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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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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입되어 있는 모임의 게시판에 가시나무님이 올린 글을 보고 생각나서 예전에 네이버블로그에 올려두었던 글을 퍼다 올린다. 노래 파일도 있으니 사연과 함께 들어보시길... 물론 이 노래를 아시는 분이 많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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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2006/02/14 18:07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당원게시판에서 하하하쏭님이 올려주신 글 중에서 다시 퍼왔습니다. 찾아보니 산하님이 "늙은 대공계 형사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하종강의 노동과 꿈에 올려주신 글이네요. 쩝...
 
글의 모티브가 되고 있는 노래는 '이 세상 사는 동안'이라는 노래입니다. 복음송 느낌이 들어 그리 좋아하진 않았던 노래인데, 노래에 얽힌 사연을 듣고 나서 여기에 노래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연 중에 나오는 조모라는 서울법대 학생은 아마 서울대 물리학과에 적을 두었던 조정식 열사가 아닌가 합니다. 그 분이 그렇게 위장취업 중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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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선배들은 물론이거니와 얼치기였던 저보다 열심히 살았던 동기나 후배들은 ‘대공계’ 형사들하고의 인연이 한 자락 걸쳐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게는 대공계 형사라면 어려서 열심히 보던 드라마 ‘추적’이나 ‘113 수사본부’에서 영웅적으로 그려졌던 형사들 외엔 별 기억이 없습니다. 물론 학교 앞에서 등굣길의 저를 날카롭게 검문하고 가방에서 나온 조국통일 머리띠를 들고서는 일장 훈계를 했던 사람도 대공계일 것이고, 가끔 학교 앞에서 선배들이 ‘저게 오 형사야.’라고 일러주던 반백의 신사도 학교를 담당했던 형사였겠지만, 어두컴컴한 방에서 그들의 취조를 받거나 혹여 제가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될 정도로 ‘큰 인물’이었던 적은 다행히도 (불행히도?) 없었습니다.
 
그렇듯 순진한 민간인(?)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선량한(?) 시민으로 살고 있는 제가 과거의 이 ‘대공’ 형사들을 경향 각지로 찾아다니며 면접할 일이 있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얘기입니다만 요즘은 아예 ‘대공계’ 또는 ‘대공과’라는 이름이 아예 사라졌더군요. 즉 보안과라는 이름으로 불리웁디다. 제가 만난 형사들 가운데 인천에서 근무하고 있는, 정년퇴직을 1년 앞둔 형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과 하루 종일 서울과 인천을 쏘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됐었지요. 고 박종철씨의 죽음을 덮으려 했던 박모 치안감이 얼마나 유능한(?) 간첩 잡이 전문가였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문에 가담했던 조 아무개라는 사람은 대구에서 날고 기는 대공형사였는데 서울로 스카우트(?)된 지 몇 달만에 신세를 조져 버려서 인생만사 새옹지마의 실례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운동권 총동원령이 내려졌던 86년 5월 3일의 인천의 생생한 기억들..... 이른바 한때 ‘적의 심장부’(?)에서 활동하던 늙은 수사관의 회고를 듣는 것은 색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름조차 아득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범인 문 아무개가 지금 뭐하고 사는지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끌러도 풀어도 다하지 않을 것 같은 베테랑 대공 형사의 이야기 보따리 끝에 제가 툭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간첩 잡아 보셨어요?”
“....... 심문은 해 봤죠.”
“아니 수십 년 동안 많이 잡으셨을 거 같은데.”
“학생들이나 위장 취업자들은 잡아 봤지만.... 걔들은 간첩은 아니고.....”
 
별 뜻 없이 하신 말씀이실 수도 있지만 저는 그분의 짤막한 말, “학생이나 위장 취업자들은 잡아 봤지만 걔들은 간첩은 아니고.....”에서 다양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공적(?)을 과장하거나 불려서 늘어놓고 계신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대적했던 사람들에 대해 약간의 연민을 지닌 듯 보인다는 것.
 
제 다음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젤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과연 그 입에서 어떤 이름이 나올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왕년에 박노해를 길렀노라 기염을 토하다가 지금은 참말이지 보면 토 나올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김 아무개 의원님이나 인천에서 오래 생활했을 노회찬 의원이나 그 외 지금은 쟁쟁한 기라성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옛날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을까 적지않이 기대를 하기도 했지요.
“하나 있네요. 그런데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네. 조.... 뭐였는데 서울대 79인가 80인가, 아니 훨씬 더 아래일 수도 있고.....”
 
서울대 법학과 출신의 조 아무개 학생은 학교를 마치지도 않은 채 인천의 어느 공단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암약(!)하다가 공장주의 신고로 결국 이 형사님한테 덜미가 잡혔답니다. 어쩌면 지금 제 앞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우지 않는 이 형사님도 당시엔 저승사자같이 무서운 몰골로 그 학생 앞에 섰을 수도 있겠고 맛 좀 보라고 고춧가루 그득 탄 물을 코에 들이부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짐짓 소름이 돋았습니다. 한 개인의 인간성 따위는 처참하게 망가지는 시대의 첨병들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기억 나시죠?”
“밥을 주니까, 왜 그 천주교인들이 성호를 긋잖아요? 그런데 걔는 구호 외칠 때 팔 뻗는 거, 그걸 세 번 힘 있게 내지른 뒤에 밥을 먹더라고. 내가 데리고 있었던 내내 그랬어. 구호를 외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척 척 척 세 번 딱 하고 밥을 먹어.”
“그리구요?”
“말도 없는 놈이었어요. 샌님도 그런 샌님이 없었어. 주변 조사해 보니까 뭐 의식화같은 걸 시도하지도 못했더구만. 그렇게 수줍어했대. 사람들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더라고. 위장 취업이라는 것도 좀 붙임성이 있고, 사람들하고 사와리가 좋아야 뭐 하는 거 아니우. 그런데 녀석은 영 아니더라고. ”
“그리구요?”
“잡혀 온 놈들 중에 말 잘하는 놈 참 많았거든. 그런데 걔는 진짜 말 한 마디 안 했어. 취조할 때도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거나 그게 다였어. 하지만 그런 느낌 있잖아. 아 이놈은 진짜구나. 겁도 안 먹을 것 같고, 눈치도 안 볼 거 같은 놈. 밥 먹으면서 걔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팔을 뻗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그 샌님이 무섭더라고. 좀 말을 시켜도 한 마디도 안해. 마치 벙어리처럼.”
 
단지 그 이유로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싱겁다 싶었습니다.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눠 보지 못한 사람이 형사 인생 수십 년에 제일 큰 기억으로 남았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지요. 서울 법대를 나왔다니 그래도 고시라도 봤을 것이고 어느 동네에선가 인권 변호사 쯤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어 지금은 뭘 하는지 아시냐면서 심드렁하게 물었을 때 형사님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죽었어요.”
“네?”
“집행 유예로 나왔거든. 그런데 다른 공장에 또 갔다는 건 들었어요. 어느 날 부평역 앞에서 녀석을 우연히 만났지. 그래 역 앞에서 한 1시간 동안 붙잡고 훈계, 아니 하소연을 했어. 너 제발 이렇게 살지 말아라. 녀석은 강원도 태백인가가 고향이었어. 아버지는 광부였고. 그 아버지가 얘가 서울 법대 갈 때 얼마나 좋아했겠어. 모르긴 해도 동네 잔치를 3박 4일 했을 거야. 막장 인생에서 용 난 거 아냐. 그런데 그런 자식을 내 손으로 잡아 넣었고, 또 그런 일을 한다고 하니까 내 가슴이 다 아프더라고요. 빌었다니까. 걔한테..... 나중에 너 잘 된 뒤에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 되는 거니까, 제발 학교로 돌아가라구요. ”
 
그 만남이 있은 지 달포가 지났을 때 형사님은 동료가 전하는 조 모 학생의 비보를 들었습니다. 위장 취업 중이던 공장에서 밤샘 작업을 하다 깜박 졸았고 그예 컨베이어 벨트에 말려 차갑고 무거운 기계의 금속성 밑에서 그 젊은 피를 쏟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형사님은 그때 자기가 강원도 태백의 고인의 아버지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봐요. 태백에서 서울 법대 간다고 했을 때 그 아버지 얼마나 좋아했겠어. 모르긴 해도 동네 잔치를 3박 4일 했을걸...... 그런데 그 아이가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서 죽었다......”
 
그분의 한숨 섞인 회고에 함께 어깨를 늘어뜨리며 지금 살았더라면 그래도 좋은 세월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하고 한 마디를 덧붙이자 그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걔는 그런 깜냥도 없었을 거예요. 그럴 놈이면 그 추운 날 길거리에서 자기 잡아넣은 형사 얘기를 1시간 동안이나 듣고 있겠어? 뿌리치거나 그냥 가버리면 되지....... 지금도 궁금해. 걔가 내 얘기를 듣고 있었던 이유가....... 겁나서 그랬던 건 분명히 아니고......”
 
조 모 학생은 그 30분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렇다고 형사에게 대들거나 무시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형사의 훈계성 하소연을 듣고만 있었다지요. “차라리 이 독재자의 개새끼야 뭐 이런 욕이나 하고 가 버렸으면” 그렇게 맘에 아리지도 않았을 텐데 며칠을 라면으로만 때운 걸 증명이라도 하듯 얼굴은 붓고 손목은 말라버린 채 그는 한 형사의 넋두리를 묵묵히 들어 준 뒤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한 뒤 헤어졌다지요.
 
지금 어렵사리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신 분의 항소이유서의 한 구절, “가장 온순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냈던 시대를 살았던, 정년퇴직을 앞둔 전 대공계 현 보안과 형사는 자신이 잡아 넣었던 한 젊은이, 밥 먹기 전 세 번 팔을 뻗으며 뭔가를 다짐했지만 그 다짐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강원도 출신 젊은이의 짧았던 젊음을 토로하며 여러 번의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한숨에 실린 듯 멍하니 있다 보니 궁금해지는 게 있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신 건 없네요? 또 기억나는 건?”
“그렇죠.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하고...... 유치장에서 걔가 부른 노래가 있었는데.... 시끄러운 투쟁가 뭐 그런 건 아니었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였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요?”
“그 노래는 걔가 죽은 뒤에 나왔지. 하여간 뭐 그런 노래였어.”
 
집에 돌아와서 아내가 손톱을 깨끗이 깎아 준 김에 기타를 잡고 뚱땅거리다가 문득 형사가 채 기억해 내지 못했던 고인의 노래가 머릿 속에 들어섰습니다. 아마도 그건 “이 세상 사는 동안”이라는 노래였던 것 같습니다. C 코드로 시작하는 그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를 실로 오랜만에 읊조리면서 저는 근 20년 전 인천 한 공장의 기계 속에서 생을 마감했던 한 사람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불렀을지 모르는 노래를 1,2,3절까지 다 불러 보았습니다. 원래 1,2절은 찬송가였습니다만 3절은 고인과 비슷한 삶을 선택한 누군가가 덧붙였다고 했지요.
 
그 후렴구입니다.... “너와 나 함께 손을 잡고 이 길을 걸으며...... 죽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장로교 청년회 1집 - 이 세상 사는 동안
   
민청년 - 이 세상 사는 동안(현장녹음)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흘릴 눈물들
이 생명 다한 후에 다 씻어지리니
이 길을 가는 동안 지쳐 쓰러져도
그보다 더욱 귀한 건 생명을 봄이라
곤한 내 혼아 눈을 들어 저 빛을 향하여
아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받을 상처들
이 몸이 묻힌 후에 다 잊혀지리니

이 길 가는 동안 지쳐 쓰러져도
그보다 더욱 귀한 건 자유를 봄이라
곤한 내 혼아 눈을 들어 저 빛을 향하여
아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장로교 청년회 선교사업회 1집
 
장청 테이프 1집이 발간 된 것은 85년의 일이다. 85년 여름 감리교 청년회 산하 노래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내겐 정말로 바쁜 봄을 보냈었다. 4월에 명동성당 천주교 청년회 문화팀과 감리교 청년회 문화선교위원회의 명동성당 성모마당에서의 연합공연, 그리고 6월말에는 류관순 기념관에서 기독교 교회협의회 (NCC) 가 주최하는 국제적 행사의 일환으로 교회협의회 가입교단인 기독교 장로회, 예수교 장로회, 감리교단 청년 문화단체들의 연합공연이 있었다. 공연의 구성단계와 대본 작업부터 마지막 공연이 올라가는 작업까지 정말 많은 작업들이 이어졌고, 힘겨우면서도 보람있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당시에 NCC 가입교단 중에서는 감리교 청년회에만 노래팀이 있었다. 기독교 장로회 (이하 기장), 예수교 장로회 (이하 예장) 에는 70년대 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을 자랑하는 탈춤 (민속극) 팀들이 있었지만, 노래팀은 전무했었다. 따라서 음악과 탈춤이 한데 어우러지는 공연형식에서 음악적 작업의 몫은 다 우리에게 주어졌었다. 이렇게 다른 교단의 청년회 선배들을 알게 된 인연으로 공연 후 여름 언젠가 내게 연락이 왔다. 예장 청년회에서 노래팀을 새로 구성하려 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고. 따라서 주도적으로 노래팀 구성작업을 하고 있던 서울대 81학번 동기인 주현신이라는 친구를 이 때 만나게 된다. 전교조 음악의 많은 부분을 담당했었던 주현신 바로 그 친구다. 지금은 목사가 되어 있는.
 
예장팀의 구성은 새문안교회 청년회, 영락교회 청년회, 서울대 기독교 학생회 출신들.. 그리고 영등포 산업 선교회 (성문밖교회) 활동가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기존의 노래팀들이 이루어 놓은 성과나 음악적 감성에 조금 더 빨리 접근하려는 조급함이 있었다. 따라서 당장의 85년 여름 공연을 위한 인적 수혈을 필요로 했다. 서울대 메아리 출신의 82학번 이현관 (이후 새벽 활동 - '먼 훗날', '백두에서 한라까지'등을 작곡), 82학번 정용호 등을 권고하여 합류시켰던 기억이 있다.
 
이 테이프는 85년 장로교 청년회 전국연합회 (이하 장청) 여름대회에서 공연한 실황 테이프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장청 노래팀 멤버 중에 외국어대학교 방송국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음향 효과나 녹음등을 깨끗하게 해 낼 수 있었다고 듣고 있다. 그리고 교회 성가대에서 다져진 기본기를 가진 친구들과 대학 노래킴 출신들의 합류과 음악적으론 매끄러운 조화를 이루어내었다고 보여진다. 장청은 이후 2집 테이프를 내었지만, 구성원의 이질성을 조직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서 지속적인 활동을 보여주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이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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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4 19:44 2009/11/24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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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교원평가제 참여 논의 무산, 그러나 중집에서 참여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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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조 대의원대회가 무산되면서 전교조의 교원평가 논의틀 참여가 무산되었다. 이와 관련한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기사논조가 엇갈린다. 한겨레에는 교찾사의 입장을 반영하는 코멘트도 없을 뿐더러 전교조 현 집행부의 합리적 태도와 대다수 대의원들의 뜻을 일부 극단적인 교찾사 성원들이 방해하고 있다는 투다. 이에 비해 경향은 추후에 중집에서 교원평가 법제화를 위한 사회적 협의체 참여를 결의하더라도 대의원대회의 논의를 거치지 않은 이상 정당성에 문제가 있다고 쓰고 있다. 교찾사에서 의도하고 있는 바도 이것인데, 한겨레는 이를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와 다른 보수언론의 논조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논의 자체를 거부하면 어쩌자는 것이냐라고 반론을 펼 수도 있겠지만, 그 논의의 올바른 틀이 지금의 6자협의체는 아니라고 본다. 교원평가 자체에 대해 엄밀한 평가가 필요한데, 이미 법제화를 전제로 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틀에 불과한 6자협의체가 어떠한 역할을 할지 뻔한데, 전교조가 여기에 참여하여 들러리 서주는 것이 논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할 말 없다.
 
물론 교원평가를 거부한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대안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사회적 협의체에 참여하는 것은 더욱 문제다.
 
이 점에서 민주노총 내에서 별다른 논의도 없이 노사정 협의틀에 참여한 민주노총 집행부의 행태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할 말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합의를 강제할 만한 힘과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는 노사정 협의체 참여는 결국 들러리 역할만 하고 끝날 것이 뻔하다는 것을 이미 과거 경험에서 알고 있을 텐데, 왜 그러는걸까. 
 
얼마나 답답하면 그랬을까 이해는 간다. 하지만 통합공무원노조 문제에서부터 노조전임자 임금금지 및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논의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장의 동력을 이끌어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밖에서 보고 있는 나도 답답한데,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은 어떨까. 그렇다고 진보정당이 무슨 힘을 보태는 것 같지도 않고... 여전히 진보정당이 빨리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진보정당의 꼬락서니를 보고 있노라면 열불이 난다. 물론 거기에 전진도 책임이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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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협의체 참가는 명백한 교원평가 수용 (참세상, 원영만 전교조 전 위원장 / 2009년11월03일 13시25분)
[기고] 협의체 참가는 교사를 권력의 노예로 만드는 길
 
전교조 정진후 집행부는 교원평가 법제화를 코앞에 두고 이종걸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장이 제안한 교원평가 법제화를 위한 사회적 협의체(6자협의체)를 덥석 받아 안았다. 협의체에 참가하여 교육개혁 대안을 제기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전교조가 ‘교원평가를 무조건 반대’한다는 비난여론을 불식시키고, 어차피 법제화 될 교원평가 법제화 내용 중 인사와 연계되는 독소조항이라도 막아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협의체 참가를 선포했다.
 
