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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 좋다는 방식의 최후!

약 두 어달 전 사건이나,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사건.

 

복지관 이용 시간이 끝날 즈음, 복지관 직원이 문 단속을 하는 과정에서 복지관 이용자 (장애아동 아머니)와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 사소한 이유였다. 휴게실에 복지관 이용자 몇몇이 있었는데, 이 직원이 문단속을 한답시고 휴게실 문을 닫아버렸고, 이 어머니가 '안에 사람들도 있고, 날도 더운데 문을 왜 닫냐?' 라고 말을 하면서 감정의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감정적 충돌이 늘 그러하듯이 어느 누가 말리거나 스스로 자제하지 않는 이상, 충돌하는 감정의 농도가 업그레이드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고성이 서로 오가는 와중에 이 직원이, '내가 언제까지 장애인들 똥이나 닦아주어야 하느냐?' 뭐 이런 식의 부적절한 발언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분노 게이지 상승은 당연지사. 당장 복지관 관장까지 호명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복지관 관장까지 뒤늦게 들어왔다. 그는 해당 직원을 질책하고 부모에게는 사과를 하면서 상황을 정리하고자 하였고, 어머니도 얼마간 수긍하는 듯하면서 상황은 마무리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

 

그 어머니는 해당 직원이 아무런 제재 없이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발끈하여 관장과의 면담을 다시 가졌고, 이 자리에서 해당 직원을 해고하지 않을 시, 당장 인권위에 진정을 넣고 부산시나 언론, 장애인 단체등에 이 사건을 알리겠다고 하면서 강력하게 문제제기하였다. 관장은 어머니의 지나친 문제제기 앞에서 적이 당황스러워하면서 일단 어머니의 요구대로 해당 직원의 사직서를 받기로 하고, 직원들에 대한 인권교육 실시,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공개 사과 등을 하기로 어머니와 약속하였고, 이에 대한 내용을 각서로 써서 넘겨주었다.

 

문제는 관장의 이런 방식이 매우 부적절했다는 점이다.

 

해당 직원이 잘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잘못은 공적 절차를 통해 징계가 이루어져야지, 이용자 요구에 못 이겨, 혹은 이용자의 성난 감정을 임시적으로 무마시킬 요량으로 각서를 써 주고 게다가 직원의 사직서까지 받는다는 것은 공정치도 온당치도 않다는 점이다. (관장은 어머니에게 각서까지 써 주었으니, 설마, 진짜 직원을 해고시키라고 할지는 몰랐다고, 나중에 토로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직원은 쫓겨나다시피 복지관을 떠나야 했고, 그 직원이 제출한 사직서는 여전히 처리되지 못한 채, 관장의 책상 안에 놓여 있다. 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해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장애자녀 부모들은 이미 그 직원에 대한 사표처리를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복지관 측에서는 이런 사정 때문에 내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고, 나로서도 이 일에 개입할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 (이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써서 타진해보아야 한다)  어머니를 만나서 '해당 직원에 대한 용서'를 부탁했으나, 어머니는 완강하였다.

 

"그럼 사람은, 더 이상, 이런 복지 쪽에 일을 해선 안 되요"

 

나로선 어머니의 그런 태도가 일견 이해가 가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진 않았다. 우선 하나는, 어머니가 받은 상처와 고통이 매우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해당 직원에 대한 해고는 그 과오에 비해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관장의 일처리 방식에서 드러나듯이 사표 수리 절차도 주먹구구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오늘, 복지관 측은 이용자 다수를 모아서 해당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하고, 아직 해당 직원에 대한 사표 수리를 하지 않았음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어머니의 격한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미 해고 처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다만 다른 이용자 어머니들 다수는 직원에 대한 해고 처리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상황이었고, 자칫 이 사건은 부모끼리의 갈등으로 확전될 상황이기도 하다. (복지관이 의도적으로 한 것은 아니겠지만, 미숙한 일처리의 결과라 할 것이다)

 

사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복지관 관장이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부모의 요구가 아무리 드세다고 하더라도 징계위원회를 통해 진행했어야 할 일이고, 설령 부모가 인권위나 장애인운동단체에 문제를 제기하여 공론화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관장은 이런 상황이 두려워 '좋은 게 좋다' 식으로 일단 미봉하려 들었고, 지금은 그 가혹한 결과 앞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이라도 관장이 나서서 '내가 각서를 쓰거나 임의로 직원에 대한 사직 요구를 한 것은 적절치 못했다. 그 대목은 나의 잘못이며, 그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겠다' 라고 나서야, 그나마 상황이 올바르게 전개될 수 있는데, 그리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오늘과 같이 부모 이용자들을 함께 모아서 결국에는 부모끼리 갈등이 조장될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지, 나로서도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내가 간접적으로 나서서 해당 직원에 대한 용서를 요청하기도 한 만큼 그 어머니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이 크지 않고, 오히려 직접 인권위에 진정을 넣는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결국 그 어머니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의제화 하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 사건과 연루된 나의 처신은 검토해볼 필요성이 있다. 이 일에 대한 개입의 의도와 그 과정, 그리고 방법에 대한 타당성까지, 검토의 필요성이 있다. 혹시 또 '오지랖' 아니었나 하는, 그런 의구심이 내게서 강하게 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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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생과 통합교육을 한다...라는 것.

며칠 전, 인문계 고등학교 사건 때문인지 '통합교육' 문제에 관심이 간다.

 

수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초등학교의 경우 대다수 부모가 통합교육을 지원한다. 장애 정도나 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특수학교에서 자신의 아이가 더 중증인 장애아동으로부터 혹시나 이상행동을 따라 하는 건 아닐가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하나의 요인이다.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그래도 비장애아동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무엇이라도 좀 더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낫지 않을가 하는 막연한 기대가 깔려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그나마 초등부는 낫지만, 중등부와 고등부 올라갈수록 통합교육을 받고 있는 장애학생들은 비장애학생들과 함께 있는 원적반에서는 별달리 말을 하지 않거나 못한다. 비장애학생들과 함께 있는 시간 내내 아무 말도 못하고 얌전히 있다가, 특수학급에 가게 되면 그 때서야 장애학생들끼리 수다를 하고 때론 싸우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말햐ㅐㅆ듯이 일반적으로 초등학교보다는 중학교가,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가 더욱 이런 경향성을 지닌다.

 

당연한 일이다.

 

비장애학생들의 분위기에 짓눌리는 것, 그래서 말하지 못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장애학생들은 예민하게 포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일대 다수이지 않은가? 게다가 비장애학생들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연히 장애학생이 잘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원적반에서 주눅들어 있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고, 그나마 특수학급에 오면 서로 말이 통하는 친구들이 있기에 입을 열수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통합교육의 현실이다. 인문계고등학교에서의 통합교육이란 게, 얼마나 불가능한지 말해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통합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장애아동에게 적절한 통합의 시기와 정도, 방법을, 장애아동 개인의 생의 주기나 단계와 상태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말일 뿐이다.

