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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나 시바의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중에서...

로크(John Locke)는 자신의 글 "재산에 관한 논고"에서 유럽의 엔클로자 운동 기간 동안에 똑같이 일어났던 절도와 도둑질 과정을 효과적으로 정당화하였다. 여기서 로크는 자본주의가 건설해야 할 자유는 곧 도둑질할 자유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로크가 보기에, 재산이라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자원을 가져와서 이것을 노동과 결합시킴으로써 창출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동'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의 통제 안에서 드러나는 '영적인' 형태로서의 노동이다. 로크에 의하면 자본을 소유한 자만이 자연자원을 소유할 자연적인 권리를갖는데, 이 권리는 다른 사람들의 공동권리를 자신들의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따라서 자본은 자유의원천으로 규정되는 동시에, 자본이 자기 것이라고 선언한 토지, 숲, 강, 생물 다양성에 대한 자유와, 자신들의 노동에 근거한 권리를 갖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부정한다. 사유재산을 공동재산으로 돌려주는 것은자본 소유자의 자유를 빼앗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자원에 대한 자신의 권리와 접근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하는 농민과 부족들은 도둑으로 간주된다. (19-20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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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이런 무엇인가? 이 질문은 생명에 대한 특허를 두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핵심적인 주제이다. 생명에 대한 특허는, 자기조직할 수 있는 자유를 통해 생식, 증식하는 유기체에 내재해 있는 창소성을 사유화(enclose)한다. 이는 여성, 식물, 동물 육체의 내부공간을 사유화한다. 또 이것은 공적으로 창출된 지식을 사적 재산으로 변홤시킴으로써 지적 창조성의 자유스런 공간을 사유화한다. (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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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소설 같은) 대중적 신화가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이 과학자들이 개방적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특허보호를 추구하는 상업적 기업들과 함께 일하는 과학자들이 과학적 의사소통에 대해 가하는 위협은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저명한 핵생물학자 엡스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거에는 동료들이 때때로 서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섬광계수기(scintillation counter)나 전기영동장치(electrophoresis cell)와 같이 방금나온 따끈따끈한 최신 연구결과들을 공유하고, 논문초고를돌려보는 열정적인 연구 분위기 속에서 서로 친구처럼 지내고 처신하는 거시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곡물 개량)에 대한 희망적인 새로운 관점을 가진 UCD(캘리포니아 대학 데이브스 분교)의 과학자들도, 데이비스에 있는 곡물 유전자 관련 분야의 두개 사기업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라든가 혹은 이런 관련자들에게 말할 수도 있는 자기 동료들에게 자신들의 이런 새로운 관점에 대해 털어놓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금기가이미 캠퍼스에 퍼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케니는 산학복합체 내에서 나타나고 있는 고하가적 개방성의 폐쇄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도둑맞거나 어떤 사람의 작품이 상품으로 바뀌는 것을 보는 두려움은 동료라고 생각되었던 사람들을 침묵하게 한다. 어떤 사람이 만든 것이, 그에 대한 어떤 통제력도 가지지 않은 누군가에 의해 판매를 ㅜ이한 생산물로 바뀌는 것을 볼 때 능욕당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일에 대한 사랑은 평범한 상품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 일은 시장가격을 기반으로 해서 교환되는 물품이다. 돈이 점차 과학발전의 가치를 중재하는 결정자가 되어가고 있다.

과학에 비밀이 도입되면서, 지적 재산권과 이와 관련된 지식의 상업화, 사유화는 과학공동체를 고사시키고 그에 따라 창조성의 잠재력까지 말살할 것이다. 지적 재산권은 창조성의우너천 자체를 죽여가면서 창조성을 착취한다. 저수지가 물을 계속 공급받지 못하면 곧 말라버린다는 자명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나무의 뿌리에 영양이 공급되자 않으면 그 나무는 죽는다는 것도 상식이다. (39-41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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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주의적 생물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구조와 역할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도못하면서 생명체들과 그 기능들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해 버리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몇몇 농작물과 나무들은 '잡초'로 규정되어 버리고, 삼림과 가축 품종들은 '불필요한것들'로 선언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을 다 파악하지 못한 DNA는 '정크 DNA'로 불린다. (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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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에 대한 재산권주장은 그 생명체가 새롭고 특이하며 자연적으로는 발생하지않는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 생물체가 자연에 방출되어 나타나는 결과에 대한 '책임자' 문제가 제기될 때는, 갑자기 그 생명체는 전혀 새롭지 않은 것처럼 취급된다. 그것들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주장하면서, 생명공학 안전성에 대한논의는 전혀 불필요한 것인양 취급한다.

이처럼 생물체가 소유될 때는 거것은 자연적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고, 환경론자들이 GMO의 방출시 생태에 미치는 영향 문제를 제기할 경웨는 똑같은 생물체가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자연적'이라는 개념의 구성에 대한 이와 같은 아전인수격 태도는, 최고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과학이 실제로 자연에 대한 접근에서 얼마나 주관적이고 기회주의적인가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53-5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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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한 특허 부여는 두 가지 형태의 폭력을 부추긴다. 첫째는, 생물이 단순한 기계처럼 다뤄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기조직하는(self-organizing) 능력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미래 세대의 동식물에 대한 특허를 인정함으로써 살아 있는 생명체의 스스로 번식하는 능력 또한 부정된다는 사실이다

살아 있는생명체는기계와 달리 스스로 조직하는 능력이 있다. 이와 같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새명체를 단순한' 생명공학적 발명품' '유전자 구성물' 또는 '지식활동의 산물'로 간주하여 '지적 재산권' 보호의 대상인 것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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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를 '주인 분자'로 구분하려는 태도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한 측면이다. 그리고 DNA로서의 유전자가 단백질을 만든다는 '중심 교리'는 결정론의 또 다른측면이다 .이 교리는 실제로 유전자가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후에도 계속 받아들여지고 있다. [DNA의 원칙]에서 르원틴은 이렇게 말한다.

DNA는 죽은 분자로, 반응성이 없는 화학적 불활성 분자에 속한다. 따라서 스스로 재생산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DNA는 단백질로 이루어진 복잡한 세포기관에의 해기본적인 물질들로부터 만들어진다. 대개 DNA가 단백질을 생산한다고 이야기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단백질(효소)이 DNA를 만든다.

유전자가 자기복제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유전자에 신비한 자발적 능력을 부여하여 이것을 신체의 다른 일반적인 물징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기복제를 말한다면, 이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복잡한 체계로서의 전체 생물체를 일컫는 것이다.

(59-60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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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종들과 생태계가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자유는 생태학의 기초를 이런다. 생태적 안정성은 종들과 생태계가 적응하고 진화하며 반응하는능력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실재로 시스템에 허용되는 자유도가 커질수록 시스템은 그만큼더 큰 자기조직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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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조직하는 시스템은 내부로부터 성장하여 외부를 향해 스스로를 형성시킨다. 반면 외부의 힘으로 조직된 기계적 시스템은 성장하지않는다. 그들은만들어지고 외부로부터 구성될 뿐이다.

스스로 조직하는 시스템은 독특하며 다차원적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구조적이며 기능적인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계적인 시스템은 획일적이며 일차원적이다. 이들은 구조적인 획일성과 일차원적 기능만을 보여준다.

스스로조직하는 시스템은 스스로 치료하면서, 변화되는 환경의 조건에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직된 시스템은 자기치료를 하지도, 적응을 하지도 못하고 다만 망가질 뿐이다. (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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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시 "씨앗을 지키는 자들"

 

 

우리의 대지(大地)를 불태우라

우리의 꿈들을 불태우라

우리의 노래에 매서운 산을 쏟아부으라

톱밥으로 덮어버려라

학살당하는 우리들의 피를

당신들의 테크놀로지로 틀어막으라

자유로운 모든 이들의

야생의 본성을지닌 모든 이들의 비명소리를.

파괴하라

파괴하라

우리의 풀과 토양을

무너뜨려라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일으킨

모든 농장과 모든 마을을

모든 나무와 모든 가정과

모든 책과 모든 법과

그리고 모든 공정함과 조화로움을.

당신들의 폭탄으로 쓸어 없애버려라

모든 계곡을,

당신들의 사설(邪說)로 지워버려라

우리의 과거와

우리의 문학과 우리의 메타포들을

껍질 벗기라

숲을 그리고 대지를

어떤 벌레들도

어떤 새도

어떤 이야기들도

숨을 곳을 찾지 못할 때까지 계속.

