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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01
    영화 [Inception]
    hongsili
  2. 2010/07/25
    별 관련없는 책들 - 장 아메리, 조지 오웰, 희망제작소
    hongsili
  3. 2010/07/10
    [책]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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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6/28
    도덕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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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6/08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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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5/14
    시공을 가로지르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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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4/18
    전술과 실용에 대한 질문 [경계도시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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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3/19
    책과 영화에 관한 간단 메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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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9/12/14
    드디어 [알제리 전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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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11/29
    [권력의 병리학](2)
    hongsili

영화 [Inception]

 

크리스토퍼 놀란 스스로의 각본을 처음으로 영화한 거란다.

메멘토 때 아주 인상적이었고,

다 죽어가던 배트맨 시리즈를 깜놀한 스타일로 부활시켜서 많은 이들을 놀랬켰던 그 자...

 

영화는 아주아주 재밌었다.

포인트는 현란한 비주얼이나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력이 아니라

플롯과 꽉 짜인 편집, 구성.... 

오랜만에 정신줄 붙들고 영화봤다 ㅋㅋ

총 네 겹의 꿈, 각기 다른 시간 프레임, 서로 다른 임무들의 교묘한 교차편집은 와우!!!

 

사실, 첫 장면에서 디카프리오가 해변에 다죽어가는 모습으로 떠밀려왔을 때 나는 타이타닉 속편이 시작되나 잠깐 의심했었다. 아, 북극해에서 가라앉았던 청년이 바다를 표류하다 이제서야 뭍에 떠밀려왔구나 ㅋㅋ

 

진지한 와중에 실소를 터뜨린 적도 몇 번 있었는데, 첫번째가 인셉션을 의뢰받고 나서 팀이 모여서 엄청 신중하게 계획짤 때...

아니, 사람 마음 바꾸려면 꼭 힘들게 인셉션 해야 하나?  한국 드라마에 자주 출몰하는, 나라말아먹은 셀레브리티 환관이나 후궁,  아니면 궁극의 이간질 퀸 악녀들을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비행기 회사를 인수하고, 평생 정신질환자처럼 살아야 하는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인셉션을 할만한 사안인가 하는 의심이....  팔랑귀 달린 사람들 천지인 세상에 뭐 그리 힘들게나.... ㅋㅋ

 

결국 타겟의 무의식 세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가짜 화해를 연출하는데, 이 상황에서 의뢰인이 아니라 오히려 타겟한데 수수료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인셉션 팀원의 대사에 정말 혼자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게나 말여!!!

 

그나저나 킬리언 머피는 언제 주연으로 나오나? 안타까워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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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관련없는 책들 - 장 아메리, 조지 오웰, 희망제작소

출퇴근 시간이 길다보니 술렁술렁 책 진도가 자~알 나간다.

근데 정리할 시간이 왜 이리 없나 모르겠다.

 

대전 살 때는 저녁 모임 거의 제끼고 살았는데

서울에 오니까 저녁 시간에 웬 모임이 그리 빈번한지.... ㅡ.ㅡ 집이 아까워...

 

의보사 후배들 왔을 때는, 저녁 먹고 함께 집으로 걸어오다가 골목길에서 길을 잃을 뻔했다.

해지기 전에 돌아다녀본 적이 별로 없어서 길이 낯설게 느껴졌음 ㅋㅋ

 

하여간, 이러저러해서 책을 읽어도 조용히 숙고할 시간이 없다는 게 좀 문제...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자유죽음] 산책자 2010

 

 

자살의 다른 이름, 자유 죽음에 대한 이야기.

책의 성격은 저자의 머리글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은 심리학이나 사회학과는 거리가 멀다. '자살학'이라는 과학이 끝나는 곳에서 이 책은 시작된다.... 이 책의 많은 대목에서, 내가 자유죽음을 옹호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살지도 모르겠다. 그 같은 오해는 단호히 말해두지만 삼가주기 바란다. 변론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은 다만 자유죽음을 좇는 사람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살'이라는 현상만을 추적하는 과학적 연구에 대한 반작용일 따름이다...."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구절들은 이것...

 

"희망이라는 원리를 놓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모순이지만 피할 길이 없는 허무라는 운칙도 함께 인정하는 게 우리의 새로운 휴머니즘이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

"... 한편으로는 사회가 냉혹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발적으로 인생의 고리를 끊겠다고 할 때 필요 이상의 과열된 관심과 근심을 보이며 소동을 떠는 이중성으로는, 인간을 올바로 이해할 수없다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의 소유물인가?... 그래서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꼭 찾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에게 속하는 존재인가?"

"잘못이고 거짓인 줄 알면서도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어쩔 수없이 품어야 하는 헛된 희망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지나온 나날을 돌이켜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리라."

 

장 아메리는 열정적인 레지스탕스 활동과 그로 인한 투옥, 고문,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견뎌낸 생존자로서 스스로 자유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심지어 자살한 호텔방의 숙박료와 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메모까지 남겨놓고...  엄청난 시련을 모두 통과한 이후, 노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의 행보는 프리모 레비의 죽음과 함께 자유의지로 살아간다는 것, 삶의 의미에 대해 엄청나게 부담스런 숙제를 던져준다.

 

어떠한 자살도 모두 부당하다거나, 혹은 꼭 막아야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개인의 실존적 결단이 어떤 사회적 유형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사회의 불공정한 질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면, 그건 충분한 개입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자살에 다 사연이 있고 통계로 쉽게 간과해버릴 수 없는 삶의 진실이 숨어있겠지만,

모든 선택이 다 장 아메리나 프리모 레비와 같은 그야말로 '자유' 죽음이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에게 속하지 않는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사회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운 존재도 아니지않은가...

