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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22
    한국에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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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더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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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철부지 과학에서 신에 대항한 복제의 시대로
    두더지-1
  5. 2007/04/24
    50년대 영화속 외계인, 오늘 디지털 폐인과 조우하다!
    두더지-1
  6. 2007/04/23
    드디어...(2)
    두더지-1

한국에서

한국방문이 해가 갈수록 낯설다. 그 낯섦이 어디서 주로 오는지 모르겠으나 여러가지로 나를 힘들게 낯설게 만든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들고, 어디로 움직이는 것도, 사람을 피해 움직이는 것도 모두 힘들다.

오스틴의 반딧불과 여유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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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소풍갈 때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꾸 잠이 깬다. 새벽녘에 그냥 일어나 버렸다. 다섯시에 집에서 출발할 요량이니, 4시 쯤에 알람을 맞춰놓았으나, 3시가 좀 넘어 일어났다. 알람이 무색하다. 아직 자고있는 승준이를 한번 안아보고  일어났다.  인천공항까지 가는 길이 왠지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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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문

프로포절은 잘 끝냈다. 어젠 승준이 생일을 가기 전에 해준다고, 아이들을 불러 영화를 보여줬다. 스파이더맨 3를 보여주고, 집에와 피자와 케잌을 먹고 놀다 다들 헤어졌다. 알렉스, 홍주, 케빈, 데이빗, 케니가 왔었다. 승준이 친구 홍주와 케빈은 이번 여름에 결국 떠난다. 홍주는 지 아빠가 하버드에 잡을 잡아서, 케빈은 엄마가 학업을 거의 마쳐서... 이제 이 동네에 승준이 친구는 알렉스 뿐이다.
엊그저께 프로포절을 마치고 한국갈 짐을 싸려니, 만만찮다. 쌀 짐도 많진 않지만... 여기 남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걸리고,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니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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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철부지 과학에서 신에 대항한 복제의 시대로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6

 

철부지 과학에서 신에 대항한 복제의 시대로

 

이광석 

 

어린 시절 그 누군들 인간 이상의 힘, 흔히들 말하는 초능력에 관심이 없었던 이가 있겠는가. 필자도 어김없이, 그 대상이 사람이건 돌연변이건 초인적 힘을 가진 이들을 동경하여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슈퍼맨을 따라 수건으로 망토를 만들어 날았고, 육백만불의 사나이를 따라 뚜두뚜두 소리를 내며 손아귀 힘으로 강철 휘는 시늉을 했고, 헐크마냥 웃통을 벗어 옷을 찢는 연기를 실감나게 했고, 스파이더맨을 따라 방바닥을 기며 벽을 타는 양 거미줄을 뿜는 흉내를 냈다. 좀 더 커선 투명인간이 돼 매일 여탕에 들어가 야동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이번 호에선, 이처럼 인간이되 인간 이상의 힘을 가졌던 생물학적 변종 인간들을 보려한다. 혹자는 잘못된 실험의 실수나 오염으로 인해, 다른 이들은 사고로 인해, 또 다른 이들은 과학의 무한한 권능에 매혹되어 초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 옛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추억의 투시인간이나 투명인간 등은, 지금처럼 아이들이 따르는 슈퍼맨식 영웅 일대기의 한 대목으로 극()화하기 보단 과학 맹신의 부작용으로 그리고 실패한 과학의 사례들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전능의 신과 철부지 과학

과학으로 인간의 본성을 통제할 수 있을까? 약물을 들이켜 인간 속에 존재하는 선악을 떼어놓는 일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으랴? 영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1920)>에서 의약품 개발자였던 지킬박사는 선악을 갈라 인간의 본성을 통제하려다 오히려 하이드란 내면의 악마에 지배당한다. 사악한 하이드가 점점 지킬박사의 의식을 통제하면서 포악해져 박사의 애인까지 죽이고 결국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파국에 이른다. 비슷한 류의 흑백 영화들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과학이 신이 주재하는 영역에 도전해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과학의 최후는 비참했다