나는 당신들의 폭정(暴政)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는 절망하지도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나는 하나의 씨앗을 지킬 것이므로

하나의 자그마한 생명의 씨앗을

나는 수호(守護)할 것이고

그리고 다시 심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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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대한 권리를부정하기 위해, 과학적 사명은 종교적사명과 결탁하였다. 과학혁명이 도래하면서 출현한 기계론은 모든 생명들을 지탱하는자연의 자기재생, 자기조직화 개념을 파괴하는 기초가 되었다. 근대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이컨에게 자연은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라, 공격적인 남성적 정신에 의해 정복되어야 하는 여성이었다. 머천트가 지적하는 것처럼, 자연에 데한 이해가 살아있고 양육하는 어머니에서 무기력하고 죽어 있고 조작 가능한 물질로변형된 것은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착취적 지상과제와 딱 맞아떨어졌다. 만물을양육하는 대지의 이미지는 자연의착취에 대해문화적인 제약요건으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어머니를 즉시 살해한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장을 파헤치고 불구로 만들었다"고 머천트는 쓰고 있다. 그러나 베니컨주의자의 프로그램과 과학혁명에 의해 창출된 복속과 지배의 이미지는 모든 제약조건들을 제거했으며, 자연의 개방을 위한 문화적 승인으로서 역할을 했다. (95-96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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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의 교잡은 씨앗 그 자체에 대한침략이었다. 씨앗의 교잡과정은 곡물로서 그리고 생산수단으로서의 종자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과정이었다고 클로펜버그는 말한다. 나아가 바로 이 과정은 사기업들이 식물육종과 상업적 종자 생산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했던 자본축적의 공간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씨앗의 자기재생적인 과정을, 원료로서 살아 있는 씨앗 공급의 단절된 단선적 흐름과 생산물로서 종자상품이라는 역흐름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생태파괴의 원천이 되었다. (1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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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살아있는 재생 가능한 자원에서 단순한 원료물질로 변화시키는 것과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기술은 여성을 비하시킨다. 일례로, 생식기술은 여성의 신체를 기계화하는 -- 직업적인 의료 전문가가 관리하는 파편화되고 물신화되고 대체 가능한 부품의 조합으로 여기는 --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에 관한 한 미국이 가장 많이 발달되어 있긴 했지만, 제3세계에도 생식기술이 점점 퍼져나가고 있다.

 

현재는 비정상적인 불임의 경우에 체외수정을비롯하여 다른 기술들이 제공되고 있지만, 자연과 비자연의 경계는 유동적이거니와 비정상적인 경우를 위해 창출된 기술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게 되면 오히려 정상이 비정상으로 재규정되는 경향이 있다. 임신이 처음으로 의학적인 관점에서 질병으로 취급받기 시작했을 때에는, 비정상적인 경우에 한해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았으며 정상적인 경우에는 원래의 전문가인 산파를 찾는 것이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30년대에는 출산의 70%가 집에서 분만할 수 있는 정상상태라고 생각되었지만, 50년대에는 70%가 병원에서 분만해야 하는 비정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자신들이 아이를 생산하고 창조한다고 믿는 의료 전문가들은, 이미 이에 대해 잘 알고 이쓴 어머니들에게 자신들의 지식을 강요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은 절대 확실한 것이고, 여성들의 지식은 터무니없는 히스테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파편화디고 침략적인 지식을 통해, 그들은 어머니와 태아 간에 -- 태아만이 보호 받아야만 하는 생명으로 바라보며, 어머니는 태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잠재적 범죄자로 환원되는 --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와 같은 어머니와 태아의 갈등이라는 잘못된 구성물은 남성 의사가 여성과 산파로부터 출산을 인수하게 된 가부장적 근거가 되었으며, 한 세기 후에는 페미니스트에 의해 여성의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선택을 옹호'하는 운동과 '생명을 옹호'하는 운동은 모두 여성과 생식에 대한 가부장적 구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을 통해 생명을 의학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사고력과 지력이 있는 인간으로서 여성이 갖는 삶의 경험과 서로 모순된다. 따라서 여기서갈등이 발생하면, 최근의 대리모와 새로운 생식기술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남성 전문가에 의한 여성 생명의 통제를 확립하기 위해 가부장적인 과학과 법률은 서로 협력한다. 이리하여 재생능력과 연관된 여성의 권리는, 생산자로서 의사가 갖는 권리와 소비자로서 부유한 불임부부가 갖는 권리로 대체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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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거의 마찬가지로, 약용 식물에 관한 지식도 지역의 공동 자원이다. (...) 아유르베다 경전 [차라카 삼히타]를 보면, 토착의료 시술가들이 다음과 같은 조언을 받는 대목이 나온다.

소치는 사람, 요가 수행자, 숲에 사는 사람, 사냥꾼, 정원사들로부터 배우고 식물의 형태와 특징을 파악함으로써 약초에 대하여 배우라.

아류르베다의 지식은 또한 민중이 갖고 있는 일상적인 지식의 일부분이다. 민간의 전통과 전문화된 의료체계는 서로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갇ㄹ리 제약기업들이 주도하는 의료산업 체계는, 민중은 치료법을 알고 있지못한 사람들로 간주한다. (131-132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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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리쉬디타 인디카'라는 학명을 가진 인도 특산의 이 아름다운 나무(님 나무; neem)는 여러 세기 동안 생물 농약과 약제로 이용되어 왔다. 인도의 일부 지방에서는 이 님나무의 부드러운 새싹을 먹으면서 새해를 시작한다. 또 어떤 지방에서는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며 숭배한다. 인도 어디서나 사람들은 매일 아침 님나무 다툰(datun, 칫솔)으로 양치질하여, 그 나무의 항박테리아 성질로 치아를 보호한다. (...)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유산은 지적재산권 이라는 이름 아래 강탈당하고 있다. (...)

1985년 이래로 미국과 일본 기업들은 님나무에 함유된 천연화합물의 안정적인 용액과 유제 제법에 대해서 12개가 넘는 미국 특허를 획득하였다. 심지어 여기에는 님나무 치약에 대한 특허도 포함되어 있다. (...)

"님나무로부터 달러를 뽑아내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라고 [사이언스(Science)]지는 평가하고 있다.

[에이지 바이오테크놀로지 뉴스]에서는 그레이스 사의 가공설비를 "님나무를 원료로 한 세계 최초의 생물농약 제조시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도에 있는 거의 모든 가정과 마을들은 생물농약을 만드는 설비장치를 갖추고 있다. 인도의 면화산업단체인 카디와 마을산업위원회가 님나무 제품을 생산, 판매해 온 지는 무려 40년이나 되었다. 기업가들은 '인디아라(Indiara)' 같은 님나무 제품을 출하하고 있는가 하면, 토착기업인 캘커타 화학은 몇십 년동아님나무 치약을 제조해 오고 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그레이스 사는 특허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근대화된 천연화합물 추출공정이 진정 새로운 혁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통적인 지식이 합성물 및 공정 연구개발에 실마리를 주었다고 할지라도, 우리 것은 충분히 새로우며 자연적인 상태에서 얻은 생산물이나 그것을 얻기 위한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르다. 따라서 특허가 가능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들의 공정은 새롭고 인도인의 기술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서구인들의 무지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새로움이다. 인도에서 님나무에서 얻어진 생물 농약과 약제를 사용해온 2천 년 동안, 비록 활성성분들에 라틴어 학명이 부여되지는 않았지만, 특수한 용도를 위한 정교한 공정이 많이 개발되었다. 님나무에 대한 지식과 그 이용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인동의 중앙해충방제국은 1968년의 살충제법에 님나무 제품을 등록하지도 않았다. 중앙해충방제국은, 님나물 물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아무런 부작용도 없이 여러 가지 용도로 인도에서 광범위하게 이용되어 왔다고 지적하였다. (134-137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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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초제 저항성 품종의 개발이라는전략은유익한 식물종들을 절명시키면서 슈퍼잡초를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특히 열대지방에서는 잡초와 농작물이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열대지방의 잡초들과 농작물은 수세기 동안유전적으로 상호 작용해 왔으며, 자유롭게 서로 교잡되면서 새로운 변종들이 생겨났다. 따라서 유전공학자들에 의해 농작물에 도입된, 제초제 저항성과 해충 저항성, 스트레스 저항성을 갖고 있는 유전자 역시 자연 교잡의 결과 주변 잡초들에 전파될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화학약품의 사용을 증가시키면서, 모든 관련 환경에 위협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1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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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생명체를 소유한다는 생각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소유하고 농민들은 가축을 소유한다. 그러나 지적 재산권은 소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다. 즉 지적 재산권은 단순히 지적인 재산으로서 이식된 유전자 또는 한 세대의 동물들에 대해서만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 전체의 재생산, 특히 그 특허기간에 생겨나는 미래 세대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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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resource)'은원래 생명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 어원인 라틴어의 resurgere는 "다시 일어나는(rise again)"이라는 의미이다. 즉 자원은 자기재생(self-regeneration)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자연'자원'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자연과 인간의 호혜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주의와 식민주의가 등장하면서, 그 의미가 변환되었다. 이제 '자연자원'이 함축하는 의미는 산업 생산품과 식민지 무역의 투입요소라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자연은 생명이 없는 조작 가능한 물질로 변환된 것이다. 재생과 성장을 위한 자연의 능력 또한 무시되었다.

