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행의일치

분류없음 2015/03/25 02:06

제목: 지행의 일치, 라고 정했는데 콘텐츠에 비해 제목의 비약이 너무 심한 것 같다. 글을 더 잘 써야 한다.  

 

 

 

수요일 오버나이트 근무를 하러 갔는데 그사이 (주말 뒤 월요일 화요일 상간에) 경찰이 데려온 클라이언트 하나가 더 늘었다. 우리 아가 괜찮니 my baby, are you okay 라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뒤를 돌아보니 스카프로 얼굴을 다 가리고 있어서 - 아마도 히잡인 모양 - 인종이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다. 응 나는 괜찮아, 너 이름이 뭐니. 언제 왔어. 이름은 E이고 오늘 (그러니까 수요일) 왔단다. 짧은 영어 대화만으로는 억양을 짐작하기 힘들어 백그라운드도 알 수 없지만 복장으로 대략 젠더 이외의 간략한 것은 헤아릴 수 있다. 나를 대하는 자세가 아무래도 엄마 내지 케어기버 같다. 아이고 No, thanks. 이날 밤은 별 일 없이 지나갔다. 

 

 

목요일 오버나이트 근무를 하러 갔는데 그사이 (만 하루 사이) 이 양반이 경고를 받았다. 케이스메니징 노트를 읽어보니 손으로 음식을 만지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 손으로 다른 클라이언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스탭에게 허그 (hug)를 하자고 했단다. 이브닝 근무자들에 따르면 바운더리 이슈 (boundary issues)가 있는 것 같다고.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이고 No, thanks. 이날 밤은 이 양반이 돌아오지 않아 또 역시 별 일 없이 지나갔다. 

 

 

토요일 이브닝 근무를 하러 갔는데 그사이 (만 이틀 사이) 우리 프로그램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너의 마음은 고맙지만 하지 말라고, 음식을 다루는 일은 네 일이 아니라고 해도 매일 낮에 오는 쿡 (요리사) 에게 잔소리를 하고 이래라저래라 한 모양이다. 쿡이 마련한 음식을 맨손으로 집어서 다른 이들의 접시에 담아주고 또 역시 낮에 근무하는 스탭들에게 허그를 하자고 한 모양이다. 데이 근무자들은 "E는 코리언을 좋아한대. 그러니까 너는 큰 걱정 안해도 돼"라며 웃는다. 뭔소리야. 했더니 브라운과 흑인들에겐 야멸차게 굴고 백인과 코리언에게만 허그를 하자고 한단다. 희한한 케이스다. 인종차별을 차이니스 (로 인식되는 동아시안)에게는 하지 않고 흑인과 브라운에게만 하다니. 아이고 No, thanks. 그런데 그날 밤 늦게까지 이 양반이 돌아오지 않았다. 별 일 없이 지나갔다. 

 

 

항상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앞서 일한 근무자들에게서 대략의 보고를 듣고 근무 준비를 한다. 그 보고시간은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공식적인 전달과 클라이언트들의 특이사항, 근무 시간 중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이 때 나누기 때문이다. 세 번의 시프트 동안 우리 프로그램의 유명인사, 셀럽이 되신 E의 행동이 보고시간 대화의 주된 소재가 되었다. 그 가운데 동아프리카에서 이민오신 한 분이 "그건 E의 문화야. 문화 차이야"라며 E가 보이는 부적절한 행동을 설명한다. 한 건물에서 같이 머무는 모든 이를 케어하려 하고 자신이 동지라고 믿는 사람과 신체적 접촉 (가령 허그를 한다든가) 을 하면서 친밀감을 표현하려는 E의 행동은 E가 나고자란 문화와 성장배경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모두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동아프리카에서 이민오신 스탭과 나를 포함한 나머지 스탭의 이후 판단은 달랐다. 그래, 그게 문화의 차이라고 해두자, 그래서 뭐? 동아프리카에서 이민오신 스탭은 E의 행동에 조금 더 관대하거나 이해를 하자는 쪽이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스탭은 E의 행동은 "부적절하다"는 쪽이다. 따라서 E가 경고를 받은 것은 당연하며 이후 행동도 모니터링해야 한다는 쪽이다. 혼자 주구장창 주장하기 곤란했던 그 스탭은 의견을 철회했다. 아니, 철회했다기보다는 더 이상 발언하지 않았다. 

 

 

사람의 행동거지가 이상하다거나 (odd; bizzare; creepy) 부적절하다는 (inappropriate) 것은 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 가령 태곳적 아담과 이브처럼 중요부위만 가리는 복장이 허용되는 사회가 있고 그것을 적당하지 않은 것으로 고려하는 사회가 있기 마련이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고온다습한 곳과 사시사철 얼음으로 뒤덮인 다른 한 곳, 이 두 곳을 생각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겠다. 

같은 사회라고 해도 시대에 따라 그 개념이 다르다. 가령 박정희 시대만 해도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은 형법상 제재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미니스커트를 입는 사람을 손가락질하거나 빤히 쳐다보면 그런 일을 저지르는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 내지 아웃데이트한 (outdated) 사람 취급을 받는다. 