 

현실에서 통합교육은 이들의 존재감을 지우는 것에 불과하다. 그나마 특수학급이 이들의 존재감을 인정하나, 그것이 제 스스로 인식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그나마 이 곳이 마음 편하다는 수준에 불과한 게 아닐까?

 

어쩌면 통합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을 바꾸어야 하는게 아닐가 싶다. 그저, 일반학교 내 비장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통합교육'이라고 말하기에는 현실은 너무나 척박하다. 아이들도 괴롭고, 비장애학생들도 괴롭고, 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는 통합교육에 대한 물리적 지원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학교 교육이 성적지상주의에다가 경쟁우선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 현실에서 과연 통합교육이란 게, 씨알이라도 먹히겠는가?

 

통합의 방법을 새로 고민하거나 모색해야하리라 생각한다.

 

특수학교라 해도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을 따르는게 아니라, 교육과정을 지역사회와 통합하는 방식으로 구성하여, 경증의 장애학생이라 해도 특수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고, 아예 특수학급은 학생을 2-3명을 하되, 교사 한 명이 집중적으로 맡는 것이다. 지역사회와 함께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원적반을 아예 특수학급에 두는 것이다. 그래서 비장애학생들 수업 시간에 들어가는 것 조차도 하나의 통합교육의 방식으로 포섭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렇게 하는 까닭은 비장애학생들로 하여금 역통합의 의미를 시도해보는 차원에서 말이다.. 통합한다고 하여, 무조건 장애학생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탈피할 필요가 있다.

 

이런 방식대로 계속 통합교육을 한다면... 글세... 나로선, 학교 현장의 어려움만 가중되리라, 예상한다... 그것도 소모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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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교사의 교육적 행위는 어디까지일까?

사건은 간단하다.

 

자폐성 장애학생이 통합반(원적반) 영어 수업 시간에 소란을 피워, 비장애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했다.

영어 교사는 특수교사를 불렀고, 특수교사는 장애학생을 지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특수교사는 어머님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말을 잘 듣질 않으니, 학교에 열흘 동안 오지 않게 하려는데, 동의하느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알겠다'고 했다.

 

다음 날, 어머니는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 행동을 일으켰다고 해서 집으로 보내 학교에 열흘 동안 오지 마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특수교사에게 따져 물었고, 특수교사는 해당 상황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이런 특수교사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학교엘 찾아갔다.

 

교장과 교감, 특수교사 2명, 부모님과 그리고 나.

 

특수교사 해명 요지는, '지난 번 아이가 문제 행동을 일으켰을 때, 4일 동안 학교오는 것을 금지시키고 나니, 그 문제 행동이 줄어들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거듭 문제 행동을 일으켰기에, 학교오는 것을 금지시켰고, 분명히 어머님도 동의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교사의 이런 판단, 즉 학교 오는 것을 금지시키니깐 아이가 좋아졌다는 것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으셨고, 때문에 그 자리는 약간 언성이 올라갔고, 서로 각자의 입장만을 제시하는 식으로 흘렀다.

 

우쨌든, 결론은,

 

어머니가 원치 않는 방식임을 미처 알지 못했으며, 그 점에서 있어서 소통이 충분치 않았고, 어머니가 서운하게 생각하게 된 점에 대해, 교사로서 사과드린다는 식으로 상황은 매듭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나로선 앞의 글에서 썼듯이 통합교육과 장애학생의 현싱이란 점의 차원에서도 고민을 다시 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방문을 통해 특수교사의 교육적 행위를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만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특수교사는 그 행위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진 않았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와 다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머님의 이해가 적절치 못한 대목이 있다는 내용이 주되었고 소통에 있어서 충분치 못했다는 식의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행위의 의도, 즉 '교육 행위'였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나 역시, 그것이 '교육 행위'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다만, 교육 행위라고 해서 학교를 보내지 않는 것이, 설령 그것이 장애학생에게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적절했는가 라는 점이다.

 

나로선 '적절치 못했다'고 주장한 반면, 교사들은 적절성 여부보다는 오히려 '이후에 장애학생에 대한 개입의 소극성'을 주로 이야기하였다.

 

맞다. 이런 일 터지면, 어느 교사라 하더라도 해당 아이에 대한 교육적 행위를 실행하기가 쉽진 않다. 부모님들은 대체로 학교 내에서 조용히 있는 것이 별 문제 없이 학교 다니는 것이고, 따라서 교사들은 가급적이면 문제 여지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 일도 결국, 통합교육이 잘 되지 않는 아이를 통합시킨다고 원적반에 보내었고, 그것이 사단이 되어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들은 가급적이면 특수학급에 아이를 돌볼 가능성이 크고, 그렇게 3학년까지 보낼 수 있다. 그리 되면 통합교육인가? 아니면 반통합교육인가?

 

어렵다.

 

다만, 나로선 여전히 학교에 보내지 않는 행위를 교육적 행위라는 교사들의 의견에는 이해가 가지만, 동의는 하질 않는다. 그것은 '차별'이기 때문이다.

 

 

"모든 요구가 권리 주장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실현 가능한지 인간 생활에 근본적이고 긴요한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 존엄성을 도무지 유지할 수 없는 것, 그것을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사회를 인간다운 사회라 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 것이 인권의 대상이 된다."(류은숙, 인권을 외치다, 푸른숲,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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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교육 현실과 장애학생의 교육권

대학의 간판만이 한 명의 삶을 거의 결정짓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

 

이 결정의 격전지인 인문계고등학교.

 

이 사건은 부산의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영수(가명)는 자폐성장애가 있는 고등학교 2학년이다. 자폐성장애라고 해도 비교적 양호한 축에 속하는 영수는 학교 생활도 잘 적응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영수는 통합반(원적반)에 있을 때, 평소 수업 시간에는 조용히 있는 편이지만, 영어 듣기 시간 때는 한 번씩 고함을 지르면서 다른 아이들의 수업을 방해하곤 하였다. 영수에겐 영어로 말하는 것이 듣기 싫었나보다. 어쨌든 영수는 아이들이 영어로 말할 때면, '하지마, 하지마' 라고 하며 소리를 질렀다.

 

어느 날 영어 수업 시간.

 

영수는 영어 듣기를 싫어했는지, '하지마, 하지마' 라고 외쳤고, 영어 교사는 특수교사를 불러서 영수를 특수학급에 데리고 갈 것을 요청했다. 근데 영수는 교실 바깥에 나와서도 고조된 감정이 가라앉질 않았는지 교사에게 양말을 벗어 던지거나 특수교사에게 약간 대들었다고 한다.

