보진 못해도, 내가 동일시 하는 대상이 배트를 잡고 홈런을 치면 미친듯이 열광할 권리는 있는거다. 그러나 경기는 관중이 아니라 감독과 선수가 하는 거다. 관중이 열심히 응원하면 선수들이 어느정도 힘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야말로 '어느정도'까지 인 거고, 그걸 넘어서는 범위에서는 관중의 역할은 없다.

 

그렇게  관전에 매몰된 관중들이 승패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장 안에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의 최대치일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진중권, 신해철 등 소위 '말빨 되는' 논객들의 등장은 게임의 열기를 달궈준다. 그러나 이들과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의 등장이 결국엔 관중들에겐 펜스 너머 필드에 더욱 목매게 하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관중석의 부실한 정치적 토양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는 것에 일조한다는 면에서 대중정치 발전에는 독(毒)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의 가장 부정적 인 효과는 사람들을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 가둬 놓는다는 것이다. 손석희를 중심으로 양 편으로 갈라진 패널과 방청객은 진보 아니면 보수, 그 외엔 없다. 이런 게임 속에서 사람들이 정치적 문제를 다양하게 사고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봉쇄되는 것이다. 그나마 <100분토론>은 양반이다. <100분토론>을 따라잡겠다고 SBS에서 만든 토론 프로그램을 보니까 뒤에 방청객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상대편 패널의 발언이 맘에 안들면 야유도 퍼붓고 갑자기 일어나 자기 얘기 막하고 그러더라. 경기를 자기 뜻대로 움직일 권한이 없는 관중들이 '훌리건'으로 변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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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위 아고라 폐인들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집단광기를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금과 같은 한국사회에서 집단 광기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80년대 남한 학생운동이 보여준 광기와 야구장의 훌리건들이 보여주는 광기는 분명 다른 것이다. 우리가 훌리건의 광기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결국 노홍철을 교주로 삼는 '돌+아이'식의 종교적 광기로 수렴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정치가 코메디화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전혀 웃기지도 않고 그런걸로 웃는데 시간 보내기에는 세상 살기가 너무 팍팍한 사람들은 어쩌나? 한판의 코메디가 끝나고 들려오는 것은 학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목숨을 끊은 어느 대학생의 이야기와 같은 것들 뿐이다. 진중권이 '집단적 유희'로 가둬지길 원했던 그 촛불이 꺼지고 난 바로 직후에 말이다. 어차피 촛불이 집단적 유희로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으니 이미 예상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1848년 프랑스에서의 혁명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시험무대였고, 1968년 5월 혁명이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 몰락의 예행연습"(김정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중에서) 이었던 것처럼, 촛불항쟁도 전례없는 경제위기에 맞선 대중운동의 새로운 순환의 출발점이 되려면 이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상황을 넘어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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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나 시바의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중에서...

