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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2/16
    하승우,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3)
    구르는돌
  2. 2009/11/20
    요즘 읽는 책 (2) -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3)
    구르는돌
  3. 2009/11/20
    요즘 읽는 책 (1) - 지식e 시즌3
    구르는돌
  4. 2009/11/03
    <남자의 탄생>으로 나를 돌아보다.
    구르는돌
  5. 2009/10/20
    기술관료를 위한 힘찬 응원가,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
    구르는돌
  6. 2009/10/07
    김도현, <장애학 함께 읽기>(2)
    구르는돌
  7. 2009/10/06
    김대중, <대중참여경제론>
    구르는돌
  8. 2009/10/05
    임종인, 장화식 <법률사무소 김앤장>(3)
    구르는돌
  9. 2009/09/27
    뒤메닐&레비의 <자본의 반격>에 관한 질문(6)
    구르는돌
  10. 2009/09/25
    아, 뿌듯하다~ ㅋㅋㅋ(4)
    구르는돌

하승우,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사실 난 아나키즘에 별로 관심이 없다. 예전 학교 다닐때 다른학교에 나보다 한 학번 낮은 친구가 자기는 고등학교때부터 아나키즘에 관심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아나키즘의 '아'자도 몰랐는데... 신기한 녀석일세..."라고 생각했다. 여하간에 아나키즘은 이런 분야의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뭔가 큰 매력을 안겨주는 것임에는 틀림 없나 보다.

 

'아나키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한 고전'이라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해설한 이 책은 그럼 왜 읽었냐 하면, 사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면 다 못 읽을것을 뻔히 알면서도 절대 1,2권씩 안 빌린다. 무조건 최대 대출할 수 있는 3권을 맞춰서 빌려온다. 이것도 거의 30분 정도 뭘 빌려올까 고민하다가 고른 책이다.

 

저자인 하승우는 지행네트워크(http://jihaeng.net)의 일원이기도 하다. 또 다른 지행네트워크의 일원인 이명원씨의 글들이 참 좋다고 생각하곤 있었는데, 하승우의 글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런데 첫 만남에 첫인상이 좀 별로다. -_-;;

 

이 책의 유일한 장점은 쉽게 쓰여졌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전혀 집중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복근운동 한답시고 다리를 수직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짓을 하면서 읽었는데, 그래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크게 무리는 없었다. 중간중간에 곁들여진 사진도 볼만했고...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아전인수격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주로 설명한 바와 같이, 제1인터내셔널 시기에 아나키스트들 대립했던 맑스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사회주의자들 중에 훌륭하다고 이름난 사람들을 죄다 아나키스트라고 묶어버리는 듯 하다. 내가 아나키즘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실제 그들이 아나키스트인지 아닌지 따질 형편은 안되지만, 저자 말대로 그들이 모두 아나키스트라고 하더라도 그 처럼 단일집단으로 묶어버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소개한 아나키스트들 중에는 테러리스트도 있고, 평화주의자도 있고, 생태주의자도 있는데, 이들이 모두 아나키스트라는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또한 볼셰비키를 악마화하는 식의 논의도 좀 눈쌀을 지푸리게 한다. 저자는 볼셰비키의 만행과 비민주성을 폭로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아나키즘이 이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던 약점들에 대해서는 어물쩡 넘어가는 듯 하다. 내가 구체적인 사례를 아는게 없어서 딱히 반론을 구체적으로는 못하겠지만, 아나키즘의 약점이라고 할 만한 단서들이 이 책에서도 몇 군데 보인다. 그것은 바로 신간회를 통해 민족주의자들과 야합(?)하려 했던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중국의 한인 아나키스들의 조직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의 강령이다.(193-4쪽)

 

1. 일체 조직은 자유연합조직원리에 기초할 것.

2. 일체 정치운동을 반대할 것.

3. 운동은 오직 직접 방법으로 할 것.

4. 미래사회는 사회 만반이 다 자유연합의 원칙에 근거할 것이므로, 정치적 당파 이외의 각 독립운동 단체 및 혁명운동 단체 와 전우적 관계를 지속 존중할 것.

5. 국가 폐지

6. 일체 집단적 조직을 소멸할 것.

7.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공산주의를 실행하되 산업적 집중을 폐하고 공업과 농업의 병합, 즉 산업의 지방적 분산을 실행할 것.

8. 종교, 결혼제도, 가족제도 폐지.

 

 위 내용에서 2번, 6번, 8번은 한편으로는 황당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순진하다는 생각 밖에 안든다. 정치운동을 반대한다면 전체 사회에 별 영향을 못 끼칠 소규모-자족적 협동조합 활동이나 (협동조합 자체가 자족적인 활동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의 폭발력은 더 광범위 할 수 있는데, 정치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잔뜩 안고 활동하면 자기들 스스로 그렇게 한계지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기껏해야 몇몇 부르주아 인물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테러활동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일체 집단적 조직을 소멸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아나코-코뮨적 공동체는 조직이 아니란 말인가? 위계적 조직과 수평적 조직의 경계는 무엇인가?

 

마지막 종교, 결혼제도, 가족제도를 폐지한다는 주장은... 음... 여기서 저자도 인용한 홉스봄의 말이 참 적절하단 생각이 든다. "부르주아지에게 충격을 주는 일이 그들을 타도하기보다는 쉬운 것이다." 종교, 결혼, 가족을 폐지하자는 말이 부르주아지에게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막히며 충격적인 언사겠는가? 그러나 그런 '말'로 그들을 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 순진한 발상이지 않는가?

 

막판에 가서는 광주항쟁까지 아나코-코뮨주의의 실현이라고 말하는 부분에 가서는 정말 아무거나 막 갖다 대는구나 싶었다. 

