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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07/27
    그래도 당신은 좀 낫잖아 - 영화 [레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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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과 맥락

살다보면, '실상'을 잘 알지 못한 채 '에이~ 그까이꺼' 하면서 폄훼하는 경우들이 의외로 많다.

 

마르크스의 적자임을 강조하며 그 분의 뜻을 헤아리는데 공을 들이는 좌파 훈고학계에서 어쩌면 가장 입에 담지 못할 단어는 '사민주의'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훈고학적 지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나같은 변방의 서생조차  '그까이꺼 사민주의'는 (반동보다 더 질이 나쁜) 변절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으니.... 

 

박근갑의 저서 [복지국가 만들기 - 독일 사민주의의 기원] (문학과 지성사 2009) 을 읽으면서, 과연 이 당시 독일 노동자들과 사회민주당의 전략/전술이 정말 최선의, 바람직한 것이었는가 하는 논의를 떠나, 어떠한 고민에서 이런 행보를 걷게 되었는지 (물론 완전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없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동안 나는 역사적 맥락과 내적 동력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이, '사민주의란 근본적 변혁을 가로막는 개량주의', '조합주의, 도대체 왜 저런 비효율적 제도를?' 이 정도의 단순화 논리만을 가지고 있었더랬다. 

 

 

 

이 책은, 1848-1914년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 독일의 복지국가 프로젝트가 태동하고 자리를 잡던 그 시기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복지정치'를 둘러싸고 사민주의 세력이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해갔는지를 아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물론, 이 책 한권을 통해 그 복잡했던 시기를 다 이해하기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더구나 사람 이름 외우는 데 천부적 무능력을 타고난 나에게, 역사책은 역시.... ㅡ.ㅡ 비스마르크, 라살, 로만, 베른슈타인, 그리고 엥겔스 (!) 말고는 다 그 사람이 그 사람... 헷갈려 죽는 줄 알았음.... ㅎㅎ

 

어쨌든 이 책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사회보장과 (아직 스스로 정의조차 하지 못하는) '공공적' 서비스의 확충을 이야기하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백년 전 독일 사민주의자의 문제의식과 딜레마가 오늘날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닥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ㅡ.ㅡ

 

문제의식과 더 공부해봐야 할 것들...

 

* '사회보장'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

보장 혹은 서비스의 내용을 보자면 사실 비스마르크가 생각했던 '독일 제국의 복지'와 좌파가 꿈꾸는 복지에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좌파 - 당시 사민주의 초기 운동은 비스마르크의 안과 이어진 수정안들에도 격렬히 반대했었다. 이는 '의미론' 투쟁이라 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고민의 지점이다.

이를테면, 선거전날이 되면 보수우익 정당이나 비교적 급진적인 진보정당이나 사회복지 관련 정책에 그닥 차이가 없어진다. 보수적 온정주의 - 포퓰리즘 - 경제개발의 토대 (인적 투자) - 사회적 비용의 최소화 - 사회권 보장 등 목적과 철학적 배경에는 폭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하지만, 과연 '그들의 것'과 '우리의 것'이 가진 본질적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 민주적 통제와 참여의 문제!

독일은 왜 북구유럽 같이 조세에 기반한 국가건강보장제도를 취하지 않고, 사회보험 방식의, 그것도 비효율적으로 찢어져있는 '조합주의적' 방식을 택한 것일까? 기존 조합들의 소위 '조합주의적' 활동 지향 때문?

하지만, 보험조합이 정치적으로 엄혹했던 시기에 어떻게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정치학교가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자본과 국가로부터 독립된 노동자 자치의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공공병원 확충에 대한 고민 속에 미국과 캐나다의 일부 모범적인 공공병원 사례들을 돌아보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회민주적 통제와 참여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백년 전 독일 노동자들의 고민에 비추어본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각종 사회보장 제도/프로그램의 확충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고민은 '어떻게, 누가'라는 부분에 상대적으로 소흘한게 아닐까? 한편으로 국가의 계급적 속성을 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만이 이를 보장하고 운영할 수있는 유일하고 효율적인 주체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한국의 건강보험 통합논쟁에서도 형평성과 효율에 대한 담론은 활발했지만, 민주주의와 참여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가물가물 기억이... ㅡ.ㅡ 혹시 나만 모르고 있었남???)  이름은 비슷한 통합/조합 논쟁이지만 당시 독일에서의 논쟁과는 초점 자체가 다른....

 한국사회에서, 각종 국가제도, 혹은 위원회에 공익위원이나 노동계 대표 몇 명 포함시키느냐를 넘어서는,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뭔가 새로운 논의들이 시작되어야 할 듯 싶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결코 순차적이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최장집 교수의 이야기는 여기에 닿아있다. (공공복지 논의와는 또 별도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통제 문제까지!)

 

* 상호부조, 연대의 원리와 책임성

노동자 계급 내부의 연대, 노동자 개인들 사이의 상호부조라는 원칙과 참여민주주의/자치행정의 운영방식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이를 위해 국가와 자본의 기여를 하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곤혹스럽다. 사실, 문제의 발생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특히 건강보험이나 산재보험은, 기업이 부담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하지만 노동계급과 사민주의자들이 우려했던 것은, 그로부터 비롯되는 독립성의 훼손.... 말하자면, 물질적인 실리보다는 '원칙' 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현실에서, 성수동 노동자건강센터의 건립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서라면 어차피 공적 기금을 제도적으로 지원받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만일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러한 지원을 받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고민하는 대상의 규모는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다고 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그러한 조직이 목표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정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성수동 센터는 제도로부터 독립된 자치기구를 지향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게 지난 3년간 고민의 나름 결론.... 과연 적절한 것이여???

