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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이 글을 작성하게 된 동기는 이렇습니다.
지난 달 28일 국정원의 전격적인 압수수색에서 시작된 이번 사건에서 이석기 의원의 5월 12일 강연에 대한 ‘녹취록’은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국정원이 불법취득 유출한 녹취록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 조작되어 있습니다. 국정원은 녹취록에서 엄청난 자극적 표현들을 슬쩍 집어넣고, 이를 통해 여론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재판에서 하나하나 밝혀질 것입니다.
저는 5월 12일 경기도당 정세강연을 직접 들은 사람으로서 그날 강연에서 이 의원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정확히 알리고 싶습니다.
국정원의 왜곡과 조작을 바로잡겠다는 뜻입니다.
강연은 말로 합니다. 또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글로 옮겨놓고 보면 문맥이 끊기는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현장에서 듣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경우도 있고, 어떤 표현들은 나중에 제3자의 입장에서 매우 과격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현장에서 청중과 공감을 이루고자 가볍게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가급적 제 기억의 범주 안에서 이 의원이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 논지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이 글을 작성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의원이 그 날 청중들에게 한 이야기의 핵심은 ‘북미 간의 대결이 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아주 높다는 것’, ‘이에 대해 평화와 통일을 지향해온 우리 통합진보당 당원들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2) 북미 간의 대결이 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성
모든 정치 강연은 정세에 대한 판단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의원의 강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월 중순부터 진보당 대변인으로 활동한 저는 지난 4월을 끔찍했던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당에 대한 새누리당과 공안기관의 정략적 공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습관적으로 진행되는 그런 공격들이야 이성과 상식의 선에서 대처하면 되는 일입니다.
정작 제가 공포심을 느꼈던 것은 한국전쟁 이후 군사적 긴장상태가 최고조에 달해 있는데도 아무도 ‘평화’를 호소하지 않는 기이한 현실이었습니다.
되레 정부와 새누리당,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전쟁불사’를 외쳤습니다.
지난 4월, 우리는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끔찍한 전쟁전야로 그렇게 걸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보당 경기도당 임원들이 긴급하게 ‘정세강연회’를 개최하려고 했던 이유입니다.
이 의원은 강연에서 당시의 북미대결 양상에 주목했습니다.
올해 상반기 북미대결이 과거와 다른 중요한 측면은 북한이 인공위성을 올릴 수 있는 로켓과 핵무기를 갖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이를 실제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에 대해 그냥 인정할 리는 만무할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북한의 전략적 도전에 맞서 도상(圖上)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올 봄 한반도 상공에는 전략폭격기, 최신 전투기가 출현했습니다.
바다에는 핵 잠수함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항공모함만 뜨지 않았을 뿐, 미국이 갖고 있는 모든 핵전력이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이 의원은 이 군사적 대결이 미국의 북한 침공과 제2의 한반도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이 의원의 강연에서 ‘전쟁’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2013년 봄의 전쟁 위기가 1994년에 버금가는 심각한 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1994년 위기가 미국의 영변 핵시설 폭격 일보 직전에 멈췄다면, 2013년의 위기는 북미 양 당사자의 총성 없는 전투였습니다. 쌍방이 실제 전력을 운용하면서 전쟁에서 쓰이는 모든 작전을 점검했습니다. 사실상 전쟁이었다는 겁니다.
외신을 보면 미국은 2012년 완성한 ‘플레이북(교전용 각본)’에 따라 B-2, B-52, 핵잠수함 등 전략 무기를 차례로 움직였고, 북한은 선제타격을 거론하면서 반발했습니다. 다행히 이 위기는 미국이 5월 초에 예정되었던 ICBM 시험발사를 연기하면서 점차 소강 국면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은 WSJ, 블룸버그 등 외신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국민들은 전쟁이 코앞에 닥쳐와도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1994년의 위기에서도 솔직히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회고록을 보면 한국의 대통령조차 미국의 폭격 계획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은 한국과 상의하지도 않은 채 자국민 철수 및 북한과의 전쟁에 나설 참이었다”면서 자신이 레이니 대사와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락해 이를 중단시켰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이럴 정도인데, 국민들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전쟁의 참화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이 아닙니까.
그러다보니 이번에도 시민사회단체 내에서조차 올해 상반기의 전쟁 위기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아무 근거 없는 낙관이 무슨 과학적인 입장처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에 대해 최대한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표현을 들어 강연을 했고, 저는 이 의원의 정세 인식이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의원은 이러한 정세가 상당한 기간동안 유지될것이라 보았습니다.
당장의 충돌 위기가 잠시 소강상태로 간다고 하더라도 정세의 구조적 측면은 그대로라는 의미였습니다.
사실 그 때나 지금이나 북미 관계는 바뀐 것이 없습니다.