    <봉녀 The Wasp Woman (1959)>에선 젊어지려는 욕망에 눈이 멀었던 화장품회사 중년 여사장 스타린Starlin, 회사에 고용된 연구원이 개발한 로얄젤리로 만든 주사약을 투입하면서 점점 젊어지는 효능을 본다. 그 제품을 만들어냈던 연구원이 공교롭게도 교통사고로 죽고, 게다가 스타린은 젊어지겠다는 욕심에 주사 투입량과 횟수를 차츰 늘이게 된다약물 과다투여로 나타난 부작용은 그녀를 흉악한 말벌인간으로 변하게 만든다.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목을 물어뜯어 죽이다, 결국은 자신도 죽는다. 영화의 교훈은 간단하다. 과학의 힘을 빌어 세월을 거스르려는 인간 욕망은 신의 룰을 깨는 죄악이라 응당 그 죄값을 톡톡히 치러야 한다는.

    영화 <4차원 인간 4D Man (1959)>은 사물을 통과하는 실험에 성공한 과학자의 비극적 최후에 대한 얘기다. 과학자 토니 넬슨Tony Nelson은 연필로 강철을 사물을 뚫는 실험에 성공한다. 실수로 연구실이 불에 타 토니는 형 스캇Scott이 있는 연구소에 둥지를 튼다. 토니는 형 애인이자 비서였던 린다Rinda와 눈이 맞는다. 그동안 스캇은 실험 중 방사선에 노출되어 동생의 기계장비에 손을 대면서 돌연 자신의 손과 몸이 물체를 통과하는 4차원 인간이 돼버린다. 음엔 자신의 능력에 놀랍고 신기해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내 읽고, 금은 보석방 쇼윈도우 창을 투과해 전시된 보석을 털기도 한다. 사악한 하이드씨처럼 점점 스캇의 외모는 흉폭하게 변해가고, 다른 인간의 에너지를 흡수하는지 그가 진 인간들은 늙어 쪼그라져 죽임을 당한다. 불행히도 스캇은 전애인 린다의 총에 맞아 최후를 맞는다. 이유없이 등장해 결국 눈 위의 발자국 때문에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 <투명인간 The Invisible Man (1933)>의 투명인간 잭 그리핀Jack Griffin도 스캇처럼 매한가지의 비장한 최후를 맞는다.  

    인간 과학이 신의 권능에 도전하면 그 최후가 얼마나 참담할지에 대한 보다 강력한 메시지는 <엑스: 엑스레이 눈을 가진 사람 X: The Man with the X-Ray Eyes (1963)>에서 아주 잘 묘사되고 있다. 제임스 세비어James Xavier 박사는 일명 "엑스"라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제임스는 사물을 투시하는 시력을 가질 수 있는 약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돈많은 재벌 스폰서들이 가시적인 연구 결과물을 내놓길 압박하면서, 연구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비어박사는 약품 실험을 자신의 눈에다 결행한다처음 그는 순간 성공의 기쁨을 만끽한다. 댄스홀에서 춤추는 사람들이 다 벌거숭이로 보이고, 내과 의사가 내린 오진을 막아 암세포의 위치를 찾아내어 우쭐한다. 허나 약물의 강도를 늘이다보니 사물의 투시력이 점점 깊어지고, 이젠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투과해 밖의 사물이 보여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해 고통만 는다. 나중엔 그의 눈엔 사물이 기하학적 빛의 무리로 비춰진다. 영화에선 그 부작용을 '엑스 효과'라 지칭한다. 거기다가 사고로 친구를 잃고 경찰에 쫓기다 탐욕으로 똘똘 뭉친 사기꾼에 걸려들어 무허가 의료시술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 도망치고, 우여곡절 끝에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한탕해 나오려다 경찰에 쫓겨 또 도망치고, 차 사고로 한적한 마을의 교회에 당도한다. 한창 예배를 보던 시골 목사의 입에선 마치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듯, 빗나간 과학과 제임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신의 독설을 내뿜는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하거든 그 눈을 빼어내버리라'. 마테오 복음 18 9절에 실린 구절이다.

