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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Focus]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이 시작됐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6/24 17:34
  • 수정일
    2011/06/24 17:3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 85크레인과 희망버스가 만나 만들어낸 특이하고 특별한 연대
 


[편집자주]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성웅 (현중사내하청지회 부지회장)
 

 

 

출처 : 울산노동뉴스


미친등록금과 85크레인과 박종길 열사의 절규는 평면 위에 하나로 연결된 사건이자 현시기 계급투쟁의 낡은 것과 생성되고 있는 것의 대립과 투쟁을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정세지도이기도 하다.

한쪽에서는 박종길 열사의 절규를 서둘러 매장하고 산업평화를 선언하는 노동조합관료제의 공고함과 반동성이 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식물성 투쟁의지”로 요약되는 진정성이 있는 다양한 사람들, 조직노동자들과 미조직노동자들의 협력과 직접행동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이다.

“해방구에서 느낄 수 있는 감격을 맛봤다”, “그렇다 우리는 아름다운 불법이다”, “사람들이 담을 넘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기죽었던 조합원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라”, “오늘 투쟁의 역동성을 봤다”,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어울리면서 기쁨을 만끽하고 승리의 환희를 느꼈다”, “진정성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해방공간을 만들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이런 세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진조합원들은 가슴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내듯 감정이 북받쳤다”, “오늘 85크레인 아래에서의 시공간은 운동의 진정성이 만들어낸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가장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이 한 이야기들이다. 외롭고 높고 쓸쓸하고 슬프고 그 끝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탄압의 늪지를 통과하고 있는 동지들이 “해방구에서 느낄 수 있는 감격을 맛봤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원하고 있는 세상”이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확실히 85크레인과 희망버스가 만나 만들어낸 특이하고 특별한 연대는 하나의 사건이었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개화를 예고하고 있다.

 

고립된 섬에서의 구조신호


희망버스의 출발지는 한진중공업 85크레인이었다. “폐절된 공간에서 퇴화를 지연시키는 유일한 도구가 트위터였다. 손바닥보다 작은 스마트폰을 붙잡고 나는 세상을 향해 맹렬히 구조신호를 보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난파선의 필사적인 깃발을 용케 알아본 사람이 김여진”이었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였다.

이 땅의 모든 생산지가 내전상태이고 모두가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답답할 정도로, 목숨을 통해 호소해도 연대는 잘 조직되지 않고 노동조합관료제는 현장의 체념과 절망을 토대로 공고화되고 있다.

한진중공업도 마찬가지다. 한진중공업지회는 “쌍용차 꼴 나서는 안된다”는 두려움 앞에 “여론을 잡아야 한다”는 기조 하에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비판과 토론을 억압했다. “분열주의자들을 엄단하겠다”는 쟁대위 지침은 평조합원들의 말문을 막았고 그들을 동원대상, 지침에 단순히 따르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켰다. 지도부의 투쟁의지를 보지 못했던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희망퇴직으로 공장을 떠나가고 살아남은 조합원들도 농성장을 떠나갔다. 떠나는 조합원들의 뒷모습을 훤히 내려다봤던 김진숙 동지의 심정은 어떠하였겠는가?

고립된 섬, 85크레인 위에서 김진숙 동지는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하고 차갑고 딱딱한 그 강철 위에서 텃밭을 만들고 상추와 치커리와 방울토마토와 딸기의 씨를 뿌렸다. 전망을 찾지 못하고 떠나는 조합원들의 처진 어깨를 보며 눈물 흘리고 그 눈물을 거름 삼아 식물들을 키웠다. 그녀는 종파적인 심리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았고 상처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위계 없이 어깨 걸고 자라는 어린뿌리들의 합창에 보폭을 맞췄다. 규정하고 단죄하고 처내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실천을 통해 대화를 생산하고 마음을 두드려 움직이게 하고 반대자들의 칼끝조차 품어 적대를 누그러뜨렸다. 심지어 김진숙 동지는 고립된 섬에서 분열주의자라고 참주선동하는 지회 지도부를 향해 수확한 치커리와 방울토마토와 딸기를 내려보냈다. 김진숙 동지는 비난과 참주선동에 대해 식물성 투쟁의지로 화답했다.

내전의 한복판에서 김진숙 동지가 보낸 구조신호는 새로운 언어였다. 내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소박한 것이었고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필수적인 광합성 작용, 식물성 언어였다. 비난과 분열, 절망과 체념을 넉넉하게 품었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자극하는 따뜻한 언어였다.

“어 내가 보고 싶은 분, 거기 괜찮은가요?” 그렇게 김여진과 첫 접선이 이뤄졌고 희망버스가 기획되기 시작했다.

 

 

츨처 : 울산노동뉴스


진정성이 있는 사람들, 조직노동자와 미조직노동자들의 만남

희망버스는 비정규직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면 누구나 모이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에서 처음 발의됐고 기륭전자, 용산, 쌍용차 투쟁에 함께 했던 문학가, 미술가, 음악가, 판화가들이 결합하고 김진숙을 사랑한 노동자들이 참여함으로써 추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송경동 시인이 ‘희망의 버스’를 타고 가자는 글을 언론에 기고하고 배우 김여진과 홍세화, 문정현 신부가 함께 가자고 제안하면서 참가자들은 처음 서너대에서 17대의 버스로 늘어나게 됐다.

이 버스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자, 주부, 시인, 소설가, 화가, 판화가, 노령의 운동가, 교수, 전교조 선생님, 작은책 글쓰기 모임 회원들, 날라리 외부세력, 학생, 인터넷 보고 무작정 온 직장인, 영화작가, 고등학생, 대학생, 전문MC, 사진작가, 무엇보다도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탔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한 몸이 됐다.

날라리 외부세력은 말한다 “날라리들은 놀러 갑니다. 심각한 곳도 일단 놀면서 분위기를 살리고 놀면서 진숙 누님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그녀를 지켜주고 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한다. 자기들의 방식대로 마음을 담아 연대를 조직한 것이다. 진숙누님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은 정부와 자본의 무장한 사병들의 폭력을 통과하는 전투 자체였다. 그 전투를 그토록 즐겁게 해치울 수 있다니!

“진정성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은 10%에 속해 있는 조직노동자들이거나 10% 밖에 존재하는 90%의 미조직 노동자들이거나 노동자들의 자식들이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들은 투쟁을 조직하고 확대하기 이전에 먼저 자본의 지불능력을 고려하거나 국회의석 자리를 먼저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오늘도 자본으로부터 억압받고 탄압받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분노보다 눈물에 더 익숙하고 소심함에 더욱 가까워서 김진숙 동지처럼 고공농성을 할 자신도 없고 투사가 될 용기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약점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제도화되지 않는 실천적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투쟁해왔고 지금도 투쟁하고 있으며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 전통을 사수하고 있는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들과 가장 빠르게 손을 잡았다. 참 잘 어울리는 커플들이다.

진정성이 있는 이 다양한 사람들은 민주노총, 혹은 개량정당에 조직당하는 객체가 아니라 새로운 소통 수단을 통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눈물로 빚어진 따뜻한 연대에 참가하고 그 힘으로 무장한 공권력이 생산하는 두려움을 너끈하게 뛰어넘은 사람들이며 85크레인 그 죽음의 시공간에서 집단적인 놀이와 율동을 통해 살림의 시간을 생산해내는 놀라운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다.


적당한 타협과 뒷거래를 뛰어넘는 직접행동과 집회민주주의


희망버스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경찰은 책임자가 누구냐고 물어왔다. 촛불행진을 불허하고 전원연행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도를 통해 행진하는 것은 어떠냐고 회유책을 제안했지만 경찰과 타협할 책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희망버스는 평면 위의 협력이었지 위계를 갖는 수직적 구조가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책임자였다.

정문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민주노총과 민주당, 민주노동당과 경찰은 국회의원들의 항의방문과 정문 앞 촛불문화제의 컨셉을 잡아놓은 상황이었다.

진정성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공장 앞에 도착하자 곧바로 사다리가 내려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촛불을 들고 공장 담벼락을 넘기 시작했다. 칠순의 백기완 선생을 비롯해 10대의 고등학생까지 사다리를 타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허둥지둥 경찰들이 와 사다리를 빼앗으려 했지만 희망버스의 직접행동을 막지는 못했다.

한진중공업 박성호 조합원은 “공장 담을 타고 넘어오는 모습들을 보면서 한진 조합원들은 가슴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내듯 감정이 북받쳤다. 기죽었던 조합원들이 그렇게 좋아했다”며 “쌍용차 이후에 공권력이 무서워 대응조차 못하고 비폭력 비무장 속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왔고 위축돼 있었다. 희망버스가 공장을 넘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조합원들은 ‘할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공장에 진입한 촛불은 무장한 용역들의 폭력을 집단적인 협력과 직접행동을 통해 몰아냈다. 이명박 정부와 한진자본은 공권력과 용역깡패들을 동원해 쌍용차의 뼈아픈 기억을 연출하려 했지만 “실천촛불”은 자본가들을 비웃듯 보란 듯이 ‘불법적인’ 직접행동을 통해 공장을 해방구로 만들었다.

공권력과 용역깡패들의 일상적인 폭력을 견디며 투쟁해왔던 재능, 현대차, GM대우, 대우조선,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들, 특히 “쌍용차 꼴 나서는 안된다”는 한진중공업지회 지도부의 통제와 억압에 짓눌려 있었던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해방구에서 느끼는 감격을 안겨주었다.
촛불의 직접행동에 통제선은 없었다. 김진숙을 만나겠다는 충만한 의지, 어떻게든 85크레인 아래로 가서 힘을 주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에겐 무장한 사병들의 폭력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원연행 방침도 그들을 동요시킬 수 없었다. 그들에겐 만남에 대한 설래임, 애뜻함, 열정이 있었고 자본에 대한 분노와 긴장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공동행동에 참가했고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졌다.

 

 

출처 : 울산노동뉴스


촛불의 직접행동은 공장 안에 집회민주주의를 도입했다. 희망버스를 막기 위한 컨테이너는 집회 연단이 됐다. 누구나 연단에 올라 발언할 수 있었고 대화를 생산해냈다. 집회에서의 자발적인 발언은 세대를 넘어, 성별을 넘어, 신분제도의 차이를 넘어 동지적인 일체감을 갖도록 했고 집단적인 협력이 만들어 낸 이 해방구를 사수하겠다는 결의를 이끌어냈다.

민주노총 집회는 누구도 허락 없이 연단에 올라갈 수 없다. 조합원들은 배제되고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다. 중앙의 방침은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전투적 행동은 통제된다. 뻔한 연사의 뻔한 이야기는 폴리스라인을 따라 배치된다. 긴장도, 열정도, 분노도 없다.

자본가계급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 선언이 이뤄지는 장소가 민주노총의 집회라면 촛불의 직접행동이 공장에 도입한 것은“계급투쟁”이었다. 바로 계급투쟁을 조직하는 노동자 대중운동의 방식이 집회민주주의, 노동자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공장과 사회가 만나 신분제도의 차이를 뛰어넘는 공동체를 구성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너무 오래동안 공장 안에 갇혀 있었다. 임금과 고용에 매달려 있었고 조합주의적 전망에 갇혀 꿈도 희망도 빼앗겨 버렸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고립당했다. 100만 촛불을 가로 막고 선 바리케이트가 바로 민주노총이었고 10%의 조직노동자 운동이었다.

그런데 산업평화(?)가 유지되던 공장에 느닷없이 침입자가 들어왔다.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하나의 비판처럼, 대안처럼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쌍용차의 어두운 그늘에서 비무장, 비폭력 무대응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노동자들이 무장을 하지 않고서도 오직 집단적 협력만으로도 무장한 사병들을 공장 밖으로 몰아냈다. 노동자들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힘이 자신을 드러냈던 순간이었다.

이날은 세상과 담 쌓은 조합주의적 공장 담벼락이 무너진 날이다. 자본의 신분제도를 허용하고 오히려 이 신분제도로 자신을 둘러쌌던 부르주아의 성체, 노동조합관료제의 튼튼한 담벼락이 무너진 날이다.
공장 담벼락이 무너진 자리에는 공장과 사회가 만나 새로운 실천적 감각과 따뜻한 감성으로 무장한 공동체가 세워졌다. 자본가들이 도입한 신분제도의 다양한 위치에 속한 사람들이 그 차이 속에서도 먼저 손을 내밀고 따뜻한 웃음을 소통수단으로 교감하면서 즐거운 대화가 싹트고 집단적인 율동 속에서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건설했다.

공장과 사회가 만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만났다. 남성과 여성이 만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만나고 해고자와 현장노동자가 만나고 노동자와 학생이 만났다. 그들은 가장 깊은 어둠에서 여명까지, 여명에서 정오의 태양까지 발언하고 귀기울이고 노래하고 합창하며 손을 잡고 춤을 추며 하나가 됐다. 수직적 위계와 제도화된 차이와 비판을 억압하는 권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넘어서기 힘들다고 체념했던 자본의 신분제도는 믿지 못할 속도로, 그것도 한꺼번에 허물어져 내렸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이 시작되고 있다
 

85크레인 고공농성은 비정규직 우선해고, 사실상의 정리해고인 희망퇴직을 허용하고 상층 밀실교섭과 직권조인으로 마무리하려 했던 한진중공업지회 지도부의 노사협조주의에 맞선 투쟁이었다. “분열주의자들은 엄단하겠다”는 한진중공업지회 쟁대위 방침, 비판과 토론을 억압하는 관료주의에 맞선 투쟁이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지회 지도부도, 금속노조도, 10%의 조직노동자운동은 85크레인의 호소를 배제하고 고립시켰다. 실천적인 계급투쟁을 조직하지 않는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오히려 생산지로부터의 계급투쟁을 통제하고 수습하고 해체하는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이미 부르주아 지배질서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줬다. 자본의 유연화공세에 맞선 비타협적인 투쟁, 85크레인 고공농성의 호소에 대한 실천적인 화답이 희망버스였고 투쟁사업장 조직노동자들과 조직노동자운동 밖의 미조직노동자들이었다.
 

 

출처 : 울산노동뉴스

민주노총 사업계획 밖에서 공장으로 범람한 촛불의 “역습”은 노동조합관료제(관료화된 민주노총운동과 개량주의 진보정당운동의 결합)에 대한 실천적 비판이었다. 공장과 사회의 경계를 허물어 촛불이 공장에 도입한 것은 바로 노동자민주주의였고 대중파업 속에서 등장했던 민주노조운동의 유년기에 느꼈던 해방구에서의 기쁨과 감동을 표현하고 있었다. 계급투쟁이 해체되고 있는 공장에 계급투쟁을 도입한 것이다.

공장에 도입된 촛불은 무엇보다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분쇄투쟁의 주체적 힘을 회복하도록 자극했다.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은 더 이상 지도부의 지침에 무기력하게 따르는 수동화 된 개인이 아니었다. 지도부의 지침이 없이도 대화와 협력을 생산해내고 규율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직 촛불의 경험이 새로운 지도력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전진하지 못하고 있지만 노동자민주주의의 첫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진중공업에 도입된 촛불은 다른 사업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쌍용차 정문 앞에서 출근 투쟁을 하는 해고자들이 웃기 시작했다. 촛불에 함께 했던 그들, 소풍오듯이 왔다 가지 말고 이틀이고 한달이고 85크레인을 지키자고 호소했던 그들, 죽음을 견뎌낸 사람들의 웃음은 남다른 것이다.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있는 것들이 빚어낸 새로운 삶이기 때문이다.

85크레인과 희망버스가 만나 만들어낸 특이하고 특별한 연대, 공장에 도입된 촛불은 부르주아 지배질서의 필수불가결한 구성부분인 노동조합관료제를 그 한 복판에서 파괴할 수 있는 발견된 무기이다. 촛불의 경험은 위계화된 수직적 질서에 맞서 마당처럼 평등한 동지적 관계를, 제도화된 차이에 맞서 수평적 협력을, 관료적 명령에 맞서 집단적 율동이 빚어내는 비판과 토론을 생산해냈다. 공장에 도입된 촛불은 반복되고 확대재생산과정을 거치며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돼야 한다. 촛불이 생산해낸 이 특이하고 특별한 연대야말로 관료화된 10%의 조직노동자운동을 대체하고 뛰어넘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이며 이 운동의 거대한 출발이기 때문이다.