로크(John Locke)는 자신의 글 "재산에 관한 논고"에서 유럽의 엔클로자 운동 기간 동안에 똑같이 일어났던 절도와 도둑질 과정을 효과적으로 정당화하였다. 여기서 로크는 자본주의가 건설해야 할 자유는 곧 도둑질할 자유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로크가 보기에, 재산이라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자원을 가져와서 이것을 노동과 결합시킴으로써 창출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동'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의 통제 안에서 드러나는 '영적인' 형태로서의 노동이다. 로크에 의하면 자본을 소유한 자만이 자연자원을 소유할 자연적인 권리를갖는데, 이 권리는 다른 사람들의 공동권리를 자신들의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따라서 자본은 자유의원천으로 규정되는 동시에, 자본이 자기 것이라고 선언한 토지, 숲, 강, 생물 다양성에 대한 자유와, 자신들의 노동에 근거한 권리를 갖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부정한다. 사유재산을 공동재산으로 돌려주는 것은자본 소유자의 자유를 빼앗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자원에 대한 자신의 권리와 접근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하는 농민과 부족들은 도둑으로 간주된다. (19-20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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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이런 무엇인가? 이 질문은 생명에 대한 특허를 두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핵심적인 주제이다. 생명에 대한 특허는, 자기조직할 수 있는 자유를 통해 생식, 증식하는 유기체에 내재해 있는 창소성을 사유화(enclose)한다. 이는 여성, 식물, 동물 육체의 내부공간을 사유화한다. 또 이것은 공적으로 창출된 지식을 사적 재산으로 변홤시킴으로써 지적 창조성의 자유스런 공간을 사유화한다. (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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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소설 같은) 대중적 신화가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이 과학자들이 개방적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특허보호를 추구하는 상업적 기업들과 함께 일하는 과학자들이 과학적 의사소통에 대해 가하는 위협은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저명한 핵생물학자 엡스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거에는 동료들이 때때로 서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섬광계수기(scintillation counter)나 전기영동장치(electrophoresis cell)와 같이 방금나온 따끈따끈한 최신 연구결과들을 공유하고, 논문초고를돌려보는 열정적인 연구 분위기 속에서 서로 친구처럼 지내고 처신하는 거시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곡물 개량)에 대한 희망적인 새로운 관점을 가진 UCD(캘리포니아 대학 데이브스 분교)의 과학자들도, 데이비스에 있는 곡물 유전자 관련 분야의 두개 사기업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라든가 혹은 이런 관련자들에게 말할 수도 있는 자기 동료들에게 자신들의 이런 새로운 관점에 대해 털어놓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금기가이미 캠퍼스에 퍼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케니는 산학복합체 내에서 나타나고 있는 고하가적 개방성의 폐쇄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도둑맞거나 어떤 사람의 작품이 상품으로 바뀌는 것을 보는 두려움은 동료라고 생각되었던 사람들을 침묵하게 한다. 어떤 사람이 만든 것이, 그에 대한 어떤 통제력도 가지지 않은 누군가에 의해 판매를 ㅜ이한 생산물로 바뀌는 것을 볼 때 능욕당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일에 대한 사랑은 평범한 상품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 일은 시장가격을 기반으로 해서 교환되는 물품이다. 돈이 점차 과학발전의 가치를 중재하는 결정자가 되어가고 있다.

과학에 비밀이 도입되면서, 지적 재산권과 이와 관련된 지식의 상업화, 사유화는 과학공동체를 고사시키고 그에 따라 창조성의 잠재력까지 말살할 것이다. 지적 재산권은 창조성의우너천 자체를 죽여가면서 창조성을 착취한다. 저수지가 물을 계속 공급받지 못하면 곧 말라버린다는 자명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나무의 뿌리에 영양이 공급되자 않으면 그 나무는 죽는다는 것도 상식이다. (39-41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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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주의적 생물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구조와 역할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도못하면서 생명체들과 그 기능들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해 버리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몇몇 농작물과 나무들은 '잡초'로 규정되어 버리고, 삼림과 가축 품종들은 '불필요한것들'로 선언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을 다 파악하지 못한 DNA는 '정크 DNA'로 불린다. (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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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에 대한 재산권주장은 그 생명체가 새롭고 특이하며 자연적으로는 발생하지않는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 생물체가 자연에 방출되어 나타나는 결과에 대한 '책임자' 문제가 제기될 때는, 갑자기 그 생명체는 전혀 새롭지 않은 것처럼 취급된다. 그것들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주장하면서, 생명공학 안전성에 대한논의는 전혀 불필요한 것인양 취급한다.

이처럼 생물체가 소유될 때는 거것은 자연적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고, 환경론자들이 GMO의 방출시 생태에 미치는 영향 문제를 제기할 경웨는 똑같은 생물체가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자연적'이라는 개념의 구성에 대한 이와 같은 아전인수격 태도는, 최고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과학이 실제로 자연에 대한 접근에서 얼마나 주관적이고 기회주의적인가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53-5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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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한 특허 부여는 두 가지 형태의 폭력을 부추긴다. 첫째는, 생물이 단순한 기계처럼 다뤄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기조직하는(self-organizing) 능력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미래 세대의 동식물에 대한 특허를 인정함으로써 살아 있는 생명체의 스스로 번식하는 능력 또한 부정된다는 사실이다

살아 있는생명체는기계와 달리 스스로 조직하는 능력이 있다. 이와 같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새명체를 단순한' 생명공학적 발명품' '유전자 구성물' 또는 '지식활동의 산물'로 간주하여 '지적 재산권' 보호의 대상인 것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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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를 '주인 분자'로 구분하려는 태도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한 측면이다. 그리고 DNA로서의 유전자가 단백질을 만든다는 '중심 교리'는 결정론의 또 다른측면이다 .이 교리는 실제로 유전자가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후에도 계속 받아들여지고 있다. [DNA의 원칙]에서 르원틴은 이렇게 말한다.

