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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노동자 정당의 현황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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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이 출범하기 전 노동운동 진영에서 나온 글 중 일부.

2004. 6?

 

 

1. 진보정당의 대표적 유형

-사민주의 정당
- 사회주의, 공산당
- 사회운동적 정당
- 대중운동 주도의 사회주의 정당

 

2. 유럽 주요 좌파정당들의 현재 모습
- 국민정당, 중도통합정당(catch-all-party)화
- 신보수주의의 정책적 실패로 중도-좌파정권이 등장하지만, 좌파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답습
- 주요 정당 노선 변화

 

ㅇ 영국 노동당

- 94년 블레어 당수 취임으로 시작된 신노동당 노선

- 제3의 길로 부르고 있지만, 내용면에서는 보수당 대처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

--> 제3의 길에 대해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성

- 95년 당헌 4조의 폐기(당헌 4조: 1918년 전당대회에서 규정. 생산ㆍ분배ㆍ교환 수단의 사회화와 기업경영에서의 산업민주주의를 당의 강령적 목표로 삼음. 이후 사회화의 현실적 형태인 '국유화'가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복지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노동당의 최종적인 강령 목표로 자리잡게 됨)

 

ㅇ 독일 사민당

- 89년 베를린 강령과 99년 블레어-슈뢰더 성명

- 당의 사회적 기반을 중간층으로 이동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이념과 정책을 수용

 

ㅇ 프랑스 사회당

- 친노동자적 성격이 비교적 유지되고 있지만, 공화주의적 노선이 주류

- 사회주의는 하나의 도덕이나 방법으로 전락(91년 임시 전당대회)

 

ㅇ 이탈리아 공산당

- 89년 18차 전당대회에서 민주주의와 강력한 개혁주의를 전략목표로 설정
- 91년 좌파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현대적 개혁정당화 - 좌파민주주의자로 2차 당명 개정


3. 사회운동적 정당의 등장 - 녹색당이 대표적
o 68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사회운동의 등장
 - 노동운동으로 대표되던 사회운동에서 운동의 주제와 조직에 있어서의 변화가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나타남
 - 새로운 사회운동의 새로움은
① 성장주의적 가치관의 부정
② 일상적인 삶에서 부닥치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주제가 확산 - 생태ㆍ환경운동, 인권운동, 여성운동, 반전ㆍ평화운동, 공동체 운동 등
③ 네트워크형 조직, 구성원간의 수평적ㆍ자율적 관계 등


o 새로운 사회운동의 등장에 따라 정치적으로 운동정치, 운동정당이 발생
 - 제도 정치권 안에 사회운동의 독자적 영역 확보
 - 조직이나 인력구성, 재정지원이 사회운동과 연결되고, 정치적 이익이나 정당화의 근거를 사회운동에 두며 동원도 사회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짐
 - 정당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회체계 내에서의 정권담당자의 역할보다는 사회운동의 의사통로로서의 역할 또는 사회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제도권 내에서의 역할에 찾고 있음


4. 노동운동에 기반한 노동자 정당
o 브라질, 남아공, 남한의 새로운 노동운동
o 노동운동에 기반한 사회주의 정당으로서의 브라질노동자당


5. 노동자 정당의 딜레마와 과제
o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국가를 통한 변혁은 가능한가?
 - 한 국가만의 변혁을 통한 사회주의 사회의 온전한 건설은 가능하지 않다.
 - 몰락했던 현실 사회주의의 모습은 의료 등의 복지체제에서 우월함을 보였으나, 자본주의와의 군사적 경쟁, 생산성 경쟁의 체제를 벗어날 수 없었음. 그리고 현재에서도 브라질 노동자정부 역시 자본진영과의 단절을 할 수 없는 속에서 딜레마를 노정
 - 그러나 국가는 변혁에서 핵심적 지위를 이룬다. 세계화 속에서도 여전히 국가는 자본의 이해를 담보하는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더욱 중요하게는 한 국가내에서의 변혁과 전세계적 변혁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o 국가를 통한 변혁이 가능하다면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어떻게 가능한가?
 -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이행이란 단선적이다. 사회 전반의 총체적 변혁이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의회내의 실천을 무시하는 경향과 싸워야 하지만, 의회 다수파 장악을 통한 집권 전략이 변혁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 노동계급의 지적,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과 일상적 실천과 동시에 혁명적 시기 노동자 권력의 건설이라는 입장 둘다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요구된다.


o 노동계급 정당인가, 국민정당인가?
 - 노동계급 중심의 계급연합 정당. 노동자 중심성의 부정은 전선정당화로 나가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적 원칙의 폐기로 이어지게 될 것임.


o 노동자 정당과 사회운동정당?
- 노동자 정당이 사회운동 정당이 될 수는 없으나, 사회운동적 정당이 제기하는 문제를 안아야 함. 사회운동적 성격을 가진 노동자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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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2 12:49 2005/03/02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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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과 진보운동(장석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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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동지가 2001년 서울대 학생위원회 당원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 사용한 원고이다.

벌써 5년 가까이 된 글이지만, 그 합리적 핵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장석준 동지가 이 때도 진보적 구조개혁을 주장했었구만.



(교안) 민주노동당과 진보운동

장석준(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교육부장)
2001.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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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노동당은 대중정당이다.
그리고, 단적으로 말해, 지금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대중정당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정당'운동'이다.

    

2.
대중은 자신이 충분히 잘 알고 신뢰하는 지도부만을 지도부로 인정한다.

-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는 정치적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6월 항쟁이다. 6월 항쟁 때 투쟁에 앞장선 민중운동 세력이 역사의 뒤안으로 밀려나고 양김 세력이 정치적 지도부로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이후의 십수년이 결정된 것이다.

  

- 그럼, 6월 항쟁 때 왜 수많은 대중은 민중운동 세력이 아니라 양김 세력을 지도부로 지지했는가? 대중은 항상 자신들이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신뢰를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도부만을 지도부로 인정한다. 양김 세력은 70년대 40대 기수론 이래 이를 철저히 인식하고 대중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 6월 항쟁 이후 지금까지도 대다수 대중이 민중운동 세력을 자신의 지도부로 인정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96년-97년 총파업의 경우도 6월 항쟁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소수인, 조직 대중의 투쟁이었다. 6월 항쟁 같은 수준의 전 민중적 투쟁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민중운동 세력은 결코 그 정도 수준의 전 민중에게 지도부로 대접받은 적이 없다.

                 

- 민중운동 세력은 과거 양김 세력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중 속에서 호홉하고 대중의 언어로 말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대중의 선도적 일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만 대중의 지도부로 인정받을 수 있다. 여기에 결코 왕도란 없다. 이것을 위해 대중정당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3.
그럼, 대중정당운동이란 무엇인가?

- 대중정당은 정치사에서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대개의 부르주아 정당은 명망가들의 정당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한국의 보수 정당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중정당은 노동자정당, 사회주의정당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

                

- 최초의 대중정당은 최초의 공개적 노동자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이 때 등장한 대중정당의 기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선거 시기만이 아니라 일상 시기에도 활동하는 지역 조직들을 지니고 있다.
  2. 지역 조직들은 명사들이 아니라 지역의 노동자·민중들로 조직되며 이들로부터 기부되는 자금으로 운영된다.
  3. 지역 조직들은 좁은 의미의 정치 활동뿐만 아니라 지역의 노동자·민중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며 그들의 문화적 근거지가 되는 다양한 활동을 벌인다.

             

- 그리고, 모든 대중정당은 대중정당'운동'으로 등장했다.
  가. 당시 노동계급은 아직 완전한 보통선거권을 지니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노동자 정치운동은 보통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대중정당은 이렇게 보통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 속에서 이 운동을 주도하며 성장했다. 이 점에서 대중정당의 활동 자체가 무엇보다도 하나의 '운동'이었다.
  나. 또한 당시 노동계급은 아직 대중교육과 대중문화의 바깥에 있었다. 노동자정당들은 사회주의 이념의 교육과 노동자 문화활동의 촉진을 통해 노동자의 정신적 삶을 만들어가는 운동을 벌였다. 그 점에서도 이는 하나의 '운동'이었다.
  다. 대개의 노동자정당은 노동조합운동과 '함께' 성장했다. 노동조합들은, 아직 노동조합 가입률이 높지 않았고, 또한 산업별 노동조합으로의 질적 변화를 요구받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정당의 발전이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을 촉진하고, 역으로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이 노동자정당의 발전을 앞당겼다. 이 점에서도 이는 하나의 '운동'이었다.

