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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8/16
    이택광, <무례한 복음>(1)
    구르는돌
  2. 2009/08/03
    소설가 김훈(2)
    구르는돌
  3. 2009/07/24
    요즘 읽는 책 (2) - <보건의료: 사회생태적 분석을 위하여>
    구르는돌
  4. 2009/07/23
    요즘읽는 책(1) - <직선들의 대한민국>
    구르는돌
  5. 2009/07/06
    김훈의 <남한산성> 읽기
    구르는돌
  6. 2009/06/10
    서사연,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 (새길, 1991)(2)
    구르는돌
  7. 2009/06/01
    이명원, <말과 사람>(2)
    구르는돌
  8. 2009/04/29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그리고 긴급출동 SOS(5)
    구르는돌
  9. 2009/03/30
    반다나 시바,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1)
    구르는돌
  10. 2009/03/14
    관심가는 책 -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2)
    구르는돌

이택광, <무례한 복음>

 

 

한참 한글2002를 켜놓고 마이크 데이비스의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3장을 요약정리 하고 있다가, 너무나 반복적으로 나오는 AFL-CIO가 민주당과 붙어먹으려다 뒷통수 맞았다는 얘기들에 질려서 간단히 서평이나 써볼랜다.

 

사실 이 책은 이택광 교수의 블로그(wallflower.egloos.com)를 하루에 한번씩 꼭 출석체크하는 사람에겐 별로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없는 책이다. 왜냐면 이 책에 실린 글이 대부분 블로그에서 한번쯤은 언급했던 내용들을 정리해서 시간순서대로 실은 것이기 때문이다. 난 솔직히 저자가 여기저기 신문같은 데에다가 기고한 칼럼을 묶어서 책으로 내는 것은 어떤 면에선 참 뻔뻔하고 종이낭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런면에서 이택광 교수의 이 책은 좀 너무한 면이 있다. 물론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나서 지금까지 터져나온 숱한 사건들과 문화적 현상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면서, 그가 줄곧 이야기하는 '쾌락의 평등주의'와 '먹고사니즘'이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지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는 매체라는 면에서는 훌륭하기는 하다. 그럼에도 난 이런식의 출판행태가 저자의 저서목록을 하나 더 추가해 주어 그의 '이름빨'을 날리는데에 기여하는 것 외에 어떤 긍정적인 면이 있을지... 심히 의심되는 바다. (그런면에서 박노자가 한홍구 교수도 쫌 거시기하다.)

 

각설하고, 어쨌든 이 책에서 주요하게 이야기하는 주제는 바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쾌락의 평등주의'와 '먹고사니즘'이다. '쾌락의 평등주의'라는 것은 올 해초 나온 <당신은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서 그가 실린 글에서 제기된 뒤로 조정환과의 논쟁에서 주요 공격타겟이 되기도 했던 개념이다. 솔직히 나도 <당신은 왜...>에서 이 개념을 접했을 때에는 뭔가 억지스러운 개념이란 생각이 들었던게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 나뿐만은 아닐텐데, 왜냐면 촛불집회를 통해 '쾌락의 평등주의'를 유추해내기에는 그 당시 거리로 나왔던 주체들의 행동양식이 '쾌락'보다는 '윤리'에 더 가까웠다고 보는게 일반적 상식이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촛불집회를 관통한 대중의 무의식이 왜 '윤리'보다는 '쾌락'에 가까운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충분히 해소해 준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분석의 시간대를 97년 IMF 이후 변화된 한국사회에서의 대중의 존재양식과 욕망구조 변화를 살펴봐야 하는데, 저자는 정확히 그런 관점에서 이명박 정부와 용산참사, 금융위기, 그리고 김연아와 원더걸스, 게다가 '1박2일'과 '우리결혼했어요'같은 예능프로그램 분석에 까지 손을 뻗친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한국사회 대중의 욕망은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겨야 한다는 한국적 방식의 평등주의"이며, 그런 류의 먹고사니즘이 경제로부터 정치를 소외시켜 경제지상주의를 내걸은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다. 한편 그런 욕망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통해 좌절을 느끼자 대중을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으며 여기서 그동안 '평등하게 쾌락을 누릴'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10대가 부각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10대들은 성공한 10대의 표상인 '김연아', '원더걸스'가 될 것을 강요받는, 존재하지만 존재할 수 없는 이들로 고정되고 만다.

 

대충 이런 식의 설명들을 한권의 책으로 읽어내고 나야 '쾌락의 평등주의'가 작동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왜 우리는 용산참사에서, 쌍용차 파업에서 2008년 5월과 같은 열기를 다시 볼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와 동등한 '쾌락의 주체'가 아니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새로운 합의가 "어떤 이들은 우리보다 더 평등하다"라는 문장 속에 담겨져 있다면, 그 '우리'라는 주체는 '더' 평등한 존재가 되기 위해 싸울 준비를 하는 이들이다. 그냥 평등한게 아니라 '더' 평등하게!!

 

"more t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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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

난 김훈에 대해 잘 모른다. 고등학교 2학년때 김훈이 <칼의 노래>로 히트칠 때, 책 표지가 풍기는 포스가 심히 휘황하여 붙들고 있던 적이 있지만, 그 때는 무참히 쏟아져나오는 한자어를 감당하기 힘들고, 수능 스트레스로 폭발 직전이어서 그런 책이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리고 올 해 들어서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읽었는데, 난 그 묵직한 문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무궁한 표현력에 껌뻑 죽어버렸다. ㅠ.ㅠ

 

얼마 전 학교 후배 및 동기를 만나서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어쩌다보니 요즘 읽는 책 얘기를 했는데,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게 이거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나는 "난 김훈의 소설이 좋더라."라고 말했다. 그 때 옆에 있던 풍선인형이 "걔 쫌 이상하고 보수적이야."라고 말하길래, "그래도 난 그 사람의 문체나 글의 소재가 좋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사실 작가를 그 사람의 이념적 성향으로 재단해서 그걸로 평가를 끝내버리는 것 만큼 작가입장에서 억울한 것도 없을 것 이란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얼마 전에 도서관에 가서 그의 산문집 <너는 어느쪽인지를 묻는 말에 대하여>를 보니까 그의 정치적 입장도 보수주의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허무주의, 아나키즘 등을 왔다갔다 한다는 느낌이어서 굳이 정치적 색깔로 그를 판단할 꺼리도 없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아, 난 어찌 이렇게 무식하던가?

오늘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그가 한국일보 재직시 전두환 찬양 기사를 '전담'해서 썼다는 것 아닌가? ㅠ.ㅠ 이에 대해 최근 남긴 인터뷰 한 마디...

 

“내가 안 썼으면 딴 놈들이 썼을 테고… 난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때 나를 감독하던 보안사 놈한테 이런 얘기를 했지. 내가 이걸 쓸 테니까 끌려간 내 동료만 때리지 말아달라. 걔들이 맞고 있는 걸 생각하면 잠이 안 왔어. 진짜 치가 떨리고….”