 

그린비에서 나온 책 중 내가 읽어본 것은 왠만큼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정말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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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는 책 (2) -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얼마 전 방송된 골드미스다이어리에서 송은이는

성대모사를 제대로 못하는 신봉선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신봉선씨는 능력에 비해 너무 떴어요. ㅋㅋㅋㅋ"

 

난, 이 말을 미안하지만 우석훈에게 들려주고 싶다.

 

요즘 그가 수많은 책을 순식간에 뚝딱뚝딱 내놓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는데, 그 중 몇개를 읽어보고 생각을 바꿨다. 조한혜정이 이 책의 추천사에서 쓴 것처럼 우석훈은 약간 수다맨 기질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딱히 창조적인 수다라기보다는 요즘 가수들이 즐겨하는 리메이크에 더 가까워 보인다. 아, 리메이크라기보다는 좀 노골적으로 말해서 자기표절의 냄새가 많이 난다. 사실 뭐 자기가 다른 책에서 썼던 문장을 그대로 옮겨오는 경우는 없지만, 사실상 비슷한 주장을 말을 다양하게 변주해서 이 책 저 책에 담는 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무 실력없는 아이돌 가수도 기획사를 잘 만나면 초특급 스타로 발돋움 하는 것처럼, 그도 여기저기 출판사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니 그 정도 책을 쓰는 것 같다. 물론 출판사가 아무나 붙잡고 '지원 해 줄테니 책 좀 써봐라' 한다고 누구나 그 정도의 책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닐테지만, 몇 년 안에 이렇게 책을 '쏟아낼' 기회가 이 한사람에게 집중되는 건 아무래도 문제가 심각한 듯 하다. 자기가 본 영화, 만화책, 심지어 삼국지 얘기까지 끌어대지만 결국 하려는 얘기는 이 책에서나 저 책에서나 비슷비슷한 책을 써내는 거라면 아무리 뛰어난 수다맨이라도 그에게 이렇게 책 낼 기회가 집중되는 건 좀 아니다 싶다. 노무현 정권 때였다면 그나마 예전에 진중권이 하던 것처럼 방송이라도 하나 따내서 수다라도 떨 텐데 요새 상황이 지저분하니 우석훈에겐 그런 기회도 안 오는 듯... ㅠ.ㅠ

 

물론 나는 우석훈이 실력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소한 난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서는 참 많은 걸 배웠다. 생태의 문제를 이토록 보편적인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처럼 20대의 문제를 솔직 담백하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도 흔치 않다. 내가 불편한 것은 그의 장점은 대중적인 '화법' 이상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치 진보담론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드는 것 처럼 포장된다는 점이다. 사회과학서적 출판도 전적으로 마케팅에 의존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88만원세대>를 10만부 이상 팔면 출판사 레디앙을 망하지 않게 할 수는 있겠지만, 우석훈이 말하는 '샤넬'식의 혁명에라도 근접하게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20대 문제에 관하여...

난 이미 대학을 졸업했지만, 여전히 20대이고, 앞으로 3년 동안은 계속 20대일 것이다. 그리고 20대 문제를 고민한다는 게 단지 생물학적 20대만이 아니라 소위 '장기20대'를 고민하는 문제라면 내가 사회 초년생으로 버벅대고 있을 30대 초반까지는 그 '장기20대'의 자장안에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난 20대 문제를 고민하는 어떤 글도 남 얘기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이 20대 문제를 논하는 글들은 항상 대학생 문제만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도 (명시적이진 않지만) 서울 4년제 대학을 보편적 형태로 놓고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도 매우 그렇다.

 

나는 <88만원 세대>에서 실업계고 졸업한 여성들의 문제를 다루는 꼭지를 보고 가장 공감했는데, 이번 책에서는 아예 그 부분이 빠져버렸다. (아마 그 부분은 박권일이 썼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연세대 일부 학생들과 함께한 수업의 결과물이라서 그렇겠지만, 그런 만큼이나 이 책이 포괄하는 20대에 대한 논의 범위도 한계적이다.

 

스펙경쟁과 쿨함으로 무장한 20대의 자기 정체성이 어디가 한계이고, 어디부터가 급진적일 수 있는 것일까?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이 점에 대해서 어떤 대답도 못 내놓고 있다. 그저 알바노조나 만들어 보라는 떡밥만 던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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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는 책 (1) - 지식e 시즌3

 

정말 정말... 너무 좋다.

아, 이런 책을 왜 이제서야 만났을까?

예전에도 가끔 지식채널 방송분을 몇개 본 적이 있긴 한데,

그것보다는 책으로 읽는 것을 더 추천하고 싶다.

물론 음악과 함께 듣고자 한다면 방송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난 각 꼭지별로 뒤에 4-6페이지에 걸쳐 담긴 짧은 해설이 참 좋았다.

참고문헌으로 제시된 몇 개의 책은 꼭 읽어봐야지 생각도 했고....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미술세계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복종 실험으로 알아내고자 했던 대중의 파시즘적 속성

멕시코 올림픽 시상대에서 당당히 오른손을 들어 흑인차별에 대해 항의했던 토미 스미스...

 

추천사에 쓰여있던 말처럼 정말 우리 시대의 비망록이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우니 영어공용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인상깊은 구절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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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여 년 전

영국 유학시절

"영어 못하는 노란 원숭이"라는 조롱을 들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으로 돌아와 총리 자리에 오르자

근대화 교육정책의 핵심으로

전국 곳곳에 '영어수업학교'를 세운다

 

그리고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

 

"더 빨리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예 일본어를 없애고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영어공용화론에 반론을 펼친

자유민권운동가 바바 다쓰이

 

"일본에서 영어만 쓴다면 어찌될 것인가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영어에 대한 동경'과

'모국어에 대한 콤플렉스'사이에서

결국 일본이 선택한 방법

 

"정부기관 내에 '번역국'을 설치하고

서양 근대 기술문명의 모든 성과들을

빠짐없이 번역하여 국민들에게 보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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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일본에게 배울 것은 바로 저런거다!!!

