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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한판

 

 

1.

지난달,

코스콤 비정규지부 단식농성투쟁 하루연대하러(릴레이 단식농성) 망루에 올라 한나절을 보낼 때였다.

 

 

"젤루 큰 어려움이 뭐예요?"

 

한평 남짓한 망루에는 굶은지 아흐레되는 부지부장과 나, 그리고 조합원한분(편의상 '아스테릭스'라고 하겠음^^) 이렇게 세명이 있었는데,

아스테릭스 동지한테 나는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어떻게 조합엔 가입하게 되었느냐, 가입해보니 어떠느냐, 등등...

매우 상투적인^^; 그러나 언제나 궁금했던^^;; 점들.

그러다가, 힘든게 뭐냐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덩치 큰 아스테릭스 동지...한숨을 가만히 내쉬면서 이렇게 말문을 연다.

 

"이제 두달 후면 계란 한 판인데..."

 

오오~~~~~~~~!!!!

알고보니 동갑~!!!

 

반가움에 놀라움을 표했더니,

아스테릭스 동지 또다시 한숨을 가만히 내쉬더니 이런다.

 

"제가...좀 나이가 많이 들어보이죠..."

 

^^;; 겉모습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내가 놀란거로 생각한 것이었다ㅎㅎㅎ;;;

암튼, 아스테릭스 동지는

계란한판이 되면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일텐데, 파업투쟁이 그때까지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있다고 하였다. 물론 계란한판을 훨씬 넘어 40대 50대 조합원도 있으니, 그런 고민은 크게 내색은 못하지만서도 말이다.

 

 

끝을 바라보면서 하는 싸움은 아닐테니, 끝에 연연해하지는 말자고

또 언제 끝이 오겠느냐 싶을 때, 문득 끝이 오기도 하는 거 아니냐고

힘내자고

나는 그런 말로 응답했다. 역시나 매우 상투적인;; 그러나 진실일 수밖에 없는...

 

 

 

 

 

2.

오늘은,

12월의 첫 날이자 올해를 꼭 한달 남겨둔 날이다.

 

 

요즘 나는 새로운 한 가지를 깨닫는 중이다.

평생 노동자로 일하면서 지루하고 무력한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런 것인가를.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두려운 게 뭔지 아나? 겉보기에 무의미하고 무미건조한 것처럼 보이는 일상적 삶을 견디는 것이다.

매일 매일의 밥을 위해 노동 속에 숨죽이며 사는 것이야말로 질기면서도 강하게 인간을 단련시켜주는 모루인 셈이다.

한 순간 불꽃처럼 타다가 사라지는 불나비 같은 인생, 나 역시 이런 신기루 같은 꿈을 꾸고 살았던 때가 있었지.

그러나 이제는 신기루가 아닌 진짜 현실이란 꿈을 꾸면서 살고 싶다.

불타오르는 열정이 식은 다음에서야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듯이

새로움을 향한 호기심과 열정이 식은 다음에서야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고 하지 않더냐?

일상적 삶이 그런 거라면 이제야말로 평생이 걸릴지 모르는 긴 기다림의 출발지점에 선 셈이라고 볼 수 있겠지.

 

 

집회에 다녀와서, 읽던 소설책을 펼쳐들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퍽이나 방황하던 주인공이 마음을 다잡고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편지속의 이야기는, 마치 날더러 들으라고 쓰여진 것만 같았다.

 

불나비 같은 인생일 줄 알았는데...

한몸 불사를 마음은 진즉 갖추어놓았는데...

 

그러나 막상 현실은,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너무나 지리멸렬하고 또한, 구차했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하려면

내가 먼저 자리를 잡아놓아야 할 터,

열심히 살아서 자리를 잡겠노라고 다짐했는데...

 

그러나 막상 나는,

계속 미끄러지는 듯 했고 헤매이고 맴돌고만 있는 듯 했다.

 

 

이게 아닌데...아닌거 같은데...

뭔가 제대로 되어가지 않는다는 느낌에 사실 퍽이나 괴로웠다.

 

그러나 서른을 코 앞에 두고서야

이제야말로 시작,인 것이로구나ㅡ깨닫게 되고 있다.

비로소 시작이니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자괴감 따위 부질없는 것이겠구나ㅡ여유있을 수 있게 되고 있다.

 

마음이 평온하다.

서른이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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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듯, 선연한 빛

 

 

1.

 

학교에 갈 일이 생겼다.

많은 것이 변했다 하더라도, 가을이 되면 붉고 노랗게 물드는 교정만은 그대로여서ㅡ 반가웠다.

 

삼거리 즈음에 이르러서일까.

 

불타는 듯, 선연한 빛에 잠시 넋을 놓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들고 있던 목도리가 온데간데 없다.

 

아무리 주위를 휘휘 둘러봐도

없다. 사라졌다.

 

불타는 듯, 선연한 빛을 뵈 준 대신

그 잎을 떨군 나무가 가져가버렸나 보다ㅡ생각하기로 했다.

 

 

 

 

 

2.

 

오늘은 故정해진 열사의 영결식이 있는 날이었다.

열사의 한이 아직 채 풀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보내...

어떻게 묻어...