 

어쨌든, 자살에 대해 공부를 하는 이들, 더구나 계량적이고 실증주의적 자료 분석에 집중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2. George Orwell [The Road to Wigan Pier] Harcourt  (1958 copyright)

 

 

내가 생각하는 오웰 식 글쓰기의 가장 큰 미덕은 객관성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주어'를 버리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

Homage to Catalonia 에서도 그랬지만,  '세상에 노동자들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요' 이렇게 무조건 호들갑을 떨지도 않고 본인이 본 것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최대한 충분한 근거들을 확보하려는 노력, 그리고 본인만이 노동자의 편이라고 혹은 진짜 사회주의자라고 강조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회의와 의심, 현재 운동에서의 문제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점은 정말 매력....

 

달리 본다면, 리버럴하고 나이브한 사회주의자.....  주변 운동가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ㅡ.ㅡ

이 책은 Left Book Club의 청탁을 받고 오웰이 북부 실업자들의 생활 모습을 직접 탐사하여 기록을 남긴 것인데, 창탁 의도와 달리 실업자들은 물론 취업 노동자들의 삶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담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제 2부는 통째로 현재 사회주의 운동이 왜 힘을 못 쓰고있나 개인의 생각을 담고 있다. 본인이 devil's advocate 라는 전제 하에, 아주 신랄한 어조로....  그래서 정착 원고를 맡긴 북클럽은 아주 난감해했다고.... 북클럽 대표가 쓴 서문에 이런 딜레마가 잘 드러나 있다.

어쨌든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노동자 북클럽에서 이런 르포를 스스로 기획하여 작가를 파견하고, 또 내부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북클럽 이름으로 출간하고 그걸 서문에 담아냈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참신해보인다.

 

오웰은 정말 꼼꼼하게 사실을 기록하고 (노동자 가정의 주간 생활비, 방의 넓이, 식품의 목록 등등), 그러면서도 결코 노동자들을 대상화시키거나 혹은 신비화시키지 않고 삶의 본질적인 조건에 대해 아주 위트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후반부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은, 그것을 오늘 날 한국사회 진보운동에 대입한다고 해도 그리 틀릴 것 같지 않을만큼 생생하면서도 '상식적'이다.  그런 거 보면 과연 운동의 방식이라는 게 발전을 하기는 한건지 좀 의심이....... ㅡ.ㅡ

책에서 오웰은 임박한 파시즘에 대해 몇 번이나 경고를 했고, 아니나 다를까 원고를 넘기자마자 스페인 전선으로 달려간다. (그러니 자신의 책이 가져온 북클럽 내부의 대혼란도 본인은 몰랐을 것.... 북클럽 운영자들만 불쌍해 ㅜ.ㅜ) 

 

이래저래 할 만은 많지만, 어쨌든 이 책은 삶의 진정성으로 가득차 있고, 감동적이며,  성찰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무조건 강추!!! 심지어 영어로 된 원서도 도전해볼만함... 쓸데없는 기교와 복잡한 문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음. 간결하면서도 위트있는 문장들 작렬.....

 

 

#3. 최민섭 등. [우리시대의 희망찾기 - 주거 신분사회 ] 창비 2010

 

 

뭐 나쁜 책은 아닌 거 같은데, 손낙구 선생의 책이나 최근에 언론에서 많이 다루어진 내용들, 사례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 정말 오랜만에 구입한 책이었는데 (그것도 새책!!!) 은근 돈이 아까워 ㅜ.ㅜ

좀 기다렸다가 대출해서 볼 걸....

(이걸 지금 독후감이라고.........)

 

앞으로는 빌려 읽는다, 헌책 산다 원칙을 꼭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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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

 

도전적인 제목의 책이다.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장화경 옮김.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 - 오늘날 일본 가족의 재구조화 ] 그린비 2010

 

 

전적으로 동의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고 뭔가 정치적으로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상당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은 일본사회 가족과 결혼의 문제를 경제적, 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하고 있다.  부부 개별 성 쓰기와 이혼 자유화라는 민법 개정을 모티브로 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지만, 이들 사건은 향후 벌어질 사건들의 원인이라기보다 최근까지 변화된 일본의 사회상황이 나은 결과물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나을 듯 싶다.

 

#.

저자는 제 1장에서 이러한 현상을 '가족의 규제완화'라고 표현했다. 애정의 고도성장과 경제의 저성장 속에서 '싫어진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불합리성'을 제거한 조치이자 '감정표현의 자유화'라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와 애정, 가족관계가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애정 이데올로기, 연애결혼의 제도화가 사실은 아주 최근의 산물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

제 2장과 3장은 '점차 없어지는 전업주부', '저출산과 기생적 싱글'이라는 제목으로 경제적 저성장이 초래한 미혼화 현상과 결혼난 (그로 인한 저출산) 문제, 그 원인들을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현재 저출산의 원인이 (기혼 가구의 출생자녀수가 줄어들어서가 아니라) 미혼화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그 원인을 여성의 수입이 어중간하여 혼자 살 수는 있지만 가정을 유지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점, 전업주부 지향성, 부모와의 동거를 통한 생활수준 유지 (소위 기생적 싱글)에서 찾고 있다.

전업주부 지향성이라.... 21세기에 이게 뭔 일인가 싶다만 실제 조사 결과가 그런 걸 어쩌랴.

사실 근대 사회에서 지지리 고생하던 농촌 여성에게, 도시에서 샐러리맨 남편을 둔 전업주부야말로 로망 중의 로망이라 할 수 있었다. 집안 일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새벽부터 가혹한 육체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농사일에 비하랴....  하지만 놀랍게도, 일본사회에서 오늘날까지도 여성들의 이러한 전업주부 로망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대도시에 거주하는 대졸 여성이라고 특별히 다르지도 않았다.... ㅡ.ㅡ  오히려 지방에 거주하는 비교적 저학력, 혹은 저소득 계층의 여성이야말로, 예전의 그 여성농민들처럼 어쩔 수없이 숙명적인 일을 해야 하는 처지... 