 

이에 특수교사가 '너 이러면 집에 보내버린다'고 하면서, 정말 영수를 집에 보내버렸다. 학교 부장교사나 교감, 교장 어느 누구와도 논의하지 않은 채, 일종의 체벌 형식으로 특수교사가 자의적으로 '열흘 동안 학교에 오지 말고, 집에 있어라'고 한 것이다.

 

아이의 엄마가 황당한 것은 당연한 사실. 교사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예의 저 사건을 언급하면서 특수교사가 '열흘 정도 학교 오질 마고 집에 있는 게 낫겠다'고 하였고, 엄마는 엉겹결에 '알겠다'고 해서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는 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열흘 동안 학교 오지 마라는 것이 누구의 결정이냐? 이것이 교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냐?'고 따졌지만, 교사는 별 말없이 '어쨌든, 10일 동안 학교 나오지 마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4일째 되는 날, 교감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정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니,

 

교감 왈, '나도 잘 모르는 일인데, 알아보겠다' 고 한 후, 나중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하는 말이 '교사가 아이들이 많다 보니깐 힘들다 보니 그리 한 것 같다. 아이가 좀 괜찮아졌으면, 학교를 보내시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5일째 되는 날, 이 어머니는 나를 찾아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었다.

 

참,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이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른 명백한 차별행위이기 때문에 인권위 진정을 하게 되면, 학교로서는 빼도박도 못하는 일이다.

또한, 학교를 상대로 언론에 공론화시키면 말 그대로 이 학교는 반인권적 학교로 비판받을 것은 뻔하다. 게다가, 지금 이 엄마는 이 일로 인해 상처를 너무 깊게 받았기에 자녀의 자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더 이상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 아이를 학교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주 화요일 오후에 학교 교장과 교감, 특수교사, 그리고 어머님과 내가 만나기로 했는데, 이 자리에서 어머니는 자퇴 의사를 밝히겠다고 한다.

 

학교로서는 이 일이 외부에 발설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퇴 사유에 적힐 내용이 '학교 현장의 교육 차별로 인해 학교를 관둔다'는 식으로 적힐 상황이기에 극구 만류할 일은 분명하나, 나로선 부모 의사를 존중하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공적으로 접근하여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지 고민이 된다.

 

재발방지 차원에서 시교육청에 문제제기를 하고, 그리고 시교육청으로 하여금 학교에 공문을 보내 이와 같은 차별 행위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식의 환기를 담은 내용을 보내는 것 정도일 듯한데, 내 고민은 결국 '통합교육 현장에서 장애학생의 현실'이란 점에서 참으로 딜레마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신혜련선생님의 말처럼 장애학생이 특정 반응을 보인다면, 그 시간 만큼은 아이에게 특수학급 입금을 시키는 것만이 하나의 방도같은데, 과연 특수교사들은 이런 해결방식에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다고 해서 장애학생은 통합해야 하니, 무조건 원칙대로 특수교사 수업 시간 이외에는 들어와서는 안 된다 라고 하겠는가? 그리하여 원적반 선생으로 하여금 알아서 해결하시라고 해야겠는가?

 

게다가, 문제는 학교 현장에서 관리자들이 종종 장애학생이 약간의 문제 행동만 해도 곧바로 '특수학급에 보내버리는 게' 또한 현실 아닌가? 그들의 인식은 단순하다. '어차피, 공부도 안 되는 얘들. 굳이 학교 현장에서 공부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들의 인식을 대놓고 비판하기 어려운 것은 이들의 비판 앞에 내세우는 논리라고 해봤자, 원론적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장애학생도 교육권이 있다는 것. 그러나 현실은 이들의 교육권이 실현되기엔 너무 척박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말이다.  

 

왜 통합교육을 하는가?

단지 장애학생의 교육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장애학생도 교육권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너무 수세적이고 수동적인 논리다.

 

어쩌면 장애학생과의 통합교육을 통해 유익할 수 있는 부분을 마련거나 생성해 내어야 한다. 그것이 특수교사와 장애인교육에 관심하는 사람들이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통합교육의 척박한 현실을 고민하다 보니, 결국 이러한 고민의 귀결점이 장애인과 왜 함께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듯하다.

 

지금 내가 제출하는 논리란,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과 태도를 습득함으로서 우리 자신의 인간다움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정도이다.

 

요약하자면, 장애인을 도와줌으로서 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 뭐, 이런 논리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심정적이고, 개인적 수준에 머무는 논리이고, 또한 시혜와 동정으로 대상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높다. 그로 인해 장애문제를 결국 개인문제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인식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제출되는 '장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런 방식의 접근은 다소 부정적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니도 장애인이 언제 될지 모르니, 장애인을 차별해선 안 된다'는 논리란 것은, 다소 슬퍼지 않은가?

 

다시 돌아와보자. 무엇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가를 짚어보자.

 

통합교육을 실시하는 학교 현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두고 볼 때, '장애학생은 공부를 해도 소용 없으니, 그냥 특수학급 가는 게 낫다'는 식의 교육 현장의 배제이다. 이것은 일정 정도 진리치를 담보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예 특수학급에서 수업을 듣는다면 어떨까? 그리 했을 때, 어떤 문제점이 발생할까? 어느 의미에서 우리 나라의 고등학교 교육 현실에서 시도해봄직한 일 아닌가?

 

물론 통합교육이란 말이 무색해질 것이나, 정작 통합교육의 의미란 것이 학교 현장에서 적용되고 있지 못한 게 사실 아닌가? 적어도 학교 현장의 비장애인 아이들한테 '니도 장애인이 언제 될지 모르니, 장애인을 차별해선 안된다'는 식의 논리가 먹혀들 가능성은 거의 없질 않겠는가?

 

가치만을 말하고 주장하기에는 현실의 척박함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 하는 문제가 정말이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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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가지다? 장애가 있다?

전현일(미국 IFDD 대표) 대표님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내용인 즉, 장애인을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규정하고 부르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아래가 그 메일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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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장애인, 발달/지적장애인, 장애아동, 학습장애학생, 자폐아....

 

이런 단어에는 그러한 장애를 갖인 사람을 일괄적으로 규정지어 버리는 함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을 칭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그들을 일반 비장애 사회와 구별하며. 그러므로 무의식중에 차별을 불러오고, 따라서 그들에게 사회적으로 격하된 차별이 자연히 있게 됩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을 폄하해서 부르는 말들이 우리사회에도 많지요. 하지만 발달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의 인격, 존엄성을 무시하는 말이라고는 흔히들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자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일찍이 People First라는 단체를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장애인이기 전에 먼저 사람이라는 주장을 한 것이지요. 그 결과 미국의 모든 법령, 해당 관공서, 신문 등 모든 곳에 용어가 바뀌었습니다. 발달장애인이 아니고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이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고 진정으로 차별을 없애고 당사자의 인격과 인간으로써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통합된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국 장애인 차별금지법은 “장애를 가진 미국인 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이라고 번역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그까짓 말이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이냐”고 반응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 불러오는 영향은 의외로 강력하며 커다란 사회적 오해를 불러온다는 것을 우리 모두 경험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 치하에 “죠센징”이 그랬지요.