DNA는 죽은 분자로, 반응성이 없는 화학적 불활성 분자에 속한다. 따라서 스스로 재생산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DNA는 단백질로 이루어진 복잡한 세포기관에의 해기본적인 물질들로부터 만들어진다. 대개 DNA가 단백질을 생산한다고 이야기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단백질(효소)이 DNA를 만든다.

유전자가 자기복제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유전자에 신비한 자발적 능력을 부여하여 이것을 신체의 다른 일반적인 물징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기복제를 말한다면, 이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복잡한 체계로서의 전체 생물체를 일컫는 것이다.

(59-60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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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종들과 생태계가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자유는 생태학의 기초를 이런다. 생태적 안정성은 종들과 생태계가 적응하고 진화하며 반응하는능력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실재로 시스템에 허용되는 자유도가 커질수록 시스템은 그만큼더 큰 자기조직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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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조직하는 시스템은 내부로부터 성장하여 외부를 향해 스스로를 형성시킨다. 반면 외부의 힘으로 조직된 기계적 시스템은 성장하지않는다. 그들은만들어지고 외부로부터 구성될 뿐이다.

스스로 조직하는 시스템은 독특하며 다차원적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구조적이며 기능적인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계적인 시스템은 획일적이며 일차원적이다. 이들은 구조적인 획일성과 일차원적 기능만을 보여준다.

스스로조직하는 시스템은 스스로 치료하면서, 변화되는 환경의 조건에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직된 시스템은 자기치료를 하지도, 적응을 하지도 못하고 다만 망가질 뿐이다. (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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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시 "씨앗을 지키는 자들"

 

 

우리의 대지(大地)를 불태우라

우리의 꿈들을 불태우라

우리의 노래에 매서운 산을 쏟아부으라

톱밥으로 덮어버려라

학살당하는 우리들의 피를

당신들의 테크놀로지로 틀어막으라

자유로운 모든 이들의

야생의 본성을지닌 모든 이들의 비명소리를.

파괴하라

파괴하라

우리의 풀과 토양을

무너뜨려라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일으킨

모든 농장과 모든 마을을

모든 나무와 모든 가정과

모든 책과 모든 법과

그리고 모든 공정함과 조화로움을.

당신들의 폭탄으로 쓸어 없애버려라

모든 계곡을,

당신들의 사설(邪說)로 지워버려라

우리의 과거와

우리의 문학과 우리의 메타포들을

껍질 벗기라

숲을 그리고 대지를

어떤 벌레들도

어떤 새도

어떤 이야기들도

숨을 곳을 찾지 못할 때까지 계속.

나는 당신들의 폭정(暴政)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는 절망하지도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나는 하나의 씨앗을 지킬 것이므로

