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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에스루이스의 시편사색
시편사색 총신대학교출판부, 1992 |
오늘은 언제 구입한 책인지는 모르는 책을 골랐습니다. 집에서 한참을 뒹굴던 책인데 이걸 고른 이유는 오직 시간이 없다는 이유 하나.
사실 처음 골랐던 책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었는데 읽다가 포기하고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건성건성 읽어도 하루에 읽기에는 무리.
루이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시간 관계상 그까이꺼 대충 대충 읽어 버리기 위해 눈에 띄는 얇은 책을 들고서 부리나케 읽었습니다. C·S·LEWIS 가 쓰고 김성우가 옮긴 책인데 1994년 3월 1판 2쇄 발행된 책입니다.
역자인 김정우는 서문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우리가 많은 경건서적을 읽는 것 보다 몇 권의 기독교 고전을 일평생 읽으라고 권면하였다고 한다.(3)
김정우의 서문에서의 인용내용과 현재 내 글 읽기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나서 뭐라 할 말은 없습니다. 단지, 나는 그냥 편하게 글을 읽고 그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내 자신을 위로합니다. 하하하
그런데 찾아보니 더 이상 출판을 안하네요. 판권이 넘어 간건가?
마치 용서가 쉬운 것처럼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너는 담배를 한번 끊었냐? 나는 열두 번도 더 끊었다”는 옛 농담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똑 같은 식으로 나도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즉 “그날 그가 나에게 저지른 짓을 용서했나?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용서했다”. 사실 용서는 하고 또 해야 한다. 우리가 용서하면 우리의 분노도 사라진다. 그러나 얼마 후, 처음 받은 상처를 다시 생각하게 되면 분노가 다시 불일 듯 일어난다. 그동안 전혀 용서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분노가 타오른다. 우리는 우리 형제가 우리에게 490번 지은 죄 때문에 70번씩 7번 용서해야 할 뿐 아니라, 단 한번 지은 죄도 그렇게 해야 한다. 따라서 이미 많은 시험을 받고 있는 그 피해자는 이미 악마에 의해 많은 시험을 당하고 있는 중에 또 새롭고 어려운 시험을 받게 된다. 남이 나에게 상처를 주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물론 나는 권력이 없으므로 남을 억압하거나 괴롭힐 기회가 적었다는 것을 특별한 은총으로 생각한다. 학급의 반장이나 하사관, 교정관, 간호부장, 간수, 혹은 시장을 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 점을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32)
도덕적 우주에는 “높이 올라 갈수록 더 큰 위험이 있다”(the higher, the more in danger)는 일반 법칙이 있다. 가끔 부인에게 불성실하며, 술을 먹고 약간 이기적이며(법 안에서) 사소한 사기도 치는 “이런 감각적인 사람”은 확실히 큰 뜻을 가지고 자기의 유익이나 행복, 자신의 안전까지도 불사하고 사는 사람 보다 더 천한 사람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인간상으로부터 매서운 재판관이나 잔인한 정보부원과 같은 유형의 사람이 나온다. 소인배가 아니라 위인이나 성자가 될 잠재력을 가진 인간이 무자비한 광신자가 된다.(35)
“천국”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며 “지옥”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라는 의미가 끝나는 순간, 천국과 지옥에 대한 신앙은 둘 중 어느 것이든지 간에 아주 해로운 미신이 된다.(47)
주님 자신의 가르침은 불완전하지 않지만, 우리가 기대하고 선호하는 것처럼 빈틈없고, 틀림없으며, 체계적인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지 않았다. 그는 책을 쓴 적이 없다. 우리는 그가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남긴 것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122)
초대교회 신자들은 현대 학자들이 현대인에게 말하는 것 보다, 주님 말씀의 정신과 문자에 훨씬 더 가까이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정신(spirit)과 문자(letter)에 대해 말하는 것은 헛될지 모른다. 사실 주님의 말씀에는 “문자”(letter)는 거의 없었다. 문자주의자들에 따르면 주님은 가장 교묘한 선생이었다. 섬광과 같은 조명을 체계에 담을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 보다 넓지 않은 그 어떤 그물로도, 사랑 보다 더 조밀하지 않은 그 어떤 망사로도 그 거룩한 고기(the sacred Fish, 그리스도의 상징)를 담을 수 없다.(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