 

* 프레임의 인정? 전술과 전략?

독일의 노동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이 복지국가 전망과 의회주의 전술을 채택한 것은 결국 체제 혹은 지배집단이 만들어놓은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현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급진적 변혁 전략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프레임 안에서 최대한을 얻기 위해 싸울 것인가?

 물론 역사적 경험을 보자면야 전자를 위해 죽기살기 싸워야 후자라도 얻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건 사후 평론이고, 막상 해당 시기에 어디까지를 전략적, 전술적 목표로 두고 싸워야 할지 판단하기란 참 쉽지 않다. 무조건 최대치를 이야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알아서 깎아주며 싸우다간 그나마도 못 얻기 십상이고.....  물론 팔짱끼고 서서 관전평만 한다면야 가급적 급진적으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뽀대가 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무언가 구체적인 답을, 더구나 작은 가시적인 성과들이 모여 큰 흐름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판단을 하기가 참참참 어렵다... ㅜ.ㅜ 백년 전 독일 사민주의자들이 갈팡질팡 했던 것도 참 공감이 되더라니... ㅡ.ㅡ

 

* 사족이지만, 그 시기 독일에서 의회주의와 제도화 전술을 두고 벌어졌던 좌파 진영의 논쟁이 80/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재현되었던 것은, 생각해보면 참 뜬금없다. 지금은 제목조차 가물가물한 마르크스의 고타강령 비판을 들먹이며, 합법정당과 개량주의 운동을 비판했던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들을 하고 계실까???

  

* 역시 사족인데, 이 책이 번역서가 아니고 국내 연구자의 저서라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도 고마운 마음... 나도 이런저런 번역 작업을 했고, 또 지금도 하고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지만, 지식 수입과 중개 노릇은 이제 슬슬 접어야겠다는 반성을 부쩍 하고 있다. 학문적 지평의 확대에서 번역 작업의 소중함을 폄훼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연구자로서,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본인의 학문적 성과물을 성찰하고 정리해내지 못하는 미숙함에 대한 자기반성....

 

 

독일 사민주의 이야기하다, 엉뚱한 길로....

저자가 특강 같은 거 한 번 해주심 참 좋을 거 같은디.. 질문할 것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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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정말 기나긴 2박 3일이었다.

대전-보령-춘천-서울-화성-대전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니, 멍 ~~      +.+

 

빨래 돌아갈 동안 맥주 한 잔 하며, 책상위에 쌓여있는 책들이나 치워볼까 했는데 기력이 딸려서 원....

책들을 옮기던 중 책읽는 부흐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꿈꾸는 책들의 도시] 들녘 2005

 

 

 

어쩜 이렇게 깜찍하고 발랄한 소설이 있는지...

책을 둘러싼 레전드급 스펙타클의 진지 버전이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라면,

이 책은 아기자기 버전의 한 극단....

 

부모님 병세 때문에 병원에 드나들고 정신이 피폐해진 그 시기에,

잠시나마 현실을 떠날 수 있도록 해준 고마운 책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또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맛깔나게 그려지지만,

그래도, 책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부흐링들의 귀엽고 기괴한 모습은 단연 최고...

마지막에 이들이 등장하던 장면에서는 하마터면 '감동'할 뻔했다. ㅡ.ㅡ

 

책을 읽으며, 부흐링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도 나만은 아닐 듯...

 

뫼르스의 다른 책들을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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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 (Not to laugh, not to lament, not to curse, but to understand)"

 

부르디외가 편저한 [세계의 비참]  첫머리에 쓰인 스피노자의 말이다.

 

최근에 읽은 몇 편의 글들은 이 문구를 '자동재생' 시킨다. 

 

  • 최규석 단편집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길찾기 2009년 (신판)
  • 최규석 리얼 궁상만화 [습지생태보고서] 거북이북스 2005년
  •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가난한 휴머니즘] 이후 2007

 

       

 

절절하지만 선정적이지 않게,

궁상맞지만 마냥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게, 그리고

"물질은 부족하지만 마음만은 부유한" 따위의 목가적 낭만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 고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그러한 빈곤과 고통이 '대상자'가 아닌 자신의 사적 경험의 일부일 때,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 서늘하게 묘사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최규석은 참 잘 해내는 작가인 것 같다. 

옛날 (?) 생각이 참 많이 났더랬다.......... '가난의 효용' 같은 장은 정말 그랬다.

 

전임 Haiti 대통령이자 신부인 아리스티드의 글은 대상이 분명하다. 선진국, 잘 사는 시민들, 그나마 정신줄이 남아 있는 인간들이 예상 독자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편지글 모음은, 글을 모르고, 혹은 편지지를 살 돈이 없거나, 우표를 살 돈이 없는 이웃들 대신해서 그가 '세계시민'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가 그들 사회에 어떤 파국을 가져왔는지... 살아남기 위해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식의 지원과 연대가 필요한지....

 

그의 논지에 적극 공감하면서도, 그래도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있다. 사람들이 밥을 굶는다면 민주주의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맥락은 이해하지만, 이와 동일한 논리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전용되었는지를 돌아본다면, 조심해서 해석해야 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물론 큰 맥락에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일종의 기우랄까.... 먹고 사니즘에의 경도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가져온 폐해를 생각해본다면, 조심 또 조심할 필요가 있다.....   

