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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로부터 출발한 두 권의 "정치" 서적

#. 우에노 치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즈코
은행나무, 2012

 

도서관에 대출 상태가 지속되어 한참이나 까먹고 있다가 지난 번에 들렀더니 서가에 돌아와있길래 냄큼 집어왔다. 저자는 젠더 이슈, 특히나 돌봄과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기여를 했던 연구자라고 들었다. 한편으로는 여성을 보호해야 할 성스러운 (?) 존재로, 다른 한 편으로 성애의 대상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찮은' 존재로 차별하고 비하하는 이 기괴한 사회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기대했던 책이다. 더구나 저자가 일본인이라니 호기심이 생겨날 밖에...  

나는 항상 일본 사회 여성의 삶이 궁금했더란 말이다...  

예전 한일 자살 비교연구를 하면서 내가 잠정적으로 갖게 된 인상은.... 미안하지만, 일본 여성들이 만일 차별을 '인정'하고 순응한다면 그닥 불행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한국인들은 일자리가 부족하면 여성이 남성들한테 양보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아내도 경제활동으로 가구소득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에 비해 일본사회는 여성한테 그닥 기대가 없었다... ㅡ.ㅡ 그래서 그런지, 경제 위기 상황에 한국의 여성 자살률은 급증하는데 일본은 변동이 없었다. 일종의 보호받는 존재인 것이다....   이걸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것이고, 그래 편하게 보호받으며 살자 하면 결과가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이 묘한 상황...  (물론, 그래도 선택하라면 나는 한국사회를 택할 거다 ㅡ.ㅡ)   

서론이 길었고... 하여간 그래서 몹시 궁금했던 책이라는 거다.

책은 흔히 가지고 있을 법한 통념 - '점잖은 일본의 여자교수'가 썼다고 보기에는 엄청나게 직설적이고 단호했다. 애써 점잖음 따위는 개나 줘버려, 싹 다 까놓고 말하자, 이런 분위기?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만큼 충분한 설명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여성혐오 현상의 본질이나 맥락 요인들에 대해, 정치경제나 사회학보다는 상당 부분 정신분석학적 접근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 이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이, 각자의 '썰' 성격이 강하다보니, 옳다그르다 하기도 어렵고, 실증자료를 통해 뭘 보여주기도 그렇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둘 다 딱히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프로이드 말씀이 뭐 성경말씀도 아니고... ㅡ.ㅡ  

더구나, 이 분석 틀에 여성이 주체로 등장하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정신분석학 기원으로 올라가면 결국 남는 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리비도와 팔루스에 대한 다양한 변주들인데, 여성 혐오의 기원이 이것이라면 그럼 젠더가 비교적 평등한 사회나 모계우선을 보이는 사회들은 뭐여??? 인간이 생물학적 리비도와 무의식의 세계로 설명되는 존재라면, 지난 수천년 이성의 발전, 가깝게 지난 백 년의 근대화 역사는 다 부질없는 거였나??? 제도니, 문화니, 정치경제니... 이런 거는 다 상관없는 것이란 말인가?

 

물론 새삼스럽게 깨닫거나 동의하게 된 부분도 있다.  

 

예컨데, 남성은 여성이라는 '기호'에 반응하며 이러한 페티시즘은 '동물적인 것이 아니라 고도로 문화적인 것'이라는 설명에는 완전 동의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생물학적 충동으로서가 아닌, 사회적 약자 혹은 학습된 성적 기호로서의 여성이나 아동, 특히나 장애인 여성에게 자행되는 남성의 성폭력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화학적 거세 같은 조치들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여성의 조신한 몸가짐 강조 따위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남성의 남성됨을 인정하는 주체는 이성인 여성이 아니라 같은 남성이라는 설명,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남성에게 과시하기 위한 객체로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또 성적 '대상화'가 될 수 있다는 자각 때문에 그토록 강력한 호모포비아를 형성한다는 설명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런게 막 불편한 거다.

 

남성이 폭력<권력<재력이라는 자원을 통해 여성들을 지배한다고 하면서, 그래서 여성이 '남성의 폭력에 복종하고 지위에 몰리며 돈에 따라온다'는 설명을 듣고 있자면, 이건 도대체 여성혐오를 부추기자는 건지, 비판하자는 건지 헷갈리게 된다. 남성의 이러한 자원에 여성이 끌리는 것은 당연하고, 남성이 이런 자원을 휘두르는 것은 못볼꼴이라는 인식은 양립가능한 것인가???