 

 

부족사회-가족사회 개념이 강한 곳에서 나고자란 E에게는 한 지붕 아래 함께 거주하는 이들과 음식을 나누고 신체적 접촉을 통해 연대감을 드높이는 일이 중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피아 (彼我)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E가 머무르는 곳이자 나의 일터는 부족이나 가족이라는 개념보다는 shared community 이라는 개념이 더 강하다. 부족 내지 가족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E에게, 그리고 동아프리카에서 이민오신 스탭에게 이 차이를 설득하기란 무망할는지도 모른다. 불혹을 넘긴 다 자란 어른에게, 굳을대로 굳어버린 하나의 강고한 세계에 접속하는 일이란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훈련하는 일이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안다고 해서 다 실천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일 E를 다시 만난다. 다시 또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우리 아가 괜찮니 my baby, are you okay 라고 하는 일이 없기를, 허그하자고 하는 일이 없기를, 모두의 음식을 맨손으로 만지며 나눠주는 일이 없기를. 

 

 

 

2015/03/25 02:06 2015/03/25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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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는것

분류없음 2015/03/17 04:24

제목: "다르다"는 것 

 

어제 간만에 교회 일요일 저녁 서비스에 들렀다. 그간 토요일 이브닝 근무 때문에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었다.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와 간단히 요기를 하고 소화를 시킨 뒤 잠자리에 들면 두 시 혹은 세 시. 이브닝 근무를 하면서 경찰을 상대하거나 클라이언트들, 동료들과 약간의 소요를 겪어 신경을 많이 쓴다거나 하면 집에 와도 그 긴장을 푸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 

일요일 저녁이 되어도 대부분 피로를 회복하지 못한다. 그런저런 이유로 그간 교회에 가는 일이 곤란했다. 어제는 큰 맘 먹고 짝과 함께 저녁 서비스에 참석. 저녁 서비스는 오전과 달리 매우 캐주얼하게 진행된다. 

 

일요일 저녁 서비스에서 기타와 피아노를 치는 S라는 남자가 있는데 외양은 완전 히피다. 그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데리고 왔다. 딸은 가느다란 끈만 달린 속옷같은 겉옷을 입고 노래를 불렀다. 특별찬송. 나는 옷을 켜켜이 입어도 추운데 역시 젊음은 좋다. 그 젊음(?)이 부럽다. 부담임 목사인 케빈이 니덜의 고민이나 나누고 싶은 기쁜 일은 무엇이냐 하면서 회중을 돌아다녔다. 그 고등학생 아이가 고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graduating [from] high-school"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속으로 정규직이 되는 거, 라고 읊조렸는데...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일"이 기도를 해야 할 만큼 힘들고 고민되는 일이냐고 물을 때 그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글쎄, 잘 모르겠다. 힘들고 고민스럽고 걱정이다, 라고 대답하는 학생들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대학에 가는 것"이 더 걱정이다, 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 

 

북미 대륙 대부분 고등학생들은 학교 수업과 시험 외에 커뮤니티 성원으로서 어떻게 사회에 복무하고 있는지, 자신의 특기와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여가시간을 쓰고 있는지 입증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졸업가능한 크레딧"으로 환원해 받는다. 학생들은 대부분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사회서비스 영역에서 자원활동 (volunteer) 을 한다. 일정 시간 이상을 채우면 증명서 (certificates) 같은 걸 받을 수 있고 이 증명서가 있으면 크레딧을 받는다. '음, 너는 네가 살고 있는 커뮤니티를 위해 이만큼 네 자원을 쏟아부었구나. 너는 네 커뮤니티를 위한 한 사람의 어른이 되어도 괜찮겠다' 이 정도의 의미랄까? 고등학교 졸업장 (secondary school diploma) 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의미이다. "커뮤니티를 이끌 어른이 되었다"는 의미. 

 

물론 자원활동 개념이 많이 변질되기도 했다. 집에 돈이 많거나 이용할 빽이 많은 부모를 둔 학생들은 그 부모의 인적-돈적-시간적 자원을 활용해 크레딧을 축적한다. 돈도 빽도 없는 이민자들 가운데 일부 열혈 부모들은 자식들 대신 자원활동을 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자원활동을 다니시는 한국인이민자 가운데 몇몇 아주머니들의 사연. 아들이 공부하느라 바빠 자원활동할 시간이 없어 엄마가 대신 그 크레딧을 따주고 있었다. 물론 전체가 다 그러는 건 아니다. 일부 소수다. 

 

자원활동만 하면 괜찮은데 자신의 적성과 특기를 활용하여 미래의 비전을 찾아가는 활동도 해야 한다. 교외-수업 외 취미 프로그램이나 경연대회 같은 데에서 입상하면 더 좋다. 물론 크레딧을 인정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경연대회여야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담당자에게 추천서를 받으면 된다. 방학이라고 예외는 없다. 만약 외국에 나가 가난하고 비루한 제3세계 아이들을 돕는 일 같은 거라도 하면 아주 좋다. 크레딧도 받고 추천서도 받고 나중에 이력서에도 쓸 수 있다. 바쁘다. 

 

이것만이 아니다. 열다섯 살부터는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으니 맥도날드 같은 데서 알바라도 해야 스마트폰 이용료라도 낼 수 있다. 열여섯 살부터는 운전도 할 수 있으니 운전면허증도 따야 한다. 다 돈이다. 금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는 한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바쁘다. 

 

이러니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일이 근심거리일 수밖에. 대학에 모두 다 가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고등학생은 바쁘다.  