그동안 교원평가 반대 투쟁은 거의 하지 않다가 법제화를 앞둔 시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협의체에 참가하여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언론을 통해 협의체 참가를 기정사실로 하면서 11월 7일 ‘교원평가 협의체 참가 대의원대회’를 소집한 것은 대의원을 우롱하고 협의체 참가에 찬성하라는 협박으로 들린다. 협의체 참가는 교원평가 시스템을 통해 교육을 독점하고 교원을 통제하려는 정권과 자본에 굴복하는 길이며, 결과적으로 40만 교원과 전교조를 권력의 하수인으로 내몰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지배권력과 자본이 벌이는 사회적 협의체의 본질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배권력과 자본은 소위 국가 차원의 주요 정책현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을 사회적 합의로 풀어간다는 명목으로 노사정위원회(노사정)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협의체를 구성하였고, 논의 결과는 언제나 노동자의 양보와 희생이었다. 왜냐하면, 사회적 협의체는 노동자를 회유하고 통제하여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만든 지배 권력과 자본의 놀이판으로 언제나 노동자는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는 틀이기 때문이다.
 
지난날 노동자들의 반대에도 민주노총은 ‘노동자의 이해를 관철해야 한다’는 논리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김영삼 정권)에 참여했지만 정권과 자본의 노동법 개악 기도를 막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 합의’의 명분을 주어 정권과 자본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노동법을 개악하는데 일조했다. 소위 민주화의 상징으로 여겼던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적극 참여하였고, 결국 기대했던 정권으로부터 받은 것은 노동자의 삶을 파괴하는 정리해고 법제화와 변형근로제, 그리고 근로자 파견제도였던 것이다.
 
교원평가는 전교조만의 문제가 아니라 40만 교원에 해당하는 문제다. 국회교육과학기술위원회(교과위)에서 제안한 6자협의체의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교원평가 법제화’ 문제를 ‘사회적 합의’의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수순을 밟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6자협의체 참가는 교원평가 법제화를 전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서로 상반된 내용은 합의할 수 없는 구조이다. 따라서 6자협의체 참가는 약이 아니라 치명적인 독이 될 수밖에 없다. 노사정에 참여했던 민주노총이 노동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아 나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지만 정권과 자본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사회적 합의’로 밀어붙였다. 전교조 집행부가 참가하고자 하는 6자협의체도 본질상 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
 
IMF시기 신자유주의 개혁(자본의 폭력)이라는 논리로 수많은 노동자가 해고되었고, 교육계에도 나이 많은 교사 1명이 나가면 젊은 교사 두 세 명을 쓸 수 있다는 논리로 정년을 단축하였다. 이때도 전교조는 정년단축에 찬성하는 국민여론과 시민단체를 들먹이며 겉으로는 정년단축을 반대하면서 속으로는 정년단축에 찬성하였다. 스스로 제 발등을 찍었다.
 
교원평가를 실시하면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지배 권력과 자본의 논리 앞에 전교조는 교원평가 반대를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다. 전교조 20년을 반성하면서 제2참교육 운동을 펼치겠다고 선언한 현 집행부는 교원평가 법제화가 결국은 참교육조차도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원래 경쟁과 평가 이데올로기는 인간에 대한 배려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윤추구를 생명으로 하는 자본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닌 권력과 자본의 세상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통제기제가 바로 경쟁과 평가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교원평가제가 도입되면 교원능력이 향상되고 교육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미 교원평가제를 도입했던 영국, 미국, 일본의 경우 모두 교육으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이 심화되어 공교육이 무너져 오히려 교육이 황폐화되고 있다. 교육으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은 소위 일류대학 중심으로 대학이 서열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위해 사교육비를 투자해도 부자들을 따라갈 수 없고, 학생들은 살인적인 입시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 모두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대학서열체제를 깨는 일이 바로 살인적인 입시경쟁을 없애고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다. 따라서 교육의 질은 교원평가나 일제고사와 같은 경쟁시스템이 아니라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교육자치, 그리고 무상교육 실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전교조 집행부가 해야 할 일은 교원평가 법제화에 대한 분명한 반대 입장을 천명하고 교사대중의 분노를 조직하는 것이지 대의원대회를 소집하여 대의원까지 6자협의체 참가의 들러리로 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6자협의체 참가는 명백한 교원평가 수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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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교원평가 논의’ 무산 (한겨레, 유선희 기자, 2009-11-08 오후 09:32:36)
대의원대회 정족수 미달…‘6차 참여’ 결정못해
“교찾사쪽 의도적 불참” 내부서 강경파 비판론

 
정부와 정치권이 추진하고 있는 ‘교원평가 법제화’ 논의에 참여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임시 대의원대회가 정족수 미달로 무산됐다. 전교조는 지난 7일 경기 수원시 교육정보연구원에서 ‘교원평가 6자협의체 참가 여부 결정 및 대응방안 마련을 위한 임시 대의원대회’를 열었으나, 참여 등록을 한 대의원 수가 총원의 과반수에 미치지 못해 대의원대회가 무산됐다고 8일 밝혔다. 엄민용 전교조 대변인은 “7일 저녁 8시부터 시작된 대의원대회에는 총원 478명의 절반(239명)에 못 미치는 210여명만이 참여해 참석인원 미달로 대회가 유예됐다”며 “오는 10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이후 일정과 대응방침을 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교조는 최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이종걸 위원장(민주당)으로부터 교원평가 법제화 논의를 위한 ‘6자 교육주체 연석회의’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참여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임시 대의원대회를 준비해왔다. 이날 대의원대회가 무산된 이유는 전교조 내 강경파로 꼽히는 ‘교육노동운동의 전망을 찾는 사람들’(교찾사) 쪽 대의원들이 조직적으로 대의원대회 참가를 거부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전교조 내부에서는 교찾사의 강경노선에 대한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대의원대회에 참석했던 한 대의원은 “교찾사가 중심인 서울지부 대의원 수십명이 대회장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참여 등록을 하지 않았다”며 “대의원대회가 정상적으로 열릴 경우, 6자협의체 참여가 확실시되기 때문에 대의원대회를 의도적으로 무산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대의원은 “교원평가 논의 자체를 거부하면 전교조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며 “대화에 참여해 교원평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견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밝혔다.
 
정족수 미달로 인해 이날 대의원대회는 집행부가 안건을 보고한 뒤 대의원들이 자유롭게 발언하는 간담회 형식으로 진행됐으며, 대부분의 대의원들은 6자협의체 참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의원대회가 무산됨에 따라 전교조의 6자협의체 참여 여부가 불투명해진 것은 물론, 전교조 내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고질적인 계파 갈등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전교조의 한 간부는 “오는 10일 열리는 중앙집행위원회에서 6자협의체 참여 여부를 다시 논의할 계획이지만, 어떤 형식이든 교원평가와 관련된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는 집행부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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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교원평가제 참여 논의 ‘원점’ (경향, 김보미기자, 2009-11-08 17:51:26)
ㆍ대의원대회 과반 안돼 무산…10일 중집위 열어 다시 논의
 
전교조 관계자는 “참석 대의원이 의결 정족수에서 20명 정도가 모자랐다”며 “그동안 교원평가에 대해 절대 수용 불가를 주장해 온 전교조 내 강경파의 반대가 심했다”고 말했다. 전교조는 정 위원장을 포함한 온건파 ‘참교육실천연대’와 강경파로 통하는 ‘교육운동전망을 찾는 사람들’이 그동안 각종 교육 현안을 놓고 마찰을 빚어왔다. 특히 2006년부터는 교원평가를 놓고 ‘조건부 수용’과 ‘수용 불가’로 입장이 첨예하게 갈려왔다.
 
이에 따라 전교조는 10일 집행부 임원과 16개 시·도지부장 등이 참여하는 임시 중앙집행위원회(중집위)를 열어 6자회의 참가 여부를 다시 논의할 예정이다. 중집위는 이미 참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의사를 묻는 대의원회의의 논의를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안건이 통과되더라도 정당성에는 큰 타격을 입게 됐다.

2009.11.11 
결국 전교조가 중집에서 교원평가제 법안 협의체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전교조 집행부를 이루고 있는 자들이 과연 향후의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하다. 공무원노조 사태의 진전을 보면 전교조의 교원평가 논의 참여가 어떻게 될지 뻔히 내다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통합공무원노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한 것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사실상 정부의 탄압에 일방적으로 속수무책 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미 합법노조의 틀에 들어와서 그것이 주는 독사과의 달콤한 독을 깨물었기 때문에 다시 법외노조 시절 내지 해고자 상황으로 내몰리기 싫은 공무원노동자들을 이끌고 가기 어려운 지경이 된 것이다. 이것은 민공노가 공무원노조를 뛰쳐나갈 때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노조의 출범 초기일수록 좀더 조합원들이 단련되어야 하는데, 게다가 공무원이라는 직종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행보가 더욱 신중하고 원칙적인 행보가 필요했는데, 민공노는 물론 전공노조차 그러하지 못했다. 
 
전교조 또한 그렇게 될까 두렵다.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역량과 투쟁의지, 자체적인 대안이 함께하지 않는 협의체 참여란 결국 저들이 만든 틀을 정당화해주는 꼴이 될 뿐이며, 백기투항의 또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과거 노사정위원회를 비롯한 사회적 합의기구 참여에서 뻔히 보지 않았던가.
  
한겨레는 사설에서 국민의 여론을 들먹인다. 국민여론이 사교육 만세를 외치면 그렇게 하는 게 타당한가. 한국의 상황에서 교육현장이 어떻다는 것을, 학부모들이 어떠한 행태를 보여왔는지를 잘 알면서도 여기에는 눈감은채 그런 국민의 지지를 받는 활동을 하라고 충고하는 게 온당할까. 자신에게 필요하고 유리할 때만 국민 여론을 팔아먹는 여타 보수언론과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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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전교조, 교원평가 논의에 참여해야 (한겨레, 2009-11-09 오후 10:25:22)
 
교원평가 법제화 논의 참여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임시대의원대회가 지난 주말 정족수 미달로 무산됐다. 전교조 내 강경파로 분류되는 ‘교육노동운동의 전망을 찾는 사람들’(교찾사)의 조직적 거부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이 그렇다면 이들의 판단이 과연 온당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교원평가는 학부모의 70~80%가 찬성하는 사안이다. 최근 들어, 평가에 미온적이었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까지 무조건 수용으로 자세를 바꿨다. 이런 상황에서 전교조가 평가 논의에 대한 참여를 거부한다면 전교조에는 ‘교사이기주의 집단’이란 씻을 수 없는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다.
 
물론 정부의 교원평가제에 대한 전교조의 반대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전교조의 지적처럼, 근무평정제와 성과급제 등 평가제도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굳이 새 평가제도를 들고 나온 데는 교육의 질 저하에 대한 책임을 온통 교사들에게 전가하려는 교육 당국의 의도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교원평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오늘날 우리 교육 현장에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턱에까지 찬 학교 교육에 대한 불신을 수렴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교육 현장을 지키는 교사들의 상당수가 ‘웰빙족화’한 것 역시 사실이다. 학부모들은 교원평가가 이런 교사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학교 현장의 변화를 가져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지금의 정부안은 학부모들의 이런 여망을 담아내기엔 충분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교육 민주화 운동의 구심체였던 전교조야말로 그 여망을 제대로 반영할 주체가 될 수 있다.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교원평가제를 만드는 일 자체가 교육 현장을 민주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지금의 교찾사처럼 교육노동자의 권익만 앞세우다간 국민의 지지를 잃고 권익을 지키는 일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전교조가 국민과 유리되면 교육 당국은 전교조 교사를 더욱 옥죌 수 있는 방안을 개발해내기가 쉬워진다. 단적인 예가 교장에게 마음에 맞지 않는 교사들에 대한 특별전보권을 허용하는 서울시 교육청의 인사관리원칙 개정안이다. 교육노동운동을 위해서도 국민의 지지와 공감을 얻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늘 열리는 전교조 중앙집행위원회는 반드시 교원평가 논의 참여 결정을 끌어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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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교원평가제 법안 협의체’ 참여키로 (경향, 선근형기자, 2009-11-11 01:42:09)
ㆍ중앙집행위 최종 결정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10일 교원평가제 법안을 논의하는 ‘6자 교육주체 협의체’에 참여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6자 교육주체 협의체는 국회 교육과학기술위 이종걸 위원장(민주당)이 교원평가제 법제화를 위해 제안한 것으로, 교과위 여야 간사와 전교조·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학부모단체 2곳이 참여한다. 전교조는 이날 오후 전남 목포에 있는 전남지부 사무실에서 정진후 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교원평가제 논의에 참여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 교원평가제 논의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혀온 전교조가 6자 협의체 참여를 결정한 배경은 크게 두가지로 해석된다. 우선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교원평가제 관련 법안(초·중등교육법)이 다수당인 한나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되는 것보다는 보수와 진보 진영이 동수로 구성된 6자 협의체에 참여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또 국민들 절반 이상이 교원평가제에 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반대만 하면 전교조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악화될 것이라는 역풍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교조가 6자 협의체에 참여하기로 했지만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앞서 지난 7일 임시대의원대회가 일부 조합원의 반발 등으로 과반수 정족수가 안돼 무산된 데서 보듯 ‘교원평가제 절대 반대’를 주장하는 강성파 조합원들을 설득하는 게 급선무다. 이 과정에서 전교조의 온건파와 강성파 간 계파 갈등이 또 다시 표출돼 내부 분란으로 비화될 공산도 큰 상황이다. 6자 협의체에서 전교조만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더욱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도 어려운 숙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접점을 발견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내부 진통도 풀어가야 하는 것이다. 전교조 엄민용 대변인은 “7일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취합한 대의원들의 제안을 반영해 6자 협의체 참여를 결정했다”며 “11일 정진후 위원장이 사회적 협의체 참여에 대한 입장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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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비 민간 부담, OECD 국가 중 '최고' (프레시안, 강이현 기자, 2009-09-09 오전 10:55:51)
고비용+열악한 환경+낮은 교사 성취도…"초라한 교육 성적표"
 
한국의 공교육비 가운데 민간이 부담하는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 단계에서는 민간 부담률이 정부 부담률보다 세 배 이상 높아, 다른 선진국에 비해 고등교육이 학생과 학부모의 등록금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OECD는 지난 8일 이런 통계가 담긴 2009년 OECD 교육지표(Education at a glance·EAG)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는 전세계 36개 국(OECD회원국 30, 비회원국 6)에서 발표된 2007년 통계자료를 기준으로 이뤄졌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초·중등 교육 단계 공교육비에서 한국은 정부 부담률이 3.4%, 민간부담률은 0.9%로 나타났다. 그러나 고등교육 단계에서는 정부부담 0.6%, 민간부담 1.9%로 나타나, 정부부담 1.0%, 민간부담 0.5%인 OECD 평균과 비교해 민간부담률이 네 배 가까이 높았다.
 
등록금의 절대적인 액수 또한 다른 국가에 비해 높았다. 국·공립 대학의 연평균 등록금은 미국(5666달러)에 이어 4717달러로 OECD 국가 중 두 번째로 높았다. 사립 대학 등록금 역시 미국이 2만517달러로 가장 높은 데 이어 한국은 8519달러로 2위를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25~34세 연령대의 고등학교 이수율은 97%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았으며, 고등교육 이수율은 56%로 캐나다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또 전문대 등 직업지향(B유형) 고등교육의 입학률은 50%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았으며, 4년제대학 이상의 고등교육 입학률도 61%로 OECD 평균(56%)보다 높았다. 반면, 박사과정 등 전문연구 프로그램의 입학률(2.2%)은 OECD 평균(2.8%)보다 낮았다.
 
초·중등 교육 현황을 살펴볼 때, 교사 1인당 학생수는 초등 25.6명, 중학교 20.5명, 고등학교 16.2명으로 OECD 평균(초등 16.0명, 중학교 13.2명, 고등학교 12.5명)보다 여전히 모든 단계에서 높았다. 또 학급당 학생 수도 초등학교 31.0명, 중학교 35.6명으로 OECD 평균 초등학교 21.4명, 중학교 23.9명보다 각각 10명 이상 많아 열악한 교육 환경을 드러냈다.
 
또 교원평가의 효율 정도를 분석한 TALIS(교수·학습 국제설문조사) 결과에서는 현재 실시되고 있는 교원평가인 근무성적평정·성과급 평가의 효율이 다른 국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교사들이 교원평가를 두고 '공정하다'고 인식하는 비율(52.7%)은 TALIS 평균(83.2%)에 비해 30% 가까이 낮았으며, '업무능률향상에 기여한다'(53.3%)고 인식하는 비율 역시 TALIS 평균(78.6%)에 비해 낮았다.
 