게다가 여기서 더 나아가 쾌락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 '수컷에 있어서 최강의 자원'이라면, 여기에 지배당하는 여성은 뭐가 되는 거임???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의구심은, 이렇게 저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남성들에게 굴복당하고 지배당하고 휘둘리는 여성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여성 주체는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남성은 비판의 대상으로서 실존하는 주체인 반면, 여성은 오히려 남성을 설명하기 위한 객체 정도로밖에 그려지지 않았다는 인상.... 뭉뚱그려서, 남성들에게 속아넘어가고 폭력을 당하고 남성을 숭배하는 집단으로서의 여성이랄까.....  여성들 사이의 차이는 온데간데 없다. 

심지어 여성들이 같은 여성의 인정보다는 남성으로부터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진단을 보고 있자면, 그래서 여자들이 이 모양 이꼴이라는 뜻? 그렇다면 남자들을 비판할 게 아니라 여자들 정신차리라고 운동하는 게 먼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삐딱함일까???   

 

그리고 이건 세대적 차이에서 비롯된 해석의 다름일 수도 있는데....

'딸은 어머니로부터 여성 혐오를 배운다. 어머니는 딸의 여자같은 부분을 증오함으로써 딸에게 자기혐오를 심어주고 딸은 어머니의 불만과 공허를 목격함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경멸을 배운다" 라는 표현은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세대에게는 좀 황당한 표현이다. 아마도 이건 스위트홈 이데올로기에 갖힌 근대 중산층 가족의 전형에서나 나올 법한 스토리인데, 노동계급의 삶에 이게 가당키나 한 설명인지 모르겠고, 더구나 '너희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면서 (몸은 안 따라올지언정) 딸자식의 사회적 성공을 위해 헌신했거나 최소한 동의했던 우리 엄마들 세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어머니가 딸의 행복을 기뻐하지 않는다거나, '너를 평생 손에 쥐고 놓지 않을테다' 하며 지배욕을 갖는다는 해석은 사랑과 전쟁 하드코어 버전에 가히 비길만하다. 

게다가 '여아는 남아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일차적인 애착대상으로 삼지만 아버지와 동일화하여 어머리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아는 어머니를 사랑해서는 안 되며 어머니와 같은 성별에 속하는 대상을 사랑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사랑의 대상 상실은 남아보다 여아가 더 근원적이며 여아는 상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상실의 대상을 체내화한다. 그것이 멜랑콜리, 즉 우울상태이다'

"어머니에게 복종하든 거역하든 어머니는 딸의 인생을 줄곧 지배한다. 어머니늬는 사후에도 딸의 인생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의 감정은 자책감과 자기혐오로서 나타난다"

"(원조교제하는 10대는) 아버지 세대의 손님을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삼아 그들의 비열하고 왜소한 성욕에 자신의 육체를 제물로 바쳐, 아버지에게 소속되어 있으나 아버지가 결코 더럽힐 수 없는 딸의 육체를 시궁창에 버림으로써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다"

.... 같은 표현을 보고 있자면, 어안이 벙벙...  나는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인가??? 정신분석학의 본질은 막장 드라마였던 말인가??? 

 

하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은 '비인기남'으로 그려진 아키아바라 무차별 살상 가해자 사례였다.

저자는 그가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여성에게 선택받지 못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자면 남성으로서 최후의 자존심을 능욕당한) 진단한다. 많은 이들이 파견노동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지적했지만,  그런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런 흉악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라면서, 그 '비인기남'의 이전 글들을 인용하여 '이러니 여자가 생길리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게 치자면, 부인이나 애인이 없는 남성이라고 모두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왜 언급하지 않나? 비단 이 아키하바라 사건만이 아니라, 경제적 불안이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불안정 고용 노동자들의 다양한 사회적 일탈이 늘어나고 있음이 지적된 바 있다.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게 이를 그저 찌질한 루저남의 미친 짓으로 치부하고 말아버린다면, 정말 답이 없다. 세상은 오로지 여자를 소유하고 싶어 안달인 남자들과, 스스로를 혐오하며 남성에게 기생하는 여성들만 존재하는 곳이란 말인가???  

 

이 책은 여성주의 이론에 익숙한 이들과 함께 토론을 하면서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전반적인 여성주의 맥락에서 보자면, 나의 독해방식이 오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어서 말이다. 정말 여성혐오를 이렇게만 진단할 리는 없잖아??? 조만간 SOS를 쳐서, 이 책에 대한 국내 여성주의자의 '해설'을 좀 들어봐야겠다!!!   