 

 
(* 이제 겨우 '비참한 상태'에서 '존엄한 가난'으로 옮겨가는 중일 뿐이라는 그의 설명에서, 아마도 존엄한 가난은 decent poverty 혹은 poverty with dignity 중 하나의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이 때 decent 의 의미는 존엄하다 보다는 acceptable or adequate 정도로 해석하는게 맞을 것 같다. 가난하지만 인간의 품위를 지킨다는 뜻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맥락이라기보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이제 그나마 견딜만한 가난으로 이행했다는 뜻이기에....) 

 

지난 3주간 한겨레 21 에 임인택 기자가 연재한 '노동 OTL' 시리즈는 고전적이면서도 한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현장'침투'의 기록이다 (그림은 최규석이 그린 표지삽화). 

 

최규석의 삽화 폴라 토인비의 [거세된 희망]  (2004) 을 떠올리게 하는 기획이다.

 

   이 땅에서 비정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첫 회에서는 '얼마나 비참한가' 혹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기에 경도된 것 같아 다소 안타까웠으나 (사실, 그럼 안 되나? ) 연결기사들과 이어지는 시리즈는 훨씬 풍부한 결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제도권 학계에서 이제 이런 프로젝트는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 빈 자리를 채워주니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과, 다른 한편의 자괴감이랄까....

 

성수동에서 의사나 전문가들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현장 - 특히 극적 효과가 뛰어난 제화 사업장을 방문하고는 한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J 와 나는 사실 좀 고민이다. 아직도 이렇게 비참한 (?) 작업환경이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것은 좋은데,

어쩌면 우리가 그 상황을 전유 혹은 악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 때문이다.

좀더 비참한, 좀더 불쌍한,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꺼이 자원활동에 나서도록 만드는.....

 

우리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 않는 사랑의 리퀘스트와 과연 다르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가만히 돌아보면,

스스로 가난했기에 누구보다 이러한 문제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분이 노점상 출신이라 없는 사람들을 잘 이해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발상이다.  

여전히, 학문으로서 빈곤과 고통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러면서도 연민과 연대의 정신줄을 놓지 않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야는 다르지만, 앞서 언급한 저자들의 통찰력, 그리고 에너지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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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삼부곡

최근 2-3주간, 

임박한 과제들을 미친 듯이 해치우느라 정신줄을 거의 놓은 폐허상태로 지냈다.

쓰나미처럼 압도해오는 그 일들의 물결이란..... ㅡ.ㅡ

 

웬지 이번 주만 어떻게 버텨내면 (!!!) 담주부터 전혀 다른 새 세상이 열릴 것 같은 이 기이한 망상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버릴 수 없는 희망....

 

이 와중에 오며가며, 잠들기 전... [사조삼부곡]의 마지막인 [의천도룡기] 8권을 다 읽었다. 

글씨가 커진 건지, 편집이 달라진 건지, 아님 번역 자체가 바뀐건지, 예전에 [영웅문]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던 고려원 문고판은 각각 6권이었던 것 같은데, 판형이 커졌음에도 각 8권씩이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를 순차적으로 읽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는 없으나, 역시 '흐름'의 맛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의천도룡기] 마지막 부분에서야 밝혀지는 의천검과 도룡도의 비밀, 도화도 (내 고향도 아닌디 이름만 보고도 웬지 향수가 울컥?), 신조협과 소용녀의 딸, 구음진경, 심지어 구음백골조(!)까지 .... 이런 작은 디테일들이 주는 감흥이 꽤나 쏠쏠했다.

 

#.

세 작품의 남 주인공 곽정 - 신조협 (양과) - 장무기 중 가장 선호하는 이를 뽑으라면 단연 신조협!

장무기의 어린 시절, 임박한 죽음을 잊지 않으며 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모습에 감흥했으나, 커가면서 웬지 자뻑....  순박하고 뚝심 있기로야 곽정을 따라올자 없으며, 어쨌든 장무기도 어린 나이에 겸양과 통찰력을 겸비한 진정한 고수가 된 것은 틀림없으나, 드라마틱한 인생 반전과 함께 정서적 몰입 면에서는 신조협이 단연 최고! (그 다음은 동사 황약사! 이분 매우 쿨하면서 낭만적이심 ㅎㅎ)

 

#.

삼부곡에 또한 수많은 여성 고수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황용 - 소용녀 - 조민/주지약/아리/아소 등...

이 중 최고라면 단연 황용....  진짜 멋진 언니.... 그리고 소용녀도 차갑고 조용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 이에 비해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행태는 진정 어이상실.... 아미파의 장문인 (주지약), 몽골 왕국의 소군주 (조민 - 민민테무르), 페르시아 명교 총단의 교주 (아소) 라는 엄청난 지위의 여인들이 장무기에게 보이는 모습은 정말 안습..... 제정신인가 싶더라니....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눈감아주려해도 오히려 이전 두 작품에서 보였던 여성 무인들에 비해서도 완전 퇴행....

손속이 잔인하기 그지 없는, 하지만 사랑에 눈먼 그녀들로  인해 남자들이 어찌나 위험에 처하는지.... ㅡ.ㅡ

 

#.