이러다보니, 여성의 직장진출이 미혼화나 저출산의 원인이 될 수 없고, 한편으로 가정-직장 양립이 저출산의 해결책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맘이 편한 것은 아니지만, 또 부정하기도 어려운 듯 싶다. 최근에 읽은 한 논문에서는 여성들이 사회진출을 하고 싶어하고, 일을 통해 자기실현을 하고싶어한다는 게 'femist myth' 의 일종이라는 지적을 했더랬다. 업무 몰입도가 남성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것으로 흔히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다수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시장을 떠나있기에, 현재 노동시장에 남아있는 여성들은 매우 선택된 집단이고, 그걸 토대로 여성일반과 남성일반의 업무 몰입도가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라는 이야기도....

 

사실 여성들이 가진 일자리의 질이 높거나, 임금이 높거나, 혹은 자기성취감을 높일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기에 쉽게 떠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한다. (그럼 남성들은 일자리가 다 괜찮아서 떠나지 않는 것인가?)  하지만 사실 그렇게 쉽게 떠나서 전업주부의 '로망' 을 실현할 수 있는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저자가 말한대로 취업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여성의 증대가 미혼화를 초래한 것이 아니라 '고생스럽게 직장일을 하지 않고도 풍족하고 여유있게 자녀를 양육하고 싶다는 전업주부 소망을 가진 여성이 눈에 차는 배우자를 찾지 못해 (그리고 부모와의 기생적 동거) 미혼화 현상이 초래되었고, 이러한 여성들의 존재는 오히려 취업과 가사/육아를 양립하려는 여성과 생계를 위해 필사적으로 일하는 여성들을 방해하고 있다는 지적은 전적으로 부정하기만은 힘들듯하다.

미혼화가 그렇게나 사회망조인지 동의하기는 어려우나, 최소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여성들의 이해가 단일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보인다.

 

어제 한 의과대학에 강의를 가서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 쪽지를 돌렸는데  놀랍게도 '현모양처 겸 교수'라는 답변이 나왔다. 기업적 마인드로 교수들을 쪼아대는 요즘의 대학에서 교수하면서 현모양처 되기란 일단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21세기에, 그것도 여성전문직의 상징적 존재인 미래의 여의사에게 듣는 현모양처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은 참으로 굉장했다. ㅡ.ㅡ

 

#.

기생적 싱글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게 바로 이 저자라고 하는데, 이 또한 선후관계에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고 싶어서 부모에게 기생하는 (!)  비혼자들이 물론 많은 것도 사실이겠지만, 독립을 하고 싶어도 일본이나 한국사회의 빌어먹을 부동산 시세가 이를 허용하지 않기에 또다른 많은 이들이 눌러앉는게 아닐까??? 어쨌든 저성장 추세 속에서 자신의 부모세대만큼 남편이 경제적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그래서 기생적 싱글은 물론이거니와 결혼 후에도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는 현상은 '신분제' 부활의 신호일 수 있다는 지적에는 그래도 백퍼센트 동의!!!

사족이지만, 내 주변을 돌아보면,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로부터 통제나 간섭을 받는 경우는 대개 경제적 의존 때문이다. 안 그런 것 같지만,  부모가 자녀에게 해주는 것도 없이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자신의 규율을 강제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이를테면 드라마에서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전까지 운운하며 성인자녀들을 휘두르는 경우 예외없이 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우이고, 현실에서도 이건 마찬가지이다.  성인자녀 입장에서도 받았으면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  바람직한 경제적 행동이다.

 

하여간, 그래서 미혼화/저출산 현상을 예방하기 위해 미혼 성인자녀와 동거하는 가구에 대해 세금을 매기자는 제안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최소한 개인의 선택들이 온전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대해서만은 동의....

 

#.

제 4부는 개호, 가사, 육아 문제를 현황을 진단하고 진정 바람직한 가족관계라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가사가 부인의 애정표현으로 간주되거나, 자녀양육에 목숨거는 형태가 과연 바람직한 것이냐는 것이다.

한편 5부에서는 앞으로 일본 가족이 어디로 갈 것인지 전망하는데, 간략한 가족의 사회사와 함께 가족제도의 규제완화가 가져올 파장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나 전후 일본 사회에서 가족은 동원, 총력전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을 지적한다. 반전집회에서 우리 아이를 위해 전쟁에 반대한다는 슬로건만큼이나, 주전론자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자는 것 또한 설득력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가족 지상주의적 태도, 사회질서와 결부된 가족주의가 가져온  오랜 갈등의 미봉... 세기말적 위기 속에서 한편으로 가족원리주의가 다시금 부활하기도 했는데 이건 어쩌면 최후의 단말마...

이제 일본사회는 '아내 전업주부, 남편의 고수입'이라는 비현실적 꿈을 버려야하고 가족의 구조조정과 새로운 사회보장제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로 책은 끝을 맺는다

 

#.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일본 사회의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의 우울한 전망들은 사실 약간의 시차를 둔다면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미혼화나 저출산이  문제다"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고, 또 현재 여성들의 전업주부 지향이나 노동시장으로부터의 후퇴, 부모와의 기생적 동거를 편하게 살아보려는 여성의 선택 (심지어 약사빠름?)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없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과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의 가족 특성과, 또 그러한 특성이 가져온 사회적 영향은 무엇일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없다. 특히나 사회적 불평등과 관련하여............ 어디 좋은 책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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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읽기

학회 다녀오면서 도덕경을 읽었다.

오강남 풀이의 현암사 버전이다.

 

 

부피가 크지 않으면서 너무 후딱 읽어버리지 않을 책으로 딱 한 권을 엄선하여 들고나간 책이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공항에서,

청명하기 이를데 없는 시애틀 해변에서,

삐딱하게 앉아 이 도덕경을 읽었다. 부조리극의 한장면..... ㅡ.ㅡ

 

책에는 워낙 여러가지 판본이 있고, 번역서 또한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리고 각 버전마다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풀이가 되어 있다고...