 

장애인 보다는 장애를 가진 사람, 지적장애인 보다는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 장애아동 보다는 장애를 가진 아동, 학습장애학생 보다는 학습장애를 가진 학생, 자폐아 보다는 자폐증을 가진 아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우리 한국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의 중요한 한 발자욱이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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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일 대표님의 메일에 장애인계에서 활동하는 몇몇 사람이 답멜을 보냈는데, 내용이 아래와 같다.  

 

2. 보내주신 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고 저 또한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글을 쓸때도 좀 길지만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장애우'란 용어에 대한 논란이 있었을 때 제가 함께걸음에서 긴 장문의 글을 2회에 걸쳐 썼기 때문에 그 때 고민을 좀 했었죠. 일부 사람들은 영어식 표현 아니냐고 했지만 전 '사람'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됐습니다. 장애는 특징이죠.

 

3. People First 운동의 의미와 영향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안으로 제시한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에서 누가 장애를 의도적으로 가진 사람이 있나요? '가지다'라는 동사는 자발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볼 때 '장애를 가지다'는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 더 낫지 않을까요? 나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장애인이라고 하여 차별적인 언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말에서는 모든 수식어가 피수식어 앞에 온다는 점에서 '시각장애인'에서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당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또한 굳이 People First 운동의 취지에 따르더라도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이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언어와우리말 간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무작정 people first 방식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4. 사실 장차법을 만들 때 그 표현을 가지고 논란을 했었거든요. "장애를 가진"이란 능동적,주체적 표현과 "장애가 있는" 이라는 현상적 혹은 존재적 표현 결국은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규정되었답니다.

제2조 (장애와 장애인) ①이 법에서 금지하는 차별행위의 사유가 되는 장애라 함은 신체적ㆍ정신적 손상 또는 기능상실이 장기간에 걸쳐 개인의 일상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하는 상태를 말한다.

②장애인이라 함은 제1항에 따른 장애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5.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표현이 가지고 있는 깊은 뜻을 생각할 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오면서 당연히 나는 장애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회가 장애인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장애를 특혜와 면제의 조건 쯤으로 여기면서 장애를 강조하는 것이 요즘의 우리 모습입니다. 특히 장애인단체에서는 이런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야 더 많은 특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데 이 사회에서 장애인단체는 정치적 힘을 더욱 얻어가면서 비장애인과 다른 점만을 더욱 강조합니다. 보편보다는 특별을 강조하는 풍토가 가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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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보면,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보는 게 좀 더 타당하다는 의견 같다(지운 내용 2-3가지가 있는데, 모두 이와 같았다)

 

근데, 나는 의견이 약간 다르다. '장애를 가진'이란 표현보다, '장애가 있는'이란 표현이 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유는 '가지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소유의 의미이고, 장애인에게 장애는 그 사람의 정체성의 일부분이란 점에서 '소유'가 될 수 있긴 하나,(오늘날 사회에서) 근본적으론 장애인이 된 원인을 두고볼 때, 자신이 원한 것이기보다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등록장애인의 90% 이상이 이른바 후천적 장애인이다) 

 

반면 '장애가 있는'이란 표현은 어느 분의 답글에서처럼 존재론적 차원에서 규정되는, 따라서 '장애가 있는 상태'가 강조된다. 그러나 각각의 사회적 지원 체계의 수준/방식에 따라 그 장애 상태는 덜해질 수 있거나 혹은 장애 상태 그 대로일 수 있다. 때문에 '장애인'에 대해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게 오늘날 '장애' 개념에 견줘볼 때 좀 더 타당하지 않나 라는 것이다.

 

물론, 가진 것도 하나의 상태일 순 있지만, '있다'라는 동사와 견줘볼 때, 전자가 정태적 뉘앙스라면 후자는 동태적 뉘앙스가 좀 더 드러난다  

 

가지다/안가지다 있다/없다라는 축은 동일하지만,

<장애인이 살아가는 데 있어 장애인콜택시가 있음으로 인해, 장애를 덜 가지다/더 가지다>

<장애인이 살아가는데 있어 장애인콜택시가 있음으로 인해, 장애가 덜 있다(하다)/더 있다(하다)'>

 

생각하면 좀 더 분명하게 구분된다. 앞의 문장은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뒤의 문장은 장애인콜택시가 있어 장애인의 외출이 그 만큼 자유로워졌다 (장애가 덜하다) 것을 말해준다.

 

 

한편, '장애가 있는 사람'과 '장애인'에 대한 구분하면서 '장애가 있는(가진) 사람'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하다는데, 이는 한국어와 미국어의 특징을 좀 더 비교해봄직한 대목이다. 가령 전현일 대표님이쓰신 "미국 장애인 차별금지법은 “장애를 가진 미국인 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고 하지만, 한국어로서 이 문장은 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이는 지금껏 장애를 가진/있는 사람과 장애인을 구분하지 않은데서 오는 낯설음일 수도 있다)

 

 

 요컨대, 이렇게 구분한 의도가 결국 (장애보다는) '사람'을 강조하자는 것인데, 한국어에서 '장애를(가) 가진(있는)사람'과 '장애인'으로 구분했을 때, 실제 '사람'이 강조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는 좀 더 숙고해봄직하다. 장애와 존재(사람)을 구분하자는 의도는, 일견 타당한 듯 하지만, 정작 장애인 당사자(존재)에게 장애는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분이라는 점에서 '이를 구분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좀 더 논의되어야 할 대목이기 때문이다.  

 

 

전현일 대표님은 미국에서의 이러한 구분이, "진정으로 차별을 없애고 당사자의 인격과 인간으로써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통합된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 요는 한국 현실에서 '장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과 미국과는 좀 더 차이날 법한 대목이 있다. 가령 우리는 조선시대의 유교문화권에서 자라왔고, 때문에 건강한 몸과 신체의 중요성을 제기하는 문화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 등은 장애인운동을 한다는 나를 비롯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예외일 수 없을 만큼 강고하다.  때문에 '장애를(가) 가진(있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실제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장애'가 강조될 것인지 아니면 의도하신 것처럼 '사람' 이 강조될 것인지는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전현일 대표님의 문제제기를 계기로 장애담론에 대한 한국 사회에서 의견들이 다양하게 제시되면 좋겠다는, 그런 소박한 바람을 가져본다. 실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장애담론이란 것은 선진국의 이른바 '장애학'을 소개하는 정도이고, 장애운동에 대한 이론화도 무족하다. 물론 장애운동 한 귀퉁이에서 발을 담구고 있는 나 역시도 이런 부족한 현실에 대한 책임이 없진 않기에 대놓고 불평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_-;

 

 

전현일 대표님의 메일 내용을 계기로 한국 사회 장애담론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해보아야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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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권교육 단상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장애이해교육'이니 '장애인식개선교육' 등에서 대체로 이루어지는 교육 내용은, 아니 학생들이 받아들이는 수준은 '장애인을 도와줘야 한다. 배려해야 한다'는 식의 도덕적 훈계의 확인이다.