 

네이버 지식IN에 누가 올려놓은 글인데, 여기에 누군가 댓글을 이렇게 달았다. 그런다고 보안사에서 동료들 안때릴꺼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냐고... 사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고 안했고를 떠나서 이런 자기 위안으로 자신의 '도덕적'(살인범을 찬양한 것은 전적으로 도덕적인 가치판단을 해야 하지 않는가?) 결함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안일함인가?

 

그리고 이 사람은 철저한 다윈주의자였다. 여기서 '철저한'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철저하게 속류화된 다윈주의를 채득한 사람이라는 거다. (나는 어렴풋하게만 느끼고 거의 신경을 안 쓴 부분인데) 여러 논평가들은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에서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에게 전혀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내가 너무 소설을 통해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봐서 그런가? 난 <남한산성>에선 인조와 영의정의 사태파악이 전혀 안되는 무뇌의 대가리에 소스라쳤고, <칼의 노래>에선 사직을 보전하기 위해서 이순신이 필요하기도 하고, 또 같은 이유에서 전공을 세워 목소리를 높일 이순신이 두렵기도 한 선조의 이중성에 냉소를 품게 되었는데... 그 화려한 수사들 속에 숨겨져 있던 다윈주의의 흔적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으악!!!

 

<너는 어느쪽인지를 묻는 말에 대하여>에서 보여진 김훈의 태도는 그의 말대로 아나키적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여성을 보호하려는 입장이기 때문에 남근주의로 보일지라도 사실상 페미니즘과 지향하는 바가 다르지 않다고 말하거나, 세상은 약육강식이기 때문에 세상을 엎을 수는 없다고 뱉어대는 그의 말은 또한 지극히 보수주의적이다. 아나키와 보수주의가 공존하는 그의 정신세계. 아, 난 현란한 문체에 속아버린 것일까?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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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는 책 (2) - <보건의료: 사회생태적 분석을 위하여>

▶ <보건의료: 사회 생태적 분석을 위하여> (비센트 나바로 외, 공감, 2006)

 

 

올 해 2월엔가 사놓고 안 읽다가 이번달 초에 몰아쳐서 읽은 책.

이 포스트의 제목을 책 표지에 있는 그대로 옮겨 놓긴 했는데, 난 좀 이해가 안된다. 사실 이건 공감에서 나오는 책의 일관된 특징이기도 한데, 이게 해외 단행본을 그대로 번역해서 내놓는 책이 아니라 과천연구실 연구원의 총괄적인 텍스트를 중심으로 해서 보충적인 읽기자료 형식으로 번역글을 실어놓는 일종의 세미 무크지(??)같은 형식이다. 근데 왜 마치 이 책이 비센트 나바로(와 그외 여러 사람들)의 글을 번역해서 내놓는 단행본인 것처럼 책을 디자인 하는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10년이 넘도록 일관되게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로 책 표지를 고수하는 뚝심은 알아줄만 하다. ㅋㅋㅋㅋ

 

이 책은 근래에 산 책중에는 정말 없는 돈 털어서 작심하고 산 책이다. 작년쯤에 반다나 시바 등의  생태주의에 빠져 열독 중일 때, 생태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인간 몸의 건강 문제에 대한 정치경제학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고는 좀 더 심층적인 텍스트를 찾아 해맸다. 그래서 손에 쥐게 된 게 바로 이 책.

 

근데... 솔직히 그닥 만족스럽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비센트 나바로의 글은 지나치게 환원론적이다. 의료문제가 자본주의 계급모순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 빼고는 다 쓸데 없는 얘기라는 식의 논의는 좀 안습이다.

 

그래도 공감이론신서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과천 연구원들의 교과서적인 글들은 나름 유익하다. 그 중에서도 하일라와 레빈스의 논의에 기초해서 설명하는 '현대의학의 생의학적 모형의 생물학적 기초'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생태학적 관점에 주목해 보면 좋다. 또한 책의 뒷부분에 실린 송인주의 '가족과 여성보건'이라는 글에 실린 보론 '황우석 사태 비판'은 생태학적 관점에서 생명공학을 비판하고 생명공학적 관심사가 어떻게 여성의 신체를 자본의 새로운 이윤 창출의 출구로 활용하는지를 폭로하고 있다.

 

 

*  *  *

 

뱀발) 짤막하게  서평을 쓰려고 했던 것인데, 뭐 이렇게 글이 중구난방이냐...

안 쓴 것만 못하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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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읽는 책(1) - <직선들의 대한민국>

서류발급 기계로 살게 된지 이제 10개월이 다 되어 간다. 얼마 전부터는 매일 밤 2시간 반씩 커피와 빵 파는 기계의 삶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나의 모든 사회적 소통을 위한 네트워크들은 철저히 파괴(!!) 되었고, (자의든 타이든 간에) 사실상 홀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내가 유일하게 사회적 소통을 할 수 있는 창구는 인터넷과 책 뿐이다.

그나마 인터넷은 워낙에 잡 쓰레기가 많이 굴러다녀서 그걸 헤집고 나가는데 퍼부어야 할 노력이 더 수고스럽다. 그래서 요즘 나를 작게나마 위로 또는 희열, 즐거움 등을 주는 매체는 오직 책 뿐이다.

 

그 10개월 동안 한 달에 책을 꼭 10권 이상 읽겠다고 다짐하고 살았는데, 성공한 적은 별로 없다. 대부분 8-9권을 읽었을 뿐.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내 속독 능력과 내 독서시간을 앗아가는 밀려오는 민원인들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그래도 2년 안에 평생 읽을 책의 절반 이상을 읽겠다는 각오로 독서에 임하고 있는 마당이니, 중간중간 독서 계획을 잡고, 간단한 독서평을 하는 것이 나의 중요한 일상적 과제다. 그래서 오늘은 간단히 최근 한 달 사이에 내가 읽은  책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들에 대한 감상만을 끄적여 볼까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

 

 

 

▶ 직선들의 대한민국 (우석훈, 웅진지식하우스, 2008)

 

 

이 책에 대해서는 나중에 제대로 된 서평을 따로 써 볼 생각이다. 사실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저자의 공전의 히트작이라 할 수 있는 <88만원세대>가 세간의 평가에 비해 매우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책도 별로 기대를 안했다. (예전에 진보넷 블로거인 EM님이 <88만원세대>에 대해서 "경제학적 개념을 통해 세대론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세대론을 빌려와 경제학적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라고 평한 것을 봤는데, 얄짤없이 정확한 평가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아 이 책은 뭐... 내가 볼땐 우리나라 청소년, 또는 젊은이들에겐 <88만원세대> 보다는 <직선들의 대한민국>이 더욱 권장되어야 한다.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세대론이라는 것은 각각의 세대가 어떤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접어두고 그저 윗 세대에 대한 공분만을 재생산해 소득없는 논쟁을 부풀릴 위험이 있다. 지극히 감상적인 것이긴 하나 실제로 <88만원세대>가 그런 효과를 낳았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부모님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져야 할 단 하나의 가치관"을 말하라면 바로 저자가 책에서 말하고 있는 '생태미학'이 아닐까 한다.

