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서평

땅이 숨쉬길 바라며 쓴 서평 - <<이윤에 굶주린 자들>>

1.

 

 

얼마 전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워낭소리>를 봤다. 워낙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아서 거의 완벽한 스포일링을 당하고 간 상태였지만, 영화의 여운이 아직까지 남는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처럼 봉화의 아름다운 풍경들에 감탄하고, 할아버지와 소의 애틋한 사랑에 동감한 것은 아니다. 물론 소가 죽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슬픔에 잠겨 있는 장면에서 나 또한 눈시울을 적셨지만, 지금까지 내 마음 한켠을 붙들고 흔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등뼈가 앙상하게 보일 정도로 다 늙어서 일만하는 소가 뭐가 부럽냐고? 그러나 내가 부러운 것은 소의 '살아생전'이 아니라 죽어서 '흙'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소는 죽고 산 언저리에 묻혔다. 그리고 그 위엔 풀이 자라났다. 그리고 수 십년이 지나면 소의 육체도 미생물들을 만나 변형되면서 풀이 되고, 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어서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매일 같이 이산화탄소를 내뿜어대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육중한 도시에는 내가 흙이 되고 풀이 되고 꽃이 될 수 있는 조그만 땅 뙤기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저 먼 중동 땅에서 왔을 법한 석유 찌꺼기들만이 온 도시를 뒤덮고 오직 흙 한줌의 숨통조차도 조여매고 있다.

 

괜히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불교에선 전생과 내세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죽어서 흙이 될 수 없고, 풀이나 꽃이 될 수 없는 이 도시중심적 사회에서도 전생과 내세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내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석가모니가 생각한 전생과 내세는 단순한 정신 또는 영혼의 순환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의 분리라는 관념은 철저히 서양 근대의 사고방식이 아닌가!) 육체와 자연의 순환까지 포함하는 언어였을 것이다. 어차피 하얀 가루가 되어 조그마한 항아리 안에 담겨질 육체라면 내세도 기약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물론 어차피 벌써부터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2.

 

 

예전에 <<블루골드>>(모드 발로 & 토니 클라크 저, 개마고원, 2006)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물 사유화의 문제를 다룬 꽤 두꺼운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물 사유화를 추진하는 초국적 기업들을 '현대판 봉이 김선달'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2%, 아니 20% 정도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선달은 대동강물은 멀쩡히 놔두고 양반댁에 물을 길어다 날라주는 짐꾼들에게 동전 몇 닢 받는 걸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여 대동강 물을 4천냥을 받고 한양 상인에게 판 정도였지만, 21세기의 봉이 김선달들은 아예 육지에 있는 물을 고갈시켜서 그 희소성을 증대시키는 악질적인 방식을 택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눈여겨 볼 것은 육지에서 담수(淡水)를 보관할 토양을 없애버린다는 점이다. 도시화로 인해 농업을 위한 경작지는 점점 파헤쳐지고, 그 위에 곧게 뻗은 길과 높은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그 위는 전부 시멘트와 석유 찌꺼기일 뿐인 아스팔트가 덮어버린다. 그리고 도시 생활에 적합한 하수도 시설이 갖춰진다. 그런데 예전엔 비가 오면 빗물을 토양이 잡아두어 지하로 흐르면 그 물이 저수지 등으로 흘러 사람들이 쓸 수 있었는데, 시멘트와 아스팔트는 빗물을 전부 하수도로 내다 버린다. 하수도로 흘러간 물은 대부분 강을 거쳐 바다로 직행한다. 이런 토양의 손실, 그리고 온갖 오염의 원인으로 인해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담수는 점차로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그나마 있는 물의 사용도 온갖 댐 건설, 관개시설 정비를 통해 전적으로 공업적 시설을 비롯한 자본의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된다. 그렇게 해 놓고 사람들이 몸을 씻고, 목을 축이고, 음식을 만들어 먹을 물은 비싼 값에 사서 쓰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봉이 김선달은 초국적 기업들로 집단화 되어 있으며, 좀 더 뻔뻔하고 노골적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 문제의 열쇠는 '흙'에 달려 있다.

 

 


3.

 

 

 

그리고 최근에 읽은 <<이윤에 굶주린 자들>>(프레드 맥도프 외, 울력, 2006)에서는 토양의 획득과 이용이 오로지 초국적 '농식품복합체'(agribusiness)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토양에 대해 자본의 논리가 들어서게 된 것은 세간의 이해와는 다르게 그리 최근의 현상만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 책의 첫 번째 글인 엘런 우드의 '농업 자본주의의 발생'에서는 이런 점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농업 문제를 논의의 바깥으로 밀어낸 기존의 인식에 대해 반성을 요구한다.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이 산업혁명의 신화에 반대해서 자본주의의 기원을 '상업'에서 찾으려 했다면, 오히려 그는 그 반대편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그는 노동을 통해 재산소유권이 형성된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진 로크의 이론은 꼼꼼히 살펴보면 논점이 노동 자체가 아니라 생산적이면서 이윤을 낳는 토지 이용인 '토지 개량'이 소유권을 형성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고 말한다. 토지를 개량하는 적극적인 지주(↔봉건적 지주)는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이 아닌, 자신의 토지와 다른 사람의 노동을 생산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소유권을 확립한다. 개량되지 않은 토지, 임대되지 않아서 이윤을 낳지 못하는 땅은 '황무지'였고, 이러한 토지를 전유하는 것은 개량하는 사람들의 권리이고, 심지어 의무이기도 했다. 영국에서의 토지 개량에 대한 이런 관점은 식민지 뿐만 아니라 본국에서도 토지 강탈을 정당화 했고, 이는 인클로저와 같은 토지 소유권의 재정립 가져왔다.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의존해 왔던 공유적 관습적 토지 이용권이 소멸되는 현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대량의 비농업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생산성을 갖는 농업 부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계 최초의 산업 자본주의가 출현 할 수 있었을까? 영국의 농업 자본주의가 없었다면, 임금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하는 무산대중이 존재했을까?

 

자본주의적으로 개량된 농업은 이제 도시의 무산 대중에게 공급될 식량 생산이나 목양, 원예, 과일 등 고부가가치 농업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 중심에 농업생태체계의 신진대사를 교란시키는 단종경작(monoculture)이 자리잡고 있다. 존 포스터와 프레드 맥도프는 독일의 토양화학자 리비히와 마르크스의 논의를 빌려와 단종경작이 중심이 된 영국의 집약적 농업이 농촌에서 도시로 식량과 섬유의 원거리 수송을 필연화하는 반면, 질소, 인 칼륨 등의 영양물질을 재생시키기 위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주변부의 농촌은 토양의 영양분을 박탈당하고, 중심부의 도시는 쓰레기와 공해로 환경이 훼손된다. (거름이 되지 못해 길거리에 뿌려진 똥 때문에 하이힐이라는 뛰어난(!!) 패션 상품을 만들어낸 프랑스 파리를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의 중심부가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농업은 또 한번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 시기에 탈곡기, 수확기 트랙터 등의 기계가 발명되고, 질소비료, 살충제, 제초제 등 화학적 투입물이 대량 생산된 것을 배경으로 농업과 공업의 '수직적 통합'이 단행된다.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에서 수행하는 영농에서부터 생산물의 수송, 가공,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초국적 농식품복합체를 정점으로 한 수직적 배치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수직적 통합을 잘 설명해 준다.

