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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ma / 다시 리마...

리차르와의 약속을 어겼다.   
리마로 돌아오기 전 메일을 보내기로 했었는데, 안 되는 스페인어로 메일을 쓰기엔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탓이다. plaza mayor에 나가 앉아 있어볼까도 했지만, 한겨울에 들어선 리마의 날씨는 흐려도 너무 흐린 게  마음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다. 석 달 전처럼 웃으며 그와 대화할 기력이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미안해요, 리차르. 역시 약속 같은 건 하는 게 아니었는데......       



plaza mayor의 벤치 한 구석에 있을 때 그가 말을 걸어왔다.

 

구두 닦으실래요?
어, 이건 구두가 아닌데요. 닦을 필요가 없는데.. 미안해요.

 

그는 수줍게 웃고는 제 갈 길을 갔다.
그날 저녁, 숙소 안에 있기가 갑갑해 밤 9시에 미친 척하고 광장에 다시 나왔다. 벤치마다 자리잡고 앉은 다양한 커플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구두, 닦으실래요? 어? 아까 오후에...

 

리차르와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내게 영어 단어나 문장을 물어보았고, 나는 스페인어 단어나 문장을 물어보며 30여 분을 족히 신나게 떠들었다. 잔뜩 신이 난 리차르는 나를 데리고 광장 근처의 야시장에 데리고 갔고, 이제 리차르보다 더 신이 난 나는, 그가 추천해 준 페루산 칵테일 ´삐스꼬 사워´를 쏘기로 하고 근처 포장마차 스톨에 자리를 잡았다.

 

뿌노 출신의 리차르가 리마에서 구두를 닦은 지도 10년이 다 된다고 했다. 리마에서의 여정을 단 하루 남겨둔 나에게, 산 끄리스또발 언덕에 올라가면 리마 전경을 볼 수 있다며 꼭 가 보라고 했다. 하지만 반드시 차부꼬에서 버스를 타고 가고, 절대 강 건너 북쪽에서 걸어다니면 안 된다고도 했다.       

정작 그 자신, 강 건너 북쪽에 살고 있었다.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이 전형적인 산동네인 그 곳에서 리차르는 자신의 10형제와 함께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삐스꼬 사워를 함께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그가 동행해 주었다. 마침 숙소 앞 monasterio de san francisco에서는 작은 축제가 벌어져 거기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받았다.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사람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 즐거워 보였고, 그 안에서 나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밤이었다.
다음 날도 버스 타러 가기 전까지 무라야 공원에서 리차르와 한참 공부했다. 나는 그의 서툰 선생님이었고, 그는 나의 수줍은 선생님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매연 가득하고 정신없는 리마를 싫어하지만, 나에게는 남미 여행의 시작점이자 리차르의 호의를 만났고 자그마한 축제의 즐거움을 처음 맛 본 이 곳을 싫어할 수가 없다.

 

구두를 한 번 닦으면 리차르는 2솔을 번다. 한국돈으로 대충 600원쯤 된다. 리마에서 다시 리차르를 만나면, 나는 운동화를 닦아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혹시 리마의 plaza mayor를 서성이다가, 누군가 구두를 닦겠냐고 수줍게  물어오면, 신고 있는 신발이 운동화더라도 그에게 맡겨 주세요. 그는 경력 많은 베테랑 구두닦이이자, 꿈비아를 좋아하는 내 친구 리차르일 거예요.   

 

07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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