              

- 대중정당운동의 발전을 통해서 유럽의 노동자계급은 비로소 하나의 '계급'이 되었다. 여기서, "오직 당운동을 통해서만 즉자적 계급은 대자적 계급이 된다"는 맑스·엥겔스 주장의 현실성이 확인된다. 독일 노동자들은 독일 사회민주당을 통해서 비로소 귀족 계급과 중간 계급에 구분되는 독자적인 계급 집단으로 행동하게 됐다. 자신의 정치적 목표(노동계급의 보통선거권 쟁취, 이를 수단으로 한 자본주의의 극복), 자신의 이념적 기반(맑스주의), 자신의 조직적 기반(당 지역조직과 노동조합, 당 언론 등등)을 통해서 말이다.

           

* 모든 추상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 과연 한국 노동자'계급'은 존재하는가?

     

- 80년대 맑스주의의 부활이 이뤄진 이래 적어도 대학가에서는 맑스주의 담론이 꽃을 피웠다. 그러나 바깥 사회에서의 진보운동의 성취도는 그렇게 높지 못하다. 학교 안에서는 쉽게 '계급'을 이야기하지만, 막상 그 계급에 속한 많은 민중들은 지역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다. 이 '짝사랑'을 설명하지 못하는 맑스주의는 결코 제대로 된 맑스주의가 아니다.

     

- 그런 점에서, '계급성', '계급운동' 운운하면서도 실제의 대중적 운동을 만들어내는 데 무능하다면, 이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현학의 발로일 뿐이다. 차라리, 우리는 이렇게 묻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한국에 노동자'계급'은 존재하는가?" -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것이 '대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을 말하는 한."

          

- 오직 자신의 대중정당운동을 지닐 때에만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대자적 계급으로서 우뚝 설 수 있다. 개혁주의의 길을 걷게 되든 혁명의 길을 걷게 되든 한국의 노동계급이 미국 노동계급처럼 햄버거나 먹으면서 야구 경기에나 미친 한갓 대중이 되지 않기 위한 오직 한 길은 자신의 대중정당운동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 민주노동당이 지금 바로 그러한 대중정당운동의 질을 확보하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현재 추진되는 정치적 실천들 중에서 민주노동당이야말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가장 올바른 조직·운동 노선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 노동자·민중의 대중정당운동으로서 민주노동당은 무엇을 하는가?

            

- 노동자 정치운동은 기성 정치 제도 안에서 활동하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의 제한성을 넘어서 나아간다.
   · 만약 기성 정치 제도의 제한성을 넘지 못한다면, 이는 자잘한 현실 개선에 만족하는 보잘것없는 정치 활동에 그치고 말 것이다.
   · 반대로 기성 정치 제도 안에서 활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활동을 벌이지 못한다면, 이는 대중에게 인정받고 그래서 대중을 거대한 해일로 일으켜 세우는 정치세력으로 커갈 수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노동자정당, 사회주의정당들은 두 개의 위험 사이에서 요동쳤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을 회피할 길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민주노동당 역시 마찬가지다.

  · 민주노동당은 기성 정치 제도 안에서 자신의 정치 활동을 출발한다. 그래서 국회의원 당선자를 내기 위해 분투한다. 그리고, 의원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대중 캠페인을 통해서 상가임대차보호법이나 이자제한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내년 지자체 선거에도 적극 참여할 것이고, 대선에도 후보를 낼 것이다. ---> 베벨이 국회의원이 아니었더라면 독불전쟁에 반대하는 그의 연설이 독일 노동계급의 양심을 깨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사회민주당의 발전, 그러니까 독일 노동계급의 정치적 발전은 탄탄대로였다.
 
  ·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기성 정치 제도 안의 실천에 머무르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조합 등 대중조직이 벌이는 투쟁 속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동맹을 형성하며 선진 활동가를 조직하는 활동을 벌인다. 민주노동당은 당원과 지지 대중들 속에서 대중교육운동을 벌이고 노동자·민중 자신의 이념과 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선다. 민주노동당은 당의 풀뿌리 조직인 분회를 통해서 삶의 현장 곳곳에 다양한 수준의 정치 실천을 벌인다. ---> 이러한 실천은 대개의 노동자정당, 사회주의정당들이 다 실천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이러한 활동을 벌여 나갈수록 이는 의미있는 노동자 정치운동으로 역사에 자취를 남겼다. 초기의 독일 사회민주당이 그렇고, 혁명기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가 그렇고, 최근의 브라질 노동자당이 그렇다.

             

- 기성 정치권 안에서든, 그 바깥에서든 우리는 전진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 1명 이상의 국회의원 혹은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키거나,
  · 올해 안에 3만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하거나, 
  · 당원의 10% 이상을 활발한 분회 활동으로 조직한다면,
  이는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이제까지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 기성 정치권 안에서 노동자·민중의 목소리가 울려퍼진 적이 있는가?
  · 기만명의 노동자·민중이 단지 정치적 목적으로 뭉쳐본 적이 있는가?
  · 기천명의 선진 대중이 하나의 대오로 움직여본 적이 있는가?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낯선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바로 이러한 전선의 맨 앞에 서 있다. 

     

* 민주노동당에 가해지는 비판들에 대해

          

- 아직 제대로 된 대중적 정치운동을 앞장서서 만들어가고 있지 못하다.

  : 이는 민주노동당에 가해지는 여러 비판들 중에서 유일하게 의미있고 제대로 된 비판이다. 하지만, 대중적 정치운동을 자신감있게 만들어가는 정치적 지도부, 정치적 부대가 하루아침에 건설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를 봐도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세대 모두가 한 삶을 바쳐 해결해가야 할 문제다.

        

- 민주노동당은 "사회민주주의", "개량주의" 정당이다.

  : 이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여러 비판들 중에서도 가장 바보같은 비판이다. 민주노동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를 비롯한 여러 진보정치세력이 결합한 잡탕 정당이다. 잡탕이라 하지만, 국물 맛을 흐리는 재료는 결코 끼이지 못한다. 노동자·민중운동에 깊숙이 결합한 정치세력들'만'이 모인 잡탕 정당이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사회민주주의가 우경화된 이후, 세계 곳곳에서는 이러한 잡탕 좌파 정당이 많이 생기고 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시대가 일정한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세계사적 정세 속에서는 느슨한 강령적 합의 속에서 모든 진보정치세력이 힘을 합쳐 대중적 정치운동을 복구하고 그 가운데에서 이론적·실천적 혁신을 이루는 것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길이다.

             

  : 민주노동당에서 앞으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을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을지, 아니면 아예 흐리멍텅한 민중주의 경향이 지속될지 이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민주노동당을 "사회민주주의", "개량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혁명적 사회주의"라고 규정한다면, 이들의 임무는 민주노동당이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민주노동당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지 바깥에서 이러쿵저러쿵 할 일이 아니다.

                

- 민주노동당 바깥에서 소위 "비제도적 투쟁정당"을 만들겠다는 움직임에 대해,

  : 이 분들은 혁명운동사를 다시 학습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분립하여 서로 경쟁하면서 노동자 정치운동이 더욱 풍성해졌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 아래서만 그랬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립된 자본주의 나라에서 사회민주당보다 좌파적인 진보정당이 의미있는 정치세력으로 존재하면서 전체 노동자 정치운동도 풍성하게 했던 것은 오직 그 전부터 사회민주당이 활발히 활동해서 노동자 정치운동이 이미 어느 정도 궤도에 이르렀을 때뿐이다.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의 관계가 그랬고, 프랑스 사회당과 프랑스 공산당의 관계가 그랬으며, 이탈리아 사회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의 관계가 그랬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조차 제 자리를 자치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공산당 역시 유의미한 세력으로 등장할 수 없었다. 전전의 일본이 그랬고, 미국이 그랬다.

           

  : 더구나, 민주노동당은 아직 그 행로가 결정되지 않은 미완의 정치운동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당을 이루었던 각국의 급진 좌파 세력이 이전에는 모두 사회민주당 안에서 정치활동을 벌였던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 분들은 알아야 한다.

            

- 민주노동당의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혁인가, 아니면 혁명인가?

