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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에 대해 - 사건의 공정한 이해

 

‘책임’에 대해 - 사건의 공정한 이해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발달장애학생이 체육시간에 운동장을 돌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학교/체육교사 측 말로는 장애학생에게 뛸 것인지 말 것이지 물으니, 학생이 뛰겠다고 하여 뛰도록 하였고, 운동장을 약 네 바퀴 정도 돌고난 후, 학생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한다. 응급조치를 하고 119를 불러 병원에 후송하는 과정에 학생의 심장이 멎었다고 한다.


문제는, 아이의 심장이 원래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부모는 입학하면서 이 사실을 특수학급 교사에게 알렸고, 체육교사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체육교사는 아이에게 뛸 것인가를 물어보았고, 아이는 제 심장이 고장 나서 멈출 때까지, 뛰었던 것이다. (영화 <말아톤>에서 발달장애인인 초원이의 마라톤 감독이었던 형욱이 사우나를 하러 가면서 ‘운동장 40바퀴 뛰어’ 라고 농담으로 말했지만, 거의 기다시피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뛰었던 장면과 겹친다.)


여기까지 보면, 체육교사 (어느 정도 명백한) 과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 아버지는 조용히 넘어가기를 원하셨다. ① 아버지의 말인 즉, ‘교사/학교의 측의 과오가 심각하다면 책임을 물을 수 있으나, 장애학생을 돌보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생각되기에, 이 문제로 더 이상 시끄럽게 하기는 싫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의 장례식까지 치룬 이후, 아이와 함께 특수학급에 다니는 장애학생의 부모님들이 ‘특수교사의 자질’ 문제를 제기하면서 ‘특수교사-어머님(들)’의 갈등 관계가 부각되었다. 그래서 ② 어머니들은 특수교사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장애학생을 대하는 특수교사의 관심이나 태도가 미흡한 만큼, 학교 측에 개선방안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③ ‘특수학급 교사와 부모와의 간담회를 매달 실시한다. 장애학생의 교육 과정에서 부모와 수시로 협의한다’ 는 내용으로 학교(교장/교감) 측과 학부모들은 협의하였고,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여기까지 보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실제 이런 일은 빈번하게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대부분 사건 전개 과정과 결과는 이와 같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내보인 태도에서는 ‘책임’이나 ‘공정한 태도’와 관련하여, 우리가 생각해봄직한 대목들이 적지 않다. 하나하나 챙겨보도록 하자.


① 아이의 아버지 : ‘이 일로 더 이상 시끄럽게 하기 싫다’


아버지의 이 말 앞에서, 이른바 ‘장애운동가’인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 아프시겠지만, 이 일을 계기로 장애학생의 건강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절차를 구비할 수 있도록, 교육청이나 학교에 요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당사자가 하기 싫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식으로 간단히 체념해버린 나의 태도는, 이런 사건의 재발방지에 책임이 있는 ‘운동가의 정체성’으로서는 결격이다. 또한, 이후 교육청 담당자와 만남에서도 이 사건을 계기로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기보다, 그들이 제시하는 우려(‘일선 학교에 장애학생에 대한 관리 문제를 공문으로 지시하면 교직 사회의 성격 상, 자칫 체육시간이나 현장 활동에 장애학생이 배제될 수 있다’)에 이해를 표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리고 여전히 교육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으며, 이를 방관하는 내 태도는 운동가로선 직무유기이다. 결국 나의 대처방식은 아이의 죽음이 아무런 ‘사회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 하나의 ‘사고’에 불과한 것으로 처리하도록 만들었고, 이후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재발할 수 있는 가능성에 기여하도록 하였다. 더욱 문제적인 대목은 ‘운동가’로서 나는, 내가 해서는 안 될, 사건 해결이 아닌 미봉이나 수습에 힘을 썼다는 점이다.


② 아이의 어머니 및 특수학급 어머니들 : ‘특수교사의 자질이 영 시원치가 않다.’


‘특수교사의 자질’ 운운하는 특수교사에 대한 어머니들의 원망 어린 말 앞에서, 나는 비겁하게도 ‘침묵’을 지켰다. ‘특수교사의 자질’과 관련하여 어머니들이 제기하는 근거라는 것들이 설득력 없는 것임을, 즉 어느 특수학급에서나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점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어머니들의 주장은 지금 이 상황 앞에서 ‘희생양’을 만들고 싶어 하는 감정의 산물임을 파악하였다. 그러나 ‘교사 편을 든다’는 오해가 싫었고 갈등을 피하고 싶었기에, ‘침묵’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특수교사의 ‘책임’을 묻기에는 타당하진 않다. 물론 도의적 차원의 책임이야 이야기할 순 있다. 그러나 이는 나를 비롯하여 어머니들이 거론할 성질이 아니다. 결국 ‘법적’ 책임의 문제가 남는데, 특수교사는 아이의 심장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양호 및 체육교사에게 알렸다. 따라서 직무유기/업무상 과실로 볼 수 있는 대목은 없다. 굳이 법적 문제를 제기한다면 체육교사가 일정 부분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의 부모님은 체육교사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설득력 없는 근거로 특수교사의 자질/책임 문제를 제기하였다. 때문에 특수교사로서는 어느 의미에서 퍽 억울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는 사건을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미봉이나 수습에 방점을 두면서, 해당 특수교사에게 매우 적절치 못한 행위를 할 뻔하였다. 나는 부모들 중 한 분과 통화를 하면서, 학교에 방문하여 교장/특수교사와 면담을 하고 그 이의 ‘자질(책임)’ 문제를 거론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통화 이후에,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특수교사에게 ‘내일 부모들과 면담 할 텐데, 가급적 갈등을 피하는 방향(부모들이 자질 문제를 제기해도, 동의하기는 어려워도 침묵으로 대처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이었으면 좋겠다. 감정끼리 대립하다보면 이 사건은 법적으로 넘어갈 것이다’는 요지로 전화를 걸려고 하였다.


나의 태도가 문제적이었던 것은, 내가 특수교사에서 이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오지랖’이었고, 그것도  부적절한 것이었다. ‘감정 충돌’이라고 하지만, 교사의 ‘감정’은 억울한 처지에 내몰린 사람이 정당하게 항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 부모들의 ‘감정’은 (아이 죽음에 따른 슬픔은 이 상황에서는 차치해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 구분되지 않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거칠게 말해서 근거 없는 마녀사냥식의 한풀이였다. 따라서 이를 단순하게 ‘감정 대립/충돌’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를 ‘감정 대립/충돌’이라는 싸잡아 버렸고, 오히려 피해자에게 ‘침묵’을 요구하려 들었다. (지난날 계두인 사태 당시, 내 처신을 떠올리게 한다) ‘당신이 참는다면, 체육교사가 무사할 것이다’는 이유로 말이다.


내가, 체육교사의 신변 문제에 대해 관심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사건의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고자 한다면, 공정한 태도를 취하고자 한다면, 특수교사 자질 문제를 제기하는 어머니들의 주장이 적절치 않음을 말해야 했다. 혹은 어머니들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은, 최소한 밝혀야 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들의 주장 앞에서 ‘비겁한 침묵’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피해자’ 입장에 서 있는 특수교사에게는 ‘침묵’하는 게 아니라, 전화를 걸어 특수교사에게 ‘침묵’을 제안하려 들었다. 결국, 나는 피해자에게 또 다른 한 명의 가해자가 될 뻔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가 취해야만 하는 태도는 학교와 부모들의 면담 전, 장애학생의 어머니들과 갈등을 빚는다 해도 내 입장을 정직하게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특수교사에게는 전화를 걸어 내 입장을 밝힐 이유도 없거니와 상황 설명을 할 필요도 없다. ‘당신(특수교사)이 나서서 사건의 원인 규명 및 책임 여부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는 아이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3자였고 나 역시 3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특수교사)은 억울하지도 않냐? 부모들이 말도 안 되는 근거로 특수교사 자질 운운하는데, 교사로서 자긍심도 없느냐? 어머니들에게 강력하게 문제제기하라’고 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비겁한 태도다. 어머니들의 부당한 주장 앞에서는 침묵한 채, 이른바 뒷담화를 즐기면서 서로 싸움을 붙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진정 내가 ‘사건의 원인 규명 및 책임 여부’를 묻고자 하였다면, 피해자인 부모를 어떻게라도 설득해야 했다. 이것이 ‘실패’하여 어머니들이 ‘특수교사 자질’ 및 ‘책임’ 문제까지 제기한다고 해도, ‘어머니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특수학급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따라서 이를 두고 특수교사 자질 문제로 볼 순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야 했다. 특수교사 편에 서서, 굳이 저런 말을 할 이유 따위는 없다. 공정성을 해치는 행위는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공정성을 기하는 행위 또한 아닐 때, 이런 경우에는 ‘침묵’이 현명한 처신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공정성과는 거리가 먼 비겁한 ‘침묵’으로 이 사건을 대했다. 게다가 나는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부적절한 처신을 취했다. 그리고 이는 나만이 아니라, 학교 관리자나 교육청도 마찬가지였다.


③ 아이가 다녔던 중학교의 교장/교감 : ‘특수교사에게 이야기를 해서, 앞으로 잘 하도록 지도하겠습니다.’