 

사실, 이런 교육은 기존의 관점/태도를 더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낳기 어렵다. 오히려, 왜 도와줘야 하는가? 왜 장애인을 배려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함께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아래 글은, 인권교육센터 '들'의 상임활동가인 한낱님이 쓴 글이다. '장애인을 도와줘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장애인과 어떻게 하면 함께 살 수 있는가' '장애친화적인 환경을 어떤 식으로 구성할 것인가' 하는 관점의 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장애인인권교육과는 차별적이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근본적인 문제와 마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인권교육은 '도발적'일 필요가 있다. 도발적이라 함은 기존에 견지하는 관념에 대해 정면으로 묻고 스스로 자기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권'의 출발도, 이런 '도발'과 '감행'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한낱님의 말처럼 '인권이 나와 상관없다고 여긴다면, 그저 남의 이야기라면, 그것은 도덕 이야기이고, 하나마나한 소리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남는 과제는, '도대체 장애인의 인권과 당신의 인권이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를 논리적으로 우리 각자가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성글더라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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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몸’으로 통하다

대안학교 청소년들과 함께 장애인권 공감하기

한낱
 
"청소년들과 함께 '장애인권교육' 해본 적 있어요?”

그동안 청소년들과 함께 '청소년인권교육'을 해 본 경험은 꽤 있다. 장애인권 활동가나 장애인 당사자 분들과 '장애인권교육'을 해본 경험도 꽤 있다. 자기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뿜어져 나오는 인권의 목소리는 명쾌하면서도 우렁차다. 그런데, 비장애 청소년들이 대다수 모인 자리에서 장애 인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권이 내 얘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로 남아 버릴 때, 그것은 인권교육이 아닌 도덕 교육으로 흐르기 쉽다.

어떻게 내용을 구성해야하나 혼자 난감해하다가 장애 인권단체 활동가 몇몇에게 조언을 구했다. 청소년들과 함께 장애 인권 교육을 진행했던 경험담을 쭉 듣게 되었다. 그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 역시 나의 고민과 맞닿아 있었다. 대부분 초․중․고등학교에서 진행되는 장애 관련 교육은 ‘장애이해교육'인데, ‘몸이 불편한 장애인 친구를 잘 도와주어야 한다, 특별히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청소년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

'학생들이 서로를 돕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시작 아닌가?' 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조금만 질문의 방식을 달리하면, 인권의 시선과 도덕의 시선이 가진 근본적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비장애인은 도움을 주는 주체로, 장애인은 도움을 받는 대상으로 고정되는가?' 거리에 나온 장애인을 보면 불편한 시선을 보내고, 사실상 장애/장애인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장애인을 도와주어야 한다,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입장만을 되풀이 한다. 이러한 껍데기 도덕을 깨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주체이며 같이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느끼고 생각해보는 것이 장애인권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나아가 '장애인은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장애 친화적으로 구성되지 못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소수자/약자화 된다는 것'을 이야기해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

어떤 식으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몸’을 매개로 청소년들과 소통해보기로 결심했다. 나에게 ‘몸’이 나의 경험, 상처, 기억이 담겨있는 공간이듯, 장애인에게도 ‘몸’은 그러한 공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장애가 불우하고, 불행한 족쇄가 아니라 나와 같은 혹은 나와는 조금 다른 경험과 기억이 담긴 ‘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장애인권 문제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하면서.

날개 달기 - 자화상, 내가 보는 나

자화상 그리기를 하려면, 나와 만나는 시간이 열려야 한다. 준비해간 몇 가지 사진자료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몸'하면 떠오르는 느낌이 뭐냐고 묻자 '야하다, 더럽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내 몸을 봐도 그런 느낌이 드나? 왜 우리는 '몸' 하면, 누군가의 벗은 몸, 그것도 잘 빠진 몸매의 남성과 여성을 떠올리게 될까?" 질문을 던지며 현대 여성 화가 제니 사빌의 자화상을 보여 주었다. "이런 자화상 본 적 있어요?"

 
위 사진:[제니 사빌의 자화상]


다소 충격을 받은 듯 한 친구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어떻게 저런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일 수 있냐'는 투의 야유. 곧이어 "거울을 자주 보나요? 내 모습을 뚫어지게 본 적 있나요?"라고 묻자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공포를 느낀다고 대답한 친구도 있었고, 위로를 받는다고 대답한 친구도 있었다. 여러 아마추어 혹은 프로 화가들이 그린 자화상들을 쭉 보여주고, 마지막으로는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을 보여주며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위 사진:[프리다 칼로의 자화상들]


프리다 칼로는 18살 때 전차 사고를 겪고, 대부분의 신체가 부서지는 경험을 한다. 그 때 병원 천장에 거울을 붙여놓고 자신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다. 퇴원 후에도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자화상의 느낌들이 모두 다르다.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림의 색감도 구도도 달라지는 것……. 졸고 있던 친구들도 일어나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몇몇 여성 친구들은 상당한 감정이입을 했다. 프리다 칼로 자화상에 대한 느낌들을 먼저 나누고, 프리다 칼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사연이 담긴,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담긴 자화상을 그려보기로 했다.