또 교원평가 시행이 '교사의 직무만족도'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평가한 비율은 35.1%로 51.5%인 TALIS 평균보다 낮았으며, '직무안정성'을 향상한다는 비율 역시 31.3%로 TALIS 평균(33.6%)보다 낮았다. 특히 교사들이 자신의 능력과 자질에 대한 확신의 정도를 평가하는 자기효능감은 TALIS 조사국 가운데 가장 낮았다.
 
이번 OECD 조사 결과를 두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엄민용 대변인은 "교육에 대한 기대수준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국가가 공교육에 부담하는 비율은 계속해서 OECD 평균수준 이하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엄민용 대변인은 또 교원평가와 관련해 "교원들이 현재의 교원평가제인 근무평정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며 "이는 전교조의 '근무평정 폐지나 개선이 전제된다면 새로운 교원평가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그는 국제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학생들의 학업 흥미도가 낮게 나오는 점과 교사의 자아 효능감이 낮은 점을 함께 지적하며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도 일제고사, 수준별 수업, 고등학교 서열화 등으로 경쟁을 더 확대하는 등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도 논평을 통해 "2008년도 OECD 교육지표와 비교해 우리나라의 교육여건은 크게 향상되지 않은 답보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한국교총은 "OECD 교육지표 결과는 우리나라가 여전히 후진적 교육여건에서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라며 "교육대통령을 자임하면서 교육재정 GDP 6% 확보를 공약한 이명박 정부가 OECD 교육지표상에 나타난 초라한 교육성적표를 받아든 현실을 인식하고 교육투자에 나서줄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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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1 23:03 2009/11/11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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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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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뉴스에 보니 각국의 유명인사들이 베를린 장벽에 다시 모여 그날의 감격(?)을 되새겼다고 한다. 
 
하지만 진보진영에서 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기는 어려웠다.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물론 노력하면 찾아볼 수 있겠지만, 의미있는 논평 같은 것이 있을리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에게 베를린 장벽 붕괴는 별다른 감흥이 있지 않았다. 이미 그 이전부터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하여 이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는 이후 동유럽의 변화과정에서 많은 문제와 폐해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입증된다.
 
체제 전환된 현재에 대해 동구의 많은 민중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회귀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일지는 의문이다. 남한 민중들이 경제가 어려울 때 박정희 시절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그리워하는 것에 비교하면 비슷한 비유가 될까.
 
자본주의의 병폐를 철저히 분석하고 이를 넘어서는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과제이겠지만, 동유럽이 가졌던 문제점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음... 이런 코멘트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냥 이대로 베를린장벽이 붕괴된지 20년이 되는 이 날을 그냥 넘기는 것이 거시기해서 끄적이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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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열정 되살려 “우리가 인민” 함성 (한겨레, 조일준 기자, 2009-11-10 오후 10:22:42)
각국 정상등 10만여명 참여 ‘자유의 축제’ 열려
도미노 1천개 쓰러뜨리며 통일의 의미 되새겨

 
인파 속에선 “비어 진트 다스 폴크!”(Wir sind das Volk·우리가 인민이다)란 외침이 다시 한 번 터져나왔다. 20년 전 동독 시민들이 군인들에 둘러싸였을 때 두려움에 맞서 외쳤던 구호다. 당시 동독 시민들의 시위를 이끌었던 요아힘 가우크 목사는 “‘우리가 인민’이라는 주제는 독일뿐 아니라 자유와 민주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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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 20년 동독을 가다]<上>상전벽해 뒤의 그림자 (동아, 베를린=송평인 특파원, 2009-10-13 02:50)
베를린 건물 쑥쑥 ‘유럽최대 공사판’ 드레스덴 옛 동독 비포장로 그대로
 
베를린에서 만난 옛 동독 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의 기자 페터 키르샤이 씨에게 궁금했던 그 풍차에 대해 물었을 때 “동독 지역에 어떻게 해도 공장이 들어서지 않자 정부는 재생에너지 산업을 키운다는 아이디어를 냈다”며 “그러나 풍차가 신성장동력으로선 턱없이 부족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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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 20년 동독을 가다]<中>동독인 마음속의 응어리 (동아, 베를린·라이프치히=송평인 특파원, 2009-10-14 02:57)
 
“옷차림이나 말투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서독인은 신경 써서 옷을 입는 스타일이고 동독인은 수수하게 입는다.”
 
“탈출을 목적으로 결혼했던 남편과는 일찌감치 헤어졌고 혼자 살면서 식당종업원, 광고대행사 직원, 스포츠제품 판매원, 재봉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지금은 재취업하려고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하다. 몸이 건강하고 가고 싶은 극장이나 식당에도 가고 좋아하는 춤도 배운다. 동독 시절엔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었다. 300유로짜리 월세에 살지만 동독 시절처럼 쥐가 시끄럽게 굴어 잠을 잘 수 없는 날도 없다.”
 
“동독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이라는 것이 통일의 요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시위대는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동독의 주권은 우리 인민에게 있다)’를 외쳤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 붕괴를 전후로 ‘우리는 한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를 외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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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 20년 동독을 가다]<下·끝> (동아, 파리=송평인 특파원, 2009-10-17 02:30)
“동서독 정신적 통일까진 시간 더 걸릴것”
통일조약 성사 주인공 쇼이블레 장관 인터뷰
통일비용 많이 들었지만 성공기준은 돈 아닌 평화
‘분단 40년’ 벽 존재해도 ‘통일 20년’ 큰 진전이뤄

 
“통일의 성공 기준은 ‘돈’이 아니다. 오늘날 모든 독일인이 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때 생명까지 위협했던 적대적이고 중무장한 두 블록의 어느 한쪽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좌파 언론인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과 달리 동독은 서독에 병합되지 않았다. 동독은 기본법 23조(동독 지역은 서독에 가입함으로써 기본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내용)에 따라 서독에 가입한 것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1990년 3월 18일 동독 자유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한 정당들은 기본법 23조에 따른 통일의 ‘패스트 트랙(fast track)’을 원했다. 그해 8월 23일 동독 의회는 4분의 3의 찬성으로 동독의 서독 가입을 통과시켰다. 새 통일헌법을 제정하는 게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상황을 그르쳤을 것이다. 협상에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위험한 상황도 나왔을 것이다. 게다가 소련이 얼마나 오래 참아 줄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재빨리 기회를 잡아야 했다.”
 
“우리는 동독 경제의 건전성을 과대평가했고 그 때문에 수리하는 데 드는 비용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했다.”
 
―서독이 동독에 많은 경제적 지원을 하고 교류를 한 것이 장벽 붕괴에 기여했는가.
“그렇다. 서독인들이 동독인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여행이나 우편으로 많은 사람이 접촉하도록 했고 스포츠 교류, 문화 교류, 도시 간 자매결연에도 힘썼다. 방송의 힘도 간과할 수 없다. 동독인들은 대부분 서독 TV를 보았고 서독 라디오를 들었다. 한 언론인은 ‘통일은 매일 TV 앞에서 일어났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87년엔 동독 주민 100만 명이 서독을 방문했다. 많은 동독인이 당의 선전과는 다른 서독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 불만을 품게 됐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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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① 새로운 세계의 시작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2009-10-25 07:45)
20세기 후반 세계사 최대의 정치적 변혁
양극체제 종식..탈냉전 다극체제 출발점

 
동독의 시민 혁명은 1989년 7월 헝가리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면서 신호탄이 올라갔다. 이어 9월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 촛불 시위'를 계기로 동독 개혁의 바람은 태풍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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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② 필연이 만든 우연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2009/10/25 07:45)
"설익은 발표.선정보도가 촉발한 돌발적 사건"
자유와 개혁 향한 의지가 빚은 역사적 필연

 
1989년 11월9일 오후 7시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공산당) 정치국원이자 선전담당 비서였던 귄터 샤보브스키는 당사에서 열린 기자회견 막바지에 호주머니에서 메모 한 장을 꺼내 아침에 있었던 내각의 결정 사항을 낭독했다. "앞으로는 여행 동기나 친인척 관계 같은 조건을 제시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외국여행을 신청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출국비자가 발급될 것입니다." 역사적인 여행 자유화에 관한 발표였지만 실제로는 행정 절차에 관한, 어찌 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단지 출국비자를 발급하는 새로운 기관을 설립한다는 조항이 반발을 야기하자 내각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포고령의 형태로 출국비자 발급에 별다른 제한이 없다는 점을 설명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안사(ANSA) 통신의 리카르도 에르만 특파원이 "언제부터요?"하고 물은 것이 '화근'이었다.
 
공산 체제의 아성이 대규모 시위로 비틀거리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 한 법안, 그중에서도 한 조항의 내용을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던 샤보브스키는 일순 머뭇거리다가 즉흥적으로 "지금부터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조용히 끝날 수도 있었던 그해 11월9일이 20세기 후반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샤보브스키의 '지금부터'라는 말에 주목한 언론은 수 분 만에 다소 과장되고 선정적인 표현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긴급뉴스를 전 세계에 타전했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TV 중계와 뉴스로 소식을 들은 동베를린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가는 검문소로 몰려들었고 그 수는 금세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이 검문소 건너편에는 지금은 베를린의 관광명소가 된 미군의 '체크포인트 찰리(찰리 검문소)'가 세워져 있었다. 주민들의 강한 통행 요구에 압박을 받던 동독 경비병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상부의 지시가 없자 우왕좌왕하던 끝에 결국 밤 10시쯤 한 장교의 결단으로 서쪽으로 가는 출입문을 열었다. 찰리 검문소에서 만난 동.서베를린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포옹했고 28년간 세계를 양분했던 베를린 장벽은 동서독 분단, 동서 냉전의 상징에서 순식간에 쪼개서 기념품으로나 쓸 만한 콘크리트 더미로 돌변했다.
 
이날의 '실언'으로 이듬해 초 공산당에서 쫓겨났던 샤보브스키는 최근 인터뷰에서 "여행 자유화는 인도주의가 아닌 대중의 압력에 따른 전술적 결정이었다"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11월9일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아주 운이 좋았다"면서 이 일이 있은 후 슈타지(동독비밀경찰) 요원이 "샤보브스키 동지, 국경이 열렸소. 그런데 보고할 게 없소"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날의 사건은 베를린 장벽 붕괴를 재촉한 도화선일 뿐 동서독 통일과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는 역사적 필연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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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③ 장벽을 찾아서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2009/10/25 07:45)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내달 복원 완료
경비초소는 박물관, 분단지역은 상업중심지 변신

 
베를린 장벽은 붕괴 이후 거의 모든 곳에서 자취를 감췄다. 무너진 벽의 부스러기는 쓰레기로 처리됐고 일부는 기념을 위해 장벽을 망치로 조각내 가져가는 소위 '월 페커(Wall Pecker)'에 의해 사라졌다. 일부 남은 장벽 중 가장 긴 구간(1.3㎞)은 1990년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로 변신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형제의 키스'는 이미 복원이 완료됐다. 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이 자신이 그린 이 작품은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입맞춤 장면을 해학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주여, 이 치명적인 사랑을 이겨내고 살아남게 도와주소서'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라피티와 낙서로 가득한 장벽의 건너편에는 동독 시절 축구 경기가 열리곤 했던 동베를린의 스포츠 경기장 조명탑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난 군나르 바그너(35) 씨는 "어렸을 적 이곳에 와서 서베를린의 현대적 모습을 보고 동경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구동독 지역인 바이마르 출신으로 지금은 개인 사업체를 운영 중인 그는 "일부 동독 주민들이 과거에 가졌던 것 중 일부를 잃게 돼 불만을 표시하지만 대다수는 통일로 행복해졌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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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④ 동유럽의 변화 (부다페스트=연합뉴스, 황정우 특파원, 2009/10/25 07:45)
시장경제체제로 전환 후 경제 급성장
취약 경제구조.빈부격차 확대로 갈등
 
동·서독 베를린 장벽 붕괴를 계기로 시작된 동유럽의 체제전환이 어느덧 20주년을 맞고 있다. 그간 시장경제를 일궈온 오늘의 동유럽에서 과거 계획경제의 공산체제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체제 하 낙후한 지역이란 뜻이 배어 있는 '동유럽'이라는 용어를 떼어내려 애쓰고 있다. 서유럽과 다를 게 없는 그냥 유럽국가이며 유러피안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번 세계경제 위기에서 동유럽은 대체로 서유럽에 비해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서유럽에 비해 취약한 경제기반과 구조 때문이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동유럽 경제가 국제금융시장과 세계경제에 이미 완전히 편입돼 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체제전환 이후 성장의 과실만 따라온 게 아니다. 시장경제의 이면에 드리게 마련인 빈부격차가 동유럽을 파고들고 있다. 부다페스트에 사는 토마스 오스테르레이쳐(48) 씨는 지난 20년간 헝가리의 주된 변화 중 하나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꼽았다. 그는 "당시에도 잘 살던 사람은 더욱 잘살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예전보다 못 살고 있다. 중산층이 없어졌다"고 비판했다.
 
제법 큰 청소회사를 운영하다 실패하고 10년 동안 엑스트라 배우 일을 하며 사는 차바 에데르(58) 씨도 변화에 적응을 못해 한 번 낙오했는데 국가에서 아무런 보호막도 돼주지 못한다며 서민들이 살기 어려워졌다고 토로했다. 차바 씨는 체제전환 이후 경제가 좋아졌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연금은 예나 지금이나 그저 그만하고, 의료보장은 더 나빠졌다. 또 1989년 이전엔 3년 이상 일하면 제 발로 나가지 않는 한 직장에 계속 다닐 수 있었는데 지금은 내일을 모르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교직원인 부인의 월급 15만포린트를 포함해 한 달 18만포린트(120만원)가 총수입이라면서 연금이 나오는 62세 이후에도 계속 일거리를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영업자 스페케르 게자 요제프(47) 씨도 "헝가리 경제상황이 20년 전보다 낫다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예전보다 일은 더 많이 하고, 또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고 있다"면서 "과거엔 여유 시간도 더 많았고 실업 걱정도 안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자신을 중산층으로 믿는 두 자녀의 아버지인 그는 "만일 내가 지금 가정을 꾸린다면 아이를 갖지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헝가리 경제가 성장했는데도 이들은 예전보다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헝가리 등 동유럽 경제는 체제전환 이후 급성장을 해왔다. 1997~2008년 사이 1인당 국내총생산(1인당 GDP-PPS.유로스타트 기준)이 헝가리는 EU 27개국 평균치의 53%에서 63%로 상승했다. 그러나 유럽 내에서 서유럽과의, 그리고 자국 내에서의 계층 간 격차는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른 박탈감이 불만의 가장 큰 원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4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헝가리의 경우 0.273(1990년)에서 0.291(2005년)로 높아져 소득불평등도가 심화했다.
 
다른 동유럽 경제도 마찬가지다. 체코는 0.232(1990년)→0.268(2005), 폴란드는 0.316(2000년)→0.372(2005년)로 상승했다. 폴란드를 제외하고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의 지니계수가 OECD 24개국 평균치(0.313, 2005년)보다는 낮지만 성장의 그늘에서 빈부격차 확대가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체코의 1인당 GDP는 EU 27개국 평균치 대비 73%(1997년)에서 80%(2008년)로 높아졌고 같은 기간 슬로바키아는 51%에서 72%로, 폴란드는 47%에서 57%로 각각 상승하는 등 고속 성장을 지속해왔다.
 
문제는 이번 금융위기가 동유럽의 빈부격차 확대와 상대적 박탈감을 가속할 공산이 커 보인다는 점이다. 동유럽 국가들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은 대가로 재정적자 축소를 약속했고 이를 위해 공적서비스 등 사회안전망 지출에 손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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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⑤ 러시아의 부활 (모스크바=연합뉴스, 남현호 특파원, 2009/10/25 07:45)
푸틴 이후 경제성장.강국 위상 회복
정치적, 경제적 민주화 등 과제

 
정작 소련은 사회주의 붕괴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지 몰락 속도는 동유럽에 비해 더디게 진행되는 아이러니한 장면이 연출됐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체제 전환에 따른 상당한 후유증을 감내해야 했다. 기업들이 사유화되고 가격결정이 시장 자율에 맡겨지면서 물가가 폭등했다.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하지 못한 은행들은 문을 닫았고 빈부 격차는 갈수록 벌어졌다. 급기야 러시아 경제는 1998년 디폴트(지급 불이행)선언과 함께 파산 직전까지 갔다. 민족분열도 심해져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체첸 등 곳곳에서 유혈 전쟁이 터졌다. 이런 불안정한 정치, 경제 상황은 블라디미르 푸틴 체제가 출범하기 전인 1999년 말까지 계속됐다.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로 10년 만에 위기를 맞고 있지만, 소련 해체 후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운 경험은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특히 푸틴의 뒤를 이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자유시장주의를 러시아에 뿌리내리기 위해 추진 중인 각종 경제와 정치 개혁 작업은 러시아인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게 하고 있다.
 