 

미친 과학과 B급영화의 만남

흔히들 '미친 과학'mad science이라 부르는 것의 가장 큰 특징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것 이상의 것을 넘보거나, 발명이나 실험을 통해서 전혀 실현 불가능한 듯 보이는 가상의 결과를 얻고자하는데 있다. 앞서 보았던 지킬박사, 봉녀, 투명인간, 4차원 인간, 투시인간은 그 미친 과학의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욕심이 과하거나 사물의 질서를 깨는 행위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미친 과학이 B급 영화와 충돌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 영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죽지 못하는 The Brain that Wouldn't Die (1959)> 바로 이 방면에서 유명한 B급 영화다. Bill 생명을 회생하는 방법에 집착해오던 수술 전문의다. 그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애인 잰Jan과 주말에 야외별장을 운전하던 중 과속을 하다 자동차가 가이드레일을 들이받고 전복된. 잰은 사고로 죽고 빌만 살아남았는지, 빌은 차 안으로부터 뭔가를 양복 웃옷에 둘둘 말아쥐고 급하게 근처 아는 이의 집으로 뛰어간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일까? 그의 양복더미 안에 들어있던 것은 잘려나간 잰의 머리였다. 애인의 불에 탄 몸뚱이를 버리고, 사고 중 잘려나간 머리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들고 냅다 뛰었던 것이다. 빌은 잰의 머리를 그 집의 실험실에서 회생한다. 있을 수 없는 일에다 황당한 줄거리지만, B급 영화에선 언제나 가능하다. 한 이틀 정도 잰의 잘린 머리를 살아있는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후, 빌은 그 시간 안에 살아있는 '착한' 몸뚱이를 구하러 스트립바와 길거리를 헤맨다. 그동안 지하 실험실 안에서 잰은 정신을 차리고 빌이 자신을 살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잰은 비정상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연명하게 만든 애인 빌에게 애정보다는 극단의 증오심을 점점 끼운다. 게다가 잰은 재생 약품의 효과로 살아있는 생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텔레파시의 초능력까지 가진다. 급기야 그녀는 다른 방에 감금시킨 프랑켄쉬타인같은 괴물과 은밀히 대화까지 주고받는다.

    신만이 행할 수 있는 창조의 역할을 넘보던 빌은, 급기야 한 누드모델을 집으로 끌어들여 신체이식을 시도하나 옆방에 감금돼있던 그 괴물에게 목을 물어뜯겨 죽음을 당한다. 잰이 있던 그 실험실엔 불이 옮겨붙고, 그녀는 죽은 빌에게 절규하며 불에 타 스러진다. "내가 경고했지, 그저 날 죽게 내버려두라구. 하하하...." 앞서 마테오 복음만큼 인간 과학에 대한 독설이 섞였다. 사고사든 자연사든 때되면 응당 죽어야할 숙명의 시간을 거부했던 빌의 미친 과학은, 잰과 보이지않은 신으로부터 그렇게 처절한 응징을 당한다.               

 