  : 역사의 길은 예정되어 있지 않다. 가장 올바른 노선은 역사의 급류에 좌초되지 않고 그 흐름을 탈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그것은 자잘한 개혁에 목매다는 것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혁명만을 외치는 것도 아니다. 혁명이 필요하고 가능할 때 개혁을 하겠다는 자들을 겁장이 개량주의자라 한다면, 개혁이 필요하고 그것만이 가능할 때 혁명만을 외치는 것은 바보다.

                 

  : 위의 입장을 좀 더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진보적 구조개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진보적 구조개혁 노선은 개혁의 단순한 축적만을 통해서 대안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 보지 않는다. 다만, 기성 정치 제도 안에서도 추진할 수 있는 개혁의 시도들을 통해 광범한 대중들을 조직된 힘으로 만들어낼 수는 있다는 것을 알며, 그런 방향에서 개혁을 바라본다.  2) 진보적 구조개혁 노선은 또한 "혁명", "혁명"을 외친다고 해서 세상이 혁명적으로 뒤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오직, 조직된 힘만이 이를 성사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며, 그런 방향에서 일상적 실천을 벌인다. ---> 역사의 방향이 어느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지더라도 노동자·민중에게 이롭도록 그 물살을 탈 수 있게 해주는 조직된 힘,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진보적 구조개혁 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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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1 23:02 2005/02/2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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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여섯 가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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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국장이 1999년에 진보정당의 성격에 대해 쓴 것이다. 당원교육에 대해 검토하면서 자료를 찾아 정리하다가 발견하였다. 벌써 6년이 다되어가는 글이지만, 읽어볼 만하다.

 

이재영 국장은 당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지길 바라면서, 당 성격에 대한 학습용으로 삼지 말길 당부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교육용으로도 유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민주노동당의 여섯 가지 성격은 노동자 대중정당, 이념을 구성하는 정당, 철저한 민주주의 정당,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정당,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정당,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정당이다. 몇 가지 이견이 있지만, 이러한 성격 규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결론 부분에 나온 사회주의자에 관한 언급이 인상적이다. "생활의 모든 방면과 수준에서 사회주의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자만이 사회주의자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다."

 



우리 당의 여섯 가지 성격

이 재 영 1999. 8. 10.

 

"한 번 들은 것은 잊고, 한 번 본 것은 기억하고, 직접 해본 것은 이해한다."
                                                                                   - 중국 속담

 

연초에 출판된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라는 책이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책 내용이야 별다를 게 없어서, 조금 관심 있게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이야기할만한 수준인데도, 그토록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은 그 필자가 일본인인 때문이리라. 누구나 치부가 있게 마련이고, 남편이나 처에게 그것을 들켰다 하여 호들갑을 떨지는 않는다. 문제는 보이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보이게 됐을 때인데, 한국인의 쇼비니즘적 심성에서 일본인이야 더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우리 당 역시 넘치고 모자라는 게 많고, 냉혹한 비판에 의해 교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운동권에 횡행하는 우리 당에 대한 비판은 사실과는 아무 관련 없이 습관적으로 남발되는 것이다 보니, 대개의 당원들에 의해 서로의 불신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또, 가끔씩 나오는 당 내의 목소리도 분파적 논리로 가공된 혐의가 크다.

  

이제, 창당 궤적을 거스를만한 변수는 거의 해소되었다.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하던 사람들이, 일일이 대응할 여유가 없다거나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변명을 계속 들이댈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발의자이자 주도자야말로 당에 대한 가장 엄혹한 비판자이어야 한다. 설마 맞아 죽기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 당의 가장 부끄러운 치부는 무엇인가? 평당원과 당 간부를 막론하고, 도대체 당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당이 무엇인지, 뭘 하려는 당인지, 어떤 당인지, 어떻게 만들고 어디로 가려는지,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무지하거나 무시한 채 창당으로 밀려가고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당'에서 멀어질 따름이다.

원컨대, 이 글을 당 성격에 대한 학습용으로 삼지 말길 당부한다. 이 글이, 당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지길 바란다.


1. 노동자 대중정당

 

나는 몇 년 전부터 '계급연합당'이라는 개념을 목적의식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렇다 해서 '계급당'이나 '계급연합당'을 명확히 분별할 만큼 식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른바 '운동권'에 팽배해 있는 잘못된 당관(黨觀)을 불식하고자 하는 의도에 의해서였다.


'현대적 국민정당'이니 '무엇 중심 당' 하는 수식어를 붙인 당 이론은 대개 당원의 직업적 구성이 어떠한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보니 '국민정당'이라 일컬어질 때는 국민의 절대 다수인 노동자는 별 무 소용인 정당이라 인식되고, '노동계급정당'에서는 다른 계급·계층은 배제하거나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으로 호도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혁명사 어느 쪽을 뒤져 보아도 특정 출신의 직업자만으로 구성되거나 압도하는 정당은 찾아 볼 길이 없다. 레닌은 사회민주당 2차 대회에서 당명에 '노동자'라는 꼬리를 붙이자고 제안하면서, '당 간부의 20%를 노동계급 출신이 차지하는 것'이 소원이라 말했다. 레닌에 있어 '노동계급'은 전취해야 할 당의 미래상이지, 현실의 표현은 아닌 것이다. 귀족인 크롬웰은 왕정을 타도했고, 부르주아 콜베르는 반동 왕정의 수호자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의 구성은 당의 성격을 보호하고 재생산하는 기제일 수는 있지만, 당의 성격 자체는 아니다.

  
다른 한편, 많은 혁명가들이 그러하였듯이, '계급의 사상을 선취(先取)했다'는 선언을 통해 계급 대표성을 자임할 수도 없다. 자의적인 '지도'라는 것이 얼마나 계급이익에서 일탈해왔는가 하는 사례는 너무도 비일비재하다.
  

당의 계급적 성격은 당의 지도이념과 당의 계급적 기초 사이에 형성되는 긴장 관계 어느 곳인가에 있다.
 

'계급연합당'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일단 제 역할을 다 했고, 이 개념의 효용처는 가시적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연합당'의 본연은 다수 계급조직의 당 내 동맹이다. 하지만, 우리 당에 명실상부한 계급조직들은 실재치 않는다. 전농을 비롯한 소생산자 계급조직은 합류치 않았다. 또, 계급성을 표방하는 유일한 조직인 민주노총조차도 자기 활동의 90% 이상을 노동자계급 4%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단위사업장 투쟁에 바치는 직업조직에 머물고 있다.

   
정당에 있어 계급은, 사회정치적 계급이다. 따라서 우리 당은 계급정당도 아니고, 계급연합정당도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계급당이냐, 아니냐' 하는 반정치적 예단이 아니라, '대중정당'이라는 생소한 개념이다. '대중정당'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다중성(多衆性). 정당의 궁극적 목적인 다수의 획득이 생소할 정도로 우리는 후진적이었다. 객관적 조건에 의해 불가피하게 취했던 한시전술인 '전위당론'을 금과옥조로 삼던 기풍이 이제야 극복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명시성. 우리는 이제서야 20세기 초 레닌이 주창했던 근대적 정당운동을 계승하게 되었다. '지지하는 자 모두'를 당원으로 간주하는(따라서 당에 대한 실질적 권한은 소수 음모자만이 쥐는) 전근대적 당이 아니라, 규정에 따른 입당 절차에 따라 명시적인 의무와 권리를 가지는 사람만을 당원으로 인정하는 조직이 우리 당이다. 모모하는 운동권 단체나 보수정당들처럼 누가 자기 조직원인지도 모르는 조직이 아니라, 조직을 창출하고 제어하는 기반인 χ명의 조직원을 가지는, 한국 최초의 조직을 우리는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대중정당이 내포하는 위험성이다. 대중은 분열되어 단일치 않고, 무릇 대중은 양면적이다. 우리가 기대고자 하는 대중은 누구인가? 역사가 보여주듯이, 전위정당은 안전성을 부분적으로 보장하는 데 반해, 대중정당은 전면적 가능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가지게 되는데, 우리는 계급성이라는 목표에 이르는 도정으로 대중의 가능성에 우선 착목하였다.
 

우리 당은 노동계급성이라는 지향을, 대중정당이라는 형식과 공개정당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려는 정당이다.