사건이 일단락된 후, 학부모들은 ‘특수교사의 자질’ 문제를 거론하면서 학교에 항의 방문하였다. 여기에서 교장/교감은 ‘특수교사에게 이야기를 해서, 앞으로 특수학급 아이들을 더욱 잘 돌보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고, 구체적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부모와 교사 간에 간담회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표면적으로 보면 잘 처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특수교사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질 문제를 제기하는 부모들의 주장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볼 기회조차 배제당한 채, 졸지에 ‘특수교사의 자질이 미비한’ 이로서 평가/매도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자리의 교장이나 교감 역시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학부모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함께 검토(특수교사 자질과 제기하는 문제들이 상관성 여부에 대한)하는 태도, 즉 사건의 원인을 제시하고 책임을 규명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사태 무마를 위해 무조건/표면적적으로 부모들의 문제제기를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좀 더 용기 있고 공평하고자 하였다면, 부모들에게 사과를 할 지언정 이 사건에 대해 특수교사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체육교사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지 아니었을까? 물론 학부모와 특수교사와 1달에 1번씩 간담회 하는 결과가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런 결과가 나온 맥락/과정을 두고 볼 때는 내가 범한 과오를 똑같이 저지르고 있고, 때문에 동의할 순 없는 것이다. 이는 교육청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역시 특수교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결국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장애학생의 죽음을 둘러싸고 학부모들과 교장/교육청, 그리고 나의 ‘태도’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모두들 하나 같이 사건에 대한 공정한 이해나 원인 및 책임 규명과는 거리가 먼, 심리적인 판단으로 해당 상황을 정의하려 들었다. 또한, 교장/교육청 및 나의 경우에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사건을 수습하거나 미봉하는 것에만 관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장애학생의 죽음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특수교사의 경우 부모들 간의 신뢰는 고사하고, 오히려 ‘불신의 싹’을 뿌린 모습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된 것이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나, 제법 기여한 것은 부정할 순 없다. 장애운동가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남은 과제는, 이런 사건 앞에 ‘공정한 시선’을 견지하는 일과 예의 공정성을 기반으로 하여 정직하고 용기 있게 사건의 이해 당사자들과 마주하는 일이다. 적어도 이와 같이 알고 행할 때, 나는 장애운동가로서 정체성을 확보/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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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인권' 은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할까?

경북 봉화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70살 가까운 할머니가 있다. 그 할머니는 50살 전후 정신지체장애인 남성과 함께 산다. 그 남자가 15살 전후로 살았다 하니, 약 30년 전후 가까이 산 것이다. 할머니 집에서 그 남자는 자기 방에서 혼자 생활한다. 할머니는 그 남자에게 자질구레한 일을 시킨다고 한다. 어느날, 그 남자의 동생이 나타나 형을 모시겠다고 했다. 할머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 남성이 떠나기 전날, 할머니는 그 남성 명의로 되어 있는 통장 안에 들어가 있는 돈 1천만원을 인출해서 자기가 가졌다. 말인 즉, '지난 30년 시간 동안 먹여주고 재워준 값'이라는 것이다. 동생은 형의 통장에서 1천만원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할머니에게 전부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할머니도 '만약 자기가 돌봐주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죽었을 것이다'고 주장하며, 그 돈은 지금까지 자신이 수고한 값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동생은 1천만을 받으면 자기 집 근처에서 전세를 얻어 형을 모시겠다고 했다. 현재 형은 '기초생활수급권자'로서 매달 정부로부터 약 40만원 정도의 돈이 나온다. 동생은 끝내 할머니가 돈을 주지 않으면 고소할 것이라고 했다.


이상이, 경북 봉화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동생은 연구소에 도움을 청했고, 연구소는 현장 조사 결과 위의 사실들을 확인하였다. 이런 일은 대체로 '장애인 인권 침해 사례'로 분류된다. 그런데 구도(할머니-가해자, 형,동생-피해자)를 이렇게 간단하게 세우기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동생의 말을 들어보자.


"형이 평생 남의 농사를 했는데, 월급은 커녕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고 지금은 몸에 상해를 입원 병원에 입원하였다. 우리들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는 바람에 삼형제가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비장애인 형제들은 성인이 되어 고아원을 나왔지만, 형은 지적장애1급이라 갈 곳이 없어 십대 중반에 고아원 원장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일을 하러갔다. 그러다 농장이 문을 닫자 형은 경남 청도에 있는 원장의 형네 집에 보내져 농사를 지으면 살게 될 것이다. 고아원 퇴소 이후 형과 소식이 끊겼다고 최근 연락이 닿아 형을 찾아갔는데 사는 꼴이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었다. 옷과 방에선 악취가 진동했고 반찬은 삭아빠진 김치가 전부였으며, 부뚜막 옆 처마 밑에서 형이 쭈그리고 밥을 먹고 있었다."


동생은 형을 그 곳에서 데리고 나와 병원에 입원시켰고 형은 현재 중이염, 심장 신부전증, 팔다리와 허리 통증에 대한 진단을 받았다. 동생은 "형이 그 동안 일한 댓가를 받아내, 내가 사는 근처에 전세를 얻어 돌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할머니의 말인 즉,


"동생이 그 동안 형 얼굴 보겠다고 드나들었는 줄 알어? 십수년 전에 한 번 와서 김씨를 데리고 갔다가 며칠도 안 돼서 못 보겠다고 다시 데려다 놨어. 그 뒤로는 연락처까지 바꾸고 소식을 끊는 통에 내가 전화도 못했다니까.... 동생도 못 보겠다고 여기다 떠넘기고 갔어. 그런데 얼마 전에 불숙 찾아와서 김씨를 데리고 가서 내보고 돈을 내놓으라는거야. 내가 여태껏 치다꺼리 하는데 내 돈 들여가면서 했는데... " 라고 주장한다. 현재 할머니가 빼간 돈 1천만원은 약 2년 동안의 생계비인데 이전 생계비는 통장에는 따로 기록이 없는 상태이다.


즉, 할머니는 지적장애인을 돌봐준 댓가로 (형의 돈을) 가져간 것이고, 동생은 오히려 지금까지 형에게 일을 시킨 댓가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동생은 형의 돈을 다시 내놓으라고 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형'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이 문제는 간단치 않다.


동생 말처럼 형을 자신의 집 근처에 모신다고 상상해보자. 지적장애가 있을 뿐더러 도시 생활을 전혀 해보지 않은 형으로선 먹는 것도 그렇거니와 일상 생활 자체가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동생이 형의 일상생활을 지도하고 교육한다면 모를까, 지금까지 형이 해 온 방식대로 생활한다면 동생이 형을 처음 목격했을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게다가 동생 댁이 사는 것도 팍팍하다고 했던 바, 형에게 신경쓸 수 있는 계제가 충분치 않으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형은 집에 처박혀서 텔레비젼 보고 살아가는 게 전부일 개연성이 높다.


그런데, 과연 이 형은 이런 삶이 행복할까?


다음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경우이다. 현재에도 형은 정신요양병원에 있다. 지병이 있기 때문에 요양병원에 들어갈 개연성이 가장 크다.  병원 생활은 말 그대로 시설 생활이다. 정해진 일과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니 먹는 것과 자는 것은 해결된다. 아니 적어도 청도 마을에 있을때보다는 좀 더 깨끗하고 좀 더 맛난 음식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동생이 형을 들본다는 것(형을 모시고 살겠다는 게 아니라, 집 근처에 형의 집을 전세로 얻어 형을 돌보겠다는 것이다)보다는 좀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이 형은 이런 생활의 삶이 행복할까?


지금 나는 형을 그 할머니에게 보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형은 동생과 살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며 할머니와 함께 살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다만 장애인 '인권'을 보장한다고 할 때,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하는가 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시설 생활이 인간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하는 것인지는 그 곳에서 경험해본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공감한다. 물론 모든 시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고, 모든 시설 생활인들도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생활하는 시설 생활인들의 삶의 모습이 다수며, 형의 삶도 이런 전철을 밟을 개연성이 크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비록 사람들에게 놀림 당하고 해꼬지를 당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사회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게 좀 더 나은 삶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물론,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 대다수가 삶에 대한 생산성을 스스로 개척/마련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형과 같은 모습과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살아가는 장소가 형은 시설이고, 나는 바깥 사회라는 점만이 차이가 날 뿐.


요는 장애인 인권 확보를 위해 운동을 한다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런 사건 앞에 유념해야 할 태도가 무엇일까 라는 점이다. 적어도 동생 요청으로 형의 '돈'만을 받아주는, 그런 모습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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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생 폭행 사건 앞에서, 드는, 단상1

사실만을 적시하자면 이렇다.

지적 장애 학생이 학교에 다녀왔는데, 머리에 ‘무엇인가 뾰족한 것으로 콕콕 찌른 듯한’ 상처가 났었다. 아이 어머니는 장애 학생의 담임을 의심했다. 담임은 이전에도 다른 장애 학생을 때린 적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학교 어머님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 어머니는 언론 매체에 이 사실을 알렸고, 공론화가 되었다. 그리고 사건 이후, 아이의 어머니와 학부모회장 등은 해당 교사를 경찰에 폭행죄로 고소하였다. 아이를 폭행했다는 ‘실질적 증거’는 없었다. 교사가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에 대해, 맞은 장애 학생은 자신을 때린 사람이 교사라고 지시하기도 했으나, 경찰에서는 ‘이것만으로 범죄를 입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였다. 경찰은 다른 참고인, 교사에게 이전에 맞았던 장애 학부모를 만나고자 했으나, 이 조차 여의치 않았다. 결국 조사는 지지부진했고, 해당 고소 건은 아직까지도 조사 중인 상태이다.

