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의 집"은 잘 꾸며진 친일화가의 정원일지언정, 충북의 문화브랜드가 될수 없다.!>
경남 합천군이 기존의 공원명칭을 '일해공원'으로 변경했습니다. '일해'가 누굴까요. 바로 쿠데타를 통해 민주화의 열기를 탱크로 짓밟아 버리고, 오월 광주를 핏빛으로 물들인 전두환의 호입니다. 합천군은 바로, 합천 출신인 전두환을 기념하기 위해서 전두환 공원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게 말이나 되는 발상일까요! 저는 절대로 이런 발상엔 동의할수 없습니다. 대통령을 배출한 합천군민의 자존심을 기라자는 뜻에서 한다는 것인데... 정말로 충격적인 그리고 너무나 야만적인 발상입니다. 설령 일부의 군민이 전두환이 합천 출신임을 은연중에 자랑스러워 한데도, 이것은 너무나 야만적인 폭력입니다.
전두환의 탱크와 군홧발 아래서, 무참이 죽어야만 했던 오월 광주의 영령들.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채 임신부 어머니의 뱃솟에서 대검에 찔려 죽어갔던 그 영혼들.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쓰러져간 수많은 영령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지역이라는 울타리와 근거지 이전에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에 살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행복, 공동체의 안녕이 우선이지 작은 부락과 내 울타리안의 행복이 무조건 우선될 수가 없는 것이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한 것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내팽겨진채, 대통령을 배출한 군민의 자존심을 운운하는건 절대로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독일에서는 나치 잔재 청산을 위해, 나치와 관련된 인물이나 명칭,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라고 하는 철십자 상징의 공공연한 사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도 나치를 영웅시하거나 미화하는 것을 엄격히 법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특히 나치의 상징인 십자가 모양의 '하켄크로이츠'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물건에서는 절대 사용을 금기시하고 있다고도 하더군요.
왜 일까요! 이것은 정의의 문제이고,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 했지요. 과거의 역사(경험)속에서 평가하고 반성하고 그로부터 정의가 확립될때에만 미래에선 그런 불행을 반복하지 않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당 서정주는 자신의 친일 전력에 참여하게된 동기에 대해서, '일제가 그렇게 허무하게 패망할준 몰랐어'라고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겠지요. 그랬으니까, 그 일제국주의가 영원할 것 같기에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제에 빌붙었겠지요. 만약 그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쯤, 모두다 일황의 황국신민이 되어있겠지요.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러워 하고, 우리의 후세대에게 가르칩니다.
왜 일까요. 바로 우리의 공동체를 지켜내는 정의를 세우는 것이니까요.
운보의 업적은 뛰어납니다. 그러나, 훌륭하진 않습니다. 운보를 애기할 때, 한국의 피카소로 비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피카소는 약 3만여점의 작품을 남겼다하고 운보는 약 2만점을 남겼다 합니다. 운보도 피카소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천쟁성을 어릴적부터 보여줬다 합니다. 그러나, 피카소는 훌륭해도 운보는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는 조국 스페인에서 프랑코 파시스트 군부 독재정권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을 일으겼을 때, 프랑코 파시즘의 난민학살을 그림을 그려 폭로했습니다. 그뿐일까요.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서 있는 한국전쟁당시의 양민학살을 폭로하는 그림 (Massacre in Korea)을 그려, 지구의 평화를 기원했지요. 잔인한 시대에 폭력에 반대하고 인간성을 옹호하는 진정한 예술가의 삶을 보여준 것이지요.
과연 운보는 어떠했나요. 운보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약자라서 그랬을까요. 운보는 이미 그 시대에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약자이기에 앞서 문화권력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금에도 한국미술계의 살아있는 권력입니다. 지금의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여성이기에 사회적 약자일까요. 절대 아니죠. 그녀는 여성이기에 앞서,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권력을 좌지우지 할수 있는 권력자이지, 절대 약자는 아닙니다. 청각 장애인이라는 것을 빌미로 해서, 동정심을 통해 그의 친일행적을 가리려 했던 것을 얄팍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운보가 더더욱 비판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바로 미술계의 최고 권력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스승인 친일화가 김은호로부터 면면이 이어져오는 한국 미술계의 최고 권력자들.
사회를 앞에서 선도하고 이끄는 지식인과 권력자들의 선동에 죄없이, 황국신민으로서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양놈들과의 싸움에 얼마나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끌려갔을까요. 혹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일개 국민의 밀정행위보다 더 위험한 것은 바로 지도층, 권력자들의 친일행위입니다.
그래서, 운보가 이룬 예술적 업적보다도 더 우리 공동체에게 유익한 것은 운보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대우속에서 우리 공동체의 사회정의를 세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눈앞의 경제적 이익이 있다 했습니다. 모든 자치단체간 전쟁이라고 까지 표현하시더군요. 그러나, 그런 눈앞의 경제적 이익보다 더 큰 공동체의 이익은 그의 친일행위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평가입니다. 아니 그런데, 그가 충북을 대표하는 문화브랜드라니요. 그 문화브랜드를 경제적 이익으로 환원시키지 못하는 사태가 바로 "충북의 혼"을 도둑맞는 행위라니요.
우리의 후세대에게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것이지요. 바로 돈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금전 만능주의 아닌가요. 아무리 죄를 져도, 돈만 된다면 모든 것은 용서된다는 가르침을 주려는 것인가요.
저는 반대합니다. 하이닉스 기숙사 용지로 청주시가 형질변경등 절차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공사를 들어갈수 있게 해주었다는 신문 보도를 접했습니다. 이것이 맞는 것인가요. 그럼, 다른 기업들, 대기업은 아니지만 중소기업들은.... 그들에게도 똑같은 대우를 해줘야 하는 건 아닌가요.
그 이전에, 하이닉스가 아무리 발전한들 지역민들에게 골고루 그 해살이 비추어지는 가요. 하이닉스가 수조원대의 순이익으로 번창을 하는 순간에, 3년째 길거리에 나 앉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거리에 있습니다. 경제가 아무리 커지고 발전하더라도, 그 공과가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사회양극화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업은 이윤은 더욱더 커져만 가는데 국민들은 가난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역의 발전을 이야기 할때, 경제적 성장을 이야기 할때도 언제나 우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공동체의 이익입니다. 그 전제속에서 공동체의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더 유익한 것이 무엇이냐에 기반해서 우리 사회의 발전방향에 대해서 토론해야 합니다.
저는, 지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운보가 충북의 대표적 문화브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 할수 없습니다. 그 이전에 운보의 친일행위에 대한 공동체의 평가가 우선이고, 그로부터 세워질 우리사회의 정의가 보다 많은 이들에게 유익함을 제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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