지금 미국과 남북한, 중국은 대화를 모색하고 있지만, 우연으로라도 작은 계기만 주어진다면 곧바로 올 봄과 같은 극단적 군사 대결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도 우리는 8월의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올 봄과 같은 대결 국면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지 않았습니까?
(3)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준비
정세 인식의 뒤를 따르는 것은 대개 실천에 대한 논의입니다.
이번 강연이 ‘내란 음모’로 불리게 된 데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당원들끼리 오간 이야기를 국정원이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표현을 조작하여 그 무슨 무장 투쟁이라도 도모한 것처럼 오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의원이 앞서 밝힌 엄중한 정세 인식 뒤에 꺼낸 이야기는 바로 진보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닥쳐올 고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의원은 수차례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확인된 것처럼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을 조직해 좌익 경력자들을 20만 명이나 학살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이른바 ‘내부의 적’을 제거한 것입니다.
이번 사건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정보기관은 수년 간 진보당원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불법적으로 사찰, 추적해왔습니다.
그들은 민주화 운동 경력자들, 진보운동가들에게 오랜 여론 공작을 통해 ‘종북’의 딱지를 붙였습니다.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전쟁이라도 난다면 63년 전처럼 당장 ‘내부의 적’으로 간주할 태세입니다.
지금도 이미 진보당원들은 백색 테러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엄중한 전쟁 가능성을 인식했다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대책부터 오가는 게 당연합니다.
실제 참가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살아남는’ 문제를 토론했습니다.
얼마씩 현금을 준비하자던가, 일단 검거를 피하는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이 의원이 강조한 ‘물질, 기술적 준비’에는 이런 대책들이 들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올해 초 저는 하나의 질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만약 94년처럼 한국의 대통령이 반대하는데도 미국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결코 그 전쟁에 협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제일 바라는 것은 이 의원의 표현대로 ”싸우지 않고 조국통일의 새로운 단계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만약 하나의 ‘현실’로 된다면 우리는 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의원이 내놓은 “물질, 기술적 준비”가 무엇인지는 저로서는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몇몇 당원들이 말했던 ‘칼’이나 ‘총’은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이 의원도 강연에서 “칼 가지고 다니지 마라”, “총 가지고 다니지 마라”고 했습니다.
예상조차 어려운 위협의 상황에서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전쟁을 막자는 것으로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압력밥솥’ 같은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테러는 원래 진보세력의 노선도 아니고, 전통도 아닙니다.
강연 현장에 있었던 저는 지난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화물연대의 활동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화물연대는 이라크로 가는 주한미군 및 전쟁 설비의 수송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냈습니다.
지구 반대편 남의 나라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해서도 이렇습니다.
하물며 우리 사회의 모든 미래를 송두리째 앗아갈 참혹한 전쟁이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솔직한 마음으로 아직 저는 이에 대해 뾰족한 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 노동조합 활동, 선거 등 다양한 경험을 해 왔지만 전쟁에 관한 한 저나 진보운동은 아무런 경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 그 계획이 없다면 결국 팔짱을 끼고 쳐다보든가, 캠페인 수준의 무력한 활동에 그치게 됩니다.
이날 강연에서 던져진 화두는 ‘물질’, ‘기술’이라는 말에서 나타난 것처럼 모호한 주장을 넘어 현실로서 반전운동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깊은 성찰과 고민이 필요합니다. 오직 민중을 믿고 민중의 힘으로 전쟁으로 향하는 길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전쟁의 위협에 맞닥뜨렸던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준비’를 위해 창조적 발상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그 날의 화두를 모두 풀어내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이 땅에서 영원히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야 그 화두를 풀지 못한다 하여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가까운 20년 동안에만 1994년과 2013년, 일촉즉발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 위기가 구조적으로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할 만한 어떤 약속도, 물질적 담보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여전히 5월 12일 합정동 강연에서 제시된 이 화두를 붙잡고 있습니다.
(4) 내란음모로 바뀐 강연회 –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것
저는 지금 10월30일의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에서 주로 지내고 있습니다. 추석에도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야권을 오랫동안 지지해 오셨던 한 어르신께서는 저에게 ‘이번 사건은 지난 해 대선에서 이정희 후보가 박 대통령을 너무 심하게 몰아붙인 데 따른 보복’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어르신의 말씀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번 사건이 정치 보복이며 촛불 시위에 가장 앞장서왔던 비판세력에 대한 정치 탄압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석기내란음모’ 사건 이후에 이어진 채동욱 검찰총장에 대한 감찰,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화 시도 등은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와 진보당은 새누리당-박근혜 정부의 민주주의 파괴행위에 맞서왔고, 또 맞서나갈 것입니다.
한편으로 진보당에 대한 진심어린 ‘쓴 소리’가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 말이 아닌 실천에서의 변화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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