 

길게 설명할 거 없이, 저자가 말하는 생태미학이라는 것을 내 식으로 해석하자면 이런거다. 얼마전에 석돌이의 동생(그는 대구소재 모 대학의 토목과(맞나?)에 다닌다)이 방학을 맞아 삼촌이 일하는 공사현장에 일도 배우고 돈도 벌 겸 해서 며칠간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그런데 그 공사가 하천 제방을 쌓는 공사인가 뭔가 그런거 였다. 공사과정에서 하천 바닥의 토사를 포크레인으로 퍼나르는 작업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수 많은 미꾸라지, 개구리 등등 민물고기들이 제집을 잃는 난리를 겪어야 했다.  그 광경을 보다 못한 석돌이 동생은 안타까운 마음에 미꾸라지, 개구리들을 품에 안아 인근 논에 '방생'해 주었단다. 하지만 그럼에도 석돌이 동생은 가슴이 아팠단다. 그 미꾸라지, 개구리들은 어차피 논에 뿌려진 농약때문에 얼마 살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일련의 경험을 통해 석돌이 동생은 "미꾸라지와 개구리, 그리고 거기에 서식하는 생물들의 터전을 파괴하면서까지 하천공사를 해야하는걸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스스로 친환경 토목설계를 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던 그는 그렇게 스러져갈 미꾸라지와 개구리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지금의 나는 오로지 "나는 생명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입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지 않은가? 라고 비관한다.

 

어느 한 어리고 착한 토목공학도의 순수한 자기고백 쯤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이야기가 나는 너무나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시대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참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바로 석돌이 동생이 가진 이런 '생태미학'이 있어야만 미래에 대한 대안을 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고가아파트에 살면서 아토피 때문에 고생하는 어린이들의 고통에 함께 할 수 있으며, 화산지형임에도 불구하고 난개발때문에 홍수를 겪게 된 제주도 사람들과 뭇 생명들의 고통에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MB정부의 대운하 건설계획 비판을 중심으로 이런 미학적 사고의 필요성을 묵직하게 역설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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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남한산성> 읽기

너무 빈번하게 등장하는 한자어들 때문에 읽는데 애를 먹긴 했지만, 재밌는 소설이다.

 

여기서 재밌다는 말은 약간의 썩소를 담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조선놈으로 태어난 것을 다시 한번 진정으로 부끄러워 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놈들은 '외교'를 모른다. 21세기 조선놈들은 세계가 다자주의로 재편되고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있다는 객관적 정세를 외면하고 오매불망 태평양 건너 코쟁이들 나라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들의 조상들은 강산이 골백번 바뀌어도 오로지 천자의 나라는 한족의 나라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남한산성>은 그렇게 대가리 회전속도가 거의 소달구지 수준인 조선 사대부들의 추태를 담은 소설이다.

 

청나라 칸이 한반도의 정 가운데까지 밀고 들어와 성곽을 맞대로 조선 왕을 죽일까 살릴까 저울질 하고 있는 마당에 조선 왕과 사대부들은 명의 황제를 향해 망궐례(望闕禮; 임금을 공경하고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한 의식으로, 임금을 직접 배알하지 못하는 지방 관리들이 행했다. 임금이 정월 초하루나 동지, 성절(聖節, 중국 황제의 생일), 천추절(千秋節, 중국 황태자의 생일)에 왕세자와 조정의 신료들을 거느리고 황제가 있는 북경 쪽을 향하여 예를 올리던 의식도 망궐례라고 한다. 여기서는 후자를 말함)를 올린다. 대가리가 안굴러가면 팔다리가 고생이라고, 임금과 사대부가 그 지랄을 해대는 통에 고생은 남한산성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다 뒤집어 쓴다. 급기야 나중에 가서는 군졸들이 싸우지도 않을 거면서 성문 쳐닫고 뻣대지말고 걍 나가서 항복하자고 성화를 낸다. 물론 지체높으신 사대부양반들은 천자에 대한 예를 갖춘답시고 반대를 한다. 그리고 아우성쳐대는 군졸들을 한 사대부 양반께서 칼을 빼드신다. 허허. 그러나 이미 달관의 경지에 오른 우리 군졸들께서는 전혀 기가 죽지 않는다. "그 칼로 나가서 적과 싸우시지요?" 그러자 사대부 왈, "사대부가 어찌 전쟁의 일을 알겠느냐?"

 

밖에 나가선 찍소리도 못하는 것들이 안에서만 괜히 뒷짐지고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대는게 꼭 오늘의 뭐시기들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이 양반들의 탁상공론의 추태는 가히 진기명기감이다. 초소를 지키고 있는 군졸들이 겨울날씨에 동상에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일어, 빈집 초가지붕을 뜯어 볏짚으로 군졸들이 쓸 깔개를 만들어 올렸다. 그런 상황에서 영의정이라는 양반이 한다는 소리가, "싸움을 하고자 한다면 말이 튼실해야 할 텐데 말 먹이 할 것이 없습니다. 군졸들이야 사람이니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다 하나 말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부디 깔개를 거두시어 말먹이 할 죽을 만드소서" 영의정의 이런 발언에 예조판서인가가 한 마디로 일갈한다. "줬다 뺏으면 군졸들이 삐진다."

 

이렇게 한심한 꼴을 하고 있으니 적의 우두머리인 청나라 칸이 조선의 임금과 사대부를 걱정해주기에 이른다. 다음은 청나라 칸이 조선 왕에게 보낸 문서.(본문 284-5쪽) 그 걱정해주는 맘씨가 하해와 같다. 글솜씨도 칸 자신의 말처럼 군더더기 없이 쭉쭉 뻗어나가는 것이 너무 빼어나 옮겨적지 않을 수가 없었다. ㅠ.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기어이 나의 적이 되어 거듭 거스르고 어긋나 환란을 자초하니, 너의 아둔함조차도 나의 부덕일진대, 나는 그것을 괴로워하며 여러 강을 건너 멀리 내려와 너에게 다다랐다.

