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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3/22
    윤리, 이현
    흑무
  2. 2010/03/22
    아름다운 도전
    흑무
  3. 2010/03/21
    홍세화 : 한겨레 2006-02-22
    흑무
  4. 2010/03/21
    홍세화 : 한겨레 2006-03-22
    흑무
  5. 2010/03/21
    홍세화 - 한겨레 2006-4-26(수)
    흑무
  6. 2010/03/21
    '나는 누구인가'
    흑무
  7. 2010/03/21
    용서의 힘
    흑무
  8. 2010/03/21
    성냥불을 팍 긋는 것처럼
    흑무
  9. 2010/03/21
    생명의 봄
    흑무
  10. 2010/03/21
    사랑의 기도
    흑무

윤리, 이현

"정치가 썩으면 사회가 썩는다. "

 

난 소크라테스 이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위의 정의 만큼은 진리이며 모두가 기억해야할 것이라 생각한다. 정의를 말하는 이들은 사회의 왕따가 된다. 이 사회가 얼마나 썩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청년들이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청년이 가장 순수한데, 그들이 이상을 말해왔는데 이 사회의 청년들은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 이 사회가 얼마나 썩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 윤리과목 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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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도전

아름다운 도전


어느 세상에나
인간 본연의 진실이 있고,
진실은 마침내 통하게 마련이다.
꼭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기 위해 도전하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전은 반드시 자신의 세계를 넓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 김희중의《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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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 한겨레 2006-02-22

자발적 복종


   젊은 벗에게,

   〈자발적 복종〉은 16세기 프랑스인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가 18세 때 쓴 저작의 이름입니다. 그는 몽테뉴의 벗이기도 했는데, 그의 〈자발적 복종〉은 적어도 프랑스에서 만큼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버금갈만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저작이 한국에는 재작년에 처음 번역, 소개되었다는 점(박설호 역, 울력출판사 2004)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이 땅에서 누린 것과 비교해볼 때 의미 있는 시사점을 안겨줍니다. 이 책은 16세기 종교전쟁 당시 위그노 교도들의 이념적 지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 자크 루소 등 그의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을 통해 프랑스 혁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 그의 이념이 갖는 근대적 성격으로 지금도 아나키즘과 비폭력 저항 운동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가령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제연대운동을 벌이고 있는 농민운동가 조제 보베는 〈한겨레 마주보기〉에서 만났을 때 〈자발적 복종〉을 화두로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자발적 복종〉이 프랑스의 교육, 지식인 사회와 시민사회운동에서 놓칠 수 없는 개념으로 자리 집힌 것은 최근에 〈비자발적 복종〉이라는 저작이 나온 것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라 보에티는 이렇게 그의 문제의식을 제기합니다.
   “여기서 나는 다만 하나의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려고 한다. 과연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 그렇게 많은 마을과 도시, 그렇게 많은 국가와 민족이 독재자의 전제 정치를 참고 견디는 일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가 라는 점이다.” ...“수백의 지역들, 수천의 도시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한 사람의 지배 체제 속에서 노예와 굴종의 상태를 전혀 죄악시하지 않고, 독재자에게 조금도 저항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할 것인가? 이 경우 비겁함이라는 단어는 결코 적당하지 않다.”

   젊은 벗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바라는 것은 ‘자발적 복종’이라는 개념만이라도 품고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발적 복종”이 과거보다 오늘날 더 강력히 관철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사회구성원들은 지배세력이 장악한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통해 지배체제, 지배질서에 대한 자발적 복종의식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가 곧 ‘자발적 복종 의식화’였으며, 분단 이후 반공, 안보 이데올로기가 ‘자발적 복종 의식화’의 일환이었으며, 오늘날의 국익, 국가경쟁력 강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구성원들이 모두 기업가가 아님에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일하기 좋은 나라’를 주장하지 못하고 따르는 것도 자발적 복종의식과 관련됩니다.

   젊은 벗, 그대의 어머니는 그대의 건강을 위해 다양한 식단을 준비합니다. 그것은 그대 몸의 각 부분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가 되어 건강한 몸을 이루도록 합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의식세계는 어떨까요? 그대의 세계관을 이루는 요소들을 그대는 폭넓은 독서를 통하여 스스로 공급하고 있나요?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장악한 세력이 그대가 균형 잡힌 세계관을 갖도록 노력할까요? 아니면 그들, 즉 지배세력에 대한 자발적 복종의식을 갖도록 노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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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 한겨레 2006-03-22

프랑스의 100만 시위를 바라보며


   경찰 추산 50만, 시위대 측 추산 150만, 지난 토요일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진 최초고용계약법(CPE) 반대 시위 참가자의 숫자입니다. 정확한 시위 참가자를 가늠하는 방법은 두 숫자의 산술평균을 내는 것입니다. 즉, 100만이 프랑스 전역에서 시위를 벌인 것으로 보면 비교적 정확합니다. 100만이든, 150만이든, 대규모 시위라는 점에선 큰 차이가 없습니다.