과학의 흑백 시대를 넘어

흑백의 정서가 그랬다. 영화속에서 과학은 종교와 신의 율법을 두려워했고, 전쟁과 살육을 위해 사용했던 과학의 비인간성과 비윤리성에 치를 떨었다. 당시 미친 과학은 종교의 이름으로만 관리될 대상이었다. 요즘처럼 영화 속에서 생물학적 돌연변이들이 인기있는 시절과는 격세지감이다. 헐크, 수많은 엑스-맨들, 스파이더맨, 판타스틱 포 등을 상상해보라. 그들 대부분은 과학의 사생아들이지만, 정서상 윤리적이고 일반 인간들에게 영웅시된다. 파국도 없다. 더욱이 그 비정상성이 장점이자 힘이다. 신체 변이가 인간을 망치기보단 오히려 사회에 기여한다. 이제 과학의 가치가 달라진 것이 그 큰 이유일 것이다. 비록 대한민국에서는 일부 사기로 판명났으나, 유전학적 변종과 복제 실험에 최고의 과학자 명예를 안겨주는 시대에 과학은 신아래 머리 조아리기보단 이에 도전하는 위치로 등극했다. 결국 흑백시대에 투명인간 외 초능력 일동들이 비극이었던 이유는 당시 유전학적 실험이 생경했고, 천진한 과학보다 신의 위치가 부동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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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영화속 외계인, 오늘 디지털 폐인과 조우하다!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5

 

50년대 영화속 외계인, 오늘 디지털 폐인과 조우하다!

 

이광석 

 

지난 호에선 50년대 영화 속에서 미국인들이 만들어낸 외계인의 모습이, 그에 대한 인식 정도에 따라 여러모로 다양했음을 보았다. 당시 인간에게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같이 생긴 것에서부터 흉측한 괴물에다 아예 무정형의 것들까지 이러저러한 상상의 생명체들을 만들어낼 정도로 다채로웠다. 낯선 이방인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그에 대한 다양한 추측과 상상을 불러왔던 것이다. 세월의 겹을 지나 오늘에 이르면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 외계인의 모습도 변한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외계인은 어떤 모습일까? 필자는 당시 외계인과 흡사하게 오늘을 사는 외계종으로 디지털 폐인廢人 꼽으련다. 몇 년 전부터 사회의 새로운 현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들은, 누에고치cocoon족들처럼 한 곳에 칩거하길 즐기고, 야행성에,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인터넷 선에 매달려 온라인 게임과 야동에 중독증을 보이는 종족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은 현실의 공간보단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는 밀폐된 곳에서 하루 시간 중 거의 대부분을 보내는 신종 칩거형 인간형인데, 50년대 영화속 외계인들의 행태만큼이나 독특하고 비슷한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다.                 

 

동굴과 게임방

50년대 외계인화들은 대부분 정체모를 유성의 추락으로 시작한다. 평온을 깨는 (주로 차 안에서 벌어지는 연인의 로맨스를 방해하는) 이 낯선 비행접시들은 거의 모두가 인간의 마을로부터 떨어져있는 야산, 둔덕 등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거나, 기존에 있는 동굴 등에 자리를 튼다. <화성에서 온 침입자들 Invaders from Mars (1953)>에선 녹색 화성 외계인들이 마을 외곽에 사람들을 땅속으로 끌어들이는 '개미지옥'마냥 지하 동굴을 만들어 자신들의 활동 근거지로 삼는다. <그것이 세계를 정복했다 It Conquered the World (1956)>에서 금성 출신의 아이스크림 콘 괴물은 본거지로 삼던 동굴을 군인들에게 들키면서 최후를 맞는다. <그것은 외계에서 왔다 It Came from Outer Space (1953)>의 흉측한 외눈박이 괴물은 벌집형 타원의 비행접시를 몰고 와, 이를 수리하기 위해 깊은 땅 속에 터를 마련한다. <혹성 애로스에서 온 뇌 The Brain from Planet Arous (1957)>에서 외계인 범죄자 '고르'Gor '신비의 산'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를 잡고, 핵물리학자 스티브Steve를 이곳으로 유인해 그의 몸속에 은신한 채, 인간의 마을로 내려온다. <외계의 9호 계획 Plan 9 from Outer Space (1959)>에서 외계인들이 착륙해 음모를 꾸미는 주 영화무대는 헐리웃 묘지였고, <우주로부터 온 킬러들 Killers from Space (1954)>의 애스트론 델타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의 최초 은신처는 또한 동굴이었다. 이렇듯 외계인들의 최초 은신처는 동굴, 지하철역, 땅굴, 묘지 등이다

