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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에 바리케이트를 치지말라! -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와 ‘희망버스’ 논쟁에 대해

정리해고 철폐, ‘누가 생산을 조직하고 통제할 것인가’로 나가야

-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와 ‘희망버스’ 논쟁에 대해

 

8월18일, 한진중공업 국회 청문회가 끝났다.

여야 의원들의 맹공에도 조남호 회장은 주어진 각본에 따라 ‘정리해고 철회 불가’ 입장을 완강하게 고수했다. 예상했지만 조남호 회장 개인의 반성과 선의, 그리고 노사자율 협상으로 정리해고가 철회될 것이라고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피도 눈물도 없는 시장경제주의자의 면모”가 드러났다며 분개하는 일부 정치인들은 정기국회에서의 국정조사 추진을 벼르고 있다.

 

그들이 과연 ‘무분별한’ 정리해고만을, 조남호‘만’을 문제삼는 것을 뛰어넘어 ‘정리해고제(법)’ 자체를 철폐할 수 있을 지, 그럴 의지조차 있을 지, 그래서 ‘잔인한 자본주의’를 ‘따뜻한 자본주의’로 바꿔낼 수 있을 지는 더 두고 보아야겠지만, 정리해고 문제가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라는 점이 정치화된 것은 진전이다.

그래, 문제는 자본주의다!

 

 

희망버스에 바리케이트를 치지말라!

 

‘정리해고 철회’의 문제는 다시 희망버스로 넘어왔다.

그간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를 개별사업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로 정치의 문제로 쟁점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연대와 저항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정리해고’가 사회 전체의 문제로 쟁점화되는 순간, 희망버스의 진전을 가로막는 또 다른 바리케이트가 등장했다.

진보연 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불편한 진실’(김기원), ‘진보의 재앙’(김대호)이라며 희망버스식의 운동 방식, ‘정리해고 없는 세상’이라는 구호와 운동방향에 대해 전면적으로 문제제기 했고, 일부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논쟁은 확산됐다.

 

사실 이런 논쟁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과거 ‘노동운동 위기 논쟁’에서도 항상 등장했던 논쟁이었다.

온갖 사실(팩트)과 논리를 동원하지만 논지의 결론, 공격의 목표는 ‘전투적’ 민주노조운동, 자본주의를 뛰어넘고자 하는 운동이념과 노선이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둘러 싼 논쟁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진중공업이 경영상의 위기인가?’, ‘해고 회피를 위한 노력했나?’에 대한 사실관계를 둘러싼 논란에서 시작돼 ‘조선산업의 국제 경쟁력’, ‘해외로의 공장이전 혹은 해외 투자’ 문제, ‘재벌총수의 사회적 책임의 문제’ 등으로, 나아가 ‘정치인이 희망버스를 타야 하느냐’의 문제로까지 논쟁은 번졌다.

 

그들의 주장한다.

“‘정리해고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한 사회주의적 주장이며 따라서 현실성이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내에서 ‘현실적’ 해법을 찾아야 하는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자본주의국가는 없다.”

이런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의식에 바탕하여 현실 가능한 정책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불편’하지만 이것은 현실이고, 따라서 ‘정리해고 철회’같이 진보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는 목표와 구호를 포기하고 ‘조직적으로 후퇴’해야 한다”고.

 

이들 기회주의적 이론가들의 주장 가운데 ‘정리해고’가 자본주의 그 자체의 문제라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들의 이론과 정책은 딱 거기에서 멈춘다.

그들은 ‘현실’이라는 잣대로 희망버스의 상상력과 동력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것에 바리케이트를 치려고 한다.

그 ‘현실’이란 “기업도, 노동도 다 시장 원리 속에 몸을 깊숙이 담그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정리해고 안하는 자본주의국가가 없다’는 것이다.

희망버스가 IMF 외환위기 이후 지난 십수 년간 강요됐던 이런 자본주의의 현실, 자본의 시장 논리를 뛰어넘기 위한 저항이자 연대인데, ‘불편’하고 ‘재앙’이라니?

 

물론 ‘자본주의’를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현실’만을 현실로서 받아들이는 이론가들은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내세운 희망버스가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전망을 자본주의 내로 가두려는 순간, 시장 논리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 재벌 자본가들의 선의에 기대며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또한 생산과정에서 구조조정이 불가피 하며, “구조조정의 충격을 기업, 국가, 노동이 적절히 분담하도록 하는 것”이 진보진영의 조직적 후퇴의 핵심이라는 그들의 주장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지 못한 주장이다.

바로 IMF 외환위기 이후 십수 년간 고통분담의 논리에 의해 고통이 노동자들에게만 전담되어 왔다는 현실에 대해 왜 그들은 눈을 감을까?

왜 이에 대한 저항을 ‘재앙’이라고 할까?

차라리 ‘진보의 재앙’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두려움’이라고 얘기하면 솔직하기라도 하지.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평범한 시민들의 시각과 과학(현실)의 시각”이라고?

그러길 바라는 자본가들의 염원이겠지.