물론 한편에서는 아직 서방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러시아에는 없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관료와 과두재벌 등 소련 시절과는 또 다른 소수특권층의 전횡과 빈부격차 심화 등도 큰 사회적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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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⑥ 메지에르 前동독총리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2009/10/25 07:45)
마지막 동독총리.."한국판 헬싱키 프로세스 필요"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피해야"

 
--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 당시 가장 힘들었고,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은 토지 소유권 문제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많은 토지가 국가에 몰수됐다. 40년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몰수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모두 돌려주기로 했지만, 현실에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오히려 상황을 그대로 놔두고 보상을 하는 방식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독일 기본법(헌법)에 위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헌법재판소가 용인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토지 소유권 반환 문제가 가장 어려웠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북한도 개인 소유의 토지를 몰수했을 것이다. 이 토지를 모두 돌려주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독일의 경우 지난 20년간 약 120만 건의 토지소유권 반환절차를 완료했다. 물론 아직 처리되지 않은 것도 있고 소송이 진행 중인 건도 있다. 이 문제를 제외한다면 다른 복잡했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잘 해결된 편이라고 본다.
 
또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우리가 동유럽 국가들과 교역을 유지하는 데 좀 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는 것이다. 통일 이후 구동독 지역의 실업률이 높은데, 그 원인 중 하나는 동독이 갖고 있던 동구권 시장의 붕괴라고 생각한다.
 
▲ 경제적으로 보면 성공적이지만 사람들의 의식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 구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서독지역보다 2배 이상 높은 상황에서 구동독 출신들은 자신이 `2류 시민'이라고 느끼고 있다. 큰 문제다. 대학생 같은 젊은 세대는 동서독 시민 간의 의식격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중장년층은 간극을 느끼고 있으며 문화적으로, 생활 감각 상으로 서로 낯설어하고 있다. 공산주의 이념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하게 많은 사람의 의식을 형성하고 좌우했다. 서독인들을 부르주아로, 서독을 완전히 다른 문명으로 인식하게 했다. 이런 점에서 현실적으로 독일은 여전히 2개의 나라라고 할 수도 있다. 구동독 지역에서는 좌파당의 세력이 강한 반면 서독지역에서는 좌파당의 영향력을 거의 볼 수 없다. 베를린만 하더라도 서베를린 지역은 기민당을 지지하는 반면 동베를린은 좌파정당들이 득세하고 있다.
 
-- 구동독 지역에서 좌파당의 지지세가 강한 것은 동독에 대한 향수 때문인가.
▲ 동독에 대한 향수라기보다는 세계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구동독 시민은 세계화에 적절히 적응하지 못했다. 구동독의 세계는 좁았지만 현재의 세계는 너무 넓다. 구동독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현재의 세계는 적응하기가 힘들다. 대부분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서독시민에 비해 구동독 주민은 외국어 구사능력이 부족하고, 외부세계는 너무 넓고 낯설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구동독 체제에서 성장한 중장년층만이 갖고 있는 문제이다. 현재의 젊은 세대는 동서독 간 지역차이를 느낄 수 없다. 동서독 통합 과정은 1-2세대가 지나야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한 세대가 지났고 또 한 세대, 즉 향후 20년이 또 흐르면 동서독 통합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대교체가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 통일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남북한도 군축으로 나아가야 하며 상호 군사적 위협을 포기해야 한다. 한국은 이미 전쟁의 비극을 겪었고 그로 인해 분단은 더욱 고착화됐다. 이러한 점에서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남북 간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 또 북한의 기아를 해결해야 한다. 북한 주민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아동들은 영양실조로 고통을 받고 있다. 기아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북한 주민들은 한국으로 이주할 것이다. 통독 당시 동독 시민의 소득은 서독 시민의 40%에 불과했다. 만일 소득이 60%만 됐으면 동독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북한의 소득수준을 개선해 남쪽으로 이주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
 
독일에 비해 한국은 한 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 한국은 자원이 부족한 대신 기술 노하우가 있는 반면 북한은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북한의 자원을 활용함으로써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기술과 자원이 결합할 때 이루어질 상황은 매우 흥미롭다. 한국이 석탄, 철광석 등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에 투자한다면 북한 경제의 발전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북한 내의 관광자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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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⑦ 쇼이블레 독일 내무장관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2009/10/25 07:45)
통독 협정 주역.."교류 활성화가 통일의 길"
"정보사회에서 고립된 체제 유지 어려워"

 
한국 정부에 해주고 싶은 말은, 독일의 경험으로 볼 때 북한과 좀 더 많이 교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독일도 분단 당시에는 최대한 많은 교류를 위해 노력했다. 상호방문과 서신교환을 위해 노력했고, 동독 주민들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언론보도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유를 억누르는 정권은 스스로 고립되려고 한다. 자유는 전염병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서독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도 북한 정권의 이해관계를 이용해야 한다. 서독은 동독 정권이 여행의 자유, 서독과의 서신 및 통신 교환을 확대하는 등 인도적 조치를 취한다면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유도했다. 원조를 제공하고 상응한 조치를 이끌어내는 데에서 이미 협력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한국정부에 해줄 수 있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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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⑧ 독일문제연구소 울 박사 (모스크바=연합뉴스, 남현호 특파원, 2009/10/25 07:45)
"장벽 붕괴로 냉전 종식, 공산주의 몰락"
"미.러 등 외교.군사마찰은 新냉전 아니다"

 
 "냉전은 이미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끝났으며, 지금 새로운 냉전을 얘기할 이유가 없다." 모스크바 소재 독일문제연구소 마티우스 울 박사(39)는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최근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고 현재 국제사회에서 나타나는 군사적, 외교적 마찰은 항상 일어나는 수준의 문제로 굳이 이를 신냉전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인해 유럽의 민주화가 시작됐다. 베를린 장벽 붕괴가 아니었다면 동구권에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현재 많은 나라가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완벽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의문점을 제기한다. 완벽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달성될지 또 가능은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 통일에 대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한 나라의 통일은 특정 세력이 기득권을 잃는 것을 걱정할 만한 수준의 일이 아니다. 통일에 앞서 경제적인 피해나 어떤 손해를 볼 것인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역사적으로 두 나라는 같은 나라고 두 나라는 합쳐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서둘러서는 안 된다. 일단 북한의 체제가 바뀌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결과물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현재 한반도 상황을 고려한다면 통일이 언제 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통일은 꼭 되어야 하고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갈라서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독일은 이미 이런 경험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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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변화” 외쳤던 곳 신나치즘 시위로 몸살 (한겨레, 라이프치히/글·사진 조일준 기자, 2009-10-28 오전 08:12:46)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① 독일, 라이프치히 민주화시위 현장
이민자 혐오 네오나치 반파시즘 단체와 대립
 
라이프치히는 꼭 20년 전 가을 옛 동독 시절,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기도회를 중심으로 “자유” “변화” “우리가 인민이다”를 외쳤던 ‘민주와 저항의 도시’다.
 
각종 깃발과 커다란 인형들, 시위 차량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남미풍의 음악과 참가자들의 ’와~’ 하는 함성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체 게바라의 초상이 그려진 깃발과 히틀러 망령 부활 금지를 풍자한 깃발들이 눈에 들어왔다. 진보단체 시위대였다. 참가자들은 인터넷 검열 철폐를 주창하는 해적당, 환경운동 단체, 사회민주주의자, 좌파 운동가들까지 다양했다. 그들은 음악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구호를 외치며 즐겁게 시위를 했다. 러시아에서 왔다는 한 이주노동자는 기자에게 서투른 영어로 뭔가 이야기하려 애썼다. 다양한 그룹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반나치즘, 반파시즘 연대감이었다.
 
경찰 저지선 저편에는 네오나치 시위대가 있었다. 이들의 시위 계획은 이미 라이프치히를 며칠 전부터 긴장시켜 왔다. 드레스덴 등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시위는 있었지만, ‘자유와 연대’의 상징인 라이프치히에서의 네오나치 시위는 3년 만이었기 때문이다. 검은색 후드점퍼를 입은 네오나치 정당인 독일국가민주당(NPD) 청년조직의 시위는 애초 예상됐던 600명의 2배인 1200명으로 순식간에 불어났다. 흩뿌리는 빗방울에 아랑곳없이 열기가 고조되던 오후 5시께, 경찰이 물대포를 쏘며 네오나치 해산에 나섰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왔다는 한스 슈나이더(25)는 “네오나치는 배타적 인종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라이프치히 정신은 자유와 연대다. 오늘 우리가 나치를 굴복시켰다”며 “정말 대단하다!”를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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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명소·통일학교된 분단의 흔적 (한겨레, 베를린/글·사진 조일준 기자, 2009-10-28 오전 08:21:46)
베를린 곳곳 전시회…장벽기념관도 40만여명 방문
완전한 통합 멀어…“화합 안될 것 같다” 42% 대답

 
상처의 온전한 치유와 통합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난달 독일 여론조사기관인 이포스연구소의 조사를 보면, “통일이 옳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89%가 “그렇다”고 답했으나, “통일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됐느냐”는 물음엔 35%만 그렇다고 했다. 독일 일간 <디벨트>가 지난 20일 보도한 여론조사에선 “동·서독 양 지역이 앞으로 잘 화합할 것으로 보느냐”는 물음에 낙관이 58%로 많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비관도 42%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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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독 민주화 진앙지에서 20년전 ‘촛불집회’ 재현 (한겨레, 라이프치히/조일준 기자, 2009-10-28 오전 09:50:52)
니콜라이 교회에 10만여명 모여 ‘월요기도회’ 기념
산증인 퓌러 목사 “자유 얻었지만 분배문제 박탈감”

 
퓌러 목사는 “동독인들은 그토록 원하던 사상의 자유와 민주적인 선거를 얻었고 경제 규모도 커졌지만, 분배 문제로 박탈감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동독지역의 50대 이상 장년층에는 ‘옛날이 더 살기 좋았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실업이 없고, 여가를 누릴 수 있고, 공동체 정서가 있고,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독 출신으로 라이프치히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마르틴 로스(26)는 “아직은 계급적 차이나 갈등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을 바꾸기를 원한다”며 “진정한 통일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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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연대노조 ‘투사’…생계 걱정에 한숨만 (한겨레, 그단스크/글·사진 조일준 기자, 2009-10-29 오후 09:18:26)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② 폴란드, 연대노조의 터전 그단스크 레닌조선소

 
스테로노프스키는 “옛날엔 월급은 많았지만 살 게 없었고, 지금은 돈이 없는데 물건은 많아졌다”고 말했다. “미래가 불안하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도 했다. 대화를 나눈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자전거를 탄 작업감독자가 다가와 “일하지 않고 뭐하느냐”고 소리쳤다. 늙은 노동자는 힐끔 이마를 훔친 뒤 다시 삽을 집어들고 허리를 굽혔다.
 
야체크 리비츠키 연대노조 전국위원회 사무총장은 “자유와 민주적 권리는 이뤘지만 급격한 체제전환의 충격으로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다. 옛 기득권층이 여전히 권력과 돈을 쥐고 있고 빈부격차가 극도로 커진 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중년의 택시 운전사는 “정부와 국민간에 믿음이 중요한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다. 옛날보다 좋아졌다고 하지만 정부의 부패가 너무 심하고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않는다”며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정부가 뭐든지 내다팔아서 국민들의 일자리가 없다. 젊은이들이 결혼하고 나서도 일자리를 찾아 따로 사는 경우가 많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6월 국내 한 민간 경제연구소가 OECD 회원국 27개국을 대상으로 산출한 사회갈등 지수 순위는 폴란드가 터키에 이어 2위였다(한국은 4위다). 반면 국민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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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안정감 잃어” vs “개인 가능성 발휘” (한겨레, 바르샤바/글·사진 조일준 기자, 2009-10-29 오후 09:01:07)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20년 변화’ 세대별 시각차
 
엘리자비에타(50)= 공산 시절엔 가게에 물건들도 없고 외국에 나살 수도 없었다. 개인이 능력을 발휘할 수도, 인정을 받을 수도 없었다. 체제가 바뀌어서 개인들이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다니엘(30)=옛날엔 자신과 가족을 배려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집도 신청하면 공짜로 제공됐지만 기다렸다가 20년 뒤에나 받는다. 지금은 당장 집을 구할 수 있고 20년 뒤에 갚을 수 있는 게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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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셔 이사장 “장벽은 높은 게 아니라 깊었다” (한겨레, 베를린/글·사진 조일준 기자, 2009-10-30 오후 04:34:32)
[만프레드 피셔 베를린장벽기념재단 이사장 인터뷰]
“후대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건 파괴된 삶과 상처가 있기 때문”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① 독일, 라이프치히 민주화시위 현장 

 
베를린장벽은 1989년 11월9일 대부분 걷어치워졌지만, 일부는 역사적 기념의 현장으로 보존되고 있다. 장벽기념재단이 관리하는 장벽기념관도 그 일부의 앞에 있다. 이 재단의 만프레드 피셔(MANFRED FISHER) 이사장은 베를린 장벽이 동서를 가르고 있던 시절, 장벽 바로 앞의 동독 땅이었던 동베를린 베르나워 거리에 자리잡은 ‘화해의 교회’의 목사이기도 하다. 지난 15일 만프레드 피셔 이사장을 장벽기념관에서 만났다. 
 
-기념재단 이사진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재단이사는 모두 6명이다. 독일 연방정부 1명, 베를린시 1명, 학계 1명, 교회(종교계) 1명 등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최근 들어 장벽기념관 방문객이 늘고 있는가?
=베를린장벽 기념관을 찾은 방문객은 2007년 26만5000명, 2008년 30만5000명이었고, 올해 들어선 10월 중순 현재에만 40만명에 육박해 지난해 보다 30%이상 늘었다. 
 
-방문객들이 방명록에 남기는 문구에 어떤 특징이 있나?
=독일인들은 장벽에 얽힌 기억과 경험 등 자기 주변의 구체적 이야기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 반면 외국인들은 현장 자체가 주는 깊은 인상과 감명을 남긴다. 올해 들어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 젊은이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방문객들은 베를린장벽 붕괴의 현장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방문객 대다수는 어떤 신화적 이미지나 상상을 갖고 이 곳을 찾는다. 권력, 동독 공산정권, 폭력, 살인, 분단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갖고 물결처럼 휩쓸려 온다. 영화나 포스터, 사진으로만 봤던 극적인 장면만 머릿속에 담고 왔다가, 정작 이곳 현장을 보고 실망한다. 아니 장벽이랄 것도 없잖아, 이렇게 작은 것은 것이 우리를, 동서독을 가르고 있었던 거야? 한다.
장벽은 높았던 게 아니라 깊었던 것이다. 위험하고 두려웠던 것은 장벽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1961년 처음 세워진 장벽은 해가 바뀔때마다 두터워졌고 경비도 삼엄해졌다. 장벽 자체가 하나의 과정이었다. 장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공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독 정권의 문제는 인민들이 더 이상 그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선거권도, 자유도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생기기 이전에는 동-서독 간에 왕래가 가능했다. 동독 정권은 장벽을 세우고 인민을 가둬두면 억압적 지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장벽은 사람들이 동독을 빠져나가려 했던 이유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장벽의 위력과 단절감은 대단히 크지 않았나?
=장벽이 공고하면 할수록 저항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장벽을 평화적으로 극복할 세력이 동독 지역에서 생겼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드문 일이다. 1989년 가을에 수천, 수만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서서 “우리가 인민이다”라고 외치며 행진했다. 시위는 평화적이었고, 군대와 경찰의 총격은 없었다. 시위대 중에는 공산당 간부들의 자녀도 있었다. 권력이 내부에서 스스로 무너졌다. 사람들의 공포심이 바로 권력의 도구이자 무기다. 그러나 당시 시위에 나선 시민들에게는 공포심보다 용기가 더 컸다.    
 
-장벽기념관의 교육적 효과도 클 것으로 보인다.
=모든 기념시설은 정치교육의 현장이다. 가장 좋은 것은 부모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와서 당시의 일과 교훈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것이 산교육이다. 이 곳에선 방문객들을 위한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독일인 뿐 아니라 외국인을 위해 여러나라 언어로 설명한다. 베를린 장벽 밑으로 터널을 만들어 탈출을 돕던 서독인, 동독에서 민주화 시위를 이끌었던 반체제 인사 등 당시를 직접 겪었던 사람들의 증언도 이해를 돕는다. 
 
-장벽기념재단이 과거의 아픈 기억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후대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 곳에 파괴된 삶과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다. 동독 시절엔 우등생이라 할지라도 냉전과 대립을 반대한다는 뜻의 평화 상징마크를 달고 다녔던 학생들은 퇴학을 당했고, 대학 진학의 길이 막혀 직업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한마디로 사회적 출세의 길이 막혔다. 왜그랬던가,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이룬 것은 당시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1961과 1987이라는 두 개의 숫자, 2개의 메시지를 가르친다. 그 메시지는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해인 1961은 “결코 망각하지 말자”는 다짐의 숫자다. 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7은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는 뜻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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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따지면 끝이 없어요…사람보고 살아야죠” (한겨레, 사라예보/글·사진 김순배 기자, 2009-11-02 오후 08:21:52)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③ 보스니아, 내전 상처 속 공존의 사라예보
세르비아계 남편-보스니아계 부인
예배는 따로따로
27년째 행복가정

 
부부는 옛날을 그리워했다. “지금은 옛날과 비교할 수가 없어요. 전혀, 전혀 못해요. 옛날에는 일자리가 있고 먹고 살기가 좋았어요. 제가 청소부였는데 늘 지갑에 돈이 있었어요. 밤새도록 마셔도 아침에 돈이 남았다니까요.”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는 브란코는 “지금은 한달한달 살아가는 게 고민”이라고 말했다. 부부는 특별히 차려입은 듯 했지만 어딘가 꾀죄죄했다. 저녁으로 나온 쇠고기 요리의 접시가 금새 비었다. 브란코는 “대통령이 세명이나 되지만, 한명만 있는 것보다 못해요”라며 “정치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화가 치민 듯 내뱉었다.
 