자연에 대한 폭력과 (자연 내) 섬세한 상호관계의 파괴는 자연의 자기조직력을 무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이러한 폭력은 사회 내의 폭력으로 전환되었다. (192-193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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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도가니> 중에서...

김덕중이 강추한 <다음> 연재소설, <도가니>를 읽었다.

근무중에 찔끔찔끔 읽으니 3일 동안 어찌어찌하여 지금까지 연재된 것을 다 읽었다.

 

진실이 교만하다고?

그래, 진실은 사실 너무 철없이 교만해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 딱 좋을때가 있기도 한 것 같다.

 

그래도 서 간사가 끝까지 진실의 교만함에 의지해 거짓의 겸손함을 물리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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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사건의 충격이 가라앉을 무렵, 영광제일교회의 젊은 목사가 말한 논리 역시 많은 힘을 얻어 퍼져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상식적이었고 보통사람의 사고에 잘 맞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사건이 자신의 도시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부끄럽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했ㅆ다.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고치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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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이윤에 굶주린 자들 - 존 포스터 외

1장. 농업 자본주의의 발생

 

 

소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은 더욱 체계적으로 이론화되었는데, 그 중 로크의 [통치론 제II논고Second Treatise of Goverment]가 가장 유명하다. 이 책의 제5장에는 개량의 원리를 기초로 해서 소유 이론의 고전적 견해가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서 "자연"권으로서의 소유권에 대하여 로크는 대지의 생산성을 높여서 이윤을 낳도록 개량하는 것을 신성한 명령으로 간주하고 있다. 노동이 재산권을 형성한다는 것이 로크의 소유 이론에 과한 전통적 해석이지만, 로크 논문의 소유권에 관한 장을 세밀하게 읽으면, 그의 논점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생산적 이면서 이윤을 낳는 토지 이용인 토지 개량이 소유권을 형성한다는 것이 명확하다. 토지를 개량하는 적극적인 지주는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이 아닌, 자신의 토지와 다른 사람의 노동을 생산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소유권을 확립한다. 개량되지 않은 토지, (아메리카 원주민의 토지처럼) 임대되지 않아서 이윤을 낳지 못하는 땅은 "황무지"였고, 이러한 토지를 전유하는 것은 개량하는 사람들의 권리이고, 심지어 의무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개량에 대한 이러한 가치관 때문에 식민지뿐만 아니라 본국에서도 토지 강탈이 정당화되곤 했다. 이것이 인클로저라는 가장 유명한 소유권의 재정립을 가져왔다. 종종 인클로저는 예전의 공유지나 영국 농촌의 일정 지역을 특징지었던 "개방 경지"를 사유화하고 울타리 치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인클로저는 (토지를 물리적으로 인클로저 하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의존해 왔던 공유적 관습적 이용권의 소멸이라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55-6 pp

 


이러한 특유한 패턴이 가져온 장기적 결과는 분명하다. 영국이 세계 최초로 "산업화"된 경제로 발전해 간 것과 농업 자본주의 간의 연관성을 충분히 해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몇 가지 점은 자명하다. 대량의 비농업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생산성을 갖는 농업 부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계 최초의 산업 자본주의는 출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의 농업 자본주의가 없었다면, 임금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하는 무산대중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토지를 강탈당한 비농업 노동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영국의 산업화 과정을 추진한 대중 소비 시장, 즉 식품이나 의복같이 값싼 일용품을 판매하는 시장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식민지의 확대를 꾀하려는 새로운 동기 -- 영토 획득이라는 낡은 형태와는 다른 동기 -- 와 함께 부의 증대가 없었다면, 영국 제국주의는 산업 자본주의읭 원동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분명히 더욱 논쟁적인 이야기이지만), 영국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떠한 종류의 잔본주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 특히 산업화된 영국에서 비롯된 경쟁 압력으로 인해서 다른 나라들의 경제도 자본주의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 63-4pp

 

 

 

 

 

5장. 자본주의적 농업의 성숙

 

 

일반적으로 말해, 상업적 종자 회사들이 동종 교배 방식을 통해 투입재인 종자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상당히 제한된 것이었다. 첫째, 동종 교배 방식은 콩이나 밀 같은 중요한 작물이나 대가축에 대해서는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없었다. 둘째, 동종 교배 방식은 일반적으로 생산량의 증가에는 성공적이었지만, 특정 질병에 대한 저항성, 제초제에 대한 저항성, 유지 종자의 유지 함량 증가 같은 많은 중요한 특성들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특성들은 다른 육종 방법을 통해 도입되어야 했다. 셋째, 농업 경영상 중요한 작물들에 도입된다면 바람직할 것 같은 특성들이 있지만, 이러한 특성은 현재 경작되고 있는 작물과 교배되지 않는 작물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예는 콩과 식물처럼 뿌리를 질소 흡착 박테리아가 서식하기 좋도록 만들어서 공기 중에서 질소를 흡착할 수 있는 옥수수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였다. 이것이 성공했다면, 질소 비료 시장은 축소되고 질소 공급은 종자 기업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종자 기업이나 종자 기업의 파트너 혹은 소유주인 화학 기업에게 이윤을 제공할 만큼 농업 경영상 중요한 작목들을 변형하는 것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은 바로 1970년대에 이르러 자본의 농업 침투가 명백한 한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농업 생산에서 새로운 형태의 중요한 기계 도입은 종말을 고하였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연료비의 급격한 변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민 노동자가 지속적으로 공급됨으로써 농업 노동자의 조직화가 지연되었기 때무닝었다. 비료와 살충제로 인한 환경오염에 대해 대중의 인식이 점차 커지고, 살충제와 제초제 살포의 유해성으로부터 농장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OSHA(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규정이 만들어져서 이미 사용 중인 화학 물질 사용을억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화학 약품 사용을 억제했다. 더구나 비료와 살충제는 이미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어서, 농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적정한 수준 이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975년 이후에는 비료 사용이 늘어나지 않았고, 1980년대 초반 이후에는 합성 살충제 사용도 증가하지 않았다. 투입재의 공급자와 산출물의 구입자들이 농업으로부터 더 많은 잉여를 전유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다음 두 가지 요인, 즉 1)농업 경영상 중요한 작묵들에 대해 근본적인 생물학적 변형을 가하는 것, 2) 변형된 특성을 보유한 생물체가 계속 자신들의 소유와 통제 하에 있도록 보장하는 것에 의해 경정 되었다. 더구나 투입재 생산 부문과 영ㅇ농 후의 생산 부문(구매, 가공, 유통)의 집중이 심화됨으로써 거의 독점 단계에 이르게 된다면, 잉여의 전유는 더욱 크게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생명 공학을 살펴보기로 하자.


- 159-160pp

 

 

 

 


동종 교배법을 통해 확보하였던 재산권의 보호는 몇 개의 유기체와 몇몇 농경적 특성에 한정된 것이었다. 생명 공학은 동종 교배법이 적용되지 않는 바로 그러한 사례들에 도입되어 왔다. 그렇다면 육종자는 결정적인 물질, 즉 유전자를 제공하면서 어떻게 더 많은 잉여를 전유할 수 있는가? 그 해법이 육종자의 손에 쥐어졌는데, 그것은 법적 무기와 생물학적 무기가 결합된 것이었다. 식물 종 보호법Plant Variety Protection Act과 뒤이은 법원의 결정에 따라 법적 무기가 육종자에게 제공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농산물의 원천을 정확하게 밝혀 주는 표준 DNA "지문fingerprint"을 사용함으로써 육종자의 권리가 보호된다. 생명공학적으로 조작된 종자를 고입하는 농민은 작물에서 생산된 다음 세대의 종자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양도한다는 계약을 종자 생산자와 맺는 것이 이제는 표준이다. 농민은 농사를 지어 얻은 종자를 다른 농민에게 파는 것 "brown bagging"이 금지될 뿐만 아니라, 더욱더 혁명적인 것으로서, 다음 해 농사를 짓기 위해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한 2세대의 종자를 다시 파종하는 것도 금지된다. 몬산토의 라운드업 레디 댖두 종자를 구매하는 모든 농민들 혹은 유지 함량이 낮은 "담백한" 감자 칩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몬산토의 특별 품종 씨감자를 구매하는 모든 농민들은 같은 품종을 계속 생산하려면 계약 조건에 따라 다음 해에 다시 몬산토에 가야 한다. 몬산토가 그러한 계약을 강행할 수 있는 것은 작물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작물 확인은 식물 한 포기 혹은 종자 한 알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유전자 조작 품종의 DNA가 유전 공학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주입된 독특한 유전자 배열을 가지기 때문이다.


