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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못한자(스포일러있음)

경험해보지 못한, 그러나 너무 익숙한 풍경

 

난 군대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내 주변에도 군대를 경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군대를

경험한 사람들조차도 군대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대부분이니

사회속의 나의 인간관계에서 난 군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고, 난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색하지 않은 이유.

그것은 이미 내가 살고 있는 공간도 군대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군대보다 물리적 폭력은 덜 할 수 있고, 그 외의 여러 문제점들도

군대보다는 덜 하겠지만 말이다. 더더욱 무서운 것은 사회는 군대처럼

무식하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군대적인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무감각하게 살아가게 만든다는데 있다.

이미 무감각하게 우리에게 습득되어있는 삶의 방식과 모양새들이

군대와 관련없는 그 누군가도 군대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삶의 관계도 그랬다. 신병을 가지고 장난치는 고참들

그리고 그 고참들보다는 낮은 계급이지만 이른바 짬밥좀 먹은 중간고참들.

예비역 선배들이 새내기하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과 신병하나 가지고

고참들이 "누가 더 잘생겼냐"며 장난치는 모습은 군대와 대학이

거울처럼 서로를 확인하는 슬픈 장면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중간정도의 짬밥을 먹은 학번으로 소극적인 비판자이자

가해자로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때로는 선배들에게 편승하고

때로는 선배들을 비판하면서... 

 

이제 군대를 거부하는 평화운동을 하고 있지만,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나에게도 분명 군대의 모습은 새겨져 있는 것이다.

너무도 익숙한 군대의 모습은 예비역들이 술자리에서 군대얘기를 하도 많이해서

만은 아닌 것이다.

 

참을수 없는 모욕감, 그리고 인정할 수 없는 나의 인내심과 무너지는 인격

 

어리버리한 '지훈'을 가지고 놀면서 지훈의 성기를 만지는 고참.

'나에게 반말을 해대면서 내 성기를 만지려는 고참 앞에서는, 헌법도 군법도

유엔의 인권선언서도 사문화되고 만다'는 책의 한구절이 비로소 영화의 한 장면을

통해서 절실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병장이

편지를 빼앗가 사람들 앞에서 읽어내려가며 비아냥거리는 장면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인공 승영과 공유했다. 하지만 어쩌면, 정말 외람된 말일지로 모르겠지만

그런 모욕감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모욕감이 견딜만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보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던 승영이 서서히 그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적응시켜

가는 모습.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것에 굴복하고 순응하고, 적극적 가담자가 되어

가는 것만큼은 그 어떤 육체적 정신적 모욕감보다 힘들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을 수 없는 것들을 참아내는 자신의 인내심이 수치러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그 질서의 적극적 행위자가 되었을 때, 과연 그 인격이 입은 상처와

남들에게 입힌 상처는 누가 치유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가해자로, 폭력이 재생산되는 구조의 무서움

 

승영은 군대의 폭력적인 질서에 의해 상처받는 피해자였다. 사실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누구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중간은 없다. 피해자로써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이 적극적인 가해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스스로 피해받지 않기 때문에 저항의 필요성이 없는 사람이며, 가해자들을 폭력을 침묵으로서 방관하고 혹은 동조하는

다른 방식의 가해자일 뿐이다. 이 끔찍한 이분법은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구조의 문제를 눈감고 그 구조에 가담할 수 밖에 없다.

한 번 그 구조에 가담한 후에는 이왕 가담한 바에야 그 안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을 고민하게 되고 그러던 한 순간 적극적 가해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비극적인 구조를 더욱 피비린내 나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군대라는 공간은 그 거대한 구조의 폭력과 비겁한 개인들이 행사하는 물리적인 폭력이 동시에 재생산되는 곳이다. 승영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이 어쩔수 없었다고 누군가 말해주길 바란다.

이 영화가 군대이야기이자 한국사회의 단면이고 어쩌면 세상의 거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폭력의 최대치인 국가폭력이 합법적으로 용인된 군대가 '폭력의 재생산'에 있어서 가장 상징적인 존재라는 것은 지당하다. 하지만 너무도 흡사하게 폭력의 재생산이 우리사회에서 기능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의 가해자인 아버지를 죽이는 세상, 이스라엘의 분리장벽에 맞선 팔레스타인의 자살테러(용어가 맘에 들진 않지만), 김일병의 총기난사사건...

거대한 폭력의 구조에서 한 개인은 너무 미약하다...

 

아마도 병역거부는, 그리고 세상의 너무 당연한 것들을 자신의 신념으로 거부하는 일은

미약한 개인이 거대한 폭력의 구조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이자 최소한의 방어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폭력의 구조는 때로는 개인들의 신념과 인격을 무참히 뭉게버리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복무하지 않는 어떠한 권력과 구조도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더 많은 폭력을 거부하고 더 많은 비폭력행동이 늘어날 때, 폭력의 구조가 우리에게 강요한 모든것을 거부할 수 있을 때, 아마도 혁명은 가능할 것이다.

나약한 모든 개인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권력도 권위도, 심지어 신도 없다는 것이 내가 가지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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