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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쓰기, 아니 장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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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돈을 참 많이 썼다.
 
우선, 두달만에 이발과 염색을 했다. 오늘도 공공사회학회 추계학술대회에 논문을 발표하러 갔다가 일준 선배를 만났는데, 염색하지 않은 머리를 보더니 '무슨 흰 머리가 이리 많나' 하는 눈치다. 그래서 오는 길에 바로 이발과 염색을 한 거다. 이젠 염색과 이발이 함께 간다. 13,000원이니 그리 비싼 건 아니지만, 혼자 집에서 부분염색한다고 생각하면 이것도 솔직히 아깝기도 하다. 암튼 두달에 한번 이발을 한다고 하면 일년에 이발에만 8만여원이 들어가는 셈인가.
 
헌책방에 들려 책 3권을 사는데 25,000원이 들었고... 도동고서던가, 여기는 탐낼만한 많은 헌책이 있는 반면,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비싸다. 그래서 정가의 반값이 넘는 경우에는 책 사는 걸 꺼리게 되는데, 어제는 700원 정도가 오바했는데도 그냥 사버렸다. 산 책은 거꾸로 달리는 미국(유재현, 그린비, 2009),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하일브론너, 홍기빈 옮김, 미지북스, 2010), 서재 결혼 시키기(앤 패디먼, 정영목 옮김, 지호, 2001)이다. 이 책들은 언제 읽게 될까. 우선 유재현의 책부터 가지고 다니면서 읽어야겠네.
 
그리고 저녁식사는 오랜만에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으려고 했는데, 고기를 싸게 파는 곳이 문을 닫는 바람에 양념치킨으로 바꾸었다. 시장에서 양념치킨 한마리 7,000원. 역시 혼자 먹기엔 좀 많았는데, 약간 남겨둔 걸 새벽에 먹었다.ㅠㅠ 이와 함께 혼자서는 술을 가능하면 먹지 않는 습성을 깨고, 맥주 1,000ml 2개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치킨과 함께 2단 정도 마셨다. 혼자 술마시는 것도 나쁘진 않구나. 맥주는 슈퍼에서 사니 1,000ml 한병에 2,450원이다. 술집에서는 500cc가 3천원인데...
또한 요하임 저지방요거트 1,000ml짜리 하나에 플러스 알파 150ml 두개 3,000원. 이건 아직 가격이 오르지 않았더라. 그리고 라면으로 요새 화제가 되고 있는 꼬꼬면을 찾았더니 보이지 않는다. 대형수퍼매장에는 잘 안들어오는 건가, 아님 금방금방 팔리는 건가. 대신 나가사끼 짬뽕으로... 이건 신라면보다 더 비싸구나.
 
오는 길에 디저트로 귤 3,000원 어치. 귤 가격은 매주 떨어지고 있다. 겨울철 과일인 만큼 갈수록 떨어질 것이다. 이 정도인가?
 
어차피 오늘 다시 시장을 봐야 한다. 묵은 김치를 처치하려면 김치찌개를 하는 게 장땡인데, 참치도 좋지만, 돼지고기 사태를 사서 넣는 것도 좋다. 그래서 일요일 쯤에 다시 혼자만의 삼겹살 파티를 벌이기로 하면서 삼겹살과 함께 사태를 사면 될 듯하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살찌는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엔 가능한한 소식을 하고, 육식을 자제하려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암튼 국내산 생삼겹이 한근 600g 9,900원이다. 몇 달 전에 비해 많이 내려간 편이다. 사태는 더 싸겠지?
그리고 달걀 한 판도 사야 하고...
 
돈 쓰는 것, 참 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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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9 05:48 2011/10/29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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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노동자 노동권·건강권 쟁취를 위한 제2회 전국돌봄노동자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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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돌봄노동자 노동권·건강권 쟁취를 위한 제2회 전국돌봄노동자대회가 서울역 광장에서 있다.
작년보다는 더 많은 이들이 모일까. 오늘의 집회를 조직하기 위해 수많은 기획팀 회의가 있었다. 물론 사회서비스 공대위의 성원으로 처음에 조금 참여하다가 사회서비스 사업팀도 모호하게 된 점이 있고, 다른 일로 바빠서 기획티 회의에 거의 결합하지 못했는데, 오늘 개최하기까지 온 것이다. 집회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한 동지들의 수고가 결실을 거두길 바란다. 물론 집회가 잘되는 것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돌봄노동자의 노동권·건강권가 확보되어야겠지. 그 전제는 돌봄노동자 자신이 그 주체로 우뚝서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돌봄노동자, 돌봄이 필요하다”
돌봄노동자 노동권`건강권 쟁취를 위한 제2회 전국돌봄노동자대회