나의 선대 황제 이래로 너희 군신이 준절하고 고매한 말로 나를 능멸하고 방자한 침월侵越로 나를 적대함이 자심하였다. 이제 내가 군사를 이끌고 너의 담 밑에 당도하였는데, 네가 돌구멍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싸우려 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몸뚱이는 다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을 굴속으로 처박은 형국으로 천하를 외면하고 삶을 훔치려 하나, 내가 너를 놓아주겠느냐. 땅 위에 삶을 세울 수 있고 베풀 수 있고 또 구걸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을 훔칠 수는 없고 거저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너는 명을 아비로 섬겨, 나의 화포 앞에서 너의 아비에게 보이는 춤을 추더구나. 네가 지금 거꾸로 매달린 위난을 당해도 너의 아비가 너의 춤을 어여삐 여기지 않고 너를 구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냐.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소게 처박혀 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너는 지키기를 원하느냐. 너의 지킴이 끝날 때까지 내가 너의 성을 가두어주겠다.

너는 내가 군사를 돌이켜 빈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느냐. 삶은 거저 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미 말했다.

너는 그 돌구멍 속에 한 세상을 차려서 누리기를 원하느냐. 너의 백성은 내가  기른다 해도, 거기서 너의 세상이 차려지겠느냐.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너의 도모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주겠다. 너는 두려워 말고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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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왕은 끝까지 돌구멍 속에 대가리 처박고 있다가 궁댕이로 성문을 열고 나가서는 칸에게 똥침을 받고 만다.

 

아, 이래서 세상은 대가리를 써가면서 살아야 하는거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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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연,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 (새길, 1991)

나 대학 1학년 때 교양과목으로 <한국역사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때 선생님이 해방이후 여성사 연구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던 이임하 선생님이었다. (그 쪽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는 말임.) 물론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 때 나는 매일 아침과 저녁 꼬박꼬박 학교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에 서서 이라크 파병 반대 선전전에 빠져 있었다. (아, 그 때는 왜 그렇게 선전전이 재밌었는지... ㅋㅋㅋㅋ)

 

여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 때 선생님이 내 준 과제가 좀 두루뭉실하게 역사에 관한 책 한권 골라서 읽고 서평 쓰라는 거였는데, 나는 당최 뭘 읽어야 할지 몰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아리 선배 한명을 붙잡고 책 한권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그 선배가 추천해 준 책이 소위 '한자발'로 통하던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책이었다.

 

 

 

 

너무 옛날책이라 딱히 땡기진 않았지만 선배의 성의를 봐서 며칠을 붙잡고 있긴 했었다. 그러나... 나는 선배의 성의를 괜히 고려했다는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ㅋㅋㅋ 앞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이렇게 재미없는 책들만 봐야 한단 말인가? 절망끝에 책을 집어 던졌고, 대신 나는 박노자의 <나를 배반한 역사>를 읽고 어찌어찌 과제를 해결하긴 했다.

 

그리고 원래 동아리방에 있던 저 책은 여차저차해서 '의도치 않게' 내 소유가 되어 내 책꽂이에 꽂혀 있다. 당시 선배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이 소위 PD론의 정수를 담은 책인데, 고런 책을 읽다가 GG쳐버렸다는게 못내 굴욕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여튼 나는 이 책을 처음 접한지 6년만에 다시 펼쳐보게 되었다.

 

한국사회성격논쟁에 대한 PD진영의 결과물로서 그리고 식반론(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과의 대결속에서 한국자본주의가 식민지자본주의에서 신식민지자본주의로, 그리고 80년대를 경유하면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 성장전화해 가는 과정을 분석한 책이다.

 

책을 다시 손에 쥔 지는 6년째지만 이러저런 필요에 의해서 이 책의 서문은 여러번 읽은 적이 있어서 대충 맥락은 머리에 박혀 있는 상황. 그래서인지 다시 봐도 재미는 없다. 내가 요즘에 나오는 세련된 문체의 글들에 매혹되어 있어서 그런지 이런 누르스름해진 종이 위에 건조하기 짝이 없는 문장을 읽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다. ㅠ.ㅠ

 

근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게 옛날 책이고, 재미없고의 문제를 떠나서 요즘 나의 관점에서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좀 거시기한데가 있어서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은 한일합방 이전 시기부터 진행된 조선사회의 본원적 축적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그 당시 조선사회의 특수성에 대한 분석이 가미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책 이곳저곳에서 보편과 특수의 변증법을 강조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여기서는 레닌의 제국주의 분석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해 식민지적 '특수'에 따른 한국사회의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분석하는데, 왠지 나는 이 부분에서 레닌적 방법론을 한국사회 분석에 좀 억지스럽게 끼워맞춘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닌의 분석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 나에게는 그게 맞는지 틀린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ㅋㅋㅋ) 적어도 조선에서 자본주의 초기 발전과정을 분석하는데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다. 조선 초기 자본주의 발전이 지체된 이유를 식민지 모국으로부터 이식된 자본주의의 특수성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공백이 너무 많이 남는다. 왠지 이런 이론은 당시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일반이론 같다는 느낌? (그래서 어느 나라의 사례에도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 실제로 조선에서의 본원적 축적을 논의하려면 조선 내부의 시장경제의 발전 상황은 어땠는지(별 볼일 없었겠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외부에서의 자본유입에 어떻게 반작용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도 유일하게 봉건적 성리학 국가로 남아 있었던 조선이 개화에 대처하는 자세가 자본주의화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는지 등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얼마간 경제주의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적합한 용어가 생각이 나질 않아서 '경제주의'라고 한 것인데, 내가 말하는 '경제주의'는 딴게 아니라, 이 책에서 다루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발전과 이에 따르는 계급투쟁 분석이 19세기말-20세기초의 조선이라는 희한한 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조선은 경제보다는 정치, 그것도 사대부 당파간의 정말 쓰잘데기 없는 말싸움이 지배하던 사회였으니까....

 

요런 생각은 얼마전에 독파한 남경태의 <종횡무진 한국사>(그린비)의 하권 말미를 보면서 느낀거다. 남경태는 이 책을 통해 조선 역사를 설명하면서 철저히 '정치주의'적인 방식을 택하는데, 뭔 말이냐면 조선의 사회-경제적 환경에 근거해 역사를 서술하기보다는 중국보다 더 중국적인 중화사상을 무려 600년동안이나 간직한 성리학 국가라는 점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그게 실상 실학, 북학, 서학 등이 횡횡하던 조선말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진실'이라는 거다.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던 20세기 초에도 여전히 그러했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조선 말 자본 축적을 위한 제조건을 밝히는데 이런 부분이 고려됐어야 했다.