남의 것을 갖다 베껴도 내 말로 베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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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으로 나를 돌아보다.

 

 

가끔 책을 읽고 안타깝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대부분 책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깊이가 너무 깊고 울림이 커서 나의 앎의 그릇으로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경우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입장은 무엇이며, 동의할 수 있는 바와 그럴 수 없는 바에 대해 밝히면서 나름 쭈뼛거리며 '비판적 독해'를 펼쳐보이고 싶은데도 그럴 수 없는 책이 가끔 있다. 어제 다 읽게 된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이 그런 경우이다.

 

이 책에 관해서는 안타까운 점은 단지 이것 뿐만이 아니다. 간혹 책의 내용과 관련해서 더 궁금한 점이 있거나 하면 저자에게 메일이라도 보내서 물어보곤 하는데, 이 책은 저자가 이미 고인이 되신 관계로 그럴 수도 없다. 57년생. 우리 아버지가 50년생이신데, 동년배들에 비해서 결혼을 늦게 하신 것을 감안하면 저자를 정확히 내 아버지 뻘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 같은 분이 자신의 유년기에 동안, 자신어 어떻게 '남자'로 만들어졌는지를, 개인의 은밀한  속살까지 낱낱이 드러내보이면서 말한다는 것은 사실 독자로 하여금 좀 낯 뜨거우면서도 호기심 가는 대목이다. 난 그렇게 남의 과거 사생활을 엿보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그러면서 또 깊이 울었다.

 

이 책의 초반에서는 주로 저자 자신과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회고가 주를 이룬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한 개념을 수용하는 듯 하면서도 거꾸로 뒤집어 버린다. 외디푸스 컴플렉스에서는 어머니와 결혼하고자 하는 아들의 욕망은 아버지 살해에 대한 충동으로 이어지지만 결국엔 아버지의 법을 수용하고야 만다는 좌절을 표현한다. 그러나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드러내는 한국 가족에서는 오히려 아버지 살해를 이루지 않고도 아들의 어머니와 결혼하고자 하는 욕망은 실현된다. 실제 내 경험에만 비춰봐도 아버지-어머니 사이보다 나와 어머니 사이가 백배는 더 가깝다. 심지어 예전부터 아버지는 나와 같이 있을 때는 어머니와 직접으로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버릇처럼 나를 대변인 삼아서 자신의 말을 전달할 것을 요구했다. 셋이서 밥을 같이 먹고 있을 때 조차도. 저자의 말대로 그것이 마치 아버지다운 행동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내 사생활 깊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대부분의 일상과 하나로 묶여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저자의 말대로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나에게 확인시키려 할 때에만 나의 사생활에 등장했다. 학교 성적표가 나왔을 때, 용돈기입장을 썼는지를 확인 할 때(아버지는 용돈을 정기적으로 주는 것도 아니면서 항상 용돈 기입장을 써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바로 최근에 까지 내일모래면 서른이 다 되어가는 누나에게까지도!), 평일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는 것을 야단칠 때... 어쩌면 아버지는 그렇게 교도관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 이외에 나와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았던 것만 같다.

 

그런데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결국 '나'라는 주체 안에 아버지의 법이 관철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나아간다. 저자 자신이 회고하듯이 나 또한 집에 아버지만 혼자 계실 때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경우 그 반대다.) 이는 아버지가 법과 질서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법과 질서는 역설적으로 내 안에 '진선미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계세제적 구조 속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인 가족 내에서 내가 따라야 할 가장 기본적인 롤 모델이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나는 아버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회 또는 국가와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경우와 나의 경우는 약간 다른 것 같다. 저자는 아버지를 통해서 그 위의 또다른 아버지를 상정하여 '학교 선생님 - 파출소장 - 지역 군부대 소대장 - ... - 김종필 국무총리 - 박정희 대통령 - 존슨 미국대통령 - 우 탄트 UN사무총장'으로 나아갔다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우리 아버지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항상 우울한 존재였다. 예전부터 아버지가 나에게 아버지로서 들려줬던 이야기는, 언제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는지에 관해서였다. 국민학교 때 3일을 굶어서 학교에서 시름시름 앓았는데 딱하게 여긴 선생님이 일찍 귀가시켰다는 얘기. 집안 형편 때문에 국민학교를 5학년 1학기 까지 밖에 못다녔는데 학교에서 어찌어찌 졸업장은 만들어 줘서 국졸 학력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 기타 다른 이야기들도 이와 비슷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미제 포탄에서 나온 부속을 재떨이로 쓰는 아버지를 보고 상상했던 것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나에겐 아버지를 무작정 부정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런 식이다. 이런 식으로...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성격, 말투, 대인관계를 형성하게 된 모든 배경에 대해 하나하나 캐물어 나가야만 했다. 결국 나 또한 저자의 말대로 '동굴 속의 황제' 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어쩌면 난 아버지를 그토록 부정했던 만큼 내 세계 안에서 황제가 되고 싶어했을 지도 모른다. 그다지 붙임성이 좋지도, 말주변이 좋지도 못했던 내가 학교 선생님들에게 그렇게 잘 보이려 노력하고 발표라도 하나 하라고 하면 기를 쓰고 손을 들어 댔던 것도 그래서 일 것이다. 저자의 경우와 전적으로 다른 경우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난 가족을 건너뛰고 학교를 나의 직접적인 아버지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지금껏 내가 다른 욕심은 별로 없으면서도 허영심에 가득찬 지적 욕구로만 똘똘 뭉쳐있는 것도 그래서 일 것이다.