 

"계약 영농의 본질을 잘 보여 주는 사례는 특히 계약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육계broilers(식육용으로 사육되는 닭)생산에서 볼 수 있다.(... ...)
육계 생산은 타이슨(혹은 유사한 다른 지방 기업들)과 4년 계약을 맺고 생산되는데, 이 계약에 따라 타이슨이 사육할 병아리, 사료, 그리고 수의학 서비스의 독점 공급자가 된다. 타이슨은 공급되는 병아리의 유형, 공급량과 공급 빈도의 유일한 결정자이다. 타이슨은 7주 후에 자신들이 정한 날짜와 시간에 다 자란 닭을 수집한다. 타이슨은 사육되는 닭의 무게를 재는 저울을 공급하고 닭을 싣고 갈 트럭을 제공한다. 농민은 노동, 사육장, 사육장이 세워지는 토지를 제공한다. 사육에 필요한 투입재와 사육 방식에 대한 엄밀한 통제는 전적으로 타이슨의 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생산자(농민)는 사료, 수의약품, 제초제, 농약, 살충제, 쥐약 등 회사에 의해 공급되거나 그 회사의 문건에 의해 승인된 것 이외의 다른 어떤 물품도 사용하지 않아야 하고, 그에 서명해야 한다." 더구나 농민은 회사의 "육계 사육 지침"을 준수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농민들은 "집중 관리" 대상이 되어 타이슨의 "육계 관리 및 기술 자문관"의 직접 감독을 받게 된다."


- 167-8pp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토지는 농민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농민은 '토지 소유자'이다. 즉 요즘엔 옛날처럼 소작농이 없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지주인가? 그렇지도 않다. 지주치고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게 너무 없다. 농업에 투입되는 비료 및 사료, 농약, 농기계, 생명공학 등의 대부분의 투입물를 외부에서 조달해야 한다. 이 과정은 전적으로 시장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며, 생산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농의 출발점이 되는 종자에 대한 정보와 기술은 생명공학기술을 독점한 초국적 종자기업(몬산토, 노바티스, 듀퐁 등. 이들은 미국에서 제약회사 다음으로 높은 이윤율을 내고 있는 기업들이다.)은 종자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끊임없이 강화하려 한다. 그래서 생명공학적으로 조작된 종자를 도입하는 농민은 작물에서 생산된 다음 세대의 종자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양도한다는 계약을 종자 생산자와 맺어야 한다. 이를 어기고 농민이 농사를 지어 얻은 종사를 다른 농민에게 팔거나, 다음해 농사를 짓기 위해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된 2세대 종자를 다시 파종하는 행위는 '해적질'로 매도된다. 그럼에도 영농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비용, 즉 자연재해, 병충해, 농민 건강 악화, 생태 파괴 등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농민이 부담해야 한다. 왜? 농민이 땅 소유자니까....

 

 


4.

 

내 주변에는 숨 쉬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그냥 '땅'들만이 가득하다. 제작년까지 우리집이었던 곳의 뒷 마당에는 엄마가 상추, 고추, 고구마 등을 심어서 우리집 네 식구 먹을 거리는 해결했는데, 그나마 그 땅도 이제 아파트 만든다고 다 밀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숨 쉬고 있는 땅이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땅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외부에서 들여온 비료며 종자기술로 생을 연명하는 땅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그렇게 많은 땅의 숨통을 틀어 막아놓고는 그나마 숨쉬고 있는 좁은 농촌의 땅과 농민들을 무한히 착취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착취한 결과가 엄청 풍요로운 것도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던 생물종의 절반 가까이가 멸종해 가고 있다니 따지고 보면 먹는 우리가 먹는 것의 종류도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오로지 비만과 당뇨병을 재촉하는 것들 위주로 말이다.

 

그런 모습들에 근육을 키우기 위해 닭가슴살과 고구마만을 먹었다는, 얼마 전에 '스타킹'에 출연했던 몸짱의 얘기가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그 때 옆에서 강호동이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 울린다. "그러다 죽어요!"

그렇다. 그러다 진짜 죽는다. 근데 죽어도 그 근육으로 단단했던 몸은 풀도 못되고, 꽃도 못된다. 그냥 흰 가루일 뿐이다. 뭐하는 짓이니 대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요즘 내가 읽은 책 - 1

원래 한 달에 2-3편 정도의 서평을 쓰는게 나름 목표였는데, 이래저래 꼬이다 보니 계획이 헝클어졌다.

 

부족하지만 서평대신 요즘 읽는 책들에 대한 간단한 감상이나 적어볼란다.

 

 

 

백승욱, <<문화대혁명>> (살림, 2007)

 

원래는 큰 맘 먹고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를 읽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 방대한 분량과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사건들이 머리속에 질서있게 정리되질 않아서 하는 수 없이 1권의 3/4 정도만 읽고 포기하고, 아주 슬림하게 문화대혁명을 정리한 이 책을 읽었다.

 

사실 모리스 마이스너의 책에서 내가 읽은 부분에선 문화대혁명 관련한 내용이 아직 시작도 안되었지만, 그걸 읽고 백교수의 책을 읽으니 나름 이해도 빨리되고 도움도 꽤 됐다. <<문화대혁명>>은 2007년에 사서 읽어보다가 중국관련 지식이 일천한 나로서는 사건 전개가 잘 이해가 안됐었는데, 마이스너의 책을 통해 문화대혁명 전사(前史)를 훑어주고 나니 요 책도 흥미롭게 읽히더라. ㅎㅎㅎ

 

백교수가 다른 글에서 말한 것처럼 중국의 근대사는 일국의 역사로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본주의 근대 역사의 뒤엉킨 모순을 가감없이 간직한 역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문화대혁명은 바로 그 정점에 서 있는 사건에 해당한다. 대중의 지식에 대한 권리와 통제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이 외형상 당의 지도에 의해 시작되었음에도 대중의 운동은 당의 통제를 넘어서기 일쑤였고, 결국엔 그 운동이 당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는 비극을 겪었다. 그리고 중국 대륙을 혼란 속으로 밀어넣은 이 운동은 결국 세상 사람들에겐 마오와 그 반대파가 권력을 잡기 위해 벌인 피의 난투극 정도로만 이해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중국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급격하게 몰입하면서 대중들로 하여금 그렇게 상처투성이인 문화대혁명의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 내도록 하고 있단다.

 

뭐 그건 그렇고, 덤으로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에 대한 평도 간단히 덧붙이자면, 난 다른 건 둘째치고 마오가 소비에트의 길과는 다르게 농민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농업이 공업에 의해 예속하되지 않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했다는 점이 꽤 신선하게 다가오더라. 마오의 대중노선도 중요하지만, 그의 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곱씹어 보는 것도 꽤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임승수 외,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시대의 창, 2006)

 

표지 사진에서 느껴지는 저 포스!! 성조기를 휘어잡고 석유방울을 튀기는 대갈장군(!!) 아저씨의 카리스마!! 그러나 나는 이런 찬양조의 표현을 쓰는 것과는 다르게 이 책을 읽고도 결국 차베스에 대한 호감을 높이지는 못했다. 처음엔 차베스에 대한 좌파적 비판자들이 하는 말들에 대해 좀 의구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비판들이 나름 근거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은 표지 사진이 쪼끔해서 잘 안보이는데, (그리고 도서관에서 저 책을 빌려볼때도 유심히 보진 않았지만) 차베스가 붙잡고 있는 성조기 아래 쪽에 줄지어 서 있는 기구 모양의 물체는 석유 시추 장치이다. (일껄??)

 

책에서도 누누히 강조하고 있는 바이지만, 차베스는 세계 최고의 석유 생산량이 있기 때문에 미국에게 그렇게 호기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국 내에서 수행하고 있는 많은 복지 정책들도 사실은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의 이윤에서 나온 것을 사회적으로 분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초국적 에너지기업들이 자행하는 자원약탈을 차단하고 자원의 평등한 분배를 이루기 위해서는 석유회사의 국유화가 필수적이겠지만, (사실 이러저러한 정황을 봤을 때, 국영석유회사의 국유화 말고 뭐 다른 대안이 있을까도 싶다. 여기에는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가 범했던 국유화론에 대한 비판이 끼어들만한 여지는 별로 없어보인다) 차베스의 전략이 국유화를 넘어서 더 높은 지향을 추구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ALBA와 같은 대안적인 무역체제를 만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얼마간 사실상 천연자원을 무기로 미국에 대항하는 지역적 헤게모니를 구축하려는 전략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가 고갈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했을 때, 차베스가 추구하는 대안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이 필수적인데, 그런 노력은 별로 보이질 않는다. 기껏해야 OPEC의 다른 국가들을 추동해서 석유 가격을 적정하게 유지시키려는 것 정도?? 물론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도에 그친다면 자원 민족주의에 불과하지 않는가?