- 162-3 pp

 

 

 

 


계약 영농의 본질을 잘 보여 주는 사례는 특히 계약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육계broilers(식육용으로 사육되는 닭)생산에서 볼 수 있다. 슈퍼마켓과 패스트푸드점에 닭고기를 공급하는 주 공급자는 사우스캐놀라이나 주의 타이슨 팜즈이다. 타이슨 닭고기는 타이슨 "농장"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100에이커 정도의 농지를 소유하고 연간 평균 25만 마리의 닭을 생산하는 소규모 농민들에 의해 생산되는데, 이들의 연간 총소득은 약 6만 5천 달러이며 순소득은 1만 2천 달러 정도이다.
육계 생산은 타이슨(혹은 유사한 다른 지방 기업들)과 4년 계약을 맺고 생산되는데, 이 계약에 따라 타이슨이 사육할 병아리, 사료, 그리고 수의학 서비스의 독점 공급자가 된다. 타이슨은 공급되는 병아리의 유형, 공급량과 공급 빈도의 유일한 결정자이다. 타이슨은 7주 후에 자신들이 정한 날짜와 시간에 다 자란 닭을 수집한다. 타이슨은 사육되는 닭의 무게를 재는 저울을 공급하고 닭을 싣고 갈 트럭을 제공한다. 농민은 노동, 사육장, 사육장이 세워지는 토지를 제공한다. 사육에 필요한 투입재와 사육 방식에 대한 엄밀한 통제는 전적으로 타이슨의 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생산자(농민)는 사료, 수의약품, 제초제, 농약, 살충제, 쥐약 등 회사에 의해 공급되거나 그 회사의 문건에 의해 승인된 것 이외의 다른 어떤 물품도 사용하지 않아야 하고, 그에 서명해야 한다." 더구나 농민은 회사의 "육계 사육 지침"을 준수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농민들은 "집중 관리" 대상이 되어 타이슨의 "육계 관리 및 기술 자문관"의 직접 감독을 받게 된다.

- 167-8 pp

 

 

 

 

 

 

6장. 세계의 식량정치

 

 

 

미국의 농산복합체는 농업 부문에서 특히 심각했던 1930년대의 대공황에 대응하기 위해서 양차 대전 사이에 실시된 농업 관련 조정 장치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1935년의 농업 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 개정으로 국내 가격을 세계 시장 가격보다도 높게 설정하는 미국 농무부의 가격 지지 계획을 지키기 위해서 농무장관은 농산물 수입을 금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신중상주의적인 수입 관리 정책은 결국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농산물 수출 계획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농가 보호로 생산 과잉을 가져왔고, 미국 정부는 이 영어 농산물을 공법 480호(농산물무역개발원조법으로서 1954년 7월에 제정)에 의거해서 원조 물자로 해외에 처분했다. 처음에는 무상 원조로 시작해 나중에는 상업에 기초한 가격으로 유통시킨 이러한 식품 체계 속에서 카길이나 콘티넨탈 같은 거대 곡물상들은 부를 축적했다. 이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가족 농장이 생산한 곡물을 거래했고, 식량 원조 계획이라는 보조금을 받는 수출을 통해 매혹적인 시장을 획득해 갔다.
값싼 농산물에 더해서, 미국의 농업 관련 기업의 기술 수출도 해외 원조 계획 기관을 통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는 마셜플랜Marshall Plan과 제3세계의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한 녹색 혁명Green Revolution이 포함되었다. 이 두계획은 유럽과 일본, 멕시코에 이르는 지역에 자본과 에너지 집약적인 미국식 농업을 모방한 근대적인 농업 부문을 만들어냈다. 한국에서는 4개의 현지 기업이 미국의 (랄스톤 류리나와 카길을 포함하는) 농업 관련 기업과 합작 기업을 설립하여 한국의 식품 체계에 전문 기술과 마케팅 지식을 도입했다. 1970년의 PL480호 연차 보고서에는 이들 기업이 대응 자금을 획득하여 "근대적인 가축용 배합 사료 공장과 가축 및 가금 생산 싯설, 육류 가공 공장의 건설이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설을 완전히 가동학 ㅔ되면, 사료 곡물과 기타 사료용 원료 시장이 실질적으로 확대될 것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2년 후에 발간된 연차 보고서에는 "이들 기업은 미국에서 개발된 기술의 한국 내 도입을 촉진하고, 미국산 옥수수, 대두박, 종축 및 기타 농자재/농기구의 대 한국 수출 급증을 가져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

흥미롭게도 1970년대 초에 미국 정부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특히, 베트남 전쟁에 의해 발생한 비용)의 상승으로 발생한 국제 수지 적자를 타개하기 위해서 농산물 수출이라는 "식량 무기green power" 전략을 채택했다. 1970년대까지 미국의 농업 정책은 국내 농업 부문의 안정화에 초점이 맞춰졌기 대문에 수출과 식량 원조는 자국의 잉여 농산물 관리의 부산물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1973년 농업법'을 통하여 생산 제한을 해제하고, 상업에 기초한 수출을 장려함으로써 잉여 농산물을 처리하는 메커니즘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에 대한 미국 농업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970년대 초부터 미국 농업은 수출 지향적으로 되어, 수출 시장을 겨냥한 값싼 기본 농산물(밀, 옥수수 및 대두)이 전체 경지의 1/3이상에서 재배되었다. 식량 무기 전략은 세계의 가족농업경영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수출 지향 생산을 강화하여 해외 시장 그중에서도 특히 제3세계의 중소득 국가, 중국, 구소련, 동구 등으 ㅣ대외 식량 의존도를 높였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농업 정책을 모방하여 미국과 마찬가리조 과잉 생산문제를 야기했던 서우럽도 유력한 곡물 수출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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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 모리스 마이스너

20세기 중반까지 중국 농촌지역에 전(前)자본주의적 사회경제관계와 신사층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근대중국사의 흐름 속에서 부르주아 혁명운동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국의 농촌지역에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가 번성할수 있느 조건을 만들어내는 역사적 임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유재산 폐지를 목표로 하던 공산당에게 주어졌다. 물론 이런 역사적 역설이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에서도 부르주아 정당들의 실패로 농촌의 부르주아 혁명은 볼셰비키가 주재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소련역사의 첫 10년은 자본주의적 농민의 등장과 성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에서 농촌의 부르주아 경제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으며, 농촌의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했던 바로 그 정권이 다시 부르주아 소유권을 파괴하는 역할을 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갖는 아이러니의 하나는 바로 여기서 발견된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부르주아 혁명운동의 좌절이 오히려 사회주의에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부르주아 혁명이 이전에,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이 권좌에 오를 수 있는 정치적 여건이 조성되기 전에 성공했다면, 두 나라의 농민은 자신의 작은 자작농지를 지키기 위해 정치적 보수세력이 되어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서유럽, 특히 프랑스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1789년 혁명에서 보여주었던 프랑스 농민의 급진주의는 이후 한 세기 이상 정치적 보수주의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보나파르트 왕조는 농민왕조다"라는 냉소적인 논평을 했다. 이에 반해 토지혁명이 늦어져 사회주의 혁명과정과 동시에 또는 그 일환으로서 이루어진 경우에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의 경우, 새로 탄생한 농민 소지주는 스탈린 정권의 집단화에 저항할 만큼 강한 계급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중국혁명의 경우 그 정치적 이득은 훨씬 컸다. 러시아의 볼셰비키와 달리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 권좌에 올랐으며 농촌사회 깊숙이 조직적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사회주의 집단화과정에서 중국농민의 저항은 아주 미미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인 사회개조를 적극 지지했다. 중국에서 농업의 사회주의화는 소련과 현저히 다르게 진행되어갔고 그 사회적/정치적 결과 역시 다를 수밖에 없었다.