2011.10.29(토) 오후 2시 서울역 광장
 
돌봄서비스 공공성, 돌봄노동의 사회적 책임 강화!
돌봄노동자 노동권, 건강권 쟁취!
돌봄노동자 산재보험 적용!
돌봄노동자 8시간 노동 및 근로기준법 준수!
돌봄노동자 실제 휴게시간 보장 및 휴게공간 마련!
돌봄노동자 적정 인력기준 마련!
 
주최 “ 공공운수노조 보육분과,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노동건강연대, 돌봄노동자법적보호를위한연대(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가정관리사협회,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전국실업단체연대, 전국여성가사사업단우렁각시, 전국여성연대, 주식회사약손엄마,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인력개발센터연합,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한국YMCA연합회, 휴먼서비스네트워크),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총연맹 여성위원회, 사회서비스 시장화 저지 공대위(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민주노총 서울본부, 진보신당, 빈곤사회연대, 사회진보연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학생행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장애인활동보조인권리찾기모임, 희망터), 전국요양보호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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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결의문> 돌봄으로 ‘골병’드는 돌봄 노동자, 건강권을 보장하라!
 
한국 사회가 저출산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돌봄 노동은 사회에서 꼭 필요한 공공서비스 영역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돌봄 노동 영역을 새로운 이윤창출과 저임금 일자리 창출 영역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돌봄 노동의 공공성을 훼손하거나 시장화로 일관하며 방치하고 있다.
가사노동자는 집안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근로기준법 자체가 적용되지 않아, 산재적용은 꿈도 못 꾼다. ILO 제100차 총회에서 가사노동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협약이 채택되었지만, 거의 반 년이 흐른 지금, 정부는 여전히 비준에 대한 입장과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보육교사는 가중되는 과로로 아이를 유산하는 사례가 빈번하며, 매일 10시간 이상 아이들을 돌보기 때문에, 일상적인 근골격계 질환, 성대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치료를 받거나 일을 그만 둘 뿐, 산재신청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간병 노동자들은 병원에서 병에 감염될 위험이 높지만, 예방접종은 커녕 환자의 병명도 모르는 채 일하다 환자로부터 옴 같은 질병에 감염되기도 한다.
요양보호사나 장애인활동보조인은 늘 장애인과 노인을 안거나 옮기거나 업기 때문에 허리, 어깨, 손목이 성할 날이 없다.
돌봄노동자들은 몸만 병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 환자, 노인, 장애인을 대하면서 늘 밝고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에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몸이 아파도 마음이 아파도 제때 치료받지 못해 우울하다는 돌봄 노동자들이 적지 않다. 돌봄노동자는 일을 하면 할수록 병이 드는 현실에 처해 있다. 돌봄 노동의 사회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노동자 개인의 희생으로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돌봄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건강실태를 사회적으로 알리고, 스스로 건강권을 쟁취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였다. 돌봄 노동자들이 항상적인 고용불안과 건강위험에 놓여 있다면 제대로 된 돌봄 서비스는 누가 제공하는가? 우리는 돌봄 노동자의 건강권은 돌봄 노동자들의 노동권 보장을 위해 꼭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하며,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공동으로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돌봄 노동자에게 산재보험을 적용하라!
하나, 돌봄 노동자 8시간 노동 및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하나, 돌봄 노동자 실제 휴게시간 및 휴게 공간 보장하라!
하나, 돌봄 노동자 적정 인력기준 마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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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9 04:39 2011/10/29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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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파크스는 어떤 맥락에서 얘기되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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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종이편지와 로자 파크스의 진실 (참세상, 권영숙(사회학 연구자) 2011.10.27 17:19)
[칼럼] "누가 로자 파크스를 말하는가"

 

YTN이 투표 직후의 투표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무슨 조사에서 박근혜의 영향력보다 안철수의 영향력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각각 추가적으로 19%, 26%의 지지를 이끌어냈다는 거다. 언론에서 박근혜가 나경원 후보에게 전달한 수첩과 안철수가 박원순 후보에게 전달한 거나 진배없는 종이편지를 비교했는데, 아마 아무리 별 볼 일 없다 하더라도 그 내용만은 수첩에 더 많이 적혔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첩의 컨텐츠는 수첩공주님과 양파녀밖에 모르지만, 안철수가 쓴 편지의 컨텐츠는 사방에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그 만큼 선거판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직접적으로 박원순 후보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는 대신 투표를 호소하기만 했는데도 큰 반응을 이끌어낸 걸 보면 안철수의 정치력이나 감을 무시해선 안될 것 같다.
 