촛불은 아직 미약하다. 노동조합관료제를 넘어설 수 있는 전망과 조직적 힘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러나 “조직되지 않은 무작위 대중들의 행동”이라고 그 한계를 지적하기 이전에 이들이 생산해내고 있는 혁명적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 운동으로부터 배우며 이 운동을 공장으로 도입해야 한다. 조합주의적 선동의 내용을 재구성하고 공장 담벼락을 허물어 사회적 이슈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도록 이끌고 이 이슈가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대중적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공장에 도입된 촛불운동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갖출 수 있는 프로그램, 노동조합관료제를 역류하는 현장으로부터의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모든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라”는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호소는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고 전체 계급의 공동행동을 조직하는 슬로건이었다.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양재동 노숙농성을 할 때 지나가는 한 늙은 청소노동자가 “당신들이 희망이다”고 지지했고 이 지지는 청소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으로 연결됐다. 바로 이것이다. 촛불을 공장으로 도입해 현장으로부터의 계급투쟁을 조직하고 이 계급투쟁은 촛불을 자극하고 촛불의 지지를 이끌며 촛불에 자극받은 미조직노동자들이 자신의 공장과 직장에서 단결과 투쟁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민주노조운동이 결합되는 우리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다.

비극의 정점에서 이미 이 땅의 다수자들은 새로운 감각과 감성적 연대의 공동체를 구성하며 전진하고 있다 이 걸음에 보폭을 맞추면서 다만 한 걸음 앞서서 있을 수도 있는 약점을 보안하고 운동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갖추게 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지금 혁명적 주체는 새롭게 구성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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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정치][기고] 사노위 실패와 잠정적 교훈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1/06/24 17:25
  • 수정일
    2011/06/24 17:26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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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궁원 (사노위 정치적 해산자 선언모임)

 

자본주의 위기와 시대정신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를 전복하고자 한다. 사회주의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환경, 계급투쟁 상황에서 멀리 떨어져 관망하는 태도로 활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 역사적 전개와 주요 국면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프롤레타리아 대중투쟁의 조건과 욕망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몇 해 전부터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2008년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후,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위기(국가부도)와 유럽 · 북아프리카, 중국, 인도, 베트남 등지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 상황을 접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동 지역의 혁명적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 상황 전개 속에서, 사회주의자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혁명이란 단어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서구의 유명한 철학자 지젝이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영원히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계급투쟁에 능동적 개입과 ‘혁명적 행동에 나서는 레닌’1)을 우리에게 상기시킨 것은 의미심장하다. 더 나아가 지젝은, ‘다시 공산주의로’ 라는 슬로건으로 자신의 입장을 제출하고 있다.

지젝의 지적처럼, 지금 우리 사회주의자 앞에는, ‘다시 공산주의와 혁명적 행동’으로 표현되는 시대정신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바야흐로 “혁명이냐 자본의 재구성이냐”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순간이 우리를 행동하게끔 만들고 있다.2)

한편, 우리는 1980년대 이후로 형성된 한국의 민족민주세력과 진보세력의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사실은 자본주의 내 의회 좌파기구로 전락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진보정당- 산별노조 양 날개론). 최근 민족해방파와 구 피디(PD), 새 피디(PD)가 공유하고 있는 ‘통합진보정당론’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여전히 ‘비합법적 낭만주의’ 세력이, 단위사업장에만 갇혀 있는 ‘현장 만능주의’(전투적 조합주의)가 득세하고 있다.3)
 

사노위 출범과 강령, 조직 활동의 쟁점
 

이러한 자본주의 위기 정세와 한국 정치 지형 속에서, 사회주의 세력들은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노동자정당 추진위 건설을 위해 활동했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공동실천위원회>4) (이하 사노위)가 최종적으로 실패한 지금 시점에, 2009년 <사회주의혁명정당 건설 노동자공동정치투쟁단>, 1년간의 ‘사회주의당 건설 전면화를 위한 전국토론회’, 그리고 그 결실로 2010년 출범한 사노위 활동은 총괄적으로 평가돼야 한다. 여기서는 사노위를 중심으로 1차 평가를 진행한다. 필자는 사노위 활동의 실패를 되돌아보는 것이 이후 사회주의 당 건설과 정치활동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 고 믿는다.

사노위는 11개 정치원칙5)을 정하고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추진위를 목표로 1년간의 공동정치활동과 ‘강령상의 통일’을 위해 활동한 사회주의자의 공동실천 조직이다. 이렇게 출발한 사노위의 출범 정신은, “공공연한 사회주의 운동과 당 건설추진위 운동” 전면화로 요약된다. 출범정신에 비추어 볼 때, 사노위 안에서 중요한 과제는 강령과 조직 활동 문제였다.

첫째, 사노위에서 필요한 것은 각각의 이질적인 세력(3주체와 개별 활동가)들이 그간 활동했던 사회주의 이론적 실천과 부문, 영역, 현장 투쟁 (주체) 경험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는, 혁명주의 입장에 선 ‘총체적인 사회주의 강령 노선의 통일’이었다.

이러한 성과 위에서, 공공연한 사회주의 운동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강령’과 가장 ‘구체적인 정치 투쟁’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1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강령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강조하건데, 강령은 단지 이론의 산물이 아니다. 강령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국제 노동자 계급투쟁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래서 ‘구 사회주의의 몰락’ 원인과 ‘현존하는 가짜 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태도와 입장을 밝히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은 당추진위가 추구할 건설할 사회주의 상이며, 사회주의 정치 선전 선동과 직결된다.

또 다른 측면은 현 시기 자본주의 위기를 둘러싼 시대 규정이다. 시대 규정은 정치조직의 전략과 전술을 규정한다. 필자는 현 자본주의 위기를 단순히 경기순환상의 문제로 보지 않고, 자본주의 체계 자체의 역사적 쇠퇴 경향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제기해야 한다고 본다.

사노위 의견그룹 (초기 5인 연서명) 안은 구소련 사회성격을 국가자본주의로 보는데 대체로 동의하며, 중국, 북한 등을 노동자를 억압하는 자본주의로 인식하고 노동자가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반면 3인 (구 사노준 경향)안은 구소련 사회를 “꼬뮤니즘 사회로의 이행에 실패한 국가”로, 중국, 북한 등을 자본주의로 보는 것에 반대하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단지, 북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주체 형성을 지원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2인 (제4 인터내셔널) 안은 구소련 사회를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중국, 북한 등을 “기형적 노동자 국가”로 각각 규정한다.

특히 현 자본주의 위기와 관련한 정세 인식은, 의견그룹이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 경향”을 얘기한다면, 3인안은 “세계자본주의의 장기적-구조적 위기의 산물”로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사노위 안에서는 크게 봐서, 혁명주의에 입각한 의견그룹 강령 안과 유럽 코뮤니즘과 유사한 3인안 강령이 주요하게 대립했다.

 

 

 

둘째, 당 추진위 건설과 관련한 사노위 조직 활동 원칙과 운영 문제다. 중앙과 지역, 현장 분회 활동상을 어떻게 잡고 활동할 것인가가 초기에 중요했다. 특히 사노위 안에서 민주노총 현장조직파(?)인 노동전선과 어떻게 조직적 위상과 실천 관계를 맺고 활동할 것인가의 문제는 내부적으로 중요한 사항이었다.

사노위 일부 지역은 거의 노동전선 활동에 치중하고 있다. 사실상 사노위는 당 추진위 기초 조직으로 나가야 할 현장 분회 활동에 대한 자기 규정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사노위가 아무리 ‘사회주의 운동의 전면화, 대중화’를 소리 높여 내걸고 있음에도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뿐, 실제 각각의 일상 활동영역에서 회원들의 실천은 노동전선이나 단체, 부문운동의 한계 안에 안주하여 그 틀을 넘어서고 있지 못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노위 1차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가입원서 작성을 거부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앙에서 발행한 소책자 내용을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한 서평 내용을 문제 삼아, 사노위 다수파가 조직사업을 ‘부정 파괴하는 행위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이는 조직 내 ‘비판의 자유’마저 억압하는 행위이며, 서울지역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사회주의자통신>은 2호를 발간하고 종료됐다. 서평 글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 토론의 문제를 행정적인 방식으로 정리시키려고 하는 관료주의는 혁명정당 건설과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사노위 정치적 실패와 단일한 강령의 야합


조직 문제는 추상적인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집중적 표현이다. 사회주의 노동자당 (혁명당) 추진위 건설 문제는 당면 혁명의 성격(강령)과 조직 활동 노선을 서로 분리하지 않고, 동시에 추구함을 뜻한다. 당 추진위 건설은 사상 · 이론과 실천 · 행동을 접목해야한다. 사노위는 1년간의 활동을 통해 강령과 조직 활동상의 최소한의 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출범 정신에 따라, 사노위 3차 총회는 조직적 해산을 결정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노위 (구사노준 경향이 다수인) 중앙위원회는 “3차 총회에서 강령초안이 채택되지 않을 경우, 차기 총회에서 강령초안을 유보 없이 채택한다.”고 결정하여 다수파 중심의 강령 안을 표결로 밀어붙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한 “단일한 강령을 작성할 것을 전제로 강령기초위원을 선출한다”고 결정했다. 이미 단일안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낸 의견그룹 (5인안)의 강령기초위원들을 배제하고, 의견그룹 이탈 세력들을 새로 구성하는 강령기초위에 포함시켜 사실상 ‘밀실야합’으로 단일안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앙위원회의 결정이 사노위 3차 총회에서 기조로 결정된 것이다.


사노위 활동의 잠정적 교훈


사노위 정치적 해산 선언과 실패에 대해,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분열주의자, 서클주의자”로 몰아가는 소위 ‘사노위 대동단결론’과 다른 하나는 “내가 조직 깨질 거라고 했잖아!” 하며 빈정대는 ‘정치적 냉소주의’다.

사노위 실패, 즉 ‘사노위를 통한 당 건설 투쟁’이 실패로 결말났다고 해서 애초 사노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식의 평가에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사노위 실패에도 불구하고 1년여 기간 동안 사노위를 통한 당 건설 투쟁의 잠정적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점증하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맞서, 현장 계급투쟁에 대한 능동적 개입과 공공연한 사회주의 선전을 진행한 점이다.

둘째, 현 시기 남한 노동자계급운동 속에서 혁명정당 건설투쟁이 넘어야 할 강령적 과제와 토론, 조직 활동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셋째, 사회주의 (혁명)당 건설 운동을 전면화하는 데서 일정한 진전을 이루어냈다.

넷째, 사노위 강령· 조직 문제를 둘러싼 내부 투쟁에서, 구 서클적 질서와 해체를 통해, 명확한 정치적 지향과 강령적 사고 틀에 입각한 세력이 새롭게 결집됐다.

 

------------------- 각주

1)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원제: 문 앞에 다가온 혁명), 2008, 교양인)
2) 로렌 골드너,『역사적 순간이 우리를 만들고 있다』,
http://home.earthlink.net/~lrgoldner
3) 필자는 사회주의자가 “대중의 파업을 기술적으로 준비하고 지도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체 운동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데에 있어야”한다는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의 일갈(一喝)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4) 사노위는 당 추진위 건설을 목표로 3개 조직 (사노준, 사노련 일부, 노투련)과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추구하는 개별 활동가들 모여 출범했다.
5) 사노위 정치원칙은 △ 사회주의혁명정당 건설 △ 노동자국제주의 △ 노동자권력(대체권력) 수립 △ 사회주의 현장분회 건설 △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관점에서 여성, 소수자, 생태문제 포괄 등 11개 항목의 정치원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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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경제]자본은 대형투자은행을 원한다_ 메가뱅크 해프닝이 보여주는 남한자본의 금융정책

  • 분류
    경제
  • 등록일
    2011/06/24 17:02
  • 수정일
    2011/06/24 17:29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14일 금융위원회는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산은지주가 우리금융 입찰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써 지난달 17일 우리금융그룹 민영화 계획 발표 이후 한 달 동안 벌어진 메가뱅크 논란이 끝을 맺었다.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MB맨 강만수를 위해 관련 법령 개정까지 시도하며 우리금융그룹을 산은금융지주에 넘기려던 정부의 시도는 이렇게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다.

 

정말 모두 메가뱅크에 반대하는가

 

지난 3월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이명박의 최측근인 강만수를 삼고초려까지 해가며 산은금융지주 회장으로 모셔 왔다. 이명박 정부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는 대표적인 메가뱅크론자로 2008년에 우리은행과 산업은행, 기업은행을 합병하는 계획을 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산은금융지주 회장이 되자마자 이번에는 우리금융그룹 인수에 욕심을 냈다.
강만수의 메가뱅크 만들기 시도에 노조와 학계는 물론 언론과 정치권까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금융기관 대형화가 가지는 위험성이 드러났는데 메가뱅크를 추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보수 언론에서도 비판적인 기사를 연일 내보냈다. 민주당은 금융 당국이 함부로 금융지주회사법 시행령을 개정하지 못하도록 해당 시행령을 법률로 격상하는 개정안을 6월 국회에 상정하겠다고 예고했다. 여당인 한나라당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나올 만큼 강만수의 메가뱅크론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런 비판 속에서도 강만수는 꿋꿋이 자신의 지론을 펼쳤다. 외국계 자본의 지분 비율이 높은 다른 금융지주회사에 우리금융그룹을 넘겨줘서는 안 된다며 토종은행론을 들고 나오기도 하고 통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거대 국책은행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까지 내세웠다. 이런 강만수에 대해 정권이 바뀌면 가장 먼저 감옥에 갈 사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강만수의 메가뱅크론을 모두들 반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금융기관 대형화를 통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드물다. 자본의 입장에서도 금융 산업을 키우기 위해 대형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이를 통해 관치 금융적 관행이 되살아나고 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화될 것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뿐이다. 남한에서 금융 산업을 키우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진행해온 일이다.

 

금융 자유화와 개방

 

△노무현 정부는 남한 자본시장 발달을 촉진
하기 위해 금융허브전략을 세우고 서울과 부
산에 국제금융센터를 짓고 해외자본을 유치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사진은 여의도에 만들
어질 서울국제금융센터 조감도.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에서 금융의 역할은 제조업 성장을 돕는 보조적인 것이었다. 사적 자본의 축적이 부족한 상황에서 각 기업은 필요한 자금을 은행 대출을 통해 해결했다. 사실상 국유화되어 있던 금융기관들은 정부가 정한 전략 사업부문에 대규모 자금을 공급했다. 이런 특혜 속에서 재벌이라 불리는 대기업 집단이 탄생할 수 있었다.
금융 산업을 기업에 자금 지원을 하는 곳 정도로 인식했기 때문에 기업을 살리기 위해 금융권을 희생하는 일도 많았다. 예를 들어 1965년 금리자유화 조치 이후 중소기업의 자금사정이 악화되며 부도 위기가 오자 박정희 정부는 1972년 8월, 사채 동결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사용했다. 또 제대로 된 심사 없이 기업 대출을 방만하게 했기 때문에 각 금융기관들은 부실 채권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남한에서는 독립적인 금융자본이 성장하지 못했고, 관치금융 관행으로 인한 정부 관료와 기업 관료 간의 유착과 부패가 항상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은행에 대한 민영화 작업에 들어가긴 했지만, 정부는 여전히 은행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관치금융의 폐해는 근절되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금융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금 조달 방식에서 주식이나 채권 등 자본시장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기업간 인수합병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등 투자은행의 비중이 커진 것이다. 남한 역시 이런 영미식 금융시스템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세계화를 모토로 내건 김영삼 정부는 금융 규제 완화와 개방 정책을 펼쳤다. 금융산업을 단지 제조업 성장을 보조하는 자금 중개 기관이 아닌 독자적인 이윤 창출의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의 금융 자유화 정책은 금융기관들에 단기성 외채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 한보, 기아 등 대기업 부도가 잇따르자 부실을 견디지 못하고 금융회사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금융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외환 위기로 남한에는 대규모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다. 막대한 부실 채권을 안고 몰락했던 금융기관들은 퇴출되거나 통폐합되었다. 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여하여 은행들을 일시적으로 다시 국유화하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시행했다.
금융기관 통폐합을 통해 부실을 희석시키고 금융기관들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김대중 정부의 정책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구조조정으로 금융기관들의 수는 대폭 줄어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금융시장 개방에도 적극적이었다. 정부는 국유화된 금융부분을 산업자본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해외자본을 끌어 들이는 방식을 채택했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국유화된 제일은행, 서울은행은 구조조정 계획을 세우는 단계에서 이미 해외 매각이 결정되었다. 다른 금융기관들에서 외국계 자본이 차지하는 지분 비율 역시 꾸준히 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금융지주회사를 통한 겸업화가 추진되었다. 하나의 지주회사가 은행, 증권, 보험 등 다양한 업종의 금융회사를 거느릴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은행업에 비해 자본 집중이 부족한 증권, 보험업계의 대형화를 꾀하려 했다. 그러나 금융지주회사들의 중심은 여전히 상업은행이었고 증권업 대형화는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예금과 대출금리 차이에서 오는 마진을 주된 수익으로 삼는 은행업만으로는 금융산업을 발달시키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금융기관이 다양한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영미식 시스템으로 발전시키려면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고 남한의 증권사들을 미국식 투자은행과 같은 형태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제는 노무현 정부 들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2003년 12월 금융허브 전략 발표를 시작으로 노무현 정부는 금융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만들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추진한다. 자본시장통합법 제정을 통해 은행, 보험업을 제외한 모든 금융 업무를 하나로 통합해 미국식 투자은행이 만들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자본시장의 발달을 위해 파생상품 등 고위험 고수익 상품 개발을 장려했다.