무엇이 가장 원전에 가깝고 노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진실을 잘 드러냈는지 나야 알 길이 없다만,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금강경이나 법구경을 읽었을 때도 생각했던 것인데, 처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담긴 내용과 구절들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경이 서구인의 정신세계와 문화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적이 있다. 어려서부터 많이 들어서 관련 상식이 풍부하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불경이나 도덕경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그동안 내가 읽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수많은 장면과 방식들 속에 이미 이러한 내용들이 상당 부분, 다양한 수준과 형태로 체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내가 특별히 공부를 하거나 지식을 쌓아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문화 속 깊이 뿌리를 두고 전승되어왔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 당혹스러웠던 사실은 추상적인 개념어가 포함된 구절들을 이해하는데, 주석으로 붙어있는 한자보다 영어 단어가 더욱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영어 단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잘 이해하고 있다거나 한자실력이 형편없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한자 실력이 형편없는 건 사실이다 ㅡ.ㅡ). 이성적인 사고, 혹은 추론과 추상화의 과정에 한자어보다는 영어가 더욱 익숙하고 편하다는 것인데,  문제는 영어를 그만큼 자유롭게 구사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한자보다 영어가 편하다는 점이다.  이는 (상당한 수준으로 한자가 포함되어 있는) 모국어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국심이 부족해서 큰일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스스로의 사고를 모국어로 제대로 개념화하지 못하고, 또 이를 다른 이들에게 정확하고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마저 제한된 것이라 생각하니, 안타깝고 조금 한심스럽다는.... ㅡ.ㅡ 또 한편으로는  모국어로 사고를 성숙시키고 추상능력을 발전시키는데 학교교육이 어찌나 부실했었나 하는 원망...

 

도덕경을 다 읽었다고 해서 '도'가 무엇이지 깨달은 것은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접근하여 '도를 아십니까' 묻는 이들이라고 해서 그 도를 깨달았다고는 물론 생각지 않지만,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역설적으로 도의 정체를 가장 잘 드러내는게 아닌가 싶다.

무위의 정신, 집착을 놓아버리고 자연의 뜻을 따르기를 강조하는 것들이 언뜻 불경에서 이야기하는 열반 혹은 깨달음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 폭과 깊이에서 열반의 개념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

어찌 본다면, 속세의 강을 건너 열반의 섬에 이르는 나침반이라기보다  이 곳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제시하는 현장 지침서?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도'라는 것이 유가에서 이야기하는 인/의/예보다는 한 수 위의 경지라는 것이다.

 

"...

도가 없어지면 덕이 나타나고, 덕이 없어지면 인이 나타나고

인이 없어지면 의가 나타나고, 의가 없어지면 예가 나타납니다.

예는 충성과 신의의 얄팍한 껍질, 혼란의 시작입니다.

..."

 

도덕경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경서이기도 하지만 특히 당대의 위정자와 지배계층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올바른 길을 전하는 책이기도 했다. 여러가지 기억해둘만한 구절들이 있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와닿는 것은 이것이다.

 

"...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

윗사람이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

이때 윗사람이 집착하는 삶은 꼭 개인의 복락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우리 집단을 위해서.....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헛된 집착 -- 내가 속하거나 다스리는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타자에게 적대적으로 변해버리는 배타적인 집착, 혹은 타인의 삶을 압도해버리는 집착이 가져오는 결과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짧지만 참으로 핵심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많이도 아니라, 단 한뼘만큼의 진정한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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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반대하는 이들...

      커트 보네거트의 [제 5도살장 - 혹은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박웅희 옮김, 아이필드 2005년)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 나는 내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량 학살에 가담해서는 안되고

  적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늘 가르친다. "

 

" 또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일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표하라고 늘 가르친다. "

 

드레스덴 대폭격, 소위 Dresden theater의 경험은 돌아가신 두 할배 - 하워드 진과 커트 보네거트의 삶에 폭격만큼이나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에릭 홉스봄의 지적했듯, 반전운동에 누구보다 열심인 사람들이 참전군인들이라는 사실은 일견 당연해보인다.

현장의 참혹함과 스러져간 목숨들의 허무함을  직접 체험한 이들만큼 생생하게 전쟁의 부당성을 증언할  이들이 또 있을까....

이런 면에서 한국의 상황은 차~암 독특....

 

 

그나저나 요즈음 강건너 불구경하듯 태평한 모습으로 (물론 표정과 억양만큼은 결연 그 자체!) 전쟁불사를 외치는 이들이야말로 전쟁의 폐해를 피해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들이다. 

고등학생인 연정이마저 그런 소리를 했다. '언니, 부자들은 벌써 비행기표 다 사놨다며?"

"야, 전쟁나면 비행기가 뜨겠냐? 혹시 모르겠다. 나라들마다 비상 항공편 마련하면 귀하신 이중국적자들 다 싣고 가실지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전쟁불사 운운하는 인간들, 어떻게 하면 앗뜨거하게 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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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을 가로지르는 책들

 

출퇴근 거리가 길어지니까 책읽을 시간이 늘어났다.

물론, 운수대통으로 일찌감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 도저히 깜빡잠이라고 부르기 어려울만큼 푸~욱 잠들어버리지만.....

얼마전에는 내릴 정거장이 되어서 문닫히기 전 후다닥 뛰어내렸는데,

하도 깊이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인지 어지러워 한동안 멍때리고 서 있었음 ㅡ.ㅡ

 

읽은지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이나, 그나마라도 기록해놓는게 좋을 듯 싶어 몇 자 남겨둔다

 

#1. Eric Hobsbawm. Vintage 1996

 

 

지난 겨울 히말라야 가서 읽기 시작했던 책이다.

저 표지사진............ 책의 내용을 이미 절반은 설명하고 있다.

 

*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이해없이 현재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소박한 진리를 새록새록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다. 