이처럼 이번 서울시장 보선에서 나름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되는, 안철수의 종이편지와 그에 언급된 로자 파크스에 대해 참세상에 글이 실렸다. 사실 로자 파크스라는 사람, 안철수의 편지에서 처음 들었다. 귀동냥한 적도 없다니, 이리 무식할 수가... 
  

암튼, 글의 맥락으로 봐서 글쓴이는 페이스북에 존재하는 공개그룹인 '진숙85기금'( http://www.facebook.com/groups/JINSUK85fund )에 이장규 선배가 쓴 글, "닥치고 투표 어쩌고 하지만 아래 삼화고속 같은 버스 노동자나 병원의 간병인 등 격일 24시간 근무를 하는 사람들은 근무일엔 투표하러 갈 시간 자체가 없다. 투표율 높이는 게 그리 중요하다면 이들의 노동시간부터 줄여놓고 닥치고 투표 어쩌고 떠들어라"라고 한 걸 옹호하면서 로자 파크스의 진실에 대해 제대로 알자라고 얘기한다.
 
(참고로, 여기저기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들에 엄청난 글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감당이 안되는 것도 있지만, 접근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더라. 이번 보선에서 세대간에 지지성향에서 많은 차이가 난 것도 어쩌면 이러한 새로운 정보 및 토론공간의 활용도와도 관계있지 않을까. 분위기에서 차이가 있었으니 말이다. 박원순 선본의 SNS 중심의 선거운동의 공과를 떠나, 세대별 활용매체와 투표성향의 관계를 분석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사실 심재옥 동지가 얘기하듯이, 밤낮없이 일하느라 투표 못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을 요구한지 오래되었는데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 건 노동자들의 정치참여가 기득권층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투표 '못하는' 사람들 문제를 이슈화시키고 기업에 대한 규제, 협조, 유화책 등을 다양하게 제시했을 텐데, 여전히 이에 대한 관심은 부족하다. 나꼼수 등이 불러일으킨 '닥치고 투표'의 흐름은 정치혐오나 무관심을 일깨우는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맥락을 다 덮어 버리고 개인의 의지문제로 환원시켰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안철수의 편지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보선이 끝나자마자 홍준표나 전여옥 등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 것에 대한 반응이 다음 총선에서 표로서 심판하자는 얘기가 트위터에 심심치않게 나온다. 각종 선거의 부정적 영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선거나 투표는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정치활동의 성과를 확인하는 장이거나 아니면 여러 활동 중의 하나로서 활용될 수 있는 공간일 뿐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투표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고...
 
가끔씩 치뤄지는 선거가 같은 시기의 대부분의 쟁점들을 삼켜버리는 걸 보면, 이를 무시한 채 현장투쟁에 집중하자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선거와 투표만이 정치의 전부라고 오도되는 것 또한 문제다. 기존의 진보정당운동내지 그 안에서 활동해왔던 전진을 비롯한 정치조직들이 비판받아야 할 지점도 이러한 오해와 왜곡을 없애기는커녕 이를 조장하는 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앞으로 몇 개월간의 상당히 많은 쟁점들은 총선, 대선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계속 표로서 심판하자는 말이 터져나올 것이다. 그냥 이대로 두고 봐야할까.
 
에고, 참세상 칼럼에 대해 코멘트만 달려고 했는데, 또 글이 수습되지 않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구나. 여기서 중지.
 
