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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az / 여행 140일 째...

오늘 tiwanaku에 다녀오면서, 이상하게 어렸을 적, 그리고 오빠 생각을 많이 했다. 사실 나를 남미로 이끈 최초의 모티브는 '태양소년 에스테반'이었다. 띠와나꾸의 쓰레기통에 그려진 콘돌 형상을 보며 그 생각이 문득 떠오른 거다. ㅎ 에스테반과 함께, 리더스 다이제스트 특별판 ´세계 제7대 불가사의'를 빼놓을 수 없겠군. 사실 어릴 때 가장 가 보고 싶어했던 곳은 '버뮤다 삼각지대'였다. 이건 데이빗 카퍼필드의 영향인가? 아무튼 나를 이루고 있는 문화적 배경들은 상당히 키치적이고 잡다한 것 같아 새삼 재밌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오빠의 삶이 이 대목에서 상당히 궁금해지는 것이, 어릴 적 오빠는 공부에 소질이 뛰어났다기 보다는 잡학상식이 장난 아니었고, 그건 소년과학으로부터 시작해 과학동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 특별판을 경유해 수많은 sf 서적이며 온갖 시리즈물을 탐독한 결과였다. 난 오빠만큼 독서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쨌든 오빠 주변에 늘 책들이 널려있으니 안 볼 수도 없고, 그걸 통해 온갖 꿈들을 키워왔다. 아마 종종 오빠랑 그것을 나누기도 했을 거다. 지금도 내 책꽂이에 티벳 사자의 서나 천수경이 있다면, 그것은 오빠의 영향이고, 반지의 제왕 역시 일반에 알려지기 한참 전에 읽은 것도 순전히 오빠 덕이다. 초자연, 초현실적인 이야기나 고대 문명 혹은 외계에 대한 궁금증은 우리의 주요 관심사였다. 물론 여기에는 ET, 례이더스, 인디아나 존스, 스타워즈를 비롯한 성장기의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들도 한몫한다. 지금도 여행다니면서 마치 그 영화들의 세팅 같은 공간을 발견하면 - 주로 중세의 도서관이나 카타콤 같은 지하묘지, 띠와나꾸 등의 태양문이나 모노리스 문양 등 - 발광하고 싶을 만큼 열광한다. 아무튼 우리 둘 다 너무나 세상을 알고 싶어 했다. 다만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세상 이편과 저편까지도. 대학에 갔을 때 오빤 전공이 전공인터라 군대에 가지 않고 4년인가 배를 타고 세상을 돌아다녔다. 가끔 메일이 올 때면, 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고 있어... 그랑블루에서처럼 돌고래떼가 지나가고 있어.. 그 구절들 하나하나에 부러워하며 나도 언젠가는 오빠처럼 세상을 돌아다닐거라 다짐하곤 했었다. 마침 영국에 머무는 동안 오빠가 탄 배가 네덜란드를 지나게 되었고, 앤트워프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유로스타표까지 끊어뒀는데,(앤트워프, 그보다는 네덜란드에 대한 로망은 순전히 피터 브뤼겔의 그림을 좋아해서 시작된 것이고, 민중미술에 대한 관심 역시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웃기는 건, 엄마가 나 영어공부 시킨다고 없는 살림 쪼개가며 프뢰벨 영어테이프를 사 준 적이 있는데, 내 관심은 그것보다는 테이프 무더기에 묻어 온 그림 한 장에 가 있었다. 바벨탑 그림이었는데, 마침 그 즈음 집에 들어온 동아대백과사전의 컬러화보에서 본 브뤼겔 그림과 무척 비슷했고, 난 그 그림들에 매료된 나머지, 사전을 찢었다간 뼈도 못 추릴테고, 프뢰벨의 바벨탑 그림을 몇 달 동안이나 벽에 붙여놓고 매일 같이 들여다보곤 했었다.)갑자기 수술하고 한국에 들어가게 되는 바람에 '앤트워프 항구에서 맥주 한 잔'의 꿈이 깨진 이후, 오빠는 빠르게 일반적인 삶의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취직을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지금 오빠는 아주 사랑스러운 꼬맹이와 아내와 함께 하는, 여유있고 행복한 핵가족의 가장이다. 여전히 다양한 관심사를 자랑하지만,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이번 여행을 떠날 때도 그저 몸건강히 잘 다녀오라고 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오빤 내 연애사 따위엔 관심을 둔 적이 없고 - 하긴 나도 그랬다, 심지어 결혼한다는 데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 결혼하라는 말 따위는 꺼내지도 않고, 부모님과는 달리 전공 선택 때부터 내 편이었고, 내 삶이나 나를 그냥 별스럽지 않게 봐주는 것 같다. 이제는 1년에 열 마디도 하지 않는, - 명절에 집에 가지 않는 관계로 오빠 만날 일이 거의 없다 - 관계지만, 나쁘지 않다. 나는 마치 무슨 요양원 같이 한적하고 깨끗하고 조용한 지방 소도시에서 자랐고, 내 주변엔 책이, 그리고 TV 보다는 라디오가 가까이 있었다. 어쩌면 내 머릿 속은, 얼마 전 어딘가 이동할 때 버스 안에서 보았던 never was(내가 사모해 마지않는 이안 맥켈렌 경이 나오는 2005년 영화)의 주인공과 비슷했을 지도 모른다. 비현실이라고 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 차츰 현실로 다가오거나 어느 틈에 과거로 지나가고 있는 지금, 이 현실이 오히려 마치 시공의 경계가 무너진 초현실 같다. 지금 나는 남반구의 해발 3800 고지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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