 

 

- 141-2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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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호모 쿵푸스 中 - 고미숙

짧은 미국 생활동안 내가 목격한 건 미국에는 '수많은 영어들'이 있다는 것이다. 히스패닉 영어, 아시아식 영어, 아프리카식 영어 등등. 이를테면 미국에는 전 세계 인종의 수만큼이나 많은 영어들이 범람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영어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곧 제국식 삶을 고스란히 복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엔 영어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 태도가 존재한다. 하나는 네이티브(native)에 대한 맹목적 동경, 다른 하나는 적대적 거부감. 이 두가지는 겉보기에 달라보이지만 영어를 제국의 언어로 묶어놓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이제는 이 둘 사이에서 아니 그 둘을 벗어나 영어를 탈제국화하는 운동을 시도해야 할 때다. 솔직히 말해, 영어 보더 더 간단 명료한 언어체계가 어디 있는가. 그걸 인정한다면, 영어를 오히려 국경과 인종을 넘어 전지구적 연대를 모색하는 도구로 적극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근데 대체 왜 이런 가능성에 대한 영어책 혹은 영어 공부법은 없는 것인가? 오직 토익점수를 올리는 것, 네이티브처럼 발음하기, 미국인과 대화하기 위한 각종 표현들 익히기 등등이 전부다. 심지어 발음을 정확하게 하기 위한 혀 수술을 한다는 괴소문까지 나돌기도 했으니, 미쳐도 한참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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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 - 권현정 외

성욕의 문제, 특히 여성 히스테리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이 형성되고 발전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여성적 동일성과 성욕의 관련성이라는 가정 하에서 여성성을 규명하기 위해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이는 무성적 존재였던 여성을 성욕을 가진 존재로 구성하는 데서 중요한 질문이었다.

프로이트에 와서 여성성의 문제는 정치철학의 영역에서 정신분석학의 영역으로 이전되었다. 프로이트에게 리비도는 이전 시기 정치철학의 코나투스와 동일한 지위를 갖는 기념으로 개인성 특히 성적 동일성의 형성을 설명하는 열쇠였다. 따라서 여성 성욕의 특성을 밝히는 것이 여성성을 밝히는 데서 핵심적 문제였다.

프로이트는 유아의 리비도를 남성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남성적 리비도를 중심으로 여성성을 설명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여성의 욕망은 페니스의 결여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여 페니스 선망을 거쳐 외디푸스 콤플렉스로 이어지는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여성은 자신의 성감대를 작은 페니스인 클리토리스에서 바기나로 이동시켜야 하며 이 과정은 페니스 선망을 페니스 삽입에 의해 남자아이를 갖고자 하는 열망으로 변경시킴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 151-2 pp

 

 

 

 

2차 성혁명을 향한 새로운 성관념의 출현은 이미 킨제이 보고서에서 시작되었다. 킨제이는 1948년 남성의성욕에 대한 연구를, 1953년에는 여성을 대상으로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 성은 오르가즘을 추구하는 하나의 게임으로 묘사되었고 '만족'이라는 모호한 용어 대신 '오르가즘'이라는 단어가 선택되었다.

킨제이에 의하면 오르가즘을 목표로 한 성은 반드시 사랑이나 이성애적 매력이나 심지어 인간적 상호작용마저도 포함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킨제이의 연구는 오르가즘의 횟수에 관한 한 동성애, 자위, 심지어 수간까지를 포함하여 이전 시대에는 일탈로 여겨졌던 다양한 성행위를 포함했다.

킨제이 보고서의 충격은 성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낳았다 .그것은 첫째, 성의 목적이 임신보다는 오르가즘의 추구에 있다면, 정상에서 벗어난 다양한 성적 일탈이라는 기존의 판단에 대한 도덕적 상대주의가 능하다는 점이었다. 둘째, 킨제이 보고서는 오르가즘의 추구가 목적인 한 성에 관해서 남녀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발전시켰다. 즉 오르가즘에 관한 한 남녀간의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킨제이의 연구는 물리적 반응으로 환원된 오르가즘은 인간적 감정과 무관하며 따라서 남녀간의 성관계는 출산은 물론 사랑 및 결혼과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하지만 50년대의 성과학은 불감증의 치료를 위해서 여전히 남성의 노력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페니스가 바기나 안에 오래 머무를 필요가 있었고 이에 대한 실패를 표현하는 단어가 '조루'였다. 여전히 남성이 성관계에서 주도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졌으며 여성의 지나친 활동성은 문제로 인식되었다. 2차 성혁명의 초기에 여성들에게 더 많은 성욕의 가능성이 열렸다고 해도 여성의 성적 경험의 본질은 변화하지 않았다. 주부든 독신여성이든 바기나 오르가즘은 여성성의 증거로 이해되었으며, 성교를 중심으로 하는 성욕에 대한 관념은 변경되지 않았다.

 

- 153-4 pp

 

 

 

 

 

금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혁명의 대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쾌락에 수반되는 위험에 대한 방어적 투쟁을 벌였다. 실제로 성혁명의 기간에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성혁명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가졌다.

1963년경 절음 여성들은 성혁명의 시대에 살면서 '예스'라고 말하라는 압력이 갑자기 '노'라고 말해야 하는 이전의 무를 대체하면서  혼란을 느꼈다. 젊은 여성들은 새로운 자유를 향유해야 하는지 성적 착취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햇다.

 

- 165 p

 

 

 

 

 

낙태의 권리를 처음으로 제기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분파는 레드스타킹스로 이들은 낙태투쟁을 통해 자신의 재생산 능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고, 나아가 자기 삶의 향을 통제할 수있는 여성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했다. 이들은 임신을 성 경험의 대가나 벌이 아닌 성적 권리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3년 대법원은 미국 전역에 걸쳐 낙태를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른바 '로우 대 웨이드' 사건으로 알려진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미국인의 사생활 권리(헌법 14조)에는 여성이 아이를 낳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논리에 근거해 정부가 낙태 문제에개입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법적으로 승인했다기보다 시민의 사생활의 권리에 대한 승인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판결을 계기로 낙태의 권리는 여성의 권리에서 개인의 선택권의 문제로 변화했다 그 결과 두 개인의 권리, 즉 어머니의 권리와 태아의 권리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로우 대 웨이드 판결을 계기로 낙태권의 문제가 개인의 선택권으로 옮겨가면서 논쟁은 이른바 '생명존중'을 주장하는 신보수주의와 '선택존중'을 주장하는 페미니즘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변형되었다. 신보수주의가 낙태를 살인으로 규정한 반면에 페미니즘은 낙태를 개인의 선택권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한편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낙태 찬성 캠페인을 재생산에 대한 권리로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많은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건강하고 보편적인 낙태 요구는 흑인 여성들의 삶의 맥락에서 볼 때 훨씬 복잡한 문제였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개입이 있은 뒤에야 낙태와 피임 문제에 관한 페미니즘 캠페인은 비로소 적절한 상담없이 강제로 낙태나 단산을 당하지 않으려는 흑인 여성들의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즉 '낙태를 할 권리'라는 협소한 정의는 임신과 출산 여부를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라는 의미를 가진 '재생산의 권리'로 다시 정의 되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낙태 문제를 이론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특히 고든은 출산통제 운동사를 통해서 자발적인 재생산 권리와 비자발적인 재생산 선택을 분리시켰고 낙태를 자발적인 권리로, 불임시술은 비자발적인 선택으로 분류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낙태의 권리를 여성의 육체에 대한 통제라는 관념 속에서 조명할 수 있게 했다. 즉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에 유비되는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통제라는 차원에서 출산통제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발전은 이전 시대에 '자발적 모성'을 제기했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도 했다.

 

- 168-170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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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이현상 평전 - 안재성

(1930년대 경성 트로이카가 주도한 연쇄파업과 관련하여...)

 

이틀 후인 9월 21일에는 서울에서도 가장 큰 공장의 하나로 알려진 동대문 종연방직과 용산공작소 영등포 고ㅇ장에서 동시에 파업이 터졌다. 둘 다 이현상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감행된 파업이었다. 종연방직에는 경성트로이카 조직원으로서 영등포 방면 공장에서 활동하던 이병기의 조카 이병의와 유해길이 취업해 있었다. 가회동 집에서 이재유와 회합한 이현상은 임금인상, 처우개선 등의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이끌기로 합의를 본 후 이효정, 이순금, 이종희 등과 함께 투입되었다. 이현상은 별도로 조선일보 배달원 정칠성과 변홍대를 신설동 하천가 야산 등지에서 만나 최대한 많은 노동자를 참가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종연방직 파업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일으켰다. 참가 인원이 오백 명으로 지금까지의 파업 규모 중에 가장 컸다. 이에 경찰이 이영자 등 다섯 명의 여성 노동자를 검거하자 흥분한 오십육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경찰서로 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일제 치하에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경찰서 진입을 감행한 것이다.