하나의 자그마한 생명의 씨앗을

나는 수호(守護)할 것이고

그리고 다시 심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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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대한 권리를부정하기 위해, 과학적 사명은 종교적사명과 결탁하였다. 과학혁명이 도래하면서 출현한 기계론은 모든 생명들을 지탱하는자연의 자기재생, 자기조직화 개념을 파괴하는 기초가 되었다. 근대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이컨에게 자연은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라, 공격적인 남성적 정신에 의해 정복되어야 하는 여성이었다. 머천트가 지적하는 것처럼, 자연에 데한 이해가 살아있고 양육하는 어머니에서 무기력하고 죽어 있고 조작 가능한 물질로변형된 것은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착취적 지상과제와 딱 맞아떨어졌다. 만물을양육하는 대지의 이미지는 자연의착취에 대해문화적인 제약요건으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어머니를 즉시 살해한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장을 파헤치고 불구로 만들었다"고 머천트는 쓰고 있다. 그러나 베니컨주의자의 프로그램과 과학혁명에 의해 창출된 복속과 지배의 이미지는 모든 제약조건들을 제거했으며, 자연의 개방을 위한 문화적 승인으로서 역할을 했다. (95-96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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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의 교잡은 씨앗 그 자체에 대한침략이었다. 씨앗의 교잡과정은 곡물로서 그리고 생산수단으로서의 종자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과정이었다고 클로펜버그는 말한다. 나아가 바로 이 과정은 사기업들이 식물육종과 상업적 종자 생산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했던 자본축적의 공간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씨앗의 자기재생적인 과정을, 원료로서 살아 있는 씨앗 공급의 단절된 단선적 흐름과 생산물로서 종자상품이라는 역흐름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생태파괴의 원천이 되었다. (1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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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살아있는 재생 가능한 자원에서 단순한 원료물질로 변화시키는 것과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기술은 여성을 비하시킨다. 일례로, 생식기술은 여성의 신체를 기계화하는 -- 직업적인 의료 전문가가 관리하는 파편화되고 물신화되고 대체 가능한 부품의 조합으로 여기는 --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에 관한 한 미국이 가장 많이 발달되어 있긴 했지만, 제3세계에도 생식기술이 점점 퍼져나가고 있다.

 

현재는 비정상적인 불임의 경우에 체외수정을비롯하여 다른 기술들이 제공되고 있지만, 자연과 비자연의 경계는 유동적이거니와 비정상적인 경우를 위해 창출된 기술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게 되면 오히려 정상이 비정상으로 재규정되는 경향이 있다. 임신이 처음으로 의학적인 관점에서 질병으로 취급받기 시작했을 때에는, 비정상적인 경우에 한해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았으며 정상적인 경우에는 원래의 전문가인 산파를 찾는 것이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30년대에는 출산의 70%가 집에서 분만할 수 있는 정상상태라고 생각되었지만, 50년대에는 70%가 병원에서 분만해야 하는 비정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자신들이 아이를 생산하고 창조한다고 믿는 의료 전문가들은, 이미 이에 대해 잘 알고 이쓴 어머니들에게 자신들의 지식을 강요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은 절대 확실한 것이고, 여성들의 지식은 터무니없는 히스테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파편화디고 침략적인 지식을 통해, 그들은 어머니와 태아 간에 -- 태아만이 보호 받아야만 하는 생명으로 바라보며, 어머니는 태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잠재적 범죄자로 환원되는 --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와 같은 어머니와 태아의 갈등이라는 잘못된 구성물은 남성 의사가 여성과 산파로부터 출산을 인수하게 된 가부장적 근거가 되었으며, 한 세기 후에는 페미니스트에 의해 여성의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선택을 옹호'하는 운동과 '생명을 옹호'하는 운동은 모두 여성과 생식에 대한 가부장적 구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을 통해 생명을 의학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사고력과 지력이 있는 인간으로서 여성이 갖는 삶의 경험과 서로 모순된다. 따라서 여기서갈등이 발생하면, 최근의 대리모와 새로운 생식기술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남성 전문가에 의한 여성 생명의 통제를 확립하기 위해 가부장적인 과학과 법률은 서로 협력한다. 이리하여 재생능력과 연관된 여성의 권리는, 생산자로서 의사가 갖는 권리와 소비자로서 부유한 불임부부가 갖는 권리로 대체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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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거의 마찬가지로, 약용 식물에 관한 지식도 지역의 공동 자원이다. (...) 아유르베다 경전 [차라카 삼히타]를 보면, 토착의료 시술가들이 다음과 같은 조언을 받는 대목이 나온다.

소치는 사람, 요가 수행자, 숲에 사는 사람, 사냥꾼, 정원사들로부터 배우고 식물의 형태와 특징을 파악함으로써 약초에 대하여 배우라.

아류르베다의 지식은 또한 민중이 갖고 있는 일상적인 지식의 일부분이다. 민간의 전통과 전문화된 의료체계는 서로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갇ㄹ리 제약기업들이 주도하는 의료산업 체계는, 민중은 치료법을 알고 있지못한 사람들로 간주한다. (131-132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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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리쉬디타 인디카'라는 학명을 가진 인도 특산의 이 아름다운 나무(님 나무; neem)는 여러 세기 동안 생물 농약과 약제로 이용되어 왔다. 인도의 일부 지방에서는 이 님나무의 부드러운 새싹을 먹으면서 새해를 시작한다. 또 어떤 지방에서는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며 숭배한다. 인도 어디서나 사람들은 매일 아침 님나무 다툰(datun, 칫솔)으로 양치질하여, 그 나무의 항박테리아 성질로 치아를 보호한다. (...)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유산은 지적재산권 이라는 이름 아래 강탈당하고 있다. (...)