 

 

 

 

 

 

고미숙, <<이 영화를 보라>> (그린비, 2008)

 

그 동안 영화 평론하는 책을 보고 싶긴 했는데, 대부분의 것들이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안 유명한 거나 아니면,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SF영화를 대상으로 해서 싸이버 문화가 어쩌구 저쩌구, 미래 테크놀로지 사회가 어쩌구 저쩌구 요따구 지랄들을 해대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요책은 고런 답답함을 말끔하게 해결해 준 책이다.

 

괴물, 황산벌, 음란서생, 서편제, 밀양, 라디오스타. 대한민국 사람 중에 웬만한 사람이면 이 6편의 영화중에 2편 이상은 봤을 것이다. 나도 괴물과 라디오스타는 극장에서 봤고, 황산벌, 음란서생, 밀양은 인터넷으로 다운받아 봤으며(근데 음란서생은 재미없어서 중간이 그냥 꺼버렸다.) 서편제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틀어줬다(그러나 버르장머리 없는 학생이었던 나는 그 시간에 수학문제 풀고 있었다. ㅋㅋㅋㅋ).

 

이 책에서 뭐니뭐니 해도 최고의 압권은 괴물에 대한 분석이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괴물을 단순하게 '반미영화' 정도로 생각하고 봤다. 한강에다가 포름알데히드를 대량 방사하는 미군놈을 나쁜놈, 거기에 꼭 달라 붙어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아니 감염되어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송강호 잡기에 나선 한국 경찰. 내 눈에도 이 영화는 단순한 '진영론'으로만 분석되는 수준이었다. (단, 어떤 사람들처럼 가족애를 다시금 생각한다든지 뭐 그딴 말도 안되는 감상은 받지 않았다. 고미숙의 말처럼 이런 사람들을 보고 가족애를 느끼기에는 너무 콩가루 집안 아닌가?)

 

그러나 고미숙은 과감하게 여기에 '위생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9.11테러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을 빈라덴 같은 극렬 테러범만 때려잡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부시의 단순 무식한 사고방식는 괴물을 없애기 위해서는 괴물의 바이러스만 제거하면 된다는 위생관념에 그대로 복사되어 있다. 지저분한 것은 못참는다는 미군 장교의 뛰어난 위생관념은 한강에 독극물을 방류하게 했고, (한강은 넓고 넓으니까 괜찮다는 아주 '상식적인' 사고방식에 의해서!!) 그것은 괴물을 낳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매일매일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수세식 화장실에서 쓸려내려가는 똥은 재생되지 못하고 강으로 바다로 흘러내려가고, 우리의 '위생적인' 생활을 위해 쓰인 공업용수들은 온갖 중금속들을 함유한 채로 강으로 바다로 흘러간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생긴 문제에 대한 해결은 바이러스, 세균만 잡으면 된단다. 유오성인가? 한놈만 잡아서 패게??

 

이런식의 분석 방법을 최근 광우병 사태에 대한 분석으로 확장시키는 저자의 사고의 폭에 그저 놀랄 뿐이다. 브라보~~!!

 

하나하나 다 얘기할라 치면 말만 길어질테고,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시길.

 

근데 서편제, 음란서생, 라디오스타에 대한 분석에서는 좀 갸웃해지는 대목도 꽤 되더라. 요건 나중에 글을 써보도록 하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88만원세대>>를 향한 소심한 반론

우석훈, 말의 덫에 빠졌다 (프레시안)

 

또 하나의 세대론? (진보넷 블로그)

 

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레디앙)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서평] 경성 트로이카 - 안재성

 

 

트로이카.

러시아 말로 '삼두마차'라는 뜻이다.

세 마리의 말이 동시에 같은 힘으로 수레를 끌면서 가야하는 구조.

이것이 바로 이재유가 1930년대 경성 일대에서 노동운동을 이끌면서 만들어내고자 했던 이상적인 조직의 형태, 바로 '경성 트로이카'의 모습이다.

 

요새 어쩌다보니 해방전후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책 저책 뒤져보고 있던 차였는데,

안재성의 멋진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우리집에서 버스타고 10여분을 달리면 나오는 도서관에 이 책이 있었고, 나와 경성 트로이카의 만남은 이렇게 손끝의 파르르한 떨림을 느끼면서 시작되었다. ^^;; (이런 책을 가까운 공공 도서관에서 이리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사실 시립, 구립 도서관을 조금만 뒤져보면 이런 보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사실 나는 이 책 제목만 보고 이 책이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소설은 아니라도... 아, 그럼 이 책은 어떤 부류로 넣어야 하나?

단순한 역사책이라고 부르기에는 '역사책'이라는 말이 너무 투박하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핵심 인물로 다루고 있는 이재유라는 인물의 평전인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그에 대한 평전이라고 하기에는 동덕여고 출신들의 운동사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 이 책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그래서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굴의 투사들에 대한 정당한 기록, 바로 진정한 역사 다큐멘터리다. 특정인물에 대한 평전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영웅사관 따위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그 당시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의 고뇌와 열정의 숨결들을 세심하게 포착해 낸, 역사실록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든 첫 번째 느낌은 무엇보다 경성 트로이카의 구성원들 모두 결과적으로 매우 불행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남한에서는 물론이고, 북한에서조차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현상, 김삼룡같이 남한 땅에서 죽임을 당해 북한에선 혁명열사로 추앙받게 된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이들이 지도했던 남로당도 북한 노동당에게는 외면을 당했고, 그렇게 염원하던 공산주의가 북한에서는 실제 너무나 강압적이고 연고주의의 고루한 것으로  서서히 드러나자 낙담하고 운동을 포기한 이들도 있고, 그 이전에 일본 경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트로이카의 우두머리 이재유 등이 있다.

 

나는 어쩌면 우리 현대사에서 이들의 존재가 잊혀진 것이 사회주의 운동의 크나큰 비극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재유를 비롯한 트로이카의 일원들은 철저하게 대중의 힘의 근거한 사회주의 운동을 도모했고, 현장에 기초하지 않은 어설픈 이론주의로 대중을 계몽하려 하지 않았다. 때론 이런 입장 때문에 국제선을 주장하는 다른 사회주의 그룹이었던 권영태 그룹과 마찰을 빚기도 했으며, 이재유는 아직 초기단계에 있는 경성의 노동운동을 지도해야 한다는 이유로, 원산으로 옮겨 이주하 등과 노동운동을 함께하라는 코민테른의 명령도 거절한다. 경성 트로이카는 그야말로 일제치하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자주파 사회주의자'들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에 비하면 사실 김일성 등이 말하는 '자주'는 얼마나 빈약하기 그지 없는가? 그는 압록강 인근에서 무장투쟁을 하다가 탄압이 심해지자 소련으로 쫓겨가 적군부대 밑에서 수십명의 유격대만을 거느리고 활동했을 뿐이다. 게다가 해방 이후 소련의 지시에 따라 국내 여론을 무시한 채 진행된 신탁통치 지지운동은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국내 좌파세력의 괴멸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면 경성 트로이카의 주축 인물이었던 김상룡(당시 남로당 책임지도자)은 국내 인민의 여론을 감안하여 찬탁운동에 신중한 뜻을 내비쳤다.

 

그에 비하면 이재유의 트로이카는 아무리 심한 탄압에도 조선의 혁명은 국내 노동자 인민의 힘으로 이뤄야 한다는 일념으로 경성지역에서 연쇄총파업을 일으키는 등 엄청난 '자주적' 성과들을 만들어 냈다. 어쩌면 김일성 등의 해외파가 이재유 사후에 남은 국내파들을 압도한 것이 우리 역사의 엄청난 비극이지 않나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사회주의는 철저히 대중운동에 기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권영태 그룹과의 통합논의 과정에서도 상부 단위의 음모적 논의를 통한 통합이 아니라, 공동의 대중투쟁 과정을 통한 사상적, 행동적 통일을 꾀했다.