 

정권은 바뀌어도 관료는 그대로

 

△ 금융계를 장악한 MB맨들. 김석동과 강만수가 합심해 우리금융그룹을 산은금융지주에 넘기려 하자 다른 측근들은 강만수를 위해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왼쪽부터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김석동 금융위원장, 이팔성 우리금융회장, 어윤대 KB금융그룹 회장,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

 

1997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을 손에 넣었지만, 경제 관료들은 바뀌지 않았다. 이는 노무현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는 모피아라 불리는 재무부 출신 경제 관료들의 수장격인 이헌재를 경제 부총리로 삼았다. 그 외에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 정책을 주도하던 관료들이 이명박 정부에서도 중용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이었던 윤증현은 노무현 정부 때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각종 금융 규제 완화를 주도했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기획재정부 장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현 금융위원장인 김석동 역시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외화자금 과장으로 있었으며 노무현 정부에서 재정경제부 1차관을 했던 인물이다. 현 지식경제부 장관인 최중경 역시 노무현 정부에서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으로 있으면서 고환율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이처럼 지난 20년 동안 남한의 금융 정책은 규제 완화와 금융기관 대형화, 겸업화라는 기조 아래 큰 변화 없이 추진되었다. 강만수의 메가뱅크는 그 연장선일 뿐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금융기관 대형화와 겸업화 허용이 가지는 위험성이 여실히 드러났는데도 관료 집단은 여전히 관성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경제 관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 역시 금융 산업이 영미식으로 재편되기를 바라고 있다. 강만수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것은 그가 추진하는 메가뱅크가 관치금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 대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우리은행과 산업은행을 합쳐 거대한 국책 은행을 만들게 되면 자연스레 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화된다. 또한 이는 우리금융지주와 산업은행, 기업은행을 민영화하겠다는 기존 정부의 정책과도 모순된다.

자본이 원하는 것은 투자은행의 탄생

 

남한에서 은행의 대형화는 이미 될 만큼 됐다. 이미 남한의 대형은행들은 업무 영역이나 지점들이 겹치는 곳이 많기 때문에 합병을 한다고 해도 몸집만 더 커질 뿐 아무런 시너지 효과가 없다. 때문에 부르주아 연구기관들은 남한 은행이 국내 시장에 안주하지 말고 해외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양한 수익 모델을 개발할 필요를 제기한다.
예금 수납과 대출을 주된 업무로 하는 상업은행은 자본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투자은행에 비해 사업의 범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상업은행은 투자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남한에서 금융 산업을 키워 이윤을 뽑아내려면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고 파생상품처럼 위험하지만 높은 수익을 내는 금융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또 이런 상품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는 투자은행을 만들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 투자은행과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는 증권사들의 경우 아직까지는 규모가 작아 미국 투자은행과 같은 업무를 감당할 수가 없다. 상위 5개 증권사들의 자기자본 규모는 미국 투자은행의 1/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증권사들이 위험 상품에도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자본 규모가 커져야만 자본시장 활성화도 가능하다. 정부의 규제 완화로 고위험 고수익 상품이 대거 시장에 쏟아져 나와도 이를 사는 사람이 없으면 자본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누군가 위험을 떠안으며 불쏘시개 역할을 해야 하는데 해외에서는 투자은행이 그 역할을 맡는다.
증권사 대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남한 증권사들은 비슷한 업무 영역에서 저가 출혈 경쟁을 벌이고 있다. M&A와 같은 수익성 높은 사업은 해외 투자은행이 독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증권사에 대한 규제 완화와 헤지펀드 허용 등을 통해 증권사 대형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 부르주아 연구기관들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말해 자본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은행 대형화가 아니라 증권사 대형화이다. 그런데 남한 증권사들은 대부분 대기업 집단의 계열사로 있기 때문에 증권사 간 인수합병을 통한 대형화는 불가능하다. 산은금융지주와 우리금융그룹 민영화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자회사인 대우증권과 우리투자증권 매각을 통해 대형 증권사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데 강만수가 두 금융지주회사를 하나로 합치겠다고 했으니 자본이 좋아할 리가 없다.

 

금융 대형화는 새로운 위기를 준비한다

 

남한에서 제조업을 통한 경제 성장은 한계에 다다랐다. 남한 수출대기업이 우위를 보이고 있는 산업에서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이 매섭게 추격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것이 예상되고 있다. 또 지나친 수출 의존도로 인해 대외적인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남한 경제의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산업 구조에 변화를 꾀해야 한다.
경기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 때마다 경기 부양의 버팀목으로 활용했던 부동산 시장 역시 더 성장할 가능성이 없다. 부동산 거품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가계부실도 심각한 상황이기에 부동산 가격 상승은 불가능하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부동산 수요도 전보다 줄어들 전망이다. 장기적으로 부동산 가격은 점진적으로 하락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 관료들과 자본은 금융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금융 산업을 키우려면 자본시장을 활발하게 만들기 위해 규제를 완화하고 금융부문의 문을 활짝 열어 해외 자본을 대거 끌어들여야 한다. 이 일을 강만수가 원하는 바대로 대형 국책은행을 만들어 관료들이 주도하거나 국가 소유의 금융기관 민영화를 통해 민간 자본이 주도권을 쥐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금융 혁신이니 금융 자유화니 하는 치장을 씌워 금융 산업에 대한 규제를 풀어버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융위기가 터지는 일이 빈번했다는 것이다. 초반에는 금융에 대한 투자가 늘면서 경기가 좋아지고 이윤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것이 거품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거품이 무너지면서 위기가 오고 다시 금융 규제 완화로 거품을 만드는 반복적인 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80년대 레이건 정부의 규제 완화 조치는 저축대부조합 부도라는 위기를 불러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까지 참여해 최신의 금융 기법을 도입했던 LTCM이라는 헤지펀드는 결국 1000억 달러라는 손실을 기록하며 생을 마감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역시 글래스-스티걸 법1) 폐지로 겸업화와 대형화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일어났다.
세계 금융위기가 터진지 5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위기가 올 때마다 그 피해는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생생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각주

1) 글래스스티걸법 [ Glass-Steagal Act ]
미국에서 1933년에 제정된 상업은행에 관한 법률로서 제안의원의 명칭을 따라 글래스 스티걸법이라고 불리고 있다. 서로 다른 금융업종간에 상호진출을 금했던 것이 요지이다. 1929년의 주가폭락과 그에 이은 경제대공황의 배경 가운데 하나로 상업은행의 방만한 경영과 이에 대한 규제장치가 없었다는 점이 지적됨으로써 이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은 지점망의 재조정, 연방예금보험제도의 창설, 예금금리의 상한설정, 연방준비제도의 강화, 투자은행업무로부터의 완전분리 등 이었는데, 그 결과 기업이 발행하는 유가증권 인수업무는 투자은행에만 한정되고 상업은행에 대해서는 일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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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환경]구제역, 육식시대에 경종을 울리다

 기고|문주란

 

지난 봄, 구제역 확산으로 수백만 마리의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정부가 구제역 확산을 막기 위해 무조건적인 살처분을 대안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식수 오염 등 2차 피해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 환경운동을 하는 문주란 동지가 구제역과 살처분 처리에 대해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였는지에 대해 글을 기고해 주었다. 기고글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주]

 

지난 4월17일에서 22일 사이 경북 영천의 돼지농가 3곳에서 구제역이 잇달아 발생했다. 이들 농가 돼지들은 모두 지난 1~2월 두 차례에 걸쳐 구제역 예방백신을 접종받았다. 정부가 가축이동제한 조치를 해제한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정부는 발생농가에 대해 살처분과 함께 이동제한 조치를 내리는 등 이 지역의 방역을 시작했다. 돼지 출하를 앞두고 있던 농민들은 지난 겨울과 봄에 시달렸던 공포가 되살아난 듯 구제역이 다시 창궐하지는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구제역 매몰지 침출수로 인해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와 농업용수의 오염으로 주민들의 고통과 불안이 커지고 있다.

 

재앙을 키우는 살처분

 

구제역이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넉 달 동안 소와 돼지 350만 마리가 살처분과 매립으로 죽어갔다. 급하게 방역 작업을 하다 보니 살아있는 돼지를 구덩이에 파묻기도 하고 지하수가 솟는 곳에 매립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엄청난 수의 살처분과 매립, 그리고 인수의 이동제한 등의 방역조치에도 불구하고 안동에서 처음 확인된 구제역은 진정되기는커녕 전국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정부는 구제역 바이러스가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안동의 한 농민에 의해 국내로 유입됐다고 발표했고 이의 확산을 막기 위한 방역활동으로 살처분과 매몰을 진행했다. 하지만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농민의 입국일과 구제역 발생일의 차이가 16일로 구제역 바이러스 평균 잠복기인 3~4일과 많이 차이가 났다. 구제역 바이러스 유전자형 검사에서도 안동 구제역 바이러스가 2010년 발생한 경기 강화와 충청지역 바이러스와 유사했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볼 때 이번 구제역 사태가 이미 국내 여러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구제역 바이러스의 발현에 의해 발생했다고 추정된다.
구제역 바이러스가 이미 자연에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면 유입경로 차단이 아니라 백신 접종을 통해 항체를 형성하고 동물의 면역력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예방하는 것이 적절하다. 구제역은 치사율이 1~5%정도로 구제역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치료가 진행되면 대다수의 가축이 죽지 않고 항체를 형성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구제역을 박멸할 수 있는 질병으로 간주하고 육류수출에 대한 욕심과 청정지역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350만 생명을 살처분했다. 그러나 살처분은 가축과 바이러스의 공진화(여러 개의 종(種)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진화하여 가는 일) 기회를 박탈하고 저항력 강한 가축 유전자를 제거함으로써 오히려 구제역의 확산을 가속화시키고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구제역 발병 가능성을 높이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더구나 지난해 남한의 쇠고기, 돼지고기 수출액은 22억원으로 이번 구제역으로 입은 피해 3조원과 비교할 때 청정지역에 대한 고집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재앙을 장기화시키는 매립

 

 

△ 출처 : 마창진환경운동연합

 

현재 전국적으로 구제역 매립지의 관리지침 미준수, 매립지 함몰, 침출수 노출, 악취 발생 등 매립지 사후관리의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다. 더욱이 곧 해빙에 따른 본격적인 부패가 진행되면 사후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홍수기를 맞아 심각한 2차 환경오염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5월27일 유원일 의원 발표에 따르면 모전리 일대 시설 하우스 세 곳의 지하수에서 가축 사체 유래물질이 각각 3.817mg/L, 1.120mg/L, 0.250mg/L 검출됐고, 한 가정집 지하수에서도 0.597mg/L이 나왔다. 정부 역시 지난 29일 전국 가축 매몰지 주변 지하수 수질검사 결과 143곳에서 음용수 수질 기준 이상의 오염물질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정부는 지금까지 매뉴얼대로 매몰할 경우 환경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번 모전리 매몰지는 매뉴얼 지침대로 매몰 상태가 상당히 양호함에도 불구하고 침출수로 인한 오염이 확인됐다. 특히 모전리 지역은 남한강 등 수도권의 상수원인 한강수계와 가까운 곳에 인접해 있어 침출수가 유출될 경우 수도권 상수원의 수질 오염이 심각하게 우려된다.
사체는 난분해성 고농도 유기물로 오랜 시간 잔류하며 지속적으로 오염을 발생시킨다. 침출수로 인해 지하수가 오염될 경우 회복시킬 방법이 없고 악취와 수질악화, 그리고 파리 등 곤충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주민들의 건강과 삶의 질을 악화시킬 위험이 높다. 따라서 매몰을 중단해야 하면 이미 매몰된 사체는 빠른 시간 안에 회수하여 폐기하고 매립지를 원상회복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재앙의 씨앗 공장식 축산

 

남한에서 1990년에 한 농가당 평균 2.62마리이던 한우가 2010년에는 16.86마리로, 34.05마리이던 돼지는 1237.63마리로 늘었다. 닭은 462.5마리에서 4만1051.88마리로 급증했다. 반면 돼지 한 마리에게 주어진 평균 농장 면적은 2001년 1.79㎡ (0.54평)에서 2010년 1.42㎡(0.43평)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또 1000마리 미만의 돼지를 키우는 농가는 마리당 평균 면적이 0.57평인 데 비해 5000마리 이상 농가는 0.39평에 불과했다(2010년 조사). 사육 규모가 큰 농장에서 크는 돼지일수록 좁게 사는 것이다.
햇빛도 안 들고 환기도 안 되는 비좁은 케이지에 바닥이 보일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니, 면역력이 떨어져 질병에 걸리기 쉽고 일단 한 마리가 감염되면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밖에도 생산성 증대를 위한 품종 개량은 가축의 유전적 다양성 손실을 초래해, 가축이 질병에 취약해지는 주원인이 됐다. 또한 면역력이 약화된 만큼 항생제를 남용하다보니 슈퍼박테리아나 신종플루 같은 변종 바이러스 출현이 더 짧은 시기에 더 많아졌다.
구제역 사태 이후 정부는 ‘축산선진화’방안을 발표했다. 축사의 환경 개선에서 유통에 이르는 일정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만족하는 농가에게 축산을 허가하는 방식이다. 미국과 한국에서 진행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농업에서의 ‘선진화’라는 것이 대자본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설비나 인증절차를 기준으로 삼아 대자본의 독점을 강화시키는 과정이었다. 예로 미국에서 조만간 개인의 텃밭 농사는 불법이 된다고 한다. 현재 한국에서 몬산토 같은 대자본의 씨앗을 구매하지 않고 토종씨앗을 뿌려 재배한 옥수수 등은 대량 수매하지 않고 있다. 축산업에서의 선진화 방안이란 것도 이미 구제역 사태 이전부터 이 같이 축산업에서의 대자본의 독점을 강화하기 위해 진행해 온 것이다.
무엇보다 정부의 축산 대책은 축산의 근본적 문제를 외면하고 축산을 장려하는 데 있다. 사료곡물 해외의존도가 97.4%니 푸드마일리지(식품이 생산된 곳에서 일반 소비자의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이동거리)와 식량자급에 문제고, 사료곡물의 82%가 전량 수입하는 옥수수니 유전자조작이 문제고, 동물학대가 일상화 된 밀집축사다 보니 생명존중이 문제다. 항생제, 생물다양성훼손, 성장호르몬의 문제까지, 최근의 매일유업 사건에서 보듯이 발암물질인 포르말린이 혼합된 사료를 소에게 먹이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으니 축산업은 갈 데까지 간 형국이다.