   관찰자 중에는 이번 시위를 가리켜 68년 이후 가장 큰 규모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68년 학생혁명에선 일자리가 보장된 젊은 세대들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으로 뭉쳐 혁명적 국면을 형성했다면, 이번 시위는 고용 불안에 처한 젊은 세대들이 주변부를 밀려나지 않을까 라는 불안이 그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68년 혁명이 ‘사회를 바꾸자!’라는 구호에 있었다면, 이번 시위는 ‘사회 안으로!’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작년 11월에 있었던 이주노동자 2세들의 소요 사태는 주변부로 밀려난 계층의 〈절망〉에 이른 사회적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면, 이번 시위는 중간계층이 주변부를 밀려나지 않을 것인가 라는 〈불안〉이 작용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번 시위는 68년 혁명보다는 95년 11월-12월에 있었던 노동자 대파업 때와 견주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95년이나 이번이나 집권 우파세력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법안을 관철하려 했다는 점에서 서로 만나고, 법안을 밀어붙였거나 밀어붙이고 있는 총리가 차기 대통령 선거의 후보감이라는 점에서도 서로 만납니다. 95년에 집권우파세력은 공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연금체계를 하향 조정한 쥐뻬(당시 총리 이름)법안을 밀어붙이려다 노동자, 학생 등 프랑스 시민사회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당시 프랑스 철도와 지하철은 3주간 멈췄습니다. - 결국 법안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음 총선에서 좌파에 패배하여 정권을 내주게 됩니다. 우파가 95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전망으로도 저는 이번 시위를 68혁명보다는 95년 대파업 국면과 연결짓게 됩니다.

   그렇다면 프랑스 사회를 들끓게 만든 최초고용계약법이란 무엇일까요? 가장 문제된 것은 26세 미만의 노동자를 최초로 고용하는 경우 2년 이내에는 동기 없이도 해고할 수 있다는 조항입니다. 25세 미만의 실업률이 24%에 달하고 있는 청년실업문제를 극복 방안으로 집권 우파세력이 강력한 노동유연성을 제기한 것입니다. 항의 시위는 예비당사자들인 대학생,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학부모단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습니다. 과반의 대학교가 봉쇄되었고 이 물결은 고등학교에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드 빌팽 총리는 아직 법안을 철회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고, 학생들과 노동조합은 3월23일과 3월28일에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번 프랑스의 대규모 시위를 접하면서 우리의 현실, 특히 비정규직의 현실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비정규법안은 2년 계약기간 동안에는 사용자 임의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유연성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프랑스와 같습니다. 프랑스와 다른 점은 우리나라의 경우 26세 미만의 노동자를 최초 고용할 때뿐만 아니라 아무 때나 2년 고용계약을 할 수 있고 2년 계약기간 안에는 아무 때나 해고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중대한 차이가 있음에도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인 곳은 한국이 아니라 프랑스입니다. 한국에서는 비정규직법안이 2월27일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는데도 별다른 저항과 분노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일부 노동자들의 투쟁은 확산되지 않았고 학생들은 자신들을 향한 악법에도 불구하고 노학연대를 보여주기는커녕 문제의식조차 갖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그렇습니다. 프랑스는 한국과 다릅니다. 전통도 다르고 산업구조도 다르고 역사과정도 다릅니다. 비정규직이 60%에 이르는 한국과 달리, 20%대에 지나지 않는데 그들 대부분은 자발적이거나 13개월까지 허용되는 시험기간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언론도 다릅니다.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일 때마다 “시민의 발을 볼모로...”를 앵무새처럼 써대는 신문이 주류신문이 될 수 없는 것은 그런 신문을 찾는 시민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르몽드는 21일치 사설에서 드 빌팽 총리에게 법안을 철회하거나 유보할 것을 강력히 권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고시공부, 토익공부, 학점공부로 ‘나만의 계층상승’으로 돌파하려는 생각보다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라는 근대 공화국의 시민의식을 갖고 있어서인지 국민의 60% 이상이 법안 철회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최초고용계약법에 대한 프랑스 시민사회의 반응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4월에 통과시키려고 하는 비정규직법안을 앞에 두고 있는 우리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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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 한겨레 2006-4-26(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


   젊은 벗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집니다. 한국 사회구성원들은 한겨레신문에 대해 알고 있을까요? 대부분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가령 한겨레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나오는 ‘책과 지성’ 특집면인 ‘18도’를 읽어 본 사람은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한겨레신문이 어떤 신문인지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읽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정보 홍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한국사회구성원은 한겨레신문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물론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입니다.