 

그렇게 동굴 속에 철저히 갇힌 나는 대인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면 항상 나의 동굴을 이렇게 왜소하게 만든 가족을 원망했다. 그럴 수록 난 더 깊은 동굴을 파댔다. 아...

 

 

* * *

 

얼마 전에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보면서 그처럼 내 자신에 대한 정신분석학 적인 해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은 알튀세르의 그것보다 내 지금 욕망에 더 적합한 정신분석학적인 해부의 모형을 제시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만큼 그의 책은 사람을 더 울렁거리게 만드는 데가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

 

 

일부 발췌

 

 

순수한 사랑이 자신이 도달해야 할 성스러운 성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라면, 음담패설적 성 관념은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를 필요로 하는 동굴 속 황제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권위적인 사회일수록 여성은 '성녀 아니면 창녀'의 양극적인 이미지로만 나타난다더니, 나야말로 그런 성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 같은 성 관념은 음란서적을 탐독하고 못된 그림책을 본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 뿌리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여자 또는 남자로 행동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결코 서로 성적 표현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일을 하고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는 사라밍란 의미에서 부부유별의 성적 표현은 많았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고 질투하며 싸우고 다시 화해하고 기뻐하는 성적 표현은 하지 않았다. 두 분은 하나의 사랑이 시작되고 유지, 발전되어 기쁨을 얻기까지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햇빛과 영양이 필요한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남녀로서 상호작용하기보다는 각자에게 주어진 길, 여자의 길과 남자의 길을 분담해서 걸었다.
지금도 두 사람은 그렇게 다툰다. 특히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당신은 왜 나를 좀 더 사랑하지 않느냐?"라고 항의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당신은 여자가 그게 뭐냐?"라거나 "니 아버지는 그게 틀렸다."라고 비난한다. 마치 선생님이나 목사님이 말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은 남녀로 맺어진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그것보다 더 숭고한 목적이 있다는 듯이 살아왔다.
한마디로 우리 집은 성의 무풍지대였다. 우리 국토의 허리를 가로질러 남북한의 대결을 피하기 위한 비무장지대(DMZ)가 있듯이, 우리 집은 마치 그곳에 성적 접촉을 하면 안된다는 '성의 비무장지대(DSZ)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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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관료를 위한 힘찬 응원가,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

 

 

 

요즘은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말이 진보라는 말 만큼이나 진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그 재구성의 내용들이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 못한 것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바람을 타고 고개를 내미는 사민주의 논의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장하준의 경제학도 비슷한 케이스란 생각이 든다. 아니 어떤 면에선 경악스럽기까지 한 측면도 많다.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은 '진보의 재구성'의 요소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경악스러운 논의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의 전체적인 논의 속에서 계속 눈에 걸리는 것은 사실상 그가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른 목소리를 통해 같은 말을 한다'. 그러면 우선 그의 논리 구조를 따라가 보자. 그는 순수한 의미의 '자유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모든 '시장'의 형성에 있어서 어떤 사회에서도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난 여기까지는 전혀 색다를 것이 없는, 진보학계에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드는데, 왜냐면 이런 사실은 장하준이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칼 폴라니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라는 허상을 공격하면서, 그리고 쉬잔느 브뤼노프가 국가와 자본이라는 머리 두개 달린 독수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깨뜨린 논리이다. 물론 폴라니나 브뤼노프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이 정도로 뭐 대단한 사상적 진전을 본 것마냥 오바할 거 하나 없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가 '자유시장'이라는 베일에 감춰진 '국가'라는 마피아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 국가를 미화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보통 신자유주의의 선봉장들은 국가를 시장경제의 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장하준은 폴라니나 브뤼노프처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시장경제의 성장에 동조한 국가의 역할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에 국가가 엄청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고전파 경제학이 경제성장을 위해선 국가의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장하준은 같은 이유로 국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국가가 암암리에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해 왔던 '긍정적인 역할'들을 인정하고 이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간간히 심지어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계획경제에도 긍정성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마치 허무개그를 보는 것만 같다. 장하준은 초국적 기업에 대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신고전파, 오스트리아학파, 후생경제학 등)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외국인 직접투자는 사실 선진국 내부에서만 발생했고 실제 개도국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말한다. 실제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산업부문에서의 직접투자보다는 금융에서의 포트폴리오 투자 같은 간접투자가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내가 장하준에게 묻고 싶은 말은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이다. 그는 줄곧 강조하는 산업정책의 발전을 위해서 이런 부문에까지 해외 자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산업부문에도 외국자본이 직접개입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자? 뭐 이런건가?

 

