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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병역거부소견서)

 

저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평화가 나에게 왔습니다. 아주 조용조용하게. 아주 사뿐사뿐하게. 그것은 겨울날 얼굴을 에는 찬바람처럼 무서운 표정으로 빠르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한 여름 푹푹찌는 더위 속에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처럼 갑작스레 오지도 않았습니다. 평화는 한 겨울 이겨낸 새싹이 돋아나듯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으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평화는 빨갛게 봉숭아물 든 손톱이 자라나 붉은 반달을 이루듯, 아주 익숙한 속도로 나와 만났습니다. 내가 평화는 만나는 과정이 바로 ‘평화’ 였습니다.


 평화를 알게 되고 병역거부를 결심한 것이 아니라, 병역거부를 결심하면서부터 평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역거부는 저에게 있어서 어떤 커다란 사건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저마다 삶에서 중요시하는 가치가 다르고 그 가치를 지켜가는 방식이 다를 것입니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의 대답은 항상 정리된 논리라기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미래에 무엇이 되느냐는 그것이 추구해야할 대상이 아니고, 현재의 나의 삶을 가꾸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의 신념은 미래의 모습을 그려나가기 위해 것이라기보다는 현재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기 위한 것입니다. 제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바로 지금 이 곳에서 ‘살아가는 것’ 그 자체로 가꾸어가고 증명하는 것이 바로 저의 병역거부입니다.


 물론 저에게 있어서 이런 의미를 가지는 병역거부지만, 저의 병역거부가 사회와 만났을 때, 더 많은 의미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마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의미를 부여했을 때, 이 세상에 다가서는 몸부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과 사람들이 저의 양심과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저의 병역거부를 특별한 것으로 기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신념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논리정연한 이론으로 기억되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몸과 삶의 태도 속에 습관으로 각인되어야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병역거부를 통해서 사람들이 가졌으면 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강하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강함을 항상 과시하고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보호해주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배려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 다른 이를 약한 자로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온갖 폭력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인간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 국가와 국가, 그리고 인간이 만드는 모든 형태의 공동체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형성한 가장 거대한 조직인 국가가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강한 군대를 과시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속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거대한 만큼,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합법적인 폭력의 권한을 군대에 부여함으로써 인류의 많은 비극들은 발생했습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오만함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 강하지 않은 수많은 인류는 희생당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병역거부는 우리 인간이 약하고 미흡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배자가 아니라 구성원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파괴의 신이 아니라 생명과 창조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일 뿐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미흡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를 억누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약함을 서로 보완해주기 위해서 함께 모여서 서로를 보듬어 안아야 합니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 강함을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애써 남을 위협하거나 과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그런 곳에 들어갈 힘을 돌려 서로의부족한 점을 메울 수 있을 것입니다.


 부족하기에, 저는 저의 삶이 다른 생명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삶은 물론 제 스스로 일궈온 것이지만, 제가 만나온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저의 보잘것없는 양심이라는 것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여동생의 삶이 저의 삶과 완벽하게 분리되어있다면 지금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이 지구생명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의 피와 살로부터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전제로 살아온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저 또한 다른 생명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고, 제 삶을 위한 희생을 최대한 줄이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을 요구하고 제가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닌 최대한의 것을 다시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너무 많은 것을 받았으며, 앞으로 갚아야 할 것들에 비해 인생은 짧게만 느껴집니다. 낭비할 시간도 없는 마당에 제 것을 내놓기는커녕 내가 살기위해 남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군대라는 것은 제가 살기위해서 남을 죽이는 곳입니다. 저는 제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그 곳에 할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는 것은 갚아야 할 빚은 늘어나고, 갚을 시간은 줄어드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무서운 것은, 내 마음 속에 겸손한 보은의 감정대신에 뻔뻔한 자기 합리화의 배은망덕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병역거부는 저의 삶을 지켜가는 최소한의 방어이자, 사회와 소통하며 평화를 퍼뜨릴 수 있는 최대한의 실천입니다. 저는 입영영장을 받고 비로소 병역거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제 부족함을 깨닫고 사람들과 부족함을 나누어 평화를 만들면서 이미 병역거부자가 되었고, 또 출소한 이후에도 계속 병역거부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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