 

물론 이런 패턴도 많이 바뀌고 있다. 특히 중국, 인도, 한국에서 이민온 이민 1.5세대, 2세대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졸업 뒤 대학에 진학한다. 위의 세 나라는 직접 보고 경험한 것들이 있으니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 나라에서 이민온 1.5세대 혹은 2세대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대학 (Post-Secondary Schools)에 진학한다. 정말 "빡씨게" 공부한다. 대학에 가서도 공부만 "빡씨게" 하는 젊은이들도 있다. 공부 외의 대부분 일들은 부모님들이 해결해 준다. 언젠가 커뮤니티 인컴텍스 파일링 자원활동을 할 때였다. 엄마들이 자기 자식들 인컴텍스 자료까지 들고 오셔서 파일링 해달라고 하셨다. 이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18세가 넘으면 무조건 성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인컴텍스 파일링도 독자파일로 제출해야 한다. 즉, 18세 넘은 자식이 두 명이면 나는 그 아주머니의 것과 자식 두 명, 도합 세 명 (혹은 아주머니가 남편 것까지 들고 왔을 경우 4명) 의 파일을 입력해야 한다. 문제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종의 개인정보 공유 동의서 같은 consent form 을 받아야 하는데 부모들이 자식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마음대로 싸인을 한다.

"본인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요"

"괜찮아요. 제 자식이에요"

"18세가 넘으면 성인이라서 본인이 동의를 직접 해야 하는데...요"

"작년에는 그냥 했는데... 다른 선생님들은 그냥 해주는데..." 

 

어쩔 수 없이 파일을 열고 자료를 입력하면서 봤더니 자식분들이 21세, 23세에 게다가 모두 대학에 다닌다. 그리고 이들의 소득자료를 봤더니 "소득이 없다". 알바같은 것도 하지 않고 대학을 다닌다. 이 나라에서 보기 드문 경우 아니냐고, 주변에 물어봤더니 보기 "흔한" 케이스란다. 패턴이 정말 많이 바뀌고 있다. 

 

 

히피처럼 생긴 S의 그 딸은 노래를 썩 잘했다. 아마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 쪽으로 재능을 떨치지 않을까 그런 추측을 하게 된다. 일요일 종일을 특별찬송을 위해 할애한 그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을 위한 크레딧을 0.3점 정도는 받아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2015/03/17 04:24 2015/03/17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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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후기

분류없음 2015/03/12 02:31

역시 화요일 반값 영화 관람. 

 

밤 열 시가 다 된 시간. 터질 듯한 열정의 십대 후반 - 이십대 초반 청춘들이 들끓고 마약딜러들이 드문드문 손님을 고르고 군데군데 홈리스 어르신들이 이불을 꽁꽁 싸매고 누워계신 그 거리에 있는 그 극장에서만 그 시간에 "킹스맨:시크릿서비스"를 상영한다. 기백 달러를 호가하는 가방, 옷, 화장품, 신발 등등의 유명 메이커 매장들이 비까뻔쩍 네온사인을 자랑하지만 문은 꼭꼭 잠겼다. 영업시간이 끝났다. 그 시간에 찾는 그 거리는 참말로, 정말로 아이러니하다. 자정 무렵의 명동 밤거리와는 사뭇 다르다. 오뎅이라도 파는 작은 스넥카라도 있으면 참 좋겠는데, 열 개라도 그 자리에서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릴없는 바람이다.

 

이 영화가 이렇게 이다지도 어처구니없을 것이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007 시리즈 정도 하겠지, 심해도 스파이키드 정도는 넘어서겠지 했는데 "19세 이상 관람" 이라는 걸 너무 쉽게 간과했다. 일단 영화를 보고 나온 즉자적인 소감은 몇 년 전에 "300"을 보고 난 직후의 느낌이랄까? 토할 것 같았고 속이 너무 불편했다. 재미가 있냐없냐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속이 메슥거렸다.  

 

사실 콜린 퍼스가 속한 킹스맨 에이전시 측도, 사무엘 잭슨의 발렌타인 측도 그 누구도 정의를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 목적과 명분이 없으니 그저 눈에 보이는 이미지만 남는다. 도식화하면,

 

 

백인, 남성, 매너, 수트, 잉글리시 엑센트의 영어, 위스키 혹은 브랜디

Vs.

비백인 등의 비주류 인물, 비매너 (야만), 래퍼를 연상케하는 캐쥬얼 복장, 사투리 (dialects) 로 불리는 영어, 에일 맥주 따위

 

 

그리고 이 두 그룹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사람을 아주 잘 죽인다. 찌르고 때리고 치고 폭발시키고 쏘고 썰고... 명분없는 살상과 전쟁을 희화한 것이라 믿고 싶은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구역질이 난다. 대립이 명징한 저 프레임이 그 희화를 즐기는 것을 방해한다. 

 

엑스맨, 킥애스 등을 만든 감독의 작품이라 열혈 팬도 많고 기대치도 높았을 것이라 사료. 나로선 개인적 취향으론 영 아니올시다이지만 헐리우드 오락 영화로는 잘 만들었다. 