 

그렇게 보내지도 못하고 묻지도 못한 열사가 몇이던가...

 

대신 나는 코스콤 비정규직 지부 출근투쟁에 결합하기로 했다.

오늘로 단식농성 17일째가 되는 부지부장 동지도 뵐 겸...

 

망루에 올라가 몇마디 인사를 나누고 그러는데

부쩍 수척해진 동지의 바싹 마른 입 안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농성장 바깥으로 보이는 단풍이 너무 곱다고.

 

짙은 안개 때문인지,

오늘따라 농성장 옆 단풍이 더욱 불타는 듯, 선연한 빛이긴 하더라.

 

그런데 내 눈엔

그 단풍말고도 눈에 들어오는게 있었다.

 

"동지여, 사랑한다"

망루에서 내려와 가까이에서 보다보니

나뭇가지에 묶인 색색의 천쪼가리에 매직으로 쓰인 글씨들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게 너무 곱고 아름답더라...

 

 

 

 

3.

 

몇해전 하루걸러 하루꼴로 열사가 나던 그때, 그때에도 불타는 듯 선연한 빛의 가을 나무 색이 너무나도 고왔는데

 

그땐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감정조차 사치로 여겨지고

미안하고, 죄스럽고,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ㅡ

먼저 가신 열사들의 몫까지 더해서

아름다운 건 아름답다고 느끼고

고운건 곱다고 느끼면서

그렇게 더욱 생기있게, 살아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그렇다.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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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의문점들, 그리고...

 

 

 

열사에 대한 예의란?

 

 

열사가 결국 운명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길 잠시, 

조합원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짐승의 그것마냥 내질러지는 외마디 비명이 아프게, 검은 밤하늘을 맴돌았다.

 

그리고 지도부는 열사의 시신이 있는 서울로 올라가기로 방침이 정해졌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그 말은 곧

 

열사가 몸에 불이 타오르던 그 순간 외쳤던 "임단협 꼭 승리해야 합니다"의 바로 그 임단투 현장을 버려두고, 거점을 사수하지 못하고, '해산'한다는 것, '퇴각'한다는 것에 다름아니었고.

 

조합원들은 그 방침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거센 반발이 여기저기서 분출했다.

 

그러자 지도부는

"동지들! 지침에 따라주십시오!"

라는 '명령'을 반복했고

 

더불어서, 지침에 따르지 않는 것은 열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식으로 조합원들을 몰아갔다.

 

그러나 나는 의아해졌다.

 

열사에 대한 예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열사의 뜻을 받든다는 것이 아닌가?

 

비록 열사의 육신은 서울의 병원에 있지만,

바로 열사의 뜻은 인천의 임단투 현장에 있는 것 아니었던가?

 

열사가 온몸을 불사질러 확보해낸 거점을 결연히 사수하고 반드시 임단투를 승리하는 것,

그리고 인천지역 건설노조 전기원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국의 비정규직 투쟁으로 상승시켜내는 것,

그것이 바로 열사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거점을 사수할 그 어떤 입장과 계획도 밝히지 않고

열사가 분신하신 이후로 종일 현장을 사수하다가 연행된 조합원들의 석방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도 밝히지 않고

서울로 가야하는 명분에 대한 토론과 설득은 커녕 그 어떤 설명도 없이

그대로 자리를 떠나자고 하는 명령,

그것이 어떻게 열사에 대한 예의가 될 수 있는지?

 

 

 

 

 

2003년과 2007년. 무엇이 달라진건가?

 

 

2003년 10월 26일, 이용석 열사는 비정규노동자 대회 중 분신을 하셨고

그 불꽃은 결국 근로복지공단 비정규투쟁의 승리를 넘어서 전체 비정규투쟁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당시 종묘공원에서 집회를 하던 대오는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마냥 일시에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거리 곳곳에서 이 치떨리는 현실을 알려냈고, 근로복지공단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2007년 10월 27일, 또 한분의 열사가 비정규노동자 대회가 치루어지던 날 분신을 하셨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 대회 및 문화제는 예정대로, 일정에 차질이 없이, 내용과 기조에도 그닥 변화가 없이, 그 대 로 그 자리에서 진행이 되었다.(물론 '결국 열사가 운명하시자' 문화제는 중단되고 병원으로 대오가 이동하기는 하였지만.(만약 운명하시지 않았더라면 계속 그대로 진행이 되었을텐데-!))

열사의 분신 소식은, 마치 단신뉴스처럼, 집회 중간에 보고되었을 뿐이다.

 

2003년과 2007년, 무엇이 달라진건가?

무엇이 달라졌길래 우리의 태도는 이토록 달라진건가?

 

 

 

 

 

 

비정규투쟁을 '사수'한다는 것?

 

 

집회가 끝나고 문화제가 시작되려는 때에

저녁식사를 하러, 혹은 다른 일정으로 적지 않은 대오가 이탈되었고

그러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여의도 전체에 울려퍼졌다.

 

"동지들!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불만많으시죠? 그래도 자리를 사수해주십시오!"

 

그 말은 아무래도 인천을 가야하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이동중이던 우리의 뒷통수에도 와서 꽂혔다.