파업이 사흘째 이어지자 회사측은 직공 모집 공고를 붙이고 다음 날 출근하지 않는 노동자는 모두 해고한다면서 신문기자들에게 구십 퍼센트 이상이 출근하리라 장담했다. 그러나 작업에 들어가는 노동자는 없었다. 이에 회사 측은 더욱 교묘한 술수를 썼다. 남성 노동자들에게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었으니 여성 노동자들을 출근하게 하라고 시킨 것이다. 이를 믿은 남성 노동자들의 설득으로 여성 노동자들도 모두 출근했다. 하지만 일단 노동자들을 축근시킨 회사 측은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한 적 없으며, 남성 노동자들이 멋대로 말한 것이라고 발뺌했다. 이 과정에서 남녀 노동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바람에 파업은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이현상은 요구조항 속에 남자들의 임금도 올려줄 것을 넣도록 하는 등 파업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애썼지만 재파업에 돌입하지는 못했다. 요구조건의 쟁취에는  실패하지만 종연방직 파업은 연일 언론에 실리는 등 큰 파장을 일으켰다.

 

- 111-2pp

 

 

 

 

감옥살이는 늘 힘들었지만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음식의 질은 더욱 떨어졌고, 사상통제도 심해졌다. 이현상은 정치범들을 조직해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싸움을 그치지 않아 서대문형무소에서 함흥형무소로, 다시 대전형무소로 강제 이감되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체포된 지 사 년 칠 개월 만에 석방될 때 감옥에서 싣고 나온 책이 손수레로 석 대나 되었다.

 

- 119p

 

 

 

 

(1945년 11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회장에서 김태준이 한 축사)

 

"여러 동무들을 등지고 연안에 갔다가 이제 대하니 오히려 면목이 없습니다.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농민의 대표 여러분! 우리의 해방은 아직도 어렵습니다. 잠깐 연안 독립동맹의 현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팔로군하에서는 남녀노소가 노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먹을 것을 농사짓습니다. 모택동 동지도 하루에 몇 시간씩은 농사를 짓는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부부도 연안에서 조선까지 걸어서 왔습니다.  여러분은 해외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호언장담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공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밥을 먹고 누구의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정치운동을 하고 있습니까? 과거의 이완용이나 김옥균도 주관적으로는 조선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과 결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우리가 사상운동이 아닌 이상, 정치운동에는 신축성을 가져야 합니다. 팔로군의 십 개조 정책을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과거의 경솔한 공산주의를 버리고 진실한 신민주주의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당한 노선을 세우고 옳게 걸아 나갑시다. 우리는 자기비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팔로군에는 정풍운동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비판을 할 줄 알면 오늘과 같은 혼란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민족을 위해 싸웠다느니, 네가 그랬느니 하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삼일운동도 결코  삼십삼 인의 지도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중운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중으로부터 세워진 과거 혁명의 결정인 인민공화국을 절대로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근 성공적으로 나가는 연안에도 민족단체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태도는 겸손합니다. 조선의 인민을 위한 일을 하려면 그러한 태도라야 할 것입니다. 혁명가는  마당히 대언장담하지 말고 자기비판을 합시다.

 

- 177-8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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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콜론타이 관련

콜론타이에게 자유결합은 '성적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자유결합 사상과 중간계급 페미니스트들의 자유결합 사상은 구별되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자유결합의 부르주아적 성격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 사실 자유결합 역시 '성적 위기'에 대한 중간계급의 대응이었다. 죽을 때까지 해체될 수 없는 관습적 결혼을 이혼의 자유가 허용되는 시민적 결혼으로 대체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부르주아적 가족의 안정성의 토대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여성들은 가족생활의 부담에서 해방되었지만, 자녀 양육의 부담은 홀로 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공산주의 공동체만이 가족을 폐지할 수 있는 원리로 이해된 것은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사회변혁의 전제 없이 성해방을 꿈꾸는 부르주아적자유결합은 오로지 육체적 욕망에만 따르는 '날개 없는 사랑'으로 타락할 위험이 있었다. 노동자들 사이의 동지적 사랑은 이러한 위험성을 공동체 내에서 통제해야 했고, 이러한 새로운 도덕이 노동 공동체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발전시키는 원리가 되어야 했다. 또한 이러한 윤리가 공산주의적 토대에 근거한 사회적 관계의 재구성 과정에서 출현해야 했다. 이것이 콜론타이가 구상한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였다.

 

콜론타이가 사랑의 문제에 특히 주목한 것은 여성 억압의 원인이 단지 경제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차원에도 걸쳐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활동으로부터 여성의 소외는 여성으로 하여금 사랑만을 욕구하고 갈망하게 만들었고,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방해했다.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여성조차 사랑에 종속되는 상황이 발생할수 있었다. 사랑을 제외하고 여성에게 의미있는 일이 주어지지 않았던 과거 역사의 부담에서 여성이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소외에 대한 해답은 사랑과 일을 결합할 수 있는 여성의 능력과 이러한 여성이 가능하게끔 남성을 교육하는 것이다.

 

콜론타이는 제프리즈처럼 독신여성을 레즈비언으로 특권화하지 않고서도, 독신여성을 신여성의 특징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 독신여성은 콜론타이가 발견한 자유결합의 주인공이었다. 콜론타이에 의하면, 신여성은 자본주의적 발전이 가져온 대중적 현상이지만 이를 초과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신여성이 사적 가족경제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필수적인 노동을 행하는 '노동 단위'이기 때문이었다. 노동에 대한 새로운 태도로 인해 신여성은 '날개 달린 에로스'를 수용할 수 있었다. 신여성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성적 욕망의 만족이 내면의 도덕적 의무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어야 했다.

 

 

- 이미경, "1세대 페미니즘",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 가족과 성욕을 둘러싼 쟁점들] 中 137-9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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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었던 고미숙의 [호모 에로스]와 이 구절이 서로 대화하고 있다. ㅋㅋㅋ

이 정도면 나도 독서의 경지에 올랐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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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중에서...

".... 처음엔  강학과 학강으로서 도저히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그녀를 설득해보려고 명자의 자취방으로  찾아가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한 학강이 아니라 한 여성노동자를 거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어..... 무슨 말인지 알겠니?"

동윤의 시선이 집요하게 민수에게 쏟아져내렸다. 동윤은 손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한모금 빨고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나는 문득 너와 또 우리 강학들을 떠올렸어. 만일 그들이 내게 이런 고백을 해왔더라면 어땠을까. 강학과 강학으로서 물론 이런 식으로밖에 처리하지 못했을거야. 그러나 .... 여지는 남겨두었을거야. 잊을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다시 새로운 관계로 시작될 수 있다는 여지... 명자의 집을 나서면서 나는 내 마음속에 그 여지가 없음을 알았어.... 최소한 명자가 내게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그애가 나를 동등한 사람으로 봤다는 것의 반증이야. 그러나 나는 그렇짐 ㅗㅅ했어. 나는 그 아이를 한 학강으로만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지. 그러나 명자는 달랐던거야. 그애는 날 인간으로서 사랑했고, 그러나 내가 강학이었기에 떠났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네 자신을 괴롭히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텐데. 그런 일에는 늘 환상이나 계층 상승욕구 같은 것이 작용한다는 건 너도 알잖아?"

".... 환상? 계층 상승욕구.... 아니야 민수야. 명자는 적어도 내게 환상을 갖지는 않았어. 그애의 편지 귀절 생각나니? 제가 끝까지 선생님을 사랑했더라면 선생님의 일대기에 오점을 남겨놓을 뻔했다고.... 그애는 날 정확하게 바라본 것인지도 몰라.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말이야."

"그럼 명자가 계속 남아서 널 사랑했으면 넌 정말 그걸 네 인생의 오점으로 생각했을 거란 말이니?"

"아니 그런 거하고는 달라."

동윤은 일어나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렇듯 불안하고 괴로워하는 동윤의 모습을 민수는 처음 보았다. 알듯 모를듯 동윤이 가지고 있는 저 소용돌이치는 어움의 깊이를 민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 민수야 넌 기꺼이 민중이 될 수 있겠니? .... 기꺼이 노동자가 될 자신이 있니? 민중과 선뜻 결혼할 수 있겠니?"

