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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닭털 같은 나날 - 류진운


류진운 (劉震雲) - 1958년 중국 하남성 연진현에서 태어나, 1982년 북경대학 중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농민일보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집으로 <닭털 같은 나날>, <고향천하황하>, <핸드폰>, <관리들 만세> 등이 있다. '1942년을 돌아보다'는 2004년 현재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 중이다.

죽의 장막이 걷힌지 오래라 해도, 중국 인민들의 삶은 아직 우리에게 낯설다. 그곳 평범한 사람들의 현재는 어떠할까? 현대 중국 문인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평가받는 류진운의 소설을 통해 슬쩍 엿보자. 우리 작가 황석영이 '대단한 작가다! 문학이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라고 극찬까지 했으니.

(우리 나라나 중국이나) 소시민의 삶이란 게 뭐 그렇다. 아침 일찍 일어나 두부를 사기 위해 줄을 서지만, 그러다가도 통근버스가 오면 늦지 않기 위해 버스에 올라타야 한다. 시간이 모자라 냉장고에 넣어두지 못해 상한 두부는 부부싸움의 실마리가 되고, 한번 시작된 싸움은 들불처럼 아내의 직장문제, 아이의 유치원 문제, 가정부 문제로 번져나간다. 아아, 상한 두부 한 근이 이렇게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다니. 정말 울고 싶어진다.

아이가 생기니 생활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조금 더 큰 집으로 옮기고 매일매일 출퇴근하고 먹고 마시고 싸고. 말이 쉽지 하나도 그냥 되는게 없다. 돈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적절히 뇌물도 써야 하고 연줄도 타야 하고 남을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소시민으로 산다는 건, 뭐 그러그렇게 남들처럼 흘러 가는 것일게다.

물론 임씨 부부도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정치적 이상향을 꿈꾸던 청년은 무능한 남편과 아버지가 되었고, 조용하고 시적인 아가씨는 잔소리쟁이에 밤에는 몰래 수돗물을 훔치는 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하루종일 업무에 시달리고 집안일을 하다보면, 저녁이 되어도 책 한장 뒤적이고 싶지 않다. 꿈이나 이상 따위, 철부지 때나 품을 수 있는 사치인 것이다. 아니 그런가?

똑같은 얼굴, 개미떼 같은 군중이 되어간다. 오랜만에 찾아온 초등학교 은사님께 저녁대접도 하지 못하고 돌려보내야 한다. 훗날 선생님의 부고를 듣고 눈물 흘리지만 어쩌랴. 산 사람에겐 죽은 이와의 이별보단 당장 눈앞에 쌓여있는 배추더미가 더 절실한 것을. 우리들 곁에 있는 건 꿈도 아니고 이상도 아니고 바로 '삶', '생활'인 것이다.

그렇게 닭털 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부수수 흩날리는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딱딱하면서도 재치있는 문체로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는 삶의 순간, 생활의 단면을 재미있게 그려낸 소설집이다. 문학적 수식은 적지만, 생활과 인간-그 자체에 집중한 중국 신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다.
- 알라딘 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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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책이다... 풀무질 일꾼 은종복님께서 추천해 주신 책.... 부라보~ 재밌다. 짱짱 재밌다....

3편의 중편소설이 모아져 있는데, '닭털같은 나날'은 급변하는 중국사회의 소시민의 일상을 통해 우리 삶의 칙칙함, 지독한 속물스러움을 정말 능청맞게도 잘 그려냈다.
'관리들 만세'는 중국 공산당(이건 분명히 '공산주의자'이고 싶은 족속들이 만든 어설픈 피조물이 분명하겠지만...)의 관료주의의 구린내 나는 작태를 껍데기 하나 남김없이 다 드러냈다.
'1942년을 돌아보다'는 별로 재미는 없었는데... 충격적인 사실들을 잘 모아놨다. 장개석 집권 당시 중국이 홍수로 인한 중국 인민들의 죽음과 고통을 얼마나 무참히 깔아 뭉개고 있는지를 어떠한 다큐멘타리 보다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꼭한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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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 박완서

 

 

박완서 -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숙명여고 졸업,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 중단. 1970년「여성동아」장편소설 공모에「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작품으로는 단편집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이 있고,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이 있다.

또한 동화집 <부숭이의 땅힘>, 수필집으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살아있는 날의 소망>,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어른노릇 사람노릇>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1),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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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인가...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 "꿈꾸는 인큐베이터"란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야 좀 느낌없이 읽었지만, 꿈꾸는 인큐베이터는 손가락이 덜덜 떨리게 만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글이었다. '낙태'를 경험하는 한 여성이 겪게되는 갈등과 고통, 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뤄지는 생명에 대한 단절... 이것이 얼마나 한 개인의 삶의 곡선에 상처를 입히는지...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꿈꾸는 인큐베이터"의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이다. (출판연도는 "그대 아직도..."가 좀 빠르긴 하지만 어쨌든...) 상처한 한 남자 혁주와 이혼한 여자 문경의 만남. 그리고 그들간의 불행을 암시하는 듯한 정사. 여자는 임신까지 했지만 남자는 매몰차게 외면하고 돈많고 순종적인 여성과 재혼한다. 그러나 재혼한 여자는 매번 딸만 낳고 결국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까지 하게 되어 더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다. 그런데 혁주와 그의 어머니는 문경이 끝내 고집을 피워 낳은 자식이 아들임을 알고 다시 문경에게 접근하는데...

 

"그 애에게 거는 저의 가장 찬란한 꿈이 뭔줄 아세요?  남자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여자를 이용하고 짓밟고 능멸해도 된다는 그 천부의 권리로부터 자유로운 신종 남자로 키우는 거죠. 그 꿈을 위해서도 그 애는 제가 키우고 싶어요." - 1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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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모순 - 양귀자

 


 

이 책은 1995년 <천년의 사랑> 이후 3년만에 펴낸 전작 장편으로 작가 특유의 속도감 넘치는 문체와 인생을 통찰하는 웅숭 깊은 시선이 빛을 발한다. 열 일곱 개로 나뉘어진 각 장마다 긴장감을 제공하면서 활달한 걸음으로 `삶의 모순`을 향해 달려가는 소설 속의 주인공은 스물 다섯 살의 젊은 여성 `안진진`이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나, 안진진`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라고 외친다. 그녀는 모순 투성이의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선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두 명의 남자와 연애를 하고,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각기 판이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와 이모가 빚어 내는 생의 다양한 변주. 그리고 쉽사리 해독하기 어려운 아버지.

이 책에서는 그 숱한 이중성과 상반의 이미지들이 불화나 충돌의 현실로 그려지지 않는다. 가난한 엄마와 부자인 이모가 눈 흘기고 부대끼면서도 마치 한 몸처럼 살아가듯이 진진은 천양지차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애정을 느낀다. 후반부로 가면서 그 행복과 불행의 관계가 거짓말처럼 뒤집혀 버린다.



양귀자 - 1978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1988년 <원미동 사람들>로 유주현문학상을, 1992년 '숨은 꽃'으로 '이상문학상'을, 1996년 '곰이야기'로 현대문학상을, 1999년 '늪'으로 21세기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원미동 사람들>,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 <희망>,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슬픔도 힘이 된다>, <모순>,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 <천년의 사랑>, <천마총 가는길> 등의 소설과 산문집 <따뜻한 내 집 창 밖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삶의 묘약>, 장편 동화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 육아 에세이집 <엄마노릇 마흔일곱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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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검색하다가 이 책의 제목을 문득 발견하게 되었다. 어디서 많이 본 제목인데... 아, 내가 고등학교때 읽었던 소설이었다. 주말드라마 소재로 많이 나올법한 내용인데... ㅎㅎ 그냥 그 때 읽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뭐 그리 나쁘진 않았던 듯...

 

우리누나는 디빵 재미없다고 했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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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71년생 다인이 - 김종광


정가 - 7,000원

출판사 - 작가정신

지은이 - 김종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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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하자면... 전대협 & 한총련 소설이다. 한총련 아닌 나랑 무슨 상관이냐 싶기도 하지만, 사실 이 소설에는 90년대 학생운동에 불어닥쳤던 온갖 파도와 바람이 뒤엉켜져 있다.

 

사실 이 소설도 살짝 기분이 나쁘다. 어제 서점에서 봤던 최영미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었을때랑 비슷한 기분이다. 뭐 책에 딸린 서평에는 숱한 후일담 문학과는 다르다는 식으로 말하지만(다르긴 한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공지영의 소설처럼 가슴아픈 기억으로 절규하는 그런 내용은 아니니까. 오히려 그땐 그랬었지, 그리고 그 다음은 여백으로 처리해 버리는 위트를 발휘했다고 평하면 될까?), 후일담 문학과는 다른 씁쓸함을 남긴다.