 

2009년 벽두에 80년 전의 혁명가들의 족적을 따라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 경찰의 미행을 피해 신출귀몰해대는 식민지 혁명가들의 장엄한 삶의 파노라마를 보면서 때론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의 역사를 통해 다시 21세기 좌파의 새출발을 상상해 본다. 어차피 이젠 코민테른같은 국제적 지도부도 없다. 다시 이 땅에 진정한 '자주적 사회주의'가 꽃피울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트로이카의 마차를 끌 말들이 될 수 있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서평]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 - 박승옥

운전면허증 따지 않기로 결심하다.

 

얼마 전 학교를 졸업(정확히 말하면 수료. 아직 나에겐 토익시험이라는 장벽이 남아있다. ㅠ.ㅠ)하고 집에 내려와서 지내면서 가족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아온 게 하나 있다. 그건 다름아닌, 수능끝난 고3 수험생들이 제일먼저 자신이 '성인'임을 인증받기 위해 치르는 '운전면허시험'이다. 난 다른 친구들이 하나둘씩 운전면허 학원으로 달려가던 고3 수능 이후, 오전엔 영어회화학원을, 오후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는 친구를 따라 택견을 배우러 다녀서 사실상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데모'하는데만 쫓아다녔으니 운전같은거 배울 세가 있을리 만무하고...

 

'인생 살아가는데 운전면허는 필수다', '나중에 직장생활 어떻게 할라고 그러냐?', '차 한대는 있어야 살 수 있는거 아니냐?' 등등... 빨리 운전면허를 취득하라는 압박의 수단은 다양하다. 우리 가족들도 서서히 이런 말들로 나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맨날 주차 문제 때문에 이웃들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 운전하면서 온갖 짜증 다 부리는 운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운전같은거 진짜 재미없겠다고 생각해오고 있던 터라 최대한 이런 요구들을 회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일단 지금은 토익학원을 다니는 것을 핑계로 운전면허 취득은 내년초로 미뤄 놓은 상태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그 계획을 '취소'했다. 나는 내 소유의 차를 가지는 것은 물론 운전면허도 갖지 않을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내키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이제 아예 가슴속에 도장을 찍었다. '지구 천연자원을 파헤쳐 자연생태계가 그간 쌓아온 저금통장을 순식간에 까먹으며 지구온난화를 부추기는 온실가스를 배출해 나의 숨통을 조여오는 자동차 따위' 타지 않겠다고!! 나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안티-오토모바일리스트다!!!

 

 

 

자본주의의 '화석 에너지 동맹'과 결별을 선언하다!

 

물론 이런 개인적 선언은 뭇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 딱 좋다는 것 정도, 나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힘으로는 아프리카의 기아를 없앨 수도 없고, 지구 온난화도 막을 수 없지만..."으로 시작되는 대기업 홍보 광고따위가 이미 나를 비웃고 있질 않은가? "너 하나가 운전 안한다고 조그만 도시 하나의 대기 오염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으냐?"라고 비웃을 지 모른다. 또는 "너 그런 생각이라면 아예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마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대중교통과도 결별할 만큼의 배짱은 없다. 하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조금씩 그것들과 결별할 것이다. 지금 나는 충분히 운전면허증과 결별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래도 내 삶에 하등의 지장이 없다. (사실 나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 실천을 안 할 뿐이다.) 이를 통해서 나는 지구 탄생 역사 45억년 중에 단 1%도 차지하지 않는 자본주의 근대 역사가 벌이는 화석에너지 강탈 동맹에서 조금이라도 빠져나오겠다는 것이다. 비단 자동차 뿐만이 아니다. 전기, 가스 사용량도 현격히 줄여서 '1인당 전기 사용량이 에펠탑 꼭대기에서 땅에 있는 자동차를 끌어올리는 힘과 같은' 이 정신나간 근대 에너지 동맹에서 서서히 탈퇴할 것이다. 난 이제 그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나 자신도 못 바꾸면서 무슨 세상을 바꾸냐?" 내가 예전에 학교 후배들 갈굴 때 자주 쓰던 말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나도 이걸 실천에 옮기는 셈이다.

 

내가 왜 이렇게 극단적이고 황당하게 들릴 법한 생각을 하게 되었냐구? 그것은 거의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박승옥 저, 녹색평론사, 2007)의 책임이다.

 

 

 

 

 

잔치는 끝났다! 햇빛 에너지로 먹고 살자!

 

내가 이런 생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2008년 5월, 온 나라가 촛불로 타오를 때, 나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겠다고 거리에 섰다. 그러면서 광우병 문제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슈로 떠오르던 전 세계 식량 위기의 문제도 함께 공부했었는데,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 자본주의에 의한 생태계 순환 파괴에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생태위기에 관련된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의 한가지 단점부터 말하자면, 지겨우리만큼 비슷한 얘기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각각의 글들이 이 책을 내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지면을 통해 발표된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거의 모든 장에서 '피크오일'문제가 등장한다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 또한 피크오일 문제는 아무리 입에 쉰내가 나도록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동의하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화석연료 문명, 즉 석유에 중독된 문명이다. 현대산업의 원동력은 값싼 석유이다. 20세기 들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석유는 자동차문명 사회를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주 모든 분야에서 석유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게끔 만들었다. (...)

인류는 수억년 전 만들어진 자연의 보물 석유와 각종 천연자원을 단 몇백년 만에 마구 퍼다 쓰고는 또 쓰레기로 마구 내다버리고 있다. 이는 미래세대의 저금통장을 몽땅 털어먹는 도둑질이자 미래를 소비하는 파렴치한 범죄행위이다. 호모 사피엔스, 즉 '슬기로운 동물'이라기보다는 재생 불가능한 쓰레기를 만드는 동물, 눈먼 소비중독의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정확할 듯싶다.

- 64-65pp

이렇게 석유에 중독된 문명이 석유가 고갈되는 사태가 발생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1956년 킹 허버트가 발표한 대로 1970년 이후 미국의 석유 생산은 정점을 지나고 있고, 다른 국가들도 거의 비슷한 길을 밟고 있는 상황에서 석유 에너지 체제를 고집하는 것은 기름을 지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지금 한국 정부가 하고 있듯이 바다 곳곳을 쑤셔대서 새로운 천연자원의 저장소를 많이 발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에너지로 인해 가속화되는 지구 온난화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게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라는 점을 아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워낙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대중들에게 알려져서 새삼스러운 면도 없진 않지만, 이런 사실을 경제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기존의 주류 경제학은 자연자원을 '무상의 선물'로 여기기 때문에(이에 대해서는 존 벨라미 포스터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석유 에너지의 '공급'을 변하지 않는 사실로 고정시켜 버린다. 그래서 주류 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의 성립과 석유 체제의 확립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이 없다. 석유를 이용해 달리는 자동차를 보급하기 위해 철도를 매입해 철도 노선을 없애버렸던 석유메이저들의 만행은 그저 자유로운 시장경제 활동의 하나로 인식될 뿐이니 말이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석유 메이저들이 아무리 주가를 올리기 위해 석유 매장량을 속일지라도 진실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저자가 주장하는대로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햇빛 에너지를 비롯한 재생가능 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 햇빛 에너지 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겐 '똥'으로 바이오매스 에너지도 얻을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바로 "똥은 에너지다"라는 장인데, 저자는 이 글을 통해, 자본주의 근대 문명이 우리 사회에 이식되면서 도입된 수세식 화장실은 사실상 퇴비나 동물 사료로 쓰일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원인 '똥'을 폐기물로 인식하게 하면서 물질의 자연적 순환을 가로막는 '퇴보'의 상징이라고 말한다.(예전에 <<소금꽃 나무>>의 저자 김진숙 지도위원이 강연할 때 수세식 화장실은 초국적 자본의 개수작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러나 볏집이나 왕겨등을 같이 넣어 똥을 썩히면, 여기서 발생하는 메탄가스는 전기로 이용할 수 있고, 남는 찌꺼기는 유용한 퇴비가 된다. 나는 유럽 몇몇 나라의 사민주의적 시스템을 동경하진 않지만, 이들 나라로 부터 배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똥'을 에너지로 활용하는 자연친화적 시스템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하루 빨리 이들 나라들 처럼 국가가 재생가능 에너지를 고가에 매입해 주는 전기매입법이 도입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생태적 전환,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사실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과 재생에너지 체제로 전환이 중요하다는 말은 하는 것은 쉽지만, 그 길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를 말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나야 일단 운전면허 안따기 부터 시작한다지만 이걸로만 그친다면 그냥 쇼에 불과하지 않겠나? 저자가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재생가능 에너지 체제는 지금과 같이 한전과 국가가 주도하는 에너지 독재체제가 아니라 동네에 마련된 소규모의 발전소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에너지 자립체제여야 한다. 제주도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서 바다에 해저케이블을 깔아놓는 해괴망측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에너지 체제의 생태적 전환은 대부분의 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첨단 기술 개발 여부에 달렸다기 보다는 석유 에너지 체제를 유지하려는 거대 자본과 국가의 권력을 민중들의 운동을 통해 얼마나 약화시킬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래서 저자는 자연스럽게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진로에 대해 고민한다. 그저 신사회운동, 부르주아 시민운동의 하나 쯤으로 생태운동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금융위기/생태위기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노동운동, 농민운동도 생태적 전환을 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되는 지점은 바로 '폭력시위'에 대한 것인데, 저자는 단호하게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폭력시위는 그만두고, 차라리 전경들 먹는 식단 재료들을 유기농으로 바꾸는 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고 잘라 말하기도 한다. 말의 뉘앙스로 봐서는 기존 운동방식을 비판하고 생태적 전환이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든 비유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현재 농민운동, 노동운동이 폭력적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조건에 대해 너무 쉽게 간과하고 보수언론과 비슷한 방식으로 일갈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된다.