민수를 돌아보며 동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민수는 갑작스런 동윤의 질문에 대답 대신 입술을 앙다문다.

"민수야. 민중과 함께하기 위해, 그들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이 곳에 모였다.... 아까 네가 물렁한 벽이라고 표현했던가? 그걸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닐까?"

 

- 82-8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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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내내 말이 없던 연순이 고개글 들고 조용한 목소리로 민수를 불렀다.

"응?"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뭔데?"

".... 왜 강학들은 .... 우리에게 공부를 가르쳐줄까요? 돈도 못 버는 일인데.... 또 고생까지 해가면서.... 제가 본 대학생들은 옷도 화려하게 입고 다니던데 .... 이상해요."

"그건... 그렇게 해야만이 스스로 또 함께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야."

연순이 의하한 눈초리로 민수를 올려다본다.

"우린 서로 모르는 게 참 많다 그치?"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민수의 목소리는 서글프게 울렸다.

"행, 복, 해, 진, 다, 구요?"

낱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연순은 한자한자 힘주며 되물었다.

"그래 행복해지기 위해서지...."

민수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작았다. 언젠가 민수는 동윤에게 이미 행복해질 수 없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따뜻한 집안에서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바와 행하는 바의 괴리 대문에 심한 괴로움을 동반한 것이었다. 그래서 집을 나왔을 때 그리고는 산꼭대기에서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을 때 민수는 이제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적어도 예전의 그 미칠 것 같은 분열은 없었다. 그러나 대신 가난과 추위와 궁핍감이 몰려들었다. 그것들은 민수의 머리채를 휘업잡기도 하고 민수를 어두운 방구석에 내팽개치면서 그녀에게 속삭여대곤 했다. 자 이제 이런 철부지 방랑은 그만두는 것이 어때? 집에 가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부모님들을 일단 안심시키고 나서, 졸업이라도 한 뒤에.....

연순은 보도 블럭들을 비집고 나온 민들레를 바라본다. 가로등 아래 민들레의 노란 얼굴이 창백하게 떨고 있다. 왜 하필 저런 곳에서 피어나야 했을까. 연순은 문득 가슴이 아프다.

".... 선생님 요즘은 모순이라든가 사회의 나쁜 점들이 제게 아주 뚜렷하게 느껴져요. 예전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들, 제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저는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 두려워요."

 

 

......

 

 

-90-91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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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혜섭의 곁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지섭은 재깍이는 시계소리와 싸우고 있었다. 이미 1차 약속 시간은 지나고 2차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어서서 이 병실을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누나의 희고 가느다란, 상처투성이 손을 한번 잡아보고 그리고 조용히 일어서서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섭은 일어설 수 없었다. 압제자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은 막상 그것이 구체적으로 다가왔을 대 공포어린 분노로 변했고 이윽고는 공포만이 남았다. 끝없이 바지가랑이를 잡아당기는 이 가난. 제가 여지껏 가졌던 분노들이 얼마나 관념적이었는가를 깨달으면서 지섭은 피투성이 붉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꼼작 않고 그 밤을 지샜다. 검붉은 해의 빛살이 닿을 때마다 그의 앞에 놓인 세상이 유리처럼 와르를 무너지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유리조각 위를 맨발로 딛는 것처럼 아픔만이 느껴졌다.

 

- 1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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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빛의 제국> 중에서...

남자는 왼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찌그러뜨려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그리고 다시 동사무소 안으로 돌아갔다. 모든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연료통 밑바닥에 가라앉은 몇 방울의 냉소를 연료 삼아 겨우 굴러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권태가 걸음걸음 바짓자락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공작원반, 흔히 130연락소라 부르는 그곳을 막 떠나온 기영은 그의 허무주의적 태도가 조금 놀라웠다. 이런 적지에서, 전두환 역도가 광주에서 수천의 인민들을 백주에 학살하는 땅에서 긴장도 적개심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와 돌이켜 보면 권태와 허무야말로 이 사회의 특질이었다. 권태는 무차별적으로 퍼져 있었다. 기영은 권태가 무엇인지는 알았으나 그것을 실제로 목도하기는 처음이었다. 그가 떠나온 사회에서 권태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에나 등장하는 추상적 개념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권태는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사회의 권태는 차라리 무류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적절한 동기부여가 부족한 상태라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어떤 자극만 주어진다면 금세 사라질 가볍고 허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맞닥뜨린 자본주의적 권태에는 무게와 질량이 있었다. 그것은 삶을 짓누르고 질식시키는 유독 가스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생겼다. 가끔 어떤 종류의 인간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아, 저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 라는 원초적인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경로로 포섭되었는지 모를 그 동사무소 직원이야말로 그런 사람이었다. 권태와 우울, 허무와 냉소, 후줄근한 옷차림과 매력 없는 용모가 어우러진, 잠시라도 함께 있기 불편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전혀 엉뚱한 자리에서 기영은 그와 다시 마주쳤다. 1999년 여름. 그는 붉은 망토를 두르고 청량리역에서 자그은 나무 궤짝 위에 올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망토에는 검은 십자가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금박으로 경계를 삼았가 때문에 멀리서 보면 대학 응원단장의 복장처럼 보였다. 이마와 뺨으로 쉴새없이 땀이 흘러내렸고, 검고 푸른 파리들이 윙윙대며 그의 머리 주변을 맴돌았다. 기영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 달라져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말랐고 눈빛은 형형했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종말이 다가왔다고 외쳤다. 권태에 찌들어 있던 고정간첩은 어떻게 종말론자가 되었을까? 정말 되기는 된 것일까? 창녀와 경찰, 대학생과 노동자가 엇갈려 오가는 광장에 멈춰 서서 그는 광신도가 되어버린 고정간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영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영이 다가가자 무심한 얼굴로 종말론 안내책자를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이 발췌되어 조악하게 편집되어 있었다. 기영은 물었다.
"혹시 저 모르시겠습니까?"
남자는 기영을 쏘아보았다. 그러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로 몸을 돌렸다. 기영은 그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그가 짜증스런 얼굴로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왜? 내가 미친놈 같소?"
"그게 아니고 예전에 동부이촌동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만."
남자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랬다 한들 그게 무슨 송용이오? 다 소용없소. 그 책자를 보시오. 우리는 곧 돌려올림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날이 멀지 않았소."
약간은 버림받은 기분이 되어 광장을 떠나려 핮 ㅏ남자는 잰걸음으로 기영을 따라붙었다.
"실은 당신이 누군지 알아."
기영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상관없어. 난 이 세계의 비밀을 알았으니까. 그 전까지는 사는게 그저 답답하고 그래, 막막하기만 했지. 그렇지만 성령을 영접하는 순간 난 알았어. 지금까지의 인생은 모두 헛거였다는 걸. 속았던 거지. 어리석었던 거야. 이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낯짝들을 보라구. 행복한 얼굴이 있나? 다 벌버둥을 치며 꿀꿀이 돼지처럼 하루하루 사는 거야. 이 섹{가 왜 존재하는가를 모르기 때문이야. 모르니까 그냥 걸어가는 거야. 그걸 알면 더 이상 방활항 필요가 없어.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신대로 걸어가면 돼."
그의 장광설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기영은 물었다.
"정말 올해가 가기 전에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올라가고, 그들이 몰던 차는 운전자를 잃은 채 고가도로 아래로 처박히고, 남은 자들은 차라리 죽기를 바라며 고통 속으로 울부짖게 된단 말입니가?"
"인간으로 태어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경험해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습니까?"
붉은 망토를 입은 남자는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작고 못생긴 쪽박귀였다.
"너는 꼭 네 눈으로 보아야만 믿느냐? 이 귀로 똑똑히 들었다구. 주님께서 알러주셨어. 당신도 귀를 기울여봐.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사내는 다시 상자로 올라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기영은 광장을 떠났다. 물론 그해 말, 어디에서도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멀쩡했다. 서른세 명의 시민들이 보신각 종을 치는 가운데 새해가 밝았다. 연도 표시방식이 네 자리로 바뀌었다고 비행기가 추락하지도 않았고 기차가 탈선하지도 않았다. 그는 전국 백예순여섯 개 교회에서 종말을 기원하는 집회가 열렸다는 뉴스를 보며 붉은 망토의 사내를 떠올렸다. 혁명과 종말, 양자에게 모두 배신당한 사내와 전국의 백예순여섯 개 교회에 모였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종말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 명확해졌는데 왜 아무도 자살하지 않을까? 종말이 이렇게 간단히 유예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잠시 궁금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오래 전 일이었다. 광화문의 대형 빌딩마다 'Y2K 문제 완벽 대비' 같은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자가발전기와 생필품을 장만하여 집에 틀어박힌 이들이 전세계적으로 수백만에 달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잊어버렸다. 가동을 중단한 핵발전소도 없었고 인공위성의 오작동으로 핵미살이니 날아가지도 않았다. 물론 그 법석 덕분에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남한에서만 일조원이 투입됐다니까 미국이나 유럽에선 더했을 게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기영은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가지 심리적 축을 두려움과 욕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세기말은 단연 두려움이 욕망을 압도했던 시기였다. 전쟁도, 전염병도, 폭동도 아닌, 난생처음 맞닥뜨린 기호에 대한 두려움. 2로 시작하는 네 자리의 숫자가 우리가 미처 짐작하지 못한 그 어떤 추상의 메커니즘을 통해 세계를 아수라장으로 만들리라는, 한편 과학적으로 들리지만 그 본질은 샤머니즘에 가까운 기이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그게 기영에게는 전혀 와 닿지를 않았다. 남의 주민등록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복잡한 암호의 세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기독교적 세계관과 무관하게 자랐기 때문일까. 어쨌든 만약 재난과 파괴의 신이라는 게정말 있다면 그런 식으로 등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온갖 난리법석을 떨며 요란스레 예정된 날짜에 나타나 그렇듯 맥 빠진 축제를 벌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진정한 재난은 인간의 상상력 저 너머에 서, 맥베스 성을 공격하는 버넘의 숲처럼 진군해올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이날 아침 홀연 그의 필립스 액정 모니터 화면으로 떠오른 바쇼의 하이쿠처럼.