돌이켜보면, 한번도 현대사를 이렇게 폭넓게 '조망'해본 적이 없었다.

읽고난 지 얼마되지도 않아 벌써 연대기 순서도 뒤죽박죽되고 구체적인 디테일들을 왕창 까먹었지만 (ㅡ.ㅡ), 부분적으로 알고 있던 사건들을 맥락 속에서 전체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느꼈던 '깨달음'의 즐거움만은 생생하다.  정치와 이념, 문화예술과 과학 -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시공간을 넘나들며 씨줄날줄을 잘 엮을수 있는거지?

 

*

홉스봄은 1930년대 대공황 부분을 기술하면서, 시장지상주의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렇게 생생하게 경험하고서도 1980-9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다시 맹위를 떨치는 현상이 참으로 기이하다고, 그래서 역사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도 또 20년이 지나 전세계적 데자뷔를 경험하고 있는 걸 보면, 집단적 기억투쟁이 중요한 것 같기는 하다.

 

*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하워드진의 [미국 민중사]와 비교를 하고는 했다. 

[미국민중사]를 읽으면서 울컥하는 감정의 고양과 낙관을 갖게 되었다면,

[극단의 시대]를 읽는 내내 눈이 뜨인다는 이성적 기쁨과는 별개로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주욱 돌아보니,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이 지구촌에 어떠한 형태든 근본적 변화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하는 비관이 스멀스멀..... ㅡ.ㅡ

 

*

실제로, 대학시절 세미나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혁명과 중국 혁명에 대해 '차분하게' 돌아보았다. 물론 그 시절에도 들끓는 환호의 마음으로 모든 걸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지금 이해의 지평이 확장되었다고 해서, '그 때는 제가 철이 없었어요'  혹은 '속았어요'하며 배신감을 느낀 것도 아니다. 

세상의 복잡성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정도의 지식과 이해밖에 얻기 어려웠던 것이 그시절의 한계일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막연하게 이해하고 있던 것보다 혁명 당시의 상황은 훨씬 열악했고, 혁명을 통해 과연 그 사회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

책의 첫 장에 인용된 인류학자 Baroja의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There's a patent contradiction between one's own life experience - childhood, youth, and old age passed quetly and without major adventures - and the facts of the twentieth centry... the terrible events which humanity has lived through"

20세기는 기이하게 마감되었다.

'평균적인' 물질적 조건들은 개선되었지만, 불평등은 유례없이 심화되고,

전지구적 차원의 전쟁을 사라졌지만 국지적 갈등은 이제 그야말로 유비쿼터스.....

 

기관사없는 폭주기관차처럼 위태롭게 질주하는 21세기 지구촌의 운명은 과연 어디로... ㅜ.ㅜ

 

*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가는 런던을 떠나며 영국인들은 다시는 런던을 보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단다.  세계가 멸망하는 줄 알았다고.....

그러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삶이 지속되느냐 하는 것이다.

 

인류는 정말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2. John Berger < Ways of Seeing> Penguin books 1972

 

 

미술작품, 특히 회화에는 등장인물 (혹은 사물이나 풍경) - 그리는 사람 - 그림을 보는 사람 이 존재한다.

Berger는 통상적인 예술사 기술이 잔뜩 신비화된 미사여구로 등장인물과 화가들의 내면에 대해 소설을 쓰는 것을 비판하며, 등장인물과 화가 의 관계, 그리고 그림과 감상자 혹은 소유자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이 BBC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에 기반을 두고 쓰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급진적'인 내용이 공중파 예술프로그램에서 가능한 거구나... ㅡ.ㅡ

 

책의 목적은 서문에 아주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다.

"A people or a class which is cut off from its own past is far less free to choose and to act as a people or class than one that has been able to situate itself in history. This is why - and this is the only reason why - the entire art of the past has now become a political issue"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고,

얄팍한 나름의 서양미술사 지식에 토대를 둔 관성적인 스스로의 작품 이해방식을 앗 깜딱이야 하면서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준 아주 훌륭한 책....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읽고서 눈이 번쩍 뜨였던 경험에 비할만하다)

칼라 도판 없이도 그림책이 이렇게 훌륭할 수 있구나!!!

 

#3. Wilkinson R, Pickett K.   Bloomsbury Press 2009

 

 

미국에 체류 중인 S 샘이 저자 친필 서명까지 얹어 선물로 보내준 책이다.

 

저자들은 주로 선진국들의 통계자료를 이용하여 소득불평등이 다양한 건강과 사회문제 (정신건강, 약물남용, 평균 수명, 비만, 교육성취, 10대 임신, 폭력, 징역/형벌, 사회 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꼼꼼하게 보여주고 있다. ( 인용하거나 참고할만한 수치나 그래프들이 적지 않다- 다만 통계미비로 한국은 분석에 거의 포함되어있지 않음 ㅡ.ㅡ)

 

그래서, 한 사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뿐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좀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불평등로 인해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은 그 사회 모두에게, 특히나 열악한 조건에 처한 이들에게 좀더 집중적으로, 전가되며, 윤리적인 측면에서 뿐아니라 효율이라는 측면에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평등한 사회로 변화해가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거나 수천만년 걸리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현실의 예를 들어서 보여주고 있다.

아주 꼼꼼하고 설득력 있게 쓰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결정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도대체 '왜' 불평등이 이러한 여러가지 건강과 사회문제들을 낳는가 말이다.

 

저자는 오랜기간 주장해왔듯, 다시 한번 사회심리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분명히 중요한 요인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마음가짐과 스트레스의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으로부터 야기된 힘의 불균형 (이들은 상호강화)이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를 배제시키고, 사회적 투자를 침식함으로써 실제적인 물리적 조건의 변화를 낳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 아닐까?