절대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결코 무공을 한 가지만 전문적으로 닦아서는 안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 거기다 외공이나 내공 한 가지만 쌓아도 안 되고 두 가지 모두 고르게 익혀야 하며, 기왕이면 명문정파와 사도외문의 스승들을 골고루 모시고 두루두루 배워야 하고, 정상적으로는 절대고수의 내공을 연성할 시간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함 ㅎㅎ 우연히 비급을 얻는 것은 빠지면 아쉬운, 정해진 코스랄까?

이를테면 곽정이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남제 단야왕 일등대사, 북개 홍칠공 같은 초고수는 물론 전진칠자니, 주백통 같은 당대의 고수들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대개 자신의 절기를 한평생 수련했던 대 비해, 이들을 스승삼아 오만가지 무공을 다 배워 복합 응용했기 때문....

이러한 상황은 신조협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에 '신조'의 가르침까지 받았으니 뭐...

장무기도, 무당파의 태극권, 명교의 건곤대나이 심법에, 공동파의 칠상권, 심지어 구양진경까지 익혔으니.....  약관의 나이에 소림사에서 거의 백년을 수련한 도사들보다 실력이 한 수 위인 것은 바로 이런 연원... 따라서,한 우물만 파다가는 절대 업계 최고가 될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주신다고 할 수 있겠다 ㅎㅎ

 

 

#.

아마도 시리즈 비디오물 중에서는 이 셋 중 의천도룡도가 제일 인기 있는 듯 싶다 (본 적은 없지만).  하지만 개인적 취향으로 평가해보자면 1부 > 2부 > 3부의 순서....

그래도, 3부에서 금모사왕 사손이 금강경을 읊조리며 번뇌의 강을 건너는 모습은 나름 감동이었다.

끝이 없는 업보의 인과를 벗어나는 길은 심지어 소설 속에서도 쉽지 않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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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 중단편 모음집에 실린 8편은 각기 열 배 분량의 해석과 논쟁이 가능한 텍스트!!! 

 

 

짧은 독후감 혹은 코멘트를 남긴다는 것이 웬지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은, 기이한 죄책감을 남기는 이 중단편들에 대해 일단(!) 몇 가지 메모를 우선 남겨둔다.

 

1. 바빌론의 탑

바빌론의 우주관에 충실하면서도, 충분히 '있을 법한' (plausible)'  생활의 이야기.

움베르토 에코 [전날의 섬]과 완전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세계관이라는 프레임을 가져와 그에 충실하게 전개했다는 점에서는 일견 유사.

 

2. 이해

높디높은 정신세계. 예측을 몇 단계 뛰어넘는 능력을 지니게 된 자들 사이에 벌어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추격담이기도 하고, 인간정신의 고도화에 따른 인식과 인지의 변화에 대한 연상극이기도 함

 

3. 영으로 나누면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달라.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신학자가 된 느낌이었어..."

세상의 근간을 이루리라고 믿었던 근본 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더구나 자신이 추구해왔던 그것의 바탕이 틀렸음을 스스로 확인해버린 수학자의 이야기. 존재를 뒤흔드는 대사건이지만, 옆사람은 똑같은 방식으로 감정이입할 수 없음.  인식의 문제로 시작했지만 어쩌면 관계의 문제로 끝난달까???

 

4. 네 인생의 이야기

미지의 세계와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법, 세계를 인식하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섬세한 소묘!!!

인과론적 세계관과 목적론적 세계관이라....

미래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의 구조는, 어쩌면 공간적 절단면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바빌론의 탑'과 달리 시간적 뫼비우스 띠의 모습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토록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은 오랜만이여!!!

 

5. 일흔 두 글자

너의 이름을 불러주면 꽃이 된다는게 반드시 시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이야기.

짧은 글 안에 무궁무진한 논란거리가 자리해있다.

전성설이라는 당대의 과학관, 우생학과 사회공학,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적 분리 (어쩌면 이 글에서의 '이름'은 오늘날의 '소프트웨어'쯤?)... 어느 하나 시덥잖게 취급할 수 없는 묵직한 주제들

 

6. 인류과학의 진화

이건 좀 슬프다....메타인류가 거둔 과학적 성취를 그저 번역해서 전달할 뿐인 인류 학술잡지의 모습이, 오늘날의 한국 학계 상황에 겹쳐보이는 것은 나의 오바?

 

7. 지옥은 신의 부재

마지막 문장이 정말 인상적이다. "진정한 신앙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주인공 닐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ㅎㅎㅎ

 

8.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다큐멘터리

와우.... 이토록 깜찍하고 심오한 소설이라니!!!

여러 명의 작중 화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칼리스의 의무 착용을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종류는 백만가지는 될 법하다!!!  차별, 인식, 온정주의, 자율성, 아름다움의 정의 등등등...

 

이 작품들이 그동안 받은 상의 종류를 늘어놓으면 두 줄이 넘는데,

뭐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

완전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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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hongsili님의 [안 어울리는 조합의 책들..] 에 관련된 글.

 

그의 책을 꾸준히 내던 이레 출판사에서 신작이 출간되었다.

 

 

친절하게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손글씨 서문으로 설명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은 이런 것이다.

"... 배나 항구가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유조선이나 제지공장, 나아가서 어떤 분야든 노동하는 세계에 깊은 존경심을 표현하면 이상하게 여기는 근거없는 편견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고 슬픔의 근원이 되기도 하면서 일상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에 대한 세상의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 경시에 대해 그건 아니잖아요 라고 말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찾아보려고 했달까....