외계인이 은둔과 칩거를 하며 음모를 꾸미는 장소의 특징을 디지털 폐인들도 대체로 답습한다. 사회적 고립에다 대인관계의 기피, 저녁부터 동이 터오는 새벽까지 이어지는 야행성 활동, 앉은 자리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생활방식 등이 닮았다. 이 모든 것은 공부방, 게임방, 서재 등에서 이뤄진다. 디지털 폐인들은 붙박힌 곳의 반경 안에서 꼼짝도 않고 사물과의 실제 접촉없이 온라인에 상주하길 바라며, 타인으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아 한다. 자신이 거하는 공간이나 컴퓨터를 잃으면, 비행접시 잃은 외계인마냥 삶의 희망을 잃은 듯 혹은 수족이 잘린 듯한 기분으로 살아간다.    

 

에로티시즘과 야동

외계인이 인간의 몸에 들어가거나 최면을 걸면, 그 조종을 받아 난폭해진다. 외계인의 난폭성이 인간에게 전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폭성 외에도 몇몇 외계인은 과도하게 에로틱한 모습을 보여준다. 몇몇 영화들은 특징적으로 인간과 외계인을 구분하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예를 들어 상당히 분별력있던 사람이 어느날 과도하게 그리고 비이성적으로 에로틱해지는 모습을 보이면 틀림없이 외계인에 의해 몸이 탈취당한 상태로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외계의 괴물과 결혼했다 I Married a Monster from Outer Space (1958)>에서 안드로메다 행성의 외계인이 허니문 중에 있는 빌Bill의 몸 안에 들어가 부인인 마지Marge를 평소와는 다른 거친 모습으로 대한다. 강한 키스신 등 평소와 다른 빌의 이상한 행동이 이어진다. <혹성 애로스에서 온 뇌>에서 과학자 스티브의 몸 속에 들어간 외계 생물 고르는, 스티브의 부인 샐리Sally에게 성적으로 강한 애정 표현을 하려 한다. 이는 인간끼리의 정상적인 부부 생활까지도 훼방하며 끼어드는 외계인의 남성적 폭력성을 그리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영화 <기어다니는 눈알 The Crawling Eye (1958)>에서 유럽의 트롤렌버그 산에 기거하는 문어 모양의 외계 괴물은 인간 조정의 텔레파시를 뿜어내며, 여주인공 앤Anne의 초능력과 부딪히거나 그녀를 신들린 듯 쓰러지게 만든다. 괴물 공포영화들에서 흔히 보이듯 여성이 괴물의 희생양인 점을 고려하면, 에로틱한 모습을 보여줬던 대개의 외계인들은 반대로 '수컷'들이다.

동굴에 칩거하면서 여자 인간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외계인들의 모습은 여태 디지털 폐인에서도 잘 보인다. '야동'이란 신조어가 국민들이 즐겨보는 오락프로그램에서 평범한 언어가 되고, 대중에게 회자될 정도로 '야동'은 디지털 폐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남성들이 대놓고 얘기하며 즐기는 문화가 됐다. 오죽하면 중국에 이어 전세계 '야동소비 2위국'의 대열에 끼었을꼬. 이의 유행에는 일차적으로 디지털 폐인들의 공헌도가 무지하게 크다. 마치 외계인들이 인간들을 줄줄이 최면걸어 자신의 지배아래 두듯, 온라인을 통해 여성 몸을 훔쳐보는 소수 디지털 폐인들의 시선이 뭇 남성들의 지배적 시선으로 전염된다. 슬슬 대중은 외계 폐인들의 최면에 하나둘 넘어가는 것이다.           

