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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출근하려고 빈둥거리다 시간이 살짝 남아서 백석시집을 꺼내 들었다,

백구두에 백정장 입고 다닌 북쪽 멋쟁이였다는 시인은 그러나 시 만큼은

백구두, 백정장과는 살짝 다른 멋이 나게 쓰는 시인이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눈은 푹푹 나리고'와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에

꽂혔는데, 눈이 오는 모양을 '푹푹'이라고 표현한 것이 참 재미있었고

보통 '사랑을' 할 텐데 '사랑은'이라고 하니 익숙한 표현을 낯설게 하면서 오는 신선함과

그러면서도 기막히게 입에 착착 붙는 어감이 좋아서였을게다.

 

오늘 아침엔 <여승>을 읽었다. 흔히들 백석의 시에는

20세기 초반 북쪽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우리 토박이 말이 잘 살아있다고 하던데

확실히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살짝 어색해보이지만, 막상 소리내어 읽어보면 입에

딱 붙는 재밌는 표현들이 많다.

 

'녯날같이 늙었다'거나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는 표현도 참 느낌이 좋다.

옛날같이 늙었다는 건 뭘까. 늙는 건 미래의 일인데, 옛날이라는 과거로 비유를 하는데 이게 참 매력있다. 불경처럼 서럽다는 것도, 불경을 제대로 안읽어봤지만, 절에서 스님들이 나지막히 읊조리는 걸 보면 서럽다기 보다는 차분한 느낌이었는데, 서럽다고 표현한 것이 여승이 되는 시 주인공의 상황과 겹치면서 감정을 몰입할 수 있는 비유가 되어버렸다.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는 표현도 참 슬픈 일을, 이렇게 슬프게 표현할수 있다니, 하는 장탄식이 절로 나오게 한다. 그냥 '죽었다' 라고 했으면 이런 감정이입은 없었을텐데.

 

그리고 시에 나오는 여인의 삶이 참 기구하다.

최근에 <몽실언니>를 봤는데, 이 여인의 삶이 몽실언니와 겹쳐져 보인다. 몽실언니 뿐만 아니라 권정생 선생님이 쓴 <한티재 하늘>에 나오는 수많은 여성들과 겹쳐 보인다. 조선왕조가 무너지며 일본을 통해 근대문물이라는 것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근대 사회가 한반도에서도 작동하면서 소수 몇 명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감내해야하는 희생은 확실히 약자들-여성들에게 지워진 것 같다. 이 시에 나오는 여인은 그런 구구절절한 사연은 안나와 있어서 단정지어 말 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팔자가 박복한 특정 개인이기 보다 그 시절 여인들의 삶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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