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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특집기획] 대공장 노조운동은 아직도 노동계급 운동의 중심인가

 

 

올해 금속 대공장의 임단협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무쟁의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완성차 공장들과 더불어 민주노조 운동의 주축을 이루던 공기업노조와 조선소노조들은 이미 오래 전에 어용이 장악했다. 현재 대규모 작업장들 중 민주노조 진명, 정확하게 말해 민주노총 소속으로 남아있는 것은 완성차공장 노조들 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민주노조라는 완성차 대공장노조들이 해고자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보이고 있는 태도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런 현실 때문에 수 년 전부터 대공장 노동자들에 대해 노동귀족이라는 질타가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장 운동의 모습은 전혀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있다.
[The Focus]는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대공장 노동운동을 진단해보는 기획을 준비했다. [편집자]

연재순서
⑴ 대공장 노조운동은 아직도 노동계급 운동의 중심인가?
⑵ 복수노조와 주간연속2교대제는 대공장 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⑶ 사회주의자들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대공장 운동의 보수화라는 문제는 꽤 오래된 얘기다.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보여준 대공장 노동자들의 높은 단결력과 투쟁력은 다른 부분들에 비해 노동조건의 급속한 개선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전노협 투쟁에 대한 대기업 노조협의회들의 방관 등을 지적하며 대공장 노동자들의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90년대 후반까지는 금속대공장 노동자들이 노동자계급의 중심이자 전 사회적 투쟁의 전위부대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98·99년 대공장 노동자들은 비록 많은 한계를 보이긴 했으나 전 사회적인 구조조정에 맞서 가장 선두에 나서서 투쟁했다.
그러나 IMF 사태와 구조조정 이후 소위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대공장 정규직과 나머지 노동자들의 이해 차이는 매우 커졌다. 사회전반에 고용불안과 저임금 노동이 확산된 반면 자동차·조선·전자·철강 등 수출산업의 대자본들은 호황을 누렸고, 이에 따라 대공장 노동자들의 임금도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거의 사라진 대신 비정규직·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투쟁과 촛불투쟁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건 투쟁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이런 투쟁들을 방관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대공장 노동자들에 대해 노동귀족이라는 비판이 보수언론 뿐 아니라 진보진영에서조차 쏟아져 나오는 형편이다.


노동귀족?


하지만 노동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그래도 여전히 노동귀족이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노동귀족이라는 말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독일의 사회주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1885년 영국 노동운동의 보수화를 설명하기 위해 노동귀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영국 노동운동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공장 노동자들과 대형노동조합에 소속된 숙련공들은 “15년 이상이나 고용주들이 그들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도 고용주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으며 “노동자계급 중 귀족을 이루고 있다” 는 것이었다.
엥겔스 식으로 말하면 남한의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 역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98·99년 사이 구조조정 시기를 제외하면 20여 년 동안 노동조건이 후퇴한 적이 거의 없다. 자동차·조선 등 민주노조운동의 주축을 이루는 금속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은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상승했으며, 이들 산업에서 정규직노동자들의 평균적인 임금은 6~7천만 원에 이른다.
물론 법정노동시간에 기초한 기본급은 130~150만 원 정도에 불과하므로 6~7천의 연봉을 받기 위해서는 주 40시간의 법정노동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 현대·기아 등 완성차 공장을 기준으로 할 때 대공장 노동자들이 그런 고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평일 8시간에 2시간 잔업을 하고 주말 특근 14시간을 해야 한다. 그 결과 금속대공장 노동자들의 평균노동시간은 현재 주당 60시간 이상에 이른다.
그런데 이런 장시간 노동은 대공장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공무원과 교사 등 일부 직종을 제외하면 모든 산업에서 남한 노동자들 대다수는 여전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OECD의 2010년도 통계연감에 따르면 남한 노동자들의 연간 평균노동시간은 2256시간(주당 약 45시간)으로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다. 작년 2월 통계청은 주당 54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가 674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2351만 명)의 28.7%를 차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평균 노동시간을 줄여주고 있는 것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저임금 단시간 노동자들로 보인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주당 26시간 이하로 일하는 단시간 노동자들이 220만 명이나 되고, 그 중 주당 17시간 이하로 일하는 노동자도 96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런 단시간 노동자들은 대부분 저임금 노동자들로 더 많은 시간 일하더라도 안정된 직장에서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싶어 한다. 물론 주당 50시간 이상 일하면서도 150만 원 정도 밖에 못받는 노동자들도 대단히 많다. 이에 비하면 연봉 6~7천만 원은 장시간 노동을 감안한다 해도 대졸 정규직 초봉이 2600만 원 정도 되는 남한 사회에서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이 걸개그림처럼 강건한 남성노동자로 표상된 대공장 노동투사들이 억압
받는 모든 계층들의 투쟁을 이끌며 선두에 선다는 것이 90년대 운동의 일반
적인 인식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인식이 지금도 유효할까?

법제도적인 보장이 아니라 개별자본과 협약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금속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고용관계에 있으며, 비정규직노동자들의 4대 보험 가입률이 절반도 안될 정도로 낮은 남한의 복지수준에서 병원비· 학자금 지원, 명절휴가비, 주택융자 등 교사·공무원에 버금가는 수준의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다.
전반적인 고용불안과 저임금의 시대에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이 누리는 이러한 지위가 특권으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규직 장기근속자의 자녀를 우선채용할 것을 단협 요구에 넣은 현대차 노조의 예에서 드러난 것처럼 자신의 지위를 대물림하고자 하는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욕구는 이를 반영하고 있다. 대공장 정규직은 이제 벗어나고 싶은 계급적 굴레가 아니라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특권적인 지위인 것이다.
물질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사회적·정치적 의식도 중산층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사회· 노동· 정치 문제보다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재테크와 노후 전망에 더 관심이 많다. 노동조합은 계급투쟁의 기관이 아니라 안정된 생활을 지켜주는 울타리로 여겨지고 있다.
촛불투쟁 때처럼 사회적 동요가 확산되고 있는 시기에도 투쟁의 기운은 대공장의 벽을 넘지 못했다. 대개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대공장 노동자들은 촛불투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현실은 공장 내부 운동질서에 고스란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소위 현장사안이 아닌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노조체계로 움직이는 데 익숙한 활동가들은 노조가 대여한 버스를 타고 오는 형식적 참여 이외에 자기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과거 투쟁에 있어 일반 조합원들을 동원하는 중추이자 노조 집행부가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일 때 아래로부터 비판자로 기능하던 대공장 현장조직들은 점차 대중투쟁의 구심이라기보다 공장 내부에 형성된 내부 정치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런 내부 정치시스템은 사측과의 관계에서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을 누가 많이 가져오는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 시스템에서 유사정당적인 역할을 하게 된 대공장 현장조직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노조 집행부에 올라가기 위해 조합원들의 실리적 욕구와 충돌하는 활동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실리주의를 표방하든 전투파를 표방하든 그 차이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가장 전투적인 활동가들은 해고와 구속으로 공장 밖으로 밀려나고 있지만 대공장 운동질서는 이를 방어하거나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2002년에 현대중공업 노조의 어용 집행부는 해고된 조합원들의 조합원 자격을 박탈했다. 해고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제 모든 대공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외관상 가장 전투적인 외피를 쓰고 있는 현장조직들과 집행부마저 투쟁과정에서 해고된 활동가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투파라는 <금속노동자의 힘>이 집권한 기아자동차노조는 이번 단협에서도 해고자 문제 해결에 전혀 의지를 보이고 있지 않다.


비정규직 노동자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보수성이 가장 극심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무엇보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문제이다. 금속대공장에서 비정규직은 주로 사내하도급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서구에서 근대적 산업화의 진척과 대공장 생산이 정착되며 사멸한 사내하도급이라는 고용형태는 남한에서 70년대 대공장 건설 시기부터 주요한 고용형태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87년 이전에는 정규직이나 하청이나 노동조건에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정규직과 하청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본격적으로 차이가 나기 시작한 것은 소위 신경영전략이 도입된 90년대 이후부터로 보인다.
남한 자본이 2000년대 들어 세계시장에서 초국적 독과점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정규직노동자들과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 정규직 임금의 60~70%도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있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확대에 기반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공장의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정규직노동자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차별적인 노동조건과 고용 불안정성을 감수하고 있다. 실제로 스스로를 비정규직노동자로 가장 먼저 자각하기 시작한 부위가 대공장 사내하청노동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대공장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후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산발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정규직에 대비해 자신들을 비정규직노동자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공장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대중적인 투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03년부터였다. 2003년에서 2005년 사이 현대자동차 아산과 울산, 현대중공업, 금호타이어, 기아자동차 등 금속대공장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노조가 동시다발적으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2004년 금호타이어와 완성차 공장의 비정규직노조들이 잇따라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내면서 비정규직노조 건설은 철강과 전자 등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대공장에서 건설되었던 비정규직노조들은 결국 노조로 안정화하는데 실패했다. 2005년 불법파견 투쟁이 사실상 패배로 돌아가면서 제조업의 비정규직노조는 대부분 식물노조가 되었으며, 어느 정도 노조로서 활동을 유지하고 있는 현대차의 세 개 비정규직노조(울산·아산·전주)는 모두 조직대상의 과반을 넘지 못하는 소수노조로 존재하고 있다. 조직대상 대부분을 조직하고 있는 유일한 하청노조인 기아차사내하청분회는 독자적인 교섭권과 쟁의권을 갖고 있지 못하다.

 

2008년 조직통합으로 해산된 기아비정규직지회의 파업투쟁 모습

 

 

 

 

 

 

 

 

 

 

 

 

 





남한에서 비정규직노조 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보다 정규직노조의 벽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공장 정규직노조들은 예외 없이 사측의 탄압에 노출된 비정규직노조들을 외면했다. 그러나 기아자동차와 현대자동차 등지에서 비정규직노조가 탄압을 뚫고 현장세력으로 생존에 성공하자 정규직노조는 원하청연대회의와 같은 기구를 만들어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통제에 나섰다.
원하청연대회의는 그 이름과 달리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의 공동투쟁기구가 아니라 정규직노조가 자신의 교섭권을 이용하여 비정규직노조에 대해 간섭과 통제를 행하는 관리 기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직력이 취약하고 극심한 탄압에 노출된 비정규직노조들은 정규직노조의 제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규직노조가 중재한 사측과 정규직, 비정규직의 3자 합의구조는 비정규직노조에게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는 정규직 주도의 대리교섭기구일 뿐이었다. 정규직노조는 사측과 비정규직노조 사이에서 브로커 역할을 하며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확대되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기아차비정규직지회의 사례는 이러한 통제의 극단적인 예이다. 화성공장의 사내하청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한 기아차비정규직지회는 당시 조직대상의 과반 이상을 조직하고 있는 유일한 대공장 비정규직노조였다. 2005년 봄부터 정규직노조는 기아차비정규직지회의 의사를 무시하고 정규직노조로의 직가입 캠페인을 시작해 결국 기아차비정규직지회를 붕괴시켰다. 하지만 기아차비정규직지회가 스스로 해산하고 통합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규직노조는 지회자체가 분회로 전환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개별 가입원서를 쓰도록 요구했다.
기존 비정규직지회의 정통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비정규직지회의 조합원으로 인정되었던 2·3차 하청업체 출신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문제가 수년째 해결되지 않는 것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1사1조직 관철 이후 사내하청분회로 이름이 바뀐 기아차비정규직지회는 쟁의권과 교섭권을 가지지 못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상급단체 금속노조의 방침인 1사1조직이 실현된 곳은 몇 군데 있지만 기존에 비정규직노조가 존재하고 있던 사업장 중에서 “조직통합”이 된 곳은 기아차 뿐이다. 이는 다른 대공장에서는 비정규직노조가 현장의 불안요소가 될 만큼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아차를 제외한 다른 사업장에서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노조에 대해 여전히 무시와 방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불법파견정규직화 투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경우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이 확대되던 시기에는 정규직 활동가들로부터 1사1조직 얘기가 살살 흘러나왔지만 점거투쟁이 접히고 노조의 조직력이 급속히 떨어지면서 1사1조직 논의는 다시 쑥 들어간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공장에서 안정적인 교섭구조를 흔드는 불안요소가 발생했을 때, 자본과 정규직노조가 함께 그 요소의 발전을 원천봉쇄하고 필요한 때는 노조를 깨면서 까지 통제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공장 정규직노조가 자본의 대리자로 기능하며 현장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대공장 투쟁의 부상과 신경영전략

남한에서 대공장 운동의 보수화는 크게 두 번의 계기를 거치며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90년대 초중반 신경영전략에 대한 대응에 실패하면사, 그리고 두 번째로는 98·99년 구조조정 분쇄투쟁이 패배한 영향이 크다.
우리가 흔히 대공장이라고 부르는 대규모 금속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까지 노동운동의 중심은 수도권에 소재한 중소영세사업장이었다. 몇 차례 폭동에 가까운 소요들을 제외하면 조직적인 대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85년 인천 대우자동차 투쟁이 거의 유일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방에 있는 대공장의 경우 80년대 노동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학생출신 활동가들의 현장이전이 상대적으로 쉽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80년대 많은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현장으로 계급적 이전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구로나 인천 등 수도권 사업장에 집중되었다. 지방에 있는 금속대공장으로 현장이전은 거리와 취업절차 등 여러 장벽으로 안해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87년 이전에도 몇몇 대공장에서 노조 건설을 염두에 둔 소모임 활동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나 구로·인천 등지의 활동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70년대 국가정책에 의해 추진되어 수출과 자재 수입이 용이한 남부 해안도시에 주로 건설된 금속대공장 노동자들은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억압적 보나파르티즘 체제 하에서 소위 병영통제를 통한 장시간·저임금 노동에 시달렸다. 가혹한 착취에 맞선 노동자들의 집단적 반발이 소요 형태로 터져 나오는 경우가 아예 없진 않았지만 이럴 경우 공권력이 직접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했다.
하지만 87년 노동자대투쟁과 함께 대공장 노동운동은 남한 노동운동의 전면에 극적으로 등장했다. 새로운 대공장 운동을 이끈 것은 무엇보다 조선과 자동차공장들이었다. 87년 투쟁을 통해 이들 대공장에서 형성된 공장 질서는 전투적이고 적대적인 투쟁의 장이었다.
산별노조 설립을 금지하는 노동악법으로 말미암아 대공장의 민주노조 운동은 불가피하게 기업별노조의 형태를 띠었다. 이는 이후 지속적으로 대공장 운동의 약점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대공장의 기업별 노조는 총회민주주의라는 직접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에 기초한 아래로부터 전투성을 보여주었다. 이런 초기 대공장 기업별 노조의 역동적인 힘은 서구에서 관료적 산별체계를 뚫고 현장의 계급적대성에 직접 기초한 투쟁성을 보여주었던 샵 스튜어트 운동이나 공장평의회 운동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2010년 현대중공업 임단협 조인식. 95년부터 무쟁의 사업장이었던 현대중공업은
2002년 이후 어용세력이 계속 집권해 오면서 2002년 해고자 청산, 2009년 임금교섭권

회사 위임 등 파격적인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출처 : 연합뉴스)