 

공장식 축산을 떠받치는 육식문화

 

 

 

아직도 세계에는 기아로 죽는 사람들이 많은 데 세계 곡물의 36%, 콩 생산의 74%가 가축을 키우는 데 사용된다. 햄버거 하나를 만들기 위해 1.5평의 숲이 사라지고, 매년 남한 땅 크기만큼의 숲이 동물사육으로 인하여 사라진다. 인간이 살아가는 땅의 80%가 동물사육에 사용되고 있으며 이미 아마존 열대우림의 70%가 파괴되어 동물사육지나 사료용 곡물재배농지로 변했다. 숲이 사라지고 그 속에 사는 생물들이 멸종하게 되면 그만큼 기후변화를 비롯한 문제들이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UN은 축산업이 인간 활동에서 기인하는 전체 온실가스 중에서 교통수단을 모두 합친 양(13.5%)보다 더 많은 18%를 배출한다고 했고, 월드워치연구소는 과소평가된 부분을 추가한다면 51% 이상의 온실가스가 축산업에서 배출된다고 했다. 또한 1kg의 콩을 생산하는 데 1800리터, 쌀은 3000리터, 밀은 1350리터가 필요한 데 비해 소고기 생산에는 16000리터의 물이 사용되고 있어 축산이 물부족 문제에도 상당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WHO에 따르면 전체 심장혈관계질환 사망자의 85%, 전체 암 사망자의 60%, 당뇨병 사망자의 50%가 육식관련사망자로 알려졌으며, 전체 질병사망자의 71.5%가 육식으로 인하여 사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축산과 육식이 사회에 이런 부담을 주고 있다면 축산업, 사료농업 및 이와 관련 있는 유통업 등에 환경부담금과 의료부담금을 부과하는 것이 필요하다.
식물이 자라기 어려운 극지방을 제외하고 인류가 지금처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고기를 먹는 육식사회로 변한 것은 불과 백여 년에 불과하다. 오늘날 인류는 예컨대 같은 곳에서 난, 혹은 같은 유전자의 소고기를 넣은 특정 자본의 햄버거 상품을 소비하고 있다. 사람들은 육식을 오롯이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라 믿고 있지만 채식을 원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거의 없다면 그것은 육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조장하는 사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고기를 완전히 먹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고기 섭취를 줄이자는 말에도, 채식이란 단어만 나와도 발끈해서 고기를 안 먹으면 건강할 수 없다는 어떤 믿음을 열변한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어느새 그것을 지키고자 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대안사회에 대한 얘기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과 흡사하다. 그만큼 육식문화는 이미 뿌리 깊게 사람들의 삶을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또 그만큼 육식문화의 폐해가 사람들의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 아니 인간뿐 아니라 많은 생물과 지구 생태에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 구제역 사태는 육식문화에 대한 생태계의 호소이자 더 큰 재앙이 올 수 있다는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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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노동]하청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자기목소리를 내야 한다-<조선하청노동자연대> 오세일 현중사내하청지회장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1/06/24 14:21
  • 수정일
    2011/06/24 14:23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최근 한진중공업과 대우조선 등 조선산업에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로 인한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경제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은 해외공장과 물량조절, 수주량의 변화 등 다양한 요인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있다. 조선산업의 정규직노조가 대부분 어용이고 비정규직노조는 거의 없거나 탄압이 심해 활동가모임 수준이다. 하지만 최근에 <소통과연대>, <조선하청노동자연대> 등 사업장을 넘어선 모임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져 터져나오는 투쟁을 지원하고 연대를 조직하고 있다. 이 가운데 <조선하청노동자연대>에 참여하고 있는 오세일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장을 만나 조선산업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황과 <조선하청노동자연대>의 활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조선하청노동자연대>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나

한 달에 한 번 선전물(제호는 <불꽃>)을 내는데 11호까지 냈고 이번 달에 한 번 밀렸으니까 대략 1년 정도 되었다. 모임이 얘기된 배경은 작년 이맘때쯤인 5~6월정도 됐을 것 같은데 08년 미국에서 리먼브라더스부터 경제위기가 생겼고 자연스럽게 조선산업의 위기로까지 연결이 됐다. 하청노동자들이 조선산업 물량이 줄거나 하면 다른 사업장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다른 사업장으로 이동해도 특별한 차이가 없다. 그래서 모임에서 하려고 했던 것은 과거처럼 하청노동자들이 물량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싸우는 게 필요하다, 이런 취지로 모임을 하게 되었다.
모임에서는 그런 걸 알리려면 선전물이 있어야하지 않겠느냐 했다. 그러면 자주 볼 수는 없으니까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하고 모임에서 선전물을 기획하고 계속 배포를 하면 그걸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많진 않겠지만 하청노동자들한테 각각 현장의 목소리가 전달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꼭 하청노동자들만으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 정규직들도 함께 할 수 있는 건 열어 두자 이 정도 얘기가 된 거다.
모임에 함께 하는 동지들은 누구인가
현대중공업은 사내하청지회가 참여하고 있고 김대환 정규직활동가 동지도 처음 모임부터 참석하셨다. 대우조선에 강병재 동지가 하노위(대우조선하청노동자조직위원회) 대표로 참석하셨고 삼호나 미포조선에 있는 하청노동자와 활동가 등이 참여하고 있다.

 

선전물 발행부수는 어느 정도 되나


대우조선에 한 7천부, 현대중공업은 사내하청지회와 정규직 활동가, 진보신당 이렇게 결합해서 4천부 정도 뿌리고 있다. 미포는 소수의 정규직들이 배포에 참여해서 5백부 정도, 삼호는 3천부해서 총 만5천부 정도 되는 것 같다.

 

선전물을 뿌리면 현장노동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현대중공업은 사내하청지회가 선전물을 계속 배포했기 때문에 크게 분리되지는 않는다. 기사에 따라서 현장노동자들의 반응이 괜찮더라고 한 게 훈련원 문제 다뤘을 때, 훈련원은 젊은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 곳인데 그 기사 괜찮더라, 이렇게 반응이 체크된 적이 있었다.
삼호 같은 경우에는 하청노동자 문제를 다룬 적이 별로 없어서 삼호에서 처음 발행하고 나서 연락와서 지금도 연락하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것을 매개로 해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게 성과이다. 그리고 식당에 있는 노동자들이 연말성과금 관련해서 상담도 했다. 그걸 계기로 하청노동자들을 만나서 얘기도 하고 정규직노동자들도 함께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거냐 이런 만남까지 간 것 등 삼호에서 구체적인 성과가 있었다.
대우조선에도 선전물을 배포했는데 그걸 보시고 나한테 직접 연락이 오셔서 강병재 동지에게 연결해드린 적도 있고.
그래서 삼호나 대우조선에서는 선전물을 통해서 연락이 되고 소통이 되는 거니까 선전물의 효과가 전혀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바로 반응이 오기도 했고 5~6개월 사이에 반응이 확인된 거다.

 

선전물은 주로 어떤 내용을 다루는가

주로 하청노동자들의 내용을 담는다. 1면은 사회적 이슈와 함께 하청노동자들 관련한 문제를 다루고 있고 뒷면은 각 사업장의 소식, 현대중공업, 삼호, 대우조선, 미포 등 현장의 목소리를 실으려고 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을 세웠고 현재까지 진행해오고 있다.
조선산업 정규직 현장조직 모임인 <소통과연대>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독립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최근에 대우조선에서 강병재 동지 올라간 다음에 <소통과연대> 차원에서는 비정규직노조 설립을 위한 10만인 선언운동이 제안이 됐고 대우조선에서는 그 문제를 가지고 실제로 1만인 선언운동을 쭉 추진해 왔다. <소통과연대>에 소속돼있는 <현민투> 동지들이 했고 그걸 <소통과연대>에서 결의사항으로 결정을 했다.
그것 관련해서 삼호에서는 정규직들이 어쨌거나 민주파고 현장조직들도 있으니 거기 동지들도 대우조선처럼 어떻게 할 수 있겠냐, 해서 지난 번 <소통과연대>에서는 삼호 민주파 현장조직들이 논의하고 결정해서 어떻게 할 건지 할 거다, 여기까지가 진행상황이었다.
별도로 활동을 해왔는데, 이러한 지점에서는 함께 논의하고 방향도 논의하고 실천사업도 하는 정도이다. 다르게 출발했지만 공통분모에서는 함께 모임도 하고 논의도 하고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모임에 들어와 있는 사업장들이 규모가 큰 대공장이고 해외공장도 있고, 이에 따라 구조조정이 많이 되고 있는데 전망은 어떠한가

 

 

△ 출처 : 참세상

현대중공업이 아직까지는 중국에 조선소를 직접 세우겠다, 이런 건 아닌 것 같고 우리가 알기론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이다. 지금의 정보로는 한진중공업이나 삼성이나 대우조선이나 이런 데처럼 (해외조선소를) 소유하고 있어서 물량을 늘린다든지 해서 그쪽 공장과의 구조조정이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까지 판단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현대중공업은 한국에서 계속 조선사업을 할 거다 이렇게 피력하고 있어서 당장에 (구조조정 문제가) 등장할 것 같지는 않다. 현대중공업은 아직까지는 중국조선소를 계획 하에 인수하고 생산하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려면 중공업의 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그런 정도는 아닌 것 같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고 정규직들도 비슷할 것 같다. 그래서 현대중공업의 해외공장과의 관계는 다른 조선소와는 좀 차이가 있다. 삼호 조선소도 그렇고.
미포조선은 (구조조정) 가능성 있다. 베트남에 조선소가 있다. 옛날에는 수리조선이었는데 최근에는 신조(새 배)를 생산하고 있어서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얘기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현재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의 지회장도 맡고 계신데 현재 조건에서 비정규직 조직화는 어떤 수준인가
하청노동자 조직화는 조선소가 다 비슷하다. 원청이 워낙 탄압이 강하고 그런 점에서 자동차하고는 조금 다른 조건이 객관적으로 있다.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가 어려운 조건에서 오랫동안 노동조합 활동을 해 와서 최근에는 현장에서 일하시는 하청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있다. 하청지회가 현장노동자들을 통해서 조합원이 생기고 그들을 통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조건이 열린 거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합원 가입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동지들은 후원이라도 하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이런 게 오랫동안 사내하청지회가 소수의 활동가들 중심으로 했던 노동조합이었지만 그게 작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런 조합원, 후원회원들을 어떻게 잘 조직하고 어떻게 사업을 할 거냐가 하청지회가 갖고 있는 과제이지 않을까. 지금 상황을 말씀드리면 그렇다.

 

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은 어떤 부분에 가장 불만을 갖고 있나

현대중공업에 하청노동자들이 대략 2만 명 정도인데 회사측 얘기로만 추측해 봐도 09년에 업체별로 10%, 2천 명 정도가 쫓겨났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된 거다. 그런 사실도 우리가 늦게 알 정도로 잘 티가 안 난다. 노동자들도 맞서 싸우기 보다는 자기 일자리 찾아서 다른 조선소 이동하거나 블록공장으로 이동하거나 다른 직종을 선택하는 상황이다. 전반적으로 조선산업이 위축되어서 일자리가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청노동자들이) 그런 걸 수용하고 거기에 위축되는 것이다.
구조조정에 대해서 하청노동자들이 일 없으면 다른 일자리 찾아가면 된다는 인식이 일상화되었다. 옛날에는 일자리가 많았지만 일자리가 없다는 게 표면적으로 느끼니까 나머지 하청노동자들이 더 자기 요구나 이런 걸 얘기 못하고 위축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09년 말부터 10년 초가지 임금삭감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런 것이 최근에 두드러진 가장 큰 불만이다.
그전부터 지금까지 일상화된 것은 정규직과의 임금 차이, 연말성과금의 차이, 여름휴가가 보통 정규직들은 중복휴일 없애서 2주 동안 가는데 하청노동자들은 유급이 3~4일, 작년에 정규직 협력사지원부에서 해소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유급을 5일인가를 줬다, 그러면서 휴가가 부분적으로 조금 늘어나는 사례도 있었지만 여전히 휴가의 차이가 있다. 보통 공휴일도 다 유급, 다 특근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3~4일, 부분적으로 일을 하더라도 유급, 특근처리가 안되고, 불만을 찾으려면 엄청 많다.

 

중공업 하청노동자의 연령대는 어떠한가

다양한데 자동차가 좀 더 젊은 것 같다. 중공업은 하청노동자도 나이 많은 노동자들이 굉장히 많다. 40~50대도 많고. 젊은 층이 높은 비율 차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선전물을 배포하면서 쭉 보면 아주 젊은 층이 많이 눈에 띄거나 그렇진 않다.

 

중공업 일이 자동차보다 숙련이 많이 필요한 것이 노동자 구성에도 작용하나

부분적으로 작용한다. 자동차 일보다 중공업 일이 힘들고 어렵다. 직종에 따라서는 젊은 노동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도 많다. 자동차 일하던 젊은 노동자들이 와서 일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 그만두는 경우도 많고. 노동의 특성이 있어서 자동차 일이 너무 단순하니까 싫어하는 사람이 중공업에 와서는 단순하지 않으니까 좋아하는 그런 노동자들도 있는데 힘들다. 힘들어서 젊은 노동자들이 오래 안 있는다.
그리고 비율은 잘 모르겠는데 여성노동자들이 있는 곳은 주로 도장부다. 도장부인데 페인트하는 일 정도가 있고 도장부에 남자들만 하는 직종도 많다. 도장부 일 같은 경우는 젊은 여성노동자들이 할 수 없다.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나이가 적어도 결혼은 하셨거나.
중공업에 여성노동자들은 도장부를 제외하고는 정규직의 설계, 사무보조 이런 거고. 하청업체에선 용접이나 이런 것도 내가 알기론 소수 여성노동자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런 것 때문에 여성노동자들 제한적이고 여성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는 특성도 있고 힘들고 어렵고. 이런 것도 작용할 거다.

 

조선산업의 비정규직 비율이 특히 높다

민주노총 금속 사업장 중 하나가 STX이다. 정규직조합원이 천 명 정도 되는데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삼사천 정도 된다, 정규직대비 비정규직이 433%정도로 제일 높다. 현대중공업이 제일 낮다고 하는데 정규직조합원이 작년 기준으로 만6천 얼마인데, 작년에 노동부가 불법파견 현장실사한 자료를 보면 비정규직이 노동부 조사로 등록되어 있는 인원만 만6천 명 정도 된다. 현대중공업은 정규직조합원 대비 하청노동자가 공식적으로 통계로 보고되어 있는 것이 거의 100% 정도 되는 수준이니까, 가장 낮은 현대중공업이 100% 가장 높은 STX가 433%. 딱 비율로 나와 있어서 비정규직 비율이 엄청나다.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만큼 대우조선과 같이 앞으로 중공업에서 비정규직 노조건설 투쟁이 계속 일어날 거라고 전망하나

지금 원청자본이 (이전과 다르게)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밀어붙이고 있다. 옛날 같으면 정규직들 임금인상이 되면 거기에 비례해서 하청노동자들 임금인상도 됐는데, 원청에서 하청에 기성(하청업체가 일을 마무리 한만큼 원청에서 결제하는 대금)을 주는데 경제가 어렵다고 까버렸다. 그러니 업체는 하청노동자 임금을 삭감하려고 시도했다. 왜냐하면 자기네 이익을 하청업체 사장들이 줄 이유가 없는 거잖나. 그리고 하청노동자들의 저항이 크지 않으면 그걸 계속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오고 있다.
하청노동자들이 이런 것에 맞서서 싸우는 게 쉽진 않다. 계속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저항선이 어디까지 될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것을 예측할 수는 없다. 어떤 임계점에 다다르지 않으면 하청노동자들이 쉽게 투쟁으로 나설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경험이 있지 않나. 하청노조 만드니 업체 폐업해버리고 활동가들 다 해고해버리고. 이런 자기 경험, 학습된 경험이 있어서 그 경험을 뚫을 만큼의 자본의 공격이 있지 않으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 임계점에 있을 때 현장이나 하청노동자들 중에 조합원이나 적극적인 하청노동자들이 그 임계점에 어떻게 확 불을 붙일 수 있을 거냐, 그게 불이 붙으면 대대적인 투쟁이 되는 거고 불을 붙였는데 실패할 수도 있는 거고. 이런 게 사실 많이 고민이 된다.
지금 현장분위기는 조금 좋아지고 있다. 그 원인은 잘 파악이 안 된다. 좋아지는 원인이 7월1일 복수노조 때문에 막연한 기대, 복수노조가 생기는데 우리 하청노동자들도 노동조합 만들 수 있는 거 아니냐, 좋아지지 않겠냐, 이런 막연한 기대도 있고.
지난 4·27 선거에는 회사의 통제를 뚫고 결과를 확 뒤집었다. 물론 과거에도 그런 경험은 있기는 한데. 이런 게 현장의 분위기를 좀 좋게 만드는 외부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내적인 자기준비나 이런 것에 큰 변화는 없는 것 같다. 이런 변화를 자기 문제에서 어떻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거냐, 이런 문제와 결합이 되면 현장분위기가 좀 달라지는데. 근본적인 원청의 대응, 하청업체의 대응은 달라지진 않았다.