오랜 세월 민족과 종교를 넘어선 공존의 도시 사라예보로 그들은 돌아갈 수 있을까? 브란코가 말했다. “어느 민족이냐, 무슨 종교냐를 따지면 끝이 없어요. 사람이 좋은지 안좋은지 보고 사귀어야죠. 그러면 예전처럼 평화로운 사라예보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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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한지붕 세민족, 학살상처 딛고 화해로 (한겨레, 사라예보·모스타르/글·사진 김순배 기자, 2009-11-02 오후 09:42:31)
“용서하는게 낫다” 일상속 사라지는 야만
‘1국가-2체제-3민족’ 현실에 갈등도 여전

 
내전을 끝낸 1995년 데이턴 평화협정은 보스니아계(이슬람)와 크로아티아계(가톨릭), 세르비아계(세르비아 정교)가 섞여 살던 보스니아 안에 세르비아계로 이뤄진 스르프스카공화국을 새로 만들었다. 보스니아는 1국가 2체제로 갈라졌고, 지금은 3개 민족 3명의 대통령이 8개월마다 번갈아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사라예보에서 택시를 타고 20분 남짓, 산을 넘자 스르프스카공화국이었다. 세르비아계의 반응은 달랐다. 50대의 랑코 바트미츠는 “밀로셰비치가 아니라,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한 게 문제”라고 말했다. 대형 슈퍼에서 만난 이들 가운데엔 “우리도 가족이 숨진 희생자다”라는 대답이 많았다.
 
버스는 3시간 가까이 계곡을 따라 돌아, 보스니아 남서쪽 모스타르에 멈췄다. 세르비아계에 맞서 함께 싸웠던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계가 ‘스타리 모스트’ 다리를 사이에 두고 다시 갈라져, 서로 죽이고 죽었던 곳이다. 한 70대 노인은 “다리를 잘 건너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슬람계가 다리 건너편의 집을 바꿀 수도 팔 수도 없게 하고 있다” “크로아티아계가 자기네 사람에게만 일자리를 준다”는 불만이 엇갈렸다.
 
이렇게 전쟁은 상처로 남았지만 일상은 계속됐다. 기념품을 팔던 한 모스타르 상인이 말했다. “평생을 원수처럼 살 수는 없잖아요. 같이 먹고살아야죠.” 전쟁 중에 무너진 모스타르의 다리는 2004년 복원됐고, 서로를 겨눴던 총탄은 볼펜으로 만들어져 기념품으로 팔린다. 점심을 먹은 식당의 주인은 크로아티아계이지만 이슬람계 지역에서 장사를 한다. 이슬람 사원에서 햇볕을 쬐던 60대 이슬람계 노인은 “제일 친한 친구가 크로아티아계다. 전쟁으로 가족이 죽었지만 증오하지는 않는다. 싸우는 것보다 용서가 낫다”고 말했다.
 
다시 사라예보로 왔다. 골목골목 내전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바닥 위로 20대 청년들이 시내로 몰려들었다. 1㎞ 안에 이슬람 사원, 가톨릭 성당, 정교회 성당, 유대교회당이 잇따라 나타났다. 성당의 종소리와 사원의 예배 소리가 뒤섞였다. 가톨릭계라는 50대 블라도 유리체는 “진짜 종교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정치인들만 우리를 가만두면 된다”고 말했다. 거리에서는 “전쟁이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인으로 나눴지 우리는 모두 사라예보인이다” “정치가들이 보스니아를 갈라놓았을 뿐이다”라는 대답도 자주 들었다. 시내 공원에는 유고를 하나로 묶어 세웠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의 책과 사진이 팔렸다. 사라예보든, 스르프스카공화국이든, 모스타르의 다리를 건너든 건너지 않든 카페에서 담배를 지독하게 빨아대는 것은 똑같았다. 보스니아에 진정 평화는 왔는가? 사라예보에서 4년 남짓 산 일본인 유학생이 말했다. “누구는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누구는 평화롭게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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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사라진 거리 ‘넘치는 자유’ 팍팍한 살림살이 ‘가득찬 한숨’ (한겨레, 부다페스트·부쿠레슈티/김순배 기자, 2009-11-03 오후 10:48:44)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④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처형 현장
루마니아·헝가리 일상속 뿌리내린 ‘자유’
경제위기에 빈부격차 확대 ‘불만’ 가득

 
이제 루마니아나 헝가리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독재와 탄압 대신 팍팍한 살림살이다. 트르고베슈떼역 앞 택시기사들은 “사는 게 정글이다. 빚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옛날은 줄을 섰지만 먹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가득찬 물건을 쳐다만볼 뿐이다”고 불평했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도 “가스와 전기가 없어 촛불에 우유를 데워 아이를 먹일만큼 어려웠다”는 과거보다는, 누구나 직장이 있던 젊은 시절을 자주 떠올렸다.
 
헝가리 특산품인 고추가 가득찬 부다페스트 중앙시장. 과일을 팔던 카탈린(60)은 “돈 없어서 못 사먹고, 휴가도 못가고 일해야 되는데 무슨 자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 물건을 사러온 손님은 “맞아, 맞아. 당연히 20년 전이 더 살기 좋았다”고 맞장구를 쳤다. 부다페스트와 부쿠레슈티의 거리에서 비슷한 불만을 수없이 들었다. 통역은 “평범한 헝가리 사람들이 한달에 100만원도 안되는 월급을 받아서, 물가는 한국 수준인 곳에서 살아가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말했다.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세계 경제위기 뒤 모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아 겨우 위기를 넘겼다. 루마니아 텔레비전에서는 연신 총리 불신임 관련 뉴스가 흘러나왔다. 1989년 체제전환 이후 처음으로 10월13일 정부가 의회에서 불신임을 받아, 에밀 보크 총리가 퇴진하게 됐다.
 
크리스토퍼 버르거 헝가리 열린사회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경쟁은 더 사악하지 않으면 가난해지는 시스템인데, 국민들은 아직 스스로의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며 “경쟁의 규칙이 공정하지 않아서 국민들은 경쟁을 꺼려한다”고 말했다. 다니엘 바부 루마니아 브쿠레슈티대 정치연구소장은 “중공업 등 중추적 산업을 외국에 팔아넘겼고, 정치 엘리트들의 전문성 결여가 오늘의 혼란을 낳고 향수만 부추겼다”며 “법과 제도에 기초한 정의가 확립되려면 20~40년은 더 걸릴 것이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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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우리는 자유만 말했지 책임은 얘기하지 않았다” (한겨레, 부다페스트/김순배 기자, 2009-11-03 오후 11:11:53)
헝가리 체제 전환 전문가 탈러시 헝가리 전략방위연구소장(48) 
 
-체제 전환 20년의 성과는?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유 체제를 받아들였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옳았음을 확인했다. 이제 사람들은 자유롭게 시위하고 유럽으로 공부하러 가고 여행도 할 수 있다. 20년 전보다 독립적인 경제를 갖춘 것도 성과다.”
 
-하지만 서민층 등의 불만은 높아 보인다.
“20년 전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만 말했지, 책임이 많아질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 부를 얻은 게 아니라, 부를 얻을 ‘기회를 얻었을 뿐’임을 모른다. 자본주의의 좋은 점과 사회주의의 안정을 동시에 가지려고만 한다. 10년도 못 타는 차를 10년 할부로 사고, 정부가 알아서 다 해주겠지라고 기대하는 식이다. 공산주의 시절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독일 등 최고 소득 수준의 나라와만 비교한다. 국민 상당수는 체제 전환 이후의 삶이 더 짧다. 20년은 긴 시간이 아니라 아주 짧은 시간이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헝가리가 구제금융을 받은 것은 일종의 ‘실패’로 볼 수 있지 않나?
“공산주의 시절 경제구조는 빚을 끌어와서 빚을 갚는 불안한 상태였다. 체제 전환 이후에도 소비와 생산의 간극을 계속 빚으로 메우면서, 사회를 지탱하기 어려웠다. 오늘의 경제위기는 체제 전환이 아니라, 전세계 금융위기에 따른 것이다. 정부가 긴축재정에 실패했고, 장기적 안목 없이 정책을 펴왔다.”
 
-옛 공산주의 엘리트의 지배가 계속된다는 비판이 있는데?
“선거에서 최고가 아니라 차악을 고른다. 공산당이 사회당으로 전환됐을 뿐, 낡은 공산정권이 정치·경제적 권력을 모두 갖고 있다. 권력층이 체제 전환 과정에서 주요 기업과 토지 등을 인수하고 쉽게 부자가 됐다. 정치인들은 20년간 똑같았고, 그래서 진정한 변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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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부르짖다 온기잃은 ‘프라하의 봄’ (한겨레, 프라하/ 글·사진 조일준 기자, 2009-11-05 오후 08:51:08)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⑤ 체코, 사라진 벨벳혁명의 프라하 
체코 벨벳혁명 뒤 고속성장 속 취약계층 양산
하벨 “시장논리 과신하고 도덕성 소홀은 실수” 

 
중세풍의 건축물들이 온전히 보전된 도시는 관광객들로 넘쳐난 반면, 벨벳혁명을 기념하는 다양한 전시회와 공연들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카를대학 부설 경제연구소의 루보미르 리잘 소장은 “10년 전만 해도 혁명 1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했지만, 지금은 (혁명이) 당연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역사 속 사건으로 기억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체코는 옛 공산권 국가들 중 가장 발빠르게 자본주의화에 성공한 나라로 꼽힌다. 1995년 동유럽 국가로는 최초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합류한 데 이어, 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이듬해부턴 경제성장이 급물살을 탔다. 2005년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섰다. 특히 그 해부터 2007년까지의 국내총생산(GDP)은 3년 연속 6%대의 초고속 성장을 했다.
 
주로 외자유치와 대유럽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체코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올해엔 10년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이 확실시된다. 그 타격은 사회적 취약계층에 쏠릴 수밖에 없다. 카를대학 경제연구소의 루보미르 리잘 소장은 “체코 경제는 대외 의존도가 높고 외부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과세와 복지 체계가 다른 나라들보다 잘 작동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산주의 경제체제에서 실업률은 제로였지만, 신기술 투자나 산업간 교류가 폐쇄적이고 비효율적이었다”며 “지금보다 나은 점도 있지만 경제성장에 도움되지 않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바츨라프 하벨 전 대통령은 지난 1일 영국의 런던정경대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1989년 벨벳혁명으로 집권했을 당시 (시장경제 논리만을 앞세운) 경제학자들을 과신하고 도덕성 강조에 소홀했던 실수를 저질렀다”고 반성했다. 그의 회고는 당시의 체코 뿐 아니라 오늘날 대다수 나라들에도 여전히 유효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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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후 동독인 ‘삶의 질’ 높아져 (경향, 김향미기자, 2009-11-05 18:08:08)
ㆍ동유럽 국가 ‘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경제상황은 대체로 악화

아이젠휘텐슈타트는 폴란드와 국경을 접한 항구도시로 철근 조립공업이 발달한 동독의 대표적인 상공업 도시였다. 그러나 2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주민 40%가 빠져나가면서 황폐한 도시로 전락했다. 이곳 아이젠휘텐슈타트에 ‘독일민주공화국 일상생활기록센터(GDR Daliy Life Documentation Centre)’가 있다. 1993년 개관한 이 센터에서는 과거 동독에서의 삶에 관한 여러 가지 문서와 물건 15만점을 수집, 전시해 놓고 있다. 대부분 동독인들이 기부한 물건과 자료다. 센터의 안드레아스 루드비히 박사는 “동독 출신 사람들은 이러한 물품들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고 있다”면서 “이러한 물품이 자신들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들을 끌어당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방문자들이 동독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것이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0년. 독일을 포함한 동유럽 국가는 현재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까.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가 최근 동유럽 9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동유럽인들은 대체로 민주주의로의 변화에 대해 수용도가 줄어들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동독인의 지지도는 91년 당시 91%였지만, 올해는 85%로 나타났다. 동유럽 국가들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대체로 반감이 증가했다. 헝가리의 경우 공산 국가로 있을 때보다 경제상황이 더 악화됐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72%를 차지했다. 불가리아는 62%, 러시아는 45%가 더 악화됐다고 대답했다. 이는 현재 각국의 경제상황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헝가리의 내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0.9%, 불가리아는 마이너스 2.5%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독일 통일에 대한 동독인들은 의식은 20년 전보다 다소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동독인의 31%만이 독일 통일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답해 91년 당시 45%보다 감소했다. 그러나 동독인 43%가 현재의 삶에 대해 만족한다고 답해 91년(15%)보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세대 간의 인식 차이도 나타났다. 러시아의 경우 18~29세의 젊은층은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65%가, 시장경제에 대해서는 63%가 지지한 반면 65세 이상은 민주주의나 시장경제에 대해 모두 27%만이 변화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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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벽 허물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다 (경향, 설원태 선임기자, 2009-11-05 18:11:39)
ㆍ‘통일독일’ 유럽통합 가속화 세계질서 재편
ㆍ연방공화국 탄생 60돌 ‘겹경사’ 베를린 활기
 
2009년은 독일인들에게 2중의 의미를 갖는다. 독일연방공화국 탄생 60주년을 맞기 때문이다. 60년 전인 49년 5월23일 독일인들은 그들의 헌법인 기본법(그룬트게제츠·Grundgesetz)을 공표함으로써 독일연방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장벽이 붕괴된 지 20년이 지난 오늘 베를린은 활력 넘치는 통일 독일의 새로운 수도로 거듭나고 있다. 과거 베를린을 동서로 갈라놓았던 장벽은 이제 흔적만 남아 있다. 역사가 남긴 흔적을 굳이 보고 싶다면 베를린의 ‘미테’ 구역에서 생생한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대사건 ‘독일 통일’은 세계화의 흐름을 타면서 동시에 세계적 발전과 변화를 이끌었다. 독일은 2000년 하노버에서 세계박람회를 열었고, 2006년 월드컵 대회를 개최해 세계인의 이목을 독일로 끌어들였다. 유럽연합은 2004년과 2007년의 결정을 통해 회원국을 12개국에서 27개국으로 크게 늘렸다. 연방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어젠다 2010’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복지제도의 개선과 실업문제 해결을 추진했다. 2005년 11월 독일에서는 동독 출신의 정치인 앙겔라 메르켈이 여성 정치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총리가 됐고,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가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됐다. 메르켈은 최근 선거 승리를 통해 연임에 성공했다. 요시카 피셔 전 독일 부총리 겸 외무장관(재임 98~2005·녹색당원)은 최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칼럼을 통해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냉전체제의 붕괴뿐만 아니라 세계화라는 새로운 흐름의 시작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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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어느 날 올 수 있어… 해법은 남북이 알 것” (경향, 설원태 선임기자, 2009-11-05 22:50:31)
ㆍ베를린 장벽 붕괴 20돌
ㆍ한스-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 인터뷰
ㆍ군비 절감해 남긴 돈 동독 등 재건 투자… 유럽·세계 변화 일궈
ㆍ한반도의 불행 절감… 통일 지원 요청땐 독일, 기꺼이 도울 것

 
경향신문은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2009년 11월9일)을 앞두고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와 특별 인터뷰를 했다. 자이트 대사는 장벽 붕괴가 독일과 유럽에 몰고온 엄청난 변화를 설명하면서 “독일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통일을 지지하며, 이를 위해 도움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베를린 장벽 붕괴에 관련된 개인적인 체험이 있습니까.
“89년 11월9일 저는 나이로비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소식을 접했습니다. 저는 가족에게는 나이로비에 남아 있으라고 말한 뒤 즉시 장벽 붕괴의 현장을 체험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평생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2주 동안 바이마르 등 동독 지역 몇 군데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여행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브란덴부르크 문 앞을 걸어보았고, 베를린 장벽에서 파쇄된 벽돌 조각들을 제 손으로 만졌습니다. 그것은 정말 감격스러웠고, 저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자이트 대사는 당시 감격이 되살아나는 듯 말하면서도 뭔가 목이 메는 듯했다.)
 