이 시기 대공장노조는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 속에서 자본과 단체협약 체결을 강제하며 노동조건의 폭발적 개선을 이루어냈다. 3저 호황으로 생산이 확대되고 있던 대자본들은 새롭게 조직된 노동자들의 요구에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불과 3~4년 사이에 대공장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두 배 이상 올랐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시기에 노동자들의 요구에 하청의 직영화가 들어 있었고, 실제로 그 결과 대공장에서 사내하청이 없어지거나 감소했다는 점이다.
90년대 초반까지 조선과 자동차 산업에서 자본은 민주노조에 현장의 주도력을 빼앗겼다. 조선과 자동차 사업장들은 몇 년 사이에 남한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대공장 노동운동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본은 90년대 중반부터 소위 신경영전략을 통해 대공장 현장권력의 재탈환을 시도했다. 이는 90년대 초반 3저 호황이 끝나는 국면과 맞물려 있었다. 신경영전략은 종래의 노조에 대한 탄압 일변도 노선에서 벗어나 노조활동을 인정하는 대신 현장조합원들을 인적으로 포섭하고 인사고과와 성과급적 임금체계를 통해 개별적 경쟁체제로 유도하려 했다.
예를 들어 단체교섭이 제도화되는 대신 인사·노무 가능을 확충하고 인사고과권을 반장 등 현장관리자에서 부여햐여 이들의 권한을 강화하였으며, 기업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한편 고충처리 등 현장관리자들의 활동을 통해 조합원들을 인간적으로 포섭하고 활동가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 시도했다. 이와 함께 설비투자를 확대하여 자동화를 도입하고 사내하청을 늘려 나갔다.
신경영전략에 대응하여 전투적 활동가들은 현장중심 노선으로 대응했다. 대공장에서 민주노조 건설 시기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등으로 결집되어 있던 현장 활동가 조직들이 현장조직으로 재편되어 '현장권력 쟁취'라는 구호 아래 현장투쟁을 강화하려 하였다. 하지만 현장투쟁이 모든 활동의 기초라는 것은 분명했으나 그 자체로는 조합원들의 실리주의적 이해를 전투적으로 관철시킨다는 것 이상으로 발전하기 어려웠다.
강력한 조직력을 가진 대공장 노조는 초기부터 다른 사업장과의 연대에 소극적이었고, 자신의 문제는 자신의 투쟁으로 해결한다는 전투적 실리주의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90년대 초반 전노협이 붕괴할 당시, 현총련, 대노협 등 대기업 노조협의회로 조직되어 있던 대공장 노조는 적극적인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이런 현실에서 선진노동자들의 현장중심 노선은 조합원들의 실리주의에 일정정도 영합하는 측면이 있었고, 정치운동과 결합하지 못하면서 실제적 이해 이상의 이념적 과제를 설정하거나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측은 투쟁에 피로감을 느낀 정규직노동자들에게 실리적 보상으로 파고 들어갔으며 활동가들은 점차 조합원들과 유리되기 시작했다. 현장조직 운동은 특히 자동차 사업장에서 자본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일시적인 효과를 보았지만 구조조정 분쇄 투쟁의 패배 이후 점차 현장조합원들의 보수적인 정서에 물들어갔다. 그 결과 이념과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한 현장조직 운동은 점차 정규직노조 중심으로 형성된 생산의 정치 시스템에 포섭되었다.
신경영 전략의 결과로 사내하청제도가 대공장에 다시 도입되거나 확대되기 시작했지만 현장 조합원 중심의 대응은 이런 사내하도급의 확대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기본급-수당-상여금을 기본으로 하는 성과급적인 임금구조가 확립되었지만 임금인상과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조합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90년대 중반부터 정규직 고용의 확대는 사실상 중단되었으나 정규직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고용이 보장될 것이라는 생각에 정규직 고용의 확대를 요구하기 보다는 비정규직 충원을 용인했다.
신경영전략은 특히 조선사업장의 노조 운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라인작업을 하는 자동차 노동자들과 달리 팀 작업을 기본으로 하는 조선사업장은 현장관리자들의 발언력이 상대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현장관리자들의 포섭에 쉽게 넘어갔다. 또한 수주량에 따라 물량 증감의 폭이 크고 고립적인 작업형태상 비정규직 증가가 눈에 잘 띠지 않기 때문에 물량증감에 따라 하도급의 고용 확대가 자동차에 비해 수월하게 추진되었다. 그 결과 조선사업장에서 사내하도급은 신경영전략 시기를 거치며 급격하게 증가했다.
구조조정 분쇄투쟁 이전에도 조선소에서는 이미 비정규직 비율이 40%를 육박하고 있었다. 현대 중공업을 비롯하여 민주노조가 있던 조선사업장은 대략 신경영전략 시기 이후 무쟁의 사업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결국 2000년대 들어 어용세력의 득세로 귀결되었다. 조선소에서 어용노조의 지배는 수년 째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그것이 변화할 가능성도 낮다. 어용 집행부들은 노조민주주의를 파괴하며 영구집권을 꾀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저항은 크지 않다.


자본의 구조조정과 대공장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 (출처 : 울산노동자배움터)


조선소에서 현장권력 파과와 민주노조 붕괴는 신경영전략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어용노조가 들어서기 훨씬 전인 90년대 초중반 부터 조선사업장은 이미 무쟁의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자동차산업의 경우에도 신경영전략의 결과 90년대 초반부터 사내하청과 용역노동자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조선산업처럼 광범위한 비정규직화가 진행되지 않았으며 어용세력이 결정적인 우위를 확보하지도 못했다. 자동차 공장 역시 실리주의적 경향이 득세하긴 했지만 노골적으로 회사의 지원을 받는 세력은 집권하기 어려웠다.
이는 라인작업을 하는 완성차의 경우 평조합원의 발언력이 강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신경영전략이 추진한 팀제 등을 통한 인적 포섭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경영전략은 결국 노동유연화의 강화로 귀결되었다. 90년대 들어 소위 신자유주의 담론이 득세하면서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코포라티즘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협력적인 노사관계의 틀을 깨고 노동유연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자본의 신경영전략은 이러한 세계적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남한정부 역시 이에 발맞추어 90년대 초부터 노동유연화를 법제화하려는 시도에 나섰다. 이는 YS 정권 아래에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통한 노동법 개악으로 나타났다. 조직노동운동은 이러한 노동법 개악시도를 97년 총파업으로 저지했으나 IMF 이후 사회적 압력 속에서 결국 노동법 개악에 합의하고 말았다.
98년 노사정 합의를 통한 노동법 개악의 성격은 근로기준법등 개별적 노사관계 법률조항의 개악과 집단적 노사관계 법률조항의 개선을 맞바꾸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현실로 등장한 조직노동운동의 존재를 법제도적으로 인정하고 근로기준법 개악을 통해 노동유연화를 제도화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결과 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변형근로제 등 노동유연화 악법이 도입되는 대신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노조의 정치참여 허용·복수노조·근로자 참여제 등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98년 노사정 합의는 조직노동운동의 안정과 노동유연화를 맞바꾸었다는 면에서 90년대 이후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공급측면) 코포라티즘의 변형된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코포라티즘 체계는 민주노총 관료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제도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는 순전히 정부와 자본이 요구하는 합의의 수준이 민주노총에서 가장 우익적인 국민파 관료들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정규직노동자들을 배제한 합의구조는 코포라티즘 체제의 실제적인 형성과 무관하게 구조조정 투쟁을 거치며 대공장을 중심으로 현장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 98년 이후 대공장에 밀려들어온 구조조정 공세는 노동법 개악으로 도입된 유연화 제도들을 다시 현장에 밀어붙이는 과정이었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서기 위해 전투적 집행부를 선출하고 투쟁에 나섰지만 별 성과 없이 패배했다. 구조조정 이후 조선과 자동차를 비롯한 주요 수출제조업에서 사내하청이 크게 늘었다.
하지만 소위 “빅딜” 등 구조조정의 결과로 자동차·조선·철강·전자 등 주요 수출제조업에서 선택과 집중을 이룬 남한의 대자본은 세계시장에서 초국적 독과점체제에 성공적으로 편입했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해양조선 등 남한의 조선소들은 세계 조선 산업의 1위에서 7위까지를 독점했다. 현대·기아로 재편된 자동차 자본은 현대와 기아 통합으로 세계 10위권 안으로 들어선 뒤 현재는 5위권 업체로 안착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계시장에서 남한 수출대자본의 승승장구는 정규직을 제외한 다수 노동자들의 저임금에 기초하고 있다. 구조조정 이후 대공장 노동자들과 부품사 등 다른 분야의 제조업 노동자들 간의 임금 격차는 더욱 커졌다. 특히 자동차산업에서는 플랫폼 통합·모듈화와 함께 현대모비스와 같은 대형 모듈업체가 등장하면서 완성차 공장-대형 모듈업체-부품업체로 이어지는 위계화·중층화가 한층 강화되고 이로 인해 완성차 자본의 부품업체에 대한 통제력이 강해지면서 부품업체 노동자들과 완성차 정규직노동자들 간의 임금 격차는 크게 차이가 나고 있다.
더욱이 현대모비스는 생산직 전원을 사내하청으로 채우고 있으며 이곳의 노동강도와 저임금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아차의 경우는 아에 특정 차종의 생산을 100% 비정규직공장인 동희오토에 위탁하고 있기도 하다.
제조업에서 전반적인 사내하도급 제도의 확대가 이들 산업에서 이윤의 보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정규직노동자들과 완전히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은 구조조정 이후 이들 산업에서 전체 노동자의 10~50% 정도로 늘어났으나 임금은 정규직의 50~70% 수준에 불과하다.
남한 제조업의 주요 경쟁국들인 미국, 유럽, 일본, 대만, 중국 등에서는 사내하청과 유사한 간접고용을 도입하고 있다하더라도 노동조건의 차이가 남한만큼 크지 않다. 이들의 경우 비정규직 도입은 거의 고용유연화만을 위한 것으로 보이나 남한의 사내하도급은 실제 노동조건의 격차를 강제하고 있다. 남한 수출제조업의 눈부신 성공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주요 제조업에서 하청고용비율 (출처 : 한겨레신문)


대공장 노동자 집단의 균질성의 파괴


사내하청을 비롯한 비정규직의 증가는 대공장노동자들의 균질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위 대공장의 전략적 중심성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생산에서 위치와 사회적 파급력 뿐 아니라, 균질적인 노동자 집단의 밀집을 통해 계급의식과 집단적 의식이 성장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는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대공장은 더 이상 노동자집단의 균질성을 보장하는 공간이 아니다.
자동화의 진전은 대공업에서 비정규직이 확대될 수 있는 기술적 기초가 되고 있다. 현재 대공업에서 숙련노동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숙련의 정도에 따라서 임금이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임금이 숙련기술에 바탕하고 있다는 모든 주장은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신경영전략 시기에 자본은 노동집약적인 체제에서 대대적인 설비투자를 통해 노동자들로부터 숙련을 통한 현장통제력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대공장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숙련도는 떨어졌으며 비정규직 고용이 확대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구조조정 이후 플랫폼 통합과 모듈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완성차공장에서는 특히 이런 경향이 강화되었다.
조선산업의 경우 자동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숙련이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숙련이 필요한 파워그라인더 같은 직종이 오히려 비정규직인 경우도 있다. 조선소에서도 일반 생산직 노동자가 노동에 필요한 기술을 능숙하게 체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1~2년에 불과하다. 물론 조선소에서도 모듈화, 블록대형화 등 자동화가 지금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현재 대공장에서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숙련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작업공정이 단순화되고 동질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장에서 노동자들의 균질성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사내하청 뿐 아니라 다양한 고용형태들의 증가로 인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조선사업장의 경우 하청노동자들과 정규직의 비율의 최대 8대 2까지 육박하고, 평균적으로는 6대 4 정도 된다. 그렇다면 사내하청노동자들의 구성은 균질적인가? 그렇지도 않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조선사업장인 현대중공업의 경우, 공장을 구성하고 있는 고용형태는 아주 복잡하다. 사내하청의 경우에도 일당제와 시급제로 나뉘어 있다. 여기에 이주노동자와 직업훈련원을 나와서 저임금으로 일하고 있는 훈련생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최근에는 과거 고숙련자 중심으로 긴급한 돌발 상황 때 투입되던 물량도급 인원도 크게 늘어나 노동조건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하락한 채 일반 생산 업무에 투입되고 있다. 사내하청을 제외하고도 이주노동자, 훈련생, 물량도급 인원들이 현재 현대중공업에서 각기 수천 명 단위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정규직 비율이 20% 정도로 조선소에 비해 노동자들의 균질성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는 자동차 사업장의 경우에도 비정규직노조 결성과 불법파견 판정 이후 사내하청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이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고용형태의 다양화가 추진되고 있다.
자동차 공장에서는 일반적인 사내하청 외에도 외부 납품업체에 계약직으로 고용되어 사내하청 업무에 파견된 경우나 납품업체가 별도의 하청업체를 통해 공장 내에서 작업하는 조건으로 고용하는 2·3차 하청노동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1차와 2·3차 하청노동자의 업무의 차이는 크지 않으며, 보통 업체 사무실이 공장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따라 구분될 뿐이다.
업체들이 영세하고 1차 하청업체의 형태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집계가 잘 되지 않지만 2·3차 하청노동자들은 1차 하청노동자보다 성과급이 적거나 임단협 적용에서 배제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시하청 또는 단기계약직이라고 불리는 아르바이트생들은 본래 정규직 노동자의 산재 대체나 신규사원 채용 전에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아르바이트 자리에 가까웠으나, 현재는 정규직을 아예 뽑지 않고 라인을 단기계약직 노동자들로 채운 후 물량이나 공정이 축소·폐쇄되면 해고하는 양태를 취하고 있다.
단기계약직 노동자들과 2·3차 하청노동자들은 1차 하청노동자들이 정규직에 비해 임금 및 복지에서 차별받는 것처럼 1차 하청노동자에 비해 차별을 당하고 있으며, 이런 격차는 점점 확대되고 있다. 비정규직 중에서도 1차 하청노동자와 그보다 더 취약한 노동자들이 중층적으로 생겨나면서 노동자 내부에 계층이 형성되고 있다.
이로 인해 2000년대 들어 대공장의 기업별 노조는 전체 공장 노동자들을 모두 포괄하는 공장위원회적인 성격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는 총회민주주의의 기반이었던 대공장 노동자들의 균질성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오로지 고용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배타적이 되고 있다.


계속되는 호황과 물질적 포섭


99년 이후 자동차, 조선·전자·철강 등 수출제조업의 대자본은 2008년 금융위기 때문에 발생한 짧은 불황기를 제외하면 지속적인 호황을 누려왔다. 2008년 위기는 오히려 세계시장에서 이들 수출대자본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기아는 미국자동차 산업의 몰락과 도요타의 부진을 틈타 6~8위권에서 5위권으로 도약했으며 최근에는 도요타를 제치고 세계 4위 업체로 올라섰다. 남한자본이 초국적 독과점 체계의 최상위에 있는 조선과 전자에서는 금융위기를 계기로 중간 순위의 추격자들과 격차를 더욱 늘렸다.
이러한 호황을 통해 이들 산업의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호황으로 얻은 이윤의 분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정규직노동자들 뿐이다. 사내하청노동자들과 대공장에 종속된 부품사 노동자들은 호황에 대한 이윤 분배에 거의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
구조조정 이후 대공장과 중소기업 노동자들 뿐아니라 대공장 내부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계속 커지고 있다. 2003~2005년 대공장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노조설립과 불법파견 판정, 이어진 정규직화 투쟁을 거친 이후 자동차 대공장의 1차 하청노동자들은 고용이 안정되고 임금 등 노동조건이 지속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럼에도 1차하청과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격차는 이전에 비해 거의 줄어들지 않고 있다.
자동차에서 1차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은 여전히 정규직노동자들의 60%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청노동자들이 배제되고 있는 복지혜택, 주식 배당 등을 합치면 실제 격차는 더욱 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1차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는 이상으로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내하청에 비해 더욱 열악할 것으로 예상되는 2·3차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파악도 되지 않고 있으며 단기계약직, 훈련생, 이주노동자 등의 노동조건은 완전한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형편이다.
정규직노동자들은 높은 노동조건과 고용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배제한 합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이는 2000년 완전고용합의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98년 노사정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조직노동운동의 이해와 노동유연화의 교환은 단위 공장에서 2000년 이후 대부분의 자동차 대공장에서 체결된 완전고용합의로 완성되었다.
완전고용합의는 정규직노조가 생산라인에 하청노동자의 도입을 용인하는 대신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현대차 정갑득 집행부는 하청도입 비율을 16.9%까지 허용하겠다고 했으나 이는 물론 지켜지지 않을 것이 뻔한 ‘눈가리고 아웅’식의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정리해고제 도입 이후 고용불안을 느낀 정규직조합원들은 완전고용합의에 지지를 보냈다. 이는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하청노동자들의 직영화를 요구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태도이다.
구조조정을 겪은 이후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자신의 이해와 회사의 이해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크게 강화되었다. 신경영전략 시기에 정착된 기본급-수당-상여금이라는 성과급적 임금체계는 이러한 의식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자본은 기본급은 인상하지 않으면서 잔업·특근 수당과 기업 수익에 따른 상여금으로 임금을 인상했다. 현재 대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에서 기본급이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정도에 불과하다. 자본은 사실상 호황기에는 정규직노동자들에게 성과급으로 임금을 올리고 불황기에는 물량이 줄었다는 이유로 잔업·특근을 없애 자연스럽게 임금을 줄이는 양상을 취하고 있다.
이는 자발적인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정규직노동자들 사이에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어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현대차 정규직노동자들은 임금이 잔업·특근이 없어지면서 임금이 3분의 1로 줄어들어 큰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존권의 하락은 사측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사내 타공장보다 많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귀결되었다. 때문에 정규직노동자들은 자신의 투쟁력으로 임금을 올리는 것보다는 회사의 이익에 민감하며 현재의 평화적인 노사관계가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임금의 형태로 사측이 지급하는 무상주 역시 이런 의식을 강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대공장 자본은 우리사주를 통해 매년 급여의 일부를 30주에서 100여 주씩 자사 주식으로 지불하고 있다. 올해 기아자동차 임금협상 잠정합의안은 무쟁의 타결 시 조합원 1인당 80주를 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대공장 노동자들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대에 이르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이익 분배에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무상주 배당을 받지 못함으로써 동일 비율로 임금이 인상된다하더라도 실제로는 벌써 여기서부터 정규직과 수백만 원의 실질적인 임금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작년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출처 : 참세상)