더불어 날갯짓- '도움 주기'에서 '함께 살기'로

친구들의 그림 실력에도 놀랐지만, 자신을 표현해내는 방식도 놀라웠다. 어떤 친구는 자신의 잘려진 머리카락과 다시 자란 머리카락을 동시에 그려 놓고, 어렸을 적 머리를 잘렸던 기억에 대한 상처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또 어떤 친구는 화면 가득 자신의 감정에 따라 다른 색깔로 빛나는 눈을 그려 놓았다. 거리 화가가 그린 캐리커처 느낌으로 나른한 자신과 에너지를 얻은 자신의 모습 두 가지를 그린 친구도 있었다. 도화지를 네모 칸으로 모두 분절시켜놓고, 자신의 각각의 신체 부위를 하나 씩 그려 넣은 후, 각각의 사연을 발표해준 친구도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집 떠난 파란 강아지로 그린 친구도, 코스프레 복장을 한 자신의 모습을 그린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의 그림을 보면서 서로 질문하기도 하고, 그림의 느낌을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위 사진:[청소년들이 그린 자화상]


자화상 감상을 나눈 후, 바로 장애여성들이 그린 자화상과 장애 여성 사진전에 전시되었던 사진 한 컷을 보여주었다. 내가 내 몸을 느끼고 사유하듯, 장애 여성도 자신의 몸을 느끼고 사유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위 사진:[출처: 장애인권교육네트워크]


장애,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을 묻자, ‘휠체어, 목발’과 같은 보장구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도움 받는 모습, 구걸하는 모습 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왜 우리는 그런 모습만을 떠올리게 되는 걸까?",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애가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라고 묻자 몇몇 친구들은 당황스러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랑한다면 장애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고 대답한 친구들이 많았다. 어떤 친구는 "누군가의 상반신만 사랑하거나 하반신만 사랑할 수도 있는 걸까?"라고 묻기도 했다. 장애인에게 장애는 분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며, ‘장애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라는 대화를 나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연애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가는 극장에 갈 때, 식당에 들어갈 때도 진입로가 없어서 벽에 부딪혀야 하는 지극히도 ‘불편한 현실’과 연관된 문제라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위 사진:[사진출처: 경향신문]


스웨덴 장애 여성과 한국 장애 여성의 하루를 비교한 그림을 보면서도 친구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장애인들이 살아가기 힘든 것 같아요." 등과 같은 이야기를 던졌다. "스웨덴보다 한국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심한 이유는 뭘까?"를 질문했고, 그것이 장애 친화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뭔가 부족한 존재,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남게 되는 것과 연관된 문제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머리를 맞대어

프랑스의 공익 광고를 보고 나서 나눈 대화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휠체어 중심, 수화 중심, 점자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된다. 광고를 보고 나서 한 친구가 아주 핵심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제가 지금 보다 훨씬 편해질 것 같아요." 청각 장애를 가진 친구의 감수성이 빛을 발하는 시간이었다. 장애 인권 수업이라고 해서 장애를 가진 친구를 의도적으로 더 발표시키거나, 그 친구를 신경 써서 수업하는 것은 오히려 장애 당사자 친구에게 부담감을 갖게 한다. 자연스럽게 ‘함께’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종종 이 친구는 작은 활약들을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교육을 정리하며 스웨덴에서는 외국 이민자들이 장애인으로 분류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친구들이 다들 놀라워했다. 통역 지원과 언어 학습 지원을 위해 장애인으로 분류된다는 점, 이와 같은 사회에서 장애는 우리 사회처럼 족쇄가 아니라 정당하게 편의를 제공받아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이야기도 더불어 나눴다.

'장애인에게 내가 무엇을 해줘야 하는가'에서 '장애인과 함께 살기 위해 무엇이 변해야 하는가'로 문제의식을 '약간은' 이동할 수 있었던 시간. 언제나 그렇듯 인권교육이란 변화를 일굴 수 있는 작은 날갯짓에 불과하다. 이 작고 우연적인 계기를 자기 삶의 돌풍으로 만드는 것은 참여자의 몫. 인권교육에서 중요한 건, 역시 '무엇을 매개로 서로 공감할 것인가'를 잡아내는 일이란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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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년크리스마스-국도 5번을 타고 철원을 가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너무'  추웠다는 것이다.

토시를 끼고 달리지 않았다면, 아마 손가락이 다 얼었을 것이다.

철원 지나면서, 다행히, 손난로를 생각할 수 있어서 조금은 덜 춥게 왔다.

 

5번 국도, 기억삼아, 기록해둔다.

 

부산 14번 국도에서 출발, 창원 진영을 지나, 79번 국도를 갈아타서 창녕군에서 5번 국도를 타고 갔다.

창녕에서부터 대구 달성을 지나, 칠곡, 군위, 의성, 안동에 도착하여,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잤다.

대략, 5시간 이상 걸렸다. 구리스마스 이브 이브 저녁 8시경에 출발하여, 이브날 새벽 2시 정도 안동에 도착했으니...

 

아침 9시 경, 안동에서 출발하여, 경북 영주를 지나 충북 단양, 제천, 강원도 원주에 도착했다. 대강 시간이 오후 1시였으니, 4시간 정도.

 

원주에 도착하니, 국도 5번 종점인 화천이 다 온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그것은 단지 내 느낌이었을 뿐.

 

강원도 원주에서 횡성, 홍천, 춘천, 화천까지... 또 3시간 정도 걸려 오후 5시, 이제 해도 넘어가 어둠이 가라앉을 때였다. 계속 가다보니 군부대만 주구창창 나왔고, 민통선이 나왔다.

 

보초서던 군인들이 '조금만 늦었다면 못 들어갈 뻔했다'고 야그를 해 주면서 조심조심 가라고 했다. 길이 온통 얼어서 오토바이 미끄러지기 딱 알맞다고... 아니나 다를가, 슈유융 미끄러져서 다칠 뻔했으나, 용케 오토바이 외관만 슬쩍 긁혔다.

 

5번 국도의 끝입니다 라는 표지는 끝내 확인하지 못하고,,,날은 벌써 어두워지고, 목적지인 1번 국도의 끝인 파주는 이미 포기한 채. 발가락과 손가락이 얼어서 운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차에 무사히 '철원'에 밤 9시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철원하고 서울하고 그리 가까운지 나는 처음 알았다)

 

구리스마스 이브라고, 캐롤송이 울려퍼지는데 순간적으로 어찌 그리 마음이 외롭던지...

 

우쨌든 찜질방에서 하룻밤 자고 (조금만 더 갔더라면 포천에 아주 좋은 찜질방이 있었는데, 약간 후줄근한 찜질방에서 잤다) 오도방구 시동을 걸려는데 날이 너무 추운 나머지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날씨는 영화 무려 20도까지 내려갔다니깐...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던 오도방구로서는 이게 무슨 일인감 할 만 하였다... 어렵게 어렵게 시동을 걸고, 파주로 가려니깐 도로가 얼어붙어서 거북이 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큰 도로는 눈을 치웠기에 갈만했지만.

 

그래서 계획을 포기하고, 3번 국도를 타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포천에서 3번으로 갈아탔는데, 동두천과 의정부, 서울의 동부쪽을 통과하면서 성남으로 나갔다. 가다가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기도 했는데, 뭐... 걸리면 부산에서 왔다고 하지,,, 라고 생각하면서 배째고 달렸다.

 

성남을 지나 광주에 도착하자 비로소 길이 낯이 익었다. 예전에 광주에서 일할 때, 이 길을 많이 다녔으니깐.... 광주와 이천을 지나, 충북 충주시와 문경시, 그리고 다시 상주에 도착한 시간이 밤 8시.