문화제를 그 자리에서 보지 않고 열사가 분신하신 그 현장, 전기원 비정규직 동지들이 연행을 불사하면서 사수 중인 그 현장으로 이동 중이었던 우리는 그렇게  '불만세력'이었던가?

의문이다.

 

대체 비정규투쟁의 '사수'란 무엇인지?

의문이다.

 

 

 

 

 

 

비정규열사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누구의 몫인가?

 

 

그렇게 인천으로 향해서 밤을 새고, 아침에 서울로 올라와서 병원 앞에서 집회를 하고,

그리고 나는 다른 동료들과 헤어져, 반전집회로 향했다.

몹시도 피곤했지만, 반전집회도 비정규직투쟁 못지 않게 중요하기에,

그리고 집회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어제오늘의 일들을 알리기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러나ㅡ

반전집회 내내 극심한 혼란과 의아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열사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는 반전집회라니!!

 

 

집회가 시작되기 전, 파병반대 국민행동의 한 동지에게,

비정규열사가 어제 분신하셨고 결국 운명하셨음을 사회자가 알리도록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노무현이가 밖으로는 이라크 민중을 죽이고 있고 안으로는 이처럼 노동자민중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려야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이는 당연히 그래야지, 라고 했다.

 

그러나 집회가 한참 진행되어도 영 기미가 없어서 다시 확인을 했더니

좀 그렇다, 라는 것이다.

 

뭐가 '좀 그렇다'라는 것인지?

 

 

 

결국 비정규열사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비정규직들만의 몫인건가?

반전평화가 결국 노동자민중의 손으로 달성되는 것이라 했을때, 거기에 비정규직의 자리는 없는가?

 

 

 

 

 

 

 

 

 

그리고....

 

그러나 답은 결국 바로 그 순간, 그 장소, 그이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다.

 

 

열사가 분신하신 그 자리에서 모두 해산하라는 방침을 따를 수 없었던 전기원분과 조합원들은

결국 그 자리에 남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왜 남은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한 조합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발언을 했다.

 

"22900볼트라는 고압전선 사이에 들어가 작업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전류에 감전되어 몸에 불붙은 동료들을 전선 사이에서 꺼내어, 밧줄로 묶어 끌어내리는 일은 부지기수로 겪어 봤지만,

그러나 제 스스로 몸에 불붙인 모습은, 저 처음 봤습니다.

이 자리, 사수합시다.

동지의 유언을 꼭, 지킵시다."

 

열사를 바로 눈 앞에서 잃은 조합원들은

결국 그 누구보다도 열사의 뜻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열사의 뜻을 받아안는다는 것은 무언지, 에 대해

첫번째 의문에 대한 답을

바로 그 순간 그 장소 그이들을 통해 확인하다.

 

 

 

이제는

나머지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해나갈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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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날 새아침

 

사무실로 온 우편물 중에 연하장 하나가 삐죽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노동악법의 날치기 통과 속에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진흙탕 개 싸움에 여념이 없던 저들이 노동자 민중을 탄압하는데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오, 얻을 것은 세상이다."

삶의 현장에서, 투쟁의 현장에서 두고두고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한 해 동안 ㅇㅇㅇㅇㅇㅇㅇ ㅇㅇㅇㅇㅇㅇㅇ에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동지들께 감사드리며

새해에는 더욱 힘차게 싸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더욱 힘차게 살아야지. 아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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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모호하다

얼마전 술자리에서 앞에 앉은 이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현실의 한 순간에 대해 이야길 나누게 되었다.

 

 

*그는 03년 고려대 노천극장에서의 철도파업의 순간을 이야기했다.

 

비가 주륵주륵 내리던 그날 밤, 노천을 가득 메우고 있던 긴장감.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댔고, 찰칵찰칵 펑ㅡ펑ㅡ 사진기는 긴장이 가득한 대기를 가르고 컴컴한 어둠 속에 빛의 길을 만들어냈다. 그 길을 통해 보이던 빗줄기의 토막토막. 빗방울의 향연.

 

 

*나는 올해 3월 기륭공장앞에서의 순간을 이야기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대치상황, 급기야 기륭공장에서는 소화전을 관리실 옥상으로 끌어올리더니 우리들에게 물대포처럼 그것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정오에 가까워지자, 순간 우리 앞엔 무지개가 떴다. 햇살은 쨍쨍한데 물대포는 비처럼 머리위로 쏟아지고...어디선가 구해온 노란 우산아래 은미씨와 김소연분회장님은 환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무나도 환한 웃음을 해맑게 지으면서 물대포를 비처럼 맞고 계셨다.

 

 

*그리고 오늘 밤, 또한번의 그러한 순간을 만나다.

 

마지막 전철은 조용하게 한강을 건넜다. 전철창의 사각틀에 갇힌 캄캄한 어둠, 그 한 가운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있는 주인공처럼 플랑이 펄럭여대는 것이 보였다. 검은하늘과 검은강물의 한 가운데 솟아있는 한강대교, 그곳에서 펼쳐지는 연극의 한장면. 핀조명. 눈에보이지 않는 농성자들, 눈에보이지않는 전경들, 붙박힌듯 세워져있는 닭장차, 모두들 스톱모션, 오로지 플랑만 펄럭인다.....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현실의 한 순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이처럼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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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되돌아가지 않을.