 

* "스칸디나비안", "더티블론드 헤어", "세상을 구하면 키스 이상의 것을 줄 것". (서양) 남성들의 판타지를 제대로 드러낸 스칸디나비안 공주님의 출연이 그나마 나에겐 가장 인상적이었다. 007의 원형을 벗어나지 않아서 그러려나.    

 

2015/03/12 02:31 2015/03/12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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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뭐했나

분류없음 2015/03/09 14:15

여성의 날. 

 

집회, 토론회, 행진. 올 해에는 아무런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다만 살고 있는 도시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Repair Cafe 자원활동에 참여했다. 연례행사 활동의 패턴을 바꾼 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하다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몇 달 전 토요일 정규근무 계약을 맺은 뒤로 토요일마다 열리는 Repair Cafe에 참여하지 못했다. 어차피 자원활동 (volunteering)이므로 내가 할 수 있는만큼, 할 수 있는 한,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일이다.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네가 하기로 해놓고서 왜 그래. 너만 바쁘냐. 그럼 미리 안된다고 했어야지. 이런 반응은 "전혀"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몸에 베인 아주 이상한 습관 내지 반응이랄까, 잠재의식에 자리한 죄의식이라고 해야 하나. 설명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다. 미안함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런 괴상한 거?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때 오는 박탈감. 아마도 그런 마음이 더 컸던 건 아닐까. 이 나라에서 오래 정착하기 어려우므로 물건을 고칠 때 필요한 연장을 하나 둘 장만하거나 그런 계획을 수립하는 일이 난망하다. 커뮤니티 수업을 듣거나 수선하는 장인들을 만나 어울리는 일도 다소간에 버겁다. 이 일의 장점은 집안에 고장난 물건들을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거, 고치기 어려우면 천천히 배울 수 있다는 거, 그리고 늙어서도 사람들과 어울리며 함께 할 수 있다는 거. 재미있는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기에 판이 다 마련되어 있어 몸만 가면 되는데도 그게 어려울 때 --- 슬프다. 

 

어쨌든 나도 여성이니까 나에게 축하를.

 

 

* 여성의 날 단상

 

한국에서 사회주의 (활동) 를 드러내어 하는 (일부) 집단-사람들도 그렇고 이 나라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공공연하게 전파하며 활동하는 (일부) 집단-사람들도 그렇고 일정 정도 '강박'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무슨 강박이냐 하면, 모든 주제를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는 깔대기로 다 담아내려는 것. 혹은 만기친람?

 

특히 여성의 날이 다가오거나 젠더-섹스 이슈가 결부되는 일 (가령 성폭력) 이 벌어질 때, 그리고 이 일이 피드백을 많이 받을 때 그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사회주의자로서 무엇을 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로서 젠더 이슈에 대해 어떠어떠한 입장을 지녀야 한다; 사회주의자의 관점으로 젠더불평등을 바라봐야 한다; 사회주의자의 눈으로 성폭력에 반대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로 사는 일은 참 피곤하겠다 싶다. "사회주의자로서" 보다는

개인 김개똥은 젠더 이슈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개인 김개똥은 살아보니까 젠더불평등이 이런이런게 좋고 이런이런 게 불편했다; 개인 김개똥은 성폭력 피해자가 고통을 호소하는 일에 적극 공감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그 사건이 성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개인 김개똥은 피해자라고 말하는 사람의 고통에 전혀 공감할 수 없다. 왜냐하면.... 

... 이런 것에 더 관심이 간다. 사회주의라는 담론 (discourse) 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에 관심이 더 간다.  

 

정말 내가 지향하는 그것을 입으로 말하거나 손으로 타자하지 않아도 그 지향이 내 몸 안에서 무의식으로 작동하는 그런 개인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을 만날 수 있으면 아, 인생 잘 살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혁명은 매우 사적인 것이다. 

 

 

2015/03/09 14:15 2015/03/0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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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시

분류없음 2015/03/06 06:27

I Do Not Love You Except Because I Love You


I do not love you except because I love you; 
I go from loving to not loving you,
From waiting to not waiting for you
My heart moves from cold to fire.

 

I love you only because it's you the one I love; 
I hate you deeply, and hating you
Bend to you, and the measure of my changing love for you
Is that I do not see you but love you blindly.

 

Maybe January light will consume
My heart with its cruel
Ray, stealing my key to true calm.

 

In this part of the story I am the one who
Dies, the only one, and I will die of love because I love you,
Because I love you, Love, in fire and blood. 

 

 

 

파블로 네루다. 본명은 잘 모르겠고 체코의 시인 이름을 따 네루다라고 필명을 지었다. 칠레의 저항 시인. 명문거족(?)에서 태어나 시를 쓸 수 없었던, 체노피트의 반혁명에 의해 죽음조차 은밀하게 위로받아야했던 저항 시인. 그이의 몇 몇 시는 사랑을 노래한 정통 사랑시인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뭘 하자는 건지 잘 알 수도 없지만 -- 거듭 읽으며 그이의 삶과 칠레 혁명을 가물가물 생각해보면 (내 나름대로 떠올려보면) 왜 그가 이렇게 알쏭달쏭 시를 썼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네이버에서 급히 검색해와 가져온 한글 번역은 아래와 같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ㅡ내가 당신을 사랑하므로 ;
나는 당신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음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당신 기다림과 기다리지 않음 사이를 오고가며
내 가슴은 차가움에서


불로 움직인다. 나는 다마 내가 사랑하는 게 당신이므로
당신을 사랑한다 ; 나는 당신을 몹시 미워하며, 미워하면서
당신한테 굴복하고, 그 변하는 사랑의 척도는
내가 당신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맹목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1월의 빛이 내 가슴을
그 잔인한 광선으로 소진시킬지 모른다, 내 열쇠를
훔쳐 참 평정을 열면서.