일상적 합의 메커니즘의 완성


신경영전략과 구조조정을 거치며 자동차와 조선 등 대공장에서는 정규직노동자들을 고임금을 통해 물질적으로 포섭하여 노사평화를 추구하면서도 광범위한 사내하도급의 확대를 통해 이윤을 보전하고 세계시장에서 경쟁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속에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대공장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노동자 집단 중 가장 크고 단일한 집단으로 존재하면서 노사교섭에서 대표권을 행사하며 정규직 외의 노동자 집단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관철시키고 있다.
자동차 산업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일상적 합의구조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대표하고 있다. 87년 이후 90년대까지 대공장의 노사관계는 단체협약 중심이었다. 노조와 합의되지 않은 노동강도 강화 등에 대해 노동자들은 작업중지권, 즉 부분적인 파업권을 행사하여 철회시키는 사례가 빈번했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에서 플랫폼·모듈화 등 자동화는 생산물량에 따라 상시적인 작업장 재편을 요구했으며 이에 따라 일상적인 구조조정을 강제했다. 대략 2000년을 고비로 하여 일상적 구조조정에 대응하는 형태로 기존 단협 중심의 노사관계를 대체하는 일상적 합의구조가 제도화되었다. 이를 통해 자동차 공장에서는 조선소처럼 무노조거나 어용노조가 아니라하더라도 외부적으로 보이는 노사 대립구도와 달리 일상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98년 노사정 합의가 2000년 완전고용합의를 통해 기업단위로 내려왔다면, 이러한 일상적 합의구조는 그것을 단위 사업장의 라인과 부서까지 침투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 합의구조가 98년 노동법 개정으로 통과된 “근로자의 참여 및 협력증진에 대한 법률(근로자참가제)”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98년 노동법 개정은 기존의 노사협의회법을 근로자참가제로 개정하면서 30인 이상 사업장에 노사협의회 설치를 의무화하고 여기에 협의권을 부여해 주었다.
현재 자동차 대공장에서의 단협은 신기술 도입, 신차종 개발, 작업공정 개선, 사업의 확장, 합병, 공장이전 등을 노사공동위원회(현자) 혹은 고용안정위원회(기아)처럼 노사동수로 이루어진 노사공동결정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하도록 규정하고 이 결정에 단협과 동일한 효력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협의기구들은 모두 근로자참가제를 법적 기초로 99년 이후에 설치된 것들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대공장에서는 작업할당과 노동강도, 배치전환 등의 문제에서 현장의 집단적인 저항을 바탕으로 한 현장활동가의 비공식적인 교섭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 왔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양상은 이러한 비공식적인 교섭이 근로자참가제를 법적 기반으로 하여 제도화되고 현장에서 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포섭과 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배제가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절차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사공동위원회나 고용안정위원회와 같은 노사협의회에 기초한 합의체계는 단협과 단협 사이에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며 기각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합의의 최종 결정은 노조의 골간체계라고 할 수 있는 대의원 체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사측이 신차투입이나 공장이전 등 생산체계의 변동을 결정할 경우, 먼저 전체 회사 차원의 노사공동위원회(고용안정위원회)에서 큰 틀에서의 대략적인 합의를 이루어 낸다.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 지면 단위 공장의 노사공동소위원회나 고용안정소위원회에 보다 세부적인 의제들이 논의사안으로 내려오고 마지막에는 작업장 대의원들이 생산체계 변동에 따른 노동강도, 인원배치등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노사협의를 하게 된다.
이러한 일상적 합의구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해를 갈라 놓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 체계에서 사내하청노동자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정규직 고용보장의 희생양이 되어 있다. 일례로 하나의 라인이 다른 공장으로 이관될 때 자기 선거구 조합원의 고용을 최우선으로 놓을 수밖에 없는 정규직 대의원들은 정규직노동자의 전환배치를 받아들이는 대신 하청노동자를 해고하는데 합의하는 관행이 구조화되어 있다. 때문에 일상화된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공장에서 정규직은 전혀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
이미 비정규직 비중이 50%를 넘나드는 조선사업장의 경우에는 물량 증감에 따라 하청업체를 폐지버리는 방식으로 상시적인 인원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따라서 자동차와 같은 정규직의 상시적인 전환배치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또한 노조가 무력화되어 있기 때문에 정규직 전환배치가 일어난다 해도 합의를 거치지 않은 개별 통보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금융위기의 여파로 물량이 급감하던 2009년 현대중공업은 최초로 정규직 400여 명에 대한 전환배치를 단행했지만 이를 합의가 아닌 개별 통보 형태로 단행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노사협의회가 정례화되어 있고 처우개선 등이 실제로 여기서 논의되고 있다. 노조가 무력한 만큼 조선소에서도 노사협의회를 통한 일상적 합의의 역할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대공장에서 노사협의회에 기초한 이러한 합의구조들은 대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적 의식을 물질적·의식적으로 포섭하는 중요한 제도적 기제가 되고 있다.


대공장노조 중심의 전략은 여전히 유효한가?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 활동가들은 정규직노동자들의 보수화 문제에 직면하면서 이를 노조관료의 문제나 고용불안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포섭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현실은 현재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이 이데올로기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자본에 포섭되어 있으며, 자신의 물질적 이해를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 문제 등에 대해 대단히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적대적인 합의에 수동적인 방관자가 아닌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대공장 노조는 조합원들의 실리를 위해서 자본과 표면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고용형태의 노동자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통해 자본에 대표권을 인정받는 이중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여타 투쟁에 연대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정을 지키는 것을 선택한다.
자동차에서 일상적 합의구조는 자동차사업장이 여전히 민주노조의 외피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면적 메커니즘을 통해 자본의 이해에 깊이 포섭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더 이상 대공장의 보수화를 집권세력이 어용라거나 실리주의 세력이기 때문으로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2003년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 투쟁 당시 정규직조합원들이 보여준 태도와 2008년 기아차에서 정규직조합원들이 보여준 비정규직노동자 투쟁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단지 어용의 준동 만으로 이해가기는 어렵다. 오히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과 여타 노동자들과 공통의 이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이러한 상황은 과연 여전히 대공장 운동이 노동계급 운동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던지게 한다. 한때 노동운동의 전위로 불리었던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이러한 변질과 대공장 운동질서의 몰락은 자본의 분할포섭 전략에 계급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노조를 통해 자신들의 실리적 이해만을 배타적으로 관철시키려 하는 공장 내부정치, 소위 “생산의 정치”로의 함몰이 가져온 필연적 비극일 수도 있다.
전투적 사회주의자들은 현장사안이 보다 계급적인 사안이라는 사고에 사로잡혀 오히려 이러한 의식을 부추겨 왔다. 정치와 경제의 이분화를 극복하지 못하는 소위 현장 중심의 “생산의 정치”에 대한 집착은 사회적 고립과 노동자들의 사회적 보수화 성향을 강화시켜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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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정치]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의 목표와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 회원 양효식 활동가와의 인터뷰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공동실천위원회>(이하 사노위) 는 지난 5월28일 3차 총회를 개최했다. 3차 총회를 앞두고 사노위 의견그룹 소속 활동가들은 사노위 해산에 관한 안건을 제출했다. 사노위가 출범한 지난해 5월 이후로 1년이 지났지만 강령 상의 통일을 이루지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3차 총회에서 이들이 제기한 사노위 해산안은 부결되었다. 사노위 해산을 주장했던 이들 중 일부는 <사노위 정치적 해산 선언자 모임>을 거쳐 <(가칭)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을 꾸려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에 사노신은 양효식 활동가를 만나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이 만들어진 배경과 향후 계획에 대해 들어보았다.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 회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노위 정치적 해산 선언자 모임’에 속했던 동지들이다. (물론 그 이후 새롭게 결합한 소수의 동지들이 있다. 따라서 ‘해산 선언자 모임’과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을 곧바로 등치시킬 수는 없다.)
지난 5월28일 사노위 3차 총회에서 우리는 ‘강령 통일 실패에 따른 조직 해산의 건’을 총회 안건으로 상정하여 사노위 조직 해산을 요구했다. 애초 사노위는 3조직 및 개별 활동가들의 ‘공동실천위원회’로 출발했고, 1년 안에 강령, 전술, 조직상의 통일을 이뤄 단일 조직(사회주의노동자당 추진위원회)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이는 역으로 1년 안에 통일을 이뤄내지 못하면 강령에 따라 각자의 길로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만큼 강령과 노선이 조직규모나 쪽수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1년이 되었는데 강령 상의 차이가 해소 불가능한 차이로 판명 난 상황에서 애초 설정한 1년을 넘어 계속 간다는 것은 무원칙한 동거가 되는 것이므로 1년이 된 3차 총회에서 조직 해산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사노위 내 ‘다수파’(2011년 1월 2차 총회 당시 ‘가입원서’ 건 표결을 계기로 형성된 다수파를 말함)는 조직보존주의 논리를 들어 해산을 끝내 거부했다. 이에 우리는 ‘사노위의 정치적 해산’을 선언하고 ‘선언자 모임’ 명의로 사노위 평가서(1차 보고서)를 냈다. 비록 사노위를 통한 당 건설은 실패했지만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의 목표와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며, 사노위 1년의 투쟁과 경험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코 헛된 노력이 아니라고 보아 당 건설 투쟁을 새롭게 다시 추진하는 것으로 동지들의 뜻을 모았다. 이것이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으로 표현된 것이다. 10월에 “가칭” 딱지를 떼어버리는 정식 출범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사노련, 사노위를 거치면서 지난 수 년 동안 추진되어 온 써클들의 통합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일부 음해성 평가들과 달리 당 건설이라는 대의 아래 써클들을 모아내려 했던 동지들의 의도는 분명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름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하고 있겠지만 통합운동은 오히려 각 써클들의 정치적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는 결과를 보여준 것 같다. 통합 운동을 가로막은 주요한 정치적, 조직적 차이는 무엇이라고 평가하는지?

 

써클 통합이라기보다 당 건설로의 결집인데, 어쨌든 통합을 가로막은 핵심 요인은 결국 강령 문제와 당 건설투쟁 노선(경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노련의 경우 강령 상에서는 대체로 일치를 이루어냈지만, 사노위 건설과정에서 나타났듯 당 건설투쟁 노선 문제에서 결국 차이를 해소하지 못하고 갈라졌다. 사노위는 ‘공동실천위원회’ 위상으로서 그 자체가 당 건설 경로이니까 당 건설 노선 문제보다는 결정적으로 강령 상의 화해할 수 없는 차이를 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해산’이 선언된 것이다.
차이의 구체적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사노련의 경우 사노위 건설에 합류한 동지들과 사노련에 잔류한 동지들 사이의 차이는, 한 마디로 전자가 당 건설을 정세적 과제로, 당면 정치투쟁의 과제로 접근했다면 후자는 현장 기반을 꾸준히 확대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는 근본적 차이가 깔려 있었다고 본다. 설사 사노위 문제로 갈라지지 않고 모두가 사노련으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모두가 사노위로 합류했다 하더라도 그 차이가 해소되지 않았다면 최종 당 건설 과정에서 다시 불거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는 당 건설이 ‘주체들 사이에서 강령, 전술, 조직 문제를 둘러싼 투쟁을 통한 당 건설’이라는 정치투쟁의 기획 없이는 가능하지도, 옳지도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계획으로서의 전술’ 없이 막연히 ‘과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만들어나가자는 것으로는 자기 써클의 확대는 될지언정 계급의 전위로서의 당은 되지 못할 것이다.
사노위는 그 자체가 이런 당 건설 계획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노위 주체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일치를 보고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를 공유한 위에서 강령, 전술, 조직상의 통일을 이루어내기 위한 투쟁을 ‘공동실천위’라는 위상 속에서 1년간 전개한 것이다, 결국 최종 통합, 즉 추진위로의 전환에 실패하고 ‘사노위 정치적 해산 선언’을 하게 된 정치적, 조직적 차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해산 선언자들이 지난 6월말에 제출한 ‘사노위 1년, 그 당 건설 투쟁에 대한 평가 (1차 보고서)’ 가운데 결론 부분인데 이것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사노위 내 소수파와 다수파의 투쟁은 그것이 비록 노동자계급운동에 당장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영향과 파장을 미치고 있지 않은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투쟁의 계급적 의미와 성격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그 투쟁은 노동자계급 속에서 어떤 당을 건설하고, 어떤 정치활동을 할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혁명정당인가, 개량주의에 뒷문을 열어놓는 중도주의 정당인가? 연방주의에 바탕한 꽁무니주의 정당인가, 민주집중제에 기초한 전위당인가? 강령에 입각하여 노동자투쟁을 조직하는 사회주의 정치활동인가, “강령 따로, 실천 따로” 식의 추수주의 · 경제주의 활동인가? 사노위 투쟁의 이 본질적인 주제는 이후 그 어떤 당 건설 투쟁에서도 결코 비껴갈 수 없는 과제로 사회주의자들 앞에 가로놓여 있을 것이다. 사노위 투쟁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성과와 유산이 있다면 바로 이 투쟁의 의미와 교훈을 당 건설 운동의 새로운 지형 위에서 정확히 되새기는 데서 나올 것이다.”

 

양효식 동지는 당 건설 운동이 정파들의 단순한 통합을 넘어 선진노동자들이 주체가 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주장한 바가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사노련, 사노위 운동은 기대했던 만큼 대중적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밖에서 보기에는 정파 상층 논의, 혹은 주요 활동가들 간의 논의를 벗어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평가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먼저 당 건설 운동과 투쟁을 해 나감에 있어, 그 주체가 노동자계급, 특히 그 중에서 가장 앞선 부위가 먼저 결합하는 경로와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정언 명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러나 당 건설은 진공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결부되어서만 그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랬을 때 한국의 경우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짧게는 10여 년 길게는 현재까지도 강도와 양상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계급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 속에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전국에서 수많은 노동자투사들을 배출해 냈다. 그들은 정말 자본과 정권에 맞서 온몸을 던져 비타협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들은 최종적으로 사회주의 당 건설의 주체로까지 성장하지 못했다. 자본과 정권의 탄압과 분열, 분화 책동을 극복하지 못했으며, 개량주의와 관료주의 세력에 맞선 투쟁지도력, 정치지도력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사회주의 세력 역시 이들과 정치적, 조직적으로 결합하는 데 실패를 거듭해왔다. 결과적으로 오늘의 시점과 현실에서 볼 때 당 건설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선진노동자의 층은 매우 얇으며 어슴푸레 하게만 존재한다.
바로 이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 돌파할 것인가를 놓고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서 인식과 실천에서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으며 나타나고 있다. 그 차이 중 핵심적인 쟁점은 지금 바로 당 건설 운동을 시작하는 것을 통해서만 다시 계급의 앞선 부위를 되살리거나 새롭게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과 반대로 계급의 선진 부위가 다시 형성되는 정세를 경유할 때만이 비로소 당 건설 운동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선(先) 당 건설론’과 ‘토대구축론’이 바로 그것이다. ‘선 당 건설론’은 다시 ‘사노위’와 같은 경로를 주장하는 입장과 그에 반대하거나 회의하는 복수의 입장이 존재한다. ‘토대구축론’은 나의 입장에서 보면 백년하청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능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 한국 계급투쟁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 세계정세에 대한 추상적 이해에 머무르고 있는 것 외에 그 무엇도 아니라는 판단이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노선을 분명하고 명료한 형태로 제출하고 있는 가시적인 세력은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토대구축론’이 결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소수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심지어 ‘선 당 건설론’을 지지하는 세력 내에서도 실질적, 심리적 ‘토대구축론’자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보아라! 기껏해야 정파 상층 차원의 논의, 주요 활동가들 사이의 논의 이상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크고 작게, 들리게 들리지 않게 주변을 맴돌고 있다. 답은 간단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조금 친절하게 답하면 이렇다. 당 건설 운동과 투쟁이 동력과 탄력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정파 상층 차원에서만 논의해서도, 주요 활동가들끼리만 논의해서가 아니라 정파 상층 차원의 논의가, 주요 활동가들 사이의 논의가 ‘제대로’ 안 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정파 상층, 주요 활동가들이 선진노동자 부위에게 정치사상적, 조직적 신뢰를 획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벌어진 균열과 틈새가 선진 부위에게 낱낱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노위’는 비록 현재로서는 성공에 이르지 못했지만 바로 그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극복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과정의 연속 위에서 당 건설 운동은 지속되어야 한다. 선진노동자가 당 건설의 주체로 나서게 해야 한다는 것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비록 ‘사노위’의 실패가 일시적, 부분적으로 선진노동자 층에게 실망과 좌절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측면을 부정하지 않지만 잔류 ‘사노위’든, 우리든, 그 어떤 사회주의 세력이든 각자의 노선과 정치를 선진노동자들에게 가감 없이 밝히는 것을 통해 그들과 소통하고 접점을 형성하려는 시도를 더욱 밀고 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선진노동자를 당 건설 주체로 세우거나 나서게 하는 하나의 경로이다. 이러한 과정 없이 어느 순간 정파 사이의 결집이 이루어질 수 있다거나, 선진노동자 부위가 대거 당 건설의 주체로 나설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가칭)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이 계속 당 건설의 고민을 이어나간다고 한다면 사노련, 사노위의 경험 이후 당 건설의 주체와 정치적 바운더리를 어떻게 보고 계신 것인가

 

너무나 명료한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당 건설의 주체는 당 건설을 자임하는 세력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세력도 현재로서는 선진노동자 층으로부터 정치적, 조직적 권위를 인정받거나 부여받은 바 없다. 누구(어떤 세력)에게나 기회는 열려 있다. 앞으로 어떤 상황, 어떤 조건이 형성되느냐, 혹은 스스로 그런 상황과 조건을 창출해 낼 수 있느냐에 따라 당 건설 자임 세력 사이의 논의는 또 다시 어떤 형태로든 다시 시도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 최종적으로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신뢰와 지도력을 획득함으로써 비로소 당 건설 자임 주체를 넘어 객관적인 당 건설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원칙적, 일반적 차원을 넘어 구체적으로 우리는 ‘당 건설 추진체’로서의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최우선적 과제로 삼고 있다. 어떤 조직이든 그것이 존재하는 한 자신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과 시도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복제를 통해 당 건설을 하겠다고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 마리 미꾸라지가 온 방죽을 흐린다는 말은 뒤집어서 말하면 한 마리 미꾸라지가 방죽 전체의 긴장과 역동성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노선과 정치를 가감 없이 밝히는 것을 통해 한편으로는 대적 전선을 형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세력에게도 자신의 노선과 정치를 밝힐 것을 강제해 나가고자 한다. ‘비판의 무기’를 넘어 ‘무기로서의 비판’을 실행해 나갈 것이다.
여기에 미리부터 특정한 바운더리(경계)를 두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미 큰 틀에서 우리의 정치적 입장과 노선은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미 말이 아닌 직접적인 행동으로 ‘무원칙한 통합’에 반대한다는 것을 실행했다. 그렇다고 우리만의 경계를 내부적으로 쌓고 있지 않다. 우리만의 성을 쌓거나 울타리를 세우는 것이 목표는 아니다. 오히려 기꺼이 우리를 던져 정세가 요구하는 정치활동을 펼쳐 나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과정을 통해 정파 사이의 정치적 거리는 자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공동활동, 공동투쟁, 공동전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당 건설 문제에 있어서는 현재로서는 조금 단호한 입장을 취할 것이다. 단호하다는 것이 곧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원칙을 지키고, 원칙을 공유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가