 

얼마 전 한진중공업에 연대한 희망버스나 홍대투쟁에 연대했던 날라리외부세력 등 노동자 투쟁에 대한 연대가 트위터를 통해서 미조직된 노동자들이나 학생들에게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조직화 활동에 트위터와 같은 소셜네트워크를 사용하시거나 활용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나

아직까진 그렇진 않다. 필요성을 못 느껴서. 현장에 있는 하청노동자들에게 그런 문화가 있으면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못해도 덤벼야 되는데 내가 보기엔 아직까지는 조선소 노동자들은 아닌 것 같다. 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좀 다르더라. (현대차울산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점거투쟁 당시) 농성장에 있을 때도 보면 옛날처럼 확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핸드폰으로 인터넷도 하고 자기 의견도 올리고 있다면 조선소는 좀 늦은 것 같다. 하청노동자 중에도 젊은 조합원들 있는데 젊은 조합원들이 조선소 노동자들이 그런 것 많이 하니까 노조간부도 그런 것 하라고 막 의견을 올릴 텐데 그렇진 않다. 문화적인 차이도 있는 것 같다, 자동차와 중공업, 노동의 특성과 함께 문화적인 특성도 조금은 차이가 있는 게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조선노동자들이 트위터를 많이 이용한다면 우리가 용을 써서라도 할 텐데 아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STX 비정규직지회 설립이 금속노조 경남지부 운영위에서 2차례나 불승인되었다. 관련해서 행동계획이나 고민이 있나

 

 

△ 출처 : 참세상

우리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방안이 뭐가 없겠냐고 내가 금속노조 울산지부 간부한테 물어봤다. 그랬더니 미비특위인가 미비담당에서 금속중앙위원회인가 중집인가로 안을 올리면 거기에서 결정을 경남지부에 권고할 수 있다고 하더라. (얼마 전) 현대차비정규직지회 동성기업 노동자들의 (신분보장기금지급을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심의위원회에서 해당사항 아니라고 한 것을 중집인가 중앙위로 올려서 권고안으로 내리려 했던 그런 방법이 있는 거다. 그것을 STX 동지들한테 얘기했다. 그 동지들은 이것을 해결방안으로 생각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것도 있다 하면서 방법을 찾아가는 거다.
어쨌거나 이런 문제는 중요하다. STX 비정규직노조건설 관련하여 문제제기한 STX(정규직)지회나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금속경남지부 운영위를 폭로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진 않다. 대안을 우리가 어떻게 마련할 거냐, 그리고 비정규직현장위원회 동지들이 정말 노조의 필요성을 느껴야 되는 거다. 자기 말고도 STX 3~4천 명의 하청노동자들이 있지 않나. 이 노동자들을 조직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
만약 개별적인 (불법파견) 소송을 중심으로 가면 노동조합 굳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노동조합 만들어야 되고 그걸 가지고 거기 있는 하청노동자에게 호소하려면 해야 할 일이 지금하고 다르다. 불법파견이니까 정규직화하라, 이것도 과제지만 노동조합으로 단결합시다, 우리가 목숨 걸고 싸우겠습니다, 하는 것과 다르잖나. 우리는 그것을 얘기하고 싶은데 그 동지들이 거기까지 갈지 안 갈지는 아직 모르겠다.

 

한진중공업지회는 과거 비정규직 문제를 이슈화시킨 적도 있으나 현재에는 정규직 구조조정 사안만 남은 채 비정규직 문제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투쟁전개 양상은 어떠했나

한진중공업은 울산에 공장이 있었고 쭉 관심 있어서 가보기도 했는데 (내가) 한진중공업 소속이 아니니까, 부산에 투쟁할 때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게 있다.
한진중공업이 그나마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노력했던 정규직노조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옛날에 물량이 막 줄어서 도장부에서 체불임금 문제로 싸웠을 때 정규직노조가 나름 노력했다. 그런 투쟁을 이어갔어야 했는데 그 투쟁이 그냥 하나의 투쟁으로 끝나버리고 집행부가 바뀌면서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전에 있던 집행부보다 덜 갖게 되었다. 이러면서 하청노동자들이 자기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놓친 게 내가 보기엔 제일 아쉽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도 자기 문제를 가지고 싸울 수 있구나라고 인식해야 하는데, 큰 성과를 내진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기회를 놓쳤던 것에는 정규직노동자들이 자기역할을 못한 것이 있었다.
비정규직노동자 투쟁 관련해서는 그렇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물량이 없고 업체가 폐업되고 인원을 줄이고. 아마 내가 알기로 한진중공업 부산공장 같은 경우에는 절반 정도 인원을 줄인 걸로 알고 있다, 몇 명만 소송하고 복직됐지만 그건 일부이고. 그러면서 한진중공업에 있는 하청노동자들 다 떠난 거고. 울산공장을 폐쇄하고 부산공장으로 전환배치할 때 정규직들은 고용승계가 됐지만 비정규직들은 업체폐업으로 다 떠났다. 그렇게 비정규직 문제는 아주 손쉽게 해결해 버렸다.
정규직 투쟁도 보면 작년에 정리해고가 철회되면서 파업을 중단한 거잖나. 나는 그 투쟁을 더 밀고 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파업할 때 공장에 비정규직이 절반 정도 일을 하고 있어서 물량, 배도 다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공장에 쭉 들어가서 불가피하게 비정규직들하고 마찰이 생겼겠지만 공장을 세웠어야 했다. 그리고 그 비정규직들에게도 전에 정규직노조가 잘 못 한 거고 그래서 우리가 함께 이 문제를 가지고 공동으로 싸워야 된다고 하면서 싸웠어야 된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쭉 지나서 2차 구조조정이 들어오고 정리해고자 받고 할 때는 이미 더 이상 생산할 물량이 없었고. 정규직 파업을 하더라도 비정규직으로 이미 생산해도 완전하게 다 될 수 있었다. 정규직노조는 사측을 자극하지 않는 파업을 했기 때문에 결국은 지금의 상황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투쟁방법을 선택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한진중공업 동지들은 이 과정에 대해서 잘 평가해야 한다.
어쨌거나 한국공장을 안 하는 게 아니고 새롭게 공장을 돌리겠다고 한다면 하청노동자는 부르면 언제든지 오는 거고 정규직들 정리해고 했고, 그렇게 되면 비정규직 공장 되는 거다. 소수의 정규직노동자들만 남아있는. 결국은 조선사업장 중에서 가장 단결되었던 노동조합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소수의 필요한 정규직노동자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다 비정규직으로 고용하고 사용하고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공장이 될 거다, 다시 재가동한다면. 재가동 하지 않는다면 다른 투쟁 과제가 생길 거다.

 

현대중공업을 중심으로 어용인 정규직노조들이 제3노총 건설흐름에 적극적이다. 현대중공업노조는 지난 427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정치적인 흐름이 하청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상하나

 

 

△ 출처 :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올해 4·27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이전부터)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어 왔다. 하청노동자들이 현대중공업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다. 한나라당 임명숙 후보를 정규직노조가 지지한 것에 대한 정규직노동자들의 반발이 있었고 하청노동자들은 계속 공격을 당하니까 한나라당을 골수로 지지하던 사람들이 아니면 (한나라당을) 별로 지지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고 민주노동당이나 이갑용 후보에게 일정정도는 투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청노동자들에겐 투표권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일이 있었다. 미포나 이런 데는 소문으로만 얘기되었던 6시 이후의 잔업, 그 이후의 회식까지 실제로 진행된 업체들이 좀 있었고. 현대중공업 같은 경우에는 현장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을 통해서 계속 제보가 있었고, 선관위가 직접 그것은 위반이고 만약에 그렇게 확인되면 벌금을 낼 수도 있다, 이렇게 공문을 쫙 보내니까 일부 업체들은 3시 일만 하고 투표할 사람 투표해라, 이렇게까지 한 상황도 있었다.
그래서 이 투표 관련해서 정규직노조가 한나라당하고 정책연대하면서 선거결과가 확 뒤집힌 거다.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노동당 김종훈 후보가 1위였지만 실제로 투표하는 건 또 다를 수 있잖나.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잘 몰랐는데 상당히 높은 표차로 당선이 되었다. 이런 것 때문에 선거 전술에 상당히 큰 문제가 있었다, 해서 현대중공업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노무담당했던 이사가 이번에 사표냈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런 얘기도 있을 정도로 중공업의 이번 동구선거가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몽준이 한나라당의 의원이니 이런 정치적 관계와 전혀 무관하지 않아서 이 것을 대단히 큰 사건으로 현대중공업은 보는 것 같다.
이게 제3노총으로 가는 것과 절대 무관할 수 없는 거다. 한나라당과 정책연대해서 지지하는 게 꼭 좋은 건 아니다, 이런 판단이 있기 때문에. 다른 데는 모르겠다, 지하철이나 공무원 이런 데는 자기 현장하고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거랑 크게 연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현대중공업하고 이 동구는 큰 연관이 있다. 내년 총선에 만약에 제3노총에서 (한나라당) 지지를 선언하면 동구에선 역효과가 나타나는 거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이용) 하기 위해서 만드는 거잖나. (제3노총이) 선진노조라는 이데올로기를 펴거나 정책을 선전하는 것과 무관하게. 직접적인 노동자들 투표와 연관될 텐데 현대중공업과 울산 동구는 이게 결합된 거다.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이 결합되면서 이번 지자체 재보궐 선거에서 한 번 딘 거다. 내년 총선도 있을 거고 대선도 있을텐데 다른 데는 제3노총으로 가도 별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현대중공업은 다르다는 거다. 그래서 대단히 많이 고심할 걸로 보인다.

 

자동차나 조선산업 정규직노동자를 귀족노동자로 보는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자기의 권리만 지키려고 하면 그런 노조는 귀족노동자다, 귀족노동자의 대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것은 정규직노동자들이 또는 노동조합 지도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는 거지. 그리고 비정규직 다 쳐내고 나중에 정규직 노동자 공격했잖나. 그리고 비정규직들이 정규직들 파업할 때도 나머지 절반은 한진중공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 거다. 꼭 비정규직을 다 쳐내고 정규직을 공격하지 않는 게 한진중공업에서 드러난 거다. 현대자동차도 똑같은 거다 98년 정리해고 싸움할 때 비정규직 쫙 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정규직들 공격했잖나. 그 다음에 다시 정규직들 복귀시키고 비정규직 확 늘어난 거고. 이게 꼭 비정규직만 공격하느냐가 아니라 비정규직 치고 나면 정규직 공격하고 그리고 굳이 정규직 힘없으면 비정규직 칠 필요도 없다. 정규직 다이렉트로 공격할 수도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누어져 있지만 단결력에 따라 원청이, 자본이 어떻게 하느냐를 (결정)하게 만드는 거다. 정규직 노조가 힘이 없고 비정규직 노동자들 저항하지 않으면 그냥 뭐 비정규직 정규직 할 거 없이 다 밀어재끼는 거다. 정규직이 굳이 필요 없잖나. 비정규직만으로 공장 돌릴 수 있으면 돌리는 거다.

 

형식적으로 민주를 띠고 있든 노골적인 어용이든 정규직노조를 압박해야 한다는 것인가

목소리는 내는데 현대중공업 오종쇄는 목소리를 내도 끄덕도 안한다. 그것은 정규직노동자들이 또는 정규직활동가들이 목소리가 없으니까 안 해도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오종쇄는. 현대자동차는 똑같은 이경훈 어용이지만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투쟁하고 있는 거고. 그러니까 노골적으론 하지 못하는 거다. 아주 교묘하게 비정규직 투쟁을 피해갔다고 생각한다. 똑같다. 이경훈 하고 오종쇄하고 뭐가 다르나. 그런데 주변의 조건이 다르니까 다른 방식으로 간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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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호][편집자의창] 되살아나는 대중투쟁

얼어붙었던 정세를 촛불이 다시 녹이고 있다.

지난 6월10일 <한국대학생연합>이 주도하는 반값등록금 촛불집회에  만여 명이 모여 3년 만에 폴리스 라인을 뚫고 시청과 광화문 일대를 행진했다.

다음날인 6월11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5개월 넘게 고공농성을 하고 있던 한진중공업에 ‘희망버스’를 타고 온 촛불시민들이 공장의 벽을 넘고 노동자와 어우러지는 해방 공간을 창출했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공권력의 거센 탄압에 주체들이 위축되자 정권에 대한 불만은 갈수록 팽배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대중투쟁은 등장하지 않는 동면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4·27 재보선 참패 이후, MB 정권의 실정이 거듭되면서 지배세력 내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한나라당은 노골적으로 정부정책에 이반하고 있으며, 공권력은 몰락하는 정권과 여론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 뚜렷하다. 6월10일 집회에서도 경찰은 거리로 밀려나오는 시위대열을 막으려는 별다른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십 수 년 전 김영삼 정권 후기를 보는 듯하다. 집권 초반 80%가 넘는 지지율로 정세를 주도하던 김영삼 정권은 후반기에 들어 각종 실책을 연발하며 지지율이 추락한 끝에 결국 97년 총파업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반란의 조짐들이 1997년이나 2008년처럼 다시 한 번 대중투쟁으로 화할 것인가? 반값등록금 같은 이슈 자체에 한계는 있겠지만 한 번 트인 대중투쟁의 물꼬는 다양한 이슈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투쟁이 내년부터 본격화될 정권교체 정세와 정치질서의 재편 흐름으로 흡수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정세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말고 되살아나는 투쟁을 급진화 시키며 새로운 주체들을 결집시키기 위한 노력들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2011년 6월20일
사회주의노동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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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Focus]대공장, 의회주의를 벗어나라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6/10 14:27
  • 수정일
    2011/06/10 14:2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이 가까운 미래에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치적 대안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민주노총이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의 이해를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고, 민주노동당이 모든 노동자들의 문제를 의회주의 전략으로만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제조업이 남한 경제의 중심이었던 8~90년대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90년대 중후반 이후 비제조업, 그 중에서도 서비스업에 고용된 노동자의 비율이 제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비율을 압도했다. 제조업에 비해 서비스업의 생산성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서비스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고용형태 또한 안정적이지 않았다. 비제조업에 비정규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은 제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임금, 상시적 해고에 빈번하게 노출되었다. 
이에 반해 고임금에 의해 물질적으로 포섭된 민주노총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들은 이미 투쟁전선에서 이탈한 상태였다.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총이 비제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길 원했다면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체질을 바꿨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기존에 조직된 노동자들의 이해에 사로잡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사실상 외면했으며정부에게 대화상대로서 파트너십만 강조했을 뿐 사회변혁적인 성격을 잃어갔다.
민주노총이 기존의 기반을 유지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을 때 민주노동당 역시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의회로 진출하면서 체제내로 안착하고자 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민주노동당은 그동안 국회에서 어떤 활동을 벌여왔는가?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들은 노동법 개악이나 한미 FTA등 대중들의 삶을 좌지우지할 만큼 굵직굵직한 사안들의 국회통과를 막아내지 못했다. 비정규직 권리입법을 제안하기도 하고  몇 차례 국회 단상을 점거하기도 했지만 이는 역부족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그러한 처지에 대해 항상 의석수가 적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결론은 의석수가 적어서 국회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으니 다음 선거에서 대중들이 더 많은 표를 민주노동당에 찍어줘야 된다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을 비롯하여 진보정당들이 고민해야 할 부분은 ‘다음 선거’가 아니라 왜 ‘지금’ 의석수가 적을 수밖에 없냐는 것이다.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이 아니라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4년에 처음 국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은 더많은 의석수를 얻기 위해 자신의 정치를 희석시켜가며 생명력을 연장해가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출범 이후부터 계속해서 민주노동당만이 진짜 노동자들의 정당이라고 소리 높여 왔지만 대다수 남한의 노동자들은 각종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을 찍지 않았다. 진보정당을 자신의 정당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대개 노동자들은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에 투표를 한다. 대중들이 자신의 이해와 무관한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투표를 하는 것만이 문제라면 진보정당이 더욱 더 제도권 정치로 깊숙이 들어가 이들 주류 정당들과 경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대중들이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에 투표한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에 참여하는 대중들의 비율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진보정당 지도부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진입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 의회정치 자체에 대해서 대중들의 무관심과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는 것을 먼저 포착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4.27 재보선에서 분당 을의 투표율이 49%로 매우 높게 나왔다고 이슈가 된 적이 었다. 그러나 49%라는 선거 참여율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절반이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남한의 국회는 어떠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해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지연과 학벌, 재력을 갖춘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장악된 국회는 대중의 뜻과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럼에도 대중들이 국회에 직접 참여할 길은 막혀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대중들의 정치참여기회는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등 몇 년에 한번 씩 치러지는 선거절차로 한정되어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거 참여율이 갈수록 낮아지는 현상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아무리 참여를 해봐도 크게 바뀌는 것이 없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중들의 선거 참여율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이 남한만의 일은 아니다. 의회제도 하에서 정기적으로 선거를 실시하는 모든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선거에서 이기지 못하더라도, 의석수를 늘리지 못하더라도 다른 정당들과 영합하지 않고 독자적 행보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일부 진보신당 당원들의 의견 또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국회로의 진입만이 진보정당 당원들의 정치활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정당의 활동범위를 의회제도 안으로만 한정지으려 하고,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만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기존의 진보정당 지도부들은 대중들의 정치적 활동의 폭을 대단히 좁게 제한하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진단하지 않은 채, 대중들의 정치적 활동의 폭을 넓히기보다 대중들을 이용하여 부르주아 정치권 내에서의 입지만을 강화하려 하고,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부르주아 의회체제에만 기대어 활동하려고 한다면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제아무리 통합을 한들 기존의 진보정당, 노동운동에서 배제되어있는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결코 끌어들일 수 없을 것이다.
민주노총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기존 노동조합운동의 중심축을 옮기지 않는 한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을 자신의 조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남한 사회엔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만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여성노동자들의 문제, 이주노동자들의 문제, 성소수자들의 문제, 저임금 노동자들의 문제 등 다양한 억압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기존의 노동운동이 포괄하지 못하고 있는 영역들이다. 기존의 노동운동이 현장의 다양한 억압들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끌어안지 않는 한 민주노총은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으로, 민주노조운동으로, 정치 활동의 무대로 확대되지 못할 것이다. 