 

OECD 국가들 중 불평등 수준이 가장 심각한 미국의 평균적인 건강수준이 나쁜 것이,

불평등 때문에 시기와 질투로 마음에 병이 나서 그렇다기보다는

계급 혹은 계층적 이해가 달라지면서 공공의 장이 축소되고,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이해에 충실한  정책과 사업들이 시행되면서 실질적인 삶의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저자들의 관점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실 나만이 아니라,

사회역학계에 나름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설명에 대해서는 학술적 논쟁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어쨌든, 이 책이 전공자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쓰여졌고 그것도 아주 쉽고 간명하게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나 이 책 반댈세'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설명방식에 대해서 관점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불평등이 건강과 사회문제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단지 가난한 이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무척이나 절실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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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과 실용에 대한 질문 [경계도시2]

 

주변의 너나할 것 없는 강추가 있었으나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불현듯 나서 보게 되었다.

 

홍현숙 감독의 다큐 [경계도시2]

 

 

작품을 보면, 나- 개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송교수의 부인만이 예외)

어떤 이들은 국가안보가 위협당할까봐 진심으로 걱정하고, 또다른 이들은 민주화 운동이 위기에 처할까봐 걱정한다. 생뚱맞게 박홍 총장 같은 이는 송두율 교수을 걱정해주며 그가  사도 바울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축원하고, 심지어 기자라는 작자들마저 어떻게하면 이 상황을 잘 돌파할 수 있을지 검찰의 '조언'을 김형태 변호사에게 일러주기마저 한다. 

 

또한 송교수의 잠재적 아군이었던 이들은 '전술'을 이야기했다.

이건 그저 전술일 뿐이다 (전략이 아니라) - 그저 사죄성명에 준법서약서 한장....,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이걸 문제 삼으니 어쩌냐, 일단 비는 피해야지....

 

이러한 전술적 접근은 좋게 표현하면 유연성이고,  ('~주의'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그리하자면) '실용주의', 혹은 약간 폄훼해서 '정치공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근대가 개인의 발견과 함께 시작된 것아라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아직 전근대라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집단적 대의명분 앞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양심이란 편의에 따라 잠깐 유보할 수 있는 생각의 한 단편일 뿐.... 

(송교수가 준수선언을 강요당했던 그 잘난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는 개인의 양심과 사상이 좌와 우에 의해 그리도 손쉽게 재단될 수 있다는 것에 새삼 (!) 놀랐다.  하긴 주위를 둘러보면, 일상에서 드문 광경도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양심과 사상을 개떡같이 취급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멀리 국가보안법까지 언급할 것도 없이, '일단' 반성문 쓰기, 종교 강요 같은 예는 수백가지도 들 수 있다.

 

이런 일들의 특징이자 위험성은 그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는 점이다.

억압을 가하는 측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억압받는 이들조차도 내적 괴로움 없이 실용주의적인 혹은 유연한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주변의 신심어린 조언자들과 지지자들이 이러한 선택을 충고한다. 그것도 진심어린 애정으로부터.....

 

파시스트 독일에서, 히틀러-나치스에 경례를 붙이고 싶지 않았던 한 저명 과학자는 집밖을 나설 때면 항상 양손에 무언가를 들었다고 한다. 경례를 붙이는 사람들이 모두 진심으로 파시스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손짓만 따라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만 열렬하게 파시즘을 미워했어도 괜찮았다. 아마도 적지 않은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이 과학자는 스스로에게 용납이 안 되었기에, 수 년 동안을 외출 때마다 짐꺼리를 만들어야 했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에 보면, 전향서를 쓴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이 모두 등장한다.

그깟 전향서, 형식적으로 쓰고 마음 속으로만 전향 안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걸 차마 할 수 없어서 수십년을 영어의 몸으로 지내버렸다.

 

스스로를 돌아본다.

(아무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나의 존재 근거를 뒤흔들 수 있는 상황들에 나또한 얼마나 '유연하게' 대처했었는지.....  나의 양심 혹은 다른 이의 정체성을 얼마나 손쉽게 '그 따위'로 만들었는지....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는

국가보안법 따위를 떠받드는 야만적 우파에 대한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근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보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 뱀발

영화에 현재 건강보험공단 정형근 이사장이 몇 번 등장한다.

역시 그곳이 더 잘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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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에 관한 간단 메모

#1.

 

지붕뚫고 하이킥 마지막회라 하여, 일찌감치 귀가하여 기다린 결과...

약간의 패닉, 그리고 멍때림..?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그러하듯, 아픔 속에서 성장했고,

심지어 누군가는 그토록 부여잡고 싶었던 순간을 시간을 멈춰 잡아둘 수 있었으니

딱히 비극적 결말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으나

빵꾸똥구 해리의 그 천진한 울음만은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더랬다.....

 

시트콤을 가장한 이 정체불명 드라마의 장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2. 영화들에 대한 간단한 메모

 

* 의형제

 - 영화 드라마 통틀어 강동원이 출연한 작품 첨 보았음.

 - 너무 잘 생겨서 깜딱 놀랐음. 목늘어난 티셔츠를 입어도, 작업복을 입어도 그는 모델.... ㅡ.ㅡ

 - 이 이야기를 주먹도끼한테 했다가, 4천만이 아는 진실을 이제서야 알았냐며 욕만 진탕 먹음

 - 송강호는 뭐 이제 입신의 경지....

 -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에 안도감...왜 ??

 

* 하늘에서 음식이 내리면

 - 지난 설 연휴에 조카들이랑 볼게 없어서 그냥 별 기대없이 갔다가 쓰러지면서 본 영화

 - 은근 촌철살인의 풍자와 기괴한(!!!) 상상력은 딱 우리들 취향

 - 집에 돌아오는 길에 목없는 젤리곰의 공격을 추억하며, 꿈틀이를 사서 나눠먹음 ㅋㅋ

 

* 밀크

 - 숀펜의 '압도'에 그저 할 말 잃음

 - 이런 영화가 그리고 있는 미국사회의 모습을 보노라면, 또라이라고 욕하기도 어려움.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구... ㅡ.ㅡ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팀버튼 감독님!!!  못 생긴 여자는 여왕도 못해요?