 

출범 일정을 최근 10월 15일로 ‘잠정’ 결정했다. 그 기간 동안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동지들을 최대한 넓히려는 노력과 시도를 다하겠지만 그 결과 때문에 출범 일정 자체를 늦추지는 않을 것이다.
출범을 하게 되면 당연히 강령(초안)을 제출할 것이다. 이제까지 대개의 경우 ‘정치원칙’을 공유하는 차원에서 조직을 형성·출범했지만, 우리의 경우는 이미 지난 1년여에 걸친 ‘사노위’ 활동을 통해 그 과정을 넘어섰다. 그러나 강령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공개 토론은 출범 이후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분명히 세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7월26일 월간정세지 <혁명(준비 1호)>를 발간했다. 출범 때까지 3호를 발간할 계획이다. <혁명>은 이미 밝혔듯이 이론지가 아니라 정세지이다. <혁명>에서 정세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밝히고 그에 입각해 우리의 정치활동을 펼쳐 나갈 것이다. 이제까지 대개의 경우 자신이 발행하는 기관지에서의 주장과 실제로 자신의 조직 활동을 직접적으로 일치시키지 않거나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우리는 이 점을 극복하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출범 이후로는 정세지의 발간 주기를 단축시켜 나갈 것이다.
우리는 현실 정세와 투쟁에 대해서도 최대한 개입할 것이다. 아직은 크지 않은 조직이라서 물리적 결합력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해당 시기, 해당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지키고 나아가야 할 원칙과 방향에 대해서는 물론 보다 더 구체적인 방침과 지침을 제시하는 데 힘을 기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세지나 투쟁유인물을 발간하는 외에 이론적 해명이 필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당분간 비정기 정치 팜플렛을 통해 우리의 입장을 알리고 선진노동자들과 심도 깊은 토론을 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출범 때까지 우리는 조직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확정하고, 당 건설 노선과 경로에 대한 입장 표명, 사회주의 정치활동과 조직화 방안 수립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펼쳐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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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FocuS]"사측의 술수에 춤을 춘 채길용 집행부" 하지만 투쟁은 계속된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8/16 16:21
  • 수정일
    2011/08/16 16:22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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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7일 서울 갈월동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서 ‘한진중공업 투쟁 강제진압 규탄! 정리해고 반대! 대학생공동행동’이 진행되었다. 폭우 속에 진행된 이 집회에서는 대학생 뿐만 아니라 현재 투쟁하고 있는 한진중공업 조합원도 발언했다. 한진중공업지회 이용대 조합원의 발언을 통해 사측과 공권력의 탄압, 노조지도부의 기만적인 합의, 그리고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조합원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사노신은 이용대 조합원의 발언내용을 옮겨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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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김여진 님이 김진숙 지도위원을 살아서 걸어 내려올 수 있게만 해준다면 조남호 회장에게 백 번이 아니라 천 번이라도 큰절을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지난 6월26일 마지막 조합원 간담회가 식당에서 있던 날 저는 채길용 지회장에게 현장 복귀 기자회견을 거두어만 준다면 나는 지회장 당신에게 무릎이라도 꿇겠다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정리해고라는 무차별적인 살인행위를 막기 위해 수백일에 걸쳐 피눈물 나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혹한에도 그리고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한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와대로 국회로, 과천으로, 한나라당사로, 시청 앞으로, 노동부로, 심지어 지하철이며 조남호 회장의 집으로까지 노동조합에서 지침만 떨어지면 정년을 바로 코앞에 둔 나이 많으신 형님들이나 나이는 어리지만 형님들 힘들어 할까 싶어 자청해서 가겠다며 안전화 끈을 동여매고 군소리 하나 없이 뛰어나가는 동생들의 고생하는 모습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두의 노력 덕에 영도구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부산시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전국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정치권을 움직였고, 전국의 네티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동부장관 인사청문회를 시작으로 영수회담, 조남호 회장 청문회, 그리고 1차에 이어 2차 희망버스가 7월9일 여기 영도 땅 한진중공업으로 온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부당해고 무효소송 건에서 회사의 물을 먹고 사주를 받은 심판장들에 의해 지노위에서 기각을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노위가 남아 있고, 행정소송 절차로는 고법, 대법까지의 법적 절차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 한진중공업 노동조합보다 더 열악하고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진방스틸 노동조합이 대법까지 가는 힘든 산고를 겪으면서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그 판결을 받은 선례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싸움이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되고 승리가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장복귀라는 말도 안 되는 실언과 더불어 총구를 180도 선회하여 우리 해고자 동지들을 무차별 난사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근데 몇몇 상집 간부에게 노무부의 문자가 직접 하달이 되어 무조건 현장복귀 기자회견을 종용하고 빠져나가라는 지침까지 내려졌다는데 대해서는 살이 떨리고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다보니 6월29일 열렸던 청문회마저 한나라당과 조남호 회장이 불참하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동지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조남호 회장은 우리들을 죽이려고 하는 절차를 밟았지만 채길용 집행부는 그 절차에 따라 확인사살까지 하는 반노동자적인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민주노조와 동지들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서는 현장복귀가 되면 비해고자들이 현장에 파고들어 현장조직을 강화하고 다시금 노동조합 깃발을 세워보자고 소도 웃고 개도 웃을 얘기를 뻔뻔스럽게 하는 것이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동지 여러분, 회사는 정리해고된 파업대오가 저들의 생각대로만 되지 않자 흔들리고 일관성이 없는 노동조합을 이용한 것이 적중했던 것입니다. 사측의 계산된 술수에 채길용 집행부는 춤을 추고 말았던 것입니다.
85크레인 사수조가 행정대집행을 막기 위하여 85크레인 밑에서 연좌농성을 하면서 있다가 집행관들과 같이 따라붙은 용역들에 의해 개돼지처럼 끌려 나가는 수모를 겪고 있을 때 채길용 집행부는 이재용 사장과 만면의 웃음을 띤 악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지 여러분, 지금껏 너무나도 많은 어려움 속에서 싸워왔지 않습니까. 이 싸움이 얼마나 더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지치고 힘들고 어떨 땐 포기도 하고 싶고 가정적으로도 어려움은 있겠으나 절대로 물러설 수가 없는 싸움이기에 이겨내야만 합니다.
토끼 같은 우리 새끼들과 여태껏 죽어라 고생만 시킨 집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번 정리해고 싸움을 이겨야만 합니다.
앞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암초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쳐 나갑시다. 아니, 꼭 헤쳐 나가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승리하는 그날 가족들과 함께 동지들과 함께 삼겹살에 소주 한잔 했으면 좋겠습니다.
동지들, 우리 동지들이 85호에 머물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김진숙 지도위원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살아서 같이 내려오기 위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동지들, 우리 모두 힘냅시다. 그 길에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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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FocuS]2차 희망버스, 개인과 조직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묻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8/16 16:15
  • 수정일
    2011/08/16 16:15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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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얼굴들이 나타났다

 

6월11일 1차 희망버스에 참가한 약 700명의 사람들은 한진중공업 사측이 배치한 용역깡패에도 불구하고 공장 앞마당으로 들어가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고 돌아왔다. 1차 희망버스의 성공은 그동안 노동자 투쟁에 연대해왔던 각종 노동·사회단체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노동운동에는 익숙치 않으나 트위터 등 SNS를 통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투쟁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 역시 자극했다. 그 결과 7월9일에 진행된 2차 희망버스에서는 참가자가 1차보다 10배 가까이 늘었다.
희망버스를 기획한 문화연대 활동가 신유아씨에 따르면 1차 희망버스에서는 개별참가자들이 70% 이상의 비율을 보였다고 한다. 기존 노동·사회단체의 참가가 두드러진 2차 희망버스에서도 절반정도의 개별참가자들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개별참가자들 중에는 예전에 노동운동을 접해본 사람들이거나 활동가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오는 희망버스 참가자들의 후기 등을 고려할 때,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시민들이 한진중공업 투쟁을 계기로 노동자의 투쟁에 밀접하게 연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투쟁의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 1만 명이 한 사업장 투쟁에 연대하러 부산까지 내려온다는 것, 이는 매우 새로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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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럽고도 관성적인

 

2차 희망버스에는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노동자의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부산에 모였다. 이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부산역 집회는 폭우 속에서도 진행되었고 집회 이후 영도까지 이어진 행진 역시 다채로운 구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희망버스의 활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찰과의 대치가 길어지면서 2차 희망버스의 집회 진행 및 기타 실무를 담당했던 기획단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부산역 집회 이후 영도대교를 건너 85호 크레인을 향해 행진하는 도중, 봉래사거리에서 경찰의 차벽으로 인해 행진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행진대오 앞의 상황과 뒤의 상황은 잘 소통되지 않았고 행진 대오는 차벽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일부 학생 대오를 중심으로 차벽을 뚫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있는 85호 크레인으로 진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가운데 이후 대응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논의되지 않고 경찰을 규탄하는 방송차의 선동만이 계속되었다. 1차 희망버스 이후로 경찰의 강경한 대응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의해 행진이 막혔을 때 어떻게 일정을 진행할지에 대한 계획이 부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개별참가자가 배제될 수밖에 없는 관성적인 방식이었다. 대치과정에서 경찰은 집회대오를 향해 최루액을 난사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골목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 상황에서 희망버스 기획단이 중심이 되어 대오를 모아냈고 이는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차벽으로 가로막힌 가운데 이번에도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은 없었다. 이후에는 주로 노동·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개인 참가자의 발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희망버스 참가자의 절반이 개별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었던 만큼 단체 활동가뿐 아니라 개별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발언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인 참가자든, 조직 참가자든 관계없이 자신의 견해와 소감을 밝힐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는 않았다.
둘째 날, 2차 희망버스 전체의 일정을 조정하는 과정 역시 개인 참가자가 참여하기는 어려운 구조였다. 소위 ‘운동권’들만 참여하는 집회에서 익숙하게 들려오는 “조직 담당자들 나오세요"라는 말만 방송차에서 흘러나왔다. 조직 담당자가 없는 개인의 참여를 고려하지 않은 논의 방식이었다. 이는 기존의 노동운동·사회운동에 익숙한 단체들만이 중심이 되어 전술을 짜고 ‘판’을 운영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자발적 연대의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도록

 

2차 희망버스 이후, 개별적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조직적인 의사소통이 필요하다는 고민이 생기고 있다. 3차 희망버스를 위한 아이디어를 모으는 과정에서 많이 제기된 것 중 하나는 ‘어떻게 원활한 소통을 이뤄낼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버스별로 깃발을 만들고 버스별로 소통 구조를 만들자’, ‘게시판을 만들어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온라인상의 게시판에서 소통될 수 있게 하자’ 등등의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노동자 투쟁에 결합하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가 이미 성공적인 희망버스를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차 희망버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노동·사회단체 중심의 구조로는 개별참가자들의 자발적 의견제시를 배제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 이는 기존의 노동·사회단체들과 새롭게 노동자투쟁에 연대하기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 벽을 쌓을 수도 있다. 따라서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의사결정에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최근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노동자 투쟁에의 연대가 생명력을 잃지 않고 더욱 강화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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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FocuS]희망버스가 드러낸 빛과 그림자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8/16 16:08
  • 수정일
    2011/08/16 16:08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7월30일, 3차 희망버스가 출발했다. 7월9일에 출발했던 2차 희망버스와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함께했다. 처음에는 성사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던 희망버스는 희망자전거, 희망기차, 희망비행기 등으로 변주되면서 벌써 3차까지 진행되었다. 곧 4차 희망버스 일정도 진행될 예정이다.
지금까지 이어진 희망버스는 새롭게 등장한 자발적인 연대를 보여주었다.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기점으로 곳곳에 솟아나오기 시작한 자발적 연대는 85호 크레인을 중심으로 더욱 확대되고 적극적으로 변했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과 동시에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무력함도 재확인되고 있다. 사실상 정리해고 투쟁을 정리해버린 한진중공업 채길용 집행부는 금속노조로부터 어떠한 징계도 받지 않았다. 또한 조직노동운동의 핵심대오라고 여겨졌던 금속노조 현대·기아차지부 정규직 노동자들은 연대투쟁을 조직하기는커녕 희망버스 참여에도 소극적이었다. 한진중공업지회의 노사합의와 이제 4차를 예고하고 있는 희망버스에서 이러한 대비는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노조집행부의 노사합의, 분노를 이끌어내다

 

 

촛불문화제에서 발언하는 송경동시인

2차 희망버스가 한창 준비되고 있던 6월27일,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졌다. 채길용 지회장이 파업을 철회하고 업무를 정상화 하기로 하는 노사협의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한진중공업지회 지도부는 ‘해고자 중 희망자는 희망퇴직자와 동일한 처우를 받을 수 있다’고 협의함으로써 정리해고를 인정해버렸다. 심지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퇴거는 노조에서 책임진다는 내용까지 합의되었다.
한진중공업지회 집행부는 “농성 노조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밑바닥을 드러낸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파업을 철회했다고 밝혔다. 파업을 철회함에 따라 농성을 진행하던 비해고자 역시 7월1일자로 현장에 복귀했다.
사측과 노조집행부가 합의한 27일은 투쟁하던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들에게 강제퇴거조치가 강행된 날이었다. 사측의 침탈로 85호 크레인을 지키고 있던 조합원 대부분은 법원집행관과 용역깡패의 손에 끌려나왔다.
트위터 등 SNS를 통해 전해진 행정대집행 소식은 사람들의 분노와 연대를 이끌어냈다. 몇몇 시민들은 퇴근 후 부산으로 직접 내려가기도 했다. 직접 가기 어려운 사람들은 트위터를 통해 부산에 가는 사람들에게 교통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행정대집행에 대한 분노가 컸던 만큼, 채길용 한진중공업지회장에 대한 분노도 컸다. ‘채길용 지회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내용은 물론이고, ‘채길용 지회장을 공개수배한다’는 트윗들이 많이 올라왔다. 행정대집행 다음 날 서울 보신각에서 진행된 ‘한진 85호 크레인의 눈물’이라는 이름의 촛불문화제에서도 채길용 지회장에 대한 규탄이 이어졌다.