   

천적들, 개와 영파라치

마지막으로 필자가 발견한 재밌는 사실은, 외계 생물은 대체로 개를 싫어한다. 아마도 인간의 충복으로서의 개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엄밀히 말하면 개가 외계인을 싫어한다. 개는 제 주인의 몸이 외계 생물에 의해 강탈당했는지를 쉽게 판별하는 눈을 가졌다. 이는 외계인을 무척 당혹하게 한다. 당연 외모만 주인을 보고 개가 짖기 때문이다. <혹성 애로스에서 온 뇌>에서 스티브의 개 조지George, 변한 제 집주인을 보자마자 물어뜯고 짖고 난리를 피운다. 스티브 몸속에 들어간 외계 범죄자 고르를 잡기 위해 뒤쫓아 온 외계경찰 볼Vol, 조지의 몸 안에 들어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외계의 괴물과 결혼했다>에서 빌의 거죽을 빌린 외계인은 개가 그를 보고 짖자, 부인인 마지 몰래  지하실에서 그 개를 목졸라 죽인다. 외계인에게 개는 인간보다 무서운 천적이다.         

법을 위반하는 자를 찾아내어 포상금을 타내는 전문 신고자를 우리는 '파라치'라 부른다. 또 불법으로 디지털 영상이나 음반을 공유하는 웹사이트 등을 신고하여 포상금을 받으면 이를 '파라치'라 구체화하여 부른다. 디지털 폐인들은 디지털 동영상에 익숙하며, 이의 가장 바쁜 잠재적 소비자들이자 공유자들이다.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신경이 곤두선 영화업계 등의 저작권자들은 이들 영파라치를 고용하거나 포고문을 내걸고, 법을 어기는 폐인들을 잡아들이길 명하고 있다. 저작권자와 영파라치들의 힘이 거세지면서 잡음도 심해지고 있다. 저작권자들이 요구하는 악성 폐인들 신상명세 공개를 꺼린 미국의 정보서비스업체들은 스스로 자신들은 '저작권자의 사냥개'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도 생겼다. 이를 보면 경위야 어떻든 잘 따져보면, 폐인들과 '영파라치'의 관계는 외계인들과 인간이 기르는 개의 관계만큼이나 상극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또 하나의 진실은, 영파라치의 사냥 능력이 외계인을 식별하는 개만큼이나 탁월하다는데 있다.

 

오늘을 사는 외계인들

동굴 서식, 에로틱한 면모, 그리고 개를 두려워하는 것 모두는 사실 외계인의 정신병리적 특성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SF 영화의 주요 기제들이다. 영화에서 외계 이방인에 대한 인간의 공포감을 조절하는 장치들인 셈이다. 한편 오늘에 이르면, 밀폐된 방, 야동, 천적인 파라치 등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남성군, 특히 디지털 폐인들의 골병든 자화상으로 봐야할 것이다. 유비쿼터스 사회가 온다고 하나, 끝없이 늘어가는 청년들의 만성 실업 상태는 이들을 어두운 골방 속의 폐인들로 쉽게 바꾸었다. 하루 일과를 스크린 앞에서 시작해 그 앞에서 취식하는 골방의 폐인들은 야동과 게임에 미치고 동영상을 힘껏 내려받고 올리는데 그 젊은 혈기를 쓴다. 폐인이 폐인인 까닭은 자신의 바깥과 소통하지 않는데 있다. 온라인으로 누구엔가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허구인 이유는 살아있는 소통을 배제하는데 있다.

'빨갱이' 적성국의 이방인들에게 향했던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상상의 괴물들을, 오늘 지금을 사는 우리가 다시 그렇게 또 열심히 또 다른 이방인의 얼굴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젠 단순히 공포의 상상물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서 꿈과 희망을 갖고 열심히 일해야 할 청춘들을 디지털 폐인들로, 우리 밖의 기괴스런 외계인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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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늘 저녁 집에 잇는데, 지도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제 발표해도 좋으니 교수들을 만나라고... 이제 정말 프로포절을 하는가부다. 진을 어찌나 뻈는지, 논문 쓰기도 전에 질린다... 날이나 잘 받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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