미류님의 [결코 되돌아가지 않으리라] 에 관련된 글.

 

결코 되돌아갈 수도 없고

되돌아가지도 않을 텝니다. 우리들은.

이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찾았고 여성해방을 향해 함께 나아갈 텝니다.

 

 

 

 

*I'll Never Return

I'm the woman who has awoken
I've open doors of ignorance
I have said eternally
farewell to all golden bracelets

I'm the woman who has awoken
my nations wrath empowered me
burnt and ruined villages fill me with hatred against the enemy
no longer regard me as weak and incapable
with all my strength I'm on the path of my land's liberation

my voice has mingled with you
thousand of arisen women
my fists are clenched with you
the fists thousand compatriots my nation

oh! compatriot
no more I'm not what I was before
oh! compatriot
I've found my path and will never,
never return never return before


나는 깨어난 여성이다
나는 무지의 문을 열었고
나는 황금빛 팔찌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하였다


나는 깨어난 여성이다
분노가 내게 힘을 주었고
불타버린 마을들이 적을 향한 증오로 나를 채웠다
나를 더이상 약하다 힘없다 말아라
나 온 힘 다해 이 땅의 자유의 길 걸으니

나의 목소리는 여기 그대들과 하나요
나의 이 주먹도 그대들과 함께 쥐어져 있네

오! 형제여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니
오! 형제여 나는 내 길을 찾았고 결코 되돌아가지 않으리라

 

 

 



♪ 안혜경3집 13. I'll Never Return ♪



♪ 안혜경3집 11. 결코 되돌아가지 않으리 ♪

 

 


I'll Never Return은 아프간 여성 Meena의 시예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교육권과 노동권으로부터의 배제는 물론이고, 일상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하는 아프가스니탄 여성들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1977년에 결성된 'RAWA(아프간 여성 혁명 연합, The Revolutionary Association of the Women of Afghanistan)'의 초기 지도자, Meena.

1956년 카불에서 태어나 1987년 KGB의 아프가니스탄 조직인 'KHAD'의 조직원에 의해 암살당하기까지 Meena는, 탈레반 정권이 구조화시켜놓은 여성 억압적인 체제를 뒤엎기 위해 RAWA를 조직하고 이끄는 데 생을 다 바쳤다고 합니다.

 

 

 

그녀의 시에 안혜경(여성노동 관련해서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노래 ♬일이 필요해, 의 바로 그 안혜경^^)이 노래를 붙여 비로소 우리도 Meena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게 된 건데요,

 

우리말 가사가 붙여진 노래는 또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오~형제여~~'라는 부분에서 의아해했는데

1년의 텀을 두고 다시 노래를 듣게 되었을때 비로소 노래를 이해하고 감동하게 되었거든요.

 

그 이후로 힘들때마다 몇번이고 되뇌였는지 몰라요.

결코 되돌아가지 않으리라, 라고...

 

 

이 노래는 안혜경 언니의 3집 음반에 있어요

노래를 인터넷 등으로 접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음반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요

저도 38 여성의 날 문화제때 음반을 구했던거라..

(안혜경 언니 홈페이지를 통해서 음반을 구할 수 있을 꺼예요.

홈피 주소는 http://femimusic.co.kr )

 

 

요기다가는 파일을 직접 올릴 수가 없어서

(블로그에서는 왜 파일을 올릴 수 없는지 불만이예요 -_-)

 

공동체를 뚝딱 만들어서 거기다 파일 올리고 링크를 걸었는데

제대로 연결이 될지 모르겠네요..;;;

 

암튼 이 노래로 지지의 마음을 전합니다.

힘내세요. 힘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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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농사짓고, 올해도 조개잡고, 올해도...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올해도 농사짓고, 올해도 조개잡고, 올해도 일을 하자!

 

 

 

"뭐해? 바빠?"


슬슬 하던 일 정리하고 집에가볼까나ㅡ하던 참에 전화가 걸려왔다. 평택 대추리 솔부엉이 도서관장 재연언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평화의 연날리기 행사 이후 또한참 만나지 못했던 언니이기에 퍽이나 반가운 전화였다. 그런데 어째 언니 목소리가 어둡다.

오늘 언니는 평택 평화의 땅 한평지키기 모금을 위해 정읍에 다녀왔다 한다. 그리고 내일은 고창을 간다한다. 평택을 지키는 인간방패가 되기 위해 대추리로 들어간 언니, 정말 온몸으로 평택을 지키고 있구나. 그런데 단지 몸이 지쳐 목소리가 어두운 건 아닌거 같다. 와락 언니가 보고싶고 걱정이 된다.


"언니, 나랑 술한잔 해요. 지금 갈께요."


평택에 가는 길은 꽤 멀다. 1호선으로 갈아탄 후 사무실에서 들고온 <작은 책>을 꺼내읽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짓게 만드는 이야기...고개를 끄덕끄덕 하게 만드는 이야기...그러다가 화들짝 놀라게 되었는데, 대학 후배녀석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이녀석, 카츄사에서 이런 괴로움이 있었더랬구나. 어찌되었든 故 효순이 미선이 투쟁을 우리는 함께 거쳐왔구나. 비록 있는 곳은 달랐지만. 그리고 지금도 있는 곳은 다르지만 이렇게 <작은 책>으로 만나는구나.