동암학교 학부모들은 해당 경찰서 앞에 가서 수사 촉구를 위한 집회를 하기도 하였으나, 증거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이처럼 시간이 길어지자, 학교의 게시판에는 아이의 담임을 성토하는 부모들의 글이 이어졌다. 그 글의 대다수는 교사가 이 아이를 때렸다는 확신을 담은 것들이었고 교사를 비난, 성토하는 글들이었다. 그리고 부산시 교육청 앞에서 집회를 하여 해당 교사의 징계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사태가 갈수록 악화되자, 학교는 교사에게 사표를 권고했다. 사건 이후, 약 3개월이 지난 후, 결국 교사는 사표를 제출했고, 학교가 수리하여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사표 제출 이후, 교사는 변호사를 선임하여 자신의 사표가 부당한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며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장애 아이의 어머니와 학부모회장, 운영위원장(전부 장애아동 부모들임) 세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또한, 학교 게시판에 자신의 실명을 올린 어머님들 약 30여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리하여 장애아동의 어머니들은 ‘특수학교 폭력 추방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이번 건이 아니라, 해당 교사가 지난날 폭행을 저질렀던 사례(부모들이 보았던)를 정리한 진정서를 가지고 부산시 교육청에게 해당 교사의 파면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 학생에 대한 폭행이 해당 특수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부산지역 특수학교의 문제임을 주장하면서 특수학교의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교실의 CCTV 설치와 교육청 직속으로 ‘특수학교 폭력 대책 기구’를 설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단순하지가 않다. 사건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하면서도 사건의 발단이었던 ‘학생 폭행’ 건이다.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에 지적 장애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지적 장애인의 경우, 이들에 대한 보호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학생 안전 관리 소홀’에 대한 책임이다. 이는 1차적으로 담임교사이고, 학교장이다. 따라서 이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합리적 절차’이다. 그런데 언론 매체에 해당 사실을 알리고, 교사를 고소하였다. 언급하였던 바, 이는 ‘교사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때렸으리라 짐작되는 일’이 ‘때렸다’고 둔갑되었다. 결국 이는, ‘명예훼손’의 빌미가 되었다. ‘더 이상 폭력교사를 학교 현장에 둘 수 없다’는 어머니들의 비분강개가, 오히려 어머니들의 처지를 어렵게 만들어 버린 형국이었다. 이것은 경찰 조사 준비 중이다.

두 번째로 ‘해당 교사의 파면’ 건이다. 교사를 사표를 제출했고, 수리되었다. 그러나 교사는 ‘부당한 압력’에 의해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다 주장하면서 복직을 위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18일 교육부에서 ‘교원소청심사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이것은 해당 교사의 법적 권리이다. 따라서 공적으로는 이 권리를 ‘존중’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심사위원회’에서 교사의 요구를 타당하다고 인정한다면 적어도 ‘법적’으로는, 다시 ‘교사직’에 설 수 있다. 그런데 부모들은 ‘이런 폭력교사는 학교 현장에 절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교사의 파면’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날 교사에게 자신의 아동이 맞았다고 주장하는 어머님들의 진술서를 확보하여 교육청을 제시하려 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해당 진술서는 짧게는 1년 길게는 몇 년 전의 것들이다. 여전히 ‘증거’ 능력이 미약하다. 물론 어머님들이 직접 본 것을 작성한 것임으로 징계의 대상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교사의 파면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두 번째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세 번째, 명예훼손 건이다. 경찰 조사 이후, 어떻게 결론 날지 모르나 명예훼손의 여지가 있는, 그런 글들이 있기도 하다. 다만, 현재 세 명(아이 엄마, 학부모회장, 운영위원장)의 경우 무혐의로 인해 불기소가 될 듯하다. 문제는, 30여명의 일반 어머니들이다. 만약 이들 중, 명예훼손으로 몇몇이 기소된다면, 이후 정식 재판 청구와 항소 등을 통해 벌금을 상당히 낮추기는 하겠으나, 해당 교사 ‘정신적위자료’를 제기하며 민사소송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악의 시나리오인데, 사정이 이리되면 상당히 난감해진다. 명예훼손의 경우, 항소심까지 가면 아예 ‘무죄’로 선고받을 수도 있고, 최악이라 해도 벌금 5십만원 전후로 추정된다. 문제는 기소사실을 전제로 하여 민사소송으로 갔을 경우, 그가 말하는 ‘정신적위자료’가 얼마가 될 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명예훼손으로 인한 금액보다는 많으리라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까지 된다면, 결국 명예훼손으로 기소가 되리라 예상되는 몇몇 어머님들만이 속된 말로 덤터기를 쓰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가장 바라는 것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어머님들이 경찰/검찰 조사에서 무혐의로 풀려나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되지 않고 검찰로부터 ‘기소’당했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언급한 바, 약식 기소(이른바, ‘벌금형’)라 하더라도, ‘기소’만으로도 민사소송이 가능하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특수학교 폭력 추방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에 대해서이다. 언급한 바, 현재 이 곳에서 요구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이 중, ‘해당 교사의 파면’ 건은 언급했으니 차치하자. 나머지 두 건, ‘교실 내 CCTV 설치’와 ‘부산시교육청 직속 폭력피해대책기구’ 요구 건이다. 우선, CCTV건은 차치하자. 이는 교권과 인권 문제가 함께 있는 것이기에, 매우 많은 고민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 다만 ‘... 폭력피해 대책기구’는 설치 가능하다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해당 ‘비상대책위원회’의 명칭이다. 그리고 여기에 장애운동가로서 나의 고민이 자리한다.

‘특수학교 폭력 추방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이러한 기구 이름은 특수학교 내 폭력이 어느 정도 만연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폭력을 하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라고 했을 때, 특수교사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특수교사는 장애학생을 직접 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 기구의 이름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들의 좌절감이나 배신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특수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의 장애 학생에 대한 물리적 체벌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물리적 체벌의 수준이나 정도가 곧바로 ‘폭력’이 될 수 있는지, 모든 물리적 체벌이 ‘폭력’인 것인지가 남아 있다. 한 가지 짐작하는 것은 이번 사건은 특수교사와 장애아동 부모의 신뢰 관계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될 개연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보이는’ 대목은 아니다. 따라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라고 반문하면, 답하기 어렵다.

나는 장애인권운동가이다. 장애인의 ‘인권’ 확보를 위해 ‘인권’ 침해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문제를 풀어나간다. 지적 장애 학생이 맞은 것은 ‘인권 침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몇몇 교사들의 ‘구타와 폭행’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과 같은 교사들은 더 이상 학교 현장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지난번 어린이집 장애아동 폭행 사건을 맡았을 때도 폭행을 당한 아이 어머니와 함께 경찰서와 법원을 들락거리기도 하였다.

나는, 사건을 이처럼 공론화시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지적 장애학생들의 권리와 인권을, 몇몇 불성실한 교사들로부터 보호하고 싶었다. 적어도 이렇게 공론화되고 나면, 아닌 말로 ‘두 대 때릴 것 한 대 때리고, 한 대 때릴 것 때리지 않는 것’으로 갈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 어머님들이 그런 것처럼 ‘장애아를 데리고 사는 내가 참아야지’라고 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눙치고 넘어가는 식보다는 힘들고 괴롭기도 하지만, ‘고소’가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내가) 믿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근래 들어와서는 흔들리고 있기도 하다. 이는 나중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겠다.) 물론 해당 개인에게는 미안한 정서가 적지 않다. 적어도 그는 이와 같은 일이 ‘법적 고소’를 당할 만큼 심각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개연성이 클 것이다. 이전에도 아이를 때리는 일은 종종 있었을 테고, 그것은 이른바 ‘사랑의 매’로서 언제나 용인되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법적 고소’를 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도 자신의 과오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옳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서설이 너무 길었는데, 이처럼 내 신념의 한 자락을 밝힌 것은 이번 사건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정작 내 자신이 헷갈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경찰 고소 이후부터 개입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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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방법적 차이를 인정하는 법?

 

07, 1, 25, 01:31



교육권연대 일일호프를 앞에 두고 빚어진 논란,

운동의 방법적 차이와 역할에 대한 인식



‘일일호프 해보자. 돈을 벌면 좋고, 못 번다 해도 홍보효과 있지 않겠는가’

일일호프 제안의 맥락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동의했다. ‘일이야, 박간사가 알아서 하니깐, 하면 좋지’ 정도 수준이 아니었나 싶다. 일을 추진했고, 각 단체들이 맡을 금액 등을 분담하였다. 단체 규모 등을 고려하여 차등 분배했고, 분배 금액에 대해 구성원 모두 동의했다. 목표액은 1백만원.


반론이 있었다.

‘돈 1백만원 벌려고 일일호프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차라리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각 단체 분담금을 합쳐서 돈을 내자. 그리고 일일호프 말고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일일호프라는 수단/방법을 택하여, 교육권연대를 홍보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름, 타당한 반론이다. 주장을 거칠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교육권연대의 홍보/활동 차원에서 일일호프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가능하지 않다.’ 이 논란의 핵심을 짚어보자. 