 

* 뱀발: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친구관계야 말로 인간관계의 상급편'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높은 스킬이 필요하다. 연애나 결혼보다 더. 왜냐하면 연인이나 부부관계는 일종의 역할극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제임스 길리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제임스 길리건
교양인, 2012

 

 

사실, 번역이 매우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epidemic'을 내내 '전염병'으로 번역해 놓은 것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상당히 거슬렸다. 전염병 (communicable disease, infectious disease)은 병원체를 통해 전파되는 질환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풍토병 (endemic)도 있고, 대유행 (epidemic) 도 있다고... ㅡ.ㅡ  그냥 역학 관련 용어들이 이 사회에 대중화가 안 되어 나타난 결과겠거니.....

그리고 책 표지가 너무 후덜덜.....  이건 아니잖아....

 

하여간 글은 길지만, 요약하자면 

정치라고는 모르는 임상의사의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해 분석해보니

공화당 대통령이 되면 살인과 자살률이 높아지고, 민주당 대통령이 되면 반대로 낮아진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이야기... 랄프 네이더 같은 좌파나 극우파들이 보기에는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는 말씀!!!

그러게, 나도 여기에 매우 동의한다. 

 

저자는 진료실에서 다양한 폭력 사례들을 겸험했지만, '폭력이라는 전염병은 개인들의 차이만 가지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고 동기를 밝혔다. 그리고 다양한 근거들을 정리하면서, Hill's criteria 에 근거하여 집권 정당이 자살/살인과 '원인적 연관성'을 갖는지 검정해간다. 역학적 훈련이 매우 잘 된 임상의사 ㅋㅋ 훌륭하시다! 

게다가, '폭력치사라는 전염병은 (개인이 아니라) 공중보건과 예방의학의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피르효의 문장으로 글을 맺는 것을 보면 왠지 고맙기까지.... ㅡ.ㅡ 

 

저자는 사회정책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그 정책들로 인해 나타나는 차이를 폭력 뒤에 내재한 '수치심'으로 설명한다. (사소할지라도) 상처받은 자존심은 반동(reaction)으로 타인에 대한 폭력을 낳는다는 것.... (반대로 '죄의식'이 강력하게 작동하면 자살에 이른다). 공화당 집권을 통해 행사하는 정책들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수치를 경험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약간 동의하기 어려운 설명도 있는디.... 

수치심은 불명예와 치욕을 악덕으로, 자부심과 명예를 미덕으로 간주하는 도댁 체계인데 비해, 죄의식은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다. 하지만 수치심 윤리에서 보자면 겸양은 자기 모욕이나 다름이 없다. 전자는 우파의 정치윤리, 후자는 좌파의 정치도덕이 된다 (고 저자는 주장한다)... 

미국의 경우 남부는 수치심의 윤리관이 두드러지고 (그래서 폭력이 만연하고), 뉴잉글랜드는 상대적으로 죄의식 문화가 강하다 (그래서 폭력이 적다) 고 저자는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문화에 대한 역사적 사료들까지 등장하는데, 글쎄올시다....  남부 지역이 플란테이션 중심의 거대 농업자본과 노예제로 대변되는 사회적 불평등이 극심했다면, 뉴잉글랜드는 비교적 일찍 공업화가 진척되면서 이민자와 자유흑인까지 포괄하는 거대하고 (상대적으로 평등한) 노동인구의 규모가 커졌던 것이 더 중요한 이유 아닐까 싶은디....  (어째, 미시적 심리세계를 통해 사회세계를 설명하는게 오늘 정리하는 두 권의 공통 테마였나보다... ) 서부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자살률 높은 것도 상처입은 자존심으로 설명하는데, 이건 좀 화가 날 지경. 

 

조금 더 구체적인 물질적 기반과 제도의 디테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는 정신과 의사니까..... ㅡ.ㅡ   

그래도, 임상의사로서 교정시설에서의 폭력 감소 프로그램 경험과 이를 통해 정책을 어떻게 구상하면 좋을지 제안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폭력에 기대지 않고도 수치스러운 경험을 견뎌낼 힘이 되어주는 개인적, 문화적, 경제적 자원을 제공해주는 것' 말이다. 

 

비록 정권들 사이에 사회정책의 차이가 그닥 크지는 않지만,

폭력과 자살 예방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한국사회에도 단서를 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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