-한국 사람들은 가끔 한반도 통일 시에 드는 비용(통일 비용)을 거론하면서 통일에 대한 준비 또는 부담감을 얘기합니다. 독일인들은 ‘통일 비용’에 관해 어떤 얘기를 하고 있습니까.
“통일 비용을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많은 돈이 서독에서 동독으로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통일 비용은 단순히 얼마나 많은 돈이 서독에서 동독으로 흘러갔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통일 이후 모든 독일인들은 ‘연대세(solidarity tax)’를 내면서 동독 지역의 재건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서독인들은 냉전 시절에도 부유한 주(란트, Land)에서 가난한 주로 돈이 흘러가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한 정책의 하나이며, 독일의 기본법(그룬트게제츠, Grundgesetz)에 규정돼 있습니다. 이런 균형발전의 정책은 2차 대전 이래 독일 내에서 전해져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통일 독일은 수도를 서독의 수도였던 본에서 구동독 지역에 있는 베를린으로 옮겼습니다. 수십만명의 공무원, 외교관, 정치인 등이 베를린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베를린은 이제 명실상부한 통일 독일의 수도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통일 비용’을 좁게만 해석해선 안된다는 얘기인가요.
“사실 독일인들도 통일 비용의 범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재통일은 ‘유럽의 재통일’로 범위를 넓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유럽연합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가진 독일의 많은 돈이 통일 이후 동독 지역은 물론이고 동유럽 국가들(폴란드·체코·헝가리·발트 3국 등)에로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돈이 공산 통치 기간 피폐해 있던 이들 지역으로 흘러가 국가 재건의 바탕이 됐습니다. 독일의 통일은 유럽과 발칸지역에까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재건과 변화의 근저에는 독일의 돈이 있었고, 강한 독일 경제는 이런 금전적 부담을 견뎌낼 수 있게 했습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우리 독일인들은 독일을 통일하는 데에도 성공했고, 유럽을 재통합하는 데에도 성공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 통일은 독일과 유럽,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도전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통일이 국내외에 미친 영향의 범위에 관한 사례로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컨대 독일은 통일 당시 동독에 주류하던 소련군 40만명과 그들 가족의 소련 귀환과 주택 마련을 위한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아울러 독일 통일 직후 시작된 유고 내전(1991~95년)으로 발생한 40만명의 유고 난민들이 독일 남부 뮌헨 등지로 들어왔을 때 독일은 이들에게 식량과 거처, 교육을 제공했습니다. 이것은 독일 경제에 또 다른 부담이었습니다. 독일의 남부지역은 유고에서 차를 타고 4시간가량 북으로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유고 내전이 데이튼 협정으로 종식되자 독일은 전후 유고의 재건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독일 통일은 단지 동서독의 범위에서만 보면 안됩니다.”
 
-구서독 지역의 독일인들도 통일된 독일에 만족합니까. 서독에서 흘러나온 자금이 구동독 쪽으로 흘러간다고 불만을 표시하지 않습니까.
“통일된 독일에서는 20% 정도의 사람들이 왜 우리가 통일비용을 부담해야 하느냐며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80%의 사람들은 독일 통일의 긍정적인 측면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통일 전 서독은 46만명 규모의 군대, 동독은 22만명 규모의 군대를 유지했습니다. 이런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는 것은 양측 정부의 재정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통일 후에는 독일 군대의 규모는 26만명으로 줄었습니다. 아울러 군 복무의 기간도 짧아졌고 군비지출도 줄었습니다. 독일은 이렇게 군비 절감에서 남긴 돈을 동독의 재건에 투입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만약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이 충돌했더라면 가장 유력한 전장은 독일이었을 것입니다. 독일은 냉전 중 유럽 갈등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탈냉전 시대를 맞아 통일된 독일은 여러 가지 이점을 발생시키는 중심국이 됐습니다. 독일은 수 년 전 경제위기와 지난해의 경제위기를 잘 극복하고 유럽통합의 기관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유럽연합에서 가장 강한 경제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 금융·경제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독일 통일의 경험을 되살려 지금도 분단된 남북한 사람들에게 건넬 만한 조언이 없을까요.
“저는 분단과 통일을 경험한 독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아직도 분단돼 있는 한반도의 불행한 상황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단된 한반도의 고통은 남북한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저는 한반도 사람들이 그 해결책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언을 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한반도의 남북 쪽 사람들이 원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도움을 제공할 것입니다. 한반도 사람들이 독일인들의 지원을 원한다면 정치적 영역 외에 다른 영역의 지원도 기꺼이 할 것입니다. 언어와 문화가 동일한 하나의 ‘문화국가’가 반세기 이상 분단돼 있다는 것은 정말 부자연스럽습니다. 언제 한반도 통일이 실현될지 알 수 없지만, 저는 한반도 분단이 종식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 믿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을 예상할 수 있습니까.
“독일인의 경험을 말하자면, 통일이 어느날 갑자기 실현됐습니다. 이것을 보면 남북한 사람들은 재통일의 기회와 도전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두어야 합니다. 한국은 한국전쟁 후 50여년 만에 가난한 나라에서 주요 20개국 정상회의(G20)를 주최할 정도의 부국으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골드만삭스는 한반도가 통일되면 엄청난 경제적 성장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한국에는 잘 훈련된 지도층이 있기 때문에 저는 한국인들이 통일에 관한 여러 도전들을 잘 이겨낼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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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붕괴 20주년]“남북한 다양한 교류통해 공유된 정체성 확보해야” (경향, 홍진수기자, 2009-11-09 18:01:36)
ㆍ통일 동의 얻으려면 동아시아 ‘평화허브’ 역할 중요
 
한국과 독일 양국 전문가들은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한 사회가 다양한 교류를 통해 사회 각 부문의 공유된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다름보다는 같음과 공통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기조발표자로 나선 베른트 플로라트 구동독 국가안보문서 연방위원회 이사는 ‘베를린 장벽 붕괴, 회고와 재조명’이란 연설을 통해 “1989년 11월9일을 독일통일의 시작으로 보는 외부 시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외부 요인만이 아니라 동독에서 이미 진행되던 민주화라는 내부요인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해 장벽이 붕괴한 것”이고 말했다. “동독 내부에서 면면히 내려 오던 노동운동 세력과 기독교 공동체, 시민사회 진영이 공산 독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동독 주민들이 여기에 호응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의 발터 클리츠 대표는 “1949년 이후 수십년 동안 서독의 대외정책은 군사안보, 주권문제, 그리고 2차 대전으로 인해 분단된 국가의 통일에 초점을 맞춰왔다”며 “서독은 대동독 접근 시 점진적 변화를 추구했고, 차이보다는 공통점과 공통의 이익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클리츠 대표는 또 “이해관계와 관심사의 공유를 통해 궁극적으로 차이점과 이질감을 극복하고, 공통의 장에서 만날 수 있도록 서로가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한반도 통일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한국이 동아시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평화 허브’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숭실대 조홍식 교수는 “독일의 정치인들이 유럽공동체의 성립을 염두에 두고 통일정책을 마련했기 때문에 독일 통일이 수월할 수 있었다”며 “한반도 통일은 남북만의 관점이 아닌, 역내국가들 차원에서 논의하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성립 여부와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역사적으로 축적된 유럽공동체의 협력과 통합의 경험은 주변국이 독일 통일을 승인하는 데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동아시아는 집단안보기구나 다자적지역기구가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지역으로, 과거 역사 문제, 상이한 정치체제 등으로 유럽과 같은 강력한 지역협력 기제가 발전하기 어려운 조건하에 있다”며 “동아시아에선 오히려 각 국가의 주권을 보장해주는 느슨한 연계 형태의 ‘중위 통합체’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이 이 안에서 가교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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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잘 작동” 11%뿐… BBC, 주요 27개국 국민 여론조사 (경향, 김향미기자, 2009-11-09 23:43:36)
ㆍ“규제·개혁으로 풀어야” 51%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주요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여론조사 결과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우려가 매우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BBC방송이 주요 27개국 성인 2만9033명을 대상으로 지난 6월19일부터 10월13일까지 진행해 9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시장경제를 주축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응답은 11%에 불과했다. 시장경제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응답이 20%를 넘은 국가는 미국(25%)과 파키스탄(21%) 등 2개국뿐이었다.
 
전체 응답자 중 51%는 현재 자본주의의 문제를 더 많은 규제와 개혁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답변했다. 또 응답자의 23%는 자본주의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으며 새로운 경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이 같이 답변한 비율은 프랑스 43%, 멕시코 38%, 브라질 35% 등으로 나타났다. 27개국 중 15개국에서 과반수의 응답자는 정부가 주요 산업을 소유하거나 직접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 소련의 몰락에 대한 찬반 응답 비율은 국가별로 차이가 있었다. 미국이 81%로 옛 소련의 몰락을 지지하는 의견이 가장 많았고 이어 독일(79%), 영국(76%) 등 서방국가에서 지지 의견이 우세했다. 반면 ‘잘못된 일’이라는 답변이 러시아에서는 61%를 차지했고, 우크라이나(54%)에서도 다수를 차지했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옛 소련의 해체가 ‘잘못된 일’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22%, ‘잘 모르겠다’고 답한 응답자는 24%로 나타났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옛 소련의 몰락을 지지하는 의견은 54%였다. 27개국 중 22개국의 67%가 정부가 부(富)를 좀 더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번 여론조사를 시행한 영국 BBC 글로벌스캔 대표인 도그 밀러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 여론조사는 지난 1년간 금융위기로 자본주의가 폭풍우를 맞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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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 23% “자본주의 치명적 결함” (한겨레, 류이근 기자, 2009-11-09 오후 07:10:53)
BBC, 27개국 3만명 설문…11%만 “잘 작동하고 있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사회주의에 맞선 자본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세계인들의 다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불완전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여론은 30년대 대공황 이후 지난해부터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반성이 커진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비비시>(BBC) 방송은 장벽 붕괴 20년을 맞아 27개국의 2만9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23%가 “자본주의는 치명적 결함이 있어, 다른 경제시스템을 필요로 한다”고 응답했다고 9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자본주의는 규제와 개혁을 통해서 다뤄야 할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는 응답까지 합하면, 거의 80%가 자본주의 시스템이 불완전하다고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자본주의는 잘 작동하고 있고, 규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덜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응답은 단지 11%에 불과했다.
 
<비비시>는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20년 전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결정적 승리처럼 보였다”며 “하지만 이번 여론조사의 결과는 지난 1년 사이 금융적, 경제적 위기로부터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가 큰 타격을 입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세계인들은 시장의 실패와 결함을 국가의 개입과 조정을 통해 수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비시> 방송은 정확한 수치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조사 대상국 가운데 22개국에서 다수가 “정부가 나서서 부를 더욱 평등하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는 조사 결과를 전했다. 또 터키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다수의 국민들은 정부가 나서서 시장에 대한 규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펴길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인 라스무센이 4월 미국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선 미국인들의 53%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낫다고 믿는다”고 답했으며, 응답자의 27%는 “어느 쪽이 우월한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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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붕괴 20년…공산주의 향수 ‘솔솔’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2009-11-10)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독일을 비롯한 세계가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지만,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향수가 솔솔 피어나고 있다. 미국 일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8일 체코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공산당 일당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데 따른 부작용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면서 이같이 보도했다. 자유시장 경쟁은 물가와 실업률을 치솟게 했고, 자유선거로 극단주의 정당이 출현했고, 언론 자유는 자극적인 선동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동의 자유는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와 서방으로의 두뇌 유출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체코의 리부세 발렌토바 교수는 현재에 대한 깊은 환멸에서 공산주의 향수가 나온다고 진단했다. 1968년 체코 민주화 운동 당시 거리를 누볐던 경험이 있는 발렌토바 교수는 “체코 사람들은 서구의 자유와 풍요를 부러워했다.”면서 “(그러나) 지금 그들이 보는 것은 물질주의와 부패, 인플레이션, 무법천지이며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풍요는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자랐던 세대들은 의료와 교육을 무상으로 받을 수 있었고 상품과 서비스가 충분히 공급됐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도 억압과 감시, 검열이 판치던 기억은 쉽게 잃어버렸다고 신문은 전했다.
 
높은 실업률 때문에 젊은이들도 공산주의 시절의 ‘완전고용’을 동경한다. 잔 클랜(26)은 체코 3대 정당인 보헤미아모라비아공산당의 청년 조직에 가입했고 내년 의회 선거에 공산당 후보로 출마할 계획이다. 그의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산당원이었다. 클랜은 실업률이 14%에 달하는 체코에서 공산주의식 완전 고용을 주창하는 공산당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그러나 프라하 전체주의체제 연구소의 지리 라이치 연구원은 “젊은 세대가 (과거를)잊지 말아야 한다.”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이 겪은 역사, 그리고 그때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기를 바란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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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1 22:38 2009/11/1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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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희망과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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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변호사의 최근 행보와 '희망과 대안'이라는 단체를 보고 있노라면 조금 답답한 생각이 든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뭔가 기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고...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 대해서는 하승우가 레디앙에 적절하게 쓴 바 있다. 박원순 변호사는 진실을 말했나? [정치사회비평] 연대 힘들게 한 행보…그가 가까이 한 곳과 멀리 한 곳 (레디앙, 2009년 09월 21일)

 
아래 김상봉, 김규항의 글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그렇다고 김상봉 교수가 몸담고 있는 진보신당의 행보가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들은 '희망과 대안'에서 희망과 대안을 찾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면을 지적하고 있기에 담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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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논단]공허한 ‘희망과 대안’ (경향, 김상봉 | 전남대 교수·철학, 2009-10-22 18:09:26)
 
얼마전 진보개혁시민단체 및 학계와 종교계 인사 100여명이 ‘희망과 대안’이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어 내년 지방선거부터 선거연합이나 좋은 후보 추천 및 지원을 통해 정치에 개입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이야 이해가 가지만, 경기하는 선수가 힘이 달리는데 밖에서 훈수를 두어 판세를 바꾸려는 발상이 퍽 놀랍고 기이하기까지 하다.
 
박정희가 그리도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야당 탓도 크다. 4·19를 통해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당은 자유당처럼 대놓고 독재를 하지 않았을 뿐 안으로는 부자들을 편들고 밖으로는 미국을 따르는 보수 정당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민주당 정부는 4·19를 추동한 진보적 열정을 끌어안는 대신 ‘반공임시특별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로 데모를 규제할 궁리나 했으니 정치의 퇴행은 예고된 일이었다.
 
그랬으니 5·16 이후 다시 야당의 자리로 나앉은 옛 집권당 사람들이 민중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김대중의 도전에 화들짝 놀란 박정희가 아예 유신 독재로 치달을 때, 당시 야당이 한 일은 중도통합론의 간판 뒤에 제 부끄러운 비겁을 숨기는 일뿐이었으니 그런 야당에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4·19에 비하면 6월항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공든 탑인지라, 그 뒤 우리는 전에 없던 좋은 시절을 꽤 오래 살았다. 그러나 4·19 이후 집권했던 민주당처럼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역시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의 정당이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나는 그것을 무조건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노동자의 정당이 필요하듯 자본가의 정당도 필요하다. 그리고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가 인권 신장과 언론 자유와 남북 화해에 크게 기여했음을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 정부가 4대강에 삽질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전 정부가 새만금에 삽질을 했기 때문이며, 이 정부가 쌍용차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해고할 수 있는 것은 이전 정부가 이미 외환위기를 정리해고로 돌파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들에 그때는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래서 정치는 잊고 ‘자본과의 중도통합’을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관대함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좋은 시절에 미래를 위해 준비했어야만 했다.
 
형식적 민주주의 뒤에 숨어 자본가들과 지역토호들을 편드는 정당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민중을 위한 진보정당을 키웠어야만 했다.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진보적 상상력을 보여주었어야만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훌륭한 시민운동가들과 학자들이 진보정당에 많이 참여해 진보정치의 길을 넓혀 나갔어야만 했다. 그랬더라면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좌절이 도리어 새로운 진보에 대한 열정으로 전환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시민단체는 그 시절 한 줌의 시민적 자유에 안주했고, 그 결과 여전히 시민들은 4대강에 삽질하려는 한나라당과 새만금에 삽질했던 민주당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유한다. 78년 총선에서 중도통합론의 신민당조차 공화당에 총득표수에서 승리한 일도 있었으니, 세상이 더 힘들어지면 지금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작용이 역사의 퇴행을 막을 수 있겠는가. 오직 새로운 사회를 적극적으로 설계하고 그것을 새로운 정당을 통해 실현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정치는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나는 희망과 대안의 깃발을 들어 올린 분들이 밖에서 훈수를 두시기보다 차라리 민주당에 입당하시길 권한다. 대의민주주의 시대에 정당 밖에서 정치의 희망과 대안을 말하는 것은 기만이 아니면 착각일 뿐이다. 그분들이 제대로 된 보수정당이라도 만들어주신다면, 가난한 진보신당에 몸담은 나는 그분들께 감사하면서 오늘 일은 그분들께 맡기고 내일의 진보정당을 위해 조용히 땀을 흘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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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사회 디자인 (한겨레,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09-10-28 오후 09:11:21)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에 따라 부의 격차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똑같은 인간이기에 그 격차는 지나쳐선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 평범한 정규직 노동자 한 사람이 이건희씨의 재산만큼 벌려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꼬박 50만년을 모아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능력과 노력에 따른 정당한 격차로 인정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큰 틀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 즉 사회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작업도 결국 그 격차를 최소화하는 것, 어떻게 하면 부자들의 돈을 빼서 가난한 약자들의 삶을 괼 수 있는가 하는 데서 출발한다.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함으로써 그걸 해결하려던 현실 사회주의가 일단 퇴장한 오늘, 우리 앞엔 대략 두 가지 사회 디자인이 제출되어 있다. 첫째는 기부나 자선을 기반으로 하는 미국식 사회 디자인이다. 빌 게이츠 같은 이가 엄청난 거액을 기부하는 모습을 보며 부모들은 제 아이에게 말한다. “부자가 되어야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단다.” 그러나 미국식 사회 디자인은 부자들의 일방적인 의사로 운영된다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알다시피 세상엔 남을 위해 한 푼도 내놓지 않으려는 부자가 훨씬 더 많고, 천사 같은 얼굴로 내놓다가 제멋대로 돈줄을 끊어버리는 부자도 많다.
 