신기하고 반가워서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평택에 다 와있다. 평택역에서 대추리로 들어가는 밤길은 컴컴하고 조용하다. 후배가 쓴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한 생각을 좀더 해본다. 올해로 이라크 전쟁은 4년째 이어지고 있다. 부시,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라! 후배녀석은 부시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그래, 부시가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렸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말야, 부시만 정신을 차리면 팔루자에서의 학살은 멈추어질까? 평택을 난도질하는 짓거리는 멈추어질 수 있을까? 글쎄...그건 아닌 거 같다. 왜냐면 꼭 부시가 아니더라도 미국은 헤게모니 국가로서의 자리가 위태롭게 된 이상, 전쟁을 불사하며 그 위기를 모면하려 들테니 말이다. 골목대장 자리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문제인가? 물론 미국이 문제이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들의 문제라고만 할 수도 없다. 그 어떤 나라, 국민이라도 미국과 같이 골목대장 위치에 놓인다면 지금의 미국과 부시처럼 굴지 않으리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이 될 테다. 부시가 설령 정신을 차린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질서가 유지되는 한, 이라크 팔루자에서의 학살과 평택에서의 폭력은 중단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부시를 정신차리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위해 어떠한 새로운 길을 만들 것인지를 궁리해야할 것이다.


대추리에 도착하니 자정이 깜빡 넘어가고 있었다. 솔부엉이 도서관 근처에서 재연언니를 만 고요한 대추리 마을길을 자박자박 걸어서 언니가 사는 숙소로 들어갔다. 언니는 얼마전 포크레인이 황새울 들판을 헤집어 놓았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전경과 용역깡패들은 포크레인을 앞세우고 대추리로 들어와 사람들을 내몰려 했다고 한다. 포크레인이 땅을 파헤칠 때마다 언니의 마음도 함께 파헤쳐지는 것 같았다고, 언니는 내게 그날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듣는 나도 참으로 속상해진다. 에잇, 술이나 한잔 합시다. 언니와 술잔을 나누고 이번에는 내가 속상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오늘 사무실에서 덤프연대 조합원들을 만나고 온 동료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많이 안좋아졌더랬다. 새만금 대법원 판정 이후 물막이 공사가 재개되자, 덤프노동자들이 새만금 물막이 공사를 하러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류가에 트럭유지비에 이것저것 떼이고 나면 남는게 없어 허덕이고, 너희들이 개인사업자이지 무슨 노동자냐 노동조합은 꿈도 꾸지말라, 비난하는 세상의 질타에 부대끼고, 덤프노동자들은 살기가 너무 힘들다. 온몸이 부서져라 이리뛰고 저리뛰는 그네들이기에 새로 공사가 시작되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새만금이라니.

부안과 해창 앞바다의 갯벌은 오래전부터 그 지역 주민들의 일터였다. 특히 맨손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여성어민들에게 갯벌은 그 자체로 고맙디 고마운 삶의 터전이었다. 집안일을 하다가, 텃밭을 일구다가, 아이들을 돌보고 시부모님 시중들다가, 물때가 되면 갯벌로 나가 생합을 캐면서, 어이구 니가 있어 고맙구나, 어이구 너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두 손을 재게 놀리셨다는 그녀들의 공간, 새만금. 그런데 그 새만금이 얼토당토않은 개발논리로 숨통이 막혀가게 된 것이다. 새만금의 어민들도 포크레인이며 덤프차들이 와서 자갈과 흙을 바다에 쏟아붓는 차르르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갯벌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숨통도 막히는 것 같아 미칠 지경이라고 하시던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지금의 세상 돌아가는 꼴이 너무나 안타까워져 언니와 나는 술잔을 거듭 주고받았다. 황새울 들판으로 들어온 포크레인 기사아저씨는 사람들이 포크레인을 막아서자 어찌할 줄 모르고 담배만 뻑뻑 피워대셨다고 한다. 새만금으로 들어갈 덤프 동지들도 새만금 어민들이 덤프차를 막아서면 담배를 몇 대이고 피워 물게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지금과는 달라질 수는 없을까? 올해도 농사짓고, 올해도 조개잡고, 올해도 일을 하자는 평택 농민과 새만금 어민과 비정규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지 않은 이야기인데, 세상은 그네들의 이야기를 서로 상관없는 일로 만들어버린다. 아니 내 이야기를 위해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짓눌러야만 하게끔 만들어버린다. 재연언니와 나는 그런 세상 돌아가는 꼴 말고 다른 세상 돌아가는 꼴을 상상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더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까? 이라크 팔루자에서도, 평택에서도, 새만금에서도, 비정규노동자들이 일하는 일터에서도 모두 행복할 수는 없을까?