 

언제나 그렇듯이 미묘한 순간, 놓치기 쉬운 의미들을 시의적절하게 포착해내고

이리저리 생각의 타래들을 엮어가는 그의 글솜씨는 실망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만큼, 아쉬움도 적지 않다.

이 아쉬움의 근원은 어쩌면 이 글 자체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의 근원이 되는 노동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고,

'노동과 일'이라면 비정규직, 고용불안이라는 단어가 자동연상되는 이 상황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철학적 성찰과 문장의 아름다움은 훨씬 덜하지만현장의 생생함과 애환 (그야말로 슬픔과 기쁨)이 절절이 묻어나는 매일노동뉴스의 [현장을 간다]가 '더 좋은' 책처럼 생각된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사람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일과 노동, 그로부터 일어난 기쁨과 슬픔을 다룬다기보다

한단계 추상화된 인간 노동의 결과물, 혹은 노동의 구조나 과정에 대한 성찰이라고 봐야할 듯...

이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풍부하고 좀더 깊은 이면을 고민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상황의 구체성과이 결핍되었다는 것은 단점.....  

 

이미 미학적 성취마저 이뤄버린 송전탑, 궤도를 정확하게 찾아들어가는 인공위성, 복잡하기 그지 없는 항공산업과 회계일...  여기에는 기술 자체 (과학), 인간의 이성적 성취에 대한 '존경'(???)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과학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옷을 거의 걸치지 않은 와이와이 인디언이 하늘에 나타나는 현상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유사 신화적인 방식으로 기계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또 과학기술을 찬미하는 것만도 아니다. ".. 회로판에는 존중심을 느끼고 빙하에는 동정심과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으니 말이다.

 

러스킨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모든 낭비 가운데 당신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낭비는 노동의 낭비다..."  알랭 드 보통은 막 견학을 마친 과자공장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진지했던)에서 선물로 받은 과자봉지를 뜯으며 생각한다..."이 사회는 우리의 진지하고 의미심장한 요구와 관계가 없는 산업, 수단의 진지함과 목적의 하찮음 사이의 괴리를 피하기 어려운 산업, 그 결과 컴퓨터 터미널 앞과 창고 안에서 우리를 의미 상실의 위기로 몰아넣기 십상인 산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나는 우리 노동의 진부함을 생각하며 희미한 절망감을 느끼다가도, 거기에서 나오는 물질적 풍요를 존중하지않을 수 없었다. 겉으로는 유치한 게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우리의 생존자체를 위한 투쟁과 절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전작 [불안]에서처럼, 보통은 직업상담소에서 강조하는 자기효능감과 능력주의에 대해 상당히 괴로워한다.  "... 나는 시먼스의 회사를 나오면서, 모두가 일과 사랑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부르주아적 자신감 안에 은밀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배려 없는 잔혹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두가지에서 절대 충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족감을 얻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뜻일 뿐이다. 예외가 규칙으로 잘못 표현될 때, 우리의 개인적 불행은 삶에 불가피한 측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저주처럼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운명에서 갈망과 오류를 위해 마련된 자연스러운 자리를 부정하여, 우리가 경솔하게 결혼을 하고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집단적인 위로를 받을 가능성을 부인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해도 나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 혼자만 박해와 수모를 당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일 때문에 피로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구체적/현실적 처방도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피곤하고 신경이 곤두설 때 유일하게 효과가 있는 해결책은 와인이다. 사무실 문명은 커피와 알콜 덕분에 가능한 가파른 이륙과 착륙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예리하다 예리해.... 우리는 매일 가파른 이륙과 착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어쩐지...ㅋㅋ

 

알랭 드 보통이 생각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다....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그 본성상 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데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줄 것이다.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있는 완벽한 거품은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 줄 것이다."

 

 

과연 나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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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도 너무 다른 (!) SF 두 권

읽은지는 꽤 지났는데,

어제 오늘 미친듯이 강의자료, 회의자료, 원고 하나 해치우고, 하얗게 타버린 뇌의 혈색 좀 되찾아볼까 하여 때지난 독후감..

 

하나는 더글라스 아담스의 [The long dark tea-time of the soul]  다른 하나는 올라프 스태플든의 [스타메이커]...  진지함과 재미의 강도에서 양 극단에 위치한 작품들이랄까........... ㅡ.ㅡ

 

#1. Douglas Adams [ The long dark tea-time of the soul]

 

 

한국어로 번역하면 [영혼의 길고 어두운 티타임] 이라고나 할까 ㅎㅎㅎ

제목만 달랑 한 줄 옮기고 나서 'ㅎㅎㅎ'라니 무슨 주책인가? 그냥 더글라스 아담스의 말투만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쩌라구....

 

Holistic Detenctive Agency (전인적 사설탐정 사무소) 를 운영하는 Dirk Gently 의 모험담 제 2탄 되시겠다. 전작 [Dirk Gently's Holistic Detective Agency] 는 최근 한국에서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 사무소]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아무래도 용어 holistic 은 성스럽다보다 전인적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 우주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총체성에 기반한 과학 수사 (?)를 모토로 내걸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줄거리를 요약할 필요는 없겠으나, 신들의 제왕 오딘 (북유럽 신화에서 제우스에 해당하는 왕초)과 좀 덜 떨어진 그 아들 '번개의 신' 사이에 벌어진 전대미문의 부자 갈등, 그리고 이 초현실적 부자갈등의 배경이 되고 있는 현대 사회 불멸의 신들의 무용성 (ㅜ.ㅜ),  이 사건에 어쩌다보니 휩쓸리게 된 한 미국 아가씨와 젠틀리 탐정의 '죽도록 고생'이 메인 플롯을 이루고 있다.  (그러고 보니 닐 게이먼의 American Gods 와 살짝 비슷하기도 하네?)