얘기의 이 부분에서 나는 죽어가는 사람ㅡ단 한 사람ㅡ
이며, 당신을 사랑하므로 사랑 때문에
죽을 것이다, 사랑이여, 당신을 불과 피로써 사랑하므로.

 

http://blog.naver.com/swwyang/100006762560

[출처] 100편의 사랑 소네트 (61~70) - 파블로 네루다|작성자 목눌

2015/03/06 06:27 2015/03/06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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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블로그

분류없음 2015/02/28 05:54

포스팅을 하고 저장을 눌렀는데 "저장하고 있습니다" 노티스가 계속 돌아가고 있어서 또 저장을 눌렀더니 "저장하고 있습니다. 저장하고 있습니다" 고 바뀐 노티스가 계속 또 돌고 있다. 어라? 대답을 하네? 설마, 하고 또 저장을 눌렀더니 "저장하고 있습니다. 저장하고 있습니다. 저장하고 있습니다" 어쭈? 대답을 또 한다. 오류인가 싶어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저장을 클릭했더니 뜨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장하고 있습니다. 저장하고 있습니다. 저장하고 있습니다. 저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대답엔 다소간에 감정이 실린 것 같다. 저장하고 있다니까!!!

 

나날이 진화하는 진보블로그. 쿄쿄쿄. 

 

2015/02/28 05:54 2015/02/28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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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그뒤

분류없음 2015/02/28 05:33

오스카 시상식이 끝난 뒤 며칠 동안 SNS에서 오가는 내용을 보며 착잡했던 기분을 오늘은 조금 정리해봐야겠다. 대체 무엇 때문에 속이 시끄러웠나.

 

1. 


가장 시끄러웠던 것은 보이후드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페트리샤 아켓 (Patricia Arquette) 의 수상 소감,

 

"To every woman who gave birth to every taxpayer and citizen of this nation, we have fought for everybody else's equal rights", "It's our time to have wage equality once and for all, and equal rights for women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아이를 낳아 기르는 모든 여성들, 세금을 내고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지금껏 한사람 한사람 모든 이들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싸워왔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미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이 임금차별없이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쟁취하여] 살아갈 수 있는 그 권리를 누리도록 합시다."

 

상을 받고 내려간 페트리샤 아켓은 무대 뒤에서,  

 

"It's time for all the women in America and all the men who love women and all the gay people and all the people of colour that we’ve fought for, to fight for us now," 1

"이제 미국의 모든 여성들, 그 여성들을 사랑하는 모든 미국의 남성들, 모든 성소수자들, 유색인종들이 모두 다같이 우리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때입니다." 

 


둘째는 첫째만큼 시끄럽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시끄러웠다. 

감독상을 수상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숀펜이 버드맨의 감독 알레한드로 이냐리뚜 (Alejandro Inarritu)를 호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Who gave this son of a bitch his green card?"

"누가 이런 망할 놈에게 영주권을 줬을까?"

 


2. 


두 가지 전혀 다른, 그러나 매우 깊은 연관을 지닌 사건을 접한 뒤로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첫째, 숀펜의 저 말은 다분히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말이다. 알레한드로 이냐리뚜 감독은 '라티노'다. 미국 사회에서 라티노는 가장 많은 수의 이민자-이주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이른바 "불법체류자" 가운데 이들 인구가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이들의 많은 수가 차별과 저임금 착취 노동에 시달린다. 위키에 있는 미국-멕시코 국경은 그 사진을 봐도 차이를 알 수 있다. 멕시코 측 국경 지대는 "삶이 지속되는 곳"이라면 미국 측 국경 지대는 "삶이 중단된 곳"이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illegal crossing) 것을 차단하기 위해 미국의 국경 지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민자인 알레한드로 이냐리뚜 감독을 직접 지칭해 '망할 놈'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그런 망할 놈에게 누가 '영주권'을 줬냐고 우스꽝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발화자가 숀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공한 백인 중년 남성, 가시적인 신체장애가 없고, 사회의 룰과 보수적인 성향에 콧방귀끼는 것을 밥먹듯이 하는 술먹듯이 하는 숀펜의 성향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저 말을 웃어넘긴다. '재미있는 농담'이 성립한다. 따라서 숀펜의 저 말은 '실수'가 아닌 것으로 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숀펜은 미디어에서 SNS에서 상대적으로 덜 까였다. 성공한 백인 중년 남성의 저 괴상한 말이 '익스큐스'를 받은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런 말을 저런 자리에서 하지도 않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털렸을 것이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질질 짜면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을 것이다. 

 

숀펜의 저 말이 나온 직후 많은 라티노들이 "우리 커뮤니티에 대한 모욕"이라며 들고 일어섰다. 적지 않은 사람들도 숀펜을 비난했다. 하지만 또 일부 사람들은 숀펜의 하이블랙-고급진 유머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분노에 찬 일부 라티노들과 숀펜을 비난한 사람들을 되려 깎아내렸다.