추가. 몰랐는데, 오늘 보니 장귀연씨가 이와 유사한 논지의 칼럼을 썼더라. 그래서 추가. 로자가 로자를 다루니 조금 거시기하네.ㅋㅋ
 
[세상 읽기] 로자 파크스와 세상을 바꾸는 길 (한겨레, 장귀연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교수, 20111027 19:19)

투표에 참여하는 게 다가 아니다
불복종·직접행동을 할 권리도 있다
로자 파크스가 한 것도 그것이다

보궐선거를 이틀 앞둔 24일 안철수씨가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를 방문해 편지를 건넸다. 언론에 공개된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1955년 12월1일 목요일이었습니다. 미국 앨라배마주의 로자 파크스라는 한 흑인 여성이 퇴근길 버스에 올랐습니다.”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불씨를 지핀 로자 파크스의 일화를 소개하며 시작한 편지는 선거 참여를 간곡히 당부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안철수씨가 든 사례는 정확히 걸맞은 것이 아니다. 로자 파크스는 투표를 한 게 아니었다. 인종분리를 규정한 몽고메리시 조례에 따를 것을 요구받자 “싫어요”라고 대답했고, ‘당연히도’ 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법을 잘 지키는 ‘착한’ 시민이었고 흑인 참정권 시행을 기다려 투표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을 바꾸자고 마음먹었다면, 민권운동의 불을 댕기지 못했을 것이고 흑인들의 투표권도 절로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로자 파크스의 행동은 오히려 시민불복종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미국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투표장에서 대표를 선출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완전한 시민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다 했다. 소로는 반문한다. “당신이 선거로 대표자에게 나랏일을 결정할 권리를 위임했다고 해서 당신의 양심도 위임한 것인가?” 그는 법과 정부의 정책 결정을 따르는 것보다 우선하는 게 양심을 따르는 것이라고 보았고 <시민불복종>이란 책을 썼다. 이는 저항권의 정신과도 이어진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과 자유, 행복추구라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가졌다고 전제한 뒤, 이를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는 언제든지 폐지하고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정부를 조직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이제 자문해보자. 글자 그대로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나라인가? 월가 점거 시위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금융자본주의라고 일컬을 만큼 이윤은 금융적 이익을 따라 순환하고,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을 위해 투자되지 않는다. “1%에 저항하는 99%”라는 시위 구호처럼 소수 자산가들에겐 유리하지만 스스로 일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기에는 몹시 불리한 구조다. 그리고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각종 노동과 복지 지표들에서 단연 미국과 더불어 수위를 다투고 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그리하여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거부했던 분리정책은 반세기가 넘어 태평양을 건넌 나라에서 다시 실현된다. 통근버스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자리가 분리되어 있는 회사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그렇기에 로자 파크스를 언급한 안철수씨의 편지가 곧이어, 이번 선거가 부자와 빈자의 대립도 진보와 보수의 대립도 아니며 이념과 정파를 넘어선 화합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규정한 건 더 생뚱맞다. 대립과 갈등보다 화합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나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화합이 이루어지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소로가 말했듯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미국 독립선언문이 규정하듯 인민의 행복을 지키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의의가 없다.
선거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투표에 참여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거나 실망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올바르지 않은 법과 정책에 불복종하거나 직접행동을 할 권리도 있다. 로자 파크스가 한 것도 그것이며, 실은 선거란 제도도 수많은 혁명과 시위, 파업을 거쳐 만들어졌다. 당신의 양심에 비춰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투표 외에도 많은 참여 방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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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8 05:02 2011/10/28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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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선생 진보신당 당대표 출마의 변]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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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감동적이고 가슴벅찬 출사표는 처음 보았다. 이건 그냥 단순한 당대표 출마의 변이 아니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함께 만들어나가자는 뜨거운 권유이다.
 
아무나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게 아닐 터이다. 아무리 글을 그럴싸하게 쓰는 글쟁이라고 해도 거기에 묻어나는 진심과 감동이 없다면 이런 느낌을 갖지 못했으리라.
 
홍세화, 그의 끊임없는 변화가 나를 들뜨게 하고 놀라게 만든다. 처음에는 그저 그랬던 그가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진보정당에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이들의 모습만 보았는데, 정반대의 정방향으로 향해가는 모습도 보게 되는구나.
 
그가 말하는 대로 진보신당이 변한다면 우리는 정말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갖게 되는 셈이다. 한 사람의 의지와 행동을 통해 조직이 변한다면, 그게 바로 리더십인 게다.
 
난파선 같은 진보신당에서 대표직을 맡는 게 자리 욕심은 아닐 터이고, 그냥 그렇게 있으면서 여기저기 성명서에 이름도 내걸면서 괜찮은 진보인사로, 명망가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척박한 땅에 참된 진보정당의 뿌리를 내리는데 작게나마 기여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단다. 이 어려운 시기에 그 어려운 결정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 당원이 아닌 입장에서도 고맙다.
 