 

앞에서 밝힌 이 책에 대한 감상은 사실 책 전반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책의 초반, 그러니까 1905년을 전후한 개항시기에 대한 분석에 대한 감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사회의 봉건적 요소가 폭력적으로 파괴되는 과정을 겪는 20세기 중후반부에 대해서는 나의 이런 불만이 적용되진 않을 거다. 게다가 한국사회성격논쟁이라는 특수한 지형에서 탄생한, 그래서 맑스-레닌주의라는 토양에 강하게 결박되어 있는 이 책에 많은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의 한계점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김상봉 교수가 5.18에 대해 분석하면서 기존의 맑스주의적인 계급투쟁론에 근거해서는 5.18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일정부분 동의한다. (그렇다고 계급투쟁적 시각을 폐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최소한 조선 말부터 생겨난 조선 민중과 국가간의 대립은 서구의 근대 시민의 탄생과정과는 사뭇 다른 것이고, 그렇기때문에 개인의 '권리 침해'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 계급투쟁적 시각에 일정한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김상봉 교수는 그래서 5.18을 절대적 공동체를 향한 투쟁이었다고 말하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의 논문을 아직 읽어보진 않아서 잘 모르겠으니 일단 패스. 여튼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 이에 맞서는 민중 저항의 동학이 앞으로 좀 더 '한국적으로' 분석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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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말과 사람>

얼마 전에 YES24에서 벌인 이벤트 <사회과학 출판사 응원하기>에 당첨되었다.

사실 내가 응원한 책은 직접 읽어보지도 않은 책(김원의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인데, 재수도 좋게 YES24측에서 잘 속아주셔서 ㅋㅋㅋㅋ 이매진 출판사의 책을 공짜로 5권을 받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을 읽어보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서 집 근처 도서관에서 2번이나 빌려놨는데도 한번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

 

뭐 여튼간 그렇게 해서 받게 된 책은

1.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2. 우기동 외, <행복한 인문학>

3.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4. 이명원, <말과 사람>

5. 여러 만화가들(ㅋㅋ), <악! 법이라고?>

 

우선 1번 책이 가격이 2만원을 넘어가는 대작인지라, 거의 감계무량 수준... ㅋㅋㅋ 그러나 지금 당장 읽기에는 부담되고... 일단 4번부터 건드려 봤다.

 

 

이명원씨는 풍선인형이 맨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송하던 사람이라 대체 어떤 인물인가 했는데, 얼마전에 문화과학에서 <바리데기>에 관한 평론도 그렇고, 여러 글들이 참 매력적인 사람이라 생각해서 <말과 사람>에도 쉽게 손이 갔다.

 

물론 이명원씨의 개인저작이 아니라 이문열, 조정래, 백낙청, 김민수, 김상봉, 김종철 등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을 만나 인터뷰 한 내용을 담은 거라 이명원씨 개인의 생각뿐만 아니라 이들 지식인의 삶과 사상에 대해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튼 그래서, 여기다가는 인터뷰 내용 중 인상깊은 부분만 좀 담아본다.

아, 그러기 전에 이들 6명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밝혀보자면....

 

1) 이문열 : 역시 구제불능인 것 같긴 하지만, 그의 불평대로 나도 그의 최근작들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니, 인터뷰에서 주로 언급된 <호모 엑세쿠탄스>라는 책 부터 읽어보고 제대로 평가해 봐야 겠다. 그의 말대로 한 사람의 작가를 '이미지'로 작살내는것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으니....

 

2) 조정래 : 인터뷰 내용이 너무 싱거웠다. 신자유주의가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탈하는 행위라니... 별로 대단한 얘기도 아닌 것을 너무 심각하게 얘기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3) 백낙청 : '진보가 통일문제에 너무 지적으로 태만하다는 데에는 동의하나, 그의 방식으로 통일을 고민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변혁적 중도주의'라니... 이건 뭐 좌파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4) 김민수 : 이 사람은 잘 몰랐는데, 아주 매력적인 지식인이란 생각이 든다. 도시 디자인을 통해 근대 철학적 문제를 사유하는 그의 통찰력은 오랜만에 나의 뒷통수를 '뻑'하고 때려주셨다. 한국사회가 '이미지맹'에 빠졌다는데 한 표!!!

 

5) 김상봉 : 이 분은 최근 황석영, 노무현 관련 논의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발언으로 좀 미워졌지만,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보기드문 사유를 하고 있는 뛰어난 분이란 생각이다. (특히 그가 주축이 되어 작성된 진보신당 강령 전문(前文)은 후대에 기리기리 남을 명문이라 생각한다.) 특히 5.18을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절대 공동체'를 지향한 씨알들의 투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인상깊었는데, 숙고해볼 가치가 있는 주장이라 생각한다.

 

6) 김종철 : 가라타니 고진은 김종철이 문학비평계를 떠나면서 한국에서는 근대문학이 종언되었다고 말했다는데, 이와 관련된 발언들은 좀 신선했다. 갑자기 그의 <시적인간과 생태적 인간>이란 책을 찾아 읽어봐야 겠다는 욕구가 불쑥 불쑥!!! "근대 문학의 핵심은 야생의 정신 유무의 문제다"

 

총평을 하자면 1,2,3번은 탈락, 4,5,6번은 합격 ㅋㅋㅋㅋ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부분을 옮겨 적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36-138쪽 김민수의 발언 내용)

 

C.P.스노우가 1959년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강연 제목에서 발의한 두 문화 논쟁은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심화된 단절 현상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시각예술과 인문학 사이에 그러한 단절이 존재하는 것인데, 사실은 시각예술과 인문학의 관계는 스노우의 두 문화 논쟁과 좀 다른 특수한 한국적 맥락이 있다고 본다.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시각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17세기 이래 근대 인문정신과 불가분의 관계에서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봉건적 길드에 속한 일개 장인에 불과했던 미술가들이 인문적 성찰을 통해 미술 아카데미를 성립시켰고, 바로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정신 활동으로서 시각예술이 출현했던 것이다. 즉 시각예술은 인문적 성찰을 통해 예술의 지위를 획득했다. 따라서 시각예술은 인문학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경우는 이러한 역사적 전통이 일제에 의해 서구 학문이 이식되는 과정에서 오독된 것이고, 어떤 점에서는 과거 조선 시대보다 퇴화된 인식틀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옛날 조선 시대에 문인들은 예술을 겸비하고 있었다. 글을 쓰면서도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고산 윤선도 선생은 <산중신곡>과 <고산유고>같은 문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직접 거문고를 제작해 사용한 악기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거문고 제작과 사용법을 수록한 책 <회명정측>과 악보를 기록해놓은 <낭옹신보>를 남기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유실하고 마치 시각예술과 인문학이 두 문화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서구 학문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전통마저 잃어버린 이상한 학문 세계에 갇혀 있는 꼴인 셈이다.

글을 못 읽는 것을 문맹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이미지를 읽지 못하는 것을 '이미지맹'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시대에는 이미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을 문맹과 같은 차원에서 취급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자에 익숙해 있기 대문에 이미지 언어에 대해서는 독해가 거의 안 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예를 들어 청계천 복원 사업에서도 잘 드러났다. 실제로 청계천에서 복원된 것은 별로 없다. 다만 한강물 펌프로 퍼올려 분수대처럼 물 흘려 내보내고 풀을 심어 '짝퉁' 녹지 공간을 조성한 것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마치 인형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조립되는 인형들처럼 청계천을 구경하러 가는 것은 일종의 도시적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는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포섭하고 있다. 일상 속의 광고의 진실은 무엇인지에 대해 소비자들의 이미지 독해가 충분하지 못하니 과장, 사기성 광고에 속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이미지 독해력이라는 차원에서 디자인이 중요하다. 단순히 환경미화 차원의 장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읽어내는 이미지 독해력의 차원에서 일반인도 디장인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관리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에게는 디자이너 교육만큼이나 소비자 교육도 중요하다.