2. 이념을 구성하는 정당

"과거는 더 이상 미래를 밝게 비추어 주지 못하고, 정신은 어둠 속을 행군하고 있다." 토크빌이 살았던 시대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처럼 우리 당의 처지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말도 드문 것 같다. 우리는 행군의 발길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지만, 않을 것이지만, 우리의 발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신치 못한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이렇다 저렇다, 속출하는 다양한 논(論)은 냉정히 말하자면, 공당(公黨)에게는 모두 개연성 있는 가설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당은 이념 문제에 대한 두 가지 편향을 경계해야 한다.
티라노사우루스가 되살아난다면, 정글의 제왕이 될까? 영화에서처럼 무지막지한 폭군으로 군림할까? 천만의 말씀. 티라노의 보폭은 인간보다도 짧고, 무는 힘은 악어만도 못하다. 공룡이 멸종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포유류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유전공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공룡은, 인간이 보호하는 쥬라기공원 안에서만 생존 가능하다. 옛 교조의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는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 혁명과 세계대전, 공황을 이겨낸 진화한 자본주의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다른 한편 당의 지도 이념은, 아무리 급해도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처럼 급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념정당이니까 이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형식논리적으로는 옳지만, 이념이 변혁을 이루는 당의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전도(顚倒)된 인식이다. 우리에게 있어 이념 문제는 어떤 사상을 취사선택하거나 적당히 조합하여 내놓는 일이 아니라, 당을 이끌고 나라를 경영할 철학적 기반을 확립하는 일이다.

    
그럴듯한 상표 없음이 장애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능동적 노력이 가능한 열린 상황을 긍정하자. 우리는 사후 선택이 아니라, 주체적·실천적 구성이라는 이념의 본령에 다가서 있다.

    
급진적 민주주의자였던 맑스가 사회주의자로 변신하는 데는 1848년 노동자혁명이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후, 그는 바뵈프 공산주의자들의 운동방식과 용어를 차용하였고, 프랑스 내전 과정에서 블랑키즘의 '체제 자체의 파괴'라는 아이디어를 흡수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킨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상 또는 이념은, 개인(소집단)의 연구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계급운동과의 부단한 교호작용에 의한 역사적 산물, 인류 지식과 구체적 실천의 화합물이라는 가르침이다. 또, 그것이 비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동맹과 독일사회민주당에 보고하고 활동했던 당원에 의해서만 표출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가장 주목해야 한다.
  

삼박한 깃발 없음을 두려워 말라. 개념이나 교조가 아니라, 인민의 마음과 세상사 속에 진리가 숨어 있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하지 않던가. 우리 당은 지난 100여 년 간 잊혀져 있던 정신 - '형태로서의 진보가 아닌 운동으로서의 진보'로 복귀하고 있다. 새 세기의 이념을 세우는 주역으로 자임하자.


3. 철저한 민주주의 정당

사무실 이삿짐을 풀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의 92년 총선 평가집을 발견케 되었다. 얄궂게도 그 제목이 『문제는 민주주의다』인지라, "그래, 아직도…"라는 새삼스런 중얼거림을 내뱉게 되었다. 운동권의 누군가가 민주주의를 들먹일 때, 나는 속으로 코웃음치곤 한다. 지난 십여 년 간 거창한 이름 가진 별별 조직의 중앙위원이니 집행위원이니 빠짐 없이 참가해봤지만, 진짜 토론을 한다든지 투표나 선거를 한 경우는 한 손에 쥘 정도도 되지 못한다. 정력적으로 민주주의 실험을 펼치던 노동조합의 시도도 근래에는 난관에 부딪혀 있는 듯 하다.


10여 년 전만 하여도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보수정당들은 오늘날 선거를 통해 당직자를 선출하고, 표결로 의사를 결정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반면 운동권에서 '선거'나 '표결'이란 말은 결코 들먹여서는 안 되는 금기이다. 언제나 추대받곤 하던 운동권 지도자들은 선거라는 거북살스럽고 위험한 장난을 기피하고, 표결은 '대동단결'을 해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잔재로 치부된다. 중진 활동가들이 모여 모양새 있게 '어르신' 수십 명을 지도부로 모시지만, 명함 뒷편에 직함을 하나 더 추가하였을 어르신 중 단 한 번이라도 사무실에 나오는 사람은 서너 명도 되지 못한다. 한다 하는 단체 대표 수십 명이 밤새워 '진지하고 열띤' 회의를 해서 나오는 결론은 고작 몇 일 몇 시에 데모한다는 계획을 넘지 못하고, 정작 데모하러 나오는 사람은 회의 참가자의 절반을 넘는 경우가 없다.
  

타도 대상이었던 반민주세력이 민주주의에 적응해 가고 있는 사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운동권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위임받지 않은 권력을 휘두르고, 뭔가가 결정되거나 시행될 때는 언제나 배후의 이해관계와 공작을 캐보아야 하는 실정이다. 운동권은 군사독재가 강요했던 민주주의의 유예에 아직껏 안주하고 있다. 즐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형식적 민주주의보다 내용적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누가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가? 오직 그들만이 판단한다. 입맛에 맞는 결정은 '대중의 요구가 표출'된 것이고, 바라지 않던 결정은 '관료집단의 음모'에 의한 것이다.
  

내용적 민주주의 같은 것은 꿈꾸지 말자. 지금 우리는, 보수정당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쫓아가기에도 힘겨운 수준이다. 새 시대의 민주주의는 자신만이 올바름을 독점하고 있다는, 선민의식에 찌든 자들의 대행주의가 아니다. 우리 당의 민주주의는 민중을 위한(for) 것도 아니고, 민중에 대한(to) 것도 아니다. 우리 당의 민주주의는 민중에 의한(by) 것이다.
 

우리 당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요소들에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당이다.
첫째, 권위주의. 보수정당들은 단일 권위가 확고해서인지 그에 대한 훼손이 아니라면, 합리를 확대하고 있다. 반면 운동권은 권위의 과두점(寡頭占)으로 고통받고 있다. 권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권위는 신뢰에 의한 위임과 총괄적 지지를 낳고, 조직을 효율화시킨다. 그러나 권위가, 결코 민주주의와 분업을 대체할 수 없음에도, 운동권은 조직보다 명망가에 의존하던 70년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그 권위가 허구일 때 발생한다. 역사적 경험이 권위를 낳고, 권위가 직책과 직권을 낳아야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의 경로를 따르고 있다.
  

둘째, 종파주의. 조직 안에 여러 이견이 있거나 집단 행동을 하는 분파가 있다하여 문제될 것은 없다. 오히려 실재하는 분파를 애써 외면하거나 죄악시하는 태도가 더 위험스럽다. 다수의 경쟁을 통해 지도 중핵을 형성하려는 우리 당에 있어 분파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문제는 분립의 이유 없이 분리하고, 당의 이익보다 분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데 있다. 우리 안에는 여러 그룹이 있다. 하지만 어떤 말을 자주 쓴다는 따위 지엽말단의 차이가 아니라, 과학적 노선 차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그룹은 없다. 그룹과 그룹 사이보다는 그룹 안 개인과 개인의 차이가 더 클 정도다. 이것은 우리의 차이라는 것이 감성의 수준, 인간 관계의 관성이라는 저급한 차원에서 기원함을 의미한다. 보수정당의 계파보다 나을 이유 하등 없다. 나는, "우리는 이렇소"라고 용기 있게 나선 분파들이 쟁투하기를 바란다. 늘상 남과 다른 것을 강조하지만, 막상 자기를 밝히지는 못하는 분파, 어떤 이유든 끌어대어 분립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기생 분파는 당을 살리는 창조적 소수가 아니라, 당을 망치는 문제적 소수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셋째, 온정주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위주의나 종파주의가 조직의 민주주의를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타인과 자신의 비민주적 태도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우리의 원칙은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이중적인 것이고, 타인을 제어치 않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기약 없는 미래로 해결을 미루며, 관용과 온정으로 당을 방치하는 온정주의는 하루 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4.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정당

  

정치의 정의(定議)는 정치학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이것은 가두어둘 수 없는 맹수, 무궁무진한 '정치'의 원죄다. 그런데 지금 우리 당은 스스로를 가두려 한다.
  

그 선두에 '대중투쟁론'이 있다. 우리 당 역시 조직된 대중의 위력으로 목표를 성취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음모자로서의 당이나 테러에 의존하는 당이 아닌, 공개적 대중정당으로서의 우리에게 대중의 분노와 지혜, 지지와 물리력 이외의 수단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 운동권의 '대중투쟁론'은 대중의 막강한 힘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특정한 전술 형태에 대한 맹신과 특정한 전술 형태의 배격일 따름이다.
  