세금을 기반으로 하는 유럽식은 그런 결함을 상당 부분 보완한 사회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거액을 기부한 부자가 사회적 영웅이 되고 가난한 약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 부자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풍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든 사악한 마음을 가졌든, 내고 싶든 내고 싶지 않든 상관없이 내야 한다. 그들이 내는가 안 내는가, 혹은 얼마를 내는가를 결정하는 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사회다. 사회적 약자들은 그 부자들을 의식하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하다는 얼굴로 사회적 도움을 받는다.
 
사실 당연한 것 아닌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부를 가진 사람이 사회에 더 많은 돈을 내놓는 건 말이다. 또한 사회 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며 살아온 사람이, 말하자면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고 심지어 병역의 의무도 이행해온 사람이 삶의 위기에 빠졌을 때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는 건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대체 왜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고 군대를 가야 하는가? 미국식 사회 디자인은 바로 그 당연하게 누려야 할 권리를 비굴하게 구걸하게 만드는 부자들의 쇼다.
 
애석하게도 우리 사회는 이미 미국식으로 접어들었다. 그 흐름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박원순씨일 게다. 그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공언하며 부자들과 손잡고 일해왔다. 그러나 얼마 전 국정원의 명예훼손 소송에 대응하여 발표한 그의 글은 그의 사회 디자인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드러낸다. “(이명박 정권 이후) 아름다운 가게와 희망제작소를 드나들었던 기업인들이나 대기업의 임원들은 철새처럼 모두들 날아갔습니다. 다시 원점에 섰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게 대통령 후보 시절까지도 돈독한 사이였다는 이명박씨의 변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의 사회 디자인에 있다. 양식을 가진 사람 가운데 박원순씨의 인간적 진정성과 사회적 헌신을 의심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의 실패, 지난 10년 이상 우리 사회의 의인이자 대표적 사회 디자이너로 추앙받아온 그가 부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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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0 20:18 2009/10/3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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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언론법에 대한 사법부의 결정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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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보선 선거가 3:2의 결과가 나온 데 이어 바로 용산참사에 대한 1심 재판부의 판결과 언론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었다. 어떤 이는 사법부와 헌재가 정치적이라고도 하고, 이제는 헌재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진짜 정치를 하자고 한다. 헌재 존폐 자체를 묻자고도 한다.
 
다 맞는 얘기다. 우리가 그걸 몰랐나. 문제는 그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다시 사법부에, 헌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있다.
 
적어도 사법부와 헌재에 대해서는 폭로를 통해 얻을 것은 많지 않다. 어쩌다가 나오는 의미있는 판결에 대해 그래도 사법부는 죽지 않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법 또한 이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수단임을 잊지 말자고 해야 한다. 사법부는 몇몇 양식있는 인사가 포함된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해놓고도 내가 내뱉는 말 또한 공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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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는 실망으로…헌재 앞 시민들 분노 (미디어오늘 2009년 10월 29일 (목) 18:06:03 김수정)
[현장] 휴대폰 DMB로 뉴스 시청…“미디어법 유효 이해 안 돼”
 
사람들의 눈은 전부 휴대폰에 집중돼 있었다. 2시 정각. 헌법재판소가 야당의원이 미디어법에 대해 제기한 권한쟁의심판청구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로 한 시각이다. 사람들은 YTN을 시청하다 이내 MBC로 채널을 돌렸다. 이날 헌법재판소의 언론악법 판결을 생중계 한 곳은 MBC뿐이었다. 2시쯤에는 각기 다른 채널을 보는 것 같더니 이내 한 방송사 뉴스로 채널이 모아졌다. 헌재 한쪽에서는 생중계로 뉴스속보를 전하고, 다른 쪽에서는 생중계되는 뉴스를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별 다른 소식이 전해지기 전, 한쪽에서 ‘와’ 하는 환호성이 들린다. 문자로 판결 내용을 먼저 받은 모양이다. 사람들은 기대에 찬 눈빛을 하면서도 뉴스 속보가 나오기 전 박수를 치기는 아직 이르다는 눈치였다. 2시24분. 화면에 ‘신문법 권한 침해 7:2 인정’이라는 속보가 떴다. 이곳저곳에서“만세”가 터져 나온다. 한 시민은 “정의는 살아있다”고 외쳤다.
 
곧 방송법에 대한 판결이 속보로 올라왔다. ‘방송법 심의표결권 6:3 침해 인정’이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시 만세 나왔다. 이내 IPTV법 심의 표결권 침해’라는 속보가 화면을 통해 보도됐다. 사실 하루 전만 해도 헌재가 기각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돌아서 처음 뉴스를 시청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런데 헌재가 한나라당의 불법투표, 대리투표를 인정하고 심의토론이 생략됐다는 점 등을 들어 야당 의원의 심의 표결권이 침해됐음을 인정했다. 재투표에 대해서도 일사부재의원칙 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사람들은 헌재가 언론악법 무효를 선언할 지 모른다는 기대에 차 있었다.
 
2시38분. ‘신문법 무효 청구 기각’이라는 속보가 전해졌다. 그래도 방송법 판결은 다를 수 있다는 기대에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곧이어 ‘방송법 무효 청구 기각’ 소식도 화면을 통해 보도됐다. 사람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절차상 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기각 결정을 내린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헌재는 오늘 죽었다”,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악에 바친 목소리도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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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현·송두환 재판관 "헌법재판소의 사명을 포기한 것" (프레시안, 채은하 기자, 2009-10-29 오후 5:26:50)
[분석] "헌재는 '위법" 여부만 판단…나머지는 '국회'가"?
 
헌법재판소(소장 이강국)가 29일 신문법·방송법 등 언론 관련법을 둔 권한 쟁의 심판에서 법 처리 과정의 '위법'을 인정하면서도 '법안 가결 선포 무효 청구'는 기각한 결정이 나오자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이런 결정을 위해서 "이전 판례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논리"를 들고 나왔다. 신문법·방송법 처리 절차는 '위법'이지만 이를 해결하는 것은 국회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것. 이들 두고 몇몇 헌법재판관은 소수의견에서 "헌법재판소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강국, 이공현 재판관은 "권력 분립과 국회의 자율권을 존중하는 이유에서 헌법재판소는 원칙적으로 처분의 권한 침해만 확인하고 권한 침해로 야기된 위헌, 위법 상태의 시정은 피청구인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김종대 재판관도 "행정 처분이 아닌 국회 법률 제정 과정에서 비롯된 국회의원과 국회의장 사이의 권한 심판 사건에서 헌법재판소의 권한 쟁의 심판권은 심의·표결권 침해 여부 확인에 그친다"면서 "효력에 대한 사후의 조치는 오직 국회의 자율적 의사 결정에 의해 해결할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동흡 재판관도 "무효 여부는 입법 절차에 관한 헌법 규정을 명백히 위반한 흠이 있는지 여부에 의해 가려져야 한다"며 "의사진행이 국회법 93조에서 규정한 절차를 위반했다 하더라도 다수결의 원칙이나 회의 공개의 원칙 등 헌법에 규정된 국회의 의사 원칙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재판관은 이윤성 국회부의장의 신문법 가결 선포 행위가 △법안 제안 취지 설명 절차 생략 △질의 ·토론 절차 생략 △'대리 투표'로 다수결 절차 위반 등으로 청구인(야당 국회의원)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했다"는 의견을 냈다. '신문법안 처리는 위법이지만 헌법 재판소는 무효 결정을 할수 없다'는 논란인 셈. 이들과는 달리 애초부터 "신문법안 가결 선포 행위가 야당 국회의원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민형기, 목영준 재판관은 "판단할 필요 없이 이유 없다"고 무효 확인 청구를 기각했다.
 
이러한 '불일치'는 방송법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민형기, 이동흡, 목영준 재판관은 "방송법 가결 선포 행위는 청구인들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면서도 "이것은 입법절차에 관한 헌법 규정을 위반하는 등 가결 선포 행위를 취소 또는 무효로 할 정도의 하자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내놨다. 김종대 재판관은 "신문법 가결 무효 청구와 같은 이유로" 기각했고, 이강국, 이공현, 김희옥 재판관도 방송법 재투표 논란을 놓고 "의결 정족수에 미달된 이상 방송법 수정안에 대한 국회 의결이 유효하게 성립됐다고 할 수 없으므로, 일사부재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다"며 방송법 무효 청구를 기각했다.
 
한편, 이런 결정을 놓고 일부 헌법재판관은 "헌법재판소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 "권한 쟁의 심판의 성격과 맞지 않다"는 소수 의견으로 반박했다. 조대현, 송두환 재판관은 "신문법안은 질의·토론 절차가 생략된 점 이외에도 표결 과정이 극도로 무질서하게 진행돼 표결 절차의 공정성, 표결 결과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바 위의 사유들은 중대한 무효 사유를 구성한다"면서 "권한 침해 행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가결 선포 행위의 무효를 확인하거나 이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들 재판관은 다수 재판관들의 결정에 대해 "가결 선포 행위의 심의·표결 권한 침해를 확인하면서 그 위헌성·위법성을 시정하는 문제는 국회의 자율에 맡기는 것은 모든 국가작용이 헌법 질서에 맞추어 행사되도록 통제해야하는 헌법재판소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신문법에 한해서 무효 확인 청구를 인용하는 소수 의견을 낸 김희옥 재판관도 이에 동의하면서 "권한 쟁의 심판 제도는 헌법적 권한 질서에 관한 확인과 직접 침해된 청구인의 권한을 구제하도록 한 쟁송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며 "신문법안의 가결을 선포한 피청구인의 행위가 헌법과 국회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인정한 이상 무효 확인 청구를 인용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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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방송법 무효청구 기각 “표결과정 문제 있으나 법안은 유효” (경향, 장은교·박홍두기자, 2009-10-29 18:26:04)
ㆍ‘정치적 민감사안 소극적 판단’ 논란만 키워
 
헌법재판소가 지난 7월 국회의 미디어법 개정안 처리 과정이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법안의 효력에 대해서는 “유효하다”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입법절차의 비민주적인 절차를 지적해 재발가능성을 막는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이번 결정의 의의를 밝혔으나, 과정상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법안을 유효하다고 결정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재판관들은 과정상 문제와 별개로 법안 자체는 유효하다고 결정했다. 개정안 가결 선포가 무효임을 확인해 달라며 청구한 효력정지가처분은 기각 결정한 것이다. 법률에 대한 무효 여부에 대해서는 신문법과 방송법을 각각 6 대 3과 7 대 2로 기각했다. 재판부는 “절차상의 문제는 있으나 국회의 자율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법률 자체에 대한 위헌 여부는 판단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심의·표결권 침해는 확인했지만 이를 바로잡는 것은 국회에 맡긴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어 “법률안 심의절차를 어긴 점은 인정되지만 입법절차를 무효로 할 정도의 하자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같은 날 통과된 인터넷멀티미디어 방송사업법 개정안과 금융지주사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권한침해라고 볼 수 없고 법률안도 유효하다”고 결정했다.
 
헌재의 이날 결정에 대해 “헌재가 정치적인 판단을 했다” “소극적인 결정이다”라는 등 비판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표결 과정의 절차상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미디어법의 효력은 인정해줌으로써 헌재가 책임질 것은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승환 한국헌법학회장(전북대 법학과 교수)은 “법안이라는 것은 절차적 정당성을 잃을 경우 법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재판관들도 다 아는 사실”이라며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사법 최고기관이라는 헌재가 헌재라는 이름만 빌려서 한쪽에만 유리한 정치적 판결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결정으로 미디어법은 다음달 1일부터 효력을 갖게 됐지만, 법적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헌재가 대리투표와 재투표 의혹에 대해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헌재가 이번 결정을 통해 미디어법 재논의의 길을 터줬다는 해석도 나온다. 또 통과 과정에 있었던 불법성을 시정할 책임이 국회에 있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개정 법안에 대해 헌재가 확실한 ‘면죄부’를 부여해 재논의 자체가 불가능하게 했다는 반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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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탓 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진짜 정치를 (미디어스, 2009년 10월 30일 (금) 10:37:37 윤현식/건국대 법대강사)
[기고]위법 행위의 모든 당사자는 사퇴해야
   
말장난
헌법재판소 결정문이 언제나 중후하고 유려한 문장을 동원해 추상같은 권위가 넘쳐흘러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대략 난감한 결정문을 통해 국민들로 하여금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드는 건 헌법재판소가 할 일이 아니다. 허무개그는 개그맨들이 하는 걸로 족하다. 근엄하게 법복을 입으신 분들이 개그맨들의 밥줄까지 끊어놓으려 하는 건 상도의를 거스르는 반칙이다. 문제는 이런 반칙이 상당히 자주 있다는 것. 불과 몇 년 전에 “관습헌법”이라는 놀라운 논거를 제시함으로서 21세기 대한민국을 졸지에 경국대전 치세로 돌려보냈던 헌법재판소는 또다시 “절도죄는 인정되나 장물소유권은 도둑님께” 류의 결정문을 내놓았다.
 
이미 미디어관련법 개정과정에서 벌어졌던 의회의 ‘막장쇼’가 어떤 절차적 하자를 가지고 있는지는 분분하게 논의한 바가 있다(미디어스 7월 23일자 ‘미디어법, 참을 수 없는 절차상의 하자’ 참조). 따라서 이하에서는 절차상의 문제를 상론하지 않을 것이나,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에 따르면 재판관 다수가 이러한 절차상의 하자를 분명히 인정하고 있으며 그 결과 국회의원들의 의안 심의·표결권이 침해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윤성 국회부의장의 진행으로 “날치기”에 준하여 이루어졌던 미디어법 개정안 의결과정은 국회법이 정한 절차를 대부분 위배했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판단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이 세간의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절차상의 위법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각 법률안의 무효확인청구에 대해선 기각을 해버렸다는 점이다.
 
당연히 기각결정을 한 다수 재판관에게도 논리는 있다. 그 주요 논리 중 하나는 권한쟁의심판에서 처분의 취소나 무효결정은 헌법재판소의 재량사항일 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헌법재판소가 불법을 확인해줬으니 그 시정은 원래 책임 있는 기관이 해결하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첫 번째 논리인데, 헌법재판소법 상 권한쟁의에 관하여 취소 및 무효결정을 “할 수 있다”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본 조항은 명백한 위법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취소 혹은 무효의 결정을 마음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고 해석할 이유가 없다. 처분의 불법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분의 취소 혹은 무효를 결정하지 않을 바에야 도대체 헌법재판소가 권한쟁의심판을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결국 헌법재판관 다수는 법률규정이 강제조항의 형식으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빌미로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코메디
공전절후한 4차원 안드로메다급 말장난이 되어버린 헌법재판소의 결정문보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오히려 헌법재판소까지 이 문제를 끌고 간 정치인들의 행태이다. 근본적인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헌정질서가 보장하고 있는 대의제체제, 즉 정당정치가 완전히 실종되고 있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권한쟁의심판은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지 정상적인 해법은 아니다. 해법은 정치 자체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 들어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빈번히 헌법재판소로 넘겨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신행정수도이전 건이며, 한미FTA관련 사안들이며, 전략적유연화에 관한 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에 이르기까지, 그 예는 무수히 많다.
 
각 사안들이 가지고 있었던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권이 자체적으로 해결했어야 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헌재에 책임을 떠넘겼다는 거다. 권력중추의 독선과 여당의 밀어붙이기, 야당의 반발과 의정의 파행이 여지없는 공통점으로 각 사건에서 발견되고, 그러한 특징들은 이번 미디어법 개정과정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시시때때로 사건의 주인공들이 역할을 바꾼다는 점만을 제외하곤 언제나 비슷한 양상이 전개된다. 그 결과 헌법재판소는 정치권이 자기 책임을 손쉽게 떠넘길 수 있는 일종의 도피처가 되어버렸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헌법재판소로 하여금 훌륭한 결정을 내리라고 요청하는 것은 실로 난망한 일이다.
 
