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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04
    마르크스의 유령들 번역 수정 by 진태원(1)
    와라
  2. 2008/01/19
    사이버-맑스에 관한 논평 - 노명우
    와라

마르크스의 유령들 번역 수정 by 진태원

9쪽 4번째 줄
사는 법을 배우기” ⇒ “사는 법을 배우기/가르치기Apprendre ? vivre”
불어에서 “apprendre”는 “배우다”는 뜻 이외에도 “가르치다”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는데, 이 구절은 데리다가 이 단어에 들어 있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시사하려는 구절이므로, 이렇게 고쳐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9쪽 4-5번째 줄
“사는 법을 배우기, 그러나 누구에게?” ⇒ “사는 법을 가르치기, 그러나 누구에게?”
여기는 “apprendre”에 담긴 “가르치다”는 뜻을 지적하는 곳이기 때문에, “배우기”를 “가르치기”로 고치는 것이 옳습니다.

9쪽 8번째 줄
“맥락 바깥에서 그것 자체만 놓고 볼 때”
⇒  “맥락 바깥에서―하지만 맥락은 항상 열린 채 남아 있으며, 따라서 오류를 낳을 수 있고 불충분하다―그것 자체만 놓고 볼 때”
여기는 원문의 줄표 사이의 내용이 누락되었습니다. 9쪽의 이 세 가지 내용은 모두 로쟈님이 지적해주신 내용입니다. 로쟈님께 감사드립니다.

10쪽 아래에서 두 번째 줄
“다른 사람의 죽음도 삶과 죽음 사이의” ⇒ “다른 사람의 죽음도. 삶과 죽음 사이의”

27쪽 주 28)
“5장 각주 291, 292 참조.” ⇒ “5장 각주 189, 190 참조.”
원주를 모두 미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각주 번호에 착오가 생겼습니다.

31쪽 10번째 줄
“왕이란 것은 하나의 사물이다.” ⇒ “왕이란 것은.”

 

46쪽 2번째 줄
“느낌이 주어” ⇒ “느낌이 주는”

81쪽 아래에서 두 번째 줄
“알튀세” ⇒ “알튀세르”

94쪽 두 번째 줄
“자본화한다/활용한다.” ⇒ “자본화한다/활용한다capitaliser.”

98쪽 아래에서 6번째 줄
“연금술을 분석하고, 가치들의 전도와” ⇒ “연금술을 분석하고 가치들의 전도와”

108쪽 첫 번째 줄
“분석을” ⇒ “분석”

116쪽 4번째 줄
“도상성圖上性” ⇒ “도상성圖像性”
“iconicit?”의 번역인데, “icone”이 “도상圖像”을 의미하므로 이렇게 바꾸는 게 옳습니다.

128쪽 두 번째 줄
“이것 역시 데리다의 말인데” ⇒ “이것 역시 후쿠야마의 말인데”

136쪽 아래에서 두 번째 줄
“하지만 우리가, 예고 또는” ⇒ “하지만 예고 또는”

137쪽 11번 째줄
“또한 공적인 또는 정치적인 질서” ⇒ “또한 공적이거나 정치적인 질서”

149쪽 7번 째줄
“어떤 목적의 불가피함” ⇒ “어떤 종말의 불가피함”
이것은 명백한 오역입니다. 불어의 “fin”은 “목적”과 “종말”이라는 뜻을 모두 지니고 있는데, 여기서는 “종말”이라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161쪽 12번 째줄
“정치적 자유주의의 승리를” ⇒ “정치적 자유주의의 승리와”

164쪽 아래에서 4번째 줄
“국내적-국제적 전쟁” ⇒ “국제적 내전”
데리다는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내전이 사실상 국제적인 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 내전”이라고 옮기는 것이 데리다의 뜻을 좀더 잘 전달해줄 것 같습니다.