 

다양한 정치적 활동방식이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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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 정치세력화 작업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등 ‘조직노동운동’이라고 통칭되는 것들을 남겼다. 그러나 조직노동운동은 과거의 화려한 유산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남한 운동의 역사에 또 하나의 다른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2008년 촛불집회 때 이들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에 포함되지 않은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투쟁의 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선 먼저 현재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을, 정권에 대한 불만을 어떠한 형식으로 외화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중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정치적 의사표현을 하고 있는가? 제도권 내 정당이나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가? 지금의 선거나 정당, 노동조합은 대중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변혁을 이끌어 갈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가?
의회정치는 날로 대중과 괴리되고 있다. 현실정치에서 배제된 대중들은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선거에 무관심한 경향을 보이거나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선거, 의회제도로의 진입이 아닌 ‘다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국회의 입법절차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대중들의 투쟁의지가 어느 한 지점에서 집중적으로 분출하게 되었을 때 2008년 촛불집회처럼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진 대중들이 무엇을 중심적 매개로 하여 새롭게 정치적으로 결집하게 될 지, 그 ‘다른 방법’이 정확하게 어떤 형태일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 힘든 상황이다. 인터넷의 변화에 따라 트위터 등이 등장해 이슈가 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진 영향력이 그렇게까지 크지 않아 그 누구도 자신 있게 이것이 대안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확대하기 위해 분명히 알아두어야하는 것은 의회제도로 해소되지 않는 대중들의 불만을 견인해낼 수 있는, 의회제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정치적 전략과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회제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은 대중들의 정치활동이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존재하는 정당의 형태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정당, 대중들의 정당이 반드시 의회제도 내의 정당일 필요는 없다. 체제 내적 정치 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활동방식을 구상해야 한다.
이것은 반드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가 알게 모르게 다양한 형태의 모임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나름의 정치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 알게 된 대중들끼리 만든 소모임이나 올해 초 홍대 시설노동자 투쟁 때 만들어져 지금까지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날라리 외부세력' 같은 경우를 보면 단기적이긴 하지만 각종 사회적인 이슈들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들이 만들어졌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대중들은 굳이 기존의 진보정당, 노동운동에 접근하지 않아도 거리 투쟁에, 노동자들의 투쟁에 쉽게, 직접 접근할 수 있고,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대중들은 직간접적 경험들을 통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을 넘나들며 때에 따라 기존의 정치조직을 선택하거나 혹은 기존의 정치제도, 노동운동에 편입되지 않는 모임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형태의 정치활동들은 제도화된 정치 질서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결사체 활동으로 통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법제도망 외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결사체들이 기존의 운동 진영과 뚝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개별적으로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진보신당 등의 조직과 겹쳐져 존재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결사체들의 활동방식이 기존의 운동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노동운동조직의 체계에 익숙한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땐 ‘저게 조직인가’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흐름이 아직은 미약하고 때로는 권위주의적 관성을 온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미약하고 미숙하지만 그럼에도 기존 운동조직의 활동방식에서 벗어난 좀 더 다양한 형태의 모임들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주도하거나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임들이 질적 비약을 이루려면, 보다 장기적인 정치적 전망을 가지고 가려면 결집의 기준인 ‘반MB'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므로 ‘반MB'를 넘어설 수 있는, 의회제도를 넘어설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노동운동, 진보정당 진영과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치활동은 더욱 괴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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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Focus]진보정당 통합논의, 누구를 위한 것인가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6/10 14:23
  • 수정일
    2011/06/10 15:18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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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등 진보정당 간 통합논의가 수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6월1일, 6차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에서는 '오는 9월 새로운 진보정당을 창당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이 가까스로 도출되었다. 그러나 합의문 도출과정에 대한 후폭풍으로 각 당 내부 사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지난 5월2일 3차 연석회의 합의문 도출 과정에서는 진보신당 한석호 사무총장이 일부 당원들의 문제제기로 인해 사퇴하는 일도 있었다. 3차 연석회의 합의문이 진보신당 당원들과의 논의 없이 몇몇 지도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관철되었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이번 6차 연석회의 합의문 도출과정도 줄다리기 진통 끝에 사회당이 배제된 채 진보신당 지도부와 민주노동당 지도부만의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당원들과의 토론과 소통을 무시한 채 합의문을 도출한 진보신당 지도부와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직권조인을 했다는 비판에 직면해있다.
진보정당 간 통합논의 초기과정에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큰 틀의 대결구도는 민주노동당 대 비(非)민주노동당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 사회당을 포함하여 세 정당이 단일정당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상정, 노회찬 등 진보신당 내에서 이른바 ‘통합파’라고 불리는 구 지도부 역시 국회의원 의석수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려는, 어떻게든 의회제도 내로 진입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는 민주노동당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반면에 진보신당 구 지도부를 제외한, 소위 ‘독자파’라고 불리는 진보신당 당원들과 사회당은 무조건적인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반대했다. 이들은 북한의 권력 세습 문제, 2012년 총선, 대선 방침, 민주노동당 내 패권주의에 관한 입장차이가 먼저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현재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는 북한 권력 세습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실질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통합을 추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구 지도부가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는, 단지 통합만을 위한 통합에 반대하는 실질적 이유는 2012년 총선에서의 야권연대전략,  더 나아가 대선에서의 ‘연립정부론’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연립정부론은 사실상 2012년 대선에서 국민참여당과 민주당 등 자유주의 세력들과 손을 잡고 이들의 힘을 빌려 어떻게든 입각해보겠다는 전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통합에 반대하는 이들의 의견은 진보정당의 통합을 애타게 부르짖고 있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지도부들에 의해 묵살되고 있다.

 

반복되는 논쟁

 

진보진영이 무조건적으로 통합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 국민참여당과 민주당 등 자유주의 세력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이번에 처음 제기된 문제가 아니다. 진보신당의 경우, 지난해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심상정 경기도지사 후보가 진보신당 당원들과의 합의과정 없이 독단적으로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었을 때 당 내 갈등과 반발이 정점에 치달으며 진보신당 구 지도부에 대한 불만과 문제제기가 최초로 불거지기도 했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좌우를 막론하고 진보진영의 총단결, 자유주의 세력과의 선거연합을 지지하는 이들은 대개 진보진영이 아무런 조건없이 하나의 단일한 정당으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신당 구 지도부와 민주노동당 인사들이 모여 연석회의 합의문이 나오기도 전에 만들어 버린 ‘진보의 합창’ 같은 조직 역시 같은 맥락 하에 있다. 이들은 선거에서 이겨 의석수를 늘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영향력을 늘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진보진영을 하나로 합친 뒤 자유주의 세력의 힘을 빌리는 것이 서로에게 좋고, 장기적으로 필요한 윈윈전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얼마 전부터 이 같은 진보정당 통합논의의 흐름을 타고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민주노총 합법화와 민주노동당 건설을 거치면서 형성된 현재의 노동운동질서를 앞으로 한 단계 더 비약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진보진영의 통합을 주장하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이야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노동자계급이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도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남한의 노동운동이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거치면서 민주노총이 합법화되던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87년 이후 1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줄기찬 투쟁 끝에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총이 남한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민주노총 기반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이로써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이름의 바통은 민주노동당이 넘겨받는 듯 보였다. 하지만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영향력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전체 노동자 중 민주노총에 가입한 노동자들의 비율은 6~7% 이상을 넘지 못했으며, 민주노동당 지지율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보진영의 고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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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성장은 왜 여기서 멈추었는가? 그것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건설되기 시작한 90년대 후반에 이미 전체 노동자계급 중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율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기존 노동운동에서 배제되었다.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뒤로 한 채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의 안정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은 노동운동, 진보진영 내에서 주류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과정에서 부작용으로 특정 정파 중심의 패권주의, 경직된 조직질서 등이 횡행했다. 결국 자기 자리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은 남한 노동자 전체의 이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혹은 의회제도가 대중들의 참여를 배제한 채 어떻게 낙후되어가고 있는지 등 급격하고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 정치적 흐름들을 전혀 포착해내지 못한 채 그저 명분 없이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의 정당성만을 외치는 집단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통합만을 강조하며 진보진영이 여전히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속내는 무엇인가? 이들의 속내는 기존의 노동운동질서에서 배제된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새로운 전략, 새로운 판을 짜겠다는 것이 아니다. 원래 가던 길 그대로 가겠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는 가정 하에 기존의 노동운동, 진보정당 지도부의 입지를 제도권 정치 질서 속으로 더욱더 확고하게 구축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진보신당 구 지도부와 민주노동당의 몇몇 명망가들을 다음 정권에 입각시켜 장관 자리 하나쯤 꿰차게 하려는, 혹은 좀 더 많은 수의 국회의원이 배출되길 바라는 심산인 것이다. 지금의 진보정당 통합논의는 기존 노동운동 진영 내 구 지도부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적 출세 욕심에 따른 이합집산일 뿐이다.

 

무조건적인 통합은 몸집 불리기 일 뿐

미조직, 비정규직 대중들을 끌어 모으겠다는 명분과는 별 상관없이 진행된 진보정당 통합 논의는 노쇠한 몇몇 상층 지도부 중심의 논의로 흘러가버렸다. 통합 논의에 있어서 쟁점이 되거나 합의되지 않은 문제들이 진보신당, 사회당 당원들 사이에서 제대로 토론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토론과 합의에 기반하지 않은 현재 논의의 수준은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이 분리되어 나오던 2007년의 수준, 사실상 '도로 민주노동당'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직 통합만을 위한 민주노동당의 압박과 진보신당의 줄다리기만이 난무했을 뿐 생산적인 결과를 내지 못한 것이다. 
앞으로도 수년 간 특별한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의 틀로 조직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들의 이해를 대변해야 할 수 있을 것인가? 진보신당의 당원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게 된 계기가 2008년 촛불이었고, 민주노동당의 성장이 앞서 10여 년 간의 투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듯 아무런 계기 없이 당과 노동조합이 확대되진 않는다. 그러므로 무조건 진보정당이 통합해야 한다는 논리로는 지금의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정규직 노동자들만의 정치세력화를 뛰어넘기 위해,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투쟁의 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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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문화]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_ 영화 <일본의 밤과 안개>로 보는 관료주의의 폐해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1/05/06 15:11
  • 수정일
    2011/05/06 15:13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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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투쟁과 관료적인 사회주의 조직

 

영화 <일본의 밤과 안개>는 일본에서 안보투쟁이 한창이던 1960년에 만들어졌다. 1957년 수상으로 취임한 기시 노부스케가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하려 하면서 이를 막기 위한 전국민적인 운동이 벌어졌다. 이를 안보투쟁이라 부르는데, 미국의 일본 방위 의무를 명하고 일본을 냉전체제에 편입시키려는 미일상호방위 개정에 맞선 반전평화 투쟁의 성격을 띠었다.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0년 5월 자민당 정부는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으로 받아들여졌고, 전국적인 반대투쟁이 이어졌다. 이 투쟁으로 기시 내각이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하지만, 조약개정을 막지는 못했다.
안보투쟁이 한풀 꺾인 뒤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점차 활기를 잃어 가고, 결국 적군파 같은 과격한 테러 집단으로 전락한다. 안보투쟁이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주의자들은 이 운동을 통해 대중적인 입지를 다지지 못했다. 여기에는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관료주의가 한 몫을 했다.
감독인 오시마 나기사는 이 영화를 통해 50년대 일본 학생운동과 일본 공산당의 관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기에는 감독 자신의 학생운동 시절 경험이 뒷받침한다. 정치적 성격이 강한 영화였기 때문에 이 영화는 개봉 나흘째 되던 날 상영이 중단됐다. 제작사인 쇼치쿠 영화사가 사회당 당수 아시누마 이네지로의 암살 사건을 핑계로 영화 상영을 중단해 버린 것이다.

 

10년 전, 타카오의 죽음

 

 

 

 영화는 레이코와 노자와라는 사람의 결혼식에서 시작한다. 둘은 안보투쟁 과정에서 만났다. 노자와는 학생운동을 하다 그만둔 뒤 신문사에 들어가 기자가 됐고, 신부인 레이코는 학생운동 활동가로서 안보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결혼식 사회는 노자와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자치위원장이었던 나카야마가 맡는다.
모두의 축복 속에 진행되던 결혼식에 불청객 두 명이 끼어든다. 한 사람은 신부와, 다른 한 사람은 신랑과 관계가 있다. 레이코와 함께 안보투쟁에 참여했던 오타는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지만 투쟁 대열에서 이탈한 친구들을 비판하기 위해 결혼식에 참가한다. 그는 레이코가 안락한 결혼 생활을 위해 키타미라는 동지의 실종을 모른 척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다른 불청객 타쿠미는 노자와 등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인물로 나카야마와 노자와에게 10년 전 죽은 타카오라는 동료의 일을 캐묻는다. 그리고 타카오의 죽음과 키타미의 실종이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영화는 10년 전 사건과 몇 달 전 사건을 뒤섞어 이야기하며 두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의 가면을 들추고 상처를 드러낸다. 10년 전에 타카오가 죽음을 택하게 된 까닭은 당 지도부가 그에게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웠기 때문이었다. 대학 자치회(남한의 학생회에 해당)에 몰래 들어와 운동 관련 문건을 보다가 들킨 사람을 스파이라고 생각한 학생들은 그를 자치회 건물 안에 가둬 두기로 결정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둬둔 사람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도 적극적으로 붙잡지 않았던 타카오는 스파이라는 오해를 사게 된다.
나카야마는 타카오에게 스파이가 된 경위서를 적어내지 않으면 제명하겠다고 협박한다. 그 뒤 타카오가 스파이라는 자백을 했다는 소문이 돌고, 회의와 절망에 빠진 타카오는 결국 자살한다. 타카오의 유서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된 타쿠미는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나카야마와 노자와에게 책임을 묻지만, 진짜 적이 누구인지 모른 채 화합을 깨뜨린다는 비판만을 받는다.

 

10년 뒤, 사라진 키타미

 

평범한 대학생인 키타미는 열렬한 활동가인 레이코와 오타에 손에 이끌려 안보투쟁에 참가한다. 투쟁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키타미와 레이코는 병원에 입원한다. 키타미가 부상이 다 낫기도 전에 다시 투쟁현장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레이코는 어짜피 조약은 체결될 것이라며 집회 참여를 만류한다.
왜 전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냐고 묻는 키타미에게 레이코는 키타미가 처음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털어놓는다. 레이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회 장소로 돌아간 키타미는 사람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조약이 체결되는 순간을 마주하자 깊은 절망감에 빠져 운동을 포기하고 만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오타는 키타미가 경찰에 잡혀갔거나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동지가 사라졌는데도 결혼식이나 올리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리고 키타미의 실종이 레이코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레이코를 추궁한다. 하지만 키타미의 사라진 데에는 오타의 책임도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10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전위라 칭했던 세력의 지도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고, 나카야마는 궁지에 처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오타가 경찰에 잡혀가게 되면서 논쟁은 중단되고, 나카야마가 운동 내 쁘띠부르주아를 비판하는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상황을 정리한다. 나카야마는 자신에게 문제제기를 했던 사람들을 인민의 적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비판의 자유를 막는 독선적인 지도부

 

50년대 초 일본 학생운동은 일본 공산당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당의 방침은 무조건 옳은 것이었고 이를 따라야만 했다. 영화 속에서 노자와의 친구들은 모두 일본 공산당의 영향 아래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이다. 대학교 자치위원회 위원장이며 공산당 당원이었던 나카야마는 당의 방침을 일방적으로 내리꽂는 인물이다.
이런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노자와는 반대 세력을 억누르며 나카야마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나카야마와 노자와는 공산당의 권위를 업고 노동계급 어쩌고 운동의 정신이 어쩌고 하는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말을 남발하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봉쇄한다. 공산당의 노선이 변함에 따라 이들의 주장은 극에서 극으로 오락가락했지만 지도부인 그들은 자신의 투쟁방침에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을 당의 노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비겁하고 나약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거나 적의 편을 드는 변절자로 몰아간다.
함께 활동을 하던 사카마키, 토우라, 타쿠미 등은 나카야마의 독선적인 태도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지만 나카야마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분위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펼치지 못한다. 결국 건강한 활동가였던 이들은 무기력과 체념에 빠져 운동을 그만두게 된다. 맹목적인 추종자였던 노자와도 결국에는 나카야마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운동을 그만둔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던 나카야마의 관료적인 조직운영이 사람들을 운동 밖으로 내몬 것이다.

