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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3/21
    섭리
    흑무
  2. 2010/03/21
    '땅 위를 걷는' 기적
    흑무
  3. 2010/03/21
    '사랑한다'
    흑무
  4. 2010/03/21
    너를 만나면 더 멋지게 살고 싶어진다
    흑무
  5. 2010/03/21
    나를 어루만지는 일
    흑무
  6. 2010/03/21
    고독이 나를 위로해줄까요?
    흑무
  7. 2010/03/21
    삼실 출근
    흑무
  8. 2010/03/11
    사랑은 너무 복잡해…메릴 스트리프 - 경향100311
    흑무
  9. 2010/03/11
    ‘입실수도 교수’
    흑무
  10. 2010/03/10
    내가 경향을 비난하지 않은 까닭 - 경향,20100310
    흑무

섭리

섭리


그냥 자기의 일을 계속해나가고
나머지는 섭리(Providence)에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 걸음은, 신께서 옮겨놓으십니다.


- 데이비드 호킨스의《호모 스피리투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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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를 걷는' 기적

'땅 위를 걷는' 기적


그대가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9세기의 유명한 선승인
임제 선사는 '기적이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땅 위를 걷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자유롭지 않게 노예처럼 걷는다.
그들은 미래나 과거에 붙잡혀서
자신들의 삶이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살 수가 없다.


- 틱낫한의《어디에 있든 자유로우라》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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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사랑한다'


오래 전, 첫사랑에게서
처음으로 들었던 사랑 고백에
가슴 떨렸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 사람이
다쳤다는 소식에 놀라, 앞으로는 손가락 하나도
다치지 말라며 울먹이던 내게 다가왔던
한 마디, '사랑한다.'
그 고백의 순간은 분명 내삶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날의 설렘은 온몸의 세포를 떨리게 했고,
사랑의 기억들은 삶과 어우러져
나를 성숙시켰다.


- 권소연의《사랑은 한 줄의 고백으로 온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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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나면 더 멋지게 살고 싶어진다

너를 만나면 더 멋지게 살고 싶어진다


너를 만나면
눈인사를 나눌 때부터 재미가 넘친다

너를 만나면
어지럽게 맴돌다 지쳐 있던 나의 마음에
생기가 돌아 더 멋지게 살고 싶어진다

너를 만나면
온 세상에 아무런 부러울 것이 없다
너를 만나면 더 멋지게 살고 싶어진다


- 용혜원의 시《너를 만나면 더 멋지게 살고 싶어진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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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어루만지는 일

나를 어루만지는 일


자신의 심장과 간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의 명상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수행이다.
자신의 몸을 보살피고, 자신의 심장을 보살피고,
자신의 간을 보살피는 수행이다.
사랑과 자비심을 갖고
자기 자신을 어루만지는 일이다.


- 틱낫한의《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중에서 -

 

... 담배와 술, 無운동으로 괴롭힘 당하고 있지만, 젊음으로 그나마 버티고 있을 나의 몸에게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함.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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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 나를 위로해줄까요?

고독이 나를 위로해줄까요?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이다.
당신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
루소는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다"고
말했다. 외로움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엄습한다.


- 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의《고독이 나를 위로한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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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실 출근

내 삼실은 아니고 형 삼실에 같이 출근했다. 오늘은 일요일, 내일은 월요일이지만 휴가다.

2박 3일 수련회를 갔다가 사무실로 가 포스터와 티켓을 만들어 보내고 집에 온 어제 저녁. 옷만 갈아입고 앉아 핸드폰게임을 하며 무한도전을 보다가 밥을 시켜먹고 형과 손잡고 일찍 잤다. 주말드라마도 하기 전이었으니까,  한 7시반쯤 잤다보다. 그리고서 아침에 눈을 뜨니 11시반. 한 16시간 잤다. 흐뭇하지만 지나치게 많이자면 세포가 늙는다던데, 하는 생각에 사서 걱정 잠깐 하고.

 

씻고 세 시간 후 형을 깨우고 삼실에 간다기에, 집에서 라면끓여먹을까하다 함께 나가기로 했다. 해서 밥 사먹고 형은 뒤에서 일하고 나는 다른 책상의 컴퓨터로 글쓰는 중이다. 이 분의 컴퓨터에는 소녀시대의 제시카 사진이 바탕화면으로 깔려있다. 푸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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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너무 복잡해…메릴 스트리프 - 경향100311

 

메릴 스트리프는 특별히 잘하는 역이 없는 배우입니다. 모든 역을 다 잘하기 때문이죠. 메릴 스트리프가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의 질은 일정 수준 이상 보장됩니다.