 

올 해 초 민주노동당이 분당하고 진보신당이 결성될 시점에 '녹색'인사로 박승옥씨가 참여하는 문제를 두고 노동운동 진영에서 말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들의 논지를 대략 요약하면 '박승옥은 너무 우파 아니냐?'라는 거였다.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생태운동에 무게중심이 가 있는 사람을 '우파'라고 지칭하는 것도 그렇고, 그 반대편에서 노동운동의 행동양식을 무조건 '폭력적이다'라는 말로 몰아세우는 것도 보기 안 좋긴 마찬가지다. 서로의 조건을 이해하면서 변화의 지점들을 찾아갈 수는 없을까?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넘어서야할 또 하나의 벽이 아닌가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서평] 남쪽으로 튀어! - 오쿠다 히데오

           

 

 

 

"아무튼요. 납부서를 드리고 가겠습니다."
"웃기지 마. 그렇다면 왜 세금으로 징수하지 않지? 나중에 임의로 납부하게 하는 것 자체가 당신들 뒤가 구리다는 증거야."
"그러니까요, 임의가 아니라 의무라니까요, 국민의 의무!"
"그럼 나는 국민을 관두겠어." 아버지가 가슴을 쭉 젖히며 말했다.
"예?" 아주머니의 목이 앞으로 쑥 내밀어졌다.
"국민이기를 관두겠다고. 애초부터 원했던 일도 아니었으니까."
"...어디, 해외로 이주하시려고요?" 갑자기 목소리 톤이 낮아진다.
"내가 왜 해외에 나가? 여기 거주한 채로 국민이기를 관둘 거야."
아주머니는 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채, 움직이기를 관두고 있었다.

(중략)

"그게 대체 무슨 농담이세요?" 아주머니가 당황하고 있었다.
"농담이 아냐. 오래 전부터 일본 국민을 관둘 생각이었어.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우에하라 씨, 일본사람..., 맞으시죠?"
"그래. 하지만 일본사람이 반드시 일본 국민이어야 할 이유는 없어."

(중략)

"사람을 저희들 맘대로 국민으로 만들어놓고 이래저래 세금을 뜯어 간다니까. 그러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피지배층이라는 얘기야? 정말 웃기고 있어."
아버지는 아직도 고함을 치고 있었다.

 

 

 

위 글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소개하기 위해 본문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왠지 불편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우에하라 이치로의 행동이 1권에서야 위의 글에서 보여지듯이 적잖이 괴짜스럽고 황당한 것이긴 하지만, 2권에서는 좀 얘기가 다르지 않나? 알라딘의 책소개에는 1권이든 2권이든 모두 저런 자극적인 부분만을 인용해 사람들의 충동구매를 유도하고 있다.(물론 1권에서는 아들 지로가 친구들과 여탕 훔쳐보기를 시도하는 것, 중학생 불량배와 벌이는 스릴러 등을 통해 다양한 코미디를 선사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아니 꽤 많다!!) 내가 서평을 이렇게 까칠하게 시작하는 것은 알라딘에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고, 이 책을 통해 느낀 감상이 저렇게 웃고 넘길 수 있을 만큼 간단하거나 코믹스러운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매우 '강하게' 들어서이다. 분명 <남쪽으로 튀어>는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엽기적인 전직 운동권 행동대장이 펼치는 시트콤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린 단순 성장 소설도 아니다. 그것과 대비되는 간단한 말로 표현하고 싶은데, 어휘력이 거기까지 도달하기에는 심히 딸리는 관계로 잠시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우에하라 이치로는 전직 과격파 운동권 행동대장이다. 조직 이름도 무시무시하다. '혁공동'(지금 옆에 책을 두고 있지 않아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아마 '아시아혁명공산주의동맹'의 줄임말이다.) 난 지금껏 이렇게 무시무시한 어감을 가진 조직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뭐 이건 약간 조폭 이름 같지 않나? 그러나 그는 지금은 이제나 저제나 방바닥만 긁고 있다. 가끔씩 아들을 붙잡고 프로레슬링을 하자고 덤벼들지만 아들은 전혀 내켜하지 않는다. 직업은 프리라이터? 뭐 가끔 잡지사에 글을 기고하거나 소설 쓰기를 하는데, 소설은 출판 직전까지 갔다가 퇴짜를 맞는다. 국민연금 담당 공무원이 집에 찾아오면 저렇게 일반인들의 상식에선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얼어버리게 하거나, 아들의 수학여행비가 높게 책정된 것을 보고 학교가 여행사와 뒷돈거래를 한 의혹을 밝혀내겠다고 학교에 찾아서 교무실을 뒤엎어 놓곤 한다.

 

내가 잠깐 다른 이들의 블로그, 카페등을 둘러보니 이 책에 대한 감상들은 대층 이런 이치로의 개인적인 기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더라. 그러나 이치로의 이런 기질은 1권 초반에 인물을 소개하기 위한 워밍업이고, 진짜 이야기는 2권, 진짜 남쪽으로 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이치로가 혁공동 시절 후배인 홍길동(지금 이름이 생각이 안나서 그러니 대충 이렇게 부르자.)을 잠시 집에 기거하게 해 주면서 일은 꼬이게 된다. 홍길동은 여전히 조직활동을 하고 있고, 조직 중앙으로부터 중대한 지령을 받고 잠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 지령이란 반대파 수장을 습격하는 것! 그러나 이 임무 수행은 예상치 못한 살해로 이어지고, 언론들은 이 사건을 "한물 간 운동권들의 혁명놀이"라고 조롱한다. 한 때 이름을 날리던 혁명 투사 이치로는 이 일로 인해 인생의 앙숙(??)인 공무원, 경찰, 공안들과 또 다시 지겨운 실랑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일로 인해 그의 아들 지로는 불량배 중학생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 더 이상 '혁명'을 믿지 않는, 완벽한 자유를 꿈꾸는 아나키스트 이치로는 이 사건 이후 가족들과 함께 오키나와의 작은 섬으로 떠난다. 헌데 그는 혈통이 그 지역의 유명한 반골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거의 무상으로 거의 모든 의식주를 제공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치로에게만 주어지는 특혜라기 보다는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이 섬의 살아가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치로가 이 섬에 거주하는 그 순간부터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주거권 투쟁". 본토 사람들과 결탁한 지역의 건설회사가 이치로가 기거하게 된 집 터를 중심으로 호텔을 건설하기로 하고 막무가내로 집을 철거하려 드는 것.

