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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의 수요편지 - 자유인인가, 마름인가

젊은 벗에게,

   일곱 명의 고대생들에 대한 출교 처분이 내려진 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수구신문들은 교수들을 ‘감금’한 학생들에 대한 출교 처분은 당연한 일이라는듯 주장하기도 했습니다만, 방송을 중심으로 ‘감금’한 게 아니라 ‘붙잡거나’, ‘앞을 막았다’라고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감금’이든(구체적으로 어떻게 감금했는지?) ‘붙잡거나’ ‘앞을 막았건’, 학생들에 대한 출교 처분이 학교 당국의 자발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른 면을 보게 됩니다.

   19세기에 자유정신의 확산을 우려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대학을 폐쇄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엔 그럴 필요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대학은 산업’이 되었고, 대학 당국자들은 신자유주의의 마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중고에서는 여전히 국가주의 이념에 충실한 마름이어야 교장, 교감이 될 수 있는데, ‘산업’이 된 대학에서는 신자유주의의 충실한 마름이어야 총장이 될 수 있고 또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가주의 이념의 마름이든, 신자유주의의 마름이든, 교육자이기를 포기한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마름의 속성은 ‘자발적 복종’에 있습니다. 16세기에 18세의 젊은 나이로 ‘자발적 복종’이라는 문제작을 쓴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히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이에 비하면,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

   저도 개인적으로 대학에서 제명 처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학적부에서 ‘이름을 없앤다’라는 뜻의 ‘제명’ 처분과 ‘출교’ 처분이 거의 같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침묵을 강요당했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독재 권력에 항거하자는 내용이 담긴 선언문을 작성하여 교내에 뿌렸다는 이유로 검거되고 중앙정보부와 대공 분실에 ‘감금’되어 조사받은 뒤에 풀려났는데, 곧 학교 당국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저에 대한 제명 처분을 알려주려 함이었습니다. 그 때 학교 당국자는 제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학교는 권위주의 독재 권력의 요구를 거역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자발적으로 학생들을 억압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의 말을 인용한 이유가 이 점에 있습니다. 과거보다 오늘날의 마름들이 ‘자발적 복종’에 더 적절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민주화된 시대’는 신자유주의와 결합되어 ‘마름들의 시대’가 된 듯합니다. 마름들이 가장 경계하고 싫어하는 대상이 자유인입니다. 고대생들에 대한 출교 처분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내면화한 마름들이 자유인들을 억압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지, 다시금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의 말을 인용해 봅니다.

   “많은 선 가운데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다. 그것은 자유이다. 우리가 만약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곳곳에 악이 창궐하며 남아 있는 다른 선에서도 어떠한 맛과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자발적 복종’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며 자유만이 유일하게 선을 정당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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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을 정리하다 발견한 2006.05.24자 [홍세화의 수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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