168쪽 12번째 줄
“공표된 시장” ⇒ “공개된 시장”

169쪽 1번째 줄
“현전하는” ⇒ “현존하는”
이 책에서는 “pr?sence”를 모두 “현존”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여기도 “현전”을 “현존”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178쪽 4-6번째 줄
“못한다면” ⇒ “못한다 해도”
“정확하게는/정당하게는” ⇒ “정확하게/정당하게”

179쪽 7번째 줄
“고정시키는 것” ⇒ “고정시키는 정신”

180쪽 아래에서 네 번째 줄
“알튀세” ⇒ “알튀세르”

182쪽 2번째 줄
“독단주의의, 심지어 형이상학의” ⇒ “독단주의 및 심지어 형이상학의”

253쪽 6번째 줄
“finfe” ⇒ “finde”

260쪽 8번째 줄
“육신 가진 존재” ⇒ “육신을 가진 존재”

286쪽 주 189) 첫 번째 줄
“이론은” ⇒ “이 혼은”

322쪽 아래에서 세 번째 줄
“또는 양자를 분리시킬 것인가?” ⇒ “또는 어떻게 양자를 분리시킬 것인가?”

331쪽 주 218) 두 번째 줄
“원문으로는” ⇒ “원문은”

335쪽 8번째 줄
“두려운 낯섦에 대한 의지는” ⇒ “두려운 낯섦에 의지하는 것은”

337쪽 1번째 줄
“지키는 일을 수 있다.” ⇒ “지키는 일을 할 수 있다.”

341쪽 주 2) 아래에서 6번째 줄
“<<기억들―폴 드망을 위하여>>” ⇒ “<<기억들―폴 드 만을 위하여>>”

351쪽 주 93) 아래에서 두 번째 줄
“탐구되어야 하다.” ⇒ “탐구되어야 한다.”

352쪽 주 96) 두 번째 줄
“나버지” ⇒ “나머지”

354쪽 주 101) 첫 번째 줄
“끝에서 두 번째 음절은 죽었다.” ⇒ “라 페뉠티엠므는 죽었다.”
이것은 장-미셸 라바테라는 사람의 책 제목인데, 원문은 “La penulti?me est morte”입니다. 불어에서 “La penulti?me”가 “끝에서 두 번째 음절”을 뜻하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했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말라르메의 시를 인용한 제목이었습니다. 말라르메의 시에서 “La penulti?me”가 “끝에서 두 번째 음절”이라는 뜻으로 국한되지 않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원어의 발음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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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맑스에 관한 논평 - 노명우

{사이버 맑스}에 관한 논평 - 노명우

 

사이버-맑스}의 저자는 "맑스주의를 혁신하는 데 도움"(41)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저자가 책을 쓴 의도를 드러낼 경우, 독자는 저자

가 의도가 과연 성공적으로 관철되었는지를 궁금해하며 책을 읽는다. "맑

스주의를 혁신"하려는 저자의 의도에 대해 저자가 아닌 독자로서 나 또한

저자의 의견은 과연 맑스주의 '혁신'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물으며

이 책을 읽었다.

  

'맑스주의 혁신'이라는 구호 속에는 두 가지 계기가 서로 충돌한다. 맑스주의가 역사화 되었다는 판단역사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는 여전히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는 판단이 교차할 때 맑스주의는 폐기나 교조의 대상이 아닌 혁신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저자가 "맑스주의를 혁신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서술했다면 저자는 두 가지 계기가 현재의 지형 속에서 어떻게 교차하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하고, 폐기냐 믿음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닌 새로운 전망을 독자들에게 설득해야 한다.