 

이 소설이 말하고 싶은건 도대체 뭔가? 역사는 돌고 돈다? 80년대 학번들이 90년대 학번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90년대 학번들이 2000년대 학번들에게, 그것도 그 낡은 틀인 '한총련'을 부여잡고 있는 후배들에게 최영미의 시에서 처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를 외치는 것 같았다. 그래, 먹고 사는 문제 중요하지... 다인이가 먹고사는 문제에 치여서 386이라는 단어가 뭔지도 모를 정도로 깜이 떨어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지금 그녀가 십여년전에 간직했던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이유는 뭔가?

 

71년생 다인이가 그런 정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 출생의 시기가 전태일열사의 분신, 유신체제 등장, 그리고 고3때 쯤 선생님들이 전교조한다고 잡혀가고... 뭐 이런 이유때문인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렇다고 마치 운동의 한 순환이 마감했다는 듯이 씁쓸한 표정으로 2000년대를 바라보는 그 소설적 재치가 나는 맘에 들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소설 말미에 여운을 남기긴 했지만.... 다석이가 다시 다인이 누나처럼 열혈 운동권이 되어서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

 

아, 하지만 이놈의 소설이라는 것들은 왜 이렇게 맨날 운동을 이렇게 오래 씹어서 지겨워진 껌처럼 뱉어내기에만 바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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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대한민국 병원 사용설명서 - 강주성

 

환자의 눈으로 건강도 권리라고 말하기 

 

 

 

최도영은 정말 좋은 의사일까?


나는 올해 초에 MBC드라마 “하얀거탑”에 푹 빠져있었다. 인터넷 다시보기를 몇 번이고 보면서 며칠밤을 새곤 했었다. 나는 특히 이 드라마의 주인공 장준혁과 대비되는 품성과 환자에 대한 애정을 갖춘 최도영이라는 의사의 매력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 인물을 연기한 배우(이선균)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정말 저런 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간미 있는 모습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낼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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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영은 매우 신중한 의사다. 오진으로 인해 환자가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수없이 연구하고, 꼼꼼하게 검사결과를 따져본다. 그리고 혹시라도 의심나는 부분이 있으면 환자에게 몇 번이고 양해를 구하면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한다. 그런데 나는 최도영의 그런 모습이 반복될수록 작은 의문이 생겼다. 무슨 병이라고 속 시원하게 알려주지 못하고 검사만 반복하는게 좋은 걸까? 내가 알기론 우리나라는 행위별수가제(개별적 진료행위 하나하나에 가격을 매기는 제도. 반대의 경우로는 각각의 질병을 단위로 비용을 책정하는 포괄수가제가 있다. 의료의 공공성이 잘 구축된 나라일수록 포괄수가제를 채택하고 있다.)이기 때문에 검사를 많이 하면 할수록 환자의 비용부담이 늘어난다. 그런데 최도영은 오진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검사를 ‘자주’한다. 드라마에선 최도영이 좋은 의사로 그려지긴 하는데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환자들의 건강권을 위한 안내서, <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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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최도영은 좋은 의사가 아니라고 시원하게 결론을 내려주는 책이 한권 있다. 바로 <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그 병원은 당연히 한 번 찍어도 될 MRI를 두 번 세 번 찍자고 덤빌 것이다. 항암 치료 끝나면 ”암세포 다 없어졌나 한 번 볼까요?” 하고 또 찍고, 3개월 있다가 “암은 재발이 무섭습니다.” 그러면서 또 찍고, 6개월 있다가 “암은 추적 관찰과 평상시의 관리가 중요합니다.” 하면서 또 찍고....”(168p) 이런게 대부분 병원들의 행태인데, 문제는 단지 의사 개인의 자질이나 품성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 의료제도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도영은 신중한 의사, 심성이 착한 의사이긴 해도 가난한 환자들의 등골을 휘게 하는 병원을 개혁할 수 없는 어찌 보면 ‘소심한’ 의사에 불과한 것이다.

 

저자는 1999년 만성 골수성 백혈병에 걸렸던 환자였다. 여동생이 준 골수를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나긴 했는데, 투병생활을 통해 의료제도의 문제점과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백혈병 치료를 받기 위해 먹어야 하는 초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가 만든 꿈의 신약 ‘글리벡’은 한알에 2만 3045원, 하루에 4알, 한 달을 먹으면 100만원 가까이나 들었다. 그나마 지금은 이게 보험적용이 되는 형편이지만, 그 조차도 그가 만든 백혈병환우회 환자들이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는 등의 목숨을 건 싸움을 했기에 이뤄질 수 있는 성과였다. 그의 싸움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건강권보다는 의료자본의 배를 불리기 위해 애쓰는 병원과 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으로 한 발짝 나아간다. 이 책은 다년간의 활동으로 저자가 접하게 된 환자들의 등골을 빼먹는 병원들의 행태와 이에 대한 우리의 대처법, 그리고 점차 시장화의 길을 걷고 있는 건강보험, 한미FTA 의료개방의 문제점 등을 다룬 종합 보고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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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질병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상식’ 깨기


이 책은 건강과 의료 현실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게 한다. 특히 그는 책의 앞부분에서 질병도 사실상 사회적 차별과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함을 지적하고 있다. 흔히들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병에 걸리면 ‘저놈은 분명 맨날 술,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을꺼야’ 라고 쉽게 생각한다. 당뇨병의 경우 이를 성인병이라고 이야기 하다가 최근에 소아 당뇨 환자가 많아지자 의학학회 쪽에서는 ‘생활습관병’으로 고쳐 부르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결국 병에 걸리면 그 책임은 다 개인에게 있다는 식이다. 이런 생각이 더 나아가면 질병에 대한 치료비는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반문한다. “병 걸리고 싶어서 걸린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해보시라. 아무도 없다. (... ...) 내가 안 좋은 공기를 안 들이마실 수 있는가? 세계 최고 수준의 공기 오염도를 자랑하는 이 서울에서 난 열심히 공기를 마신다. 열악한 노동시간과 환경,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돈 없는 사람들은 더 병에 잘 걸리고 병에 걸리면 더 많이 죽는다. 이게 우리의 잘못인가?” 실제 2002년도에 수십명의 백혈병 환자들에게 병 걸리기 전의 심리 상태를 조사해 본 결과 약 80퍼센트 정도의 환자들이 병에 걸리기 전에 거의 ‘죽고 싶다’고 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유명한 의사들이 TV에 나와서 “술 담배 줄이시고 운동 열심히 하세요”를 강조하는 것이 만병의 해결책일 수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뜩 떠오른 한 가지 사건! 얼마 전에 소고기는 절대 입에도 안대는 한 외국 여성이 광우병에 걸려서 죽었다고 한다. 왜? 그녀가 바르던 화장품에 소가죽의 성분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란다. 한미FTA 광우병 논란에 대해 “소고기 안 먹으면 되지”라고 속편하게 이야기하고 말 문제가 아님을, 더욱이 이런 엄청난 사회적 변화가 개인의 노력 여하를 보기 좋게 비웃고 있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똑똑한 노민국 교수가 왜 선택진료제를 모르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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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 얘기를 한번 더 해보자. 이 드라마 초반부에는 장준혁과 외과 과장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는 노민국 교수가 등장한다. 그는 후임 과장으로 장준혁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현직 과장 이주완이 스카우트한 해외파 교수인데, 이주완은 노민국을 자신의 사위감으로까지 생각해서 자기 딸과 함께 저녁식사를 나누게 한다. 그런데 이주완의 딸 이윤진은 의료분야에서 ‘운동’을 하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저녁식사 자리가 영 불편했던 이윤진은 “노교수님은 선택진료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으로 기어이 저녁식사의 분위기를 깬다. 그런데 잘 나가는 해외파 노교수님은 “선택... 진료제요... ??”라고 얼버무리며 얼굴이 벌게지고 만다.