이렇게 어색한 구도를 만들어놓은 후에 하는 일이 기껏 헌법재판소 정문 기둥을 앞에 두고 철야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절간에서 이만배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삼보일배를 하고 어떤 이들은 촛불을 켠다. 뭐하자는 걸까?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미륵불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니면 델피신전의 신관이라도 된다는 건가? 뭘 바라는 걸까? 정치가 원내에서 또는 장외에서 불꽃 튀는 설전과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안수 떠놓고 손바닥을 비비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코메디가 아니다. 의원직 전원 사퇴라는 배수진을 치겠다던 민주당은 헌법재판소 판결 전날 이루어진 보궐선거에서 3:2로 승리했다고 환호를 올린다. 거기엔 미디어법과 관련된 정치도 없고 투쟁도 없었다. 4대강 개발은 반대한다고 하면서 경인운하는 찬성하고 있는 어떤 의원이 승리의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TV화면에 크게 부각되는 판국에, 조중동 방송이 안방을 장악한다고 한들 대세에는 지장이 없는 거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가져올 파장에서 보다 주목되는 것은 정치권의 충돌이 아니다. 어차피 청와대는 휘파람을 불고 있을 것이고 여당은 다 끝난 일이라고 덮어버릴 일만 남았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헌법재판소를 공격하는 걸로 또다시 자기책임을 회피할 것이다. 시민사회는? “희망과 대안”으로 뭉치려나? 아무리 봐도 경천동지 상전벽해에 준하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개정미디어법 체제를 뒤집을만한 건수는 보이지 않는다. 헌법재판소가 절차상 위법을 지적하고 국회로 하여금 그 흠결을 치유하라고 권고를 했더라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여당이 이렇게 나오게 되면 앞길은 마냥 막막한 거다.
 
진정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과 중앙을 위시해 미디어법 개정에 사활을 걸었던 언론사들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자마자 이들은 환호작약한다. 너도 나도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선언하며 종편채널의 꿈에 들떠있다. 하나같이 이들은 자신들이 자금과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겠노라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예컨대 중앙일보는 “좌우 이념대력의 스펙트럼이 아닌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는 가치를 방송에 도입하겠다”고 사자후를 뿜어대는 실정이다. 물론 이 발언을 한 당사자는 자신의 포부가 전형적인 보수이데올로기라는 점은 살짝 감추고 넘어간다. 이렇게 개정 미디어법과 관련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우려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 사고는 정치인들이 치고, 욕은 헌법재판소가 먹는 와중에 조선 중앙을 비롯한 언론재벌과 재벌언론은 로또대박을 맞은 듯이 떼돈을 벌 꿈에 부풀어있다. 제 돈 들여 돈 벌겠다는 것을 막을 이유도 없고, 배 아파할 이유도 없다. 자본주의사회 아닌가? 개정 미디어법의 논리가 바로 그거고. 게다가, 어차피 개발동맹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장삼이사들에게, 늘어나는 아파트 프리미엄에 기뻐하는 것만큼 딱 그 정도의 수준으로 조선방송 중앙방송이 선정적인 방송을 내보낸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인가?
 
헌법재판소 탓하지 말고
다시 한 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돌아가자. 헌법재판소가 무효청구를 인용하지 않은 것은 의원들의 입장에서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안도할 일일지도 모른다. 결정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 본회의장은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는데, 한나라당 의원들에 의한 대리투표는 물론이려니와 민주당 등 야당의원들의 투표방해 역시 결정문에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시 말해,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국회법에 따른 정상적인 심의·표결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 데 대하여 공히 그 위법성을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의원들에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헌법재판소가 청구를 인용하였더라면 법률안 처리를 무효로 만들 정도로 위법행위를 한 모든 의원들은 총 사퇴를 해야만 한다. 본연의 의무인 법률안 처리를 하는 데 있어서조차 위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의원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적 사안을 헌법재판소로 손쉽게 넘기는데 버릇이 들어버린 정치인들 스스로가 대오각성하는 것이다. 헌법이 괜히 3권분립을 엄정하면서 의회에 막대한 권한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헌정질서를 운운하는 국회의원들이 헌법에 보장된 자신들의 권리조차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자신들의 주제파악도 못하는 주제에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가지고 비아냥거릴 자격은 최소한 현직 의원들에게는 없다고 봐야한다.
 
야당의원들, 특히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까지 했던 민주당 의원들은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의원직 총사퇴를 하고 다시 투쟁에 돌입하시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항간에 개정 미디어법을 헌법소원을 통해 무력화시키는 방안이 제기되고 있으나 그건 굳이 의원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나설 필요가 없다. 개정 미디어법으로 인하여 피해를 본 당사자들이 직접 헌법소원에 나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정치인들은 지금부터라도 진짜 정치를 하기 바란다. 촛불이니 삼보일배니 하는 21세기형 샤머니즘 정치는 ‘막장쇼’의 외전일 뿐이다. 차라리 금배지 떼고 국회해산하고 정권타도투쟁을 벌이던가. 그게 더 현실적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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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만큼 정치적이다 (프레시안, 정종권 진보신당 부대표/ 용산참사해결촉구 단식 중, 2009-10-30 오전 11:48:25)
[기고] 용산참사 판결과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보며
 
첫번째 이야기, 용산참사 재판에서
10월 28일 수요일 오후 2시 중앙지방법원에서 용산참사 철거민에 대한 1심 선고가 있었다. 2명에게 징역 6년, 5명은 징역 5년, 집행유예는 2명, 불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3명의 철거민들은 법정 구속됐다. 얼마 뒤면 딸 결혼식을 앞둔 아버지도 용산사건의 후유증으로 지팡이를 짚고 재판받으러 법원에 왔다가 법정에서 구속됐다.
 
검사 구형내용을 그대로 베낀듯한 판결에 항의를 하며 재판정을 퇴장하던 방청객에게 판사가 외친 말은 "저기 떠들고 구호를 외치며 퇴장하는 사람 잡아서 구속시켜"라는 악다구니 소리였다. 왜 그렇게 들렸을까? 나에게 판사의 그 목소리는 법정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판결의 부끄러움과 치부를 감추려는 몸부림이었다.
 
판결문에서 가장 가소로운 소리로 들렸던 것이 "철거민들의 불법행동은 대한민국 국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동으로 법치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으며 중형의 선고가 불가피하다"는 구절이었다. 누가 반사회적이고, 누가 대한민국의 상식과 정의를 파괴하는지 판사 자신의 양심에게 물어볼 일이다. 법은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땅의 법률은 상식을 유린하고 정의를 파괴하고 불의를 정당화한다. 만인에게 평등한 게 아니라 만 명에게도 평등하지 못한 게 대한민국 법률이다.
 
누군가 옆에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너희 사법부가 이건희, 정몽구와 같은 재벌들, 높은 권력자들에게 그 엄정하다고 하는 법치주의의 잣대를 제대로 들이댄 적이 한번이라도 있는가? 재벌들에게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무죄, 이러저러한 경제적 사회적 공헌을 이유로 정상 참작하여 집행유예 등등 그리고 가진 것 없는 철거민들에게는 목숨 잃고 다치고 구속된 것도 억울한데 제 아비를 죽였다는 죄목을 씌우고 중형을 선고한다. 지존파의 절규,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슬프지만 진실이다.
 
망루에서 화염병을 본 적이 없다는 특공대원들의 진술은 부정하면서 화염병이 발화와 참사의 핵심원인라고 우긴다. 누가 던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철거민들이 던졌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법률의 이름으로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상의 중범죄를 엄정하게 처벌하겠다고 판결한다. 이런 판결을 하고도 국민들이 사법부를 정의의 심판자라고 신뢰하기를 바란다면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다.
 
여러 여론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정부기관 중에서도 아주 낮은 중하위로 나타난다. 누가 그 불신을 만들어내는가? 바로 사법부 자신이다. 정치 권력자와 재벌과 같은 경제 권력의 눈치를 보고 알아서 기는 태도, 정의와 진실의 기준이 아니라 정치논리에 근거한 고무줄 판결이 스스로의 존립근거를 위협하는 것이다. 10월 28일 사법부의 판결은 사법부를 살인하는 판결이다.
 
26일 월요일부터 용산범대위 대표자 5명이 용산참사 해결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문규현 신부가 용산참사 해결을 촉구하는 단식을 하다가 쓰러져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청와대와 정운찬 국무총리, 서울시는 서로 폭탄 돌리기 하듯이 책임을 미루는 상황에서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단식농성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노숙농성에 들어가자마자 경찰은 곧바로 단식자 전원을 연행하였고, 48시간을 30분 앞두고 석방하였다. 불법집회를 했다는 것이 혐의였다.
 
그 대표자들은 이전에 1인시위를 하다가도, 기자회견을 하다가도 불법집회라고 연행되었고, 또 용산참사 해결촉구 3보1배를 하다가도 연행되었다. 이제는 단식을 하겠다고 거리 그것도 인도에 주저앉았다가 또 연행된 것이다. 거창하게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것도 없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입을 틀어막고, 오로지 정부방침에 순종할 자유 비판하지 않을 자유 그리고 숨 쉴 자유만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28일 용산 재판 결과가 나왔다. 사실 재판 전에 조금은 기대한 것이 사실이다. 워낙 힘들게 버티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재판 결과가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10개월째 이명박 정부에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씩 지쳐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주 가끔씩 보이는 의로운 판사들의 판결을 보면서 그 행운이 우리에게도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청와대와 한나라당, 사법부의 정치적 담합과 결속은 강하고 굳건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로 끝났다. 희망은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것이지 누군가의 선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이 그나마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두 번째 이야기, 미디어법 판결이 있었던 헌법재판소 앞에서
하루 뒤인 10월 29일 목요일 오후 2시 헌법재판소에서 신문법, 방송법 등에 대한 권한쟁의심판청구에 대한 선고가 있었다. 구름처럼 많은 언론사의 취재경쟁 그리고 조마조마하며 기대하는 사람들이 헌법재판소 앞으로 몰려들었다. 방청인원이 한정된 - 용산참사의 선고재판도 방청객을 한정하였다 - 탓에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핸드폰 DMB를 켜고 헌재의 선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문법, 방송법에 대한 선고에서 질의응답 기회 박탈 등 의원들의 법률심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것이 인정되었고, 대리투표 등의 행위에 대해서는 위법한 것이라고 인정되었으며, 일사부재의의 원칙에 근거하여 재표결을 한 것도 위법하다고 헌법재판소는 결정했다. 각각의 쟁점에 대한 입장을 통해 총체적으로 신문법과 방송법이 위법한 결정과정을 거치면서 의원들의 권한을 침해한 것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 과정을 방송을 통해 듣고 있던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한사람은 피켓을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눈물이 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로 몇 분 뒤, 각 법률의 처리 과정에서의 권한침해와 위법한 사실을 인정하지만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신문법, 방송법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요청은 기각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고 당황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법률가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환호는 분노로, 기쁨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누구는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이러저러한 혈중알콜조사를 해보니 음주를 하고 운전한 것은 분명한데 결론적으로 음주운전이 아니라고 판정한 것과 다를바 없다, 이러저러한 조사를 해보니 위조지폐인 것은 분명한데 이 위조지폐를 유통시켜서 사용할지는 당신들이 알아서 해라' 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규탄하였다.
 
헌법재판소는 87년 민중항쟁의 결과로 탄생한 소중한 제도적 성과이다. 그러나 제도가 그런 과정을 거쳐서 탄생하였다고 하여 그 실천이 항상 올바르거나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헌법재판소를 대표로 하여 사법부가 보여주고 있다. 사법부의 보수화, 특히 사법 상층부의 정치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사법부가 정의와 진실의 잣대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의중과 기득권 집단의 이해를 옹호하는 것이 1차적인 잣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미 90년대 초반에 헌법재판소는 토지공개념 관련 3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유의 핵심은 사유재산의 보호를 핵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근본 정신을 훼손하는 입법이라는 것이다. 경제민주화, 사회적 공평이라는 헌법적 정신은 이들에게 2차적일 뿐이다.
 
멀지 않은 시간인 바로 몇년전에 헌법재판소는 행정수도 이전 입법에 대해 관습헌법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가면서 위헌 판결을 했다. 헌법재판소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뿐인가, 종합부동산세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는 위헌판결을 하였고, 정반대로 교육형평성과 평등교육을 침해한다고 위헌소송을 낸 국제중학교 사건에 대해서는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헌법재판소와 용산참사 1심 재판부의 판결들을 관통하는 기조는 단 한가지이다. 사회정의와 공정함이 아니라 기득권과 권력자의 이해관계가 사법결정의 1차적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서글프지만 10월 28일 용산참사 1심 판결과 29일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통해 확인한 사법현실은 - 비록 몇몇 의로운 사법부의 성원이 있지만 -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의 모습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느끼고 있는 것이 이명박 정부 2년의 시간이다. 결국 이러한 부당하고 불의한 현실을 바꾸는 것은 기득권 세력을 압도하는 민중들의 정치적 힘과 사회적 영향력을 키우고 확산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법부를 비롯한 그들도 힘이 있다면 우리를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만큼 정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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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존폐 여부 국민에게 묻자 (미디어오늘, 2009년 10월 30일 (금) 12:57:39 백병규 / 미디어평론가)
헌법정신 부인하는 쿠데타적 결정들…"존재 이유 사라졌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헌재가 ‘관습헌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논거를 들어 의회와 행정부를 농락했을 때 헌재 재판관들은 그 정체를 드러낸 바 있다. 그들은 헌재를 정치적으로 오염시켰을 뿐만 아니라, 헌재의 이름으로 헌법과 헌법정신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쿠데타적 결정을 서슴지 않았다.
 
헌재는 이번 언론법 결정을 통해 다시 한 번 헌법과 상식을 짓밟았다. 이번 헌재 결정에서 소수 의견을 낸 조대현, 송두환 두 재판관의 신랄한 지적은 그 정곡을 찌르고 있다. “법안 처리과정에서의 위법성(심의 표결권 침해)을 확인하면서도 그 위헌성․위법성을 시정하는 문제는 국회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타당하다는 이유 등을 들어 분명한 결정(무효 확인이나 취소선언)을 회피하는 것은 국가 작용이 합헌적으로 행사되도록 통제해야 할 헌법재판소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헌재의 양식은, 사법의 정의는 그러나 속절없이 무너졌다. 교언영색의 복잡한 법리는 권력에 대한 사법의 치욕스런 ‘충성서약’을 분칠하는 분장일 뿐이다. 헌재는 위법하지만 합헌이라는 결정으로 법치의 근간을 허물었다. 국회의 위법을 적시하고도, 법의 논리로 권력의 폭력적인 힘의 남용을 용인함으로써 헌법과 법률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말았다. 3권 분립이라는 이유로 사법부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3권 분립을 와해시켰다. 민주주의와 법치의 기본질서를 송두리째 망가트렸다.
 
바로 이런 점들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헌재의 결정은 유효하다. 헌법과 헌법 정신의 최종 수호기관이 스스로 헌법을 파괴하고 있는 현실, 그것이 드러내고 지시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언론법 문제는 이제 단순히 언론법 차원을 넘어섰다. 언론법 논란의 핵심이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에 관한 것이었다면, 언론법 헌재 심의는 이 땅의 모든 헌정 시스템, 공공적 체제에 대한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재검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당장에는 헌재의 존재 이유를 공론에 붙여야 할 때가 됐다.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근간이 결정적으로 위태롭게 될 때마다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을 배신하는 헌재라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지극히 정치적이며 기회주의적인 헌재의 결정을 존중해 언론법의 재심의를 정부 여당에 기대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언론법에 대한 불복종 정도는 어찌 보면 부차적이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헌재의 존폐 여부를 곧바로 시민들에게 물을 때가 됐다.
 
비단 헌재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불법적인 재판 간여가 명백하게 확인돼 대법원장의 사실상 사퇴 권고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대법관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법부의 현실에서 과연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 대법관 같은 이들이 사법부에 어디 한 둘일까? 그런 사법부의 심판에 과연 누가 승복할 수 있을까?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는 본래의 역할은 저버린 채 되레 권력의 통치 기구로 전락하고 있는 검찰 체제를 이대로 두고 과연 어떤 사법적 정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용산 참사 사건 1심 재판은 사법부가 사회적 정의 실현에 얼마나 역행할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법시스템뿐만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원칙과 공공적 질서 자체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다. 그 근원을 살펴보면 시스템도 시스템이지만, 결국 공공 부문에 복무하는 ‘사람의 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하게 제기된 때도 없다. 공공부문에 종사해서는 안 될 사람들, 공공부문의 책임과 역할을 감당할 의지와 품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 기득권 세력의 대변자로 전락한, 권력과 자본의 사병과 그 조직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지난 10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경험, 그리고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공공부문의 기가 막힌 변신은 한국 역시 공직사회와 공공 조직의 일대 쇄신 없이는 그 어떤 전향적인 정치 사회적 변화도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여실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헌재는 어제 그것을 극명하게 재확인해주었다. 대한민국에 앞으로 필요한 것은 비단 정권 교체뿐만 아니다. 권력은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반세기 이상 대한민국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지배하고 있는 ‘공공부문’과 ‘공공권력’의 교체야 말로 진정한 정치 사회적 변화의 기본 요건임을 새삼 절감케 한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그 구체적인 청사진을 마련할 때다. 필요하다면 모든 공직 사회와 공공 조직을 전면적으로 쇄신하는 청사진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그 맨 앞에 헌재의 존폐를 상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럴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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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0 15:22 2009/10/3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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