이 감동의 출사표가 진보신당 당원들뿐 아니라 이 사회가 바뀌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길 바란다.
 
어쩌면 몇 년 후 사람들은 2011년 10월 26일 있었던 가장 놀랍고 엄청난 사건은 무소속 시민후보의 서울시장 당선 소식이 아니라 <빠리의 택시운전사>로만 알려져 있던 홍세화 선생이 진보신당의 대표로 출마하면서 "<진보신당>을 ‘싸우는 정당’으로 만드는 것, 진보정당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거대 지배 권력과 싸우고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 그리하여 약자가 끝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진보신당>밖에 없다고 느끼게 하는 것"을 약속했고, 이를 지켰다는 걸 알게 될지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의 글이 감동적이다 못해 너무 짠해서 이번 기회에 나도 다시 진보신당에 입당해야 하나 고민하게 되었다.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이 많이 있을 터이다.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함께 나아가길 기원해본다.
 
아래에 홍세화 선생의 진보신당 당대표 출마의 변 중에서 몇 가지를 추려보았다. 하지만, 출마의 변 자체, 글자 하나하나가 감동적이다. 전문을 읽어보길 권한다.
 
관성과 관습을 넘어선 우리의 새로움은 과연 어디에 있었던 것입니까? 새로움은 어디서 긴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까? 진보정치의 새로움은 잠자는 권리와 저항의식을 일깨워 불의한 세상의 질서에 맞서 싸우게 하는 것이고 그 최전선에서 눈 부릅뜨고 미래의 세계를 향해 손을 뻗는데서 찾아야 하는 것인데 정작 우리는 어디에서 나태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 진보정치의 위기는 우리가 누구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고, 그리하여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데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진보신당>의 당원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양심적인 시민일 뿐이라면 우리는 이 땅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약자들의 투쟁의 뒷자리에 서있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진보신당>은 자본의 거대한 힘과 싸울 뿐 아니라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 너머의 내일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자본권력에 맞서 싸워야 할 진보세력이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포기하고 급속히 ‘우경화’되는 사태를 막아야 할 책임이 있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되찾아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재벌국가를 우리 모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합니다.
 
당의 정체성은 어떤 경우에도 선언이 아니라 실천적 활동 속에서 실현됩니다. 비정규직 없는 평등국가, 핵과 자연 수탈이 없는 생태국가, 전쟁 없는 평화국가, 모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존중받는 연대국가를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말보다 실천입니다.
 
<진보신당>처럼 단 하나의 의석도 없는 작은 정당일수록 한국 사회에 새롭고 핵심적인 의제를 던지면서 진보정치를 주체적으로 견인해야 합니다. 저는 <진보신당>의 가장 큰 자산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도자를 추종하는 당원이 아니라 이 시대의 진보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따지는 지혜로운 당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배 담론에 길들여져 허락된 것만 말하는 진보정당은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금지된 것을 욕망하고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불온함 속에 세상을 바꾸는 우리의 힘이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도 바뀌어야 합니다. 진보적 가치는 우리 당 속에서 가장 먼저 실현되고 증명되어야 합니다. 우리 당의 문화가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호혜적이지 않다면, 보수정당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

- 진보신당 당대표 출마의 변
                                                                                 홍세화(서울마포당협 당원)