나의 이런 의문은 뒷부분으로 가면 말끔히 정리된다. 그는 초국적 기업  투자를 촉진하는 것은 규제완화 조치들이 아니라 국내정치적 안정성이라 주장한다. 왜냐면 실제 규제완화 여부와 상관없이 개도국의 기업투자 유치 실적은 늘지 않았고, 오히려 선진국에서만 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171쪽)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주도하는 '전략적 산업정책'을 통해 국제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앞에서 그의 주장이 '다른 목소리로 같은 말하기'일 뿐이라고 일갈한 이유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가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자나 장하준 자신이나 모두 초국적 기업 투자 자체는 '선'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신자유주의자는 규제완화를 주장하고 장하준은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주장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사실상 세계적으로 '순수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말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남미에서도 워싱턴 컨센서스를 수용하는 친미세력의 정권 장악이라는 국내정치적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NAFTA도 체결하고, 아옌데도 때려잡았던거 아닌가? 물론 이 당시 남미의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이 박정희 정권 당시 한국 정치 상황을 안정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 당췌 이 양반이 생각하는 '안정'이 뭔지 아리송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 신자유주의자들도, 장하준도 국가주의자이다. 다만 장하준이 좀 더 솔직할 뿐이다. 여기서 장하준이 어떤 국가주의자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기술관료 즉, 테크노라트에 대한 비판이 주되게 제기되고 있는데, 장하준은 정확히 이런 테크노라트들의 치어리더다. "선별적 산업, 무역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경제학자로서의 능력보다는 오히려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229쪽) 이딴 식이라면 어떻게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장하준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장하준의 테크노라트를 위한 응원가는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는 중국, 한국, 폴란드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초국적 기업은 매몰비용의 문제 때문에 정부의 정책전환에 불만을 가지고 자금을 회수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초국적 기업을 상대로 해당 국가 정부가 다양한 협상 카드를 제시할수 있고, 협상 과정에서 초국적 기업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165-167쪽) "그러니 이 땅의 모든 기술관료들이여! 두려움을 버리고 당당히 나아가라! 전 세계 자본에게 당당히 호객행위를 하라!"

 

한 학생단체에서 낸 팜플렛을 보니까 장하준을 비판하면서 그의 입장이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던데, 솔직히 난 이런 비판도 좀 오버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가 만약 현시기 자본주의가 위기라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일테고, 그렇기 때문에 장하준은 (이 단체가 생각하는) 위기를 극복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극복의 방향은 '대안세계화'인데, 장하준은 대안세계화 정도되는 대안 논의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정확히 이런 수준에서, 노무현은 장하준의 책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놈의 '진보의 재구성'을 이루기 위해선 장하준도 노무현도 넘어서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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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장애학 함께 읽기>

 

 

약간의 변명

 

내가 그의 책에 논평하는 것은 적절한 것일까? 장애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사실상 전무한 국내 좌파의 토양 위에서 그나마 장애와 관련해서 의미있는 글들을 써왔던 수유+너머의 고병권마저도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사실 내가 김도현의 책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장애 문제에 관한 한 그는 내 교육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차후 문제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고병권의 말을 기준으로 하자면 내가 '서평'이라는 큰 타이틀을 걸고 '낙서' 수준으로라도 글을 찌끄리는 것은 상당히 발칙한 생각이겠지만, 버스비 천원이 아까워 3-40분 거리 정도는 가뿐하게 걸어다니는 내가 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이 책을 샀으니 인터넷 쇼핑몰에 상품평 올리는 사람들마냥 몇 마디 코멘트 할 자격은 있는 것 같다.

 

일단 뭔가 평을 하려면 해당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다른 문헌들, 특히 논평하려는 책과 다른 관점을 가진 문헌들과 비교하는 것 정도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더군다나 나 같은 풋내기 독자가 이 책을 평하는 글을, 심지어 낙서수준으로라도 쓴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상 국내에서 장애문제를 자기 학문적 과제로 다루는 사회복지학이나 특수교육학 전문서적을 제외하고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장애(학) 관련 서적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내가 봤을 때 (물론 공부를 전혀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장애복지 어쩌구 하는 이름을 달고 있는 책들은 그냥 '장애'라는 단어를 '노인'이나 '아동' 등으로 바꿔놓으면 또 아주 새롭고(?) '훌륭한'(??) 이론서가 될 만큼, 장애문제 자체에 대한 고민은 전무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정이다보니 김도현의 <장애학 함께 읽기>의 참고문헌 목록에도 (국내출판 문헌만 봤을 때) 전공서적스러운 몇 개의 문헌과 저자 자신이 이전에 쓴 다른 책을 제외하고는 장애문제 자체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결국 이 책은 전문 연구자도 아닌 저자가 거의 맨땅에 해딩하는 식으로 해외 원문서적 찾아가며 읽어낸 장애학의 정수를 그의 말마따나 소화한 만큼 보여주는, 그래서 완전 알짜배기로만 뭉쳐있는 그런 책이다.

 

 

 

내가 읽은 <장애학 함께 읽기>

 

이 책의 1부는 주로 '장애' 자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와 이 중에서 특히 주로 사회적 생성주의 모형에 따르는 '사회적 장애이론'에 대한 소개에 할애하고 있다. 이에 근거한 관점은 그의 전작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에서도 얼마간 제시되고 있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주로 영국 리즈대학 장애학연구센터의 연구성과들을 중심으로 이해를 돕고 있다. 하지만 이론에 대한 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운동세력들(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몸의 사회학 등)간의 논쟁을 덧붙이면서 저자 자신이 생각하는 장애학의 지평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나아가 2부에서는 장애학이 사회운동 속에서 실현되기 위한 다양한 논의들을 엮어놓는데, 이 부분에서는 특히나 저자의 폭넓은 독서편력이 돋보인다. 그는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대안사회체제에 대한 논쟁에 장애문제가 논의될 수 있는 방식, 그 중에서도 특히 장애와 노동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폴 애벌리의 '노동거부'와 '기본소득'론, 그리고 이에 대한 우회적 비판의 경로로서 울리히 벡의 '새로운 노동세계'건설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며 이 둘을 경쟁시킨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는 제도정치와 비제도정치의 결합 또는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이라는 오래된 논쟁을 장애인운동의 시각에서 다시 읽어내고 있다.