대중투쟁론의 모든 것은 "절박한 민중투쟁을 등지고 의회선거에 매몰된다"는 식의 주장, 집회 주최측의 통제를 어기고 가두로 뛰어들고는 "투쟁을 기피하는 지도부를 대중의 투쟁 열기로 잠재웠다"는 식의 평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중투쟁론자들이 선호하는 대중투쟁은 파업(그 84∼93%가 경제파업이다 ; 91년-98년 기준), 집회 및 시위(특히 집시법을 위반하는) 등이다. 그리고 제도나 기구를 이용하는 투쟁은 '개량주의'로 낙인찍는다. 그렇다면, 보통선거권 쟁취를 강령의 제일 앞머리에 두곤 하던 맑스가 개량주의의 원조이다. 그렇다면, "인민의 정치생활은 언제나 선거에 의해 결산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극히 반동적인 의회조차도 모든 선동의 중심으로 이용"하고, "부르주아 의회도 이용할 줄 모르는 무정부주의자와 무자비하게 인연을 끊으라"고 조언한 레닌은 개량주의에 매몰돼 있었던 것이다(위 인용은 순서대로 「선거캠페인과 선거강령(1911)」,「제4차 국회의원 선거(1912)」,「국가와 혁명(1917)」).
  

당 전술의 채택, 그리고 투쟁에 대한 평가는 그 투쟁의 양상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투쟁의 내용과 지향, 정세 및 조직 현실과의 적합성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대중투쟁론자들은 형태주의적 전술관에 빠져 대중을 생디칼리즘으로 오도(誤導)하고 있다.
  

대중투쟁론의 연장선상에 '대중투쟁을 지원하는 당'이라는 성격 규정이 자리한다. 상당 기간 동안 우리 당의 활동 중 대부분을 대중투쟁 지원이 차지할 것은 불문가지이지만, 계량에 따라 당의 성격과 임무를 가늠할 수는 없다. 대중투쟁 지원을 목표로 한다면 투쟁지원조직을 만들 일이지, 당을 만들 필요는 없다. 우리 당의 첫째 임무는 그 본연인 정치투쟁을 잘 하는 것이고, 대중투쟁에 정책적으로 결합하고 정치적으로 엄호하는 것이지, '몸 대주는' 투쟁 지원은 아니다.

    
'합법정당'이라는 재단도 옳지 않다. 선관위에 등록하는 우리 당이나, 비밀경찰의 추적을 받는 어떤 당 사이에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벼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벼랑은 스스로를 제한하는 자기 검열일 뿐이다. 국민회의가 모든 것을 공개하는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국민회의의 비밀당원과 간첩이 득시글댄다. 무슨 운동을 한다는 재야 명망가 상당수는 등판을 기다리며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는 국민회의의 구원투수들이다. 한나라당이 선거 제도에만 안주하는가? 아니다. 한나라당은 한총련만큼이나 정권 퇴진을 고창하며, 이른바 '장외투쟁'을 서슴치 않는다.
우리가 누구이고,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가장 정확하게 나와 있다. 무엇만 하겠다, 무엇은 안 하겠다고 선언하거나 약속하는 경직된 조직은 정당이 아니다. 더더구나 사회를 뒤흔드는 진보정당은 결코 될 수 없다. 우리 당은 어떤 전술도 꺼리지 않고, 어떤 상황도 피하지 않는 당이어야 한다.


5.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정당

    

우리 당은 성장하는 정당, 변전(變轉)하는 정당이다.
창당 후 당원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갈까? 아마도 사람들은 "당인데……"라거나 "당이니까……"라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될 테다. 우리 사이에는 어느새, 당이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당인데 그럴 수 있나 하는 문제의식이 자리잡아 가고 있다. 모두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모든 당이 같을 수는 없다. 1만5천 내지 2만 명 정도의 당원을 갖게 될 99년의 당과 10만 명을 육박할 몇 년 후의 우리 당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서너 명의 문필가가 대부분의 문서를 작성하는 당과 수십 수백의 전문가 풀(pool)을 상시 가동하는 당은 다를 수밖에 없다. 광역으로 조직을 짜도 생존키 어려운 지금의 당과 통 반 조직까지 갖춘 당은 사업 목표, 활동 수단, 활동 경로, 영향력에서 서로 다른 당이다.

    
2000년 초반까지의 우리 당은 2만 명 정도의 수동적 당원, 100명도 안 되는 전업 당 간부, 월 1억 가량의 유동 자산을 가지는 작고 힘 없는 당이다. 우리 당은 날씨가 안 좋으면 숨고, 큰 적을 만나면 피해야 하는 게릴라 부대다. 달랑 AK 소총 몇 자루 들고, 정규군 흉내를 내거나, 제국주의 군대와 정면 대결하는 멍청한 게릴라 부대는 없다. 질과 양에서 민중당 출마자의 절반도 갖추지 못한 우리가 내년 총선에 많은 투자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산발하는 즉자적 '투쟁'을 쫓아다니는 것은 그나마의 자원을 소진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게릴라 조직의 제일 가는 금도(襟度)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당 조직을 짜고, 계획을 세우고, 전술을 택하고 행사함에 있어 '당위'라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당으로서의 형식적 완결을 추구하거나 '시대적 과제'니, '급박한 요구'니 하는 것들에 휩쓸려서는 곤란하다. 당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고, 어떤 일을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지, 냉정한 판단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지금 단계 우리 당의 금도는 집중과 기동, 과감한 포기이다.
"별을 따려고 손을 뻗는 사람은 자기 발 밑의 꽃을 잊어 버린다." - 제레미 벤담


6.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정당

  

우리 당은 변화된 상황에 발맞추어 가는 새로운 유형의 정당이다.
첫째, 우리 당은 비국가 영역에 적극 참여하는 당이다. 지난 100여 년 간 정치는 국가와 동일시되어 왔다. 서구 사민주의와 동구 사회주의는 이런 인식에 따라, 제도를 생산하는 근원인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사회와 인민을 개조하는 전략을 취한 제2인터내셔널의 두 산물이다. 의회주의를 택하든 군사주의적 방식을 택하든 그들의 문제의식은 국가로만 향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문화, 시민사회 속에서 매순간마다 제도가 생산 유지되고 있으며, 정치투쟁 또한 비국가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 외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계급투쟁에 주목하면서, 그곳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별도의 정치권력을 구축하여야 한다.
  

둘째, 우리 당은 명실상부한 탈국가주의, 노동자 국제주의를 지향한다. 지구적 자본주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1848년에 제출됐다. 하지만 당시의 노동자 국제주의는 유럽에 국한되었고, 제2인터내셔널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사회애국주의에 무릎 꿇었으며, 제3인터내셔널은 소련의 국가 이해를 관철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국제 자본 이동의 98%가 금융 투자인 오늘날 계급과 당의 운명은, 우리의 사고와 실천이 얼마만큼 국경을 넘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투기자본의 가장 큰 돈줄이 미국 노동자 연기금인 상황, 원진레이온 설비가 '사회주의' 중국에 수출되는 상황을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당장, 국제사업에 사람을 배치하고 돈을 써야 한다.


結. 당은 당이다

지금까지 나는, 우리 당의 현황과 나아갈 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당만이 가지는 특수한 성격을 알리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당'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조직이 당이라는 사실 외에 여러 수식어들은 몽땅 잊어도 무방하다. 아니, 잊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당이란 무엇인가? 당은 사회의 조직자이다. 새 사회를 만드는 일이든, 사회를 유지시키는 일이든 당은 그 최종 조직자로 기능한다. 따라서 모든 당은 집합 이성일 수밖에 없으며, 특히 진보정당은 집단적 혁명가로서 기능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정당창당추진위원회의 현재 모습은 집합 이성이라거나 집단적 혁명가라 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은, 말은 많지만 하는 일은 거의 없는 또 하나의 거대한 '운동권 연합전선체'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운동권의 전통과 관례에 따라 의사결정 구조를 짜고 인사(人事)했다. 당에 대해 하등 아는 것이 없는 사람, 앞으로도 관계 없을 사람들이 당의 일을 갑론을박한다. 잘 뛰는 이동국이 아니라 유명한 차범근에게 공격을 맡기고, 연주가가 아니라 음악평론가에게 악기를 쥐어주는 꼴이다. 지금 진보정당창당추진위원회는 국가권력을 넘볼 당이 아니라, 보기에 그럴듯한 당으로 흘러가고 있다. 여기에 승리를 향한 냉정한 이성은 존재치 않는다.