1985년 이래로 미국과 일본 기업들은 님나무에 함유된 천연화합물의 안정적인 용액과 유제 제법에 대해서 12개가 넘는 미국 특허를 획득하였다. 심지어 여기에는 님나무 치약에 대한 특허도 포함되어 있다. (...)

"님나무로부터 달러를 뽑아내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라고 [사이언스(Science)]지는 평가하고 있다.

[에이지 바이오테크놀로지 뉴스]에서는 그레이스 사의 가공설비를 "님나무를 원료로 한 세계 최초의 생물농약 제조시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도에 있는 거의 모든 가정과 마을들은 생물농약을 만드는 설비장치를 갖추고 있다. 인도의 면화산업단체인 카디와 마을산업위원회가 님나무 제품을 생산, 판매해 온 지는 무려 40년이나 되었다. 기업가들은 '인디아라(Indiara)' 같은 님나무 제품을 출하하고 있는가 하면, 토착기업인 캘커타 화학은 몇십 년동아님나무 치약을 제조해 오고 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그레이스 사는 특허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근대화된 천연화합물 추출공정이 진정 새로운 혁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통적인 지식이 합성물 및 공정 연구개발에 실마리를 주었다고 할지라도, 우리 것은 충분히 새로우며 자연적인 상태에서 얻은 생산물이나 그것을 얻기 위한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르다. 따라서 특허가 가능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들의 공정은 새롭고 인도인의 기술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서구인들의 무지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새로움이다. 인도에서 님나무에서 얻어진 생물 농약과 약제를 사용해온 2천 년 동안, 비록 활성성분들에 라틴어 학명이 부여되지는 않았지만, 특수한 용도를 위한 정교한 공정이 많이 개발되었다. 님나무에 대한 지식과 그 이용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인동의 중앙해충방제국은 1968년의 살충제법에 님나무 제품을 등록하지도 않았다. 중앙해충방제국은, 님나물 물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아무런 부작용도 없이 여러 가지 용도로 인도에서 광범위하게 이용되어 왔다고 지적하였다. (134-137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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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초제 저항성 품종의 개발이라는전략은유익한 식물종들을 절명시키면서 슈퍼잡초를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특히 열대지방에서는 잡초와 농작물이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열대지방의 잡초들과 농작물은 수세기 동안유전적으로 상호 작용해 왔으며, 자유롭게 서로 교잡되면서 새로운 변종들이 생겨났다. 따라서 유전공학자들에 의해 농작물에 도입된, 제초제 저항성과 해충 저항성, 스트레스 저항성을 갖고 있는 유전자 역시 자연 교잡의 결과 주변 잡초들에 전파될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화학약품의 사용을 증가시키면서, 모든 관련 환경에 위협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1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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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생명체를 소유한다는 생각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소유하고 농민들은 가축을 소유한다. 그러나 지적 재산권은 소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다. 즉 지적 재산권은 단순히 지적인 재산으로서 이식된 유전자 또는 한 세대의 동물들에 대해서만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 전체의 재생산, 특히 그 특허기간에 생겨나는 미래 세대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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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resource)'은원래 생명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 어원인 라틴어의 resurgere는 "다시 일어나는(rise again)"이라는 의미이다. 즉 자원은 자기재생(self-regeneration)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자연'자원'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자연과 인간의 호혜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주의와 식민주의가 등장하면서, 그 의미가 변환되었다. 이제 '자연자원'이 함축하는 의미는 산업 생산품과 식민지 무역의 투입요소라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자연은 생명이 없는 조작 가능한 물질로 변환된 것이다. 재생과 성장을 위한 자연의 능력 또한 무시되었다.