 

노회찬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여성학을 읽고 젠더가 배제된 정치는 진보일 수 없음을 깨우쳤듯이, 이제 우리는 장애학을 함께 읽고 장애가 배제된 정치 또한 진보일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이 책이 노회찬의 이 말을 더 근원적인 물음에 닿게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장애인운동을 전체 사회운동에 어떤 자리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라는 물음. 젠더가 배제된 정치여서는 안된다고 이해했다면, 이는 곧 여성운동이 사회운동의 단순한 '부분집합'이 아니라 사회운동 자체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핵심'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페미니즘을 우리 운동의 전략적 심급으로 사고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장애인운동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운동사회 전반적으로 이런 시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저자가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말미에서 발리바르가 제기했던 '노동과 자본의 모순으로 포섭할 수 없는 인간학적 차이'라는 시각을 환기시키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장애를 인간학적 차이로 이해하고 이로 인한 모순들이 다른 어떤것으로 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조를 이해하는 노력이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일전에 나는 어떤 활동가가 여성운동이 왜 전략적 심급을 갖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이유를 장애인운동과 다르게 여성운동은 보편적일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즉, 장애인운동은 특수한 사례이기 때문에 전체운동의 질을 결정할 수 있는 전략적 심급이 아니라는 것이고, 여성운동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하나하나 반박하고 따지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기에 넘어가긴 하겠지만, 어쨌든 <장애학 함께 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전체 사회운동 내에서 장애인운동의 근원적 위치를 물을 수 있는 통로를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2부를 읽으면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 '장애 정치' 부분은 장애정치를 다룬다기 보다는 일반적인 사회운동론을 다룬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도 그럴것이 여기서는 주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 탄생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는 논쟁인, 당이냐 사회운동이냐라는 쟁점을 환기시키고 여기에 장애문제를 살짝 얹어놓는 듯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쉽다'라는 느낌이 책 자체에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책의 논의를 둘러싼 장애정치의 발전 수준에 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장애정치에 대한 논의가 이런식으로밖에 갈 수 없는 것은 저자 자신의 논의력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장애운동이 세계 어디에서도 정치무대의 제대로된 논의 테이블에 올라온 적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 자신도 불가피하게(?) 장애운동 외부의 이론적 자원들을 동원했던 것일테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양한 이론적 자원에 근거를 둔 논의 방식이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밑거름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활동가의 롤모델

 

어쩌다보니 난 지금까지 김도현씨가 낸 3권의 책을 다 사보게 되었다. 근데 좀 씁쓸한 것은 그의 책 세권이 내가 지금까지 본 장애운동 관련된 책 중에 한권 빼고 나머지 다 라는 사실이다. (그 한권은 삼인출판사에서 나온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이다) 내가 그 동안 책을 많이 본 편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장애문제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관심을 두고 있던 편이다. (그냥 '관심'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런데 내가 본 4권에 장애문제 관련된 책 중에 3권을 김도현씨가 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장애운동의 이론화, 대중화를 위해서 그 혼자 독고다이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공부하고 투쟁하는 사회운동가의 전형적인 롤모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참 그런 의미에서 김진균상 같은 것은 정말 아무한테나 주는 상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여하간에 이 허섭스러운 서평, 아니 낙서를 보시는 분들에게 <장애학 함께 읽기>라는 양서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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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중참여경제론>

구르는돌님의 [DJ 경제학] 에 관련된 글.
 

 

 

책을 읽은지는 한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서야 후기를 남긴다. 사실 그냥 김대중의 경제학이기 때문에 관심이 간 것도 있지만, 하버드대학에서 교재로 쓰인다는 책이라길래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라는 생각을 갖고 책을 펼쳤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나서야 대학에서 교재로 쓰는 책들이 항상 다 좋은 책은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하버드라고해서 별 수 있겠나...

 

본문의 내용에 왈가왈부하기 전에 고인에게 괜히 몇 가지 따지자면,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바탕이 된 논문을 미국의 교수들이 읽고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책으로 출판하자고 제의했다는데, 그 교수들이 대체 누구인지 전혀 얘기를 안한다. 그냥 '저명한 교수'라고만 말한다. 뭐야? 이름이 '저명한'이야? 게다가 남의 말을 인용한 부분들에서 한 번도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처음에 논문으로 쓰여졌던 것을 대중적 출판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러 뺀 건가 싶으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이게 뭐 신변잡기 농담따먹는 책이 아닌 이상 기본적인 것은 지켜야 하지 않나 싶다. 그가 책 전체에서 출처를 밝힌 부분은 오직 숫자와 표로 이루어진 통계자료들 뿐이다.

 

<대중참여경제론>에 담긴 김대중의 경제사상을 몇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경제는 지금껏 정부주도의 관치경제의 심각한 폐해를 겪어왔다. 관치경제는 자유로운 경제주체의 활동을 제약하고 독재정권과 유착된 일부 재벌에게만 편향적으로 재정분배가 이뤄지도록 했다.  2) 정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금리가 낮게 유지됨으로 인해서 은행으로 돈이 모이질 않고, 게다가 부족한 은행자금의 기업 대출과정에 정치권력이 개입함으로써 대출을 통해 사회적 부가 대거 재벌로 이전된다. 은행을 통한 자산증식의 경로를 찾지 못한 돈들은 대부분 부동산 투기로 몰려 인플레이션을 조장한다.  3) 결국 이런 정부주도 경제성장 정책은 일부재벌과 대토지소유자의 이익만을 보장하고 중소기업과 근로자의 이익을 배제한다.  4) 한국이 기존의 경제성장의 성과를 이어받아 '세계 8대 선진국에 들려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대토지 소유자에게 중과세를 매겨 불로소득을 차단함과 동시에, 금리 자유화-한국은행 독립, 그리고 법인세 인하 등을 통해 시장경제를 원활히 작동케 해, 금융시장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런 논의 속에서 얼마간 정치적인 결론도 도출되는데, 이는 어느정도 87년 이후 정세에서 김대중이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대립전선의 재구축에 대한 주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에는 권위주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일부 재벌과 대토지 소유자가 한 편에 있고, 다른 한편엔 건전한 기업가(중소기업)과 근로자, 그리고 민주화 세력이 버티고 있다. 후자의 세력은 지금껏 관치경제의 폐해로 인해 성장이 발목잡힌 이들로서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경제주체이다. 이들은 성장된 금융시장에 동등한 투자자로서 활동할 수 있으며, 특히 근로자들은 소규모 다수조합으로 활동하여 국민경제에 제동을 걸기보다는 광범위한 전국적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국가적 단위의 협상에 참여해 자신들의 법적 권익을 지키고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요로한 책의 내용에 근거하여, 나는 김대중이 정말 준비된 대통령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저런 내용은 IMF가 남한에 요구했던 경제개혁 조치의 주요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그리하여, 김대중이 IMF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던 것이, IMF의 강요때문이었다고 항변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아주 중요한 증거자료가 될 것이다. 니들이 김대중을 그렇게 떠받들고 싶으면 최소한 선상님이 쓰신 책 정도는 읽어보고 떠들어야지...