나는,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활동이든지 간에 그 활동 과정과 결과 속에서 ‘교육권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의식하는 활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 활동의 ‘원칙’이라고 한다면, ‘일일호프’라는 수단/방법이 최고나 최선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악은 아니라고, 적어도 ‘원칙’을 배반하거나 거스르는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단, 내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되어야 한다. ‘교육권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의식하는 활동’으로서 일일호프를 준비한다면, 그에 따르는 부수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교육지원법의 내용을 담은 홍보물이라든지 부산지역 부모들의 활동을 담은 영상물/소식지 등이 최소한의 준비일 수 있겠다. 이를 통해 그 자리에 온 장애 학생 부모들이 예의 ‘교육권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의식한다면’, 그런 계기가 된다면, 이를 두고, 나는 일거양득이라고 말하겠다. 비록 많은 돈을 번 것은 아니라 해도(많은 돈을 벌면, 더욱 좋겠지만), 돈도 벌고, 구성원/단체 간 결속력도 강화시켰으니 말이다. 만약 이런 준비 없이, 여느 시민사회 단체들이 하는 것처럼, ‘하루 술 먹고 노는 마는’ 식이라면, 이것은 아니 하는 것이 옳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성원 간 결속력을 높이기는 커녕, 서로에 대한 실망만을 가득 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기실 어떤 단체이든지 간에 이러한 행사를 준비하면서 서로에 대한 존경과 관계의 깊이를 확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서로 실망하면서 행사를 준비하고 소모적으로 치루어낸다. 우리 또한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내가 교육권연대의 홍보/활동 차원에서 일일호프를 하자고 주장한다면, 적어도 저 정도의 준비는 해야 한다. 그것이 내 책임이고, 의무이다. 만약, 해당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면, 다시 말해 교육권연대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로서 일일 호프를 활용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내 역량 부족이고, 기획 실패이다.


반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 있다. 일일호프보다는 다른 활동 방안/수단을 통해, 교육권연대 활동 홍보를 하자는 것이다. 일일호프를 교육권연대 활동의 근본/원칙에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선 여기에서 나는 해당 ‘근본/원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말을 길게 하기 어렵다. 다만, 교육권연대의 활동 ‘근본/원칙’에는 해당 일일호프가 ‘그르기 때문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며,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 나로서는 예의 선택을 ‘존중’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내가 취해야 할 처신이 있다면, 최대한 깔끔하게 방법적 이견을 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번 한 번 서로 방법적 이견이 다르다고 해서 이후에도 함께 하지 않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들 대다수는 ‘좋은 게 좋다’ 식의 미봉적 선택을 취하며, 나 또한 여기에 따랐다.


‘일일호프의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후 활동을 고려하여 이번에는 분담금을 내도록 할 것이다. 다만 현재 책정된 금액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대목이 있으니, 다소 감한 금액 정도는 낼 용의가 있다’


나는 방법적 이견을 달리한 단체의 해당 제안을 ‘호의’로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방법적 이견’을 확인한 마당에 굳이 아니 내어도 될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안한 이가 언급하였던 것처럼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사실상 ‘논리적’ 차원이고 인간관계이니 만큼 ‘정서’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사실 내가 ‘호의’로 해석한 대목도 상대방에 대한 내 호의적 정서가 개입해 있다. 만약 상대방이 다른 이였다면, 나와 정서적으로 공감대 형성이 덜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거절’했을 개연성이 높다. ‘방법적 이견이 다른 마당에 굳이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다른 계기가 되면, 함께 해 보자’ 정도로 언급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 돈을 두고, 마치 우리를 ‘동정’하는 식으로 이해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래도, 상대방이 주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대부분 일반적 사람이라면 그처럼 ‘거절’을 당했다면, ‘알겠다. 그럼 그리 하시라’고 말하면서 거두어들일 것이다. ‘나는 갑갑할 것, 딱히 없다.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당신들의 처지 아닌가’ 식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연대하는 구성원으로서 방관자의 위치로 서는 것이다. 이것이 ‘정서의 작용’이며, 대부분 사람이 보이는 평균적 행위이고, 일상의 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나의 모습에서 드러나듯이 평균적인 사람들 대다수는 해당 제안을 ‘불편해 하면서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언급한 바, 우리들은 ‘깔끔하게 방법적 이견을 인정’하여 적어도 이 사안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사안을 매듭짓는 형태가 아니라, 이후 관계를 고려하여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제안을 수용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각각의 심리 동학을 엿보면 어떨까?


일단, 방법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나, 주는 입장에서는 말했듯이, ‘이후에 함께 활동을 계속 할 테니, 그래도 아예 손 놓아 버린다면, 서운함이 더욱 커지 않겠는가. 그러니 모든 금액은 우리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이고, 이 정도의 성의라도 보여주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라고 인식했을 개연성이 높다. 받는 입장에서는 깔끔하고 합리적으로 ‘받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인지도 모르나, 대부분 ‘받는다’. 물론 받으면서도 예의 호의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언급했듯이 ‘아니 받으려다가, 주는 것이니 주는 사람 입장에서 무안해할까봐 받는다’ 식의 생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또 다른 정서적 서운함을 낳기도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어렵게, 하는 것인데, 왜 이처럼 거칠게 대하는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 아닌가?’ 라는 식의. 뭐, 내가 독심술가가 아니니 이 정도로 정리하자. 다만 이와 같은 심리적 작용들이 오가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서로 아니 해야 좋을 계약이라는 것이다. 해서 서로 손해 보는 계약이라고나 할까? 서로의 욕망이나 기대를 서로 달성시킬 ‘의지’나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서로 기대하고 있으니, 어찌 관계가 파토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면 ‘돈’을 아예 아니 내는 것이 ‘타당한 처신’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사실 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호의’로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지 모른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는 사람과 정서의 공감대가 큰 사람이라면, ‘호의’로 이해하고 ‘감사함’을 표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는 사람과 정서 공감대가 크지 않은 사람이라면, 혹은 얼마간 정서적 불편함을 안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방법적 이견을 달리 한 마당(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켜 버린 사람에 대한 정서)에 그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한다 해도 ‘불편함’을 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속된 말로, ‘미운털’이 이미 박힌 상황에서 주면 주는 대로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그 사람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평균적인, 일반적인 인간관계이며,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 정도의 수준과 차원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


교육권연대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일일호프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가능하지 않다(가능하다 해도, 다른 일로서 교육권연대의 활동을 하는 것이 좀 더 낫다)는 상반된 주장을 살펴보면서, 방법적 이견이 다른 상황 앞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식의 관계 흐름이 구성되는가를 정리해보았다.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일호프이든, 찻집이든지 간에 어느 활동이든 ‘교육권연대 활동을 해야 할 필요성을 의식/환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며, 만약 이와 같이 되지 않는다면, 흔히 볼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해서 서로 상처와 불신만 쌓고 마는 것’이라면, 아니 하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오늘 회의 때, 일일호프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면서, 이 점을 먼저 환기하면서 시작하였다. 그 결과, 내가 전전긍긍했던 것과는 다소 다르게, 어느 의미에서 간단하게 ‘하지 말자’고 결론 내렸다. 일을 중심적으로 해야 할 ‘발달부모회’의 입장이었는데, 이에 대해 나는 ‘존중’한다. 전교조나 한울, 그리고 뇌병변이나 참배움터의 경우 당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반면, 발달은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하며, 따라서 발달의 선택에 따라 일일호프를 하거나 말거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면 좋고, 아니 해도 그만이다’는 전교조나 타 단체의 입장은,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취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형편이니 말이다. (여기에서 표를 파는 노동은, 일단 차치하자.) 그런데, 일에 대한 실질적 준비, 예컨대 홍보물을 비롯하여 영상물의 제작 등은, 내가 담당해야 할 몫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결국 당일 서빙 문제만이 남은 과제였다. 그처럼 간편하게 ‘과업이 부담스러우니 하지 말자’고 결론 내릴 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단, 방법적 이견을 달리하는 것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존중의 태도를 취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논의는, 내가 전전긍긍했던 것과는 다르게, 언급했듯이 퍽 간단하게 ‘하지말자’는 결론으로 끝이 났다. 이유는, 내가 제시한 우려 중의 한 가지,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 회의에서 ‘하지말자’고 결정한 우리의 판단이 틀렸다거나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로 하여금 고민을 하게 만든 것은 ‘책임과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내가 일일호프를 꼭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내가 ‘자원봉사자’를 섭외해서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그 정도의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이는 구성원 모두의 공통된 태도이기도 하였다. 즉 일일호프에 대한 매력을 크게 느끼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과 역할’ 문제는 여전히 나로 하여금 고민을 하게 만든다.