 

아담스의 전작들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해괴한 언어구사와 얼토당토않은 상상력, 기기묘묘한 상황해석 능력에 유쾌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제일 골 때리는 장면 중 하나는 열쇄구멍을 사이에 두고 독수리와 젠틀리가 눈 마주치던 장면... ㅎㅎㅎㅎㅎㅎ 이건 정말 읽어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흠.... 이제 보니 아담스가 냈던 소설을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그의 작품 중 최고로 꼽고 싶은 것은 히치하이커 2부와 3부, [The restaurant  at the end of the universe][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들이다.

근데 많이 안타깝다... 좀더 오래 사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2. 올라프 스태픈든 [스타메이커 Star maker]  오멜라스 2009

 

 

국내외에서 평은 엄청나게 (!) 좋으나, 읽으면서 엄청 괴로웠다.

스케일은 우주의 시작과 끝을 다룰만큼 시공간적으로 장대하고, 존재의 의미와 종교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깊이 또한 대단한 것이었으나....

문제는 너무너무 재미가 없다는 거다 ㅜ.ㅜ

플롯도 없고 구체적인 사건도 없이 우주를 '개괄'하는 사변만 창궐하다보니 책 전체가 '서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장이면 본격적 이야기가 전개되려나, 이번 장만 지나면 뭐가 시작되려나... 그렇게 기다리며 마지막 장까지 덮고나니 안습...... .ㅡ.ㅡ

 

도대체 '세계과학소설 사상 10대명작'이라는 타이틀은 누가 갖다 붙인겨???

책 말미에 SF 칼럼니스트가 친절한 해제를 통해 과학소설 (혹은 사변소설) 계에서 이 작품이 가진 의미에 대해 상찬하였으나, 글쎄다....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

공부하려고 소설 읽는 것은 아니잖아....

그게 꼭 잔재미일 필요는 없지만 감성적 울림과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작품을 '의의' 생각하며 애써 받아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문학적 식견이 짧아서일수도 있지만, 벌거벗은 임금님 옷맵시 찬양하듯 부화뇌동하고 싶지는 않음...

세상에 진지하고 차분하기로 말하면야 램의 [솔라리스]만한 것이 있을까마는 그 때에 느꼈던 묵직한 '이성적' 감동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듯!!! 

 

이 책이 우주의 처음과 끝,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지만,

앞서 언급한 더글라스 아담스의 책들은 그 모든 것을 더구나 '재미있게' 담아내고 있다.

 

뭐 취향의 문제이기는 한데, 두 책을 함께 놓고 보니 더글라스 아담스가 더욱 그리워(?)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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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현실을 다룬 영화들

매트릭스가 워낙 인기를 얻고 난 지라, 가상 현실과 현실을 넘나드는 것 쯤이야 SF 영화에서 이제 진부한 것이 되어버린 듯 하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트론]을 다시 보면서, 이것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상큼한 발상이자 특수효과였나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봐도 어찌나 포스트 모던한지....

 

 

Steven Lisberger  감독 (1982년)

 

80년대에 한창 유행하던 전자오락기에 대한 로망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ㅎㅎ

오빠와 나의 보물 1호였던 스타워즈 게임기 생각도 났다... 정말 미친 듯히 하고 놀았는디...

'유저'에 대한 충성심으로 몸부림치는 프로그램들의 행태를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우나,

보안을 이유로 자유를 제한하고, 권위적 감시체계를 유지하는 master control program 과 시스템 소유자에 대해 저항하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기왕에 생각난 거, 가상현실 - 특히 게임과 현실을 넘나드는 영화들 중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몇 편을 정리해본다. David Cronenberg 감독의 1983년 작 Videodrome 도 그 기괴함과 창조성에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일단 '게임'과 직접 관련성은 낮으니까 제외....  Paul Verhoeven 감독의 1990년 작 Total Recall 도 역시 '게임'은 아니라는 점에서 제외... 이 영화도 참 명작인데.... 물론 필립 K 딕이라는 원작자의 힘이 큰 역할을 했지만서도....  역시 필립 K.딕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A Scanner Darkly (Richard Linklater 감독, 2006년 작)도 이런 류로 분류되지만 명백하게 '게임'이라고 말하기 어려움...

참, 1983년 작  War Games 도 관련은 있는데, 게임인 줄 알고 들어간 소프트웨어가 실제 전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가상현실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

 

       

 

이렇게 저렇게 빼고 나서 남는 영화들이란.... 그리고 영화 제목은 다 게임 제목....

 

#1.  Gabriel Salvatore 감독 (1997년) [Nirvana]

 

 

 

 

[지중해]와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처럼 아름다운 (?) 영화를 만든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이 만들었다는게 좀 쌩뚱맞게 느껴지는 영화.... 평은 그닥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반복되는 게임 속에서 매일 똑같이 죽고 다시 살아나는게 지겹다며 자기를 영원히 소멸시켜달라고 개발자에게 호소하는 게임속 주인공 (살바토레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후덕한 디에고 아자씨!)의 절절한 모습만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특수효과 자체가 특별하지는 않았었다.