 

이 책을 읽으면 김대중이 추진했던 일련의 경제개혁 조치들이 IMF 사태에 의해 우발적으로, 자기 의도와는 다르게 추진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전국단위 노동조합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실제 파견법, 정리해고법과 맞거래된 민주노총의 합법화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그의 사상과 정치적 실천 사이에 놓인 잘 뻗은 고속도로가 참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항간에는 김대중이 2000년도에 생산적 복지를 내걸고 기초생활보장법 도입한 때에 정권 초반 신자유주의 정책과 단절하고, 그의 원래 경제사상이라 할 수 있는 대중경제론을 실현해 보려는 시도였다고 말하는 놈도 있더라. 그러나 이 말을 김대중이 대선 첫 도전 때 낸 <대중경제 100문 100답> 집필을 막후에서 지원했다는, 심지어 요즘엔 그 때문에 대필 논란까지 제기되고 있는 박현채 선상님께서 듣는다면 저승문을 박차고 뛰쳐나오고 싶으실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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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인, 장화식 <법률사무소 김앤장>

 

 

나는 작년 초 진보신당이 만들어지는 걸 매우 띠겁게 바라보던 사람 중에 하나이다. 무엇보다도 당을 뛰쳐나가신 분들이 내걸은 이유(종북주의와 패권주의)가 전자의 것은 시기적으로 좀 쌩뚱맞고, 후자의 것은 어차피 이놈이나 저놈이나 오십보백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에겐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임종인이라는 사람 때문이다. 신당의 두 상임대표라는 사람들이 맨날 임종인을 끌어들이려고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듯한 모양새가 모양새가 영 띠꺼워 보였기 때문이다.(=>요 문장은 좀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대충 넘어가 주시길...) 임종인이 대체 뭔대? 얼마나 잘난 놈이길래 열우당에 있던 놈을 데려오려고 저리도 거품을 무나? 어렴풋하게 예전에 이라크 파병에 대해 비판하면서 행정부와 각을 세웠던 기억이 나긴 하는데, 그런 식의 활동은 진정성이라고는 개미 코딱지 만큼도 안 느껴지는 천정배, 김근태 이런 놈들도 다 하던 짓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래봤자 열우당인데..."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이건 내 정치적 당파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열우당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 문제가 되는 것인데, 난 이게 어떤 측면에선 요즈음 일반적 시민들의 구 집권세력에 대한 보편정서가 나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체현된 것이라 (강하게!) 주당한다.

 

그러다가 임종인이 보궐선거 출마를 결정하고 진보정당들에 지지요청을 보낼 즈음 레디앙과 한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걸 보고 임종인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진보의 재구성'을 외부 사람 끌어오기로 대체하려는 신당의 몇몇 어르신들의 행태에 대해선 여전히 띠거운게 내 기본적인 관점이다.) 사실상 친노파 '출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친노신당을 친박연대에 비유하는 것을 보고 그냥 큰 제목만 읽어보고 닫으려던 기사를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블로거 한윤형의 말을 빌자면 "2004년 탄핵열풍을 업고 열린우리당에서 금뱃지를 단 인물들 중에 자신을 뽑은 유권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헤아렸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다가 임종인이 외환카드 노조위원장을 지낸 장화식과 함께 쓴 <법률사무소 김앤장>을 읽게되었다. 예전에도 읽으려다가 임종인의 '출신성분'이 맘에 걸려 멀리하다가 위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 나름 그와의 '오해'를 풀고 편한 마음으로 읽어갔다.

 

일단 최종 감상평(??)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런 책을 쓰고도 아직 이 사람이 정치인으로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라는 거다. 삼성 이건희 회장보다 1년 수입이 더 많은 사람을 대표 변호사로 두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 사적 권력 집단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속옷까지 벗겨서 낱낱이 까발릴 생각을 하다니, 이 양반들 간댕이를 수십개씩 은행에다 냉동보관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실제로 위클리경향의 전신인 뉴스메이커에서 김앤장 비판성 기사를 썼다가 김앤장으로부터 몇 십억대 소송 협박을 받고 정정기사를 내보내야만 했던 전례를 저자들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책 속에는 대한민국 최고 로펌이 살아가는 방법이 조목조목 드러난다. 핵심은 이중생활!! 대한변협에는 그냥 공동사업자(이거 맞나?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서 정확한지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로 등록해서 변호사법상 로펌에 가해지는 제약을 피하고, 국세청에는 로펌으로 등록해서 세제상의 혜택을 받는다. 게다가 수많은 고위공직자 출신들을 고문으로 거느린 이 로펌은 당당히 2년에 한번씩 국세청으로부터 납세자 표창을 받아서 주기적으로 2년간 세무조사를 면제받는다.