 - 손모가지 치켜들고 진상 떠는 백색 여왕이 더 악당 같아요!!!

 - 왜 이렇게 평범해진거예요? 실망이예요!!!!!!!!

 

 

#3. 책....

 

시간이 없어서 우선 제목만 적어두고 to be continued....

 

 * 삼성을 생각한다

 * 청부과학

 *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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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알제리 전투]

소문은 무성했으나 볼 기회는 없었던 영화 [알제리 전투] (1966년 작)를 보았다.

개봉 소식도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명불허전이라....

칠레전투가 완전 다큐라면, 이 영화는 다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큐가 전하는 것 이상의 리얼리티를 담고 있었다. 어쩜 다큐가 아니기 때문에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연출'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나 소설이라면 으례 그렇듯,

이 영화는 결코 계몽적이거나 '단선적'이지 않다. 긴장과 갈등, 그리고 관객들의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무수한 상황들이 툭툭, 때로는 미묘하게 제시된다. 

 

#.

테러리즘을 다루는 태도도 그랬다. 가시적인 테러와 좀처럼 가시적이지 않은, 그러면서도 실질적 효과는 더 엄청난 구조적 폭력의 문제 중 무엇에 비판의 무게를 두어야 할까? 후자의 극복을 위해 전자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예전(?) 같으면, 일고의 여지도 없이 후자의 '근본적' 문제를 지적하며 전자를 (상대적으로) 옹호했었을 게다. 그런데, 이제는 도저히 못 그러겠다. 입장은 지지하지만, 내가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소리다. 대의를 위해 누군가에게 구체적인 위해를 가하는 행동을 이제는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예전에 했다는 소리는 아니고... ㅡ.ㅡ  하지만 대의명분이랍시고 후배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던 몇몇 일들을 지금 떠올리면 등골이 서늘하다.....) 조지오웰처럼, 결국 어느 순간에는 (전적으로 지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들 수 있을지 의문이다. 

 

#.

영화에서 진정한 모범군인으로 등장하는 마띠유 대령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대사는 IMDB 에서 퍼옴)

"We aren't madmen or sadists, gentlemen. Those who call us Fascists today, forget the contribution that many of us made to the Resistance. Those who call us Nazis, don't know that among us there are survivors of Dachau and Buchenwald. We are soldiers and our only duty is to win."

"Should we remain in Algeria? If you answer "yes," then you must accept all the necessary consequences.:

 

알제리의 식민모국은 프랑스...

공화주의의 모범을 세웠고, 나치스에 그 어느 나라보다 격렬하게 저항했고, 현재에도 막장 미국에 비하면 나름 똘레랑스를 갖추고 있다고 인정받는 그런 나라...

하지만 인도차이나, 알제리까지, 무려 60년대까지도 식민지를 유지했던 대표적 제국주의 국가 중 하나라는 점을 나는 종종 잊는다. 

알제리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엄청난 차별과 억압을 자행했던 130년의 역사는, 프랑스의 소수 제국주의자나 꼴통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령의 이야기가 바로 그 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게 바로 슬픈 현실인 것이다. 내부로부터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혹은 묵인이 합의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제국주의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이건 자본의 폭력적 속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제 시대에 부역하던 이들은 정말로 해방이 올 줄을 꿈에도 몰랐단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하면서 의아해했는데, 30년 이상 식민통치가 지속된다면 그럴 법도 하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면서 불과 1년 사이에 사람들이 속내를 드러내거나 혹은 변해가는 모습들을 보니, 그 때에는 어땠겠구나 하는 짐작도 새록새록....

120년이라는 식민통치를 겪으면서도 소진되지 않고 남아있는 독립의 열망은, 자유를 향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으로 해석해야 할까?

 

영화에 보면, FLN 지도부가 다 소탕(?)되고 난 2년 후, 다시금 들불처럼 민중봉기가 끓어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모두들 국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데, 국기라기보다는 넝마에 가까운 천쪼가리들.... 걸치고 있는 옷들도 그닥.... 그걸 보고 있자니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조선의 독립운동은 얼마나 더 추레하고 볼품없었을 것인가 저절로 연상이 되었더랬다.

 

#.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을 읽고 복잡다단한 생각과 의문들이 들었었는데 정리를 못하고 넘어간 적이 있다. 차분하게 앉아 좀 정리를 해봐야겠다. 그가 책을 썼을 때 불과 서른 여섯.... 결국 독립은 보지 못했다.....

 

 

#.

사족이라면, 엔리오 모리꼬네가 영화음악을 맡았다는데, 정말 딱! 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FLN 지도부로 등장하는 배우는 실제로 주도적 활동가였고, 나중에 정부 각료가 되었다고....ㅡ.ㅡ

 

참, 주인공인 알리가 교도소에서 혁명운동에 눈을 뜨고 출소하여 첫 임무를 수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글을 몰라.... ㅜ.ㅜ 그래서 지령을 전달하러 온 꼬마가 지령을 읽어준다. 나 원... 글도 모르고 어떻게 혁명운동을 한다는겨... 순간 속터져 죽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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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병리학]

Paul Farmer < Pathologies of power - health, human right, and the new war on the poor> California University Press 2005 (김주연, 리병도 옮김. [권력의 병리학] 후마니타스 2009)

 

 

 

올해 번역서가 출간되기는 했지만, 미국에 머물던 당시 사놓았던 책이 있어서 그걸 읽었다.