 

사실 이 장면은 드라마에서 별로 비중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 의사들의 수준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환자들의 등골을 빼먹는 선택진료제 문제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그 문제에 대해서 폭로하는 이 책의 저자같은 사람들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선택진료제는 환자가 특정 의사를 택한 뒤 그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제도인데, 의학지식이나 권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을 수밖에 없는 환자들은 자의에 따라 의사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환자의 사전 동의 없이 선택진료를 하거나 진료비를 부당 징수하는 등 갖가지 편법과 ‘환자 지갑털기’가 자행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선택진료를 통해 병원이 부당 징수한 금액을 돌려받기 위해 3달을 홀로 싸우신 60세 노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의 영웅적(??) 실천으로 비슷한 부당징수 사례가 발견되어 환불받은 케이스가 한 대학병원에서만 1000여명이었다고 한다.

선택진료제의 문제는 가난한 환자들과 거대 병원자본과의 싸움에서 절대 접점이 있을 수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내가 한의원을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 병원 접수창구 앞에는 버젓이 환자들에게 선택진료제 폐지 반대 서명을 받고 있었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거기에 서명을 했을까? 안타까운 현실이다.

부실한 국민건강보험, 민간의료보험이 대안이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운영하는 4대보험에 대한 불신이 매우 깊다. 하긴 보험료 체납으로 신용불량자가 되어야 하는 세상이니 그럴 수밖에... 건강보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이런 불신의 근원은 사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의 부실에 있다고 말한다. 건강보험이 보장해 주지 않는 질병, 즉 비급여 항목이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급여항목의 경우에도 본인부담비율이 만만치 않아서 재수 없게 병에 한번 걸리면 패가망신하기 십상인 게 우리나라의 현실인 것이다. 이런 부패한 토양을 숙주삼아 민간의료보험이라는 곰팡이가 자라난다. 사람들은 자신이 덜컥 큰 병(이런 병은 대부분 건강보험의 비급여 항목이다.)에 라도 걸릴까봐 무서워 너도나도 민간의료보험을 찾아간다. 아니 오히려 TV광고들이 그런 공포를 부추긴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민간보험들은 우리의 미래를 ‘확실하게’ 저당잡는다. 비급여 대상 질병들은 정부가 치료비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수천을 하든, 수억을 하든 의사들 마음대로다. 그뿐이랴? 의료기관들이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시술들을 마음대로 하든 말든, 투약을 제대로 하든 말든 통제할 방법이 없다. 이 틈을 비집고 성장하는 민간보험은 환자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해 거액의 보험료를 전 생애를 걸쳐서 거의 ‘강탈’해 간다. 그런데 실제 병에 걸려도 이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보험료 지급을 ‘뺑끼친다’. 열심히 보험료 걷었는데 환자가 덜컥 병에 걸려버리면 보험회사 입장에서는 손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얼마 안가 이 나라도 미국처럼 국민건강보험 없는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저자는 그 결과에 대해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마이클 무어의 <씨코sicko>나 덴젤 워싱턴 주연의 <존Q>라는 영화를 보라고 말한다. 참고로 미국은 의료보험에 아예 들지도 못하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16%에 달하고, 돈이 없어서 제때 치료를 못 받아 죽는 사람이 매년 2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아, 그런데 저자가 전해주는 <한미FTA를 찬성했던 노건강 씨의 투병 이야기> 읽고 있자니 우리나라도 미국의 길로 따라들어 갈 것 같아 영 불안하기만 하다.

작은 아쉬움, 그리고 우리가 고민할 바.


이 책은 병원이 병을 치료해 주는 곳이어야지 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나기만을 기다렸다가 돈을 벌 궁리만 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런 병원 때문에 환자들이 더 이상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인지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몇 가지 행동요령들을 제시해 준다. 물론 불법 청구된 진료비를 되찾는 법, 우리 동네 좋은 약국 찾는 법 등을 아는 것은 ‘의료소비자’적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유용한 정보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도 반복해서 지적했듯이 대한민국 병원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의료의 공공성을 생각하지 않고 갈수록 금융자본의 이해에 장단을 맞추려 하는 영리법인화에 있는 것이다. 단지 몇몇 소비자들이 병원이 부당 징수한 진료비를 되찾는 것만으로는 이런 의료 공공성의 파괴를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 환자들이 이렇게 미시적인 대응을 할 때, 힘의 우위에 서 있는 병원자본들은 매우 거시적으로 관련 법 개악등을 통해 이런 행동을 무력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문제는 <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가 우리에게 남겨준 숙제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병원에서 떼 주는 처방전이 원래는 환자 보관용까지 해서 2장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기 전에 알았던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지식들을 이 땅의 수많은 가난하고 그래서 더 아플 수밖에 없는 대중들이 어떻게 활용할지, 그래서 이 책의 후속편으로 <대한민국 병원 변혁 보고서> 쓸 날을 앞당기는 것이 우리 사회운동 세력들이 마주하고 있는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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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생태위기'에 관한 새삼스러운 고발

 

‘생태위기’에 관한 새삼스러운 고발

- 서평 :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존 벨라미 포스터, 현실문화연구, 2001)



얼마 전 MBC뉴스에서는 “서울에 ‘열대 과일’ 자란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간 적이 있다. 뭐 사실 이런 류의 기사가 새로운 것은 아니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니긴 하지만, 유독 이 기사가 ‘황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대목이 있다. 바로 방송 맨 마지막에 인터뷰를 한 농촌진흥청 연구정책국장이라는 사람의 발언 때문이다. 이 사람 인터뷰 직전까지 세계 평균에 비해 한반도 기온이 2배 이상 빠르게 상승하고 있고, 그래서 고랭지 채소 수확량이 급감했으며, 새롭게 나타난 해충도 골칫거리라는 암울한 내용이 전해졌다. 온난화 문제가 확산되면서 전 세계적 식량 위기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국책 연구기관에서 국장이라는 자리에 까지 와 있는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다. “망고, 파파야, 키위 등 열대작물을 개발해서 수입을 대체하는 효과를 발휘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오히려 국내 농업 경쟁력을 강화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라는 말도 덧붙여졌을 법 하지만, 이 양반의 말이 너무 민망하다고 생각한 담당PD가 편집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지구 온난화가 진행된다면 해수면이 가파르게 상승하여 지구상의 몇몇 섬은 지도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고, 생물종의 대다수가 멸종할 가능성이 높다는 웬만한 과학자들의 충고는 고리타분한 맹자왈 공자왈 쯤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프리카나 남미의 나라들처럼 식량작물을 포기하고 환금작물로 농업을 다 갈아 엎어버리면 농업 경쟁력이 상승할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것일까? 혹시 집에 TV가 없어서 이들 나라가 최근의 애그플레이션으로 인해 엄청난 식량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신 것인지...?? 아! 농진청 국장님의 구상대로라면 한 동안 사람만이 자원이라던 우리나라가 엄청난 농업 수출국이라도 되는 것일까? 여하간에 다양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인터뷰 대목이었다.

이렇게 나이브한 생각을 가지신 분에게는 ‘생태위기’에 대해 포괄적이고 친절한 설명이 요구되는데, 포스터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는 바로 이런 양반을 위해 준비된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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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태위기의 범인을 찾아라!