사랑하고 존경하는 당원동지 여러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지금과 같은 순간이 올 것이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갈 수 없는 나라’로 남아 있었던 땅에 다시 돌아온 뒤로, 저는 이 척박한 불모의 땅에 뿌려진 진보정당의 씨가 마침내 개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벅찬 감회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소망했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쓴 글을 읽거나 저를 알고 지내온 사람이라면 제가 버릇처럼 되뇌던 말 하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의 소망은 하나였습니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는 것, 이것이 귀국 이후 10년 동안 제가 품어온 유일한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제가 나이 먹기를 거부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는 이를 두고 가당찮은 나르시시즘이라 이름 붙일지 모르지만, 제 꿈은 ‘사병’으로 남는 것이었습니다. 장교는 나이를 먹으면서 진급합니다. 사병은 나이를 먹어봤자 사병으로 남습니다. 실제 전투는 주로 사병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병으로 남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어!’ “평당원 홍세화!”― 이처럼 자랑스런 호명이 없을 것이고, 이 이름을 남기고 사라지고 싶다는 것! 지독히도 척박한 이 땅에서 힘겨운 진보정당의 발걸음 앞에 놓이는 작은 거름이 되는 것, 그 긴 행렬의 끄트머리를 지키며 사랑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싸우다 사라지는 것, 이것은 단지 소망을 넘어 제 삶의 원칙이자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둑이 흔들리고 금이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진보신당>의 벽에 균열이 생기고, 당의 보루라 믿어왔던 원칙들이 하루아침에 버림받는 것을 목격하면서 저와 같은 평당원들의 꿈들 역시 황망한 처지에 놓였을 것을 생각하면서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힘겨웠습니다. 그냥 달아나버리고 싶을 때는 마포강변을 걸었습니다. 나의 빈 주먹질을 묵묵히 지켜보던 쎄느강처럼, 과거 홍수가 나면 주변을 초토화시키곤 했던 그 한강을 바라보기 위해 말입니다. 달아날 것인가, 아니면 무너져가는 둑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언제나처럼, 대답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믿음이 살아나는 당을 위해 이 무대에 오르겠습니다
저는 이제 허공을 향해 퍼부었던 탄식과 누군가를 향한 원망을 모두 접습니다. 주저와 망설임 끝에 저는 오는 11월 진보신당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기로 하였습니다. ‘보다 나은 삶’과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정치는 존재하며, 그러므로 ‘정치는 고귀한 것’이라 주장해왔지만 결코 저 자신이 오르고 싶지는 않았던 무대, 그 무대에 오르며 당원 동지 여러분께 제 두려운 결심을 알리고, 숱한 번민과 그동안 느꼈던 마음의 고통과,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진보신당의 미래에 대한 저의 희망을 간략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3년 전 ‘새로운 진보’의 깃발을 내걸고 창당된 뒤, 우리 당은 새로운 진보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지금에 와서 이 모든 노력들이 헛된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오늘 <진보신당>의 초라한 모습 앞에서 자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관성과 관습을 넘어선 우리의 새로움은 과연 어디에 있었던 것입니까? 새로움은 어디서 긴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까? 진보정치의 새로움은 잠자는 권리와 저항의식을 일깨워 불의한 세상의 질서에 맞서 싸우게 하는 것이고 그 최전선에서 눈 부릅뜨고 미래의 세계를 향해 손을 뻗는데서 찾아야 하는 것인데 정작 우리는 어디에서 나태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진보신당>의 위기가 통합이냐 독자생존이냐를 결정하는 데 실패한 것에서 온 것이라 믿지 않습니다. 단언컨대 오늘 진보정치의 위기는 우리가 누구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고, 그리하여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데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우리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 이 자가당착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상황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가운데서도 가장 치명적인 것은 믿음을 잃은 것입니다. 당 바깥의 대중은 진보신당의 의지와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고 우리 당의 당원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반목하게 되었습니다. 불신과 반목은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 피어나는 가시꽃입니다. 하나의 질문만이 남았습니다. 지리멸렬을 지속하다 자멸의 시간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이 황량한 가시밭을 다시 일구어 ‘빵과 장미’를 가져오는 당의 새로운 시작을 피와 땀을 흘려 만들어낼 것인가? 만일 우리가 실낱같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가장 먼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또한 서로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아직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위해 저는 이제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 위로 오릅니다.
 