언급했듯이, ‘발달’은 타 단체들에 비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도자 단체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거나 역할을 생성하려 하기보다는, ‘왜, 우리는 이 만큼 하는데, 타 단체는 저것만 하는가’ 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는 발달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며, 어느 단체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발달이 교육권연대 내에서 이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존경과 지지의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며, 충분히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른스러우면서도 품위 있는 태도일 것이다. 문제는, 저 정도의 인식 수준으로는 하나의 조직/단체가 성장하기가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이, 이번 일련의 상황을 통과하면서 내게 들었던 생각의 한 자락이다. 발달이 ‘하지 말자’고 내린 결정의 배경에는, 저 정도의 인식 수준에서 일처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방법적 이견을 달리한 한울의 입장을 존중했듯이, 예의 발달의 입장도 존중한다. 내가 보았을 때, 두 단체의 행위 수준은, ‘일을 추진하는 합리성과 어른스러움’의 차원에서 볼 때,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두 단체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은, 지금까지 누차 언급했던 바이다. 즉 우리들의 대개 수준이 저처럼 어느 의미에서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조악한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우리가 이 사회를 좀 더 낫게 해 보기 위해 사회 운동을 하고 있으니, 어찌 우리 사회가 발전이, 품위가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너무 위악적인 진술인가??? (한 가지 환기하자면, 이런 평가는 퍽 거칠기는 하나 어떻게 하면 좀 더 낫게 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구구절절 쓸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이번 사안을 통과하면서 ‘방법적 이견을 달리하는 이들과의 소통’ 문제를, 한편으로는 ‘책임과 역할’ 문제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하였다. 아직까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떤 처신이 좀 더 어른스럽고 품위 있는가를 말이다. 만약 내가 일일호프를 ‘강행’했다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 언급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밟았을까? 아니면 최악은 피해갔을까? 글쎄, 내 능력으로 보자면, ‘최악’에 가까웠을지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이번에는, 아니 한 게 더 나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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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와 장애인 영화에 대한 단상

이 블로그를 찾는 분이 누구신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앞서, 저의 글에 어떤 분이 트랙백이라는 걸어두었기에, 잠시 그 곳에 다녀왔습니다만...

(저는 컴맹에 가까운지라...ㅠㅠ 한글 작업만 주구창창... )

 

그래서, 상당히 어색합니다. 누군가가 이 곳에 다녀가고 있다는 사실이...

 

사실, 만들 때에는 제가 쓴 글을 차곡차곡 모아놓고 싶은 바람(별로 쓴 것도 없지만서리...)도 있고, 무엇보다 '장애' 문제 '인권' 문제의 상관성과 장애인권운동의 방향이나 구체적 기획 등을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막상 만들고 나니, 하도 야릇한 느낌이 들어 지워버리려고 했는제, 지우는 방법을 찾지 못해 결국 남겨 두었음다. (지금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인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처음인지라..아마도 이런 묘한 심사에 시달리는 것이겠죠.) 그런데 하루 지난 다음 날 보니, 무려 20여분이 왔다갔다는 내용이 뜨고, '무슨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비워두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 글을 올려두었는데,

 

무려 160여분이 다녀갔다는 기록이나오더군요. (억! 소리가 났습니다.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구요...)

 

어떻든, 그래서 아직 이 블로그를 어떤 용도로 쓰는 것이 적절한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든 것이 저이니, 그냥 방치해두지 못해, 지난날 썼던 글을 하나씩 올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장애코드로 문화읽기'라는 장애문화 공동체에 제가 올린 것인데... 막상 지난 글을 올리려고 하니, 앞서 '제 글을 차곡차곡 올려두고 싶다'는 생각과 달리, '제 글을 울궈먹는다'는 생각이

들어, 이처럼 약간의 거부감이 생겨나는 듯 싶기도 합니다. ....  블로그에 대한 제 입장이 분명해지면, 덜하려나...

 

아, 어떻든, 왜 이 글을 쓰는지 여전히 묘연한 상황에서, 주절주절 거렸습니다.

 

아래는 말씀드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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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와 '장애인 영화'에 대한 단상(斷想).


이 글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생겨난 논란과 관련하여, '장애인 영화란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야 할까' 라는 물음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한 글이다. 이를 위해 <오아시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몇몇의 글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는 장애인의 현실(장애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 퍽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장애인인 공주 명의를 빌려 새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그의 오빠, 공주와 한 집에 있는데도 상관 없다는 듯이 성관계를 맺는 이웃 부부, 종두네 가족 사진 찍을 때 짐짝 부리듯이 공주의 훨체어를 옮기는 종두 형, '너 변태지, 저런 얘에게 성욕이 생기데...' 라고 말하는 경찰까지. <오아시스> 이전에도 장애인 등장 영화, 예컨대 <고양이를 부탁해> <안녕 유에프오> 등을 보면 장애인과 관계 맺는 비장애인의 모습이 드러나긴 했으나, 이처럼 선명한 방식으로 나타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장애 여성의 현실/삶을 다루지 않았다'는 식의 적지 않은 비난을 몇몇의 비/장애 여성들로부터 거세게 받았다. 가령 장애여성 <공감>이란 단체 구성원인 박주희씨는 '오아시스는 없다'는 글에서 "강간은 사랑이 아니"며 "감독의 상상처럼., 장애 여성은 비장애여성이 되길 염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해야 할 일이라면, 장애 여성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의사 표현을 한다"고 주장하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장애여성"으로 그려 두었다 비판했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보여주지 않는 것에 관하여'의 홍성희씨는 "종두와 달리 공주에 있어서는 환상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으며,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의 현실적인 삶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 즉 "진짜 장애여성으로서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반면 류미례 감독은 '정상화의 관점에서 본 영화 <오아시스>의 소중함' 이란 글에서 <오아시스>는 기존 장애인 등장 영화와 달리 장애인을 특별하게 다루지 않는, '장애 문제에 관한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라는, 그들과 더러 상반된 주장을 했다. <오아시스>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다르지 않다'고 습관/상투적으로 읊조리는 비장애인들로 하여금 '진정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가' 라고 두 시간 내내 묻고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주장은 제 나름의 일리가 있는 듯 하나, 꼼꼼히 따져보면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우선 류미례 감독의 경우, <오아시스>가 '장애 문제에 관한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라 주장하는데, '계몽 영화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남아 있다. 만약 영화에서 등장하는 비장애인들의 일방적인 태도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계몽 영화'라 한다면, 비장애인들의 태도를 '사실적'으로 그리기만 한다면 그것이 곧 '계몽 영화'가 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언급한 다른 장애인 등장 영화와 <오아시스>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의 물음 등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류미례 감독처럼 '내가 장애인을 평소 어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적 태도를 취할 것인가도 남아 있다. 나로선, 이 대목에 대해 회의적이다. 우리들 대개는 어떤 영화를 볼 때,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읽고자 하는지 의식하기 보다 영화 소비자로서 등장 인물들의 행위가 '좋았다/나빴다'는 식의 정서적 반응/인상만이 남을 가능성이 크다 생각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해 자신의 삶의 태도와 무관하게, (타자의 부정적인 모습에선)'나를 예외로 한다' 할까. 그런 점에서 <오아시스>는 장애 문제에 대한 '계몽의 가능성이 있는 영화'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를 만든 목적이 '장애인의 현실이니 장애 문제니 등을 다루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장애/인 문제'는 부차적이었거나, 거칠게 말해 고려/계몽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라는 류미례 감독의 비평은 감독의 의도/목적에 바탕해서 글을 썼다기보다 장애 운동이란 차원에서 정리한 것이라 짐작된다. '장애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박주희씨나 홍성희씨의 비판도 이창동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관심하기 보다, 얼핏 보면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장애여성이 등장하는 영화 <오아시스>가 낳을 수 있는 부정적 효과에 주목한 바가 아닐까 싶다. 다만 류미례 감독이 생각한 것과 달리 이들은 대개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장애인을 어찌 생각하는가'에 대해 성찰적 태도를 취하기 보다 '장애 여성은 사랑하는 사람이 억울하게 잡혀가도 말도 못하는 사람이다'는 식으로 오해/이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주목하여 비판한다.