 

대중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전위주의

 

50년대 중반을 거치며 일본 공산당의 스탈린주의에 반기를 드는 흐름이 학생운동 안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안보투쟁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선을 취하는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을 비판하며 국회의사당 진입과 같은 전투적인 행동을 취한다.
이들을 흔히 신좌파라고 불렀는데 레이코와 오타가 바로 그 신좌파였다. 영화 속에서 오타가 나카야마, 토우라 등에게 거친 언사를 늘어놓는 배경에는 신·구좌파의 대립과 갈등이 놓여 있다.
일본 공산당의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면서 출발했지만, 이들 신좌파도 자신들의 조직운영 방식에서는 구좌파와 다르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오타 역시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는 토우라 등이 10년 전에 나카야마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한 것을 욕하기만 할 뿐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또 키타미가 안보투쟁 과정에서 회의를 느끼고 운동을 떠나는 것이 자신의 그런 독선적인 태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키타미가 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사라진 이유는 레이코와 오타가 심어준 환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열심히 투쟁하면 조약개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키타미로서는 개정안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자 혼란스러워했다. 혼란 속에서 절망감을 느끼는 키타미에게 오타처럼 더 열심히 투쟁하자는 말만 외치는 사람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키타미가 사라진 까닭은 대중에게 운동의 전망을 솔직히 보여주지 않고 금방 승리를 얻을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는 활동가들의 잘못된 태도에 있다. 이들의 이런 태도는 대중을 동원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진실을 가지고 대중을 설득하지 않고 그들을 주체로 만들려는 노력 없이 거짓된 환상과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에 연연해 쉽게 대중을 동원하려는 조급함이 이런 태도를 낳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영화 속 이야기는 남한 운동진영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과거 남한의 운동조직에서도 지도부에 대한 비판은 가로막히기 일쑤였다. 정권의 탄압 속에서 조직을 비합법적으로 운영하면서 경직된 조직구조를 갖추었기 때문에 조직 내부에서 비판의 자유는 거의 없었다.
누구나 민주집중제를 이야기했지만, 언제나 “민주”보다는 “집중”에 훨씬 강조점이 찍혀 있었다 보안과 규율, 단결과 통일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언제나 개인이 가진 “비판의 자유”를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암묵적으로 강하게 억압했다. 이 속에는 조직은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초인적인 전위관이 깔려있었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이런 실수와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은 구성원들의 비판과 자유로운 토론이다. 지도부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누구라도 그에 대해 비판을 하고 토론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단합과 통일을 핑계로 비판을 막을 때, 그 조직은 자기만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괴물과 수동적인 꼭두각시로 채워지고 말 것이다.
대중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활동방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중을 투쟁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고 몇몇 활동가의 화려한 전술 사로 쉽게 투쟁에서 승리하려는 경향이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따낸 승리가 대중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어 더 큰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투쟁이 성공하지 못하게 됐을 때 대중이 느끼는 패배감은 매우 컸고, 그로 인해 빠르게 운동에서 이탈했다.
일본에서 사회주의 조직들은 관료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운영을 계속하다 대중과 점점 멀어졌고 결국 붕괴했다. 남한 사회주의 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열린 자세로 조직 내외부의 비판을 진지하게 수용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일본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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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인터뷰]비판의 자유를 방어하라!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1/05/06 15:07
  • 수정일
    2011/06/24 13:5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이하 ‘사노위’)의 내부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는 지난 2·3월 합본호에서 조직 문제에 대한 논쟁으로 사노위 내부에 의견그룹이 형성된 사실을 소개한 바 있다. (정치기사 <혁명가의 조직원칙과 정치의 문제는 여전히 투쟁해야할 과제이다> 참조 ) 조직문제에 대한 경향적 대립은 강령 문제에 대한 논쟁을 거쳐 최근 조직 내 민주주의의 문제로 폭발하고 있다.
의견그룹에 속한 한 회원이 사노위 서울지역위원회의 온라인 정치신문에 사노위가 발행한 소책자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에 대해 비평기사를 게재하면서 불거진 이 문제는 사노위 주류(현 지도부 경향)의 기사 삭제 및 사과 요구로 인해 조직 내에서 개인적 견해 표현의 범위와 비판의 자유에 대한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애초 논란의 발단이 되었던 사노위 서울지역 온라인 정치신문 <사회주의자 통신> 2호는 “사회주의 정치활동과 비판의 자유”라는 특집기획을 통해 전면적인 논쟁을 제기했다.
하지만 4월19일 열린 사노위 서울지역위원회 총회에서는 기존 조치를 재확인하는, 사살상 조직 내 비판의 자유를 부정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 결과 사노위 내부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나 변화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며, 사노위 주류는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
사노신은 이 문제가 단지 일개 조직의 내부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운동진영에 팽배한 관료주의·스탈린주의의 전형적인 사례로 판단하고, 총회가 열린 다음 날, 서울지역위원회 2기 집행위원을 지낸 이형로 활동가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소위 조직의 권위와 사업의 편의를 위해 개인의 견해를 억압하고 탄압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운동 전반에 퍼져 있는 스탈린주의 조직관의 잔재이다. 사노신은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조직 내 민주주의를 제약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며 사노위 내에서 비판의 자유를 방어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지들에게 지지를 보낸다. [편집자주]

자기 소개 부탁드린다.

사노위에서 강령실무위원을 하고 있다. 서울지역위원회(이하 ‘서울지역위’)에서는 집행위원회(이하 ‘집행위’) 집행위원이었다. 어제(4월9일) 서울지역 총회결과로 서울지역위 대표 이하 모두 사퇴하기로 해서 지금은 모두 전직이다.

집행위원위가 전원 사퇴하신 것인가.

전원 사퇴했다. 서울지역 2기 집행위가 어떻게 꾸려졌냐하면 공공연하게 의견그룹에서 추천을 받은 대표와 집행위를 꾸리겠다고 해서 만장일치로 꾸려진 것이었다. 현재 사노위 중앙집행위원회(이하 ‘중집’)가 지난 전체 총회 이후 통합지도부가 아니라 한 경향 중심으로 구성된 것과 마찬가지다.
어쨌든 이번에 서울지역 집행위가 서울지역 운영위원회(이하 ‘운영위’)와 마찰을 빚었고, 총회가 운영위 안을 수용한 것은 운영위의 비판대로 집행위를 조직의 사업을 부정하고 파괴한 기구로 규정한 것이다. 때문에 집행위는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것이 맞았다. 관례에 따라 운영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비대위를 꾸렸고 다음 총회 때까지 비대위 체제로 가게 되었다.


서울지역 집행위와 운영위 간에 대립이 벌어졌다고 했는데 논쟁의 전개과정을 간략히 소개해 달라.

자세한 전개과정은 서울지역위 명의로 발행한 온라인 정치신문 <사회주의자 통신> 2호에 다 나와 있으니 보시면 될 것이다.
애초 문제의식은 중집 주도로 발행한 소책자 사업에 대립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강령토론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소책자를 보니 내용이 너무 평이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강령토론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논쟁을 유발하기 위해서 서울지역 집행위원인 임천용 동지가 비판을 해서 새로 창간한 서울지역위의 온라인 정치신문에 기고했다.
비판의 핵심내용은 (소책자가) 사회주의를 목가적으로 표현했다는 근거 하에서 공상적 사회주의로 비판한 거다. 또 중간에 나오는 미래 소득의 문제에서 기본소득제를 유추할 수 있으니 우려가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두 가지가 문제가 되었다.
(온라인 정치신문) 창간호 교열 중 중집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내용이 적절치 못하니까 글을 보완하거나 다음에 싣는 게 어떻겠냐고. 하지만 편집권을 가진 편집장이 그건 우리의 고유 권한이고, 이 상태로 나가도 우리가 원하는 바를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기사가 나가자 중집에서, 중앙의 공식사업인 소책자 사업을 공상적 사회주의로 규정하고, 그것도 서울지역위 기관지라는 공식매체에서 그렇게 한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심각한 사태라고 문제제기를 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엄청난 논쟁이 있었다.
사실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진 것은 중집에서 서울지역 집행위와 운영위에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혀 달라고 요청하면서부터였다. 집행위는 이 문제에 대해 비평 글 게재와 관련하여 어떠한 문제도 없다는 입장을 단일하게 밝혔다. 오히려 토론을 통해 논쟁을 확대시켜 나가자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반면 운영위에서는 운영위원의 다수가 그것은 조직의 사업을 부정하고 파괴한 행위다, 그래서 그 기사를 삭제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피할 수 없는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애초에 중집이 문제제기한 내용은 무엇이었나.

그게 어제 총회를 보니 원래 했던 말과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교열 과정에서부터 비평 글 게재에 대해 문제제기했던 중집은 정작 총회에서는 서울지역 운영위 대 집행위의 싸움으로 던져 놓고 발뺌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집은 총회 발언을 통해 비판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 아니라, 비평글 내용이 서울지역위의 공식 입장(중집에게는 아마 다수 의견)인지 서울지역위에서 판단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라고 발언했다.
만약 중집의 순수한 의도를 사실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비평 글 게재에 대해 조직 원리를 들먹일 것이 아니라, 내용에 대한 조직적인 토론을 요청했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중집은 내용 토론은 철저히 외면한 채 관료적 제재로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사실은 운영위 역시 자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이 아니라 중집에서 먼저 운영위를 움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임시 운영위를 발의했던 운영위원이 중집 사무국 성원이기도 했다. 중집의 당시 정서는 의견그룹이 주도하는 서울지역 집행위가 자기 사업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하게 운영위를 압박한 것이다.


중집은 처음부터 제재조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인가.

애초 중집의 문제제기의 핵심은 공상적 사회주의라는 표현 때문에 조직의 권위가 무너지고 책을 팔 수 없는 상황이 왔다, 공상적 사회주의라는데 이걸 어떻게 팔겠냐, 그 결과 조직의 사업을 부정하고 파괴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제재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먼저 소책자의 내용이 과연 공상적 사회주의라는 비판의 근거가 전혀 없는 완전히 왜곡이라는 것을 규명해야 그 다음 토론이 될텐데 논쟁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우리는 “임천용 동지의 글이 아주 수준 높은 글은 아니라도 충분히 토론 가능한 글이었고 중집에서 토론을 통해 해결했으면 오히려 강령적 수준까지 접근할 수 있었는데 내용토론은 전혀 하지 않고, 형식과 절차상의 문제로 권위적으로 대응한 것에 대해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그랬더니 중집에서는 “우리는 임천용 동지의 글 내용 자체를 비판하지 않았다, 그렇게 충분히 쓸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했을 뿐이다”라고 한 사람도 있었고, “서울지역의 소수 의견이 소책자를 부정하고 있는 것 같아서, 서울지역 다수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듣고 싶었기 때문에 서울지역 운영위와 집행위에 의견수렴하려고 했다”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 발언을 듣고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교묘한 발 빼기는 둘째 치고 그냥 의견수렴을 하려고 문제제기를 했는데, 기사를 삭제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결론이 어떻게 날 수가 있나.


총회 결과는 어떻게 됐나.

총회에 이르기까지 많은 복잡한 과정이 있었다. 첫 번째 운영위 회의에서는 그 안건 자체가 사회주의 조직에서 있을 수 없는 안건이라고 해서 서울지역 대표가 퇴장하면서 회의가 유예되었다. 나중에 회의를 속개한 결과, 삭제라는 용어만 빼고 나머지 내용은 그대로 다 들어간 결정이 내려졌다. “임천용 동지의 글은 조직의 사업을 부정하고 파괴했다, 그래서 서울지역 운영위는 회원들에게 사과한다”는 입장이 운영위 다수 의견으로 결정되어 공표되었다.
반대로 서울지역 집행위는 운영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럼 조직의 체계상 가장 아래로부터, 운영위원회보다 직접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총회로 넘겨서 심판받자고 해서, 임시총회를 대표 권한으로 소집했다.
총회 안건은 “운영위 결정사안을 폐기하라”는 단 하나였다. 그 하나를 가지고 세 시간 넘게 회의를 했는데, 우리가 제출한 안건에 대한 찬성이 참석자 중 4분의 1도 안 되었기 때문에 부결되었다.


상식적으로 당연한 문제제기를 했는데 그렇게 밖에 표가 안 나왔다니 의외다.

임시총회를 통해 비판의 자유 문제와 그 글 내용 중에 문제가 됐던 내용들이 충분히 조직 밖으로도 공개할 수 있을 정도로 근거가 있다는 점을 제기하며 토론을 계속 하려했다. 그러나 반대 입장에서는 일관되게 “우리는 정치 토론할 생각이 없다”, “이런 비판이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을 뿐 아니라 조직의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그 결과 사업이 잘 안 되고 있으니 잘못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왜 공상적 사회주의라는 비판에 근거가 없는지 먼저 얘기를 해 달라고 했는데 답변은 하나도 없었고 “빨리빨리 표결하고 가자” 이런 태도였다. 깊은 토론은 전혀 되지 않았다.
이런 정치적인 내용은 토론을 통해서 걸러진 다음에 결과를 도출해야지, 어떻게 운영위원들이 내용에 대한 토론은 하나도 없이 무조건 조직파괴 행위로 규정해 놓고 밀어 붙이냐, 그런 문제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총회에서도 사실 토론을 통해서 소수지만 설득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인원조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반대 입장 쪽은 토론할 생각은 전혀 없고 사람 동원해서 표로 제압하려는 그런 구도였다.


아까 말씀 중에 정치토론을 할 생각이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정말 그런 말까지 나왔나.

총회 전에 열렸던 운영위에서 소수 운영위원들이 이건 토론의 대상이므로 정치토론을 더 하자고 제안하니까 다수는 정치토론 필요 없고 바로 이 안으로 결정하자고 했다. 안건에 대한 토론만 하자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결국 정치토론 없이 운영위에서 그 안건이 통과된 것이다. 이미 그 때 정치토론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내부게시판을 통해서 계속 정치토론을 통해서 해결하자, 그 결과를 가지고 다시 이야기하자, 의견에 대해 삭제·사과 요구를 하는 것은 사회주의 조직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이성적으로 판단하자, 소수파 말고도 거의 모든 집행위원들이 글과 입장을 통해서 그런 의견들을 밝혔지만, 단 한 마디의 공식 입장이나 반박 글, 심지어 임천용 동지의 기사에 대한 비판 글조차 한 번 내오지 않았다. 내부 게시판에서도 그랬고, 운영위원회에서도 그랬고, 몇 주라는 많은 시간 동안 정치토론이 아예 안 된 거다.
그래서 아까 말한 것처럼 총회에 가서 제대로 된 정치토론을 통해서 결과를 내려고 했는데, 여전히 처음에 한 시간 정도는 절차상의 문제니, 안건 순서가 어쨌니, 이런 걸로 시간을 질질 끌어서 정치토론과 전혀 무관한 내용으로 흘려보냈다. 심지어 서울지역 대표의 거취 문제 같은 걸로 안건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이 안건이 통과되면 어떻게 하실 거고, 부결되면 어떻게 하실 건가 하는 걸로 말이다. 대표나 집행위원들을 사퇴시키고 싶은데, 총회 이후에 이 사람들이 어떡할 것인가 확인해보려는 의도가 농후했다. 결국 우리 쪽에서 총회 결정사안에 대해 행동통일 원칙을 따르겠다고 하니까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것가지고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정작 안건을 상정하기도 전인 이 때 이제 토론 충분히 했으니까 표결로 처리하자는 발언까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안건 상정을 하고나서, 내용에 대한 문제부터 시작해서, “조직운영 원리상 이런 게 말이 되냐, 1호에 비판 글 실리면 2호에 반박 글 싣고, 그래도 안 풀리면 (사노위) 전체 회원 토론을 개최하고 그런 판을 만들어서 해결해야지 단지 분회 대리인일 뿐인 운영위원들 일부가 정치토론도 없이 그런 결정을 해버리는 것이 말이 되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형식상도 말이 안 되고 내용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에 토론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문제로 인해서 사업이 집행이 안 되고 뭐가 안 되고, 그렇기 때문에 사과해야 한다, 징계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징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나.