    
대표들은 발족한지 네 달이나 지났음에도 조직에서 누가 일하고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고, 스무 명에 가까운 상임집행위원(常任執行委員) 중 상임하는 사람은 채 다섯도 안 된다. 이대로라면 사회개혁에 일조할지는 몰라도, 사회혁명을 이끄는 조직이 될 수는 없다. 당의 집단적 혁명가로서의 역할은 노동조합 활동의 연장도 아니고, 사회운동 여가를 활용하는 취미생활도 아니다. 우리 당은 시급히 당 외부의 질서에서 독립하여, 당의 고유한 질서를 창출해야 한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는 공개 선언을 하였다. 사회주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주장을 새삼 반복한 것이었는데, 또 다른 이면에서는 80년대 이념 인플레의 산물인 한국의 '사회주의'에 신물이 낫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자는 자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생활의 모든 방면과 수준에서 사회주의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자만이 사회주의자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그 지식을 지지하는 학자, 양심 삼는 사람들, 기껏해야 급진적 민족주의자나 민주주의자에 불과한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라 자칭하고 있다. 3류 혁명가와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의 '사회주의'는 운동권의 허장성세, 혁명적 낭만주의, 비이성적 맹동일 뿐, 합목적적 효율성 이외의 어떤 것도 가지지 않는 사회주의 핵심과는 아무 인연이 없다.

    
우리에게 있어 창당은 운동권 후진 문화와의 절연이다. 한국처럼, 일반민주주의적 과제인 진보 일반과 근로계급의 이해에 입각한 특수 진보가 착종된 사회에서는 진보정당의 진출을 가로막고 그 성장을 방해하는 모순이 당 내부에 배태된다. 그리고 근로계급은 일반민주주의 운동으로부터의 독립을 통해 진출·성장하게 마련이다. 맑스가, 범람하고 오도된 '사회주의'와 분별 정립하여 공산주의를 태동시킨 것처럼, 러시아 사민주의가, 나르드니키를 자양으로 삼으면서도 철저한 절연정책을 통해 형성된 것처럼, 우리의 창당 역시 한국 운동권과 절연하고 투쟁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우리 당의 진정한 창당은 한국 운동권의 전근대성, 비민주성, 비효율성, 관념성을 숙청하고, 사회주의적 전통을 복구하는 문화혁명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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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1 20:03 2005/02/2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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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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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 중 하나는 손석춘 님의 글은 2004년 8월말에 쓴 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사회적 교섭이 왜 문제인지, 노사정 대타협을 운운하는 것이 왜 위선인지를 잘 지적하고 있다. 대타협을 할만한, 사회적 교섭에 임할만한 조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민주노총 지도부는 공약을 들먹거리며 사회적 교섭을 운운하는가.

 

두번째 기사에서 언급되는 글들은 읽어볼 만할 듯하다. "여전히 지속되는 국가의 노동배제 전략이 전환되지 않는 한 노사정위는 ‘참여와 협력’의 기제가 아닌 ‘이데올로기 통제장치’ 구실을 할 뿐"이라는 노중기 교수의 글이나, "조직노동자의 대표성 확보를 통한 사회통합은 정규직 노동자의 특권화를 통한 대다수 비조직 노동의 배제와 경쟁 등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사회통합 논리에 활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조직노동자만이 참여하는 노사정위는 또 다른 배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기존의 틀로는 노동계 전체의 문제를 담아낼 수 없다"고 파악하는 김원 연구원의 글도 의미가 있다.



‘노사정 대타협’의 위선

한겨레신문 아침햇발 편집 2004.08.30(월) 18:52

         

가물가물하다. 권력과 손잡은 ‘먹물’을 우리 무엇이라 불렀던가. 그 이름을 다시 새긴다. 어용지식인. 박정희·전두환·노태우에 부닐던 어용지식인은 늘 넘쳐났다. 언론인·문인·교수들이었다.

                    

권력의 성격이 바뀌면서 ‘어용’이란 말은 시나브로 사라졌다. ‘어용’보다 ‘참여’가 온당하게 들렸다. 딴은 갈고닦은 지성을 현실화한다면 ‘보국’ 아닌가. 잘못된 현실을 바꾸기란 어쩌면 권장할 미덕일지 모른다.

            

김대중을 거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뒤 지식인의 참여는 여느 때보다 왕성하다. 먹물만이 아니다. ‘운동가’까지 곳곳에 포진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대통령에 오른 두 김씨 또한 ‘민주인사’ 아니었던가. 그들보다 기여는 적지만 ‘인권 변호사’ 노무현도 대통령에 앉았다.

             

문제는 그들 모두 권력을 쥔 뒤다. 현실을 지청구로 군부독재자를 어금지금 닮아간다. 노동문제에 이르러선 한결 두드러진다. 국제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는 악법을 근거로 살천스레 “불법 엄단” 으름장이다. 권력을 만끽하는 풍경이다.

              

본디 권력을 잡겠다고 나선 정치인들은 그렇다고 접자.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정치인도 아닌 이들이다. 누구인가. 김대환. 현직 노동부 장관이다. 경제학 교수인 그는 학식과 성품 두루 높이 평가받아 온 학자였다.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모르쇠하지도 않았다. 참여했고 발언했다. 노 당선자 시절 ‘정권 인수위’에 들어간 그가 조각에 빠졌을 때 아쉬움마저 느꼈다. 현직 노사정위원장에 눈길이 가면 더 허전해진다. 김금수. 그 이름 석자는 현재 대다수 노동운동가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있다. 부자신문의 표현을 빌리면 ‘노동운동의 대부’다. 그의 영향과 감화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생게망게한 일이다. 노동정책은 그대로 아닌가. 여전히 불법을 내세워 엄단한다. 정책결정에 노동자를 따돌리는 구태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령 ‘노사정 대타협’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른바 ‘대타협’에서 노동자는 더 잃을 것밖에 없지 않은가. 금융노련의 한 간부는 분노를 삭이며 물었다. “무엇으로 우리가 조합원에게 타협을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차분히 톺아볼 일이다. 실제로 그러하지 않은가. 악법으로 노동자를 곰비임비 구속하면서, 대타협을 윽박지르기란 위선 아닌가. 올해 초 노사정의 ‘일자리 사회협약’을 되돌아보자. 선언으로 끝나지 않았던가. 그 선언에 나선 김 위원장의 모습은 차라리 민망스러웠다.

          

물론, 오늘의 노동현실을 모두 권력 탓으로만 돌릴 일은 아니다. 일차적 책임은 응당 지난 10여년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지도부’에 물어야 할지 모른다. 지도부에만 싸움을 맡기거나 뒤에서 ‘평론’만 일삼는 이들 또한 그 ‘문책’에서 자유롭지 못할 터이다.

           

하지만 그 자성이 문제의 본질마저 흐릴 수는 없다. 보라. 이 땅의 자본가들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저들의 완고함이야말로 노사관계를 무장 악화시키는 주범 아닌가. 더구나 그들의 논리를 세련되게 포장해 날마다 수백만부씩 뿌리는 공범이 있지 않은가. 부자신문만이 아니다. 방송 3사도 노동운동에 결코 ‘중립’이 아니다. 비단 언론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자본의 권력에 부닐며 떡고물 챙기는 어용교수·어용문필가 따위는 얼마나 널려 있는가.

            

그래서다. 언죽번죽 ‘노동귀족’을 들먹이는 대통령이나 ‘불법 엄단’을 앵무새처럼 부르대는 국무총리에게도 ‘언론의 자유’를 한껏 주자. 다만 김금수 위원장과 김대환 장관에게는 그럴 수 없다. 믿음 때문이다. 노동운동만 지지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최소한의 일은 해야 옳지 않은가.

          

정부·여당과 한나라당이 ‘합창’하는 대타협이 허울만 타협이지 노동운동을 겨냥한 ‘여론 공격’임을 모르는가. 그것이 ‘오해’라면 대타협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지 당당하게 밝혀야 옳지 않은가. 선언식으로 압박하는 대타협이 이땅의 노동운동을, 이땅의 노동자들을, 벅벅이 옥죌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궁따고 있는가. 그 ‘깊은 뜻’은 대체 무엇인가.