이야기도 깊어가고 밤도 깊어갔지만, 답은 쉽게 안나온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그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언니나 나나 우리 모두가 지치지 않고 서로의 활동이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서로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 마주쳐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도 농사짓자! 올해도 조개잡자! 올해도 일을 하자! 소박한 바램들이 비로소 현실이 되는 날을 상상하며 언니와 나는 그간의 고단함을 털어내었다. 대추리에서의 깊은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지난 4월 밤중에 평택을 찾은 적이 있다. 평택까지 가는 긴긴 길에 사무실에서 들고나온 <작은 책>을 읽어나갔다.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다가 그런데 화들짝 놀란 것이, 후배녀석 글이 떡하니 있는 것이지 뭔가. +_+

 

신기하고 반가워서 그 친구 글에 이어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서 <작은 책>으로 보냈고

다음달에 실리게 되었다.

(<작은 책>은 참으로 편한 책이라, 읽기에도 좋고, 읽은 후에 나도 한번 저런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또한 독자들에게도 열려있는 구조라 투고를 하면 잘 실리게 되는 듯 하다.)

 

위엣글은 그 글이다.

분량 등의 문제로 정작 글을 쓰게 된 동기부분 (후배녀석의 글을 맞딱뜨린 반가움)은 잘라내고 싣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평택이든 새만금이든

팔루자든 이라크든

모두 함께 살 수 있으면 안될까.

 

모두들

올해에도 농사짓고

올해에도 조개잡고

올해에도 일을하고

올해에도 살아가면

안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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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를 먹으며

 

 

 

 

*

진보 블로그가 귤색깔로 뒤바뀌었길래, 그 신선함으로 포스트를 하나 써놓고 보니

한달도 넘었구나 블로그에 글을 쓴지.

 

 

 

*

05년의 끝무렵, 그리고 06년의 초입

정세도 정세였지만, 나 자신에게도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는데...

 

어쨌거나 비로소 정떼기가 가능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전의 운동, 이전의 공간, 이전의 사람들.

 

어쨌거나 비로소 정붙이가 가능하게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운동, 지금의 공간, 지금의 사람들.

 

 

 

 

 

*

지난주

내가 담당하는 투쟁사업장 공대위 사람들과의 편한 술자리에서였다.

 

" 얼마전에 '이상한'문제제기를 받았는데~"

 

P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에 말을 꺼낸다.

 

음~ 삘이 딱 오긴 했지만 (이젠 완전 그런 쪽으로는 자동반사적인 반응이 온다 -_-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어디 한번 보자 하는 심정으로

 

 

" 아니 문제제기면 문제제기지 '이상한' 문제제기는 또 뭐예요? "

물었더니

 

 

역시.

P가 받은 문제제기는 언어 성폭력과 관련한 것이었다.

 

 

작년 초겨울 공대위 집중집회에서 박준 동지의 노래가 끝나고 고대 한 학생이 와서 문제제기를 하더랜다. (당시 P는 사회자) 노래에 욕설이 어쩌구 하던데 잘 모르겠어서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그리고 올해 1월에 겨민투라고 학생들이 간담회요청을 해서 자리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자신이 조합원 동지들을 '어머니'라고 불렀더니 (당시에도 P는 사회자) 또 뭐라고 하더라.

 

영 이해가 안되어서 '이상한' 문제제기라고 그는 말을 꺼낸거다.

 

 

그랬더니 K와 J가 나름의 소견들을 밝힌다.

(P와 K는 삼십대 중반 남성활동가, J는 사십대 남성활동가)

나도 이야기를 잘 해보려고 노력한다.

(집회에서 고대 학생이 어떤 문제의식에서 제기를 했을지도

간담회에서 겨민투 학생들이 어떤 문제의식에서 제기를 했을지도

익히 짐작이 되는데, 그 흐뭇함을 감추려 애썼다는^^;)

 

 

 

 

 

 

- 욕설과 관련한 이야기

 

 

" 학생들이 욕가지고 뭐라 그러는거 잘 이해가 안되요.

우리가 분노를 표출하고 그 분노의 힘으로 투쟁을 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게..."

 

" 하지만 욕을 통해 함께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에 대해 오히려 고민이 되는데요,

과연 욕을 통해 함께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이 언제나 맞는 이야기인가? 싶어요.

예를 들어 이주투쟁에서는 욕설이 사용되지 않는데요, 현장에서 늘 욕을 듣고 무시를 당하며 일을 해야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욕설은 다른 의미이기 때문이죠. 남성의 성기를 중심으로 한 욕설도 마찬가지인 것이고..."

 

" 욕이라는게 원래 사회적 약자를 비하하는 내용이 주된 거잖아요.

그런데 장애인/여성/못배운사람들/돈없는사람들 이 투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우리들 입장에서 그런 욕을 그대로 써야하는 것인지 그게 의문인거죠."

 

" '좇빠지게'라는 욕이 원래는 '쌔'빠지게 아닌가요? 우리 고향에서는 그랬는데...그래서 서울 올라와서 놀랐어요. 그래서 나는 영 집회때 따라하기가 거시기하더라고. 민망하고 어색하고."

 

" 지난 5월에 덤프연대가 출정식을 하고 처음으로 대규모 집회를 하던 날, 조합원들이 많이 앉아있긴 하는데 이게 영 단합이 안되는 거라, 마이크를 든 활동가가 이 구호도 외쳐봤다 저 구호도 외쳐봤다 하다가 " 좇빠지게 일했는데 이게 뭐야 씨발!" 이라는 구호가 잘 먹히니까 그 구호로 계속 선동을 하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면서 고민이 많이 되더라구요.

