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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먼곳에'

김추자 노래가 많이 나온대서 보고 싶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의 얘기가 제각각이었다.

김용택시인은 좋다고 하고 젊은 사람들은 별로라 얘기했다.

영화를 보고 난 내 의견은? 좋았다!

영화는 주인공 순이(수애 분)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남편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60년대 말 70년대 초 한국의 부끄러운 과거, 즉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자에 주목하는 경우 영화는 어색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고 후자에 주목하는 경우는 전자는 후자를 위한 장치일 뿐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 같다. 위문공연단은 당연히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이야기하기 위한 매개다. 난 이준익 감독이 한국인의 일원으로서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자기비판을 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연배로 보아 이준익 감독이 전혀 책임질 사건은 아니지만.

다음은 영화에서 그려지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들이다.

'돈벌기 위해'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베트콩에 의해 발설된다), 그러면서도 전쟁의 목적을 미국이 읊어준대로 '평화'라고 읍조리는 한국민. 아, 창피하다!!

전쟁에 사람의 희생이 없을 수 없다. 전쟁은 전쟁중 지하 땅굴에서도 아이들을 교육하는 베트남 민중들을 죽이고, (사고치고 월남에 파병된) 한국의 군인들도 죽인다. 돈벌기 위해 이런 짓을 하다니! 용납하기 힘든 부끄러운 과거임에 틀림이 없다. 박정희는 그만큼 반주변 한국의 처지가 처절했다 변명하겠지.

물론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 '평화' 따위엔 관심이 있을 리 없다. 당연히도 자신의 생존("돌아갈 수 있는 거냐 뭐냐, 씨발!")이 가장 중요한 문제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의 불안 속에서 여성 위문공연단에 광적으로 열광한다.

공연단 비용으로 군수물자를 내주는 장교들과 전쟁중에도 돈벌이에 혈안인 공연단 단장도 있다. 공연단 단장은 심지어는 폭격으로 위문 공연이 중단되었고 여전히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팔기위해 군수물자를 빼낸다.

베트콩에 붙잡혀 있다가 미국군인들이 쳐들어 와 다시 베트콩과 함께 잡혀 있다가, 미국국가와 '오 대니보이'를 부르면서 사지에서 빠져 나오는 한국인 공연단들. 노래를 부르며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손들고 빠져나오는 정진영을 비롯한 공연단은 미국에 종속된 반주변 한국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상징하고 있었다(여기에서 정진영의 그 비굴연기는 압권이었다). 미군의 명령에 투덜거리면서도 그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는 한국군 장교, 그리고 결국 남편을 찾기 위해 미군장교에게 몸을 허락한 순이도 마찬가지다.

 

한편 군공연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순이가 미군장교에게 몸을 허락한 이후 공연단 일원이 라이타를 켜 태워버리는 에피소드는 모든 이야기를 다 할려는 이준익감독의 영화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왕의 남자'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았다. 여러 이야기가 있어서 풍부하긴 하지만 압축미는 떨어지는 느낌 같은 것이랄까...

 

수애가 부른 김추자의 노래들은 매우 좋았다.  이는 아이러니다.

나와 이준익감독을 포함한 우리세대는 80년대를 경과하면서 베트남전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어느정도는 획득하였다. 그런데도 베트남전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당시의 노래들(예를 들면 '월남에서 돌아온 쌔까만 김상사')을 흥얼거린다. 그 형식이나 내용이 제국주의적 미국 대중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노래들이 여전히 좋은 것이다. 

김추자 노래를 부르는 수애와 그 노래에 열광하는 군인들은 베트남전 참전의 공범자이자 피해자들이고, 베트남전 참전 비판 영화에 베트남전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김추자노래를 이 영화의 주요 모티로 삼은 이준익 감독과 영화를 보고 영화속 노래를 흥얼거리는 나는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사람들인 것이다.

문제는 머리가 아니라 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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