그 염원이 어쩔 수 없이 평범한 시민들에게 투영된 것이겠지.

 

그들은 생산과정에서의 문제(구조조정, 정리해고 등)는 자본주의적 현실이기 때문에 모두 받아들이고, 분배의 영역에서만 실업수당, 재취업 지원, 공동부조기금 등의 정책적 대안에 힘을 쏟을 것을 강변한다.

왜 생산영역과 분배 영역 모두에서 근본적인 해법을 찾는 것이 제약되어야 하는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문제가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라고 하면 자본주의 자체를 뛰어넘기 위한 모색이 이루어져야 하지, 왜 미리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포기되어야 하는가?

그 현실의 실천적 재구성은 왜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방향에서 재구성될 수 없는가?

 

그들이 얘기하는 정책적 대안(사회복지) 역시도 희망버스의 결과, 그 힘의 결과로서만 현실화될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둘 중 하나다.

솔직하게 자본가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하든지, 입을 닥치고 있든지.

희망버스의 진전을 가로막는 것은 경찰의 바리케이트만이 아니다.

이런 진보의 탈을 쓴 지식인들도 이데올로기적 바리케이트를 친다.

희망버스가 없었다면 한진중공업의 ‘현실’은 정리해고 자체가 문제되는 지금의 현실로 바뀔 수 있었을까?

희망버스로 정리해고제가 정치화된 것에 편승하면서, 한편으로 진보연 하며 희망버스의 정치적 진전을 가로막는, 자본주의만이 현실이고 그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게 하는 이런 바리케이트는 하루바삐 걷어치워야 한다.

 

 

‘정리해고 철회’에서 ‘정리해고제 철폐’로!

 

희망버스는 바리케이트를 걷어 치우고 더 나아가야 한다.

물론 당장의 과제는 한진중공업에서 정리해고를 철회하도록 하여, 김진숙 위원이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다.

개별사업장의 자율적 노사협상으로 그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외부세력의 개입으로 경영 활동이 힘들어진다"고 조남호 회장이 얘기했는데, 노동자 민중, 시민 모두가 외부세력이 되고, ‘정리해고 철회’가 ‘정리해고제(법) 철폐’로 진전될 때, 이 문제는 우리 모두의 ‘내부의 문제’가 되고, 우리 모두는 내부세력이 된다.

그래야 김진숙 위원이 안전하게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게 된다.

 

정리해고의 문제를 정치와 분리시키려는 시도도 넘어서야 한다.

1990년대 중반에 정리해고제를 도입한 것이 바로 ‘정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리해고제(법)’를 그대로 둔 채 무분별한 정리해고 남발‘만’을 규제하려는 정치 역시 우리는 넘어서야 한다.

희망버스는 ‘정리해고 철회’에서 ‘정리해고제 철폐’로 더 나아가야 한다.

2008년 이후 세계대공황의 진전은, 즉 자본주의의 현실은 다시 자본가들로 하여금 긴급한 경영상의 위기를 빌미로 다시 노동자들을 정리해고로 내몰 것이다.

‘법’과 ‘제도’만으로 이런 현실에 맞설 수는 없지만, 미리 법적 제도적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

 

정리해고제는 IMF 외환위기 이후, 민주노조진영에서 불철저 하게 대응한 결과 - 바로 앞의 이론가들 같은 주장을 민주노조진영이 받아들인 결과, 그런 불철저한 대응을 낳게 했다. - 그간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민주노조를 약화시켜 왔다.

노동자를 산자와 죽은 자로 가르고, 노동의제를 ‘일자리 보존과 창출’로만 갇히게 만들었고, 그 결과 끊임없이 민주노조운동을 위축시켰다.

이제 이 희망버스에 조직노동자들이 대거 탑승해야 한다.

‘정리해고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구호로 노동자를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시켜야 한다.

 

또한 정리해고 문제는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비정규직의 양산과 맞물려 있다.

희망버스는 더 채워져야 한다.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함께 타야 한다.

정리해고, 노동유연화라는 자본의 축적 전략을 그대로 둔 채, 그들의 선의에 기대어 혹은 분배과정에서의 사회복지 등의 문제로 제한되서는 안된다.

 

 

희망버스, '누가 생산을 조직하고 통제할 것인가'로 나아가야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탑승한 희망버스는 자신의 요구와 목표를 분배의 문제에 한정시킬 필요가 없다.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탑승한 희망버스는 분배 영역에서 생산 영역의 문제로, 누가 생산을 조직하고 통제할 것인가의 문제로 더 나아가야 한다.

이제 투자나 해외 이전 등에 대한 결정, 노동력의 재배치 등을 노동자들 스스로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전망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생산수단을 소수의 자본가가 독점하고, 그들만이 경영하는 체제를 뜯어고쳐야 한다. 세상을 뒤집어서라도 모든 노동자민중들이 함께 살 수 있다면 차라리 그렇게 하자. 그 때 ‘정리해고 없는 세상’이 가능하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면.

 

그게 사회주의라고? 그렇다면 사회주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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