 

 

 

 

(139-140쪽 김민수 발언 내용)

 

과학기술은 여전히 일상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신비화되고, 인문학은 위기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과 담을 쌓고 있고, 예술은 여전히 예술의 전당과 미술관에서나 하는 것으로 생각해 일상과 거리가 있고, 디자인은 세상과 너무나 가까운 공간, 제품, 이미지를 다루고 있는데도 우리들의 삶의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판타지만을 부추기고 있는 점이 그렇다.

 

 

 

 

(214-215쪽 김종철의 대답을 듣고 이명원이 정리한 내용)

 

요컨대 오늘날 지배적으로 돼가고 있는 경제성장 지상주의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 김종철의 근본적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녹색당조차 제도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주장을 내놓고 제기하기 힘들다. 대의제 민주주의 구조 아래서, 녹색당이 제도 정당의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여론'에 편승해야 할 텐데, 그랬을 때 경제성장 지상주의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당의 존립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비관이 앞선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김종철의 현실에 대한 비관주의는 매우 뿌리깊은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김종철은 비관적 상황에 대한 어설픈 희망보다는, 비관적 상황 그 자체를 냉철하게 사유하는 시각이야말로 오늘의 시민들에게 오히려 더 필요한 가치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러한 반문은 현재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서경식 교수 역시 동일하게 제기한 바 있다. 서경식은 이른바 민주화 시기에 자신의 두 형인 서승과 서준식 형제가  한국의 감옥에 수감 중일 때, 이탈리아계 유대인인 프리모 레비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이탈리아 작가는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전쟁 뒤 이탈리아에 돌아와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작품 등을 통해서, 우리가 인간에게서 찾고 있는 통념적인 인간성이라는 것이 실상에 있어서는 얼마나 허구적이고 절망적인 가치인가를 되물었다. 프리모 레비는 증언하는 문학을 추구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느 날 돌연 자살을 했다. 서경식 교수는 이 증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절망에 전율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식인은 정작 뿌리 깊게 절망해야 할 때 그 절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헛된 낙관주의보다는 정직하고 근원적인 절망이 때로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절망을 회피하려는 의식이 강한 것 같다.

어쩌면 희망을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욕망보다, 절망을 좀 더 투명하게 투시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김종철의 절망은 그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근본적 절망과 비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절망과 비관을 통해서, 우리는 근대를 틀 지우고 있는 반인간주의와 반생명주의의 무서운 발전주의를 상대화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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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그리고 긴급출동 SOS

 

어젯밤 집에서 우연히 SBS에서 하는 <긴급출동 SOS>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얼마 전에도 14살 짜리 아들이 엄마를 폭행하는 사건을 보도해 나에게 충격을 줬던 프로였는데, 어제 방영된 내용은 동생네 부부가 지적장애를 가진 64세의 형(방송에서 불렀던 대로 아래부터는 '김씨'로 통일)을 학대하고 폭행한 것에 관해서였다. 동네 주민들은 동생네 부부, 특히 동생 부인이 김씨의 집안 살림을 해 주는 등 장애를 가진 형을 보살펴 주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김씨에게 고물 주워오는 일을 강제로 시키고 매일 같이 그에게 폭행을 일삼고 있었다. 게다가 종이 박스같이 돈이 안되는 고물을 주워올 경우 폭력은 더 심해지고, 고철류 같이 돈이 되는 고물을 주워오도록 해 결국 그에게 절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그러나 (방송이 사용했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김씨는 제보를 받고 그를 도우려 달려온 주위의 손길(방송국, 경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같은 전문가 집단)을 피하려 했다. 여기서 심리 치료 전문가가 등장해 그의 상태를 진단한다. 결국 경찰과 '전문가'가 동행한 채 카메라는 김씨의 집에 '급습'한다.

 

흡사 삼자대면이 벌어지는 상황. PD와 '전문가'는 번갈아가면서 김씨와 동생 부인에게 폭행사실을 추궁한다. 동생부인은 길길이 날뛰고, 김씨는 카메라를 외면하려 한다. 카메라는 집안 곳곳과 김씨, 동생 부인,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동생의 얼굴을 수시로 옮겨가며 이를 전파에 담아낸다. 그러는 동안 김씨는 초조함에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입고 있던 추리닝 바지를 만지작 거리고만 있는다.

 

방송은 당연하게도 동생 부부가 자행한 폭력의 잔인함과 비인간성을 드러내고 김씨의 노예와 같았던 삶에 대한 연민을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연민에 공감하고 김씨의 삶의 끔찍함에 경악하기 전에, 방송국 카메라가 향하는 시선들에 불편함을 먼저 느꼈다. 그런 불편함을 수시로 연발하다가 같이 TV를 보고 있던 엄마에게 심한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아마 엄마에게는 내가 동생 부부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불편함은 이와는 많이 다르다.

 

우선 왜 동생과 동생 부인의 얼굴엔 모자이크 처리를 하면서 김씨의 얼굴은 있는 그대로, 머리에 난 상처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드러내는가? 또한 김씨에 대한 여러차례 대화시도가 실패하자 방송은 진상을 파악하겠다고 김씨의 집 가까이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한다. 대체 이런 조치는 누구의 허락을 받고 하는 것인가? 방송은 심리 치료 전문가의 발언을 반복적으로 전달하지만, 김씨의 심리에 대해서는 조금의 고려도 없었던 듯 하다. 김씨 입장에서는 어디서 뭐 하던 놈인지 알 수 없는 PD가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밀어 "도와주러 온 것이니 집에서 맞은 적이 있는지 말해보라"고 목청을 높인다. 내 생각엔 PD의 이런 행동은 김씨에게 동생 부인의 폭력보다 더 두렵게 느껴졌을 것 같다.

 

며칠 전에 읽었던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이런 상황, 즉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있는 현실의 기만성과 가증스러움을 낱낱이 폭로한다.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저, 이재원 역, 이후, 2004)

 

매혹적인 육체가 외부의 공격을 받는 광경을 보여주는 모든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그라피이다. 그렇지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담은 이미지들도 매력적일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자동차 충돌 현장 옆을 지나칠 때 운전자들이 차의 속도를 늦추는 이유가 단지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대부분 운전자들은 뭔가 소름끼칠 만큼 섬뜩한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바람을 '병적'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 표현이 뭔가 보기 드문 일탈 행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끔찍한 광경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 현상은 영원히 계속될 내적인 고문의 원천이라고 할 만하다. ([타인의 고통], 144-145쪽) 

타인의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고통을 충격적인 사건 전개, 탐정과 같은 PD의 추적을 통해 '관람'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고통을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이는 확실히 고통과 한참 먼 '수직적' 거리를 두고,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행위다. 혹여나 그 시선이 연민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한들, 그것은 무능력하기만 할 뿐이다. 그런 시선으론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개입도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고통을 해결하기 보다는 고통의 비극성을 증폭시킨다. 개인의 고통이 만인의 관람대상, 즉 포르노그라피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른바 '고통의 사회화'인가?