사실 위의 인터뷰에서 보여진 입장을 비롯해서 최근 환경과 생태위기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략 다음과 같은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생산적 부에 대한 자연의 기여를 ‘무상의’ 이득 또는 공짜 선물로 취급한다. 위의 인터뷰에서는 심지어 기후의 교란 조차도 수입대체 효과를 낳을 수 있는 ‘기회’(즉 ‘공짜 선물’)로 보고 있지 않은가? 둘째, 환경변화에 따르는 위기를 단순한 기술적 진보나 새로운 국제협약을 통해 탄소배출 감축량 등을 정하는 것으로 해결될 것으로 본다. 최근의 교토의정서 협약에 포함된 ‘탄소거래’가 바로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앞의 두 가지 입장의 당연한 결론이겠지만) 셋째, 자본주의적 경제성장과 생태의 보존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때마침 이명박 대통령이 들고 나온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슬로건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포스터는 이와 같이 생태위기에 대한 고전적인 입장에 통렬하게 일침을 가한다. 그의 다른 책(『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 책갈피, 2007)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생태계의 안전과 자본주의는 양립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는 여기서 마르크스의 ‘신진대사의 균열’(metabolic rift)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즉 노동뿐만 아니라 자연도, 산업혁명이 인도하는 새로운 조건들의 결과로 점점 더 자본에 종속되고 있으며, 자본주의는 도시와 농촌을 분리(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에서 “20세기 후반의 가장 극적이고 가장 영향이 널리 미친 사회적 변화이자 우리를 과거세계로부터 영원히 단절시킨 변화는 농민층의 사멸이다.”라고 말한 바로 그것!)함으로써, 전자뿐만 아니라 후자에도 공업적인 기법들을 적용함으로써 인간존재의 생태적 기초를 파괴했다고 본다. 이로 인해 생명 그 자체의 자연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 물질대사의 상호 의존 과정에 비가역적인 균열을 불러일으키는 조건이 만들어지고, 그 결과 토양 생명력이 낭비되고 이 낭비는 무역에 의해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무역에 의해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부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을 통해 저자는 생태위기가 일국적 경제성장 전략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체계적 메커니즘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경계를 넘어서’라는 말은 단순히 개별 국가들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서 한 나라의 생태위기가 다른 나라로 전이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을 초과하여,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등장과 함께 구조화된 불평등한 국가간체계의 문제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사탕수수 재배의 세계화’(이 표현은 그냥 내가 붙인 거다)의 예를 든다. 사탕수수는 주변부의 환경을 변형시킨 최초의 현금작물이다. 아메리카 발견에 성공한 개척자(??)들은 카나리아 군도의 원주민들을 노예노동을 위한 인력으로 뽑았다. 개척자들(아, 왜 이렇게 이 단어가 거슬리냐?)은 이들을 활용해 다양한 생물종이 번성하던 땅을 사탕수수 생산을 위한 단종경작의 대농장으로 변화시켰다. 이와 같은 단종경작의 결과 이 식민지들은 식량을 유럽과 북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내륙에 의존하게 되었다. 최근 제3세계 식량위기로 인해 운위되고 있는 ‘식량 제국주의’의 출발은 바로 자본주의 세계체계가 성립되던 15-16세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계 비판에 바탕을 둔 포스터의 생태위기에 대한 인식은 생태에 대한 미국 사회의 전통적인 두 진영, 즉 보호주의(conservationist)와 보존주의(preservationist) 모두와 차별점을 가진다. 전자의 경우 미국의 대기업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으로서 환경악화에 반대하기보다는 장기적인 이윤을 위해 자연자원의 이용을 규제, 합리화하려 했던 쪽에 속한다. 테오도르 루즈벨트와 기포드 핀쇼가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데, 이들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관리자’를 자청해 왔다. 생태계가 자본에 점점 더 종속됨에 따라 인간존재의 생태적 기초가 파괴된다고 보았던 포스터가 “우리의 번영은 우리의 주요산물의 생산과 미국 전역을 통한 그것들의 상업적인 유통에 기반해 있으며, 이는 또 그 산물들이 숲으로부터 적절한 비용으로 적당한 양만큼 영원히 공급된다는 점에 불가분하게 의존해 있다.”고 말하는 과학적 관리의 입장과 교차점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포스터가 산업혁명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기술적 진보를 거부하고 ‘생태적 양심’이나 ‘땅의 윤리’와 같은 도덕주의적 방식으로의 회귀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불평등하게 조직해 내고, 생태적 교란을 심화시키는 ‘사회적 구조’였다. 그런 이유에서 포스터가 아무리 프란시스 베이컨과 같은 근대 계몽주의자의 이성에 대한 낙관주의를 비판한다고 해도, 이성에 대한 거부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환경영향에 관한 코모너의 연구를 차용하여 다음과 같은 공식을 제시한다.


I = P×A×T

 

I : 환경영향,  P : 인구,  A : 부(富)와 관련된 물질산출량, 

T : 물질산출량을 생산하는데 사용되는 에너지 단위당 환경영향(기술)


오늘날의 논의에서 환경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인구증가에 기인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부(A)와 기술(T)이 거의 언제나 일정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는 종종 무시된다. 이러한 맬더스적 관점에서는 인구성장이 교체 수준(‘높은 사망률-높은 출생률’의 단계에서 ‘낮은 사망률-낮은 출생률’의 단계로의 인구학적 이행)에 접근하는 부자 나라들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에 환경문제의 주된 책임이 돌려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3세계 나라들이 인구학적 이행의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여 교체수준의 번식력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국제적 불평등 구조의 결과일 뿐이다. 즉 “식민주의는 세계의 부의 분배뿐만 아니라 인구의 분배도 결정하여, 대부분의 부를 북반부에, 그리고 대부분의 인구를 남반부에 집적”시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작가 저메인 그리어의 말을 인용하여 쓴 다음 부분은 음미하면 할수록 가슴이 미어진다.


“기근의 기억이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한,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어린이 수를 줄임으로써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하나 더 있다고 해서 동냥질에 방해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경제체제가 다수의 궁핍화를 야기한다면 그런 일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며, 실제로 이로 인해 극빈자의 확산이 더욱 심화되었다.”



2. 자본주의 농업․생태체계를 인식하기


이 책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20세기 후반기의 생태위기에 대해 다룬 6장 「상처받기 쉬운 지구」이다. 이 부분에서의 설명이 비록 여러 사례의 나열 형태이기는 하나, 그 분석의 방법은 최근 광우병 사태, 멜라민 파동 등으로 붉어진 자본주의 농업․생태체계의 문제와 먹거리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해 나가는데 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의 설명을 더욱 보충․심화하는 것으로는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제이슨 무어 외, 공감, 2005)을 들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포스터의 몇몇 글도 번역되어 소개하고 있다.)

먼저 주목해 볼 것은 영농과 농업 사이의 괴리 증가에 관한 것이다. 르원틴과 베를랑은 이 둘의 차이를 전자는 밀을 생산하는 것이고 후자는 비료를 빵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정의한다. ‘밀’이라는 생산물이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영농 그 자체는 이제 농업생산물의 평균 부가가치 중에서 겨우 10%만을 차지할 뿐이다. 나머지 90% 중에서 40%는 농업 투입물(종자, 비료, 살충제, 기계 같은)에 의한 것이고, 50%는 생산물이 농장을 떠난 이후 주로 마케팅과 유통비용의 형태로 부가된다. 그 결과, 비록 영농 자체는 “많은 수의 소생산자들에 분산되어 있지만” 농업 투입물의 판매와 농업 생산물의 마케팅과 유통을 독점하는 소수의 대기업들이 영농에서의 생산 조건을 통제하고 농업 이윤의 대부분을 거둬들인다.

농업과 영농의 괴리 증가는 사실 미국자본주의 하의 ‘녹색혁명’의 기본적 펀더멘털이라 할 수 있다. 자유무역체계에 종속된 농업 시스템은 자국내의 자족적 식량생산을 파괴하고 이를 단종경작 중심의 환금작물 재배로 대체한다. 이 때 종자의 생산, 보급, 생산과정, 유통과정 전반이 초국적 농식품기업의 통제하에 놓여지게 된다. 여기서 농민은 전통적인 부농/빈농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pt화 되는데, 이들은 농업 생산물 생산 과정에서 가장 위험하고 자연재해에 쉽게 노출되는 ‘영농’을 담당하게 된다. 예컨대, 식품산업자본이 종자, 비료, 기계 등을 농민에게 제공하고 매뉴얼화된 농작법에 따라 생산을 강제한 뒤, 2차가공의 원료로서 농산물을 다시 사가는 것인데, 이 때 품질검사 탈락이나 풍수해, 병충해 등으로 인한 손실은 모두 농민책임이 된다.

이로 인해 농민은 자본주의 농업 시스템에 실질적으로 포섭된다. pt화된 농민과 함께 자연도 실질적 포섭에 묶이게 되는데, 그 결과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신진대사의 균열’이 심화되는 것이다. 개별 농민의 독립적 통제하에서 작동하던 ‘토지-가축-농산물’의 영양물질의 순환은 초국적 농산품기업의 통제하의 ‘화학적/인공적 투입물(교배종 종자 또는 유전자 조작 종자, 화학비료 등)→농산물’의 선형적 흐름으로 대체된다. 자연 생태계를 ‘무상의 선물’로 인식한 초국적 자본이 오로지 자본축적을 위해서만 생태계를 변형/조작함으로 인하여 지속 가능한 농업․생태체계는 한계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pt화된 농민, 자연의 자본으로의 실질적 포섭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종자생산의 상품화’라 할 수 있다. 농업의 전 과정을 단일한 법인자본 하에 수직적으로 통합한 몬산토, 듀퐁, 카길과 같은 초국적 농산품기업들은 유전공학의 힘을 빌어 종자생산을 통제한다.(ex: GMO) 생산량 증대를 목적으로 유전자 조작된 종자들은 보통 해충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고, 자연재해의 피해를 덜 입는 특성을 지니지만, 이런 종자를 사용한 농부들은 매년 새 종자를 구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유전자 조작된 종자들은 진품을 낳지 못하며, 이들 자손들은 그 이전 세대에 비해 산출량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변종 종자들은 초국적 기업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기술 패키지가 수반되었을 경우에만 좋은 산출량이 나온다. 그 뿐인가? 변종 종자들은 이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관개용수를 요구하며, 이를 재배하는 농민들의 건강을 해친다. (몬산토사가 만든 유전자 조작 Bt면화를 생산하는 인도 농민들은 피오줌을 싸는 질병에 걸리고, 이를 먹고 자란 염소들은 대량 폐사했다.)