손석춘 논설위원 s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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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친노동자’ 정부 노사정위는 어디로?

기사섹션 : 책과 사람 등록 2003.07.04(금) 18:23

조흥은행 및 철도 파업 이후 재계와 보수·수구언론이 노동계를 향해 총공세를 취하고 있는 가운데, 노무현 정권 아래에서 노사정위원회의 향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작업장 차원에 국한된 조합원들의 물질적 복지를 개선하자는 성격보다는, 은행산업 및 철도교통망의 향후 방향을 둘러싼 정책 갈등 성격을 띤 파업 국면에서, 해결을 모색하는 노사정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가능하냐는 물음에 대한 회의론도 커지고 있다.

노중기 교수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당화 장치"
조효래 교수 "정규 노동자 실리 넘어 사회연대 나서야"
파업 때 정부의 노동배제 극복이 노사정위 앞날 관건


노중기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한국사회과학연구소에서 펴내는 학술지 〈동향과 전망〉(박영률출판사/1만2천원)에 특집기획으로 실린 ‘노사정위 5년, 평가와 전망’에서 “노사정위는 국가의 노동통제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며 “김대중 정권 아래에서 노사정위는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통제장치였다”고 분석한다.

현 정권 아래에서 노사정위 전망을 두고서는 △위기 국면을 벗어난 한국의 거대자본들이 더는 정부의 노사정위 참여를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조합주의의 정치적 기반 및 조직구조가 부재한 상황에서 상층부 중심의 합의기구는 장기적으로 존속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어 회의적인 눈길을 보낸다. 특히 여전히 지속되는 국가의 노동배제 전략이 전환되지 않는 한 노사정위는 ‘참여와 협력’의 기제가 아닌 ‘이데올로기 통제장치’ 구실을 할 뿐이라고 한다. 다만 노동계의 최대과제인 비정규직 노동 해소, 산업별 노조체제로의 전환에 대해 정부가 비전을 제시한다면, 노동계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음을 내비친다.

같은 책에 실린 ‘노사정위를 둘러싼 노사정의 전략과 활동전망’에서 임상훈 한국노동연구원 박사(노사관계학)도 어두운 전망을 내놓는다. 무엇보다 “사용자 단체는 노동계가 참여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장하거나 참여하더라도 노정간 갈등을 증대시키고 실질 협의를 지연하는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때문이다. 노사정위 역시 “김대중 정권 때처럼 노동정치의 전면에서 활동하기보다는 업종·지역협의회나 노정 교섭, 산별 노사교섭 등 노사정 간에 벌이는 사회적 협의의 한 교섭기구로서 운영되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도 상당한 기간 동안 우여곡절을 겪을 것임을 예고한다.

노동조합으로 결성된 ‘조직노동자’의 상태에 관한 연구결과들도 노사정위의 향후 전망이 밝지 않음을 보여준다. 김원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객원연구원은 〈역사비평〉 2003년 여름호에 노사정위를 코퍼러티즘의 실험으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며 기고한 ‘노동문제 인식과 담론 비판’에서 “조직노동자의 대표성 확보를 통한 사회통합은 정규직 노동자의 특권화를 통한 대다수 비조직 노동의 배제와 경쟁 등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사회통합 논리에 활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한다. 조직노동자만이 참여하는 노사정위는 또 다른 배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기존의 틀로는 노동계 전체의 문제를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경제와 사회〉 2003년 여름호의 특집기획 ‘경제위기 이후 노사관계와 노동자 의식’은 조직노동자의 상태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지난해 7~8월 경상대에서 경남·울산·부산지역의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 소속 노동조합 92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 결과를 정리하며, 조효래 창원대 교수(사회학)는 “기업 수준에서 단체교섭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조합원들의 실리적 참여 수준은 높으나, 기업 수준을 넘는 조합활동을 통한 사회적 연대나 계급적 연대는 취약하다”고 분석하며, 이런 조합원의 의식상태를 ‘집합적 도구주의’로 규정했다. 최근 현대자동차 노조 조합원들이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것을 부결시키고 기업별 노조를 유지하기로 한 것은 이런 틀로 분석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노사정위의 필요성에 대해 비판적이든 긍정적이든, 말로는 노사정위를 키운다고 해놓고 ‘대통령직속자문기구’인 노사정위에 힘을 싣는 대통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노사정위는 올 11월까지 ‘사회적 합의기구’로 발돋움하기 위한 ‘로드맵’을 만들 계획이지만, 최근 파업 국면을 거치는 과정에서 정부가 드러낸 ‘노동배제’의 모습은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조준상 기자 s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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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2 06:25 2005/02/12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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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의 사회적 교섭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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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에서 이기기 위해 사회적 교섭을 하자고 김명호 민주노총 기획국장은 얘기한다. 그런데 뭘보고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건가? 기본적인 것에서도 제대로 당해내지 못하고 있는 판국에...

 

민주노동당 기관지인 진보정치 208호에 나온 사회적 교섭 특집기사를 올린다. 당은 아직 이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이 없다. 평등연대에서 최고위원회가 이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글을 당원토론게시판에 올렸다. 그러지 않아도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 당 중앙위원들 중의 많은 수가 민주노총의 대의원이다. 17일 있을 중앙위원회에서 중앙위원들이 사회적 교섭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2월 말에 있을 민주노총의 대의원대회에 임했으면 한다.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도록 요구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이걸 제안하면 전진의 동지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그들도 신중을 표방하면서 각을 세우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하면 내가 잘못본 것일까? 제안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일단 제안하고 나서 반응이 그저그렇더라도 추진해볼 필요가 있다.   



진보정치 208 호 2005. 1.17 ~ 1.23

사회적 교섭 비판론 논거들 

“노조 무력화 구조에 들어갈 필요 없어”

 

사회적 교섭 기구를 활용하자는 ‘참여론’ 혹은 ‘활용론’과는 뜻을 달리하는 사회적 교섭 비판론에는 불참론과 시기상조론이 있다. 불참론과 시기상조론은 노조의 교섭 전략·전술까지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노·자간 교섭을 하듯이 노·정간 노·사·정간의 교섭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불참론은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사회적 교섭이라고 하지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노사정의 흐름을 보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정부나 자본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도구로 사회적 교섭의 틀을 활용해 왔다. 노조인 이상 교섭이 필요하지만 그 교섭이 노동자에게 불리하거나 정부나 자본에게 이용당할 소지가 많다면 노동자들은 교섭을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민주노총 김태연 정책국장)


또 민주노총 지역본부의 한 상근 국장은 “외국의 사례에서 보면 강력한 좌파 정권이 있어도 사회적 교섭에서 노동자들이 많은 것을 양보했다. 참여정부는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어 노사정 교섭에서 2대 1의 양상이 벌어질텐데 이러한 힘의 관계에서 노동자들은 얻을 것보다는 잃을 것이 많다”고 말했다.

  
불참론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교섭에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시기상조론’은 현재 민주노조 진영의 조직 역량상 사회적 교섭을 추진하기에는 이르다는 것이다. 강력한 산별 조직도 건설되지 않은데다 참여 정부가 사회적 교섭을 위해 노동계에 대한 태도 변화를 보이지도 않았는데 사회적 교섭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김종수 강원본부장은 “현재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분명히 견지하고 있고 그 틀 안에서 노조를 무력화를 시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 구조로 들어가는 것이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공공 연맹의 현광훈 정책국장은 “불참론과 시기상조론은 내용상 별 차이가 없지만 참여론과는 정세 인식에서부터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교섭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참여 정부의 개혁성을 주목하고 계급 타협의 전망을 보기 때문이다”면서 “불참론이나 시기상조론은 참여 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하려는 의도를 과거 국민의 정부에서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정리해고 문제를 해결했듯이 비정규직 문제를 법제화하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 국장은 “노사 관계, 노사정 관계에서 핵심적인 문제를 합의하기는 불가능하므로 전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부분, 예를 들어 사회적 보호가 필요한 계층에 대한 지원이나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한 사회적 교섭이나 대화로 가볍게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교섭 비판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민주노총이 2월 투쟁을 앞두고 1월 20일 열리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사회적 교섭 방침을 결정하는 것은 잘못이라 지적했다. “지금은 2월 총력투쟁을 조직화해야 되는 시기”(민주노총 김종수 강원본부장)라는 것이다.