 

채길용과 거리를 두려는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의 상급단체인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은 합의가 이루어진 바로 다음날 채길용 지회장이 진행한 노사협의가 무효라고 선언했다. 금속노조는 산별노조라서 단체교섭권과 협약권은 금속노조 위원장에게만 있으며 정리해고와 같은 사안에서 금속노조 위원장의 위임이 없는 한 개별 사업장 노조위원장의 협의는 무효라는 것이다.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은 채길용 지회장을 비판하면서 정리해고 투쟁을 사수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또한 2차 희망버스에 함께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 사수에 대해 얼마나 진정성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6월28일, 한진중공업지회 집행부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애초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전국금속노동조합 부산양산지부, 그리고 한진중공업지회로 꾸린 ‘공동투쟁본부’는 6월30일까지 회사와 합의하는 것으로 정리했다"고 밝혔다. 또한 6월 말에 투쟁을 정리하고 해고자들은 현장 바깥의 투쟁으로 빼낼 계획이 있었으며, 공권력 투입 계획을 앞둔 상황에서 합의를 사흘 앞당긴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금속노조도, 민주노총 부산본부도 투쟁을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6월27일 한진중공업지회 집행부의 합의가 여론의 뭇매를 맞자 금속노조, 민주노총은 채길용 집행부의 독단적인 행동임을 부각시켰다. 채길용 집행부와 금속노조 사이에 차별성을 부각시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금속노조는 채길용 집행부에 대해서는 어떠한 제재도 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현재 인터넷 상에서 돌고 있는 채길용 집행부의 탄핵을 요구하는 서명 역시 금속노조 내부 혹은 조합원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노동자·시민’의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

 

금속노조의 현실

 

금속노조가 보이고 있는 태도는 현재 금속노조의 조직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금속노조의 주력대오라고 하는 완성차 정규직노조의 희망버스 참가율에서 잘 드러난다.
금속노조는 6월28일에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2차 희망버스에 노조간부 및 조합원까지 최대한 참석케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정작 7월9일 영도에서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은 잘 보이지 않았다. 현대자동차지부는 참여도 하지 않았으며 기아자동차지부는 몇몇 활동가와 노동조합 집행부만 참여했을 뿐이었다. 완성차 정규직노조는 휴가 기간과 겹치는 3차 희망버스에 아예 버스를 대절하지 않았다.
형식적인 상급단위를 대체했던 것은 전국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서울부터 천릿길을 걸어서 부산 영도로 찾아왔다. 희망버스 이전에도 쌍용자동차 가족대책위와 노동자들은 희망열차를 타고 85호 크레인을 방문하였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부산으로 모였다. 1300일 넘게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재능 학습지 노동자들과 사측의 노동조합 탄압에 맞서 투쟁하는 유성기업 노동자들도 희망버스에 탑승했다. 이렇듯 매번 연대 선언은 상급단체가 하지만 실제로 연대를 만들어 나간 이들은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집행부의 합의를 넘어서려는 ‘외부세력’

 

 

외부연대가 투쟁을 이어가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투쟁을 정리하려는 집행부와 무기력한 상급단체의 모습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투쟁은 두 가지 지점에서 새로워 보인다. 첫째로 한 사업장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연대하려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집결 장소는 남쪽 끝 부산이다.
이러한 자발적인 연대는 올해 초 벌어진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 때에도 엿볼 수 있었다.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에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1인 시위를 진행하고, 후원물품을 보내고, 집회에 참여했다. 이제는 그러한 연대가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공농성을 중심으로 한진중공업 투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두 번째로 놀라운 점은 외부의 연대가 이어지면서 노동조합 집행부가 사측에 백기투항한 이후에도 투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간 노동조합 집행부의 직권조인이 있었을 때, 이후에 그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있었어도 실질적으로 투쟁이 조직되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노사협상을 하면서 한진중공업 사측과 노동조합 역시 예전과 같은 양상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투쟁은 정리되는 수순을 밟지 않았다. 물론 현장에서의 분위기가 그리 좋지는 않다. 올해 초 투쟁하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는 700여명 이었지만 6월 말에는 그 수가 1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투쟁이 장기화되고 노동조합 지도부가 합의함에 따라 투쟁주체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주체가 소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공농성이 지속되고 희망버스를 겪으면서 외부의 연대가 확산되었다. 투쟁하는 조합원 수는 많지 않지만 사회적인 지지와 연대가 이 투쟁을 유지하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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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노동] 기로에 선 유성기업 투쟁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1/08/12 17:20
  • 수정일
    2011/08/16 16:03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5월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파업 소식으로 전국은 떠들썩했다. 유성기업은 엔진용 부품을 제조하여 현대기아차를 비롯한 남한 완성차공장에 납품하는 부품사이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부품업체의 파업으로 남한 완성차 공장들은 조업 중단에 내몰리기도 했다. 유성기업 사측은 임단협 과정에서 조합원에 대한 직장폐쇄를 단행했고, 이에 맞서 조합원들은 공장에 모여 집회를 진행하다가 자연스럽게 점거파업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공장점거투쟁은 용역과 공권력 투입으로 파괴되었고 사측은 회유와 협박을 일삼으며 조합원들을 위축시켰다. 점거투쟁이 정리된 지 두어 달이 지난 현재, 세간의 관심은 줄어들었지만 노조턴압에 맞선 유성기업지회 조합원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사측이 장악한 유성기업 현장은 무자비한 공격으로 초토화되고 있다.

 

기획된 공격 - 교섭해태, 직장폐쇄, 간부체포, 노조탈퇴, 그리고 어용노조 건설까지

 

언론은 2009년 노사가 합의했던 주간연속2교대 시행을 가지고 유성기업 투쟁이 불거졌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를 계기로 제조업 노동자들의 야간노동 실태와 주간연속2교대가 새삼스레 조명받기도 했다.
보수언론에 의한 이데올로기 공세도 몰아쳤다. 파업으로 인해 부품조달에 문제가 생기면서 남한경제를 지탱하는 완성차 조업이 중단될 것을 우려하며, 고임금 노동자의 이기적인 파업이 나라를 망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주간연속2교대와 관련해서는 완성차에서 아직 교대제 변화가 시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품사인 유성기업이 주간연속2교대를 먼저 시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둥, 부품공급의 다변화가 추구되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성기업 사측에게 주간연속2교대를 둘러싼 노사갈등은 단지 노조를 말살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2011년 임단협이 시작되면서 진행된 수차례의 교섭에서 사측은 불성실한 태도로 임하다가 직장폐쇄를 단행해 점거파업을 유도했다. 그리고는 용역깡패와 공권력을 동원하여 파업을 파괴하고 노조간부를 고소고발하여 구속·수배시켰다.
지도력에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사측은 조합원들을 회유·협박하며 분열시키는 수순을 밟았다. 일부 조합원만 선별복귀시킨 것이다. 현재 복귀자들은 어용노조를 설립하고 현장에서 가입원서를 받으러 돌아다니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사측이 복수노조 본격 시행과 맞물려 기획된 공격을 펼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 아산공장 앞 비닐하우스에 거점을 잡고 투쟁 중인 유성기업 조합원들 (출처 : 미디어충청)

 

현장장악 위해 인권탄압도 서슴지 않아

 

과거에는 임단협을 안정된 노사관계의 결과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측이 일방적으로 단협을 파기하거나 갱신하지 않음으로써 노조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교섭해태에 따른 파업과 파업파괴 이후 어용노조 설립이라는 수순은 최근 몇 년간 자본이 노조를 깨면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양상이다.
대공장인 쌍용자동차나 금호타이어뿐만 아니라 난 해 여름 점거파업을 벌였던 KEC나 그 이전의 대림자동차, 발레오만도와 같이 노조의 조직력이 살아있었던 지역의 중형기업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현재 이들 사업장에서는 어용노조가 득세하고 기존의 노조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밀려나거나 해고되어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는 실정이다.
현장에서 대의원과 활동가들의 노조활동이 유지되고 있었던 유성기업에서도 힘의 관계를 역전시키기 위해 사측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교섭을 해태하고 직장폐쇄하면서 선제공격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사측이 계약한 용역업체 CJ시큐리티가 경상병원, 국민체육진흥공단, 대우자판, 씨엔앰, 삼성물산 등에서도 활약한 노조파괴전문회사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측은 이에 그치지 않고 복귀한 노동자들에 대한 정신교육과 단속을 실시하고 있다. 사측은 나이가 많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조합원들은 복귀시키지 않았고 복귀하려는 조합원에게는 공장 정문을 지키는 용역 앞에서 ‘나는 개다’라고 외쳐야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모멸적인 짓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복귀자 환영식에서 충성서약서를 쓰게 하고 일하기 전에 컨설팅업체의 교육을 4시간 받게 하는 등 통제를 넘어서 인권탄압 수준에 이르는 노무관리를 벌이고 있다.
이러한 노조탄압에 공권력도 장단을 맞추고 있다. 경찰은 공장점거 당시 사측 용역이 조합원들을 향해 돌진하여 부상을 입힌 뺑소니를 과실이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경찰과 충돌한 것과 관련하여 사진채증한 것을 검증하기 위해 조합원의 부모에게 확인하거나, 국과수에 가서 사진을 찍으라고 조합원들을 협박하는 등 강압수사를 벌이고 있다.

 

 

 

 

노조탄압에 맞선 방어 필요해

 

점거파업 이후 유성기업지회는 사측의 선별복귀에 반대하며 일괄복귀를 선언하고 출근투쟁, 노동부 천안지청 점거, 상경투쟁 등을 이어나가고 있다. 또한 지도부에 체포영장이 떨어지자 비상대책위를 구성했다. 현재 노동부 주재로 노사교섭이 재개되었지만 사측은 여전히 시간끌기 중이다.
투쟁은 지역으로 퍼져나갔지만 현장 밖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활동하기는 녹록치 않다. 복귀하지 않은 조합원들은 공장 앞 비닐하우스를 거점으로 삼아 숙식을 해결하며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노동부 주재로 노사교섭이 재개되었지만 사측은 여전히 시간끌기 중이다.
김성태 아산공장지회장은 구속되었고 엄기한 아산공장부지회장과 이구영 영동공장지회장은 조계사에서 단식투쟁을 진행하다 건강이 급속히 나빠져 중단했다. 유성기업 아산공장 앞 굴다리 밑에서 단식농성을 진행하던 이재윤 비대위원 역시 단식 28일째인 지난 25일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투쟁이 시작되었던 시점에 받았던 여론의 관심과 달리 상급단체와 조직노동자들의 연대는 미미한 수준이다. 금속노조는 유성기업 사태해결을 위한 6월말 총파업을 결의했지만 이는 하계 임단투 흐름 속에 유실되고 말았다.
현대기아차를 비롯한 완성차지부는 단사 내 성과를 따내기 위해 무쟁의 흐름으로 가면서 부품사인 유성기업 투쟁을 사실상 외면하고 있다. 또한 7월16일에 유성기업 아산공장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결의대회에는 500여명이 참가하는 데 그쳐 상급단체의 조직이나 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예상을 뛰어넘는 사측의 도발에 노조들이 점거투쟁이나 전면파업 등 강력한 투쟁을 결의하며 노조를 사수하기 위해 저항했지만 현장의 권력은 자본에게 넘어가고 있다. 노동자들이 파업권을 거의 보장받지 못하는 현재의 노동탄압 국면에서 용역깡패의 폭력과 공권력의 비호 아래 치고 들어오는 자본의 탄압을 제대로 방어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수노조 시행 이후 어용노조의 난립이 예상되는 가운데 노조가 아직 살아있는 다른 중형사업장에서도 유성기업과 비슷한 양상으로 노조파괴공작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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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FocuS]되살아나는 공안탄압의 망령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8/02 14:20
  • 수정일
    2011/08/02 14:22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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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월10일 새벽 경찰은 2차 희망버스 집회 현장에서 참가자들에게 최루액을 뿜어대고 방패를 휘둘렀다. 그것도 모자라 무차별 연행을 시도해 50여명을 그 자리에서 끌고 갔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7000여명의 시민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85호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만나 응원의 마음, 공감의 마음을 전하려던 그 소박한 희망은 경찰의 잔인한 폭력에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2 7월10일 오후 국정원 등 공안당국이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아 국내에 ‘지하당’ 형태의 반국가단체를 조직한 혐의로 노동계, 학계, 언론계 인사 10여명을 수사 중이라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수사선상에 오른 이들의 집과 직장은 압수수색 되었고, 그 중 한명은 이미 구속되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뭇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공안당국의 언론플레이가 과거 군사정권 시절과 꼭 닮아 있어 시대를 거스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명박이 공안탄압의 칼을 또 다시 빼들었다. 레임덕의 격랑을 맞고 있지만 내년 총선과 대선을 결코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확인되었듯이 대중 스스로 사회적 요구와 불만을 직접 제기하고, 직접 행동에 나서는 움직임이 최근 들어 재현될 조짐을 보이자 내년 선거를 앞두고 사전정비 작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고전적 수법의 공안탄압

올해 들어 정권의 공안수사는 끊이질 않았다. 공안당국은 구시대의 악습인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각계각층을 차례로 탄압했다. 지난 3월 대학생 동아리인 ‘자본주의연구회’를 시작으로 5월에는 청년단체와 노동단체인 ‘6․15 공동선언 실천 청년학생연대’, ‘민주노동자 전국회의’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하며 조직사건 만들기에 나섰다.

현재 공안당국의 탄압양상은 이들 모임이나 단체 모두가 국가권력이 소위 ‘친북세력’이라 규정짓고 단죄하려 했던 통일운동 진영이라는 점에서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권기의 조직사건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87년 민주화 투쟁의 수혜를 입은 386 세대들이 집권세력의 일부로 편입된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는 공안사건이 주로 통일운동 진영에 국한되었다. 민주화 시대의 유산자임을 자처한 자유주의 정권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노동운동에 대해 강경탄압을 유지했지만 사회정치적 사안에 대해선 기존의 보수진영과 차별화를 꾀해 이념적 유연성을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명박을 통해 10년 만에 집권에 성공한 보수진영은 ‘잃어버린 10년’ 청산작업에 나서며 민주주의적 요구와 권리 전반에 대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되돌리려 했다.

때문에 적용 법률도 집시법이나 국가보안법만이 아니라 형법의 각 조항들, 통신비밀보호법, 전기통신사업법, 선거법 등 적용가능한 모든 법률을 찾아내 노동자서민의 반정부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차단하고 억압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운동세력에 대해서도 자유주의 정권 이전처럼 통일운동 진영 뿐 아니라 사회주의 정치를 표방한 운동세력까지 국가보안법을 확대․적용하였다. 그 결과 이명박 정권 들어 공안사건은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최근에 공안당국은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다시 통일운동 진영으로 집중하고 있다. 급기야 이들에 대해 북한의 지령으로 지하당을 만들려고 했다는, 과거 70~80년대에서나 있었을법한 조직사건으로 엮어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이러한 양상 변화는 지금 사회전반에 걸친 대중운동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최근 대중운동의 양상

작년 지방선거는 민주주의와 복지, 그리고 평화를 바라는 대중의 정치적 열망이 재확인된 자리였다. 천안함 사태로 이명박이 기획한 여론통제나 북풍몰이는 되레 여론의 역풍을 맞은 반면 무상급식을 비롯한 보편적 복지는 사회적 의제로 추인 받았다.

그럼에도 대중이 제기한 사회적 요구와 불만은 거리의 민주주의로 움터 나오진 못했다. 수출 대기업들의 화려한 실적과는 대조적으로 고물가 속에서 전세대란, 등록금 인상 등 서민경제의 주름살이 깊어가고, G20에 반대했다고 처벌당한 ‘쥐벽서’ 사건처럼 최소한의 민주주의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은 지속되었지만 제도정치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대중이 직접 발언하고 직접 행동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찾기란 좀처럼 어려웠다.
 

 

△6월 10일 등록금 촛불집회

하지만 지난 6월의 반값 등록금 운동은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50억 원대의 자산가이기도 한 오세훈마저 자녀 등록금 부담으로 허리가 휜다는 마당에 서민가계의 한계치를 넘어선 등록금 인상은 분명 전사회적인 문제였고, 반값 등록금 운동은 그래서 빠르게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물론 정권을 향해 이명박의 대선공약을 이행하라고 청구하는 반값 등록금 운동이 지닌 정치적 한계는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주목되는 건 이를 계기로 대중의 잠재력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미 지난 겨울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에서 가능성을 내비친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에 기초한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자발적인 실천은 반값 등록금 운동 과정에서도 그 보폭을 이어갔다.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다양한 요구와 그 표출은 특정 쟁점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되어 재점화된 거리의 민주주의는 6월 반값 등록금 운동에 이어 7월에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로 확산되었다.

한진중공업의 노조 지도부가 지난 6월 말 자본의 정리해고 방침에 사실상 백기투항을 했음에도 85호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 지도위원이 고립되지 않고 오히려 여론의 중심에 선 것은 이렇듯 다시 힘을 얻고 있는 전사회적인 대중운동의 확산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투쟁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무대가 재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물꼬가 터진 계기는 바로 광화문 거리에서 연행을 각오하며 반값 등록금을 외쳤던 통일운동 세력의 한국대학생연합에 의해서였다.

현재 통일운동 진영은 사회적으로 활성화 되고 있는 대중운동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나서고 있다. 때문에 공안당국은 이들을 우선 지목하며, 그동안 대학생모임․청년단체․노동단체 순으로 간헐적으로 수사한 밑그림을 가지고 이제는 본격적인 공안탄압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다.

이명박의 레임덕과 공안탄압

등록금․정리해고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노동자서민의 요구가 전사회적인 지지를 얻어가자 이명박도 처음엔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레임덕으로 인해 여론이 더 악화되는 것을 우려했던 탓이다. 지난 6월10일 1만여 명의 시위대는 2008년 촛불시위 이후 처음으로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거리행진을 갖기도 했다.

이렇듯 시간은 이제 이명박의 편이 아니다. 내년 총선과 대선이라는 양대 선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차기주자들 간에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면 이명박은 자칫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집권 후반기 이명박의 강공은 결국 앞으로 거세질 정치적 불안감에 대한 대비책으로 보인다. 여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이 7월15일 법무부 장관과 검찰 총장 자리에 자신의 측근인사를 내정한 다음 이를 고집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사정라인을 통제해 임기 말 권력누수를 최소화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정권의 기강확립에 나선 이명박이 겨냥하는 탄압방향도 반MB 전선으로 수렴되고 있는 민주대연합에 대한 ‘판 흔들기’로 설정했을 개연성이 높다. 통일운동 세력 중심인 민주노동당이 진보진영을 대표해 야권연대의 한축을 이루고자 하는 상황에서 이명박의 공안탄압은 민주노동당에 타격을 주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현재 대중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통일운동 진영을 향해 색깔론 공세를 퍼부음으로써 향후 보수층의 결집을 도모하는 한편 북한의 억압적 체제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민주노동당, 나아가 민주노동당이 참여할 야권연대에 대한 지지이반을 노리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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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전교조에 대한 대규모 탄압도 민주노동당에 대한 공격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지난 7월21일 검찰은 전교조 교사 200여명을 공무원 신분으로 민주노동당에 한 달에 5천원에서 2만원의 정치후원금을 냈다고 무더기로 기소했다.

이는 전교조에 대한 무력화 공세이자 노조 등 기존 운동세력의 소액기부금이 당 재정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우회적인 공격을 의미한다. 현재 검찰의 내사 대상자는 1500여명이어서 실제 기소자는 1000명 안팎이 될 것으로 예상되며, 그런 만큼 민주노동당의 정치활동 자체를 옥죌 것으로 보인다.