3. 새삼스러운 위기, 뒤늦은 인식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껏 운동을 하면서, 생태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올 해가 처음이다. 심하게 말해서 그 전까지는 ‘생태위기’ 떠들고 다니는 얘들을 좀 우습게 봤다. 변명이긴 하지만 그 때의 ‘무시’가 그렇게 근거없는 짓은 아니었다고 하겠는데, 왜냐하면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생태’ 운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뭔가 도덕주의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치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 문제를 거창하고 거시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손 치더라도, 지금 환경단체의 대부분은 개인적인 양심에 호소하거나, 정부에 청원하는 형태의 운동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들의 인식속에 자본주의라는 생태계 파괴의 가장 큰 범죄자에 대한 인식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듯 하였다.

그런 와중에 광우병 파동, 전세계적 식량 위기 이후에 명박이는 새삼스럽게도 ‘녹색 성장’을 들고 나왔다. 일단 나는 이 구호가 명박이 개인의 정치적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차원에서 제기되었다고 본다. 사실 서울시장 재직 시절, 청계천 복원공사를 통해 나름 환경 친화적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놨는데, 대운하 때문에 엄청 이미지 구기지 않았던가? 이걸 만회하려면 자기 이미지에 나름 쐐기를 박는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이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녹색성장'이란 구호는 어딘가 광고 카피스러운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

하지만 이건 좀 부차적인 이유다. 더 중요한 것은 전 세계적 정세가 '녹색'을 강제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멍청한 부시만이 부인하고 있지만) 2-30년 안에 오일 피크가 도래한다는 것은 지질학자가 아니더라도 상식 수준에 속하는 것이어서, 당장의 에너지 위기 해결이 전 세계적 과제가 되었다. 게다가 한국도 1997년 체결된 쿄토의정서에서 합의한 나라로서 이산화탄소 감축량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현재 에너지 체계에 대한 제고는 아무리 명박이 똥배짱이라 하더라도 피해 갈 수 없는 문제였다. 정부가 이 '녹색성장'을 중심으로 경제위기를 탈출하고 신성장동력을 창출하겠다고 나섰다. '녹색'이라는 담론이 이명박 정부에겐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하나의 비상구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사실 내가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어찌보면 명박이 때문이다. 명박이 덕분에 새삼스럽게 위기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열라 고맙다!!)

그런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정부가 '석유 이후 시대'를 준비한다면서 제시한 제1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에는 새로운 원전 개발, 수소에너지, 원자력 에너지 비중 확대와 같이 화석에너지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거나 화석에너지 만큼이나 환경파괴의 문제점이 거론되어왔던 것들이다. (현 정부의 이러한 에너지계획에 대한 반론으로 적절한 책으로는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강양구 저, 프레시안북, 2007을 들 수 있다.) 바로 어제까지 러시아를 방문하고 온 명박이가 러시아 대통령하고 합의했다는게 러시아에서 직통으로 남한까지 가스 송유관을 연결한다는 것이란다. 이게 대안에너지 체제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건설자본 중심의 회색빛 경제성장 정책이 국민들에게 약발이 안먹히는 것 같으니까 겉 표면만 녹색으로 덕지덕지 칠한 '삽질 경제정책'의 2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서평을 마무리 지을 타이밍이 왔다. 이 글이 최근 생태위기를 둘러싼 정세를 분석할 목적으로 쓴 글은 아니니까... 그 방향이야 어찌됐든 간에 정권차원에서도 '녹색'과 '생태' 담론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무엇을 위해서 이런 담론을 활용하려 하는지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이명박이가 전통적인 자본주의적 성장 전략을 포기하고 생태주의로 돌아섰다고 단단히 착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포스터가 다른 글에서 언급하는 아래 글을 음미해 보자.

 

(오코너의) "두 번째 모순" 개념의 전반적 취지는 일단 생태적 손상이 자본주의의 경제위기로 전환되면 일종의 피드백 매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직접적으로는 자본이 생산조건의 손상과 결합된 생산비용의 증가를 억제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간접적으로는 사회운동이 체계로 하여금 외부효과를 내부화하도록, 바꾸어 말하면 자본이 외부화해온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지불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체계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생산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다. (...)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전체로서 자본주의에는 그러한 피드백 매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 녹색당이 주장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계는 마지막 한 그루의 나무가 벌목되었을 때야 비로소 화폐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인간사회와 대다수 생물종을 위해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주 혼란스러운 생태 파괴의 와중에도 축적할 수 있고 (예컨대 폐기물 관리산업의 성장을 통해) 환경 훼손으로부터도 이윤을 얻을 수 있으며 회복 불가능한 지점까지 지구를 계속 파괴할 수 있음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달리말해서, 더욱 심화되고 있는 생태 문제의 위험은 자본주의 체계가 그것을 재촉하도록 인식하게 만드는 어떤 내부적 (또는 외부적) 조절 매커니즘도 그 체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더 심각하다. 생태에는 경기순환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 존 벨라미 포스터, "자본주의와 생태: 모순의 성격",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中

 

자연생태계를 무상의 선물로 여기는 자본에게 생태계의 교란이 이윤 압박을 가져와 자본 스스로 생태계 치유비용을 내부화하기 위한 자정 노력이 발생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은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 안정적인 생태계가 자본에게 무상의 선물이라면, 자연 자원의 희소성 또한 자본에게 무상의 선물이 된다. 자연 생태계를 사유화한 자본이 '희소성 판매'에 나선다면 '생태계 파괴'라는 자연적 상황 또한 자본 축적을 위한 안정적인 조건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에서 어렴풋 하게나마 이런 더러운 속셈을 훔쳐보고 있다. 전 세계적 담수부족 현상을 물 사유화의 유리한 조건으로 활용하고, 지구 온난화는 열대 과일의 수입 대체 상품화의 기회로 인식하는가 하면, 대체 에너지 개발은 탄소거래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논의의 중심에 '지속가능한 생태'에 대한 문제의식이 빠져있다. 포스터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는 생태위기를 어떻게 인식할 것이며, 어디서부터 물고 늘어질 것인지, 매우 새삼스러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왜 우리가 녹색'성장'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녹색', '생태'를 지향해야 하는지 고민이 드는 사람이라면 포스터의 이 책으로부터 시작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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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성.노.동 - 여이연 성노동 연구팀

'성매매'와 '성노동' :

그 경계에서 읽은 것들에 대한 소고

 

 

 

얼마 전 가족들과 아침식사를 하다가 약간의 언쟁을 한 적이 있었다. 늘상 그렇듯이 우리집은 아침밥을 먹을 때 TV 뉴스를 시청하는데, 그 날엔 유독 평소엔 보기 힘든 기사가 보도되었다. 바로 성매매 업소 집결지의 업주들이 벌인 시위에 대한 기사였다.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찮게 본 기사라서 기사의 세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었으나, 대강 내용은 경찰이 성매매 업소 단속에 나섰는데, 업주들이 생계대책을 우선적으로 마련해 달라며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이를 보고 난 후의 반응부터가 나와 가족들 사이에는 사뭇 차이가 났다. 기사를 먼저 본 엄마와 누나는 “저런 미친 놈들...”을 두 세차례 연발했다. 이 말은 당연하게도 그녀들이 보기에 부도덕한 직업을 갖고 있는 그 ‘업주’들을 향한 것이었다. 뒤늦게 기사를 확인한 내가 조금은 소심한 말투로 “쫓아내더라도 살 길을 마련해 주고 쫓아내야지...”라고 받아친 순간 두 모녀로부터 날아온 따가운 시선에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사실 그 다음 상황을 봤을 때 이건 ‘언쟁’이라기보다는 내가 그냥 가족들에게 욕을 먹은 거다. “엄마, 얘 좀 봐.”라는 누나의 고자질과 뒤이어 나온 엄마의 질책. “너는 저런 시위 하는 사람들만 보면 무턱대고 편 드냐?”