 

#2. David Cronenberg 감독 (1999년) [eXistenZ]

 

 

 

 

가상현실이라기보다, 신체에 직접 게임포트를 연결한 이들이 겪게 되는 기괴한 상황을 그린 영화. 기계와 생체의 하이브리드.... 데이빗 크로넨버그 특유의 스멀스멀... 불쾌한 느낌과 극단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들.... 하지만 몰입도은 최고...  

이 감독의 영화들이 하도 기괴한지라, 그나마 초현실적 상황을 다뤘다는 점에서 오히려 가장 받아들이기 쉬웠던 작품이라고나 할까.... ㅡ.ㅡ  83년의 비디오드롬에서 받았던 충격에 비하면 이 영화는 순한 양!

 

#3. 오사이 마모루 감독 (2000년) [Avalon]

 

 

 

 

이 영화도 그닥 평판이 좋지는 않았으나 (심지어 흥행에서도 실패), 화면의 전체적인 톤과 음악(!!!) 때문에 내가 엄청나게 좋아하는 영화....  설령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미지의 클래스에 도달하고자 하는 플레이어들의 열망이 절절하게 전달된다. 

아바론 (원래 아더왕의 검이 벼려지고, 또 그가 상처를 회복한다는 그 곳)에서 울려퍼지는 음악...

오사이 마모루는 여성 전사에 대한 어떤 로망이 있나보다...  근데 또 생각해보면 여성 전사는 중국무협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체...  반지의 제왕 같은 서구적 신화 서사에서 여성 전사가 극도로 드물었던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  이건 어찌 해석해야 하는거지???

 

뭐 어쨌든 영화의 특수효과는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플롯과 아이디어라는 것을 20년도 더 된 영화 트론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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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가 아니라 무강권주의!

사놓은지는 꽤 된거 같은데 이제서야 읽는다.

어쨌든 책은 사놓으면 읽는다 ㅎㅎ

 

하승우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그린비 2006

 

 

#1.

'아나키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한 고전'이라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해설서 혹은 입문서라 할 수 있다.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 과 비슷한 류(?)라고 볼 수도 있을텐데, 강유원의 책이 공산당선언 본문의 해석에 주로 중점을 두고 있다면, 이 책은 아나키즘의 진화, 그리고 [상호부조론]의 맥락을 설명하는데 좀더 집중하고 있으며 '그 이후'의 영향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상호부조론]에 대한 주해서라기보다, 아나키즘 사상의 핵과 역사 일반을 설명하는 아나키즘 입문서라고 보는게 더 적당할 듯 싶다.

 

#2. 어원

아나키즘의 어원이 된 그리스어 anarchos 는 '지도자가 없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들'을 뜻한다고 한다. 이건 무질서라기보다, 누구도 선장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생명력 넘치는 혼돈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나키즘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테러리즘, 혹은 아시아권에서 통용되는 한자어 '무정부주의'는 상당한 악의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과 중극에서는 '무정부주의'가 갖는 부정적 성격 (더구나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저항속에서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열망이 높았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해본다면!)을 바꾸기 위해 '무강권주의'라고 쓰려 했지만,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고.... ㅡ.ㅡ 무강권주의.... 좋은데.....

 

#3. 좌파 내의 갈등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 (혹은 마-레 주의)의 충돌은 투쟁방법을 둘러싼 '기술적' 차이라기보다, 어떤 혁명을 원하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라 할 수 있었다. PT 독재와 코뮨주의는 화해하기 어려웠고, 이를테면 파리코뮌의 실패(?)를 둘러싼 해석도 달랐다. 갈등은 사상투쟁에서 끝나지 않았고, 한쪽 (아나키)에 엄청난 실질적 손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스페인내전에서 한편으로는 프랑코 독재와 다른 한편으로는 모스크바의 패권주의적 스탈린주의자들과 싸워야했던 아나키들의 모습은 조지오웰의 [까딸로니아 찬가]에 잘 그려져 있다.

다가올 사회가 민주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그런 사회로 가능 방법도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이 혁명 이후에 세워질 사회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크로포트킨의 지적에는 완전 동의...

사실, PT 독재 혹은 코뮨주의의 선택을 결정짓는 것은, 민중의 역량에 대한 신뢰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결정이 쉽지는 않다. PT 독재를 주창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민중 스스로의 통치라는 원칙 자체를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4. 상호부조의 본성과 아나키 윤리.....

사물은 대개 여러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한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깨어나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적자생존'의 설명이론으로 현존의 계급갈등을 합리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는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에도 해당한다. 

그동안 나는 생각해왔었다. 적자생존이 자연의 논리이고, 인간해방이라는 것은 이 자연의 논리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적자생존이라는 짐승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 인간해방이라 생각했기에 목가적 생태주의 (자연으로 돌아가자!!!)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크로포트킨의 논리에 의하면 적자생존만이 자연계 질서는 아니다. 개체 상으로는 그럴지 모르지만 집단수준에서 상호부조하는 경우 생존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며, 인간사회에서도 그러하다.

서로 돕고 연대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본성 중 하나.....

