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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지 아니한 기다림

모든 기다림은 즐겁다.

오랫만에 만나게 되는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만남을 준비하고 상상하며 여러가지 계획들을

세우고 다시 세우다 보면 대체 달력이나 시계따위가 눈에 들어올 일이 없다.

 

계획된 만남과 기다림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고 기다리는 것이다.

옛 애인을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 우리는 그 만남을 기다리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헤어져 돌아오는 발걸음과 아련한 마음은

우리가 그러한 만남을 은연중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렇듯 삶은 기다리는 재미로 이어진다.

오히려 '헤어짐'을 예약하는 '만남'보다

'만남'을 준비하는 '기다림'이 더 즐거운 법이다.

 

그런데 지금 난 그다지 즐겁지 아니한 것을 기다리고 있다.

어제 집에 들어오니 등기가 와있었다.

사람이 없어서 오늘 12시에서 2시사이에 다시 온다는 메모...

나에게 집으로 올 등기는 '입영영장'

 

처음받아보는 입영영장도 아니고,

갑작스레 날라온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이미 병역거부를 하기로 마음먹은지도 오래,

여러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내면서

나름대로의 준비도 오랫동안 해왔다.

그리고 난 나의 병역거부가 그다지 슬픈일이거나

안타까운일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뜻대로 살아가는 일만큼 즐거운 것은 없고,

그럴 수 있는 사람만큼 축복받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다.

사무실에 일찍 나가려고 했는데 그걸 기다리느라고 못나간것도 싫고,

내 삶의 즐거움인 기다림이 이럴수도 있다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도

 

국가가 나에게 강제적인 어떤 것을 강요하는 것이 마음에 안든다.

 

물론 국가라는 것이 내 삶에 강요하는 것이 징병뿐이겠냐만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강요를 기다리는 것이 어찌 즐겁겠는가.

 

그래도 난 즐겁게 살아갈거다.

어떠한 거대한 권력집단이 아무리 나에게 즐겁지 아니한 기다림을 강요하여도

난 나름대로 즐거운 기다림들을 상상하고 만끽하며 살거다.

 

친구들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눈과 목도리와 호빵(이미 나와버렸지만), 그리고 겨울을 기다리며,

옛 연인과의 우연한 만남을 기다리며,

그리고 앞으로의 새롭고 향긋한 만남들을 기다리며,

 

살다보면,

달력넘어가는 소리도 시계바늘 소리도,

무엇보다도 즐겁지 아니한 기다림따위는

신경쓸 겨를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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