소심한 반항 이후에 나는 어떤 반론도 하지 않고 그냥 밥만 먹었다. 거기에는 아침 밥상 앞에서부터 가정의 평화를 깼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싫었던 것도 있지만, 내 주장을 더 자신 있게 펼칠만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위를 한 사람들이 성매매 여성들도 아니고 업주들이라니까 사실 더 할말도 없었다. (물론 우리 엄마와 누나의 가치관에 비추어 봤을 때 업주가 아닌 성매매 여성들이 시위했다고 해도 태도가 달랐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나의 자신감 없음은 얼마 전 읽었던 『성.노.동』(여이연 성노동연구팀, 2007)으로부터 받았던 충격과 혼란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상태인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성노동자 개념이 들어오고 성노동운동이 시작된 것은 2004년 성특법(성매매방지특별법)의 제정으로 인한 성매매 여성들의 저항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에 대해 내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기 시작한 것도 그 해와 같이 하지만, 매우 생경한 개념들과 자발과 강제의 애매모호한 경계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는데에 나의 지적 수준이 매우 미달했던 탓에 이에 대해선 항상 애매한 입장을 말했을 뿐이었다.

사실 『성.노.동』을 읽고 나서도 이런 애매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책은 처음엔 나에게 온갖 오해를 증폭시켜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이 책에는 사실 ‘성노동’ 개념의 승인이 성상품화에 대한 인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만한, 위험한 서술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김경미의 「성노동에 관한 이름붙이기와 그 정치성」에서 주되게 비판하고 있는 원미혜의 「우리는 왜 성매매를 반대해야 하는가」(『섹슈얼리티 강의』에 실림, 동녘 1999)를 함께 읽으며 나름대로 ‘성노동’에 대한 개념화의 의미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고 『성.노.동』에서 제기하려고 했던 바의 긍정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성노동’ 개념이 갖는 몇 가지 딜레마, 즉 성상품화에 대한 인정문제, 프리섹스주의와의 단절 가능성 여부, 자발 패러다임에 대한 지나친 낙관에 대한 의문들은 해소되지 않았다. 사실 이 문제는 『성.노.동』이란 책에선 의도적으로 대답해야 할 문제의 목록에서 제외시켰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냐면 이 책의 목표는 국가와 여성단체들이 주도하여 만든 성특법에 대한 비판과 함께 ‘피해자화’가 아닌 성매매 여성들의 새로운 주체화 가능성이 있음을 드러내 보이려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표는 딱 여기까지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성노동을 둘러싼 최근의 정세적 쟁점들에 대응하고자 하는 목표로 쓰여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최근의 정세적 사안들을 초과한 더욱 장기적인 문제, 즉 가족 외부의 성매매를 통해 지지되는 근대적 자본주의 하의 가부장적 핵가족 형태를 전화하고 새로운 젠더 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문제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조금은 다른 질의 이론적 시도가 요구된다.

이 글은 일단 「우리는 왜 성매매를 반대해야 하는가」와 『성.노.동』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독해하면서 성매매, 성노동, 성노동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쟁점들을 검토하고 성매매를 둘러싼 쟁점을 풀어나가기 위해 여성운동이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고자 한다.

 

                    

 

 

 

I. 「우리는 왜 성매매에 반대해야 하는가」 vs 『성.노.동』


원미혜의 글이 실린『섹슈얼리티 강의』는 『새 여성학 강의』와 함께 대학가 등에서 페미니즘 입문서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책 중에 하나이다. 그런만큼 이 책에 실린 입장이 어쩌면 한국사회 내의 페미니즘 운동 일반의 경향을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대학가의 ‘영 페미니즘young feminism’의 경우에는 더더욱)

예전에 읽을 때는 별 생각 없이 읽어서 몰랐는데, 이번에 보니 이 글은 (원미혜의 글만을 지칭하는 것이다. 『섹슈얼리티 강의』의 다른 글들에 대해서는 꼼꼼히 읽어보지 않아서 판단할 능력이 없다.) 참 이론적으로 불성실한 티가 많이 드러난다. 급진 페미니즘의 이론적 문제설정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볼 땐 불성실하다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적절한 것 같다. 먼저 저자는 남성의 성욕을 식욕과 마찬가지로 욕구의 필연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을 비판하기 위해 페이트만(C. Pateman)의 주장을 차용한다. “페이트만은 음식에 대한 인간의 필요는 섹스의 필요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인간은 손이라는 수단으로 성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으므로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성관계를 가질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180p) 이 인용문은 분명 남성 성욕의 생물학적 필연성을 반박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저자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손으로도 성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또 다른 생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물론 “성욕의 충족은 문화적 습관에 따른 것이고, 성매매를 통해 남성이 여성의 몸을 사는 것으로 성욕을 분출하는 것은 남성의 가부장적 권력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보충하고 있지만, 남성 가부장 권력의 사회적․역사적 맥락이 위와 같은 생물학적 설명으로 밝혀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글의 어딜 봐도 성욕에 대한 사회적․역사적 분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결국 뒤에 가서는 “남성의 새로운 여성에 대한 욕구는 구매력을 자극하는 원동력”(191p)이고, “성매매는 남성의 가학적 심리가 내재된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존재한다”(190p)고 말하며 아이러니 하게도 남성 성욕의 생물학적․심리학적 필연성에 굴복해 버리고 만다.

이런 불성실함은 성매매의 성격 규정에 있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성매매 반대론자들, 즉 현실에서는 ‘(법에 의한) 성매매 폐지주의자’들은 성매매에 대해 법적인 규제를 가하더라도 성매매 여성들에 대해서는 비범죄화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성특법의 가장 큰 성과로 강제적으로 성매매에 들어선 여성에 대한 비범죄화를 들고 있다. 성특법 이전의 윤방법(윤락행위등방지법)에서 윤락행위를 한 자로서 여성만 처벌을 받고 대상자로서 남성은 처벌받지 않았다면, 성특법에서는 구매 남성뿐만 아니라 매춘의 구조적 책임 주체인 ‘알선하는 자’ 까지도 처벌하는 것으로 변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원미혜도 이런 방향 전환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성.노.동』에서 문현아는 강화된 것은 성매매 종사자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성매매를 둘러싼 불법한 행위를 부각시킨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성특법이 전혀 새롭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문현아, 「비범죄화의 진실과 오해」,『성.노.동』, 100p) 그런 점에서 성특법은 윤방법과 같은 맥락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인데, 1994년 윤방법 개정 당시에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남성 구매자도 처벌하는 ‘쌍벌주의’로 나아갔다면, 2004년 성특법에서는 직접적 성관계에 있어서는 제3자라 할 수 있는 알선자까지 처벌하는 ‘삼벌주의’(?)로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법의 초점은 여성에 대한 처벌을 면하는 것이 아닌 ‘처벌의 강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성매매에 대해 ‘처벌을 강화’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것이 비윤리적, 비도덕적이라는 시각을 담고 있다. 원미혜 또한 성매매가 추상적 개념 차원에서 노동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기 전에, “노동이라면 어떤 노동인가, 우리는 그러한 노동을 사회적으로 정당한 ‘노동’으로 이름붙일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 시각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성매매도 절도, 사기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행위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정당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성 구매자 또는 포주 또는 알선자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성매매를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하고 나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상관없이 성매매 여성들도 옳지 못한 일을 한 사람들이 되어버린다. 결국 강제에 의한 성매매의 경우 처벌하지 않는다는 식의 비범죄주의는 자발적으로 성매매에 들어선 여성들 (성매매 폐지주의 입장에서는 자발은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주변에는 인신매매와 같은 강제적인 성매매 진입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채팅, 전화방 등을 통한 엄청나게 많은 ‘자발적 경로’들이 존재한다.)을 보수적인 윤리관의 잣대에 따라 자신의 도덕성을 검열하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문은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 부분에서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조 도지마Jo Doezema는 강제와 자발을 구분하는 것은 성노동자 안에서 창녀와 마돈나 같은 여러 가지 이분법을 재생산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한다. (…) ‘정상적인 성규범’을 위반하는 여성들은 언제나 처벌받아야 한다는 믿음을 강화하면서 이러한 분리가 오히려 여성의 인권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 ‘강제’ 패러다임의 위력은 ‘가난’이라는 서사를 중심으로 경제적 이유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매춘을 선택하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전제하게 하며, 이미 존재하는 여성들을 비가시화하고 매춘여성의 현실을 박제화하는데 있다.