 

개인적으로 숀펜의 저 말은 용납할 수 없는 말이다. 숀펜의 화려한 리버럴 지향을 이해하고 그를 일정 부분 지지하기는 해도 그의 지향과 성향이 '익스큐스'의 원인으로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개인이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에는 "별 문제 없겠지"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랴"는 기대심리가 있기 마련이다. 이 정도 뇌물은 주고 받아도 문제 없겠지, 저 여자의 짧은 치마가 남성을 유인하려는 거라고 대놓고 말해도 나만 그런 게 아니니 괜찮을거야. 개인의 행동은 많은 부분 그 개인이 속한 커뮤니티의 분위기를 방증한다. 물론 숀펜이 이런 것까지 생각했을 위인은 아니다. 그는 누가 아무리 뭐하고 해도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3. 

 

둘째, 페트리샤 아켓은 (숀펜에 비해) 과도하게 욕을 먹었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머리가 나쁘다거나, 꼴페미라든가, 인종차별주의자라든가, 중산층(리버벌)페미니즘의 한계라든가 등등. 그런 비판(들)은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늘! 언제나! 생물학적인 여성이 저지르는 실수 (혹은 여성이 얻는 찬사)는 그의 젠더와 섹스 때문에 더더욱 과장되어 부풀려지고 더 많이 회자된다. 그것은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남성이 저지르는 실수는 그 남성의 남성성, 젠더적 성성을 경유해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낼 필요가 없다. 이 사회에서 남성성이 표준인 까닭이다. 

 

페트리샤 아켓의 발언이 거북스러운 것은 "To every woman who gave birth~," 부분이다. 그리고 " ~ ~, to fight for us now" 부분이다. 

 

페트리샤 아켓은 "To every woman who gave birth"라고 운을 떼면서 여성의 생득적 능력인 '출산'에 초점을 맞췄다. 이 세상에 여성과 남성, 오로지 두 개의 젠더-섹스만 존재한다고 할 때 상대 성(性)인 남성에게는 이 능력이 없다. 이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남성(중심의 이 구조와 세상)은 스스로-태생적으로 결여한 이 능력을 상대 성(性)인 여성을 통제함으로서 전유할 수 있었다. 남성들이 독점했던 노동시장에 여성들이 쏟아져 나오고 또 남성들만 참여하던 투표권을 여성들이 얻자 이 통제는 벽에 부딪혔다. 자, 이제 그들이, 이 사회가 통제를 지속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성만이 지닌 그 생득적 능력을 고결하고 참되고 가치있고 인류를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의무로 만들었다. 통제가 원활할 때에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거니까 마땅히 강조할 이유도 없었고, "아침에 애낳고 오후에 김매고 와서 저녁에 시부모남편 밥상 차린다"는 말까지 했다. 화장실에서 똥누는 일처럼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출산이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 것으로 되자, 여성 스스로 여성의 몸을 결정할 수 있게 되자 되려 그 출산이 "여성이 수행하는 고결하고 엄숙하며 신성한 의무로" 된 이 아이러니를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심지어 "남자는 군대를, 여자는 출산을" 웃지못할 캐치프레이즈가 횡행할 때도 있었더랬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무와 권리의 항을 그릇되게 이어붙인다. 의무를 다해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어불성설의 논리를 마치 "정상"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권리는, 특히 이것이 보편인권에 관한 것일 때에는 권리 그것은 그 자체로 평등한 것이어야 하며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반면 의무는 다르다. 만약 부자와 거지에게 동일한 액수의 세금을 내도록 한다면 이 의무 행위가 '올바르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의무는 사회적 맥락, 가치, 개개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구현하는 바가 다르다. 가령 우리나라 헌법 제39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 헌법 제39조에서 말하는 법률은 병역법으로 따로 다룬다. 병역법에 의해 두드러진 신체-정신적인 차이를 지닌 젊은 남성은 -그가 아무리 GP 근무를 하고 싶어도- 실제로 복무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군대를 운영하는 국가, 사회가 그 개인이 지닌 차이를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미 의무를 다한 것으로 간주하여 국가가 그들을 "정상집단"에서 분리한 것이다. 말이 좋아 "너에게 의무를 면제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미 의무를 다한 것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이른바 "군면제"인 이들이 헌법 제39조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는, 의무를 다하였다. 

 

여성이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남성과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출산을 하고 있거나 세금을 내고 있거나 따위의 이유가 아니다. 페트리샤 아켓이 이것을 모를 리 없을텐데 그녀는 이렇게 얘기해야 사람들이 끄덕끄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몰랐다면 정말 그녀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겠지만 그것은 내 판단 밖의 영역이므로 패스!

 

4.