 

#5.국가의 역할

크로포트킨은 지적한다. 근대 국가가 발달해가면서 시민들이 서로에게 해야 할 의무를 국가가 대신하게 되었다고....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적이다. 점차로 상호부조보다는 일방적 '시혜'를 강조하고,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비동등성을 가정하는..... (이러한 비판은 불교적 세계관과 상당히 유사함!!!)  우리가 현실속에서 복지 '국가', 민주적 '정부'의 역할을 강조할 때 반드시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민중적 참여와 상호연대없는 정부(?)의 일방적 서비스 제공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 않나...

 

#6. 아나키...

기독교에도 분파가 여러개 있고, 마르크스주의에도 그러하듯, 아나키즘에도 여러 분파가 존재하며, 크로포트킨의 아나코-코뮨주의는 그 중 하나....

하워드 진 할배가 60-70년대를 거치면서 자신이 아나키즘에 경도되었다 했고, 그래서 엠마 골드만의 생을 다룬 [Emma]라는 희곡을 집필하기도 했다.  [Marx in Soho]에서 바쿠닌을 그렇게 친근하게 그려낸 것도 '사심'이 있기 때문일터 ㅎㅎ 나도 미국에 있는 동안 아나키즘에 관심이 생겨 Alexander Berkman 의 책이랑 Emma Goldman 의 자서전 등을 사두기는 했는데 아직  손을 대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다시금 관심 폭주.....

우선 크로포트킨의 책을 읽어봐야 할까???

 

요즘, 부쩍...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 후딱 읽기 - 하영식 [남미인권기행] 레디앙 2009

 

 

한겨레 21에 연재했던 기사를 거의 하나도 안 고치고 묶어서 낸 것 같다.

실망.... ㅡ.ㅡ

그리고 연재되었을 당시도 생각했던 건데, 성찰의 깊이나 글쓰기가 2% 부족한 듯....

딱히 뭐라 지적하기는 어려운데, 남미 관련 글을 많이 쓰는 이들 중 박정훈 씨의 글에 비해서는 내공이 부족한 듯 싶고, 김영길 씨에 비해서는 생동감이 좀 떨어진다. 분쟁 전문 기자인 정문태씨의 글에 비해서도 결정적 한 방이 부족해보임... ㅜ.ㅜ (근데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는 힘드네.. 이거 인신공격인가???)

 

동어 반복이나 어색한 문장들도 눈에 띄는데, 이건 전적으로 편집/출판사 잘못이라 생각한다. (레디앙의 전작 [88만원 세대]에서도 비문이 와장창....)

절절한 현실과 글쓴이의 수고로움에 비해 특징들이 잘 드러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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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당신은 좀 낫잖아 - 영화 [레인]

어제, 실로 오랫만에 씨네큐브에서 혼자 영화를 봤다.

 

아네스 자우이 감독의 레인 (Let it rain)...

 

 

전작 [타인의 취향] 이나 [룩앳미]에서 보여주었던 감독 특유의 썰렁하면서도 세심하고 통찰력 있는 유머는 사그라들지 않아 있었다.

프랑스의 우디알렌이니 어쩌니 하는 칭찬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영화가 '나의 취향''인 것만은 분명하다.

 

#1.

 

가족, 일, 연애.. 모든 것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이야기한다.

그래도 너는 나보다 사정이 좀 낫잖아.... (그러니까 나를 이해하고 배려해줘!)

직업정치인을 꿈꾸는 인텔리페미니스트, 재능은 있지만 그 재능을 펼칠 기회가 좀처럼 제한된 알제리 출신 이주 청년, 능력이 있는 것도 같으나 하는 일마다 엉망이 되어버리는 이혼남 다큐 감독, 무능한 남편과 드센 언니 사이에서 항상 주눅들어 있는 전업주부 여동생....   이들은 각자 조금씩 사회적으로 결핍되어 있고, 스스로를 피해자, 희생자로 여기고 있다. 성별에서, 인종에서, 사회적 지위에서... 그리고 그건 모두 사실이기도 하다. 권력 관계는 복잡하다.

 

그러나 정작 이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고 가는 것은, 이 집의 가정부 할머니.... (ㅡ.ㅡ)

이주 노동자 인데다, 헛간에서 생활하고, 주인집의 생활고 때문에 월급이 몇 달째 밀려 있으며, 폭력 남편은 아직도 협박을 멈추지 않고 있다. 불행의 스토리라면야 팔만대장경을 쓰고도 남을 분이다........ 

 

세상에 자신의 고통이 가장 커 보이는게 인지상정이라지만,

연민과 염치를 겸비하면, 좀더 성숙한 인간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2.

 

정치 진출을 꿈꾸는 페미니스트는,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환멸과 성토 (마치 지금의 사회문제가 그녀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에 둘러싸여 갈등한다. 열심히 일하고 결국 돌아오는 것은 이런 것이라면 과연 정치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대사가 정확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럴 바에야 그냥 까페에서 정치 이야기나 하며 살아가는 도시특권층으로 남아버릴까?'라고 내뱉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

작금의 정치란 고귀한 이상을 꿈꾸는 존재들이 발을 담그기에 너무나 더러운 진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더러운 것이 우리 삶의 너무나 큰 부분을 좌우하기 때문에 술자리 안주거리로만 놔둘수는 없는게 현실이기도 하다. 

 

#3.

 

영화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모두들,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비는 갈등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을 치유하고 화해시키는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지금 내리는 비도,

너덜너덜해지도록 지친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치유하는 그런 비가 되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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