 

물론 김씨의 육체가 일반적인 의미로 손택이 말한 것처럼 '매혹적인 육체'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육체가 매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방송국 카메라가 그를 향해 'Shot'(손택에 따르면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사람을 쏘는 총은 'Shot'이라는 용어가 갖는 두 가지 용법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동일한 성질을 갖는다고 말한다)을 날릴 수 있던 것이다. 윤금이씨가 미군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음부에 우산이 꽂힌채로 죽임을 당한 사진이 대중에게 여과없이 공개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육체가 매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팔루자에서 학살당한 이라크 어린이들이 팔다리가 잘리고 피를 흘리며 처량한 눈빛을 보이는 사진이 지구 반대편까지 전해질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이라크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백인이며 게다가 미국인이고, 상류계층에 속한 이었다면 이런 이미지들이 '살포'될 수 있었을까? 이런 이미지들은 폭력의 외부에 남아있는 우리(그런 폭력적 이미지를 '시청'할 여유와 권리를 가진 '시.청.자.들.')에게 폭력의 끔직함을 일깨워줘서 그런 폭력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고 하지만, 이는 오로지 '우리'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킬 따름이다.

 

방송에 따르면 다행히도 김씨는 동생 부부의 폭력에서 벗어나 재활원에 들어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불편하다. 문제의 원인이 오로지 '동생 부부'에게만 있을까? 그들과 격리시키면 일은 다 해결된 것인가? 오히려 카메라의 시선이 동생부부에게 책임을 몰아가는 동안 나를 포함한 시청자들은 이 사건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이 사건과의 물리적 거리 뿐만 아니라 '책임감'의 거리 또한 확보한 것은 아닐까? 방송이 김씨의 생활을 그 속살까지 드러내 보인 것도 시청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씨는 우리('시청자들')에게 있어서 지극히 낯선 존재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화려한 '스펙터클'로서 그의 삶을 편안하게 바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희생자들, 슬픔에 빠진 친지들,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들 -- 이들은 모두 자기들 나름대로 전쟁과 어느 정도 덜어져 있거나 근접해 있다. 전쟁을 가장 솔직하게 재현해 놓은 것, 어떤 재앙으로 부상을 입은 신체를 가장 솔직하게 재현해 놓은 것은 우리에게 지극히 낯선 존재들, 그래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피사체가 우리에게 더욱 더 친숙할수록, 사진작가는 훨씬 더 신중해지는 법이다. (98쪽)

장애를 가진 김씨와 같은 이들이 이렇게 '구경거리'로만 남게되면서, 이들의 타자화는 더욱 공공해 진다. 우리가 폭력에 노출된 그의 삶을 아무 불편한 없이 그저 '연민'만으로 보고 있다면, 이 화면을 전송해 준 전파를 통해 '나는 그런 폭력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고 안도감을 확인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방송이 끝날 때 쯤에 자막으로 나온 광고 한마디. "다방에서 감금된 적이 있거나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신 분들의 제보를 받습니다." 손택이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겹쳐지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포위되어 있을 당시의 사라예보에서는 폭격의 와중이나 저격수의 총탄이 빗발치는 와중에서도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을 호통치는 사라예보 주민들의 고함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은 목에 두른 장비 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다. "시체들 사진을 찍으려고 포탄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요?" (164쪽)

그리고 손택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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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나 시바,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요즘 사람들이 나에게 뭐에 관심이 많냐고 물어보면 서슴없이 '생태주의'라고 말한다. 그래, 나는 생태주의자다. 그 전까지 나는 '어렴풋이' 맑스주의자였고, '희미하게' 알튀세르주의자(??) 였는데, --왜냐면 사실 나는 이 사람들이 '직접' 쓴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복잡하고 꼬불꼬불한 해설서들만 읽었을 뿐... -- 이제는 자신있고 분명하게 나를 ~~주의자 라고 소개할 수 있다. 나는 '생태주의자'라고!!

 

그렇다고 내가 '생태'라는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게 오래된 일도 아니다. 작년 금융위기와 함께 불어닥친 식량위기, 먹거리위기 등을 접하면서 생태위기를 인식할 수 있는 길들이 조금씩 엿보이기 시작했고, 그런 길들을 조금씩 따라가다보니 생태주의라는 신비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생태주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니 맑스주의도, 알튀세르주의도, 나아가 페미니즘도 나의 시선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생태주의는 나에게 '빛'과 같은 존재다. ㅋㅋㅋㅋ

 

 

이런 생각에 쐐기를 박아 준 책이 바로 반다나 시바의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이다.

 

내가 기존에 읽었던 생태주의에 관련된 책들이 생태계 파괴에 자본주의라는 구체적인 생산체제가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분석했다. 그런데 시바의 이 책은 한 단계 더 들어간다. 이런 생태파괴를 가능했던 자연과학이 밑바탕에 깔고 있던 철학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것이다. 바로 근대과학의 '환원주의'말이다. 생명공학은 그런 환원주의가 낳은 이 시대의 '괴물'이다.

 

이런 논의 속에서 그녀는 최근의 생명공학이 여성의 모성에 대한 권리를 파괴하는 사례들을 들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에코 페미니즘'에 대한 주장을 펼쳐낸다. 생태주의를 매개로 근대과학비판, 페미니즘, 자본주의 농업 비판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정말 내공이 장난 아니다!!!

 

 

이 정도 찌질한 서평으로는 이 책의 위대함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빨리 내공을 쌓아서 더 잘 표현해 봐야지... 이제 본격적으로 생명공학 비판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다음 도전 상대는 리처드 르원틴의 이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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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가는 책 -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9년 3월 6일

 

 

 

요즘 나는 시간만 나면 근처 시내 대형서점에 '아이쇼핑'을 하러 간다.

아니, '아이쇼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무전독서'가 더 맞는 표현이겠다.