- 문은미, 「‘강제’에서 ‘자발’로의 사고전환과 그 의미」, 『성.노.동』, 52-3pp


이어서 그는 성매매를 ‘노예 노동’이라고 단언한다. 그 이유로는 ①여성들의 몸에 대한 자기 통제권의 상실, ②성매매의 비가시성과 사회적 관계의 단절, ③성매매를 통해 성장하는 성산업의 지하경제를 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성매매 여성들은 노예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 맞다. 그리고 나 또한 현실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앞의 ①, ②, ③번의 문장에서 ‘여성’을 ‘이주노동자’로 바꿔보자. 내 생각엔 그렇게 바꿔도 내용상 그리 틀리지 않다. 이 땅에 100만명이 넘는다는 이주노동자들도 몸에 대한 자기 통제권을 상실하여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고 있고, 언어와 얼굴색을 비롯한 부당한 이유로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한국 경제는 이들을 제조업 분야에서 무한 착취함을 통해 성장해 왔다. 물론 성적 착취 여부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경우를 생각해 봤을 때는 그 차이는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다. 이 땅의 얼마나 많은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사각지대에 방치된 채로 성적 유린을 당하고 있는가? 이 땅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비정규직의 경우는 또 어떤가? 평생을 시설에 감금되다시피 한 채로 부도덕한 사회복지재단의 강제노역을 당해야 하는 중증 장애인들의 경우는 또 어떤가?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성매매 여성의 현실에 감정적으로 분노하여 ‘노예노동’이라고 부르는 거야 부르는 사람 자유지만, 유독 성매매에 대해서만 그렇게 명명할 어떠한 이론적, 현실적 근거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가 성매매를 ‘노예 노동’이라고 말하는 이유들을 살펴보자. 원미혜는 남성의 화대 지불이 성매매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간의 권력관계를 드러내 주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여성이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가 과연 화대 지불 자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하는 모든 노동은 ‘임금’이라는 형태의 대가를 받는다. (원미혜가 ‘성노동’에 대해 이론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노동이라면 어떤 노동인가, 그것은 정당한 노동인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현실적 차원에서 성매매가 이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들에게는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마저 부정한다면 성매매 여성을 범죄자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어떤 ‘매매(賣買)’에서도 가격지불 자체가 문제로 거론되지 않는다. 이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자발적으로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성매매에 뛰어든 여성들을 성매매를 둘러싼 논의 구도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효과를 낼 뿐이다.

그런데 사실 원미혜는 화대지불을 통해 남성들이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성적 서비스‘를 통해 남성의 가학적 성욕을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남성의 성욕을 초역사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그의 논리는 논외로 하더라도, ’성적 서비스‘에 초점을 맞추는 그의 문제설정은 결함이 많다. 만약 ’성적 서비스‘가 문제라면 그 대상은 성매매 여성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원미혜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것이 단순한 ’성기 접촉‘ 문제를 넘어선다면 말이다. 가부장제와 결합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성애화된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가족 내에 있을 경우 상대적으로 비가시적이고, 가족 외부의 노동시장(labor market)에 있을 경우 상대적으로 가시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항상 TV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여성댄스가수들, 에로영화배우들은 또 다른 전형적인 형태의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이다. 간간히 연예계 비화쯤으로 전해지는 인기여자연예인의 성상납 기사는 전형적인 성매매 여성의 범주설정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근무시간에는 무조건 빨간 립스틱을 바를 것을 강요받는 이랜드 비정규직 계산원 노동자들, 직무와 상관없이 커피를 타 와야 하는 직장 내 여성들도 그 물리적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성애화된 노동, 성적 서비스를 행한다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다. 단지 남성주도하의 권력을 재생산하는데 기여하는 ’방식‘에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유독 성매매 여성들의 성적 서비스에만 노예노동이라는 딱지를 붙여 극단화 하는 것은 그녀들이 섹슈얼리티 위계구도의 최하위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또 그런 지위를 재생산하는데 기여 할 뿐이다.

박이은실은 『성.노.동』에서 가부장제 안에서의 대(對) 남성역할 기대유형을 살펴봄으로써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이 가지게 되는 사회적 지위에 어떤 위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박이은실, 「섹슈얼리티의 위계와 낙인의 문제」, 『성.노.동』, 68-71pp)


       기대역할 

역할

성서비스(유형)

생식노동

친족구성

가사노동

남성소득공유

○ (1:1)

○ (1:1)

애인

○ (1:1)

×

×

×

고가 성노동

○ 

(1:1 혹은 특정소수대상)

×

×

×

저가 성노동

○ (1: 불특정다수)

×

×

×

박이은실은 위 표를 바탕으로 “가부장적 결혼제도에서 왜 여성이 굳이 ’처‘가 되었을 때만이 사회적으로 인정된 성을 영위할 수 있고, 또 자원을 분배받을 수 있는 위치를 부여받게 되는지, 왜 ’남편‘의 성에 대한 ’처‘의 독점은 ’아주 느슨하게‘ 유지되는 반면에 ’처‘의 성은 ’남편‘만이 독점적으로 영위할 수 있도록 강제되는 것인지” 질문하고 있다. 이 질문에서 출발해 본다면 (위계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처에게는 성이 통제되고 (위계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하는) 처 이외의 여성들에게는 생식이 통제되면서 ’처‘와 ’남편‘ 사이의 거래가 유지되어 왔고, 이로써 가부장제가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박이은실은 이런 측면에서 성거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sex과 성별gender을 중심으로 단순화된 구조 안에서가 아니라 섹슈얼리티의 위계구조를 통해 다각적/다층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미혜와 같은 성매매 반대론자/폐지론자들은 성매매 여성들의 열악한 조건을 드러내고 그 심각성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그녀들의 일을 ‘노동 이하의 일’이라는 의미로 ‘노예 노동’이라 부르고 성노동 개념을 거부하지만, 그것은 의도치 않게 여성 내부의 섹슈얼리티 위계 구도의 고착화를 심화시키고 만다. 『성.노.동』은 오히려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을 당당히 ‘노동’으로 선언하고 이에 대해 ‘노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주체화 될 것을 제안한다. 이는 곧 가부장제 사회가 자기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려왔던 성매매 여성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며, 동시에 가부장제 사회의 부당한 유지를 위해 위계화 되어 있던 여성 내부의 섹슈얼리티 위계 구도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나아가 결혼과 핵가족 신화에 대한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고정갑희는 "결혼제도 내의 성차별에 대해서는 결혼제도 자체를 문제 삼아 결혼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매춘 내의 성차별에 대해서는 매춘업의 근절과 폐지로 운동의 방향을 삼는 법과 여성주의는 매춘노동을 하는 여성들을 억압하는 주체가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고정갑희, 「성노동자 투쟁은 시작되었다」, 『성.노.동』, 237p)



II. 성노동운동의 딜레마


앞에서 나는 『성.노.동』의 논지에 근거하여 원미혜의 글을 비판하였다. 그러면 이제 내가 앞에서 『성.노.동』을 읽고 충격과 혼란에 빠지고, 오히려 성노동 개념에 대해 오해가 증폭되었다고 말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이다. 나는 내가 느꼈던 이 충격과 혼란, 그리고 오해는 단지 내 감정 차원의 문제이기 보다는 ‘성노동’ 개념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딜레마라고 생각하며, 성노동운동의 발전과 여성운동의 새로운 전화를 위해서는 꼭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여러 부분에서 다양한 질문들을 쏟아내며 형성되었지만, 결국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질문해 볼 수 있다. 조금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져보자면, 첫째, 성노동운동은 성상품화의 적극적 인정을 통한 임노동자로서 성매매 여성들의 권리보장 운동인가? 둘째, 성노동개념이 프리섹스주의와 공명할 가능성은 없는가? 일단 이와 관련하여 내가 정말 ‘뜨악’ 했던 문장들을 다시 보며 질문을 더 구체화 시켜나가 보자.


매춘을 여성에 대한 억압이며 폭력이라고 보는 상당수 여성주의자들에게 남성구매자들은 여성에게 성적 폭력을 행사하는 자로, ‘포주’들은 그 폭력을 알선하는 자로 보인다. 그러나 매춘성노동자 여성들에게 그들은 ‘고객’과 ‘업주’로서 자신들의 생계유지에 필수적인 사람들이다. 따라서 성노동자운동은 매춘성산업의 업주들의 위치에 대해서도 생각을 달리할 것을 주문하였다. 흔히 ‘포주’라고 불리는 매춘성산업의 업주들은 법적 억압을 같이 받고 있기 때문에 법에 대한 입장에서는 성노동자들과 같은 편에 있다.