 

저자는 야심에 찬 시작을 꾀한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정보시대가 자본과 노동주체 간의 역사적 대립을 해소하기는커녕 어떻게 그 대립이 가장 거대한 전장으로 뒤바뀌는지, 새로운 첨단기술(컴퓨터, 원격 통신 그리고 유전공학)이 어떻게 형성되며, 어떻게 일반적 상품화라는 전례 없는 전 세계적 질서를 형성하는 도구로 사용되는지, 그리고 역설적으로 어떻게 이 과정에서 이전과 달리 부가 공동 분배되는 미래를 실현할 수 있는 세력들이 등장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23) 저자의 이러한 의도는 책제목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책제목 {사이버-맑스}는 과거의 시점으로 환원되고 폐기 위협을 받고 있는, 아니 이미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폐기 당한 맑스와, 맑스를 뒤로 한 채 미래를 향해서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는 정보화의 물결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저자의 의도를 잘 드러낸다. 그래서 이 책의 한국어판 표지에 쓰여져 있는 "{제3의 물결}에 보내는 좌파의 반론"이란 표현은 단순한 광고 문구가 아니라, 이 책이 담고 있는 정보에 대한 탁월한 압축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맑스주의 혁신'이라는 야심에 찬 기획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더구나 그 적들은 맑스주의 외부에만 있지 않고, 내부에도 있다. 맑스주의를 둘러싼 현재의 이론적 정세는 이렇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사회주의의 몰락은 맑스주의의 붕괴를 최종 선언"했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가 맑스주의 외부의 적이라면, 저자에 의해 '포스트 맑스주의'라는 딱지를 부여받은 맑스주의는 외부의 적 못지 않게 위험한 내부의 적이다. 왜냐하면 포스트 맑스주의는 전통적 맑스주의의 이론에 내재한 계급 환원론 '총체성' 지향 을 문제삼으며 맑스주의를 혁신하지만 그 혁신은 잘못된 것으로 저자에 의해 판명된다. 왜냐하면 포스트주의자들은 "미디어와 대중문화를 언급할 때에도 자본주의적 구조조정의 어두운 측면을 노골적으로 경시"하고 "대중문화를 둘러싼 거품뿐이 열광에 아첨"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맑스주의의 폐기를 주장하는 맑스주의의 과거에 대한 우파적 해석과 전유, 그리고 계급노선을 순치 시키는 포스트 맑스주의의 맑스주의 역사해석 양자에 거리를 둔다. 그가 거리를 두는 맑스주의의 과거를 해석하는 두 가지 입장은 저자가 보기에 '참된 맑스'와의 대화가 아니라 부재 하는 맑스주의의 유령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즉 저자에게 지금까지 제기된 맑스주의를 역사화 하려는 모든 경향은 "맑스주의의 유령과 적대적인 대화"(42)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유령과 대화하는 대신, 저자는 맑스주의를 혁신하기 위해 뉴미디어와 대화하려 한다. 뉴미디어로 인한 사회적 조건의 변화에 주목하여 맑스주의의 혁신을 모색하는 것은 저자가 보기에 맑스적이면서 동시에 비맑스적이다. 이러한 모색은 19세기 당시 최첨단 정보산업이었던 {라인신문}의 편집장이었던 맑스를 염두에 둘 때 철저히 맑스적이다. 단지 21세기의 맑스는 올드 미디어가된 신문이 아닌, 21세기의 최첨단 정보산업의 성과를 이용하려하다는 점에서 맑스와 다른 시도를 꾀할 뿐이다.

 

저자는 정보혁명에 대응하는 맑스주의의 3가지 입장을 이렇게 분류한다. (1) 자본주의를 필연적으로 패배시킴으로써 절정에 다다를 변증법적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과학적 사회주의 (2) 기술이 자본주의의 지배적 도구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네오 러다이트 (3) 기술의 중재를 통해서 노동과 자본이 서로 화해할 가능성을 내다보는 포스트포드주의(94)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현대의 저자로 저자가 지적하는 만델은 저자에 의해 탈산업주의자들과 은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된다. "만델이 보여준 자동붕괴론적 맑스주의는 상대방의 이론에 담긴 가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다만 과학적 기술혁신이 온화하고 진화된 미래를 가져오리라는 전망에 대해서만 의견이 엇갈릴 뿐이다."(107) 만델류의 객관주의적 분석은 "노동이 욕구와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살아 있는 주체라는 점뿐만 아니라, 이 주체가 적어도 기계 속에 구현된 죽은 노동만큼 복잡하고 다양하게 역동적인 변화를 겪는다는 점도 거의 이해하지 못하며, 자본주의가 주로 이런 집합적 주체의 에너지를 가둬둔 채 억누르면서 발전해 나아간다는 점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109)는 것이다.