하지만 박주희씨가 '장애 여성이(의 관점에서) <오아시스>를 읽었다'는 대목은 앞서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 라는 것 만큼이나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장애 여성의 관점에서 읽는 것과 비장애 여성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 어떤 차이가 나는가, 장애 여성이라 할 때,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 할 수 있는가' 등의 물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오늘날 장애 여성의 현실/삶을 그려내지 못했다'는 비판은 <오아시스>라는 영화의 목적과는 다소 거리가 있고, 그래서 비판의 초점이 모호하다. 그럼에도 이 같은 논란은 장애/인 문제와 관련한 담론의 빈약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어떤 매체에 등장하거나 다루어지는 장애/인 문제에 대해 장애인 당사자의 시선으로 읽고 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보는 것은, 비록 그것이 작품 목적/의도와 거리가 있다 해도 장애/인 문제를 다시 환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장애인의 현실에선 말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대목이 있다면 이 같은 논란이 생기게 된 '그렇다면 장애인/여성 영화란 무엇인가. 장애인/여성 영화는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 내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산적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난날 <오아시스> 논란은 저 정도 수준에서 그친 채, 끝나고 말았다. 여기에서 그 까닭을 해명하는 것은 나로선 무리인 바, 다만 이 논란을 통해 마련된 '장애/인 영화는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야 할까'에 대한 물음과 관련하여 내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영화 <여섯 개의 시선> 중 여균동 감독의 <대륙횡단>을 보면 장애인의 외출 장면이 등장한다. 대개 가족과 함께 외출하던 주인공 김문주. 어느 날 그는 혼자 외출해 보리라 마음을 먹고 목발에 의지한 채 나오는 중, 아파트 문을 잠구다가 키를 땅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그런데 지나가던 위층 아주머니 왈, '아이구,,, 문주 어디 나갔다 오는가 보네.. 엄마는? 열쇠 떨어뜨렸네.. 자 내가 열어줄께... 집에 들어가서 엄마 기다리고 있어...' 라고 말하며 바깥으로 나오려던 그 이를 되려 집 안으로 밀어 넣고 만다. 아주머니로선 '호의/선의'를 베푼 것이었지만 김문주로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장면, 즉 비장애인의 호의나 무관심이 장애인에겐 난감한 일로 다가가는 일이 장애인의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대다수 비장애인들은 이런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호의가 예의 장애인에게 '고마운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소박한 (그러나 장애인 입장에선, 때론 폭력적인) 바람말곤 없다는 것이다. 마치 <오아시스>에서 강간 혐의로 종두가 잡혀나가던 순간, 경찰서에서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한 분노와 자책, 그리고 자괴감 등이 폭발하여 캐비넷에 머리를 박치기 하던 공주에게 '아가씨... 모두 끝났어요... 이제 안심해요' 라고 말하던 올케의 모습처럼 말이다. 여기에서 나는 비장애인의 호의가 장애인에겐 어떤 식으로 엇나가거나 뒤틀리는지에 대한 관계 맺기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장면들이 담겨 있다면, 그것을 일러 '장애인 영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와 유사한 상황을 저지르곤 하는 비장애인들이 그런 엇갈림의 장면/영화를 보았다면, 그나마 장애인을 달리 대할 수 있는 가능성, 류미례 감독의 표현을 빌자면 '계몽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쓰고 나니, 중언부언한 듯 하다. 이 글에서 나는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오간 비판들을 통해 장애인 영화는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야 할까 하는 물음에 대해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관계 맺는 방식, 그 중에서 특히 비장애인의 호의가 장애인의 실제 삶에 어떤 식의 부정적/긍정적 영향을 미치는가를 관객들이 보고 헤아릴 수 있을 때, '장애인 영화'일 수 있음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았다. 물론 이는 매우 기본적인 수준의 답변이고 이후로도 이 물음은 지속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풍성한 논의가 따라야 할 것이다. 하기에 '장애 운동'을 한다는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란 장애 차별의 현실을 구체적 영상에 담아낼 수 있도록 좀 더 섬세하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 맺기 방식에 대해 관찰/성찰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의 삶이 곧 운동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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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비장애인 논란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들...

지난 8월달에, 대한항공에서 지적(정신지체, 발달, 정신 등) 장애인 탑승 거부 사건이 있었죠.

 

오늘(28일) 위드뉴스를 보니깐, 국가인권위 진정을 받아들여 '철회'하겠다고 했다고 나오던데요.

 

그런데, 당시 이 사건이 촉발이 되어, 인터넷 다음에서 꽤나 논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반응을 나름대로 분석해서 보고 있는데, '장애인-비장애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분들이 적지 않더군요. 그러다가 지난 6월 즈음에 다음 아고라에서 '장애인-비장애인' 논란이 있었더군요.

저도 '장애 운동가'랍시고 '비장애인'이라는 말을 썼는데, '왜 일반인/정상인을 일러, 비장애인이라고 해야 하느냐' 라는 문제제기는, 타당성 여부를 떠나 검토할 필요는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헤아려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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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비장애인’ 논란을 지켜보며
드는, 몇 가지의 생각들. .


‘장애인’이라는 용어는 1981년 제정된 심신장애자복지법이 1990년에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정될 때, 당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장애자의 ‘자(者)’라는 글자가 ‘놈 자’라 하여 인격을 비하하고 일본식 표기이므로, 이를 ‘사람 인(人)’자로 바꾸어주라고 요구함으로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공식적인 법적 용어로 자리 잡았고, 다수 사람들은 ‘병신’이나 ‘불구자’, ‘비정상인’이 아닌 ‘장애인’으로 호명했다. 물론 ‘장애인’이라는 용어 역시 임의적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존재 규정의 측면에서 볼 때, 진일보했다 할 것이다. 이는 지난날 ‘장애를 가진 사람’을 규정했던 용어와 대비해서 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장애인’을 일컬었던 단어를 나열해보자면, ‘병신, 불구, 폐질자, 앉은뱅이, 절름발이, 절뚝박이, 반신불수, 찐따, 쩔뚝이, 난쟁이, 곰배팔이, 외다리, 외발이, 외팔이, 장님, 맹자, 소경, 봉사, 애꾸, 외눈박이, 벙어리, 아자, 귀머거리, 백치, 정신박약아, 정박아, 미치광이, 정신병자, 미친 사람, 조막손, 육손이, 곱추, 꼽추, 곱사등이, 문둥이, 나병환자’ 등 정신/신체적 결손에만 주목한 호명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단어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장애를 가진 존재’에 대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범위 내에서 저와 같은 부정적 용어는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몇 년 전부터 이른바 진보적인 언론 매체를 중심으로 ‘정상-비정상’의 구도를 탈피하고, ‘장애’를 기준으로 ‘장애인-비장애인’이라는 구도로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소수자였던 장애인이 다수자를 규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비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제기되자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일련의 사람들이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동의/공감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곧잘 제시한다. 내용인 즉, 비장애인은 ‘장애’를 기준으로 제시된 용어이고, ‘비(非)’라는 용어가 대체로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일반인’ 혹은 신체/지적 기능에 있어 ‘장애’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여 ‘정상인’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장애인의 반대어/개념은 비장애인이 아니라 일반인 혹은 정상인이라는 것이다. 이들 주장을 호의적으로 해석하자면, 장애가 없는 자신들을 정의하는데 있어 ‘장애가 없는 상태’에 주목해야지, ‘장애가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정의/언어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장애인과 대비되는 차원이 아니라, 본래적 속성에 주목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이란 인터넷 싸이트에는 ‘아고라’ 라고 불리는 게시판이 있다. 장애인-비장애인 논쟁은 이 게시판에서 일어난 일이다. ‘민아’라는 아이디를 쓰는 어느 (여)학생이 “‘비장애인’이란 말 쓰라고 강요하지 마세요”라는 글에서 촉발되었는데, 내용인 즉, 장애인 행사(이 말도 쓰고 나니, 이상하다.)에 자원 봉사하러 갔는데, 인사말을 하던 중 ‘저희 같은 정상인.... 어쩌구 저쩌구’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장애인이 인상을 쓰면서 ‘정상인은 잘못된 말이다. 비장애인이 맞는 말이다’ 라고 하여 ‘과연, 그런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장애인이 하라는 대로 했다고 한다.)

‘민아’라는 이의 주장은 ‘정상인/일반인을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 제시하는 두 가지의 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신체적/정신적 기능이 정상적인 사람들은 ‘정상인’ 또는 ‘일반인’이고, 신체적/정신적 기능에 ‘장애’가 있는 비정상인 사람들은 ‘장애인’이다. 띠라서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 또는 ‘일반인’이다. 그러므로 ‘정상인/일반인’을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② 그리고 장애인을 염두에 두어 배려의 차원에서 비장애인으로 부르거나 혹은 장애인이 일반인을 일러 비장애인이라고 부르기를 원한다고 해서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동정이다 (따라서,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장애인을 동정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①번의 근거는 이후 점검하기로 하고, ②번의 근거는 실제 많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내용이다. 인용문을 보자

“민아님, 당신처럼 정상인과 장애인과 벽을 두는 우리 정상인을 때문에, 그들의 살 권리, 살아갈 용기를 잃는 장애인을 위한 최대의 배려입니다.. 그래도 님아..정상인이라는 말을 굳이 써야겠습니까?” (떠나자, 민아님!! 답변해 주세요) “비장애인이라는 말은 장애인에 대한 자그마한 배려라고 생각하면 좋을듯 싶습니다.”(제트, 말에는 어감이라는게 있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는 호칭사용이 필요한 것입니다. 장애인들은... 자신의 몸이 남들보다 약하다는 이유 때문에 열등감과 소외감을 느끼는 정도가 매우 심하다는거죠. 이러한 장애인들의 특성을 이 글쓴 님처럼 비장애인이라는 단어가 국어문법상으로 잘못된 말이고 장애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며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장애인들은 육체의 결함과 함께 정신적 결함도 함께 가지고 있으므로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 이다라는 말은 통용이 안되는 거죠?”(문경지교) “그거 한 가지만 가지고도 굳이 자연 법칙상 10%나 차지하는 신체장애(본인들이 원해서 된 것도 아닌데)를 자존심 상하게 할 거까진 없지 않아요?(ttzkldf)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은 '장애' 즉 이른바 '비정상'이 사회적 표준이 되어 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관심과 노력이 전제되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에 의해 상처받는 우리의 이웃을 조금 더 생각 했으면 합니다.”(햇빛아래)

인용한 글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주장이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배려하기 위해 쓸 수 있는/쓰는 용어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민아’들은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장애인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비장애인이라는 우월적 처지에서 장애인을, 이른바 봐준다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동정’과 ‘배려’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정상인’이라는 용어에 대한 반감 차원에서 비장애인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기도 하다.) 적어도 저 위의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진술들을 통해서는 ‘배려’와 ‘동정’에 대한 명확한 구별을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여기에서 ‘배려’와 ‘동정’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 배려 :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는 것
* 동정 :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을, 또는 그런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알아주고 마음 아파하는 것, 또는, 그런 마음으로 도와주는 것

사전적 의미 차원에서 볼 때 위의 진술들은 ‘동정’에 가깝다. ‘배려’가 실천적 의미에 가깝다면, ‘동정’은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고자 함(마음 씀씀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동정’이 나쁘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요는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비장애인이라고 부른다고 할 때, 이 호명의 조건이 장애인에 대한 배려나 동정에서 기인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그런데 마음 씀씀이와 실천이 간단하게 분리될 수 있을까? 여기에 ‘동정’과 ‘배려’를 객관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즉 누군가의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를 두고 그것은 ‘동정’이니 ‘배려’이니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한편 장애인의 입장에서 비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은 어떤 내용을 의미할까. 이는 장애여성인 김효진의 글 <장애인 관련 용어에 대한 고찰>에서 적절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사회적 약자로서 범주화되는 장애인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장애를 기준으로 한 장애인 중심의 이분법적 사고”인데, “힘 있는 다수의 의도적인 편가르기나 분리와는 달리” 사회적 약자가 자신을 정체성을 구축하고 저항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있다.