자연에 대한 폭력과 (자연 내) 섬세한 상호관계의 파괴는 자연의 자기조직력을 무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이러한 폭력은 사회 내의 폭력으로 전환되었다. (192-193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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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가는 책 -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9년 3월 6일

 

 

 

요즘 나는 시간만 나면 근처 시내 대형서점에 '아이쇼핑'을 하러 간다.

아니, '아이쇼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무전독서'가 더 맞는 표현이겠다.

지난번에는 아예 이틀에 나눠서 서점에 '출근'을 하여 장편소설 한 권을 다 읽어버렸으니... ㅋㅋㅋㅋ

뭐 나에겐 대형서점은 최신도서가 즐비한 도서관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오늘도 서점으로 발길을 향했는데, 반가운 아이템을 발견했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촛불'이란 단어때문에 예전에 참여연대 쪽 인사들이 모여 펴낸 "어둠이 빛을 이길수는 없습니다." 류의 책인 줄 알았는데, 저자들의 면면을 보니 그 쪽과는 약간 뉘양스가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제목부터가 좀 다르지 않은가? 왜 촛불을 껐냐? 제목은 존대말로 말을 걸어오지만 실상 내용은 쫌 시비를 거는 투다. 시비 거는게 나쁘다는게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진보진영 내에서 촛불에 대해 온갖 찬사를 쏟아내는 입장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말투는 신선하기까지 하다.

 

사실 나는 작년 촛불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기 시작한 7,8월 정도만 해도 이런 류의 주장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었다. 실제 내가 몸 담고 있었던 곳에서도 '촛불'에 대한 어떤 종류에 비판에 대해서도 반박하려고 항시 대기, 으르렁대고 있었다.

 

물론 나의 그런 행동에도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좌파들의 촛불에 대한 '비판'은 솔직히 '비판'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지점에 너무 많았다. 촛불이 가장 뜨거웠던 5-6월에는 아주 소극적인 방식으로, 촛불이 소강기에 들어서기 시작한 7-8월에는 이 때다 싶은 마음으로 조금은 적극적으로 소위 '촛불 시민'들에게 불만 토로 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촛불의 주도세력은 자유주의자'라는 식으로 손쉽게 규정해 버린 후(이런 방식은 너무 한나라당 얘들이 하는 짓하고 비슷하지 않나?) 민주당 비판할 때나 쓰는 포퓰리즘 같은 용어를 동원해 이들의 한계를 따지고 들다가 이들이 앞으로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투쟁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버리고는 그래서 이후 새로운 운동주체의 형성에 있어서의 대안에 대한 자기 얘기는 한마디도 안하고(아니, 못하고!!) 말아버린다.

 

그래서 나는 누구 말마따나 그 때고 지금이고 간에, 대중의 행동은 '점수매길' 문제가 아니라, 운동주체가 이에 어떻게 개입하여 어쩌면 대중의 정치에 대한 환멸의 증폭으로만 귀결될 수도 있을 이 촛불집회를 새로운 운동주체 형성의 계기로 만들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그런 생각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위의 입장들과의 대결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대중지성'의 찬미를 늘어놓는 이들의 입장에 얼마간 동조하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것 같다.

 

 

각설하고, 그런 혼란을 갖고 지내던 차에 만나 이 책이 난 참으로 반가웠다.

촛불이 꺼지고 광우병 보다 더 굵직굵직한(특히 용산참사!!) 사건들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너도 나도 손쉽게 예언했던 제2의 촛불은 왜 일어나지 않는지 조금은 차분한 마음을 갖고 고민해 볼 계기를 전해 주기에 좋은 책이다.

 

 

일단 반가운 이름들이 눈에 띈다. 김정한, 백승욱.

이들은 촛불집회가 뜨겁던 작년 봄에도 찬양과 냉소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균형잡힌 입장을 보여줘서 나에게도 참 인상깊었던 저자들이다.