정권의 의도는 국정원이 이례적으로 전면에 나서 압수수색까지 했다는 것에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국정원은 국가보안법 관련 수사권을 갖고 있긴 하지만 통상 공개수사 전 정보수집만 담당하고 이후 사법처리 과정은 경찰과 검찰에 넘겨왔다.

하지만 이번에 국정원은 반값 등록금 운동 배후에 북한이 연계되어 있다며 학술단체인 한국대학교육연구소를 직접 압수수색하고 증거물이 없다는 증명서까지 발부했다. 국정원의 이러한 움직임은 무리한 수사를 했다는 점에서 일견 해프닝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국정원이 나설 정도로 정권 내부의 사정이 있음을 오히려 방증하고 있다.

민주주의 탄압에 맞서 투쟁 필요해

국정원까지 동원한 이명박의 공안탄압의 실체는 지난 7월29일 검찰의 발표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국정원과 검찰은 7월 들어 모두 5명을 구속하고 12명을 압수수색한 결과 ‘반국가단체 왕재산’ 사건으로 이름 짓고, 수사대상에 현직 구청장 2명을 포함해 시의원과 구의원 등 민주노동당 당원과 민주당 전 당직자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공개했다.

공안당국의 이러한 수사확대 및 강행방침은 지난 6월 이후 탄력을 받고 있는 대중운동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통일운동 진영을 겨냥해 조직사건을 터트려 분위기를 공안정국으로 몰아가면서, 거리의 민주주의에 동참한 개개인들을 향해서도 법에 따라 엄벌하겠다는 강경자세를 보이고 있다.

경찰은 이미 지난 6월부터 반값 등록금 집회에 참여한 대학생, 시민 중 200여명에게 소환장을 보낸 데 이어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참가자들 가운데에서도 120여명에게 소환통보를 하고 있다. 3차 희망버스가 끝난 직후인 8월1일에는 서울 대한문 앞 ‘희망단식단’ 농성장과 서울 시청광장 부근의 재능교육노조 농성장을 기습적으로 침탈했다. 경찰의 이 같은 탄압은 국정원의 색깔론 공세와 함께 대중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구시대적인 공안탄압으로 지금 전개되고 있는 대중운동을 위축시키고, 사회적 저항의 움직임을 차단하겠다는 정권의 의도부터가 순진하고 단순한 생각이다.

한진중공업을 향한 3차 희망버스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1만여 명의 참가로 대중운동의 물줄기가 정권의 기대처럼 줄어들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이후 4차 희망버스를 8월 하순 서울에서의 대규모 시위로 예고하고 있다. 또한 통일운동 세력과 투쟁거점들에 대한 탄압으로 대중운동의 흐름을 끊어내려는 정권의 의도와 달리 거리에서 펼쳐지고 있는 대중의 집단지성은 그 누구의 뜻도 의지도 아닌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 이는 존중받아야 하며, 또한 더욱 더 확대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경찰의 강경대응과 국정원의 공안탄압으로 본격화 하고 있는 정권의 공격에 대해선 민주노동당과 통일운동 진영에 대한 지지여부를 떠나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아내기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 노동자서민의 요구를 외면하고, 정치사상의 자유를 억누르는 정권의 탄압이 최소한의 생존권, 최소한의 민주주의마저 짓밟는 데 있음을 함께 인식하고 함께 투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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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독자편지]어느 교생의 이야기...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1/06/27 15:56
  • 수정일
    2011/06/27 15:59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한 독자회원이 교생실습 과정에서 느낀 소감문을 기고해주었다. 교생실습을 하면서 경험한 학내의 비민주성과 권위주의, 그리고 일부 학생들과 소통하려는 교사들과 그들의 좌절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어색한 마주침

지난해 여름, 언제 졸업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한 남자고등학교에 교육실습 신청서를 냈다. 이유야 간단했다. 새벽부터 불편한 정장을 차려 입고 나서기엔 집 근처 학교가 제일이었다. 물론 생판 모르는 학교보다는 졸업한 학교가 아무래도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신청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저만치 학생들이 보였다. 군인들처럼 머리를 짧게 하고 있었다. 누군가 매 맞는 소리도 귓가에 울렸다. 어쩜 예전과 그리 똑같은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해가 바뀌자 학교는 거짓말처럼 달라져 있었다. 교생 첫날, 일명 ‘스포츠머리’를 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교실 뒤에 걸린 커다란 거울을 보면서 머리 빗는 학생이 여럿 보였다. 어디 그 뿐이랴. 학교의 전통이라던 이른바 ‘떡매’도 볼 수 없었다. 학생들의 엉덩이를 떡을 치듯 때릴 수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떡매. 그 존재만으로도 학생들을 긴장과 공포로 몰아넣던 떡매가 이젠 학교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그래서일까. 학생들은 자유스러워보였다. 수업 시간이 다 돼 종이 울리고 교사들이 교실에 들어가라고 호루라기를 불고 소리를 쳐도 학생들은 느긋하게 걸어가며 재잘거렸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나사가 풀렸다며 성을 냈지만 학생들의 그런 모습이 내 눈에 싫지만은 않았다.
교생은 ‘교육실습생’의 준말이다. 하지만 내게 교생은 교사도 학생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로 느껴졌다. 교사 앞에선 학생보다 더 학생 같이 있다가도 막상 학생 앞에선 교사인 마냥 있어야 했다. 지금에 와서 그런 내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색하기만 했던 교생이라는 자리가 교육 현장을 들여다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교무실과 교실을 두루 둘러볼 수 있었고, 해서 학교라는 공간을 예전과는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던 까닭이다.

 

반민주적인 너무나도 반민주적인

 

출처: realcsn.tistory.com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흔히 전통이 깃든 도시라고 불린다. 자랑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되레 고루한 보수적인 분위기를 말하고 싶어서다. 변화에 둔감해서 그런지 옛것을 고집하는 문화가 아직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데, 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그중에서도 내가 나온 학교는 시내 학교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곳으로 손꼽혔다. 고교 평준화 지역이지만 학생들을 때려서라도 공부시켜 비평준화 지역만큼 소위 명문대에 보낸다는 것을 자랑이라고 들먹이는 데였다.
수십 년이나 이어졌다는 완고한 전통은 작년 가을 언론의 주목까지 받은 ‘떡매 사건’으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한 교사가 예전 방식 그대로 학생을 때린 것이 발단이었다.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는 소셜 미디어 시대에 엉덩이와 허벅지를 시퍼렇게 멍들게 한 잔혹한 체벌은 더 이상 암암리에 용납되지 않았다. 이를 고발하는 인터넷 기사가 곧바로 떴고, 결국 교장까지 물갈이 될 정도로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물리적인 체벌만 없어졌다 뿐이지 학생들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교육이 아닌 훈육을 받고 있었다. 체벌의 유무를 떠나 학교를 배회하고 있는 유령은 권위주의와 위계질서였다. 학생들에게 정해진 일과 시간, 즉 등교·수업·청소·야간 자율학습 등의 시간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절대 명제였다. 그 선을 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교사의 제재가 뒤따랐다. 벌점제와 수행평가는 체벌을 대신하는 훌륭한 제재 수단이었다. 학생들은 여전히 교사의 지시에, 학교의 규칙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권위주의로 포장된, 그래서 감히 넘볼 수 없다고 여겼던 학교의 위계질서가 예전만 못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간 학교의 엄격한 통제에 짓눌려 있던 학생들은 더는 웅크리지 않았다. 나름의 일탈을 꿈꾸기 시작했다. 획일성이라는 잣대로 학생들을 성적으로 줄 세우기에 여념이 없던 학교를 상대로 그들은 스스로의 욕구를 표출하고 싶어 했다. 그것의 귀결점은 단 하나, 공부의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었다.
거창한 건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 핸드폰 게임하고, 수업 시간에 자고, 청소 시간에 놀고, 그리고 언제나 와글와글 시끌벅적하고, 대충 이런 식이었다. 내가 봐도 참 밋밋했다. 굳이 덧붙이자면 학교 안에서 빈번해진 학생들의 흡연 문제가 있지 싶다. 하지만 교권추락의 사례로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다른 학교들과 견줘보자면 전반적으로 얌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군대는 저리 가라 할 정도 규제가 엄격했던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보인 변화는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다. 교사들은 그러한 균열에 근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교사와 학생이 날마다 대립하고 긴장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사실 교사와 학생이 뺏고 빼앗기는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지 않는가.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 이 학교에서도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정이라는 게 있었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 일도 없지 않았다. 그런 걸 모두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던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학교의 위계질서였다. 교장을 정점으로 수직 체계계화 한 권력 질서는 정작 학교 구성원의 다수이자 흔히 학교의 주인이라 치켜세우는 학생들을 소외와 배제로 내몰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는 중세의 봉건 영지와 다를 바 없었고, 영주와 마찬가지로 교장만이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학교는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보였고, 오직 반민주적인 깃발만이 펄럭여 보였다.

 

교사의 열정, 교사의 좌절

 

사용자 삽입 이미지일부 교사들도 이러한 학교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교사를 조롱하듯, 교사들은 교장을 조롱했다. 실제로 몇몇 교사들은 달라진 학교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나이가 20~30대로 젊거나 기간제 교사 ― 해가 갈수록 정교사 자리가 줄어듦에 따라 공립학교임에도 전체 교직원의 40% 정도가 기간제 교사였고, 젊은 교사들의 상당수는 기간제로 근무하고 있었다 ― 일수록 학생들 위에서 군림하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과 협력하는 교사가 되길 원했다.
동아리 활동이나 창의적 체험활동과 같은 시간엔 학생들과 함께 하기 위해 열심이었고, 수업 시간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과 토론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학생을 마주할 때도 권위주의에 물든 과거의 모습과 달리 편히 대하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런 모습에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곤 했다. ‘그래도 아직은….’
안타까운 건 이러한 노력들이 교사 개인의 문제로 한정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의지나 열정, 이런 걸로 말이다. 하지만 교사도 사람이다. 더구나 온갖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 개인적인 의지와 열정이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부장 교사는 교생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담임 10년 하면서 학생들한테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역시나 고고한 이상보다는 당면한 현실이 더 커다랗게 보이는 걸까.
어느 교사든 교직생활 초창기를 물어보면 대답은 한결 같았다. 누구나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교육에 대한 희망을 가슴 속 깊숙이 품고 있었다. 그러나 교사들은 말한다. ‘현실은 다르다고.’ 그리고 이런 말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결국에는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고.’
교사가 교육 현장에서 부딪치는 가장 커다란 벽은 다름 아닌 이 나라 공교육 체계였다. 좋든 싫든 국가의 방침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고, 학생들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다양한 욕구가 국영수를 중심으로 한 국가의 교육과정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학생들에게 교사는 그야말로 공교육의 화신일 수밖에 없다. 교사의 딜레마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하기 싫은 공부를 왜 해야 하느냐고, 공부 잘하는 애들 들러리 하기 싫다고, 지금 공부보다는 당장 돈 벌어야 한다고.’ 누군가의 인생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 어려운 게 또 있을까. 교사는 뭐라고 답해야 하는가. 집중이수제로 한 학기에 교과서 한 권을 다 봐야 할 정도로 진도 나가기에 급급한 교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교육’공무원이 아닌 교육‘공무원’으로 잡다한 교육행정 처리에 정작 자기수업 연구할 시간도 빠듯한 교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공교육 체계에서 겉도는 학생들의 요구와 불만이 무엇인지 최소한 공감이라도 하려면 방법은 한 가지다. 일단 학생들과 직접 대화부터 하는 거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의 밝은 빛뿐 아니라 어두운 그림자에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학생들과 대화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학생들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려는 교사에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교사 개인의 의지와 열정이 충만할 때야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러한 시간과 노력은 고스란히 자기 부담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한마디로 피곤하고 귀찮아지는 거다.
더군다나 미래가 보장된 정교사라면 사회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지위에, 교직생활 20년이면 노후가 보장되는 공무원연금에, 사실상 유급휴가인 방학마다 할 수 있는 재충전과 자기계발에, 그대로 안주하고픈 마음이 더 크지 않을까. 가뜩이나 교육 전반에 대한 교사의 재량권이 적은 마당에 꿈쩍도 하지 않는 공교육 체계는 더 거대하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 그 자리 그대로 순응한 교사는 더는 학생들과 함께 호흡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마음을 주고받는 교사가 아닌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교사로 전락하게 되는 거다. 이때 학교의 권력 질서가 안겨주는 권위주의는 외면할 수 없는 강렬하고 달콤한 유혹이지 않을까. 연차가 늘수록 편해지는데, 왜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학생들에게 그러한 교사는 단지 자신들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통제자일 뿐이다. 권위주의로 무장한 학교 질서의 재생산, 학교는 변하지 않는다.

 

위계질서가 아닌 대화와 소통으로

 

내가 겪은 학교에서 현재의 공교육은 학생들에게 희망이 아니었다. 날마다 옥죄는 학교의 통제와 흥미 잃은 수업의 반복에 학생들은 지쳐 있었다. 탈출구를 원하지만 기껏 한다는 게 일순간의 일탈뿐이었다. 공부와 성적으로 채워진 족쇄는 회색 벽돌로 구획된 교실로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교사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의 화살을 직접 맞는 교사들 역시 지쳐 보였다. 그런데도 공교육의 요새로 군림하는 학교는 굳건히 서 있었다.
때문에 한 달 남짓 교생을 하면서 몇 번이고 곱씹어 생각한 건 학교가 바뀌기 위해선 학교의 위계질서부터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화를 차단하고 교류를 억제하는 지금의 학교 질서에서는 그 무엇도 새롭게 시작할 수 없어 보였다. 수십 년 묵은 권위주의의 낡은 때부터 벗겨내, 우선은 학교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소통의 장부터 필요해 보였다.
이를 위해 학교 현장에서 당장 요구되는 것은 그 누가 됐든 자기의 불만과 요구를 말할 수 있고, 또한 이를 집단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의 보장일 것이다. 생소하고 어려울 건 없다. 초, 중, 고교 12년간 교과서에 반복해 등장하는 낱말이 바로 민주주의다. 저마다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하는 민주주의, 그것도 직접민주주의를 배운 대로 가르친 대로 직접 실행에 옮기면 된다. 최소한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만으로도 이는 가능하다.
서로 다른 배경과 서로 다른 꿈을 가진 학생들이, 이 나라 정책에 의해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분할된 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학교 안팎에서 제기되는 쟁점을 놓고 서로 대화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은 그러한 민주주의의 첫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이 활발해질수록,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또한 때때로 서로 논쟁하고 서로 설득할수록,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는 현 교육의 문제를 집단의 고민, 집단의 요구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는 사회 어느 곳보다도 가장 민주적이어야 한다. 학교는 사회 어느 곳보다도 가장 개방적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교생을 하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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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문화][기고]파리꼬뮌, 잊혀진 혹은 지워진 기억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1/06/27 15:44
  • 수정일
    2011/06/27 15:46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올해는 파리코뮌 140주년이다. 이에 <사노위 정치적 해산자 선언 모임>의 김병효 활동가가 파리꼬뮌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파리 탐방기를 기고해 주었다.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편집자주]

 

 

이제 막 여름 날씨가 시작되던 5월 중순, 파리코뮌 140주년을 맞아 파리를 찾았다.