이번주에는 그가 출연한 <사랑은 너무 복잡해>가 개봉합니다. 스트리프는 재결합을 원하는 전 남편(알렉 볼드윈), 다정다감한 건축가 애덤(스티브 마틴) 사이에서 갈등하는 요리사 제인 역을 맡았습니다. 연적으로 등장한 볼드윈과 마틴은 며칠전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동으로 사회를 맡기도 했습니다. 스트리프는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작이었던 <줄리&줄리아>에서도 요리사 역을 맡아 객석에 앉아있었고요.


에밀리 블런트, 앤 헤서웨이, 클레어 데인스, 페넬로페 크루즈. 스트리프를 롤 모델로 삼고 있다는 젊은 여배우의 명단입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스트리프는 연기뿐 아니라 사생활에 있어서도 딱히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조각가인 남편과 30년 이상 해로하면서 아이 넷을 키웠습니다. 결혼, 이혼, 또다른 결혼이 순식간에 이뤄지는 할리우드에선 보기 드문 삶입니다.

연기와 삶에 있어 모두 모범을 보이고 있는 스트리프이건만, 상복은 없는 편입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스트리프는 다시 한번 미끄러졌습니다. 역대 최다인 16번 노미네이트돼 2번 수상. 마지막 수상이 <소피의 선택>(1983)의 여우주연상이었으니, 27년간 아카데미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스트리프의 성공적인 경력을 생각한다면, 타율이 지나치게 낮아 보입니다.

스트리프 대신 여우주연상을 가져간 이는 올해 처음으로 아카데미 후보로 지명된 샌드라 불럭이었습니다. ‘꿈의 공장’ 할리우드 최대의 축제답게, 아카데미 시상식은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길 좋아합니다. 주연상도 고르게 우수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보다는, 생애 다시 없을 열연을 펼친 배우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럭 역시 아카데미 전날 열린 라즈베리 상에서 최악의 여우상을 받을 정도로 들쭉날쭉한 연기를 보였습니다. 최근의 수상자 중에서는 리즈 위더스푼, 힐러리 스웽크, 할리 베리 등이 유사한 모습입니다. 스트리프는 지난해가 아니면 올해, 올해가 아니면 내년이라도 상을 받을 수 있지만, 다른 배우는 이번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래서 상복이 없는 스트리프가 불행할까요. 올해에도 여느 때처럼 스트리프는 무대 위의 수상자에게 환한 웃음,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속이야 모르지만, 표정엔 섭섭한 기운이 없었습니다. 따져보면 환갑이 넘도록 할리우드 영화의 주연 자리를 꿰차고 있는 여배우가 어디 있을까요. 상을 받는 건 영예롭지만, 대중과 제작자에게 끝없는 호출을 받는다는 건 더 영예롭습니다. 배우에게 상은 이벤트지만, 연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 경향, 백승찬기자의 배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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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실수도 교수’

성균관대 권철신 명예교수, 개인연구실 마련 학생 지도

‘입실수도(入室修道) 교수.’ 성균관대 권철신 명예교수(65)의 별명이다.

권 교수는 1986년 이 대학 시스템경영공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래 지난달 정년퇴임할 때까지 매주 월~토요일 6일간을 학교 연구실에서 보냈다. 학생들이 “입실수도하는 교수님”이라고 부를 만도 하다.

권 교수는 24년간 연구실에서 먹고 자며 강의와 연구, 논문 지도에 열중했다. 방학이라고 예외를 두지도 않았다. 오히려 여름방학에는 4주에 걸쳐 세미나, 특강, 야외체육훈련 등으로 꾸려진 ‘한계돌파 지옥세미나’를 하며 학생들을 독려했다. 이렇게 길러낸 석·박사 제자만 190여명에 이른다.

권 교수는 ‘3배수 원칙’으로도 유명했다. 3시간 강의를 하려면 9시간을 준비해 똑같은 강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지난달 28일 퇴임한 뒤에도 그의 제자 사랑은 계속되고 있다. 아직 박사학위 과정을 끝내지 못한 제자 5명이 학위를 얻을 때까지 지도를 계속해달라고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사비를 들여 서울 양재동에 개인 연구실을 열고 제자들과 만나고 있다. 다만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퇴임 전처럼 사무실에서 숙식하지는 않기로 했다.

권 교수는 “처음 연구실에서 먹고 자기 시작했을 때는 1년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면서 “그러다 기간이 3년으로 늘어나고, 결국 10년이 넘었다. 시간이 가면서 가족들도 제자들에 대한 나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술회했다. “엿새 분량의 도시락을 싸느라 아내가 고생이 많았다”고 부인에 대한 고마움도 표시했다. 교육자로서 그의 좌우명은 “교육을 하고자 하는 자, 실망을 두려워하지 말라”이다.
 

