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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교협충북지회에 바란다

민교협충북지회, 창립20주년 기념 :  "민교협에 바란다"

김남균 (민주노총충북지역본부 비정규사업부장)

 

 

창립20주년, 이 스물이란 숫자가 얼마나 대단하지에 대해서 미력하나마 알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노동운동에 발을 내 딛었을 때, 속으로 '함 10년은 어티게든 나가보자. 10년을 넘긴다면 내 선택이 옳았다고 할수 있지 않을까'하고 채근해본적이 있습니다.

그 시간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어티게든 도망갈 궁리만 찾았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 간신히 그 10년이란 시간을 겨우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회 민주화의 깃발 하나로 민교협충북지회는 자그만치 20년을 내달려 왔다 하니 그 시간의 깊이 만큼 민교협의 역사와 정신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사실 저희들은 민교협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민교협의 제자로서 제대로 살고 있는 가 할때, 많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사실 학교를 다닐때도 민교협 선생님에게 F학점을 받았으니 이미 그때부터 전 불량제자 였던 것 같습니다.

 

김승환 선생님으로부터 '민교협에 바란다'는 소리를 해달라는 소리를 듣고선 좀체 감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함에도 이 자리에서 감히 하찮은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민교협의 불량제자였긴 하지만, 어쨌든 제자이건 분명하니까 그 애정으로 들어봐 주십시오.


< 배터진 민주주의, 배고픈 민주주의 >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 라는 화두를 들어본적이 있습니다. 87년 체제는 분명, 이땅의 민주주의의 성숙을 가져왔고 많은 부분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명확한 한쪽만의 민주주의에 불과했습니다. 분명 형식과 절차적 민주주의는 질적, 양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는 너무나 명확히 나타납니다. 바로 경제의 민주주의, 분배와 평등의 문제는 사실상 배척당했습니다. 이 경제의 영역에선 87년 이전이나 이후, 그리고 오늘날 차이가 없습니다.

 

정권의 수장이 군복입고 선글라스 쓰던 사람에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구속되고 사형선고 받았던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각하로 통칭되던 무소불위의 권력과 권위주의, 엄숙주의는 사라졌습니다.  정권의 권위주의, 엄숙주의는 사라졌지만 아쉽게도 자본의 그늘아래로 편입되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누가 통치, 지배하는가란 질문을 던져봅니다.
군복과 각하의 자리를 이젠 자본이 대신해 권력 정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현 노무현 대통령의 시스템과 룰이라고 애기합니다. 그 훌륭한 시스템은 바로 자본의 시스템에 불과합니다.

이제 자본이 통치하는 민주주의는 한쪽에선 배터지는 민주주의이고 한쪽에선 배고파지는 민주주의입니다. 빈부의 격차는 더욱더 심해집니다. 기업의 이윤은 나날이 늘어가는데, 국민들의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교협과 선생님들께 바라는 첫 번째 희망사항이 있습니다. 87년 민주화의 미완성 과제인 경제의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에 대한 제2의 민주화 대투쟁을 선도해주십시오.
완성된 절차민주주의에 안주해, 87년 체제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고 연장시키는 대투쟁을 선도해 주십시오.

 

<사회정의로서의 노동(운동)의 가치를 재조명해야...>

 

노무현 대통령이 '부동산 원가공개'를 반대하며 했던 말이 "열배 남는 장사도 있더라!"라는 말입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기업이 이윤추구를 위해 활동한다는 것은 유치원다니는 우리 아들놈아도 알고 있습니다. 좋은 말로 이윤추구지, 속되게 표현하면 기업이 돈에 환장에 인격도 눈물도 없이 운영한다 해도 이를 비난하지 않는 분위깁니다. 자본주의하에서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라는 있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선 요즘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귀족노조란 애기도 나옵니다. 대기업노조가 임금인상을 요구하면 비난이 쏟아집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보자면 비난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면 이윤추구가 기업의 존재 목적이듯이 노동조합의 노동자들의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 자체가 존재의 이유입니다. 존재에 충실한 것은 비난이 대상이 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은 그 이유로 비난의 대상입니다.

 

노동기본권, 노동법체계는 사회법의 핵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동기본권의 헌법적 권리로 자리매김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권리가 기본권이고 본질적으로 침해될수 없는 상식선의 권리라는 것은 부정되고 있습니다.

경제의 민주주의 분배의 평등문제의 가장 기초는 노동과 자본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과 자본이 이익을 분배함에 있어 노동자들의 임금몫, 그 비율이 어느정도로 가는 가가 그 사회의 분배지수의 첫 번째입니다.

이념으로서의 노동자들의 실천운동이었던 사회주의는 몰락했지만, 노동자들의 실천운동-노동과 자본의 대립과 투쟁이 몰락한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한 것은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고 이 속에 노동자, 노동자들의 실천의 사회적 의미가 제대로 찾아질수 있다고 봅니다.

 

군복입은 대통령 시절로 돌아가 불쌍한 노동자들을 은혜적, 동정적 시각에서 보자하면 노동의 그 사회적 의미가 찾아 질수 없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측면으로 한걸음 한걸음 진보시켜 내는 노동의 힘에 대해서 다시한번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일곱 살난 아이에게 여기계신 선생님들부터 배운 것을 가르칩니다. "네,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면 '노동자'라고 대답해라. 노동자가 누구냐구 물으면 '역사의 주인이시다'라고 대답해라"하고 말입니다.

현재, 노동은 매우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자본과의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패배한 노동은 결과적으로 노동기본권이라는 헌법적 권리마저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민교헙에 바라는 지점이 바로 이대목입니다. 노동의 가치, 노동의 꿈, 노동의 권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연대해주십시오. 그럴려면, 노동자들과 친구 먹어야 합니다. 직업란에 교수라고만 쓰지 마시고 노동자라 당당히 쓰시고 그옆에 가로치고 '대학교수'라 써주십시오.

 

 

<연대를 가르치는 스승, 연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어 주십시오>

 

 

낮은 곳에 있는 자에게, 나의 눈높이로 올라 와라 하면 이것은 연대가 아닙니다. 낮은 곳으로 몸을 낮추는 것이 연대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평평해져야 넓어진다는 말도 기억이 납니다.

민주화의 등불이 되었던 것처럼, 이제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위한 연대의 등불을 밝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인문학의 위기라 합니다. 오늘 대학에서 폐과된 강좌의 60%가 인문학이라는 애길 들었을 때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으면, 사회적 연대가 될리 만무합니다. 우리의 젊은 이들에게 사회적 연대, 인문학적 소양을 불어 넣어 주십시오. 재밌는 인문학, 가슴 따뜻한 인문학으로 위기를 극복해주십시오. 


 
<사회쟁점의 한가운데에 있는 민교협을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들을 보면서, 많은 가르침과 감화를 받지만 가끔 드는 생각이 너무 '점잖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이러면 재미가 없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우리 선생님들이 많이 튀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톡톡튀는 김승환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사회문제, 지역현안문제, 정치영역 등에 대한 적극적인 튀는 행동이 많았음 합니다.    


마치면서

 

주제넘는 말이 많았습니다. 노동운동에 있는 사람으로 더 많이 반성하고 자책해야 하는데, 어줍잔케시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불량제자이긴 했으나 선생님들의 제자였다는 사실하나만으로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민교협 20년, 그 세월의 깊이를 저 자신도 살면서 따라갈수 있었음 좋겠습니다. 존경의 마음을 전하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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