우리가 누구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되새깁시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지 여러분!
동지 여러분과 제가 떠올려야 할 한 가지 질문이 더 남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진보신당>에 남으려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왜 다른 이가 내던지고 간 이 막막한 짐을 계속 지려 하는 것입니까? 그 까닭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그것은, <진보신당>이 아니면 어떤 정당도 해결할 수 없는 근본 문제가 지금 우리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군부 독재가 종말을 고한 뒤에 민중은 지금 자본의 독재 아래 신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지금 전 세계에서 요동치는 반反금융자본 투쟁 하나만을 보아도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아직도 35미터 상공의 영도조선소 크레인 위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 찬바람을 맞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투쟁만 보아도 명확해지는 사실 아닙니까? 우리가 만일 <진보신당>의 당원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양심적인 시민일 뿐이라면 우리는 이 땅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약자들의 투쟁의 뒷자리에 서있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것만으로는 당과 당원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보신당>은 자본의 거대한 힘과 싸울 뿐 아니라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 너머의 내일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자본권력에 맞서 싸워야 할 진보세력이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포기하고 급속히 ‘우경화’되는 사태를 막아야 할 책임이 있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되찾아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재벌국가를 우리 모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말이 아니라 먼저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당의 정체성은 어떤 경우에도 선언이 아니라 실천적 활동 속에서 실현됩니다. 비정규직 없는 평등국가, 핵과 자연 수탈이 없는 생태국가, 전쟁 없는 평화국가, 모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존중받는 연대국가를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말보다 실천입니다. <진보신당>은 싸우는 시늉만 하는 정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민생은 ‘투어’로 자족해도 좋을 만큼 여유롭지도 녹록치도 않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저는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약속드리겠습니다. <진보신당>을 ‘싸우는 정당’으로 만드는 것, 진보정당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거대 지배 권력과 싸우고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 그리하여 약자가 끝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진보신당>밖에 없다고 느끼게 하는 것, 그것입니다. 저는 그것만이 공허한 논쟁으로 분열되고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을 올바르게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여기가 로두스Rhodus다. 여기서 뛰어보라!” 만일 우리에게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힘이 남아 있다면 다친 무릎을 일으켜 세워 있는 힘을 다해 절벽과 절벽 사이를 다시 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당의 능력 있는 젊은 일꾼들과 함께 지역별로 또는 과제별로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그것을 하루속히 조직화하는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정치공학적인 생존전략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통해 대중의 신뢰를 얻고, 당의 외연을 확대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일에만 몰두하여 ‘지혜’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주어진 조건이 열악할수록 지혜는 선택과 집중 속에서 잘 발휘될 것입니다. <진보신당>처럼 단 하나의 의석도 없는 작은 정당일수록 한국 사회에 새롭고 핵심적인 의제를 던지면서 진보정치를 주체적으로 견인해야 합니다. 저는 <진보신당>의 가장 큰 자산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도자를 추종하는 당원이 아니라 이 시대의 진보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따지는 지혜로운 당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시대의 핵심적인 과제들이 무엇인지 상당 부분 알고 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노동자 경영권을 요구해 주주자본주의를 흔들어야 하며, 상비군 폐지를 공론화시켜 병영국가의 성벽에 균열을 내야 합니다. 서울대는 없애고, 대학은 평준화하며, 각종 국가고시는 지역별로 할당하라고 요구함으로써 학벌사회를 전복시켜야 합니다. 지배 담론에 길들여져 허락된 것만 말하는 진보정당은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금지된 것을 욕망하고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불온함 속에 세상을 바꾸는 우리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도 바뀌어야 합니다. 진보적 가치는 우리 당 속에서 가장 먼저 실현되고 증명되어야 합니다. 우리 당의 문화가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호혜적이지 않다면, 보수정당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것들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비난하는 극우 사익추구집단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작은 차이로 끝없이 반목을 거듭한다면, 누구에게 참된 만남과 고양高揚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이 결심을 하고자 했을 때 저를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극구 만류하고 나섰습니다. 그분들이 제게 한 말 중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받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선의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저를 아직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셨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는 상처가 두려워 평당원으로 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였던가요, 두려운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이라고 말했던 이는. 당원 동지 여러분. 저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설령 만신창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 척박한 땅에 참된 진보정당의 뿌리를 내리는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젊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얻은, 그것 아니었다면 쎄느강변에서 소멸했을 허명에 값하는 의미로서 이미 충분합니다. 동지 여러분이 <진보신당>의 당원임을 자랑할 수 있는 날을 반드시 오게 하기 위해 오늘과 내일 받을 상처 때문에 뒷걸음질 치지 않겠습니다. <진보신당>은 지나간 역사와 희생당한 투사들에게 빚지고 있는 정당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듯이, 제게도 제가 부재한 땅에서 어둠과 싸우다 앞서간 동지들에 대한 부채감이 있습니다. 이제 저는 <진보신당>의 새출발을 위한 거름이 되는 것으로 이 빚들을 갚으려고 합니다. 부디 저를 딛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 인사글의 제목은 체코의 저명한 작가이자 정치가인 바츨라프 하벨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며 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바츨라프 하벨
 
일단 내가 시작해야 하리, 해보아야 하리.
여기서 지금,
바로 내가 있는 곳에서,
다른 어디서라면
일이 더 쉬웠을 거라고
자신에게 핑계 대지 않으면서,
장황한 연설이나
과장된 몸짓 없이,
다만 보다 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의 내면에서 알고 있는
존재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나는 홀연히 알게 되리
놀랍게도
내가 유일한 사람도
첫 사람도
혹은 가장 중요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떠난 사람 가운데에서
모두가 정말로 길을 잃을지 아닐지는
전적으로
내가 길을 잃을지 아닐지에 달렸다는 것을.
 