.....................

 

..........교육을 하고자 하는 자, 실망을 두려워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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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향을 비난하지 않은 까닭 - 경향,20100310

[김상봉칼럼]

 

내가 경향을 비난하지 않은 까닭

 

 

 김상봉| 전남대 교수 ·철학

 

이런 일은 좀체 없는 일인데, 나는 요즘 고시를 보겠다는 법학도에게 법학 따위는 집어치우고 철학을 공부하라고 권하고 있는 중이다. 어젯밤 강의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그 학생이 같이 걸으며 물었다. 철학을 공부하면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는 거냐고. 나는 그런 물음을 묻지 않게 되는 것이 철학을 하는 것이라 대답했다. 철학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니까, 우리가 철학하는 까닭은 철학 말고는 다른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 철학을 수단으로 삼아 다른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니까. 도리어 먹고 사는 것이 철학을 위한 수단일 뿐이니까.

그러므로 내가 경향신문에 실리지 못한 칼럼을 인터넷 매체에 발표하면서 경향신문을 비난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까닭은 노후대책으로 소설을 쓴다거나 밥벌이 때문에 소설을 쓴다는 위인들이 말하듯이 무슨 밥벌이의 엄숙함 때문이 전혀 아니었다. 세상만사가 밥벌이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은 제주도의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가서 그 가난한 예술가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었는지 순례하는 마음으로 참배하길 권한다.

그 사나이는 1985년 제주도에 정착하여 200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직 제주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했다. 가난을 각오하고 결혼 같은 것은 처음부터 포기했던 이 예술가에게 유일한 걱정거리는 쌀이 아니라 필름과 인화지였다. 이것들을 살 돈마저 떨어지면 그는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해 번 돈으로 필름을 샀다. 그리고 다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해서 제주의 신비를 2만장의 필름 속에 남기고 루게릭 병으로 오십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불쌍해 보이는가? 제주에 가 그가 남긴 사진을 보라. 그 앞에서 우리가 눈시울을 붉힐 때, 그는 숭고한 빛 속에서 웃고 있다.

부끄러움은 영혼의 소금과 같아

철학자는 지혜를 위해 살고,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위해 죽는다. 기자는? 진실을 위해 싸운다. 밥벌이 때문이라면 그 좋은 머리로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광고 끊어지고 월급 못 받을까 두려워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신문이라면, 경향신문과 조선일보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런 신문이라면 감싸고 돌 까닭이 아무것도 없다. 40년 전에 박정희를 비판하지 못한 신문이 신문 아니었듯이 지금 이건희를 비판 못하는 신문도 신문이 아니다. 그런 신문사는 망해서 아쉬울 일 없다.

내가 경향신문을 비난하지 않은 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다. 그 칼럼을 보내고 나는 편집국 기자 세 사람과 직위 순으로 올라가며 통화를 했다. 나중에 용기 있게 고백했듯이 그분들은 광고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솔직하게 전하면서 표현을 조금만 완화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거절했더니 다음엔 단 하루만이라도 기다려 달라고 거의 애원하듯 간청했다. 나는 매몰차게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참 뒤 문자가 왔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말에 담긴 부끄러움 때문에 나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난할 필요가 없었다.

부끄러움은 영혼의 소금과 같다. 수치를 아는 영혼은 결코 썩지 않는다. 그리고 반드시 그 부끄러움으로 찌든 영혼의 거적대기를 팽개치고 일어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내 글이 인터넷 매체에 올라온 뒤 경향신문 평기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래서 맹자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의(義)의 싹이라고. 그런 신문사를 광고 끊어져 망하게 내버려둔다면, 이제 그건 우리 모두의 부끄러움이다.

‘씨알의 소리’가 가르쳐준 진실

올해는 함석헌이 <씨알의 소리>를 창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그는 돈에 매여 진실 앞에서 침묵할까 염려해 처음부터 일절 광고를 받지 않고 오직 독자들의 구독료만으로 월간지를 발행했다. 그렇게 찍어낸 것이 많을 때는 1만부가 넘었는데, 그런 정성이 모여 유신독재를 끝냈던 것이다. 군사독재가 자본독재로 바뀌었을 뿐,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할 일은 비슷하다. 삼성 휴대폰과 노트북은 바꾸고, 삼성카드는 자르고 가맹점 해지하고, 삼성에 든 보험은 해약하고, 삼성을 비판하는 경향신문은 정기 구독하면 된다. 부수 늘수록 적자라는 간첩들의 유언비어에 속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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