 

반면 네오 러다이트들은 정보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 그 자체를 지배와 동의어로 봄으로써 "죽은 노동으로 산 노동을 지배하는 자본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기에 "궁극적으로 자기패배를 불러올 한계"(121)를 지니고 있다. 네오 러다이트가 기술을 두려워한다면, 포스트 포드주의적 입장은 기술을 너무나 신뢰하기에 저자에 의해 공격된다. 즉 포스트 포드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세력들은 "자본의 새로운 기술이 지닌 억압적인 힘에 절망하기보다, 그 기술의 해방적 잠재력에 매혹되는 문"으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맑스주의를 구원하기 위해, 맑스주의의 역사를 해석하는 모든 입장을 비판하는 저자가 찾아낸 유일한 탈출구는 자율주의적 노선이다.

 

현재를 전유하기 위해 혁신의 전통을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혁신의 전통을 비판하려는 맑스주의자가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즉 맑스주의 진영 내부의 상호비판이 치열해질 때, 맑스주의의 명백한 적인 자본보다 자신과 다른 판단을 내리는 다른 맑스주의가 강력하고 시급한 적으로 부각되는 아이러니이다. 맑스주의의 혁신은 맑스주의 내부에서 되풀이되어온 이 아이러니의 극복 또한 요구된다. 하지만 저자는 내부의 잘못된 해석에 너무나 많은 관심을 할애한 나머지 아이러니에서 빠져 나올 길을 찾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많은 맑스주의 내부의 적을 만들어놓았다. 그 이후 저자는 힘든 싸움을 벌인다. 저자는 한편으로는 맑스주의의 잘못된 혁신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을 상대로 각각의 문제점을 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의 현재성과 혁신을 다루고 있는 책은 맑스주의를 무역사적으로 옹호하거나, 맑스주의를 시대적 변화의 속도를 근거 삼아 폐기하려는 주장보다 어려운 길을 걷는다. 과연 저자는 이 위험한 경계에서 벌이는 싸움에 성공했는가?

 

이 책의 정당한 문제제기와 참신한 해석 시도와 야심에 찬 의도는 책의 중반 이후, 유일한 해결의 길로서 자율주의적 맑스주의를 선택하고, 그 유일한 선택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설득력을 급속히 상실한다.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틀을 통한 맑스주의의 혁신을 독자에게 설득하는 저자의 호흡은 빠르지만, 아쉽게도 "저자의 손은 끝까지 침착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해석이 유일한 혁신의 길임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숨가쁘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자율주의적 맑스주의가 정보혁명을 전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대항해석이라고 주장하고 싶다(사실상, 맑스를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자율주의자들의 저서들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런 대항 해석은 근본적으로 대안적인 전망을 통해 공동체와 커뮤니케이션을 바라보면서, 컴퓨터화된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21세기의 코뮤니즘을 구축하는데 기여할 것이다."(147)

 

자율주의적 노선의 유일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맑스주의 내부의 다양한 혁신 노력과 거리를 둔 것처럼,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해석을 '정보시대'의 유일한 '대항해석'이라는 주장을 저자가 펼치자마자 저자의 주장은 진리의 보증물을 표현해주는 '당파성'이라는 기호가 '올바른 해석'으로 바뀌었을 뿐, 구좌파의 당파성 논쟁과 유사한 논쟁의 구도로 말려 들어간다. 자율주의적 맑스주의가 정보시대에 대한 맑스주의의 대응이라는 주장과, 유일한 올바른 해석이라는 주장은 확실히 다르다. 저자는 점점 후자의 길을 택한다. 저자가 후자의 길을 택하면 택할수록, 맑스주의 내부에는 무수히 잘못된 혁신의 길과 하나의 정당한 혁신의 길 사이의 대립만 명료해진다.