 

찜질방에서 하룻밤 더 잤다가, 상주에서부터 3번은 김천과 거창으로 빠지기에, 상주에서 25번으로 갈아타서 구미와 칠곡, 대구, 경산, 청도, 밀양으로 빠져 달렸다. 앞서 5번이 대구의 좌측을 통과한다면, 25번은 대구의 우측을 통과하였다.

 

달리고 달려, 창원 진영에 도착, 14번 국도를 타고 부산 집으로 오니, 26일 오후 2시 정도 된 것 같았다.

 

그렇게 09년 구리스마스는 오도방구만 약 30시간을 탔었다...

 

이 사진은 부산에 막 도착했을 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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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베리, 새생명을 보면서 생겨난 부끄러움.

우리 집 마당에는 블루베리 한 그루가 화분에 심겨져 있다. 이전에 귀농카페였던 곧은터 정모에 갔을 때, 추첨으로 받은 것이다.

 

처음, 가져왔을 때는 물도 주고 신경도 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졌고, 겨울을 맞이했다.

 

지난 겨울 내내 블루베리가 있는 화분을 간혹 보긴 했으나, 죽었나 살았나... 뭐 이런 관심을 딱히 가지지 않았다. 한 번씩 쳐다보면서, '살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이야 있긴 했으나, 말 그대로 바람이었고, 앙상하고 말라비틀어지는 가지를 보면서 '얘가 죽었나 보구나'...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했으니깐...

 

그런데, 엊그제.

 

아침에 바쁘게 나가다가 죽었다고 생각한 가지에 푸르른 잎이 무성한 것을 발견했다.

 

기분이 좋았다. 기뻤다. '이야... 이 눔이 살긴 살았네... 다행이다.. 주인 잘못 만나서 죽은 줄 알았는데...' 하지만,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내가 이렇게 마냥 기뻐할 수 있나? 기뻐할 자격이 있는건가? 이번 겨울 내내 무관심으로 방치해두었는데, 이렇게 기뻐하는 것이, 너무 염치없는 일 아닌가?

 

맞다. 나는 기뻐할 자격이 없다. 블루베리가 새생명을 틔우기 위해 내가 한 일이 전혀 없음으로... 그러고 보니, 부끄러웠다.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터자에게 한 것 만큼 타자에게 기대하고 바라자. 내가 타자를 위해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면, 기대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며, 부끄러운 일이라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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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달리고, 다시 쓰다.

거의 1년 만에 달리기를 다시 시작한 것 같다.

 

중간에 간헐적으로 뛰곤 했으나, 지난날 1주일에 4-5회씩 매번 10킬로 정도 뛴 것을 생각하면, 뛰었다고 말하기가 내 스스로 생각해도, 창피하다.

 

그리고 그 동안 내팽겨쳐두었던 블로그도 다시 들어와서 조금씩 다듬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뛰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고, 쌓아올리는 것은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이구나.

 

땀으로 범벅된 몸을 씻고, 블로그 관리를 조금 하고, 이렇게 글을 써 본다.

 

오늘 약 7킬로 뛰었는데도 시간은 50분 이상이 걸렸던 것 같다. 내 삶의 건강성과 자기주도성의 척도라 할 수 있는 '달리기'  매일은 아니더라도 1주일에 최소 3회는 뛰고자 한다. 그리할 때, 이 블로그도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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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성장 영화를 보는 아픔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닌,

착한 성장 영화를 보는 아픔.

<날아라 허동구, 박규태 감독>

 

 

 

1.

‘날아라 허동구’는 ‘성장’ 영화이다. 그리고 ‘착한’ 영화이다. 주인공 동구는 물론이거니와 동구를 둘러싼 대부분 등장인물들은 때론 미운 행동들도 하지만 착하다. 그래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웃고 있어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오히려 마음이 아프다. 무엇 때문일까?

 

2.

IQ 60인 지적장애아동인 동구는 초등학교 3학년이다. 동구는 교실에 있는 노란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같은 반 아이들에게 물 따라주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해하며, 학교에 다닌다. 그런데 동구는 학교(제도)와는 어떤 사회적 관계도 맺지 못한다. 오히려 이를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는 교사는, (시험 당일) 학급의 평균 점수가 낮아진다는 이유로 동구를 제도 바깥으로 내몰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제도(학교 교육) 내에서 함께 하지만 언제든지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동구를 배제하려 드는 것이다. 교사와 교장이 준태(동구 아빠)를 불러 특수학교 전학을 강요하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요컨대 동구는 장애아동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 제도/규칙과는 상관없는 제도로부터 배제된, 사회로부터 격리된 이방인인 셈이다.

 

이런 사정(모습)은 같은 반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이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행복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나, 어쨌든 줄기차게 물을 떠다 나르는 동구의 노동으로 아이들은 편하게 물을 먹지만 어느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할 줄 아는 거라곤 물을 떠다 옮기는’ 일밖에 없다고, 동구를 줄곧 무시한다. 이런 모습은 야구 코치 상길과 관계 맺는 과정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야구 코치 상길은 선수 1명이 없어 시합을 나가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동구의 출현이 마냥 반갑고 고맙다. 비록 룰도 모르고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지만 가르쳐주면 습득하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구는 규칙을 말해줘도 모르고, 공도 무서워한다. 단지 주전자에 물을 떠다 나르는 일을 행복해할 뿐이다. 상길의 바람/기대는 점점 좌절되고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동구를 무시/외면하기 시작한다. 상길 역시 동구가 ‘장애아동’이라는 사실을, ‘차이’가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 착한 성정 때문인지 ‘동구’를 이른바 ‘잘’ 대해주지만,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는 실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의 모습은 동구의 든든한 의지처인 아빠 준태마저도 크게 다르지 않다.

 

3.

준태는 동구를 성심성의껏 보살핀다. 동구의 통학 길을 3년 만에 깨우치게 했다는 준태의 말에서 그의 고단한 노동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동구가 잘 때, “양 한 마리가 울타리를 넘는다”는 주문을 읊어대는 모습은 사랑스럽다. 게다가 그는 동구의 미래를 위한다는 이유로 새까맣게 태운 치킨을 먹고 담배를 하루에 몇 갑씩 피는 등 보험금을 타기 위해 눈물 겨운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준태의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동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 라는 친구 말에 발끈하고 “우리 애가 너희 애랑 같냐?”라는 말을 하는 것에 그친다. 동구의 일상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동구의 성장과 발달의 계기를, 마련하지는 못한다. 때문에 이사를 가야 하는 현실 앞에서 두려움에 포섭되고 특수학교 전학을 강권하는 교사/교장의 말 앞에서 무릎 꿇고 빌기도 한다. 한 없이 잘해주는 ‘착한’ 아빠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마지막 장면에서 동구의 통학로에 표시를 해 놓고 동구로 하여금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대목은, 동구를 성장 가능한 존재로서 대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아빠의 한 단서를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동구-윤찬’의 관계 맺는 양상/과정은 이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4.