밤늦게 출발한 비행기가 자정을 갓 넘길 무렵, 흐린 날씨 탓에 이륙 후 창밖으로 별빛도 비추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하바로프스크 상공에 이르자 비행기 창을 통해 여명이 비추기 시작했다. 여명이라기보다는 아마도 고위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백야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 때부터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창 밖에는 12시간 비행 내내 새벽빛이 비추었고, 저 아래 광활한 툰드라가 끝없이 펼쳐졌다. 5월이지만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채, 원시의 자태를 비추는 동토의 땅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경치구경도 잠시, 비행 기간은 내내 자다 깨다의 반복이었다. 드디어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할 무렵 시간은 시차 때문에 여전히 새벽녘이었고, 벌써 발걸음은 무거웠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숙소까지 이동해 짐을 풀고는 곧바로 첫 목적지로 향했다. 첫 목적지는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여는 빵집. 일단 배고픔을 해결해야 했으므로.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부터 파리코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파리코뮌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빵집 점원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로 그 빵집 바로 옆에 있는 오래된 수도꼭지가 옛날 파리의 공용 상수도가 있던 곳이란다. 맞은편에 있는 구청사 앞 광장은 파리코뮌 당시 꼬뮤나르드들이 집결했던 장소, 그리고 그 앞길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고가도로가 코뮌 최후의 격전지로서 당시 꼬뮤나르드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끝까지 버티던 지역이었단다. 지금은 그저 파리 외곽의 조용한 고가도로일 뿐이지만.
파리 전역이 코뮌의 현장이었기에 도시 곳곳에 많은 흔적이 남아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또 막상 찾아보면 별다른 특이한 장소를 찾기는 힘들었다. 이 격전지도 코뮌과 관련된 아무런 안내나 표지도 없었다. 파리가 코뮌 이후 1977년까지 불온한 도시로서 100년 넘도록 시장조차 없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럴 만하다 싶기고 했다. 파리코뮌 당시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던 부르주아지에게 있어 파리코뮌은 아마도 기억하기조차 싫은, 일종의 트라우마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지금도 진행형일 것이다. 그래서 파리코뮌과 관련된 역사를 가능하면 모조리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꼬뮌 기간에 희생된 부르주아지와 성직자를 기리기 위한 사크레쾨르 대성당이런 착잡한 마음도 잠시, 다음 일정으로는 파리에서의 다음 목적지인 몽마르트로 향했다. 몽마르트는 화가들의 광장으로도 유명하지만 바로 파리코뮌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몽마르트 가는 길에는 프랑스인 친구 한 명도 동행했다.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서 몽마르트 꼭대기의 사크레쾨르 대성당(Le Sacré-Cœur)을 바라보며 열심히 길을 재촉했다. 몽마르트 가장 높은 곳에 3개의 돔 구조로 이루어진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에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언덕길을 힘든지도 모르고 올랐다.
그런데 성당 앞에 펼쳐진 잔디 언덕에 이르렀을 때, 함께 가던 프랑스 친구가 이 성당의 유래를 아냐고 물었다. 몽마르트가 파리코뮌이 시작된 곳이니 당연히 파리코뮌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한 것 아니냐고 내 말에, 맞긴 맞는 말이란다. 파리코뮌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하여. 그런데 그 희생자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파리를 해방구로 만들었던, 하지만 부르주아지의 폭격으로 몽마르트 언덕에 매장된 수많은 꼬뮤나르드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희생자들은 코뮌 기간에 희생된 일부 부르주아지들과 성직자들이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애초에 코뮤나르드들의 무덤 위에 놓인 부르주아지의 승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순간 80년 광주가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희생자가 폭도가 되고, 가해자가 되었던 역사. 가해자가 오히려 민중의 편이자 희생자 대우를 받던 역사가, 이곳 파리에서도 반복되었구나......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향한 발걸음은 바로 거기서 멈췄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유롭게 앉거나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대화를 나누는 이 언덕이, 그리고 저 아름다운 건물이, 학살을 감추고 오히려 왜곡하는 것이었다니, 더 이상 성당을 구경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피해 화가들의 광장으로 가는 길에는 또 하나의 성당이 있다. 그것은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비하면 오래되고 초라한 성당이지만,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가운데 하나인 생피에르 성당(Église Saint-Pierre de Montmartre)이다. 파리코뮌의 학살 이후에도 파리 시민들은 교회와 부르주아지들이 ‘코뮌의 범죄에 대한 앙갚음’이라는 의미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건축하는데 골몰하는 동안 이를 무시하고 생피에르 성당에 다녔다고 한다. 코뮌의 후예들은 이처럼 괴멸적인 타격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오후에 화가들의 광장과 몽마르트 주변을 더 둘러보긴 했지만, 더 이상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다음 날은 일찍부터 ‘펠라쉐즈 묘역’(Le Cimetière du Père-Lachaise)을 찾았다. 1871년 파리코뮌의 마지막 투사들이 처형된 ‘코뮌 용사들의 담장’(Mur des Fédérés)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찾은 펠라쉐즈는 고즈넉했다. 파리코뮌 희생자들의 묘가 있다고 하는 서북쪽 출구를 통해 펠라쉐즈에 들어섰다. 입구 바로 안쪽의 안내지도에는 전체 묘역의 대략적인 구분과 유명 인사들이 안장된 곳이 표시되어 있었다. 쇼팽, 짐 모리슨, 오스카 와일드, 이사도라 덩컨 등 문화예술계의 거장들과 학자, 정치인, 그리고 잘 모르는 수많은 혁명가들……. 파리 최대 규모의 공원묘지이니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전날 미리 인터넷에서 위치는 확인해뒀지만, 안내지도에도 표시가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간혹 펠라쉐즈를 찾는 프랑스인, 외국인 관광객들이 있었지만, 파리코뮌 희생자들이 이곳에 처형당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러시아에서 온 한 무리 관광객들은 짐 모리슨을 찾아왔다고 했다. 미국에서 온 또 다른 무리 관광객들은 오스카 와일드를 찾았다. 지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파리코뮌에 대해 하냐고 물었고, 대부분은 모른다고 답했다. 간혹 파리코뮌 희생자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아무도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하는 수 없이 외벽을 따라가며 과거의 흔적을 더듬었다. 전체 2킬로미터가 넘는 외벽을 따라 묘비를 하나하나 확인해가기 시작했지만 파리코뮌 희생자들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정문 안내소에서조차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여기서 얻은 팸플릿에도 수십 명의 유명 인사들의 묘역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파리코뮌 희생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파리코뮌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 그리고 그 최후의 희생자들의 역사에 대해 부르주아 정부가 철저히 삭제한 느낌이었다. 마치 절대 기억하지 말아야 할 금기인 것처럼…….
그래도 이왕 온 김에, 묘역을 둘러보기로 했다. 묘역 곳곳에 거리 이름을 붙이고, 마치 산 자들이 사는 것처럼 교회면 광장이며 설치해 둔 것이 이채로웠다. 크고 작은 묘비들이 제각각 망자들의 집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이 호흡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 파리코뮌의 희생자들은 집도, 이름도 없이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일행들과 함께 두 시간 넘게 묘역을 헤맨 끝에 결국 반대편 출구를 향했다. 결국 묘역 탐사를 마치고 동쪽 출구로 빠져나오려는 순간, 그래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출구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 현지인에게 다시 물었다. 스페인 억양의 관리인은 우리가 방금 지나온 서쪽 외벽이 바로 마지막 희생자들이 처형된 곳이며, 처형된 이후 그대로 버려져서 따로 묘역은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어차피 명확한 표시는 없고, 대략 그 즈음이라고만 알고 있다고 했다.
만약 다시 들어가 찾고자 했으면, 묘역 어딘가에 있을 ‘코뮌 용사들의 담장’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덩굴에 가려진 담장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던 여느 묘비 뒤편 어딘가에 초라하게나마 코뮌 용사들을 기억하는 흔적들이 넝쿨에 가려져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허망하고, 안타까웠다. 광주의 원혼처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없이 죽어간 원혼들이여.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도 않는 곳에…….
아마도 한 주만 늦게 이곳을 찾았더라면, 매년 5월 마지막 주에 있는 파리코뮌 희생자 기념행사 대열을 따라 쉽게 그 담장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년에 한 차례 특별한 기념행사 때라야 겨우 흔적이라도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안내지도 및 팸플릿에 명확하게 파리코뮌의 용사들의 자리를 표시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

펠라쉐즈 묘역 밖의 이주노동자 시위대아쉬움을 뒤로 하고 펠라쉐즈를 나서는 순간, 300여 명 가량 되는 이주노동자 시위 행렬과 마주쳤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핸드폰 카메라를 찍으며 대열에 합류하려고 다가가는 순간, 시위에 참가하는 노동자 중 일부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대부분 식민지 출신의 불법 체류자인 이주노동자들이 얼굴을 찍히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인 것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합법적 체류 보장과, 노동자로서의 동등한 대구를 요구하는 이들의 시위에서 펠라쉐즈에서 찾지 못한 코뮌 투사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파리코뮌 만세!! 혁명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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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노동] 야간노동 철폐를 위한 우리의 투쟁 요구_주간연속2교대제 현 논의의 문제점과 08년 우리의 투쟁 요구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1/06/24 19:02
  • 수정일
    2011/06/27 15:4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출처 : 미디어 충청

 

김지현 jihyun@jinbo.net
 

 

최근 유성기업 투쟁을 통해 주간연속2교대제가 다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현대자동차 1차 부품업체인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는 최근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을 포함한 임단협 과정에서 파업에 나섰다가 직장폐쇄를 당했다.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의 출발점인 현대자동차 현장조직들은 성명서를 내고 유성기업 투쟁이 주간연속2교대제를 둘러싼 대리전이라고 선언했지만, 완성차대공장에서 주간연속2교대제 투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주간연속2교대제에 대한 완성차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열망이 크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노동조건의 후퇴를 막기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대신 임금을 일정부분 삭감하여 주간연속2교대제를 수용할 것이 예상된다. 애초에 원칙으로 제기되었던 3무원칙(임금삭감, 노동시간 연장, 노동강도 강화 없는 주간연속2교대제)은 이미 교섭의제에서 사라진지 오래이다.

문제는 유성기업의 사례에서 보다시피 부품사에서 주간연속2교대제는 노조탄압과 구조조정의 빌미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완성차 정규직노동자들을 제외한 자동차산업의 여타노동자들에게 주간연속2교대제는 구조조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특히 주간연속2교대제가 시행될 경우 완성차 대공장의 사내하청노동자들은 대규모 해고와 노동조건 하락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노신은 2008년 발간한 잡지 <사회주의노동자>에서 「야간노동철폐를 위한 우리의 요구」라는 기사를 통해 당시 진행되던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주간연속2교대제 쟁취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열망인 “야간노동 철폐, 구조조정 분쇄, 생활임금 쟁취, 노동유연화 분쇄”를 걸고 전체 노동자의 투쟁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글이 나온지 3년이 지나 그 사이 상황도 변하고 글 속에 제시된 우리의 인식 역시 일부 변화했지만, 주간연속2교대제에서 완성차 노동자만의 요구가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기본으로 가져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하여 [The FocuS]에 다시 게재한다. [편집자주]


현대자동차지부는 2005년 단체교섭을 통해 2009년 1월1일부터 주간연속2교대제를 실시하기로 사측과 합의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금속노조는 이 시기를 활용하여 자동차 산업 전체로 주간연속2교대를 정착시키고 노동시간 단축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2008년 중앙협약에 ‘노동시간 단축과 교대제 개선에 대한 항’을 제출하고 6대 요구안 중 하나로 상정하여 집중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가 완성차 대공장노조의 이해를 넘어 전체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의 이해를 담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 글에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전체노동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노동자계급은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제시해 보고자 한다.


주간연속2교대제의 현재 논의 내용

주간연속2교대제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일부 부품사에서 2009년 1월1일부터 시행에 합의를 하였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의 여파가 해당 단사뿐만 아니라 관련 하청업체나 동종업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금속노조 전반의 문제로 가져가야 할 사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에서의 노사 논의에 기반하고 있어 논의 자체가 현대자동차지부의 논의 과정에 좌우되고 있으며 자동차, 그 중 대공장에 한해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기에 여기서는 현대자동차에서의 논의를 중심으로 주간연속2교대제의 논의 진행 상황을 살펴보도록 한다.

현대자동차지부는 기업별노조였던 2005년 단체교섭을 통해 09년 1월1일부터 주간연속2교대제 도입에 합의했다. 현대자동차지부는 2005년 단체교섭을 앞두고 2004년 주야맞교대 근무로 인한 건강장해 실태조사를 통해 주야맞교대근무가 건강상 미치는 악영향으로부터 주간연속2교대제 도입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생활임금을 확보 받지 못하고, 노동조건을 개악시키는 현행 시급제의 월급제로의 전환문제 역시 처음 제기되었다.

금속노조에서 연구한 결과를 보더라도 주간연속2교대로의 전환의 주된 이유로 장시간 노동에 따른 건강장해, 중대재해, 사망사고의 빈번 등이 꼽히고 있다. 하지만 보다 실제적인 이유는 조합원들의 고령화에 대한 대비와 자동차산업의 과잉경쟁, 해외공장 증설에 따른 고용불안에 따른 물량 확보와 임금보전에 있다. 생산 물량의 축소에 따른 고용 불안과 임금 삭감이라는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장기적으로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금속노조는 2008년 주간연속2교대제 대응과 관련하여 “▲노동시간 연장 없는 주간연속 2교대제 ▲임금삭감 없는 주간연속2교대제 ▲노동강도 강화 없는 주간연속 2교대제 ▲완성사와 부품사를 포함한 금속노동자 전체의 교대제 변경 ▲주간연속 2교대 실현의 중심과제는 실노동시간 축소다” 등을 대응원칙 및 정책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금속노조에서 내걸고 현대자동차지부 또한 3가지 원칙으로 동감하고 있고 그 방향 하에 추진되고 있는 주간연속2교대제가 이러한 희망을 안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주간연속2교대제, 노동자에게 희망을 안겨줄 것인가?
 

1) 과거 노동시간 단축 경험과 해외 교대제 전환 사례로부터의 교훈, 견지해야 될 자세

해외에서, 특히 유럽에서의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된 협약이 체결된 시기를 보면 자본이 신자유주의 흐름, 유연성의 강화를 도입했던 시기와 맞물리며, 대부분의 노조에서 신자유주의 흐름에 맞서기 위한 전략적 대안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제기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모든 협약이 노동시간단축과 유연화의 교환이라는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시간 단축은 독일의 경우에서처럼 노조가 형상을 통해 타협점을 찾는 방식을 취할 때 그 당시 경제여건에 따라 크게 좌우되며 노동자에게 절대선(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노조는 노동시간을 단축시켰으나 임금인상 자제, 유연화 확대적용 등을 수용하면서 노동시간단축이 목표로 하는 고용유지나 창출의 여력을 축소시키고 임금감축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기업비용의 증가를 상쇄시켜 자본은 어떠한 손해 없이 유연성을 강화를 관철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명목상의 임금은 삭감되지 않았으나 협상임금 인상을 자제하거나 임금협약을 3년 단위로 계약하게 되었고 예상했던 것보다 실제 물가상승률이 높아지면서 실질임금이 삭감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또한 유연화의 확대적용(탄력적노동시간제의 기간 확대)으로 시간외 노동 할증임금 부분이 줄어드는 등 실질소득이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했다.

교대제 변화 과정 또한 노동시간 단축과 맞물리는 것으로 유사한 결과를 낳았다. 90년대 후반 유럽과 일본의 교대제 변화 과정을 보면, 협약노동시간이 단축되는 과정에서 자동차 회사들이 추가적인 설비 투자를 하기보다는 기존 설비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가동시간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교대제 변경을 꾀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주간 2교대제가 생산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3교대제의 도입 추세가 강하게 나타났으며, 98년 현재 유럽에서 자동차 생산량의 절반 정도는 3교대제 공장에서 생산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또한 회사의 입장에서는 추가비용부담을 적게 가져가면서 생산량을 확보하려 하기 때문에 잔업과 특근을 선호한다. 협약노동시간이 줄더라도 가동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확대하는 것은 회사측으로서는 중요하다. 하지만 가동시간의 증가에 따른 비용대비 이익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주간2교대제에서 순환/고정3교대제로 전환한 공장의 경우 대부분 근무형태의 변경이 인원충원과 함께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의 경우 24시간 풀가동하고 있는 조립공장이 그리 많지 않다. 이 보다는 주말 노동을 위해 주말 노동자를 정해진 기간 동안만 계약하거나 대행업체를 통해 고용했다. 일본의 경우엔 우리와 마찬가지로 필요 인력을 정규직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드는 비정규직을 투입하여 해소하거나 휴일 근무의 경우 할증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법정외 휴일인 토요일을 활용했다.

또한 회사는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물량생산의 필요에 따라 초과 노동에 따른 금전보상을 하지 않고 생산을 할 수 있는 노동시간계좌제도를 도입하였다. 일본에서는 연차휴가소진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도요타의 경우 2003년 전사적으로 연차휴가소진운동을 벌였고 혼다의 경우엔 휴가를 사용하지 않는 조합원이 있으면 그 사유를 확인하며 대체사용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독일의 노동시간계좌제도와는 다르지만 노동시간 단축과 회사의 비용절감이라는 측면에서는 유사한 전략이다.

해외의 노동시간 단축과 교대제 사례에서 노동시간단축과 유연화 사이의 상관관계를 인식해야 한다. 노동시간이 짧은 곳일수록 교대제가 다양하고 교대제 시스템에 유연성 요소를 포함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즉 노동시간의 단축과 노동시간의 유연성은 서로 관련이 없는 개별적인 흐름이 아니라, 회사와 노동자들이 서로의 이해관계를 위해 서로의 요구를 맞교환한 것이다. 결국 노동조합의 입장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을 얻었지만 반대로 자본의 입장에서는 유연화의 실현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2005년 주간연속2교대제에 현대자본이 합의를 하고 2006년 월급제로의 전환을 전제한 것은 자본의 이해가 결합하는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령화로 인한 장시간 노동의 비효율성과 생산의 유연화의 필요, 전환배치나 탄력적노동시간제 적용 등의 유연성의 강화 등 자본 스스로 원하는 지점이 있기에 합의에 이르렀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교섭석상에서 유연성의 확대와 연계되는 노동시간 단축 논의는 노동자에게 득보다는 장기적으로 실이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우려지점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2) 노사간 협상으로 가져가는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의 우려지점

주간연속2교대제를 이야기하며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장시간 노동 문제 해결과 심야노동에 대한 근절이다. 실제로 2교대를 하는 노동자들 가운데 심야노동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야간노동 철폐 문제는 현실적으로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노동시간 단축의 문제는 자본의 입장에선 생산량 감소 문제와 연동된다. 또한 생산량 감소는 임금감소와 연동된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생산량이 감소되고 생산량의 감소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단위 노동시간동안 생산되는 물량을 증가시키는 것, 노동강도 강화를 통해 유지하고 이를 통해 임금을 유지시켜주는 논리를 펼 것이다. 실제로 현대자동차 자본은 노동시간의 단계적 감축과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UPH 상승과 자유로운 배치전환 등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노동자의 대응은 임금의 문제와 물량의 문제, 고용과 물량의 문제의 연결 고리를 끊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임금이라는 것은 물량에 따라 책정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생활에 필요한 수준을 기준으로 자본과 노동자간의 힘 관계에서 책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물량이 부족한 부분은 생산설비를 증가시키고인원을 증가시키는 것을 통해 문제 해결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원칙적 입장에서 후퇴하게 된다면 금속노조가 추진하는 주간연속2교대제의 경우도 유럽의 경우처럼 노동시간은 부분 축소시킬지라도 야간노동이 일정 유지되고, 노동자들의 휴게시간은 축소되며, 노동 강도는 강화되고 유연화 정책은 도입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과잉 경쟁과 미국발 경기침체의 국면에서 제기되는 이러한 요구와 그에 따른 근무형태의 전반적 변화 과정은 사회연대전략이 보편적 방향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현실에서 노동자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출처 : 미디어 충청

3) 주간연속2교대제 추진 과정에서의 문제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는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과 일부 부품사에 한정된 요구이다.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로 받아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논의나 준비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완성차 공장에서의 교대제 변경에 사내외 협력업체들의 경우 직·간접적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완성차와 관련된 협력업체들의 문제까지 종합적으로 사고되고 대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일부 완성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관철하는 과정에서 사내외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희생이 뒤따를 수도 있다.