 

그런데 이 '주거권 투쟁'은 도시의 변두리에서 일어나는 숱한 분쟁중에 하나에 불과했다면 누구도 관심갖지 않을 것이겠지만, 이치로의 과격한 행동과 언행, 그리고 섬에서의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의 모습 때문에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그의 투쟁은 거의 생중계 감이었고, 한 장면 장면 마다 라이브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전국으로 전파를 탄다.

 

물론 그의 투쟁은 명목상 패배로 끝나지만, 이들은 파이파티로마라는 또 다른 '남쪽'을 향해 다시 떠난다. '일본 국민'에서 탈퇴하고자 하는 이치로가 또 다시 진정한 자유를 찾아 떠나가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 쯤되면 나는 완벽한 스포일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ㅋㅋㅋㅋㅋ 그러나 같은 내용을 읽더라도 독자에 따라서 느끼는 감정과 여운들은 제각각일 것이므로, 나의 스포일링이 그닥 다른 독자들의 독서를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치로의 주옥같은 멘트들에 뻑 가곤 한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2권 245p)

 

지로, 전에도 말했지만 아버지를 따라하지 마라. 아버지는 약간 극단적이거든. 하지만 비겁한 어른은 되지 마. 제 이익만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라고.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  (2권 288p)

 

진보넷 블로그를 제 집 드나들듯이 하는 많은 동무들께서는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멘트들이지만, 오늘날 같이 불의를 보면 엉덩이가 무거워지는 사람들에게는 피가되고 살이되는 말들이 아니겠는가? 정말 사람들이 이런 걸 보고 느끼는게 있어야 될텐데 말이다....

 

하지만 왠지 나는 이치로의 행동을 보면서 씁슬해 지기도 하고, 답답해지기도 한다.

 

 

우익과는 요란하게 한바탕 벌렸다. 가두용 차량을 집 가까이 들이대고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지르겠다니 무슨 망언이냐!"라고 마이크로 꽥꽥거리는 얼룩덜룩한 군복 차림의 아저씨에게 양동이로 물을 퍼부은 것이다,
"대기업 건설사에 빌붙어서 먹고사는 이 우익 놈들! 너희는 야스쿠니를 놓고 떠들 자격이 없어!"
당장 몸으로 들이박는 싸움이 벌어져서 경찰이 달려와 필사적으로 떼어놓았다. 결국 폭력은 쓰지 않겠다는 규칙을 정한 끝에 메스컴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대 설전을 펼치게 되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삼십여 분 뒤에는 서로 어깨를 두드려 주는 사이가 되었다.
"우에하라씨, 당신은 어떻든 단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니까 참 대단해"
우익은 마지막에는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 주의나 주장의 차이보다 '폭력적 성향의 연대감'이라는 공감대가 더 컸던 것 같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동질의 인종을 구분해내는구나, 라고 지로는 생각했다.  (2권 222p)

 

박노자 교수가 말했듯이,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라이벌인 김일성과 박정희가 아이러니하게도 닮은꼴인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개인적인 아나키즘, 돌출적 행위가 우익과 폭력적 성향으로 수렴하는 것도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언론들은 투쟁 그 자체보다는 이치로의 개인적인 기질, 라이프 스타일 따위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 결국 언론들은 본래 취재 목적이었던 이 섬의 환경단체 취재는 아예 쌩까버리고, 마치 스포츠 중계하듯이 이치로의 투쟁, 아니 싸움(나는 투쟁과 싸움은 전혀 다른 뜻을 가진 언어라고 생각한다.)을 보도한다.

 

 

아버지의 인터뷰는 열기가 대단해서 그 큰 목소리가 한참 떨어진 지로 일행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 자들이 우타키를 부순다면 나는 그 답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질러주지. 일이 그렇게 되면 죄다 케이티 책임이오. 그만큼 우타키는 우리야에야마 사람들의 정신적 뿌리 같은 것이야!"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는 건가. 이러다가 또 다시 공안이 들이닥치는 건 아닐가. 리포터 까지 곁에서 아버지를 슬슬 부채질하고 있었다
"우에하라 씨의 삶을 반권력적인'슬로 라이프'의 실천으로 생각해도 될까요?"
"흠. 그렇지 마침 좋은 말을 하시는군.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슬로 라이프요"
분명 이것으로 세무서도 적으로 만들었다.  (2권 204p)

 
물론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것'이 그야말로 참된 슬로 라이프라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치로는 이런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자기 혼자 스타가 되고, 호텔 건설 반대 운동을 언론의 좋은 상품화 꺼리를 제공해 줬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이치로가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다고 볼 순 없지만,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을 자기의 (오로지 개인의)  저항적 행동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이치로가 이사오기 전부터 반대운동을 이끌어 오던 지역의 환경단체는 분통을 터트린다. 이치로가 운동을 이용해 먹는다고 했던가? 배신자라고 했던가? 여하튼...

 

그런데 독자된 입장에서 상황이 또 애매한게, 딱히 이 환경단체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은 안 든다는 것이다. 이치로가 이 빈 집에 '입주'하자마자, 환경단체 간부들이 찾아와 행동대장을 맡아줄 것은 간청한다. 그러나 이치로가 이들을 단박에 퇴짜 놓으면서 하는 말, "당신들은 운동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어. 공산권이 망하고 자기 구실 찾기 위해 끌어들인게 환경이고 인종이고 뭐 그런 것들이지. 사람들은 개인단위로 자유로운 것이 진짜 자유로운 거야"

 

사실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나에겐 이 부분이 가장 가슴아프고도 고민스럽게 하는 구절이었다. 나를 포함해 소위 '운동권' 이라는 사람들에게, 과연 진정성이라는 것이 있는가? 나는 그들이 꼭 이치로처럼 아나키스트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운동을 통해 또 다른 권력의 성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운동'이 만들어주는 도덕성의 외피 속에 숨어, 자신들의 왜곡된 욕망을 투사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권력의 새로운 수임자가 되는 것을 꿈꾸는 것을 넘어, 이치로처럼 '남쪽'을 지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말이다. 체 게바라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라고 한 것에서 이치로가 anti-리얼리스트가 되면서 과잉된 불가능한 꿈만을 꾸었다면, 지금의 운동권, 아니 운동'꾼'들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가능한 꿈, 아니 가능한 '계획'만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여기서 최근의 두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하나는 얼마전 국군의 날 행사에서 알몸으로 '군대폐지' 퍼포먼스를 벌였던 강의석 군이고, 또 하나는 공금횡령 스캔들로 시민운동의 도덕성에 먹칠을 한 환경운동연합이다.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치고 강의석의 의도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많은 이들이 강 군에게 씁쓸한 마음으로 훈계를 했던 이유는 '운동'은 '함께 꾸는 꿈'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환경운동연합 사건이 안타까운 이유는 '환경'과 '생태'라는 모두의 꿈을 권력의 고지로 향하는 사다리로 남용했던 이들의 결말이 안겨주는 씁쓸함 때문이다.