 

나는 출생하면서 부여받은 생물-해부학적 젠더와 나고 자라면서 나를 규정하는 젠더가 일치하는 시스피메일 (cis-female), 여성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출산의 능력은 있다. 그러나 직접 출산할 의사도 계획도 없다. 만의 하나 성령으로 잉태하는 일이 있어도 임신중단 결정을 내릴 생각이다. 그렇다면 나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니 권리의 일정 부분을 제한받아도 되는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나의 젠더아이텐터티와 출산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세금을 내고 있다. 물건을 살 때마다 붙는 간접세 (Indirect Tax: GST, HST, PST)는 물론이고 직접세 (Direct Tax: Income Tax, EI, CPP) 도 꼬박꼬박 잘 내고 있다. 간접세를 안 내자니 물건을 살 수 없고, 회사에서 월급날마다 뜯어가는 탓에 직접세도 잘 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나는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의 세금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알 권리와 이렇게저렇게 운용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고 나보다 세금을 적게 내지만 사회적 혜택을 나보다 더 많이 받는 사람을 줄이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것은 법에서 규정할 시민의 권리와 전혀 다른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세금을 내는 문제"와 "사회복지혜택의 대상을 규정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영역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 나라에 노동비자로 머물고 있다. 투표권이 없고 사회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다. 비자 기간이 만료하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 안그러면 '불법체류자'가 된다. 그러면 나는 시민들이 주장하는 권리를 요구할 수 없나? 그렇지 않다. 권리가 주어지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나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특히 동일임금-동일노동, 남과 여에 임금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사안을 나는 당연히 주장할 수 있고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럼 '불법체류자'들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주장하면 안되나?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도 인간이 누릴 기본권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들에게 "체류비자가 없는 문제"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권리"는 전혀 상충하지 않는다. 둘은 전혀 다른 영역의 문제다. 

 

 

5. 

 

안 그래도 페트리샤 아켓과 숀펜 때문에 속이 시끄럽던 찰나에 아래와 같은 페티션 (청원서) 이 돌고 있다. 페트리샤 아켓의 스피치에 버금가는 말이다. 우리는 이만저만하니까 가치가 있어요. 한참을 생각하다가 페티션에 서명을 했다. 청원서를 내고 요구를 천명하는 것 그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https://www.change.org/p/citizenship-and-immigration-canada-candidates-on-open-work-permits-and-working-in-canada-need-more-visibility-in-express-entry-system

 

 

 

 

 

 

 

  1. "we" "us" 가 지칭하는 것이 누구인지 페트리샤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we" "us"가 누구인지에 따라 한국어 옮김 내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볼드는 꽃개가 했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2015/02/28 05:33 2015/02/2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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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와경계

분류없음 2015/02/25 01:50

일터에서 파트너가 되면 심신이 고단한 사람이 두어 명 있다. 한 사람은 한국 태생 여성, 또 한 사람은 인도 태생 남성. 둘 다 아시아에서 이십여 년 전에 이민온 캐나다 국적의 사람이다. 

 

한국 태생은 나에게 종종 먹을 것과 결혼할 것과 종교를 강요한다. 퍼스널스페이스에 대한 존중이 없다. 가끔 요리를 하는데 그것을 먹어보라고 한다. 먹고 싶으면 감사하다, 인사를 드리고 먹는다. 먹고 싶지 않으면 거절한다. 괜찮습니다. 저는 밥을 먹고 왔어요. 그래도 권한다. 계속 권한다. 피곤하다. 결혼은 안해? 부모님이 그냥 두나봐. 안 외로워? (남자랑) 결혼해야지. 네 저는 괜찮습니다. 때로는 종종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다니라고 한다. 나는 LGBTQ 사람들의 인권과 크리스처니즘의 결합을 도모하는 교단에 적을 두고 있다. 무슨 교회에 다녀. 교단의 공식적인 이름을 말해줬더니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 휘말려서는 안된다"고 한다. 어느 날, 이 모든 고통에 대해 큰 맘 먹고 조목조목 따졌더니 "나이"를 들먹이길래 그냥 포기해버렸다. 방법이 없는 사람이다.  

 

인도 태생의 남성은 가끔 어깨와 등을 친다. 퍼스널스페이스에 대한 존중이 없다. 그이가 백인 여성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웅변하다못해 타인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한다. 가령 며칠 전 나에게 부모님과 가족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그들은 그들 나라에서 살고 있어. 라고 대답했더니 나에게 이기적 (selfish) 이라고 말한다. 말인즉슨 나 혼자 살기 좋은 나라에 왔다는 거다. 그이는 처자식 형제자매 부모조부모를 모두 이끌고 이민왔다. 개인은 각자 자기 가치가 있고 자기가 살고 싶은 나라가 있어 (every single person has their own value, and has their own loved country would like to live). 무슨 말인지 이해를 했다면 다행이고 이해하지 못해도 내 비즈니스는 아니다. 

 

한국 태생의 이민자께서 나에게 먹을 것을 권하고 사적인 질문과 제안, 참된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야 한다고 설파하는 것은 그이가 나에게 "선한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한국적인 정(情)을 나누려는 의도 때문이지 나를 만만히 보거나 나를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 그 점은 잘 알고 있다. 

 

인도 태생의 남성이 나에게 과도한 친밀감을 표현하고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살기 좋은 이 나라로 이민오라고 종용하는 것은 자기가 경험한 장점을 나와 나누고 싶어서 그러는 "선한 의도" 때문이지 혼자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 동아시안 여자를 어떻게 찝쩍거려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이 아니라는 점. 그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두 사람의 "선한 의도"는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퍼스널스페이스는 다만 물리적인 거리만이 아니다. 한국인 아줌마는 심리적인 경계, 정서적인 경계를 함부로 훼손하고 내 영역을 침범했다. 그 결과 나는 그녀와 언제나 12피트 (3.6미터) 이상의 거리를 두고 싶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도 아저씨는 물리적인 것에 더해 심리적, 정서적 경계마저도 훼손해버렸다. 나는 그이와 어지간하면 마주치고 싶지도 않다. 할 수만 있다면 언제나 12피트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 일터에서 만나지만 않았다면 가령 예전에 한국에서 만났던 숱한 "아저씨"들처럼 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나는 두 사람과 어쩔 수 없이 '동료'로 지내야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어 견뎌야 하는 그런 사람. 