현재 현대자동차를 보면 1차 부품협력업체가 대략 440개로 파악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교대제가 변경될 경우 직서열 업체냐 아니냐에 따라 효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우선 생산의 동기화가 필수적인 직서열 업체의 경우 완성차와 근무형태를 동일하게 변경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해당되는 업체는 부품업체 전체의 5% 정도로 완성차에서 주간연속2교대제를 실시할 때 이를 동일하게 적용받을 사업장은 미비하다. 나머지 부품업체들의 경우 완성차에서의 근무제 변경에 맞춰 자신들이 근무형태를 굳이 변경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근무형태 변경에 따른 물량감소부분이 부품업체 노동자들에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금속노련이 조사한 부품사 실태를 보면 부품업체들이 납품거래의 다양화에도 불구하고 실제 최대 납품처는 대부분 완성차그룹업체 혹은 자기사업장 관계사-계열사 등에 한정되어 있고 최대 납품처에 대한 거래의존도가 매우 높은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즉 외관상 납품거래의 다변화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특정 기업(그룹)의 전속도가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이러한 높은 전속도는 기업의 매출과 수익을 제약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부품업체들이 매출액의 상당부분을 완성차에 의존하고 있고 전속성이 심하기 때문에 완성차 주간연속2교대제는 경영상황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특히 물량이 감소할 경우 매출액은 감소하는 반면 인건비는 증대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악화될 수 있다. 생존을 위해 생산성을 향상시키려 해도 추가투자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일정한 한계에 봉착할 수도 있다. 특히 현대차 계열사가 아닌 독립적 부품업체의 경우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대제 소요 비용을 CR 등을 통해 부품사들에 전가할 것이라는 우려 또한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다시 비용 절감을 위한 생산의 해외이전, 구조조정과 외주화, 비정규직화를 본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 하에 임금축소와 노동 강도 강화를 거부하기는 더욱 힘든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물량의 축소는 제한된 물량을 둘러싼 부품사간의 경쟁심화를 낳을 가능성이 있어 그 과정에서 개별 부품사들의 도산과 인수합병 등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부품업계 전반의 구조조정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이 또한 현대자본이 원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현재(이 글이 쓰여진 2008년 당시) 현대자동차지부에서 울산과 경주지역 부품사들과 간담회를 진행한 바 있다. 구체적 내용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현대자동차지부와 금속노조에서 언급했던 정도의 약속 정도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1500여개의 부품업체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이로 인한 20여만 명의 부품업체 노동자들의 고용과 전망을 염두에 두고, 완성차 노조로서의 역할과 대안 마련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는 약속으로 대공장 노동자들의 이해를 위해 부품사, 사내외 하청노동자들의 향후 노동조건의 문제를 좌우할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이 문제는 관련된 주체들의 논의를 통해 공동의 요구안을 형성하고 이를 관철시킬 집단의 계획과 투쟁의 준비를 통해 관철시켜야 한다.

또한 현대자동차지부는 조합원들에게 주간연속2교대제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공개하고 지부의 입장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현재 현장제조직에서는 노사전문위에서 다뤄진 내용이 전혀 공개되지 않고 현장에 배포된 설문조사 내용이 사측의 안에 노동조합 주체인 노동자의 의식을 오히려 유도하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이뤄졌다. 현장에 배포된 설문조사 내용의 의도가 결국 사측의 안에 대한 노동조합의 수용 또는 절충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며, 이를 기초로 주간연속 2교대 실시의 연기나 책임을 현장으로 돌리려 하는 것에 다름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리고 4월 15일 현대자동차지부 정책기획실에서 연 주간연속2교대제 관련 대토론회에서도 “2대 지부가 전문위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조합원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있다”며 공개 비판했다.

주간연속2교대제는 노동자들의 이후 노동조건의 전반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으로 반드시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 현재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단체들이 ‘올바른 주간연속2교대제로의 전환’이라며 이런저런 방향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주간연속2교대제로의 전환 그 자체가 투쟁의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주간연속2교대제는 야간노동 철폐라는 요구로부터 대안으로 제시된 근무형태일 뿐이며, 자동차산업 전체를 볼 때 완성차 정규직을 비롯한 일부의 요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가시적 성과를 위해 현실의 투쟁 요구들을 후퇴시키는 협의가 이뤄져서는 안 된다.


 

출처 : 미디어 충청


전체 노동자의 이해로 가져가기 위한 우리의 요구


주간연속2교대제는 수세적 국면에서 정리해고 중심의 구조조정에 피하기 위해 제출하고 있는 요구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공장 정규직의 이해로 제한되고 있는 부분들은 분명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는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 국면에서 노동계급은 다음과 같은 핵심 요구를 가지고 완성차에 제한되지 않는 전체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야간노동 철폐, 생활임금쟁취, 구조조정 저지! 노동유연화 분쇄!
 

1) 전체 노동자의 야간노동 철폐

야간노동철폐는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열망이다. 2003년 현대자동차노조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66.6%의 노동자들이 10년 이상 주야맞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장시간 반복된 주야맞교대 근무는 심각한 수면장해를 일으키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하루 수면시간은 주간근무시 6~7시간이 46.5%로 가장 많았고 야간근무시에는 5~6시간이 26.2%로 가장 많았다. 응답자의 52.2%가 8시간 이상이 필요한 수면시간으로 응답하였으나 실제로 8시간 이상을 자고 있는 노동자들은 주간 근무시 9.1%, 야간근무시 4.8%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질수록 수면길이가 짧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야맞교대 근무를 하는 노동자들의 경우 전체적으로 수면길이가 짧아지면서 잠을 깨는 현상이 주간근무시에도 나타나 전체적으로 수면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자다 깬 횟수가 1회 이상인 경우가 주간근무시 58%, 야간근무시 79%였고, 야간근무시 38.8% 노동자들이 3회 이상 자다 깨는 것으로 나타나 야간근무시 더 자주 깸으로써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피곤한 상태에서 계속 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작업시작시와 작업종료시의 각성도와 심한 졸리움(각성도 7-9)에 대한 결과를 보면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작업시작시 상시주간 근무자의 5.2%만 ‘심한 졸리움’상태라고 했는데, 야간근무자의 경우 22.8%가 ‘심한 졸리움 상태’라고 응답하였다. 작업종료시엔 더 많이 차이가 났는데 상시주간 근무자의 26.9%가 ‘심한 졸리움’을 호소하는 반면 야간근무자는 81.1%가 ‘심한 졸리움’을 호소했다. 그리고 야간근무시 야식시간 이후인 02시부터 피곤한 정도가 점점 증가하여 마지막 타임인 06시부터 08시가 가장 피로도가 높은 시간대로 나왔다. 결국 야간근무자는 심한 졸리움의 상태로 일을 시작하거나 종료하고 있으며 일을 하는 과정에서 피로도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체중감소를 제외하고도 상시주간 근무자와 주야맞교대 근무자의 질병유병률의 차이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주야맞교대 근무로 인한 질병 양상 조사에서 위장장해가 51.7%, 심혈관계 질환이 15%, 정신장해가 37.1%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나이가 많아질수록 유병률이 높아지고 있어, 나이가 많아질수록 근속년수가 높아지고 야간노동을 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위장장해, 심혈관계 질환, 정신장해 유병률이 높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노동자들은 장기적인 야간노동에 노출되면서 이로 인한 건강장해들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간노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ILO(국제노동기구)는 40세가 넘는 노동자는 야간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고 독일 수면의학회는 주야맞교대 하는 노동자의 평균수명이 13년 이상 짧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야간노동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이를 보완하기 위한 모색들이 이뤄지고 있다. 야간노동 금지 문제는 전체 노동자들의 건강한 삶과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이뤄져야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야간노동 철폐의 문제는 한 사업장의 문제 해결로 이뤄질 수 없고 전체 노동자들의 대안을 형성해야 하며 이와 연동된 임금이나 노동 강도 등의 문제들과 함께 종합적으로 사고되어야 한다. 하기에 다음의 두 가지 요구를 함께 외치는 것이 필요하다.
 

2) 법정노동시간에 준한 생활임금 쟁취!

2004년 7월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었지만 실제로 지켜지는 직장은 많지 않다. 노동시간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남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여전히 길다. OECD(경제개발협력기구)자료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남한 노동자들의 연간노동시간은 2354시간으로 비교 대상 나라들 가운데 가장 길었다. 우리나라 제조업 노동시간은 2005년 주당 46.9시간으로 ILO(국제노동기구) 회원국 65개국 가운데 59위로 나타났다. 금속노조 자료에 따르면 금속노조 조합원의 주당 노동시간은 54.17시간, 주당 노동일수는 5.48일로 나타났다. 이 중 주 6일 이상 일하는 노동자가 42%, 주 7일 일하는 노동자도 9%나 됐다.

주5일제가 법적으로 도입되고 확대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이렇게 긴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현대자동차지부에서의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93.7%의 조합원들이 초과노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초과노동 없이는 생활이 힘들어서 미래의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라고 답변했고 79.8%의 노동자들이 생활임금 확보 시 초과노동 여부를 묻는 질문에 “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했다. 40시간 노동제가 법적으로 도입되었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생활임금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장시간 노동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인해 실제적 노동시간이 줄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귀족노동자라고 하는 현대자동차 생산직 노동자의 경우 19년차 시급이 5322원이다. 40시간 노동을 했을 때 1533만원이 된다. 여기에 상여금이 1011만원, 복지수당이 18만원이고 근속수당이 108만원, 기타 가족수당과 장려금, 휴가비 등이 연간 232만 원 정도 추가된다. 이를 모두 더해도 통상 연봉은 2901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보수·경제지들이 비난하는 귀족노조에 걸맞은 임금을 받으려면 살인적인 잔업과 특근을 해야 한다. 19년차의 경우 잔업 시급이 5322원의 150%, 7983원이 된다. 10시 이후와 휴일에는 야간근로수당 100%를 가산, 시급이 1만 644원이 된다.(참고) 생활임금 확보를 위해 잔업과 특근에 목매는 것이다.

임금 노동자들의 경우 생활임금이 쟁취되지 않는 속에서는 자본이 요구하는 장기간의 노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전체 노동자들의 생활임금이 쟁취될 때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또한 근절될 수 있을 것이다.

3) 구조조정 저지! 노동유연화 저지!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 속에서의 자본의 노림수는 명확하다. 이미 현대자동차 자본은 자신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노조는 “제도변경에 따른 근로시간 감축 분은 회사측이 설비투자를 늘리거나 인력충원을 통해 이뤄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자본은 “주간연속2교대를 시행하면 종전대비 1인당 3~4시간 정도 라인 가동시간이 감소하는데 그만큼 임금감축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또한 물량을 보전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9+8, 9+9의 단계적 도입과 오전, 오후반 사이의 잔업시간 확보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UPH UP, 편성효율 증대, 가동률 향상, 차종투입 및 생산일정과 수요에 따른 물량조정, 원가절감, 전환 배치 자유화, 능력에 따른 직무직능급 등등을 제기하고 있다.

주간연속2교대제로의 전환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측은 물량을 볼모로 수많은 요구들을 들이밀고 있다. 하지만 이는 회사측의 논리와 사정일 뿐이다. 자본은 지금까지 최소한의 비용으로 생산량을 늘리는 최선의 대안으로 교대제를 선택했고, 이미 현대자동차 등은 고용인원을 늘리기보다는 노동시간과 노동 강도를 늘리는 것을 통해, 비정규직의 사용을 확대하는 것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해 왔다. 이런 손쉬운 방법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완성차 대공장의 주간연속2교제 시행은 자연스럽게 부품사의 구조조정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완성차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용보장을 위해 이러한 부품사 노동자들의 이해가 희생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노동유연화 기제들은 대규모의 구조조정과는 달리 현재의 고용을 보장하기 때문에 노조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고 위기를 넘기려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그리고 몇몇 노조들은 이미 이러한 부분들을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유연화의 수용은 현장에서 그나마 가지고 있는 노동자의 권력을 자본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즘 완성차4사 노조들에서 수용하고 있는 전환배치는 단기적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를 불러오고 있지만 이것으로 감당되지 않을 때, 그 다음 수순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이다. 이러한 전환배치 자유화를 수용한다는 것은 생사여탈권을 자본에게 쥐어주는 꼴이다. 그리고 UPH UP이나 편성효율 증대 등도 인간능력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는 자동화나 노동시간의 증대를 불러올 것이다.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 과정 속에서 요구하는 자본의 유연화 요구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 구조조정을 저지하기 위해 지금부터 자본의 공격에 날을 세우고 맞서야 한다. 더 이상 현장의 권력을 자본에게 이양해서는 안 된다.
 


[보론] 완성차의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가
부품사와 부품사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금속노조에서 내놓은 자료에 의하면, 2005년 자동차 산업 관련 직간접적인 고용인원은 총 152만 7천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 자동차 생산에 직접 관련 있는 완성차 제조에 종사하는 종사자수는 약 10만 6천여 명, 자동차부품 제조에 종사하고 있는 종사자 수는 약 15만 4천여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완성차 제조에 종사하는 노동자보다 1.5배나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 완성차 자본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를 전후로 한 자동차산업의 급격한 구조재편에 따라 국내 생산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수요독점적 지위가 강화되면서,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하는 계열사들이 부품산업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새로운 분업 체계, 즉 수직적 계열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현대차는 독립적인 부품기업을 인수하거나 핵심부품을 인수합병하거나 핵심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을 신규설립하고 난 후, 발주물량의 몰아주기와 높은 단가설정을 통해 계열사들의 급성장을 촉진시켰다. 또한 동일부품을 계열회사에도 발주함으로써 독립 업체를 불공정한 경쟁관계에 놓이게 할뿐만 아니라 부당한 단가인하 압력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도록 만들고 있다.

자동차생산방식이 모듈화와 시스템화로 발전하고 있기에 종합모듈업체로서 현대모비스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모듈화와 시스템화를 주도하는 1차 핵심부품업체가 완성차업체의 계열사로 대체되고 있으며 기존의 중소규모 1차 부품업체는 2·3차 부품업체로 전락하고 있다. 또한 현대자동차의 계열사 여부와 관계없이 단가인하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부품업체 간 경쟁을 유발하기 위해 동일부품의 경우 계열사에게도 단가인하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계열사의 수익성 보장을 위해 내부거래 등의 방식으로 영업이익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써 장기적으로 중소협력업체들이 부품전문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재벌계열사의 하청업체로 전락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것은 외환위기 전후로 완성차업체의 매출이익은 상승하고 있는 반면, 부품기업은 하락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완성차업체의 매출이익은 매출원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조원가의 인하, 즉 부품업체들에 대한 납품단가 인하 압박이 작용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납품단가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부품업체들의 경우 매출이익률이 하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부품업체들은 완성차에 대한 전속성이 심하기에 원청업체에 항의하기 보다는 자신의 하청업체인 영세 2·3차 부품업체에 그 부담을 전가하거나노동자들의 임금 및 각종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게다가 정기적 단가인하 외에 원청의 경영상 사정악화를 빌미로 부정기적으로 임의적 단가인하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행은 주간연속2교대제 실시로부터 오는 원청업체의 손실을 고스란히 부품사에 전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부품사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 내지 노동강도 강화, 고용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

부품사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완성차 사내하청노동자들에게 미칠 영향 또한 클 것이다. 논의 초기 식당 노동자들의 경우 심야 노동이 불가피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며 주간연속2교대제가 불가능한 업무의 경우 상시야간조 구성이 이야기되었다. 공장 별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메인라인에 투입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경우 비정규직만으로 상시야간조 형성이 가능한 구조이다. 현재도 비정규직만으로 특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규직노동자들의 심야노동 철폐를 위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상시야간조 구성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를 정규직노조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남아 있는 문제는 많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월급체계를 정규직과 같은 조건의 월급제로 변경하지 않을 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식당노동자들의 경우 심야노동의 불가피함이 이야기되면서 3교대 방안도 나오는데 이와 관련하여 인원과 노동강도 문제 등이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식당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후퇴할 수밖에 없다. 이외에도 사내하청노동자들의 고용이나 근무형태, 출퇴근 문제 등에 미칠 영향은 큰데 1사1조직을 추진하는 완성차 정규직노조의 요구안에는 이러한 내용이 제외되어 있어 완성차 논의 결과에 따른 후속조치들에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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