한글판도 있는데 굳이 영문판 읽는다고, 잘난체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 비싼 돈 주고 산 책을 냅두고 또 새책을 사란 말이냐... ㅡ.ㅡ

 

약간의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외면하거나 혹은 냉소해버릴 수 없는 엄청난 경험과 슬픈 진실,  그리고 저자의 감성적/이성적 분노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천상 임상의사인 그의 직접 서비스 제공 (이걸 pragmatic solidarity 라고 칭했다)  고집 원칙이 가끔 아쉬움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건 사실 당연한거다. 앞에서 당장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원칙이나 법개정이니, 근본적 대책이 어떻고 하는 건 한가하게 비춰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노력들이 함께 이루어져야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의 강점은, 대부분의 인도주의적 구호/원조활동이 그리는  '따뜻한 마음'과 '불쌍한 사람들' 이면의 구조적 폭력 (structural violence)과 권력의 병리학 (pathologies of power)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른손으로는 자선 활동을, 왼손으로는 가공할 폭력을 행사하는 신자유주의/보수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은 매섭다. 한국에서 최근 몇 년 간 한비야 씨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참여를 통해 국제 구호활동이 관심을 끌고 있지만,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여전히 금기....  비록 시간과 공간, 드러나는 현상은 다르지만, Haiti와 Chiapas 의 가난한 이들, 러시아 구금 시설의 청년 수감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은 모두 같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조금 아쉬운 점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자체의 착취적 성격에 대해서는 그닥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가 문제삼고 있는 국제 금융기구의 활동이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어떠한 동력에서 비롯되었는지에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음. 하지만 이 책의 초점이 그건 아니잖아?)

 

파머는 국제사회 혹은 학계, 인권운동의 통상적 접근법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의 원조가 어떻게 독재정권 (Haiti와 Chiapas 에서)의 권력을 영속화시키고 민중들을 고통에 빠뜨렸는지, 인권의 협소한 법률적 해석과 정치적/시민적 권리에 치중한 인권운동이 어떻게 실질적인 사회권 침해로 이어졌는지, 비용효과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의 지원이 거부된 결핵 프로그램 때문에 어떻게 러시아 구금시설의 청년들이 약제 내성 결핵으로 죽어갔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연구자들 혹은 국제사회, 관료들의 이중적 잣대와 위선을 맹 비난하신다 (사실, 미국에 있을 때 이 분 본 적 있는데, 엄청 까칠해보임 ㅜ.ㅜ 훌륭하신데, 같이 일하기는 무서울 것 같음.......내공이나 경험이나....그 무시무시한 포스....) 

특히 '중립성'이라는 이름으로 피억압 민중과 가해자들의 주장, 그 어디 사이엔가 진실이 있는 것처럼 호도해버리는 가장된 당파성, Haiti 의 가난한 민중들이나 Russia 구금 시설의 수감인들이 결핵 내성을 갖게 된 것은 미신에 쉽게 빠져 근대적 의학치료를 거부하거나 생활태도가 불량하여 약을 잘 안 먹기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해버리는 선진국 연구자들의 편견, 비용효과 분석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선진국 국민과 후진국 국민의 목숨값이 다르게 계산되기 때문에 최선의 치료가 후진국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이미 내성이 생겨버린 1차 약제를 계속 퍼붓는 비효율적인(!) 원조활동을 하는 국제기구와 '전문가들'.... 또한 최근 붐을 이루고 있는 '의학윤리' 분야가 의학 신기술의 적용과 개별 진료행위에는 그토록 뜨거운 논쟁을 벌이면서도 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값싼 약제조차 복용하지 못해 죽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모르쇠하는 것, 축제나 기이한 문화체험에만 초점을 둔 인류학 연구들에 대해서도 막 야단을 치신다... (ㅡ.ㅡ)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인종적 혹은 문화적 특수성에 천착하는 '문화적 상대주의'나 '정체성의 정치학 (identity politics)'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 쪽 문화의 고유한 전통이니 우리는 그걸 인정해야 한다는게 도대체 말이 되냐는 거다. 또한 대개 인종, 젠더, 종교/문화 등에 근거한 정체성의 기저에 도도하게 흐르는 사회경제적 힘을 고려하지 않는 '인정 투쟁'은 충분치 않다는 거다.

 

(참, 본문에 보면, 임상 의사들이 개별 환자 보는데만 매몰되어서 보건의료 체계나 사회적 건강, 공중보건의 문제는 역학자들에게 미룬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그것도 오해다. 대부분의 역학자들도 이런 문제를 잘 다루지 않는다.....  )

 

그래서, 결국 저자의 결론은 무엇인가...

실천적인 방향으로 연구의 의제를 변화시켜야 하고,  또한 연구'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다 ("But remember that none of the victims of these events or processes are asking us to conduct research").

또한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해방신학에서 이야기하는 'preferential otpion for the poor'의 원칙을 수용하고, 건강권을 인권 문제의 중심에 혹은 유용한 잣대로 활용하자는 것이다.실제로, 건강을 매개로 접근하는 것은, 보편적인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크고 또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당장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면서 이를 토대로 지평을 넓혀 나가기에 유리하다.

그리고, 사회권 보장에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연대활동에서 국가나 관료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는다. 좋은 뜻이 항상 좋게만 쓰이지 않는 경우가 많고, 더구나 인권 유린이 일어나는 경우 대부분 국가가 가해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나...........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알리는 것은 배운 자들이 가진 특권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단지 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싶다. 

관찰과 분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참여 없이는 진정한 관찰과 분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과대학이나 보건학 분야의 학생과 연구자들.... 그리고 국제연대 혹은 심지어 '봉사활동'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한번 꼭 읽어보아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정도의 경험과, 그 엄청난 경험을 이렇듯 정제된 언어로 정리해낼 수 있는 이는 지금 이 지구촌에 몇 명 없을 듯....

 

* 인용된 Edurardo Galeano 와 Paulo Freiri의 글은 기억해둘만하다.

"   The technocrats claim the privilege of irresponsibility: "We're neutral", they say.  "

"  True generosity consists precisely in fighting to destroy the causes which nourish false ch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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