즉 사회적 약자 운동의 차원에서 장애인-비장애인 구도는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약자로서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했던 구체적 경험을 통해 제시하는 것이기에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 환자로부터 시작하여, 절름발이, 병신, 불구, 장애자, 그리고 비정상인이라는 개념 규정을 '당해왔고', 이는 장애인으로 하여금 자기 존재가 어디인가 결핍되거나 부족하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부정적인 용어들로 이루어져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렇듯 ‘장애가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장애가 없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장애’의 유무라는 일부의 차이로 인해 ‘병신’이나 ‘불구자’로 언어화 되었다. 하지만 이들 용어는 언급했듯이 장애인 스스로를 규정한 말이 아니라, ‘차이’ 나는 상황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의 사람들을 그처럼 규정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운동적 실천을 모색했고 그 결과 ‘장애인’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또한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장애를 가지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을 비장애인이라는 용어로서 규정했다.

이는 앞서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비장애인’으로 규정화한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표면적으로는 ‘비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쓰는 의도는 다르다는 말이다.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장애인에 대한 배려/동정 차원에서 스스로 비장애인으로 규정하여 ‘정상-비정상’이라는 언어 구도에서 비켜서고자 하는 반면, 장애인은 저항적 도구 차원으로 비장애인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은 각각 일견 타당한 대목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런 물음이 가능하다.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신체적/정신적 장애라는 인간 존재의 하나의 특성에 주목하여 규정화한 것이다. 그런데 비장애인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장애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짝개념으로서만 성립 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가 ‘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을까.

언급한 두 가지의 근거, ‘약자의 정체성 구축을 위한 저항적 차원으로서 쓴다’는 것과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쓴다’는 것이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두고 ‘비장애인’이라고 부를 만한, 불러야 한다 라는 주장의 필요조건은 되기 어렵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한편 이 두 가지의 주장과는 또 다르게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비장애인’으로 불러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장애 문제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해결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들의 주장은 앞서 두 가지보다 (과학적 사실에 바탕한다는 점에서) 좀 더 설득력을 지닌다. 다음 글을 보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5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장애인 숫자는 2000년의 145만 여명에서 215만 여명으로 약 70만 여명이 늘어났다. 매년 평균적으로 약 14만 여명이 증가했는데, 이 중 89%가 각종 질환이나 사고 등에 의한 후천적 요인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산업재해로 ‘장애’를 갖는 숫자가 매년 35,000여명이고, 교통사고로 임시 혹은 영구적 장애를 갖는 인원이 매년 100,000여명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노동부, 2002; 건설교통부, 2004). 게다가 이러한 사고 말고도 내외부 신체 기관의 질환 등으로 인해 장애인이 되는 비율이 전체 장애인 중, 약 52%에 이르고 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5년). 이러한 일련의 수치들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 중 어느 누구도 ‘장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해준다. 즉 ‘장애’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박용민, 2006)

이 글에 따르면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언제나 ‘장애를 가질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저항적 수단’이거나 ‘배려의 차원’보다는 (과학적 차원에서) 좀 더 설득력이 높은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과학적 사실이 있다 해도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서 장애인의 짝개념으로서 비장애인이지, 이것이 ‘일반인이 아닌 비장애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충분한 근거가 되기에는 미흡하다는 점이다. 즉, 사회적 차원에서 장애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과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일러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차원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만약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장애인이 될 노출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면, 이는 ‘비장애인’이기보다는 ‘예비/잠재적 장애인’이라고 표현/언어화하는 것이 좀 더 적절/설득력이 높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인간언어의 특징이 대상/사물 현상을 기술하고 특성을 포착하여 이론화/명제화하는 것이라고 할 때, 비장애인이라는 명제어는 장애인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진위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 정리한, 개념의 내포와 외연에 주목해보자)

정리하자면, 비장애인이라는 단어는 장애인의 짝개념으로서 쓸 수 있는 말이지, 어느 상황에서나 비장애인이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하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어떤 언어 상황 앞에서 장애인이라는 존재가 자리한다면 그 때에는 비장애인이라고 쓸 수 있고 또한 써야 한다고 (심정적으로, 혹은 과학적 이유로) 생각하지만, 장애가 없는 상황에서 비장애인이라고 쓰는 것은 얼마간 어색하다는 것 정도이다.

이 긴 글의 너무 시시한 결론 같다. 이는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장애’라는 용어의 근본적인 한계/부정성에서 기인한다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장애인-비장애인’ 구도는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또 다른 용어 정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적어도 운동적 차원의 방식으로는 썩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일 수 있을까? 어려운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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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장애운동사적 의미에 관해

이 글은, 장애인에 대한 호명 문제를 두고 '장애우'라고 부를 것이냐, 아니면 '장애인'이라고 부를 것이냐를 두고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장애운동사의 관점에서 살펴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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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장애운동사적 의미에 관하여> -



이 글은 '장애인-장애우' 논쟁이 한국 사회 장애운동사에서 어떤 의미가 함의되어 있는가를 소략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처음 의도한 것은 '장애인-장애우' 논쟁을 통해 '장애'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내 역량 부족으로 인해 논쟁 과정을 정리한 수준의 글이 되었다. 그럼에도 장애인-장애우 논쟁이 식어 가는 이 시점에 문제를 제기한 박지주씨들과 당사자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정리한 글이 없다는 점에서 이 글의 쓰임이 어느 정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 해 본다.

'장애우' 라는 용어에 관한 문제 제기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별 다른 호응을 얻지 못한 채 개인의 '불만' 정도로 치부되었고 연구소 역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장애인이동권연대 전 사무국장인 엄태근씨와 지난날 연구소에 적을 두기도 했던 박지주씨가 이동권연대와 연구소의 게시판, 그리고 장애인 뉴스 싸이트 등에 기사를 올려 '장애우'라는 용어의 문제성을 적극적으로 환기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상당수 장애인들이 '장애우'라는 용어가 지닌 문제성에 공감하면서 연구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엄태근씨의 문제 제기는 설득력이 높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으나, 연구소 입장에선 문제 제기의 쟁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를 불러 올 만큼 거친 대목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왜 그들은 장애우라는 말을 유포하는가" 라는 글에서 엄태근씨는 연구소를 일러 "장애인을 주체화하지 않고 대상화"하고 있으며, 연구소와 국가관료를 등치시켜 "장애인들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하여 이 같은 엄태근씨의 문제 제기는 '장애우'라는 용어의 타당성 여부라는 논쟁의 공통 지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연구소와 감정적 대립을 불러왔다. 이동권연대 사무국장으로 있던 엄태근씨의 정치적 입지와 거친 문제 제기로 말미암아 장애 운동계에서 장애우 연구소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생성적 논의/긴장의 장을 형성하기 보다는, 거칠게 말해 '연구소를 씹고 밟음으로서 이동권연대가 크려고 한다'는 오해와 억측을 불러온 것이다.

이동권연대나 엄태근씨가 실제 이런 의도를 지녔는가 하는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다시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사실 나로선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지금 연구소의 존재 의미/정체성을 비판하기엔 더러 비약적이란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유인 즉, 이는 이후 연구소의 해명에서 드러나듯이 한국 사회 장애 운동사에서 연구소의 역사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엄태근씨의 문제 제기는 그 의도야 무엇이었든지 간에, '장애우'라는 용어와 연구소의 현재 활동 상황을 혼용하거나 비약함으로서 '장애우' 용어에 대한 논의의 생산성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허나 이를 두고 엄태근씨의 거친 문제제기에만 책임을 두기 어려운 것이,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연구소의 응대 방식도 그 책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소는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해명 과정에서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단체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정체성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불성실하거나 안이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우선, 단체의 지향성을 드러내는데 있어 어떤 단체 이름을 쓰는가 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엄태근씨의 논의에 나 역시 동의한다. 그리고 어느 단체의 표지/이름이란 것은 사회 변동의 차원에서 혹은 단체의 정체성 변동의 산물로서 바뀔 수 있고 또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임을 밝히고 논의를 이어나가 보자.