 

이건 그냥 도의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뭐 전과자들이 장관되고 총리도 되는 세상에 쩝... 그러나 정치적으로, 국민경제적으로 문제인 것은 이들이 신자유주의를 위한 법률해석, 나아가 법개정에까지 개입할 수 있는 막강파워를 지녔다는 점이다. 세계최초 문자해고를 발명하고, 단협해지를 단체협상과 함께가는 연례행사로 만들어 버린 것도 이 변호사 집단의 머리에서 나온 거라 한다. 진로소주가 불법적으로 헐값 매각될 당시에도 진로 사장의 등뒤에서 칼끝을 겨누던 것도 이 변호사 집단이다. 기업 사장까지 무릎꿇게 할 정도면 노동자들은 집단 암매장 시켜도 눈하나 깜빡 안할 놈들이라는거지...

 

하나하나 열거하기에도 숨이 찬 이 devil's advocates(악마의 옹호자)를 여론의 심판대 위로 끌고 올 여지를 만들어 놓은 두 저자에게 늦었지만 박수를 보낸다. 여하간에 이번 보궐선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둬서 18대 국회에서도 그가 말한 '보이지 않는 권력을 보이게 하는'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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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메닐&레비의 <자본의 반격>에 관한 질문

여기를 오가시는 블로거 분들 중에 아시는 분 있으시면 답변 바랍니다.

 

어제부터 제가 1년 가까이 책꽂이에 묵혀두고 있던 뒤메닐&레비의 <자본의 반격>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 2부 내용에서 이해가 안되는게 많아서요.

 

 

1. 일단 아주 간단한 질문부터 하자면 43p에 보면 이윤율에 관한 설명이 나오는데요,

여기서 맨 밑에 나오는 공식을 보면 [이윤율=이윤/고정자본] 이라고 써 있는데요.

보통 이윤율하면 투여된 총 자본과 비교한 이윤량의 비율로 표시하지 않나요?

근데 왜 여기선 고정자본만을 분모자리에 놓는 건지...??

또한 그 다음다음 공식에 나오는 실질임금률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2. 이게 본격적인 질문인데요,

4장에서보면 저자는 실업의 원인이 기술진보에 있다는 주장을 일축하는데요, 그러나 5장에 가면 70년대 이후 미국에 비해 유럽의 실업률이 높은 이유는 유럽의 기술진보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앞에서의 설명과 뒤의 그것이 다른 이유로 "세계적인 현상에 대한 설명은 다양한 지역 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아무리 봐도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뒤에서도 반복되는 미국과 유럽의 실업률의 차이에 대한 설명은 계속 이렇게 뜬금없는 주장을 나열하는 것만 같고.... 게다가 미국이 유럽보다 노동절약을 훨씬 적게 했다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 하는 말인지도 전혀 설명이 없고...

 

 

3. 다음으로, 저자들이 말하듯이 완전고용과 강력한 기술진보가 관련된 것이라면,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강력한 기술진보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윤율이 하락하고 그 결과로서 위기가 닥쳐 자본축적에 문제가 생기고 이로 인해 기술진보가 정체되는 상황. 이런 문제에 대응해 자본은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이 책 3부에서 설명하듯이) 금리인상 등의 조치를 통해 부를 금융부문으로 이전시킵니다. 이것이 저자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인것 같은데요...

 

그런데 문제는 신자유주의를 이런 방식으로 비판하면 결국 신자유주의를 탈피하는 방법은 '기형적인' 금융부문의 성장을 통해 이윤율을 회복할 것이 아니라, 기술진보와 고용증진의 선순환을 가동시키는 것, 즉 케인즈주의적 해법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사실 지금 제가 이 책을 절반만 읽어서 궁극적으로 저자가 어떤 주장을 하고자 하는지는 모릅니다.)

 

최근 금융위기를 분석하면서 뒤메닐의 주장을 상당부분 수용하는 윤소영교수의 경우도 뒤메닐이 새로운 뉴딜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사민주의에 대한 지지를 원칙적 문제로 수용한다는 점을 비판하던데요...

 

 

 

그런 점을 둘째 치더라도 전 이 책의 2부 내용인 전혀 개연성있게 다가오질 않아서요. 좀 아시는 분 있으면 댓글 달아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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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뿌듯하다~ ㅋㅋㅋ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어제까지 바짝 읽어서 다 읽었다.

책 내용을 다 이해하고 안 이해하고는 둘째 문제다.

중요한 건 어쨌든 첫 페이지부터 옮긴이 해제까지 다 정독했다는 것.

 

마음 같아서는 서평을 좀 써보고 싶지만,

스피노자와 발리바르라는 어르신들의 생각에 이러쿵 저러쿵

토를 달 만큼의 사고 수준에는 한참 미달하는 지라 그런 건 생략.

 

사실 책 본문을 읽는 것은 완전 고역이었다.

분명히 한글로 써 있는데도 난 읽는 내내 내가 문맹인지를 의심해야 했을 정도로. ㅠ.ㅠ

그러나 친절한 옮긴이 해제를 읽으면서 나름 통쾌!!!

이건 뭐 고등학교때 '수학의 정석'에 있는 어려운 문제 풀다가

답답해서 해답지 보고 문제를 이해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요즘 나의 독서가 조금씩 교양서에서 이론서로 옮겨가고 있는데,

읽는게 고역이긴 해도 뿌듯한 마음은 몇 배로 높다.

 

예전에 출판사에서 절판 직전에 거의 반값으로 판매하길래 사 놓은

<헤겔 또는 스피노자>(피에르 마슈레)도 집에 있는데,

올 해 안에 요것도 읽어야 겠다. 역자이신 진태원씨의 친절한

역주가 곁들여 있어서 아주 든든하다.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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