   한국사회 구성원은 민주노총에 대해, 전교조에 대해, 공무원 노조에 대해 알고 있을까요?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을까요? ‘알 필요가 없는 것’으로입니다.

   이미 부정적으로 의식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노동당은 어떤가요? 한국 사회구성원이 민주노동당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요? 물론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을까요?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주장하고 있다는것쯤은 이제 거의 모든 한국사회 구성원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중요하게 알고 있는 게 있습니다. ‘접근해선 안 되거나 접근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입니다. 사민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사회주의든 사민주의든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마르크스의 명제가 전혀 통하지 않는 이유 입니다. 이미 의식화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으로.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합니다. 한번밖에 오지 않는 삶, 그 삶을 유지해 주는 것은 건강한 몸이고 그 삶의 지향을 규정하는 것은 의식세계 입니다. 그런데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삶의 상태를 유지시켜주는 몸의 건강에 대해서는 엄청난 관심을 갖는데 반해, 삶의 지향을 규정하는 의식세계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보신문화’라면 세계에서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몸보신에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데 반해, 나의 의식세계가 나라는 존재를 위한 것인지 묻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이율배반 입니다. 그러나 이점 또한 이미 의식화가 이루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의식화가 이루어졌을까요? 의식세계니 가치관이니 세계관이니 하는 것에 관심 갖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입니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인문사회과학을 멀리 하는 것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관철 입니다.

   한편, 내 몸의 형성은 일차적으로 내가 건사하고 내가 어렸을 때엔 부모님이 건사해주었습니다. 나와 부모는 서로 위하는 ‘목적의 관계’입니다. 의식세계의 형성은 다릅니다. 나의 의식세계를 내가 주체적으로 형성하지 않을 때, 부모님이 내 의식세계에 주는 영향은 크지 않으며 내 의식세계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점령하게 됩니다. 즉, 나의 의식세계는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지배세력을 위한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나와 지배세력의 관계는 서로 위하는 ‘목적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나의 의식세계가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지배세력을 위한 것이지만, 나의 의식세계는 그것을 알아차릴 비판력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이미 의식화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수많은 사회구성원들이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하고도 그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의식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부디 젊은 벗은 이 폐쇄회로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대 자신을 위해서 입니다!
    다시금 인문사회과학 책을 벗하길 강조합니다.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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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삶이 어떤 길을 걸어가든지
늘 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달아나지 말라.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
그러나 무엇이 참 슬픈가를 생각하라.
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또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참으로 슬픈 것이다."


- 류시화의《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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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힘

용서의 힘


그 어느 누구에게도,
과거가 현재를 가두는 감옥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과거의 아픈 기억을 해소할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용서는, 과거를 받아들이면서도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있도록, 감옥 문의 열쇠를
우리 손에 쥐여준다. 용서하고 나면,
두려워 할 일이 적어진다.


- 프레드 러스킨의 《용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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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불을 팍 긋는 것처럼

성냥불을 팍 긋는 것처럼


성냥불을 켤 때
살살 갖다 대기만 한다고 불이 켜지지 않듯이,
힘을 주어 팍 그어야만 불이 붙듯이,
수행(修行)의 과정도 그러하다.
에너지를 집중해서 일정한 수준에 올라야만
이 고개를 넘어서는 것인데,
그 고개 문턱에서  포기하고
굴러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 법륜스님의《금강경(金剛經) 이야기》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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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봄

생명의 봄

모든 삶의 과정은 영원하지 않다.  
견딜 수 없는 슬픔, 고통, 기쁨, 영광과
오욕의 순간도 어차피 지나가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회생하는 봄에 새삼 생명을 생각해 본다.
생명이 있는 한, 이 고달픈 질곡의 삶 속에도
희망은 있다.


- 장영희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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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도

사랑의 기도


연약함이 아닌 온유함
격한 내적 감정을 지배하는
사랑의 힘을 가르쳐 주십시오.

스스로 삼갈 줄 알고
이웃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자유를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웃의 작은 필요와 바람을 알아 채워주는
섬세함을 배우게 해주십시오.


- J. 갈로의《사랑의 기도》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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