(거기에 여성조합원이 없긴 했지만...좇이없는 여성들은 그 구호에 절대 공감이 안되는 것인데..)"

 

" 그래도 계속 고민이 되는 건 대중의 정서를 무시할 수 있는가, 하는 거예요."

 

" 대중의 정서가 정치적으로 온당하지 않을때 활동가는 어떠해야하는지, 고민되는 문제이지요. 그런데요 활동가라면, 노동자들이 노래방가서 도우미 아줌마 부르거나 단란주점 가서 여자 부르거나 그러는 것을 대중의 정서라고 그냥 넘어가지는 않잖아요?"

 

 

 

 

 

- 호칭과 관련한 이야기

 

" 우리 어머니들은 우리들이 담배피우는 것 가지고도 뭐라고 하시거든, 젊은 놈들이 어른들 앞에서 담배피운다고...그런 어머니들에게 동지 동지 그래봐봐. 당장 혼나지. 그런데 그걸 가지고 왜 동지라고 안하고 어머니라고 하냐고 뭐라 그러는거 영 이상했단 말이지."

 

" 아까 박준 동지 이야기나오기도 해서 말인데, 저는 예전에 최도은 동지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그 분은 꼭 노래 전후 사이사이로 이야기를 하실때 ' 이 누나가~'라고 말을 하시는 거라, 기분이 팍 상했죠. 정말 멋지다, 하면서 목빠지게 쳐다보고 있는 나는 그 순간 없는 존재가 되는 기분, 그랬거든요. 호칭이란 것, 호명이란 것은 사소한 일은 아닌 거겠죠."

 

" 작년 최저임금 투쟁당시 한 집회때, 사회자가 '여성연맹 **노조의 *** 어머님 모시겠습니다!'라고 소개를 하더라구요, 그때 참 이상했어요. 왜 꼭 *** 어머니라고 부를까. 동지라는 말 놔두고 그래야 하나."

 

" 그러네요. 우리가 "*** 아버님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음..."

 

" 제가 고등학교때 농활을 갔었는데 그때 한 농민회원분의 부인되시는 분이 오셔서 소개를 '** 형님 사모님'이라고 했다가 호되게 혼난 적이 있어요. 자기 이름은 ***이라고. 그때 혼났던 생각이 나네..."

 

" 그래도 우리 어머님들을 일상적으로 ** 동지, *** 동지 그렇게 부르는 거 영 어색한데..."

 

" 그 학생이 문제제기 했던 것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여성을 호명하는 방식에 대한 것 아니었을까요. 여성들은 누구누구의 부인이거나 누구누구의 어머님 외엔 사회적으로 자리가 없으니까...그래서 투쟁하는 여성들의 위치도 불안정한 것이고...학생들은 간담회 자리를 공식적인 자리로 생각했을 꺼니까 그런 제기를 했던 것이겠죠."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과연 성폭력이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까지 나아갔다.

 

셋은 모두 한차례 정도씩 반성폭력 교육을 받아본 적이 있다고 한다.

교육때 들은 것과 평소 들은 바들을 가지고 무엇이 성폭력인가에 대해 갑론을박한다.

 

"내가 교육 들어서 아는데~ 여성이 불쾌감을 느끼면 성폭력이고 아니면 성폭력이 아닌 거래요."

 

"에이~ 그런데 그걸로는 부족하지~ 만약에 직장상사한테 성폭력을 당했다고 해봐, 불쾌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J와 K의 갑론을박이 결론이 잘 안나자

P가 정리를 시킨다.

 

"우리 다음에 *** 동지에게 물어보자고.

그 동지가 황우석 문제가 전공이 아니라 여성국장이래."

 

(*** 동지는 공대위에 함께 하는 언니인데, 일전에 공대위 회의 마치고 밥을 먹다가 황우석 이야기가 나오자 그 문제에 대해 쟁점을 뭘로 봐야할 것인지에 대해 한 강의 하신 바 있다^^ 그때의 임펙트가 컸던지 '황우석 문제 전공'한 사람이라고 내부에서 이야기가 오고갔나보다.)

 

 

 

 

아무튼

언어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언어 성폭력 뿐만이겠느냐만은)

문제제기하는 전후 맥락이 함께 이야기되지 않으면

문제의식이 전달되기 어려운지라.

 

집회 사이, 간담회 마치고

그 짧은 찰나의 학생들의 문제제기는 '이상한' 문제제기로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비록 '이상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채로이긴 하지만 꺼내어 놓고 말을 붙여보는 P가 참으로 건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직 개념정립 등이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손치더라도 자신이 살아온 경험들을 바탕으로 성폭력 문제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K와 J의 모습도 아름답게 보였다.

 

자기가 공격당할 헛점하나 안잡히려고 번드르르하게 말에 기름칠만 할 줄 아는 세련된 마쵸들만 보다가

소탈하기 그지없는 이들을 보니까

마음이 참 푸근해지더라.