 

- 79-84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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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산적이 단 일 주일만 마을을 다스린다 하자. 그놈들은 아마 하루도 안 돼 마을을 거덜내고 말 것이여. 그러나 일 년을 다스린다면 추수 때까지는 기다리겠고 사람들도 살려두겠지. 만약 십 년을 다스린다면 계획도 세울 거여. 다 굶어 죽으면 안 된까 밥과 옷도 주면서 다스리겠지. 삼십 년을 다스린다면 애를 낳느냐 안 낳느냐까지 신경을 쓸 거다. 삼십 년을 다스리는 산적, 고것이 바로 국가란 것이다."

 

- 1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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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의 만화에서 따온 까치라는 가명을 쓰던 더벅머리 친구와 역시 주둥이라는 가명을 쓰는 친구, 그리고 망치라는 가명을 쓰던 기영, 이렇게 셋이 어느 여름날 인천 월미도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소주와 바닷바람에 취해 바닷가 벤치에 축 늘어져 있던 까치가 문득 물었다.

"너희들은 혁명의 그날이 올 것 같냐?"

까치의 형은 까치보다 먼저 학생운동에 투신한 투철한 활동가였고 소수파인  PD의 핵심적 이론가 중 한 명이었는데 고등학생인 까치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가서 뭐 할 거냐, 부르주아의 개가 될 거냐, 그럴 바엔 차라리 공단에 바로 들어가서 노동운동을 해라. 날 봐라, 대학에 들어갔지만 곧 때려치우고 공장에서 활동하는데 너무 늦게 온 것이 늘 후회스럽다, 너는 일 년이라도 빨리 노동자가 되어 나와 같은 죄책감 없이 계급투쟁에 몸을 던지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책상도 없이 온 가족이 공유하는 단칸방에서 어렸을 때부터 어깨를 맞대가 함께 살아온 까치에게 형의 말은 무시하기 어려운 압박이었다. 까치의 형은 그의 교과서를 빼앗고 책상 대용으로 쓰던 사과궤짝도 갖다버렸다. 흥, 자기만 대학 가고 나는 가지 말라는 거냐. 대학을 다니다 그만두는 거하고 처음부터 안 가는 거하고 어떻게 같냐? 까치는 반발심으로 형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몰래,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합격 했다. 오히려 평소 성적보다 더 월등한 점수를 받았지만 그 역시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자기 형과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강의실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단지 형과는 다른 정파를 택해 NL이 되었고 곧 주체사상을 '사상원리'로 받아들였다.

주둥이가 까치에게 말했다.

"혁명의 그날이라.... 언젠가 오지 않겠냐?"

그러자 까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난 말이야,  실은 혁명의 그날이 올까봐 두려워."

"왜?"

".... 내가 좋아하는 만화방도 못 가고, 전자오락도 못 하고."

맨정이었다면 정색을 하고 따졌을 주둥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못 하겠지."

"미제를 축출하고 독재정권 타도하고 반제반봉건체제를 깨부순다 치자. 그래서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그런 세상이 온다 치자. 그 다음엔 뭘 하지?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

기영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아침 일곱시, 사이렌 소리와 함ㄲ ㅔ일어나 일제히 직장으로출근하고, 일요일은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이 있을 때만 쉬고, 매일 밤 함께 모여서 하루의 일과를 총화하는 세상을 너희는 모를 것이다. 물론 거기서도 삶의 ㅅ즐거움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공터에서 배드민턴도 치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타고 친구들과 축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골방에 틀어박혀 포르노를 보거나 이어폰으로 이글스를 듣거나 잔혹한 일본 만화를 볼 수는 없다.

주둥이가 옆에 앉아 있는 기영의 존재를 문득 의식하고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넌 어때?"

"글쎄, 아마 그런 건 못 하겠지. 까치 말대로 지루하긴 할 거야. 그렇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기영은 월미도에서 나눈 그날의 대화들이 생각나곤 했다. 바닷바람에선 자반고등어 냄새가 풍겼다. 어깨를 겯고 노래를 부르며 비틀거리던 휴가 장병들, 입술을 부비고 서로의 속살을 더듬는 연인들 사이에서 그들 셋은 오지도 않을 혁명 이후를 걱정하고 있었다. 결국 어린 혁명가들이 남몰래 걱정하던 ㅎ'혁명의 그날'은 오지 않았다. 대신 국제통화기금이 진주해 1945년 미군정이 그랬던 것처럼 남한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기영이 처음 보았던 팔십년대의 남한은 지금으 ㅣ남한보다 차라리 당시의 북한과 더 비슷했다고 할 수 있었다. 직장들은 대부분 평생고용을 보장했고 대학생들은 취업 걱정 같은 것은 거의 하지 않았다. 수입 대리석으로 로비를 장식한 은행과 대기업은 영원불멸할 것 처럼 보였다. 자식은 부모를 봉양했고 부모는 자식에게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체육관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선출되었으며 야당은 유명무실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경 너머의 세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는 북한의 구호는 팔십년대의 남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자원을 배분함에 있어 시장원리보다는 국가의 결정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공무원의 부패가 자심했고, 뇌물과 협잡이 사방에서 판을 쳤다는 점도 북한과 비슷한 점이었다. 고등학생, 대학생 할 것 없이 학도호국단으로 편성되어 일 주일에 며칠은 교련복을 입고 등교하고 한 달에 한 번은 온 국민이 민방위 훈련을 하느라 법석을 떠는 것도 북한과 다르지 않았다. 공습에 대비한 등화관제 훈련으로 서울과 평양 모두 몇 달에 헌 번은 캄캄한 암흑세상으로 변해버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남한은 팔십년대의 남한과 비슷한 점이 거의 없는,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나라였고, 당연히 북한과도 전혀 다른 종류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북한보다는 싱가포르나 프랑스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결혼한 부부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일 인당 국민소득은 이만 덜러에 육박하고, 은행과 대기업의 운명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매년 수십만 명의 외국인이 결혼과 취업을 위해 입국하고, 영어권 국가에서 공부하려는 초등학생들이 날마다 인천공항을 떠난다. 부산에서는 러시아제 권총이 팔리고, 인터넷으로 섹스 파트너를 찾고, 휴대폰으로 동계올림픽의 생중계를 보고, 페덱스가  샌프란시스코 산 엑스터시를 운반하고, 온 국민의 반 이상이 적립식 펀드에 투자하는 사회였다. 최고 지도자는 풍자를 감당할 카리스마도 없는 한갓 비아냥의 대상일 뿐이었고, 노동자 계급을 대표한다는 정당이 해방 이후 최초로 의회에 진출했다. 만약 기영이 처음 남파되었던 1984년에 누군가 이십 년 후 남한이 이런 사회로 변모하리라 예상했다면 아마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었을 것이었다.

 

- 196-199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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