 

 

2015/02/25 01:50 2015/02/25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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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죽음

분류없음 2015/02/24 08:37

*본의 아니게 죽음을 연달아 포스팅*

 

옆집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평소에 휠체어와 스트롤러에 의지해 움직이시던 장애인이셨고 항상 기저귀를 입고 계시는지 할머니를 만나면 대개 소변냄새가 났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도 잘 듣지 못하셔서 '개무시'당하는 적이 많았다. 처음엔 동양인을 싫어하는 인종차별주의자인가 오해도 했다. 문을 열어드리면 괜찮다고 당신이 하겠다고 하시는 등 자존심이 강하셨다. 그 분이 앞에 계시면 일부러 한참을 기다렸다. 아파트 포치에서 종종 (대중교통서비스센터에서 제공하는) 휠체어버스를 기다리고 계실 때가 많았는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때가 더 많았다. 호딩 (hoarding) 이슈도 있으신지 밖에서 물건을 갖고 당신의 아파트에 차곡차곡 쌓아 아파트 매니저의 애를 먹이는 일도 왕왕 있었다. 아파트 건물에 불이 나기 전에는 낮은 층에 사셨는데 대피하고 돌아와보니 옆집으로 이사를 오셔서 뜨악. 왜 저런 노인분을 고층에 사시도록 하는지 모르겠어요. 짝과 함께 그런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토요일 출근길에 할머니 집에서 텔레비젼 소리가 나길래 아, 댁에 계시는구나. 의당 그러려니 했다. 할머니는 늘 텔레비젼을 아주 크게 해놓으셨다. 아무래도 청력이 약하셔서 그러셨을 것이다. 오늘 아침, 아파트 매니저가 룸메에게 물어봤다고, 할머니가 이틀동안 안 보이는데 본 적 있니, 전화도 안 받으시네. 룸메와 나는 할머니를 직접 대면한 지 한참 되었다. 그리고 매니저가 올라와 할머니 집 문을 열었다. 돌아가셨다. 

 

매니저는 911에 전화. 응급구조반과 경찰, 검시관이 순서대로 왔다. 아파트 유닛은 봉쇄됐고 나는 경찰과 짧은 인터뷰를 했다. 상황 종료. 

 

 

전형적인 노인 고독사, kodokushi. 짧은 죄책감을 느끼기도 전에 우울함이 엄습한다. 할머니는 아파트 건물에 불이 나 커뮤니티센터로 대피했을 때에도 이 도시 어느 곳으로도 가실 곳이 없던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었다. 다만 백인이고 캐나다 시민권이 있고 노인에게 주는 서비스와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정도. 그러나 할머니는 늘 혼자셨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을 어떻게 지킬 수 있나. 과연 인간은 존엄하기는 한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마지막 순간에 할머니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지금까지 살아내느나 애쓰셨어요.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할머니의 명복을 빌어드릴께요.  

 

쓸쓸하고 우울한. 어떻게 버텨야 하나 하루종일 안절부절하다가 이렇게 포스팅으로 마감한다.

 

2015/02/24 08:37 2015/02/2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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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죽음

분류없음 2015/02/21 07:31

너무 춥다. 연일 -20도에 육박하는 날씨. 윈칠(wind-chil)이라고 실제 사람이 느끼는 추위온도로 계산하면 -30 아래로 떨어진다. 이 날씨에 어제 아침, -한국시간으로는 설날이려나- 세 살짜리 꼬마아이가 바이탈사인을 잃은 채로 발견되었다. 꼬마는 새벽 4시 30분 아파트를 빠져나가는 게 CCTV에 찍혔다. 그게 그 아이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모습이다. 꼬마는 티셔츠와 풀업기저귀, 부츠를 입고 있었다. 조모와 이모 혹은 고모들과 살았던 이 아이는 왜, 그리고 어떻게 세 살짜리로서는 열기 힘든 아파트 문을 열고 그 시간에 걸어나갔을까. 

무엇을 찾아 나갔던 걸까. 

 

그리고 오늘 오후 또 다른 아이가 발견되었다. 다행히 다친 곳도 아픈 곳도 없이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며칠 전 홈리스 두 사람이 연달아 길거리에서 얼어 죽고 그이들을 추모하는 행사에 다녀오면서 마음이 무척 아프고 쓸쓸했다. 

 

그리고 지난 발렌타인데이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버스가 우회를 하는 도중 바라본 장면. 수도가 터져 꽝꽝 얼어붙은 교차로. 미처 해를 피하지 못한 차, 주차해놓은 차의 반이 얼음으로 덮였다. 얼음 속에 차가 들어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영화 더 데이 에프터 투모로우 (The Day After Tomorrow) 가 떠올랐다. 무서웠다. 

 

죽은 아이와 거리에서 명을 달리한 사람들에게 애도를. 

 

2015/02/21 07:31 2015/02/21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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