 

 

남성성기를 중심으로 한 욕설이 여성주의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인지

노래방 도우미 아주머니를 불러 유흥을 즐기는 풍토가 왜 문제가 있다는 것인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단지 그 이유가 아니라)

여성들에 대한 호명이 어떠해야 될 것인지

학생동지들의 문제제기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하는 것인지

성폭력이 과연 무엇인지

 

등등의 쟁점은 여전히 남겨진 문제인 것이지만

 

이네들이 이렇게 소탈하고 진지한 자세만 계속 가져준다면

그리고 이네들의 운동과 여성 운동이 마주칠 수 있는 조건만 계속 갖추어진다면

내가, 우리가 바라는 변화가

영 먼 일만은 아닐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게되더라.

 

 

 

 

어쨌건

끊임없이 문제제기하는

그래서 균열과 틈을 만들어내는

학생동지들이 흐뭇하고 고맙고 이쁘고^^

 

그네들이 계속 균열과 틈을 만들어주면

나같은 사람들은 그 균열과 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그런 일이 자주 생긴다면 참 좋겠다.

 

 

 

 

 

 

*

새콤한 홍어를 먹으며

고소한 먹걸리를 돌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런데 어떻게 운동 시작하게 되셨어요?"

술자리의 단골 화제가 나왔다.ㅎㅎ

 

K는 전라도 바닷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어릴때, 쥐포를 봉투에 집어넣는 일을 하는 어머니 옆에서 쥐포살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것이 재미였는데

 

80년 5월의 어느날, 쥐포가 담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가던 어머니의 길목을 공수부대가 막아섰더랬다.

총을 들이대면서.

 

광주리에 쥐포 외엔 아무것도 없다고 보여주고 나서야

어머니와 K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광주리에서 꺼내어진 쥐포를 채 다시 담지도 못하고서

혼비백산하여 그렇게.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역사의 한자락이 그렇게 그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고

그리고 나서 중고등학교 시절 전교조 선생님들의 영향이 있었고...

대학생이 된 형과 형의 친구들, 그네들이 들고다니던 빨간책들이 있었고...

 

군대를 다녀와서 공장으로 들어간 후에 오늘까지란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K는 같은 질문을 내게 던졌다.

^^; 누구나 그렇겠지만 운동을 하게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과 나름의 사건들이 있는 건데

나 역시 나름의 스토리가 있었거늘

 

그날 K의 이야기를 듣고나서는

뭐랄까,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통해 운동을 하게된 내 이야기는 별로 이야기도 못되겠다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야기를 할 차례.

 

 

 

 

" 어쩌구 저쩌구~해서 힘들어하던 참에

한 친구가 대중의 양가성, 민주주의는 논쟁과 소통을 요구하고 피와 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등을 이야기해주었어요. 그때 제대로 쁘락이 걸린거죠. 그게 시작이예요."

 

아, 싱거워라 ^^;

 

암튼 그 이야기에 이 이야기도 덧붙였다.

" 그런데요, 바로 그 친구가 나중에 성폭력 가해자가 되어버렸지 뭐예요.

나는 그 사건의 대책위를 해야했고. 참 재미나죠? 나는 내가 운동하는 한 그 친구도 계속 같이 할 꺼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나의 덧붙인 이야기에 담긴 많은 이야기를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감 같은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여성이 운동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필연적인 과정을 빼놓고 싶지 않아서였다.

역시 그는 덧붙인 이야기의 의도를 접수하지는 못하였는데,

그런데 대신 내가 전혀 생각해본 바 없는 점을 환기시켜주었다.

 

"음...나는 혼자 운동시작해서...."

 

 

 

그렇구나.

그렇게 스스로 의식화 조직화된 사람은

그런 문제에서 초연할 수 있는 것이겠구나.

 

 

운동이란게 본디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운동이란게 실로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 점 역시 사실이라는

그걸 불현듯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래저래 K의 이야기는

소박하고 소탈해서 더욱 강한 임펙트를 남겨주었더랬다.

 

 

 

 

 

 

*

소탈한 이들과 함께 한 간만의 편한 술자리.

홍어를 좋아라 하지는 않지만 그날의 홍어는 참으로 새콤달콤 했더랬다. 냠 ^^

그런 술자리와 맛난 안주가

심심치않게 있어준다면 올 한해가 제법 즐거울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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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은 기륭집회가 있는 날이다.

([불법파견철폐와 기륭분회 투쟁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정기집회를

매주 목요일 5시에 구로공단 내 기륭전자 앞에서 진행하기로 했다.오늘은 세번째 집회)

 

 

 

 

오늘 집회때 대오 맨 끝에 앉아있는데

 

구로지역 다른 투쟁사업장에서 연대하러 오신듯한 한 조합원 동지가 내 옆에 앉아있던 기륭조합원 아주머니께 노란 하나를 쥐어주신다.

 

손에 을 꼭 쥐고 계시던 그 동지, 집회를 마치고 내가 가려고 하니까

어느틈엔가 내 가방에 을 찔러넣어주신다.

 

가방에서 돌돌돌~ 그 을 나는

집회 이후 만난 후배님에게 건네드렸다.

 

 

돌고돌고은돌고~☆

동지애도무장무장~♡

 

 

기륭에서 만나는 소탈함이 못내 좋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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