윤찬은 아이들로부터 무시당하면서도 항의조차 하지 못하는 동구가 못나고 갑갑하다. 이런 윤찬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동구로 하여금 ‘제도/규칙’을 배우게 하는 계기로서, (동구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 동구의 코치로서 동구가 좋아하는 주전자와 컵으로 야구의 규칙을 설명해주는 준태의 (때론 모질기도 한) 모습은 ‘장애아동’의 특성과 차이를 이해한 바탕 위에서 관계 맺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과정은 장애인 등장 영화였던 <허브>가 보여준 작위성보다는 현실성 있게 그린다. 인간 승리는 아니라 해도, 오히려 홈런이 아닌 번트를 대는 동구의 모습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공만 맞히기만 하면 되는 번트조차도 동구에게는 어려운 과정이었고 노력과 인내, 그리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윤찬으로 인해 처음으로 동구는 규칙(사회)을 배우게 되고 또한 규칙(사회) 속에서―잘 하든 아니 하든 상관없이―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이를 수행해보는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동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규칙)을 배워야 하고, 이 속에서 자신의 어떤 역할이 있으며 이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비교적 담백하게 그려내었기 때문인지 <날아라 허동구>는 상당수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 평가를 이끌어 내었다. 가령 씨네21의 장미는 “<날아라 허동구>는 장애 아동이 겪는 차별 대우에 집중하기보다 조금씩 전진하는 (세상과 맞서는 법을 터득하는) 동구의 발자취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거나 강병진은 “장애아동이 세상의 편견과 맞서는 이야기는 아니다... 동구가 자신만의 즐거운 삶을 찾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날아라 허동구>는 동정과 편견의 함정에 장애를 빠뜨리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고 평하였다. 또한 심영섭은 “장애인 영화의 깜찍한 기습 번트”(부산일보)라는 글에서 영화의 의미를 이 같이 규정하기도 하였다.

 

“이 영화는 최근의 여러 상업 영화의 흥행 공식을 모두 모았다. '말아톤'과 '허브'를 잇는 사랑스런 장애인 캐릭터, 부재하는 가족, 부성애, 우정, 최후의 승리, 소박한 낙관주의 같은 것들. '장애인 영화'라고 불리워도 좋을 이러한 새로운 장르의 등장은, 장애인의 험난한 세상살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도 동시에 가족애와 휴머니즘이 꽃 피던 전근대적인 인간 관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관객의 환타지를 차고 넘치게 만족시킨다.”

 

대부분 맞는 말이다. 때문에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는 나로선 더 이상 이 영화에 대한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처지 때문인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대목, 다름 아닌, 영화를 보는 동안 즐겁지만 마음이 아픈 대목이 있다. 문제는 과연 이 아픈 대목을 어느 정도 의제화 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이유인 즉, 이 영화는 장애인권영화가 아니라 대중영화이기 때문이고, 단지 ‘장애아동’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심승보는 “장애인, 당신들이 사회에 적응해라?”(씨네 21, 562호)라는 글에서 ‘장애라는 소재만을 이용했지, 현실은 눈감았다’고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는데 내용을 보자.

 

“영화는 아무런 사회적 능력이 없는 장애아동을 둔 가정을 묘사하면서도 어떠한 대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동구가 오직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된다는 소망만을 가지고 있을 뿐 그 뒤의 삶에는 전혀 대비하는 모습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지능이 낮은 장애인들이라 해도 고도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한 일이나 행위는 반복적인 학습을 통하면 어느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나 장애인 부모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11살인 동구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주전자 당번과 학교에 다녀오는 것 외에는 없다. 화장실 볼일까지 아버지가 일일이 지시해주어야 하고, 학교수업은 단 0.1%도 이해하지 못하는 등 배움의 능력은 전혀 없는 아이로 묘사돤다... 결국 이 영화는... 비장애인의 관점에 서서 사회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장애인들이 문제가 있는 존재이니 피나는 노력을 하든, 대충 살든 너희가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심승보씨의 비판은 영화의 의도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비장애인의 관점에 섰다’고 하지만, 정작 이 영화는 ‘장애-비장애’의 관점으로 접근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비평에 있어 감독의 의도를 충실히 따를 필요가 없고, 자신만의 관점을 세워 비평할 순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적어도 영화 주제에 대한 이해는 기본일 듯한데, 심승보씨의 비판에는 이 대목을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심승보씨의 비판을 쉽사리 지나치기 어려운 ‘대목’은 이 영화가 ‘장애아동’을 소재로 다루고 있고, 이를 일반 대중들이 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때문에 나는 지난 <허브>와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을 비평하면서 이와 같은 장애인 등장 영화를 비평하는 것이 꽤나 곤혹스럽고 어렵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대중영화라는 속성 상 장애인의 현실을 ‘극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은 말 그대로 보는 이의 처지나 입장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승보씨의 비판과 앞서 인용한 평론가들의 비판의 차이는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여기에서 한 가지 기준을 설정해볼 수 있다면 심영섭씨가 제기한 것처럼, “장애인(아동)의 험난한 세상살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영화 속에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가? 달리 말하자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회 통합을 위한 제도적/인식적 장치들이 영화 속에서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고, 이에 대한 감독의 시선/입장은 어떤 식으로 그려지고 있는가?’ 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대목과 관련해서는 “히딩크의 한국이름도 허동구입니다. 히딩크가 보여준 희망처럼 우리 동구도 여러분께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감독의 소박한 인터뷰처럼, 말 그대로 소박하였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즉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회 통합적 차원에서 생각해볼만 한 대목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윤찬-동구의 관계 양상은 이를 말해준다고도 할 수 있지 않는가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 역시 ‘소박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일반 대중들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윤찬-동구’의 관계 양상을 보고 ‘장애인의 험난한 세상살이를 보며 영화를 보는 내(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저 일상의 동구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 웃기고 살짝 감동을 주는 것 뿐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하여 이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고 하여 감독을 비난할 수 있는 사안은, 결코 아니다. 다만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맨발의 기봉이>나 <허브>보다는 현실적으로 그리지만, 정작 장애인(가족)의 현실 문제를 함께 고민해볼 만한 내용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기에 웃고 있어도 맘 놓고 웃지 못하는, 아픈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더하는 말) 2008년 4월 11일부로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이 시행되었다. 그러니까 동구 아버지는 특수학교로 전학가라고 요구하는 교사와 교장을 이 법에 의거하여 고소를 하면 승소할 것이니, 다음에는 무릎 꿇고 빌지 말고 장애인부모 단체를 찾아 도움을 구하거나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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