연구소가 '장애우' 라는 용어에 대해 문제 제기를 받고 처음 해명한 글은 2002년 겨울호 회원소식지에 실려 있다. 그러나 연구소의 소식지라는 무게를 가진 책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 실린 '장애우'에 대한 해명은 단순 소박함, 그 자체로 일관하고 있다. "처음 '장애우'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함께 살아야 할 세상이지만, 아직까지 장애인들이 살기에는 너무나 열악해서 우리 사회가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풀어가고자 하는 의도이다... 지금은 워낙 많은 곳에서 '장애우'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그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모두 나올 수는 있지만, 장애인을 지칭하는 단어에 대해 너무 얽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2002년 겨울호 연구소 회원소식지)라는 진술은 이를 보여준다. 이는 '장애우' 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단지 용어에 대한 문제성 정도로 인식했지, 장애인의 정체성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별 달리 주목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런 연구소의 무성의한 태도는 장애인 당사자인 박지주씨들로 하여금 분노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 글에 대해 박지주씨들은 "사회적 약자가 되는 기준과 그 배려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또한 더디더라도 함께 가자는 외침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장애우 용어의 지속적 사용은 끊임없이 장애인을 사회적 주변부의 존재로 무언가 계속 받아야하는 비생산적인 보호의 대상으로 낙인하고, 그런 영향으로 정책·제도·인식을 만들어 왜곡된 구조를 양산해 낸다고 봅니다"라고 연구소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언급했듯이 '장애우'라는 용어 사용이 이처럼 문제성을 내장했는가 하는 문제는 다시 따져 봐야 할 문제다. 하지만 연구소의 이런 무성의함과 안이함이 장애인들의 이와 같은 분노, 혹은 논의 초점을 흐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할 수 있다. 이런 목소리가 거세지자 연구소는 2003년 2월호 함께 걸음을 통해 '공식적'으로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해 해명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연구소는 지난 소식지에 실었던 '장애우' 용어에 대한 해명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왔다는 점에 대해선 밝히고 있진 않다. 또한 글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과 달리 '장애우'라는 용어 비판에 대해, "이 용어를 만들어 낸 동기나 과정,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말로서 '장애우'라는 용어가 생겨난 의미를 해명하고, 되려 이를 제기하는 이들의 태도를 더러 불온시한다. 이는 2003년 4월호 함께 걸음에 실린 "장애우(友)를 사용하는 우(優)를 범하지 말라"라는 글에서 "문제는 내용, 즉 맥락인데 여전히 장애 가진 사람을 대상화시키며 동정의 눈길을 바라보는 관점이지 '장애우' 용어 자체가 시혜적 관점을 부각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으로 반복된다.

물론 이는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박지주씨들의 문제 제기가 <장애우 라는 용어를 하루 빨리 바꾸는 것이 장애인 복지에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연구소의 정체성에 걸맞다> 라는 식의, 본래 맥락과 다른 차원에서 제기된 비판으로 인해 기인된 바가 없지 않다. 예컨대 2월 호에 대한 박지주씨의 반론 글 중에서 "초기 연구소를 만드신 분들이 장애가 있다고 해서 당사자 주의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진술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당사자주의가 무엇인가 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박지주씨는 '이 사회에서 배제 당한 채 살아온 중증장애인들만이 당사자주의에 합당하고, 하기에 우리 목소리는 정당하다'는 식의, 더러 단순한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오해를 불러왔다.

이런 식으로 문제 제기자와 당사자 간의 논점 일탈로 인해 '장애우-장애인' 논쟁의 요체, 즉 '장애우라는 용어를 장애인으로 바꾸는 것은, 오늘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장애인의 삶의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복원하는 데 있어 필요한 사안인가' 라는 논의는 초점화가 되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났다. 그러다 보니 현재까지 두고 본다면 연구소 입장의 최종본인 4월 호에서도 논의의 진척은 안 되고, '장애우' 용어에 대한 거듭된 해명에 이어 결국 문제 제기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무엇이라 부르든지 간에 '취향의 문제다' 라는 식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장애우다 라고 표현한다면 주체성이 결여"된 것이지, 혹은 "나는 장애인이다 라고 말하면 주체적인" 것인지 라고 물으며, "'나는 장애우다'라는 표현이 익숙지 않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틀린 것이 아닙니다. 1인칭으로 사용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장애용어에 대한 선택권은 당사자들에게 있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용어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문제 맥락을 흐리면서 눙쳐 버리는 연구소의 입장은, 적어도 '장애우'라는 용어를 단체 명으로 삼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궁색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초점화 삼고 있고, 또한 삼아야 하는 것은 '장애우' 용어의 틀리고 맞음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합당한가, 혹은 설득력이 있는가 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장애인-장애우' 논쟁과 관련하여 일련의 과정을 짚어보았다. 그렇다면 이 논쟁이 무엇을 낳았는가를 정리하는 장이 필요하겠으나, 언급했듯이 내 역량 상 이는 어려운 대목이다. 다만 이 논쟁을 지켜본 사람들의 입장을 살피고 난 다음, 무엇을 낳아야 하는가와 관련하여 소략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대체로 다섯 가지 정도의 반응을 보였는데, 첫째는 장애 운동이 여느 사회 운동처럼 내구성도 부족한데 이런 '용어'에 대한 논쟁은 장애계 내에서 분열만 불러오고 소모적이다, 그러니 싸우지 말고 대동단결하자 라는 식의 '좋은 게 좋다'형. 둘째는 장애인을 사용한다고 주체적이고, 장애우를 사용하면 비주체적인가 라는 식의 '논점 흐리기'형. 셋째는 '우(友)'는 운동적 관점이기에 장애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장애우라 부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막가파'형. 넷째는 장애인이란 법적 용어가 존재하고 연구소가 이를 바꾸자고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용어 사용을 사람들의 선택에 맡기고 그것을 존중하자는 '취향선호주의'형. 다섯째는 나는 '장애인'이지 '장애우'가 아님을 조목조목 밝히고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매김하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소수이긴 하나, 비록 '병신→불구→장애→?'라는 담론적 변화를 제시하진 못했으나, '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지점과 방향을 헤아리는 글도 있긴 했다. 여기에서 '장애인-장애우'논쟁의 의미를 장애운동사의 차원에서 새겨볼 수 있다.

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최종적 귀결은 표면적인 것만 두고 보아서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단체 이름을 바꾸거나 고수하는 것 정도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중증 장애인들이 자신들을 규정하고 불리는 용어를 거부했다는, 이른바 '장애 담론'의 주체 변화/확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특히 '장애우'에 관한 문제 제기의 축을 이루고 있는 중증 장애인은 어떤 선택권/결정권도 없이 가족과 국가에 의해 배제/박탈당해왔다. 이는 그들을 호명하는 방식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장애인에 대한 호명은 중세적·봉건적 용어라 할 수 있는 '병신'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전후로 하여 산업 발달로 생겨난 후천적 장애인을 일러 이 사회는 '불구자'라는 용어로서 규정했다. 즉 "불구자라는 용어는 선천적인 장애보다 후천적 장애의 발생이 더 중요해져 가는 사회적 변동의 산물"이며, 이는 비장애인들의 새로운 인식의 결과로서 자리잡았던 것이다. 이 같이 후천적 장애/인의 증가는 장애인에 대한 호명을 복잡하게 했으며, 이런 혼란 상은 1980년대 초반 법전과 일상적인 언어에서부터 여실하게 드러난다. 당시 장애인에 대한 지칭은 법전으로 명시된 언어는 "불구자·심신장애자·심신박약자·신체 장애자"였고, 언론 매체에 사용된 구체적 용어는 "맹인·장님·소아마비·하반신 불구자·귀머거리·곱추" 등으로서 뒤섞인 채로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장애 운동계의 당사자들의 문제 제기로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장애인'이란 용어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장애인'이란 용어가 비장애인들 혹은 우리 사회의 삶의 자리까지 아주 조금이나마 실질적으로 스며든 것은 불과 몇 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이유인 즉슨, 오늘날 장애인의 현실, 이동권과 교육권, 그리고 노동권의 열악함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내면에는 여전히 장애인에 대해 병신·언청이와 같은 낙인(烙印)이 자리잡고 있음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애인'이란 법적 용어가 생긴 지 벌써 20여 년이 지났으나, 우리의 생각이나 행위는 '병신→불구자→장애인'이란 담론 변화와는 무관하거나 동떨어진 채로, 실질적 내용은 여전히 비장애인들로 하여금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부르게끔 되어 있다는 것이, 오늘날 장애인이 처한 현실이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애우'라는 용어는 이런 실질적 내용이 부실한 상황에서 운동적 동력을 견인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기에 오늘날 '장애인-장애우' 논쟁은, 비로소 '장애인'이란 호명이 한국 사회에 '보편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즉 그런 장치마저도 거부해도 될 만큼의 운동적 역량을 견인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라고 하겠다. 근자 들어 전국에서 조금씩 생겨나는 중증장애인독립센터는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다만 우리가 좀 더 멀리 지향할 바란, 객관/현상적 지칭인 '장애인'이란 용어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이 사회에서 장애인이란 정체성을 담아내면서도 한 명의 동등한 인간으로서 보편적/실질적 지위를 지향하는 언어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민중'이란 개념이 이 사회의 변혁 운동에 참여하는 구성원 전체를 일컫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 조건으로서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장애인-장애우' 논쟁이 '맞다, 틀리다', 혹은 '각자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식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하고 설득력 있는 근거와 목소리를 가지고 치열한 논쟁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 지칭은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서 대상에 대한 인식의 폭과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되살리고 이를 지향한다는 장애 운동을 한다는 연구소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운동의 대상으로 선택'당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선택'하는' 지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김규항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지금 여기에서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장애 운동의 원칙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언제나 호명의 대상으로 불려왔던, 즉 배제/박탈당해왔던 그 이들의 고통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태도, 신영복 선생의 말을 빌자면 '하방연대(下方連帶)' 바로 그 지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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