지난번에는 아예 이틀에 나눠서 서점에 '출근'을 하여 장편소설 한 권을 다 읽어버렸으니... ㅋㅋㅋㅋ

뭐 나에겐 대형서점은 최신도서가 즐비한 도서관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오늘도 서점으로 발길을 향했는데, 반가운 아이템을 발견했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촛불'이란 단어때문에 예전에 참여연대 쪽 인사들이 모여 펴낸 "어둠이 빛을 이길수는 없습니다." 류의 책인 줄 알았는데, 저자들의 면면을 보니 그 쪽과는 약간 뉘양스가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제목부터가 좀 다르지 않은가? 왜 촛불을 껐냐? 제목은 존대말로 말을 걸어오지만 실상 내용은 쫌 시비를 거는 투다. 시비 거는게 나쁘다는게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진보진영 내에서 촛불에 대해 온갖 찬사를 쏟아내는 입장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말투는 신선하기까지 하다.

 

사실 나는 작년 촛불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기 시작한 7,8월 정도만 해도 이런 류의 주장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었다. 실제 내가 몸 담고 있었던 곳에서도 '촛불'에 대한 어떤 종류에 비판에 대해서도 반박하려고 항시 대기, 으르렁대고 있었다.

 

물론 나의 그런 행동에도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좌파들의 촛불에 대한 '비판'은 솔직히 '비판'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지점에 너무 많았다. 촛불이 가장 뜨거웠던 5-6월에는 아주 소극적인 방식으로, 촛불이 소강기에 들어서기 시작한 7-8월에는 이 때다 싶은 마음으로 조금은 적극적으로 소위 '촛불 시민'들에게 불만 토로 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촛불의 주도세력은 자유주의자'라는 식으로 손쉽게 규정해 버린 후(이런 방식은 너무 한나라당 얘들이 하는 짓하고 비슷하지 않나?) 민주당 비판할 때나 쓰는 포퓰리즘 같은 용어를 동원해 이들의 한계를 따지고 들다가 이들이 앞으로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투쟁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버리고는 그래서 이후 새로운 운동주체의 형성에 있어서의 대안에 대한 자기 얘기는 한마디도 안하고(아니, 못하고!!) 말아버린다.

 

그래서 나는 누구 말마따나 그 때고 지금이고 간에, 대중의 행동은 '점수매길' 문제가 아니라, 운동주체가 이에 어떻게 개입하여 어쩌면 대중의 정치에 대한 환멸의 증폭으로만 귀결될 수도 있을 이 촛불집회를 새로운 운동주체 형성의 계기로 만들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그런 생각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위의 입장들과의 대결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대중지성'의 찬미를 늘어놓는 이들의 입장에 얼마간 동조하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것 같다.

 

 

각설하고, 그런 혼란을 갖고 지내던 차에 만나 이 책이 난 참으로 반가웠다.

촛불이 꺼지고 광우병 보다 더 굵직굵직한(특히 용산참사!!) 사건들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너도 나도 손쉽게 예언했던 제2의 촛불은 왜 일어나지 않는지 조금은 차분한 마음을 갖고 고민해 볼 계기를 전해 주기에 좋은 책이다.

 

 

일단 반가운 이름들이 눈에 띈다. 김정한, 백승욱.

이들은 촛불집회가 뜨겁던 작년 봄에도 찬양과 냉소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균형잡힌 입장을 보여줘서 나에게도 참 인상깊었던 저자들이다.

 

특히 김정한의 글에서는 두가지 지점에 눈에 들어온다. 하나는 촛불의 성과를 교육감선거 승리로 갈무리하고자 했던 시도의 한계점에 대해서. 그의 논의는 딱히 교육감 선거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굵직굵직한 대중투쟁의 양상과 그에 후속해 등장하는 선거국면의 결과가 반비례하는 예들을 보여주면서 사회운동과 제도정치의 결합이 쉬운 과제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그리고는 대중정치와 선거정치의 '게임의 룰'이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런 주장은 암묵적으로 촛불집회 당시 최장집, 박상훈 등이 주장했던 '원내정치로의 복귀'에 대한 일정한 비판을 암시하는 듯 하다. 둘째로 결론 부분이 참 맘에 들었는데, 촛불은 어찌되었건 간에 앞으로 벌어질 대중운동의 장기지속의 새로운 출발점을 암시할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그는 월러스틴의 말을 인용하는데, "1848년 프랑스에서의 혁명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시험무대였고, 1968년 5월 혁명이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 몰락의 예행연습"이었던 것처럼 촛불항쟁도 전례없는 경제위기에 맞선 대중운동의 새로운 순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진짜 그럴 수 있을 지 없을 지는 전적으로 운동주체들의 선택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백승욱의 글은 사실 비슷한 논조의 글을 참세상에서 접했을 때에도 그랬지만, 약간 수긍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는게 사실이다. 그는 글을 통해서 '우리가 민주시민이다'를 넘어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라는 선언을 할 것을 제안했었는데, 나는 그게 가능하기나 한 얘기인가가 의심스러웠고, 또 민주시민이라는 범주에서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로 나아가는게 어떻게 넘어서는 것이 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또한 당시 대중들의 행동을 "자랑스런 대한민국 만들기" 정도로 폄하하는 신기섭의 글을 치켜세우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난 이게 전형적인 '점수매기기'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점수를 매기려면 너는 50점 밖에 안되니까 90점 이상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조언정도는 달려야 하는데 신기섭은 그 정도의 성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기존의 지식인들이 촛불의 자발성에 무비판적으로 부화뇌동하면서 '대중지성 예찬론'을 퍼트리는 조류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놓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런 류의 주장은 그동안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어떤 것보다도 진지하고 아직도 촛불 그 이후를 고민하고 있는 많은 이들이 곱씹어 보아야 할 주장이다.

 

 

“…촛불집회를 분석하는 이론들이 보여주는 ‘낙관주의’는 매우 우려스럽다. 이론은 촛불집회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자율성의 낙관적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그 자율성이 넘어서지 못하는 경계들을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그 한계를 드러내는 입장을 채택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론은 늘 오히려 ‘비관주의적’이어야 하며, 대중에 대한 상찬으로 가득한 이론적 낙관주의는 결국 대중 스스로 환상에 빠져들게 하고 정세의 엄혹함을 회피하게 만드는 알리바이에 불과할 수 있다. 더욱이, 정세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기초해, 절망 속의 대중들이 표출하는 탈정치화의 전망을 대중적 봉기로 오해해서는 안 되는 시점에 등장하는 이론적 오해는 대중에게 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백승욱)

 

 사실 난 어떤 식으로든 '비관주의'를 앞장세우는 주장에는 마음이 거슬리는 편이긴 하지만, 이론에서의 비관주의라는 말은 현 정세를 보는 모든 이론이 갖춰야 할 미덕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엄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임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읽은 글은 요 두개인데, 앞으로 며칠 동안 나눠서 서점에 더 출근하면서 더 읽어봐야 겠다. 사실 요렇게 특정 정세에 맞춰서 쓴 여러 사람의 글을 모아놓은 책은 돈 주고 사기에는 아까운 면이 좀 있는게 사실이다.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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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천에서만큼은, 그리고 삶에서 만큼은 조금은 낙관적이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비관은 그저 등돌리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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