 

<남쪽으로 튀어>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외로운 줄타리를 해야 하는 우리에게 숱한 고민을 안겨 줄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라도 이치로가 이렇게 말해주길 바란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자신만의 파이파티로마를 지니자."라고 말이다. 그래야 조금 위안이 될 것 같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예전서평] 사이버 맑스 - 닉 다이어 위데포드



닉 다이어-위데포드 저/신승철, 이현 역 | 이후 | 2003년 6월

책소개

토플러의 『제3의 물결』로 대변되는 탈산업주의 미래학은 '예견'이 아니다.
닉 다이어-위데포드는 정보혁명이 낳은 놀라운 성과를 인정한다. 그렇지만 정보혁명이 유토피아와 다름없는 지평을 열어줄 것이라는 탈산업주의 미래학의 주장에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탈산업주의 미래학은 자본주의에 맞서는 대중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한 '계획'이다. 현재의 경향에서 자연스럽게 추론되지 않는 미래의 모습을 단언하는 미래학은 그저 자본주의가 원하는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미래학일 뿐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 미래학은 자본주의가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적이 없다.
맑스주의자들도 정보혁명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기술혁신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은 첨단기술과 지식,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계가 지닌 지배의 잠재력과 해방의 잠재력을 노동과 자본의 투쟁에, 그리고 또 다른 종류의 혁명인 코뮤니즘 혁명에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정보혁명 이론가들과 구별된다. 정보혁명 이론가들과는 달리, 맑스주의자들은 정보혁명이 야기한 '현실의 운동'을 좇아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본이 주축이 되는 '타인들의 전지구화'가 아니라, 우리가 주축이 되는 또 다른 형태의 전지구화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 왔다. 즉, 맑스주의 미래학은 자본주의 자체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해 왔다.
=========================================================
 
책소개를 YES24에서 퍼왔는데 이 책소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빼놓은 것 같다. 이책의 2장 '혁명' 은 앨빈 토플러, 다니엘 벨, 프랜시스 후쿠야마로 대표되는 정보혁명가들의 주장들을 싣는다. 이른바 역사의 종언이라는 소리를 지껄여대며 이 시대는 탈산업사회로서 산업사회에서의 계급투쟁은 소멸됐으며, 맑시스트들이 떠드는 계급중심성, 토대-상부구조론은 이제 한물 간 옛말이라고 주장한다. 정보기술은 인간을 고된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3장 '맑스주의들' 에서는 이에 대한 맑시스트들의 반론을 싣는다. 에르네스트 만델과 같이 자본주의를 필연적으로 패배시킴으로써 절정에 다다를 변증법적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과학적 사회주의적 입장,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같이 기술이 자본주의적 지배의 도구로 보는 비판이론의 주장(저자는 이들을 네오러다이트라고 명명한다.), 기술의 중재를 통해서 노동과 자본이 서로 화해할 가능성을 내다보는 포스트포드주의. 그러나 저자는 이장의 막판에 가서 이 세가지 주장도 첨단기술 자본주의에서의 투쟁에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이어지는 장을 통해 저자가 옹호하는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적 입장이 드러난다. 안토니오 네그리같은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 들의 문헌을 주로 인용하면서 자본주의가 그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서 첨단기술을 발전시키는 측면이 있는 반면, 역으로 그에 대한 저항투쟁의 가능성 또한 첨단기술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현준이형이 준책인데 현준이형이 준 책중에 유일하게 제대로 읽은 책이다. ㅡㅡ;; 그 이유는 그나마 이 책이 젤 쉽기 때문이었다. ㅎㅎ
 
근데 생각해 보면 저자가 주장하는 자율주의도 별거 없는것 같다. 얼마전에 읽었던 킴무디의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아마 영문 책 제목은 Workers in Lean World 인듯...) 에서 주장하는 사회운동적 노조주의하고 하나도 다를게 없다.(이 책의 저자도 킴무디의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그 내용을 옹호하고 있다.)
 
하여튼 지식인도 별거 아니라니까 ㅋㅋ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예전서평]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 공지영

공지영 저 | 풀빛 | 1989년 12월 초판 발행
 
책소개
80년대라는 특별한 시기에 20대를 맞아 '정의'라는, 그 추상적이고도 지순한 이름을 위해 온몸을 던졌던 젊은이들의 이야기. 시대와 역사를 거슬러 올라야 했던 청춘의 방황이 얼마나 처절하고 힘겨웠던가를 드러냄으로써 그 '방황' 속에서 일구어내는 어둠 저편의 내일은 또 얼만큼 아름답고 값진 것인가를 이 소설은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작가 소개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창작과 비평〉에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시대와 사회의 모순을 개인의 삶 속으로 수용하면서 진지하고 치열하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모색하는 소설들로 주목받아 왔다.

사회 변혁이라는 거대 명제 앞에서 고뇌하던 80년대 청춘들의 삶을 이야기한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와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을 비롯해 여성 문제를 90년대 한국 사회의 중요한 쟁점으로 끌어올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착한 여자》, 《봉순이 언니》 등을 발표하며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잡았다. 이밖에도 작품집 《인간에 대한 예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와 산문집 《상처 없는 영혼》등이 있다.
===========================================================
얼마간 공지영 소설에 매료되어 공지영의 초기작품인 "더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까지 읽게 되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 만큼 재밌지는 않은것 같다.
 
이 소설에서 민수라는 여자는 흡사 모래시계에서 고현정을 보는 것같다.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서 명문대에 입학하고 그리고 운동써클에 들어가 사회와 역사의 모순에 눈을 떠 데모질에 나서고... 짭새들에게 잡히면 아버지 빽으로 훈방되고... 여기에 적절한 삼각관계 연예까지... 하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방황'이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다 방황하고 있다. 열성적인 운동꾼이었던 인경은 돈많은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면서도 옛 애인인 지섭과 그와 같이 했던 치열했던 고민했던 시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섭은 군대를 제대했지만, 인경은 다른 남자와 결혼 하려 하고 주위에 수많은 동료들은 소리없이 하나둘씩 어디론가 끌려가선 주검으로 돌아오고, 몰락한 집안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가족들의 모습에 지쳐가고 있다. 그리고 민수를 비롯한 야학을 하고 있는 학생들은 "넌 기꺼이 민중이 될 수 있겠니? 기꺼이 노동자가 될 수 있어?" 라는 어이없는 선민의식적인 고민을 털어놓는다...
 
공지영의 초기작품이 잘 다듬어 지지 않아서 일까? 인물들은 계속해서 푸념만 늘어놓는다. 술마시고 토악질을 해가며 치열하게 문제의식을 쌓아가긴 하지만...
 
민수의 마지막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나의 방황은 이해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아름답지 않다고. 이 어두운 죽음의 시대에 결코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고."

그래... 우리에게 방황은 더이상 미덕이 아니다. 나에게도 내 방황이 아름답길 바라던 그런 시기는 이제 없다. 나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예전서평] 신자유주의적 '반격' 하에서 핵가족과 '가족의 위기' - 이미경




이미경 지음 / 공감 / 1999년 11월


저자소개
이미경 - 1965년 서울 출생. 84-89년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수학하고 1994년 한신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과천연구실 연구원으로 있다.

 
목차

서문

신자유주의적 '반격'과 페미니즘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
페니미즘의 전통
- 자유주의 페니미즘/급진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
성적차이의 페미니즘 : 또 다른 전통을 찾아서

아메리카 핵가족의 역사
핵가족의 전사
핵가족의 형성
- 가족임금과 국가정책/성혁명/핵가족의 황금기 : 1950년대
'가족의 위기'

남한에서의 핵가족과 '가족의 위기'
핵가족 논쟁
핵가족의 변형
- 가족형태/가족주의 이데올로기
'가족의 위기'
여성운동에 대한 반성

참고문헌

 
본문읽기
서문
서문

아메리카에서 '가족의 가치'라는 정치적 켐페인이 출현한 것은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위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1970년대였다. 이후 친가족 운동은 정치적 켐페인에 그친 것이 아니라 1080년대 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으러 자리잡았고, 1990년대에는 신자유주의를 보츙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다.

1992년 아메리카 대통령 선거전은 본격적인 가족 논쟁의 전장이 되었다. 경제문제와 윤리문제라는 피상적인 대립구도 속에서 가족의 가치는 모든 정치적 쟁점에 우선하는 '새로운 합의'로 주창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합의에 의해 옹호된 기족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이'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이상한 조합이었다. 이러한 가족 모델이 실재로 어떤 것인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사실 상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족은 역사상 존재해본적이 없는 구조와 가치의 우스꽝스러운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어떤 가족 형태도 이와 유사한 것은 없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합의가 주창하는 가족 모델은 식민개척기의 확대 가족으로 해석도기도 하였고, 전형적인 근대의 핵가족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아메리카의 여성학자인 스테파니 쿤츠는 신자유주의적 가족 논쟁에 대한 반론을 가족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가족 논쟁의 투사적 기원은 아메리카적 핵가족이었다. 아메리카적 핵가족은 세계경제의 헤게모니적 국가에 적합한 노동력 재생산 제도로서 역사적으로 특수한 두 구성요소를 갖고 있었다. 핵가족의 구성요소 중에서 그 물질적 토대로서 가족 임금은 1970년대 불황이후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있었다.

