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노동의 기록 [4]

이번 주에 있었던 허접 시리즈 발표는 오늘로 끝이 났다. 인내심을 갖고 경청해준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흑......

 

-------------------------------------------------------------- 

대학에 입학했다. 우리 때는 입시가 전기/후기로 나뉘어졌 있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나는 후기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은 우리 집이 심하게 안 좋을 때였다. 아빠가 많이 편찮으셨고, 그래서 오빠는 진학을 포기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내가 3학년 되던 해에 입대를 했다. 전기에 불합격 되고 일단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후기에 응시했고 운좋게 합격을 했다. 당시 유명한 모 입시학원에서 내가 무시험 합격자(ㅎㅎㅎ)에 해당한다고 전화가 오기는 했는데, 학원 등록금도 무지하니 비싸서 일단은 학교에 다니면서 알바를 해서 재수를 하자.. 이런 깜찍한 생각을 했었다. 

 

그리하여 알바가 시작되었는데.... 합격자 발표가 난 그 다음 주부터 바로 일은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때 한 공부 했었기 때문에(호호).. 여기 저기 과외 자리가 줄을 이었다. 대학 입학식도 하기 전에 시작된 과외는 본과 4학년 국가고시를 치르기 두 달 전까지 7년 동안 거의 한 달도 쉬임 없이 지속되었다. 어찌 보면 여지껏 내가 가졌던 일자리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네는 주로 우리 고등학교 인근 지역을 커버했다. 홍제동, 홍은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녹번동, 불광동, 세검정, 부암동, 평창동, 정릉.. 등등... 그리고 서클 사람들의 소개로 멀리 여의도, 반포동까지 진출하기도 했었다. 한창 때에는 두 개, 방학 시즌에는 세 군데를 뛰기도 했는데, 끼니도 거른 채 땡볕에 돌아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다른 일들에 비하면 과외라는게 심하게 (!) 편한 일이기는 하지만, 스트레스는 정말 컸다. 학생 부모나 학생에 대한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하는 각종 활동이나 시험 등에 일정을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주변에서 이런 상황을 잘 이해해주려 하지 않았다. 내 용돈을 벌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게 중요한 생계였는데, 그게 없으면 학교에 다닐 수 없었는데, 의대에 다니는 사람들, 심지어 운동을 한다는 선배들도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번은 세미나 일정을 잡는데  "제가 과외 때문에 그 때는 좀.... ㅜ.ㅜ" 했더니만 대뜸 그거 꼭 해야 하는 거냐고 신경질을 낸 선배도 있었다. 사실 나만큼 세미나 시간을 잘 지킨 사람도 없었건만....본과에 들어가서는 수업과 시험 때문에 좀 힘들기는 했었다. 본 3때.. 화요일 마지막 교시가 성형외과 였는데 교수가 시간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 슬라이드를 몇 박스씩 가지고 들어와서는 저녁 여덟 시나 되어야 수업을 끝내주고는 것으로 유명했다. 결국 한 학기 동안 그 수업을 한 번도 못 들었다. 다섯 시가 넘으면 살금살금 빠져나가 일터로 달려갔다. 그 시간이 엽기적이고 황당한 사진 많이 보여주기로 유명했는데.. 좀 안타까운 일 ㅎㅎㅎ



내가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한번은 예고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여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반짝 과외.. 거의 문제집 암기 수준), 그 집은 평창동 고급 빌라촌에 위치하고 있었다. 빌라 두 채를 터서 개조한 집이라 무지무지 넓었다. 내 기억에는 현관에서 저쪽 마루 끝이 운동장만큼 멀었던 것 같다 ㅎㅎㅎ. 하여간 학생 방에 들어가면 어머니가 에어컨을 조절해주시면서 생과일 쥬스를 내오시고.. 끝나면 (다른 레슨 때문에 내 과에는 밤 12시에 끝났다) 승용차로 우리 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방에는 책상과 피아노, 탁자 등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런 부잣집 아이가 침대를 안 쓰나보네 하고 의아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이건 공부 겸 레슨 방이고 침실은 따로 있었다. 반포 아파트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새끼 선생이었다. 당시 모 학원에서 잘 나가던 수학 강사가 본 선생이고, 그 사람의 수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게 아마추어 강사인 나의 일이었다 (당시에 세미나를 했던 쿠바 혁명사에 보면 혁명전 쿠바의 부패와 빈부격차를 이야기하면서 새끼 과외선생에 대하 이야기가 나와 깜짝 놀랐었다). 이 집 엄마의 극성은 정말 대단해서... 암기과목 시험보는 날이면 엄마가 고등학생 딸과 같이 앉아서 책을 외우고 그걸 퀴즈로 내주기까지 했다. 나로서는 상상 못할 일이었다. 허나... 홍제동 인근에서 했던 과외들 중의 일부는 차마 돈을 받기가 미안한 형편인 경우도 꽤 있었다. 내가 보기에 과외를 할 상황이 아닌거 같은데 부모님들이 무리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경우였다. 다행히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본인들 스스로도 열심히 해서 비교적 짧은 기간이 지나면 자신감을 갖고 혼자 공부하기를 원했다. 덕분에 나는 일자리를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심리적으로는 다행감을 느꼈었다.

중간에 휴학했을 때에는 잠깐 학원에 나간 적도 있다. 월급은 별로 안 많았던 거 같았는데 난생 처음으로 중학생도 갈쳐보고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멀쩡하게 생긴 범생이 여중생들이 담배 피우는거 보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도 난다 ㅎㅎㅎ 

 

이렇게 모은 돈은 참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학비와 각종 부대비용(책값이 정말 비쌌다 흑.), 활동비(?)... 다행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서 졸업할 때까지 4백만원 정도 저축도 할 수 있었다. 내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공부를 잘 해서 이기도 하지만(음하하.. 자만심..) 장학재단에서 기준으로 제시하는 가정형편에 해당하는 사람이 의대 내에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경쟁이 없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했다. 참 잘들 살더라....어쨌든 그 코묻은 돈은 오빠 결혼 때 전세값으로 모두 기부당했다.

 

이후.. 인턴, 레지던트 하면서 정식으로 월급을 받고... 나 개인의 경제적 곤란은 상당부분 해결되었지만, 그 와중에 집안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나이드신 부모님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점점 줄어들었으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