- 고정갑희, 앞의 글, 『성.노.동』, 234p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위와 같은 주장이 성노동을 둘러싼 논쟁 중 가장 핵심을 차지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위 주장은 암묵적으로 ‘성매매는 궁극적으로 폐절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대부분의 운동진영의 ‘심기’를 건드렸다. 성매매, 성산업을 통해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고 여겨지는 포주들도 성노동자들과 같은 편이라니!! 나 또한 아무리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이런 주장은 사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같은 책에서 문은미의 경우 성매매를 바라볼 때 ‘강제’보다는 ‘자발’ 개념에 초점을 맞춰서 분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선불금의 존재와 그로 인한 감시와 감금, 폭력과 부당한 임금착취와 같은 ‘강제’적인 성격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아주 극단적인 사례일 뿐이라고 말한다.(46p) 나는 이 부분에서부터 고개가 갸우뚱해 지기 시작했는데, 성매매에 대한 자발적 선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발’이 보편적인 사례이고, ‘강제’는 극단적 사례일 뿐이라는 근거는 어디 있는가? 이 책 어딜 봐도 그런 근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이 책의 필자들은 기존의 여성주의가 주목하지 않았던 자발적 성매매 여성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그랬을지 몰라도, 일단 내가 아는 선에서만 보더라도 성매매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도 꽤 많다. (‘자발적’ 성매매 여성들보다 많은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 도리가 없다.) 문은미의 주장은 앞의 인용문에서 나온 것처럼, 성매매에 대한 자발과 강제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에서 끝났어야 한다. 자발을 중심으로 보자는 데에 적합한 근거는 없다.

자발적 성매매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성매매에 진입하는 주요한 요인이 세계적으로 만연한 ‘여성의 빈곤화’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난 2005년에 지구를 돌며 벌어졌던 세계여성행진의 기치 또한 '여성에 대한 폭력과 빈곤화 반대'였던 것으로 안다. ‘여성의 빈곤화’가 무조건 여성을 성매매로 이끄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외부의 중대한 요인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자발과 강제의 이분법을 넘어서자고 할 때에는 ‘강제’ 개념에 내재된 모든 여성의 피해자화를 넘어섬과 동시에, ‘자발’ 개념에 내재된 성적 자유주의의 함정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만약 후자의 문제를 간과한다면, 『성.노.동』에서도 중요하게 제기하고 있는 섹슈얼리티의 위계화에 대한 질문, 즉 왜 자신의 성을 파는 남성은 여성에 비해 극히 적은지에 대해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고정갑희의 경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포주를 성매매 여성의 동업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사회에서 가장 구좌파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알려진 채만수 노사과연 소장은, “혹시 자신들이 '성산업', '성매매의 합법화․자유권'을 요구하는 음성적 포주단체들의 선전․투쟁도구로 전락해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볼 일이다.”(채만수, ‘성노동자 운동’이라는 현실주의」, 『정세와 노동』4호)라고 비판한다. 나는 채만수 소장의 입장 전반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고정갑희 비판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2005년 6월 29일 성노동자의 날 행사에서 나왔다는 다음과 같은 문구도 성노동운동의 지향이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성 구매 남성도 여건이 열악하기에 우리를 찾는 빈곤한 사람들, 구매자 처벌 반대”. 성매매 여성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이들의 결정권에 따라 성매매 지속 여부를 판단하는 것과 성 구매자 남성과 업주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이런 논리는 기업 내의 노동조합이 노동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기업주를 파트너로 인식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시효만료한 ‘노사협약 이데올로기’의 모습을 닮았다. 노동자의 잉여노동을 착취함을 통해서 축적을 이뤄내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듯이, 성매매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준 남성 포주들이 도덕적 면죄부를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물론 고정갑희는 업주와 성구매자의 비범죄화가 갖는 전술적 유용성을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성매매 여성의 비범죄화를 꾀하면서 성구매자와 업주는 처벌한다면 모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처벌된다면 성매매 여성들은 당장의 일자리를 잃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끝나야 한다. 업주와 성구매자의 비범죄화는 정확히 전술적 유용성의 차원에서만 인정되는 것이지, 성노동운동의 궁극적 지향의 차원에서 인정되어서는 안된다. 아직까지 성구매자와 업주들의 시선 속에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비하와 낙인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을 ‘같은 편’으로 인식하자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을 조장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1997년 인도 꼴까따에서 열린 ‘인도 성노동자 전국회의’ 에서 채택된 ‘성노동자 선언’에 제시된 다음과 같은 사회가 도래한다면 ‘성 서비스 구매’가 지금과 같이 비난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물질적이고 감정적이고 지적이고 성적인 수요가 공정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해결되는 이상 사회에서는 아마 그러한 거래가 불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가 도래하기 전 까지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성인 남녀의 자유로운 성거래에 대한 단순한 규제 철폐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이를 빌미로 남성의 성적 서비스 구매의 자유를 주장하는 모종의 ‘프리섹스주의’에 반대한다. 나는 성노동의 범죄화를 반대하지만, 동시에 남녀의 섹슈얼리티 또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노동운동이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박탈당하지 않는다는 17조로 되돌아가 보자. 물론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강간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하철 광고에 나의 벌거벗은 육체를 이용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며 세계인권선언에 도발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뤼스 이리가레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노.동』은 책의 표지에도 나와 있듯이, ‘기존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의 차원에서는 뛰어난 저작이지만, 성노동운동이 남녀간, 여성내부의 섹슈얼리티 위계를 어떻게 해체하고 새로운 ‘보편성’을 형성할 것인지, 즉 이 운동의 장기적인 지향을 설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깊이있는 고민을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든다. 특히 민성노련 위원장 이희영이 주장하는 ‘성매매 특별지역 선포’와 같은 쟁점은 성노동운동의 지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인데도 그리 비중 있게 토론되지 못한 것 같다.



III. 성노동운동을 딛고 핵가족에 기반한 가부장 질서의 전화를 향하여


마르크스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을 인식하고, 그런 현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상품으로서 노동력이 사멸하는 공산주의를 지향했다. 그런 마르크스의 입장은 단지 상품으로서 노동력의 폐지를 주장하는 아나키즘이나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개량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현실이라면, A)그런 현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성매매를 사멸시키자는 입장은 B)성매매를 폐지하거나 금지하자는 급진 페미니즘이나 C)성욕이 없어지지 않는 한 성매매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식의 초자유주의 페미니즘과도 다른 것이다. (윤소영,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이념과 운동』, 공감, 2004, 296-300pp 참조)

앞에서 지적한 고정갑희의 글은 A)를 택하는 데에는 주저하면서, B)는 맹렬히 비판하고, C)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성.노.동』의 다른 필자들의 경우 다소 차이는 있지만, 애매한 입장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는 A)의 입장에서 B)의 성매매 폐지론이나 C)의 성매매 영구화론(?) 모두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들이 ‘가사노동’, ‘성 노동’의 정치적 의미를 부각시켰던 것은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 사회화하기 위한 것이다. 즉, ‘여성의 사회 진출’처럼, ‘사적’ 영역의 노동에 남성들도 진출하여 남녀가 함께 성별 분업을 극복하자는 것이지, 여성이 계속 ‘성 노동’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희진, 「성노동권 유감」, 한겨레 05.07.17)

그래서 나는 『성.노.동』2권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성.노.동』1권이 한국사회의 주류 여성운동이 행하고 있는 성매매 여성에 대한 낙인 재생산을 비판했다면, 2권에서는 1권에서 다 다루지 못한 성노동운동을 자기 과제로 받아 안아야 하는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의 전망과 과제, 장기적 목표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토론해 봤으면 하는 생각이다. 만약 그것이 출간된다면 여이연 성노동연구팀 뿐만 아니라 <성노동운동 위한 네트워크> 전체가 이런 이론적 작업을 함께 하는 것은 어떨지 작은 제안을 해 본다.

성노동을 개념화하는 것은 여성운동에 있어서 중간도, 끝도 아닌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핵가족에 기반한 가부장질서의 전화와 새로운 시민성의 구축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다양한 성적 정체성을 둘러싼 상징체계를 역전시키는 것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섹슈얼리티 위계 구도의 수평적 재조정, 노동 개념의 재구성과 같은 문제를 수반한다. 이런 난제의 해결을 위해 현대적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재생산 장치로서 ‘핵가족’이라는 역사적 형태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필수적이다.(권현정, 「근대적 가족형태 비판」,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현재성』, 공감, 2002) 핵가족의 정상성 이데올로기를 비판/해체 할 수 있을 때라야만 가족 내외부를 넘나드는 가변적인 여성 정체성에 적합한 권리들을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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