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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니들이 노동을 알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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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이 되도록, 알수 없었던 진실들
 
2007년 05월 17일 (목) 11:27:50 김남균 spartakooks@hanmail.net
 

 

제목을 ‘니들이 노동자를 알어? 이렇게 예의없게, 싸가지라곤 밴댕이 소갈딱지 만큼으로 정했습니다. ‘니들이 게맛을 알어’ 라는 광고카피가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참 그 카피가 친근하게 다가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 광고카피처럼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자들의 기본권이 친근하게 다가갔음 해서 흉내를 내 봤습니다.
요즘같은 세상, 개발과 기업의 이익이 지고지선의 선이 되어버리 세상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건 너무나 고통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시기일수록 노동자들의 권리, 노동자들의 기본권은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헌신짝처럼 버려지기 쉽상입니다.
아무쪼록, 저의 미천한 글이 노동자들의 권리, 노동자들의 실천을 이해하고 응원하는 데 조그만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황금성을 짓는 사람들 : 노동자

나는 열한살이 될 때까지 가난이란 말을 몰랐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사회가 구분되었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세상에 이층집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내 고향은 강원도의 아주 산골마을. 누구나 똑같이 고무신을 신었고, 누구나 감자, 옥수수가 들어간 밥을 먹었다. 뒷동산 나무가 푸른 빛깔에서 누르스르하게 변할때즘, 그래서 개울물이 차서 더 이상 물에 들어가 노는 것이 중단될쯤부터 다음해 개울가 물놀이가 재개되기 전까지 씻는것도 함께 중단됐다. 모두가 그랬다. 그래서 새학기가 시작되면 선생님들은 물 양동이 교실에 갖다 놓고 양말을 벗기고 때검사를 했다. 겨울내내 씻지를 않아 갈라질대로 갈라진 그 발을 시린 양동이물에 불러터질때지 담그면서도 창피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그랬으니까! 청주로 이사오기 바로 전해에 전기가 들어왔다. 그래도 변화는 없었다. 집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없었으니까!

청주로 이사 오던 날! 비가 왔다. 모두가 침통해 했다. 중학교 2학년에서 배운다는 것을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중단해야 했던 작은누나, 어머니는 울었다. 난 그 울음이 뭔지를 몰랐다. 나만 웃었다. 도시로 간다는거 그 하나만으로 난 즐거웠다. 도시로 오면서, 이층집, 삼층집이라고 하는 신기한 건축양식이 있다는 걸 보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웠다.

한 삼사년 전이었을 거다. 청주의 한 대학교에서 청소일을 하시는 아주머니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우리가 그들이 일하는 곳을 찾아갔을 때, 우리는 경악했다. 일끝나서 옷갈아 입고 오겠다던 아주머니들은 죄다 화장실로 간다. 화장실로 가서 옷 갈아입고 나온 아주머니들에게 탈의실이 없냐고 했더니 한쪽을 가리킨다. 화장실 입구 구석에 속이 유리문으로 되어 훤히 디다보이는 채 한평도 안되는 곳, 창고로나 쓰여질 바로 그 공간. 자식뻘 되는 아이들이 옷갈아 입는 것을 훤히 볼수 있는 공간! 하지만 똥종이 치우고 머스마들 조준 잘못해 튀어버린 오줌을 닦아내는 하찮은 일을 하는 이 늙은 여성노동자들이 남들이 보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으매 어떤 수치심도 느끼지 못할것이라고 해서 만들어준 그 공간.

청주라는 도시로 이사오기전까지 난 나의 부모와 형제들이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난 나의 부모와 형제들이 부끄럽고 가난하고 못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데에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농사만 짓다 청주로 나온 아버지는 일거리를 찾지 못해 헤매다 사십대 중반에 지금은 카지노로 유명한 고한으로 가서 탄광노동자가 되었다. 열다섯살 작은 누이는, 당시 같은 동네에 살던 대농이란 회사에서 반장직급을 가진 아줌마에게 뒷돈 삼만원을 주고 대농에 들어갔고, 월급 2만원을 받는 공순이가 되었다. 세째형은 조그만 공업사의 월급 삼만원짜리 공돌이가 되었고, 이제 막 스물을 넘긴 둘째형은 건설현장의 막노가다쟁이가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대농 정문앞에 리어카를 개조해 꾸민 포장마차에서 오뎅과 핫도그를 파는 포장마차 주인이 되었다.

열한살 그 어린 나이에, 나는 그새 눈치를 챌수 있었다. 공돌이 공순이가 얼마나 천한 존재인지를! 하루종일 연탄보일러를 놓는 일을 하는 셋째형은 정작 연탄보일러가 있는 집에 살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하루종일 실을뽑아 원단을 만드는 일을 하는 작은 누이의 월급으론 그 원단으로 만든 옷 한 벌 제대로 살수 없다는 것을. 그 어린 공돌이 공순이에게 쏟아지는 멸시와 조롱, 천대가 쏟아지는 걸 볼수 있었다.

매년 새학기가 시작되면 써서 내야 하는 가정환경조사서에 어므이, 아버지의 학력과 직업. 내 형제의 학력과 직업, 가족의 재산을 써내야 하는 의무, 이것은 너무나 큰 곤욕이었다. 아버지의 직업란에 탄광노동자라고 쓰고, 나의 누이와 형들의 직업과 학력란에 중퇴, 중졸, 공순이 공돌이라고 적는게 얼매나 창피한것인지..... 그래서 난 나의 아버지의 직업란에 곧 죽어도 ‘상업’이라는 고상한 직업을 찾아내 적어냈다.

그러다, 열다섯살때쯤인가! 아버지가 준 고사리, 삼엽충 화석을 자랑하다 그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수업시간에 아버지가 탄광에 다닌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혀졌을 때, 갑자기 알몸으로 혼자 서있는 것처럼 부끄럽고 창피함에 교실을 뛰쳐나갔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는 선생님의 말씀은 거의 그랬다. 야 너 김남균이 니 공부 그리해서 공장가서 공돌이 될래, 아님 열심히 할래!

열두살, 전두환 대통령 각하가 청주에 온다해서 청주시내 모든 학생들은 두세시간쯤 태극기를 들고 도로에 나와 각하를 환영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가 대통령각하가 헬기를 타고 지나가셨다는 말 한마디와 더불어 교실로 들어온적이 있다. 교실로 들어오니, 갑자기 삼립빵 두 개, 초코우유 하나씩 배분되고.... 이 빵과 우유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사랑과 애정이라고 친철히 설명하는 선생님.

그러나, 어떤 선생님도 노동자, 공돌이 공순이에 대해서 가르쳐 주진 않았다. 노가다쟁이가 아파트를 짓고 수십층 고층건물을 올린다는 것을! 실뽑는 어린 여공의 손에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옷감이 나온다는 것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이 없으면 세상이 똥오줌으로 범벅이 돼 살수가 없다는 것을! 공돌이 공순이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주역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는 아니 우리 나라 국민의 삼분의 이가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노동자로 살아가면 가난한데, 그 가난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를!

노동자들의 손끝에서 땀방울이 모여서 황금성을 짓는 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그 황금성의 어떠한 것도 노동자는 가질수 없다는 것을!

난 스무살이 될 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죽음, 전태일의 죽음을 알때까지 그것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쉽게 알았으면 한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이 연재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인데도, 참 무지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고, 언론에서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김남균회원님은 민주노총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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