 

정보기술의 발전에 따라 맑스주의가 혁신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저자의 설득력은 자율주의적 맑스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배타적 주장이 첨단 정보기술로 인한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일방적 주장이 맞물리면서 현실성을 상실해간다. 저자는 '사회적 노동자'들이 쌍방향 미디어의 출현으로 인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대안적 저항운동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들에 주목한다. 저자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대안적으로 사용되는 예들을 '적극적인 시청자' 분석에서부터, 대안적이고 자율적인 미디어의 발전, 즉 라디오 행동주의, 게릴라 비디오, 퍼블릭 엑세스 케이블 운동, "낡은 픽업트럭의 전구소켓에 노트북을 꽂아 성명서를 입력하는 부사령관 마르코스"(336)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찾아내고, 이 사례들을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의 증거로 제시한다. 물론 저자는 인터넷의 대안적 사용가능성에 대한 탈산업주의자들의 과장된 견해와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사이버 스페이스의 정치성을 기술적 측면에서 찾지 않고, "지상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을 서로 눈으로 확인하고 연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미디어"(275)이기 때문이라 한정을 짓지만, 저자의 설득력은 점점 떨어진다.

 

저자는 쉬지 않고 인터넷의 대안적 사용가능성에 대한 사례를 수집하고 제시한다. "오늘날 다양한 투쟁결절점들은 이런 활동을 통해 전지구적 차원에서 수평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들은 기술적 노하우와 장비를 서로 이전시켜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분석 토론 지지를 중계해주기도 한다. 캘리포니아의 저출력 방송국들은 아이티 프린스 항에 라디오 방송국을 세우려는 활동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벤쿠버의 비디오 활동가들은 니카라과의 대중교육을 전담한다. 영국 뉴베리의 고속도로 항의자들은 나이지라 웅고니랜드의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시위를 지지하는 팩스를 받았다. 한편 유럽의 환경 활동가들은 켄 사로-위와의 사형선고에 항의해 쉘오일에 대량의 전자우편을 보내기도 했다. 바로 이것이 투쟁세력 재구성의 커뮤니케이션적 연결이다."(316)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들은 분명 주목받을 만한 새로운 경향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양한 대항집단이 인터넷을 혁명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만큼 정보격차(Digital Divide)도 사실이다. 저자는 정보격차를 증거로 삼아, 인터넷의 대안적 사용가능성을 비판하는 모든 시도들 정보사회의 가능성에 주목하지 못한 채 계급 불평등만을 되풀이하는 낡은 좌파의 푸념으로 치부한다.

 

저자는 "인터넷은 부분적으로 성별, 인종, 연령에 따라, 특히 소득에 따라 개인용 컴퓨터, 모뎀, 전문 기술을 향한 접근가능성이 차별된다는 인구통계학적 한계"(267)에 대해서 눈을 감은 채, "1991년 나이키가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에게 그가 광고를 한 신발을 만들기 위해서 고된 일을 한 젊은 인도네시아 여성들 3만 명의 연간 수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홍보비용으로 지불"한다는 사실에 항의하기 위해 "인터넷을 사용해 전 세계 각지에서 나이키 본사로 '전화공격'"을 감행한 사실과 맥도널드 햄버거 체인점의 저임금노동관행, 아이들을 겨냥한 광고, 우림 파괴, 동물들에게 가한 범죄에 항의하는 '맥도널드에 저항한 2인조'에 의해 주도되어 전 세계 맥도널드 체인점의 홈페이지에서 이뤄진 시위와 방해작전에만 주목한다. 이토록 {제3의 물결}에 대한 좌파의 반론은 점점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제3의 물결}에 대한 좌우파 혼성 합창처럼 들린다. 저자는 뉴미디어를 통해 가능한 일을 너무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는 뉴미디어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회의하고 있는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또 다른 독자에게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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