그리고 핵가족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로서 1차 성혁명은 1920년대 진행된 구애 구조의 전환에서 유래하는데, 1960년대 이후 진행된 2차 성혁명은 핵 가족의 가치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아메리카적 핵가족은 물질적으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해체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가족의 가치를 옹호하는 상황은 매우 위선적...
==========================================================
 
이 책을 대전에서 사 보려고 시내에 있는 대형 서점을 다 뒤졌는데도... 없었다. 하긴 그 서점들에 가서 도서검색대에서 출판사명란에 "공감" 이라고 쳐도 한 5개 정도 목록에 나왔나? 그중에 3개 정도가 재고가 '0'이라고 나왔으니... 기대를 안하는게 좋지...
 
그래서 저번에 서울 올라갔을때 논장에서 사고야 말았다. 책 두께도 면도날처럼 얇고 글씨도 큼직큼직해서 읽기 좋다. 근데 100페이지 밖에 안되는 책이 6000원이나 받아 먹다니.. ㅡㅡ;;
 
이 책에서 상정하고 있는 아메리카적 핵가족이라는 것... 한국적 상황은 나름대로 특수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상당히 신선한 내용이었다. 첫장에서 설명하는 페미니즘 전통에 관한 생소한 용어때문에 애를 좀 먹긴 했지만...
 
포스트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봐야 겠다. 뭔지 도대체...
 
역시 가족임금제... 근데 생계부양자에게 주어지는 가족임금이라는 것도 그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부족한 임금임에도 가족임금제에 덧씌워진 이데올로기가 엄청나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 외부에서 공적영역을 통해 지원되던 안정망도 신자유주의시기에 그 기반이 무너지고 나자 그 모든 책임을 해체되고 있는 핵가족(독신가정, 한부모가정 등등...)에 전가하는 모순들...
 
가장 맘에 드는 부분은 마지막 부분의 '여성 운동에 대한 반성'이다. 남한 페미니즘의 성격을 규정한것은 1973년 시작된 가족법 개정운동 이었는데, 이것은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불혼의 폐지, 친권 행사에서 부모의 동등한 권리... 등을 주장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남한 페미니즘이 가족법 개정이라는 쟁점에 매몰되어 있었다는것. 이런 문제점은 이후 남한 여성 운동에서 단일 사안 중심의 투쟁에 매몰되는 경향을 낳았다는 것. 이런식의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이후 10대 미혼 여성 노동자를 극심하게 탄압하는 가부장적 노동 구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고 한다...
 
절대 동감이다. 지난번에 철학입문 레포트때문에 정정헌을 읽은 적이 있는데 '페미니즘에 대한 일반적 편견'에 대한 반박을 하는 글이 있었다. 그 글의 필자는 페미니즘 운동이 다른 부문운동들과 연계해서 변혁적 관점을 가지지 않아도 페미니즘 운동 하나 만으로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위와 같은꼴이 났겠지...
 
요즘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 인가 하는 단체에서 여성의원 102명 당선운동하는 것도 이해가 안간다. 그여자들이 국회의원되면 여성해방 되나?
 
하여튼 이해가 안간다... 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예전서평]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 박노자



박노자 저 | 한겨레신문사 | 2002년 06월


저자소개

본명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영화 <춘향전>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를 거쳐 학생과 강사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던 그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사를 보는 거시적인 혜안 속에서 치열하게 인문학적 성찰의 삶을 살아온 그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등의 저서를 통해 '토종' 한국인보다 진한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책소개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박노자가 두번째 책을 펴냈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태생으로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박노자는 한국 사회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날카로운 논리로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다.

박노자는 이번 책을 통해 북유럽식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노르웨이 사회의 이모 저모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박노자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상하의 질서와 복종을 강조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문화와 달리, 다양성의 존중과 소박한 삶을 생활의 주요 철칙으로 여기고 있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평등한 인간 관계다. 특히 외국 매춘부들의 인권까지 지식인들의 주요 의제가 되고 있는 지식인 사회의 선진성과 교육, 병역, 인권 등 사회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박노자는 북유럽 사회에 비추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되돌아보는데 그치지 않는다. 외견상 선진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제3세계에 대한 차별, 인종주의와 극우 민족주의의 발호 등을 예리하게 포착해 내면서 평화로운 일상에 젖은 그들보다 모순과 부조리를 뛰어넘고자 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더 큰 희망이 있음을 역설한다.




목차

1부 또 다른 세계 북유럽
   북유럽을 가다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2부 과연 그들은 건강한가
   유럽사회의 이면
   제3세계에 대한 이중 잣대
   인종차별과 민족주의

3부 반폭력 평화를 위하여
   악의 씨앗, 폭력에 반대한다
   테러리즘을 보는 또다른 시각
   양심의 권리가 더 신성하다
   폭력을 거부하는 마음은 인간의 동심이자 본심이다

- 보론 : 좌파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단상-노르웨이, 유럽, 세계...

==========================================================

먼저 빌려온 정말 재미없게 생긴 두권의 책(마르크스주의와 공황론, 자본론 연구)을 뒤로하고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박노자 선생님의 책을 먼저 읽었다. 역시 박선생님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다. 정말 감동 감동★☆♥♡♣♧

흔히 우리가 서양 역사를 볼때 주로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보곤 한다. 영국은 초기 자본주의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던 나라로서, 독일은 악명높은 파시즘 히틀러 때문에, 프랑스는 현대 시민사회를 추동한 각종 혁명이 있었던 나라로서...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노르웨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냥 추상적으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정도로??

이 책만 보면 노르웨이는 정말 세계 최고의 인권, 복지, 평등, 자유의 나라이다. 왜일까? 그건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기" 때문이다. 좌우, 그러니까 사상과 신념의 차이는 인정하고 그래서 보수정당도 있고, 사회주의 좌익당도 있지만, 상하관계, 체통과 체면, 권위를 중요시하지 않는 노르웨이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공산당 기관지에 보조금을 지급할 정도로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시위와 데모가 일상적인 사회생활일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교육장소가 되기도 한다. 또 누가 학생이고 누가 교수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민주적이며, 학생이 교수의 수업방식에 대해 실랄하게 비판을 해도 결코 피해를 받지 않는다.

이 책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노르웨이 사회의 장점, 또는 그 이면일수도 있고, 이를 통해 고찰 해 볼 수 있는 민족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전쟁, 평화, 폭력, 양심적 병역거부, 여성문제 등등등....

박노자의 책을 보면 일관되게 등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서구의 사회진화론.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를 강조하는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근대화를 이룬 서구 사회는 그 논리를 그대로 제3세계 아시아, 중동 등에 이식하려 한다. 그러면 꼭 그는 한국 근대사를 집고 넘어간다.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등 개화파 근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근대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은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그대로 배껴와선 한국 민중들을 핍박하고 압박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주장은 당연히 친일, 친미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고, 우리 고유 문화의 가치들을 너무나도 쉽게 용도 폐기 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그동안 내가 생각하던 '전통문화의 보수성'이란 생각도 조금은 재고 해 봐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내용이 있어 소개하겠다. 노르웨이의 의사인 길베르트와 후숨은 아프간 탈레반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에도 나름의 명분이 있다라는 주장을 해서 노르웨이에서 이슈화 된적이 있었다. 그들은 이런 예를 든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무자비하게 침략한 1982년에 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그때 환자 중에 '타리크'라는 레바논 소년이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아이의 부모와 가족, 친척과 친구들을 섬멸해 버렸다. 타리크는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 수술을 여러 번 거듭한 끝에 그를 어느 정도 치료했지만 끝내 오른손은 못 쓰게 됐다. 그런데 그 애는 말도 안 하고 음식도 안먹었다. 완전히 절망한 것이다. 어느날 나는 그에게 의욕을 주기 위해 '왼손으로 총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아니는 그야말로 살아났다. 나는 그때 그 아이가 싸움에 몰두하다 죽으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난 말을 할 수 있는가?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그 아이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