그렇다. 일부에서. 특히 노동전선에서 활동하는 회원들. 그런 주장에 대해 그게 관료주의고, 그게 바로 사회주의 조직의 기본을 모르는 행위라고 이야기를 해도, 서울지역위를 당신네 의견그룹이 사조직으로 운영하지 않았냐, 서울지역위가 당신들 사조직이냐, 이런 식으로 나오는 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토론은 더 이상 안 되는 거구나, 논리로 밀리면 말을 바꾸고, 그런 걸로 시비를 걸고. 그러다 결국에는 표결이나 하자, 이런 식이었다.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서울지역위 총회가 그렇게 됐다면 사노위 전체 총회를 소집해서 문제를 다시 제기할 계획은 없는가.

아직 계획세운 바가 없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강령토론에 집중해야 되기 때문에. 이것도 사실 총회까지 소집한 것은 싸우자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원래 목적인 강령토론을 위해 이 문제를 빨리 해소하고 가자는 의미가 컸다. 이런 대립 구도 속에서는 아무 것도 못하니까. 어쨌든 총회에서 패배한 것은 받아들여야 하니까. 전체 총회는 강령총회라서 이 문제를 갖고 (사노위) 전체 회원 총회까지는 안 갈 것 같다. 아직 이후 구체적인 방향은 안 세웠지만 이 문제를 갖고 끝까지 싸울 거다.
내 개인적인 견해는 사노위가 명백하게 정치적 파산을 한 거라고 본다. 정확히는 스탈린주의를 부활시켰다, 사노위 출범할 때 사민주의, 민족주의, 스탈린주의는 제외하고, 그런 그룹들은 고려의 대상에서 빼고 시작한 건데, 결국 1년 만에 서클논리·조직논리로 어렵사리 극복한 구태의연한 관료주의를 여기 다시 끌어온 것이다. 그 동안 토론과정이나 총회과정에서 발언들을 보면 50% 이상은 그 기저에 스탈린주의가 깔려 있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에, 나는 스탈린주의의 부활이라고 판단한다. 이에 대해서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다. 지금까지 봤을 때 조직 내부는 변화하지 않을 테니까 외부로 확장시켜서 싸우겠다는 거다.


외부로 확장시킨다고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주 기밀사항이 아닌 이상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결정사항과 경과 등을 공개해서 외부로부터 심판을 받게 하겠다는 말이다. 정말 이런 조직이 한국에서 당을 만든다고 하는 조직이 맞나, 이런 조직과 앞으로 같이 갈 수 있겠나 없겠나를,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 오래 있던 노쇠한 활동가들의 판단력은 이미 흐려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당장 사노위에 결합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 건설의 열망을 가지고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동지들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방법은 아직 생각을 안 해봤지만 그런 걸 기본관점으로 갖고 있다.
사회주의 조직의 기본 운영 원리, 스탈린주의에 대한 철저한 차단, 사상투쟁의 자유 문제나 사상투쟁의 조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당 건설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확히 깨닫지 않으면 당 건설은 어렵다.


사노위가 정치적으로 파산했다면 이상 과연 강령토론을 계속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의문스럽다.

미묘한 문젠데, 내 말은 일부 파산이라고 한 거다. 1년 전에 배제시키고 왔던 스탈린주의적인 것을 부활시켜준 데 대한 일부 파산이고 전면적 파산은 아닌 거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 자체가 서울지역에 국한되어 나타난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긴 어렵다. 예를 들어 다른 지역에서는 예전 사노준 쪽에 있었던 회원들 중에서도 이번 조치에 대해서 적극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긍정적인 면도 있기 때문에 전체 파산으로 볼 수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게 고착되면 전체 파산으로 가는 길이다.
개인적으로 강령은 실천적으로 승인되고, 무기로서의 강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을 주도했거나 몰아간 주역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제출한 강령과는 전혀 맞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사람들이 이런 강령을 채택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강령에 대한 모독이자 강령의 정신을 질적으로 저하시킬 것으로 본다. 그람시나 스탈린도 강령을 받아들였지만 그렇게 변절한 사람들이 강령을 낮추어 버리거나 바꿔 버렸다. 강령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말거나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강령을 설득할 생각도, 권유할 생각도 없다.
다만 이런 사태까지 주도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중에는 선의로 동원된, 그게 조직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동원된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본다. 그런 사람들을 계속 설득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번 조치를 주도한 사람들과는 강령토론의 실천적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면 의견그룹에도 이번 운영위의 조치를 지지한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럼 의견그룹은 어떻게 되는 건가.

마지막 의견그룹 회의에 비판의 자유에 대한 문제를 지지하는, 그러니까 이번 총회에 올린 안건과 똑같이 운영위 결정에 대해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연서명 안건이 올라왔다. 의견그룹 전체의 동의를 받기 위해, 최소한의 행동통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글 내용이나 절차상 문제에 대한 내용은 다 뺐다.
오직 삭제·사과 요구에 대해서는 절대로 받을 수 없는 요구니까 그에 한정해서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동지들이 글 내용에 대해서 지지할 수 없고 절차상 문제 있는 것이 맞기 때문에 사과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오랜 토론에도 불구하고 전혀 바뀌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건 노선의 차이구나, 더 깊게 사상적으로 들어가면 정말 위험한 사고들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발언들 중에 심지어 마음에 안 드는 글은 삭제하는 것이 기본 아니냐는 발언도 있었다. 마치 스탈린이 환생한 것 같은 발언들이, 그것도 젊은 동지들 입에서 쏟아져 나와서 깜짝 놀랐다.
그 과정에서 이렇게 되면 의견그룹으로 같이 갈 수 없다, 행동통일 안 되는 의견그룹은 이미 소멸한 것이라는 입장이 나왔다. 나 같은 경우도 “의견그룹이 애초에 강령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민주집중제에 대한 동의로 모인 것이고, 다만 의견그룹 성원들이 주도하는 강령안이 나와서 의견그룹 안으로 채택해 달라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민집제 문제에서 지난 번 멤버십 문제가 ‘집중’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민주’의 문제가 걸린 것이다, 따라서 여기 동의하지 못한다면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가는 게 맞다”는 의견을 냈다.
비판의 자유를 옹호하지 않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논리의 밑바탕에는 당분간 강령을 채택하지 말고 처음 사노위가 구성될 때 제출된 11개 정치원칙을 가지고 1년 더 계속하자는 주장이 깔려 있다. 여기에는 “모든 대립과 갈등을 봉합하고 조직보존 잘하고 확대시켜서, 1년 더 끌고 가서 다수파 획득해서 당으로 가자”, 이런 논리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과 본래 의견그룹의 입장은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의견그룹은 애시당초 명확한 기한을 정해 놓고 강령논쟁에 집중하고자 했었는데, 그런 주장은 이를 희석시키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의견그룹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향후 문제는 아직 결정된 것이 없고, (새로운 의견그룹의) 준비모임 정도만 한 차례 가졌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조직문제가 반복해서 논쟁되고 있고, 조직문제에 대한 결집이 계속 강령문제에 대한 결집으로 연결되는 양상인데. 이것은 사노위를 구성했던 세력들이 애초에 조직원칙에 대한 기본적인 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완전히 달랐던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정확하게 보았다. 사노위에 참가한 소위 혁사진영이라는 소수파는 혁명정당, 전위전당 쪽에 모든 것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다른 쪽은 사노위라는 것 자체가 전환해서 당 추진위로 가야한다는 입장이다. 사노위를 잘 다듬고 만들어서 그것이 당추진위나 당으로 가는 밑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사노위 조직 자체를 흔들고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사노위가 한시적인 조직에 불과한데도 끊임없이 대중들에 대한 권위, 조직의 권위에 대한 강조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당건설의 경로는 서클 몇 개가 모여서 통합의 정치를 잘해서 당으로 간다는 게 전혀 아니기 때문에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혁명적인 분파 투쟁은 기본이고 항상 모든 논쟁은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그 쪽의 조직관은 내부적으로 모든 논쟁을 다 해소한 다음에 정선된 것만 단일한 걸로 외부에 보여주자는 것이다.
이번에 비판의 자유가 문제가 된 것도 “내부게시판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다 괜찮지만 왜 그걸 공식기관지에 싣느냐, 그래서 너희들은 조직사업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의 조직관이 우리가 말하는 민주집중제를 기본으로 하는 당관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부딪치는 것이다.


사실 민주집중제라고 하는 것은 일정정도 의식적인 동일성이 보장되고, 그 하에서 비판의 완전한 자유와 행동의 통일이 존재하는 건데 그런 것들이 현재 사노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맞다.


그 결과 한편으로 느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히 관료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현상들에 대한 진단은 어떻게 하고 있나.

나는 그 사람들과 같이 한지 1년 밖에 안 돼서 아주 객관적인 판단은 할 수 없다. 그래도 지금까지 나타난 모습을 보고 판단해보면, 이름은 비록 바뀌었지만 한 서클이 십년 이상 지속되었을 때 나타나는 폐쇄성과 자족성이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 결론은 서클주의의 폐해인 것 같다. 그 안에서는 그들 내부적으로 권력을 장악해 왔던 흐름에 권위주의적인 면도 있고, 폐쇄성도 있고 패권적인 요소도 있고. 그런 것들이 복합된 것 같다.
겉으로는 느슨해 보이는 것은 정치적인 긴장이나 정치의식이 높은 수준에서 균질화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와 폐쇄성은 높고. 아주 전형적으로 정치의식은 낮으면서 조직논리로만 조직을 유지하려는 그런 모습이다. 사실 지난 번 멤버십에 관련된 논쟁도 엄밀히 보면 왜 문제제기 하느냐를 가지고 친 것이다.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동지들이 지난 번 조직과 멤버십 문제에서는 주류를 연방주의라고 비판해 놓고, 이번에는 독재라고 비판하는 것은 일관되지 않다는 견해도 있는 것 같은데, 아까 말씀하신 그런 모습들이 이런 양면성을 설명하는 것 같다.

그렇다. 정립이 안 돼 있으니까. 어느 때는 저렇게 가고, 어느 때는 이렇게 가고. 멤버십 문제는 엄격해도 될 문제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느슨하고, 실제 정치적인 견해나 노선의 문제에 대해서는 열려있어야 하는데, 비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어서 질적인 상승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건 다 다 막혀 있고.


수준 높지 않은 사람에게는 비판의 자유가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하는데 그건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인 발상이 아닌가. 사실 내용 문제를 다 떠나 조직에서 개인의 견해에 대해 이런 논의가 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맞다. 그들이 계속 주장하는 논리 중 하나는, 소책자를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하는 그 글이 논리적으로 이해되고 수준이 높은 글이었다면 그 글도 방어하고 삭제·사과 요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소책자를 판매하지 말라고 했을 거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건 글이 후져서 삭제하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런 후진 글들은 공개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 발상 자체가 참 그렇다. 실제로 사노위 신문에 글 쓰는 사람은 10명도 안 된다. 쓰는 사람들만 계속 쓰고 있는 거다. 임천용 동지도 조직에서 집행위원까지, 나름 간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글마저 수준 떨어진다고 평가하고 못 싣는다고 하면, 글 쓰는 게 서툰 일반회원들은 어떡하란 말인가. 앞으로 글을 쓸 수 없는 거다.
또 비판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토론을 거치지 않고 그런 글이 나가는 것에 반대한다고도 이야기하는데, 그게 그들의 조직관이자 언론관인데 그것도 내가 보기에는 굉장히 위험한 논리다.


내부적으로 정치적 통일성이 높거나 상호신뢰가 있을 때는 서로 합의 하에서 그럴 수 있을 듯은 한데, 지금 사노위 같은 경우는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다양한 성격의 정치가 들어와 있는 것이고 그런 경우에는 상당히 위험한 논리로 보인다. 사실 사람들이 아주 철통같은 조직으로 알고 있는 볼셰비키 같은 경우도 캠페인에 직접 들어가기 전까지는 거의 무조건적인 비판의 자유가 있었고, 심지어 캠페인 도중에도 몸은 따르지만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는 게, 예를 들어 책자를 팔면서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 견해는 이렇다고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게 역사적 기록이다.

맞다. 세 개 조직이 모이고 무소속이 모이고 해서 합의해서 출범했으면 내부적으로 보장해줄 것도 보장해주고 소수파의 권리도 보장해주고 페어플레이를 해야 하는데 배후정치로 일관하고 있다. 1년 동안 단 한 번도 서로 톡 까놓고 토론을 해서 결정해서 의견이 일치되고 행동통일이 된 적이 없다. 그래서 죽은 조직이 맞는 것 같다.
다수파 쪽은 원래 그랬으니까 이해한다 치고, 의견그룹에 있다가 그 쪽에 힘을 실어준 사람들의 논리는 정말 위험하다. 결국 레닌, 트로츠키 말 찾아다 정당화시키려고 몇 년에 뭘 쓰고 몇 년에 뭘 쓰고 찾아다니고 있는데, 스탈린을 겪은 후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들의 조직관이 어떻게 변했는지, 현실이 어떻게 변했는지 정말 무지하다. 결국 1917년에 묶여 있다. 레닌 저작이 성경책도 아닌데, 레닌 저작 갖고 서로 찾기 경쟁이나 하고.


향후 계획은 어떻게 잡고 있나. 강령논쟁은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

의견그룹이 해소된 뒤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간 얘기는 이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 가야한다. ‘혁명 강령 수립을 위한 모임’ 혹은 ‘혁명 강령 수립을 위한 의견그룹’ 같은 명칭으로 강령투쟁만 사노위 끝날 때까지 집중하는 그걸로 모이자, 그리고 전처럼 낮은 차원이 아니고 정확하게 강령에 동의하는 사람들로 모여서 행동통일까지 하는 정치적인 의견그룹을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전제조건은 명확한 기간을 정하고 싸우는 의견그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령논쟁을 1년 더 하자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강령이 같더라도 같이 못할 것이다.
강령은 조만간 완전한 초안형태로 제출하려 한다. 현재 세 가지 안이 나와 있는데 절충하거나 조합하는 건 바라지 않고, 같은 것과 다른 것에 대한 원칙상의 확인을 해서 노선적인 원칙이 다르면 단일안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 과정을 겪고 나면 5월 달부터는 한 달 동안 공개토론 기간을 갖고 그 결과를 갖고 5월 말에 총회를 할 건데, 그 총회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크게 네 가지 정도이지 싶다.
첫째, 다수가 선호하는 강령을 채택하자, 둘째, 3개월 정도 강령논쟁을 더 하자, 셋째,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강령들이니 각자 강령에 따라 헤쳐 모이자, 넷째, 강령을 채택하지 말고 1년 더 지금 형태로 가자. 우리는 강령 토론을 1년 연장하자는 안에 반대하고, 다수가 선호하는 강령선택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 두 가지는 배제하고 강령 논쟁에 최선을 다한다가 입장이다. 우리 목표는 기계적 절충이 아니라 실제 사상 투쟁을 통한 강령 통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향후 전망을 이번 논쟁의 결과보다 강령 논쟁의 결과를 보고 세우겠다는 것인가.

그렇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실제로 다수파 같은 경우도 5월 이후를 상정하고 있지 않다. 사실 그 동안 토론이 거의 안 됐다. 4월, 5월에 강령토론을 내외부적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4.30 정치대회다, 뭐다 해서 뺑뺑이 돌리고 해서 정신 하나도 없게 만들어 놓고 실질적인 토론은 그냥 묻혀왔다. 이런 과정이 분명히 또 반복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내 개인적인 생각은, 어쨌든 5월 달부터는 무조건 내외부로 토론을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일 단일안이 안 나오면 독자경로로 가는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다른 세력이나 개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사노위 일부 성원들 중에는 사노위만이 유일한 길이고, 이게 안 되면 운동이 수십 년 후퇴하는 거라는 과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건 특권의식일 뿐이라고 본다. 우리는 단지 먼저 시작하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의 강령은 계급의 강령이고 조직체계도 계급이 함께 할 수 있는 열려 있는 체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1년 동안 사람은 거의 안 늘었고 집회에 피켓팅하고 신문 뿌리며 피드백 없이 일방적인 홍보만 해왔다.
비판의 자유 문제가 나오게 된 계기는 결국 사노위 조직이 갖고 있는 폐쇄성과 논쟁이 외적으로 확장되는 것에 대한 제한, 분파 활동에 대한 적대감들 때문이었다. 당 건설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이 뭔지를 모르는 것이고, 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본다. 이런 걸 외부 동지들도 제대로 알게끔 더 공개적이고 전면적으로 해서 나중에라도 당을 같이 할 거면 우리만의 경험이 아니라 같이 공유해서 외부로부터의 압박도 좀 가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외부로부터 많은 생각들을 받았으면 좋겠다. 사회주의건, 당이건, 정말 한국의 운동이 얼마나 무너졌나 망가졌나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데 ABC부터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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