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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안녕...

무려 작년(!)에 후기를 쓰다가 잠시 덮어놓은 걸 깜빡했는데,

오늘 프레시안북에 실린 서평을 보고 떠올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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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sili님의 [앙드레 고르, 서경식...] 에 관련된 글.

 

내 짐작이 옳았다. 

<에콜로지카>를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었어야 했던 것이다.

"사회주의가 만약 도구를 바꾸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그 말...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앙드레 고르
생각의나무, 2011

 

에콜로지카에서 일종의 '비약'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여기에 비교적 상세하게 펼쳐져 있었다. 

번역서가 순서대로 출간되지 않는 바람에... ㅡ.ㅡ;;

 

30년 전의 글이라고는 믿기지않는 동시대성과 혜안에 놀라면서도, 

항상 나쁜 예감만 들어맞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더랬다.

 

*

현재의 노동계급 상황을 많은 (?) 이들이 마르크스주의로 설명해보려 하지만 실증자료는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다.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궁극적인 이분화를 보이지 않고, 자본주의 모순에 의해 저절로 주저앉지도 않았다.  논쟁은 계속되었지만, 마르크스를 다시 불러내고 그의 경전을 충실하게 해석하려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식 구조를 갖춘 철학'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라는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변증법적 원리를 견지한다면서, 1백년 전의 추론에 따라 오늘의 세계를 해석하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아닌듯 싶다. 작업장을 장악할 예능적 기술력을 가진 노동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기계화와 단순화 속에서 일어난 노동의 파편화와 소외는 노동자 계급을 단결시키기는 커녕 이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게 현실이다.  

"부르주아지는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권력에 대해 프롤레타리아가 가져야 했던 의식을 뿌리까지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노동을 잠재적으로나마 창조적 행위로 경험할 가능성을 노동과정에서 제거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회주의의 위기는 프롤레타리아의 위기라는 고르의 지적에 동의한다. 후기산업사회에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점차 사라지고 '비계급'이 남아있을 뿐이다. 

 

*

생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우리 또한 모든 해방의 우선 조건으로 생산력 발전을 꼽는다.

그렇다면 세상이 바뀌더라도 (노동자가 권력을 갖더라도) 현재와 같은 생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지배가 계속될 것이다.   즉, '자본'의 권력과 정대칭의 관계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에 의해, 프롤레테르 (개별 노동자)는 그 동일한 '자본'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게 될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소외된다는 것이다.

현대 대형 산업생산의 비밀은 그 안에서 '아무도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스스로를 모든 법과 모든 정당성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주체라도 그 권력을 소유하거나 책임지지 않는다... 직위를 가진 개인은 언제나 우연의 산물이며 다른 인간으로 교체될 수 있다..."

앙드레 고르는 '개인적 권력'과 '기능적 권력'을 구분하면서, 왜 '기존'의 방식으로 변혁이 불가능한지를 이야기한다. 익명적 조직의 구조에 내재하는 기능적 권력을 위해 개인적 권력이 제거됨으로써 계급투쟁의 문제가 획기적으로 바뀐 것이다. (다시금 '가시적인' 개인적 권력으로 회귀하려는 대중적 열망은 파시즘으로 귀결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에 의해 설치된 기구를 장악하더라도 (이를테면 자주관리), 그들은 자본의 지배와 유사한 것을 재생산하고, 그들 스스로 '기능적 부르주아지'가 될 것이다. 권력을 이양받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지위'를 이양받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제 지배관계를 제거할 유일한 가능성은 권력과 지배를 분리시키고 시민사회, 정치권, 국가 각각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능적 권력은 불가키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전에 정해진 '한정된 자리'를 그 기능적 권력에 부여하는 데 있다"

 

*

이제 변화를 뒷받침할 생산력 수준은 충분하다. 필요한 것은 '혁명'이라는 명명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적인 필요조건은 노동시간 단축이다. '사회적으로 결정된 노동'의 영역을 축소하고 자율성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 스스로가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

"그러나 사회적으로 결정된 노동을 없애도, 각자가 외부적 의무들을 폐기해도 해방은 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방은 필연성의 영역이 타율적인 일들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타율적인 일들의 기술적 요구사항들은 도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정확한 규칙을 정해 그 일들을 특정 사회공간 내로 한정시키는 데 있다.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 후자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국가가 필요하며, 정치와 국가가 동일한 것으로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노동을 마지못해 하는 그 무엇으로 격하시켜도 되는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흔히, 취미로 좋아서 하던 일이 직업이 되는 순간 고통으로 탈바꿈한다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인간이 현재 종사하는 일들을 그것이 사무직이던 생산직/서비스직이던 너무 고답적인 일자리 형태로 싸잡아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노동시간 단축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노동을 좀더 필연적이고 사회적으로 가치있게 재조직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죽지못해 이어가는 삶의 영역이 존재하고, 다만 노동시간이라는 것이 자율성의 영역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한다면 이 또한 서글픈 일이다. ㅜ.ㅜ

 

부록에 실린 <이원론적 유토피아>는 정말 흥미롭다.

새로운 혁명 국가에서 대통령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다.

첫째, "우리는 덜 일할 것입니다" - 우리는 자유로운 노동과 여가시간에 대한 권리를 획득한 것이다. 

둘째, 우리는 더 나은 방식으로 소비할 것입니다" - 소비상품의 개발은 내구성, 수리의 용이성, 제작공정의 만족성, 친환경성이라는 원칙을 따를 것이다

셋째, "우리는 모든 사람의 일상에서 문화가 스며들도록 할 겁니다" - 사람들이 상상력을 계발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더이상 방영하지 않을것이다

 

첫째, 둘째에는 적극 찬성하는데... 셋째는... 그럼 무한도전은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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