(박미경pmk@kdlp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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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208 호 1.17 ~ 1.23 

사회적 교섭과 민주노동당 

‘지지와 우려’ 공존, 공식입장 아직 없어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공식입장은 없다. 민주노총 내에서도 아주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당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조심스럽다. 특히 사회적 교섭에 적극적인 민주노총 이수호 지도부와 다른 입장을 가진 당직자나 당원들은 공개적인 입장표명을 꺼린다. 이런 가운데 최고위원회에서도 토론 없이 간략한 보고만 있었다.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이기도 한 이용식 최고위원은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에 적극 찬성하고 있다. 민주노총 이수호 지도부와 같은 입장이다. 이 최고위원은 “민주노동당이 제도권에 진입한 이상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을 거부하기는 어렵다”고 전제하고, “정부와 사회적 교섭의 틀을 만들겠다는 민주노총에게 대화하라 하지 말아라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오히려 이 최고위원은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을 당이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최고위원은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한 상황에서 민주노총의 대정부 교섭력은 더 커졌다. 민주노총이 이를 바탕으로 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당당하게 치고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당은 이런 민주노총의 시도를 지원하면 된다”고 밝혔다. 진장호 대외협력국장도 비슷한 입장이다. 진 국장은 “대중단체가 대중투쟁에 더해 교섭력이 있으면 더 좋은 것 아닌가. 당 외에 더 힘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당이 굳이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현재 민주노총 이수호 지도부가 추진하는 사회적 교섭이 과거의 협의틀과는 다르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이 최고위원은 “논의과정의 합의제와 결정사항의 법제화를 요구하는 것이 예전과 다르다”며 “민주노총이 설정한 의제들이 교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탈퇴도 가능한 전술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덧붙여 이 최고위원은 “지도부의 공약이었고 대의원대회에서 최종 결정할 것인데 시도조차 안 해보고 예전처럼 정부에 들러리만 설 것이라고 회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책위원회의 입장은 다르다. 전략적으로는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에 찬성하면서도 전술적으로는 반대한다. 장기적으로는 필요할지 몰라도 현재 정부 정책 아래서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정책연구원은 “핵심 이슈인 비정규직 문제와 공무원 노동3권에 대해 정부와 새로운 합의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노사정 테이블에서 민주노총이 얻을 것은 없다”면서, “정부 자문 역할이나 들러리에 머물지 않겠다면 지금은 사회적 교섭을 언급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연구원이 주장하는 사회적 교섭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의제를 설정할 수 있는 권한과 합의사항의 집행보장. 그는 이를, “비정규직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협의할 수 있고 이것을 법제화할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말로 표현했다.

 

또 다른 연구원은 사회적 교섭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민주노총의 분열과 지도력의 약화를 우려했다. 이 연구원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민주노총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 교섭 가부 여부와 상관없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교섭의 조건과 시기, 그 속에서 얻을 것 등이 진지하게 토론되고 결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대호ldh@kdlp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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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208 호 1.17 ~ 1.23

 

‘사회적 교섭’을 바라보는 민주노총의 입장 

“사회적 교섭은 투쟁이다”

 

사회적 교섭은 필요한가?

물론, 필요하다. 이것은 ‘사회적 교섭’을 바라보는 원칙적 관점의 문제이다. ‘투쟁과 교섭은 병행돼야 한다’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의 기본원리이다. ‘투쟁 없는 교섭이 허구적인 실리주의라면, 교섭 없는 투쟁은 공허한 전투주의’가 되고 만다.

 

투쟁은 본질적이고 지속적이지만, 교섭은 일시적이고 조건적이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생활경제적 처지 개선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해 투쟁하며, 협약을 통해 확보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쉬지 않고 투쟁한다. 나아가 노동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사회정치적 투쟁영역에서도 집요하고 완강하게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투쟁에는 언제나 매듭이 있다. 특히 자본주의체제 아래에서 노동조합이 자본가와 일정한 기한이 정해진 단기협약을 맺지 않고 존립하여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의 새로운 요구와 조건을 확보하는 하나의 매듭이며, 새로운 협약을 위한 준비과정이다.

 

노동조합운동에서 투쟁은 절대적 요소이며, 협약은 상대적 조건적 요소이다. 투쟁은 교섭으로 마무리되지만, 교섭은 어디까지나 투쟁의 한 형태이다. 교섭은 대중투쟁의 발전에 복무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정치세력화의 완성에도 복무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투쟁은 대중적 직접행동을 과시하는 정치경제적 투쟁과 교섭투쟁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그래서, 교섭은 또 하나의 계급투쟁 형태이다.

 

대중투쟁과 결합된 교섭을 통해 일정한 협약이 쟁취된다 해도, 그것은 영원불변할 수 없다. 새로운 투쟁이 분출하면서 더 나은 새로운 협약으로 전진해 나가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근본적인 노동해방의 조건을 성숙시키는 방향으로 협약을 복종시켜 나가야 한다.


교섭을 전략으로 보며 투쟁을 전술로 삼는 것은 우편향이며, 총파업과 전투적 투쟁만을 절대시하며 교섭을 부정하는 것은 좌편향이다. 그래서 사회적 교섭 추진의 원칙으로서, 대중투쟁과 교섭을 긴밀히 결합시켜 나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회적 교섭, 무엇을 다뤄야 하나

사회적 교섭은 1천5백만 노동자계급의 생존권과 차별철폐, 노동기본권 보장 등과 직결되는 국가정책이 주요의제로 되어야 한다. 50년 동안 미뤄져 온 정당한 분배문제를 실현하고, 빈부격차 해소, 비정규직 문제, 사회공공성 강화문제 등을 공세적으로 요구하며 노동계급적 해결대안을 사회적 해결방안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교섭을 통해, 무상교육·무상의료를 전면 실시하기 위한 법제도 정부예산 확보문제, 8백20만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 폐기와 근본대책 마련 문제를 다뤄야 한다. 또 대외경제 종속과 고용불안을 야기하는 시장개방정책의 전면 재검토, 노동3권 보장과 산별 관련 법제도 개선, 원·하청 불공정거래를 통한 중소영세기업 육성 등을 다뤄야 한다. 이것은 성장제일주의, 고용 없는 경제성장, 경쟁력 제일주의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기조를 바꾸는 투쟁이며, 진정한 의미의 경제살리기이다.


치열한 이데올로기 대결의 장

민주노조운동은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귀족노동운동’, ‘집단이기주의’, ‘그들만의 노동운동’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당하고 있다. 국민적 고립을 목표로 하며 노동운동의 정당성과 투쟁의 명분을 희석시키고 나아가 무력화시키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진행되고 있다. 정권과 자본은 언제나 ‘반공·반북 대결주의’, ‘성장제일주의’, ‘노사협조주의’, ‘생산성향상’, ‘국가경쟁력강화’,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출발점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횡행하는 가운데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노동조합운동이 이데올로기 대결을 회피하거나 수세적으로 대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데올로기 대결을 회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도 아니고, 수세적으로 방어한다고 해서 방어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별 차원의 교섭에서는 이념적 요구가 그렇게 높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당장 산별 차원으로만 넘어가도 국가산업정책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고, 국가정책에 내재된 이념문제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이겨야만 대중투쟁역량 구축에도 유리한 조건을 만들 수 있다. 그 동안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패배하고 이로 인해 개별투쟁의 패배로까지 이어진 뼈아픈 경험은 하나둘이 아니다. 사회적 교섭의 장은 치열한 이데올로기 대결의 장, 정책공세의 장으로 될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은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전민중적, 전사회적, 전민족적 이익을 대변할 것이다. 분배와 차별철폐, 평등과 자주, 진보적 민주주의, 반전평화와 통일 등의 민중적 이데올로기로 공세를 펼쳐 나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무력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원내 의정활동을 통해 매우 강력한 정책공세, 여론공세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며,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양 날개가 전사회적 쟁점을 주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교섭은 이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수단이 아니라, 민주노총이 노동자 민중의 진보적 이념과 정책공세를 대중적으로 펼치는 장으로 만들어져 나갈 것이다.

 

(김명호/민주노총 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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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1 22:58 2005/02/11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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