2011년 10월 26일 홍세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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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6 23:19 2011/10/26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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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보궐선거 투표를 며칠 앞두고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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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벽보를 보면 박원순후보의 경우 공약은 보이지 않고 스마트폰 사용자를 위한 바코드만 6개 나와있어 다른 후보들과 대조를 이룬다. 물론 공약을 벽보보고 확인하는 이도 많지 않겠지만, 거기에 스마트폰을 대보는 이들도 없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박원순 선본 내에서 논의를 하다가 SNS에서 승리해야 한다며 2500만 스마트폰 사용자 중 서울 거주자를 겨냥하는 게 선거전략상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거라고 주장하는 쪽이 승리한 결과일 터이다. 박원순 선본의 아마추어리즘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박원순이 승리하면 SNS를 이용한 선거라고 하면서 사례로 들먹여지겠지. 스마트폰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다 배제하면서 말이지. 선본 사람들 중에 정보격차(digital divide)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가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다. 그들 눈에는 나꼼수의 청취자들만 보이는 걸까.
 
사실 박원순 후보는 이전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던 한명숙 후보보다 못하다. 제대로 된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출마한 것 하며, 토론 등에서 밀리는 것은 물론, 민주당 후보가 아닌 까닭에 조직력 또한 취약하기 때문이다. 박원순 후보 진영에 들락날락하는 민주당 인사들은 다들 내년 총선을 위한 사전홍보기회로 삼고 있는 듯하고...
 
하지만 안철수 교수가 지지선언을 하고, 나경원 후보가 네거티브 전략에 대한 부메량을 맞아 까도 까도 계속 깔 것이 나오는 까도녀가 된 현재의 상황에서는 지지는 않을 듯 싶다. 그렇다고 이걸 가지고 시민정치의 승리 운운한다면 비웃어줄 수밖에... 시민운동이 현실 정치에서 얼마나 무능한지를 잘 드러냈는데도 이를 보려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선거 때만 되면 진보진영 후보들의 공약이나 정책을 가지고 현실성이나 타당성 운운했던 이들, 평소에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축적해야 하고 선거는 그 결실을 거두는 장이라고 주장했던 NGO 인사들이 박원순 후보 지지를 하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게 조금 거시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등에서 박원순 후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나는 어떻게 할까. 원래는 투표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조금 했었다. 아무리 뭐라 해도 나경원 후보보다는 박원순 후보가 되는 게 나은데도 박빙으로 나와서리... 그래서 투표일인 수요일에는 오전에 강의가 있어서 시간을 맞추려면 최소한 7시 전에 나서서 투표소에 들렸다가 가든지 해야 하고, 아니면 6시반에 끝나는 오후 강의를 빨리 마치고 투표소에 8시 전에 도착해서 투표하든지, 이 양자를 선택하거나, 내가 지지하지도 않는, 차악의 후보에게 투표하기 위해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무리를 하지 않아도 될 듯해서 좋다. 물론 누가 당선되냐보다도 투표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기도 한데, 저번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대입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투표가 변화를 만드는 시작인 것은 사실이다. 근데 문제는 투표해서 승리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게 결판난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 다수결 민주주의의 한계에서 드러난 것처럼 투표가 말해주는 것은 한정적이다. 더 중요한 것은 투표 전에 시민들이 숙의(deliberation)를 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으로 각성하는 것이다.
 
박원순 후보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시민정치를 얘기했으면서도 시민을 바로 선거의 주체로 세우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본다. 시민정치가 박원순이라는 인물로 대리되는 정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운동이, 진보진영이 선거에 뛰어들 때 항상 잊어서는 안 되는 사항이다. 노심조를 비판하는 것도, 기존의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물론 선거에서 승리하지도 못하면서 세상을 바꾼다는 건 허세에 불과하다. 선거에서의 승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에 정리해보는 것은 내년의 총선, 대선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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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3 23:41 2011/10/23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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