 

특히 김정한의 글에서는 두가지 지점에 눈에 들어온다. 하나는 촛불의 성과를 교육감선거 승리로 갈무리하고자 했던 시도의 한계점에 대해서. 그의 논의는 딱히 교육감 선거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굵직굵직한 대중투쟁의 양상과 그에 후속해 등장하는 선거국면의 결과가 반비례하는 예들을 보여주면서 사회운동과 제도정치의 결합이 쉬운 과제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그리고는 대중정치와 선거정치의 '게임의 룰'이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런 주장은 암묵적으로 촛불집회 당시 최장집, 박상훈 등이 주장했던 '원내정치로의 복귀'에 대한 일정한 비판을 암시하는 듯 하다. 둘째로 결론 부분이 참 맘에 들었는데, 촛불은 어찌되었건 간에 앞으로 벌어질 대중운동의 장기지속의 새로운 출발점을 암시할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그는 월러스틴의 말을 인용하는데, "1848년 프랑스에서의 혁명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시험무대였고, 1968년 5월 혁명이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 몰락의 예행연습"이었던 것처럼 촛불항쟁도 전례없는 경제위기에 맞선 대중운동의 새로운 순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진짜 그럴 수 있을 지 없을 지는 전적으로 운동주체들의 선택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백승욱의 글은 사실 비슷한 논조의 글을 참세상에서 접했을 때에도 그랬지만, 약간 수긍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는게 사실이다. 그는 글을 통해서 '우리가 민주시민이다'를 넘어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라는 선언을 할 것을 제안했었는데, 나는 그게 가능하기나 한 얘기인가가 의심스러웠고, 또 민주시민이라는 범주에서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로 나아가는게 어떻게 넘어서는 것이 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또한 당시 대중들의 행동을 "자랑스런 대한민국 만들기" 정도로 폄하하는 신기섭의 글을 치켜세우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난 이게 전형적인 '점수매기기'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점수를 매기려면 너는 50점 밖에 안되니까 90점 이상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조언정도는 달려야 하는데 신기섭은 그 정도의 성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기존의 지식인들이 촛불의 자발성에 무비판적으로 부화뇌동하면서 '대중지성 예찬론'을 퍼트리는 조류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놓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런 류의 주장은 그동안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어떤 것보다도 진지하고 아직도 촛불 그 이후를 고민하고 있는 많은 이들이 곱씹어 보아야 할 주장이다.

 

 

“…촛불집회를 분석하는 이론들이 보여주는 ‘낙관주의’는 매우 우려스럽다. 이론은 촛불집회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자율성의 낙관적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그 자율성이 넘어서지 못하는 경계들을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그 한계를 드러내는 입장을 채택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론은 늘 오히려 ‘비관주의적’이어야 하며, 대중에 대한 상찬으로 가득한 이론적 낙관주의는 결국 대중 스스로 환상에 빠져들게 하고 정세의 엄혹함을 회피하게 만드는 알리바이에 불과할 수 있다. 더욱이, 정세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기초해, 절망 속의 대중들이 표출하는 탈정치화의 전망을 대중적 봉기로 오해해서는 안 되는 시점에 등장하는 이론적 오해는 대중에게 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백승욱)

 

 사실 난 어떤 식으로든 '비관주의'를 앞장세우는 주장에는 마음이 거슬리는 편이긴 하지만, 이론에서의 비관주의라는 말은 현 정세를 보는 모든 이론이 갖춰야 할 미덕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엄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임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읽은 글은 요 두개인데, 앞으로 며칠 동안 나눠서 서점에 더 출근하면서 더 읽어봐야 겠다. 사실 요렇게 특정 정세에 맞춰서 쓴 여러 사람의 글을 모아놓은 책은 돈 주고 사기에는 아까운 면이 좀 있는게 사실이다.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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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천에서만큼은, 그리고 삶에서 만큼은 조금은 낙관적이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비관은 그저 등돌리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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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도가니> 중에서...

김덕중이 강추한 <다음> 연재소설, <도가니>를 읽었다.

근무중에 찔끔찔끔 읽으니 3일 동안 어찌어찌하여 지금까지 연재된 것을 다 읽었다.

 

진실이 교만하다고?

그래, 진실은 사실 너무 철없이 교만해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 딱 좋을때가 있기도 한 것 같다.

 

그래도 서 간사가 끝까지 진실의 교만함에 의지해 거짓의 겸손함을 물리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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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사건의 충격이 가라앉을 무렵, 영광제일교회의 젊은 목사가 말한 논리 역시 많은 힘을 얻어 퍼져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상식적이었고 보통사람의 사고에 잘 맞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사건이 자신의 도시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부끄럽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했ㅆ다.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고치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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